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갈원경 편지

2021.05.01 00:0005.01

편지

갈원경

 

한일현 선생님께.

그동안 안녕하셨는지요? 자주 연락드리겠다고 말씀드리고서는 생활을 핑계로 연락이 늦어져 버렸습니다. 이국땅을 밟고 새 생활에 적응하다 보니 한국에 대한 생각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고 하면 변명이 될까요. 고국을 떠날 때는 이른 봄이었는데 벌써 한여름이 되었으니 그만큼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는 것이겠지요.

지금은 권해주신 대학의 랭귀지 스쿨에 등록해서 다니고 있습니다. 가을학기에는 입학할 수 있을지. 오랫동안 영어와는 담을 쌓아와서 조금 걱정이지만, 담당 선생님은 계속해서 격려해 주십니다. 저는 이 클래스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데, 그런 걸 의식하지 않게 해주시죠. 집 근처의 지리도 이제는 거의 알고요. 한 달 동안 그렇게 여기에 적응해가고 있답니다.

한 달. 네 벌써 한 달이 지났네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장례식장에서 선생님께서 몇 번이나 제 어깨를 토닥여 주시던 것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데 벌써 한 달이나 지났다니요. 어머니의 시신을 불길 속으로 보낼 때도 선생님께서는 제 옆에 있어 주셨지요. 선생님께서 저와 제 동생에게 해 주셨던 일들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버지 없이 자란 저희에게 선생님께서는 정말로 친아버지 같은 분이셨지요.

장례식 때 선생님께서는 몇 번이나 제 손을 잡으시곤, 언제든 힘들 때는 이야기해도 된다고 말씀해 주셨지요. 제가 이렇게 편지를 쓰는 건 그래서입니다. 만약 선생님이 조금이라도 마음이 불편해지시면 어쩌나 죄송한 마음이 되면서도, 제 마음속에 있는 이 이야기를 무덤까지 갖고 갈 엄두가 나질 않아요. 평생 마음에 안고 계셨다가 마지막 순간에 제게 모든 이야기를 해주신 어머니처럼, 결국은 모두 털어놓게 될 것 같으니까요.

제가 어렸을 때-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저와 제 동생을 굉장히 신기하게 쳐다보곤 했었어요. 어머니 손을 잡고 셋이서 시장이라도 가면, 똑같은 옷을 입은 저희 둘을 보고 사람들은 다들 한마디씩 했으니까요. 어머니를 아는 사람들은, 꼭 여자 혼자서 딸 둘을 키우다니 안쓰럽다고 말을 건네곤 했던 게 기억납니다. 어머니는 부모님, 그러니까 제 외조부모님과 의절하다시피 하면서 저희를 낳으셨죠. 그때 어머니와 선생님이 무척 가까운 사이셨다는 걸 나중에 알았습니다. 조모님이 선생님께 못할 소리를 많이 하셨다는 것도. 어렸을 때는 정말로 선생님이 저희의 친아버지셨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는데, 아셨나요? 아, 아셨겠네요 참. 동생이 몇 번이나 선생님께 칭얼댔었으니까요.

선생님을 처음 뵌 게 초등학교 입학하던 해의 봄이군요. 교복을 나란히 맞춰 입고 돌아왔을 때, 선생님은 저희 집 담벼락에 기대어 서 계시다가 어머니를 보고는 반갑게 손을 드셨죠. 어머니가 당황하던 걸 그때 처음 봤어요. 어렸을 때인데도 그 장면이 마치 영화처럼 떠오르는 보면, 아마도 어린 마음에도 알았던 게지요. 이 사람은 어머니와 관계가 있다는 걸 말이에요.

“인사드려, 이분은 한일현 선생님이라고- 엄마랑 같은 곳에서 일하는 아저씨야.”

“만나서 반갑구나. 음, 누가 누가 수린이고 누가 다인이지? 정말 닮았구나.”

“다인이는 저예요. 안녕하세요, 아저씨.”

동생이 먼저 인사를 했죠. 선생님은 말을 참 예쁘게 하는구나- 하고 동생을 쓰다듬으셨고요. 왜였을까요. 그런 선생님을 어머니는 왜 그렇게 불안한 눈빛으로 보셨던 걸까요.

다인이는 유난히 선생님을 따랐었죠. 다인이는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요. 쌍둥이 중에 동생이라고 불리는 걸 싫어했고, 절 언니라 부르는 걸 싫어했고. 어머니는 그걸 별로 야단치지 않으셨어요. 아니 오히려 제가 언니 노릇을 하려는 걸 주의 주신 기억이 더 많죠. 일부러 옷 한 벌을 살 때도 같이 손을 잡고 나가서 각자 고르게 하셨으니까요. 그렇게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이 되어갔죠.

어릴 때 다인이와 전 참 닮았었어요. 외모뿐만 아니라 취향도. 그렇지만 어째서였을까요? 어머니는 다인이만 데리고 피아노학원엘 가셨고, 첼로를 배우게 해 주셨고, 붓을 잡게 하셨어요. 똑같이 책을 읽는 걸 좋아하고 똑같이 음악 듣는 걸 좋아하던 다인이와 저는 그렇게 점점 달라졌던 거예요. 저는 계속해서 책을 읽었고, 선생님을 만날 무렵에 저는 그림일기를 그만 쓰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두꺼운 일기장을 어머니께 선물로 받았죠. 다인이는 물론 계속 그림을 그렸어요. 이런저런 대회도 많이 나갔고, 상도 적잖게 받아왔고.

제가 어머니에게 사랑을 못 받았다는 건 아니고요. 어머니는 저한테는 다른 사랑을 주셨으니까요. 3학년 때 부터 어머니 서재를 들어가도 좋다고 허락을 받았고, 학교 숙제를 마치고 나면 거기서 틀어박혀 있어도 야단치지 않으셨어요. 어렸을 땐 어머니는 정말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죠. 그만큼 제 기분을 잘 아셨으니까요. 동생과 저한테 어머니는…, 네, 정말로 세상의 모든 것을 아는 분이었어요.

중학교에 들어가서였죠. 교내 백일장에서 작은 상을 받아온 저한테 어머니는 서재를 다 뒤져서는 커다란 바인더 하나를 건네주셨죠. 그건 오래전의 문서였어요. 종이도 많이 낡았고. 바인더 앞쪽에 시디가 한 장 들어있더군요. CD. 제가 태어날 때쯤에 이미 컴퓨터의 저장매체로는 별로 쓰이지 않게 되었다는 그것. 어머니는 그게 당신이 옛날부터 쓰던 글들을 모두 컴퓨터 파일로 옮겨서, 그걸 다시 하드카피한 거라고 설명해 주셨어요. 첫 장에 있는 건 9살 때의 동화더군요. 서투르고 엉성한 동화였지만 즐겁고 귀여웠어요. 그게 어머니가 쓰신 첫 번째 동화라더군요.

“수린이 것도 이제 파일로 만들어보자.”

어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정말로 환하게 웃으셨어요. 그리고 말씀대로 컴퓨터에 제 글들을 저장하기 시작하셨죠. 그 파일들은 곧 제가 이어받았고요.

다인이는 그맘때쯤,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된 대신에, 첼로에 더 몰두하게 되었죠. 저는 음악은 잘 모르지만, 다인이가 연주하는 첼로 소리를 참 좋아했어요. 가끔 눈을 감고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다음에 켤 음을 미리 알 수 있다고 느껴질 때도 있었죠. 쌍둥이들은 교감이 있다고 그러잖아요? 정말로 그랬어요. 다인이가 첼로를 들고 잠시 눈을 감고, 무슨 곡을 켤지 생각하는 그 순간에 저는 다인이가 연주할 곡을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요.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 봄, 다인이와 저는 같은 날 어머니와 상의를 했어요. 그날은 선생님도 와 계셨죠? 제가 머리를 단발로 자른 걸 보곤 서운해하셨잖아요. 긴머리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하셨던 것도 기억나요. 그거야 맞는 말이었죠. 다인이는 긴 머리를 풀고 있었는데, 제가 보기에 다인이는 참 예뻤으니까. 아아, 우리는 그땐 똑같이 생기진 않았었죠? 다인이가 조금 더 키가 컸어요. 어깨는 둘 다 좁았지만, 다인이가 머리색이 조금 옅었고-, 제가 안경을 꼈고. 나란히 나가더라도 쌍둥이 소리를 듣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다인이는 예고에 진학하고, 저는 과학고에 진학했지만 곧 저는 인문계로 도로 전학을 왔구요. 그 때 제가 선생님께 전화드렸던 것 기억하시죠? 선생님은 연구소에서 금방 뛰어나오셔서, 저를 만나 주셨죠. 몰래 학교 기숙사에서 빠져나온 저를요. 그때 저는 정말 어렸죠. 학급 친구들이 다들 대단해 보인다거나, 그 애들의 개성에 비해서 저는 너무나 초라해 보였다거나. 그런 어린 투정들을 선생님은 어떻게 그렇게 다 받아 주셨는지. 어머니께 상의하면 좋은 답이 있을 거라고 웃으시던 선생님은 분명히 어머니를 아주 사랑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죠.

“너는 네 어머니 어릴 때와 정말 닮았어. 언제나 당당하셨지. 너도 잘해 나갈 거라고 믿는다.”

신기하게도 저는 그날 곧바로 집으로 가서, 놀란 어머니께 말씀드렸죠. 전학 가고 싶다고. 어머니는 한참 제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몇 번 물으셨어요. 정말로 후회하지 않을 거냐고. 과학고에 진학하겠다고 했을 때도 어머니는 그렇게 물으셨어요. 저는 그때와 똑같이, 그럴 거라고 대답하고, 어머니는 조금은 쓸쓸하게 웃으셨습니다.

인문계 고등학교로 전학을 가니 아이들은 예상대로 저를 좀 따돌렸어요. 중학교 동창들이 주동이 된 일이었죠. 저는 어머니께 아무런 말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고집스럽게 옮겨온 학교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말씀드릴 수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잘 적응한 다음에 이런 일도 있었다고 이야기할 참이었죠. 사실은 성공하지 못했지만요. 그래도 상관없었을지 몰라요. 고등학교 3년 동안 아주 친한 친구 한두 명은 있었고, 그 따돌림도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나중에는 서로 고민을 나눌 급우도 있었고, 스스로 행복하지 않다고 여기진 않았으니까요.

…그렇지만 그 시절을 생각하면 가장 많이 후회되는 것이 하나 있지요. 우리 다인이. 내 반쪽. 저는 제 삶밖에 보지 못했어요. 가끔씩 가슴이 저릿하게 이유 없이 아파져 오더라도, 저는 그게 다인이의 고통인지 몰랐어요. 첼로를 연주하는 다인이의 얼굴이 전보다 훨씬 수척해져 있는지도 못 알아봤어요. 그 애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건 저였는데. 선생님은 그러시겠죠. 다인이가 고통스러워했던 건 스무 살 이후가 아니냐고. 아니에요. 저는 알아요. 그 애가 일 이년의 고통으로 그렇게 된 게 아니라는 걸, 저는 알고 있었어요.

우리는 나란히 같은 대학에 입학했죠. 그리고 선생님은 축하의 뜻으로 멋진 저녁을 대접하겠다고 하셨고요. 그 자리에서 선생님이 어머니에게 청혼하셨죠.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어요. 선생님이 어머니가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어머니를 좋아해 왔었다는 것. 우리에게도 선생님은 참 좋은 분이어서, 저는 어머니가 그 청혼을 받아들이셨으면 좋겠다고, 내심 그렇게 바랬었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우리 앞에서 그걸 한마디로 거절해 버리셨죠. 그날 밤, 우리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다인이는 어머니와 크게 싸웠습니다. 다인이는 저보다 선생님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더군요. 선생님이 어머니와 초등학교 선후배지간이라는 것, 고등학교 때부터 어머니를 좋아해 왔고 청혼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것까지. 아마 선생님께서 다인이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셨겠지요. 선생님은 다정한 분이시고, 다인이는 궁금한 게 많은 아이였으니까요.

“엄마는 그럼 평생 혼자 살겠다는 거야? 우리 아빠라는 사람이 그렇게 대단해? 우리한테 얼굴 한 번 안 내비친 사람이 뭐가 그렇게 대단한데? 엄마 평생 그렇게 혼자 외롭게 살래?”

“내가 언제 외롭다고 그랬니? 나는 너희 둘이면 돼, 너희 둘만 보고 살면 된단 말이다.”

“나는 엄마가 아냐! 엄마 인생을 나한테서 찾지 마! 제발 엄마 길 찾으라고!”

어머니와 다인이는 서로 아픈 부분을 건드리려 애쓰는 사람들 같았어요. 어머니는 그날 밤 많이 우셨고, 다인이는 자기 방문을 걸어 잠그고 꼼짝도 하지 않았어요. 그 날부터였군요. 눈에 보이지 않았던 두 사람의 틈이 점점 벌어져서 넓어진 것은. 나는 그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다인이는 내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실망했고, 어머니는 내가 다인이를 말리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했죠.

사실은 알았어야 했습니다. 그때 다인이가 그런 말을 하기까지, 다인이 안에서 얼마나 많이 갈등이 있었는지. 어머니의 지극한 익애와 헌신에서 다인은 오히려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걸 우리는 몰랐어요. 학교의 오케스트라 단원으로도 뽑히고, 교수들에게도 인정받고 있는 다인이었지만, 그 애는 더 많은 걸 바라고 있었던 거지요. 어렸을 때 저와 똑같이 좋아했었다가 자연스럽게 그만두어버렸던 글쓰기에 대한 미련이라든가, 악기를 다루면서 소홀해져 버린 다른 공부같은 것들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서로에게 그랬습니다. 저는 다인이의 첼로 연주를 들으면서 종종, 저 역시 음악가가 되고 싶었다는 걸 떠올리곤 했습니다. 글쓰기가 막힐 때면 저는 창고에 처박힌 다인이의 화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지요. 그러나 그림을 그리겠다거나 악기를 배우겠다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다인이도 그랬겠지요. 입 밖에 내지는 못하면서 남아있는 미련에 몇 번이나 돌아보고, 지금 있는 자리가 자신이 있어야 하는 곳이 맞을지 고민했던 겁니다.

저는 그 뒤로 다인이에게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했습니다. 대학에서 만난 선배와의 사이에서 임신까지 하게 되었던 것도, 어머니 몰래 병원에서 아이를 지우고, 며칠 안 가 쓰러져 입원한 것도. 그 무렵 저는 선생님이 아시듯이 중국 여행 중이었으니까요. 가끔씩 찾아오는 우울함이나 쓸쓸함 때문에 일에 손을 잡을 수 없게 되어도, 저는 그게 단순한 향수병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요. 그 모든 것이 다인이가 저에게 보낸 신호였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중국에서 돌아와 저는 다인이와 어머니가 완전히 틀어져 버린 것을 알았습니다. 다인이가 1년을 남겨놓고 학교를 그만두어 버린 것과 예의 임신 건이 결정적이었지요. 그 선배라는 사람의 집으로 어머니가 찾아갔었다는 것을 알고, 다인이는 저와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손목을 그었습니다.

“그만 좀 해! 나는 엄마가 생각하는 것같이 그렇게 잘나지 않았다고!”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면서, 울면서, 다인이가 외쳤던 말 중에 가장 생생하게 박혔던 말은 그 말이었습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지요. 저 말끝에 다인이는, 손에 들고 있던 메스로 손목을 그었으니까요. 그 여린 팔목에 무슨 그런 힘이 있었을까요. 그 메스는 문제의 그 선배라는 사람에게 구했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야 알았겠어요. 다인이가 메스를 구해달라 그랬을 때는 뭔가 다른 구실을 붙였을 테죠. 피를 보신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으셨고, 다인이는 미친 사람처럼 계속해서 손목을 그어댔습니다. 제가 다인이와 한참 몸싸움 끝에 메스를 빼앗았을 때 상처는 벌써 수십 겹이 나 있었어요. 하얀 다인이의 티셔츠가 검붉은 물이 들었죠. 메스를 베란다 바깥으로 던져 버리고 저는 119를 불렀습니다. 119에서는 어머니를 싣고, 다인이의 손목을 응급처치하고는 데리고 갔습니다.

다인이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첼로를 켜는 다인이는 그날 죽었죠. 깊게 패인 상처가 신경을 건드려서, 하필이면 섬세하게 현을 짚어야 하는 손이 나가 버린 겁니다. 그리고 퇴원하던 날 다인이는, 선생님이 아시는 대로,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지하철 선로에 뛰어들었습니다.

다인이를 불길로 보낼 때도 선생님이 곁에 계셨군요. 계속 넋이 나가 있는 어머니를 든든하게 붙잡으시고, 선생님은 제 눈치를 계속 살피셨지요. 저는 다인이의 일기를 어머니가 보시지 못하도록 같이 태웠습니다. 그 일기에는 고등학교 때부터 줄곧 다인이가 고민해 왔던 것들이 적혀 있었어요. 학교에서의 따돌림, 욕심처럼 늘지 않는 실력. 부잣집 아이들의 악기 자랑에, 그걸 부러워하는 자신에 대한 자책감. 그리고 버리고 왔던 것들에 대한 미련과, 저에 대한 동경. 어머니는 그걸 보셨다면 더욱 상처받으셨을 테지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어머니는 정말로 넋을 잃은 사람 같았습니다. 선생님이 줄곧 찾아오시고, 어머니가 좋아하는 많은 것을 보여주려고 해도 어머니는 변하지 않으셨지요. 어머니가 좋아하던 쇼스타코비치의 선율도, 마네의 그림도, 양손 가득한 물망초 꽃도, 어머니의 표정을 살려놓지는 못했습니다. 어머니의 병명은 없었습니다. 병원에서도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고 했으니까요. 단지 어머니를 보고 그렇게 말했지요. 살아있을 희망을 잃은 사람 같다고. 그랬습니다. 어머니는 정말로 빛이 들지 않는 곳에 둔 화분의 식물처럼 시들어 가셨으니까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날 밤, 저는 이상하게도 어머니와 같이 자고 싶었죠. 어머니는 제가 어머니 방으로 들어오자 갑자기 생기를 띄곤 일어나 앉으셔서 제 손을 꼭 잡으셨습니다.

“…다인아, 엄마, 엄마 용서해 주렴. 응?”

머리도 짧고 옷차림도 달랐는데요. 그렇지만 저는 수린이라고, 그렇게 말할 수 없었어요.

“엄마는 불행하게 살았다. 재능이 많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형제도 많고 집도 가난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 늘 소망했어. 다시 태어난다면, 누군가가 내 재능을 알고 키워준다면 정말로 나는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알고 있던 이야기였습니다. 의절하다시피 나온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평생 어머니의 동생들만을 챙겼지, 장녀였던 어머니를 따뜻하게 보듬지는 못하셨다고요. 그건 선생님도 해주신 이야기였지요? 어머니는 가엾은 사람이라고요. 저는 가만히 듣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쥐신 손을 놓지 않고서.

“그래서 그랬다, 그래서 너희를 낳았어. 나를 다시 살게 하고 싶어서, 한일현 박사한테 부탁해서. 불법이었지만, 그 사람이라면 절대로 비밀을 지켜 줄 걸 알고 있어서.”

예 선생님, 저는 알아버렸어요 그 순간에. 25년 전에 시작했던 인간 복제 연구는 정부가 완전한 개체의 복제를 금지하면서 중단되었지만, 복제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은 있었죠. 그 소문의 주인공이 바로 저와 다인이였다니. 선생님이 저희를 보실 때마다 어머니가 그렇게 불안해하셨던 이유도 알 수 있었죠. 어머니는 늘 비밀을 알고 있는 선생님이 그 비밀을 이야기해 버릴까봐 걱정하셨던 거죠. 어머니가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던 이유도 그 때문 아니었을까요? 더욱 가까워진 우리에게 선생님이 모든 진실을 이야기해 버리실까봐.

선생님,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날 저는 선생님의 연구소에 갔었어요. 거기 연구원으로 있는 차 박사님 아시죠? 평소에 저에게 아주 친절하셨던. 그분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그 연구소에 아직 냉동 보관하고 있는 어머니의 수정란이 남아있다는 것도 알았구요. 아아, 그러고 보니 정말로 유감이군요. 바로 그다음 날이죠? 연구소 화제로 차박사님이 돌아가시고, 연구소가 불타버렸던 것이.

가능하다면 한국에는 이제 돌아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참, 저 얼마 전에 학교에서 다른 클라스에 있는 사람과 사귀기 시작했어요. 러시아 고려인 3세인데, 정말로 좋은 사람이랍니다. 제가 어떠한 일을 겪었든 다 이해할 수 있다고 그러더군요. 이 주일 전부터 같이 살고 있어요. 깔끔하고 이해심 많은 사람이라 도움이 많이 돼요. 저보다 영어도 잘하고요. 러시아 억양이 가끔 묻어나는 그 사람의 영어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선생님께도 들려드리고 싶어요.

혹시 볼더에 오실 일이 있으면 꼭 찾아주세요. 선생님을 뵙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답니다. 그 때쯤이면 제 아이도 태어나 있지 않을까요? 뵐 수 있을 때까지 건강하세요.

 

 

2045년 6월 13일

사랑을 담아. 수린 올림

 

덧. 그이는 생물학적 아버지가 누구든 제가 낳은 아이는 자기 딸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저를 꼭 닮은 딸이면 좋겠다고도요. 그 사람의 작은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댓글 0
분류 제목 날짜
정도경 대게 - П...4 2021.10.01
노말시티 일인용 냄비에 라면을 끓였다 2021.10.01
갈원경 우주로 2021.10.01
유이립 이기적이다 2021.10.01
곽재식 하늘의 뜻2 2021.09.30
돌로레스 클레이븐 천국의 벌레들 2021.09.13
갈원경 마지막의 아이 2021.09.01
노말시티 안테로스 2021.09.01
곽재식 최후의 기술9 2021.08.31
해망재 상해기담 - 마리 이야기 2021.08.22
갈원경 믿어라, 내가 말하는 것만이 진실이다. 2 2021.08.01
노말시티 출근하자마자 퇴근하는 세상 2021.08.01
곽재식 크리에이티브 이노배이션을 위한 뉴 스페이스2 2021.07.31
갈원경 중요한 노트는 반드시 복사를 해 둘 것 (본문 삭제)2 2021.07.01
노말시티 헤매 2021.07.01
갈원경 삼각형이 아니라 삼각기둥이라고 수민은 말했다 (본문 삭제) 2021.07.01
지현상 파고들다 2021.07.01
엄길윤 코로나 호캉스 2021.07.01
곽재식 이상한 웅정 이야기2 2021.06.30
노말시티 기관사를 좋아하세요 2021.06.01
Prev 1 2 3 4 5 6 7 8 9 10 ... 48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