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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도연 병범 씨의 인생 계획

2022.12.01 08:0012.01

병범 씨의 인생 계획

해도연

 

병범 씨의 인생 목표는 평범했다. 죽지 않고 살아가는 것. 다행히 병범 씨는 가진 것도 물려받은 것도 특출 난 것도 없는 자신이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빈틈없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철들기 전부터 깨달았다. 시골 마을에 살았다 보니 뒤늦게 땅을 치며 후회하는 노인들을 많이 본 덕분이었다. 그중에는 병범 씨의 할아버지도 있었다. 오래전 이혼 서류만 남기고 집을 나갔던 할머니가 영생 시술을 받고는 달 궤도 우주정거장에서 70년 짜리 초장기 개발사업을 따냈다는 소식을 들은 병범 씨의 할아버지는 술과 약에 취해 여생을 보내며 죽음을 기다렸다. 그 모습을 본 병범 씨의 아버지는 사람이 어찌 죽지 않기 위해 살겠냐며 달관을 하더니 병범 씨가 중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속세를 떠나겠다며 사라졌다. 저승사자를 따르는 이상한 사이비에 빠졌다는 소문을 듣고 속리산 중턱에 있는 문제의 교단에 어머니와 함께 찾아갔지만 결국 병범 씨는 아버지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어머니를 본 것도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혼자 남은 병범 씨는 그저 죽지 않고 묵묵히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생각하고 계획하고 준비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이미 병범 씨는 노트 한 권 분량의 인생 계획서를 완성했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상황은 변하고 지혜는 늘기 마련이므로 병범 씨의 인생 계획서는 여러 권의 노트를 거치며 수정되고 개선되었다.

일단 돈이 필요했다. 많은 돈이 필요했다. 병범 씨는 직업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가능하다면야 노동 대비 수당이 높은 일을 하면 좋겠지만 그런 일들은 대개 인공지능이나 그럴듯한 명함이 필요한 부유층 자제들이 남김없이 쓸어가버렸다. 병범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신 인공지능 같은 고급 기술을 투자하거나 구식 로봇을 유지 보수까지 하며 사용하기에는 애매하게 아쉬운 것들이었다. 작은 마을에서 열리는 행사를 기획하거나 진행하는 일이라든가, 감각반응형 소설에 익숙지치 않은 중년과 노인들을 위한 문자소설을 쓰는 일이라든가, 이젠 박물관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디지털 시대 저장장치의 데이터를 복원해주는 일이라든가. 대충 그런 것들. 간단히 말해 며칠 몇 달 지나면 누가 했는지 안 했는지도 모를 그런 일들이었다. 하지만 보수는 의외로 괜찮았다. 죽음을 피하길 포기한 노인들이 주대상이었기에 병범 씨를 자식처럼 생각하는 고객들이 제법 후하게 보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하고 괜찮은 것으로는 충분치 않았기에 병범 씨는 결혼은커녕 연애도 하지 않았고 친구도 취미도 만들지 않았다. 물론 일을 구하기 위해서는 인맥이 필요했기에 병범 씨도 사람 만날 줄은 알았다.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하고 근황을 주고받은 다음, 지키지 않을 약속을 하는 듯 마는 듯하며 서로의 갈 길을 마저 가는 것이다. 

일한 만큼 받는 돈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 정도는 병범 씨도 잘 알았다. 그래서 가끔은 지키지 않을 약속을 지켜가며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주로 일하지 않고 돈을 불리는 방법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병범 씨가 만나려고 해도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는 했지만 병범 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덕분에 병범 씨는 29살이 되었을 때 투자와 금융, 부동산 따위에 대해 제법 해박한 지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병범 씨가 본격적으로 은행을 드나든 건 30살 생일 때부터였다. 은행 직원은 왜 이제야 왔냐며 온갖 종류의 200세 시대를 위한 상품을 들이밀었다. 지금 달과 화성에서 부동산과 일자리 수요가 급증하고 있어 돈 불릴 곳이 많다면서 이번에 새로 나온 200세 상품에는 무려 70세부터 보험 혜택 당겨받을 수 있는 특약이 생겼다고 말했다. 하지만 병범 씨는 속지 않았다. 특수 목적을 위해 설계된 상품에 투자하는 대신 그동안 보고 들은 경험을 살려 수익이 조금 아쉽더라도 리스크가 적은 포트폴리오를 직접 설계해 직원에게 내밀었다. 직원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병범 씨가 약소하기 그지없는 투자 금액을 말했을 때 직원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창구 건너편에 앉은 은행장의 눈치를 보며 태블릿을 두드리는 직원의 손끝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병범 씨는 그가 광양자 컴퓨터에 연결된 안드로이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개의치 않고 모든 요구 사항을 나열했다. 요즘 은행 직원들은 논리와 숫자로 고객을 설득하기보다 눈앞에서 직접 감정과 양심을 자극한다는 사실을 미리 듣고 간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병범 씨는 그렇게 달마다 해마다 은행을 찾아가며 수익은 낮지만 안정적인 투자를 이어나갔다. 은행 직원의 정교한 인공근육이 만들어내는 표정에 이끌려 고위험 고수익 상품에 낚일 뻔한 적도 있지만 자칫 잘못하다가는 할아버지나 아버지처럼 넋 놓고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 덕분에 실수를 면했다.

소소하게 성공적인 투자와 인공지능 기피 업무를 병행해나가던 병범 씨가 50살이 되자 죽지 않고 살아가는 선택지가 현실로 다가왔다. 여전히 돈은 부족하지만 투자 설계를 살짝 바꾸고 조금만 더 수고스러운 일을 이어나간다면 62살 생일에는 꿈에 그리던 CWT 시술을 위한 비용을 마련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선 것이다. 매년 조금씩 오르락내리락하는 시술 비용을 고려해 앞으로 계속 오르기만 할 경우도 계산해봤는데 그래도 66살 생일 전에는 비용을 마련할 수 있을 듯했다. 병범 씨는 흥분을 억누르며 그동안 집중을 위해 일부러 관심을 주지 않았던 CWT 시술에 대해 다시 알아보기 시작했다.

CWT 시술은 코레이 와이스-토니라는 스탠포드대 신경과학자가 개발한 생리시계조작 기술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생리시계 시스템의 지표가 되는 BCS 단백질 9종을 통해 피시술자의 노화 파라미터를 알아내고 생리시계를 해킹해 노화를 멈추는 것이라고 홈페이지에 적혀 있었다. 그 이상의 설명은 사실 병범 씨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CWT 시술이 가능한 것은 35살 때와 65살 때, 그리고 85살 때뿐이라는 것이다. 어떤 이유에선지 사람의 몸에선 그 시기에만 생리시계 해킹이 가능할 만큼의 BCS 단백질이 만들어졌다. 35살의 병범 씨는 돈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리고 인공지능 기피 업종에서 일하면서 85살까지 건강하게 살 자신은 없었다. 병범 씨가 65살을 목표로 삼은 건 그 때문이었다. 비용이 계속 오른다면 1년 늦어지기는 할 테지만 그 정도는 허용 가능한 범위였다.

병범 씨는 며칠 동안 계산을 반복하며 확인을 거듭했다. 틀림없었다. 12년 뒤, 62살이 되면 CWT 시술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확보할 수 있다. 늦어도 66살이면 가능하다. 건강 면에서도 지금의 생활 습관을 잘 유지한다면 죽지 않고 살기에 딱 적당한 60대가 될 수 있다. 그때 모든 투자금을 회수해 CWT 시술을 받고 나면 병범 씨는 드디어 죽지 않고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병범 씨는 마지막 검산을 마무리하고는 30년 동안 함께한 딱딱하고 푸근한 나무 침대 위로 몸을 눕혔다. 모든 것이 분명해진 순간의 짜릿함이 아쉬워 쉽게 눈을 감지 못하고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던 병범 씨는 문득 CWT 시술 이후의 삶이 궁금해졌다. 그동안 오직 CWT 시술만을 바라보며 달려왔기에 정작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못했다. 그저 죽지 않고 살게 되겠지, 딱 그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엔 조금 마음의 여유를 갖고 주변을 걸으며 죽어가는 사람들과 죽지 않고 사는 사람들을 둘러보기로 하고 심호흡 여덟 번과 함께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병범 씨는 도시로 온 이후 처음으로 강변 공원길을 천천히 걸었다. 죽지 않고 살겠다는 목표를 위해 여가를 가질 틈도 없이 살아왔기에 공원길을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는 병범 씨의 모습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런 어색함은 기대와는 다른 모습의 노인들을 본 순간 금세 사라졌다.

병범 씨는 죽음을 묵묵히 기다리는 노인들이 할아버지나 아버지처럼 절망에 빠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공원의 노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밝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시간을 즐겼다. 마치 그들이 더 이상 늙거나 죽지 않기라도 하는 것처럼. 값비싼 와인과 치즈를 간식처럼 꺼내놓고 경치를 즐기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제법 과격한 운동을 즐기는 이들도 있었다. 정신 건강은 물론 육체적 건강 상태도 아주 좋아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약해진 신체 일부에는 인공 외골격이나 보조근육 패드를 붙이고 있었지만 그 정도는 병범 씨보다 젊은 사람들도 사용하는 터였다. 다만 어린 시절부터 고급 100세 보험을 들어놓은 게 아니라면 너무 비싸서 쉽게 쓰지 못할 뿐이었다. 100세까지만 살 생각이 없었던 병범 씨는 그런 보험을 들어놓지 않았기 때문에 가끔 저려오는 아픈 무릎과 허리를 짚으며 부러워할 따름이었다. 병범 씨는 이젠 일자리도 없을 저 노인들이 어떻게 비싼 의료 장비를 구입했을지 궁금해졌다.

병범 씨는 강을 마주한 벤치에서 느긋하게 그림을 그리는 노인 옆에 앉았다. 이젤, 캔버스, 붓, 물감 모두 고급스러움이 잔뜩 묻어났다. 병범 씨가 마지막으로 그림을 그려본 건 초등학교 방학숙제를 했을 때였다. 제법 솜씨 좋게 붓질을 하는 노인을 보며 병범 씨는 이런 노후라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조금 심란해졌다. 어린 시절에 마을 노인이나 할아버지, 아버지 같은 나쁜 사례만 접한 탓에 자연스럽게 늙어 죽음에 이르는 것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 세상의 절반만 바라보며 달려온 건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병범 씨를 괴롭게 했다.

병범 씨는 그림을 그리는 노인에게 슬며시 물었다. 어떻게 이렇게 풍요로운 노후를 보낼 수 있는 건지, 어떻게 충분한 자금을 마련하고 건강한 신체를 지켜냈는지.

노인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저기 있는 사람들이 돈을 주는 거라고 했다. CWT 시술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지구 밖에서 일을 하며 태양계 경제를 이끌고 있었다. 죽지 않으니 그만큼 살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야 했고 지구에 남아 있는 일거리로는 영생자들 모두가 먹고살기 어려웠다. 그래서 우주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내는 막대한 세금을 통해 CWT 시술을 받지 못한 노인들이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병범 씨는 제법 합리적인 시스템이라고 생각했다. CWT 시술을 받는다는 건 아무리 큰 비용을 지불했다고 하더라도 영생이라는 어마어마한 혜택을 손에 넣은 셈이니 그 혜택의 일부를 시술을 받지 못한 대부분의 노인들에게 환원한다는 건가. 

고개를 끄덕이는 병범 씨를 보며 노인이 덧붙였다. CWT 시술 비용이 왜 매년 달라지는지 아느냐고. 병범 씨가 고개를 젓자 노인은 인자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젊은이들이 내는 세금만으로는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노인들을 부양하고 국가를 운영할 수가 없기 때문에 개발된 것이 CWT 시술이고, 이를 통해 만들어진 영생자들은 죽어가는 노인들과 국가를 위해 지구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영원히 일을 하며 세금을 내는 것이라고 했다. CWT 시술 비용이 해마다 달라지는 건 오로지 젊은이와 노인, 영생자의 비율을 통제해 세금을 관리하기 위함일 뿐이니 사실 진짜 승리자는 다름 아닌 이 공원에 있는 노인들, 그 중에서도 특히 100세 보험이나 200세 보험을 들어둔 노인들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니 아직 젊은 사람들은 보험 미리미리 잘 챙겨두고 마음 편하게 살라며 노인은 병범 씨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병범 씨는 잠시 고민하다가 노인에게 사실 자신이 CWT 시술을 받기 위한 경제적 준비를 하고 있고 아마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직 이 목표를 위해 평생을 달려왔다고. 하지만 지금 당신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조금 흔들린다고 했다. 200세 보험에 들 수 있는 나이는 훌쩍 지나버렸기에 이제 와서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지만, 그래도 지난 일과 다가오는 일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때 노인의 눈빛이 달라졌다. 인자한 표정은 사라지고 붓을 잡은 손은 떨렸다. 노인이 병범 씨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나한테 넘겨. 난 아직 70살이야. 아직 내겐 기회가 있다고. 85살에 시술을 받고 싶어. 굽은 허리로라도 살고 싶어. 이게 마지막 기회야. 자네에겐 이번이 아니라도 기회가 있지 않나. 그러니 좀 더 천천히 생각해보고 이번 건 내게 양보해줘. 나 200세 보험있어. 이거 무상으로 양도해 줄게. 양도세도 내가 내고 돈도 더 얹어 줄게. 

노인의 눈동자에서 절망과 분노, 두려움이 쏟아졌다. 노인이 붓을 집어 던지고 병범 씨의 손목을 잡았다. 형상기억섬유 덕분에 노인의 악력은 병범 씨가 고통에 겨워 소리를 지를 만큼 강했다. 노인의 팔뚝에 있던 근육섬유 스위치를 꺼버린 다음에야 병범 씨는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병범 씨는 흔들렸던 마음을 다잡았다. 절대 죽지 않고 살겠다고. 저 망할 노인의 자기합리화에 넘어갈 뻔했던 자신을 돌아보며 병범 씨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 병범 씨의 마음에 이정표라도 남기려는 것처럼,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작은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처음 보는 고양이 한 마리가 문 앞 잡초 덤불 사이에서 병범 씨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눈부신 빛 덩어리로 보일 만큼, 티끌 하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새하얀 아기 고양이였다.

병범 씨는 고양이를 좋아했다. 하지만 삶의 변수를 늘리는 건, 특히 예측 불가능한 요소를 도입하는 건 병범 씨의 삶에서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리 사람 좋아하는 고양이가 발목을 감싸며 목을 울리더라도 병범 씨는 손도 대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강변 공원길에서 있었던 일이 병범 씨를 조금 바꿔놓은 게 틀림없었다. 병범 씨는 아기 고양이를 품에 안고는 집으로 들어갔다. 병범 씨는 그날 밤의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책상 앞에 앉아 새벽까지 계산을 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이 고양이를 키우더라도 병범 씨의 계획에는 지장이 없다. 조금 덜 먹고 덜 자고 더 움직이면 된다. 병범 씨는 아기 고양이에게 이름을 지어주지는 않았다. 그저 고양이, 가끔은 흰 고양이라고 부를 뿐 그걸로 충분했다.

고양이는 병범 씨 생각보다 큰 변수였다. 자주 아프거나 다쳤고 병범 씨의 잠을 방해해 업무 및 건강 관리에 지장을 초래했다. 하지만 병범 씨는 어떻게든 대응할 수 있었다. 근무 계획을 조금씩 바꾸고 투자 포트폴리오를 조율했다. 가장 큰 위기는 제법 자란 흰 고양이가 낯선 아기 고양이를 네 마리 데리고 왔을 때였다. 어디서 데리고 온 건지, 어미 고양이는 어디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병범 씨는 결국 다시 한 번 밤을 지새우며 계산을 하고는 투자금의 일부를 회수해 생활비로 돌려 잠시 일을 쉬면서 아기 고양이들을 돌봤다. 그러면서 오랜만에 지키지 않을 약속을 뒤져가며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 조금 자란 아기 고양이들을 한 마리씩 입양 보냈다.

병범 씨는 태연하게 손세수를 하는 흰 고양이를 보며 잠시 원망을 하다가도 자신이 영생을 손에 넣을 즈음엔 이 녀석과도 더 이상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모처럼 사온 고급 사료의 뚜껑을 땄다. 고양이는 뚜껑 따는 소리를 듣고는 거만한 자세로 다가와 병범 씨를 올려다봤다. 병범 씨는 사료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다시 삶의 수레바퀴를 돌렸다. 예전보다 바퀴의 수가 늘었지만 여전히 빈틈도 여유도 없었다.

그렇게 14년이 지났다.

병범 씨의 몸은 여기저기 힘이 빠지고 쇠약하긴 했지만 CWT 시술을 받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병범 씨는 저축부터 연금, 부동산, 주식 따위의 모든 자금을 회수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예상보다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인생 계획을 꽤나 잘 실천한 셈이라고 병범 씨는 자평했다. 하지만 평가야 어떻든 65살이 되기 전에 모든 비용을 마련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이제 한 달만 더 기다리면 CWT 시술을 받을 수 있다. 그러고 나면 죽지 않고 살 수 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우주에 나가서 영원히 일을 해야겠지만 공원에 앉아 그림을 그리며 두려움을 감춘 채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병범 씨는 그렇게 생각했다. 병범 씨는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 행복에 자그만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양이가 아프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늙은 고양이인 만큼 아픈 게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회복하지 않는 건 처음이었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고양이는 죽음이 무엇인지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태연하게 느린 숨을 내쉬었다. 공원에서 만났던 노인이 눈빛 속에 숨기고 있던 두려움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낮게 골골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저 편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죽음을 피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당분간 돈 걱정이 없는 병범 씨는 일을 그만두고 고양이를 보살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고양이. 그동안 병범 씨의 인생 계획을 몇 번이나 위협했던 녀석. 병범 씨는 늙은 고양이를 품에 안고 체온을 교환했다. 내년이면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으로 간다는 사실을 드디어 실감하기 시작했다. 그곳에 가면 이런 이별을 마주할 일도 없겠지. 병범 씨는 문득 고양이가 부러워졌다. 죽음을 슬퍼해주는 존재가 있다는 게 어떤 일인지 궁금해졌다. 할아버지의 죽음을 병범 씨는 슬퍼하지 않았다. 언제 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죽음은 공평하지 않다는 사실에 무거움을 느끼고 이 못난 고양이에겐 그래도 자신이 있어줄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를 느꼈다. 그리고 자신은 이제 곧 이런 불공평함이 없는 곳으로 떠난다는 사실에…….

고양이는 평화로운 하품을 한 번 하고 숨을 거둔다.

……자신이 조금 비겁하게 느껴졌다.

병범 씨는 고양이를 처음 만난 문 앞 잡초 덤불에 묻어주기로 했다. 맑은 날 아침, CWT 시술을 하러 갈 때 입으려고 준비해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병범 씨는 이슬에 젖은 수풀 위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자그만 묘종삽으로 깊은 구멍을 파고 고양이를 담은 종이 상자를 내려놓았다. 병범 씨는 마지막 인사를 위해 상자를 다시 한 번 열고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그때 고양이의 입 속에서 무언가가 보였다. 병범 씨는 고개를 깊이 숙여 자세히 들여다봤다. 입천장에 네모난 표식이 있었다. 고양이에게 소리 없이 사과를 하며 입을 조심스럽게 벌리자 홀로그램 코드가 나타났다. 병범 씨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각막 센서로 코드를 읽어 들이자 눈앞에 장황한 안내문이 나타났다. 요약하면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이 고양이는 스탠포드 대학교 신경과학연구소의 재산으로 선천적 CWT 형질을 가지고 태어난 인공생명체다. CWT 시술 때 고급 옵션을 선택한 사람들에게만 제공되는 선물이자 심리적 안정을 위해 준비된 특별한 반려동물이기도 하다. 원한다면 간단한 설정을 통해 건강 상태나 성격, 수명도 조절할 수 있다. 그리고 죽었더라도 일주일 이내라면 다시 살려낼 수도 있다.

이 고양이는 병범 씨보다 먼저, 그리고 더 많은 돈을 지불해 영생자가 된 누군가를 위해 만들어졌고 평범한 건강 상태와 평범한 수명이 설정된 상태로 유기된 것이었다.

병범 씨는 고양이를 담은 상자를 들고 강변 공원길로 갔다. 그리고 강이 바라다보이는 벤치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자신이 평생 노력해 손에 넣으려고 했던 CWT 시술의 기회가 어떤 곳에선 선물용 고양이에게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회의감은 사실 별거 아니었다. 그럴 수도 있지. 병범 씨를 고민하게 만든 것은 이 고양이를 다시 살릴 것인가 말 것인가였다. 죽고 나서 아직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았다. 다시 살려낼 수 있고 병범 씨가 원한다면 함께 영생을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고양이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피하지도 않았다. 죽음마저 운명의 선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양이가 14년의 삶을 산 대가로 받은 그 선물을 앗아가도 되는 걸까? 자신이 죽음을 선물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어느새 해가 강줄기 끝 언덕에 걸려 하늘이 붉어졌을 때였다. 그제야 병범 씨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내다봤다. 그저 죽지 않기 위해 살아왔다. 그리고 CWT 시술을 받고 나면 죽지 못해 살아갈 것이다.

병범 씨는 은행에 전화를 했다. 긴 대화 끝에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아 오래된 그림을 펼쳐보고 있는 80대 노인에게 다가가 은행 직원의 명함을 말없이 건네고는 강변을 따라 묵묵히 걸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지평선의 그림자가 밤과 함께 떠오르는 곳을 향해.

병범 씨는 그날 이후, 은행에도 공원에도 집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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