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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노래하기 시작했다

아밀

 

옛날에 어리석은 왕이 있었다. 왕은 어려서부터 어리석었으나 그의 형은 포악했으므로, 선왕은 그나마 어리석은 둘째 아들이 왕이 되는 것이 낫다 하여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화창한 봄, 어리석은 왕이 선왕의 장례를 치르고 새 왕으로 즉위한 이후 가장 먼저 추진한 일은 천도(遷都)였다. 왕은 꿈에서 신에게 계시를 받았는데, 계시인 즉슨 그가 지금의 도읍에 있으면 즉위 99일이 채 되기 전에 죽음을 맞으리라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포악한, 그리고 이제는 왕이 되지 못한 울분까지 품고 동쪽 나라로 도망친 형에게 칼을 맞아 죽는 꿈이 너무나 생생하여 왕은 덜덜 떨었다. 그리고 곧장 신하들을 불러모은 다음 앞으로 99일 안에 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도읍을 옮기고 새 왕궁을 지으라고 지시했다. 
99일 안에 도읍을 옮기고 새 왕궁을 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농사 지어야 할 수많은 백성이 톱질하고 못질하는 일에 동원될 것이고, 국고의 절반이 금과 은과 석영과 산호와 대리석과 감람석과 녹주석을 사들이는 데 쓰일 것이었다. 왜냐하면 왕은 원래의 왕궁을 허물고 그 왕궁을 이루었던 금과 은과 석영과 산호와 대리석과 감람석과 녹주석으로 새 왕궁을 짓는 것은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왕이 생각하기에, 본디 왕궁이었던 곳에 진기한 식물들을 심고 희귀한 동물들을 풀어 백성들이 노닐 수 있게 하면, 백성들이 감탄하고 즐거워하여 왕을 칭송할 것이었다. 
충직한 신하들은 관복을 벗을 것을 각오하고 어리석은 왕에게 반대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어리석은 왕은 그 신하들이 포악한 형을 지지하는 이들이라고 생각해 목을 자르도록 했다. 그리하여 서른 명의 충신이 명을 달리했고 어리석은 왕의 곁에는 아첨하는 무리만 남게 되었다. 

 

98일 동안 수많은 백성이 피땀을 흘리고, 98일 동안 수많은 배가 이국의 암석과 보석을 실어나른 끝에, 그 해 여름 드디어 새 왕궁이 완성되었다. 어리석은 왕이 새 왕궁을 보니 옛 왕궁보다 아름다워 심히 만족스러웠다. 99일째에 왕은 새 도읍을 선포하고 옛 도읍의 수비대를 모두 새 도읍으로 옮기도록 했다. 그리하여 1만 명의 병사들이 모두 새 도읍으로 옮겨갔다. 왕은 새 왕궁에 기녀들과 무희들과 악공들을 불러모아 성대한 주연을 베풀었다. 아첨하는 신하들은 고기와 술을 마음껏 먹고 마시며 즐거워했다. 이후로 여러 날 동안 새 왕궁에서는 노랫소리와 고기 굽는 냄새가 끊이지 않았다. 
왕과 왕족과 귀족이 떠난 옛 도읍은 백성들의 차지가 되었다. 돌을 깎고 나무를 베다가 손가락이 없어지고 십장들의 채찍질에 살갗이 터지고 벽돌을 나르고 쌓느라 허리가 굽은 백성들은 과거에 발도 들일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옛 왕궁을 거닐었다. 공작새와 코끼리와 원숭이와 종려나무와 봉황목과 협죽도가 있는 옛 왕궁은 마치 낙원과도 같았고 백성들은 그곳에서 시름을 덜 수 있었다. 옛 왕궁의 이름은 이웃나라들에도 알려져 귀족들과 사신들이 방문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돈 냄새를 맡은 상인들이 몰려와 시장과 여관과 음식점과 주점을 차리기 시작했다. 온 나라의 시장과 광장을 돌아다니는 광대들과 악사들과 시인들과 춤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느새 옛 도읍은 향락가가 되었다. 이후로 여러 날 동안 옛 도읍에서는 노랫소리와 고기 굽는 냄새가 끊이지 않았다. 
어리석은 왕은 과연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며 기뻐했다. 어려서부터 선왕에게 어리석다는 꾸지람을 들어온 왕은 자신의 현명함이 비로소 만천하에 증명되었다고 생각했다. 
“백성들은 어리석어서 자신들이 당한 고통은 금세 잊고 즐거움에 취하는구나.” 왕은 말했다. 

 

가을이 왔다. 추수를 할 때였으나 지난봄부터 많은 백성이 노역을 하느라 씨를 뿌리지도 밭을 돌보지도 못했기에 전에 없는 흉년이었다. 기근은 사람마다 다르게 와서, 왕족과 귀족 들은 세금과 공물로 여전히 부족함 없이 먹었고, 상인들은 비싼 값을 치르고 곡식을 사서 먹었고, 오로지 가난한 백성들만 굶주렸다. 그들은 다가올 겨울을 두려워하며 풀죽을 쑤어 먹었다. 그리고 시장과 광장에서 노래를 불렀다. 슬픈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우스운 노래를 부르며 왕족과 귀족 들을 조롱했다. 그렇게 백성들은 시름을 덜 수 있었다. 
어리석은 왕은 옛 도읍에서 백성들이 자신을 조롱하는 노래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화를 냈다. 형을 두려워하며 쩔쩔매는 바보 임금에 대한 노래가 옛 도읍 밖으로도 퍼지고 있었다. 어리석은 왕은 당장 그들을 잡아들이고 싶었으나, 그런 노래를 부르는 이들이 너무 많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왕은 어떻게 하면 그들을 막을 수 있느냐며 신하들을 추궁했지만 아무도 뾰족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때 서쪽 섬에 있던 용이 가을을 맞아 긴 잠에서 깨어났다. 용은 요정들에게 세상 돌아가는 일을 물었고, 재미난 소식을 들었다. 나라의 주인이 옛 왕궁을 버리고 떠났으며, 떠날 때 옛 도읍을 지킬 수비대도 모두 데려갔다는 것이었다. 이제 옛 도읍에 남아 있는 군인이라고는 백성들이 불온한 노래를 부르지 않는지 단속하는 병사 137명뿐이라고 했다. 그러니 용이 옛 왕궁에서 반짝이는 금과 은과 석영과 산호와 대리석과 감람석과 녹주석을 손아귀에 넣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터였다. 수비대조차 아닌 졸병 137명 정도야 용이 발을 한 번 구르고 날개를 한 번 치고 입김을 한 번 뿜으면 다 스러질 목숨이었다. 
그래서 용은 그렇게 했다. 
병사들이 죽었다. 공작새와 코끼리와 원숭이와 종려나무와 봉황목과 협죽도가 죽었다. 이웃나라의 귀족들과 사신들이 죽었다. 시장 상인들과 여관이며 음식점이며 주점 주인들이 죽었다. 광대들과 악사들과 시인들과 춤꾼들이 죽었다. 손가락이 없어지고 살갗이 터지고 허리가 굽고 굶주린 백성들도 죽었다. 옛 왕궁은 앙상한 뼈대만 남았다. 어느새 옛 도읍은 폐허가 되었다. 
“이 나라의 왕은 어리석어서 선왕이 하던 일도 금세 잊고 제 보기 좋을 대로만 행하는구나.” 용이 말했다. 
소식을 들은 왕은 깜짝 놀랐다. 신하들은 침묵했다. 백성들은 왕의 어리석음을 탓했다. 가을마다 용이 깨어난다는 것과 용이 반짝이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다 예견된 일이었는데 어째서 대비를 하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많은 사람과 많은 금은보화가 모인 곳을 무방비하게 방치했느냐는 것이었다. 
어리석은 왕은 비난을 듣기 싫어했지만 백성들의 원성은 굳게 닫힌 왕궁 문을 넘어올 만큼 컸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곤란한 점은 옛 왕궁을 구경하던 동쪽 나라의 귀족들과 사신들마저 용의 입김을 맞고 죽었다는 것이었다. 동쪽 나라에서는 왕의 포악한 형을 보호하고 있었다. 동쪽 나라가 어리석은 왕에게 전쟁을 선포한다면, 그리고 백성들이 어리석은 왕에게 반란을 일으키기라도 한다면, 포악한 형은 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서 돌아올 것이었다. 포악한 형은 백성들을 칼 삼고 동쪽 나라를 방패 삼아 어리석은 왕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고야 말 것이었다. 
왕은 고민 끝에 신하들에게 말했다. “내 묘안이 떠올랐다. 이제부터 온 나라에 애도 기간을 선포하고 노래를 금지하겠노라. 그러면 동쪽 나라에서는 차마 상중인 나라를 침입하지 못할 것이고, 백성들은 시장과 광장에 모이지 못할 테니 반란도 일으키지 못할 것이 아닌가.” 
신하들은 왕에게 과연 현군(賢君)이라 입을 모았다. 

 

노래가 없는 겨울이 왔다. 그 해 겨울 추위는 혹독했고 해가 들지 않아 낮에도 밤처럼 어두웠다. 사람들은 콧노래라도 흥얼거리다가 발각되면 목이 잘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몸을 옹송그리고 침묵했다. 온 나라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옛 도읍에서 목숨을 잃은 혼령들은 슬픔에 잠겨 폐허를 배회했다. 용의 발에 밟혀 짜부러진 혼령들, 용의 날갯짓에 날아가 박살난 혼령들, 용의 입김에 활활 타 재가 된 혼령들이 길거리를 걸어다녔다. 그들은 고통스럽고 황량한 이승을 떠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혼령은 스스로 울지 못하기 때문이다. 혼령이 천국으로 가려면 울어서 슬픔을 씻어야 한다. 그리고 혼령은 노래를 들어야만 울 수 있다. 그러나 나라 어디에서도 노래가 들리지 않았기에 혼령들은 울지 못했고, 울지 못했기에 슬픔을 씻지 못했고, 슬픔을 씻지 못했기에 천국에 가지 못했다. 그들은 거대한 슬픔에 잠긴 채 자신이 죽은 자리를 맴돌다가 노래가 들리는 곳을 찾으러 도읍 밖으로 나갔고 도읍 밖에서도 노래가 들리지 않자 서쪽 바닷가로, 동쪽 숲으로, 북쪽 설원으로, 남쪽 초원으로 향했지만 그 어디에서도 노래가 들리지 않아서 그들은 울고 싶었지만 울 수 없었고 산 사람들은 아무도 그들을 볼 수도 없고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지도 못하고 다만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안타까이 죽은 이들을 위해 울고 또 울었다. 
“소중한 이들이 우는 것을 보니 더욱 견디기 힘들구나. 차라리 우리 소중한 이들이 없는 곳으로 가자.” 
혼령들은 그렇게 정하고 새 도읍의 새 왕궁으로 몰려갔다. 
새 왕궁에 가까워지자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왕궁 안에서 노랫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이었다. 왕이 온 나라에 노래를 금지했다고 했는데 어떻게 왕궁에서 노랫소리가 들릴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애초에 그들의 죽음부터가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기에 혼령들은 생각을 그만두고 왕궁으로 향했다. 
왕궁은 흰 눈밭 위에 수많은 담장으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었다. 왕궁 뒤 펼쳐진 참나무 숲은 겨울을 맞아 앙상했지만 감람석과 녹주석으로 된 왕궁 벽은 겨울에도 짙푸른 녹음을 펼쳤고, 지붕에 박힌 산호는 꽃송이 같았고, 석영과 대리석으로 된 기둥은 별빛을 반사해 하늘과 땅이 뒤바뀐 듯 보였으며, 금과 은으로 된 창틀 안에서는 금색과 은색의 불빛들이 일렁거렸다. 그 불빛들과 함께 누군가의 노랫소리가 선명하게 흘러나왔다. 깊고 청아하여 이 세상의 소리 같지 않은 음색이었다. 혼령들은 그 소리가 나는 곳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넓은 방 안에 왕과 귀족들이 둘러앉아 먹고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방 한편에는 악공들이 앉아 있었고, 그 앞에 기녀 한 사람이 서 있었다. 흑단 같은 머리를 틀어올리고 밤바다 같은 드레스 자락을 발치에 드리내린 기녀는 석류 같은 입술을 벌리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기녀는 왕 앞에서 단 한 번 노래할 수 있는 영광을 위해 평생을 연습해온 사람이었다. 이제 기녀는 꿈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고 그래서 꿈을 꾸는 듯했다. 기녀는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는 새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했고 그 시간은 영원이면서도 찰나였다. 
그러나 왕은 그 시간을 음미하지 않았다. 왕은 먹고 마시고 떠드느라 바빴다. 그 시간이 영원이면서도 찰나임을 아는 것은 혼령들이었다. 방 안 가득 모인 혼령들이 기녀의 노래를 듣자 그들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 방울 한 방울씩 떨어지던 눈물이 빗줄기처럼, 냇물처럼, 폭포처럼 흘렀다. 눈물과 함께 혼령들의 가슴 속에서 슬픔이 모래처럼 씻겨 나갔다. 눈물은 방 안을 가득히 채우고 채우다 못해 넘쳤고 눈물은 창밖으로, 담장 밖으로 쏟아져 나가 눈밭을 적셨다. 
눈물과 눈물이 떠올라 하늘로 증발할 때 혼령들도 가벼이, 가벼이 날아올랐다. 

봄이 왔다. 눈이 녹고 새가 울고 꽃이 피었으므로 왕은 더 이상 애도 기간을 연장할 핑계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이제는 폐허가 된 옛 도읍을 재건하는 것을 빌미로 백성들을 징발하였다. 
한편 동쪽 나라에 있던 포악한 형은 어리석은 왕이 반란을 다스리는 데 모든 병력을 동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리석은 왕은 국경을 활짝 열어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포악한 형은 말을 타고 깃발을 들고 병사들을 대동하고서 서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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