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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가을에 경서랑은

 

갈원경

 


나는 왜 경서랑으로 태어나서.

이틀에 한 번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곳에 성씨는 넘치도록 많고 하필이면 성씨와 조합을 생각하지 않고 이름을 붙여서 이어 말하면 이상해지는 이름이 아니라면 자기가 가진 성씨를 원망할 일이 많지는 않을 거다. 나도 그랬다. 이응이 붙은 성씨에 이응으로 끝나는 이름을 어릴 때 놀리는 녀석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까짓 머리가 덜 여문 것들이 철없이 하는 짓이라 비웃어버리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머리가 조금이라도 여물게 되면 ‘경’이라는 성씨가 그렇게 쉽게 놀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걸 알게 마련이다. 같은 어린이집에 ‘경’씨 아이가 있다는 걸 안 어른들이 그게 누군지 확인한 후에는 아이를 붙들고 쟤랑 친하게 지내라고 말하는 게 훨씬 더 흔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이모들과 이모할머니들이 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경효부’의 ‘부장’이다. 처음엔 할머니가 부장이었고 그다음에는 잠깐 육촌이모할머니가 부장이셨다가, 지금은 어머니가 부장이 되었다. 내가 열 살 때였으니 이제 십 년째. 경효부 서쪽으로는 바다로 향하는 아무르강이 있고 북쪽으로는 평원이 있어서 서울에서도 함부로 대하지는 못한다. 내가 열다섯이 되자마자 어머니는 첫째인 내가 서울 풍습도 알아야 부를 잘 꾸릴 수 있다며 서울에 있는 학교로 보냈는데, 사실 꼭 첫째에게만 했던 일은 아니었다. 동생 둘과 나 세 사람 중에 누군가가 다음 부장이 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이모의 자식 중에 누군가가 받을 수도 있다. 경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될 수 있는 자리니까. 그리고 이모할머니가 부장이셨을 때나 어머니가 부장인 지금이나 그 일을 내가 할 거라고는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친척이 너무 많기도 하고, 동생들이 어머니 일에 관심을 보이면서 눈을 빛내는 만큼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안 들기도 하고.

 

내가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게 된 건 어머니의 뜻이었지만, 서울은 여러 가지로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었다. 나는 아무르 강의 반의 반도 안 되는 개천을 보고 한강이라 부르는 걸 보고 말문이 막혔다. 강변에서 도시락을 먹는 게 연인이 생기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이라고 말하는 학교 동기들을 보고는 기가 찼다. 무릇 강이라면 날씨가 가물다고 바닥이 보일 듯이 수면이 내려가는 것도 아니고, 비가 오면 금방 차올라 다니지 못하는 곳에 옹기종기 앉아서 도시락을 까먹을 것도 아니다. 아무르강을 보지도 못한 서울 촌놈들 같으니라고. 하지만 물론 나는 그런 말을 실제로 하지는 않는다. 경효부 출신은 그런 천한 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 법이거든.

하지만 강변에 산책가지 않을래, 라는 말을 한 게 남수아라면, 말이 달라진다.

“오늘 밤 한강 연등 축제인데, 같이 안 가 볼래?”

수아는 언제나처럼 밝게 웃으며 내게 물었다. 이 가을은 학교에서 보내는 마지막 가을이고, 내년 봄꽃이 피기 전에 우리중 상당수는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열에 하나 정도는 서울에서 일을 하게 될 것이고, 스물에 하나 정도는 조금 일찍 어머니의 일을 물려받을 것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오 년 동안 한 번도 먼저 뭔가를 청하는 법이 없었던 수아가 내게 그렇게 말을 한 건. 그건 수아가 내가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던 마음을 조금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기도 했다.

“경효부 출신 경서랑께서 한강 같은 실개천을 뭐하러 보러 가시겠어.”

채이경이 말했다. 채이경도 서울 출신이 아니지만 성으로는 어디 출신인지 짐작할 수가 없다. 먼저 어디서 왔다는 말도 한 적이 없고, 말투도 완전히 서울 말투다. 채 씨는 북부와 서부에 두루 퍼져 사는 성씨라서 아마 그중 어딘가에서 태어나 자랐겠지만, 물려 받을 자리가 없는 성씨인 만큼 앞으로 무슨 일을 어디서 할지도 정해져 있지 않다. 다만 나한테 하는 말을 보면 경효부에서 일을 할 생각은 전혀 없나보다 짐작할 뿐이다.

“아, 경효부에는 아무르 강이 있으니까? 하지만 한강 연등 축제는 정말 예쁘다고 들었어. 작년엔 태풍과 겹쳐서 취소돼서 올해는 그만큼 더 배를 멋지게 만들 거라고 하니까. 강을 보러 가는 게 아니라 연등을 보러 가는 거니까.”

수아가 구구절절 설명하는 게 꽤나 귀여워서, 나는 조금 웃었다. 수아는 채이경이 말 속에 심어놓은 칼날은 눈치채지도 못한다. 그게 수아의 장점이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자기 같은 줄 안다. 누군가가 태생적으로 누군가를 미워할 수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한다.

“아무르는 신성한 강이니까 그런 건 안 하지. 그래, 몇 시에 볼까?”

내 말에 수아는 웃으며 수첩을 펼쳤다.

 

약속 시간은 다섯 시였는데 네 시 반에 도착한 강변에는 벌써 수아가 나와 벤치에 앉아 있었다. 수아가 제복 아닌 옷을 입은 걸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저렇게 긴 머리카락을 평소에는 모자 안에 다 넣고 다니면 답답하지 않을까. 출신이 드러나지 않도록 고려해서 만들어진 제복은 실제로 입었을 때 효과적이긴 했다. 이름으로 드러나는 출신은 어쩔 수 없었지만. 이름만 들으면 남수아가 저런 머리색을 하고 있을 거라는 건 짐작하기 어렵긴 하다.

“머리, 풀었네 오늘.”

내 말에 수아가 눈을 크게 떴다가 아, 하고 얼굴을 붉혔다.

“기숙사에서는 풀고 있는데 넌 처음 봤겠구나. 나는, 아빠 닮아서.”

“아빠?”

“응, 아빠가 초명부 사람이야.”

별것 아닌 것처럼 흘려 말했지만, 별 게 아닌 건 아니었다. 내가 아는 남수아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완전 서울 촌... 아니, 온실 속 화초 같은 애였다. 그래서 당연히, 윗대에 북부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초명부는 북부 중에서는 서울에 가까운 편이었지만 그래도 국경을 맞닿아 있는 곳이고, 오래전부터 북부에서 뿌리를 내린 사람들이 살았다. 서울에 오기 전에도 배웠다. 북부 사람들이 어떤 풍습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외모를 가지고 있는지. 그래서 북부 사람이 살지 않는 경효부에서 태어나 자란 나도 알고 있었다. 어떤 북부 사람은 눈동자 색이 옅어서 꼭 강물 같기도, 하늘 같기도 하다고 했다. 어떤 북부 사람은 마치 눈이 내린 것 같은 머리카락을 갖고 있기도 하다고 했다.

남쪽에서 온 이들이 나라를 세웠다. 경효부와 같은 동쪽 사람들은 오래전에 남쪽에서 전쟁을 피해 와서 뿌리를 내린 사람들이니 남쪽과 이어져 있는 사람들이라 했다. 서쪽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하나의 나라를 세우려고 했지만, 땅이 거칠고 길이 험해서 하나로 이어지기 어려운 이들이었다. 남쪽 사람들이 나라를 세우고 서쪽 사람들을 위해 길을 닦고 병원을 짓고 학교를 세우면서 서서히 서쪽 사람들도 이 나라의 부분이 되었다. 북쪽 사람들과 서쪽 사람들은 오래전에 하나였던 적이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서로 교류는 끊어졌지만 이 나라가 서쪽 사람들에게 하는 것을 보고 북쪽 사람들도 이 나라의 부분이 되길 바랐다고 했다. 우리는 학교에서 이 나라의 시작을 그렇게 배웠다. 모든 사람이 어디서 왔든 이 나라의 사람들이므로 서로의 풍습을 옳다 그르다 말하면 안 된다고 배웠다. 그래, 책에는 한 나라가 된 뒤로는 북쪽과 서쪽과 동쪽이 서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다만 그게 남수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초명부에도 강이 없으니까 나는 한강보다 큰 강은 본 적이 없지. 서랑에게는 한강이 아주 작은 강처럼 보이겠지만.”

“초명부에 가 본 적 있어?”

“응, 명절 중에 꼭 한 번은 초명부에 가. 할아버지랑 부할머니가 나를 많이 보고싶어하시거든. 서울로 돌아올 때마다 매번 눈물을 글썽글썽하시는데, 울지 마시라고 하면 운 적 없다고 버럭하셔. 그러니까 매년 가려고 해.”

할아버지. 그 단어가 뭐였는지 기억을 더듬어봤다.

“아, 할아버지는, 아빠의 아버지를 말해. 부할머니는 아빠의 엄마. 우리끼리는 그냥 쓰는 말이라서 보통은 쓸 일 없는 말이라는 걸 자꾸 잊어버리네.”

나는 수아가 초명부의 산길을 걷는 걸 상상해봤다. 북쪽 국경과 바로 맞닿아 있는 부인데다가 큰 물도 없고 온통 산이라 농사를 짓기에도 과일을 키우기에도 좋지 않은 곳. 큰 물이 없다는 건 공장을 세우기에도 좋지 않다는 뜻이고, 온통 산이라는 건 길을 내기 어렵다는 뜻이다. 서울과 가깝다는 것 말고는 좋은 점이라고는 없다. 게다가 그 산들이 죄다 돌산이니, 옛날이라면 돌을 캐서 건물을 세우든 탑을 쌓든 했을지도 모르지만, 요즘에야 길 내기 어렵고 날씨 조절에도 도움이 안 되는 별 쓸 데 없는 산일 뿐이다. 명절마다 그 척박한 곳에 가서, ‘아버지’의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고. 그걸 정말 즐거웠던 일을 회상하는 표정으로 떠올리고 있는 남수아가, 갑자기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네가 초명부에 가면 어머니는, 그럼 그동안 뭘 하시는데?”

“어머니? 어머니도 같이 가셔. 당연히. 다른 명절에는 할머니 집에서 보내는 걸. 할머니가 처음에는 아빠가 오는 걸 불편해 하셨는데 지금은 좋아하셔. 아빠가 솜씨가 좋으셔서 명절마다 할머니가 좋아하는 걸 만들어 가시는데, 주변에 자랑을 얼마나 하시는지 몰라.”

“할머니는 남부 분이신 거지, 남 씨니까.”

“응, 그렇지.”

“아버지가 북부 분이면, 아버지는 할아버지 성을 받으신 거지?”

북부의 풍습은 배웠다. 아이는 아버지의 성씨를 받고, 아이들은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는다. 그걸 처음 배웠을 때는 깜짝 놀랐었지만, 여섯 부가 모인 우리의 나라는 어느 부의 풍습도 틀렸다고 하지 않는다는 걸 그보다 먼저 배웠다.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낯선 것뿐이니까, 이상하다는 표정을 해서는 안 된다.

“응, 그리고 나는 엄마 성. 나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가 조금 우셨대. 이렇게 예쁜 애한테 이름을 줄 수가 없다고. 하지만 아빠가 계속 설득했대. 두 분이 같이 사는 것부터가 서울에서는 드문 일인데 그것까지 바라면 안 된다고.”

그리고 아마도, 어머니의 성을 받아 남 씨로 자라는 게 수아에게 좋은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수아가 어머니의 일을 이어받기 위해서라도.

“영화 같다. 소설 같고.”

“조금 특이하긴 한데 지금은 괜찮아. 난 아빠랑 엄마 골고루 닮아서, 다 예뻐해 주시니까.”

고등학교 2년, 대학교 3년, 서울에서 보낸 5년 동안 수아 같은 경우를 만난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교복 차림으로 있으면 어디 출신인지 알기 쉽지 않은 학교 안에서, 사복 차림을 본 적 없는 아이들 대부분이 실제로 어디 출신인지 알 수는 없었다. 성씨로 짐작할 수 있는 남수아까지 이렇다면, 채이경 같은 애들이 어떤 풍습을 따라 살고 있는지는 다 알 수 없을 것이다.

 

“서울에 가서 많은 걸 겪어보고 와.”

어머니가 처음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로 가라고 권한 날이었다. 어머니는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를 전부 보여주면서 내게 고르게 했다. 비슷한 듯도 다른 듯도 한 고등학교 중에 뭐가 좋은지 알 수 없어서 그중에 대부분이 대학에 진학한다는 기숙학교를 고른 게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였다. 그리고 기대한 대로 함께 고등학교에 다녔던 애들은 모두 대학에 갔다. 그때 나는 그냥 잔소리가 많은 이모들을 안 만나도 된다는 게 좋아서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로 가라는 말에 신나서 고개를 끄덕이는 어린애였다. 중학교를 겨우 마쳐가는 열 다섯 살이 뭘 알았겠어.

“경효부에 있어도 요즘 세상에 못 겪을 게 뭐가 있다고 그래, 열다섯이면 아직 어린 나이인데 굳이 서울로 보내야겠어?”

막내 이모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막내 이모는 어머니의 일을 도왔는데 어머니 말로는 같이 일하는 사람 중에 가장 일을 야무지게 해서 자기 동생이지만 믿음직하다고 말하곤 했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 야무진 성격이 그대로 잔소리가 되는, 그렇게 편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수첩만 열면 이 나라 소식에 다른 나라 일까지 훤히 알 수 있는데, 뭐하러 가족들 없는 곳에 어린애를 보내.”

이모의 말 때문에 혹시라도 서울에 못 가게 될까 봐 걱정하는데, 어머니가 덧붙였다.

“수첩만 열면 언제든 연락 되는 곳인데 못 보낼 건 또 뭐 있어. 너도 서울에서 고등학교 나왔으면서 왜 그래.”

이모가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건 그때 알았다. 경효부 1대학을 나왔으니 당연히 평생 경효부에서 지낸 줄 알았던 이모였다. 유독 경효부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기도 했다.

“괜히 옅은 애들이랑 얽혀서 좋을 게 뭐가 있어. 내가 서울에서 얼마나 힘들었는데. 서랑이가 이상한 애들이랑 얽힐까 봐 걱정돼서 그러지.”

“경미율!”

어머니가 정색하며 이모를 노려봐서 오히려 이모의 흘리듯 말한 단어가 더 귀에 꽂혔다. 옅은 애들. 북쪽 서쪽 사람들을 부르는 나쁜 말. 이모가 평생 그 말을 입에 담은 걸 들은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만, 나는 우리 가족 중에 누군가가 그 말을 했다는 걸, 결코 잊을 수 없을 거였다. 경 씨는 경효부의 기둥이자 중심, 이 나라의 여섯 부 중에서 동쪽의 중심. 강과 바다와 대륙이 만나는 축복의 땅. 그렇게 좋은 땅에서 태어나 자라서 그 땅을 책임질 부장의 역할을 맡을 경 씨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이 나라의 이상에 공감하는 바른 눈을 갖고 자라야 한다고 했다. 어머니는, 이모할머니는, 거기에 누구보다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어머니와 함께 일을 하는 막내 이모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걸, 나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아마 막내이모는 바로 이런 상황을 걱정했던 것일까. 남씨 성의 아이와 친해져서 이렇게 한강축제를 보러 왔는데 사실 그 아이는 북부 사람과 남부 사람 사이에서 태어났다거나 하는.

“아, 노을 진다.”

수아의 말에 나는 수아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봤다. 강이 흘러가는 먼 끝에 노을이 걸리기 시작했다. 저쪽이 서쪽이구나. 경효부는 그 반대편에 있다. 한강은 동쪽에서 시작해서 서쪽 바다로 먼 길을 가고, 한강의 시작에서 더 거슬러 동쪽으로 가면 경효부가 있다. 이 강의 세 배는 되는 넓은 아무르강이 동쪽 바다로 흘러가는 땅이.

“그럼 아버지는 초 씨 성을 쓰시는 거야?”

“응? 아니, 아, 아빠가 초명부 사람이래서 그러는구나. 아냐, 아빠는 서울에 일하러 오셨다가 어머니를 만나신 거야. 어머니는 역 사무실에서 일하시는데, 역 사무실에는 부 사무실보다 북부 서부 사람이 많거든.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러다가 서로 친해지셨대. 어머니는 서울에서 태어나서 줄곧 서울 밖으로 안 나가봐서, 북부 출신 사람들에게 실수하면 안 되니까 아빠한테 이것저것 많이 의논하고 그랬대. 그러다가 어머니가 아빠한테, 우리 북부 풍습처럼 같이 살래요, 했대.”

수아는 즐거운 듯 조잘거리며 어머니와 아빠 이야기를 들려줬다. 즐겁게 이야기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 남씨 성의 사람과 북부의, 고장의 성씨를 받지도 못한 사람이 북부 풍습처럼 같이 산다는 게. 남부 동부 사람 중에는 평생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도 있고 평생 언니나 어머니와 함께 사는 사람도 있고 한 사람과 여러 아이를 갖는 사람도 있지만, 아이의 아빠와 함께 사는 사람은 없으니까. 어머니의 아이들로 연결된 가정 안에 아빠의 자리는 없는 게 당연하다고 그렇게 자라온 사람들이니까. 나 역시도, 아빠가 누군지 신경 써 본 적이 없다. 그저 나와 동생들의 생김새를 보며 내 아빠는 둘째의 아빠보다 키가 컸나보다, 셋째의 아빠는 운동을 잘하는 사람이었나보다 생각할 때가 있긴 했지만.

“그리고 행복한 결말?”

“으응 아니. 그리고 아빠가 도망쳤어.”

수아가 깔깔 웃었다.

“어머니가 휴가 내고 북부로 갔대. 아빠랑 친하던 북부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주소를 알았는데 너도 알겠지만 초명부가 길이 험하잖아. 어머니가 아빠 집에 가는 데 꼬박 이틀이 걸렸는데 부할머니가 보시고는 깜짝 놀라서, 어머니가 쓰고 간 모자도 벗겨져서, 웬 남부 사람이 여기 왔냐고 우리 애가 무슨 죄를 지은 거냐고 물으셨대. 그리고 그대로 휴가 내내 거기서 머무셨다지. 할아버지가 만들어주신 국이 그렇게 맛있었다고 지금도 말씀하셔. 서울에 있는 북부 음식점 중에 절반은 다 문 닫아야 한다고 그러실 정도로 할아버지가 요리를 잘 하시거든.”

수아의 어머니는 그때 스물 일곱이었다고 한다. 갓 대학을 나와서 일을 시작한 나이도 아니고 역 사무실에서도 꽤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이 갑자기 휴가를 내고 북부로 갔다는 사실은 역 사무실에 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금방 퍼졌다. 내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수아의 어머니가 혼자 돌아올지, ‘아이 아빠’를 데리고 올지. 그때 수아는 아직 없었지만. 역 부장을 맡고 있던 수아의 할머니는 며칠 단식을 하면서 두 사람을 반대했지만 그 반대 이유라는 것이 참 바깥으로 말하기는 애매한 것이기도 했다. 여섯 부의 모든 풍습이 옳고 그른 것이 없다고 항상 강조하던 남씨 집안에서 자기 자식이 북부의 풍습을 따르게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공공연하게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아가 태어날 때까지 수아의 어머니는 결국 계속 수아의 할머니 집에서 살았다. 아이가 태어난 뒤에 아이 이름은 남씨 성으로 짓겠다고 한 뒤에야 할머니는 수아의 어머니가 새로 가정을 이루는 걸 허락했다. 알고 보니 서울에서는 드물지만 가끔은 일어나는 일이라고 했다. 아이의 엄마 아빠가 모두 북부 사람인 경우 외에도. 그중에는 아이에게 아빠 성을 붙이는 일도 있다고 했다. 나는 고등학교 때 만났던 북부 성씨의 친구 중에 어쩌면 어머니가 북부 사람이 아닌 경우도 있었겠구나 새삼 생각했다.

그 순간 문득, 채이경의 얼굴이 떠올랐다. 여섯 부 중에 어느 부의 이름도 따르지 않은 성. 북부와 서부에 많은 성. 채이경은 북부 풍습대로 아빠와 엄마가 함께 살고 있을까. 어쩌면 남쪽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처럼 엄마와 살면서 할머니와 가깝게 지내고 있을까. 남의 가정에 관심을 가지는 건 적절하지 못한 일이라고 배워서 한 번도 궁금하게 여긴 적이 없는데.

완전히 해가 저물고 강물 위에 떠 있던 배에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배 위에 여러 가지 모양을 내 만든 커다란 등이 불이 밝히며 한강 위로 용이, 새가, 서울탑이, 초대 여섯 성씨의 우두머리들이, 빛을 내며 일렁였다. 이 축제를 준비하면서 길게는 몇 달, 짧게는 몇 주를 연등 지붕을 만드는 데 시간을 들였다고 했다.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가 꼭 강물이 흐르는 박자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아무르 강은 이것보다 많이 크지?”

남수아가 말했다. 나는 연등의 일렁이는 불빛에 흔들리는 남수아의 얼굴을 보면서 아무르강을 떠올렸다.

“봄에 아무르 강을 따라 동쪽 바다로 가면, 북쪽에서 겨울에 얼었다가 떨어져나온 빙하 조각이 바다로 흘러내려와. 그걸 보고 있으면 아무르강이 넓다는 생각이 안 들어. 바다가 그만큼 넓고, 끝없고, 비현실적이라.”

“가 본 적 있어?”

“경 씨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자주 가. 남쪽 땅에서 전쟁을 피해서 경효부로 올 때, 그 바다로 왔다고. 우리 뿌리를 알아야 한다고.”

서랑아, 저기가 우리를 살게 한 바다란다. 우리는 다 저기서 왔다. 서울보다 더 남쪽에서, 신성한 이곳으로 오게 해 준 게 저 바다다. 잊어서는 안 된다. 너는 경효부의 기둥이 되어야 한다. 경 씨 사람들은 그래야 하는 법이다. 할머니가 이모할머니가 이모가 계속해서 들려줬던 이야기였다. 내게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여서 서울에서 만난 친구들에겐 이야기 해 본 적이 없다. 동부에서 온 친구들에겐 너무 익숙한 이야기여서 말할 필요가 없었고 북부나 서부에서 온 친구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말하지 않았다.

수아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강 너머의 북쪽을 가리켰다.

“북쪽 국경을 넘으면 할아버지랑 부할머니랑 어렸을 때 지내던 나라가 있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바위산을 넘어서 처음 사람이 살만한 땅을 만난 게 초명부였대. 초명부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대. 부할머니도 그렇게 온 사람이라고 했어. 그래서 서울에서는 초명부가 북쪽이어도, 두 분에게는 남쪽이라고 그러셨어.”

수아는 수첩을 펼쳐서 지도를 열었다. 북쪽 더 북쪽으로 지도를 옮기자 국경을 넘어서 넓은 사막으로 표시된 곳이 보였다. 지도에는 예전에 고리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안내가 붙어 있었다. 오래전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계속 꺼지지 않고 타오르더니 모든 것을 삼켜 모래만 남게 되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뿔뿔이 다른 지역으로 흩어졌다. 그중에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은 초명부에 터를 잡았고,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얼음으로 가득한 바다를 헤치며 살아가는 지금의 밀국 사람들이 되었다. 오래전, 우리나라가 세워지기도 전의 일이었다.

“남쪽 나라에 가 본 적 있니?”

수아가 물었다. 나는 수아의 수첩이 남쪽 국경을 표시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남쪽에는 ‘기국’이 있지만 우리는 그 나라 이름을 잘 말하지 않는다. 경효부 사람들의 사람들이 살던 곳. 기국은 원래 세 개의 나라였다. 기국이 강해지며 경효부 사람들을 억압하고, 그들의 왕을 섬기라고 강요해서 경효부 사람들이 바다로 떠나왔다고 했다. 그들은 경효부의 풍습을 틀렸다고 했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법도에 맞지 않은 방식으로 살아간다고, 마땅히 고치고 참회해야 한다고 했다. 거기 순응한 사람들이 기국에 남았고, 굴복하지 않은 이들은 떠나와 경효부를 닦았다. 그 뒤로 다시 기국에서 산을 넘어 떠나온 이들이 지금의 남쪽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릴 때부터 배운다. 여섯 부의 풍습 어느 것도 틀린 것이 아니라고, 우리는 여섯이 다르지만 여섯이 모여 하나의 나라를 만들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그걸 잊어버리면 우리는 결국 좁은 땅에서 뜻이 다른 이들을 쫓아내고 억압하는 저 기국 사람들과 같아지고 만다고.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저 기국 사람들까지도 다른 이들로 존중해야 한다고 배운다.

“거긴 겨울에도 눈이 안 내린대.”

고개를 젓는 내게 수아가 말했다.

“알아, 그래서 눈 보고 싶다고 우리나라에 오는 사람들이 있잖아. 통행 허가 없이 머물 수 있게 해 달라고 정부 사람들이 계속 교섭을 하려는 모양이던데. 그렇게 되면 기국에서도 우리 나라 사람들을 통행 허가 없이 머물게 하겠다고.”

“나는 궁금하더라. 남쪽 과일이 맛있대.”

“난 별로 안 궁금해. 작년에 그 나라 왕이 우리나라 보고 기국의 아들과 같은 나라라고 했던 거 기억나지? 끔찍해. 그 나라가 싫어서 온 사람들이 여기 얼마나 많은데.”

내 말에 수아는 조금 풀이 죽었다. 나는 강변의 가로등 불빛과 강 위의 연등 불빛이 비치는 수아의 밝은 머리카락을 보았다. 수아는 이런 이야기를 하러 나를 부른 것일까. 제 아빠의 뿌리 이야기를 들려주고, 기국에 가 보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대학에 들어와서 3년 동안 같은 공부를 하는 수아를 계속 봐 왔다. 남씨 성을 받았으니 아마도 서울의 어딘가의 역장이 될지도 모르는 아이. 남부 사람일테니 동부와 같은 풍습을 따를 아이. 그래서 남수아를 계속 봤을지도 모른다. 남들보다 하얀 얼굴은 운동을 별로 안 좋아해서 그런 거라 생각했다. 서쪽 친구들에게도, 채이경 같은 애들에게도 다정하고 친절한 남수아. 경효부의 아이들만큼은 아니었어도 학교 친구들도 내 이름을 들으면 조금은 태도가 달라지고 거리를 두곤 했는데 남수아는 아니었다. 수아는 내게 아무르강을, 동부의 넓은 초원을, 가 본 적 있는지 맑은 눈으로 물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야트막한 산 하나 보이지 않는 초원의 풍경은 어떤 거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수아와 함께 경효부에서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꿈꾸었다. 그런데 수아는, 똑같이 맑은 눈으로 지금 남쪽의 과일이 맛있다는 말을 한다. 내가 설렜던 그 모든 것이 수아에게는 특별하지 않았던 듯이.

“나는, 졸업하면 경효부로 돌아갈 거야.”

수아가 눈을 동그랗게 떠서 나를 보았다. 다들 당연하게, 나는 그럴 거라고 믿고 있는데, 수아는 상상도 못했다는 듯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동생이 있대서, 여럿 있대서, 너는 안 돌아가는 줄 알았어. 그래서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줄 알았어.”

“넓은 세상을 보고 많이 경험하고 돌아오라고, 그거 흔한 일이야, 수아야. 작년에 졸업한 민기연 선배도 민수부로 돌아갔지. 지금 부 사무소에서 일하고, 언젠가 부장이 될 거야. 젊은 세대들은 달라야 한다고, 지금 어머니들은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아.”

그래서 친구들은 내 이름을 들으면 너무 친해지지 않으려고, 너무 소원해지지 않으려고 거리를 뒀다. 경효부와 자기 집이 사이가 나빠져도 안 되지만, 언젠가 돌아갈 사람과 너무 가까워져도 힘든 건 마찬가지여서. 나는 남수아가 그러지 않아서 기뻤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대해 줘서 좋았다. 그리고 지금은, 남수아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나를 보는 것이 아프다. 서울에서 계속 만나고 가끔은 함께 일을 하게 되기도 하고 가끔은 우연처럼 길에서, 식당에서, 공연장에서, 마주칠 수 있는 사이인 것처럼 나를 봐서. 내게는 그런 선택지가 없는데.

“오늘 불러줘서 고마웠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앉아있는 수아를 내려다보았다.

“서랑아.”

수아가 나를 보았다. 수아의 눈동자색이 남들보다 옅다는 걸 나는 이제야 눈치챈다. 보고도 보지 못했던 것들이 넘쳐난다.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해서 내가 말하지 않았던 것들처럼 .

“조심해서 들어가. 수아야. 내일 봐.”

“그래, 내일 봐.”

수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수아를 남겨두고 걸었다. 가을은 짧을 것이다. 겨울이 올 것이고, 그 겨울이 끝나면 나는 서울에 없다. 나는 수아와 함께 아무르 강을 보기를 꿈꿨지만, 수아는 나와 서울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우리는 다른 꿈을 꾸었고, 우리에게는 이제 한 번의 겨울밖에 남지 않았다.

“서랑아!”

수아가 등 뒤에서 나를 불러서 돌아보자 수아가 뒤에 서 있었다.

“나는 엄마를, 훨씬 더 많이 닮았어!”

수아가 말했다. 갑자기 무슨 말이냐고 되물으려는데 수아가, 일렁이는 눈으로 나를 봤다.

“그러니까, 경효부라도, 괜찮아!”

숨을 헐떡이며 수아가 말했다. 나는 한참 멍하니 있다가, 겨우 웃었다. 수아의 머리카락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빛났다.

 
댓글 1
  • 서계수 22.10.01 20:32 댓글

    이 소설 좋은데요? 갈원경 작가님은 짧은 글로도 항상 독자가 작품 속 세상을 궁금하게 만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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