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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원경 여름의 섬

2022.08.01 18:3308.01

 

여름의 섬

 

갈원경

 


‘아이’의 꿈은 눈을 보는 거였다. 아이의 세상에는 눈이 없었다. 아이의 옛 세상은 파랑이었고, 지금 세상은 율리우스 섬이었다.

 

아이의 엄마의 엄마가 아이의 엄마를 낳았을 때 세계는 아직 섬으로 나뉘기 전이었다. 단지 가끔, 30도조차 넘었던 적이 없던 지역에 40도의 여름이 찾아왔고, 한 번도 녹지 않던 눈으로 쌓인 곳에 갈색 풀밭이 드러났고, 태풍이 오지 않던 곳에 태풍이 올라왔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온난화’라는 이름으로 바뀐 날씨를 말했지만 추운 계절에 난방비가 아까워 담요를 둘둘 둘러쓰고 모여 앉아 겨울을 억지로 넘기느니 날씨가 점점 더 따뜻해지는 게 낫지 않냐는 사람들도 있을 만큼 그 사실에 무심했다. 전 지역에 전염병이 돌았다. 처음 병이 일어난 지역의 사람들과 그들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에게 무차별 폭행이 일어나는 뉴스가 드물지 않게 보였다. 사람들이 병원 복도에서 죽어가는 한편 전염병은 그저 감기일 뿐이고 제약회사가 백신을 팔기 위해 위험을 과장할 뿐이라는 동영상이 사람들 사이를 감기처럼 떠돌았다. 사람들은 식당에 모여서 밥을 먹는 대신 포장과 배달에 익숙해졌다. 재활용된다는 말로 일회용품은 사람들의 죄책감도 거두어갔다.

녹지 않던 얼음이 녹으면서 해안이 바다 밑에 잠겼다. 몇 개의 나라는 아예 땅을 잃었다. 낮은 땅으로 이어졌던 나라들이 바다로 갈렸다. 그 일은 모두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일어났다. 바닷가에 지은 고층 건물이 비싼 주거지였던 시대는 지나고 사람들은 위로, 산으로 올라갔다. 가난한 나라는 무한 같던 숲을 베어 팔았다. 수만 년을 이어온 나무는 이색 실내장식 아이템으로 비싼 값에 팔렸다.

아이의 엄마는 나라가 없어지던 시대의 한복판을 살았고, 아이가 태어났을 때 엄마는 한없이 여름이 계속되는 율리우스 섬에 살고 있었다. 가끔 태풍이 찾아왔고 돌풍이 불었지만, 비가 지나가면 새파란 하늘이 펼쳐졌고 춥지 않았으므로 나무를 베지 않아도 됐다. 아이의 엄마의 엄마가 살던 시대에 넘치게 만들어낸 물건들은 썩지도 녹슬지도 않아서 율리우스 섬의 집은 모두 그 시절의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예전 뭍이던 바다에는 그런 것들이 여전히 물속에서 썩지도 녹슬지도 않은 채 남아 있었다. 바다에 사는 것들은 무엇도 먹을 수 없게 된 지 오래였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이미 세계는 여섯 대륙 대신 수많은 섬으로 쪼개져 있었다. 어떻게 율리우스 섬이 지금처럼 파랑 섬의 사람들이 일하는 곳이 되었는지 아이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수많은 섬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일부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영원히 지속시킬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고, 그 시스템을 유지하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이들은 섬에서 떠났다. 가끔 적당히 비가 내렸지만, 폭우가 내리지는 않았고 선선한 바람이 불었지만, 돌풍이 이는 법은 없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지붕이 끝없이 쾌적한 날씨를 유지했다.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도 사람들이 필요했지만,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가까운 파랑 섬에는 일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넘쳐났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파랑 섬에서 스무 살을 맞았고 스물한 살부터 율리우스에서 일했다.

 

아이가 일하는 곳은 일곱 군데였다. 오늘 들러야 하는 곳은 셋, 아침에 숙소에서 일어나면 제일 먼저 출근하는 A의 집으로 향했다. A는 시스템 소프트웨어 개발자라고 했지만, 얼굴은 알지 못했다. 메시지가 가끔 오갔을 뿐 A의 집에는 얼굴이 들어간 사진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침실의 시트를 모두 교체하고 걷은 시트는 가져온 세탁함에 넣었다.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원래 있어야 하는 자리에 돌려놓는 동안 아이가 가져온 청소기는 바닥을 바쁘게 돌아다니며 먼지를 빨아들이고 걸레질을 했다. 오늘은 소파 시트를 교체할 날이 아니었으므로 거실 청소는 조금 쉬웠다. 프로젝터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공기 필터는 교체하지 않아도 되는지 점검하고 눌린 쿠션을 부풀려 제자리에 두었다. 서재 책상 위에 흐트러진 것들을 원래 위치로 되돌려두고 테라스 테이블 위에 컵과 포트와 접시를 세척기에 넣고 현관에 벗어둔 옷들을 세탁기에 넣을 것과 외부 세탁을 해 올 것으로 나누어 세탁기를 돌렸다. 모든 집에는 청소 기준 사진이 있어서 그 사진의 상태로 복원해 두는 것이 아이의 일이었는데, 오랫동안 관리한 집은 거의 목표 상태가 머릿속에 들어 있곤 해서 사진을 확인할 일은 별로 없었다. 세척기와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아이는 A가 미리 주문한 퇴근 후 먹을 음식을 요리했다. 상용화된 로봇 중에는 지금 아이가 하는 일들을 모두 해낼 수 있는 것도 있었지만 아이의 회사에 의뢰하는 사람들은 그런 로봇을 구매하는 비용을 쓰는 걸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로봇을 구입하는 것은 물론이고 임대하는 비용조차 아이가 일하는 회사에서 물리는 비용보다 비쌌으므로.

A가 자주 주문하는 안주를 다 만들었을 때 세척기와 세탁기가 거의 동시에 완료 음을 울렸다. 아이는 보송하게 건조된 그릇을 정해진 위치에 되돌려두고 세탁기가 건조를 마친 옷을 잘 다려 옷걸이에 걸었다. 어떤 회사는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의류 관리기가 비치되어야만 하는 것도 있었지만, 아이의 회사는 그보다 비용이 조금 더 들어도 직접 다리미질을 하고 세탁물을 분류하는 것까지 해 주었기 때문에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두 번째 집은 드물게도 두 사람이 함께 사는 집이었지만 아이에게는 집에 두 사람이 살든 세 사람이 살든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으므로 아이는 그 둘을 모두 B라 불렀다. 굳이 보려고 하지 않아도 사람이 나간 뒤의 집에서는 항상 전날의 흔적이 남아 있기 마련이었다. B 중 한 명은 식탁에서, 한 명은 소파 테이블에서 저녁을 먹었다. 둘이 주문하는 음식도 매번 달랐다. 그러나 B들은 술만큼은 달콤한 과일 향이 풍기는 같은 술을 주문했다. 차갑게 식혀서 얼음을 띄워 마시는 달콤한 술이 떨어질 때가 되면 늘 새 병을 주문하곤 했는데, 술 냄새가 아직 옅게 남은 술잔도 하나는 소파 위에 하나는 식탁 위에 놓여 있곤 했다. 크리스탈 술잔에 물 자국이 남지 않게 깨끗하게 닦아 넣어두면 다음 날이면 매번 똑같은 자리에 나와 있곤 했는데 둘 중 누구도 술잔을 미리 그 자리에 두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천연섬유로 만든 옅은 연두색 시트와, 푸른 빛이 돌 정도로 새하얀 시트를 주문하는 두 사람의 시트를 제대로 갈아 끼우고, 둘이 주문한 음식을 1인분씩 나눠 세팅해 둔다. 바닥에는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과자 봉지가 있을 때도 있고 지난 밤에 먹은 칩 부스러기가 떨어져 있기도 했지만, B는 컴플레인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편한 집이었다.

세 번째 집인 C의 집은 책 정리가 가장 힘든 곳이었다. 관리도 까다롭고 이제 그렇게 많이 생산하지도 않는 종이책이 서재에 세 벽을 모두 채우고 있었는데, 아이가 가는 날마다 무슨 책을 그렇게 많이 읽었는지 책상 위에 펼쳐지거나 엎어져 있는 책들이 열 권은 되었다. 책을 전자 DB로 만들어주는 서비스도 있고 그편이 검색하기에도 훨씬 편할 텐데 매일 서로 다른 책 열 권 남짓을 뒤져서 읽고는 그대로 두는 심리를 아이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B의 색다른 취향 때문에 아이는 오래전에 사라진 책을 정리하면서 조금씩 B의 소장품을 읽어볼 수 있었다. 세상이 아직 여섯 개의 대륙으로 불리던 시절의 이야기도, 다른 지역을 방문하는 ‘여행’이 인기 있는 취미였던 시절의 이야기도, 그리고 전염병으로 집 밖을 나가기 어려웠던 몇 번의 시기의 이야기도 아이에게는 흥미진진한 과거 이야기였다.

C는 율리우스 섬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이었다. 원래라면 아이가 방문자의 직업을 알 일은 없었지만, B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출근 후 빈 집의 모습으로 소리쳐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책상에 놓인 노트(!)에는 대학 마크가 새겨져 있고 때로는 자신의 서재에 속하지 않은, 대학 마크가 붙은 책이 쌓여 있기도 했다. 그가 쓰는 볼펜과 연필은 대학의 물건이었다. 책장에 대학 마크가 새겨진 감사패가 장식되어 있기도 했다. 몇십 년 전의 풍습이었다. 얼마나 오래전의 것인지 알기 어려운 단체 사진도 있었는데, 눈 덮인 산을 배경으로 하는 걸 보면 적어도 이 섬사람들이 외부로 나가지 않게 되기 전의 것일 터였다.

집에 돌아오기 전에 저녁 식사까지 마치고 돌아오는 C의 집은 정리할 것이 조금 많고 복잡하긴 해도 음식을 준비할 필요가 없어서 그만큼 수월한 부분도 있었다. 책이든 옷이든 사람 중에는 자신이 물건을 찾을 때 항상 정확한 특정 위치에 있기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그것만 주의해서 정리해 두면 되었다. 책 위에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솔로 털어내는 것과 특정 선반의 하드커버의 순서를 월요일마다 한 권씩 위아래를 바꿔서 가로로 넣어 두는 것이 C가 특별 옵션으로 주문한 내용이었다. 그 선반의 책은 아이가 보기에도 오랜 세월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이어서, 한 권씩 조심스럽게 다 빼낸 뒤에 책장 바닥을 마른 수건으로 닦고 한 권씩 순서대로 제일 아래로 오도록 순서를 옮겼다.

막 로봇과 함께 C의 집을 나가려던 때, 갑자기 집 문이 열렸다. C가 돌아오려면 아직 두 시간은 남아 있었는데, 아이는 놀라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근무 중 지침은 어긴 게 없다. 마스크와 안경도 썼고 유니폼도 입고 있다. 로봇도 외부 통행 모드가 아닌 실내 모드로 변경되어 있어서 바닥을 상하게 할 염려도 없다.

“아 미안해요, 예정보다 조금 빨리 돌아오게 돼서. 역시 아직 근무 중이었군요.”

아이는 조금 물러섰다. 매뉴얼에 따르면 사용자와 마주치지 않고 시간 내에 업무를 마치고 집을 비워야 했다. 오래전 옛 동화에 나오는 우렁각시나 난쟁이들처럼. 그러지 못하고 마주쳤을 때는 사과하고 최대한 빠르게 집을 나와야 했다. 하지만 아직 이 집에서 나가야 하는 시간까지 30분 이상 남아 있는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매뉴얼에 없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나는 바로 서재에 들어갈 테니 신경 쓰지 말아요.”

그렇게 말하던 C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아이를 가만히 응시했다. 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C의 시선을 피했다.

“…혹시 괜찮으면, 음, 30분 정도 시간이 있는데, 잠깐 같이 있어 주지 않겠어요? 아, 이건 규정 위반입니까?”

“위반되는 규정은 없습니다.”

아이가 말했다. C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부드럽게 웃었다.

“서재를 소개해 줄게요. 일하는 집 중에서도 좀 특이한 곳이죠?”

아이는 C의 뒤를 따라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이 방금 정리해 둔 공간을 C가 웃으며 훑어보았다. 관리자는 가끔 로봇이 촬영한 작업 결과 영상을 아이의 앞에서 돌려보곤 했다. 컴플레인이 있을 때는 의무적으로 가져야 하는 시간이었고, 컴플레인이 없더라도 불시에 점검처럼 하는 일이었다. 그때처럼 긴장되는 순간이었지만 C는 그렇게 꼼꼼하게 사방을 살피는 것 같지는 않았다. C가 돌아보았다.

“작업하면서 궁금한 건 없었어요? 당신 나이에는 종이책을 보는 것도 낯설 것 같은데.”

낯설지는 않았다. 세상에는 언제나 레트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 번도 꺼내 본 적 없는 책 위에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쓸어 달라고 요청하는 집도 있다. 언젠가 청소 때문에 꺼냈다가 펼쳐진 책이 온통 백지였던 것도 본 적이 있었다. 세상에는 책이 꽂혀있는 모습만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책이 많은 것만으로 이상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왜 저 칸의 책은 눕혀 두나요?”

아이가 매주 순서를 바꿔서 가로로 쌓아두는 칸을 가리켰다. C가 책장을 보고 조금 웃었다.

“저기 있는 책들은 표지가 안쪽 종이보다 5밀리씩 더 크게 되어 있어요. 두께도 두꺼운 책들인데, 실제본으로 되어 있고. 아, 이건 좀 알아듣기 어렵겠군요. 어쨌든, 오래 세로로 꽂아 두면 안쪽 종이 부분이 무게 때문에 늘어져서, 결국 묶은 부분이 뜯어질 수 있어요. 그래서. 그런데 크기가 같은 책들이라도 아무래도 가장 아래에 있는 책은 계속 무게를 받으니까. 이제는 안 나오는 책이니까 가능하면 처음 모습에 제일 가깝게 유지하고 싶어서.”

“월요일이 순서를 바꾸는 날이어서, 오늘 바꿔 뒀어요.”

“봤어요. 당신은 정말 일을 잘해 주더군요. 업체에 맡긴지 몇 년이 됐는데 요즘이 가장 만족스러워요. 당신이 일한 게 육 개월 정도 됐지요?”

“육 개월하고 2주 됐습니다.”

C가 또 웃었다. C는 아이의 눈을 계속 쳐다보면서 의자를 가져와 아이 옆에 두었다.

“잠시라도 앉아요. 일하는 동안 못 앉아서 피곤했을 텐데.”

“괜찮습니다.”

“내가 불편해서 그래요.”

C의 말에 아이는 의자에 앉았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당신은 내가 오래전에 잃어버린 사람을 닮았어요.”

아이가 C를 올려다보았다. C도 책상 앞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럴 리가 없는 건 알고 있어요. 그 사람은, 이 세상에 없으니까. 하지만 아마 살아 있었다면 당신 정도의 나이가 되었을 거라서. 어쩐지 반가운 마음이 들어서. 옛날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 옛날식으로 생각하는 거겠지요. 내 손으로 동의 서명을 했는데.”

C의 말을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아이는 C를 묵묵히 쳐다보았다. 언제나 책을 뒤지고, 때로는 책의 내용을 종이에 옮겨 적고, 아이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을 것 같은 책을 이렇게 많이 가지고 있는 이상한 사람이라 말하는 것도 알아듣기 어려운지 몰랐다. 애초에 아이는 이 섬의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눌 일이 없었다. 아이는 율리우스의 부속품이고 C는 이 섬의 주민이다. 대화를 나눌 일 같은 건 없다.

침묵이 흐르고 있을 때 종료 소요 시간을 알리는 소리가 울렸다. 아이는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고마워요, 계속 잘 부탁해요.”

C도 일어났다. C의 얼굴은 어쩐지 지쳐 보였다.

 

그 뒤 일주일간 C를 다시 만날 일은 없었다. 매일 다른 집을 세 곳에서 네 곳을 방문해 사전에 요청받은 일을 해 두고 집을 나온다. 변함없는 일정을 마치고 아이는 자신의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숙소에 일어나 단말기를 열자 오늘 해야 할 일정이 죽 들어 있었다. 그중에 C의 집에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요청이 들어와 있었다. 늘 하던 일에 대한 소요 시간 세 시간, 그리고 말 상대 한 시간. 노인이 사는 가정 중에 가끔 아이와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오래 일을 해 온 사람들 중에는 노인이 끝없이 늘어놓는 자신의 삶 이야기를 들어주는 걸로 근무 시간을 인정받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요청을 아이는 한 번도 받아본 적 없었다. 관리자가 보낸 메시지가 추가로 들어와 있었다.

< 사용인의 이야기는 하지 않아도 됩니다. 부적절한 요청이 있을 경우 동행하는 로봇을 통해 업무 기피 요청을 하면 곧 이쪽에서 적절한 대응을 하겠습니다. >

부적절한 요청. 업무 이외의 개인적인 만남을 요청하거나, 피부와 피부의 접촉을 요청하는 것. 일방적인 접촉 포함. 노인 개호 업무 매뉴얼에서 본 적 있는 말을 기억에서 떠올렸다. 아이는 좀 더 경력이 쌓이면 노인 개호 업무를 받을 예정이었지만 벌써 사용인과 만날 일이 있을 줄은 몰랐다.

C가 요청한 시간이 길었으므로 아이는 오늘 B의 집을 마치고 곧바로 C의 집으로 향했다. C는 아이가 청소와 정리 정돈을 마칠 시간이 되자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는 관리자의 지시대로 준비해 간 차를 C의 잔과 자신이 가져간 잔에 각각 따랐다. 따뜻한 김이 올라왔다. C는 웃으면서 찻잔을 받아들었다.

“차가 맛있네요. 오랜만이에요. 다음부터는 이 차도 부탁해도 될까요?”

“요청하시면 언제든 가능합니다.”

아이의 말에 C가 웃었다.

”방문하는 집 중에 아이가 있는 집이 있나요? 흔적 같은 걸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제가 가는 집 중에는 없습니다.“

말하고 나서야 이게 다른 시민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보이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이십 몇 년 전에, 아이를 낳은 적이 있어요. 얼굴은 딱 한 번 봤지만. 알아요? 여기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모두 기본 검사를 받아야 해요.“

”들은 적 있습니다. 율리우스의 시민이 낳은 아이들의 경우지요.“

율리우스의 시민으로서의 자격 검사라고 했다. 갓난아이들의 검사는 율리우스의 두뇌들이 만들어낸 종합 검사 체제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중에 평균적으로 20%의 아이들이 불합격 판정을 받는다. 이런 아이들은 부모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부모의 동의를 거친 후 그 아기들은 밖으로 보내진다.

시민이 아닌 이들이 아이를 낳는 경우는 다르다. 그런 아이들은 검사받을 필요가 없다. 애초에 그런 아이들이 율리우스에서 태어나는 경우도 매우 드물지만, 그들은 율리우스의 시민이 될 자격이 없으므로 그 부모가 속한 섬에서 기른다. 그들이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 율리우스에서 일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없을지도 알 수 없다.

”내 아이는, 밖으로 보내졌어요.“

아이는 알고 있다. 이건 우회적인 표현이다. 율리우스의 밖, 세계의 밖, 생명의 밖. 아이는 침묵하고 C는 웃는 듯 아닌 듯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아이를 보았다.

”이름을 물어도 되나요?“

”원래 이름이 너무 거창해서, 줄여서 ‘아이’라고 불러요.“

”아이……, 아이스타스(Aestas)?“

아이가 놀라 C를 보았다.

”좋은 이름이네요. 아주 오래전에 사라진 나라의 말로 ‘여름’이라는 뜻이에요. 당신의 부모님은 당신이 율리우스에서 일하길 바라셨나 봐요. 율리우스는, 그 나라의 말로 ‘7월’이라는 뜻이거든요. 영원한 여름의 섬에 어울리는 이름이죠. 태풍도 폭풍도 오지 않고 찜통더위도 없이 한없이 푸르르고 맑은 여름의 섬.“

아이는 아는 사람은 모두 길고 복잡하다고 줄여서 부르던 이름의 온전한 형태를 타인의 입에서 처음 들었다.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나라의 말로 ‘아이’는 사랑이라고 했다. 또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다른 나라의 말로 ‘아이’는 성인이 되기 전의 사람을 부르는 말이라고 했다. 아이는 자신의 이름에 관한 말들을 모두 기억했다. 그리고 애써, 길고 복잡한 이름을 묻어두었다. 여름이라니. 파랑에서 자라 율리우스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부속품으로 살아갈 이에게 여름이라는 이름은 과하다고 생각했으므로.

”저는 시설에서 자라서……, 이름 말고는 아는 게 없어요. 파랑 섬에는 부모와 함께 사는 집이 율리우스처럼 많지 않아요. 아이스타스라고 적힌 쪽지를 쥐고 있어서 그게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인가보다 생각했죠. 그래도 저는 운이 좋았죠. 일을 빨리 배웠고, 잘 잊어버리지 않았어요. 가사 보조자나 개호 담당자로 적합한 재능이라고 판정을 받아서 율리우스에서 일하게 됐으니까 어쩌면 이름을 이룬 셈이네요.“

아이는 처음으로 길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관리자에게도 말한 적 없는 이야기였다. 파랑 섬을 떠나 율리우스에 왔을 때 이미 자신이 파랑 섬의 14호 시설 출신으로 적성검사에 통과해 율리우스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건 관리자가 알고 있었다. 숙소에서 함께 근무하는 이들은 파랑 섬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지만 나이도 제각각이고 근무시간도 제각각이어서 함께 이야기 할 시간도 거의 없는 데다가, 다들 엇비슷한 서로의 과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이유도 없었다.

”파랑 섬은 어떤 곳인가요?“

C가 물었다. 파랑 섬이 어떤 곳이라고 하면 좋을까. 율리우스에서 배출되는 쓰레기를 재활용해서 물건을 만들어 쓰는 곳. 율리우스가 버린 가방이 다져져서 침대가 되고 집이 되고, 율리우스가 버린 옷을 뜯어서 새로 기워서 옷을 만드는 곳. 재활용할 수 없는 쓰레기들은 다지고 다져서 묻고 쌓아서 쓰레기 산이 점점 늘어나기만 하는 곳. 언젠가 파랑 섬이 쓰레기로 가득 차게 된다면 파랑 섬의 사람들은 쓰레기 섬을 두고 떠나야 할 것이다. 율리우스 섬처럼 사람들을 끝없이 필요로 하는 섬의 근처에, 살 수 있는 섬을 찾아서. 그게 아이가 더 이상 율리우스에서 일할 수 없는 몸이 되어서 돌아가야 하는 날까지는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율리우스가 먹여 살리는 섬이지요. 알고 계시겠지만.“

”그 반대가 아니라?“

C가 웃었다. 아이는 C를 보았다. 농담인지, 아이를 도발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파랑 섬에서 온 사람이 절대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말, 율리우스 섬에게 파랑 섬이 필요하다는 말을, 율리우스의 주민이 입에 올리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예전에 내가 살던 곳에는, 계절이 계속 바뀌어서 사람들은 계절에 맞춰서 옷을 바꿔 입었죠. 한여름에는 돌풍이 왔어요.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서 유리창이 깨질까 봐 마음을 졸였죠. 겨울에는 물이 꽁꽁 얼어서 물이 나오지 않았어요. 나는 가을을 좋아했어요. 여름이 지나고 겨울이 오기 전까지의 아주 짧은 기간이었죠. 일부러 밖을 걸어 다녔어요. 매일 오늘 날씨를 확인하고, 비가 올까 오지 않을까 두근거렸어요.“

”……예전에 배운 적 있어요. 그런 ‘나라’가 있었다고. 지구가 여섯 개의 대륙이었을 때.“

”서재에 있는 사진은 그때 찍은 거예요. 그땐 험한 산에 올라가는 걸 취미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죠. 내가 좋아한 사람도 그런 사람이어서, 함께 산을 오르곤 했었죠.“

아이는 서재의 사진을 떠올렸다. 수많은 사람이 함께 찍은 그 사진 중에 누가 C이고 C가 좋아한 사람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알 필요 없는 일이기도 했다.

”내 아이는, 그 사람의 아이기도 했어요. …그 사람이 다른 섬으로 떠난 뒤에 태어났고, 내가 서명한 지 얼마 뒤에, 그 사람이 행방불명 됐다는 소식을 들었죠. 눈으로 가득한 섬으로 간다고 한 이들이 그렇게 되고 나서, 율리우스 섬에서는 외부 섬으로 이동이 금지됐고요.“

”…왜, 불합격, 이었나요? 무례한 질문이라면 취소하겠습니다.“

아이가 말했다. C는 고개를 저었다.

”불합격 사유는 알려주지 않아요. 들으면 계속 기억에 남아서 부모의 정신 건강에 나쁠 수 있어서 그렇다더군요. 그래서 나는, 가끔 상상했어요, 그 애가 사실은 불합격이 아니었다거나, 다른 섬에서 잘살고 있다거나 하는 상상을.“

“시설의 아이들에게는, 부모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습니다. 부모가 혹시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다거나……, 마약 중독자일 수도, 폭행범일 수도 있으니까, 그걸 알면 아이들이 계속 부모의 나쁜 모습을 닮게 될 수 있다고, 부모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지 않습니다. 비슷한 이유 같습니다.”

아이 역시 가끔 상상했었다. 자기 부모는 모두가 반대한 불꽃 같은 사랑을 했지만,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거나 하는, 동화책 속의 멋진 연애담의 결실이 자신이라는 상상을. 어릴 때의 일이었다. 주변에 대해서 알게 되고 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자신이 조금이라도 잘 살아남는 방법은 율리우스 섬에서 일하는 자원이 되는 것뿐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이야기책은 더 이상 읽지 않았다. 사람들이 말하는 율리우스 섬은 낙원이었다. 자신은 지금 그 낙원을, 낙원이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이는 비어있는 C의 찻잔에 차를 좀 더 따랐다. C는 웃으며 아이를 보았다. 시간 종료를 알리는 소리가 울렸다.

“가끔 이렇게, 시간을 요청해도 될까요? 오늘처럼.”

“가능하십니다.”

아이가 일어났다.

“다음에 또 봐요, 고마웠어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C는 아이가 집을 나가는 것을 한참 바라보다가 찻잔을 들고 서재로 향했다. 단체 사진 속의 옛 연인은 아이를 닮은 나무색 눈동자로 C를 보고 있었다.

< 동의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제가 서명하지 않으면. >

< 그 경우, 이 섬의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게 됩니다. 아이와 함께 추방 절차를 밟게 되지요. >

연인이 눈속에서 조난되었다는 소식이 도착한 날 C는 자신에게 이제 누구도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걸 택한 것은, 율리우스의 섬에서 살아가는 것을 택한 건 자신이었다. ‘아이’와 우연히 마주치지 않았다면 어쩌면 계속 잊고 살았을 것이다. 찻잔을 비우고 C는 일어나 오랜만에 개수대 앞에서 잔을 씻어 올려두었다. 아이가 내일 와서 이 찻잔을 보고 웃어주면 좋겠다고, C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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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제목 날짜
서계수 인생서점 2022.10.01
박도은 돌고래 앨리 2022.10.01
갈원경 마지막 가을에 경서랑은1 2022.09.30
곽재식 소원의 정복자2 2022.09.30
박도은 겨울, 내 사랑 2022.09.04
빗물 추석이니까요 2022.09.01
곽재식 소설 쓰다 그만두는 이야기3 2022.08.31
갈원경 여름의 섬 2022.08.01
노말시티 꿈에서 읽은 이야기 (본문 삭제) 2022.08.01
전삼혜 시간을 넘어도1 2022.08.01
곽재식 극기4 2022.07.31
곽재식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4 2022.07.01
김산하 상태창! 2022.07.01
갈원경 수국의 꽃 2022.06.30
곽재식 우제점2 2022.06.01
갈원경 신사의 밤 2022.06.01
노말시티 최악의 변신 2022.06.01
강엄고아 별의 기억 (본문 삭제) 2022.06.01
미로냥 그때 흰 뱀 한 마리가 2022.06.01
김산하 반발계수가 높은 이 공의 이름은 107, 그 외에는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2022.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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