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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원경 돌아가야 할 곳

2022.01.01 00:0001.01

돌아가야 할 곳

 

갈원경 

 


작은 배낭 끝에 반짝 하고 무엇인가가 빛났다. 나는 앞서 가는 사람, 시윤의 배낭을 빤히 쳐다보았다. 배낭 끝에 노릇한 빛깔의 금속이 반짝이고 있었다. 단순한 디자인이긴 해도 그 끝에 달려 있는 것은 평범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어디선가에서 본 적이 있었다는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어디서였더라. 한참만에야 1년 전, 시윤과 내가 모두 이 나라에 있지 않고 이웃 나라의 대학에 있었을 때 시윤의 커다란 크로스백에서 그것을 보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가방은 그때의 카키색 크로스백이 아니라 새파란 배낭으로 바뀌어 있었지만, 그 끝에 반짝이는 동그란 물건은 그대로였다.

“저, 안 상.”

“응?”

귀가 드러나는 짧은 머리의 시윤이 돌아보았다.

“가방에 달고 있는 것, 목걸이입니까?”

“응, 왜?”

“게이오에서도 그거, 안 상이 달고 있는 것 보았습니다.”

시윤은 피식 웃었다. 나는 조금 잰 걸음으로 시윤의 걸음걸이를 따라잡았다.

[ 미나쨩이 다른 사람에게 관심 가지는 건 처음 본 것 같다. ]

일본어였다. 내 서툰 한국어를 배려한 것이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 일본인들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는 걸 실례라고 생각하니까. 그런 뜻이야. 이해한다고. ]

일본말로 주욱 이야기하고 나서 시윤은,

“내가 돌아가야 할 사람이 준 것.”

이라고 한국말로 덧붙였다. 나는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게이오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시윤은 지금처럼 귀와 목덜미가 훤히 드러나는 짧은 머리에 커다란 크로스백을 매고, 마치 푸대자루처럼 보이는 헐렁한 점퍼를 걸치고 있었다. 3학년 1년 동안을 교환학생으로 있게 되었다는 시윤의 이름이 일본어로 발음하기 심하게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학생들은 시윤을 그저 안 상이라고 불렀다. 보통의 경우라면 교환학생은 대부분 1년을 그림자처럼 살다가 어느날 문득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기 마련이었으므로 사람들이 시윤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시윤은 그렇지 않았다.

[ 그 경우에 미필적 고의를 인정하느냐는 좀 더 미묘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갑은 의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약을 복용시킴으로써 을이 죽을 수 있다는 것까지 이해하고, 그것을 감수했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

4학년 선배가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자리에서 모두 아무 말도 못하고 있을 때에 시윤은 차분히 손을 들어 의견을 말한 것이다. 그것도 아주 유창한 일본어로. 정작 발표자가 말문이 막혀 있자, 교수가 쓱 자리에서 일어나 시윤을 보았다.

[ 그럼 안 군. 자네의 견해로는 이때 갑의 행위는 무엇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는가? ]

[ 제 생각에는 갑의 행위에는 과실의 정도를 고려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 경우에 갑의 의료적 상식을 생각해 볼 때 과실의 정도가 중과실에 해당한다고 할 것인지는 좀 더 전후의 상황이 필요하겠습니다만, 중과실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본 건은 과실치사에 해당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

교수는 빙긋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더 이상의 질문은 나오지 않았고 발표자는 중언부언 발표를 마무리하고 내려왔다. 교수는 코멘트에서 시윤의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미필적 고의를 인정하는 데 있어서는 매우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형법은 벌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며 죄없는 사람을 벌주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때 모두에게는 4학년 선배의 발표보다도 저 조그만 이웃나라에서 온 교환학생 안시윤이 깊이 머리에 박혔음은 물론이다.

굳이 형법시간만이 아니었다. 시윤은 수업시간마다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허스키 목소리로 논리를 풀어나가는 시윤의 말에 바로 논박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사람들은 시윤이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도서관에 틀어박힌다는 것을 놀리듯 이야기했었다. 자신이 교환학생으로 다른 나라에 간다면 저렇게 공부하느라 시간을 보내지는 않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게 게이오의 학생들에게 시윤은 좀 튀는 교환학생이었다. 그러나 한 달가량이 흐른 후, 법학부의 한 사람이 월요일에 충격받은 듯이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일요일, 식구들과 함께 갔었던 홋카이도의 허브화원에서 시윤을 보았다는 것이다. 주말이면 항상 기숙사에서 보이지 않는 시윤은, 정말로 월요일이면 얼굴이 조금 얼굴이 그을려 돌아왔다.

 

시윤이 일본에 머무는 마지막 방학이 되자 시윤은 이번에는 일본 전국 순례를 하려고 한다고,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동안 시윤과 조금은 말을 나누게 된 사람들이 일행이 되었다. 나는 그 멤버 안에 있었다. 내가 한국인 3세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나 역시도 한국어에 서투르고 일본의 음식에 더 익숙한, 성만이 일본식인 것이 아니라 아마도 사고 전체가 일본에 더 가까울 그런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때 전국 순례에 참여한 것은 시윤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의식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과는 상관없는, 안시윤이라는 사람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최남단 오키나와에서부터, 북쪽의 홋카이도까지. 여름의 더위를 안고 가기에는 조금 강한 코스였지만 다행히 우리 중에 낙오되거나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그저 평범해 보이는 작은 사찰에도 시윤은 진심으로 감동하는 것 같았고, 신사를 지날 때면 늘 작은 부적을 하나씩 샀다. 일행들도 어느새 마음에 드는 색의 부적을 하나씩 가방에 달게 될 정도로.

“일본은 모든 것이 압축되어 있는 것 같아. 고즈넉하게 잦아드는 느낌. 일본의 산도, 일본의 강도.”

교토의 이스이엔에서 잠시 다리를 쉴 때 갑자기 시윤이 한국어로 중얼거렸다. 나는 시윤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들에게 시윤이 한국어를 쓰는 것은 처음 들었기 때문이었다. 일행들은 모두 호수를 끼고 있는 후원의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는 중이었다.

“한국에 오면, 꼭 연락해. 안 하면, 두고두고 원망할거야.”

마치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는 것처럼 시윤이 중얼거렸다.

 


창경궁에 도착하자 꽤 햇볕이 따가웠다. 일본의 강점하에 있을 때 이곳에 동물을 들여와 동물원을 만들었었다는 시윤의 말에 나는 조금 얼굴을 붉혔다. 일본이 이 나라에 있을 때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나는 아무래도 편하게 듣고 있기가 힘들었다. 내가 한국인의 입장에서 분노해도 괜찮은가. 나는 일본인의 입장에서 변명하거나 혹은 미안해해도 되는가.

“저기, 저 건물이랑 다른 건물이랑 다른 게 보여?”

시윤이 한 건물을 가리키며 물었다. 왕의 정실부인인 중전이 머물렀다는 건물이었다. 그냥 규모라든가를 말하는 것은 아닐텐데.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아, 하고 시윤을 보았다.

“지붕, 가운데가, 다릅니다.”

“그래. 거기 이름이 ‘용마루’라고 하거든.”

“용마루.”

“응, 료[龍]가 들어가잖아. 용 위에 용을 둘 수 없다고 해서 안 둔 거야.”

“용 위에 용?”

시윤은 빙긋 웃으면서 덧붙였다.

“임금을, 왕을, 용에 비유해. 왕이 앉는 자리가 용상, 왕이 입는 예복은 곤룡포.”

“안 상, 여기는 왕후가 쓰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왕후도 용입니까?”

“아니, 왕후는 용은 아니고. 왕후가 주무시는 곳이니 왕도 주무실 거니까.”

아, 하고 나는 쑥스럽게 웃었다.

 

시윤과 함께 한국 종단 여행을 한지도 한 달 가까이가 지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곳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시윤의 설명을 들으며 부산의 충렬사부터 하나씩 거슬러 올라왔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로 한국에 오게 되리라는 것을 시윤이 어떻게 알았는지. 또 나는 왜 그 말만을 믿고, 시윤이 건네준 명함의 번호로 연락을 했었는지.

“궁궐은 이번이 처음이지?”

“한국 궁궐은 처음입니다.”

시윤은 나의 손을 덥석 붙잡고 바깥으로 나갔다. 당황한 것도 잠시, 궁궐 앞 너른 공터에 사람들이 북적북적 모여 있었다. 들어올 때 비하면 이상하리만큼 늘어난 인파였다. 얇고 특이한 천으로 된(시윤은 그것을 ‘갑사’라고 불렀다) 두루마기를 입은 청년 두엇이 사람들을 정리하면서 공터를 비웠다.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앉거나 서고, 어디선가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시윤에게 왜 그랬냐고 묻지도 못하고 광장에서 일어나는 이벤트를 보았다. 공터의 한쪽에서 색색의 갑사 두루마기에 관모를 쓴 남자들이 줄지어 나오고 있었다. 언제 생겼는지 깃발을 든 청년의 무리가 광장의 한 가운데에 정확하게 사열해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영어로 안내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옛날, 조선시대에 왕궁을 경비하던 수비병들의 교대식이라고 했다. 깃발을 들고 줄지어 발을 맞추어 걸어 나온 청년들 가운데에 검은빛깔의 두루마기를 입고 있던 남자가 앞으로 나와 뭔가를 읊기 시작했다. 서 있던 똑같은 빛깔의 옷을 입은 사람이 그에게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모든 행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설명해주는 영어 방송이나 한국어 방송보다도 그들의 정렬한 모습이 나에겐 더욱 확실하게 와 닿았다. 그 시절에 살아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시절로 거슬러 가 볼 수도 없었지만, 그것은 무언가 가슴 벅찬 느낌이었다.

“마침 시간이 맞아서. 어때, 미나쨩 전에 영국에서 살았다고 했으니 근위병 교대식 본 적 있었겠네?”

“네. 에, 비슷하지만 달라요. 뭔가, 이거, 뭐라고 하나요?”

서툰 한국어가 원망스러웠다. 나는 가슴을 가리켜 보이다가 결국 일본어로 말을 이었다.

“満ち足りた気持ち.”

시윤이 빙긋 웃으며 어깨에 매고 있던 배낭을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오늘 저녁에는 오코노미야끼 먹자. 숙소로 가서.”

“숙소는 어떻게 갑니까? 지하철을 타나요?”

“신림동. 지하철 갈아타면 돼.”

신림동. 한참 그 동네의 이름을 되뇌었다. 일정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지만 한국에서 제일 크다는 대학이 있는 곳이었다는 것이 불현듯 생각이 났다. 그쪽에 숙소를 잡으면 이동하는 것이 그다지 쉽지 않을 듯 했지만, 한국에서의 숙박은 자신에게 맡겨두라며 호언장담한 시윤이었으니 뭐라고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남대문 시장에 갔을 때는 잠시 여기가 다른 나라인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잔뜩 진열되어있는 외국 상품들은 일본의 백화점 지하 같기도 했다. 신흥 중심가나 비즈니스 중심가가 아니면 일본의 도로는 대체로 한국의 도로보다 좁아서 시내 중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큰 건물보다는 작은 낮은 건물들이 많은 편이었는데, 부산에서도 그랬지만 인천도 서울도 번화가가 여기저기 있는 것처럼 높게 올라온 건물과 고층 맨션들이 가득했다. 해운대, 인천 신도시는 마치 요코하마 미나토미라이가 주택가까지 퍼진 느낌 같기도 했다. 4차선 이상의 도로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도 나에겐 충격이었다. 그 도로들이 차로 빼곡히 들어찬 모습도. 그런 중에 동대문 수입상가의 좁다란 길과 주욱 쌓인 물건들이란. 그 중에서 일본의 후리가케라든가 오챠즈케를 발견했을 때는 묘한 향수까지 느껴졌다. 한바퀴 시장을 돌고 나왔을 때엔 나도 시윤도 양팔에 잔뜩 뭔가를 사들고 있었다.

신림동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 시윤은 목소리를 낮춰 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왜 서울의 지하철은 일본의 것과 방향이 반대인데 유독 1호선만 방향이 일본과 같은지, 일본이 이 나라에 어떤 영향을 남기고 갔고 그것을 지우기 위해서 한국인들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나는 시윤이 어쩌면 나에 대해서 생각보다도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신림동 숙소는 산에 있다 싶었더니 보통의 좁은 방이었다.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문이 가득한 복도 앞이어서 로비가 1층이 아닌 곳인가보다 생각했는데 쇠문을 열고 들어가니 안쪽에는 3평 정도 되는 방 안에 가재도구들이 들어차 있었다. 꽤 커다란 책상 위에는 컴퓨터가 있고, 작은 서랍장 위에 이불채가 잘 개켜져 놓여 있었다.

“거기 앉아.”

한쪽에 세워놓은 탁자를 바닥에 놓고 방석을 깐 후에 시윤이 말했다. 나는 배낭을 맨 채로 멍하니 시윤을 보았다.

“아, 여기 내가 사는 방. 좀 지저분하지?”

“아니오, 저는 호텔로 갈 거라고 생각해서.”

“음, 집 두고 굳이 호텔 잡을 필요가 있나 싶었는데 미리 말을 안 해서 미안. 호텔로 가고 싶으면 내일부터는 그렇게 하자.”

시윤은 난처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아니에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자, 오코노미야키 먹자구.”

주춤거리며 내가 자리에 앉자, 시윤이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들고 와 탁자위에 놓으며 말했다. 바깥으로 난 테라스는 테라스라기보단 부엌과 세탁실을 겸한 장소였다. 시윤이 그대로 싱크대 앞에 서서 식재료를 손질하는 것을 나는 멍하니 보고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다른 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는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한국에 온다고 했을 때도 배낭을 지고 나온 시윤이어서, 시윤의 집에 묵는 일이 생길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방은 시윤의 느낌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깨끗하게 정리된 커다란 책상 옆 책장에는 가득 법학 서적이라든가 일본에 관한 책들, 여행에 관한 책들이 꽂혀 있었다. 한문으로 적혀있지 않은 것은 서툰 한국어로 추측할 뿐이었지만. 책상 앞 벽면에 붙어있는 달력에 커다랗게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건 내가 한국에 온 날이었다. 부산에 도착했을 때 기다린 듯이 항구에서 서 있었던 시윤의 모습이, 그 배낭이, 어제처럼 생각났다.

“미나쨩, 거기 작은 문 열면 샤워실이거든, 씻어도 돼.”

“네! 고맙습니다.”

더운 몸을 식히고 나와 나는 곧바로 시윤이 준비한 식재료들을 보았다. 그릇마다 담긴 해물, 쇠고기, 양배추, 숙주나물 같은 것들.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이렇게 다 마련했나 싶다. 탁자 위에는 서리가 맺힌 컵도 두 개 놓여 있었다.

“미나쨩은 뭐 좋아해? 오징어 넣을까?”

“다 잘 먹습니다.”

“그래? 그럼 다 넣자!”

커다랗게, 걸죽한 반죽을 올려놓는 손동작이 신났다. 노릇하게 구워질 때 능숙하게 큰 반죽을 뒤집고, 데리야키 소스를 뿌린다. 마요네즈를 곁들이는 건 접시에 놓은 후다. 파슬리 가루에 가츠오부시 채는 손끝으로 뿌린다. 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것이 이 날씨에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차갑게 식은 몸 때문인지 그게 무척 반갑게 느껴졌다. 마가 들어가 부드러워진 반죽이 입안에서 기분 좋은 촉감으로 퍼졌다.

“입에 맞나 모르겠네?”

“맛있습니다!”

힘차게 대답하곤 먼저 쑥스러워져서 얼굴이 붉어졌다.

“이게 또, 김치랑 같이 먹으면 맛있단 말야.”

김치를 길죽하게 찢어서 슥 얹어먹는 모습이 부러워서, 어설프게 흉내를 내었다. 시큼하게 익은 김치의 맛이 달짝지근한 오코노미야키에 어우러져 전혀 다른 맛이 되었다.

“미나쨩도 신김치 좋아하는구나.”

표정을 보고 시윤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한국에 올 것,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야, 미나쨩 자이니치(在日)잖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한다.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말한 적이 없었던 것을. 그리고는 시윤은 맥주잔을 들어선 가볍게 나의 맥주잔에 부딪혔다.

“보니까 알겠더라. 첫날부터. 교실에 앉아있는데 이상하게 눈에 띄었어. 가만히 보니까 한국계, 아니, 자이니치 같은 거야. 그래서 한국말로 그냥 말해버렸지. 일본인이라면 그때 뭐라고 했을 텐데, 아무 말도 하지 않길래 내 생각이 맞았다는 거 알았고.”

“처음 들었습니다. 늘 통명을 썼고. 어머니 아버지 두 분다 통명을 쓰셔서. 쓰루하시에 살지도 않고요.”

“응 그야, 뭐, 일본사람들은 잘 구별 못할 수도 있지. 귀화한 사람들도 많고 하니까. 난 그때 일본 처음 간 거였으니까.”

어머니는 철저한 사람이었다. 혹시나 딸이 재일이라는 것이 알려져 따돌림이라도 받을까, 친구들이 집에 오는 날이면 일부러 기모노 차림으로 친구들을 맞았다. 어머니의 일본 요리 솜씨는 수준급이었고, 친구들이 올 때는 일부러 피자며 스파게티며 카레 같은 것들을 만들었다. 누구도 재일이라는 것을 알 수 없도록,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렇게 조심했다.

벌컥, 나는 맥주를 들이켰다. 술에 약한 체질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이 달아올랐다. 함께 여행을 다니면서도 시윤이 나에게 술을 권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시윤 역시 술을 마시는 걸 본 적이 없다. 가만히 보니 시윤의 얼굴도 조금 벌겋게 보였다. 이런 날씨에 따끈한 음식과 차가운 맥주 한잔이라면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안 상, 목걸이 이야기해 주십시오. 아니, 일본에 오게 된 이야기해 주십시오.”

그간의 궁금증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아니, 술 탓일 거다. 눌러왔고 입 밖으로 내지 않으리라 여겼던 궁금증이 치민 것은.

“그거 두 가지 다 같은 이야기니까 같이 해도 되겠네.”

시윤은 자기 앞의 오코노미야키를 뒤적이곤 맥주를 한 번 더 들이켰다. 시윤도 술이 그렇게 센 것 같지는 않다. 얼굴이 저런 색이 된 걸 보면.

[ 고등학교 때 선배였는데, 역사연구반이었어. 나는 1학년이고 선배는 2학년이었지. 언제부터 좋아했는지도 기억은 안 나지만, 그 사람이 졸업한다는 말에 굉장히 가슴이 아팠었다. ]

배낭의 목걸이가 반짝하고 빛났다.

“미안해, 시윤아. 나 일본 간다.”

그, 상원은 잔뜩 굳은 얼굴로 시윤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했다. 졸업식이었단다. 그전까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던 그가, 계속해서 침울해 있었던 이유는 졸업 때문이라고 시윤은 생각했단다. 수시에 원서를 넣지 않았다는 소문이 들렸고, 수능 시험장에도 가지 않았다고 했다. 수능 원서를 아예 안 썼다는 말도 들렸다. 실제로 학교에서 게시하기 시작하는 합격자 명단에 그 이름은 없었단다. 그런 그가 돌연, 졸업식이 되어서야 그런 말을 했단다.

“뭐라고요?”

“아버지 집으로 들어가기로 했어. 게이오에 갈 거야.”

시윤이 언젠가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상원의 아버지는 귀화한 재일 한국인이었고, 어머니는 이혼하면서 선배와 함께 한국으로 나왔다고 했다. 고등학교 2학년, 그의 아버지가 한국으로 와 그를 데리고 돌아가고 싶다고 했을 때, 그의 어머니는 절대로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했다고. 그러나 그가 고3이 된 여름에 그의 어머니는 갑작스럽게 떠나버렸단다. 지병이 있었는지도 아무도 모르는, 급작스러운 죽음이었단다. 혼자된 그가 어머니의 장지에서 말없이 흐느끼고 있는 것을 본 것도 시윤이었고, 장지까지 따라간 것도 시윤이었단다. 그 이후에 아버지와 무슨 이야기가 있었는지, 어째서 갑작스럽게 선배가 일본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것인지는 시윤은 도저히 알 수 없었단다.

“악수 해 줄래.”

상원이 손을 뻗어서, 시윤도 얼떨결에 손을 내밀었단다. 꼬옥 잡은 손길이 꼭 마지막 같았단다.

“돌아올 테니까. 기다려 줘.”

손끝으로 뭔가가 시윤의 손으로 넘어왔단다. 그때.

“그게, 이것입니까?”

“응.”

시윤은 배낭에서 조심스러운 손길로 목걸이를 끌렀다. 반짝이는 목걸이를 이번에 시윤은 팔에 둘렀다. 두 줄을 감은 목걸이는 에스닉한 팔찌처럼 보였다. 나는 벌개진 얼굴로 시윤을 빤히 쳐다보았다.

“안 상이 고등학교 때라면 벌써 몇 년이 지났습니다.”

“응… 몇 년은 기다렸으니까.”

시윤은 빙긋 웃으며 팔에 걸린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 한 번인가 편지가 왔는데, 게이오에 입학했다고 했어. 일본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는 했는데 알려주지 않더라. 어느 과인지도. 단지……, 돌아가고 싶다고. 내가 있는 이 나라에 돌아오고 싶다고. 그래서. ]

[ 그래서? ]

[ 당신이 돌아올 수 없다면 내가 돌아가겠어, 라고 생각했어. ]

시윤이 또 한 잔의 맥주를 비웠다.

[ 재미있더라. 일본어. 목표가 있어서 그랬겠지? 게이오에 가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 그리고 교환학생 선발에 뽑혔고. 하지만, 게이오에 갔을 땐 그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어. 사진도 보였지만 얼굴만으로는 아무도 알아내지 못하더라고. ]

[ 그렇겠지요. ]

나는 무심히 대답하다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였구나. 이 사람은 그래서 주말이면 일본 전체를 돌아다녔구나. 자신이 돌아갈 곳을 찾아서, 사진 한 장을 들고 헤매어 다녔구나. 이름도 바뀌었을, 어쩌면 얼굴도 그전과는 달라졌을지 모를 그 사람을 찾아서.

[ 아 모르겠다, 이제 미나쨩이 이야기할 차례! ]

짐짓 너스레를 떨며 시윤은 벽에 기대어 버렸다. 내게도 낯설지만 불쾌하지는 않은 취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아마 그것을 시윤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 미나 짱도 연애 이야기 해 줘. 나도 부끄러운 이야기 했으니까! ]

과장된 말투는 아마도, 쑥스러움 때문이었을 거다. 나는 음음, 조금 목을 가누고 한참 생각했다. 딱 한 번의 인연. 결혼하게 된다면 이 사람과 하겠다고 생각했던 유일한 사람의 얼굴이 스쳤다.

[ 그 사람은, 사학과였어요. 조금 수줍고 말수가 없는 사람이었는데, 산을 타는 것을 좋아했어요. 산악회에다 마운틴 바이크까지, 야외 운동이라면 못하는 게 없는 사람이었어요. ]

[ 멋진 사람이네. ]

시윤은 웃으며 내 이야기를 들었다.

[ 나는 월반해서 2년을 일찍 들어왔기 때문에 수업을 따라가는 게 어려웠어요. 점점 우울해하니까 어머니가, 등산이라도 해 보라고 권하셨어요. 그래서 그 사람을 만났는데. 대뜸 그러는 거에요, 너, 예쁘다. 라고. ]

시윤이 웃음을 터뜨렸다. 확 얼굴이 달아오른다. 그렇다니까, 그 사람 이야기를 하면 다들 처음엔 저렇게 웃어버리지.

[ 그래,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 ]

시윤의 물음에, 나는 조금 곤란해졌다. 이 이야기는 결국 내가 왜 한국으로 여행을 오게 되었는지를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말을 하면, 시윤이 혹시 불쾌하지는 않을까. 자신이 수단으로 사용되었다고 여기지는 않을까.

[ 곤란한 질문을 했나보네. 그럼 다른 거 물어볼까, 이건 어때? 한국여행을 계획하게 된 이유라든가. ]

[ 그거, 결국 같은 질문인데요. ]

씁쓸하게 웃었다. 시윤이 잠시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아아, 하고는 표정을 굳혔다.

[ 겨울 산행을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어요. 남알프스에서. 너무 갑작스러워서 믿어지지도 않았고, 아무것도 눈앞에 보이지 않으니 감정정리도 되지 않았죠. 그래서 마음을 비울 겸 해서 한국에 오자 한 거예요. 안 상 생각도 났고요. ]

[ 그건 영광이네. ]

시윤은 조금 중심을 흔들리며 맥주잔에 맥주를 다시 부었다. 서늘한 두 개의 맥주잔이 차자 자기 잔을 들어 내 잔에 부딪히고 혼자 축배를 들었다. 이건 두 사람의 감정정리다. 연애라고는 이것밖에 해보지 못한 두 사람의 푸념이다. 나는 잔을 들어 시윤의 잔에 혼자 부딪힌다. 시윤의 흉내를 내듯이.

[ 잘 모르겠어요. 정말로 날 좋아했는지. 가끔 아련한 눈으로 날 보았는데, 문득문득,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기분 탓이었을까. 언젠간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럴 수 없게 되어버렸네요. ]

[ 어째 느낌이 꼭 나이 든 아저씨같은데, ]

[ 응? 아니에요, 나보다 겨우 세 살 위. 굉장히 성숙한 느낌이긴 했지만요. 말수도 적고, 가끔 오사카 억양을 쓰곤 해서 재미있었어요. ]

[ 사내들이란 왜들 그 모양이람. 이렇게 멀쩡한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고 말이야. ]

과장된 동작과 억양으로 말하고 시윤은 키득 웃는다. 나도 과장되게, 실제 이상으로 취함을 가장해서 긍정하고 웃는다.

 


며칠 후, 서울 여행을 모두 마치고 나는 비행기에 올랐다. 시윤은 배낭도 매지 않고 모자도 쓰지 않은 보통의 옷차림으로 나를 배웅했다. 게이오에서 보았던 자루 같은 옷차림이 아니라, 가벼운 반팔 블라우스에 스커트 차림이었다. 나는 단추 하나를 끌러 낸 시윤의 다갈색 목덜미를 쳐다보았다. 목걸이는 거기, 시윤의 목에 걸려 있었다.

“일본에 오게 되면, 연락하세요, 안 상.”

“부탁 하나 들어주면 그렇게 할게.”

시윤이 엷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날 언니라고 불러주면.”

“말도 놔도 좋습니까? 언니야, 하고.”

너스레를 떤다. 어젯밤의 과장된 감정의 앙금이다. 시윤은 풋, 웃는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게이오에서 벌떡 일어나 의견을 말하던 그 씩씩한 시윤, 여행지에서 항상 부적을 사 모으며 뭔가를 기원하던 시윤, 항상 앞장서며 내 여행길을 인도해주던 시윤. 검게 그을린 건강한 피부는 그대로인데 시윤은 하룻밤 사이 전혀 달라진 사람처럼 보였다. 겨우 두 살 차이지만, 나보다 한참 어른 같은. 그래 마치, 그 사람처럼.

“죠-단[弄談]. 시윤언니. 고맙습니다. 꼭 일본에 놀러오세요.”

“그래, 미나. 잘 가라, 건강하고.”

가볍게 시윤의 손이 내 어깨를 토닥였다. 나는 아쉽게 돌아서서 비행기에 올랐다. 시윤이 일본에 올 일이 있을까. 그는 오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전처럼 오진 않는다. 그는 이제 돌아갈 곳을 찾지 않을 테니까. 내가 지금, 내가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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