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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약 하나로 얻는 깨달음

노말시티

 

다이어트를 굳게 결심한 밤에 어디선가 라면 끓이는 냄새가 흘러들어 온다면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욕망은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지만 또한 인간은 욕망의 노예이기도 하다. 그럴 때 알약 하나로 용광로처럼 들끓는 식욕을 잠재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누구나 한 번쯤은 해 봤을 것이다.

그런 기적의 알약이 시판되어 화제다. 디메틸에스시탈린이라는 정식 명칭이 있지만 '젠스톤'이라는 별명이 더 유명하다. 일반적인 식욕억제제와는 달리 식욕이 솟구칠 때 먹으면 오 분 내에 바로 효과가 나타난다. 효과는 한시적이다. 대략 두세 시간 정도 지속된다. 늦은 밤 갑자기 치솟는 식욕을 달래고 잠자리에 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심각한 부작용도 없다. 한 번에 많은 양을 먹었을 때 소화불량이 보고되는 정도다. 신경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에 금단 증상도 없다. 더욱 놀라운 것인 이 알약이 식욕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욕망을 사라지게 한다는 점이다. 일체의 욕심에서 벗어나 자연과 하나가 되는 느낌이라고 한다. 깊은 명상에 빠지는 것과 비슷하다. 동양의 선 사상을 뜻하는 젠(zen)스톤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다.

그러다 보니 이 약은 다이어트 용도 이외에도 성욕이나 심지어 구매욕을 달래기 위해 쓰이기도 한다. 무언가를 충동적으로 구매하고 싶다면 잠시 숨을 돌리고 이 알약을 삼켜 보라. 물건을 사고 싶은 욕망이 씻은 듯 사라지고 구매 버튼 대신 쇼핑몰을 닫는 버튼을 누르게 될 것이다. 삶의 갈림길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면 반드시 이 약을 먹어라. 일시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약에 대해 갑작스러운 판매 중지 결정이 내려졌다. 네바다주를 비롯한 다섯 개 주에서는 완전히 판매가 금지되었고 그 외 대부분의 주에서는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만 살 수 있게 되었다. 마트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주는 아칸소주 정도인데 현재는 모든 매장에서 품절된 상태다. 유통 업자들이 물건을 빼돌려 웃돈을 받고 판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다.

부작용이 새로 발견되었기 때문은 아니다. 이 약이 판매 중지된 이유는 역설적으로 약의 효과가 너무 뛰어나서다. 알약 하나를 먹는 것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 소름 끼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상태가 깊은 명상에 빠져 마음의 평온함을 얻은 상태라고 생각하면 굳이 금지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젠스톤을 유용하게 쓰고 있던 사람들은 당연히 반발했다. 부작용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약의 효과가 너무 뛰어나다고 해서 판매를 제한하는 게 말이 되냐며 불만을 터뜨린다. 욕망을 다스리고 마음을 평온하게 해 주는 효과가 뛰어나다는 게 뭐가 문제냐는 주장이다. 그럴 거면 요가나 명상도 금지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주장이며 금지 권고를 내린 FDA의 결정에 의문이 가는 게 사실이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이유는 짤막하다. 젠스톤은 중추신경계에 작용하여 인체에 위해를 끼칠 수 있는 향정신성의약품이라는 설명이다. 어떤 위해인지는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다. 해당 결정을 내린 회의는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참석했던 사람들은 회의 내용을 밝히기를 꺼렸지만 그 위해가 알려지지 않은 부작용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젠스톤의 효과인 욕망의 제거 그 자체를 위해로 판단한 것에 가깝다는 분위기를 풍겼다.

종교계에서는 FDA의 결정을 환영하고 있다. 세속적인 욕망을 다스리는 마음의 상태는 절제와 기도를 통한 종교적인 수련으로 도달해야지 알약 하나로 손쉽게 얻는 것은 가짜 평온함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종교계의 입장에는 젠스톤이 종교조차 필요 없게 만드는 강력한 약이라는 사실이 숨어 있다는 지적이다. 알약 하나로 마음의 평온함을 얻을 수 있다면 주말에 힘들게 교회에 나가 기도하고 죄를 고백할 필요가 있겠는가.

경제계의 입김이 반영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동력은 인간의 욕망이다. 그 욕망을 사라지게 만든다면 경제가 순환할 수 없다. 실제로 젠스톤이 출시된 이후 사치품의 소비가 13% 줄어들었다는 보고도 있다. 결국 젠스톤의 판매를 금지한 것은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이 대중들을 계속 노예로 부리기 위해서라는 음모론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젠스톤의 초기 개발 단계에 참여했던 존스 홉킨스 의대의 캐롤 뱅크스 교수는 그런 음모론을 부정하며 FDA의 결정이 지극히 합리적이라는 글을 올렸다. 젠스톤을 통해 도달하는 욕망의 제거와 평온한 마음이 바람직한 인간의 상태가 아니라는 게 글의 요지다. 요가나 명상 혹은 종교적인 수련을 통해 일시적으로 그런 상태에 도달하거나 이를 추구하는 행위 자체는 지극히 정상적이지만 알약 하나를 통해 간단히 그걸 얻어서는 안 된다고 교수는 주장한다.

'욕망은 인간의 본질 중 하나입니다. 인간은 욕망에 시달리고 욕망에 이끌립니다. 욕망은 종종 인간을 어리석은 선택으로 이끌고 좌절의 구렁텅이에 빠뜨리기도 하죠. 그런 욕망을 다스리고 혹은 억누를 수 있는 인간이 보다 고귀하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고귀함은 그 사람이 욕망을 이겨내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과정을 생략하고 얻는 평정심은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심지어 비인간적이기까지 합니다. 삶의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바로 죽음의 안식에 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젠스톤을 개발한 제약사인 네오호라이즌의 대표 콜린 로저스는 모든 미국인에게는 자신의 마음을 원하는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며 FDA의 결정에 불만을 표시했다. 약품을 승인했던 FDA가 판매가 시작된 이후에 명백하지 않은 이유로 금지 권고를 내린 것은 부당하다며 피해 보상 소송을 검토 중이라는 입장도 밝혔다.

식약처는 젠스톤의 수입 허가 여부를 놓고 고심 중이다. 의사의 처방이 필요한 전문의약품으로 허가할 것이라는 전망이 높다. 제약사들은 욕망을 제거하는 효과를 낮추거나 식욕만을 선택적으로 제거하는 방식으로 규제를 피할 수 있는 새로운 약품을 개발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 중이다. 한 국내 제약사는 학구열만을 선택적으로 높이는 약을 개발 중이라는 소문도 있다.

욕망은 극복해야 할 인간의 적일까 아니면 그 자체로 인간의 본질일까. 어느 쪽이든 욕망이 인간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임은 분명하다. 이 욕망을 원하는 대로 구성하고 편집할 수 있는 미래가 머지않아 보인다. 새로운 욕망으로 무장한 신인류가 탄생할지도 모른다. 그런 신인류가 이끄는 미래는 과연 어느 방향으로 향할까.

댓글 6
  • No Profile
    진일보 21.11.01 11:35 댓글

    인간 욕망을 기본으로 깔고 있는 자본주의에서, 저런 약은 시판이 불가할 것으로 보입니다.ㅋㅋㅋ 좋은 내용 즐겁게 감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진일보님께
    글쓴이 노말시티 21.11.01 14:46 댓글

    저도 온갖 이유를 대면서 못 팔게 하지 않을까 싶네요. 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심너울 21.11.04 00:11 댓글

    잘 읽었습니다.

  • 심너울님께
    글쓴이 노말시티 21.11.04 09:25 댓글

    감사합니다!

  • No Profile
    윤새턴 21.11.07 16:38 댓글

    각자의 이성이 합리적 선택의 기준이 될텐데, 욕망으로 하향평준화된 이성이 다시 변별력을 갖추게 도와주는 약이 될 수도 있겠군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 윤새턴님께
    글쓴이 노말시티 21.11.07 23:57 댓글

    어느 정도의 욕망을 유지하는 게 인간다운 걸까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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