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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대게 - П...

2021.10.01 00:0010.01

대게 - П...

정도경

 

- Помогите...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죽도 시장이었다. 우리는 커다란 게 모형이 간판 대신 붙어 있는 수산물 가게에서 대게를 고르고 있었다. 국산 대게는 아직 제철이 아니라며 사장님이 대신 러시아산 대게를 홍보하면서 프리모리예, 마가단, 캄챠트카 등등 익숙한 지명을 이야기했고 그래서 나는 왠지 편안한 기분이 되었다. 그리하여 러시아 극동의 어느 지역이 최근에 오염이 많이 됐고 어느 지역은 아직 깨끗한지 생각하면서 게의 산지를 고민하는 중에 어디선가 러시아어가 들려왔던 것이다.

- Помогите.... (도와 주시오...)

명확한 러시아어였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장은 한산했고 주위에 러시아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고려인이나 다른 극동지역 소수민족이라면 흔히 생각하는 금발 백인이 아니라 한국인하고 똑같이 생긴 아시아계 인종인데 러시아인일 수도 있으므로 나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애초에 나한테 말을 거는 사람이 주변에 없었다. 남편은 수산물 가게 사장님과 여전히 대게를 논의하고 있었다.

- Помогите.... (도와 주시오....)

이번에는 러시아어와 함께 뭔가 단단한 것을 톡톡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수족관 안의 대게가 나를 바라보며, 아니 게 종류의 눈이 어디 붙어 있는지 나는 모르니까 나를 바라봤는지 말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간 대게가 수족관 유리에 배를 바짝 붙이고 나를 향해서 (나를 향한 게 맞나?) 집게발로 유리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 Помогите.... Спасайте.... (도와 주시오... 구해 주시오...)

나는 남편의 소매를 잡아 끌었다.

«오빠, 저거.»

«응?»

남편이 고개를 돌렸다.

«저걸로 해요.»

나는 결연하게 대게를 가리켰다. 우리가 결정을 내리자 사장님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쪄 드릴까요?»

«아뇨!»

내가 황급히 대답했다. 남편이 뭔가 항의하려 했으나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살려달라고 도움을 청하는 대게를 꺼내서 쪄 버리는 건 도리가 아닐 뿐더러 요리를 해 버리면 대체 무슨 일인지 물어볼 수 없게 된다.

수산물 가게 사장님이 대게를 살아 있는 채로 수족관에서 꺼내어 커다란 스티로폼 상자에 담아 주었다. 남편은 할 말이 매우 많다는 표정이었으나 어쨌든 선선히 값을 치르고 대게 상자를 받아들었다. 차를 향해 걸어갈 때에 남편이 들고 있는 스티로폼 상자 속에서 조그만 목소리가 속삭였다.

- Спасибо.... (고마워요...)

 

프리모리예, 마가단, 캄챠트카는 모두 동해에서 북쪽으로 가면 있는 러시아 극동 지역의 이름이다. 프리모리예는 북한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곳으로 최근에, 최근이라 함은 팬데믹이 덮치기 이전 좋았던 시절에 한국에 관광지로 알려지기 시작한 블라디보스토크를 포함한 지역의 이름이며 조선 말기였던 1860년대 혹은 그 이전부터 한인들이 이주해 가서 살기 시작하여 지금도 한인의 후예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다. 마가단과 캄챠트카는 그보다 훨씬 더 북쪽으로 올라가서 오호츠크 해에 인접한 지역으로 북극에 가깝기 때문에 아주 춥다. 마가단 지역은 여름 최고기온은 27도 정도까지 올라가지만 1995년도 겨울에 영하 37도까지 내려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캄챠트카는 커다란 반도인데 역시 북쪽이고 시베리아에서 찬 기운이 몰려오는데다 서풍이 불어서 다른 시베리아 지역과는 달리 습하고 비가 많이 온다. 캄챠트카 역시 겨울에는 영하 20도 정도로 내려가고 여름에도 최고 기온이 영상 20도 정도로 언제나 추운 편이다. 블라디보스토크는 항만 개발 등으로 인해 인근 바다가 오염된 편이지만 마가단과 캄챠트카는 상당히 청정한 지역이었다. 그런데 최근 기후변화와 이상기온으로 인해 시베리아 지역 전체가 불안정해지면서 캄챠트카 지역도 영향을 받게 되면서 이 지역 어민들이 고기잡이를 하다가 북극 얼음이 깨져서 떠내려가 조난당하는 등의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러시아어를 하는 대게를 차에 싣고 돌아오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게가 말을 할 수 있었던가?

 

- Спасибо, что меня не варили. (나를 끓이지 않아서 고마워요.)

돌아와서 스티로폼 상자를 꺼내 뚜껑을 벗겼을 때 대게가 가장 먼저 한 말이었다.

- А можно что-нибудь поесть? (그런데 뭣 좀 먹을 수 있을까요?)

나는 남편을 쳐다보았다.

«대게는 뭐 먹고 살아요?»

«뭐든지 잘 먹어요. 생선이나 새우나, 자기보다 작은 게도 먹고...»

«배가 고프다는데요.»

내가 말했다. 남편은 여전히 할 말이 많다는 표정이었지만 일단은 대게의 식량이 될 만한 해양생물을 찾아보기 위해 주섬주섬 일어났다.

«게 안 먹냐?»

어머님이 부엌에서 거실을 내다보며 물었다. 대게와 대화를 하기 위해 요리를 해 오지 않았다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얼버무렸다.

«어... 조금만 기다리려구요. 지금 남편이 더 사러 나갔어요.»

다행히도 어머님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게는 엄청난 양을 먹어치웠다. 남편도 언제나 배고픈 편이라서 내 관점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분량의 각종 해양수산물을 수시로 먹어치웠지만 대게의 식성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남편은 눈앞에 산더미 같이 쌓인 새우와 생선과 홍게와 꽃게가 대게의 뱃속으로 사라지고 껍질과 뼈가 쌓이는 모습을 보며 매우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기가 먹으려고 사왔으니까 대게한테는 그냥 조금만 나눠주면 될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이런 강력한 적수를 만날 줄은 몰랐던 것 같다. 한편 나는 대게가 홍게나 꽃게 등 자기보다 작지만 같은 게 종류를 먹는다는 사실을 처음 알고 조금 놀랐다. 그러나 충격이 가신 뒤에 나는 옆에서 대게의 식습관을 관찰하며 해양수산물을 사랑하는 남편의 식습관과 어쩐지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여 혼자 즐거워하고 있었다.

- Газопровод. (가스관.)

먹을 만큼 먹고 난 뒤에 대게가 마지막 남은 꽃게 다리 껍질을 뱉어내고 말했다.

- Строят газопровод. (가스관을 짓고 있어요.)

물론 러시아는 언제나 가스관을 건설한다. 가스와 석유 등 에너지 자원 수출이 러시아 경제의 약 60%를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세계 최대의 천연가스 보유국이며 러시아 천연가스 매장량이 전세계 매장량의 4분의 1 정도를 차지한다. 천연가스는 가스관을 꽂아서 연결하면 다른 어떤 처리를 하지 않아도 알아서 가스관 타고 흐르니까 러시아는 언제나 가스관을 건설해서 주로 유럽에 가스를 팔고 있다. 대략 십년에 두 개 정도 속도로 가스관을 건설하는 것 같다.

- На дне океана. Из России в Японию. (동해 바닥에요. 러시아에서 일본까지.)

러시아에서 일본까지 극동 아시아 지역을 포함하는 에너지 그리드 계획은 이미 실행되었다. 전기 공급은 이미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제는 가스관도 짓고 있나? 러시아의 에너지 수출 판로 다변화의 결과인가? 나는 수업시간에 얘기했던 내용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남한과 일본은 육로로 가스관을 연결할 수 없기 때문에 러시아가 천연가스를 판매하려면 가스를 압축해서 액화시킨 뒤에 액화천연가스를 배로 실어와서 다시 기화하는 공정을 거쳐야 한다. 이런 공정은 복잡하고 비싸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유럽에 내다 팔듯이 그냥 가스관 꽂아서 해결할 수 있다면 가장 덜 골치 아플 것이다. 그러나 남한까지 육로로 가스관을 연결하려면 북한이 문제가 되고 일본의 경우 동해바다가 가로막고 있는데 동해는 깊다.

- И поэтому наняли нас. (그래서 그들이 우리를 고용했소.)

- Кто вас нанял? Вас всех? (누가 고용해요? 당신들 전체 다요?)

내가 물었다. 대게는 집게발을 흔들었다. 사람이 고개를 움직이는 것과 비슷한 의미를 나타내는 비언어적 의사소통인 것 같았다. 물론 애초에 대게가 어떻게 언어적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나의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 Государство. Правительство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국가가요. 러시아 연방 정부.)

대게가 말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된 것이었다. 러시아 연방, 더 정확히 말해서 네 번째 임기를 수행중인 18년차 대통령 П모씨의 정부는 가스관과 석유관으로 세계를 정복하려는 야심을 불태우고 있다. 2014년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크림 반도를 강제 점유한 이후 유럽에서 러시아산 에너지를 보이콧하고 러시아에 경제제재를 가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에너지 수출에 국가 수입의 절반 이상을 의존하는 러시아는 2015년 드디어 경제위기를 맞이했다. 이쯤 되니 러시아 현 정권은 다급해졌다. 대게는 바다 밑바닥에서 산다. 그래서 러시아 연방 정부는 기존에 건설된 극동아시아 에너지 그리드에 가스관을 추가하기로 결정하고 이미 해저에 살고 있으며 크고 힘세고 수도 많은 대게들에게 가스관 건설작업을 주문했다는 것이다.

- Обещали новое место переселения. На севере. Чиестое, холодное, говорили.... (새로 이주할 곳을 주겠다고 약속했어요. 북쪽에. 깨끗하고 추운 곳이라고 했어요....)

대게가 말했다. 눈자루에 달린 여러 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열 개의 다리가 떨렸다.

러시아 연방정부의 약속을 믿은 대게들은 작업에 착수했다. 해저 가스관 건설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가스관이 거의 다 연결되었을 때쯤 같이 작업하던 동료들이 한두 마리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 Мы думали, что они уже пошли на север, переехали.... (그들이 이미 북쪽으로 떠났다고, 이주했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기준으로 누구는 떠나고 누구는 남아서 작업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남은 대게들은 자신들도 때가 오면 북쪽의 깨끗하고 추운 바다로 떠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어느 날 대게는, 그러니까 우리 눈앞에 앉아서 러시아어로 이 모든 이야기를 하고 있는 언어적 대게는, 동료의 다리를 발견했다.

- Так просто плавала в воде, наполовину съеденной.... (이렇게 그냥 물에 떠 다니고 있었어요, 반쯤 먹힌 채로....)

언어적 대게의 설명에 따르면 게를 잡아먹는 물고기나 다른 천적들이 자연에는 당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다리가 하나 떨어져 나가 떠내려온 것 자체는 커다란 사건이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떠내려온 다리에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잇자국이 나 있고 살을 파먹은 흔적이 명백했다. 이 때문에 대게들은 공포에 질렸고 커다란 혼란이 일어났다. 잇자국의 정체를 파헤치기 위해 떠내려온 다리를 관찰하던 중에 대게들은 다리 안에 깊이 박힌 조그맣고 딱딱하고 까만 물체를 발견했다.

- Неизвестный объект был плоский, с мелкими тонкими кусочками золотого цвета наверху, похожие на очень мелкую крабовую шкуру. (정체불명의 물체는 편편했고 작고 얇은 황금색 조각들이 위에 붙어 있었는데 그 조각들은 아주 작은 게 껍질 같았어요.)

게는 역시 게의 관점에서 세상을 본다는 당연한 사실을 나는 새삼 깨달았다. 작고 까맣고 납작한 물체 위에 금색 조각들이 붙어 있다면 게 껍질일 리는 없고 아마도 뭔가 칩 같은 종류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 Что нам делать? Что случилось с коллегами? Почему эта нога и что за неизвестная вещь? (우리는 이제 어쩌면 좋죠? 동료들은 어떻게 된 걸까요? 그 다리는 왜 떠내려왔고 알 수 없는 물건은 또 뭐란 말입니까?)

대게가 말했다. 말하면서 대게는 다섯 쌍의 다리를 끊임없이 떨었다.

«쟈 무슨 속상한 일 있어서 저러는 거가?»

어머님이 안방에서 거실을 향해 말씀하셨다.

«쏘주라도 한 잔 줘야 되는 거 아이가?»

대게한테 소주를 대접해도 되는지 알 수 없으며 애초에 술 좀 그만 마시라고 내가 잔소리를 시작하기 전에 남편이 반색하며 얼른 일어나서 술과 술잔을 가지러 갔다.

 

대게는 씹히고 먹힌 채 칩이 꽂힌 모습으로 떠내려온 다리의 주인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났다. 그리고 마가단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어선에 잡혀서 한국으로 팔려오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납치되어 끌려오면서 대게는 자신의 동료들, 북쪽 바다의 깨끗하고 차가운 물 밑바닥에서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사라진 동료들이 이렇게 끌려와서 잡아먹혔으리라는 사실을 점차 깨달았다. 칩이 꽂힌 채 짓씹혀 떠내려온 다리 한 짝은 그 사실을 알리고 위험을 경고하기 위한 누군가의 영웅적인 희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게는 동료를 찾지 못했고 이대로라면 마가단의 고향 앞바다로 다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르는 지경에 처해 버렸다.

남편의 조언은 물론 조직화를 하라는 것이었다. 비록 아무도 존재조차 잘 알지 못하는 조그만 노동조합이지만 어쨌든 산별노조 3선 위원장을 지냈고 학생운동 시절까지 합치면 30년 경력의 활동가로서 남편이 제안한 최선의 대응책은 노동조합을 만들어 사용자측, 이 경우에는 러시아 연방 정부에 요구사항을 전달하고 작업에 참여한 대게 전체를 위해 체계적인 노선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남편과 언어적 대게는 소주를 앞에 놓고 대게들의 노동시간과 임금, 대게 전체 숫자와 작업에 참여하는 대게의 숫자, 작업 규모와 해당 지역, 작업 환경과 조건에 대해 대단히 상세한 질의응답을 시작했다.

중간에 낀 나는 죽을 지경이었다. 술 취한 한국 호모 사피엔스와 술 취한 러시아 갑각류에게 노동운동과 조직화에 대해 동시통역을 해줘야만 하는 인생 최대의 위기가 닥칠 것이라고는 평생 상상도 하지 못했다. 몇 년 전에 검도 관련 술자리에 불려나가 러시아인 검도 사범에게 러시아어로 신라의 화랑오계를 설명해 달라는 한국 검도사범님의 난데없는 요청을 받은 적은 있었는데 화랑오계가 뭔지 한국어로도 잘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내가 술을 마셨더니 일단 그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되었다. 그 때는 그것이 러시아 전공자로서 내 직업경력 최대의 위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상황은 그 때보다 조금 더 심각했다.

그러나 그 때나 지금이나 러시아가 관련된 모든 의사소통 문제에 있어 궁극적인 최종 해결책은 술이었다. 남편과 대게는 소주를 각 3병 정도 마시고 나더니 왠지 내가 없어도 자기들끼리 무리 없이 의사소통을 하기 시작했다. 그와 비례해서 술을 마시지 않고 옆에서 지켜보는 나는 술 취한 인간과 술 취한 갑각류의 대화를 어느 언어로도 점차 알아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옆에서 남편이 안주로 내놓은 오징어를 가끔씩 집어먹으며 남편과 대게의 혼란스러우면서 호의적이고 어쩐지 기묘하게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냥 구경하고 있었다.

«쟈는 집에 안 가나?»

어머님이 다시 안방에서 얼굴을 내밀고 물었다. 나는 노동문제에 대해 상담하는 중이라서 아마 좀 오래 걸릴 것 같다고 간략하게 설명했다.

«노동문제? 데모하고 그런 거가?»

어머님이 눈쌀을 살짝 찌푸리셨다.

«쟈(남편을 말한다)는 교수가 될 줄 알았는데 빨갱이가 돼가지고 데모하는 게 뉴스에 나오더니 이제는 게한테까지 데모하는 걸 가르치고 남세스러워서 원....»

어머님은 이렇게 불평하셨고 대게가 러시아 출신이므로 아마도 원래 빨갱이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려드려야 하는지 내가 고민하는 사이에 '너도 얼른 자라' 하시더니 안방으로 표표히 들어가 문을 닫았다.

 

대게도 잠을 자는지, 아니 생물이니까 어떤 식으로든 휴식을 취하겠지만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잠을 자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목격한 바에 따르면 술 취한 대게는 대자로 뻗어서 잔다. 물론 다리가 열 개니까 인간과 같은 대(大)자는 아니고 다리가 많이 달리고 중간이 둥근 비(非)자에 더 가까울 것이다. 하여간 대게는 우리집 거실에 쓰러져 다리를 뻗고 잘 잤다. 그리고 나는 침실에 들어와서 이미 코를 골며 의식을 잃은 남편 옆에 누워 어쩐지 크림 반도 해저에 뚫린 구멍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점유한 이후 크림반도의 고질적인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목으로 크림반도 인근 흑해 바닥에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내가 알기로 구멍을 26개 정도 뚫었다는데 크림반도의 물 부족 문제가 해결됐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고 우크라이나측에서 크림반도로 식수를 공급하겠다고 제안했는데 러시아는 물론 거절했다. 우크라이나인으로서 크림반도에 살고 있다가 하루아침에 러시아인이 되어 옴짝달싹 못 하게 된 현지 사람들도 문제지만 바다 밑바닥에 그렇게 무차별로 구멍을 뚫었다면 해양 생태계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크림반도만이 아니라 러시아는 그 유명한 가스관을 우크라이나나 폴란드 등 러시아와 사이가 나쁜 나라들을 거치지 않고 유럽연합 국가인 독일로 직접 연결하기 위해 «노드스트림 2»를 건설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은 해양생태계를 전혀 파괴하지 않았으며 심해 생물들은 잘 살고 있다는 자체 조사 결과를 내놓았고 노드스트림 2는 이미 완공되었으므로 내 의견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겠지만 나는 러시아측 자체 조사 결과를 믿지 않는다. 그리고 러시아는 최근 발트 해에서 핵실험을 진행했으며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인근 바다에 핵분열로 인해 생기는 방사성 동위원소가 이상하게 높은 수준으로 검출된다고 보고하여 국제 핵실험 금지 조약기구가 움직이자 핵실험 사실 자체를 완강히 부인했다. 스웨덴과 면한 발트해 지역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러시아 핵물리학자가 핵실험의 존재를 인정하고 자신과 동료들이 피폭되어 위험한 상태라고 구조를 요청했으나 러시아 정부에 의해 묵살당했고 이 연구원의 행방은 이후 알 수 없다. 러시아 최대이자 세계 최대의 공영 천연가스 회사인 가즈프롬은 북극에 인접한 카라 해(Kara Sea) 인근의 야말 반도에서 석유를 채취하기 위해 18개의 유전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 지역에서 석유가 유출되어 토양과 강물을 오염시키고 있다. 이 모든 일들이 작년, 재작년, 올해 사이에 일어났다. 그리고 내년, 내후년이 되면 일본이 원전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할 것이다. 바다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니며 그러므로 후대를 위해 보호해야 한다고 러시아 지질학자가 1940년대에 이미 경고했지만 그런 얘기는 아무 소용도 없었고 내가 아무리 플라스틱을 적게 쓰고 분리수거를 열심히 해도 바다에 방사능 오염물질을 국가 단위로 쏟아붓는 데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북극해도 발트해도 동해도 모두 오염되고 깨지고 부서졌다. 도망칠 곳은 없다. 인간도 대게도, 어디에도 갈 수 없다. 코를 골며 잠든 남편에게 나는 이런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조금 울었다.

«그러니까 싸워야죠.»

잠든 줄 알았던 남편이 중얼거렸다.

«싸워서 못 하게 해야죠.»

«그렇지만 어떻게요? 게는 집게발이 전부인데 이걸 다 어떻게 막아요?»

«이길 것 같으니까 싸우는 건 아니잖아요.»

남편이 돌아누우며 웅얼웅얼 대답했다.

«도망칠 데가 항상 있으니까 싸우는 것도 아니고.»

«그럼 오빠는 왜 싸우는데요?»

세상을 바꾸려고, 라고 그는 말했었다. 학생 시절에 그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모든 조직에 속해서 가장 험한 현장에서 가장 격렬하게 싸웠던 이야기를 그는 자주 들려주었고 그래서 내가 언젠가 물어보았다. 세상을 바꾸려고. 그래서 그렇게 싸운 끝에 세상이 바뀌었냐고 묻는다면, 그렇게 그가 현장에서 30년을 보낸 지금, 그는 세상이 바뀌었다고, 자신이 세상을 아주 조금이나마 바꾸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0년이나 지나서, 눈가에는 주름이 생기고 손목과 어깨와 허리가 수시로 아프게 된 지금에야 말이다. 싸워서 세상을 바꾼다는 건 그런 것이다. 주로 허리와 어깨가 아픈 작업이다.

«안 싸울 수는 없잖아요.»

남편이 돌아누워 나를 쳐다보았다.

«열 받으니까.»

그건 그렇다. 남편이 팔을 뻗어 나를 품에 안았다. 가슴으로 끌어당겨 꽉 껴안고 다시 코를 골며 잠들어 버렸다. 나는 남편의 옷과 이불 사이에 얼굴을 묻고 숨쉴 공간을 찾기 위해 잠시 버둥거려야 했다. 답답하고 따뜻했다.

나의 결혼생활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혼자 살았고 생활공간 안에 다른 사람이 함께 있다는 사실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상당히 노력해야 했다. 남편은 나와 살아온 이력도 생활방식도 완전히 달랐다. 남편이 술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남편이 아니라 위원장님이던 시절부터 알고 있었지만 결혼하고 보니 남편은 초저녁에 잠들었다가 오밤중에 일어나서 새벽까지 밤새 술을 마시거나 몇 시간씩 뭔가 먹는 습관이 있었고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 보면 식탁과 거실에 술병이 즐비하거나 정체불명의 해양수산물 부스러기가 바닥에 잔뜩 깔려 있었다. 분명히 어제 저녁에 다 치우고 잤는데 일어나 보면 다시 치우기 전 상태로 돌아가 있어서 결혼하고 얼마 안 됐을 때는 (지금도 얼마 안 됐지만) 뭔가 타임루프 같은 현상일까 고민하기도 했다. 아무리 치워도 타임루프처럼 다음날 아침이면 도로 원상태로 돌아가는 바람에 치우다 치우다 지쳐서 대판 싸우기도 했지만 어쨌든 남편은 김가루와 멸치 부스러기(로 판명되었다)를 여전히 흩날리면서도 다 먹고 나면 스스로 치우기 시작했고 나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노력했으며 그가 자신의 싸움을 해 왔고 지금도 하고 있듯이 내가 나의 싸움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게 어떤 싸움인지 서로 언제나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이 사람하고 결혼했다고, 나는 답답하고 따뜻한 남편의 팔에 갇힌 고개를 힘겹게 돌려 자세를 고치며 생각했다. 이 남자와 결혼한다면 마지막 순간까지,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질 줄 알면서도,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언젠가는 끌려나가 사라지더라도 어쨌든 끝까지 고개를 높이 들고 목청껏 외치면서 사라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인간을 위해서든, 난데없이 등장한 대게를 위해서든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는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검은 정장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오랜만입니다.»

검은 덩어리가 말했다. 그러니까 일 년 남짓 전에 나를 여러 가지로 멀미하게 했던 그 해양정보과라는 정체불명의 부서 소속 검은 정장 사람이었다. 남편은 여전히 침실에서 코를 골고 있었다. 어젯밤 마신 술의 양으로 보아 빠른 시간 내에 깨어날 것 같지 않았다. 대게는 그 옆의 침실 바닥에 여전히 아닐 비(非) 자 모양으로 뻗어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신 어머님이 걸리적거린다고 남편을 시켜서 치워 놓은 것이었다.

검은 덩어리가 무감정하게 말했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됐어요'였지만 예의상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내가 위원장님에게 홧김에 사랑을 고백하기까지 이 검은 정장 사람들이 위원장님과 같은 취조실에 하루종일 가둬놓거나 오며가며 멀미를 시켜준 공로도 없지 않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떠올리며 마음이 따뜻해지기 전에 검은 덩어리가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이야기했다.

«러시아 대게 어디 있습니까?»

«어떡하시려구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죽이지 마세요. 동료들이랑 다같이 살겠다고 여기까지 도망쳐 왔다가 잡혔단 말이에요.»

«죽이다뇨. 그럴 리가요»

검은 덩어리가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럼 어떻게 하시려고요?»

내가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고 말했다.

«누굴 좀 만나게 해 주시면 됩니다.»

검은 덩어리가 조용히 말했다.

 

러시아는 2019년 여름과 2020년 여름, 2년 연속으로 전투훈련 중 한국의 영공을 침범했다. 2019년에 처음 침범이 일어났을 당시 한국 정부가 항의하자 주한 러시아 대사관은 실수였다며 사과했으나 불과 몇 시간 뒤에 모스크바가 직접 다시 답변하였다. 그 답변의 내용을 요약하면 «한국 정부가 잘못 안 것이며 러시아군은 타국 영공을 침범한 적이 없는데 남한이 러시아를 음해하고 있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2020년 여름에도 러시아군이 똑같이 정기 전투훈련 중에 한국 영공을 침범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이어서 2021년 여름에는 동해안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한국 어선들이 물고기를 따라서 북쪽으로 이동했다가 러시아 해군에게 위협사격을 받는 사건이 발생했다. 고기잡이를 하는 해상에 러시아 해군이 나타나자 한국 어선들은 한국 해양수산부에 문의했고 한국 해양수산부가 러시아 정부에 문의했으며 러시아 정부는 괜찮다고 대답했는데 러시아 해군은 고기잡이하는 민간인들에게 위협사격을 가한 것이다. 러시아 정부는 여기에 대하여 어떤 공식적인 사과도 해명도 내놓지 않았다. 이미 2019년 영공 침범 사태가 일어났을 때부터 한국 국방부와 외교부는 러시아를 한국의 국가안보에 위협이 되는 대상이라 정의한 터였다.

검은 덩어리는 여기까지 말하고 의미심장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이런 얘기는 해양정보과에 속하지 않은 나도 지난 몇 년간 뉴스에서 봐서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전 위원장님 현 남편님도 그렇고 이 검은 덩어리도 그렇고 남자들은 어째 상대방이 자기와 같은 비장애인 성인 남성이 아니면 아무 것도 모를 거라 생각하고 다들 아는 사실을 길게 설명하는 앙증맞은 버릇이 있다고 나는 조금 짜증스럽게 생각했다. 배가 매우 고팠다. 나는 아직 아침 커피 한 잔도 마시지 못했다.

«그래서 재작년부터 러시아측 해양정보과하고 연락을 취해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양국간에 위급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대화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러시아측 해양정보과가 좀처럼 협조를 하지 않는 겁니다.»

검은 덩어리가 말했다. 러시아에도 해양정보과가 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냉전을 45년이나 이끌어왔고 냉전 종식과 소련 해체 이후에도 현재 대통령인 П모씨의 정적들을 대략 2003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효율적으로 제거하고 있는 나라이니만큼 KGB의 후신인 국가 안보 서비스(FSB)에 속하거나 속하지 않은 기관으로 해양정보과가 따로 있다고 해도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요?»

내가 물었다. 검은 덩어리가 여전히 무감정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대답했다.

«러시아 해양정보과를 이쪽으로 불러 와야지요.»

«어떻게요?»

내가 다시 물었다. 그 순간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아침 먹었어요?»

남편이 헝클어진 머리로 눈을 비비며 침실에서 나오면서 나를 향해 물었다. 열린 문 사이로 남편 뒤에는 바닥에 아닐 비(非) 자로 뻗어 있던 술 덜 깬 러시아 갑각류가 검은 덩어리를 보고 흠칫 놀라는 모습이 보였다. 흠칫 놀라는 집게발의 흔들림이나 눈의 움직임은 사람이나 대게나 이상할 정도로 똑같다고 나는 두서없이 생각했다.

«오랜만입니다.»

검은 덩어리가 남편을 보고 똑같이 무감정하고 차분하게 인사했다.

«손님이 또 왔냐?»

어머님이 안방에서 내다보았다.

«쟈도 데모하는 애냐?»

어머님이 물었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남편이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손님은 아침 먹었다냐?»

어머님이 재차 물었다. 어머님은 언제나 가장 중요한 사안을 가장 빨리 파악한다.

«아침 먹어라. 차려주께.»

이렇게 말하며 어머님은 부엌으로 들어갔다.

 

러시아 정부는 가스관 건설작업에 동원한 대게들의 다리에 위치추적 칩을 꽂았다. 그 칩을 대량으로 모으자는 것이 검은 덩어리가 내놓은 계획이었다. 대게 위치추적 칩이 갑자기 이동해서 한 곳에 전부 모이면 러시아 해양정보과 측에서 수상하게 여기고 무슨 일인지 알아보러 올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칩을 어떻게 떼요?»

내가 겁에 질려 물었다.

«대게들 다 죽이게요?»

«아뇨, 아뇨.»

검은 덩어리가 아침식탁 위로 숟가락을 내저었다. 어머님이 눈쌀을 찌푸렸다. 검은 덩어리가 눈치를 보더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나는 마음 속으로 조금 기뻤다.

«칩이 꽂힌 다리 하나만 떼는 겁니다. 게들은 원래 포식자이기 때문에 다른 생물들하고 싸우다가 다리가 떨어지기도 하고 그러거든요. 하나쯤은 없어도 사는 데 큰 지장 없을 겁니다.»

그거야 댁은 인간이니까 쉽게 말하겠지만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나보고 너는 사지가 네 개나 있으니까 그 중에서 팔이나 다리를 하나 떼서 내놓으라고 하면 몹시 싫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검은 덩어리가 갑자기 나에게 명령조로 말했다.

«그렇게 정리해서 말씀 좀 전해 주시죠.»

«제가요?»

내가 짜증이 나서 되물었다.

«왜요? 해양정보과에는 러시아어 통역 없어요?»

«그냥 해요.»

남편이 옆에서 나를 찔렀다.

«저놈들한테 맡기면 예브게니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모르잖아요.»

«예브게니가 누구예요?»

«게요. 자기 이름이 예브게니(Yevgenii)랬어요.»

나도 모르는 대게 이름을 남편은 대체 언제 알아냈단 말인가? 애초에 남편은 러시아어를 배운 적이 없는데 게 이름이 예브게니인 건 어떻게 알았지? 그런데 그 이름은 게라서 예브'게니'인가? 그렇지만 남자 이름 겐나디(Gennadii)의 애칭은 '게냐'니까 게한테는 게냐가 더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두서없는 생각들을 아침 식탁에서 전부 다 늘어놓을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어쨌든 검은 덩어리의 제안을 대게 예브게니에게 통역하는 데 동의했다. 그리하여 아침식사를 마친 후에 나는 어디서 많이 보았던 검은 차에 또 다시 실려서 또 다시 익숙한 창문 없는 건물로 끌려갔다. 러시아 노동대게의 대표자 예브게니가 나와 함께 타고 갔기 때문에 차 안에서 게 냄새가 나서 나는 예상대로 또 다시 멀미를 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대화는 쳇바퀴를 돌았고 무척 재미없었다. 검은 덩어리는 남편이 물었던 것과 대략 비슷한 내용을 예브게니에게 질문했다. 누가 너희를 고용했는가. 동해 가스관 건설의 건설주체는 누구인가. 대게들을 고용한 주체와 가스관 건설 주체가 같은가. 가스관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어지는가. 추정 운송량은 얼마인가. 언제부터 작업을 시작했는가. 작업에 동원된 대게는 몇 마리인가. 현재 어디까지 작업이 진행되었는가. 예상 완공일은 언제이며 가스관 가동은 언제로 예정되어 있는가. 예브게니는 할 수 있는 한 성실하게 검은 덩어리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 같았지만 검은 덩어리는 했던 질문을 또 하고 또 하면서 계속 같은 대답을 반복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신라의 화랑오계를 러시아어로 다시 읊는 편이 지금 이 대담보다 백 배는 더 재미있을 것 같았다.

마침내 지루한 질의응답을 마치고 검은 덩어리가 태블릿을 펼쳐 지도를 보여주었다.

«지금 여기 있는 당신의 가족과 친구들을 이쪽으로 이주시켜 드릴 겁니다.»

검은 덩어리가 지도상의 어떤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쪽은 러시아 정부의 영향이 미치지 않으며 핵실험이나 석유 누출로 오염되지 않은 지역입니다.»

나는 통역했다. 예브게니의 눈자루에 달린 여러 개의 눈동자가 나와 검은 덩어리와 지도를 번갈아 바라보며 바쁘게 움직였다.

«언제 떠납니까?»

예브게니가 물었다. 검은 덩어리가 대답했다.

«칩이 들어있는 다리를 우리에게 넘겨주면 곧바로 이주시켜 드립니다.»

- Ногу? С чипом? (다리를? 칩과 함께?»

예브게니의 눈자루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검은 덩어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몸은 움직이지 않은 채 눈자루만 움직여 나를 바라보면서 예브게니가 물었다.

- Хотят, чтобы я дал им одну из моих ног? (내 다리 하나를 달라고 하는 건가요?)

- Трудно вам будет, да? (역시 어렵겠죠?)

내가 동정적으로 말했다.

- Значит, снять ногу и убежать? (그러니까 다리를 떼어내고 도망치란 말이죠?)

예브게니가 대답 대신 다시 물었다. 그리고 단호하게 집게발을 내저었다.

- Нет. Не буду. (아뇨, 안 할 거요.)

«안 한다는데요.»

내가 조금 곤란해져서 검은 덩어리에게 말했다.

«이거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설득해 보세요. 위치추적 장치를 떼어내고 러시아 정부가 쫓아오지 못할 곳으로 이주하는 게 최선이라고요.»

검은 덩어리가 강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내가 그 말을 통역하기 전에 예브게니가 먼저 말하기 시작했다.

- Я не трус. Мы, племя великих крабов, не трусы. За нашу свободу не будем бежать, организуемся мы и потребуем... (나는 겁쟁이가 아니오. 우리들 대게의 종족은 겁쟁이가 아닙니다. 우리의 자유를 위해 우리는 도망치지 않고 조직화해서 요구를....)

- Тогда погибнете вы. Все. (그러면 당신들 죽을 겁니다. 모두 다.)

검은 덩어리가 갑자기 말했다. 예브게니도 나도 깜짝 놀랐다.

«아니, 러시아어 할 줄 아셨어요?»

예브게니가 입을 열기 전에 내가 먼저 말했다. 남편은 러시아어도 못하면서 예브게니의 이름을 알지를 않나 검은 덩어리는 러시아어로 유창하게 말하지를 않나, 이 사람들 나만 빼고 어디서 러시아 갑각류하고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완벽하게 배워가지고 온 건가 생각하니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럼 직접 통역하지 저는 왜 여기까지 끌고 오신 거예요? 저 바쁘다고요.»

«민간인이 어쩌다 우연히 이런 외교상의 비밀을 알게 됐는데 무조건 믿고 놔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검은 덩어리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러시아어를 모르는 척하며 내가 예브게니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감시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나는 점점 더 화가 났다. 검은 덩어리는 여전히 무감정하고 차분했다.

«그리고 위원장님하고 선생님은 저희하고 이미 한 번 만나신 적도 있고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위원장님 아니에요!»

내가 소리를 빽 질렀다.

«재작년에 임기 끝났다고요!»

사실 내가 화난 지점은 그 부분이 아니었지만 사실관계를 짚어볼 때 화를 낼 수 있는 사안이 그것밖에 없었다.

검은 덩어리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의 분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검은 덩어리는 나와 예브게니를 향해 고개를 들이밀고 천천히 한국어로 말했다.

«러시아가 2012년부터 비정부단체에 관한 법을 개정해서 외국에서 후원을 받는 러시아 내 비정부단체는 모두 '외국 에이전트'로 지정한 사실을 알고 계시지요?»

물론 알고 있다. 이 때문에 러시아 내에서 시민단체의 활동이 크게 축소되었다. 러시아는 시민단체에 대한 자국민들의 후원이라는 개념이 희박하여 대부분 비영리 시민단체의 활동은 해외에서 받는 지원으로 유지된다. 그런데 외국에서 단 한 푼이라도 후원을 받은 사실이 있으면 당장 러시아 국세청이 들이닥쳐 세무조사를 해대서 어느 시민단체든 세무자료 준비하다가 모든 다른 작업이 마비되어 본래 하려던 활동은 전혀 못 하는 상태가 되고 그러다가 자료가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당장 단체장이 세금포탈 혐의로 체포되어 사실상 이 법을 통해 러시아 정부는 자국 내의 독립적인 시민단체 운동, 즉 인권이나 환경이나 동물보호 등의 의제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자발적이고 진보적인 움직임들을 짓밟아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반 시민단체가 깨끗하게 활동해도 후원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외국 에이전트가 되는데 실제로 외국 반체제인사가 노동조합 설립하라고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러시아 정부가 이 대게들을 가만 놔둘 것 같습니까?»

«대게는 시민이 아니잖아요?»

내가 풀이 죽어서 미약하게 반박했다. 남편이 반체제 인사라는 사실은 반박할 수 없었다. 나도 반체제 인사에 끼워주지 않은 것은 매우 섭섭했다.

«바로 그겁니다.»

검은 덩어리가 목소리는 무감정하고 차분하지만 눈만은 반짝이며 더욱 고개를 들이밀었다.

«인간도 아닌데 대게가 노동조합을 조직한다고 러시아 정부가 그 권리나 요구를 존중할 것 같습니까?»

그러는 너야말로 진짜로 대게들을 한국의 에이전트(첩자)로 활용하려는 것 아니냐는 반박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쩐지 그렇게 말했다가는 나도 예브게니도 정말로 이 창문 없는 방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만 같았다. 예브게니는 겁쟁이가 아닌 용감한 대게일지 몰라도 나는 겁 많고 소심한 인간이었다. 남편이 보고 싶었다.

- Что? Что он говорит? (뭐죠? 뭐라는 겁니까?)

예브게니가 조급하게 물었다. 내가 대답했다.

«노동하는 존재의 권리는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아요. 위치추적장치를 떼고 도망가요, 예브게니.»

말하면서 나는 어쩐지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권력기구는 인간이 만들었지만 인간의 생명도 존중하지 않아요. 인간이 아닌 생물도 똑같이 이 지구에서 살아갈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을 거예요.»

예브게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말했다.

«그러니까 떠나요. 잔인한 권력이 쫓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가요. 가서 행복하게 살아요.»

그리고 나는 울었다. 비인간 생물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인간이 망쳐버려 살 수 없게 된 바다, 부서진 해저, 죽은 땅과 도망칠 곳 없이 좁아져 버린 지구가 한없이 미안했지만, 그러나 우는 것 외에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예브게니가 다른 다리들로 나를 받치고 집게발에 기대어 울게 해 주었다. 집게발은 비린내가 나고 거칠고 단단했다. 나는 그 거친 단단함에 기대어 울었다. 검은 덩어리도 예브게니도 내가 다 울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예브게니는 마침내 동의했다.

- Дам ногу. Мы все дадим. И чип и ногу. (다리를 줄게요. 우리 모두 줄게요. 칩도 다리도.)

내가 흐느끼며 대답했다.

- Спасибо. Простите.... (고마워요. 미안해요....)

예브게니가 딱딱한 다리로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 Ни за что. (괜찮아요.)

창문 없는 방에 예브게니를 남겨두고 나올 때 나는 예브게니와 그의 동료들을 잘 돌봐줘야 한다고 몇 번이나 당부했다. 문앞에서 머뭇거리며 여전히 눈에 눈물이 가득한 나를 보고 예브게니가 짧게 인사했다.

- Прощайте. (잘 가요.)

돌아오는 차에 예브게니 없이 혼자 타서 나는 차 안에 남은 게 냄새 때문에 울면서 멀미를 했다.

 

일주일 뒤에 검은 덩어리와 그의 동료 검은 정장 사람들이 커다란 스티로폼 상자를 몇 개나 집으로 가지고 왔다. 안에는 대게 다리가 들어 있었다. 요리하지 않은 상태였다.

«다리만 뗐습니다.»

검은 덩어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게들은 다치지 않았어요.»

나로서는 그 말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어머님과 함께 게 다리를 쪘다. 나는 해양수산물을 다룰 줄 몰랐기 때문에 찌는 과정에 참여하지 않고 상을 차렸다. 그리고 어머님과 남편과 나와 검은 덩어리와 그의 동료들은 모두 거실에 둘러앉아 게 다리를 실컷 먹었다. 양이 정말 어처구니없이 많아서 나는 도중에 포기하고 구경만 했다. 남편이 평소보다도 더욱 눈부신 식욕을 발휘했으나 결국은 그 남편조차도 배가 너무 불러서 포기하고 말았다. 검은 덩어리와 그의 많은 동료들이 남은 게 다리를 모두 먹어 치웠다.

게 다리에는 모두 예브게니가 말했던 까맣고 납작한 칩이 들어 있었다. 집게발도 있었고 그냥 다리도 있었고, 게의 해부학에 박식하지 않아서 정확한 명칭은 알지 못하지만 다리의 종류는 여럿이었는데 모두 다 칩이 들어있다는 사실은 같았다. 게 다리를 먹다가 칩이 나오면 우리는 검은 덩어리에게 건네주었고 그러면 검은 덩어리는 동료에게 건네주었으며 검은 덩어리의 동료는 뭔가 기계로 칩을 훑은 뒤에 굵은 집게 같이 생긴 도구를 사용해서 칩을 부수어 다 먹은 게 다리 껍질이 들어 있는 스티로폼 상자에 넣었다. 검은 덩어리와 그의 동료들이 스티로폼 상자를 모두 차에 싣고 떠나려 할 때 내가 검은 덩어리에게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예브게니는 잘 갔어요?»

«그게 누굽니까?»

검은 덩어리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나를 다시 쳐다보지 않고 차에 올라타고 떠나버렸다. 검은 정장 요원들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대답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려 해도 나의 마음에 아무런 위안도 되지 않았다.

 

그 뒤로 대게 노동자와 그의 동료들이 어떻게 됐는지는 나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검은 덩어리가 우리에게 연락처 같은 걸 남겼을 리도 없고 러시아 수산업 시장에 딱히 아는 사람이나 아는 게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마가단 인근 바다에 살던 대게들이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나에게 알려줄 수 있는 생물은 아무도 없었다. 포항에 길 잃은 러시아 선원들이 무리지어 나타났는데 어쩐지 항구가 아니고 얼마 전에 불이 났던 쓰레기 매립장에서 헤매고 있어서 한국 정부가 이들에게 코로나 검사를 실시하고 격리했다는 뉴스가 나왔을 때 남편은 저 러시아 선원들이 선원이 아니고 그 러시아 해양정보과 사람들일 것이라는 추측을 내놓았고 나도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었고 우리는 검은 덩어리를 또 만나서 또 멀미를 하며 창문 없는 방에 실려가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그 추측을 너무 진지하게 파고들거나 너무 크게 소리내어 말하지 않고 그냥 넘겨 버렸다.

다만 몇 달인가 지나고 나서 수업준비를 위해 유튜브에서 기초 러시아어 관련 동영상을 검색하다가 나는 우연히 추천 동영상 목록에 «Краб» (게)라는 제목의 영상이 있는 것을 보았다. 링크를 눌렀다. 영상은 12초 정도로 아주 짧았으며 올린 사람도 Краб, 즉 게였다. 화면에는 거의 10초 지점이 넘어가도록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았으며 단지 새까맣고 어두워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어둠은 동영상에 오류가 났을 때와 같은 인위적이고 깊이도 높낮이도 없는 평면적인 까만색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안에서 뭔가 일렁이는 것 같은, 짙은 액체가 움직이는 것 같은 동적이고 살아 있는 어둠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2초 동안 화면에는 다섯 글자가 나타났다.

Ев. жив

예브게니는 살아 있다.

나는 그 영상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돌려 보았다.

나중에 남편이 퇴근해서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그 영상을 남편에게도 보여주려 했다. 그러나 현관에 나갔다가 컴퓨터 앞으로 돌아온 그 몇 분 동안의 시간에 예브게니가 살아있다고 나에게 알려준 동영상은 사라지고 없었다. 화면 속 동영상에는 러시아 뉴스가 떠 있었고 네모칸 안의 잘생긴 러시아 인간 앵커가 러시아가 터키와 장기간 대규모 가스수출 계약을 맺었다는 소식과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가 준공한 가스관 노드스트림2를 우크라이나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한다고 성명했다는 소식을 빠르고 정확한 러시아어로 전해주고 있었다.

댓글 4
  • No Profile
    한때는나도 21.10.01 14:57 댓글

    정말 멋지고 재미있는 빨갱이 첩보 판타지 스릴러였습니다.

  • No Profile
    한때는나도 21.10.01 14:57 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글쓴이 정도경 21.10.02 07:05 댓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애초에 대게가 가스관을 지을 리가 없지요... 그러므로 칩을 포함해서 그 뒤의 전개도 전부 헛소리입니다. 다리에 칩을 꽂은 것은 칩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대게 다리를 마음껏 먹는 전개를 위한 어설픈 설정이었습니다 (대게 먹구 싶어여 흐릅)

     

    제목도 주인공도 대게지만 사실 해양오염과 한국 주변을 둘러싼 양아치 국가들의 환경에 대한 깡패같은 태도를 한탄하고 싶어서 쓴 이야기입니다. 러시아도 일본도 바다를 끊임없이 오염시키거나 오염시킬 궁리를 하고 있는데 한 개인으로서 남의 나라 정부가 하는 일을 어떻게 막을 도리가 없고 너무 답답합니다.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해양오염에도 관심 좀 ㅠㅠㅠ 부탁드립니다 ㅠㅠㅠ 흐엉

  • 정도경님께
    No Profile
    한때는나도 21.10.04 16:55 댓글

    게 이야기와 현실 뉴스들이 섞이는 것을 보고 그것이 주제인가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말씀처럼 주변 강대국들이 오염물질을 마구 방류하는 걸 어떻게 할지 답이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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