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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달팽이와 다슬기

2007.05.26 22:5605.26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그 해에 우리집은 이사를 갔다. 원래 우리 집은 내항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어촌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멸치잡이 배를 타셨고, 어머니께서는 동네 과수원에 나가서 일을 하셨다. 그러다가,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나서부터는 아버지께서 외국으로 멀리나가는 큰 배를 타시게 되었다. 그렇게되자 나는 1년에 한 달 정도만 아버지와 같이 지냈을 뿐이어서, 자연히 아버지와는 같이 있어도 서먹할 뿐 별 할 일도, 할 말도 없는 사이가 되었다.

사실 그게 아니라도 아버지 보다는 어머니와 훨씬 더 친했다. 아버지는 결혼을 늦게 하셔서 텔레비전 연속극 같은 데 나오는 할아버지들 보다 더 나이 들어 보였다. 말수도 많은 편이 아니셨고, 그렇다고 딱히 자잘한 이야기거리들을 많이 만드시는 편도 아니었다. 그에 비해, 어머니께서는 무척 젊으신 편이었고, 그래서인지 다른 집 어머니들보다도 훨씬 예뻤다. 어머니 고향은 베트남 나짱이었는데, 아는 것도 많으시고 나를 데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많이 해주셔서 훨씬 재밌는 분이셨다. 가끔 어릴 때 부터 하던 베트남어로, 내가 투정을 부리거나 조르거나 하면, 어머니께서는 참 재밌어하시며 웃으시기도 했다.

그 동네에 살 때 친구들은 훈이, 기식이, 성우 같은 아이들이었다. 나는 딱히 무슨 설명할 거리가 많은 아이는 아니었지만, 또 게중에 모아 놓아보면 그다지 부족한 아이도 아니었다. 가끔 친구들과 다툴때가 있었고, 그러면, 아이들은 곧잘 나를 "베트콩"이라고 놀리기는 했다. 하지만, 그러면, 우리 패거리들은 그 녀석의 어머니에 대해 알아내서는 중국에서 온 사람이면 "오랑캐"라고 했고, 필리핀에서 왔다면 "검둥이"라고 맞받아쳤다. 태국에서 온 사람이라면, "에이즈"라고 했고, 어머니가 러시아나 중앙아시아권에서 온 사람이라면, "나이트" 라고 놀리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욕하며 싸우다보면, 선생님들이 질겁을 하면서 그런 말 하면 안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만한 애들 싸움이란 결국 공을 차다가 금 밖으로 나갔느냐 안나갔느냐를 두고 싸우는 따위였다. 그래서, 무슨 뜻인지도 모를 욕을 하며 무서운척 굴다가 결국 몇 밤 지나고 나면 다시 친하게 지내기 마련이었다.

아버지가 다시 한 번 다녀가신 후, 우리가족은 이사를 가기로 했다. 우리 가족이라고는 하지만, 어머니와 나 둘 뿐이었고, 이사라고는 하지만, 자동차로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 근처 동네로 가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몽돌이 섬이 보이는 언덕배기에 있던 집에서 떠나 우리는 신도시 언저리에 있는 아파트의 15층에 살게 되었고, 나는 친구들을 떠나서 새 학교에 오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면, 열린다고 아무 생각 안하고 그냥 타면 안돼. 가끔 엘레베이터가 고장나면,  문만 열리고 엘레베이터 바닥은 안 올라올 때가 있거든. 그러면, 여기가 몇 층이야?"
"15층."
"그렇지. 그러면, 엘레베이터가 올라온 줄 알고 그냥 들어가다가 밑으로 떨어진단 말이야. 그러면 큰일나. 알겠지."
"알았어."

어머니는 짐짓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엘레베이터 앞에서 나에게 그렇게 설명하셨다. 하지만, 그날 어머니께서는 아파트의 엘레베이터며 계단이며 높다란 베란다가 참 좋아 보이시는지, 싱글벙글하시며 즐거워 하시는 것을 어린 나도 뻔히 알 수 있었다. 그러자니 나도 괜히 기분이 들떴다.

어머니께서는, 떡을 사서는 옆집과 아래층, 위층으로 주욱 돌렸다. 대부분 초인종을 눌러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나는 그때 초인종을 누르면, 집안 인터폰에 있는 화면으로 얼굴이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낯선 집에서 초인종을 누르고 조금은 긴장된 모습으로 문 앞에서 기다리는 어머니 모습이 그 집안 인터폰 화면에 그대로 나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집안 사람은 낯선 사람의 얼굴이 비치니, 그 화면 속의 어머니를 조용히 쳐다보면서도 아무도 없는 척 가만히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속으로 "안녕하세요, 이번에 1503호에 이사온..." 하는 인사말을 연습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필시 현관문 안쪽에서는 잡상인인지, 종교단체에서 온 것인지 귀찮아 아무도 없는 체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자니, 나는 어쩐지 그런 모습으로 저 집안 인터폰 화면에 철문앞에서 기웃기웃 기다리는 어머니의 모습이 비친다는 것이 좀 싫어졌다.

그렇거나 말거나, 어머니께서는 여덟집을 계속 돌아다니셨고, 마침 시장을 봐 오던 1803호의 "은이 엄마"라는 사람과 마주치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1503호에 이사왔어요."

어머니께서는 웃으시면서, 그 "은이 엄마"에게 떡을 건넸다. 은이 엄마는 좀 나이든 아줌마였는데, 나를 보더니, 몇 학년이냐고 묻고는, 자기네 딸은 5학년이라고 하면서 웃어댔다. 어머니가 조금 마른편인데 비해서, 그 아줌마는 약간 통통한 편이었다. 그런데, 그 아줌마는 그냥 1803호 아줌마일 뿐이면서도, 어딘지 옛날 동네의 과수원 주인 아줌마 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조금 주눅이 들어, 가는 목소리로 아줌마가 묻는 말에 겨우겨우 대답을 했지만, 어머니께서는 마침내 떡을 줄 사람을 발견한 것이 반가운지, 한참을 서서 이야기를 했다.

그날 저녁에, 어머니께서는 내일은 나에게 학교에 가야하니 일찍 자라고 했다. 하지만, 막상 어머니께서는 자리에 누워도 새 집에서 잠이 잘 안오시는지, 계속 부엌 옆의 창고를 보거나, 화장실의 붙박이 장을 살펴보거나 하셨다. 어머니께서는 한참 복잡하게 전화번호를 누르면서 몇 번씩이나 아버지와 통화를 하려고 하시기도 했다. 아버지와 통화하시지는 못했지만, 그날 밤 어머니는 무엇이 그렇게 설레도록 즐거운지, 새 집에서 첫 밤에 잠을 잘 드시지 못하는 듯 보였다.

이튿날 새 학교에 가보니, 선생님들끼리 이런 저런 서류를 주고 받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나는 학교 복도에 서서 한참을 지루하게 기다려야 했다. 그러는 동안 이 학교 아이들을 찬찬히 살펴볼 수 있었다. 그날 기분 때분에 그냥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이 학교는 예전에 다니던 학교에 비해서 여자아이들은 좀 더 예뻐 보였고, 남자아이들은 조금씩은 더 키가 커 보였다. 나도 키가 작은 편은 아니어서 딱히 눌리는 기분이 든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 아이들은 싸우거나 욕을 해도, "베트콩"이니 "오랑캐"니 하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나는 만약에 여기서 싸우게 되면 뭐라고 소리를 질러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며 조금 겁을 먹었다.

"나랑 같이 가자. 자암깐만 기다려."

한 선생님이 나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그 "자암깐" 동안 안경을 벗어놓고, 콘택트 렌즈를 양쪽 눈에 끼우는 일을 했다. 그녀는 내손을 잡고 방향을 이끈 뒤에, 앞장서서 걸어서 교실로 걸어 들어갔다.

"새로 전학온 친구가 있어요."

이름 묻고 답하고, 아이들이 박수를 우르르 한 번 쳐 준 뒤에, 나는 맨 뒤쪽에 빈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것이 새 학교에서 보낸 첫날의 시작이었다.

선생님께서는 나에게만 이것저것 묻는게 좋지 않다고 생각하셨는지, 그날 아이들을 두고 손을 들게 해서 조사를 했다.

"모두, 눈 감아. 눈 뜨면 안돼."

선생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더니,

"아버지나 어머니께서 공무원이신 사람 손들어. 눈 뜨지 말고 손만 들어."

하시면서 아이들에게 손을 들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손 든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그 숫자를 세곤 했다. 선생님께서는 그런식으로 할머니나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아이나, 그렇지 않은 아이를 조사하시기도 했다. 또 집에 컴퓨터가 없는 아이가 있는지 묻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내 선생님꼐서 또 물으셨다.

"어머니가 한국 사람 아니신 분 손들어."

라고 하셨다.

나는 잠깐 가슴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나는 실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눈을 감은척 하면서 주위를 돌아 보았다. 우리 반에서 손을 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도 손을 들지 않았다. 속인 것도 아니고,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선생님 질문대로라면, 나는 손을 들지 않는게 맞았다. 하지만, 나는 꼭 잘못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쩐지, 나는 그날만큼은 그곳을 빨리 빠져나오고 싶어서, 수업이 끝나자, 청소도 하지 않고 집까지 달려왔다.

둘째날은 공교롭게도 시험 보는 날이었다. 보통 나는 자연은 좀 잘하고, 수학은 잘했다 못했다했다. 한편 음악은 몰라서 좀 틀리고, 실수해서 틀리고 해서 무척 못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 학교는 대부분 과목들이 옛날 학교보다도 한 달씩 진도가 빨랐고, 음악은 두 달 정도 느렸다. 그 탓에 나는 대부분의 과목들은 무슨 소리를 하는 지 몰라서 우수수 다 틀려버렸다. 그리고 음악은 두 달 전에 배웠던 것이 거의 생각이 나지 않아서 또 우수수 다 틀려버렸다. 점수나 등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모르는 문제가 계속 우수수 우수수 나와서, 자꾸만 허둥대고 무섭고 질리고 막막하고 했던 느낌만은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시험을 망쳤다는 느낌만은 정말 화끈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날 집에 가는 길에, 아이들은,

"나 시험 망쳤어."
"야, 내가 진짜 망쳤어. 너 8번 문제 답 뭐라고 했어?"

따위의 말을 하면서 어울려 갔다. 혼자 집에 가는 내가 보기에는, 녀석들의 표정은 유쾌하게 웃는 것 같기만 했다.

며칠 쯤 지나고 나니, 어머니께서 나를 영어 학원에 보내겠다고 하셨다. 나는 가기 싫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그러면 안된다고 하셨다.

"은이는, 벌써 3년째 다녀서 이제 중학교 때 꺼 배운다는데. 다른 애들도 다 다닌데. 그러다 너만 계속 공부도 못하고, 다른 애들이 바보라고 놀리면 좋아?"

어머니꼐서 그렇게 말씀하시며 내 손을 잡아 끌었다. 그것은 "이빨 안 닦으면 다 썩는다" 하는 것처럼 무섭게 위협하는 투가 아니었다. 오히려, 어머니께서 겁을 먹은 듯한 말투였다. 그러니, 어쩐지 나까지 무서워서 나는 따라나서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속 한켠에는 더 가기 싫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희 아카데미는 커리가 사실 상당히 프랙티컬 하거든요, 어머니. 보통 이런 학원들이 그냥 아무 캐어 없이 그냥 컨버세이션 클래스만 계속 하고, 머티리얼 부클릿만, 볼륨 원 불륨 투 넘어가는 걸로 진도 나갔다고 좋아하는데요. 어머니. 저희 아카데미는 그렇지 않아요."

나는 학원 "디렉터"가 설명하는 그 말을 처음 들으면서, 커리가 커리큘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도 음식을 말하는 줄 알았다.

"어머니, 저희 아카데미 커리는요, 지금 우리 친구 같은 경우에는 클래스 C로 어싸인 하는데요. 어머니, 그럼 원 위크에 포 클래스 해서, C 투 P 원 S 원 이거든요. 그래서 컨버세이션 투 클래스, 파닉스 원 클래스, 스피치 원 클래스예요, 어머니. 사실 컨버세이션 하면서 스피치하고 파닉스까지 같이 진행하는게, 지금 우리 친구 나이 또래에는 이피션시가 굉장히 좋거든요. 어머니."

한참을 설명을 듣고나서는, 어머니께서 몇 가지를 물으시고 끝으로 작은 목소리로 또 물으셨다.

"그럼, 회비는 한 달에 얼마나 되지요?"
"저희는 먼슬리 는 없고요. 원 이어 하고 투 이어 거든요. 그래서 투 이어에 교재비 합해서 천만원이고요. 원 이어에 교재비 빼고 오백만원입니다. 굳이 먼스 바이 먼스로 계산을 하면, 한 달에 사십만원 꼴이예요. 사실 원 이어 프라이스로 보면, 가격은 다른 아카데미하고 비교하면 좀 있는데요. 교재비 합해서 투 이어로 보시면 저희가 꼭 하이프라이스 정책으로 가는 것만도 아니에요."

어머니는 조금 놀라는 빛이 있으셨다. 그러더니, 몇 마디 더 이야기를 하고는 나와 함께 그곳에서 나왔다. 나는 어머니께서 좀 땀을 흘리고 한숨을 쉬시는 것도 보았다. 어머니께서는 그리고나서도 다른 영어 학원을 세 군데나 더 돌아보셨는데, 학원의 크기와 "디렉터"라는 인간의 얼굴만 다를 뿐이지 하는 이야기와 듣는 이야기는 거의 같았다. 그런 짓을 하루종일 반복하고 있자니, 난 좀 지긋지긋해져서, 이 영어 학원이라는 곳에 굉장히 가기 싫어지기까지 했다.

좀 칭얼거리고, 혼나고, 좀 심통부리고, 또 혼나고 하는 시간이 흐른 후에, 나는 마침내 처음 "커리" 들먹이던 학원의 사분의 일 쯤 되는 작은 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그 즈음 해서, 학교에서 나는 어느 정도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결코 좋은 자리는 아니었다. 두 달 먼저 옛날 학교에서 배웠던 음악은 금새 알아 먹을 수 있었지만, 음악은 원래 잘하는 과목이 아니어서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게다가, 중간에 한 달을 빼먹고 전학 온 다른 과목들은 계속 쌓이고 밀려서 도무지 잘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선생님이 수업시간이 많이 남는다 싶으면, 질문을 시키거나 발표를 하게하는 대상이 되었다. 그러면 나는 더듬거리거나 딴소리를 하는 역할인 것이다. 선생님께서는 쉽디 쉬운 초등학교 4학년 과목들을 도무지 제대로 알아먹지 못하는 나에게 괴로워 하셨다. 그리고, 꾸중하고 다시 가르치시는데, 그러면 꽤 많이 남은 시간도 선생님에게는 훌쩍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나에게는 해내기 어려운 숙제들이 많았고, 해봤자, 한두줄 끄적거리다가 접어 버리는 것이 적지 않았다. 나는 선생님께 꾸중을 자주 들었고, 나중에는 그냥 학교에서 선생님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나, 숙제를 하는 것 자체가 좀 싫어 졌다. 학교에 가는 것은 그냥 꾸중을 들으러 가는 짓 같았다. 숙제를 한다고 낑낑거리다보면, 자꾸만 잘못했다고 혼나는 상상만 되었다. 차라리 그런 것은 다 집어 던지고, 아무것도 생각 안하고 놀러다니는 쪽이 훨씬 속편한 일이었다. 어차피 욕먹기란 매한가지 아닌가 말이다.

그나마, 다니는 영어 학원의 윈스턴이 꽤 재미있는 사람이기에 영어는 좀 잘할 수 있었다. 학원은 작고 궁색한 편이었지만, 윈스턴은 웃기고 숙제도 곧잘 도와주는 사람이었다. 뉴올리언스에서 온 사람이었는데, 원장이 안 볼때면, 종종 똑같은 말을 뉴올리언스의 자기 친구들은 어떤 식으로 발음하는지 과장해서 웃기게 읊조리곤 했다. 일부러 좀 껄렁한척 하는 윈스턴의 표정이나 말투는 무척 재미있어서, 나는 처음 영어학원에 가기 싫어했던 것 치고는, 무척 많은 것을 익힐 수 있었다. 잘된 일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그렇게 영어만 좀 잘하는 덕분으로, 학교 선생님은 내가 가능성은 있지만, 게으르고 아는게 없어서 답답한 아이로 여기게 되었다.

내가 옆반 아이들끼리 싸우다가 팔이 부러진 것을 목격한 날이었다. 두 아이가 싸운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 사람은 나 밖에 없어서, 나는 교무실로 가서, 그 반 선생님과 두 아이의 어머니 사이에서 묻는말에 지루하게 계속 대답해야 했다. 세 사람은 서로서로 마구 다투는 모양이었는데, 거기에 성난 채 씩씩거리는 두 아이까지 섞여 있으니, 나는 어떤식으로 뭘 말해야할지 당혹스러워서 사실 두 눈으로 본 것도 잘 답할 수 없었다.

"야, 니가 봤다며. 봤다며. 이야기해봐. 본대로 이야기해 봐."

그렇게 소리지르는 세 어른과 두 아이에게 끼여 있는 것은 무척 울적한 일이었다. 나는 내가 혼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괜히 더더욱 말을 잘 못했다. 곧, 세 어른 중에 누가 먼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사람이 욕을 하기 시작해서 더 말은 거칠어졌다. 마침내, 다른 선생님 한 분이 나서서 다섯 인간들을 교무실 옆에 딸린 흡연실로 옮기게 했고, 나는 이 일행과 헤어질 수 있게 되었다.

교실로 다시 돌아가보니, 이미 담임 선생님은 왔다가시고, 아이들끼리 청소를 하는 중이었다. 나는 내 앞자리에 앉는 은영이에게 물었다.

"다 끝났어? 청소 당번 아닌 사람은 가도 되지?"
"너 지난 번에 숙제 안해서 오늘 청소 당번 아냐?"
"맞는데."

그렇게 대답하고나니, 나는 청소하는 시늉이라도 좀 내야할 것 같았다. 은영이가 다시 말했다.

"너 오늘 숙제는 알어?"
"뭔데? 영어야?"
"영어 아닌데. 오늘 숙제 쫌 많은데."

그러면서 은영이가 이야기하는 숙제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교과서에는 주몽이 알에서 깨어나서 도망가다가 거북이와 물고기를 만나 무사히 건너가고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 이야기 같은 옛날 이야기를 할머니나 아버지에게 물어 보고,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그 이야기 줄거리를 쓴다. 그리고 종이 두 장을 뒷면에 붙이는데, 하나는 자신이 쓴 이야기의 뜻과 교훈이고, 다른 하나에는 이야기를 해 준 할머니나 아버지에게 이야기의 뜻과 교훈을 써달라고 하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주위 사람에게 귀찮게 부탁해서 이야기를 듣는게 일이고, 그 줄거리를 쓰는 것도 일이고, 게다가 느낀점과 교훈을 맞춰 쓴다는 것도 일인데다가, 다른 사람에게도 내용을 받아 달라는 것까지 합쳐진 숙제였다. 은영이 말대로 확실히 "많다"고 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설명이 끝나자 나는 이건 그냥 포기하고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청소를 마치고, 집에 가보니, 역시 어머니는 계시지 않았다. 어머니께서는, 이곳으로 이사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근처의 휴대전화 공장에 나가고 계셨다. 보통 점심과 저녁 때 먹을 밥을 차려두고 가셨는데, 일주일에 절반정도는 일찍 오셔서 저녁은 새로 만들어 주시곤 하셨다. 오늘도 식탁 위에 덮어둔 보자기를 치워보니, 어제 먹었던 것과 비슷한 밥과 반찬이 보였다.

어머니께서는 항상 숙제 먼저하고, 그 다음에 놀라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 말대로 한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일단 어머니가 안 계시니 집에서 좀 놀다가, 저녁 때 쯤 되면 바깥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파트 단지에서 나가서 10분정도 내려가면, 논밭이 있고, 논밭에 물대는 물길 옆에 작은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계절이 초여름이라서인지, 이 개천에는 송사리 떼가 자주 눈에 뜨였다. 나는 그 놈들을 잡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어제는, 그 개천에서 한참 물방울을 튀기며 쫓아다닌 끝에 드디어 개발한 나만의 신공법을 완성하기까지 했다. 그 수법은 이렇다. 우선 흙을 한 줌 파서 손에 쥐고 있다가, 송사리 떼가 보이면, 그 위에다 흙더미를 뿌린다. 송사리는 위에서 갑자기 흙이 덥쳐오니까 당황하고 비틀거리는데, 바로 그틈에 손바닥으로 물과함께 당황한 송사리를 건져올리면, 간단히 송사리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에야 말로, 어제 완성한 그 공법을 이용해서 마음껏 송사리를 잡을 날이었다.

집에서 빈둥거리다가, 송사리를 잡으려고 문을 나서려는데, 그 때, 나는 집으로 들어오는 어머니와 마주쳤다.

"밥은 챙겨 먹었어?"

어머니께서 물으셨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재빨리 문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어머니께서는 피곤하신지 지친 모습으로 앉으며, 말했다.

"숙제는 다 하고 나가는 거야?"

나는 그냥 나가려는데, 어머니께서 다시 물으셨다.

"엄마가 묻잖아. 숙제는 다 했어?"
"아니, 갔다 와서 하면돼."
"엄마가, 숙제부터 하고 놀아야 된다고 그랬지."
"오늘 숙제 별로 안많단 말야. 갖다와서 해도 돼."
"별로 안많으면 하고 가서 놀아도 되겠네."

나는 계속 숙제를 안하고 가겠다고 우겼고, 어머니께서는 그날 따라 절대 안된다고 했다. 나는 징징거리며 짜증을 냈다. 어머니께서는 화를 내시며 나를 다그치셨다. 그러다가, 마침내 나는 은영이네 엄마는 금요일마다 맛있는거 해주는 날이라는데, 나는 맨날 집에 오면 아무도 없고 맛없는 것만 차려준다고 투덜거리까지 했다. 어머니께서는 조금 주춤하시는 듯 했지만, 물러섬이 없으셨다.

"오늘 숙제 어려워서, 어차피 내일까지 하기 어렵단 말야."

나는 그렇게 짜증을 내면서 다시 집안으로 들어왔다. 어머니께서는 숙제가 뭐냐고 물었다. 내가 숙제가 이렇고 저런 거라고 설명을 하니,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면, 엄마가 이야기해 줄께."

어머니께서는 공장에 들고간 가방을 내려 놓으셨고, 씻고, 저녁을 다시 준비하시면서, 내 숙제에 쓸 이야기를 생각하셨다.

마침내, 저녁을 먹으면서 어머니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먼 옛날 어느 마을에 한 처녀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논농사를 짓느라 물을 모아놓은 작은 저수지가 있었다. 동네 어른들이 말하기를.

"저 저수지에는 들어가지 말아라. 들어가면 큰일난다. 이유는 모르지만 옛날부터 저 저수지에 들어가면 안된다고 전해내려왔단다."

라고 했다. 처녀도 이 이야기를 알고 그 저수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처녀는 집이 가난해서, 일을 많이 해야 먹고 살 수 있었다. 그래서 처녀는 늦게까지 논에서 일을 해야 했다고 한다. 그렇게 늦게까지 일하던 어느날, 처녀는 밤이 되도록 늦게 까지 일하느라 너무 더웠다. 땀도 많이 났거니와 날씨도 유난히 무더운 날이어서 처녀는 그만 참지 못하고, 옷을 벗고 저수지에 들어가서 목욕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다음날부터, 처녀는 이상스럽게도 점점 자신의 배가 불러오는 것을 느꼈다. 처녀의 주위사람들은 이를 매우 의아하게 여겼고, 처녀도 놀라서 무서움에 떨었다. 마침내 처녀는 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처녀가 낳은 것은 사람이 아니라, 달팽이와 다슬기였다.

사람들은 이 소문을 듣고 해괴한 일이라며 놀랐다. 처녀는 말했다.

"저수지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그 다음날 부터 배가 불러오더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듣더니, 마을 사람들은 모두 들어가지 말라던 저수지에 들어갔다며 처녀를 욕했다. 그러던 가운데 한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이 사람을 낳지 않고, 달팽이와 다슬기를 낳았으니, 이는 필시 요물이나 도깨비에게 홀린 것임에 분명하다. 달팽이와 다슬기는 그 자식들이니, 장차 이 요사스러운 달팽이와 다슬기 때문에 큰 화를 입을지도 모른다."

라고 했다.

그 말을 듣더니, 사람들은 겁을 먹고, 하나 둘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고, 심지어 달팽이와 다슬기를 낳은 처녀까지 마을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마을은 아무도 살지 않는 텅빈 곳이 되었고, 달팽이와 다슬기만 사는 마을이 되었다.

아무도 없는 마을에 남겨진 달팽이와 다슬기는 먹을 것이 없어서 스스로 일을 해야 했다. 누구도 농사짓고 일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기에, 달팽이와 다슬기는 몹시 힘겹게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달팽이와 다슬기는 서로 힘을 합해 열심히 일했고, 둘은 겨우겨우 목숨을 연명해 갈 수 있었다.

그렇게 달팽이와 다슬기가 서로를 의지하며 지내던 어느날, 갑자기 저수지 물이 점점 넘치더니, 마을이 온통 홍수에 휩쌓이게 되었다. 달팽이는 나무 꼭대기 위로 올라가 물을 피했고, 다슬기는 땅바닥 밑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물에 휩쓸려가는 것을 피했다. 한참을 홍수물이 휘몰아치다가, 다슬기가 있던 곳 부터 먼저 물이 빠지니, 물이 빠져나가면서, 다슬기 껍질까지 같이 휩쓸려 나가고야 말았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다슬기는 완연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다슬기는 자신의 모습에 신기해 하며 길을 지나다, 달팽이를 보았다. 그러자, 사람의 모습과 같은 다슬기를 보고는, 달팽이가 다슬기에게 물었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내 형제 다슬기를 못보셨소."

그 말을 듣고 다슬기가 달팽이에게 답하였다.

"나를 못 알아보겠소? 내가 바로 다슬기라오."

달팽이는 깜짝 놀랬다.

달팽이가 물이 빠질 때까지 나무가지 끝에 매달려 있는 동안, 다슬기는 부지런히 홍수가 휩쓸고간 자리를 추스렸다. 그리고, 그 동안 다슬기는 달팽이 몫까지 열심히 일했다.

마침내, 달팽이가 있던 곳도 물이 빠져서, 달팽이도 나무가지 끝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그런데, 달팽이는 너무 오래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기에, 그만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달팽이 등의 껍질이 쑤욱 빠져서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렇게해서 껍질이 벗겨지자, 놀랍게도 달팽이 역시 완연한 사람의 모습이 되었다.

달팽이가 자기 몫까지 열심히 일을 해주고 있는 다슬기에게 달려가자, 다슬기가 그를 보고 물었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내 형제 달팽이를 못보셨소."

그 말을 듣고 달팽이가 다슬기에게 답하였다.

"나를 못 알아보겠소? 내가 바로 달팽이라오."

다슬기는 깜짝 놀랐다. 거추장스러운 껍질을 벗어던진 두 사람은, 그전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

일하면서 보니, 그렇게 홍수가 나면서, 비옥하고 기름진 흙이 마을에 온통 떠밀려 와 쌓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을의 땅에서는 전에 없이 많은 벼가 쑥쑥 튼튼하게 자랐고, 마침내, 달팽이와 다슬기는 대단한 풍년을 맞게 되었다.

둘이서 다 먹지도 못할 만큼 많은 쌀을 걷게 된 달팽이와 다슬기는 쌀을 내다 팔기 위해 장터로 나왔다. 그런데, 두 사람이 사는 마을 외에 다른 마을은 모두 극심한 흉년이 들어, 다들 굶주리고 있었다. 그래서 거지떼가 많았는데, 그 중에서 한 여자가, 구걸을 하였다. 달팽이와 다슬기는 양식이 넉넉했으므로, 그 여자에게 풍족하게 쌀을 주었다. 그러자 여자가 말했다.

"내 지난날, 달팽이와 다슬기를 낳았는데, 그만 그 모습이 부끄러워 달팽이와 다슬기를 버리고 도망치고 말았소. 그래서 내가 오늘날 하늘이 내린 벌을 받아 이렇게 거지꼴이 되었나보오."

그 여자는, 달팽이와 다슬기를 낳은 쳐녀였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달팽이와 다슬기는 그 여자를 부여 잡으며 말했다.

"어머니, 어머니, 내가 달팽이요."
"어머니, 어머니, 내가 다슬기요."

그 여자는 그리하여 달팽이와 다슬기가 이끄는 데로 옛날 살던 집에 가 보았다. 그랬더니 그곳에는 곳간이 차고 넘칠만큼 많은 양식이 있었다. 옛날 마을 사람들이 모두 굶주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달팽이와 다슬기는, 다른 마을 사람들까지 다 불러 모았다. 달팽이와 다슬기가 거두어 들인 곡식으로 사람들은 무사히 굶어죽을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달팽이와 다슬기와 함께 예전처럼 마을에 다시 모여 살게 되었다. 사람들은 달팽이와 다슬기를 고마워 하게 되었고, 그후로도 오랫동안 마을은 잘 사는 마을로 이름이 높았다. 물론, 사람들은 그 해부터는 마음놓고 저수지에서 목욕을 했다고 한다.

나는 이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사실 생각해 보니, 어머니는 내게 별로 이야기 같은 것을 들려주신 적도 없었다. 이야기는 꽤 신기한 것이었고, 커다란 달팽이가 나무위로 올라가는 모습 같은 것을 상상해 보니 재미나게도 해서, 나는 꽤 좋다고 생각했다.

숙제를 마치기 위해서 나는 느낀점을 썼다. 뭐라고 써야할지 잘 몰라서, 한 줄 쓰는데 한참씩 시간이 걸렸다. 나는 밖에 나가서 놀고 싶은 생각에 자꾸만 조바심이 나서 더 잘 쓸 수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좀 쓰기 싫기도하고 그래서, 외려 더 쓰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한편, 어머니께서 느낀 점을 써 주시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어머니께서는 서류에 이름이나 주소를 쓸 때 외에는 한글, 한국어로 뭔가를 길게 써 본 일이 많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어머니께서도 나만큼이나 뭐라고 써야할까, 어떻게 써야할까 고민하시는 눈치셨다. 어머니께서는 종이를 들고, 식탁위에 앉아서 한참 동안 고민해서 몇 글자쓰고는, 잠시 고민하다가 지우개로 지우시기를 반복했다. 그나마, 인터넷에 베트남어-한국어 사전 같은 것이라도 많이 올라와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런 자료도 무척 드문 편이어서 어머니께서는 그저 손으로 이마를 짚고 고민하고 또 고민하시는 것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은 흐르고 흘러서, 영어 학원에 갈 시간이 되고야 말았다. 간신히 내가 느낀점을 다 쓰고 나니, 놀 시간이라고는 하나도 없어진 것이었다. 나는 짜증이 나서 화를 버럭 냈다.

"이게 뭐야. 하루 종일 이거 한다고, 시간 다갔잖아. 하나도 못놀고 또 학원가야돼? 엄마 때문에 이게 뭐야."

나는 투덜거렸으나, 어머니께서는 아무 흔들림 없이 말씀하셨다.

"숙제 다하고 나가 놀기로 했었잖아. 오늘 못 놀면 내일 놀면 되지."

사실 똑바로 따져보면, 전혀 어머니를 탓할 것이 아니었지만, 나는 왠지 억울하다는 생각에 계속 어머니께 틸틸거리면서 집을 나섰다.

영어 학원에서는 윈스턴이 자기가 좋아하는 재즈 음악을 소개해 주어서, 같이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보니, 처음에 뾰로통 해 있던 내 표정은 금새 사라졌고, 시간은 잘만 지나갔다. 곧 해가 넘어가는 저녁 무렵이 되었고,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니, 어머니께서는 아직도 내 숙제를 붙잡고 계셨다. 숙제를 붙잡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은이 엄마를 불러다 놓고, 한 마디 한 마디, 한 문장 한 문장 계속 물어 보시고 계셨다. 어머니께서는 내 숙제를 잘 해주시기 위해서, 오후내내 수백번도 더 고쳐쓰고 말을 다듬었던 것이었다. 은이 엄마까지도, 그렇게 정성을 다하는 어머니가 꽤 가상해 보였는지, 무척 귀찮을 텐데도 끝도 없는 어머니의 질문을 다 받아 주셨다.

내가 저녁을 다 먹고, 밤시간이 되어서야, 어머니께서는 겨우겨우 내 숙제에 들어가는 "이야기를 해 주신 웃어른이 느낀점"을 다 완성하실 수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자뭇 자신있어하시며, 숙제를 나에게 돌려 주셨다. 그것을 받아들고나니, 나는 오랫만에 남들만큼 두툼하고 딱딱 답에 들어맞는 숙제를 해냈다는 생각에 좀 뿌듯하기까지 했다.

"친구들 앞에서 읽게 되면, 잘 읽을 수 있게, 자기 전에 한 번 다 읽어 보고 자는게 좋지 않을까."

어머니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겉으로는 그때까지도 "어머니 때문에 오후에 놀러가지 못해서 화난 상태" 였기 때문에, 별로 대답을 하지 않고, 불만있는 듯한 표정으로 내 방에 들어갔다.

하지만, 잘 때쯤 되니, 과연 어머니 말씀이 맞는 것 같았다. 안그래도 으례 숙제 안해오는 아이라고 생각해서, 내가 발표할 때가 되면, 아이들은 한심하게 여길 것이었다. 그런데, 더듬거리면서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무슨말인지 알기 어렵도록 웅얼웅얼한다면, 열심히 숙제를 잘 해놓고도 성의 없이 글자수만 채운 것으로 들릴 것이다. 나는 그러기에는 오랫만에 한 숙제가 무척 아까웠다.

그래서 나는 자기 전에 두번, 세번 계속 내가 쓴 것과 어머니께서 써 주신 것을 읽어보았다.

다음날 아침에, 선생님께서는 숙제를 걷어 가셨다. 그리고, 세번째 시간에 검사한 숙제를 아이들에게 하나 둘 돌려 주셨다. 그리고, 아이들은 자기 숙제를 받고나면 발표를 하게 되어 있었다. 이야기를 먼저 읽고, 자기가 느낀점과 어머니가 느낌점을 차례로 읽으며 발표했다.

선생님께서는 그날 별로 기분이 안좋으신지,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아이들 이름을 불렀다.

"박은영."

그러다, 이름 부른 아이가 대답을 빨리 하지 않으면, 도리어 갑자기 평소보다 여섯배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박은영. 선생님이 부르는데 대답 안하니?"

아이가 대답하고 뛰어나가면, 선생님께서는 기분 나빠하시며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앞에 나와서 너희들 숙제 하나하나 보면서, 맞춰주고 신경써 주는데. 너희들은 사람 말하는 거 듣지도 않고 너희들끼리 히죽히죽 웃고 있으면 돼? 사람 말귀 못알아 듣니? 말 모르는 짐승이야?"

보통 선생님께서는, 숙제 안해온 아이는 손바닥을 세 대 때리셨는데, 그 날은 그 세 대도 무척 아프게 때리시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보통 흥부가 박 타는 이야기나, 콩쥐가 물 길어오는 이야기를 했다. 똑바로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 없어서, 이야기 내용은 저마다 조금씩 달랐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대체로 그 두 가지 중 하나 였다. 가끔 심청이 이야기를 하는 아이도 있었고, 광포 설화를 이야기 하는 아이가 있긴 했다. 그러나, 결국 대체로 보면 똑같은 이야기를 두 번, 세 번 계속 반복해서 듣는 일로 계속 수업은 진행되고 있었다. 아이가 이야기 줄거리와 느낀점을 읽으면, 선생님께서는 교육청에서 배포한 자료에 써 있는 "해설"을 보시고, 그 이야기를 찾는다. 그리고, 그 교육청 자료에 있는 글을 칠판에 몇 자 써 주셨다.

보통 때 같으면, 내 차례가 올 때 쯤 되면, 나는 숙제 안했다고 말하고 혼나는 것이 두려워, 초조해 했을 것이다. 보통, 나는 초조한 마음을 지우기 위해, 일부러 옆에 앉은 아이와 애써 더 이야기를 하거나, 괜히 책이나 공책 이곳저곳을 뒤적거리며 넘겨다보고, 혹은 샤프나 연필을 분해하고 조립하면서 계속 딴짓을 했다. 그렇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나는 숙제를 똑바로 해서, 낸 상태였고, 읽는 것도 잘 할 수 있었다. 나는 사실, 너무 똑같은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좀 지루했고, 그래서 은근히 내 차례가 빨리 돌아오기를 바라기까지 했다.

내 차례가 되자 선생님께서는 내 이름을 부르셨다. 나는 나가서 숙제를 든 선생님 앞에 섰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런 이야기 있니?"

나는 그 때 조금 어리둥절해, 선생님께서 무슨 말씀하시는 줄 알 수가 없었다. 선생님께서는 한 번 픽 웃으시더니, 아이들 모두를 보며 말씀하셨다.

"이 이야기 한 번 들어봐. 옛날에 어떤 여자가 갑자기 임신을 했는데, 낳아보니까 달팽이랑 다슬기였대. 그런데, 그게 너무 무서워서 그 여자랑 마을 사람들이 다 도망을 갔다는 거야."

선생님께서는 그리고나서 이야기가 잠시 생각나지 않는지, 내 숙제를 앞뒤로 한 번 넘겨 보셨다.

"그러고 나서 갑자기 홍수가 나더니 달팽이랑 다슬기가 갑자기 사람으로 변신을 하고...... 그러고나니까 풍년이 들어서, 갑자기 마을 사람들이 전부다 다시 달팽이랑 다슬기한테 돌아 온다는데......."

다시 한 번 숙제를 뒤적거리셨다.

"응... 그래, 이게 끝이야. 뭐야? 이런 이야기 들어 본 사람 있니?"

선생님은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웃으셨고, 아이들 몇몇도 따라 웃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나를 보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숙제 안하는 사람보다 거짓말 하는 사람을 훨씬 싫어해. 숙제야 갑자기 좀 놀고 싶어서 못할 수도 있고, 하다보면 깜빡하고 까먹어서 못할 수도 있지. 그런데, 그렇게 숙제를 못해놓고, 선생님을 속이고, 자기 자신을 속이고 그러면 되겠니?"

나는 영문을 몰라, 선생님 얼굴을 보며 따졌다.

"이거 숙제 제대로 한 건데요."

선생님께서는 그러더니, 숙제 세번째 장을 펴서 내 앞에다 흔들었다.

"이거 봐라. 엄마가 쓴거라고 해놓고 지어내서 이게 뭐니? 말도 하나도 안맞고. 글씨가 개발새발 딱 니 글씨처럼 지렁이 기어가듯이 엉망이잖아. 아니 나 같으면 그래도 엄마가 쓴거라고 속일 때는 글씨라도 좀 예쁘게 쓰겠다. 이건 글씨가 딱보니깐 하기 싫어가지고 삐뚤빼뚤 1학년 짜리 유치원생 글씨보다 못하게..."

나는 얼굴이 갑자기 빨개 졌다.

"이건 너 혼자 거짓말 하는게 아니라, 자기 엄마까지 팔아서 엄마까지 욕하는 거야. 그런식으로 혼 안나려고 거짓말만 하면, 커서 사기꾼밖에 안된다. 그것도 큰 도둑도 못되고 좀 도둑."

선생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무말도 못하고 가만히 우두커니 서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얼굴이 붉어진 나를, 한참 동안이나 선생님께서 보고 계시는 것 같았다. 선생님께서는 이내 다시 말씀하셨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소리도 한 마디도 안하네. 손바닥 대. 넌 숙제만 안한게 아니라, 거짓말까지 했으니까 열 대 맞는다."

나는 꼼짝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손 내밀어. 손 안내미니?"

나는 고개를 들어 선생님 얼굴을 한 번 쳐다보았다.

"손 내밀라니까."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나는 모든 반 아이들이 나를 빤히 보고 있는 것을 알고는 손을 내밀었다.

"어디, 벌써부터, 선생님 속이려고 거짓말을 하니."

선생님께서는 내가 별로 반성하는 기미가 없는 듯 하니, 무척 화가 나신 듯, 내 손에 매질을 열대 하셨다. 그러느라, 내 숙제는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다음, 은서 나와."

갑자기 이름을 불린 다음 아이가 허둥지둥 뛰어나가면서, 바닥에 떨어진 내 숙제는 언저리가 한 번 밟히고 말았다. 한장 한장 바닥에 흩날린 숙제를 나는 주섬주섬 주워서는 자리로 돌아왔다. 자리에 돌아와 앉아서, 나는 숙제를 다시 추스려 손에 들었다. 나는 밟힌 발자국을 지우려고, 손으로 문질렀는데, 그게 이미 종이에 스며서 더 번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걸 보니, 어제 하루 종일 어머니께서 해 주신 숙제는 유난히 청소를 안한 바닥에 떨어져 더럽게 쓰레기처럼 구겨져 얼룩져 있었다.

선생님은 앞에 나간 은서에게 숙제를 건네 주다말고, 나를 보며 말씀하셨다.

"어, 너 우니? 그거 열 대 맞았다고 아파서 울어? 여학생들도 안 우는데, 뭐 잘한 거 있다고, 그걸 맞고 사내 자식이 울고 있니."

선생님은 참 나, 하시면서 한 번 웃으셨다.

그러니, 나는 그때부터, 울음이 터져나와서, 그만 소리를 내어 그자리에서 엉엉 울고 말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렇게 계속 울다가 죽어버리고 싶었다.


- 2007년 5월 가양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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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
  • No Profile
    07.05.27 04:50 댓글 수정 삭제
    ... 가슴이 미어지네요.
  • No Profile
    곽재식 07.05.27 08:21 댓글 수정 삭제
    올리고 보니, 나름대로 가정의 달 특선.... 비슷한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 No Profile
    날개 07.07.07 14:36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참 슬픈 이야기고, 마지막에 감정이입이 되어서 분노와 억울함이 드는데 글이 딱 끝나더군요.
  • No Profile
    후니쿤 07.08.09 10:31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달팽이와 다슬기 이야기는 아름답습니다
    압바스키아로스타미 감독같은 사람이 이 글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 No Profile
    이형 08.04.07 22:33 댓글 수정 삭제
    마지막에 엄청난 울분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현실이겠지만, 그 현실 속의 인간에 대한 작가님의 진한 애정이 느껴졌습니다.
  • No Profile
    물고기 08.08.25 02:15 댓글 수정 삭제
    저도 읽으면서 눈물날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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