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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최악의 레이싱

2005.08.26 23:4208.26

1.

그녀는 키재기하듯 늘어서 있는 가지각색의 우유며 요구르트를 보고 있었다. 한편, 지나양은 카트 위에 올라서서 위풍당당한 기세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또 한편, 카트를 붙잡고 있는 나는, 항상 비좁기 마련인 유제품 진열대 앞까지 굳이 카트를 밀고 들어온 것은, 좀 민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젊은 부모들은 꼭 도심의 교통체증처럼 이리저리 카트를 드밀고 들어와 통로를 가득 메우며  어지럽게 오가고 있었다. 그리고 드문드문 카트에는 지나 같은 조그만 아이들이 서 있었다.

게중에 몇은 알수 없는 높은 소리를 내며 팔을 휘젖는 행동을 하는 아이도 있었고, 어떤 아이들은 딸기맛 우유를 가리키고 부모를 보며 뭐라고 알수 없는 "마- 짱라 다부아-" 같은 이상한 발음으로 말하기도 했다. 이들의 이러한 행동양태들은 도저히 의미 해석불능.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그 반응에 주목하는 듯하면서도 무시하는 듯 그러나 또한 굉장히 익숙한 태도로 그런 아이들을 상대하면서 카트에 물건을 골라 담았다.

'원래 애를 데리고 장보러 나오면 이 정도의 혼란은 허용 되는것인가' 내가 그런 생각을 할 때, 그녀는 우유에 적힌 날짜를 확인하고는 카트에 담았다. 그녀는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먼저 앞서 나갔고, 나는 카트의 꺾인 바퀴를 발로 차서 바로잡고는 약간 방향을 조절했다.

"지나, 이 우유 먹어?"

그녀는 카트에 서 있는 지나에게 그렇게 물었다. 지나는 거기에 대답하지 않고, 이미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지나가 묵비권을 행사한 것을, 그녀는 괜찮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혼란스러운 통로를 빠져나갔다. 변덕과 투정으로 범벅이된 것이 아이의 취향이다. 그럴진대 그녀는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자신있게 결정하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그녀가 굉장히 능숙해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어린 조카라도 있는 것인지?

"자전거!"

지나가 보고 있던 것은 "초특가 전단 세일 오늘, 내일 단 이틀간!!" 이라고 느낌표를 두 개씩이나 써 붙인 작은 자전거였다. 아무리 초특가 세일이언정, 생선 파는 곳과 우유 파는 곳 사이에 왜 자전거를 세워 놓는지. 그것은 분명히, 지나처럼, 카트를 유모차 삼아 통로사이를 질주하는 아이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것이었을 게다.

그녀는 이런 경우에 아이의 시선을 오래 멈추지 못하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지나는 조를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자전거를 보다가, 조그마했던 감정의 도화선이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끓어오른다. 그러고나면 울며불며 자전거를 사달라고 매달릴지도 몰랐다. 그녀는 지나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약간 빠른 속도로 자전거 앞을 지나쳤고, 나도 재빠르게 카트를 밀며 그 뒤를 따라갔다.

"아, 맞다. 나 자전거 고쳐야 되는데."

그녀는 앞을 보면서 혼잣말처럼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지나가 가리킨 자전거를 보고, 잊었던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자전거는 왜?"
"방학 시작하고 집에 갔다 온동안 며칠 학교에 남겨뒀더니, 비 맞고 녹슬고 이상하게 된거 같어. 넌 자전거 괜찮어?"

나는 약간 난처해져서 못들은척 바쁜척, 괜히 종이 쪽지를 들여다 보았다.

"인제, 생선만 사면 다 산거지?"

말돌리기 성공?

"어. 딴건 다 샀어."

그녀는 자전거 주제는 가볍게 흘러 보내고 생선매장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말돌리기 성공.

내가 왜 자전거에 대한 이야기를 안하려고 하냐 하면, 나는 자전거가 없기 때문이다. 자전거가 없는게 무슨 문제가 되는가. 문제가 약간은 된다. 말이 대학이지 행정구역상 1개 동 전체를 몽땅 차지하고 있는 작은 동네 같은 학교에서, 학생들은 대체로 누구나 자전거를 갖고 있었다.

그렇기에 내가 자전거가 없다고 하면, 분명히 좀 궁금해하며 "왜?"라고 물어 볼 것이다. 그러면 나는 "안 샀으니까" 라고 쓸 데없이 대답을 하며 마지막으로 답을 피해보려고 할 것이다. 그러면 대부분의 호기심 많은 상대방은 "왜 안샀는데?"라고 물어볼 것이고, 나는 우물쭈물 하다가 비굴하게 "그냥" 하던지, 아니면 과감하고도 솔직하게 "탈 줄 모르니까". 라고 답할 것이다.

그렇다. 나는 자전거를 탈 줄 모른다. 지난번에 병역 신체검사를 받으러 가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거기에 줄줄이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1급도 있고, 2급도 있고, 3급도 있고, 장군의 아들도, 신의 아들도 있을 것이다. 게중에 나는 당당한 현역 1급이었지만, 아마 그 많은 사람 중에 자전거를 탈 줄 모르는 사람은 나 밖에 없을 것 같았다.

내가 무슨 균형감각이 심하게 안좋다거나, 다리에 무슨 문제가 있다거나, 그게 아니면 허리가 안 좋아서 자전거를 못타는 게 아니다. 나는 운동을 썩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키가 좀 크고 달리기를 잘하는 편이어서 체육 점수는 항상 좋았다.

그렇다면,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무슨 사고를 당해서 정신적 충격이 심해져서? 그렇기 때문에 자전거에 올라 앉기만 하면 세상이 빙글빙글 돌면서, "무섭지? 무우서업지이이이?" 하는 환청이 들리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요즘 약간 정신이 없는 편이긴 하지만,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빈부격차에 대한 정치적 견해를 가질 줄 하는 정상적인 정서와 사고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 자전거를 왜 못 타는가? 그건 반대로 질문하면 답이 명확해 진다. 보통 사람들, 그러니까 나를 제외한 다른 대다수의 사람들은 왜 자전거를 탈 줄 알까? 만화에 나오는 뉴타입 초능력자도 아닐텐데, 태어날 때 부터 자전거 타기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자전거라는 기구와 뇌 싱크로나이즈 율 10%를 넘는 사람만이 자전거를 탈 수 있는가? 전혀 아니다. 자전거를 탈줄 아는 사람들은 대체로, 5세에서 9세 사이에 형성되는 "자기 자전거 처음 갖기" 기간에 자전거 타는 법을 스스로 연마해 깨우쳤기 때문이다.

카트 위의 지나처럼, 그 또래의 조그마한 아이들은, 부모에게 자기 자건거를 사달라고 조르거나, 혹은 아이의 생일 선물로 고르고 고른 부모의 정성 때문에, 자기 자전거를 갖게 된다. 그러고 나면 작은 보조 바퀴를 달고 넘어지지 않는 자전거를 타고다닌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두개의 바퀴로 외줄 타기를 하듯 균형을 잡으며 질주하는 절묘한 감각을 익히게 된다.

그렇게 한 번 연마의 기간을 지나기만하면, 평생동안 자전거 조종술을 까먹지 않게 된다. 그 사람은 자전거 조종술을 항상 체득하고 있는 채로, 험한 성장기와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보낸다. 그리고, 막상 자전거를 타지는 않더라도 그 타는 법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으면서, 외로운 청년기와 골치아픈 중장년기, 별볼일없는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나는 5세, 6세, 7세의 3년간의 기간 중에 언제 한 번쯤 울며불며 떼를 써서 자전거 습득에 성공했어야 했다. 그런데, 어느날 텔레비전 외화시리즈에서 한 아이가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날렵하게 미끌어져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스파이 6명을 때려잡는 장면을 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충격과 감동을 받고 롤러스케이트를 사달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단식투쟁 - 밥을 안먹으며 불쌍한 눈빛으로 호소했다는 말이다. -을 하기도 하고, 여러가지 조건을 걸고 귀찮게 매달리며 협상을 시도해 보기도 했다. 바보 같은 텔레비전 쇼 때문에 나는 롤러스케이트가 내 인생에서 어마어마하게 중대한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굳은 신념을 가졌다. 나는 그 신념을 쉽게 굽히지 않아서 꾸준하고도 강도 높게 투쟁을 지속해 나갔다.

결국 그 때 타협은 "이번에 롤러스케이트만 사주면 다시는 아무것도 사달라고 안한다"라는 무지막지하고 극단적인 조건으로 타결되었고, 그 타협의 결과로 나는 간절히 염원하던 롤러스케이트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지금도 롤러스케이트를 타라면 잘 탈 수 있다. 빙판에서 타는 스케이트도 비슷하게 익혀서 잘 타고.

물론 그 후에도 나는, "꼭 진짜처럼 생긴 고무 개구리 인형" 이라든가, "풀빛 수영장에 놀러갈 권리" 등등을 달라고 조르는 등 계약 위반을 많이 했다. 하지만, 롤러스케이트 구입 이후 어영부영하는 동안 나는 내 자전거를 사달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 자전거에 별 신경 안쓰며 살다보니 어느새 태어난지 11년이 흘러, 초등학교 고학년의 연배가 되고야 말았다. 그 정도 연배가 되면 자전거 따위에 연연하는 것도 궁상 맞은 일. 자연스럽게 나는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울 기회와 멀어지고야 말았던 것이다.

딱 한 번, 12세 때, 나는 동생의 자전거를 빌려타고 자전거 타기에 도전해 본 적이 있었다. 나에게 자전거 강사이던 부친께서는 전통적인 교수법을 적용하셨다.

"뒤에서 잡고 있을 테니까 넘어지는 거 걱정하지 말고 그냥 타."
"꼭 잡고 있어야 돼. 놓으면 안돼."
"안 놓는다니까. 페달 밟아봐."

뒤에 눈이 없는 관계로 나는 오직 인간과 인간의 믿음에만 모든 것을 건 채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조마조마한 마음. 왠지 아버지의 느끼한 웃음하며, 꼭 잡고 있는다고 했지만, 그래도 놓을 듯한 느낌. 의심. 아니나 다를가, 아버지는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았는데, 나는 그 느낌에 분노의 표정으로 놀라서 뒤를 되돌아보며 우당탕 자빠지고 말았다.

아프기도 아팠거니와, 의심과 믿음이 교차하는 상황에서 처절하게 배반 당했다는 생각에 사무쳐, 나는 공원의 잔디위에 눈물을 흩뿌렸다. 그 때 나는 아버지께 격렬히 항의했다. 아버지는 웃음으로 얼버무려 넘기시면서 다시 자전거 타기를 시도해 보라고 하셨건만, 나는 너무나 실망감이 커서 그 이후로 자전거를 타겠다는 생각을 한 동안 하지 않았다.

중학교는 초등학교 옆에 붙어 있었고, 버스를 타고 다녔던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도 자전거 타는 법을 모르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학 입학 할 때 쯤 해서는, C버튼을 누르면 26초만에 지붕이 접혀 뒤에 들어가는 독일 자동차 신형 모델에 관심이 있었지, 자전거 따위는 생각도 해 본적이 없다.

고등학교 졸업 무렵해서 면허를 딴 한 친구가 자기 스쿠터를 샀다며 자랑을 했다. 구한말쯤에 제조되었을 법한 낡은 택트를 사서는 나에게 전화를 해서 전화기를 스쿠터 엔진에다 들이대고  "엔진소리 들리냐, 나의 택트, 이름하여 택트리안!" 할때는, 세 글자로 깔끔하게 "바보냐?"라고 답해줄 뿐이었다.

그런데, 연소공학이라는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는 학문을 배운다고, 머나먼 도시의 대학에 와 보니, 이 학교는 건물 모서리마다 수십대씩의 자전거가 가득가득 메여 있는 곳이었다.

하필이면 넓은 학교에서도 학부생 기숙사는 학교 제일 안쪽 깊숙한 산등성이에 있었고, 강의는 학교 정문쪽의 그럴듯한 고층빌딩에서 개설되기 일쑤였다. 술이라도 한잔 하려고 하면, 가로수가 늘어선 도로를 따라 쭉 뻗은 끝없어 보이는 길을 한참을 나가야 했고, 들어 올 때는 늦은 밤 도로를 역시나 기나길게 지나와야 했다.

그리하여 학생들은 학부에 입학해 하는 첫번째 일이 학교 안에 있는 자전거포에서 자전거를 사는 일이었다.

나는 거의 십년만에 처음으로 자전거를 탈 줄 모르는데 대한 좌절감을 느꼈다. 자전거를 탈 줄 모르는 나는 당연히 자전거를 사지 않았고, 타지 않았다. 나는 남들보다 20분정도 먼저 건물에 나서서 항상 그냥 걸어다녀야 했고, 비오는 날을 지나치게 좋아하게 되기도 했다. 왜냐하면 비오는 날이면 누구나 다 자전거 안타고 걸어다니게 되니까.

하지만 그런 것을 의식하게 되는 것도 불과 1개월여. 필수과목 수업이 끝나고 교양수업을 듣기 위해 강의실을 옮기는 동안 550미터를 걸어 간다든가, 분식집에서 순대를 사오기 위해 왕복 4.4킬로미터를 걷는 일을 한 50, 60번쯤 하다보면 그것이 당연한 듯 별로 이상한 것도 모르게 된다. 오랫만에 방학이 되어 서울에 온다. 그러면 나는 그 감각에 익숙해져서, "왜? 서울역에서 대학로면 걸어서 가도 금방이지."하는, 1920년 무렵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인력거꾼 같은 대사를 하게 되고 했으니.

하염없이 걸으면서 캠퍼스 다니기의 또다른 이점은 자전거를 타고 휙휙 지나치는 것보다 훨씬 더 주변을 자세히 살펴볼 기회가 많다는 것이었다. 높이 솟은 메타세콰이어 나무나, 파란 하늘에 피어오른 뭉게 구름의 모습 같은 것들은 보기 좋았다. 또 비 온 뒤 바닥에 괸 물에 비치는 풍경이든가 붉은 저녁노을 빛을 반사하는 건물의 유리창 같은 것을 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역시 무엇보다 마음에 남았던 것은 지금 생각해 봐도 역시, 그녀였다.

그녀는 키가 큰 편이었다. 나는 내 키가 큰 편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을 서서 보면 나보다 눈 높이가 아래에 있다. 그런데 그녀는 별로 그렇지가 않았다. 나는 처음 그녀를 봤을 때는, 그래서 그녀가 나보다도 키가 큰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유행과는 아무 상관도 없어보이는, 항상 단순한 단색의 옷을 입고 다녔는데, 그게 목욕탕 가는 뒷집 누나 옷차림 같다기 보다는 북유럽에서 내년 봄에 유행할 분위기 같았다. (원래, 할일 없는 남자 기숙사에는 여자 모델들이 수십명씩 나오는 패션쇼 같은 거 가끔 모여서 보면서 야식 먹으며 밤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런데도 곰곰히 따져보면, 그녀가 어제 아홉시 수업에 가면서 입고 갔던 옷 자체는 분명히 뒷집 누나 목욕탕 분위기였던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혼자 다닐 때도 있었고, 친구들과 다닐 때도 있었지만,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다니는 모습은 거의 못 본거 같다. 그녀가 말을 하는 모습은 많이 보지 못했고, 말 할 때는 말소리도 작았다. 늦잠 자다 시간이 늦어 허둥지둥 거리며 뛰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한 것 같다. 비가 오면 신문지를 머리에 쓰고 가거나, 내리는 빗줄기에 팔을 내밀어 확인하면서 발을 동동구르는 대신, 언제나 작은 노랑색 우산을 준비해 들고 갔다.

내가 그녀와 같이 듣는 수업은 250명이 한 강의실에서 듣는 미적분학 응용 수업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공부도 꽤 잘하는 것이 분명했다. 강의실 맨 뒤에 앉아서 멀리서 보면, 항상 수업시작 전에 그녀 주변에 몇몇이 모여들어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 때마다 그녀의 숙제를 모범 답안 삼아 비교대조 분석이 벌어졌던 것이다. 게 중에는 괜히 그녀에게 친한척 하고 싶어하는 남학생들도 있었고, 숙제 점수 감점의 하한선인 50점을 사수하기 위해 결사적인 그녀의 고등학교 동문들도 있었다.

언젠가 기이하게 수염을 기른 미응 교수님이 - 미응은 미적분학 응용의 통용 약어 - "이 숙제 문제를 제대로 푼 학생은 수강생 250명 중에 딱 두 명 밖에 없었어요."  했을 때, 문제를 푼 두 명 중에 그녀가 있었다.

교수님이 지적하셔서 그녀는 앞에 나가서 칠판에다 그 문제를 풀고 들어왔다. 그 문제는 초절정 치사한, 비열한 얍삽이를 써서 풀어야하는 적분이 핵심이었기에 사실 거의 못풀만도 한 문제였다. 문제를 푼 나머지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나 였는데, 칠판에 둘이 서서 문제를 풀어보니, 그녀의 풀이보다 내 풀이가 약간 더 나아 보이는 듯도 했다.

하지만 개판 300초전인 나의 삐뚤삐뚤한 글씨에 비해서, 그녀의 글씨는 칠판에 인쇄한 듯 깨끗했다. 교수님 역시 나의 풀이는 무시하고 그녀의 풀이를 가리키며 설명을 했다. 물론, 그 날의 일이 아니더라도, 세 번에 한 번 꼴로 숙제를 2,3일씩 미루곤 하는 나에 비해, 그녀는 항상 강의가 끝나자 마자 시계처럼 꼬박꼬박 숙제를 교수님 앞에 올려다 놓았다.

남녀의 성비가 지극히 기울어져 있는 공대에서, 그녀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온 학교로 퍼져나갔다. 소문에 따르면 한 4학년 학생하나가 장미 백송이짜리 꽃다발에 하얀색 쉬폰 케이크를 들고, 인터넷 어느 구석에서 아이디어를 배워온 대로 편지까지 써서, 그녀 앞에서 한바탕 쇼를 펼쳤다고 한다. 나의 비아냥거리는 어투에서 짐작되듯이, 그 4학년 학생에게 돌아온 것은 따끔하고 칼같으면서도 예의바른 거절이었다.

전산과 학생 하나는 그녀에게 숙제를 빌려달라고 하고, 돌려주면서 밥을 사주니 어쩌니 하면서 뭔가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녀에게 깊이 빠진나머지 현실감각을 잃고, 또한 똑바로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에 압도당한 나머지, 그 학생이 한 대사는 대체로 "버버벅버벅버벅"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가하면 같이 술을 사니 마니 하면서 문자그대로 수작을 부려 보려하던 그녀의 고등학교 선배도 있었다. 그 선배가 초기에 조성한, 괜히 선배 티내면서 멋있어 보이려 하던 어깨 힘들어간 모습은, 결국 혈중농도 0.4%의 알콜에 힘없이 날아가 버렸다. 그는 불쌍하게 눈물을 뚝뚝흘리며 엉뚱한 캠퍼스 구석에서 혼자 그녀의 이름을 뇌까렸다. 그리고 자기 친구들에게 한탄의 시를 읊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던가.

그녀의 얼음장 같은 태도와 스스로 충돌 끝에 자빠져 나갔던 수 명의 경쟁자들은 더욱 그녀의 명성을 드높게 하였다. 이른 아침길에 끝없는 캠퍼스를 걷다가 흘깃흘깃 스쳐가던 그녀를 보면서 처음 그런 사람이 있음을 알아보던 나는, 그러한 그녀의 유명함이 왠지 이상하게 아쉽기도 했다.

사건이 급반전 된 것은, 그 모든 얼음 눈보라를 뚫고 지극히 노련하게 그녀와 친밀함을 쌓아가던 생명공학과 학생의 등장 즈음이었다.

이 학생은 듣자하니 자연 경쟁률이 극도의 인플레이션을 달리고 있는 공대의 연애 세계에서 작은 전설로 자리잡은 사람이었다. 어느 한심한 중생이 작성하는 목록인지는 모르겠으나, 소위 생명공학과 삼대 미녀 셋을 꼽아보면, 셋이 모두 그 학생의 옛 여자친구였다. 그 놈은 이상하게 아니꼬와 보이는 면이 없잖았으나 교묘하게 그럴듯해 보이기도 했고, 과연 그녀와 어울리는 듯 보이기도 했다.

잠깐. 그렇다면 그녀와 그 작은 전설이 어떻게든 맺어졌다는 말인가? 그럴리가.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여기에 등장한 지나라는 인물은 연소공학과의 한참 윗기 선배인 정애 선배의 딸이었다. 학교 옆에 있는 아파트에 사는 정애 선배는, 연구소에서 갑자기 일이 생겨서 밤늦게 퇴근하게 되거나 토요일에도 출근을 하게 되면 종종 지나를 나에게 부탁하곤 했다. 그러다 가끔은 거스름돈으로 맥주나 사먹으라고 하고는 나에게 장보기 심부름도 같이 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보면 이 이야기에서, 지나와 나 말고 나머지 한 명의 주요 등장인물이 바로 그녀 였음이 기억 날 것이다. 그렇다. 지난주 월요일. 그 절묘한 하루 덕분에 나는 그녀와 갑자기 굉장히 가까워 졌다. 그 월요일 아침에는 가끔 그녀가 꽤 멋져 보인다고 생각하던 그냥 남남이었지만, 월요일 밤에는 어느새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 또한 내게 호감을 갖고 있는 것도 분명했다. 하지만 그때 그녀가 과연 나만큼 나를 좋아하고 있는가 하는데는 의심이 생긴다.

나는 삑삑소리를 내며 전화기에 들어오는 문자메세지를 왠종일 닳도록 들여다 보곤 했다. 그러나, 그녀는 남에게 나를 남자친구라고 소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나를 그냥저냥 애매한 사이로 여겼다. 다만 경쾌한 것은 어쨌거나 그녀는 저녁마다 내게 전화를 해서 별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재잘거리며 길게 했고, 좀 닭살 돋게 잘자라고 인사를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는 것이다. 명확히, 생명공학과의 느끼해빠진 작은 전설 놈은 이미 저 멀리 무관심의 행성, 사막 저편으로 사라진 것이다.

그 후로 오늘 토요일까지 10일여 동안, 그녀와 나의 역학 관계는 평생 어느 때보다도 박진감 넘치는 시간으로 점철 되었다.

나는 그녀와 같이 걸어서 기숙사까지 올라오는 길이 무척 좋았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 강의가 끝나고 후다다닥 그녀의 강의가 있는 강의실 앞으로 달려가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랑 같이 걸어 가고 싶어서 여기서 계속 기다렸다고 하면 너무 내 태도를 내려깔게 되는 것은 아닐지. 혹은 이 얼음장은 거기서 뭔가 답답한 속박감을 느끼거나, 나에게 스토커 기질이 있다고 넘겨 짚을지도 몰랐다. 그건 위험하다. 그녀와 나의 이 관계를 답답하고 지루하게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짐짓 우연히 그녀를 마주친채 위장하며 그녀를 따라잡기로 했다. 내 생각대로 이야기는 전개되었다. 심지어 절묘한 각도 설정으로, 나는 그녀가 나를 먼저 발견하고 내 이름을 불러 "어디가?" 하며 걸어오게 만들기까지 했다. 어쨌든지 내 이름을 부르면서 머리 위로 손을 들어 흔드는 그녀는, 또다시 내가 본 그녀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 신기록을 세우고 있었다.

4학년, 전산과, 동문선배등등의 도전자들이 마주한 것은 차가운 냉기였건만. 어떤면에서 좀 더 친해진 뒤에 알게 된 그녀의 모습은 그 반대라서 또한 꽤 의외였다.

예를 들면, 처음 내가 언급했던 그녀의 그 단순하면서도 잘 어울리고, 유행을 무시하면서도 괜히 격식 있어보이는 그녀의 옷차림에는 비밀이라면 비밀이 있었다.

비밀의 핵심은 뭐냐면 그녀는 여간해서는 자기가 옷을 골라 사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옷은 거의 전부가 그녀의 부모님과 함께 백화점에 나선 길에, 부모님께서 사주신 것들이었다. 그녀는 스스로 옷을 사는 일을 귀찮아 하기도 했고, 또 어떻게 보면 두려워하기도 하고 아까워 하기도 했다.

당연히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옷을 골라 사 입으면 가끔 실패할 때도 있을 것이다. 좋아 보이는 옷과 그럴듯해 보이는 옷 사이에서 왔다갔다 굉장히 고민을 하다가 결국 좋아 보이는 옷을 샀는데,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럴듯해 보이는 옷이 훨씬 더 괜찮았다고 뒤늦게 깨달아 통탄하는 것 말이다.

성격이 꼼꼼하고 망가지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그녀는 그런류의 "옷 사기 실패"에서 패배감과 억울함, 심지어 세상의 야박한 상술에 대한 반감마저 느끼는 것이라 짐작되었다. 더군다나 묘하게 아직도 어린애 같은데가 있는 그녀는, 그녀가 모아 놓은 돈으로 사면 "자기돈"이 날아가는 것이요, 부모님이 옷을 사주시면 "돈이 절약된다"는 의식이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그런즉, 그녀는 여간해서는 자기가 옷을 직접 골라 사 입지 않았다. 문제의 유행을 초월하는 단순한 멋은, 바로 그녀의 부모님이 골라준 옷들 사이에서 최대한 좋은 효과를 내려는 그녀의 그 꼼꼼한 안목이 교집합을 이룬 결과였던 것이다.

항상 또박또박 작은 목소리로 필요한 말 몇마디만 하는 것 같았던 말없는 그녀는, 사실은 재잘재잘 거리며 별 의미도 없는 말을 끝없이 늘어 놓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문법을 따지며 또박또박 단어를 짚는 말투였지만, 가만가만 듣다 보면 그 사이사이에서 숨겨진 충청도 사투리의 향취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녀의 집에서 전화가 오면 굳이 사람들이 없는 한데에 나가서 전화를 받곤 한다. 왜냐하면, 오랫만에 이야기하는 가족들과, 고래의 구성진 사투리로 대화 할 때의 어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눌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결코 그걸 들키지 않고 싶어하지 않는다.

사실 요즘에 충청도 사투리라는 것은 대전이나 청주만 해도 그렇게 튈 정도로 원형이 보존 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향토색이 강한 시골사람들이었던 그녀의 부모님은 드물게 정통 원어민들이었다.

그녀는 "대근하다"라는 어휘를 무심결에 자연스럽게 섞어서 대화를 했다. "대근하다"는 충청도식 표현으로 "대강 그정도면 된다"라는 긍정적인 추정의 표현이다. 어리둥절하여 그 뜻을 내가 캐묻자, 그 뜻을 설명할 때 그녀는, 보기 드물게 얼굴이 붉어지며 부끄러워 했다. 그녀는 그러다가 말꼬리를 흐리며 괜히 내 등짝을 한 대 가격했다.

매정하게 우리가 카트를 돌려 자전거 앞을 벗어날 때, 지나는 카트 진행 방향의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미련 가득한 눈빛으로 뒤로 멀어져가는 자전거를 보고 있었다. 나는 왠지 그 모습에서, 2차대전 당시 티거 전차가 전진하면서 포탑을 반대로 뒤로 돌려 사격하는 것을 떠올렸다. 늠늠하게 카트위에 서 있는 지나의 얼굴 표정을 보라지.

나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그 이야기를 그녀에게 하려 했다. 그러나 잠깐, 카트위의 어린이를 보고, 2차대전이며 요하임 파이퍼의 티거 전차 이야기를 들먹이면 좀 꼬인 괴짜로 보이지 않을까? 방안 가득 플라스틱 모델 수백개를 쌓아 놓고 밤마다 전쟁 무용담 사이트를 순례하며 퀭한 눈빛으로 이상한 감상주의에 불타는 괴청년. 그런 고정 관념을 그녀에게 심어 줄 우려가 있었다. 나는 아쉽게 참신한 나의 문학적 감상을 아꼈다.

그녀는 삼치와 고등어 중에서 상태가 좋은 것을 골라 보려고 얼음조각 위에 벌여 있는 생선들을 살폈다. 나는 카트를 킹크랩이 살고 있는 수조 앞에다 세웠다. 우리의 전차장께서는 이내 시선을 자전거에서 거두고 수조 속의 킹크랩을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어 이거 뭐야? 킹킹 킹 르랍."

지나가 수조에 붙은 글자를 읽었다.

"킹 르랍이 아니고 킹 크랩. 아 옆에 이가 있으면 애라고 읽어야지."
"킹 르랩."

왜 르와 크를 헷갈리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 지나는 고개를 숙이고 보골보골 방울이 올라오는 수조를 좀 더 가까이에서 내려다 보기 시작했다. 옆에 나란히 서서 보니, 킹 크랩은 긴 팔을 휘저으며 수조 안을 싸돌아다니고 있었다. 투박하게 각진 껍질에 우둘투둘한 질감. 강아지 만한 덩치가, 아귀가 들어맞는 갑옷을 걸치고 물 속에서 걸어다니는 모습은 사실 내가 봐도 신기해 보였다.

차가운 오호츠크해의 바다를 주유하다가, 보드카에 취해 배 위에서 자던 러시아 어부가 졸린 눈으로 걷어 올린 그물에 걸려 올라왔겠지. 그리고, 답답하고 깜깜한 배의 창고에서 동해를 가로지르기를 수삼일. 눈을 뜬 곳은 알록달록한 옷들을 입은 수백명의 사람들과 눈부신 조명이 아침 10시부터 밤 11시까지 어지러운 곳. 해산물 코너의 수조 속인 것이다.

"킹- 르랩."

지나는 다시 한 번 이 갑각류의 이름을 읊조리더니 조심스럽게 물 속에 손을 넣어 킹 크랩을 건드려 보려고 하는 것 같았다.

"야, 너 손가락 넣으면, 얘가 자기 손으로 콕 찝어 버릴걸."
"어?"
"저기 봐. 얘가 손이 이렇게 집게 처럼 생겼잖어."

나는 내 손가락을 2 대 3으로 모아서 한 번 오므렸다 폈다. 집게 흉내.

"이게 그래서 이렇게 팔을 휘젖고 있다가. 지나가 손 넣으면. 이렇게 콕."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지나의 손을 확 잡았다. 나는 나름대로 뭔가 겁을 줘 보려고 한 것이었는데, 지나는 재미있는지 까르르 하면서 잡힌 손을 내려다 보며 웃었다. 지나는 더 호기심이 생겼는지, 말그대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꼭 수조 속에 다이빙이라도 하려는 양 수조벽을 짚고 킹크랩을 들여다 보았다.

나란히 서서 킹크랩을 보며 헛소리를 하고 있는 지나와 나를, 그녀는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삼치 샀어?"
"고등어."

나는 좀 부끄러워져서 급히 뒤돌아서며 물었다. 그녀는 자기가 카트를 잡았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에 언뜻 웃는 기색이 있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다시 한 번 그녀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 신기록을 다시 작성하고 있었다.

나는 그리고 그 짧은 순간, 언제 그녀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또 세월이 흘러 지나 같은 자식이 생겨서 이렇게 같이 나서면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행복은 순수한 행복이기도 하고, 그런 사실만으로 세상 누구에게라도 당당히 자랑할 수 있는 어떤 경지이기도 했다.

한글 독해력도 보완의 여지가 있는 7세 어린이와 함께 킹크랩의 생태를 관찰한 것이 무슨 감동의 원천일까만은, 분명히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은 별 것 없어도 이렇게 좋구나, 하는 그런 생각만은 확실했다.

나는 감개무량한 듯한 어조로 그 말을 하려다가 다시 멈칫했다. 이제 정식으로 안 지 일주일 조금 더된 그녀에게, 결혼? 2세? 이건 헛다리를 짚어도 금문교 수준으로 짚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녀와 나의 관계가 정확히 뭔가? 친구? 친구끼리는 아무 일 없이 아침부터 "첫수업 부터 졸면 엄단함" 같은 문자메세지를 보내지는 않는다. 그렇다고해서, 지금 그녀에게 같이 보내는 시간이 어쩌고 인생의 작은 행복이니 하는 일일드라마스러운 말을 하다간, 이상한 부담감과 속박감을 안겨줄 것이다. 그건 안된다. 그녀는 경계하며 물러설 것이고, 이 스리걸친 관계를 무너뜨릴 것이다.

나는 그냥 혼자서 빙그레 웃었다.

"왜 웃어?"
"아니, 그냥 웃긴게 생각나서, 왜 그럴 때 있잖어. 버스타고 가다가 갑자기 옛날에 웃긴 거 생각나서 혼자 비실비실 웃다가, 옆 사람이 째려보게 되고 그런 상황."

나는 그렇게 얼버무렸다.

같이 선배 애 봐주며 장보기. "데이트 장소 총집합!" 책에는 결코 안나오는 것이었지만, 나는 토요일 오전을 같이 보내기에 충분히 좋은 데이트였다고 생각했다. 연구소에서 일을 마무리 짓고 온 정애 선배의 집에 가서 지나와 함께 장봐온 것들을 인계했다. 정애 선배는 고맙다고 고맙다고 했고, 우리는 정애 선배에게 좀 이른 점심을 얻어 먹을 수 있었다.

정애 선배가 만들어준 냉면을 그녀와 같이 먹고 있는데, 지나는,

"엄마, 나 자전거 사줘."

하며 한 4,5회정도 보채었다. 관심있게 바라 보던 자전거를 지나는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음, 그 어물쩡 넘어간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니. 과연 90학번의 신화, 정애 선배의 후손 답군.

더위가 한 풀 꺾인 좀 시원한 정오 무렵의 토요일은 아주 좋았다. 옆에 사랑하는 사람이 같이 걷고 있으면 훨씬 더 좋아진다.

주말 동안 집에 다녀 온다는 그녀는 이제 기숙사에 돌아가서 짐을 정리하고 오후 무렵에 예매해둔 기차를 타러 역에 갈 것이다. 나는 간만에 룸메이트 재찬이와 피자에 맥주나 불태우며 저녁을 보낼까 하는 계획을 갖고 있다.

햇볕이 좀 강했기에 우리는 가로수가 그늘을 만드는 길 한편으로 섰다. 지난주 수요일날 읽었던 책에서 길을 걸을 때는 내가 길 바깥쪽으로 걷는게 정석이라고 했다. 나는 그녀의 오른편에 섰다.

언젠가 무진장 자연스럽고 좋은 분위기가 오면, 정식으로 엄청나게 좋아하고 있다고, 그녀의 눈을 보면서 이야기하겠다고 또 다시 결심했다. 그녀의 눈을 보며, "어 저 있잖아" 하면서 말을 꺼내기 시작하는 그 계획은, 심장에 너무 무리가 가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때 우리의 옆에 뭔가가 휙 지나갔다. 좀 아슬아슬하게 스쳐서, 바깥쪽에서 걷던 나는 팔언저리가 긁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것은 자전거였다. 운전자는 바로 그 생명공학과의 느끼한 단눈치오 녀석이었다. 그 뒷자리에는 아직 고등학생 같아 보이는 신입생 여학생이 앉아 있었다. 그 여학생은 자전거를 타고 바람을 스치는 동안 약간 고개를 들어 멀리 가로수 위와 하늘을 잠깐 보고 있었다.

전형적인 우리 학교의 남녀가 만들어내는 모습중에 하나 였다. 나는 슬쩍 그녀의 얼굴 표정을 살폈다.

자전거를 타고 두 사람이 지나가는 것은, 순수하고 자유로워 보인다. 그러면서 그 모습은 친밀해 보이기도 하고, 차분하고 조용해 보이기도 한다. 아직 복잡한 세상의 이전투구와는 거리가 있는 젊은 사람들만의 분위기인 거 같기도 하다. 이런 전형적인 고리타분한 수식어들이 따분해보이기도 하지만, 넓은 학교에 지나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고 나무와 잔디밭이 많은 이 캠퍼스에서는 약간 전원적인 느낌마저도 든다.

사실 그래서 무슨 호수 공원이나 연인들이 자주 찾는 관광지에서는 꼭 자전거를 빌려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빌려타는 자전거는 좀 궁상맞고 억지스럽다.

옛날에 왜 조성모랑 "잘자 내꿈꿔"하는 인형 마스코트 나오는 광고가 있었다. 광고 자체는 유치해 보일 수도 있고 재밌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걸 따라한답시고 어설프게 흉내를 내면 그건 정말로 얄팍해서 매실음료 광고만도 못해 보인다. 억지로 "낭만적인척 해보려고" 자전거를 타고 괜히 왔다갔다하는 것은 자칫 바보스러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눈 앞에 펼쳐진 이 학교의 자전거는 진짜였다. 이 학생들은 운전면허가 없거나 아직 돈을 모으지 못해서 자동차를 살 수 없었다. 그런데, 학교는 넓다. 누구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게 되었다. 그런 학교에서 두 사람이 같이 다닌다. 자전거를 같이 타고 다닌다. 지극히 자연스럽다. 뭐 하나 우스꽝스런 200원짜리 핸드폰 전송용 일러스트를 닮은 가짜 허영이라고 비웃을 구석이 없다.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이 맑은 여름 토요일 정오. 우리 앞을 스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은 그렇게 꽤 고전적으로 보였다. 심지어 우리 학교라는 지역적 특수성이 갖고 있는 약간의 개성마저 느껴진, 참신한 진짜 "낭만"이었다.

이상의 생각은 나 혼자 펼친 망상의 나래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날개의 크기를 가늠해 보려고 다시 생각을 하는데, 그녀가 말했다.

"자전거는 앞에 바구니 달린게 좋은가? 그거 보기에는 이뻐 보여도 사실 그런거 없이 날렵하게 생긴게 탈 때 허리에는 더 편한데. 그치?"

나는 다시금 당황했다. 내가 자전거를 뭘 안다고. 나는 다시 대강 둘러서 빠져 나오려고 했다.

"뭐 그런거 같기도 하다."

그녀는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다음에는 나도 너 자전거에 태워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얼굴을 빤히 올려다 보았다.

그 표정은 차가운 완벽주의자의 그녀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말 그대로 "태워죠."하는 표현이었다. 장난끼도 좀 있어보이고, 어떻게 보면 수줍어 보이기도 하면서 또 약간 애원하는 듯한 표정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다운 그 강한 모습은 또 강한 모습대로 엿보이는 표정. 간단히 요약하면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의 신기록을 새로운 세대로 전환시키는 모습이었다.

부정불가. 나는 어떠한 조금의 의심도, 일말의 다른 우려도 없이.

"그래."

하고 헤벌레 하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정신을 차린 나는 다시금 말을 돌리려고 했다. 그런데 기숙사까지 같이 걸어들어가는 그 기나긴 길은 그날따라 이상하게 계속 자전거 쪽으로 화제가 흘러갔다. 이래서 아버지께서 정직하게 살라고 했구나하는 것을 그 날만큼 여러번 되뇌인 적도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조금씩 조금씩 말을 꾸며대야 했다.

그리하여 나의 가공된 상상속에서 나의 자전거는 산지 얼마 안되는 새 것. 이라고 일단 무미건조하게 등장했다. 그러다 그녀와의 대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은색 색깔에 약간 낮은 안장을 얹게 되었다. 과연 허리가 약간 아프다는 설명과 함께 자전거 핸들 앞에 바구니가 생겼고, 비교적 크게 붙은 뒷자리도 생겼다.

기숙사 앞에 도착해서도 왠지 좀 더 같이 하고 싶어서 나무 그늘 아래 벤취에 앉은 우리는, 거기서도 해괴하게 자전거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최대한 의심사지 않을 만한 노력하에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했지만 다른 화제로 옮겨가서 몇 번 이야기를 하다보면 돌아 돌아서 다시 자전거 이야기를 하게 되어 버렸다.

다음 주에는 영화나 한 편 보러가자는 약속을 하고,

"어. 조금만. 조금만 더 있다가 가야 겠다."

하면서 벤취에 한 한 시간 가까이 보냈다. 그리고 결국에 손을 흔들어 그녀가 기숙사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볼 때 쯤이 되자, 내 자전거는 뒷바퀴 브레이크가 약간 뻑뻑한 대신, 체인은 지난주에 정리를 해서 이제 아주 상태가 좋다는 경지로까지 구체화 되어 있었다.

이게 뭔가. 나는 혼자 내 기숙사로 걸어가는 길에 들어서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벌어진 가공과 환영의 대향연. 그런 소리를 지어내서 떠들어 댄 것은 나의 인격에 대해 심각한 오점을 남길 것이다.

아니, 그녀에게 나는 최악의 협잡꾼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헛된 사기와 협잡으로 얕게 사람의 환심을 사려는 기회주의자. 실망감과 함께 그녀 특유의 찬바람이 쌩쌩 몰아치고, 나 역시 무관심의 행성, 혐오의 늪 속으로 날려 버리겠지. 아니다. 사실 그 정도도 잘 봐준거다.

정오의 햇살을 고개를 들어 바라보며, 내 스스로 돌이켜 보니, 상상속의 친구와 매일 저녁 대화를 하며, 허상의 세계와 현실을 잘 구분 못하는 광인. 혹은 성격파탄자 비슷한 모습마저 연상되었다. 망했다.




2.

멕시코 속담에 그런 말이 있다. "한번 멕시코의 흙먼지를 맛 본 사람은 지구상 어느 곳에서도 그러한 평안함을 잊지 못한다."

굉장히 뒤숭숭한 정신상태로 기숙사에 돌아오니, 재찬은 여느 때처럼 컴퓨터 화면 앞에 붙어 어느 외국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이 나른하고 가라앉은 분위기. 엷게 퍼지는 여유로운 무의미함.

그 모습은 울산바위나 구룡폭포처럼, 마치 수천년 전부터 자연의 일부로서 그 자리에 펼쳐져 있는 것 같았다. 동영상을 보며 여가시간을 보내고 있는 재찬의 모습은, 바로 그 멕시코의 흙먼지 같은 것이었다.

"야, 재찬아 큰일 났다."
"왜? 뭐야?"

재찬은 이어폰을 한쪽만 빼서 귀를 열었다. 시선은 화면을 계속 보고 있었다. '스테레오로 들어야 사운드를 제대로 들을 수 있는데, 빨랑 대화를 끝내고 다시 정식 동영상 감상에 돌입하자.' 그런 생각이 텔레파시처럼 나에게 전해졌다.

"자전거 타는 거 배우는 데 얼마나 걸릴까?"
"그게 뭐 배울게 있냐? 그냥 한 두 시간 타보면 알 수 있어."

전혀 아무런 신뢰감이 생기지 않는 무성의한 어조였다.

"나 자전거 사러 가야겠다. 같이 가자."
"뭐? 자전거? 왜?"

재찬은 단축기를 눌러 동영상을 일시 정지 시킨 후, 그제서야 의자를 돌려 나를 쳐다 보았다. 나는 "몰라. 그냥 그렇게 되었다." 그러면서 말을 때우다가, "말해봐. 뭔데. 너 또 뭐 저질렀냐?" "알거 없고." 그렇게 실랑이를 하고는 재찬에게 사실대로 사연을 말했다. 재찬은 몹시도 흥겨워 하며 나를 비웃었다.

자전거 타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리 없었다. 지금 갑자기 자전거 타는 것을 연마한다는 게 좀 뜬금없긴 해도, 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떠벌려 놓은 괴언을 수습할 길은 오직 그것 뿐이었다.

잽싸게 자전거를 한 대 사서 타는 법을 익힌 후에, 다음 주에 영화보러 갈 때 그녀를 만나서는, 익숙하게 십수년 전부터 자전거 타는 법을 알고 있었던 척 하면서 유유히 그녀를 태우고 들어 오면 된다.

그리고 그러고나면, 드디어 나는 자전거 타는 법도 익히게 되고, 또 자전거도 생기게 된다. 그러면 어린시절 이루지 못했던 공백을 하나 깨끗하게 메우는 것이기도 하며, 동시에 이제 하염없이 두 다리로 걷는 대신 남들처럼 날쌔게 자전거를 타고 신속함을 즐길 수 있다. 이러한 부가적인 효과도 있는 좋은 해결책인 것이다. 괜한 말 실수로 쓸 데 없이 신경써야 할 일이 하나 생겼다는 그 원인 자체가 나쁠 뿐이지, 힘들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3시간 후. 나와 재찬은 두 시간째 더위에 시달리며 동네의 자전거포들을 뒤지고 있었다.

"더 이상 더 뒤지는 건 바보 짓이야. 그냥 아무거나 사."
"저기 저 초등학교 뒤에 있는 집까지만 보고 결정하자."

재찬은 짜증을 냈다. 우선 자전거를 사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그녀에게 한 시간 동안 꾸며댄 그 환상속의 자전거와 똑같은, 적어도 비스무리한 자전거를 찾아내야 했던 것이다.

아무렇게나 지어내는 대신 길가에 눈에 많이 띄는 모델을 보고 참고해서 말했으면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번도 내 자전거를 갖고 있지 않던 나는, 자전거에 대해서 진지하게 관심을 갖고 있었던 적 역시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내 머릿속 한 구석에 저장되어 있던 자전거의 이미지란, E.T.에서 하늘을 날아오르던 자전거나, 레모나 광고에서 롯데가 내보내는 화면속의 자전거 같은 것들 뿐이었다.

그나마 그게 일관성 있게 하나만 펼쳐지면 다행일 것일진데, 내가 그녀에게 떠들어댔던 모습은 60년대 영화속의 자전거와 지난밤 스포츠 뉴스에서 펼쳐졌던 산악자전거의 모습까지 이것 저것 뒤섞여 있던 모양새였다.

사실 이게 무슨 완전범죄를 기획하는 것도 아니요, - 사실 완전범죄를 기획하려는 것이다 - 그녀가 새로 도입한 기자재 감사하듯 꼼꼼히 목록을 갖고 검사할 리도 없었다. 그렇기에 내가 그녀에게 말한 내용을 정확하게 따르는 모델을 살 필요는 없었다. 나도 그걸 아는데, 이상하게 내가 상상한 내 자전거의 모습과 대강 닮은 것조차도 발견하기 어려웠다. 이건 뭔가 안좋은 조짐이었다.

"자전거가 무슨 뭐 그렇게 많이 중요하냐? 그냥 내 자전거 빌려줄테니까 그걸로 연습해. 니 자전거 고장나서 맡겨 놨다고 하고, 그냥 내 자전거 빌려가서 타고 폼만 잡으면서 오면 되잖어."

여섯 번째 자전거포를 나오면서 재찬은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 시나리오 속에서는 다음주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내 자전거를 확보하는 일을 해야 한다. 기왕 그럴바에야 지금 내친김에 내 자전거를 사두는 게 낫다.

게다가, 나는 정말 내 자전거를 갖고 싶었다. 1차적으로 나는 거짓말을 수습하기 위해서 자전거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그녀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싱글벙글 웃으면서 그 곧게 뻗은 길을 달리는 모습을, 나도 한 번 진심으로 만들어 보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달릴 때, 옆 얼굴을 스칠 미풍을 생각해 보라. 그 옅은 바람이 지치고 지나가며 이어져서는, 그대로 그녀의 머리칼을 약간 흐트리며 빠져 나간다. 그러면 그녀는 한손을 뻗어 머리를 다시 만질 것이다. 그런데, 그 때 타고 있는 자전거가 사기치고, 재찬이 자전거 빌려온 것이라면? 이거 얼마나 우중충한 설정인가. 아니다. 나는 정말 내 자전거를 사야 했다.

나는 재찬이에게 오늘 저녁 피자와 맥주를 모두 내 돈으로 사준다고 달래서 결국 네 군데의 자전거포를 더 둘러보고 상상속의 내 자전거와 완벽히 부합하는 모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자전거값 피자값과 맥주값을 합치니 지난 두 달간 틈틈히 지나 봐주고 정애 선배에게 받은 돈이 산산히 흩어졌다.

어쨌거나 그 날 저녁 나는 사상최초로 나의 자전거를 두 손으로 잡고 옆에 끌고 돌아 올 수 있었다. 나는 자전거를 탈 줄 모르니까 그렇게 끌고 들오 오는 수 밖에. 그러나 기분은 약간 감개무량하기까지 했다.

다시 기숙사로 걸어들어오는데, 내 자전거가 굉장히 멋있어 보였다. 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모습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왠지 성능도 아주 좋을 듯 했다. 이것이 나의 자전거. 나의 이동수단. 스쿠터 이름을 택트리안이라고 붙였다고? 그러면 나의 이 특급 멋진 자전거는 "바이클스" 쯤의 이름이 어떠한가.

약속대로 피자와 맥주를 먹으며, 또 컴퓨터 게임으로 재찬이와 다섯번 대결해서 다섯번 모두 패하면서 우리는 저녁을 보냈다. 그리고, 나는 재찬이와 함께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으슥한 기숙사 뒷길로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 이제 자전거를 배울 차례였다.

나는 재찬의 설명대로 자전거 핸들을 꼭 잡고 페달을 밟을 준비를 했다. 10년전과는 달리 뒤에서 잡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냥 앞으로 쭉 빨리 가버려. 속도가 붙을 수록 안넘어지니까 그냥 쭉 가면 돼. 그게 다야."

재찬은 멀찌감치 뒤에서 보고 있었다.

핸들을 잡은 손에서 약간 땀이 났다. 아무리 친한 친구고 룸메이트지만, 이 나이에 이 덩치로 자전거를 못 타서 자빠지면 꽤나 쪽팔릴 것이다. 나는 용맹하게 땅에 딛고 있던 두 발을 떼고 페달에 발을 딛었다.

"괜찮어? 안다쳤냐?"

잠시 후 혼비백산하며 재찬이가 쓰러져 있는 내 옆으로 뛰어 왔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10년전에 공원 잔디밭에서 아버지께 배신당해 쓰러졌을 때보다 다섯배쯤은 더 아픈 거 같았다. 여기는 잔디밭이 아니라 시멘트로 포장된 길바닥이었고, 나는 그 때보다 세 배는 더 덩치가 커져 있었다. 그러니 그 운동량과 충격량은 얼마나 더 컸겠는가. 더군다나 그 때처럼 눈물을 흘리며 분노를 발산할 대상도 없고. 그저 수치심과 육체적 고통만이 마음속 한 가득 메아리칠 뿐이었다.

2차 시도. 3차 시도. 넘어지는 방향과 각도의 문제였지, 출발 10미터를 채 못채우고 굉음과 함께 자빠지는 것은 똑 같았다. 유일한 발전 사항은.

"그렇게 자빠지다간 자전거가 부서지겠다. 넘어질 때 몸을 요렇게 돌리면서 다리를 짚어. 그러면 너야 시멘트 바닥에 나뒹굴겠지만 자전거는 그래도 별로 안 상할거 같으다."

라는 재찬의 지적이었다. 매정한 말이었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이 자전거를 부숴 먹으면 모든 게 끝이다. 만약에 자전거가 박살이나서 오늘 저녁 자전거를 처음 사서 끌고 들어올 때 치솟았던 희망이 그 좌절감으로 내리 꽂을 때의 심정은 어떠할까. 나는 그 다음부터는 온몸이 멍투성이가 될 지언정 자전거는 지키겠다고 결심했다.

우리는 수십번쯤. 정확한 횟수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 생각에는 한 2천번쯤 나자빠지며 자전거 타기를 연마하다가 결국 철수하기로 했다. 자전거 타는게 뭐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고. 그걸 못해서 우당탕 거리고 있는 나를 보고 재찬은 안타까워 했다.

재찬은 불쌍히 여기다가, 나중에는 자기가 아무리 조언을 해 주어도 아무 변화가 없는 나를 보고 약간 짜증을 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재찬은 나를 보고 놀라며,

"너 피나 임마. 으에... 줄줄흐른다. 고만해 고만. 그만하고 방에 들어가자."

라고 했다. 재찬의 만류로, 10년만에 시도한 나의 두 번째 자전거 타기는 이처럼 구슬프게 막을 내렸다.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재찬은 모든 것을 잊고 그냥 케이블 텔레비전의 리얼리티쇼나 보자고 했다. 나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고민을 했다. 실패의 원인은 크게 세 가지다. 우선 나는 어떤 원인에서인지 정확히 의학적으로 지적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감각적인 문제가 있었다. 내가 자전거를 타는 어떤 감각이 좀 둔하다는 게 첫번째 원인이었다.

두번째 원인은 고통에 대한 공포다. 앞서 말했듯이 덩치는 커지고 도로 사정이 아주 안좋아졌기 때문에, 실패할 경우에 받는 외상의 위험과 심리적 타격이 크다. 더 아프고, 더 쓰리고, 더 열 받는다. 때문에 지나치게 신경쓰게 되고 자유로운 반사신경은 굳어 버린다. 그러다 보니 대담하게 균형을 내맡긴채 페달을 밟아야 하는 그 작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이다.

가장 큰 세번째 원인은 쪽팔림에 대한 의식이었다. 야밤에, 자전거 탈 줄 몰라서 타는 거 연마하고 있는게 나는 부끄럽게 느껴졌다. 특히.

"왜 그걸 못하냐... 왜..."

라며 한탄하는 재찬의 목소리는 가슴을 쿡쿡 찔렀다. 재찬은 그나마 낫지. 지나가는 행인1이나 행인2, 혹은 기숙사주민3이 나를 발견한다면 얼마나 더 부끄럽겠는가.

그런 기본 부끄러움을 넘어서서 더 큰 부가 위협이 존재하기도 했으니, 만약 그녀나 그녀의 친구나, 그녀의 친구의 친구에게 이 모습을 들킨다면? 그러면 "들킨다".

그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모든 염원이 깨어지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런 걸 자꾸 걱정하다보니, 자전거에만 집중하는게 아니라 사방을 두리번 두리번하게 되고, 소심해지고, 자세의 개선에 기울이는 노력이 부족해졌던 것이다.

이튿날 일요일. 나는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렸고, 다시 자전거포에 찾아가 무릎 보호대와 헬멧을 샀다.

기껏 자전거 타면서 중세 시대 기사나 킹크랩 같아 보일 보호구를 덕지덕지 입는 것은 바보 같아 보였다. 분명히 쪽팔림이라는 세 번째 원인을 더 가중시킬 것이다. 그러나, 또한 부상의 위험이라는 두번째 원인을 대폭 줄여줄 수 있다. 그러면 일단 절대 연습량을 확 늘일 수 있다. 한 백번이나 이 백번쯤 시도하다보면, 쪽팔림은 점점 줄어들 것이고, 얼굴의 두께는 점점 비후될 것이라는 게 내 계산이었다.

자전거 타기 3차 시도는 월요일 야간에 같은 장소에서 이루어졌다. 재찬은 실험3 과목이 밤늦게까지 이어지기에 나 홀로 연습하고 있으면, 끝나는 대로 찾아오기로 했다. 아직 다리와 팔꿈치에 입은 상처가 덜 아물긴 했지만, 어제 산 보호구를 다 두르면 참을만 할 듯 했다.

혼자 나와 있으니 괜히 더 주변 사람들이 보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그리고, 뒤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없으니까, 자꾸 뒤를 돌아다 보고 싶어서 더 정신이 사나웠다. 그래서인지 줄기차게 계속 실패만 하고 있는데, 재찬과 그의 실험 파트너인 후배 종욱이 나타났다.

"종욱아 너 오랫만이다. 내가 언제 보쌈 한 번 사주기로 했었는데."

괜히 과장되어 반가운척 하며 길게 인사를 했다. 그런데, 종욱과 재찬은 '말은 그만하고 어서 연습이나 우리 보는 앞에서 똑바로 해 보시지' 하면서 버티고 서있는 분위기였다. 나는 상당한 중압감을 느끼며 종욱과 재찬 앞에서 자전거 위에 앉아서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그건 내가 생각해도 "자전거를 탄다"고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한 참 그러고 있자니, 종욱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했다.

"저기요. 선배. 안장을 약간 높이고 손잡이를 조금 아래쪽으로 휘면 어떨까요. 그럼 중심이 앞쪽으로 가면서 앞바퀴가 덜 비틀거리고 균형도 잘 잡힐 거 같은데요."

무슨 소리인지. 그러나 재찬의 탄성소리가 뒤를 이었다.

"오오.. 맞네. 그러면 훨씬 낫겠네. 맞어. 지금 중심이 너무 뒤쪽에 있어서 자꾸 앞바퀴가 미끌려서 균형이 무너지거든. 그러니까. 종욱이 말대로 하면 좋을 거 같은데."
"뭔 말이냐?"
"정역학이나 뭐 그런거 배운적 없냐?"
"연소공학과에서 무슨 정역학을 배우겠냐?"
"그래도 일반물리 시간에 힘의 평형 이런거는 배웠을 거 아냐."

내가 다 까먹고 하나도 기억안남. 이라는 텔레파시를 보내는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재찬이 보도 블럭 한 켠에 앉으며 A4용지 한장을 꺼냈다.

"이거 봐, 자전거가 이렇게 생겼고, 니가 여기에 이렇게 있으면, 중력이 연직방향이니까 힘이 여기하고 여기에 걸리지?"
"그렇다치고."
"뭘 그렇다쳐. 맞잖어."
"글쎄, 그렇다치고."
"그런데, 아까 종욱이가 한 말대로, 여기를 약간 높이면, 니 자세가 이렇게 되지. 그러면 중력 방향이 이쪽인데, 이 벡터를 진행 방향 성분하고, 그 직각 성분으로 분리해 보면, 평형이 이렇게 나오잖아 그치?"
"대강."
"이걸 정확하게 방정식을 풀면 값이 나오겠지만, 뭐 그게 아니라도 이 그림상에서 보면, 힘의 평형을 생각해면 중심점이 이렇게 앞쪽으로 오잖어. 그러면 무게가 앞바퀴 쪽에 좀 더 실리기 때문에 훨씬 더 균형잡기가 쉬워 질거라고."

날마다 야바위식으로 아슬아슬하게 답만 꿰어 맞추던 일반물리의 기억. 그 기억 되살아나면서 재찬의 설명을 이해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사실 잘 못알아 들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종욱이가 말한 것이니까 맞을 가능성이 높았다.

"믿어 본다. 한 번 해보자."

우리 셋은 기숙사 사감실에 가서, 자전거를 수리해야 겠다며 공구들을 빌려 왔다. 새 자전거라서 아주 튼튼하게 조립되어 있었고 너트와 볼트들을 하나 돌리는대도 엄청나게 힘이 들었다.

"너 진짜 수고한다. 내가 내일 점심 때 꼭 보쌈사주께."

실험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이상한 일에 휘말린 종욱이 나는 좀 안되어 보였다. 그러나 지금 현재 아주 중요한 인력이었기에 이러한 당근으로 달랠 수 밖에.

수 시간의 작업 끝에, 균형 강화판 자전거가 완성되었다. 나는 큰 기대는 하지 않고 다시 자전거에 올라 페달을 밟았는데, 의외로 꽤 큰 효과가 있었다.

물론 비틀비틀 하다가 몇 미터 나가지도 못하고 넘어진 것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확실히 더 안정적인 느낌과 끝까지 내가 자전거를 조작하고 있다는 통제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큰 진전이었다.

그 날 밤, 두 사람의 응원과 타오르는 나의 노력이 쇠할때까지 넘어지기를 반복할 끝에, 나는 평균 7,8미터 정도를 운행할 수 있었다. 재찬의 표현에 따르면 그건 운행이 아니라, 스타트를 제대로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나마 분명한 발전이었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넘어질 때 그렇게 많이 다치지는 않을 듯 했다.

다음날인 화요일. 이 날은 강의 하나를 빼먹고 애저녁부터 연습에 돌입했다.

계절 학기 과목으로 들은 것은 "19세기 프랑스 오페라의 이해" 였다. 출석 점수가 꽤 높긴 하지만, 시험 점수의 비중이 압도적인 고로 시험만 잘치면 학점은 대강 받을 수 있었다. 나는 CDP에 시험에 나오는 오페라 곡들을 넣어 와서는 그걸 들으면서 자전거 타기 시도에 나섰다.

구슬픈 아리아 가락에 맞춰 넘어질 때는 처량함이 더 강화되기도 했거니와, 힘찬 합창곡이나 유쾌한 기교적인 곡을 따라 페달을 내딛을 때는, 그 아슬아슬한 느낌이 더 크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재미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 수록 점점 절망감의 싹이 돋았다. 갈수록, 19세기 프랑스 오페라에 대해서는 더 잘 이해하고, 곡들을 기억하고, 감상이 정리되었던 반면에, 도무지 자전거는 늘지가 않았던 것이다.

"오페라에 정신을 빼앗기는가 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CDP를 옆에 두고 음악을 듣지 않으면서 시도하려고 했다.

"잠깐, 누가 CDP를 훔쳐가면 어쩌지?"

요즘 의외로 도서관과 기숙사 근처에는 도둑이 많다고 게시판에서 떠들썩하지 않았던가. 나는 CDP를 기숙사 방에 두고 와야 겠다고 생각했다.

"잠깐, 누가 자전거를 훔쳐가면 어쩌지?"

자전거 도둑이야 사람 사는 곳에 항상 있는 고전적인 직업이다.

나는 자전거를 우선 천막안에 묶어 두고, CDP를 기숙사에 두고 오기로 했다. 귀찮은 2단계의 작업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나는 어느 새 이 자전거를 굉장히 애지중지 하고 있었다. 한 번의 개조를 거친 이 자전거는 이제 돈 주고도 구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경제외적 이유를 따져 보자면, 내 정념이 투사된 나의 첫번째 자전거가 아니던가.

CDP를 갖다 놓고, 자전거를 묶어두고, 나는 다시 돌아 왔다. 방금 전의 진술에서 확인 되 듯, 나는 이 생각 저 생각에 굉장히 정신이 산란되어, 결국 반대로 CDP를 먼저 갖다 놓고 자전거를 방치해 두었다가, 나중에 자전거를 천막밑으로 끌고가서 묶어 놓으려고 했다. 자물쇠에 막 열쇠를 넣으려다가.

"가만, 이게 무슷 짓인가."

싶어 자전거를 도로 풀어서 너의 연습 장소, 기숙사 뒷길로 끌고 나왔다. 영구스럽기 한량없다.

그렇게 자전거를 끌고 나타나니, 재찬과 종욱이 어느새 나타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 수 있을 거예요. 선배."
"오늘은 적어도 다칠 걱정은 없으니까 진짜 죽도록 연습해 보자."

두 사람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정말로 자전거 타기 연습을 종신토록하다가 인생을 다 보내고 노후를 맞이할 수는 없었다. 나는 지루하고도 맹렬하게 연습을 계속했건만,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결국 나는 심리적으로 완전히 지치고 말았다.

"진짜 미치겠다. 에휴."
"이게 우리가 자전거 타는 걸 가르친 경험이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어요. 수영이나 테니스도 다 강사한테 배우잖아요. 뭔가 경험이 있는 사람한테 배우면 잘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종욱은 그렇게 설득력있는 의견을 하나 더 제시했다.

"일단 보쌈부터 먹고 보자."

먹으러 나가는 길에 생각해 보니, 종욱의 말이 과연 맞는 거 같았다.

물론 수영이나 테니스는 강사한테 배우지만, 대체로 말하는 법이나 키보드 타이핑 같은 것은 강사한테 배우지 않고도 익히는 것 아닌가? 거기에 대한 대답을 나는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 막막한 상황에서 "그건 다 무슨 차이점이 있을거야"하고 얼버무리고 나는 종욱의 말대로, 자전거 지도의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한 번 배워 보겠다는 결심을 했다.

식당에서 틀어준 시트콤을 보며 웃으면서 종욱과 재찬은 보쌈을 먹었다. 그동안 나는 배추잎을 뒤적뒤적하며 곰곰히 고민을 했다.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 본 적이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나는 얼마전에 조카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 줬다는 제어공학과 대학원의 진수 선배가 생각 났다.

진수 선배는 나에게 신세를 갚을 것이 하나 있었다. 진수 선배가 짝사랑하던 자신의 대학원 선배와 그렇게 잘 맺어진 것은 나의 비범한 조언이 탁월한 효과를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2주 전 까지만 해도 진수 선배는 사랑의 번민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산소 부족과 잠수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 나 역시 비슷하게 갑자기 진전된 그녀와의 관계에 당황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며칠간 나는 많은 사람들처럼 서점에 깔려 잇는 "여우의 속셈, 늑대의 작전" 같은 책을 보고, 또 "연애 공략법" 같은 만화로 된 버전을 뒤적이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나는 그녀와의 애매한 관계를 확정적인 것으로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불타올라 인터넷을 뒤적거렸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애매한 관계를 어떻게?" 같은 게시물들을 곰곰히 읽었다. 그리고 수없이 읽은 게시물들을 컨트롤C와 컨트롤V를 이용하여 하드디스크에 그 내용을 편집해 저장한 것 또한 물론이다.

인터넷에 퍼져 있는 글들은 굉장히 읽을 것들이 많았다. 심지어 그녀와 비슷해 보이는 인기 있는 얼음 소녀들이 직접: "오히려 그런 남자들은 거부감이 생기죠." "짜증날 것 같은데요." 하면서 덧글을 달아 놓은 사연들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다각도로 그녀를 대할 태도를 연구하던 예리한 연구자의 눈에,  바로 그것들의 오류가 드러났다.

그것은 직접 자기 심정을 쓴 글이 올라온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진실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것이었다. 자기 자신의 심정을 직접 써 올리는 것이 인터넷의 글인 만큼, 아무리 익명성이니 자유분방함이니 해도, 거기에는 분명 자기 꾸미기와 폼 잡기가 가득했다. 그게 아니라면 오히려 그 반대로 자극적인 카타르시스를 위한 위악이나 "솔직함의 과장"이 있기도 쉬웠다.

예를 들면,

"꽃 선물은 싫어요. 실용적이지도 않고, 잠깐 보기에 그럴듯해 보이지 조금만 지나서 시들면 지저분하기만하고..."

이런 글을 읽었다고 치자. 그렇지만, 이것은 꽃을 선물 해서는 안된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다만 헛된 치장과 진부한 사랑고백에 질려버렸다는 뜻일 뿐이다. 선물의 종목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에게 좀 더 솔직하고 편안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니면, 반대로 주변에 꽃을 받고 자랑하는 듯한 아니꼬운 친구가 눈에 띈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진수 선배는 그걸 깨우치지 못하고, 인터넷에 나온 조언을 그대로 따르다가 죽을 쑤고 있었다. 아슬아슬한 짝사랑녀와의 관계는 균형을 잃고 쓰러져 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쯤 내가 새로운 정보의 보고를 발견했다.

보다 솔직하고 직접적인 연애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은, 연애상담 게시판이 아니었다. 그것은 각종 포털 사이트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시댁 식구 이야기 게시판이었다. 포털 사이트 마다, "울컥벌컥 시댁이야기" 라거나 "몰래하는 시댁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개설되어 있는 이 게시판은 의외로 굉장히 활발하게 운영된다. 여기에서 주로 결혼한지, 2,3년차쯤 되는 아낙네들이 이런저런 시댁 식구와 관련된 삶의 무용담들을 늘어 놓는다.

"울랑"은 "우리 신랑"이고, "셤니"는 "시어머니"를 지칭한다는 약간의 어휘습득을 마치고 나면, 이 게시판의 게시물들을 면밀히 읽는다. 물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글의 화자인 결혼한 아낙네들이 아니다. 우리가 찾는 핵심 정보는 이 아낙네들이 풀어 놓는 "시누뇬"이나 "짱나는 남푠 동생" 이야기에 있다.

이 글에는 무수히 많은 남편의 동생들과 친척들의 험담이 올라와 있다. 이 험담 중에 상당수를 차지 하는 것은, 시누나 시동생이 바깥에서 어떤 사건과 어떤 연애담에 울고 웃게 되어 심리상태가 오락가락했는지, 그 정보가 솔직하고도 예리하게 분석되어 담겨 있다. 어떤 전화를 받고 즐거워 했는지, 그에 비해 누가 언제 나타났을 때 기분나빠했는지, 그럴듯한 심리분석까지 곁들여 정리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인터넷의 이 숨겨진 심리전의 보물지도를 진수 선배에게 알려주며, 짝사랑녀와 관계를 개선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할 몇몇 게시물들을 짚어주었다. 기껏해야 "필승의 여인공략법" 같은 게시물이나 외고 있던 진수 선배에게 이것은 신천지요, 별세계였다. 결국 진수 선배는 강 저편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고, 기쁨에 가득차서 격앙된 목소리로 나에게 전화해서,

"나에게도 드디어 봄이 왔다. 진짜 고맙다. 진짜. 내가 술 백번 살께. 백번."

그러면서 떠들어 댔다.

진수 선배의 도움을 얻기 위해, 나와 재찬과 종욱은 심야의 제어공학과 대학원의 연구실로 찾아 들었다. 시간은 자정넘어 새벽으로 가고 있는데, 진수 선배는 연구실에 홀로 불을 밝히고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선배, 안녕하세요."
"어? 야- 너 오랫만이다."

사연을 밝히자, 진수 선배는 아주 즐거워 했다. 자신이 짝사랑 때문에 번뇌할 때, 내가 나타나 묘책과 비방을 알려주었는데,  비슷한 상황에서 훨씬 더 바보스러운 시도에 고통받고 있지 않은가? 동병상련인 동시에, 안고수비였다.

"그런데, 오늘은 너무 바빠서 안되겠는데. 처리해야할 일들이 너무 많어. 일 하는 걸 인제 배우는 입장이니 짬이 안나네."

이미 대다수의 시민들이 곤히 잠을 청하고 있을 심야 중에서도 심심야인데, 무슨 할 일이 많다는 것인지. 나는 도와줬는데, 나를 도와주지는 않다니, 역시 세상은 이렇게 비정한 것인가하는 생각마저 조금 들었다.

그런데 아닌게 아니라 진수 선배는 시달리는 일이 많았다.

"지금, 내일 아침까지 여기 소갑이 형 책상이랑 중을이 형 책상 닦아 놔야 하거든. 서병이 형 자리쪽 바닥에 얼룩도 지워 놔야 하고."
"에이, 청소 정도야 뭐."
"남정이 형이 읽어서 정리하라고 한 논문도 두 편 있고..... 있다가 새벽 두시 반에는 중무 형이랑, 동기 형이랑 만나서 할 일이 있거덩."
"무슨 일이요?"
"같이 교수님 자동차 세차 다 해야 돼. 그거 모이는 시간에 늦으면 중무형 자다 일어나서 되게 짜증될거다. 투싼... 아... 씻기 힘든데..."
"내일 아침에는요?"
"아침에는 대경이 누나랑 마트가서 커피랑 녹차 사러 가야지."
"틈틈히 시간은 안나시나요?"
"틈틈히 시간이 날 때는, 어제 학부생들이 친 시험지 채점!"

나는 잠시 이 대학원생 선배가 약간 두려워 졌다.

그러나 잠깐 더 고민을 하다가 나는 다음과 같이 과감한 제안을 펼쳤다.

"저기요. 선배. 저랑 재찬이랑 종욱이가 청소 대신해 드릴 테니까, 그거에 절약되는 시간만큼만  저에게 가르침 내려 주시면 안될까요?"

쌓인 피로로 충혈된 진수 선배의 눈동자는 무엇인가 일을 부탁하기에는 사실 좀 불쌍해 보였다. 그러나, 나에게 사랑을 얻은 은혜를 빚지고 있지 않은가. 본래 진수 선배는 사람이 착하다. 그는 결국 내일 불벼락이 떨어질 가능성을 과감하게 무시하고 연구실을 박차고 나왔다. 그는 우리들과 함께 연습장인 기숙사 뒷길로 향한 것이다.

졸지에 친구따라 나섰다가 청소 용역을 하게된 재찬과 종욱에게는 야식을 사줘서 무마하자. 야식일도 하사불성.

"너 키크니까, 다리 땅에 닿지?"
"예."
"그러면, 자전거에 탄채로 다리를 굴러서 목마타듯이 자전거를 앞으로 굴려나가. 그러다가 어느 정도 관성을 얻으면 그 때부터 페달을 밟는거지."
"오호."

진수 선배의 말을 듣고 있던 재찬이가 감탄했다. 어느 정도 속도가 붙어야 균형잡기가 쉬워진다. 그러나, 속도를 붙이려면 그만큼 균형을 잃을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페달을 밟으며 달리기전에 도움닫기를 하는 것이다.

"그치? 그러고나서, 왼쪽으로 기울어질 거 같으면 오른쪽으로 핸들을 살짝 꺾고, 오른쪽으로 넘어질 거 같으면 왼쪽으로 핸들을 꺾어. 페달 계속 밟아서 속력내고. 간단해."

나는 믿음직스런 진수 선배의 조언대로 자전거를 조작하였다. 그러나 결론은 이론은 되는데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지금 핸들을 오른쪽으로" 간절히 생각은 미치는데, 팔이 제꺽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트리거에서 어커런스까지 가는 시간보다, 트리거 리액션 타임이 너무 크다."
"예?"
"이해는 하는데 반응이 느리다고."

진수 선배는 자전거를 가만히 쳐다 보았다. 그는 수심에 빠져 있었다. 종욱이 말했다.

"저기요. 무게 중심을 앞쪽으로 주려고  핸들을 좀 꺾었거든요. 이걸 약간만 들어 올리면, 반응 시간을 좀 줄일 수 있지 않을까요?"
"그건 그래봤자 너무 마이너할 거 같은데. 지금 중요한게, 조작이 중추반사로 이뤄져야 대응시간이 줄어드는데, 지금 얘는 대뇌판단으로 하고 있다고. 그게 차이가 너무커서 도저히 데드타임으로 안쪽으로 떨어지게 하기가 어렵네."
"반사 신경을 키우는 무슨 훈련을 해 보면 어떨까요?"

재찬이 제안했다. 나는 무슨 신형 우주 전투기 파일럿 취급을 받고 있었다. 진수 선배는 근엄하게 꾸짖었다.

"상품 설계의 기본은 유저 프렌들리야. 인터페이스를 사용자한테 맞춰야지, 사용자를 인터페이스에 맞추게 하면 백전백패한다."

진수 선배는 고민 끝에 다시 연구실로 돌아가서는 파이프 두가닥이 연결된 알루미늄 드럼세트 같은 것을 가져 왔다. 이미 그는 교수님 차 세차라든가 내일 아침에 커피 사다 놓기 같은 것은 완전히 잊은 거 같았다.

"큰 선박 같은거 보면......"
"성박이요?"
"아니 선박. 배 말이야 배. 배가 파도가 치면 이렇게 막 흔들리잖아. 이거 흔들리는 거 막기 위해서 배에 뭘 달아 놓냐면, 물탱크를 좌우로 크게 달아 놓고, 흔들리는 반대쪽으로 물이 고이게 설계해 놓거든. 그러면 배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면 어떻게 되겠어?"
"물이 왼쪽으로 흘러가서 고이겠죠."
"그치? 그러면 물이 왼쪽에 많이 모여 있으니까, 배가 왼쪽으로 기울어지려고하면서 지가 중심을 잡는거야."
"간단하면서도 신기하네요."
"이게, 그거 작은 버전인데. 우리 실험실에서 작년에 무슨 보고서 쓴다고 만들어서 쓰던건데 말이야. 크기가 작아서 그렇지 거의 같은 역할을 하는 거거든."

그렇게 말하면서 진수 선배는 그 평형유지 장치 세트를 내 자전거 핸들 앞에 달린 바구니에 담았다.

"이 밸브를 좀 조절해보면서 맞춰 보자. 니가 직접 핸들을 돌려서 균형을 맞추기 전에 이 평형유지장치에 몰이 반대로 흘러서 먼저 핸들을 조금 기울어지게 할거거든. 그러니까 분명히 도움이 될거야."
"이 밸브쪽이 수위를 쟤는 거고, 요쪽 관으로 물이 왔다갔다 하는거죠?"

눈썰미가 좋은 종욱은 그 드럼세트를 보며 신기해했다.

과연 진수 선배의 예상은 적중했다. 평형장치를 다니까 핸들을 움직여 균형을 잡는게 훨씬 더 쉬워졌다. 자전거가 달리게 되니까 얼굴에 가득 웃음이 번졌다. 달리는구나. 좋아라 하는 순간, 비틀비틀 거리며 나의 자전거는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야, 그래도 이번에 굉장히 좋지 않았냐?"
"충분히 좋은 가능성이었어요. 인제 그냥 이대로 한 두 시간만 더 연습하면 완전 익숙해 질 거 같은데요?"

쓰러진 내 곁으로 달려온 세 사람은 모두 기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기쁨과는 달리, 그 이상의 진전은 전혀 없었다. 진수 선배는 끝까지 답답해 하며 뭔가 더 노력 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새벽 두 시 반이 되어 세차하러 모일 시간이 되자 그는 바삐 그의 연구실로 돌아갔다.

다음 날이 밝도록 나는 답답함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결국 내 선에서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분명히 두 개의 물탱크 사이의 무게 차이를 이용하는 평형유지장치는 도움이 된다. 항상 자전거가 똑바른 자세를 잡도록 핸들을 조금씩 비틀어주는 기능을 한다. 그러나, 내가 언제 넘어졌느냐를 검토해 보면, 그러한 평형유지장치는 오히려 커브를 틀 때, 방향을 조절할 때는 큰 방해가 된다.

물이 출렁거리는 느낌과 정상보다 훨씬 더 무거워진 핸들은, 운전을 아주 어렵게 만든다. 그렇게 한 타이밍 어긋나게 핸들을 억지로 꺾으면, 그 때 갑자기 물탱크가 반대로 기울어지면서 중심을 무너뜨리고 자전거는 넘어지게 되는 것이다.

"똑바로 가는데 도움되는 장치 때문에 커브를 못 꺾네."

얄궂은 기술적 아이러니에 좌절하고 있을 때, 등 뒤에서 누가 나를 불렀다.

"뭘 그렇게 곰곰히 고민하냐?"

바로 그녀였다. 갑자기 생각도 안했는데 그녀의 얼굴이 나타나자 나는 깜짝 놀라서 좀 허둥댔다. 이번에는 정말로 우연히 그녀가 나를 발견하고 같이 점심 먹으러 학교 식당으로 가자고 한 것이다.

그 날은 날씨가 더워서 땀이 좀 났다. "애고고, 덥다." 하면서 얼굴에 손을 저어 바람을 일으키는 그녀를 보았다. 머리칼이 땀에 젖어 뺨에 달라 붙어 있었다. 에잇.

"나 너 사실은 정말 좋아하거든. 사실 지금 우리 관계가 좀 어정쩡하잖아. 그래서 좀 어떻게 잘보여 보려고 내가 정말 궁리를 많이해. 그러다 보니까 나 자전거 탈 줄도 모르는데, 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주절주절 헛소리만 많이 해버렸어. 어떡해. 미안해."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갑자기 용솟음 쳤다. 그러나, 분위기가 아니었다. 밥 먹는 도중에 그냥 확 말해 버릴까.

이 빈틈 없을 것 같은 총명한 학생의 한 가지 지적할만한 사항 중에하나는 밥먹을 때의 서투른 동작이었다. 그녀는 젓가락질이 좀 서툴러서 종종 음식을 칠칠맞지 못하게 흘렸고, 오늘처럼 생선이라도 발라먹을 때는 한 점 살을 뜯기 위해 천 번은 생선토막을 통째로 뒤집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생선 한 쪽을 잡아 주었고, 그녀가 눈으로 신호를 보내면 자진해서 생선을 집어 먹기 좋게 해체해 주기도 했다.

굉장히 중요하고 힘든 일을 하는양 얼굴을 가까이 대고 두 손에 젓가락 한 짝씩을 쥐고 생선 앞에 붙어 있는 그녀의 모습.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는 왠지 사실을 말하기 겁이 났다. 엎친데 덥친 격으로 그녀는 이번 주말에 볼까말까 생각하고 있는 영화의 줄거리를 이야기하면서,

"사람을 그렇게 감쪽같이 속여 먹다니."

라고 정직하지 못한 등장인물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표했다. 도둑 자전거의 제 바퀴가 저릴 지경이었다.

그렇게 뻣뻣하고도 불편하게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나는 언제 그녀를 이런 곳, 이런 시간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여자도 아니고, 모든 것이 나와 어울리는 천생연분과도 거리가 멀다. 그렇지만, 지금과 같은 이 여름과 같은 상황을 오년 후에, 십년 후에 또 만날 가능성이 있을까?

점심을 먹고 오후 수업을 들으러 그녀가 가는 길에, 어디선가 그 생명공학과의 느끼남이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다. 그녀에 들러 붙은 그 놈은 싱글거리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이야기 했다. 내용이 유쾌한 농담이었는지, 그녀도, 그도 소리내어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생각해보니, 오늘이 어느새 일주일의 절반이 흐른 수요일이었다. 아직 혼자 제대로 타지도 못하는데. 그녀를 뒤에 태우고 능숙하게 그 먼 학교길을 주행하려면 타는 법을 익힌 후에도 많은 수련이 필요하다. 그런데, 오늘이라고 뭐가 더 나아질 가망이 있었는가?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진수 선배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나는 "선배, 전대요. 예. 예. 저기요. 선배. 예. 오늘도 저 자전거 좀 도와주시면 안돼요?" 했다. 그 목소리는 겁에 질린 것 같은 목소리에 가까웠다. 어떻게 들으면 약간 울먹이는 거 같기도 하고. 진수 선배가 괜히 어설프게 연구실 선배의 조언대로 짝사랑에게 데이트 하자고 졸랐다가 매몰찬 거절을 당했을 때, 그 때 모든 희망이 깨어진 그 목소리와 아주 닮아 있었다.

바로 그 마지막 묘사에 해당하는 부분이 진수 선배의 마음을 움직였다. 전화에서 진수 선배 역시 평형 장치 때문에 늘어난 무게와 커브에서 역효과를 감당하지 못해서 넘어지는 거 같다고, 내가 생각한 것과 같은 결론을 들려주었다. 전화기에서 한 동안 어떡한다... 어떡한다... 하면서 말을 잇지 못하던 그는,

"할 수 없네. 일단 오늘 저녁에 좌현동에 있는 장주 갈비로 와라."
"장주 갈비요?"
"거기가면 얼마전에 우리 랩에서 포스닥 연구원으로 계실 때 나 많이 가르쳐 준 분 계시거든. 그 박사님하고 한 번 의논해 보자."
"장주 갈비에서요?"
"어. 정일환 박사님이라고 못들어봤냐? 에이플러스 불도저 정일환?"
"들어 본 거 같기도 하고요......"

이렇게 대화는 전개 되었다.

별 다른 수가 없는 나는 택시를 잡아서 좌현동 장주 갈비라는 곳으로 갔다. 이제는 어쩐지 이 사건에 재미를 붙인 듯한 재찬과 종욱도 동행했다.

에이플러스 불도저라 함은, 정 박사님이 학부 시절에 줄기차게 온통 과목을 에이 플러스로 장식했기에 신화처럼 내려오는 호칭이었다. 에이플러스 불도저, 절대 만점, 소스앤 솔루션. 수리통계학과의 정일환은 무용담도 많았다.

그런데, 그 정일환 박사라는 분에게 조언을 얻기 위해 왜 우리는 장주 갈비라는 곳으로 가야하는가?

그 내막은 이러했다. 학교에서 학부를 마치고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딴 정 박사님은, 한 전자회사 연구소에 취직했다. 그는 전파 동조 코일의 타이밍에 대해서 계산하는 일을 했고, 최고의 실력을 발휘해서 좋은 제품을 만드는데 기여를 했다.

그렇게 한 5년쯤 일했을 때, 이 회사의 연구소에서는 더이상 전파 사업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사업부를 철수 개편했다. 전파 사업부의 영업 인력과 재무 회계 업무부분은 다른 부서의 비슷한 부분에 통합되었다. 그러나 어디 갖다 붙일때가 없는, 전문화되고 특화된 개밥에 도토리, 연구부분은 청산처리 되었다. 자연히 정 박사님은 해고 당하였다.

정 박사님은 여기 저기 일자리를 알아보다가, 결국 한 스페인의 이동 통신 회사에 연구원으로 취직했다. 정 박사님은 갑자기 스페인어를 공부하더니, 회사 경연진에게 직접 스페인어로 보고하는 등의 괴력을 발휘했다. 그는 전화위복 오히려 더 많은 연봉을 받고 더 좋은 대우를 받았다.

"그래서 그게 갈비집하고 무슨 상관인데."

내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택시 안에서 재찬이는 답답하여 그렇게 물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다음 이야기에서 갈비집이 등장한다.

그런데, 옛날에 정일환 박사를 해고 했던 바로 그 전자 회사가 휴대용 게임기 시장에 진출했다. 그러면서 이 스페인 이동 통신회사와 경쟁하게 되었다. 특히 중국 시장을 두고 벌이는 두 회사간의 경쟁은 피 튀기는 것이었고, 전자 회사의 전략팀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이동 통신 회사를 공격할 것을 지시했다.

정일환 박사는 바로 거기에 걸려 들었다. 정일환 박사는 입사하면서 전자회사와 퇴사후 5년 이내에 같은 업종에 취직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한장 썼다. 그래야만 한 회사에서 일하면서 핵심 기술만 쏙 빼서 배워서 다른 회사로 옮긴뒤 똑같은 복제품을 만들어 내는 일을 막을 수 있으니까.

이 전자회사의 논리는, 정일환 박사가 전자회사의 전파 사업부에 있었고, 지금은 이동 통신 회사에서 일하고 있으니, 이것은 같은 업종에 취직한 것이고, 전자회사의 기술을 빼돌린 셈이라는 것이었다.

정일환 박사가 전자회사 전파 사업부에서 연구하던 것은 전파 동조 코일의 타이밍이었고, 통신 회사에서 연구하는 것은 LCD의 불량률에 관한 것이었다. 둘은 아무 상관 없었다. 기술 유출은 얼토당토 않은 억지였다. 정일환 박사는 그런 내용으로 이유서를 제출하였다.

"야, 지들이 짜를 때는 언제고, 인제는 짤려서 다른 회사 들어갔다고 소송을 거냐?"

재찬이는 그 대목에서 분통터져 했다. 그러나, 전자회사는 일격필살의 비밀병기, "기술유출방지법"을 갖고 있었다. 전자회사는 법률 고문단을 동원하여 정일환 박사를 국가정보원에 신고했다. 정일환 박사가 스페인 회사에서 일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우리나라의 기술을 돈에 눈이 멀어 외국에 빼돌리려는 비열한 매국노 행위인 것이다!

그리하여, 정일환 박사는 신문지상을 "굴지의 전자 회사 출신 연구원, 이동 통신 핵심기술 팔아먹어" 라는 제목으로 장식했고, 집안은 수사 당했으며, 난생처음 수갑도 차보고, 구치소에 구속 수감도 당해 보게 되었다.

학부 수리통계학과 출신인 그는, 석사과정 학생일 때부터 따져도 11년동안 수리통계만 연구한 셈이었다. 정일환 박사는 결국 전자회사의 변호사들에게 "앞으로 수리통계 연구를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구치소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실업자로 전전하다가 그 처지를 불쌍히 여긴 제어공학과의 교수 한 명이 진수 선배 연구실의 포스닥 연구원으로 그를 잠시 머물게 했던 것이다. 바로 그 때 진수 선배는 정 박사님을 만났다. 두 사람은 온갖 분야의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같이 연구실에서 밤을 지새면서 많은 것을 같이 배우고 깨닫곤 했다.

지금 정일환 박사는 아무 상관도 없는 자동차 회사에서, 2년전만 해도 이름도 들어 본적 없는 부품에 대해 동력학 연구를 돕는 연구보조원이었다. 계약직으로 취직해서 대졸 초임의 절반 정도를 받고 있긴 했지만, 놀랍게도 에이플러스 불도저는 여전히 시동이 걸리면 사정 없는 것이었다.

다시 처음부터 공부를 시작한 정 박사님은 이 말도 안되게 생소한 분야에서도 충분히 한 사람 몫을 하고 있었다. 물론 이 분야의 다른 연구원들은, 그를 이면지 재활용 담당 정도로 무시하고 있긴 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몇몇 사람들은 종종 꽤 중요한 문제를 심각하게 그와 의논하곤 했다.

"그러니까, 학생들도 취직해서 연구원 생활을 하게 되면, 월급 생길 때마다 조금씩 떼서 모아서 이렇게 갈비집 같은 부업을 빨리 시작해야 돼요. 애초에 내가 여기, 장주 갈비 같은 데 하나만 갖고 있었어봐. 감옥 가기전에 진작에 바로 손 털고 그냥 갈비집이나 열심히 했지."

낮에는 연구보조. 밤에는 갈비집 사장. 눈코 뜰새 없이 손님들 사이를 다니며 고기를 나르고 설거지 거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우리가 여기까지 찾아온 이야기를 듣자, 이 아저씨는, 아이가 처음 줄 위에서 도는 팽이를 보았을 때처럼,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래? 자전거랑 평형장치좀 볼 수 있을까?"
"여기 몇 시에 문 닫으세요?"
"열한시 정도."
"그러면, 끝나는 대로, 저희 기숙사 뒤에 있는 길쪽으로 오세요."
"기숙사면 원래 기숙사 이야긴가 아니면, 새 기숙사 이야기인가?"
"새 기숙사요?"
"왜 원래 기숙사가 서문쪽에 하나 있었는데, 93년도에 새로 기숙사를 하나 더 지었잖어."

우리는 그 부분에서 과연 상전벽해의 벽을 넘은 옛날에 학교 다니던 선배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진수 선배가 말했다.

"서문쪽에 있던 기숙사는 없어졌고요, 93년도에 지은 기숙사는 지금 창고로 바뀌었거든요. 97년도에 기숙사 건물을 새로 뒷산쪽으로 해서 지었어요."
"아 맞어. 그랬다고 했지. 참."

그 날 밤 나는 또 같은 곳에서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제는 지루하거나, 부끄럽거나, 아프기보다는, 그냥 초조했다. 벌써 수요일 밤이었다. 그녀를 만나는 토요일까지는 이제 목요일, 금요일 밖에 없다.

정 박사님은 갈비집 이름이 새겨진 작은 트럭을 한 대 끌고 나타났다. 그 트럭에는 갈비 대신에 몇 가지 공구와 배선이 어지러운 금속 케이스들이 몇 개 있었다.

"이게 우리 회사 연구소에서 요즘에 개발한 '멜라니온'이라는건데, 네비게이션하고 연결하면 자동차를 원격 조종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걸 차에 달아 놓으면, 자동차 뒷자리에서 운전할 수도 있고, 뒷차에 탄 사람이 앞에 가는 차를 운전할 수도 있고 그런거죠."
"근데 이런거, 연구소 밖에 막 갖고 나와도 돼요?"
"이 놈들이 정말 답답해. 이걸 우리 보고 직접 써보면서 문제점을 찾아보고 개선할 점을 리스트로 만들라고 하는데, 그게 말이 되겠어요?"
"직접 연구원들 자기 차에 달아서 시험해보라는 이야기예요?
"갈비랑 재료 싣고 트럭몰고 다니자면 한 시간이 급한데, 괜히 이 시험 장비들고 이상한 짓 하다가 길에서 사고라도 나면 어쩔거야. 그러니까 연구원들이 전부다 샘플 장비 받아서 집에 그냥 모셔 놓고는, 나중에 보고서 쓸 때는 대강 이도저도 아니게 적당히 지어내서 쓰고 마는 거예요."

정일환 박사의 아이디어는 바로 이 원격 조종 장치 멜라니온을 평형 유지 장치의 밸브에 연결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간다. 그러면 멜라니온 시스템은 센서에서 전달되는 신호를 전송한다. 그러면 이미 자전거를 능숙하게 탈줄 아는 사람이 멜라니온 시스템의 조종장치를 들고 원격으로 평형을 잡는 것이다. 그러면 커브를 틀 때 불안하게 중심이 확 쏠려도 원격 조종으로 균형을 잘 잡아주면 된다.

"대강 될 거 같기는 하네요."
"밸브안에다 수신기까지 달면 더 무거워지니까 앞바퀴를 약간 앞쪽으로 빼서 무게 중심을 좀 조절하는게 어떨까요."
"저울 같은 거 있을까? 이거 무게를 달아 봐야지 앞바퀴를 얼마나 뺄지 계산을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정 박사님의 등장으로 분위기는 단숨에 쇄신되었고,  나와 재찬과 진수 선배와 정 박사님은 부지런히 장비를 들고 자전거에 달라 붙었다.

"자전거 타고 가는 학생이 서버 쪽이고, 뒤에서 원격 조정하는 쪽이 클라이언트 쪽이예요. 클라이언트 담당은 누가 해야 되려나."
"재찬아, 니가 해라."
"이거 은근히 부담되는데."

정일환 박사는 세심하게 무선 장비의 강도를 살폈고, 평형장치의 밸브와 연결부위가 튼튼한지도 따졌다. 그러나 멜라니온 시스템의 희망찬 등장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이번에도 역시나 실패였다.

"이거 조종하기 너무 어려워요."

재찬이 울상을 지었다. 진짜 울고 싶은 건 나였다.

재찬의 말 그대로였다. 아니 멜라니온 장비 자체가 그렇게 조작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배선이나 모니터용 계측기들은 복잡해 보였다. 그렇지만 송수신기와 연결된 조작부 자체는 자동차 핸들처럼 생긴 간단한 것이었다. 문제는 감각이었다.

자전거 운전은 눈으로 땅과 주변 경치를 보면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전거를 타는 일은 기울어진 정도를 몸으로 느끼면서 그 때 그 때 반사적으로 대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화면에 나타난 영상과 수평계의 수치만을 보고 자전거가 넘어지지 않게 원격 조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그것은 비행기를 착륙시키는 일이나 사실 별 다를 바 없는 난이도였다.

"이거 심하게 넘어지면 장비 망가지거든. 그러면 큰일나요."

멜라니온이 파손될 위험때문에 마음 놓고 넘어질 수도 없었다. 만약에 너무 심하게 넘어지게되면 나를 붙잡아 주기 위해 종욱이 자기 자전거를 타고 바짝 붙어서 같이 가면서 몇 번 더 시도해 보았다.

그렇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원격 조종하는 사람의 실력이 문제인가 싶어, 진수 선배와 종욱으로 클라이언트 조종사쪽을 교체해 보기도 했지만 좌절감과 함께 낙상을 당하는 나의 비극적 결말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면서 밤은 깊어 갔고, 우리는 철수 해야 했다. 정 박사님은 일이 해결되지 않은 것에 오기가 생겼는지,

"장비 그냥 여기다 두고 갈게요. 내일 다시 한 번 해봅시다."

하면서 장주 갈비 트럭을 몰고 돌아갔다.

그리고 목요일이 밝았다.

이제 토요일까지는 불과 이틀이었다. 사실, 그녀를 만나는 시간이 다가오는 것은 아주 반가운 일이었다. 심지어 지금처럼 시간에 쫓기고 상황이 안좋고, 만나면 난처한 상황에 처할지라도, 그래서 두렵고 난감한 마음에 가슴이 답답해도 반가웠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를 만난다는 그 단순한 사실 하나의 힘이, 나머지들을 다 덮어버리고, 토요일은 기다려지는 날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 토요일을 제대로 맞이 하려면, 이렇게 되어서는 안된다. 나는 그날 하루 동안 진수 선배와 재찬, 종욱으로부터 몇 번씩.

"어떡할거냐?"
"정 박사님한테 무슨 연락왔어?"
"생각 해 봤는데, 클라이언트 입력장치를 핸들 대신에 조이스틱으로 바꾸면 어떨까?"

그런 질문의 전화를 받았다. 나의 대답은 항상, 몰라. 몰라. 몰라. 였다.

그러던 끝에 정박사님의 전화가 다시 왔다.

"학교 C동인가 D동에 선형시스템 연구센터라고 있죠?"
"있었던 거 같은데요."
"거기에 박명아 교수님이라고 인공지능 전공하시는 명예교수님 계세요. 그 분한테 제가 전화드려 뒀으니까 있다가 여섯시에 그 분 방에서 만납시다."

박명아 교수님이라면 나도 아는 분이었다. 9시에 시작해서 10시 30분에 끝나는 수업이면, 항상 9시 00분에 말을 하기 시작해서, 정확히 10시 30분 00초가 되어야 수업을 마쳐 주는 것으로 악명 높은 할머니 교수님이셨다.

학교에서 거진 가장 나이가 많으신 편인 박 교수님은 인공지능이 전공이었다는데, 나이가 드셔서인지 주로 기초 선형대수학 같은 기본 과목을 가르치셨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 딱부러지는 수업시간때문에 그녀를 싫어했으나, 강의 자체는 어느 젊은 교수들 못지 않게 정석대로 였다.

나 역시 자진해서 박명아 교수님 강의를 신청한 적은 별로 없었으나, 시간표가 맞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박 교수님의 강의를 듣게 되면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가끔, 광복 직후 혼란기에 과학 공부한 사람들이 맨주먹으로 뭐 해보겠다고 고생하던 때의 이야기 같은 걸 들려주실 때가 있었는데, 그런 이야기들을 나는 참 좋아하기도 했다.

"정 박사 왔나? 이 덩치 큰 친구가 자네가 말한 그 자전거 파일럿이고?"

정 박사님과 내가 교수님 방에 들어서니 박 교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다.

"원격 조종 장치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요. 교수님. 그런데, 이걸 사람이 조종하려다가 보니까 눈으로 보고 숫자만 보고 조종하기가 너무 힘들다는게 문제거든요."
"그럼 내가 자네들을 어떻게 도와 주면 되나?"
"연구센터에서 기계 학습 연구할 때 쓰는 워크스테이션 시스템 있잖아요. 그걸 좀 쓰게 해 주십시오."

정 박사님의 말을 듣더니 박명아 교수님은 빙그레 웃으셨다. 돋보기 안경 뒤로 주름진 얼굴의 그녀가 웃는 그 모습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역시, 정 박사구만. 아직도 학부 때, 터미널에다 틱택토 짜 올리면서 장난치던 때랑 별 다를 바가 없네."
"이게...... 사람은 수치만 보고 조종하긴 어렵지만, 컴퓨터 신경망 시스템을 돌리면 컴퓨터가 조종을 돕게 할 수가 있을 거 같거든요. 그렇게 되면 입력되는 각도 정보하고 중력 정보를 갖고 연구센터 워크스테이션이 돌고, 그래서 자동 조종으로 자전거 균형을 잡아 주는 거죠. 간단하게 짜넣어도 충분히 될 거 같거든요."

나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정일환 박사님의 계획을 알 수 있었다. 원격 조종 장치를 컴퓨터에다 연결해서 인공지능이 균형을 잡도록 하는 것이었다. 클라이언트 자체가 유닉스 기반으로 개발되어 있으니까, 연구센터 워크스테이션에도 쉽게 연결할 수 있을 것이다.

박명아 교수님은, 어느 학부생의 한심한 도전에서 비롯된 이 황당 무계한 기획을 과연 도와 주실 것인가. 그 답은 도와 주는 쪽이었다. 박명아 교수님은 전적으로 정 박사님을 믿고 있었다. 열 아홉살 소년으로 학교에 입학해서, 30세로 박사학위를 따서 학교를 나갈 때 까지, 박 교수님과 정 박사님은 온갖 분야의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며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학문의 변경들을 쿡쿡 찌르며 다니곤 했다.

어느 새 나이차이가 50년쯤 나는 학부생들이 수업 늦게 마쳐 준다고 짜증을 내고, 강의가 끝나기 10분전부터 여기저기서 핸드폰이 울어대곤 하지 않는가. 박명아 교수님은 재미난 문제를 갖고 오랫만에 학교를 찾아온 옛 제자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컴퓨터가 세 대가 있잖아. 쿠루 머신, 바이코누르 머신, 휴스턴 머신. 그런데, 쿠루랑 바이코누르는 지금 부팅이 안되고, 휴스턴도 좀 불안해."
"아니, 왜 그렇게 됐습니까?"
"지난 번에 왜 국가기술과제 한다고 물리과, 화학과 교수들하고 전산과랑 수학과 교수들이, 저기 20억짜리 프로젝트 하나 맡은 적 있잖아."
"엔탁(NTAC)이요?"
"그 놈 한다고 이 놈들이 순 여기저기 엉뚱한 학회장가서 잔뜩 떠들기만 하고, 이 교수 저 교수 이름 올려 놓고 연구비만 타먹었지 사실 아무것도 몰라. 그냥 그렇게 연구하고 있네, 하고 있네, 하고 어영부영하면서 시간만 끈거야. 그러다가 결과 제출해야 될 때 되니까 수학과 석사 과정 학생하나가 하룻밤 밤새서 만든거 편집해다가 보고서 냈거든."
"20억짜리 과제 정도면 그래도 좀 제대로 하지 않나요?"
"정박사만큼만 하면 괜찮게. 그래서 허둥지둥 결과 만든다고 이 놈 저 놈 뒤지고 다니다가 워크스테이션들이 다 엉망이 됐어."

나는 다만 할머니가 "워크스테이션"이라는 발음을 아주 멋있게 한다는 생각 정도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할 수 없죠. 휴스턴 하나만 있어도 되니까. 휴스턴 머신은 뭐가 어떻게 불안합니까?"
"이거 봐."

박명아 교수님은 직접 컴퓨터 화면에서 SSH 터미널을 열어서 휴스턴이라는 컴퓨터에 접속했다. 나로서는 잘 알아먹을 수 없는 숫자들을 보여주시다가 박 교수님이 말하셨다.

"여기 이 부분 있지. 여기가 가끔 메모리 릭키지가 생겨. 그걸 가만히 놔두면 시스템이 다운 돼 버리거든."
"그렇겠네요."
"내가 만들어둔 스크립트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이걸 돌려서 직접 손으로 메모리를 돌려줘야돼."

나의 덜떨어진 고정관념 때문이었겠지만, 할머니 교수님이 능숙하게 컴퓨터를 다루면서 지극히 현실적인 이런저런 팁을 알려주는 모습은, 다시 한 번, 아주 인상적이었다.

박 교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컴퓨터를 붙잡고, 버그들과 네트워크 설정에 시달리면서 연구 중인 세대 였다. 하기야, 월급을 받고 가르치고 연구한다는 교수라면, 나이가 좀 들었기로 당연한 일일만도 했다.

박명아 교수님과 나는 정 박사님의 갈비집 트럭을 타고 자전거와 장비들이 있는 기숙사 뒷길로 다시 돌아왔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자기들끼리 연락을 하고는 재찬과 종욱, 진수 선배가 모여 있었다.

"네트워크 프로그래밍 해 본 사람?"
"저 해 봤는데요."

종욱이 대답했다.

"뭘로?"
"PHP랑 Java로만 해봤어요."
"그 정도면 됐어요. 라이브러리 함수 몇 개만 익히면 유닉스에서 C로도 똑같이 할 수 있거든. 그러니까 학생이 휴스턴 머신에 들어갈 인공지능 프로그램의 네트워크 부분을 짜요."

정박사님이 노트북을 열고 원격 조종 시스템인 멜라니온의 소스코드를 살피고 있을 때, 재찬이 말했다.

"그런데요. 이게 무선 네트워크면 지형이나 거리도 고려해야 되는거 아닌가요?"
"그렇..지."

박명아 교수님이 입을 열었다.

"목적이......"

박 교수님이 "목적이"로 운을 떼자, 정박사님이 같이 말하며 따라 읊었다.

"목적이 불분명한 개발 프로젝트는 반드시 실패한다."

수십년을 같이 공부해 온 스승과 제자다웠다. 나는 기숙사에 올라가서 급히 학교 지도 하나를 프린트해 왔다.

"토요일 날,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학교로 진입하면 서문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서문 바로 앞쪽에 저는 자전거를 미리 세워 둘 생각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자전거에 탑승하고, 이 서문 바로 앞에 쭉 뻗은 길을 따라... 바로 여기 여학생 기숙사 앞까지가 우리가 진행해야할 구간입니다."
"거리가 얼마 정도 되나?"
"한, 팔백 오십, 육십미터쯤 되는 거 같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자 갑자기 정박사님의 표정이 어두워 졌다.

"난감한데요. 멜라니온 무선 네트워크 범위가 5백미터가 채 안될텐데요."
"그러면 어떡하죠?"

종욱이 물었다. 어제 오늘 어쩌다보니 종욱은 정박사님과 손발이 굉장히 잘 맞는거처럼 보였다.

"그러면.... 그러면.... 예,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여기 이 중간, 그러니까 식당 건물쪽에 기지국 역할을 할 수 있는 중계기를 하나 세웁시다. 무선 노트북에 안테나만 하나 달아 놓은 다음에 조금만 손보면 대강 쓸만할 것 같은데요."
"내가 이 대학원생 친구랑 같이 만들어 보지."

박 교수님이 진수 선배를 언급했다. 지도를 들여다 보던 재찬이가 말했다.

"이거 따져보니까, 그렇게 되면 준비할 게 꽤나 많아지는데요. 우선 팀을 나눠야 합니다. 멜라니온 클라이언트랑 휴스턴 워크스테이션 있는 컴퓨터팀이 있어야 되고, 무선기지국 역할을 하는 식당팀이 있어야 되고요... 그리고, 만약에 일이 잘못되어서 자전거가 넘어지려고 하면 자전거 쪽으로 달려갈 수 있는 구급팀이 있어야 합니다. 이 구급팀이 계속 안보이게 자전거를 멀찌감치서 따라다녀야 합니다."
"그러면 팀끼리 연락할 때 쓸 핸드폰 헤드셋 같은 것도 있어야 겠네."

일단 가장 바쁜 것은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핵심 부분인 신경망 가속 알고리즘은 박명아 교수님 연구팀이 예전에 만들어 놓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 핵심부분과 멜라니온의 자동 조종장치를 연결시키는 것도 꽤나 골치 아픈 일이었다. 따라서 재찬이 지도를 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벌써 정박사님은 코딩을 시작하고 있었다.

재찬이 다시 말했다.

"이거 좀 보시겠어요. 여기 식당 쪽 지나서 꺾이는 부분이요. 그러니까 출발점에서 한 624미터쯤 되는 지점. 여기는 나무가 우거져서 구급팀이 따라간다고 해도 자전거가 넘어지는지 어떤지 잘 안보일거 같은데요."
"그러면, 이렇게 하자. 무슨 신호기 같은 걸 들고 가다가 여기서 만약에 위급상황이 생기면 신호를 보내는 거야. 그러면 구급팀이 출동하는 거지."
"패시브 시큐리티 시스템으로 하는게 좋을 텐데."
"패시브요?"
"피동 안전 체계."
"피동이요?"
"정 박사 말고,  이 중에 피동 안전 체계 아는 사람 없나?"

박명아 교수님. 역시 교수 티를 이럴 때 한 번 내 주신다. 잠시간의 침묵과 정 박사님의 웃음. 답은 내가 했다.

"안전이 정말로 중요할 때는요.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신호를 보내는게 아니라, 무슨 일이 생기면 신호가 꺼지는 식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만약에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넘어질거 같아서 제가 신호를 보낸다고 합시다. 그런데, 만약에 그때 마침 신호기까지 고장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안되잖아요.

그래서, 대신에 항상 신호를 보내면서 가다가 만약에 무슨 사고가 생기면 신호를 끄게 합니다. 그 꺼지는 걸 보고 구급팀이 출동하는 거죠. 만약에 고장나서 신호가 정 안꺼지면 전원을 내리거나 부숴버려서 알릴 수도 있는거고요. 보통 고장이 심각하게 나면 자연히 신호도 안들어오고 꺼지게 마련이니까 금방 알아볼 수 있죠.

이렇게, 능동적인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것. 신호를 보내지 않음으로서 위험을 알리는 걸 패시브 시큐리티라고 합니다."

박명아 교수님도 만족스럽게 웃으셨다. 작년 가을학기에, 연소공학과 전공수업에서 발전소 보일러의 안전시스템에 대해서 배우다가 얼핏 들은 것이었다.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식당을 지나고 나무뒤로 들어가면서부터는 초록색 레이저 포인터를 켜고 갑시다. 만약에 무슨일이 생겨서 초록색 레이져 불빛이 보이지 않으면 구급팀이 출동하기로 하고요."
"초록색 불빛이 멀리서 잘 보이지 않을거 같은데."
"제가 천문학과 대학원 다니는 친구한테 천체 망원경을 하나 구해 볼게요. 그걸로 보면 잘 보일 겁니다."

기숙사 뒷길에서 저마다 도구와 장비들을 붙들고 우리 여섯명은 분주히 움직이며 밤을 보내고 있었다.

하루 전날인 금요일이 찾아 왔다. 정박사님과 종욱은 밤새도록 프로그램 짜기에 몰두하느라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나는 재찬이와 함께 헤드셋, 레이저포인터, 천체 망원경, 다른 사람들 심부름 거리 같은 잡다한 것들을 모으고 다녔고, 진수 선배는 박명아 교수님과 함께 무선기지국을 만들었다.

정박사님의 트럭을 식당 벽쪽으로 댄다. 그 트럭을 딛고 올라가서 진수 선배가 식당 지붕 위로 간다. 식당 지붕 위에는, 식당에서 위성 텔레비전 방송을 보기 위해 달아놓은 위성 안테나가 하나 있는데, 이걸 잠시 뜯어내는 것이다. 위성 안테나를 노트북과 직접 만든 회로에 연결해 무선 네트워크 기지국으로 사용하게 된다.

내일. 바로 내일이었다.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온 학교를 뒤집고 뛰어 다니면서 우리는 정신 없이 일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정 박사님의 장주 갈비에서 다같이 저녁을 하게 된 우리팀은 자뭇 비장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런 가운데, 성공을 위한 각오를 다졌다. 한편으로는 모두가 재밌어하고 즐거워 하고 있는 거 같기도 했다.

"옛날에 해방되고 얼마 안돼서... 그러니까 사십육년도 늦여름, 초가을 쯤일거야. 그 때 경성에 전화망 교환기가 한 번 벼락을 맞고는, 전화망이 아주 통채로 나갔다고. 그런데 일본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고 나니까 그 때 경성 전화망이 뭔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이 있어야 말아지.

그래서 그 때 나랑 미군정 여군 정보부에 스물 두살짜리 정보 장교 소위 하나랑, 달랑 둘이서 서울 시내 왠갖 곳을 다 돌아다니면서 전화망을 고쳐 보겠다고 다녔다고. 그 때 참 막막했지. 그 소위하고 영어도 잘 안통했으니까.

그런데 말이야. 그 막막한 와중에도 하나씩 하나씩 해나가는데 그게 재미가 나고, 또 신기하더란 말이야. 결국 그 때 둘이서 서울시내 전화망을 다 다시 짰지. 나도 왜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오늘 그 때 생각이 많이나는구만."

박명아 교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 날 밤, 바로 토요일의 전날 밤에 나는 자전거를 막상 타지 못했다. 신경망 인공지능 시스템의 성능을 높이려면, 자전거를 잘타는 사람의 경험이 많이 입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찬과 종욱, 진수 선배가 줄기차게 자전거를 타고 온 학교를 빙빙 돌아다녔다.

그자들은 참 거칠것 없이 신나게, 내 생애 맨 처음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맨날 넘어지기만한 나 자신이 이 자전거에 수천배의 타격을 입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사람들이 내 자전거를 타고 다니다가 어디 망가뜨리는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되었다. 좀 얄미웠던 것이다.

아주 늦은 시각까지, 우리는 내일을 준비했다.

내일, 나는 내 자전거를 타고, 뒤에 사랑하는 그녀를 태운채, 서문에서부터 기숙사 앞까지, 연장 팔백오십사미터를 달릴 것이다. 서문 앞의 직선 구간을 주파하고, 200미터 지점을 지난 커브를 돌고, 그리고 식당 기지국 전파 구역으로 돌입한다. 잠시 후에 외부와 차단된 나무 지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때 나는 내가 안전하게 주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초록색 레이저를 켜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숙사 앞 계단으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을 달리면, 나는 결승선을 통과한 것이 된다.

나는 내일은 필요하지 않을 헬멧과 보호구를 벗었다. 그것들은 아직 일주일도 되지 않았지만, 한 오륙년은 쓴 듯 보이게 헤어져 있었다. 나는 기숙사 방 한켠에 가지런히 그것들을 포개어 두었다. 나는 책상 앞에 조용히 앉았다. 나는 생각했다. 내 미래나 진로, 학업이나 인생에 대한 고민으로 생각이 빠져들기까지 했다. 그렇거나 말거나, 피곤에 지친 룸메이트 재찬은 신나게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토요일 아침이 밝았다.




3.

오전 10시 10분경. 도서관 앞에서 바짝 긴장된 마음으로 나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앞에, 그녀가 등장했다. 그녀는 분홍색 블라우스와 짙은 색의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 보는 것인 작은 하트 모양의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나는 처음 한다는 말이,

"귀뚫으면 아프지 않냐?"

였다. 많이 초조해 하고 있었다.

여전히 그녀는 단순한 옷차림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갑자기 피자먹고 싶지않냐."
"피자 부페갈까?"
"피자부페. 피자부페."
"아싸, 먹으러 나가자! 와! 와!"

하면서 친구들과 길을 나서는 차림새나 분위기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좋은 하루를 보내기 위해 거울을 보고 잠깐이라도 고민을 한 것이었고, 거기서 오늘 하루에 대해 약간 기대도 하고 있다는 뜻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백화점 구경을 했다. 그녀는 운동할 때 입을 운동복을 사겠다고 했다. 그녀가 고른 최종 2안은, 몸의 선이 강조된 노랑색과 시골에서 김맬때 입는 옷 같이 생긴 흰색이었다.

"어떤 게 더 마음에 들어?"
"노랑색."

나의 묘사에서 드러나듯, 내가 보기에 괜찮아 보이는 것은 노랑색이었다.

나는 누가 옷을 고를 때 어떤 게 더 마음에 드냐고 물으면, 과감하게 단정적으로 답한다는 결의를 한 적이 있었다. 어차피 긴긴 고민끝에 말해봐야, 사는 사람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럴바에, 흔들리는 결정자의 마음에, 용기나 반발심, 둘 중에 하나는 북돋아 줄 단정적인 말투가 더 의미있다는 생각에서 였다.

그러나 그녀의 갈등은 한쪽으로 몰아지지 않았다.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기 위해서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그 모습. 그 고르고 또 고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는 답답한 마음에 잠시나마 자전거 타기의 긴장감을 잊을 수 있을 정도였다.

결국 그녀는,

"아무거나 사면, 돈 아깝다."

며, 둘 중에 아무것도 사지 않았고, 배고프다며 밥 먹으러 가자고 나를 이끌었다.

우리는 백화점에 식당들이 있는 층으로 올라가서, 점심으로 비빔밥을 먹었다. 그녀는 계란의 익은 정도를 약간 의식하는 듯 하기는 했으나, 별 불만을 겉으로 표출하지는 않았다.

전망이 좋은 식당이었다. 나는 창밖에 펼쳐진 시내의 집들을 물끄러미 보았다. 자전거 생각에 마음이 다시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추리하며, 자기도 창 밖을 한 번 보았다.

오후에 우리가 본 영화는, 내용이 난리도 아닌 CG 애니메이션 영화였다. 그녀는 깔깔 거리며 웃었고, 나도 즐겁게 보긴 했다. 그러나 어떠한 의미도 갖고 있지 않은 채 그저 정신없이 전개되는 이야기를 펼치는 이 영화는 참으로 무의미의 바닥을 치는 것이었다. 영화속에서 펼쳐지는 몇몇 유머들은 내 영혼의 심연을 뒤흔들 정도로 실없었다.

이건 분명히 감동적인 것도 아니고, 교훈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나는 것도 아니고, 또한 그러면서도 재미 없는 것도 아니었다. 영화에 대한 평을 나누며 극장을 걸어나오는 그 시간에, 뭐라고 할 말이 참 없었다.

"정말 연습을 많이 하면, 발로 손뼉쳐도 손뼉치는 소리가 날까?"
"발로 치면, 발뼉이라고 해야지."

등등과 같은, 영화에 나온 무념무상의 유머를 인용해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같은 시각. 학교에서는 오늘 저녁 자전거 타기를 위해, 결의를 다진 팀이 이미 막바지 작업에 한창이었다.

재찬이는 사람들과 연락을 위한 헤드셋을 나눠 주었고, 천체망원경을 불빛이 잘 보일 도서관 건물 옥상에 설치했다. 나는 다른 곳에 신경을 쓰지 않은채, 완벽히 조종을 하기 위해 헤드셋을 지급받지 않았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은 전화와 연결된 헤드셋을 들고 항상 서로 대화하면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한편 종욱은 자기 자전거를 타고, 내가 지나갈 길 주변을 둘러 보면서, 눈에 안 뜨이게 숨어서 나를 따라갈 길을 정하고 있었다. 진수 선배는 완성된 무선 중계 시스템을 들고 식당 주변을 왔다갔다하면 지붕위로 올라갈 기회를 엿보았다.

정일환 박사는 내 자전거에 달라붙어 마지막까지 연결 부분과 기계작동을 점검했다. 휴스턴 컴퓨터 앞에 앉은 박명아 교수님도 종욱이 짠 네트워크 모듈과, 정일환 박사가 짠 원격 조종 모듈, 그리고 휴스턴 컴퓨터의 인공지능 신경망 프로그램이 서로 잘 맞아떨어지며 돌아가는지 수십번도 더 검토하고 있었다.

"식당입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헤드셋에다 대고 진수 선배가 말했다. 박명아 교수님이 가장 먼저 답했다.

"휴스턴에서 듣고 있습니다. 문제 말씀하세요."
"식당에서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습니다. 자전거가 들어올 시간을 생각해 보면, 그 때 꽤 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볼 거 같은데요."
"함부로 안테나를 뽑을 수 없겠다는 이야기입니까?"
"그렇습니다. 굉장히 항의가 심할 거 같습니다."

돌아다니고 있던 재찬과 종욱까지 걸음을 늦추며 고민에 빠졌다. 답을 내놓은 것은 정박사님이었다.

"멜라니온에서 말합니다. 그러면, 지붕위에서 보고 있다가, 자전거가 들어오기 시작하면 그 때만 잠깐 안테나를 바꿔 연결하면 어떻겠습니까? 한 3,4분 정도만요. 그러면서 노트북에 저장된 다른 동영상을 식당 텔레비전에 보내주면, 그렇게 크게 항의 받을거 같지는 않은데요."
"구급 입니다. 혹시 정확히 못볼수도 있으니까, 제가 따라가다가 무선기지국 영역에 들어가기 전에 연락하겠습니다. 제 연락 받고 안테나 연결하시면 될겁니다."
"그러면 되겠네요."
"식당,  알아 들으셨습니까?"
"봉수봉인."

알아 들었다는 말이었다.

다시 장소는 학교에서 십여킬로미터 떨어진 시내. 나와 그녀는 영화가 끝나고 백화점에서 좀 걸어가면 있는 옛날 동양척식 주식회사 건물에 갔다.

1920년대 후반에 지어진 이 고생창연한 건물은 지금은 작은 미술관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녀도 나도 미술에 큰 관심은 없었다.

그런데 거기에 있는 샌프란시스코의 풍경화를 보면서, 그녀는 중학교때 잠깐 샌프란시스코에 살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것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서 꽤 재미있었고, 나는 "더 록" 영화에서 본 내용들이 생각나서 갑자기 흥에 겨워 질문을 했다. 덕분에 미술관의 다른 그림들도 이야기 할 거리들이 계속 생겼다.

저녁은 샤브샤브 칼국수를 먹으러 갔다. 식당에 앉았을 때쯤 해서, 문자메세지가 왔다. 재찬이 보낸 것이었다. 학교에 있는 네 군데의 팀. 즉, 휴스턴, 구급, 식당, 망원경이 모두 준비완료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작은 전화기 화면에 띄어쓰기 없이 다닥다닥가득 쓴 메세지의 내용에 따르면, 자전거의 상태도 문제 없고, 인공지능 프로그램도 잘 돌아가고 있다고 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중압감을 느꼈다. 그걸 떨쳐버리려고, 나는 저녁을 먹으면서 말을 좀 많이했다. 그러다 보니, 어릴때부터 갖고 있던 컴플렉스라든가, 내가 충격먹었던 고등학교 시절의 사건같이 별로 말 할 필요 없는, 그야말로 개인적인 이야기를 이리저리 너무 풀어 놓고 있었다.

"휴스턴 들으십시오. 지금 일정 마치고, 학교쪽으로 오고 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내가 보낸 문자 메세지를 받고 재찬이 말했다. 휴스턴 컴퓨터 앞에는 정박사님과 박교수님이 있었다.

"좋습니다. 휴스턴에서 말합니다. 전체 마지막 점검한번 해 보겠습니다. 프리어리티 높은쪽에서부터 점검합니다."

박교수님이 말씀하셨다. 정박사님이 체크표를 들고, 헤드셋에 들려오는 보고를 듣는다. 그러면서 표에 각 팀의 상황을 기록해나간다.

"응급, 이상없습니다. 현재 출발거리 0미터, 도착거리 854미터입니다. 주행도로와 8미터 떨어진 곳에서 정상대기 중입니다."
"멜라니온, 전원 넣고 부팅 끝냈습니다. 무선 신호 정상으로 잡힙니다. 네트워크 속도 5메가BPS 전부 다 나옵니다."
"휴스턴, 시스템 온라인입니다. 메모리 문제 없습니다."
"식당, 준비 완료 입니다. 노트북 부팅했고, 현재 지붕에 올라온 채로 대기중입니다. 높아서 약간 무섭긴 합니다."
"망원경, 잘 보입니다. 통신 상태 양호합니다."

헤드셋에다 대고 돌아가면서 말하고 있는 그들은 팽팽한 떨림을 느꼈다. 나만큼이야 떨고 있으랴만은, 그들 모두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드디어 우리가, 내가, 도전할 순간이 지척에 다가 온 것이다.

"잘 해 봅시다. 화이팅"
"화이팅"
"화이팅!"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잠시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그 분주했던 일주일 동안의 작업이 마지막으로 최후의 강렬한 침묵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점검을 끝으로 모든 사람들이 아무 말 없이 조용한 순간. 이것이 바로 폭풍전의 고요다.

"휴스턴, 들으십시오. 지금 막 서문 진입했습니다."

내가 그녀와 함께 학교로 들어오는 걸 먼 발치에서 보고 종욱이 말했다.

저녁놀이지는 토요일 저녁이었다. 이날 따라 노을이 아주 붉게 온 하늘을 온통 물들이고 있었다. 기숙사 앞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저녁에 산책을 나온 사람들과, 우리처럼 밖에서 시간을 보내다 온 학생들. 근처 아파트에서 잠깐 바람쐬러 소풍나온 가족들로 꽤 오가는 사람이 많은 편이었다.

"자전거 타고 갈까?"

용감하게도 그 말을 먼저 꺼낸 사람은 나였다. 그게 낫다. 내가 먼저 당당히 제안하는 쪽이 의심을 덜 사고, 완벽하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부드럽게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목소리는 그런 기획과는 달리 흔들리고 있었다.

"이게 니 자전거구나."

내가 자전거에서 자물쇠를 풀고 있자니, 그녀가 보고 말했다. 그녀는 자전거 바구니에 담긴 무거워 보이는 붉은 보자기를 싼 것이 뭐냐고 물었다. 그것은 멜라니온 무선 서버가 연결된 평형 유지 시스템이었다.

"비밀."

나는 장난스럽게 웃는 표정을 흉내내며 그렇게 말했다.

이것이, 어제 밤새도록 궁리해서 생각해낸, 기계장치의 정체를 숨기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집에서 가져온 밑반찬이다, 빨래 할 옷가지다, 실험에 쓸 재료다. 별 이상한 핑계를 다 떠올려 보았지만 마음에 드는 아이디어가 없었다. 그냥 "비밀"이라고 말하고, 나중에 그녀를 놀래켜줄 무슨 선물이라도 되는 양 위장하는 것이 그나마 낫다는게, "울컥불컥 시댁이야기"의 이야기들을 참조한 결론이었다.

"구급입니다. 현재 자전거 탑승 상태입니다."

나와 그녀를 보고 있던 종욱이 말했다. 나는 자전거 위에 타고 핸들을 꼭 잡은 채 정면의 길 끝을 응시했다. 그녀는 뒷자리에 가볍게 옆으로 앉았다.

"됐어. 가."

그녀가 자리를 잡았다고 말했다. 가슴이 방망이질 쳤다. 속으로 하나 둘 셋, 세고 페달을 밟아야지. 잠깐만, 그게 아니라 우선 발로 도움닫기를 조금 하고, 속력이 약간 붙으면 그 다음에 페달을 밟아야지. 이제 더위도 한풀 꺾였는데, 이마에서는 땀이 흘렀다.

"저녁 먹고 들어오냐?"

딱 나가려고 하는데, 박자를 깨며, 누가 옆에서 불렀다. 놀라서, 나는 출발도 하기 전에 넘어질뻔 했다. 정애 선배와 선배의 남편이었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먼저 웃으면서 인사했다.

나는 다시 출발하려고 하는데, 내 옆으로 아주 작은 자전거 한대가 휑하니 지나갔다. 그것은, 정말 해맑게 웃고 있는 어린 아이의 전형적인 표정. 딱 그대로 웃고 있는, 지나였다. 지난주 토요일, 장보러 갔을 때 자전거를 발견한 것이 일주일 전인데. 그 일주일 동안, 지나는 기어이 자전거를 사고 만 것이다.

언제 타는 법을 익혔는지, 지나는 웃으면서 자전거를 타고 정애 선배 주위를 자유 자재로 빙빙돌고 있었다. 지나는 자전거 타고 놀고, 정애선배와 남편은 그걸 보기 위해 학교에 놀러 온 것이었다.

"지나......"

지나의 웃는 소리가 나에게 까지 생생히 들려 왔다. 이런게, 바로 상대적 박탈감이고, 이런게 바로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다.

나는 정말로 심란했다. 아무 생각없이 빨리 내달려서 모든 걸 끝내자. 그런 생각이 그 심란한 와중에 소용돌이 쳤다. 다시 한 번, 하나, 둘 하고 숫자를 속으로 헤아렸다.

"자전거 출발했습니다."

종욱이 말했다.

"휴스턴, 어떻습니까?"
"평형 정보 요동이 수신됩니다. 출력 정상 송신 됩니다. 휴스턴 신경망 정상 가동 중입니다."

나는 그녀와 함께 천천히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 5미터를 내달릴 때, 나의 심장박동수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결과는, 일단 성공.

성공이었다. 장비들은 정확히 예상대로 동작하여, 비틀거리는 내 자전거를 완벽히 잡아주고 있었다. 나는 정말 기뻤다. 이것이 그동안 수없이 넘어지고, 자빠지고, 뒤집어지고, 쓰러지고, 나뒹군 결과요, 대가였던 것이다. 나는 그 넘실거리는 기쁨으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지만, 그녀를 의식하여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저 수백번도 더 능숙하게 자전거를 타 본척, 페달을 밟기만 했다.

"휴스턴 대답하십시오. 현재 25미터 전진했습니다. 연산 상황 어떻습니까?"
"초당 10번 피드백입니다. 정밀도 허용치 10의 마이너스 8승까지 내려갑니다."

박 교수님이 답했다.

휴스턴 컴퓨터의 신경망 가속 프로그램은, 두 사람이 타고 있는 자전거의 균형을 정확히 계산해서 실시간으로 전송하고 있었다.

정박사님이 연결해 놓은 멜라니온의 제어 시스템도 한치의 오차도 없이 - 만약 한치의 오차가 생기면 큰일 난다. - 평형시스템을 움직여 핸들을 잡아주고 있었던 것이다. 터미널 화면을 보고 있는 박명아 교수님의 표정은 그처럼 신날 수가 없었다. 박명아 교수님은 모두가 듣고 있는 헤드셋에 대고 말했다.

"이거 내가 만든 인공지능이지만, 정말 멋있지 않나?"

기쁨은 기쁨대로 즐거웠지만, 또한 나는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하나 둘, 하나 둘 하면서 구령을 붙이며 떨리는 다리를 계속 내딛고 있었다.

그녀가 내 등에 머리를 살짝 기대었다. 나는 심하게 의식하여 등줄기를 곧게 폈다. 모든 것이 상상하던 그 모습 그대로 였다. 평온하고 차분하지만, 유유하고도 날렵한 속도감. 지나가는 가로수들과 초록색 잔디들. 우리 곁을 지나가는 다른 자전거들. 저녁 노을.

속도가 붙은 자전거는 시원하게 공기를 흩뿌렸다. 바람이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 바람은 그녀의 머리칼로 이어져 흐를 것이다. 그러면 그녀가 머리를 다시 만지는 모습은 분명히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보기 좋겠지. 그렇지만, 나는 자전거 핸들을 꼬옥 붙잡고 앞쪽만을 바라보고 있기에, 그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식당 나오십시오. 식당 들립니까?"
"식당입니다. 현재 위치 알려 주십시오."
"현재 250 미터 지점 통과했습니다. 안테나 연결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알겠습니다. 무선 기지국 작동합니다."

식당 지붕 위의 진수 선배는, 잽싸게 위성 안테나의 선을 뽑아다가 회로판에 꽂았다. 노트북 키보드를 타이핑했다. 곧 중계 프로그램이 돌기 시작했다. 평소에 수줍음이 많은 편이었던 진수 선배가, 갑자기 분위기에 휩쓸려서 지금은 식당 지붕위에 올라가서 접시 안테나를 들고 설치고 있는 것이다.

진수 선배가 위성 안테나를 뽑자, 식당의 텔레비전들의 화면이 일제히 나갔다. 보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경제뉴스 케이블 방송이나마 보고 있던 사람들은 잠깐 의아해 했다.

곧, 화면은 다시 들어왔다. 안테나는 무선 기지국으로 쓰고 있기에, 다시 들어온 화면은 진수 선배의 노트북에서 보내는 "Do You Want To Know A Secret?"의 공연 실황이었다.

"식당 기지국 온라인 입니다."
"휴스턴에서 말씀드립니다. 신호 잘 잡힙니다."
"전송 속도 얼마 정도인가요?"
"4메가 BPS까지는 나오는데요."
"오키도키!"

지붕위의 진수 선배는 웃으며 허공에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진수 선배가 배선을 잘 못 연결했는지, 식당 건물 외부 스피커에서도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Listen. Do you want to know a secret?" 하는 노래 가사가 주변으로 울려퍼졌다. 진수 선배는 정확하게 계획대로 작동하는 무선장비가 흥에 겨워서, 나오는 노래의 코러스까지 따라 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식당 안의 사람들은 갑자기 경제 뉴스에서 왜 옛날 노래를 들려주는지 궁금해 했다.

자전거를 타고 있는 나와 그녀에게도, 그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Do you promise not to tell? Closer. let me whisper in your ear..."

고개를 돌리면 지붕위에서 안테나를 붙잡고 있는 진수 선배가 보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러다가 만에 하나 지금까지 잘 타고 오던 자전거가 넘어지며 어쩌나, 하는 미신 같은 생각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는 노랫소리에 맞춰서 까닥까닥 다리를 움직이고 있는 것도 같았다. 나는 "인제 반도 넘게 왔다. 조금만 더 가자"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나는 자전거 핸들을 더 힘주어 움켜 쥐었다.

"휴스턴에서 네트워크 모니터링 합니다. 식당으로 들어옵니다. 3초, 2초, 식당으로, 들어 왔습니다."
"정상 수신입니까?"
"이상 없습니다. 응급 팀이 보기에도 괜찮은가요?"
"괜찮습니다."

이제 식당 지붕에 있는 간이 무선기지국으로 신호를 전송하며 자전거가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자전거가 출발하고나서부터 지금까지, 단 한마디 말도 하고 있지 못했다. 말을 하면, 정신이 혼란스러워져서 넘어질 것 같았다.

나는 옆으로 앉은 그녀의 어깨가 내 등에 닿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뭐라고 물었다. 나는 자전거에 너무나 집중하고 있던 나머지 잘 못 알아 들었다.

머릿속에 그녀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처음 봤을 때. 그 여름 월요일을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 저녁마다 하던 전화 통화들. 같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 갈 때 식당 스피커에서 들리는 노랫소리.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왔을 때, 문제 풀던 종이 위에 적혀 있던 글씨. "잠깐 얼굴보러 도서관에 왔더니, 없군. 맨날 싸돌아다니면 공부는 언제하나".

그 무렵,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난리가 나기 시작했다. 휴스턴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정박사님은 이상한 숫자를 보기 시작했다.

"휴스턴입니다. 갑자기 네트워크 속도가 떨어집니다. 지금 2메가 BPS 겨우 넘는데요. 각자 체크 하십시오."
"식당에서 보고 드립니다. 역시 네트워크 속도가 계속 떨어지는게 보입니다."
"응급쪽에서 파악하는 상황은 아직 이상 없습니다."
"아직까지는 시스템이 잘 잡아주고 있어요."

그러나, 이렇게 간다면, 곧 네트워크 연결이 끊기고 문제가 생긴다. 정일환 박사는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듯한 빠른 손놀림으로 어지럽게 터미널 화면을 바꿔 가면서 프로그램의 각 부분을 살폈다.

"네트워크 모듈은 테스트 잘 했나?"
"예, 그 부분은 종욱이 학생이 테스트 철저히 해서 보고 했습니다. 휴스턴 컴퓨터 메모리 릭키지도 분명히 처리하고 넘어가고 있고요. 지금 아예 기지국 쪽에서 부터 속도 저하가 감지되거든요. 더 앞 단, 더 앞쪽 문제 같습니다."

정일환 박사는 원인을 알 수 없어서 빠르게 손을 놀리고 있지만, 얼굴 표정은 점점 굳어 가고 있었다.

"식당입니다. 속도가 1메가 BPS 까지 떨어지려고 합니다. 500킬로 BPS 이하로 떨어지면, 시스템 연결이 끊길 텐데요. 이대로면 30초 채 못갑니다."

진수 선배의 당황한 외침이 울렸다. 정박사님이 뒤지다 뒤지다 원인을 파악 못해서, 유닉스 OS의 네트워크 설정 부분까지 검토하고 있을 때, 박명아 교수님이 한 단어를 발음했다.

"배터리."

진수 선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예?"

정 박사님은 그 때 깨달았다.

"아아... 배터리..."

어제 밤에, 신경망 프로그램에 자료를 많이 입력시킨다고 자전거를 이리저리 주행시킨 결과, 자전거에 장치된 원격 조종 시스템의 배터리를 너무 많이 소모했던 것이었다. 프로그램 연결과 개발에만 신경쓴 나머지, 모두가 자전거에 장치된 장비의 배터리를 깜빡했던 것이었다.

이래서는 아무 도리가 없었다. 시스템이 꺼지고, 자전거가 균형을 잃고 쓰러지게 된다. 그 전에 자전거를 세워서 막는 수 밖에 없었다. 배터리가 계속 버텨 주기를 바랄 뿐이었지만, 야속하게도 신호감도는 계속 약해지고, 네트워크 전송 속도는 자꾸만 느려졌다.

"현재 800킬로 BPS 밖에 안나옵니다."
"휴스턴 쪽에 묻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지금 가서 자전거 세울까요?"

안 보이는 곳에서 계속 자전거를 따라오던 종욱이 그렇게 말했다.

자전거의 위치는 이제 막 장막지역으로 진입하려 하고 있었다. 장막지역은 624미터 지점에서 약 30미터쯤 이어지는, 나무에 가려서 응급팀이 자전거를 볼 수 없는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서는 자전거에서 발사되는 초록색 레이저를 망원경으로 보고, 상태를 판단해야 한다.

"장비 부서지는 문제도 있고 하니까, 지금 자전거를 세우는게 어떨까요?"

안절부절하던 정일환 박사는 체념한 목소리였다.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그러는 사이에, 자전거는 장막지역, 높다랗게 솟은 메타세콰이어 나무 뒤로 사라져 버렸다.

"600킬로 BPS밖에 안나오는데요. 잠시 후에 네트워크 두절됩니다."

적막했다. 박명아 교수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으음..."하는 소리를 냈다. 아마도 그 의미는, "만약에 자전거가 장비를 박살내면 그래도 내가 내 돈으로 물어주는 게 제일 모양이 좋겠지. 학생들 한테 재미난 거 한 번 가르쳐 준 셈 치지뭐. 그래도 돈은 좀 아까운데..." 일 것이다.

네트워크는 두절 되고, 나무 사이로 사라진 자전거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자전거가 넘어져 있지 않으면 여유롭게 자전거를 세운 뒤에 대강 둘러대고 자전거를 철수 시키면되고, 자전거가 넘어져 있으면, 당황한 파일럿을 도와서 뒷일을 수습하면 되었다.

"지금, 원격 조종은 완전히 놓은 상태입니다."
"신호 없습니다."

가장 힘든 일을 도맡아 했던 종욱이 정 박사에게 묻는다.

"응급팀 들어갈까요?"

실패는 씁쓸한 법. 종욱에 답하는 정일환 박사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들어가세요."

종욱은 마지막으로 괴력을 발휘. 날쌔게 자기가 타고 있던 자전거 방향을 돌렸다.

그는 마구잡이로 보도 블럭을 뛰어 넘고, 풀과 울타리 사이를 헤집으면서 최고의 속도로 달렸다. 인도와 차도의 구분을 어지럽게 가로지르며 달려서 그는 최대한 빨리 자전거가 있는 도로로 진입하려 했다. 종욱의 마지막 몸부림. 그 우당탕탕 하는 소리를 헤드셋으로 전해 듣는 다른 모든 사람들도 아주 우울한 기분이었다. 그 우당탕탕 하는 소리에 맞추어 가슴에 돌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바로 그 때 였다. "제발 나와라 제발 나와라"하면서 도서관 옥상에서 망원경을 들여다 보고 있던, 나의 그레이트 에센셜 룸메이트 재찬이 극적인 메세지를 타전했다.

"초록색 불빛이 보입니다! 초록색 불빛이 보입니다!"

자전거가 이상 없을 때 쏘아 보내기로 한, 초록색 레이저 포인터 불빛이 재찬의 망원경에 포착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아직도 내가 넘어지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오고 있다는 증거였다.

"휴스턴 말합니다! 응급팀 철수하세요. 진입 취소입니다."

헤드셋에다 대고 박 교수님이 다급하게 외쳤다.

곧, 재찬의 망원경에 나무 사이로 나타난 나와 그녀와 내 자전거의 모습이 들어 왔다. 나는 약간 겁먹고 심하게 바보 같은 표정을 하고 있긴 했지만, 입술을 굳게 다물고 낑낑거리면서, 그리고 무엇보다 넘어지지 않고, 계속, 자전거를 타고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 때까지도 나는 원격조점 시스템이 배터리가 다해서 꺼졌다고는 상상도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스템 정상작동을 표시하는 작은 LED가 하나 달려 있긴 했지만, 아까 이야기 했잖은가. 나는 너무 너무 굳어서, 정면, 길 앞 말고는 아무 곳도 못 보고 있었다. 나는 오직 핸들을 꼭 붙잡고 페달을 밟기만 했다.

다만 머릿속으로 한 생각은 "장막 지역에서 레이저, 장막 지역에서 레이저"하는 말 뿐이었다. 장막지역에 들어 섰을 때, 핸들에 붙어있는 전조등 레버를 밀면, 뒤쪽으로 초록색 레이저 포인터 불빛이 나가게 되어 있었다. 그걸 키고 달려야만, 내가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걸 알리는게 된다. 패시브 시큐리티 시스템.

계속 나는 그 생각만 하면서 달리다가, 휴스턴도, 멜라니온도 모두 끊어진 줄은 꿈도 못꾸고, 그저 우직하게 페달만 밟았던 것이다. 하늘 끝까지 초록색 불빛을 비추면서.

"혼자서도 잘타네. 혼자서도, 혼자서도. 잘 타네."
"다시 구급팀 시야 확보 했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오늘밤에 장주 갈비에서 잔치 한 번 하죠."

그렇게 해서, 나는 팔백오십사미터의 도로를 완주해 내고야 말았다. 여학생 기숙사 앞에서, 그렇게 나는 당당히 자전거를 세울 수 있었고, 영광스러운 두 다리를 굳건히 땅에 디딜 수 있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나는 진이 빠져서 털썩 주저 앉아 헉헉거리고 싶었다.

"기사 아저씨, 감사합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려섰고, 나는 짐짓 편안하고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 자전거에서 내리는 그 때, 나는 한참 전부터 원격조종장치가 꺼져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게 도대체 언제부터 꺼져 있었던 것인가? 나는 놀란 나머지 "으허"하는 비명소리를 낼뻔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그 곱하기 일백만의 경악감을 느꼈다. 일주일만에 여학생 기숙사에 와보니, 이 방향에서는 내 기숙사 뒤편이 보였다. 그녀의 방인 북향에서는 아마 연극무대처럼 환하게 기숙사 뒷길이 내려다 보였을 것이다.

지난 일주일 동안 밤마다 나는, 수없이 거기서 자빠지고 있지 않았는가. 그녀가 그런 내 모습을 보았을 가능성은 100퍼센트 였다. 인심 후하게 써도, 99퍼센트였다.

혼자서 자전거를 못타서 계속 넘어졌다 일어나고, 넘어졌다 일어나고. 친구에 선배에, 교수님까지 모아서 자전거를 타겠노라고 날마다 밤을 새우는 나를 보고, 과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 것인가.

그녀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너무나 편안하게 내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있지 않았는가. 그리고 정말로 내가 자전거 타기에 능숙하다고 생각하는 듯이 내 등에 머리를 기대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그것은 내가 잠깐 놓치고 있던, 너무나 그녀다운 완벽주의자 얼음칼의 완벽한 연기였을까? 아니면, 나에 대한, 그저 믿음이었는가.

도무지 한 마디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나에게, 그녀는 내 눈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우리 다음부터는 그냥 걸어서 들어오자. 자전거 타고 오니까 그냥 휙휙 지나가고 재미 없다. 뭐 바쁜 일이 있어서 자전거를 타고 가. 같이 이 이야기, 저 이야기하면서 천천히 걸어오는게 훨씬 더 좋지 않어?

혼자 자전거 타고 휙 지나가는 애들 보면, '쟤는 애인이 없어서 혼자다니는 게지. 그러니까 저렇게 걷는게 재미없어서 빨리다니지'하면서 같이 비웃어 주고 말야."

내가 처음 자전거를 탔던 날은, 그렇게 마무리지어지고 있었다.
mirror
댓글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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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itro 05.08.27 05:04 댓글 수정 삭제
    단편집 내세요. 반드시 한권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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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05.08.27 08:58 댓글 수정 삭제
    * 글에 덧붙여 뒷이야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름은 거의 다, 2005년 8월호 한국어판 포브스의 필진과 편집인들 이름에서 따온 것들입니다. 그외의 이름은,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와 동서남북대중소를 대강 조합하여 만들어냈습니다. 짐작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 이야기는 얼마전에 지구로 돌아온 디스커버리호로부터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Nitro/ 감사합니다. 애매한 SF를 주로 써다 올렸는데, 다음번에는 "환상문학웹진 거울" 대문에 부합하는 좀 전통적인 환상물을 한번 올려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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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둥쓰 05.08.27 11:31 댓글 수정 삭제
    언제나 거울이 업뎃되면 가장 먼저 읽습니다.
    날이 갈수록 기기묘묘한 연구소의 세계군요. 정말 넘넘 재밌게 읽었습니다. 연구소 시리즈로 단편집 꼭꼭 내세요!!

    덧 : 읽으면서 우주선을 떠올리긴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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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끼아 05.08.29 23:01 댓글 수정 삭제
    멋있네요~ 너무 재미있어요.
    오자 몇개 발견..
    게중에 -> 개중에
    늠늠 -> 늠름
    휘젖고 -> 휘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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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05.08.30 07:59 댓글 수정 삭제
    둥쓰/ 이번에도 어김없이 읽어 주시다니. 분량이 긴 글을 끝까지 즐겁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끼아/ 국어실력에 고등학교 졸업 이후 연마가 없는지라, 어디 오자가 그뿐이겠습니까. 부끄러울 뿐입니다. 감사합니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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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lu 06.04.22 03:20 댓글 수정 삭제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단편소설 좋아하는데 이런 곳이 있었군요. 참, 아라 타고 왔습니다. 시험기간이라 낚이신 분이 많을 것 같은데 혹시 조회수가 급작스럽게 증가하셨다든지 하면 대강 짐작해 주셔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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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jella 06.04.22 15:29 댓글 수정 삭제
    아, 정말 대단하시네요! 정말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ㅎ 저도 아라타고 왔는데. ㅠ 정말 최고에요. ㅎ 배경이 카이스트 맞나요? ㅎ 아, 너무 풋풋한 게, 좋아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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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금이 06.04.23 10:57 댓글 수정 삭제
    박교수는 도서관 사서 분을 생각나게 하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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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시 06.05.14 07:17 댓글 수정 삭제
    덧글을 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늦게 읽긴 했지만 정말 너무 재밌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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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이 06.06.03 21:50 댓글 수정 삭제
    저도 차근차근 읽고 읽답니다. 저와는 동떨어진 연구소 얘기라서 그런지 더 재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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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상입니다...정말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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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rk 07.08.22 17:39 댓글 수정 삭제
    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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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택씨 07.09.13 13:47 댓글 수정 삭제
    아주 잘 읽고 갑니다.
    계란집는 로봇 개발기와 비슷한 느낌입니다.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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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f 07.09.30 15:11 댓글 수정 삭제
    매우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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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노 07.12.07 20:33 댓글 수정 삭제
    1인칭과 3인칭 전지적... 좀 혼란스러운 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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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유 11.05.22 02:39 댓글 수정 삭제
    끝내주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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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현종 11.10.06 01:47 댓글 수정 삭제
    블로그에서 추천해주셔서 읽어봤는데 역시 재미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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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야 18.03.19 19:14 댓글

    저는 공대 마인드를 갖추지못한 모양입니다..왜 읽는 내내 '보조바퀴를 달고 연습하라고..' 라는 생각이 드는거죠ㅠㅠㅋㅋ하지만 한 자전거 배우는 학생과 그를 돕는 지인들의 열의가 인공지능 기술마저 발전시킨다니 훈훈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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