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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구조 요청

2015.04.01 00:0004.01

구조 요청





1.
그녀에게 그만 만나자고 말하려는 데, 갑자기 탐사정이 요동을 쳤다. 어디에 부딛혔는 지, 뭐가 쪼개졌는지, 탐사정은 뒹굴뒹굴 구르며 어디인가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관측창 확인 요망”
“비상 자세 유지 장치 작동!”
“긴급 진단 실시”


그렇게 긴박하게 말하면서, 멋있게 탐사정을 조작하는 흉내라도 냈으면, 위기를 만난 모험극의 주인공처럼이라도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놀라고 겁먹은 나와 그녀는 그냥 으워어어워어어어워어어어 하는 소리만 길게 냈다. 소리를 크고 길게 낸다고 갑자기 구르며 떨어지던 탐사정이 “어, 미안 그렇게 놀랄 줄은 몰랐어”라면서 혼자 멈춰 서기라도 할까.


인간이 비명을 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만약 돌봐주는 부모가 곁에 있던 아기라면 큰일을 당했을 때 소리를 지르는 걸 알아 듣고 부모가 와서 구해 줄 것이다. 혹은 들판에서 모여 살던 몇 만년 전이었다면, 한 명이 사자에게 공격 당하면서 소리를 지르면 옆에 있는 사람들이 알아 듣고 도망이라도 칠 것이다.


그러나, 내 부모님은 이곳에서 6억 킬로미터 떨어진 녹번동에 살고 계시고, 목성의 어느 곳에서도 사자가 사람들을 공격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었다. 따져 말하자면, 목성의 위성인 이곳 유로파에 사람들은 여럿 와 있는 편이었지만, 사자는 한 마리도 없다.


겨우 탐사정이 어디엔가 처박혀 있는 지 멈췄다. 더는 구르지도 흔들리지도 않는 걸 보면, 어딘가 안정적인 자리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방금 뭐였지?”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그러는 동안에도 왼손에 차를 담은 컵을 그대로 들고 있었다.


“분명히 탐지기에는 딱딱한 바닥이 있는 걸로 알고 왔는데, 갑자기 바닥이 확 꺼진 거 같아.”
“있던 바닥이 갑자기 어디 가. 땅이 도망가?”


그런데 그때, 관측창에 뭔가가 보였다. 이번에는 탐사정이 가만히 있었는데도, 우리는 둘 다 아까와 같은 소리를 질렀다. 관측창에는 꿈틀거리는 커다란 이상한 것이 보였던 것이다.


그것은 빛이 약해서 잘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큼직한 벌레 같았다. 모양은 곱창 같기도 했고, 순대 같기도 했고, 무슨 애벌레처럼 보이기도 했다. 흰색 내지는 노랑색인 것 같기도 하고, 다리나 촉수가 있는 것 같기도 했는데 희미해서 잘 알 수는 없었다.


“저게 뭐야?”
“진짜 신기하다. 우와. 와. 우우와.”
“야, 사진찍어 사진.”
“컴퓨터가 돼야 사진을 찍지.”
“뭐? 컴퓨터 안돼?”
“안돼. 아까 굴러 떨어질 때 뭐가 고장났나봐.”


목성의 유로파에는 땅속에 물이 있었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따뜻한 지역이 있었기 때문에 이미 작은 생물들은 몇 가지 발견된 것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 중에 가장 큰 것이라고 해봐야, 아주 작았다. 잘 보이지도 않았다. 눈이 좋은 사람이 본다고 해도, 그것도 밝은 날 금성 정도 거리까지 태양에 가까이 갔을 때 햇빛에 비춰 봐야, 겨우 까만 점으로 보이는 둥 마는 둥 한 벌레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본 것은 지금껏 발견되지 않은 새로운 생물이었다. 사자만한 크기의 생물이었다. 사자 보다 더 클 수도 있었다. 황소나 코끼리나 고래 만할 것 같기도 했다.


“땅에 그 갈라진 틈에 틀어 박혀서 사는 거 아니었을까?”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들고 있던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 생물이 천천히 유로파의 바다를 헤엄치다가 가끔 그 까만 점 같은 동물들을 잡아 먹으면서 사는 것인가 싶었다. 아니면 따뜻한 열이 나오는 지역에서 찜질방에서 노는 것처럼 몸을 지지고 있다가, 열이 점점 약해지면 다른 열이 나오는 지역으로 이동하는 생물인지도 몰랐다. 만약에 그렇다면, 저 생물은 우리가 받은 첫 인상과는 달리 동물이 아니라 식물에 가까운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햇빛 대신에 유로파 땅의 열을 받아 먹고 자라나는 식물. 그런데 열이 나오는 지역이 자꾸 바뀌기 때문에 꿈틀거리며 이동할 수도 있게 된 것 아닌지.


“저렇게 큰 게 땅에 박혀 있었으니까, 탐지기에는 그게 그냥 땅인 걸로 나왔나봐. 그런데 우리가 그 위로 갔을 때 저게 움직여서 옆으로 피하는 바람에 우리가 굴러 떨어진거겠지.”
“그런데 큰일 났다. 이거 어떡하냐. 컴퓨터가 안돼서.”


우리는 어디로 굴러 떨어졌는지, 얼마나 탐사정이 부서졌는지도 알 수 없는 형편이었다. 탐사정을 움직이는 조작 장치도 말을 듣지 않았다. 이대로 있으면, 산소가 떨어져서 숨막혀 죽거나, 아니면 이 조그마한 철통 속에 갇힌 채로 가끔 바깥에 꿈틀 거리는 목성 왕벌레나 보면서 멍하니 있다가 굶어 죽거나, 아니면 그 전에 너무 무서워서 발작해서 뭐 어떻게 되거나 할 것 같았다.


“껐다 켜봐.”


그녀가 말했다. 그녀가 제시한 것은 20세기 컴퓨터가 창조 된 이후부터, 인간이 조작하는 컴퓨터가 우주 곳곳으로 퍼져나간 지금까지도 언제나 컴퓨터를 고치는 가장 훌륭한 수단으로 평가 받는 방법이었다. 리부트! 나는 컴퓨터가 발명된 이후 사용해 온 역사 속의 지구상 그 많은 사용자들처럼, 컴퓨터를 켜고 컴퓨터가 다시 켜지면서 소리를 내는 동안, 다시 켜지면, 사람이 잠 자고 일어났을 때 찌뿌둥했던 것이 사라지고 가뿐해지듯이, 뭔가 마법적으로 다시 잘 되기를 바랬다.


그녀는 또 차를 마셨다. 이유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나는 차를 마시지 말아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런 걸로 다투고 싶지 않아 그냥 아무 말 말았다.


“큰일났다. 이제 아예 화면에 불도 안들어오네. 조명도 좀 이상해. 아주 기계 장치 자체가 타버린 거 같은데. 아예 먹지를 않는 거 같애. 먹지를.”


내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심통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아, ‘이 모든 게 다 너 때문이야’라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보았다. 그녀는 한 마디도 말은 하지는 않았지만, 짜증나고 열 받는데 어디 화풀이 할 데는 없으니 나에게라도 갑자기 벌컥 화를 내고 싶다는 그 심정은 몇 년 간의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1시간 전만 같았어도, 그런 그녀의 태도를 갖고 말다툼이라도 하는 방향으로 대화가 흘러 갔을 것이다. 그렇지만, 너무 겁이나고 무서워서 그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우리는 끝장난 것 같았다. 컴퓨터가 고장 나서 우리 스스로 탈출할 방법은 없었고, 어딘가에 통신해서 상황을 알릴 방법도 없었다.


아무나, 아무나 바깥에 있는 사람 목소리만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단숨에 사람을 어색하게 만드는 서경숙 임무관리담당의 “시간 됐습니다”하는 목소리가 그리웠다. 지금 갑자기 스피커에서 서경숙의 그 낮은 목소리가 나와서 “시간 됐습니다. 귀환 시간 됐는데 뭐하고 계세요?” 그렇게 말하면 엄청 달콤하게 들릴 것 같았다.


우리가 사라진 것을 알면 구조대가 우리를 찾아 보기야 하겠지만, 그게 희망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우리는 굉장히 멀리 이상한 곳으로 굴러 떨어진 느낌이었다. 엉킨 실타래처럼 꼬여 있는 유로파의 갈라진 땅 틈 중 어디에 우리가 쳐박혀 있는 지는 알아내기 어려울 것이다. 거기다 저 멍청하게 생긴 목성 생물이 시치미 뚝 떼고, “어휴, 여기가 아랫목인가 보네”라면서 우리가 굴러 떨어진 입구로 가서 틀어 막고 또 바닥의 일부인 것처럼 가만히 있으면, 우리는 아예 길목이 막혀 봐도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허둥지둥거리며, 비상 신호 장치며, 긴급 운영 장치며 이것저것을 만져 봤다. 하지만 제대로 되는 것은 없었다. 겁을 먹어 손이 떨리다 보니, 그렇게 뭔가 제대로 잘 안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 조차 시간이 오래 걸렸다. 호흡이 가빠졌다. 그녀는 아직도 그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날 노려 보고 있었다. 숨이 가빠 왔다. 벌서 산소가 부족한 것 있는 것인지?


아아, 세상아 잘 있거라. 이럴 줄 알았으면, 다이어트 고민하지 말고 그때 고기 뷔페 가는 건데.


2.
눈을 뜨니, 어떤 여자가 보였다. 정신이 나흘 동안 방치해서 쉰 김치찌개 같은 느낌이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그 여자의 모습이 점점 또렷하게 보였다. 여기가 천국인가, 지옥인가. 혹시 아직 안 죽은거면 진짜 좋겠다. 그 여자는 다름 아닌 그녀였다.


“대기 시간에 졸 수야 있겠지만, 뭐 그렇게 깊이 자냐? 너 꿈도 꿨지?”


그녀가 말했다. 어, 꿈? 그 말을 듣고도 앞뒤가 잘 정리되지 않아 오락가락했다. 그녀가 그녀가 마실 차를 컵에 담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뭔지 알 수 있었다. 임무 중에 갑자기 추락해서 갇혀 있었던 것은 바로 꿈이었던 것이다. 만세, 만세. 살아 있구나. 살았구나. 하하하.


“너 돌았어? 왜 갑자기 웃어?”


기뻐하는 나를 보고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눈빛은 냉랭했다. 유로파 외부 만큼 차가워 보였다. 언제나 말 수가 많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많이 하는 그녀의 성격 때문에 그녀는 기분이 지금 나쁜것인지, 아니면 나쁜 기분이 조금은 좋아졌는지, 가늠하기란 쉽지 않았다. 말을 많이 하고, 하는 이야기 중에 웃긴 이야기도 좀 섞여 있고, 그러면 ‘어, 별로 기분 안 나쁜가 보네.’하고 착각하기 쉬웠다. 그러나 그녀는 사실 그렇지 않았다. 그녀의 분노에는 명백한 이유가 있었고, 그것의 해결도 적절한 조치와 충분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단지 웃긴 말을 그녀가 많이 한다고 해서 화가 나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분노가 해결되기 전에 뭔가 문제가 다 해결 되었다고, 나 혼자 생각하고 그녀에게 긴치 않은 장난이라도 걸면, 당연히도 욕을 얻어 먹게 되었다. 그럴 때 가중된 그녀의 분노는 목성 표면의 그 크고 붉은 점과도 같은 거대한 폭풍이 되어 몰아쳤다.


“아,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너 기분 나쁜데, 너 혼자 실실 웃어서, 너를 더 기분 나쁘게 한 게. 그게 미안해.”


나는 사실대로 자백하고 용서를 빌기로 했다. 그러나 돌아 오는 그녀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너 진짜 짜증난다. 니 말대로면, 너는 사소한 일에도 나한테 진심으로 깊이 사과하는 정말 착하고 사려 깊고 선한 사람인데, 나는 별것도 아닌 걸로 너한테 화내고 그러면서 니가 나한테 빌어야 기분이 풀리는 그런 엄청 성격 더럽고 나쁜 사람이야? 너 왜 나를 나쁜 사람 만들어? 그런 식으로 너만 착하고 내가 다 잘못이라는 그런 구도를 억지로 꾸미지마. 진짜 짜증나고 역겨워.”


나는 뭐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곧 출발할 시간이라는 것을 알려 왔다.


“시간 됐습니다.”


서경숙 임무관리담당이 나타나 딱 그 한 마디를 하고 지나갔다. 생기 없는 목소리와 걸음걸이만으로 몸짓을 표현하는 모습은 거의 유령과 같았다. 대기 시간이 끝났으니, 이제 탐사정을 타고 유로파의 구덩이들을 탐험하라는 명령이었다.


“가자, 가자. 이러다가 우리만 늦겠다.”
“니가 졸고 있다가 빠릿빠릿하게 못하는 바람에 늦는 거 잖아.”


네 대의 탐사정이 동시에 네 방향으로 나가서 탐사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 오게 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 중에 한 대였다. 처음 움직일 때 안전하게 기지 밖에서 잘 있을 수 있을까, 모든 기능들이 다 잘 움직일까, 걱정되고 긴장 되었다. 그래서 처음 탐사정이 기지를 나설 때, 그때, 다들 할 일이 많고, 분주하다.


“많이 안 늦었잖아. 우리가 그래도 4팀 중에 3등이네.”


내가 말했다. 그녀는 대답 없이 차만 한 모금 마셨다. 그것은 그냥 차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녀가 들고 있는 그 차가 그녀의 권위를 상징하는 마패처럼 보인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탐사 지역인 먼 곳으로 가는 동안에도 우리는 꼭 필요한 말 말고는 말이 없었다. 어제 내가 그녀에게 약간 쌀쌀 맞게 대하기는 했다. 내가 일부러 말을 많이 하지 않고 있기도 했고. 그녀는 그때부터 조금씩 나를 미워하기 시작한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말이 없는 시간은, 말이 없다는 그 자체가 위협적이었다. 평소에 그녀는 하는 많은 이야기들 중에는 재미 있는 것들이 많았다. 그녀가 하는 이야기들은 목성의 자기장과 유로파 생태계에 대한 인상적인 통찰력에 관한 것들로부터, 동료 대원의 실패한 머리 모양까지 넓은 주제에 걸쳐 있었다. 그 중 몇몇의 주제에 대한 그녀의 이야기들은 상당한 흡인력이 있었고, 일단 듣기 시작하면 자연히 그녀와 활발히 대화에 빠지게 되었다. 그녀는 그런 대화를 자주 이끌어 냈고, 그녀와 떠들어 대는 것은 영화를 본다거나, 책을 읽는다거나 하는 일보다 훨씬 더 시간을 빨리 가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어떤 행동을 해야만 위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 나에게 위협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특히 이렇게 같이 단 둘이 임무를 위해 일해야 할 때, 그런 위협이 몰아 닥치면 그 조용한 순간순간이 불안하고 아슬아슬하기만 했다.


“이거는 애인이랑 일을 같이 하니까, 일 하면서 연애도 하고, 연애 하면서 일도 하네. 정말 나 같으면 이러면 매일 일하는 게 즐겁겠다.”


나와 그녀를 보고 그렇게 말하며 농담하는 사람도 있었다. “일 하면서 연애도 하고, 연해하면서 일도 하네.” 그게 무슨 운율이 맞는 재미난 말이라고, 그렇게 말을 하고 나서 정말 웃긴 말을 자기가 만들어 냈다고 혼자 감탄하며 낄낄거리고 웃기도 했다. 양천종 통신팀장. 악마 같은 입냄새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마 정말로 지옥에 떨어지고 지옥 입구의 악마가 ‘지옥에 온 걸 환영한다’고 말할 때, 그 앞에 목성 기지 사람들이 있다면, ‘어휴, 저 악마는 입냄새가 양천종 팀장 못지않네.’라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같이 임무를 하는 일이 많아질 수록 오히려 싸우는 일만 많이 생기게 되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이 있어도 갇혀 있다는 느낌이 큰 유로파 기지에 도착한 이후로 점점 더 그렇게 싸우게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일 없이 항상 같이 있다 보니, 그게 그녀와 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날 기회가 더 많아 지고, 반대로 충돌이 가라앉을 다른 데 신경 쓸 시간은 없어지다 보니까, 그런 식으로 점점 더 싸움으로 번지는 일이 많아 지는 거 같다, 싶기도 했다.


“저기까지 가자.”
“탐지기에는 안전 떴어.”


나는 탐지기를 보고 길이 튼튼하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그녀는 탐사정을 길 끝까지 이동시켰다.


“똑바로 본 거 맞아?”


그녀의 목소리는 기분 나쁘게 들렸다. 나는 “맞아. 맞아”하고 대답했다.


그렇게 투덜거릴 때, 한 며칠 묻어 두었던 생각이 다시 솟구쳤다.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다. 이거 접자. 지금이라도 많이 안 늦었다. 헤어지자. 헤어지자고 하자. 그게 지금 내 진정한 본심이다. 오래 같이 지냈고, 결정적인 큰 문제는 없었고, 먼저 헤어지자고 하면 나쁜 놈처럼 보일 것이고, 그녀는 슬퍼할 것이고, 그러면 불쌍해 보일 것이고, 막상 그러고 나서도 그녀보다 더 사랑스러운 여자를 찾을 가능성이 높지도 않겠지만, 그래도 헤어지자. 그게 결국 모두를 위해서 낫고, 그게 바로 순리를 따르는 길 아닐까.


겁내지 말고 말하자. 일단 말이라도 하자. 그냥 확 말하고 나서, 그래 그런 다음에 뭐 어떻게 되겠지. ‘우리 이건 도저히 안되겠다. 우리 헤어지자.’ 아닌가? 좀 더 비열하지만 안전하게 말해야 하나. ‘우리 지금 너무 신경이 곤두서 있는 거 같애. 우리 목성에서 임무 끝날 때 까지만이라도 좀 쉬어 가는 시간을 갖고, 그 다음에 다시 우리 관계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역시 너무 비열한데. 적당한 말 없나.


이런 거 고민하다가 말할 시간 놓치겠지. 이제 곧 관측 시작하면 정신 없이 바쁠텐제. 지금 일단 말을 꺼내는 거야.


“저, 잠깐만 봐봐.”


나는 그렇게 말을 꺼냈다. 그리고 그녀는 나를 정말 보았다. 나는 그녀의 표정을 보기가 두려워서 시선을 살짝 피했다. 그리고나서 말을 하려는데, 바로 그 때 탐사정이 요동쳤다. 바닥이 꺼지는 것 같았다.


탐사정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 이상한 큰 벌레. 그 놈이었다. 그 벌레가 바닥인 척 하고 아래를 받치고 있다가 도망치는 바람에 탐사정이 구덩이로 떨어졌다. 떨어질 때 컴퓨터는 고장 났다. 구조 요청도 안되고 움직일 수도 없다. 산소는 점점 줄어 들어 간다.


나는 공포 속에서 마음이 어지러워지다가 점점 정신을 잃는 것을 느낀다. 이렇게 죽는구나. 아아,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이럴 줄 알았으면, 너무 돈 모아서 집 얻으려고 애쓰지 말고 좀 쓰고 살 걸.


3.
눈을 감고 있는데, 쿵쿵하고 뭘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왜, 넌 그렇게 눈을 감고 있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 앞에 깜빡이는 숫자들이 보였다. 빨간 그래프와 글자들이 눈앞을 날아 다니는 것도 보였다. 수학 잘 한다고 남들한테 잘난 척 했던 벌을 저승에서 받는구나. 이게 바로 수학 지옥이구나. 생각했다.


“훈련을 종료합니다.”


가장 신뢰감을 주는 것으로 골랐다는 21세기 초반의 TV방송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따와서 만든 목성 기지 공식 컴퓨터 음성이 들렸다. 곧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머리와 목과 등이 따끔하더니 다시 눈앞이 환해졌다.


눈부신 것 때문에 눈을 가리고 구석으로 뒹굴고 숨는 내 앞으로 그녀가 먼저 나타났다. 그녀는 일어 서서 걷게 되자 마자, 손을 뻗어 차를 담은 컵을 집어 들었다.


“너 똑바로 숫자 안봤지? 시뮬레이션 훈련할 때도 건성으로 하지 말고 똑바로 해야지. 바닥이 약해서 지나가면 안되는 길이었는데, 니가 탐지기에서 안전하게 나왔다고 하는 바람에 지나갔더니 바닥이 꺼져서 실패했잖아.”
“뭐? 벌레, 벌레 아니었어?”
“뭐라고? 방금 뭐라고 말했어?”


그녀는 버럭 화를 냈다. 벌레라는 말을 얼른 알아 듣지도 못할만큼, 그녀는 내가 엉뚱한 헛소리나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곧 그녀의 옆으로 통신팀장 양현종이 나타났다. 양현종이 그녀에게 말했다. 양현종은 자애로워 보이려고 애를 쓰는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그래도 파트너인데 너무 가혹하게 뭐라고 그러는거 아냐?”
“아니에요. 쟤는 욕을 좀 단단히 들어 먹어야 돼요. 세상에 시뮬레이션으로 훈련 받으면서 그 잠깐 대기 시간 동안 자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러다 갑자기 졸다가 일어나서 시뮬레이션 훈련을 하려고 하니까 뭐가 잘 되겠어요?”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부터 마치 함대처럼 출발하여 나의 귓속으로 도착하는 그 많은 비난의 단어들이 비내리듯 쏟아졌다. 나는 그 비난을 들으면서, 주변을 살폈다. 커다란 관측장이 보였다. 그리고 관측창 밖으로는 별들이 보였다. 그 중에는 작게 보이는 목성이 있었다. 이곳은 목성으로 오는 우주선 속이었다.


나는 목성으로 오는 우주선을 타고 있었고, 우주선 안에서 가상현실 시뮬레이션으로 훈련을 받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탐사정을 타고 그녀와 함께 유로파를 돌아 다닌 것은 실제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돌아 다니는 영상과 소리를 듣고 그 감촉을 느끼는 훈련 기계 속에서 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죽은 것이 아니었다. 하하하, 살았구나.


그 때, 양천종이 방을 나갔고 그녀가 나를 돌아 보았다. 나는 괜히 웃었나 싶었다. 아까 졸면서 멍한 정신으로 훈련을 한다고 나를 비난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무서웠는데.


“미안해. 저 사람 양천종 팀장은 훈련하다가 초기 결과 약간 나쁜 거 갖고도 사람한테 엄청 나쁜 소리 많이 하고, 막말 많이 하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또 쟤는 성격이 뭐 이상하게 꼬였는지, 자기 보다 먼저 딴 사람이 나서서 심하게 비난하고 뭐라 그러면, 그 때는 또 자기는 반대로 위로를 해주려고 한다고. 남이 사람 괴롭히는 거 볼때는 또 괜히 그걸 감싸주는 부드럽고 사려 깊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그런 마음이 막 솟아나나봐.


그래서 내가 먼저 나서서 너 한테 막 화를 내면, 쟤는 화를 안내고 위로하는 소리나 몇 마디 하다가 저렇게 가거든. 그래서 일부러 너한테 화낸 거야. 양천종 한테 나쁜 소리 듣지 말라고. 너도 알았지?”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얼떨결에, “그럼, 나도 알았지.”하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나의 건강과 심정에 대해 찬찬히 물어 보았다.


“우주비행도 별로 안 해 본 애가 목성까지 이렇게 오니 얼마나 힘들어. 잠자기도 힘들고, 인공 동면도 했다 말았다 자꾸 반복해야 되고. 사람이 안 졸리면 그게 이상하지. 잠 잘 오게 내가 음악 골라 줄까?”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엔켈라두스의 온천처럼 따뜻했다. 그녀는 마시고 있던 차를 나에게 줄까, 하고 내밀었다. 나는 문득 엇나가는 마음이 되어 그녀에게 말했다.


“너 또 갑자기 왜 그래. 이상하게 너답지 않게 과하게 따뜻하게 대하는 거 아니야? 너 기분 나쁠 때에는 엄청 사소하게 내가 표정 하나 바꾼거, 말투 하나 마음에 안든거 갖고도 엄청 화내면서. 지금은 무슨 바라지도 않는 음악을 골라 준다고 그래? 너무 과잉친절 아니야?”


그리고나서, 나는 그녀가 위선적인 면이 있고, 지금과 같이 그녀가 이렇게 자신의 자상함을 자랑하기 위한 목적으로 취하는 자상한 척을 하는 행동이 나는 조금도 즐겁지 않으며 오히려 아니 꼽게 보이며, 하나도 안 자상하고 냉정해도 좋으니까 다만 언제든 나를 부당하게 비난하는 행패를 부리지만 말아 달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평화로운 그녀의 태도를 보자 나는 이 평화를 깨고 일부러 그런 위험한 요청을 내가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사서 평화를 깨고 투쟁의 세계로 들어 가야 하는가.


그러다 보니, 목성에 거진 도착한 그 우주선이 유로파로 도착하는 기간 동안 나는 그냥 “고마워” “아니, 뭘” “괜찮아” “아냐, 나는 네가 걱정이지” 그런 말만 하였다. 그러다 보니, 나는 그녀와 사랑의 달콤한 말들을 속삭이기나 했고, 그녀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고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지 그런 이야기만 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니, 이미 나는 기지에 도착하여 목성의 막강한 중력권에 붙들려 있었다.


“이제,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 시작하는 겁니다.”


목성의 위성 유로파에 도착하면서, 김학상 대장이 새로 오는 대원들을 환영하기 위해 녹음해 놓은 그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유로파에서 몇 차례 탐사정을 타고 나갔다 오며 임무를 수행하고, 기지에서 여러 잡일을 하는 동안 뭐 사는 게 다 이런거라고 생각하려고도 했다. 그녀는 목성 기지에서 일하는 건실한 대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지성에서 체력까지 벌써 많은 부분이 검증되는 조건이었다. 거기다가 인기도 있는 편이어서, 유로파에서 한 번 탐사정을 타고 나갔다 들어 오는 사이에 벌써 접근하는 남자가 셋이나 발견 되었다.


그래, 뭐, 남들도 이렇게 살고, 세상 사는 게 다 이런 것 아니겠나. 사람이 사지육신 멀쩡하고 살인 강도하는 사람 아니면, 다 같이 살다 보면 정들고, 장점은 배우고 단점은 보완해 주고 그러면서 살면되는 거지.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자주 그녀에게 욕을 얻어 먹고, 2.2일에 한번 꼴로 그녀에게 빌어야 하는 삶을 살았지만 그녀와 같이 지내는 것이 크게 나쁜 일은 아니라고 계속 다짐했다.


그러다가 나는 서경숙 임무관리 담당이 관리하는 임무를 하면서, 출발을 기다리다가 서경숙의 옆 모습을 찬찬히 보게 되었다. 서경숙은 표정의 변화가 많지 않았고 엷어 보이는 입술을 아주 약간씩 움직이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 얼굴이었다. 서경숙은 언제나 믿음직스워 보였다. 목소리는 작고 힘이 없었지만 그런데도 위엄이 있었다. 나는 서경숙이 이제 임무 준비가 다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탐사정의 대원들 한 명 한 명을 정면으로 보며 눈을 맞추는 모습이 아름답고 멋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서경숙 같은 사람을 원래 좋아했다. 좀 신비로운 면이 있어 보이면서 강인한 사람. 어릴적 좋아하던 여자 연예인이나 학교 다닐 때 쟤 진짜 예쁘다고 혼자 좋아하며 애태웠던 애들, 다들 그런 사람들이었다. 하다 못해 별로 보람찬 결과를 맺지는 못했지만 소개해 달라고 괜찮아 보인다고 했던 예전에 만났던 사람들도 어느 정도는 그런 신비파, 강인파 분위기였다.


그녀는 그런 파가 아니었다. 정반대라고 하면 너무 억지로 대립시키는 느낌일 것이긴 하다. 목성까지 와서 유로파 기지에서 일하는 사람이니 그게 신비롭다면 신비로운 면이 있는 것이고, 전자기 폭풍이 몰아치고 방사능이 쏟아 지고 죽는 게 사는 것 보다 훨씬 쉬운 세계로 탐사정을 끌고 나가는 게 직업인 사람이니까 강인하다면 강인하기는 한 것이다. 그런 점이 있었으니까 그녀가 나에게 “너, 지금 내가 정말 매력덩어리야 라고 말해”라고 장난치며 말했을 때, 큰 머뭇거림 없이 “넌 정말 매력의 소행성이야.”라고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서경숙이야 말로 매력의 대행성이었다. 서경숙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서경숙은 감히 내가 부질 없는 희망조차 품으면 안될 정도의 급에 올라와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녀 대신에 서경숙을 만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게 하기 위해 준비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서경숙을 볼 때 마다,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세상은 바로 저 쪽이라고. 애절한 마음이 되고, 긴장 되어 두렵게 만들기도 하고, 간절히 그리워하게 되고, 몇 시간씩 기약도 없는 공상과 답도 없는 고민으로 내 마음에 가득가득차는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을 사랑했던 일이 있었다고. 그런데, 그런데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나는 그러려고 일부러 한 것도 아니었는데, 저절로 조금씩 그녀에게 예전보다 조금 덤덤하게 대하게 되고, 조금 밋밋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나는 그 정도가 아주 조금씩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그런 내 태도의 차이를 어떤 정밀 감지 장치라도 이용해서 측정한 것인지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나에게 화를 내고, 호통을 치고, 소리를 지르는 일들은 점점 더 잦아 졌다. 그녀가 정말로 그렇게 변한 것인지, 내가 예전보다 더 그런 것을 자주 의식하게 되고 더 피곤하게 여기게 되어 그렇게 느끼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가장 먼 곳으로 가는 탐사 계획이 이루어지게 되기 전, 나는 늦게까지 탐사정의 안전 관리 장치들을 따져 보고 있었다. 갑자기 주변 재질이 달라 지는 지역으로 탐사정이 가게 되면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바닥과 주변을 미리 감지할 감지 설비와 탐지기들을 살펴 보았다.


그때, 등 뒤에서 따뜻한 기운과 그 이상한 향기가 감돌았다. 돌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그녀였다. 그녀가 왼손에 차가 들어 있는 컵을 들고 나타난 것이었다. 항상 이렇게 차를 들고 돌아 다니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이 그녀의 특징이었다.


그녀에게 내가 말했다.


“탐사 나가야 되는 데 일찍 쉬지, 왜?”


그러자 그녀는 스스로는 아주 긍정적인 효과를 낸다고 믿고 있는 애교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 나 인줄 아떻게 알았어?”
“차.”
“차에서 냄새라도 나? 어떻게 보지도 않고 나인 줄 아냐?”


그리고 그녀는 그녀가 마시는 그 꽃과 특이한 향기 나는 풀들을 괴이하게 섞어 만든 차에 대해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향이 좋은데, 어떤 심정이 들 때 마음을 어떻게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고, 빛깔이 어떻고 이야기 했다.


“여기서 너 잠 잘 못 자잖아. 자도 잔거 같지가 않고. 깨도 깬거 같지가 않고. 자꾸 꿈만 많이 꾸고. 잠깐 조는 것 같은데도 길게 자고, 졸고 나서도 정신 못차리고. 그럴 때 이 차를 마시면 좋데.”


그녀는 그런 긴 설명의 뒤에, 그러면서도 그녀는 자기는 차 마시는 데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 하고, 너무 고급차 따지는 사람은 자기는 싫어한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나는 차를 마시거나 말거나에 대해 아무 불만은 없었다. 그런데 그때 그녀와 헤어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확 들었다. 그리고 났더니, 갑자기 뭔가 확 가슴이 트이면서 삶의 새로운 방향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 그게 다만 언제,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 지, 너무 급한 결정은 아니었는지 하는 그런 고민만 뒤이어 이어졌다.


한쪽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도 어느새 나는 그녀의 이야기 속에 또 한쪽으로 빠져서 유로파에서 풀을 키우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 양천종이 나타났다.


“하여튼, 두 사람이 있는 곳은 어디든 이동식 깨 농장이지. 왜이렇게 깨가 쏟아져.”


양천종은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자동판매기에서 판매라도 할 수 있을 정도의 웃음으로 답해주고, 바로 도망쳐 흩어졌다.


다음날 우리는 탐사에 나섰다. 마지막으로 나를 쳐다 보아 준 서경숙은 다 잘 될 것이고,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을 거라는 마음을 불러오는 눈으로 나를 보아 주었다.


그러나, 그 탐사 경로의 마지막 부분에서 바닥이 갑자기 무너졌다. 나는 바닥에서 갑자기 커다란 벌레처럼 생긴 것이 움직여 도망치는 것을 본 것 같았다. 확신할 수는 없었다. 무엇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컴퓨터는 부서졌고, 작동 되는 것이 거의 없는 탐사정에 갇혀 나와 그녀는 알 수 없는 유로파의 어느 먼 구석으로 떨어져 버렸다.


어떻게 살아 보기 위해서 허둥거리는 사이에, 시간은 휙휙 지나가는 것 같았다.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산소가 없어진 느낌이 들었다. 얼마나 산소가 남았는 지 컴퓨터가 고장 나서 알기도 어려웠다. 그렇지만 이상해지는 호흡과 앞뒤가 잘 연결되지 않는 생각 때문에, 나는 이제 다 끝났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아, 이게 내 마지막이구나. 이만하면 보람찬 인생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싫은 놈들한테 진짜 싫었다고 유서라도 하나 써 놓을 걸 그랬나? 에라이, 이...


4.
그녀가 한숨을 길게 푹 쉬더니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안되나 보네.”


그러더니 그녀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조금도 겁을 내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차가 담긴 컵 부터 우선 집어 들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그녀는 컵을 든 채로 탐사정의 문을 향해 걸어 갔다. 그리고 그 문을 열려고 했다. 쟤가 왜 저래. 나는 다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죽어도 곱게 죽지 무슨 난리를 치려고, 왜 저러는 거지.


그런데 그때 갑자기 다시 환하게 전등이 켜졌다. 그리고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 그곳에서는 사람이 보이는 것 같았다.


뭐라고? 유로파에 사람 모양의 외계인이 있는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외계인에게 구출되는 것이란 말인가. 이럴수가. 이럴수가.


그런데 외계인이라고 생각했던 그 모습은 알고 보니, 서경숙이었다. 유로파의 바깥에서 맨몸으로 서 있다니. 이것은 아무리 신비롭고 아무리 강인하다지만, 이것은 논리에서 벗어나는 일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그 뒤에서 양천종이 걸어 왔다.


“수고 하셨습니다.”


양천종의 입냄새가 풍겨 왔다. 그가 말을 했다는 것 보다, 그 입냄새가 났다는 사실이 더 먼저 느껴졌다. 그제서야 나는 이 모든 일에 생생한 현실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곧 탐사정 안으로 김학상 대장도 걸어 들어 왔다.


“여러분은 여기서 탈락이십니다. 그래도 엄청 잘하셨고요. 최종 우승자는 여러분 두 분하고, 여기 계신 서경숙씨예요.”
“정말요? 저희가 최종 우승 3명에 들어 간거예요? 정말요?”


그녀는 웃으며 기뻐했다. 그리고 그녀는 걸어서 탐사정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손을 잡고 이끌기에 나도 따라 나가게 되었다.


“여기가 어디죠?”
“어디기는 일산이지.”


나는 유로파에 일산이라는 지명은 없는데,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깥에 나와 보니 내가 있던 곳이 커다란 텔레비전 세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일산에 있는 방송 세트였다.


“지금은 그냥 밋밋하게 나오지만, 방송으로 나갈 때는 아나운서가 감동해서 막 소리도 치고, 화려하게 효과도 넣어서 그렇게 나올 거에요.”


김학상 대장이 말했다. 그러니까, 김학상 대장의 말인즉슨 지금까지 나는 지구에 있는 목성의 유로파처럼 꾸며 놓은 세트에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다른 많은 지원자들과 함께 유로파 탐사에서 필요한 일들을 배우고 유로파에서 하는 것처럼 실제로 일산에 있는 세트에서 체험해 보는 대회에 참여 했다는 것이다. 이 세트 안에서 나와 다른 참가자들이 오랫동안 생활하며 서로 경쟁하는 그 모든 과정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방송이 되었다.


그리고 그 지원자들 중에서 가장 성적이 좋은 세 사람은 실제로 목성으로 가는 대원이 되는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았다는 말이었다. 만세, 만세. 나는 기뻐서 하하하 웃었다. 옆에서 그녀도 같이 웃어 주었다. 그녀는 우승했다는 것이 기뻐서 웃고 있었다.


어리둥절 했지만, 곧 나는 사실을 깨달았다. 몇 시간 사이에 다시 상황을 잘 알 수 있었다. 최종 합격자가 된 것을 축하하는 파티가 있었고, 별 볼 일 없는 뉴스 회사에서 인터뷰를 몇 번 해갔다. 첫번째 인터뷰에는 아직도 혼이 빠져 반 쯤은 유로파의 구덩이 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멍한 정신으로 대답했다. 그렇지만 두번째 인터뷰부터는 그럭저럭 농담 삼아 잘난 척도 할 수 있었고, 겸손으로 위장된 잘난 척도 부드럽게 해낼 수 있었다.


목성으로 가는 우주선이 출발 할 때까지는 몇 달 정도 시간이 남아 있었다. 대원을 뽑는 대회를 보여 주던 그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잠깐씩 세간에 이야기 거리가 되던 것이긴 했지만 인기가 아주 많은 것까지는 아니었다. 그래서 나를 알아 보는 사람이 갑자기 생겨난다든가 광고에 출연하게 된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래도 원래부터 알던 사람들 중에 내가 목성에서 일하는 것에 대해 이것저것 “인생에 대한 조언”을 해 주는 사람들은 대폭 늘어 났다.


그 사람들이 하던 이야기 중에 가장 와 닿았던 이야기는 역시 목성에 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사실 우주에서 일하려는 사람들 중에서 정말 실속있고 돈도 잘 버는 것은 지구 상공의 우주정거장이나 달 지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일거리도 많고, 돈 되는 일도 많았다. 자주 지구에 돌아 올 수도 있었다. 사람들이 “우주 임무”라고 생각할 때 머릿속에 떠올리는 똑똑하고 대단해 보이고 부유하고 소위 “사회 지도층” 같은 그런 모습들은 대체로 바로 이 지구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신비로운 것을 탐사한다면, 토성이나 더 먼 우주 임무를 목표로 하는 게 맞긴 맞지.”


한편 그녀는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가장 뛰어난 기술이 동원되는 임무는 토성보다 먼 우주를 대상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최신형 우주선과 실력도 배짱도 넘치는 가장 모험심 많은 우주의 탐험가 같은 사람들은 토성보다 멀리 가는 임무에 지원한다. 이런 사람들은 돈은 좀 덜 벌지만, 놀라운 것들을 보고 듣는 일들이 많고, 그런 것들로 지구에 보고하며 항상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정부 요원이 되어 일하는 경우도 많고, 그 외에 “최초로 뭘 어쩌고 한 사람”이라는 식의 이유로 여러 명예를 주는 상이나 감투를 받기도 한다.


그러니까, 양쪽을 종합해서 놓고 보면, 목성으로 가는 사람들은 헛바람만 든 사람들이라는 이야기였다. 우주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멋진 사람이 되기 위해, 학교 다니면서, 취직 준비하면서 노력했는데, 재주가 부족해서 사실상 실패한 것이다. 짭짤한 지구권의 일자리나, 최고의 인재가 필요한 토성 외권의 일자리에서 모두 다 떨어진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 맞는 일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그래도 “우주에서 일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신기하게 바라 볼 거라는 그 허영을 포기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그저 “저는 우주 임무를 합니다.”라고 말하면서 멋있는 척 하기 위해서, 돈도 얼마 못벌고 고생만 하고 위험하고 별 보람은 없는 목성 임무에 지원한다고 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 갈등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유로파의 탐사정 조종 일에 지원하기 위해서 TV 프로그램에 나가 오디션을 할 때만해도 제발 목성 임무에라도 합격해서 우주로 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공을 들이고 애달파하던 사람들이, 막상 목성으로 떠난다고 하면 점점 현실을 따지면서 생각이 흔들리게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 먼 목성까지 가서 험한 일만 하면서, 청춘을 보내고, 늙어서 돌아 오면 남는 것도 없는 일을 하느니 보다, 차라리 그냥 다른 일자리에 취직해서 지구에서 착실히 일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자꾸 들었다. 거기다가 유로파가 위험한 곳이라는 자료, 소식이 왜 그렇게 그때부터 점점 더 자주 많이 보이는지.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하겠어. 벌써 몇 년째 이것만 준비했는데. 이제와서 그냥 확 다 없던 일로 해버릴 수도 없고. 거기도 사람 일하는 데인데, 뭐 그렇게 살면 그렇게 살아야지. 이 목성 일만해도 못해서 안달난 사람들도 널렸잖아.”


그녀와 나는 푸념처럼 격려의 말을 주고 받았다. 우리는 출발하는 그날까지, 서로서로 ‘우리는 목성으로 간다’ ‘우리 인생은 목성으로 가는 인생이다’라고 서로 다짐하듯이 말을 주고 받았다. 혹시 둘 중에 누구 하나 배신해서 때려 치우고 지구에서 일하겠다고 할까봐 불안하게 눈치를 보기도 했다. 가끔은 서로 서로 나란히 손을 잡고 진흙탕에서 빠져 나와 그 앞에 있는 늪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들어 가는 느낌 같기도 했다. 지금 돌아 보면, 오히려 반대로 둘 중에 하나가 포기한다면 ‘그래 쟤도 포기했는데, 역시 목성에 안가는 게 맞겠다’고 나머지 한 쪽도 포기할 근거를 기다리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을 때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결국 둘 다 목성으로 가는 우주선을 탔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정서의 연결이 근거가 되어 어찌저찌하다 보니 이런저런 남녀가 쌍으로 하는 여러 일들을 하나 둘 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어찌저찌하다 보니 그녀와 나는 사귀게 되었고, 나와 그녀는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서로를 알아 가게 되었다.


끔찍하게도 나는 그녀와 사귀기도 전부터 그녀에게 헤어지자고 말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상상하고 있었다. 그녀와 같이 보내는 시간은 서로에게 재미있었고, 이제 그녀에게는 깊게 친근감을 느끼고 있어서, 그녀와 함께 있으면 겨울잠을 자기 위해 파 놓은 굴에 들어 온 곰이 된 듯이 편안하기는 했다. 어색하거나 신경이 곤두서는 일이 전혀 없었다. 그녀에게 욕을 푸지게 얻어 먹고 왜 또 저렇게 나에게 화를 내는지 답답해서 속이 터질 때라도, 그래도 그녀와 함께 탐사정을 타는 것이, 양천종이라든가 김학상이라든가, 서경숙과 같이 있는 것보다는 어색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분명해지는 것도 있었다. 남녀의 짝으로 나름대로 서로 역할을 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처음에도, 또 지금도 그녀에게 내가 무슨 정열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했다.


모르겠다. 원래 보던 것 보다 40배는 거대하게 빛나는 달을 보면서 우주선 궤도를 화성쪽으로 움직이며 조금씩 작아져 가는 지구를 같이 볼 때, 그 때 온 우주가 다 들어가 있는 것 같은 그녀의 눈동자에 뭔가 확 느껴졌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에 비해, 이해하기 어렵고 나에게는 부당하게만 보이는 그녀의 말과 행동은 하루하루 선명하기만 했다.


언제인가는 끝나야할 관계라고 생각했다. 지금 끝나도 괜찮은 관계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면 헤어지자고 하지. 왜 또 참고 버티고 있어?”


잠깐 잠이 들었을 때 꿈에서 그녀가 그렇게 따진 적이 있었다.


“니가 그래도 헤어지자고 해서 나 그만 만나는 것 보다는, 만나고 있는 게 더 좋으니까 헤어지자는 말은 안하고 있는 거 아니야? 그렇다고 치면, 결국 너 한테 이득이라서 이러고 있는 거 잖아. 그러면 니가 너 혼자 그렇게 무슨 피해자인 척 하고, 나는 맨날 너 괴롭히는 악당이라는 식으로 그러면 안되지. 너 그렇게 신세한탄하면서 너는 착한데 나한테 당하고 있다고 완전 자기연민에 빠져 있는 거야. 너는 나 참아 주는 착하고 관대한 사람이라고 자아도취하는 거야. 진짜 꼴사납고 재수 없어. 혼자 니 머릿속에서 그렇게 막 착한 편 나쁜 편 갈라서 연속극 찍지마.”


나는 욱해서 아니라고 항거하려 했지만, 할 말이 없었다. 심지어 나 스스로 설복 당할만 한 이야기였다.


비몽사몽 시뮬레이션 훈련을 하면서 탐사정을 조종을 연습할 때, 그녀는 이런 말을 한 것 같기도 했다.


“너, 지금 나 대하는 태도가 아주 매너 없고 치사 해. 너 이럴 거면 나 왜 만나? 그냥 너무 외로우니까 아무라도 한 명 있어야 될 거 같아서 나 만나? 다른 사람 대충 꼬여 드는 거 같으면 그때 나 안만다고 딴 사람 만나려고, 그때까지 땜빵하려고 나 만나는 거야? 왜 이렇게, 사람이 개같이 비겁해?”
“뭐, 개같이 비겁하다고? 너 말이 너무 심하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냐?”
“왜, 내 말이 뭘?”
“개같이 비겁하다고 했잖아. 사람한테 그런 말 막해도 돼?”
“개같이 비겁하다는 말이 어떤데?”
“너무 하잖아.”
“개가 비겁해?”
“개는 용감한 동물이지.”
“그러면 개같이 비겁하다는 거는 거의 안 비겁하다는 뜻 아니야?”
“그 이야기가 아니잖아. 그러면 니가 개같이 비겁하다고 말하는 게, 내가 별로 안 비겁하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냐?”
“말 뜻만 보면 그렇지.”


이와 같이 이어지는 말을 하다가, 내가 정신이 정상적으로 연결되는 흐름을 놓쳐 잠시 말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을 때, 그녀는 멍하니 있지 않고 재치있게 컵에 든 차를 한 모금 마시면, 어쩐지 그녀는 승리를 쟁취하고, 나는 패배의 구덩이에 나뒹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침내 나는 그녀에게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느낀 것을 모두 다 이야기하고, 그래서 나는 그녀와 헤어지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여러 탐사정이 한꺼번에 나가서 멀리까지  전면 탐사를 하는 임무가 곧 있으니까, 둘만 같이 탐사 임무에 나갔을 때, 그녀에게 다 말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어찌보면 오히려 상담을 구하는 것과 같은 태도일지도 모른다.


그 결심을 마음 속으로 하고 있는데, 그녀는 화면의 임무 지도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이쪽은 바닥이 단단하지 못한 곳이 있을 수 있으니까, 탐사기를 잘 작동시켜서 따져 보면서 가야 하겠네.”


나는 그 말을 듣자 정신이 들어 나도 지도를 보았다. 안정하지 못한 바닥. 먼곳으로 헤치고 나가서 아무도 안 가 본 곳에 가봐야 하는 임무. 불길한 느낌이 확 들었다. 그곳에서 바닥이 꺼지고 추락해서 쳐 박히는 사고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야, 이거 우리 내일은 임무 안 나가면 안될까?”
“왜?”
“좀 위험해 보이고, 그리고 음, 몸도 좀 안좋아서.”
“뭔 개소리야? 건강 체크 이상 없잖아. 그리고 위험해 보이기는. 우리가 제일 좋은 길로 가는 건데.”
“그래도, 이거는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너 안 가려면 가지 말아. 나 혼자라도 갈테니까.”
“혼자서 탐사정을 어떻게 끌고 나가냐?”
“너는 그걸 알면서 안 나가겠다고 버티냐? 내일 임무가 제일 멀리 나가는 데, 내일 가서 어디 산소층이나 열층이라도 발견해 봐. 그럼 완전 영웅 되는 거 아니야. 혹시 알아 무슨 외계인이라도 발견할지. 그런데, 그걸 다른 사람들한테 다 하게 넘겨 주고, 그냥 기지에 쳐박혀 있겠다고? 그게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뭘 마음에 두고 있는거야? 너, 내가 전에도 몇 번 말했지. 혼자 이상한 생각을 하면서 결론만 말하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아냐고. 내가 텔레파시 초능력이 있는 사람이야? 니가 생각한 게 이러저러하다고 말을 해야 내가 알아 먹잖아.”


나는 무슨 생각으로 임무에 나가지 않겠다고 했는지, 이러저러하다고 그녀에게 설명할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다. 그렇지만 그녀의 눈빛은 나를 죽이고 싶다는 것에 가까웠지, 나에게 설명을 듣고 싶다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생각해도 남에게 튼튼한 근거가 있을만한 설명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유치해진 것인지, 나는 대신에 다시 그녀에게 정말 내일은 헤어지자고 꼭 말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그러나 임무에 나갔을 때, 탐사정 바닥이 무너져 내렸고, 그녀와 나는 알 수 없는 곳으로 떨어져 버렸다. 컴퓨터가 꺼진 탐사정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창바깥에는 여기가 어디인지를 알려 주지 않는 암흑과 무심한 커다란 유로파의 벌레만 보였다.


산소는 점점 더 부족해졌다. 나는 최후를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무서운 와중에도 한 가지 새로운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이 모든 것이 매우 공교롭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몇 차례에 걸쳐 정확히 똑같은 지점에서 추락해 갇혀 죽어 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여러 복잡한 상황과 공교로운 우연으로 현실과 꿈을 구분 못하거나, 꿈과 가상 현실 훈련, 세트에서 촬영하는 대회를 구분하지 못하고 착각할 수도 있기는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때마다 항상 유로파의 구석과 목성 벌레를 보면서 일어난다는 것은 너무 이상했다. 아주 확률이 낮아 보이는 우연의 일치였다.


이것은 누가 일부러 그렇게 의도적으로 짠 것이 아닌가 싶었다. 떨어져서 절망하는 나를 반복적으로 보고 싶어 하는 누가 일부러 이렇게 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것은 어떤 실험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재미 삼아 누가 꾸민 쇼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갇혀 있는 이 상황과 이 상황 속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만든 어떤 작성자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해서 고생하는 나와 내가 두려워 하는 이 세상을 만들어낸 작성자가 있을 것이다. 그 작성자가 일부러 지금 나를 이렇게 몰아 가고 있는 것이다. 작성자가 어디에 있는 어떤 자인지는 알 수 없다. 섭리로 세상을 표현하고 있는 대단한 자일 수도 있겠지만, 서울 등촌동쯤 되는 동네에서 컴퓨터로 나에 대한 이야기를 작성하며 오후 시간을 보내고 있는 놈 정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그 작성자는 지금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도 지금 꾸며 내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작성자에게 지금 따지고 싶다. 왜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가? 이렇게 작성자에게 따지는 생각을 품고 있는 이 순간의 행동조차도 지금 작성자가 지어 내고 있는 내 행동이겠지만, 그래도 나는 항의하고 싶다. 이렇게 망하면서 끝나는 이야기에 꼭 나를 밀어 넣어야겠냐고. 어떻게든 내가 다시 살아 나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는 결말로 가면 안되겠냐고.


의식이 점점 더 가물가물해져 가고 있었다. 나는 작성자에게 부탁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별로 상쾌한 이야기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 결국 결말까지 내가 비참하게 망하는 게 끝이어야 하나. 그것은 아니지 않나. 살고 싶다. 행복하게 오래오래. 작성자라면 나의 이런 생각을 지금 알아 들었을 것이다. 알아 들을 필요도 없겠지, 애초에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 조차도 작성자가 그렇게 꾸민 것일 테니까. 그런 만큼, 제발 여기서 나가게 해 주쇼. 좀. 부탁한다. 작성자 양반, 날 살려 달라.


또 내가 이렇게 간절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다음으로 팍 넘어 가서는, 비정하게 뚝 ‘10일 후 차갑게 얼어 붙은 시체로 그는 유로파의 깊은 구덩이에서 발견되었다’는 뭐 그런 식으로 확 끝내 버릴지도 모르지. 그래야 더 안타깝고, 더 좌절감도 클 테니까. 그래 놓고, 그게 비정한 세상에서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낸 거라고 작성자는 좋아할 수도 있겠지.


5.
10일 후 차갑게 얼어 붙은 시체로 그는 유로파의 깊은 구덩이에서 발견 되었다.


내가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녀가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야, 눈 떠 눈 떠. 여기 이상해.”


그녀는 한참 나를 때린 후에, 아픈 손을 털었다. 내 뺨은 무섭게 부어 있었다. 그녀는 손을 잡고, “아휴 때리는 내 손이 더 아프네”라고 말했다. 나머지 손으로는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아직 탐사정 안이었다.


“여기 잠깐 정신 놓치면 생각이 막 이상하게 빙빙 돌면서 정신이 막 헷갈리고 이상하게 돼. 되게 이상한 곳인 거 같아.”
“근데 너 진짜 아프게 때린다.”
“어떡하겠어. 정신 바짝 차리려면 할 수 없잖아. 나도 눈 감고 이상해지는 것 같으면 너도 내 뺨 때려.”


나는 그녀의 뺨을 때릴 기회를 찾고자, 그녀가 잠깐 멍한 눈빛을 보일 틈을 보이지는 않는 지 집중해서 감시했다. 그러다 보니, 저절로 내 정신이 조금씩 맑아 지는 느낌이기는 했다. 한편 그녀는 전혀 틈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더욱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가 말했다.


“일단 컴퓨터는 망했지만, 아직 전원은 살아 있는 데가 있는 거 같잖아. 그러니까, 우리 통신기를 뜯어 가지고, 회로를 합선 시켜서 아무 신호나 그냥 팍팍 나가게 해보자. 전기를 보냈다가 말았다가 하면서, SOS신호를 보내면 기지에 있는 전자파 관측팀에서라도 그거 잡아내지 않을까.”


해 볼만한 일인 것 같았다. 나는 통신기로 연결된 부품이 있는 곳을 찾아 냈다. 나는 손에 감전이 되고 베이고 찔린 상처가 생겨 가면서 그곳을 뜯어 냈다. 설계도나 회로 설명 자료가 없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대강 짐작으로 마땅한 전선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녀는 모스 부호로 SOS 신호가 어떻게 되는 지 알려 주었다. 나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전선을 연결했다가 떼어 냈다가 해 보았다.


“되는 거 같아?”
“소용 없는 거 같애. 이거 램프 들어 오는 거 봐서는, 단거리 통신은 살아 있는데, 아까 떨어지면서 장거리 통신 안테나가 깨진 거 같애.”
“단거리 통신이라도 관측팀에서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목성은 전자기파가 워낙 혼란스러운 데 잖아. 이 근처까지 누가 와서 일부러 우리를 찾으려고 들으면 모르겠지만, 아니면 힘들겠지.”


나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그녀가 또 내 뺨을 확 후려쳤다.


“야, 왜 때려?”
“네가 눈 감고 또 정신 나가는 거 같아서.”
“그냥 마음이 답답해서 잠깐 지긋이 눈 감은 거야.”
“그것도 위험해.”


매우 아팠다. 나는 곧 죽겠다는 것도 잊을 만큼 울분을 느꼈다. 그런데, 관측창 밖에서 벌레가 꿈틀거리며 이쪽으로 다시 기어 오는 게 보였다.


“저거 왜 저래?”
“잠깐만. 다시 SOS 보내봐.”


그녀의 말대로 통신 신호를 보내자, 벌레는 다시 이쪽으로 더 다가 왔다.


“저게 전파 신호에 반응하는 거 같은데.”
“목성 유로파 여기는 소리도 잘 전달 안되고, 빛도 잘 안보이는데 전자기파는 워낙 혼란스럽게 오락가락하는 데니까, 여기 생물들은 서로 의사소통하는데 전파를 직접 사용하는 거 아닐까?”
“입하고 귀가 있는 대신에 라디오가 얼굴에 달려 있는 거라고?”
“하여튼 함부로 신호 보내지 말자. 저게 와서 무슨 해코지 하면 어쩌냐.”


나는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났다. 사람의 뇌가 움직이는 것은 뇌세포들이 서로 전기 신호를 주고 받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 괴상한 생물이 전자기파를 교란시킬 줄 안다면, 우리 뇌세포의 활동을 흐려 놓을 수 있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저 벌레가 우리한테 말을 걸면, 우리는 정신이 꼬이면서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어 버리는 것 아닐까.


목성 왕 벌레가 우리에게 반갑다고 컹컹 짖어 대고 있는 건지, 아니면 노래를 불러 주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우리한테는 그냥 우리 생각을 꼬이게 만드는 효과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서 꿈에 자꾸 빠지고 자꾸 꼬이는 환상에 헤메게 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때리지마 때리지마. 나 정신 차리고 집중하고 있었어.”


그녀가 또 때리려고 하기에, 나는 간신히 말하며 그녀를 저지했다.


“무슨 생각에 집중했는데.”
“우리 얼마나 깊이 떨어졌는지 대충 확인은 안되나 싶어서. 눈으로 보기에는 저 위까지 한 10미터에서 20미터 정도 거리인 거 같은데. 저 위까지 다시 올라가기만 하면, 다른 탐사정에게 보이지 않을까?”
“그렇기는 한데, 무슨 수로 저 위까지 올라 가는데?”
“여기 중력이 약하니까, 어떻게 조금만 하면 갈 수도 있을텐데.”
“어떻게 조금만?”
“어떻게 조금만.”
“그래도 맨 몸으로 기어 올라 가기에는 디딜 데가 없는데.”
“누가 밧줄 같은 걸 묶거나 해서 우리를 당겨 주면?”
“그러면 되겠지만, 우리가 여기 있는 걸 누가 아냐?”


그녀는 그렇게 말을 하고 나서, 관측창을 보았다. 나도 관측창을 보았다. 벌레가 보였다.


나는 그녀를 쳐다 보았다. 그녀도 나를 쳐다 보았다. 나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내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어떻게 해 볼까?”
“그냥 드럼 치듯이 신나게 전속력으로 SOS SOS SOS 계속 보내봐.”


우리는 출력을 최대로 해서, 단거리 통신으로 전기 신호를 보냈다. 생각대로 꿈틀거리면서 그 벌레는 우리 쪽으로 다가 왔다. 그녀가 말했다.


“확실히 전자파 신호에 반응을 하네. 우리 탐사정이 자기네들하고 같은 동족인 줄 알고 와서 붙은 건가봐.”
“먹이라서 먹으려는 걸 수도 있고.”


곧 벌레는 우리에게 딱 달라 붙었다. 우리는 흡착 밸브를 수동으로 열어서 우리도 벌레에게 달라 붙도록 만들었다.


“이제 벌레가 위로 갈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될 거 같은데.”


그렇지만 벌레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잠깐씩 꿈틀거리기만 할 뿐, 어딘가로 멀리 움직이거나 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어떡하냐.”
“이게 열을 좋아하는것도 맞나봐. 그러니까, 우리 탐사정이 약간 뜻뜨미지근한 기운이 있으니까 그게 좋아서 그냥 가만히 이렇게 오래 열심히 붙어 있는 거 같은데. 우리 열을 쪽쪽 빨아 먹으면서.”


그녀가 말했다.


그 때 열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자, 내 눈에 확 들어 오는 것이 있었다.


나는 그녀가 방금 한 모금 마신 뜨거운 차가 들어 있는 그녀의 컵을 넘겨 받았다. 그리고 탐사정 해치를 열고, 그 차가 들어 있는 컵을 온 힘을 다해서 위쪽으로 내던져 버렸다. 멀리 멀리 가거라.  공기가 쉭쉭거리며 빠져 나갔고, 컵도 위로 높이 치솟았다.


그러자, 내던진 컵을 향해 벌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벌레에 달라 붙은 우리는 끌려 올라 갔다. 벌레는 온 몸에서 빛을 내며 번쩍거렸다. 신이 나는 지, 벌레는 더 강한 전자파를 뿜었고, 나는 자꾸 정신을 잃었다가 되찾았고, 그녀는 내가 정신을 차리게 만든다며 내 뺨을 악기와도 같이 줄기차게 계속 때렸다. 그 전자파는 주변에 작은 레이저 빛을 만들어 냈다. 벌레와 거기에 끌려 올라가는 우리 탐사정 옆으로 초록색과 보라색 빛이 물방울 거품처럼 쏟아졌다. 그 빛 덩어리 방울 하나하나가 휘날리는 커튼 모양으로 색을 길게 뻗치며 반짝거리면서 온통 퍼져나갔다. 사실인지, 꿈인지, 그녀와 나는 그 빛깔들이 날개짓을 하면서 탐사정 안과 바깥, 우리의 머릿속과 몸 안팎으로 쏟아지는 꽃잎 같이 가득 휘날리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단번에 목적지에 도착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갑자기 튀어 올라온 그 모습이 우리를 찾아 나선 구조대에 발견 되었다. 우리는 산소가 떨어지기 두 시간 전에 산소통을 받았고, 그 후 여섯 시간 후에 무사히 구조되어 기지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구덩이에 빠져 있을 때 이미 다른 곳의 탐사팀이 유로파의 벌레를 발견했다고 기지로 보고 했기 때문에, 최초 발견자의 영예는 그 사람들이 다 가져가 버렸다. 가끔 “보고는 늦었지만 그래도 목격 자체는 이 사람들이 제일 먼저 했다”면서, 어떻게 우리를 선전이나 광고에 써먹어 보려는 사람들이 연락을 해오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것 중에 별로 우리 생활에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은 없었다.


한 가지 바뀐 것이 있다면, 이제는 그녀가 차를 타 오라고 시키면 나는 두 잔을 마련 한다는 것이다. 나도 이제 그 차를 마시고 있다. 나는 종종 그 희귀한 차를 마시면서 그녀에게 가서 말을 거는 내 자신의 모습이 괜히 멋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떻게든 거만하고 여유있게 보이려고 연출해 본다. 하지만,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그냥 빤히 보기만 하면 언제나 실패하고 만다.


- 2015년, 등촌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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