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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망재 사과나무

2014.02.01 10:4702.01

사과나무




쌉싸래한 풀 내음 사이 희미한 꽃내가 감돌았다. 깜빡 잠이 들었는가 했더니, 관복에 풀물이 들도록 이래 앉아 있었다. 여운국 각란성은 소매 끝의 하얀 깃에 어린 풀과 기름진 봄날의 황토가 남긴 자국을 들여다보다, 문득 한숨을 쉬었다.


세상 다 망한 것처럼, 무슨 한숨인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가 기대어 잠든 고목의 반대편 쪽, 햇살 아래 파르스름한 빛을 띤 긴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조아렸다. 여자는 돌아보지 않았지만, 그녀의 어깨 너머로 아삭, 싱싱한 사과를 깨무는 소리가 났다.


대군 저하.”

모처럼 신기한 구경을 하였구나. , 찔러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던 그대가 낮잠 자는 꼴을 다 보고.”

망극하옵니다.”

번을 섰으니 피곤할 만도 하지. 중궁 앞마당에서 늘어지게 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이 곳이야 학사들이 몸도 마음도 달래게 하려 만들어놓은 곳인데 잠 좀 자면 어때서. 그래도 그대가 그렇게 쿨쿨 자는 모습은 처음 본 것 같구나.”


그는 그녀가 사과를 다 먹도록 그대로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명성대군 유미디아 아라스는 그제야, 이 젊고 미숙한 성정에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인내심이 강한 청년이 아직도 고개를 들지 못한 것을 알았다. 그녀는 옷을 털며 일어나더니 거의 다 먹은, 꼭지라고 부르는 편이 합당해 보일 듯한 사과를 허공으로 집어던졌다. 사과는 사라졌다. 각란성은 머리를 숙인 채로 눈을 깜빡였다. 몇 번을 보아도 희한한 광경이었다.


“......?”

대체 그 사과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질문이 틀렸다. 어디서 왔는지부터 물어야지.”

. 그러니까 대체.”

사람들이 나를, 공연히 시간의 마녀라 부르는 게 아니지.”


그녀는 허공에서 손을 저어, 마치 주머니에서 꺼내듯 사과를 새로 집어 각란성에게 던져주었다. 각란성은 멍한 표정으로 사과를 들여다보다가, 유미디아의 눈치를 살피며 소매에 사과를 문질러 닦았다. 갓 나무에서 따낸 듯 싱싱한 사과였다.


둘째 황녀의 시강관이 되기로 하였다지? 그대의 인내심이라면 그 애의 망나니 짓도 어떻게 감당이 될지 모르겠으나, 그 애의 스승 삼기에는 그대가 아깝지.”

황공하옵니다.”

황공한 줄을 알면, 왜 그런 자리는 제 발로 찾아 들어간 건가.”

“......”

하마드리스 가의 공자를 만난 적 있나?”


유미디아는 가까이 다가오라는 듯 손짓했다. 각란성은 그녀가 어딜 가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이야기를 나누려는 것인지 몰라 머뭇거리다가, 그저 한 걸음만 가까이 다가갔다. 유미디아는 혀를 차며 그에게 다가갔다.


물었잖나. 마법사단장 하마드리스 대후 말고, 그 아들 쪽.”

, 그것이......”

얼마 전 성년식을 치르기 위해 이쪽에 왔을 터인데.”

잠시 뵙기는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그대가 똑똑하다고 꽤 칭찬을 하던걸.”

“.......”

그대가 쓴 논문이며, 지난번에 낸 국정 보고서 같은 것을 읽은 모양이야. 원래는 아직 관직이 없지만, 폐하께서 그를 총애하셔서 불러서 손수 이것저것 가르쳐 주시기도 하고, 마법사단장이 될 이니까 그 정도는 미리 배워 두어 나쁠 것이 없기도 하고.”

.”

그런 얼굴 할 것 없네. 마이렌 상 하마드리스는 허언같은 건 하지 않는 사람이야. 그가 똑똑하다고 하면, 똑똑한 게 맞는 게지.”

“......감사합니다.”

내게 감사할 것 없어. 난 그대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그녀는 성큼, 한 걸음을 크게 내밀었다. 그녀는 앞장서서 걸었고, 그는 머뭇거리다 멈추어 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명성대군 유미디아 아라스는 황상의 조카이자, 후사 후보 중에서 황상께서 가장 사랑하는 이라 알려져 있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양친을 여의고 고모인 황상의 배려로 입궐하여, 본래 부친께서 성년이 되어 별궁으로 나가기 전까지의 거처였던 북쪽 전각에 머무르고 있었다. 황족들의 고유 능력인 영력 자체가 강한데다, 어린 나이임에도 무리없이 고강한 마력을 운용하는 뛰어난 마도사이기도 한 그녀는, 사람들 사이에서 시간의 마녀라는 묘한 이름으로 불리곤 했다.


시간의 마녀라.


그녀의 힘을 본다면 누구라도, 인간을 넘어선 그 불가해한 힘에 두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을 테지. 그 역시 그랬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순간이라면, 그녀는 지나간 시간과 다가올 어느 순간들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그처럼, 그저 발 밑을 바라보는 것이 고작인, 한 걸음 한 걸음, 그저 벼랑 아닌 길이라면 밟아 올라갈 밖에, 다른 어떤 것도 꿈꿀 수 없었던 보통 사람과는 달리.


이봐, 각란성.”


그는 고개를 들었다. 유미디아는 몇 걸음 앞에서 뒤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줄 설 줄 모르는구만.”

?”

자고로 출세를 하고 싶으면 줄을 잘 서라고 했는데, 그대가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라네.”


잘 알고 있습니다, 대군 저하. 하온데, 그렇다면 소인은 어디에 줄을 서야 하겠습니까.


그 말을 삭이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소리죽여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순간 눈을 의심할 정도로, 그녀는 키가 작았고, 어깨도 아직 어린아이처럼 작고 둥글었다. 어쩌면 실제로도 그랬을 것이다. 시간의 마녀, 황제의 가장 총애받는 후계자, 철혈의 유미디아, 그런 수식어를 지워버리고 나면, 그녀는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소녀일 뿐이었으니까. 어디선가 희미한 꽃내가 나는 것 같았다. 각란성은 억지로 웃었다.


알기는 아옵니다만, 대군 저하.”

몹쓸 사람이로군. 아는 자가 그리 하던가.”

세상천지 다 둘러보아도 썩은 동아줄뿐인데, 소인이 무슨 수로 줄을 제대로 서겠습니까.”


따가울 정도로 똑바로 응시하는 형형한 시선에서 눈을 돌리며 각란성은 속삭였다.


무슨 말씀을 하고자 하시는 지 모를 만큼 어리석었다면, 차라리 마음이라도 편하였겠지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할 만큼 어리석었다면 애초에 그런 것을 묻지도 않았다.”

“......무슨 말씀이시온지.”

내게 설명까지 하라는 거냐. 모자란 것.”

하문을 하시옵소서. 혹시, 소인에게 무언가 기대하시는 것이 있다면.”

기대를 하고 싶어도, 그대가 그리 모자라니 어찌 기대를 할까.”


유미디아 대군은 혀를 차다가, 먼저 앞장서 걸어갔다. 뒤를 따르라 말한 것도 아니다. 어째서 어리석은 황녀를 섬기기로 작정하였느냐 질책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모자라다는 말 뿐. 여운국 각란성의, 실제보다 나이들어보이는 신중한 표정 위에 감추지 못할 당혹과 수치심이 떠올랐다.


황상의 지병이 점점 깊어지니, 굳이 다음 대를 도모하여 단숨에 권력의 중추로 뛰어오르기를 바란다면 고려할 수 있는 선택지는 셋이었다. 첫째 황녀와 둘째 황녀, 그리고 황상의 조카이지만 황녀들보다 더 뛰어난 이 어린 대군 저하. 이중 가장 유력한 이야 당연히 얼마 전 성인식을 치른 첫째 황녀로되, 각란성이 굳이 선을 댄 것은 그 누구도 다음 대의 보위를 차지하리라 기대하지 않은, 둘째 황녀였다. 어릴 때부터 제 언니와 동갑내기 사촌에 비교되며 주눅들고 한없이 비뚤어진, 아름답지만 앞뒤 가리지 않고 사고를 저지르는 어린 황녀. 다른 모든 학예관들이 거부하고 돌아선 그 자리, 한 달을 버티기만 해도 용하다는 그 망나니 황녀의 시강관 자리에 지원한 것도, 수업에 나오는 것은 고사하고, 공부하실 시각이라고 앞마당에서 시립하고 고하기만 하여도 난리가 난다 하는 그녀의 시강관 노릇을 하겠다고 나서, 마치 붙들고 늘어지듯 그녀가 제 말 한 마디를 들어 주기를 그저 묵묵히 기다리는 것은, 첫째는 그의 후원자가 그에게 기대하는 것이 바로 그 일이었고, 둘째는 그 누구도 황제의 재목이라 여기지 않은 그 소녀가 품은 분에 넘치는 야심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당신에게 걸지 않을 때 나는 당신에게 걸 것입니다.


그러니 언젠가는 제게, 그리고 제 등 뒤에 있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약속해 주셔야 합니다. 그것은 잃을 것이 없는 그이기에 할 수 있는 도박이었다. 누가 보아도 합당하고 번듯한 후계자, 혹은 혈연으로는 밀리지만 가장 총명하다는 대군, 그런 이들의 주변에서, 흔하디 흔한 갑남을녀 중 하나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희미한 별에 거는 것을 택하는 쪽이 나았다. 어차피 살아가면서 울 일은 많았고, 홀로 남을 수 밖에 없는 일도 그만큼이나 많았다. 일면 그렇게 무모해보이기까지 하는 그 선택은, 부족함 없이 갖출 것은 다 갖추어 태어난 이들은 결코 알 수 없을, 가난하고 척박한 중륜에서도 하층민의 아들이었던 그에게는 뼛속 깊이 새겨져 있는 어떤 뒤틀린 감정들이 빚어낸 결과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후회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자신을 꿰뚫어보듯 바라보는, 그 흔들림없는 눈동자를 마주하기 전 까지는.


“.......저하.”


그는 들고 있던 사과를, 양 손으로 감싼 채 얼굴 앞으로 들어올렸다. 그렇다고 하여도, 저하께서는 옥좌에 오르실 뜻도 처음부터 없으셨지 않습니까. 사과를 던져주던 그녀의 웃음이, 그리고 지난 번 보았던 하마드리스 가의 젊은 공자의 모습이 머릿속에 아찔하게 떠올랐다. 바랄 수 없는 것을 감히 꿈꿀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꿈꿀 수 없는 것에 손을 내미는 그런 낭만 같은 것은 배우지도, 보고 들어 보지도 못했으니까. 관능적일 정도로 새빨간 빛을 띤, 차갑고 매끈한 사과껍질이 입술에 닿았다. 각란성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 사과를 한 입 베어물었다. 달콤한 한편으로 시리도록 새큼한 맛이 났다.

 

 

 

 

 

 

 

  

하마드리스 가의 젊은 공자는 빼어난 마법사였다. 그는 약관의 나이로 제국의 마법사단장인 자신의 부친을 능가한 젊은 천재였다. 단정하게 빗어내린, 하얀 뺨까지 흘러내리는 적갈색 머리카락, 반듯한 이마, 조금 마른 듯 하지만 하얀 뺨과 턱, 검은 대수포 사이로 들여다보이는 햐안 속저고리의 동정과 그만큼 흰 목은 언제나 청결하게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서 있는데도 어딘가 똑바로 서 있다는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그 청년은 올해로 스물 한 살이었다. 누구에게나 예의바르지만 말수가 적고 고고하여 다른 사람에게 쉽게 곁을 주지 않는 그 붉은 머리 청년이, 유독 대군의 곁에서는 안절부절 못 하더라는 이야기는 너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그러나 확실하게 퍼져나갔다.


답답한 작자로고.”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건, 대귀족가에서 은숟가락 물고 태어난 제 또래의 청년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편이 차라리 마음 편했다. 어차피 닿을 수도, 따라잡을 수도 없었다. 마법이라는 것이 수학의 논리를 실체로써 구현하는 것이라 해도,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기 위한 재능이라는 것은 분명 타고 나는 것이었으므로.


삼척동자가 봐도 알겠구만. 저하께서 저 좋아하는 것은.”


세상에는 노력만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런 것도, 아마 그러할 것이다. 처음부터 다 갖고 태어난 이를 부러워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 각란성은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 하마드리스 가의 공자와 자신을 견주어 보는 것 역시, 부질없는 미망일 뿐일 테니까. 그는 아마도,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는 병으로 쓰러지시며 졸지에 가장이 된 열 살난 사내아이의 막막한 절망같은 것을 알지 못하고 자랐으리라. 배가 고파 울부짖는 동생들을 달래고 또 달래다가, 끝내 혼자만이라도 살아남겠다며 옷가지를 챙겨 도망쳐나오는 그 참담함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허기진 몸으로 도망쳐 나와 나비에 홀린 듯 뒷산을 오르다가, 진달래 꽃무지에 코를 파묻고 마치 정신나간 염소처럼 그 꽃을 뜯어먹다가, 문득 집에서 배고파 우는 동생들 생각에 가슴이 막혀 뱃속에서 노란 물이 쏟아질 때 까지 억지로 무언가를 토하던, 그런 마음을 알 수 없을 것이다. 학교에는 갈 수 있었고, 학교 선생님의 도움으로 최소한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수속을 할 수는 있었지만, 그 뿐이었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쌀과 소금만이 아니었으니까. 다행히도, 성적이 좋고 성실한 가닥이 있어 그 지역의 유지, 대실 가문의 도움을 받게도 되었지만, 그 후원이 결국에는 몸을 팔고 인생을 저당잡히는 일이나 다름없었음을 각란성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야 알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대실 가문의 지원을 받아 학업을 마치고 관직에 출사한 다른 이들의, 찌들어버린 뒷모습에서 그는 자신의 앞날을 미루어 짐작했다.


그 하마드리스 공자는, 그런 것을 알 수 있을까. 이해는 할까. 그저 논문 몇 장, 보고서 몇 줄 속에서 채 감추지 못한 어떤 것들을, 그걸 나라고 인식하고 똑똑하니 아니니 제 멋대로 논평을 하는 것일 뿐이었겠지. 그저 날개가 크고 아름다운 나비 한 마리를 잡고 싶어 산을 기어올랐던 마음 같은 것을, 그 조차도 가질 수 없었던 슬픔을, 겨우 손에 넣었다고 생각한 순간, 그 나비가 화려한 인분의 파편만을 남긴 채 제 손 안에서 산산이 부서져버리는 그런 감정을, 그난 한 번이라도 이해해본 적이 있었을까.


그런 것을 이해받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대군의 곁에 얼씬거리는 이상, 그에 대한 관심을 아주 접어놓을 수는 없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런 것은 연모도 아니고, 집착도 아니며, 무어라 딱히 이름을 정하여 설명하기도 참 애매한 감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쓰였다. 사실은, 기회가 닿는다면 한 번 묻고 싶었다. 멀리서 한두 번 목도하였을 뿐이지만, 늘 칼로 자른 듯 반듯하고 단정한 사람이 대군 앞에서는 유독 평소의 침착함을 잃곤 하면서, 어째서 제 마음을 전할 생각은 아니하고 자꾸 도망칠 궁리만 하는 것인지를. 마음을 밝힌다 해도, 혼인을 청한다 해도, 하마드리스 가는 황실로서도 결코 마다할 혼처가 아니었다. 어차피 그 가문은 가장 강력한 마법사 가문이기 이전에 황실의 가장 가까운 친척으로, 이 나라가 개국한 이래 지금까지 수많은 황족들과 통혼하여 실질적으로 황실 다음 가는 혈통과 위상을 자랑하는 집안이니, 대군이 제 짝을 찾기에 부족함이 있는 집안도 아닌데도, 뻔히 마음이 있으면서 숙맥불변도 못하는 양 그리 도망치기만 하는 것이 이해는 가지 않았다. 모를 일이다. 멀쩡하던 사람이 대군 앞에서는 잔뜩 긴장하여서 말 한 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한 채 화난 표정으로 돌아서서 도망치듯 사라진다는 것을 보면, 그저 아직 나이가 젊어 요령이 없는 것일 뿐일지도.

사실 그가 신경을 쓸 만한 일도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여운국 각란성은 궁을 배경으로 귀공자들이 벌이는 어설픈 사랑놀음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자신이 가르치는 사고뭉치 황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시강관들은 얼굴도 뵙지 못하고 그대로 해고당하기도 하였다는데, 어떻게 황녀께서 한 달이나 버티고 선 변죽 좋은 놈의 얼굴이나 보자며 나오신 덕분에, 운이 좋게 독대를 청할 수 있었고 심중에 둔 말씀도 올릴 수 있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 옥좌라면, 손에 넣을 수 있도록 지근거리에서 그녀의 책사 노릇을 하겠노라고. 하지만 그 뿐이었다. 몇 번인가, 못 이기는 척 그녀의 유혹에 넘어가 얼우고 나오는 일도 있기는 있었지만,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사랑놀음이라 낮잡아 부르는 것 조차 민망한 일이었다. 그런 것은 그저, 결속을 위한 일이나 다름없었다.


덫에 걸리는 줄 알면서도 앞발을 내미는 어리석은 짐승처럼, 그런 주제에, 각란성은 자꾸만 대군에게 마음이 쓰였다. 황상에게 무례하게 군 타국의 대사를 반쯤 얼려버렸다거나, 폐를 얼려 질식시켜 죽였다거나, 바로 옆에서 한 말 가까이 피를 쏟고 죽었는데도 놀란 표정 한 번 지어보이지 않았더라는 흉흉한 소문을 여전히 달고 다니는 그 대군에 대해서만큼은, 자기도 모르게 신경이 쓰였다. 그런 것은 마음에 두고 있다거나 하는 우스꽝스러운 감정과는 다른 것이었다.


어쩌면 조금은 그녀를 걱정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차라리 쥐가 고양이를 걱정하지, 제 따위가 감히 황상께서 총애하는 대군 저하를 걱정한다는 것이 가소로웠지만, 이런 마음을 걱정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대체 무어라 불러야 할까. 그는 먼 발치에서, 마이렌 상 하마드리스 공자의 모습을 눈길로 좇는 대군의 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아예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닌 듯 한데 어찌 저러는지.


무엇이 그리 답답한지 몰라도, 그대만 할까.”

소인이 또 저하의 심기를 거스르기라도 하였사옵니까.”

아니, 그대의 혼담 이야기를 들어서.”


대군은 쉼터 앞마당에 새로 사과 묘목을 심는 것을 지켜보다가, 손등까지 내려오는 저고리를 손목까지 접어 올렸다. 새하얀 손등이 여름의 햇살 아래 투명할정도로 빛나 보였다. 각란성은 살집이 적은, 섬세한 손가락을 홀린 듯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별 일에 다 신경을 쓰십니다. 왕후장상의 혼담도 아니고.”

그대는 왕후장상이 아니라 해도, 자네 처 될 사람이야 이야기가 다르잖나.”

“......집안은 좋긴 하지요.”

중륜의 실질적인 지배자라 불렸던 대실 가문의 아가씨라니. , 그대가 무사히 학업을 마쳤던 것도 대실 가문 덕분이었던가. 하긴, 그렇다면 있을 법 한 이야기로군.”

소인이 무사히 학업을 마친 것이야 의무교육법 덕분이지요.”

은혜를 모르는 말을 하면 안 되지. 고등학교 까지야 그 법 덕분이었겠지만, 그대의 어머니 병원비를 대준 것이 그쪽이라고 들었는데.”

“......”

무엇보다도, 그대를 궁에 들여보낸 대실 가문에서 그대를 감시할 이를 붙이지 않았다고 보기도 어렵고. 서로서로 감시하는 사이들 아니었던가. 하긴, 소중한 조카딸을 시집보낼 정도라면 그대가 그 대실 가문에 퍽 미쁘게 보인 모양이로구나. 축하해도 모자랄 일이겠지.”

저하께서는.”


각란성은 쓰디쓰게 웃었다.


소인에게 관심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애초에 이렇게, 구중궁궐이라 하나 실질적으로는 하나의 작은 도시나 마찬가지인 이 궁에서, 자꾸만 마주칠 이유가 없는 분이었다. 북쪽 전각에 머무르는, 미성년의 대군이 그와 궤적이 겹칠 이유는 아무리 머리를 짜내어 보아도 둘도 많았다. 지나간 시간과 오지 않은 날들을 모두 아시는 분이라 하니, 그저 뭔가 내가 나중에 좋지 않은 일에 휘말릴 것 같아 미리 마음 쓰시는 게 아닐까, 막연히 생각할 뿐.


대실 가문이 두루두루 장학생을 키워 관직에 밀어넣으니, 언제 분에 넘치게 설치려 들지 몰라 지켜보고 있었다. 겸사겸사, 그대가 궁금하기도 하고.”

궁금하실 게 뭐 있습니까. 소인이 뭐 특출한 구석이라도 있어야지요. 혹시 저하께서 보신다는 그 미래에서, 소인이 뭔가 좋지 못한 일이라도 저지르고 다닌답니까.”

, 반쯤 맞았다.”

?”

그렇다면 어찌 할 텐가.”


대군은 돌연 차가운 얼굴로 되물었다.


그대가 미래를 보는데, 장차 그대의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누군가가 지금은 그대를 볼 때 마다 묘하게 설레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면 그대는 어찌 할 텐가? 그나마 지금 그대에게 호감이라도 있을 때 조금이라도 잘 해주는 게 낫다 보지 않겠나.”

?”

내가 본 앞날에, 그대가 있기는 있지.”


대군은 입술을 깨물었다 놓았다. 그녀의, 엷은 빛을 띠었던 입술은 금세 연지라도 바른 듯 붉어졌다가 되돌아갔다.


그런 것을 아는가, 한 번 정해진 앞날은, 적어도 그 큰 그림은 바뀌지 않아. 나는 앞날을 바꾸어 보기 위해 지금까지 별 짓을 다 해 보았다네. 황상의 밀명으로 미래를 보고, 이 나라의 앞날에 걸림돌이 되는 이들을 마법으로 살해한 적도 있었지. 하지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는가.”

어찌 되었습니까.”

자리가 사람을 만들더라는 것인지, 아니면 역사의 흐름이라는 것은 쉬이 손을 댈 수 없는 것인지. 그 후임자가 똑같은 짓을 하였네. 그나마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측은 하고 있던 상황이라 피해는 줄일 수 있었지만.”

“......”

이보게, 각란성. 사람들은 내가 황상의 총애를 받는다고, 황녀 저하의 경쟁자라고 말하고 있지만, 나는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좋으니 사람 좀 그만 죽였으면 좋겠네. 내 손에 직접 피가 묻지 않는다고 해서, 내 눈 앞에서 사람이 쓰러져 죽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내 손 끝에 전해지는 사람의 마지막 고동이라는 것까지 눈 감고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마법사라는 것이 그렇지. 지위가 높을수록, 황상의 가까이에 있을수록. 하물며, 국운을 읽고 미래를 보는 시간의 마녀가 그 앞날에 방해가 되는 이들을 해치우는 것이야.”

저하께서는...... 감당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감당하는 척이라면 할 수 있지. 나는 황상께서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그리 할 생각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고통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라네. 지금 내가 황상을 위해 감당하는 그 죽음들이, 내게 돌아올 반동을 생각하면 나는 잠자리에 누워도 발을 뻗고 잘 수가 없어. 언젠가 되짚어 돌아와 내 목을 조를 그 모든 것들을 생각하면, 가끔은 숨을 쉬어도 살아있는 것 같지 않을 때가 있지.


입은 웃고 있는데, 그 눈은 울먹이는. 안쓰럽고 처연하면서도, 동시에 더 이상 다가와선 안 된다는 경고와도 같은. 그 표정에 각란성은 그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마치 반짝이는 송곳처럼 가슴을 찔러 왔다.


내가 아직 만나지 못한 모든 날들을, 미리 피를 뿌려 놓고 한 걸음, 한 걸음. 그렇게 되밟아가는 마음은 어떠할 것 같은가. 그대라면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나.”


그 반짝임은 어쩌면 눈물이었을지도 모른다고, 각란성은 생각했다. 그녀는, 각란성이 어릴 때 잡고 싶었던 가장 날개가 크고 아름다웠던 나비와도 같았다. 상처입을 줄 알면서도 손을 내밀고, 감당할 자신도 없으면서 제게 기대시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할 테니까. 오히려 부서뜨리고 말 지도 모르니까. 각란성은 소매 자락을 신경질적으로 구겨쥐었다 펴며 겨우 대답했다. 아뇨. 대군은 웃었다.


난 그대가 그리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라 마음에 든다네.”

“......”

그대가 감당 못할 것을 못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서, 그 점 하나는 참 좋아하지.”

소인은 보통 사람일 뿐입니다.”

관에 출사한 사람이, 언제까지 스스로 소인이라 이를 텐가.”

“......”

나는 그대가 보통 사람이라 마음에 들어. 수와 논리를 읽고, 세상의 흐름을 회로처럼 읽어 어떤 일이 되게 하는 스위치를 찾고, 숫자로만 이루어진 차가운 세상을 밟아 가는 사람에게, 그게 얼마나 큰 동경인지 아는가.”

허나 그런 이유로.”


각란성은, 처음으로 심중에 끓어오르는 말을 막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런 이유로...... 저하의 곁에 서실 분은.”

마이렌 상 하마드리스.”


대군은 연붉은 입술로 중얼거렸다.


물론 그는 그런 것마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지. 하지만 그대는 또한 보게 될 것이야. 그런 것을 감당한다는 것이, 그런 시간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이를 사랑하고 나란히 걷는다는 것이, 누군가의 길을 잇고 누군가의 유지를 받들어, 그가 말한 내일, 또 내일만을 보며 살아간다는 것이, 어쩌면 평화롭게 학문에만 몰두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 한 고결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부수고 짓밟는지를.”

“......”

나는, 내가 그를 조금만 덜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주저치 않고 그에게 그 미래를 감당하라, 나를 사랑하라 요구하였을거라네. 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조금은 양심 비슷한 것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지. 나는 못 하겠네.”

저하.”


움켜쥔 손에, 손톱이 파고들었다.


날카로우나 무딘 압박감이 느껴졌다. 묻고싶었다. 어찌하여 이 모든 이야기를 소인에게 털어놓으십니까. 하지만 듣고싶지 않았다. 그 질문의 답이 가리키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날들의 이야기를, 어쩌면 이 아름답고 무모하고 용감하지만, 그 어깨에 걸친 대수포와 구군복을 벗어놓으면 그저 어린 소녀일 뿐일지도 모르는 유미디아 대군과, 평생을 대립해야 할 지도 모른다는 직감 때문일까. 절대로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지만, 그가 둘째 황녀의 심복이 되기로 결심한 이상 아마도 결코 한 편이 될 수 없을, 그 뒤틀린 인연을 손바닥 가득 새기듯 쥐어보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 이런 말은 하지 않는 편이 나을 지도 모른다. 영원히 가슴에 묻어, 차라리 그로 인해 하루하루 타들어갈지라도.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 있다.


저는......”

그만.”

저는 저하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유미디아 대군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각란성은 조금 전 심중의 말을 털어놓은 사람 답지 않게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잔뜩 독이 오른 어린 야수처럼, 그녀는 온 몸으로 살기를 드러내며 그를 향해 다가섰다. , 각란성이 뒤로 물러난 그 만큼을.


그대는 참으로.”

“......”

“......참으로.”

송구하옵니다. 소인이 제 주제를 모르고 그만......”

참으로 변화무쌍하여 볼 때마다 새롭구나.”

?”

내가, 이 모습을 몇 번을 보았을 것 같으냐.”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각란성은 그 말을 이해해보려고 애써 생각을 거듭하다가, 유미디아가 자신의 손목을 붙잡고 있는 것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털었다.


그렇게 싫으냐.”

“......”

그렇게 싫어서, 결국에는 죽여버릴 것이면서, 지금은 그렇게 사모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냐. 나는 그대가 하는 말도 행동도, 대체 어느 것이 진심인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저하?”

여운국 각란성, 나는 그대가 참으로 밉다.”


눈을 깜빡였다. 조금 전, 손목을 감싸쥐었던 그녀의 온기가 아직도 남아있는 듯 했다. 각란성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서늘하고 선명한 시선을 그대로 받아낼 듯 마주 바라보았다. 가슴 속에서부터 어떤 감정이 천천히 끓어올랐다. 그 말은, 하지 않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평생의 한이 되고 말았을 거다. 사람의 운명과 하늘의 천시가 꼬이고 또다시 뒤꼬여, 언젠가 그녀와 자신이 적이 되고, 결국에는 제 손으로 그녀의 운명을 끊어버리는 그런 날에, 결국 한 순간의 충동에 못 이겨 그녀에게 속삭였던 그 말은 밤새 가슴을 쥐어뜯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인은 저하를.”

나는 그대가, 정말로 밉다. 왜인지 아느냐.”

저하.”

이렇게 서 있는 내게는, 지금 이 시간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다른 시간, 다른 날들. 내게 다가올 그 언젠가의 최후까지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돌리듯 그대들을 시험해 보았다. 다시 돌이킨다면, 어떻게 달라질까. 무엇이 바뀔 것인가. 아무리 손을 써도, 미래는 변하지 않아. 선택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 변곡점을 넘어서는 순간 미래는 결정되어버린다. 여운국 각란성, 나는 지금 그 변곡점 직전에 서 있지. 이 순간을 몇 번이나 되새기고 또 되새겨 보았다. 무엇이 바뀔까. 여기서 무엇을 하면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한 순간, 열 일곱 살의 소녀가 아니라, 일곱 살의 어린 아이, 스물 일곱 살의 성숙한 여성, 그리고 그보다는 조금 더 나이 들었지만, 결코 서른 일곱 살은 되지 못하였을 유미디아 대군의 모든 모습이 각란성의 눈에 비치는 듯 했다. 각란성은 눈을 의심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을 때, 그의 눈 앞에 서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눈물을 글썽이는 열 일곱 살의 유미디아였다.


어떤 사람은 밤 하늘의 별처럼, 몇 번의 시간을 되돌려도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어떤 이는 나비처럼 끊임없이 앉은 자리를 바꾸지만 정말로 무언가를 바꾸어내기에는 한없이 부족하기만 할 뿐.”

저하.”

그대를 탓하는 게 아니다.”

숨결이, 낡은 저고리 너머 어깨에 닿았다.

그대를 비난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미워하는 것이 내 잘못은 아니잖느냐.”

“......”

그 언젠가의 앞날에서, 나는 그대에 의해 죽는다. 그대가 둘째 황녀를 선택한 순간, 그대와 나는 결코 한 편이 될 수 없을 것이니. 설령 그대가 내 말을 듣고 어떻게든 앞날을 바꾸려 한들, 그대가 빠져나올 수 있겠느냐. 그대는, 이미 둘째 황녀와 중륜 대실 가문을 잇는 연결고리가 되었으니, 그대가 빠져나오려 마음먹는 순간 그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테지.”

소인이 죽으면, 그러면 저하께서는 어찌 되시옵니까.”

말했잖느냐. 어리석은 것.”

?”

한 번 정해진 앞날은, 그 큰 그림만은 바뀌지 않는다 하였잖느냐. 내가 앞날을 바꾸기 위해 사람을 죽여도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올라 같은 짓을 하였듯이, 그대가 죽으면, 그대의 후임이 나를 죽이겠지. 그대의 후임이 누가 될 지는 몰라도, 그대와 내게 연민도 없고 빚진 것도 없으니, 적어도 죽을 때 단숨에 아프지 않게 끝장을 내라는 부탁조차 할 수 없지 않느냐.”

저하의 죽음이, 그렇게 큰일이옵니까.”

뭐라고.”

저하의 죽음이, 저하를 죽이고자 하는 이들을 줄줄이 죽여 없애도 지워지지 않을 만큼 큰일이냐는 말이옵니다. 시간의 마녀라 불리는 저하이시니, 소인을 죽여 없애고, 그 다음에 저하를 노릴 이를 또 없애고, 그렇게 계속 없애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언젠가는, 피도 눈물도 없이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가 되어서, 비참하게 죽게 되지 않을까?”

증거가 없잖습니까.”

마법으로 사람을 죽일 경우, 시전자보다 마력이 강한 마법사는 그 흔적을 되짚을 수 있거든. 마법은 만능이 아니야. 내가 상당히 강하여, 어지간한 마법사는 그 흔적을 짚어낼 수 없을 뿐이지. 나랏일이기도 하니 누군가 눈치를 채더라도 황상께서 덮어 주실 것이고. 하지만 다음 대에도 그게 가능할까? 그대가 섬기는 둘째 황녀라면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아이고, 첫째 황녀께서도 나를 곁에 두시기는 하지만, 그분의 측근들은 역시 나를 못 미더워하지. 황상의 총애를 받는 조카따님이란, 사실 적통의 후계자에게는 꽤나 번거로운 상대일 수밖에 없거든. 내 진심과는 상관없이 벌어지는 일들이지. 짜증스럽게도.”


대군은 빙글, 뒤로 돌았다. 마치 나비가 춤을 추듯, 그녀의 긴 치맛자락 위로 나비 수가 놓인 파란 옷고름이 팔락거렸다.


그대를 죽이고, 또한 내가 삶을 택한다면, 그건 내 세계 전부를 무너뜨리는 일이 될 거다. 반역을 저지르고, 그대의 뒤를 이을 수많은 이들을 모두 내 손으로 죽여 없애고. 그때는 내 손으로 마이렌 상 하마드리스까지 죽여야만 하겠지. 그는 대의를 저버리고 감히 살아남기를 바랄 자가 아니니, 나를 죽이거나 내 손에 죽기를 바랄 테니까.”


가슴에서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


아직 어른도 채 되지 못한, 열 일곱 살의 소녀는 차분하게 웃으며 제 죽음을 이야기한다. 도래하지 않은 내일을 이야기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제 손으로 죽이지 않기 위해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게 될 날들을 웃으며 속삭인다. 몸을 팔 듯 둘째 황녀에게 안기고, 한편으로는 혼담이 오가는 가운데, 불가능한 소망임을 뻔히 알면서도 혼란스러운 가슴 속에서 겨우 건져낸 한 가닥의 본심을 겨우 꺼내놓은 청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한 채 머리를 숙였다. 바닥을 딛고 선 발 끝이 흐릿했다. 눈물을 손등으로 씻어내는데, 소녀의 손이 뺨에 닿았다.


울지 마라.”

“......”

덜 떨어진 것. 중륜 제일 가는 가문에 장가 들게 생겼으면서, 이렇게 덜 떨어진 놈인 줄 알면 혼담이고 뭐고 없을 거다. 울음 그쳐라.”

저하.”

나는 그대도, 마이렌도, 내 손으로 해치고 싶지 않다.”


달콤쌉싸름한, 그러나 독과 같은 속삭임이 닿았다. 그의 뺨에 닿은, 그녀의 손처럼.


그러니 그대들은 나를 나누어 가지면 된다. 마이렌은 내 삶을 가질 것이고, 그대는 내 죽음을 가질 것이니.”

그 말씀을, 제가 멋대로 이해하여도 되겠습니까.”

아니.”


유미디아 대군은 언제나처럼 차게 웃었다. 조금은 곤란하고, 조금은 한심하다는 듯, 그리고 거짓과 진실이 반반씩 느껴지는 그런 웃음이 그녀의 입가에 떠올랐다.


나는 그대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 어리석은데다 주제까지 넘어서.”

 

 

 

 

 

 

 

 

저하.


희미한 꽃내 사이로 쌉싸래한 풀 내음이 났다. 마치 온갖 풀꽃을 뒤섞어 약초탕이라도 끓여낸듯한, 그런 묘한 향기에 각란성은 눈을 떴다. 잠시 쉬었다가 간다는 것이, 그만 깜빡 잠이 들고 말았나보다. 고작 몇 시간의 회의에 피로를 느낄 만큼, 그는 나이가 들었다. 그리고.


모처럼 별난 구경을 다 하였소.”


열 다섯 난 소녀가 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살기에 가까운 시선을 품은 채로.


찔러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은 대내상께서 이런 데서 졸고 계신 것을 다 보고.”

송구하옵니다, 전하.”

당연히 송구해야지요. 오늘 아침에도 내 식사에 또 독이 들어 있는 것을, 미처 모르고 기미하던 여관이 그만 죽고 말았는데, 대내상께서는 팔자 좋게 낮잠 주무시고 계시니.”

남궁에 그런 일이 있었사옵니까.”

모르는 체 하면 된다 여기는 모양이지요. 대내상께서는 이 나라의 신하가 아니라 적영궁의 신하나 다름없는 분이시니. 제발 적영궁에 그리 이르시오. 이젠 좀 참신한 방법을 쓸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언제까지, 나 하나 죽이자고 애먼 아랫사람들을 줄초상을 낼 작정이랍니까.”


세월이란 무서운 것이다. 홍안의 젊은이었던 그가 어느덧 쉰을 바라볼 만큼 나이 먹는 동안, 이곳 황궁에서도 수많은 삶과 죽음이 지나갔다. 선황께서 돌아가시고, 첫째 황녀께서 즉위하시고, 그분이 다시 두 황녀를 생산하시는 동안, 각란성은 계속 승차를 거듭하여 마침내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 불리는 대내상의 자리까지 올라갔다. 둘째 황녀께서는 별궁인 적영궁을 거처로 받고, 그 아비가 누구인지 모를 두 아이를 낳았다. 그녀는 제 스스로 옥좌에 오르는 대신, 제 아이들 중 하나를 다음 황제로 즉위시킬 생각으로 계속 각란성을 채근하고, 또 적통의 황녀들을 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잔 수작들을 부리고 있었다. 기미관들이 있고, 첫째 황녀의 곁에는 그녀의 스승이 된 하마드리스 후작이 지키고 서 있으니 어차피 밥에 독을 푸는 정도로는 해치는 것은 고사하고 화풀이조차 되지 못할 것이라고 몇 번이나 아뢰었음에도.


그래도, 뻔히 아는 일이라 하여도, 예 그렇습니다 하고 순순히 머리 숙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리 고변한들 적영궁과 그는 이미 운명을 같이 하고 있었고, 그에게는 정해진 길 대로 혼인한 대실 집안의 아씨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이들이 있었으므로. 쉬이 거역할 수 없는 상황과 시운에 떠밀렸다고 애써 마음속으로는 변명해 보았지만, 그는 황제 시해 작전을 세워 실행에 옮겼고, 그 과정에서 유미디아 대군은 황제를 대신하여 목숨을 잃었다. 남편과 네 살 난 아들을 남긴 채로. 그 슬하의 아들을 데리고 낙향했던 하마드리스 후작은, 세 해 전 다시 돌아와 첫째 황녀의 보호자로서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적영궁에서 사주하였다는 증거는 없지 않습니까.”

일을 키우지 않고자 덮는 것과 증거가 없는 것은 다르지요.”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좀 더 조심하라 적영궁에 말씀 아뢰겠습니다.”

하지 말라고 전하십시오. 나도 내 이모 되시는 분을 내 손으로 없애버리기는 아무래도 껄끄러우니.”

소인이 뭘 어찌 할 수 있겠습니까. 적영궁 마마와 전하의 일이라 하여도 결국은 집안 문제인데, 제가 감히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을요.”

작게 보면 집안 싸움일지 모르지만, 그 실상은 다음 대 보위를 노리고 적통 후계자를 살해하려 모의하는 게 아닙니까. 대내상께서는 적영궁을 위해서라도 좀 상황을 거시적으로 보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유미디아 대군에게는 종질이 되는 첫째 황녀는, 올해 열 다섯 살이었다. 신기할 정도로 대군을 많이 닮은 그녀는, 미래를 보는 힘은 없었지만 심지가 굳고 강인한 성격이라 제 어머니와는 또 많이 달랐다. 그녀를 볼 때 마다, 각란성의 측근인 몇몇 어리석은 이들이 적영궁의 권세에 호가호위하여 황상께 무례를 범했다가, 아직 어린 아이인 줄 알았던 첫째 황녀에게 혼쭐이 나거나 더러는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도망치들 돌아올 때 마다, 각란성은 유미디아 대군의 그 말을 새겨 보는 것이었다. 길을 잇고 유지를 받들어 마침내 소중하게 키워낸 내일. 이미 죽어 세상에 없는 이의 희망과, 남아있던 사람들의 절망과 눈물을 받아 자라난 것 같은, 독약으로 벼린 얼음칼 같은 아이. 그녀는 각란성을 바라보다가, 눈을 찡그렸다.


그러고보니, 저하라고 불렀는데.”

“......”

누굴 보고 그런 말을 한 겁니까?”

실언일 뿐입니다, 잊어 주십시오.”

모른다, 잊어라, 그런 말이 다가 아니라고 하는데도.”

송구하옵니다.”

그대는 밤낮없이 송구하기만 하다가 죽을 자요. 대내상, 난 대내상이 참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똑똑하다는 자가 어찌 그러고 삽니까. 답답하지도 않습니까.”


그녀는 가슴 앞에서 팔짱을 끼며 고개를 돌렸다. 입은 웃고 눈은 살기를 띤 채로. 그 모습이, 많이 비슷하고 많이 다르던 누군가를 닮아, 각란성은 조금은 쓰라린 기분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또 무슨 못된 생각을 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닙니다.”

아니기는 뭐가 아닙니까. 그대가 보고 있으면, 이번에는 또 어떤 식으로 날 죽여 없앨 궁리를 하고 있을까, 그 생각밖에는 아니 듭니다.”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전하.”


그 씁쓸한 감정 속에서 희미하게 달콤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가 던져 주었던, 새큼하고 싱싱하던 사과의 향기. 각란성은 황녀의 어깨 너머 보이는 사과나무를 바라보았다. 그때 대군이 시간의 틈에서 따들어 그에게 던져준 사과는, 어쩌면 저 사과나무에서 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에는 아직 심지도 않았던, 그 사과나무. 그 자리에서 서서 이미 지나간 날들과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바라보았다는 대군은, 어쩌면 지금 이 순간마저 지켜보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각란성은 사과가 익어가는 사과나무를 바라보다가, 성큼 그 쪽으로 다가섰다.


전하.”

“......?”

전하께서는, 사십시오.”

, 물론이지요. 그대나 적영궁이 다 무너지고 비참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꼴을 다 보고 나서도 오래오래 살아남을 겁니다.”

, 그리 하십시오. 부디.”


각란성은 황녀를 향해 웃어보이며 사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가 따려던 사과는, 어째서인지 사라져 있었다. 누군가가 그의 앞에서 낚아채어 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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