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해망재 페라리

2014.05.01 00:2205.01

우리 부모님이 제일 기뻐하셨던 건, 내가 삼성에 들어갔을 때였어요.”


테이블 위에 놓인 아이폰과 펜마이크가, 남자의 음성을 잡아내기 시작했다.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독보적인 기술을 개발한 남자. 인간의 삶을 한단계 진화시켰다는 스마트 디바이스의 시대를 넘어, 마침내 인공지능이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이모셔널 디바이스의 시대를 열어낸 남자. 그 기술로 한때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마크 주커버그가 차지했던 왕관을 스스로의 힘으로 대관한 남자는, 삼성 마크가 새겨진 펜마이크를 손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웃었다.


거길 그만뒀더니 미친놈이라고, 정말 죽일 듯이 그러시더라고요.”

솔직히 말해서 거기야 다들 부러워할 만한 직장이긴 하죠.”

그래요?”


남자는 빙긋 웃다가, 내가 오해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바로 덧붙였다.


아니, 거길 부러워하는 게 이상하다는 건 아니에요. 나도 분명히, 거길 동경했던 시기가 있었고. 실제로 노력해서 거길 들어갔고.”


나이에 비해 일찍 성공한 사람은 보통 아무리 신경을 써도 무례한 구석이 남아있기 마련인데, 남자는 젠틀했다. 내가 무시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자꾸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그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고, 나는 그때의 이야기를 좀 더 듣고싶다고 했다. 그는 손가락 끝을 서로 엇갈리며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졸업 전에 취업이 확정되기까지 했으니까, 주변에서 부러움도 많이 샀어요. 하지만 합격발표를 듣기도 전에 깨달은 거죠. , 난 이건 아니구나. 이건 내가 정말 원하던 게 아니구나.”

그럼 왜 거기서 1년이나 근무하셨던 거예요?”

왜겠어요?”


남자는 웃었다. 나는 남자의 이력을 다시 들춰보았다. 남자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삼성에 들어갔고, 1년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고 나왔다. 사표를 내고 두 달만에 9급 공무원 공채시험에 합격했지만, 공무원이 되지는 않았다. 사실 아무리 보아도 이 남자가 어딘가의 동사무소에서 등본을 떼어주는 모습은 상상할 수 없었다.


남자는 스물 여덟 살에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알고리즘을 만들어냈다. 대학 동기와 함께 사업을 시작했지만 곧 실패했고, 기술마저 대기업에 빼앗길 뻔 했다. 사채를 썼고 조폭들에게 쫓겼다. 어지간해서는 갚을 수 없는 돈이었다고 했다. 함께 사업을 하려 했던 대학 동기는 남자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지방의 적당한 회사에 입사했다. 사생활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는 법이 없어, 기자들 사이에서는 사업가인데도 무슨 연예인처럼 신비주의 노선을 걷는다는 비아냥도 듣고 있었지만, 어떻게 그 암담한 시기를 지나올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었다. 오죽하면 증권가 찌라시 쪽에는, 남자가 그 무렵에 몰래 장기매매를 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신장 하나와 간의 절반을 떼어냈다고. 젊고 정력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약 없이는 단 며칠도 버틸 수 없는 몸이라는 소문도 꾸준히 돌았다.


들어올 때 봤어요? 내 차.”

, . 스포츠카요. 멋있던데요.”

페라리.”


페라리. 그렇지, 페라리. 스포츠카 하면 떠오를 만큼 유명한 그 브랜드를 바로 떠올리지 못하다니. 머쓱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한 해에 육천 대밖에 생산하지 않아요. 그렇게 유명한 차인데도, 아무나 손에 넣을 수 없는 차라는 거죠.”

사장님의 드림카셨나봐요.”

?”

보통 이만한 회사 사장님이라면......”

그렇죠, 까만 대형차. 리무진 같은 것. 근데 난, 저 페라리가 좋았어요. 엔진에서부터 자동차의 도장, 아주 작은 손잡이까지 한 공장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전 생산공정을 다 거치는 차. 장인정신과 테크놀로지가 만난 명품. 엔진 소리부터 달라요. 혹시 페라리의 엔진 소리를 들어본 적 있어요?”

레이싱 경주할 때 같은 소리...... ?”

맞아요. 사실은 페라리가 레이싱 카로도 많이 활약하니까.”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울부짖는 야수같기도 하고, 벌떼들이 몰려드는 소리같기도 해요. 누구라도 한 번 들으면 잊어버릴 수 없는 그런 소리죠. 맞아요. 꿈이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그러게요, 정말 근사하던걸요.”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슬쩍 의자를 뒤로 빼며 통유리로 된 사장실 창문 쪽을 바라보니. 눈부신 햇살 아래 커다란 루비처럼 반짝이는 새빨간 스포츠카가 저쪽 담장 아래에 자리잡고 서 있었다. 남자의 입가에 아마도 자부심으로 해석해도 좋을 듯한 미소가 스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그런 미소를 지을 만한 자격이 있었다. 그건 그 남자의 왕관이었고, 적토마였으며, 그의 발 밑에 놓인 영광스런 레드카펫이었다. 어쩌면 힘겹게 싸우며 지내온 이십대에 대한 보상일수도, 삼십대가 되어 마침내 차지한 부와 명예에 곁들이는 트로피일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남자가 중얼거렸다.


난 한 번도 저걸로 제 성능을 다 해서 달려본 적이 없어요.”

?”

아무리 엔진이 좋아도, 우리 나라에서는 끌고 달릴 만한 데가 마땅치 않아요. 가끔 트랙에 끌고 나가긴 하지만, 그게 다예요.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데, 달릴 수가 없는거나 마찬가지죠. 절름발이를 만들어버린 거나 다름없어요. 남들이 선망의 눈길을 백날 던진들, 저놈은 도로 위에서는 마티즈랑 비슷한 속도로 달리는 거예요. 미친 거죠. 못할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유리창에 손을 대고 자신의 꿈이었다는, 이질적으로 생긴 날렵한 스포츠카를 내려다보았다.


저놈을 볼 때마다, 제 부모님 생각을 합니다.”


나는 아이폰과 펜마이크가 남자의 목소리를 제대로 잡아내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되물었다.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남자는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커피잔이 바닥을 드러내고, 차를 한 잔 더 청해 마시도록, 그는 손가락을 얽었다 풀었다 하기를 반복했고, 나는 아이폰의 메모리가 바닥나지 않을까 마음이 조급해졌다. 몇 시간 정도는 끄떡없이 녹음하고도 남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얼마나 기다렸을까.


우리 아버지는 중학교밖에 못 나오셨어요. 철물점을 하셨는데, 보일러도 수리하고, 겨울에는 막힌 수도관도 뚫으러 다니고. 그것만으로는 먹고 살기 힘드니까 어머니가 보험 일을 하셨죠.”

자수성가 하신 거네요.”

그럴지도요.”


남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공부는 곧잘 했으니까. 사실은 과학고등학교에 가고 싶었어요. 거길 갔다가, 카이스트나 그런 데 가면 학비가 공짜라고 그랬으니까, 그런 데 가서 학자가 되고 싶었는데, 어머니도 아버지도 학교 선생님도 그런 것에 대해 정보가 너무 없었죠. 요즘 같으면 인터넷이 있었겠지만, 그땐 그것도 아니었고.”

그래도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하신 것으로 아는데요.”

아아, . 모의고사 점수에는 자신이 있었고. 실제로 연합고사도 잘 봤어요, 늘 버스 타고 학교 가는 길에 창문 밖으로 보이던 학교였으니까, 그래도 좀 만만하다 싶은 게 있었죠. 그런데 막상 들어가 보니 만만하질 않았어요. 공부가 문제가 아니었죠. 만화 꽃보다 남자 알아요?”

드라마는 봤어요.”

거기 나오는 여자애가, 서민인데 부잣집 애들 다니는 학교 들어가서 처음에 왕따 당하고 고생하잖아요. 그렇게 당한건 아니지만, 아주 다르진 않았어요. 예를 들면 봄에 소풍을 가는데, 나만 혼자 시장표 비메이커를 입고 가는 거예요. 우리 반 애들은 다들 게스나 스톰이나 리바이스를 입는데. 다들 나이키 에어조단 농구화 그런 걸 신고 다니는데, 나만 혼자 프로스펙스, 농구화도 아닌 그냥 운동화 신고. 그런 것에 기죽는 게 싫었어요. 여자애들이나 그럴 줄 알았는데, 내가 그렇게 못나게 구는 게 그냥 싫었고, 비참했고. 난 그런 가게가 있는 줄도 몰랐는데, 반장이랑 공부 잘하는 그룹 엄마들이 애들 모아서 밥먹는데 나도 성적 좀 잘 나온다고 불러서 갔거든요. 집에서 먹든가, 잘하면 고기부페 같은 데 데리고 가 주려나 하고 따라갔는데 스카이락이나 씨즐러 같은 데 가는 거죠. 바닥이 나달나달하게 닳아빠진 운동화를 신고 있는데, 누가 그거 눈치챌까봐 어깨도 못 펴고 있었어요. ......그때 가격표 보고 잔뜩 쫄았던 생각이 지금도 가끔 납니다.”


남자는 차분하게 말했지만, 가끔 아직도 속에서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다스리는 듯 말을 멈추었다.


어려서부터 똑똑하다, 수재다. 그런 말은 많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거기서의 내 포지션은, 그거죠. 공부 잘 하는 가난한집 애. 다른 애들에게 동기부여를 해주고, 추격당하는 동안만 가치를 인정받는. 사냥감 같은 것이었어요. 몇몇에게는 추격당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내 자리를 지켰고, 수능을 봤죠. 하필 그때 IMF가 터졌어요. 집에서는 대학에 가지 말라고 했고...... 공대에 가겠다고 했더니 아버지가 그러시는 거예요. 보일러 고치고 수도관 고치는데 대학 졸업장 같은 것 없어도 된다고. 괜히 공대 가서 헛바람만 들어와서 험한 일 안 하려고 든다고.”

보통 한국 부모님들하고는 많이 다르셨네요.”

제 중학교 때 친구들 부모님들은 대충 다 그러셨어요.”


남자는 아직 마흔 살도 되지 않았다. 서른 여섯 살. 나보다는 다섯 살이 많았다. 그러니 이건 세대의 문제가 아니었을 거다. 남자의 고등학교 친구들, 대학교 친구들이 아니라, 하필 중학교 친구들 역시 비슷한 말을 들었다는 것은, 그가 그동안 떳떳하게 밝혀 말하지 않았던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와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으로 이어졌다.


김 기자님.”

.”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김 기자님도 그냥 솔직히 물어 보셔도 됩니다. 다들 궁금해 하는 그것 말이지요.”

“......어떤 것요.”


아뿔싸.


세상에 어디 호락호락한 인터뷰이가 없다더니, 매끈하게 예쁜 얼굴에 캐스팅 운까지 뒤따라 그야말로 벼락 스타가 된 몇몇 셀럽들과 인터뷰를 할 때의 느껴지는 피곤함과는 또 다른 압박감이 느껴졌다. 이 젠틀한 남자는 내 생각보다 훨씬 예민한 사람이다. 모르긴 몰라도 혼자 기억을 다듬다가 뭔가 스위치가 잘못 눌리기라도 한 모양이지. 정중해 보이는 얼굴 뒤로, 뒷골목에서 초라하게 살아가던 어린 그림자를 깊이 깊이, 새어나오지 않게 꾹 눌러 숨긴 채, 그는 입가를 움찔거렸다. 그는 멀쩡한 듯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내게 말했다.


내 뱃속에 신장이 몇 개 있는지, 다들 궁금해 하던데요.”

글쎄요......”

설마 김 기자님 같은 분이, 소위 증권가 찌라시 같은 것도 못 들어보셨을 것 같진 않고.”

저희는 증권가 찌라시가 아니니까요.”

하나예요.”

?”

하나라고요.”

저기......”

사람들이 생각하는 게 맞아요. 내 뱃속에 신장은 하나밖에 없고, 간은 반 토막이 났어요. 지금은 어느정도 재생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술 한 모금 마실 수가 없죠. 범죄 피해자라면 범죄 피해자인 거고, 불법이라면 불법이겠죠. 하지만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고,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더라도......”


남자는 후회하지 않겠다는 듯 말하다가 말을 멈추었다.


괜찮으세요?”

뭐가 말입니까.”

이거 오프 더 레코드예요?”

특종 원하신 것 아니었어요?”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처음부터 사채를 쓴 건 아니었어요. 2금융권 같은 데서 빌렸는데, 그 무렵에 저축은행들이 좀 망했거든요. 그때 흘러간 채권이 어깨들에게 넘어갔어요. 찾아갔죠. 난 이 돈 못 갚는다. 배 째라고 그러는 게 아니라, 난 정말로 갚을 능력이 없다. 그 친구들도 돈 받아내는 데는 뭐가 있는 사람들이에요. 프로죠. 우리 집에 가 봤는데 알량한 반지하 전셋집이고, 전세자금이라도 빼서 아들 살려야 하지 않느냐고 협박한 모양인데, 안 먹혔죠.”

......”

현명하게 대처하시긴 했지요. 그렇게 되었으니 간을 떼자고 하더군요. 돈 되는 게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별다른 선택지도 없었죠. 난 어깨들에게 잡혀 있었고, 거기서 나온들 돈을 마련할 방법도 없었으니까. 70% 떼고, 신장 하나 떼고, 골수도 좀 뽑고. 그리고 거기서 입원비 제하고. 나중에 그 조폭놈이 그러더군요. 보통은 아들 목숨 두고 협박하면 울기라도 하는데, 찔러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이 구는 것 보니 불쌍해서 이걸로 봐 줬다고. 불쌍해서 봐 주지 않았으면 글쎄, 살아있기 어려웠을 것 같지 않나요.”


인터뷰를 따는 것만으로도 특종 감이라고 했지만, 이건 진짜였다. 그렇지 않아도 잡스나 주커버그가 그랬듯, 지금 전세계의 이목을 모으고 있는 남자였다. 남자가 그동안 숨겨왔던 과거 이야기. 가난한 동네, 수재 아들을 대학에 보내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던 불우한 집안, 아름다운 미래 밝은 내일을 이야기하며 희망을 주기에는 절망이 더 컸을, 남자가 지닌 재능의 가치를 알아볼 도리조차 없을 만큼 무식하고 못 배운 부모님, 작은 성공과 가혹했던 실패, 그리고 그의 뱃속에 지금은 하나밖에 안 남은 신장까지. 이건 최고였다. 현실만큼 드라마틱한 건 없다더니, 그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 죽을 고생만 하던 소년이 자수성가하여 자수성가하여 세계를 주름잡는 CEO가 된 성공 스토리. 이게 진짜지. 이런 이야기는 언제나 먹히는 법이다. 실패와 고생담은 언제나 성공한 사람의 인생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빛내주는 최고의 스키다시였다.


나중에 겨우 목숨만 붙어서 풀려났어요. 그 와중에 채권은 돌려받았죠. 혹시라도 나중에 딴 소리 할까봐. 집에 돌아갔는데, 문도 안 열어주더군요.”

가족들이요?”

부모님이요. 집에는 남동생도 하나 있었는데, 남동생은 그런 조폭 돈이나 쓴다고 손가락질하고, 아버지는 제가 집으로 돌아오면 다시 조폭들이 올 거라고, 동네 망신이고 가게 문 닫을 일 있느냐면서 다시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하시고. 그랬지요.”

어머니는요.”

어머니는....... 글쎄요. 따지고 보면 어머니는, 그래도 절 늘 걱정하시긴 했어요. 장남이니까. 늘 제게 말씀하셨어요. 넌 내 전부다, 넌 꼭 성공해서 엄마한테 효도해야 한다. 넌 뭐든지 할 수 있으니까, 꼭 의사나 판검사가 되어서 엄마를 기쁘게 해 줘야 한다.”

“......일단 아까 이야기로 돌아갈까요?”

부모님요?”

. 아까 아버님께서 대학 가는 것을 반대하셨다고.”

.”

왜 그러셨을까요...... 아드님 재능을 좀 더 키워주시고 기대해 주셔도 좋았을텐데. 그때에도 공부 잘 하셨잖아요. 고등학교도 좋은 곳 나오셨고.”

아버지가 보셨던 세상이라는 게, 그게 전부였으니까요.”


잘하면 자서전을 낼 수 있을 지도 모르지. 이쪽 계열 사람들은 아무리 똑똑해도 글솜씨나 말솜씨까지 훌륭한 것은 아니니까, 괜찮은 대필을 붙여서. 아니면 아예 인터뷰 대담집 형식으로 책을 내도 괜찮고. 나는 그의 단정한 얼굴이 담긴 표지 위에 그의 이름과 내 이름이 함께 새겨진 대담집 같은 것이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코너에서도 제일 앞쪽에서 당당하게 빛나는 모습을 상상하며 침을 꼴깍 삼켰다.


아버지는 끝까지 반대했어요. 그냥 보일러 수리를 배우라고. 저는 1학년 첫 학기 등록금만 대 주면, 그 이후는 알아서 하겠다고 했어요. 입학한 다음에야 과외라도 뛸 수 있고. 그나마도 절반은 장학금을 받아서 그 반만 마련하면 되었는데. 정말 대학만은 가야 할 것 같아서 아무리 애를 써도 부족했는데, 어머니가 부족한 만큼을 구해 주셨어요. 정말 기묘한 건, 나중에 남동생이 대학 갈 때가 되니까 아버지가 둘째 대학 보내야 한다고 어디서 돈을 구해 오셨더라고요. 그땐 정말 마음이 아팠죠. 많이.”

지금의 성공은 어머님 덕분이네요.”

글쎄요.”


남자는 내 쪽을 향해 돌아섰다.


똑똑하다고 칭찬은 해 주셨어요. 넌 커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엄마 아빠 호강시켜 줘야 한다는 말씀도 꼭 하셨고요. 어머니는 고생을 많이 하신 분이시죠. 하지만 말입니다, 그 훌륭한 사람이라는 건 진짜 몇 안 되는 선택지 속으로 걸어들어가라는 말이나 다름없었어요. 의사가 되거나, 법대에 가서 판검사가 되거나. 그도 아니면 고시를 보거나. 그만한 건 아니라도 대기업에 들어가면, 그래도 동네 찜질방에서 다른 아주머니들 기 좀 죽일 수는 있지요. 그게 다예요. 김 기자님, 혹시 이 세상에 몇 가지 직업이 있는지 아시나요?”

, 글쎄요...... 만 가지는 넘을 것 같은데.”

“40만가지. 30년 전, 제가 초등학교에 가기도 전에, 이미 세상에는 40만가지의 직업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 많은 직업 중에, 평생 고생하며 날 뒷바라지한 불쌍한 어머니를 기 펴고 살게 해드릴 직업은 고작 네 가지인 거죠. 그 좁은 동네에서는, 세상은 딱 이 커피잔만해요. 커피잔 밖에 얼마나 넓은 세상이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 생각도 없고, 그저 요 커피잔 속에서 올려다 본 하늘에 마침 걸려있는 직업 네 가지가 그렇게 자랑거리가 되었던 거죠. 그게 다예요.”

삼성에 들어갔던 건, 효도를 하기 위해서였나요?”


남자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아니라는 듯, 짧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


나는 남자의 얼굴에 어린 그늘을 바라보았다.


자식자랑이라는 건, 부모님 잠깐 어깨 으쓱하고 뿌듯할 진 몰라도, 그게 뭘 바꾸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다들 우러러보는 것도 아니고, 정작 그 자식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죠. 그따위 것, 블로그 스킨 바꾸고 휴대폰에 바탕화면 바꾸는 것보다도 못한 것, 그런 것 때문에 시들죠. 저놈처럼, 한 번 마음껏 달려 보지도 못하고.”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신장을 떼이고 집에 돌아갔을 때, 어머니는 문도 열어주지 않았어요.”

왜 그러셨을까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아들이었으니까. 쉽게 말해서, 더 이상 자랑스러운 아들 같은 게 아니었으니까.”


나는 펜마이크를 만지작거렸다. 이 이야기를 어디까지 써야 하는 걸까. 이런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어디까지 들려줘야 하는 걸까. 남자는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는 빈 잔을 손끝으로 밀어놓으며 애써 웃음지었다.


그분들이 바라던 내 미래라는 게 그랬어요. 페라리의 엔진을 달고 얌전히, 소리조차 내지 말고, 시내에서 경제속도 60 놓고 달리는 것 뿐이었죠. 그게 얼마나 끔찍한 짓이에요.”


남자는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라면...... 내게 시간이 있었다면, 저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어디, 먼 곳에 팔고 돌아왔을 겁니다. 누구라도, 저놈을 제 원껏 달릴 수 있게만 해주면 되니까. 그건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게 아니에요. 정말로, 그럴 여력만 남아 있었다면.”

왜요, 아우토반 같은 데도 있지 않아요? 속도 무제한이라고.”

아우토반이 상상하는 것 만큼 그렇게 뻥 뚫린 트랙같은 데는 아닙니다.”

그래도요. 그게 아니면 레이싱 서킷이라든가. 얼마든지 원하시는 만큼 달릴 수 있을 텐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여력이 남아있지 않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난 경영에서 물러날 예정입니다.”


남자는 침착하게 음성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신장암 중에는 자각증상이 거의 없어서, 다른 장기로 전이된 뒤에야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 있죠.”

설마......”

하나밖에 없는 신장이 그렇게 암세포로 변하는 줄도 모르고, 나는 한 번 마음껏 달려보지도 못한 채 내 페라리를, 내 꿈을, 저기 세워두고 있었어요. 내 부모님이 내게 했던 것과 똑같은 실수를 저질러놓고, 이제 아무것도 붙잡지 못한 채 혼자 죽음과 싸우는 일만 남았죠. 이번에 김 기자의 인터뷰 요청을 받아들인 것도, 누구에게든 한 번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기사로 내도 된다는 말씀이신가요?”

어차피 내가 CEO에서 물러나면, 거의 소설같은 추측성 기사들이 잔뜩 올라올 테지요. 회사는 개인이 아닌 법인이니 창업자가 없다고 굴러가지 않을 건 아니고, 내 개인 재산이야 기부할 데를 찾아놓았으니 변호사가 알아서 처리할 겁니다.”

가족들께는 연락하셨어요?”

내가 연락하지 않아도...... 난 결혼도 안 했고 자식도 없으니, 내 재산 중 상당 부분은 그 사람들에게 가겠지요. 김 기자, 그러니 내가 살아있는 동안 말고 죽은 다음에, 내 페라리에 대한 이야기를 써 주지 않겠어요? 커피잔만한 세상에서 겨우 도망쳐 나온 줄 알았는데, 내 손으로 쌓아올린 성인 줄 알았던 모래구덩이 밖으로 한 발도 나가지 못하고, 결국 정말 원하는 것은 제대로 손에 넣지도 못하고 죽었다고. 그런 한심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겠어요?”

mirror
댓글 0
분류 제목 날짜
양원영 인생 2014.05.31
해망재 페라리 2014.05.01
곽재식 로봇 반란 32년1 2014.04.30
양원영 효용가치1 2014.04.30
아이 2014.04.30
赤魚 흔한 남자들의 기적 (본문 삭제) 2014.04.30
미로냥 채미가(采薇歌) 2014.04.30
곽재식 소설가가 주인공인 소설 (본문 삭제)8 2014.03.31
정도경 흉터 -- 본문삭제 2014.03.31
아이 지옥의 분홍, 로희 2014.03.31
양원영 마에스트로 G4 2014.03.31
해망재 노래같지 않은 세상 2014.03.01
곽재식 망했다4 2014.03.01
pilza2 우주에 쓰레기를 버리지 마세요 2014.03.01
아이 무서워서 2014.03.01
미로냥 페일 블루 발라드Pale blue ballad 2014.03.01
해망재 사과나무 2014.02.01
곽재식 꿈 속의 여인4 2014.02.01
pilza2 두 부부 이야기1 2014.02.01
정도경 2014.02.01
Prev 1 ...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 52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