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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대안학교 라이언스

2014.10.31 23:5510.31

대안학교 라이언스

 

 


토요일 오후 7시. 나는 지금 카페에 앉아 있다. 
그는 매일 오후에 이 카페에 온다. 혼자 온다. 시간대는 일정치 않다. 오후 2시부터 오후 9시 사이에 온다. 혼자 무방비 상태로 들어와서 에스프레소 더블을 한 잔 시킨다. 그리고 역시 무방비 상태로 에스프레소 더블을 세 번에 꺾어 마신다. 그리고 잔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설탕을 스푼으로 한 번 떠먹은 후 테이블 위에 음료 값을 놓고 나간다. 항상 오천 원. 천 원은 팁인가. 
특징, 평소에는 늘 맞춤 양복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주위에는 보디가드 세 명. 굳이 보디가드를 데리고 다니지 않아도 될 정도로 체격이 건장하다. 키 183센티미터. 몸무게 92킬로그램. 몸무게 때문에 행동이 좀 둔할 것 같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킥복싱, 가라테, 검도, 유도, 주짓수를 두루 섭렵했다. 지금도 매일 몸을 단련하고 있다. 거기에다 사격술까지 수준급이다. 일당백까지는 무리겠지만 무기 없이 맨주먹으로 싸운다면 혼자 열 명은 족히 제압하고도 남을 것이다. 물론 품속에는 권총 한 정, 칼 두 자루가 있다. 일당백도 어쩌면 가능할지 모른다. 게다가 곁에는 늘 보디가드 세 명이 붙어 있으니, 함부로 놈에게 접근하려 했다가는 평생을 병원 침대에서 누워지내야 할지도 모른다. 놈은 잔인하다. 죽이는 대신 불구로 만든다. 그것도 거의 식물인간이나 다름없을 만큼 처참한 상태로 만든다. 겨우 숨만 쉴 수 있는 상태로 만든다. 
놈은 늘 오후 2시부터 오후 9시 사이에 이 카페에 온다. 혼자 무방비 상태로 온다. 지금은 오후 7시. 나는 카페 출입문을 등진 채 앉아 있다. 비록 출입문을 등진 상태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출입문이 안 보이는 건 아니다. 나는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 내가 앉은 자리에서는 카페 계산대가 보인다. 계산대 위에는 인테리어 소품용으로 만든 반짝반짝 작은 금빛 사자가 하나 있다. 그 사자 몸통에 카페 출입문이 비친다. 제법 선명하다. 
그건 그렇고, 지금 내 옆 테이블에는 젊은 커플이 앉아 있다. 많이 쳐줘야 20대 후반, 어쩌면 대학생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젊다. 남자는 키 174센티미터에 몸무게 68킬로그램. 여자는 160센티미터에 49킬로그램. 아슬아슬하게 40킬로그램 대를 유지하고 있다. 남자는 등을 잔뜩 굽힌 채로 앉아 있다. 왼쪽 다리를 조금씩 떨면서. 시선은 앞에 앉아 있는 여자의 목젖. 지금은 인중, 지금은 왼쪽 귓불, 지금은 이마, 지금은 오른쪽 관자놀이, 지금은 입술, 지금은 왼쪽 가슴, 그리고 오른쪽 가슴. 그들은 내 옆 테이블에 앉아 있기 때문에 보이는 것도 당연히 옆모습이다. 옆모습이지만, 정확히 따지자면 남자와는 대각선. 그의 눈동자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여자의 눈동자는 안 보인다. 여자도 나처럼 출입문을 등지고 앉아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고, 여자는 차가운 레몬차를 마시고 있다. 남자에 비해 여자의 앉은 자세는 균형이 잘 잡혀 있다. 허리도 쭉 폈고, 다리도 거의 90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건 허벅지에 지나치게 힘을 주고 있다는 거다. 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의자를 박차고 뛰쳐나갈 것처럼. 게다가 말을 하는 건 오로지 남자 쪽이다. 여자는 듣기만 한다. 가끔 고개만 까딱일 뿐 “응”이나 “그래” 같은 소리도 내지 않는다. 남자와 마주 앉아 있으면서도, 남자의 말 대신 다른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그런데 왜 시원한 레몬차를 시켰을까. 9월 29일 오후 7시. 밖에는 이슬비가 내리고 있다. 그러니까 더운 날씨는 아니다. 따뜻한 음료를 마셔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남자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여자는 시원한 음료를, 그러니까 얼음이 들어간 음료를 시켰을까. 마시지도 않을 거면서. 얼음은 다 녹아버렸고, 음료가 담긴 잔 주변에는 물기가 남아 있다. 저러면 처음부터 이 카페에 들어온 목적도 음료를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게 뻔히 드러나고 만다. 그런데 왜 저런 남자를 데리고 왔을까. 저 남자는 여자의 직업이 뭔지나 알까. 이제 곧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기나 할까. 
어쨌든 저 여자는 킬러다. 나와 같은 목적을 갖고 이곳에 온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클라이언트는 내 실력을 못 믿었던 건가. 대단히 불쾌하다. 
두리번거리는 시선에 허리를 잔뜩 웅크리고 앉은 자세, 가느다란 손가락, 허여멀건 피부, 근육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매끈한 팔뚝, 거기에 더해서 기름진 머릿결까지. 행동파하고는 거리가 먼 전형적인 책상머리 타입이다. 대학생이라면 취미와 특기는 공부일 것이고, 직장인이라면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서 업무를 볼 것이다. 술은 아마 입에도 못 댈 게 뻔하고. 게다가 저런 책상머리 타입의 특징은 또 있다. 말이 굉장히 빠르다는 것이다. 미처 입의 움직임이 생각을 따라 잡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하나, 행동파 타입의 여자를 좋아한다. 물론 가슴이 큰 행동파 타입의 여자. 그러니까 저 남자는 지금 본인의 이상형을 딱 찾은 셈이다. 신기할 정도다. 더 신기한 건, 남녀관계란 참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누가 봐도 여자가 주도권을 잡아야 할 관계인데, 남자가 질질 끌려다녀야 할 관계인데, 옆에서 듣자하니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내가 볼 때 저 녀석은 분명 미쳤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저런 가슴 큰 행동파 미소녀에게 막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걸 또 가슴 큰 행동파 미소녀는 듣고만 있다. 물론 다른 데 신경을 쓰느라 그런 것일 테지만, 그래도 온전히 다른 것에 집중하려면 저 책상머리의 입부터 꿰매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가 앞으로도 계속 만나야 할 이유가 있을까 싶어. 이제는 그 열정적인 기분도 사라지고 없잖아. 그러니까 우리 둘 다 말이야. 확실히 만나는 횟수도 줄었지. 전에는 매일 만났었는데 이제는 일주일에 한 번 만나면 많이 만나는 거잖아. 한 달에 한두 번 만날 때도 많고. 그리고 만나서도 뭐 딱히 하는 것도 없어. 늘 똑같지. 밥 먹고 영화 보고. 아니면 영화 보고 밥 먹고. 뭐 미술관 갈 때도 있고, 결혼식장에 갈 때도 있고, 장례식장에 갈 때도 있고, 카페에서 커피 마실 때도 있고, 그런데 넌 왜 항상 아이스 음료만 마시냐? 한겨울에도 넌 아이스 음료잖아. 그런데 오늘은 시켜놓고 마시지도 않네. 시켰으면 마시라고. 그거 비싼 거란 말이야. 수제 레몬차거든. 물론 같이 여행을 갈 때도 있지. 하지만 그런 경우는 많지 않잖아. 대부분은 그냥 영화 보고 밥 먹고, 아니면 밥 먹고 영화 보고. 게다가 늘 떠드는 건 나고. 물론 네가 내 이상형이기는 한데, 그러니까 가슴 큰 행동파 미소녀, 딱 내 스타일이기는 한데, 그러니까 내 말은 말이지, 넌 그런 분위기를 풍긴다는 거지. 왠지 반달 모양 부메랑 같은 걸 잘 던질 거 같단 말이야. 하지만 말이지, 아무리 이상형을 만났더라도 말이지, 시간이 지나면 질려. 안 질릴 줄 알았는데, 질리더라. 게다가 뭐, 우린 결혼할 사이도 아니잖아. 난 결혼 같은 거 안 할 생각이거든. 이건 사귀기 전에 내가 미리 얘기했지? 그랬더니 너도 결혼할 생각 같은 건 없다고 했고. 독신이 좀 뭔가 있어 보이기는 하지. 무언가에 얽매이는 걸 싫어하는 사람 같아 보이잖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많을 거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지.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끄덕끄덕. 
“그래, 넌 항상 말이 없으니까. 그래도 사람이 얘기를 하면 가끔 그렇게 고개라도 끄덕이라고. 그래야 얘기할 맛이 조금은 날 거 아니야. 뭐 중요한 건 아니야. 그러니까 내 말은 사람들이 결혼 같은 거 안 하겠다는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는 거지.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 쟤 혹시 성불구잔가, 섹스공포증이라도 있는 건가, 이렇게 생각해도 상관없어. 어차피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나한테 직접 말하지는 않을 테니까, 나야 상처 받을 일이 없지. 아무튼 뭐 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서로에게 싫증을 느끼고 있다는 거야. 너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겠지. ‘아직은 아니야!’ 속으로 외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뭐 그럴 수도 있어. 너한테는 그럴 수도 있다는 얘기야. 하지만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중요한 건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거니까. 그리고 나는 방금 전에도 얘기했다시피 우리가 예전처럼 서로를 절실히 원하고 있지는 않다는 거고. 물론 이대로 계속 관계를 지속시킬 수는 있어. 1년, 2년, 혹은 3년. 그리고 4년 뒤에 헤어지겠지. 지금이 아니라 4년 뒤에. 서로 원수지간이 돼서 말이야.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그런 건 낭비야. 인생 낭비. 의무적으로 만나고, 물론 지금도 그런 면이 없지는 않지만, 어쨌든 의무적으로 만나고, 의무적으로 섹스를 하고, 의무적으로 함께 밥을 먹고, 한 달에 한두 번씩은 꼭 영화를 봐야만 할 것 같고, 그러다 결국 어느 시점이 되면 서로 폭발하겠지. 너 때문에 내 좋은 시절을 다 날려버렸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면서 서로에게 막 저주를 퍼부을 거야. 틀림없어. 난 그런 경험을 한 번 해봤으니까. 헤어질 때 헤어지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결국 서로에게 추한 꼴을 보이면서 헤어졌어. 그러니까 결국은 헤어진 거지. 더 안 좋게 말이야. 너랑은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아. 어쨌든 내 이상형이니까. 가슴 큰 행동파 미소녀. 그런데 지금 내가 한 말이 이해는 되는 거지?”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그렇다고 좌우로 흔들지도 않았다.
보디가드 세 명이 그림자처럼 붙어다닌다면, 적어도 합법적인 일을 하지 않는다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설사 합법적인 일을 할지라도, 그건 사방에 적을 만드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내의 직업이 정치가라는 얘기는 아니다. 물론 대다수 정치가들이 사내의 고객이기는 하지만. 사내는 살인귀 양성소를 운영하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대안학교로 알려져 있지만, 학생들이 그곳에서 배우는 건 국어, 수학, 영어 같은 게 아니다. 과학이나 역사도 아니다. 기술이다. 오로지 싸움 기술.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을 죽이는 기술. 그러니까 살인 기술. 나 역시 그곳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일단 지원 조건은 전혀 까다롭지 않다. 누구든 지원 가능하다. 사지가 절단된 자도 가능하고, 갓난아기도 가능하고, 지팡이 짚고 다니는 노인도 가능하다. 말 그대로 남녀노소 죄다 가능하다. 국적, 나이, 성별, 학력, 장애유무 이런 거 다 필요 없다. 전부 지원할 수 있다. 전형료 같은 것도 안 받는다. 지원서 작성해서 그냥 접수만 하면 된다. 인터넷으로도 가능하다. 물론 지원 조건이 그렇다는 얘기다. 지원서 작성해서 제출한다고 모두 입학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누구든 지원할 수 있다는 건 다시 말해 그만큼 입학 조건이 까다롭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아니지, 까다로운 게 아니고 위험한 거지. 목숨을 걸어야 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지원한다. 일단 입학만 하면 모든 게 무료니까. 먹고 자고 입고 하는 게 모두 무료니까. 학비 같은 것도 안 받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학교 시설이 형편없다거나 교내 식당 음식이 부실하다거나 기숙사가 노후했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다. 학교 건물은 매우 훌륭하다.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훌륭하다. 축구장 50배는 됨직한 넓이, 그 이상일 수도 있다. 돔구장처럼 되어 있는 학교 건물의 둘레를 한 바퀴 돌려면, 세계 톱클래스에 속하는 마라톤 선수의 폐활량을 갖고 있을 필요가 있다. 그렇게 건물 둘레를 돌다보면 출입구가 보인다. 아니지, 공식적으로는 학교니까 교문이라고 해야 옳다. 그리고 교문 한쪽에는 당연히 수위실도 있다. 수위아저씨도 있고. 다만 좀 평범하지 않은 수위아저씨다. 160센티미터도 안 될 것 같은 작은 체구에 머리가 희끗희끗하다. 60대 중반 정도로 보인다. 여기까지는 일반 학교 수위아저씨와 별 다를 게 없다. 다른 점은 한 손에 들려 있는 무기다. 가스총을 허리에 차고 있다면 그나마 이해가 가겠지만, 이곳 수위아저씨는 말 그대로 무기를 들고 있다. 그것도 무시무시해 보이는 무기를. 위협을 느낀 고슴도치가 야구 배트 위에서 몸을 돌돌 만 것 같은 모양, 일단 모양은 그렇게 생겼고, 크기는 그러니까 자루의 경우 길이는 야구 배트와 비슷하지만 굵기는 세 배 정도 된다. 그러므로 한 손으로는 자루를 꽉 움켜쥘 수가 없다. 보통 사람이라면 손이 작아서 안 된다. 하지만 이곳 수위아저씨는 그 굵은 자루를 한 손으로 꽉 움켜쥐고 있다. 손이 비정상적으로 크다. 한쪽 손만, 그러니까 오른쪽 손이 비정상적으로 크다. 일반 사람의 세 배는 된다. 손이 그렇게 크니 사실 따로 무기를 안 들고 있어도 충분히 위협적이지만, 어쨌든 무기를 들고 있다. 그리고 그 굵은 배트 위에 달린 둥근 공 모양의 뾰족뾰족한 밤송이는 지름이 30센티미터는 넘어보인다. 이렇게 철퇴처럼 생긴 무기는 실제로 전체가 쇠로 만들어졌다. 무게가 1톤은 넘을 것이다. 그걸 자유자재로 휘두른다. 마치 플라스틱으로 만든 야구 배트를 휘두르듯이 말이다. 이게 어딜 봐서 학교 수위아저씨의 모습인가. 지옥문을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맡겨도 어울릴 캐릭터다. 그렇게 지옥문을 통과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터널 같은 좁은 통로가 나온다. 그리고 그 터널 끝에는 또 다른 문이 있고, 거기에도 마찬가지로 수문장이 있다. 딱 봐도 철퇴를 들고 있는 수문장보다는 레벨이 높아 보인다. 이 큰 건물이 외부와 연결된 통로는 이 길 하나다. 그리고 이 길에는 수많은 문이 있고, 각 문마다 수문장이 지키고 있다.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고, 멋대로 나갈 수가 없는 곳이다. 
입학 절차는 이렇다. 1차 서류 전형, 2차 실기, 3차 면접. 필기시험은 없다. 원래는 필기시험도 보려고 했다. 입학시험이라면 당연히 필기시험도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문제를 만들려고 하니 막막했다. 일명 살인귀 양성 학교인데 도대체 어떤 문제를 내야 한단 말인가. 
살인에 실패했을 경우 취해야 할 행동으로 올바른 것은? 
1. 소지하고 있는 알약 폭탄을 삼켜 몸을 산산조각 낸다. 
2. 황산을 뒤집어쓴다. 
3. 학교에 알린다. 
4. 취할 수 있는 행동이 어딨단 말인가. 이미 죽었을 텐데. 
이런 문제를 낸단 말인가. 아니면 이런 건 어떨까. 
동급생과의 대련에서 졌다. 취해야 할 행동으로 올바른 것은? 
1. 패배를 인정하고 훈련에 더욱 매진한다. 
2. 패배를 인정하고 학교를 떠난다. 
3. 패배를 인정하고 자결한다. 
4. 취할 수 있는 행동이 어딨단 말인가. 이미 죽었을 텐데. 
이런 문제를 낸단 말인가. 아니면 이런 건 어떨까. 
전교생은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한다. 그리고 기상 시간은 새벽 4시 30분이다. 몸을 씻고 5시까지 제1운동장으로 모여야 한다. 하지만 A라는 학생이 늦잠을 자는 바람에 5시까지 제1운동장에 나가지 못했다. 1분이나 늦었다. 이때 취해야 할 행동으로 올바른 것은? 
1. 한 달간 100평 넓이의 제1운동장 바닥을 혼자 쓸고닦는다. 
2. 두 달간 바닥을 쓸고닦는다. 
3. 세 달간 쓸고닦는다. 
4. 취할 수 있는 행동이 어딨단 말인가. 이미 죽었을 텐데. 
이런 문제를 낸단 말인가? 교사들이 내놓은 문제들은 전부 이런 식이었고, 교장은 이 중에서 어떤 걸 골라야 할지 결정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살인귀 양성 학교라지만, 문제가 너무 단순했다. 그래서 아예 필기시험은 안 보기로 했다.
지원할 때 필요한 서류는 이력서와 지원 동기서다. 교사들은 이 두 가지 서류를 훑어본 뒤 특별히 문제될 게 없으면 일단 1차는 합격시킨다. 여기서 ‘특별히 문제될 것’이라는 건, 그러니까 지원자가 사람이 아니라 동물일 경우, 뭐 그런 경우에는 불합격 처리한다. 그러니까 결국 1차는 모두 합격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2차 실기 시험을 치르기 위해 지원자들은 학교로 와야 한다. 이때 수험표를 반드시 지참해야 한다. 수험표가 있어야 철퇴를 든 수위아저씨가 안으로 들어가게 해준다. 없으면! 철퇴에 맞는다. 머리가 날아가고 몸통이 뚫리고 하반신이 사라진다. 수험표를 지참하고 제1운동장에 모이면, 그러니까 지원자들이 모두 제1운동장에 모이게 되면, 문이 닫힌다. 아무도 나갈 수 없다. 지원자들이 수군거린다. 모여서 웅성거린다. 몇몇은 문을 두드리기도 한다. 걷어찬다.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한다. 그러면 이제 제1운동장 천장에서 각종 무기 혹은 흉기들이 우르르 쏟아진다. 재수 없는 지원자들은 그 쏟아지는 무기 혹은 흉기에 맞아 죽기도 한다. 그 수가 꽤 된다. 경쟁률이 낮아지는 셈이다. 하지만 기뻐하는 자들은 없다. 기뻐하기는커녕 쏟아지는 무기 혹은 흉기들을 피하려고 정신이 없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뛰어다녀야 하니까 기뻐할 겨를도 없다. 까딱하면 죽어버리니까. 하지만 그렇게 바쁘게 뛰어다녀도 재수 없는 인간은 결국 죽는다. 무기 혹은 흉기에 맞아 죽기도 하고, 사람들 발에 짓밟혀 죽기도 하고. 이제 10분이 됐다. 그러니까 제1운동장 문이 닫히고 천장에서 무기 혹은 흉기들이 떨어지기 시작한 지 정확히 10분이 지났다. 그동안 사람들은 62명이 죽었고. 작년보다는 저조한 실적이었지만, 살아남은 자의 숫자는 비슷했다. 237명. 그러니까 작년보다는 지원자가 줄어든 것이었다. 다른 도시에 경쟁 학교가 하나 새로 생겼기 때문이다. 아무튼 10분이 지난 시점부터 사람들의 광기는 극에 달한다. 문이 잠긴 걸 뻔히 알면서도 서로 문 가까이 가려고 다툼을 벌인다. 물론 이건 단순한 다툼이 아니다. 이미 사람들 손에는 무기 혹은 흉기가 들려 있다. 학교 관계자가 무기를 집으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본능적으로 무기를 집어들었다. 무기의 종류는 실로 다양했다. 칼, 도끼, 망치, 총, 낫, 삼지창, 게다가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는 기괴한 모양의 각종 쇠붙이들 혹은 철기구들. 사람들은 그것들을 무작위로 휘둘렀다. 그래서 더 잔혹했다. 눈 뜨고 보기 힘들 만큼 잔혹했다. 훈련 받은 자들의 싸움은 잔혹하지 않다. 거기에는 규칙이 있고 절도가 있고 절제가 있고 상대에 대한 존중이 있다. 게다가 훈련 받은 자들의 실력이 출중하다면, 잔혹하기는커녕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래서 설사 상대에게 지더라도 미소를 지을 수 있다. 자신이 아름다웠기에. 그러니 훈련 받은 자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쉽게 이성을 잃지 않는다. 가만히 자기 자리를 지키며 상황을 주시할 뿐이다. 학교 관계자들, 그러니까 교장을 비롯해 교사들은 모두 교무실에 모여, 모니터로 도살장으로 변해버린 제1운동장을 보고 있었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다들 얼굴을 찡그릴 뿐이었다. 저토록 추한 광경이 또 있을까. 저렇게 간단히 정신이 무너지다니. 왜 아무도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들지 않을까. 빨리 죽어버려라. 다들 죽어버려. 추한 것들은 어서 빨리 사라져버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교장도, 교사들도 다들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누구 하나 동정심 같은 건 갖지 않았다. 도끼를 든 자가 제1운동장의 유일한 출입문인 철문을 내리찍었다. 하지만 도끼는 철문에 닿는 순간 어디론가 튕겨나갔다. 아마 근처에 있던 자의 이마에 가 꽂혔을지도 모른다. 도끼를 들고 있었던 자가 그 자의 이마에서 도끼를 뽑으려는데, 재수 없게도 누군가가 휘두른 해머에 머리를 정통으로 맞았다. 그리고 해머가 너무 무거웠던 탓에, 그 누군가는 손에서 해머를 놓쳤다. 그래서 대신 누군가의 이마에 꽂혀 있던 도끼를 뽑아들었다. 그걸 질질 끌면서 출입문 쪽으로 가다가, 날아온 해머에 뒤통수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자가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길길이 날뛰는 걸 보며, 이미 짓뭉개진 그 자의 머리를 다시 도끼로 찍어버렸다. 불과 몇 개월 전에 친구들이랑 야외 캠핑장에 갔었다. 고기를 구워먹으려면 직접 도끼로 나무를 찍어서 땔감용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 작업이 쉽지 않아 애를 먹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사람 머리는 그렇게 힘을 들이지 않고 내리찍었는데도 반으로 쩍 갈라졌다. 히죽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그는 출입문 쪽으로 가려다 말고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끼로 내리찍을 수 있는 머리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는 히죽 웃었다. 그리고 내리찍었다. 좌우로 휘두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 머리가 가로로 혹은 세로로 쩍쩍 갈라졌다. 그렇게 히죽히죽 웃으면서 도끼를 휘두르자, 어느새 주위에 그 자를 흉내 내는 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칼, 도끼, 망치, 낫 등을 든 자들이 모여들어, 출입문을 부수려고 발광하는 자들의 머리를 가격했다. 쪼개지고 갈라지고 부서지고 찍히는 머리들, 그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 역시 히죽히죽 웃었다. 죽어가는 사람들이 갑자기 불어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마구잡이로 총을 휘갈겼다. 총구가 자신에게까지 향하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철퇴를 휘두르다가 양팔이 쑥 빠져버린 사람도 있었다. 
“자, 자, 지원자 여러분, 이제 동작을 멈춰주세요! 모두들 들고 있는 무기를 내려놓으시고 잠시만 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세요!”
목소리는 제1운동장 천장에 매달린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학생주임 선생님. 교무실에서 제1운동장 상황을 지켜보다가 마이크를 집어들었다. 물론 학생주임 선생님의 말을 따라 움직임을 멈춘 지원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낯선 사람의 말소리는 지원자들의 신경만 자극할 뿐이었다. 두려움에 떨며 죽은 척하던 자들까지 눈이 풀린 채로 일어나 시체를 훼손하면서 짐승 같은 소리를 질렀다.
“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세요! 동작을 멈추세요! 그러다 여러분 다 죽습니다! 입학생이 하나도 없게 된다고요!”
아마 학생주임이 끼어든 목적은 이것 때문일 것이다. 지금 이곳 제1운동장에서 벌어지는 풍경. 까딱하다가는 올해 신입생이 한 명도 없게 될지 모른다. 뭐, 신입생이 한 명도 없어도 괜찮다. 문제가 되는 건, 아직 2차 심사인 실기가 남았다는 거다. 실기 시험을 볼 지원자는 있어야 한다. 그리고 최종 심사인 면접을 볼 지원자도 최소한 한 명은 남겨놔야 한다. 그러고 나서 그 한 명이 면접에서 떨어진다면, 올해 신입생은 한 명도 없는 거다. 이런 건 괜찮다. 그러니까 어쨌든 실기 시험 볼 지원자는 몇 명 살아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잡음이 안 생긴다. 그래야 몇 몇 혈기왕성한 젊은 선생이, 그러니까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젊은 선생이, 그러니까 학생들에게 온갖 살인 기술을 선보이고 싶어 미치기 일보 직전인 젊은 선생들이 폭주하지 않는다. 물론 폭주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건 없지만, 일부 간부급 선생들이 제압을 하면 되지만, 어쨌든 살인 기술이 뛰어난 선생들을 잃는 건 학교 측으로서는 큰 손실이다.
“일단 손에 든 그 빌어먹을 무기들부터 버리세요! 그 정도면 충분히 경험하셨을 겁니다! 어때요, 사람 죽이는 거 생각보다 쉽죠! 죄책감도 안 드셨을 겁니다! 문제는, 그러다 내가 죽을 수 있다는 거죠! 그러면 큰일이잖아요! 그래서 기술이 필요한 겁니다! 살인 기술 말이에요! 여러분은 그걸 배울 수 있어요! 물론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에 한해서 말입니다! 아, 아직도 다들 무기를 들고 계시네요! 어쩔 수 없군요! 그럼 저희가 무기를 회수하겠습니다! 그렇다고 저희가 여러분을 죽이지는 않을 거예요! 대신, 다음부터는 저희 명령에 따라주세요! 더 이상 이성을 잃지 마세요! 그런 지원자들은 필요가 없어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없애버리겠다는 뜻입니다!”
학생주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천장에서 검은 물체들이 떨어졌다. 혈기 왕성한 젊은 선생들이었다. 아주 빠른 속도로 떨어졌고, 바닥에 정확히 착지해, 각자 어디론가 움직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와이어 같은 것에 매달려 바닥으로 떨어진 건 아니었다. 그냥 뛰어내렸다. 바닥과 천장 사이의 높이는 약 60미터. 일반 돔구장 높이다. 하지만 그런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대안학교 라이언스 선생들이니까. 여러분들이 2미터 담 위에서 뛰어내렸다고 생각하면 된다. 어쩌면 그보다 더 간단한 움직임이었을 수도 있다. 아무튼 선생들은 쏜살같이 움직였고, 이번에는 제1운동장 벽을 박차듯이 밟으면서 위로 올라갔다. 그런 뒤 천장 어딘가로 다시 사라졌다. 선생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진 시간은 불과 20여 초, 선생들의 모습을 제대로 본 지원자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손에 들려 있던 무기가 언제 사라졌는지 눈치 챈 지원자 역시 단 한 명도 없었다. 
“네, 이제 무기를 들고 있는 분들은 아무도 없네요. 싸움은 정정당당하게 해야죠. 상대가 무기를 안 들고 있다면, 나 역시 무기를 들면 안 됩니다. 그것이 설사 누군가 죽어야 끝나는 싸움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혹은 상대가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지금부터 실기시험을 치르겠습니다. 제한 시간은 30분입니다. 매우 짧죠! 살아남으세요. 그러면 합격이니까요. 자, 실기시험 시작합니다!”
제1운동장 철문이 열렸다. 동시에 수십 마리 들개들이 서로를 짓밟으며 운동장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눈은 시뻘겋게 충혈 됐고, 다물지 않은 주둥이 사이로 침이 줄줄 흘러내렸다. 들개들은 컹컹 짖지도 않았다. 짖을 겨를이 없었다. 오로지 지원자들을 향해 총알처럼 돌진할 뿐이었다.
남은 지원자 수는 126명. 수십 마리의 굶주린 들개가 이들을 물어뜯어 죽이는 데 과연 몇 분이나 걸릴까. 지원자들 모두에게는 무기도 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게 실기시험이다. 대안학교 라이언스에 지원한 자들을 위해 준비된 실기시험. 합격하려면 별 거 없다. 살아남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까 선생들이 보기에, 학교 관계자들이 보기에 매우 단순한 시험이다. 게다가 시간도 30분으로 아주 짧고.
물론 학생주임 선생이 하나 빠뜨린 이야기가 있다. 제한 시간은 30분이지만 실기시험이 그 전에 끝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10분 만에 시험이 끝날 수도 있는 것이다. 지원자들이 들개들을 다 죽이거나 혹은 들개들이 지원자들을 다 죽이거나. 이런 경우 시험은 자동 종료된다. 그런데 그런 경우가 있었던가. 그러니까 지원자들이 30분 만에 들개들을 다 죽인 경우가 있었던가. 물론 그 반대의 경우는 많았다. 들개들이 지원자들을 다 죽인 경우는 많았다. 신기록은 현재까지 7초다. 7초 만에 200명 가까이 되는 지원자가 들개들한테 물려 죽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몇 번 있었다. 들개들을 다 죽인 경우. 특히 그중 한 번은 아직도 전설처럼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시험 시간 20분이 막 지난 뒤였다. 남은 지원자는 한 명이었고, 남은 들개들은 열일곱 마리였다. 들개들은 아직 배가 고팠고 피 냄새 때문에 미쳐 날뛰는 중이었다. 그리고 지원자의 몸은 만신창이었다. 군데군데 살점이 뜯겨 나간 상태였고,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정신이 흐리멍덩한 상태였다. 숨이 붙어 있는 게 기적이었다. 그래도 이제 들개가 한 번만 더 달려들면, 시험은 자동 종료될 게 뻔했다. 그리고 들개 몇 마리가 달려들었다.
아무 훈련도 받지 않은 보통 사람이, 그것도 맨주먹으로 혼자 들개 수십 마리를 상대로 살아남을 확률은 0.0001%도 안 된다. 그렇다고 완전 제로는 아니지만, 아무튼 거의 제로에 가깝다. 그렇다면 0.0001%도 안 되는 확률에 속하는 사람, 살아남을 확률이 거의 제로에 가깝지만 아무튼 살아남는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이런 자다. 장난삼아 길에 버려진 깡통을 발로 뻥 찼는데, 그것이 수십 미터 떨어져 있는 쓰레기통 속에 쏙 들어갔다. 오락 기계 중에 주먹으로 쳐서 펀치력을 측정하는 게 있다. 평소에는 점수가 보통이었는데, 어느 날 친구들과 점심 내기로 주먹을 휘둘렀더니 기계가 꺼져버렸다. 주인아저씨한테 따졌더니, 오히려 주인아저씨가 화를 낸다. 주먹으로 내리쳐야지 도대체 뭐로 내리친 거냐고. 물이 담긴 유리컵을 평소처럼 집어들었는데, 컵이 손안에서 박살이 났다. 비유가 좀 약하다면, 이런 경우는 어떨까. 번개에 맞고도 살아났다. 아파트 13층 베란다에서 떨어졌는데 가벼운 찰과상만 입었다. 이런 자들이 있다. 그래서 들개 열일곱 마리가 달려들었는데, 어째선지 몇 마리가 깨갱거리며 뒤로 나자빠졌다. 나머지 들개들은 눈치를 보며 뒤로 슬금슬금 피했다. 피 맛을 본 들개들답지 않았다. 마치 우두머리 앞에서 복종의 몸짓을 취하는 듯했다. 들개들은 그 지원자의 눈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주둥이를 땅에 처박은 채 낑낑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들개 무리 중에도 우두머리는 있다. 남은 지원자는 한 명. 하지만 들개들은 아직 배가 고팠다. 우두머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보통은 우두머리가 먼저 달려들지는 않지만, 무리들이 달려들고 나서 우두머리가 뒤이어 달려들지만, 이번에는 지원자가 한 명밖에 안 남아서 들개 우두머리가 먼저 달려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이상하게 지원자의 눈에 들개 우두머리의 움직임이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했기에 오히려 들개 우두머리가 달려들었을 때는 그다지 공포를 느끼지 못했다. 어서 빨리 저 들개가 목을 물어뜯어 숨이 끊어졌으면 하고 바랐다. 그런데 하필이면 달려든 들개 우두머리의 움직임이 느릿느릿하게 보이는 것이 아닌가. 어찌된 영문이지, 이런 생각이 들면서도 주먹을 휘둘러 들개의 정수리를 가격하면, 왠지 들개가 나가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펀치력을 측정하는 그 기계가 꺼져버렸듯이 말이다. 그래서 그렇게 했더니 정말로 들개가 나가떨어졌다. 뒤이어 달려들던 서너 마리의 들개들도 마찬가지였다. 다 나가떨어졌다. 그러자 나머지 들개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물론 그 뒷걸음질 치는 모습은 슬로모션처럼 보이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체육시간이 끝나고 교실로 향하는데, 머리 위쪽에서 여러 명이 동시에 꺅 하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제법 큰 화분 두 개가 내 머리를 향해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창문 틈에 잠시 올려놓았던 걸 누군가 실수로 툭 친 모양이었다. “꺅, 피해!” 이런 소리가 계속 시끄럽게 들렸다. 그 순간 나는 ‘저거 정통으로 맞으면 죽겠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던 이유는, 그러니까 맞을 리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화분이 아주 느리게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3층에 있는 어느 교실에서 떨어졌을 거 같은데, 운동장 바닥과 교실 3층 사이의 높이는 약 8미터. 아마 정상적인 속도라면 운동장 바닥으로 떨어지는 데 3, 4초밖에 안 걸릴 것이다. 물론 화분이 진짜로 느리게 떨어지고 있었던 건 아니고, 그리고 실제로도 3, 4초 만에 바닥에 떨어졌지만, 내 눈에는 느리게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저 화분에 맞으려면 적어도 제자리에서 1분은 기다려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냥 옆으로 슬쩍 피했고, 피하자마자 화분은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났다. 1분은 젠장,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아무튼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던 들개들은 더 이상 덤벼들 생각이 없어보였다. 이미 기가 꺾여버린 모양이었다. 그리고 천장에 있는 스피커에서 “합격!”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어디선가 또다시 검은 물체가 나타났던 것도 같았는데, 운동장에 있던 들개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3차 전형인 면접은 시간이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실기시험 합격자가 한 명뿐이라, 사실 면접은 그냥 형식적으로 봤을 뿐이다.
“혹시 저희 학교에 지원한 동기나 뭐 그런 거 있습니까? 없어도 뭐 상관은 없습니다만.”
“세계 최강이 되고 싶어서요. 다섯 살 때부터 꿈꿔왔거든요. 전 세계의 군대가 총출동해도 저를 이기지 못해요. 그런 세계 최강이요. 그러니까 마음만 먹으면 저는 세계를 지배할 수 있죠. 물론 그러지는 않을 테지만요. 아무튼 그런 세계 최강이 되고 싶어요.”
“다섯 살 때부터 꿈꿔왔단 말입니까?”
“네.”
“세계 최강을요?”
“네.”
“그 꿈 이루려면 굉장히 힘든 훈련을 받아야 할 텐데요.”
“괜찮아요.”
“그렇게 훈련을 받아도, 그 꿈 이루지 못할 수가 있는데요.”
“괜찮아요.”
“그러니까 제 말은, 훈련을 받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인데요.”
“괜찮아요.”

 

오후 9시가 다 돼간다. 10분 남았다. 이제 올 때가 됐는데.
“저기, 혹시 누구 기다리시는 거 맞죠? 아까 낮 2시부터 여기 앉아 계셨던 거 같은데…….”
그래, 난 낮 2시부터 여기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왜 갑자기 말을 걸지!
이 사람은 이곳 카페 주인이다. 소설책 읽는 걸 무척 좋아한다. 평소에는 빈 테이블에 앉아서 소설을 읽는다. 그러다 손님이 들어와 음료를 주문하면, 아주 느릿느릿 음료를 만든다. 아메리카노 한 잔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이 핸드드립 커피 만드는 시간과 비슷하다. 이해가 안 간다. 당연히 핸드드립 커피 한 잔 만드는 시간은 단편소설 한 편 읽는 시간과 맞먹는다. 이해할 수가 없다. 참고로 이 주인은 소설을 참 빨리 읽는다. 이것도 이해가 안 간다. 그렇게 손님한테 음료를 만들어주고 나서 다시 빈 테이블로 가 소설을 읽는다. 단골손님이 와도 특별히 아는 체를 하지 않는다. 그냥 음료 만들어서 주고 다시 소설을 읽는다. 손님이 아는 체를 하면 그냥 살짝 미소만 짓는다. 그러고는 소설을 읽는다. 그런 사람이다. 누군가에게, 특히 손님에게 먼저 말을 걸 사람이 아니다. 덕분에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커플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인을 쳐다보았다. 그들도 주인의 행동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그런데 옆 테이블에 있는 커플도 여기 단골인가. 난 오늘 처음 본 거 같은데.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이 주인은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해서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까.
“한 두 달 전부터 저희 가게에 매일 오셨죠? 어떤 날은 아침 10시부터 밤 11시까지 가게 밖에서 훔쳐보기도 하셨고요. 하, 엄청 궁금하더라고요. 분명히 누군가를 찾거나 혹은 미행하는 것 같은데, 내 생각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 방금 딱 하고 떠올랐어요. 아하, 누군가를 기다리시는 거구나. 만나기로 서로 약속한 건 아니고, 그냥 일방적으로 기다리시는 거구나.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그 누군가가 나타나는 거구나. 제 말이 맞죠? 그런데 오늘은 낮 2시부터 오셨고, 이제 곧 밤 9시가 다 돼 가는데 손님은 아직도 여기에 앉아 계신단 말이에요. 그런데 또다시 생각해 보니까 손님은 요 근래에 계속 낮 2시에 여기 오셨단 말이에요. 그랬다가 일찍 가신 경우도 있고 오후 6시가 넘어서 가신 경우도 있고, 아무튼 오는 시간은 일정한데, 돌아가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았단 말이에요. 게다가 평소에는 품속에 무기 같은 건 없었잖아요. 아, 발목에 단도는 항상 차고 있었죠. 하지만  뭐, 그런 건 무기라고 할 수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오늘은 무슨 닌잔지 사무라인지 모를 이상한 캐릭터 흉내를 다 내시고. 뭐 그렇게 잡다한 무기들을 품속에 감추셨는지, 아, 좀 조잡해 보여서요. 뭐, 그거야 취향일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 치죠. 괜찮아요. 네. 정말로 괜찮아요. 아, 괜찮아요, 하니까 불현듯 생각이 나네요. 예전에 제가 대안학교 라이언스 면접시험 볼 때요, 면접관님이 뭐라고 물으면 제가 그 말밖에 안 했었데요. 괜찮아요, 이렇게요. 전 잘 모르겠는데 말이죠. 아, 왜 그렇게 눈을 동그랗게 뜨시고. 뭔가요, 그럼 혹시 제 정체는 모르셨던 거예요? 제가 듣기로는 최강 킬러시라던데. 물론 손님네 나라에서요. 그런 분이 정작 제 정체는 모르셨다니, 제가 아직은 덜 유명한가 보네요. 그래도 나름 좀 이쪽 세계에서는 알려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에요. 얼굴이 다 화끈거리네요. 하지만 괜찮아요. 분발하면 되니까요.”
그러면서 이곳 주인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아, 왜 이 녀석 정체를 몰랐을까. 이 녀석이 그 학교 졸업생이었단 말인가. 그 학교는 졸업하기가 상당히 힘들다고 들었는데. 그리고 일단 졸업을 했다는 건, 그것만으로 엄청난 실력을 갖고 있다는 얘기가 되는데. 설마 그런 녀석이 이렇게 작은 카페 주인 노릇이나 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아, 이런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다니. 그래서 그 자는 이곳에 올 때 무방비 상태로 왔던 건가. 자기 학교 졸업생이 운영하는 카페니까. 그럼 저 커플은 뭐야. 저 녀석들도 수상하잖아. 너무 오랫동안 여기 죽치고 앉아 있는데. 그렇다면 저 녀석들도 설마. 저 책상머리도 설마.
“아니에요. 아직 졸업은 못 했어요. 재학생들이에요. 물론 그렇다고 만만하게 보시면 안 돼요. 마음만 먹으면 당신네 나라는 순식간에 쑥대밭으로 만들 만한 실력은 갖고 있으니까요. 오늘은 그냥 실습 나온 거예요. 제가 직접 손님을 상대할 수는 없잖아요. 사자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풀을 뜯지 않는 법이거든요. 아, 이거 적절한 비유 맞나요? 그러니까 제 말은, 손님 같은 레벨은 쟤네들이 딱이라는 거죠. 제가 나서기에는 좀 창피하다는 거죠. 아, 그리고 손님 죽기 전에 말씀 드려야겠네요. 오늘 교장 선생님 안 오세요. 저희 학교는 그렇게 어설픈 집단이 아니랍니다. 제가 너무 말을 많이 했네요. 그럼 이만.”
주인은 다시 빈 테이블로 돌아가 소설책을 펼쳤다.
그리고 커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같은 최강 킬러(과연 최강 킬러가 맞는가!)는 상대가 본격적으로 적의를 내뿜을 때 이미 어느 정도 승패를 예감한다. 이곳 주인은 줄곧 적의를 숨기고 있었다. 살기를 드러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단 한 순간도. 지금도 마찬가지고. 거의 무방비 상태로 소설책을 읽고 있다. 그래서 전해지는 기운 만으로는 저 자가 얼마나 강한지 감이 안 온다. 하지만 지금 자리에서 일어난 커플, 대안학교 라이언스에 재학 중인 커플, 있는 대로 적의와 살기를 내뿜고 있다. 실로 경험해 보지 못한 기운이다. 압도당했다는 말이 적절하리라. 과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저 둘을 상대로 내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이 어딨단 말인가. 움직이려는 순간, 이미 나는 죽었을 텐데. (정답!) 
재학생 커플은 품에서 동시에 반달 모양 쇠붙이를 꺼내들었다. 날카롭게 날이 선 무기. 아마 부메랑처럼 사용하는 것이리라. 
“저기, 그럼 킬러 아저씨, 저희가 지금 이 무기 던져도 될까요? 마음의 준비 같은 건 하셨어요? 아니면 시간을 좀 드려야 할까요? 이건 상대의 목을 베지 않는 이상 절대 저희 손에 안 돌아오거든요. 계속 허공을 배회하면서 상대의 목을 노려요. 피할 수 있는 길은 한 가지예요. 저희 둘을 죽이면 됩니다. 그럼 이 무기들도 땅에 떨어져요. 하지만, 왠지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네요. 어떻게 할까요? 지금 던질까요 말까요? 결정해 주세요. 아, 그리고 혹시 오해하고 계실까 봐 죽기 전에 말씀드리는데요, 저희 연인 관계 아니에요. 연기였습니다. 물론 눈치 채셨을 수도 있겠지만요.”
눈치 못 챘다.

 

참, 그때 그 제1운동장에 있던 126명은 모두 죽었다. 그 해에는 신입생 제로. 결국 젊은 선생들은 폭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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