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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이립 모두 엇갈리다

2016.07.31 22:4307.31

무대

주 무대는 의사 사무실이다. 무대 중앙 벽면쪽에 탁자가 놓여 있다. 그 위에는 창문이 있다. 벽면에 커다란 책꽂이가 있다. 왼쪽 끝에는 안쪽 방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

무대 밝아진다.

의사가 탁자에 앉아 손목 시계를 들여다 보고 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뚜벅뚜벅 힘있는 발자국 소리가 울리더니 천 사무실로 들어온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의사어이구. 우리 천군 왔는가

예. 선생님 사무실은 처음이군요.

의사정말? 우리 사이에 내가 너무 매정했나

아니죠. 선생님은 늘 마을을 위해 애쓰시니 진료실에서만 뵌 것도 당연하죠.

의사그래.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고. 어때(사무실을 둘러본다)초라하지

아뇨. 깔끔하고 좋은데요.

의사시골의사가 가지면 얼마나 가지겠나? 그래도 말이야. 나는 여기서 일하는 자부심이 있어.

그럼요. 선생님이 안 계시면 저희 마을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의사그렇지? 역시 자네같은 사람들은 역시 심미안이 있군. 본질을 볼 줄 알아. 요즘 하는 일은 잘 되나?

예. 포토폴리오를 돌리고 있는데 에이전시에서 반응이 좋아요.

의사포토 뭐?

포토폴리오라고 제가 연기하는 걸 사진으로 모아둔 책이요.

의사그래? 자네는 잘 생겼으니 사진도 잘 나올거야. 회당에서 공연한 거 보았네.

감사합니다.

의사자네는 꿈을 이룰거야. 훌륭한 배우가 될거야.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황송하죠.

의사아니야. 아니야. 나는 자네를 아주 어릴때부터 보았다네. 자네는 싹이 달라.

서울에서도 그러기를 바래야죠.

의사그래 서울에 언제가나

삼일 뒤에 시내로 가서 기차를 타고 떠날 겁니다.

의사그렇게 일찍?

예. 아리도 같이 갈겁니다.

의사아리도?

예.

의사사람들은 유명해지면 조강지처 따위는 잊어 버리는데...역시 자네야.

아직 아내는 아니죠.

의사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겠는가

(애매하게)예. 안그래도 떠나기 전에 찾아뵈려 했는데...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습니까

의사자네 이서라고 알지

이서? 그 친구요. 예. 알죠.

의사그 친구가 최근에 사고 친 것도?

예...예전에도 많이 그랬죠.

의사그래. 그래왔지. 근데 이번에는 달라. 더 심각해.

턱이 부러졌다죠.

의사그렇다네. 그 전까지 그래도 동네 사고뭉치의 치기로 여겼는데 이번에는 사람이 크게 다쳤으니...

그 친구 어렵게 살던데.

의사그래. 홀어머니 모시고...내가 자주 들여다 봤줬지.

역시. 선생님이십니다.

의사(쑥쓰러워 한다)뭐 나야.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지. 그 친구 지금 여기 있네.

예?

의사불쌍한 우리 김간호사를 고향으로 잠시 보내고, 녀석을 여기로 데려왔네.

어째서요?

의사저 녀석이 어떻게 될 것 같나? 이대로는 감방행이야. 홀어머니 모시고 어렸을 때부터 뼈가 휘도록 고생만 아이가 감방으로 가도록 지켜 볼 만큼, 우리 마을 인정은 메마르지 않았어. 그래서 내가 파출소장하고 얘기했지.

무슨 얘길?

의사저 녀석 옛날부터 사고 쳐서 찍혀 있단 말이야. 그래서 인식도 좋지 않고.. 그것을 돌릴만한 생각을 했지. 자네 충동조절 장애라고 들어봤나?

글쎄요.

의사들어본 적 없을 거야. 의사인 나도 잘 모르니..아니 내 전공이 아니지. 정신과니까.

정신과라? 그 친구가 미쳤다는 얘기 입니까

의사그렇지. 아니야. 미쳤다는 건 좀 심하고...정신이 편하지 않다 가 낫겠지.

편하지 않다라...하긴 성급하게 욱하는 게 있더라구요.

의사그래. 역시 문제가 있겠지? 역시 자네를 부르기를 잘했어.

저를요

의사그래. 그 친구는 마음이 아파. 편하지 않다고 그래서 사고를 치는 거야. 파출소장에게 얘기했지. 지금 이서를 감방에 넣는 게 최선일까요? 아니면 불쌍한 청년을 선도해서 사회로 돌려보내는 게 최선일까요? 라고 말야. 파출소장이 시간을 주더군.

얼마나요?

의사삼일. 삼일동안 난 이서의 마음을 열어야 돼. 진솔한 얘기를 나눠야 한다고.

삼일이라. 삼일 안에 마음을 열 수 있을까요?

의사그렇지. 그러니 자네가 한번 대화해보겠나

제가요?

의사내 말은 뭐랄까? 자네 같이 똑똑한 친구들 외에 잘 못 알아듣더라고...일자무식인 그 친구에게 점잖게 얘기해봤자. 쇠귀에 경읽기지. 그때 딱 자네가 생각나더라고. 자네는 누구와도 쉽게 친해지고 마음을 열게 하는 신비한 능력이 있지 않은가? 술집 건달패들도 자네랑 대화하면 양처럼 순해지지 않나

제가요? 글쎄요. 저는 누구랑 대화하든 마음을 열려고 하죠. 그게...(생각하다가)항상은 아니지만 운 좋게 좋은 방향으로 풀렸죠.

의사어허. 나 이래봬도 배운 사람이야. 그것도 아주 많이. 그러니 내 눈은 정확해. 자네는 이런 시골구석에서 썩을 인재가 아니야. 난 자네를 처음 본 순간부터 알았어. 이 친구는 뭔가 다르다고...자네에게 아우라가 있어.

처음 봤을 때라면 저 어렸을 때 였지 않나요?

의사그렇지. 세월은 정말 빠르군. 코흘리개 였던 동네 꼬마가 이제는 마을을 이끌어 가는 젊은 리더가 되다니.

떠나는데...

의사그래. 그건 정말 아쉬워. 좀 더 남아 달라 할 수도 없고, 하긴 자네나 나 같은 사람이 이런 촌구석에서 무슨 할 일이 있겠는가?

제가 이서랑 만나보면 되는 겁니까

의사그래. 정신이 불안하다는 견해를 가져주면 더 좋고. 그래 주겠지

거절은 안 하지만..선생님 견해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의사(불만스럽다는 듯)자네 같이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이 없으니까 그렇지. 빌어먹을 파출소장. 그 인간이 내 말을 안 듣는단 말이야. 항상 날 의심한단 말이야.

의심이요?

의사그 경찰 나으리는 내가 무슨 불법적인 일을 공모하지 않나. 의심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말이야. 내가 이 상담을 제의했더니. 파출소장이 그러더군.(파출소장을 흉내낸다) 왜 이서를 감싸지요? 녀석하고 무슨 일 있으십니까? 라는 거야. 내가 그 놈하고 할 일이 뭐 있다고? 내가 아무리 바쁘다 한들 사고뭉치 놈과 무슨 일을 하겠어? 옥신각신 하다가 보증인을 두기로 합의를 봤지.

보증인요?

의사자네 정도라면 파출소장도 납득하겠다 하더라고. 아무튼 사고뭉치 놈 이번에는 단단히 걸렸어. 파출소장이 전부터 노리고 있었는데 이렇게 사고 치다니 말이야. 그래도 감방가게 내버려 둘 수 없지. 오로지 감방만이 최고의 교화라는 아집을 내버려 두기에는 나는 호락호락 하지 않아.

설마 자존심 대결은 아니겠죠?

의사물론 아니지. 우리는 방황하는 청춘을 바로 잡아주려 이 자리에 모인거야. 세상에 사랑이 너무 부족하지 않은가.

(생각하다가)제가 이서랑 그렇게 친하게 지내지를 못해서.

의사자네가? 이 동네 사람이라면 동네 거지와 코흘리개부터 마을 이장까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그럴 기회가 없어서리..이서 그 친구는 좀 욱하며...말투도 곱지 못하고. 친구는..없어...보이죠.

의사그렇지?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정서적으로 고립된 자들의 특징이야. 내가 보고 들은 게 확실하군.

그래도. 자기 일에는 최선을 다 한답니다. 진지하고 성실하고...그 친구를 고용한 그 누구도 일하는 태도에는 뭐라 말 못했다고 했죠. 잘 생각해보니 성실한 친구면...마음 한구석에 선함도 있겠죠.

의사음. 역시. 자네는 보는 눈이 달라. 마음 한 구석 선함이라..멋진 말이야. 배우들은 다 그런가?

사람마다 다르죠.

의사이 친구 겸손한 줄 알았더니. 은근히 내세우는 것도 있군.

그건 그렇고 이제 이서를 만나야 할 것 같습니다. 전 이 일만 아니라. 떠날 준비도 해야 하거든요.

의사아. 그래. 그렇지. 데려 오겠네.

자. 이제 이서에게 왜 우리 차기 이장 후보 익준이를 팼는지 알아볼까요

의사차기 이장 후보.(크게 웃는다)맞어. 딱 맞는 말이야.

익준이 하는 짓을 보면 장래 이장 후보로 끝날 거 같지는 않습니다.

의사익준이가 오지람이 넓어서 안 끼는 데가 없으니...인재긴 인재인데 자네에 비하면 아니지.

앞으로 잘돼서 서로 도우면 되지 않습니까.

의사그렇지. 역시 앞날을 내다 볼 줄 알아.(안쪽 방문으로 가다가)정말 이서랑 안 친한가?

예. 뭐 그렇다고 나쁜 사이는 아닙니다. 동네에서 서로 얼굴만 보고 스쳐 지나가는 사이입니다. 이서가 사고 쳐서 몇 번 마주치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마을을 도는 소문이상으로 알지 못하는데요.

의사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건 나빠도, 몰라서 모르는 건 어쩔 수 없지. 아무튼 자네 좋은 일 하는 거야. 자네 말 한마디에 그 사고뭉치, 감옥 대신 병원 가네.

의사 안쪽 방으로 가서 문을 열려는데 천박하고 요란한 차림의 생쥐가 들어온다.

생쥐여. 천 안녕.

어. 생쥐 안녕. 어디 아파?

생쥐아니. 내가 의사 선생님께 볼 일이 있어서 말이야.

의사나한테? 어디 아프냐?

생쥐(조심스럽게)예. 늘 아픈데가...아시잖아요

의사(멀뚱멀뚱 생쥐를 쳐다보다가)난 잘 모르겠다. 어디가 아픈지.

생쥐선생님. 제발. 제가 돈 나중에 드릴게요.

의사(천을 의식하며 소리지른다)무슨 소리야. 누가 들으면 내가 돈만 밝히는 수전노인줄 알겠다! 내가 언제 돈 없다고 치료 안 해준 적 있어

생쥐(풀이 죽어서)아니죠.

의사그럼 뭐야. 이렇게 불쑥 들어와. 아픈 곳도 제대로 안 밝히고, 돈 얘기하면 내가 꼴이 어떻게 되겠어. 이렇게 천군도 있는데!

생쥐죄송해요.

의사어디 아파? 아프면 말해. 치료해 줄 테니. 말해봐.

생쥐(마지못해)안 아파요.

사이. 어색한 침묵.

생쥐그러고 보니 천 왜 왔어

선생님이 부르셨어. 이서랑 만나보라고 하시는데.

생쥐이서? 그 새끼. 또라이야. 시궁창만 뒤지다 보니 머리가 이상해진 거야.(머리에 원을 그린다)

시궁창을 뒤져?

생쥐마을 음식물 찌꺼기 모아서 시내로 가서 판데. 매주 한 번씩 가.

의사그걸 누가 사?

생쥐찌꺼기를 비료로 만드는 공장이 있다는데. 시내 가는 거 선생님은 아시지 않아요?

의사내가 뭘 알아? 이 녀석이 들어와서 이상한 소리만 늘어놔!

너. 이서에 대해서 뭘 알아? 친하다거나

생쥐친해? 그 새끼랑 친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 냄새나는 거지 놈인데.

그럼 최근에 익준이 턱 날린 건? 얘기 들은 거 없어

생쥐(신이 나서)이야. 그거? 내가 봤어. 바로 앞에서 봤어. 주점에서 건너편 테이블에서 익준이가 술먹고 있는데, 이서 그 새끼가 주점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익준이한테로 일자로 걸어가서 턱을 날리더라고.

바로? 다짜고자?

생쥐어. 나중에는 올라타서 주먹으로 아주 난도질을 하더라고. 턱이 부러질 만 하지.

의사임마! 이만 가봐.

생쥐예.

의사나가라고. 중요한 일 있으니.

생쥐, 천이 눈치 채지 못하게 의사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낸다. 의사 무시한다. 생쥐 힘없이 걸어 나간다.

의사생쥐!

생쥐예.

의사이따와.

생쥐(좋아한다)예! 천. 내일 보자.

생쥐 잘가.

의사자. 방해꾼이 사라졌으니. 주인공을 모셔올까

의사 안쪽 방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간다.

의사 목소리야! 어서 일어나. 여기가 네 안방이야

이서 목소리뭐야?

의사 목소리뭐야 같은 소리하네. 그 이불 왜 덮었어

이서 목소리덮을게 없으니까!

의사 목소리그래도 그 이불 덮으면 안돼!

이서 목소리그럼 나보고 화투장 담요나 덮으란 말야?

의사 목소리네 녀석한테는 그것도 감지덕지해!

이서 목소리웃기고 있네. 아! 혹시 간호사랑 그 짓할 때 이거 덮었어?

의사 목소리이 자식이 못하는 소리가 없네. 당장 안 일어나

천 소리 죽여 웃는다.

이서 목소리

의사 목소리나가보면 알아.

의사랑 이서 사무실로 나온다. 이서, 천을 보고 놀란다.

이서뭐야 저 자식 왜 여기있어

의사저 자식이라니! 너 같은 놈이 함부로 부를 그럴 인재가 아니야!

이서인재?

의사그래. 10년 뒤에는 너 같은 놈은 감히 쳐다도 못 볼 것이야. 나는 다르지만..

이서뭐가 달라? 간호사랑 대낮부터 엉겨붙으면서.

의사니가 봤어?

이서안 봤겠어? 내가 여기 드나든 게 골백번은 더 될텐데

의사어머니 치료해주니 은혜를 원수로 갚아!

이서은혜? 싸구려 약으로 치료하고,(의사 흉내)못 먹으니 아픈 거죠 라고 빈정대는 게 치료야? 당신이 엉망으로 치료해줘서 내가 엄마 모시고 시내까지 갔다 왔어. 돈이 두 배로 들었다고. 내 월급 반이 날라 갔어!

의사엉망 좋아하네. 역시 무식한 것들은 안돼.

이서시내 의사가 그러더라. 누가 이 따위로 처방전 써줬냐고. 누가 무식한 거야? 실력이 없으니 이딴 시골에 귀양 와 있지.

의사귀양은 무슨!

이서(천을 가리키며)아무튼 쟨 왜 여기 와 있어

안녕(이서 고개를 돌린다)

의사뭐하는 거야? 못 배운 티 내는거야? 인사는 문명의 기본 아냐?

이서거부도 문명의 기본이야.

의사웃기고 있네.

이서(짜증스럽게)쟤 왜 왔냐고? 몇 번 묻는 거야!

(한 발자국 다가가며)어떻게 지내나 보러 왔어.

이서(의사에게)뭘 보러와. 갇힌 꼴을 보러 와? 취미 좋네.

의사아이고. 이런 놈에게 은혜를 베푸는 내가 호구지.(천을 보며)자네는 내 맘 알지

어떻게 지내?

이서니 눈에 어떻게 지내는 걸로 보이냐?

천, 이서의 태도에 팔짱끼고 이서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이서뭐야?

좋게 지내는 걸로 보이진 않군.

이서그게 뭔 상관이야

의사이것보라고 이 눈을 봐. 아무 꿈도 미래도 없는 죽은 눈을 봐봐. 이런 놈한테 호의가 무슨 소용이야

이서(버럭 소리 지른다)내가 왜 꿈이 없어!

의사, 겁먹고 움츠러 든다. 눈으로 천에게 도와 달라 신호 보낸다. 천 한발자국 더 가까이 온다.

그래. 진정하고 얘기나 할까. 나를 봐봐.

이서(고개를 돌리며)너랑 할 얘기 없어.

정말 그럴까?

이서없어.

정말

이서어. 없어. 아니 있다.

그렇지

이서시간낭비 하지 마. 가!

(의사를 보며)자리 좀 비켜 주실래요?

의사알았네.(이서에게)이 고집불통 짐승아. 너 왜 이렇게 무식하니 못 배운 티 내냐? 사람들이 이렇게 은혜를 베풀어도 모르냐

이서당신 같은 인간의 은혜 필요 없어! 내가 정말 무식했으면 엄마 더 나빠질 때까지 아무 것도 모르고 당신 약만 먹였겠지.

의사야이. 새끼야. 그건 니가 몰라서 그런 거야. 의사마다 관점이 있어!

이서당신 비뇨기과잖아? 근데 왜 여기서 내과 행세해? 불법 아냐?

의사(당황한다)누가 비뇨기과라고?

의사 당황해서 천의 눈치를 본다. 천, 고개를 돌리고 못 들은 체 한다.

이서당신. 시내에 소문 다 났어. 의료사고 일으켜서 여기로 쫓겨났다고..시내 의사가 그러던데 어떻게든 다시 시내로 돌아갈려고 명절마다 와서 빈다면서(비는 시늉한다)이렇게.

의사누가 그 딴 허무맹랑한 소리해

이서나중에 다시 시내갈 때 그대로 전할게.

의사싸가지 없는 놈. 이래서 애비 없는 자식은 안 되는 거야!

이서(소리 지른다)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와!

의사와 이서 서로 마주 노려본다. 천 말리려 드는 순간. 노크 소리가 들린다.

의사(화난 목소리로)누구야!

아리 목소리선생님. 저 아리인데요

아리?

의사들어오렴.

아리 사무실로 들어온다.

아리안녕 하세요.

너 여기 왜 왔어?

의사그래. 무슨 일이니?

아리이서에게 이것 좀 갖다 주려고요.(바구니를 내민다)

이서(놀란다)나한테?

아리어. 배고프잖아. 쿠키를 구웠어.

의사아리야. 이 녀석은 짐승 같은 놈이야. 이런 거 필요 없어.

아리예?

이서(화낸다)누가 짐승이야!

의사(이서에게 삿대질한다) 너 말야. 너!

(아리에게서 바구니를 가져온다)내가 건네줄게. 지금 분위기가 아니니 이만 가봐.

아리응.(나가다가)이서야.

이서어.

아리힘내. 이따 또 올게.

이서(멍해 있다가)고마워.(아리 나간다)

선생님. 저..잠시만..

의사그래. 난 산책이나 다녀와야 겠어. 머리 식힐 겸.

이서어딜 도망가!

의사도망은 무슨! 우회적으로 자리 피해주는 거야. 일자무식아!

이서그래? 그러면 산책하는 김에 김 간호사한테 전화해봐.

의사왜?

이서헤어지자는데? 더 이상 갖고 놀지 말래잖아.

의사(놀란다)뭐?!

이서(안쪽 방을 가리킨다)편지 봤어. 김간이 남기고 갔는데...안 봤어?

의사정말?!

이서어! 그러게 유부남이 왜 그래.

의사(혼잣말)망할 년...오갈데 없는 조무사를 간호사라 불러주니.

의사 허둥지둥 사무실을 나간다. 천 탁자 위에 바구니를 내려놓는다.

큰일이군. 선생님.

이서인과응보지.

쿠키라...아리가 잘하지. 맛있겠다.

이서너랑 할 얘기 없다고.

난 있는데.

이서그럼 너 혼자 해.

왜 때렸어?

이서안 한다고.

시내로 가서 턱을 철사로 붙였대.

이서꼴좋네. 멋있겠는 걸.

그래. 멋있어? 똑같이 만들어 줄까?

이서아. 그래. 이게 용건이냐? 누가 똑같이 되나 해볼까? (잠시 생각하다가)아니. 관두자.

왜?

이서알바 아냐.

겁 먹었냐?

이서겁은 무슨. 넌 한방 감이야.

그렇게 생각해? 쉽지 않을 텐데.

이서(손을 내젓는다)오늘은 봐준다. 가라.

그럼. 더 운 좋게 해줘. 얘기나 하자.

이서까불지 말고 가라.

심심하잖아. 얘기할 사람도 없잖아. 나랑 하자.

이서(짜증낸다)귀찮아 가!

왜 나한테 적대적이지?

이서그렇게 느껴?

좋은 분위기는 아니잖아. 너와 난 친하게....거의 남...아니 남이지.

이서(불쾌해하며 얼굴이 일그러진다)남이라..맞아. 남 일이고, 넌 쓸데없이 여기서 시간 낭비하고 있어. 가. 에비.(내쫓는 손짓한다)

왜 내가 싫어?

이서널 좋아해야 하나?

이유가 있어야 할 거 아냐. 너와 나는 같은 마을에 살았던 것만 빼면 아무 교류도 없었어. 교류 없이 무슨 이유가 있어.

이서이유? 너 저번에 주점에서 내 자리 뺏었던 거 기억 안 나

그거? 너한테 양해 구했잖아. 내 친구들이 많아서 비켜 달라고 한 거야. 넌 빈자리로 가서 계속 마셨잖아.

이서그래. 나 구석 가서 혼자 마셨지.

같이 합석할 수도 있었어. 그럴 마음이 있었고, 그렇게 말했다면...

이서(비꼬듯)맞아. 넌 마음 넓은 사람이지? 난 아니어서 미안하게 됐다.

결국 내 친구랑 싸웠고.

이서친구? 니 똘마니겠지. 딸랑딸랑 거리는 추종자들.

내 친구들을 모욕하지 마.

이서예. 예. 분부대로 합죠.

폐지 줍는 아저씨가 너 걱정하더군.

이서폐지 줍는 아저씨가 한 둘이야.

그 튀기 아저씨 있잖아.

이서혼혈이라고 부르는 거야. 튀기는 욕이야!

알았어. 혼혈. 혼혈 아저씨가 너 걱정하더라고, 안부 전해 달래.

이서받았다 그래.

너 그 아저씨. 점심 챙겨 준다며? 겨울에는 보일러도 고쳐주고.

이서 고개 돌리며 귀를 판다.

마음씨 좋은 사람이 왜 이래

이서난 안 착해. (가슴을 가리킨다)이 안에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어.

왜?

이서왜는 무슨 왜야.

(달랜다)난 듣고 싶은데

이서너한테 할 얘기 아냐. 다른 사람들은 다 몰라도 너한테만은 할 얘기 아냐.

나? 왜 나야?

이서(진지하게)몰라도 돼.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나중에라...

이서그래 나중에. 나중에 확실히 알게 될거야. 싫어도.

그때가 언젠데

이서언젠가 알게 될 거야.

그때가 궁금하군.

이서지금 내 꼴을 실컷 비웃어라. 나중에 후회할지 모르니.

난 널 비웃으려 온 거 아냐. 널 도와주고 싶어서 그래.

이서(코웃음치며)그래. 뭘 도와주고 싶으십니까? 또 소문 퍼졌어? 사실인지 궁금해서 긴박감 넘치게 만들어 줄까?

오해하는 것 같은데 나는 여기 오기 전까지 너랑 얘기 할 줄 몰랐어.

이서그래...그런가? 네가 올 줄은 나도 몰랐어. 하지만 예상 가능했지. 제길. 내가 왜 생각 못 했을까? 돌팔이 의사가 지 나이 값도 생각 안하고 너를 떠받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좋게 갔으면 좋겠는데...

이서뭘 좋게 가?

왜 그랬어?

이서궁금하면 익준이한테 가봐.

지금 시내로 실려갔어. 익준이는 나중에 듣지. 그 전에 가까이 있는 사람 먼저.

이서나 맘은 먼데 있어. 미안. 할 말이 없네요.

그렇게 나오면 니가 세다고 느껴져?

이서뭐?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피하니까 니가 뭐라도 된 것 같아?

이서누굴 바보로 알아?

바보가 아니면 왜 지금 이 상황에서 이렇게 의기양양할까?

이서의기양양하지 않아. 내가 아무리 무식해도 그럴 정도는 아냐. 나 엄청 복잡하니까. 그냥 가.(생각났다는 듯)아. 넌 나한테 이럴 수 없어. 나한테 빚도 있는데.

내가 너한테 빚이 있어?

이서그럼. 내가 주점 아저씨랑 싸운 거 기억 나? 그 빌어먹을 영감탱이가 알바하는 여자애들 다리 만진다는 거 알지? 내가 왜 싸웠는지 알아? 그 날 영감 그 새끼가 아리를 만졌어. 아리가 싫어하는데도. 그때 넌 니 똘마니들한테 에워싸여서 술 마시고 있었지. 아리는 몇 번이나 네 쪽을 쳐다봤는데도 넌 계속 니 똘마니들하고 바보같이 웃고만 있었어. 이게 내가 싸운 이유다. 이래도 빚진거 없어?

그랬나?(생각하다가)하지만 장난이겠지.

이서(놀란다)뭐? 장난

너무 예민한 거 아냐? 그런 장난칠 때도 있는 거야.

이서아리랑 사귀는 거 아니었어?

사귀지.

이서사귀는데 그걸 봐줘?

장난이잖아?

이서아리도 그렇게 생각할까.

나 너한테 이 얘기 처음 들었어. 아리가 말 안했다면 걔도 그렇게 느끼지 않을까?

이서정말 아무 말도 안 했어?

너무 예민한 거 아냐? 이 얘긴 접자.

이서그럼 할 얘기 없어.

외로울 텐데?

이서안 외로워.

그러니까 더 외로워 보여. 너 친구 없잖아. 매일 더러운 옷만 걸치고 다니고, 냄새 풍기잖아.

이서뭐 이 새끼야? 죽을래? 사람들이 더러워 하는 일, 니들이 안 하는 일 한다고 친구 없다고 몰아세워? 나 없으면 우리 마을이 어떻게 되는지 아냐?

음...그 것보다 성격 문제가 크지.

이서잘 넘기네. 너 말로 먹고 살 것 같다.

미안. 난 말보다 얼굴로 먹고 살 것 같다.

이서(아무런 악의 없이 즐겁게 웃는다)농담한 거지?

오다가 너희 어머니 봤는데...눈에 힘이 없드라. 눈이 풀렸어. 왜 그럴까?

이서 고민하는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다.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제발 이러지마. 얘기나 하자. 이렇게 아무 의미 없이 폭력 휘두르고 기세등등할 때가 아니잖아. 애 같아.

이서애?! 내가 애 같다고?! 너 자초지종이나 알고 있냐?

어떻게 때렸는지 소문으로 대충 들었어. 그거 재연하는 거 기대하고 온 거 아냐. 모든 행동에는 다 이유가 있지.

이서이유라...그래 그 자식이 못 봐주겠더라고. 맨날 살랑살랑 거리고, 힘 있는 사람들에게 아양 떠는 거 말야. 좆같아서 한 대 쳤다.

좆같아서라..그냥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익준이 그렇게 안 보는데? 이유가 빈약해.

이서(비아냥, 흥분한다)아 그러세요? 너 같은 애들. 아니 사람들한테나 사교성 좋은 걸로 보이지. 그 녀석은 말야. 힘 있으면 앞에서 살랑거리고 아부하고 친한 척하고, 약하고 못났다 싶으면 가차 없이 헐뜯고 모욕 주는 놈이야. 지윤이라고 알지?(천 고개를 끄덕인다)익준 그 녀석 할 일 없으면 지윤이 괴롭히고 그랬어. 너 알았어? 몰랐겠지. 니 앞에서는 늘 알랑방귀 끼면서 아부했으니. 익준 지나가면서 지윤이 걷어차고, 앞에서 비아냥 대고 지윤이 글쓰는 거 빼앗아서 큰 소리로 읽으면서, 쪽주고...하루는 여자친구랑 같이 걸어가는데 일부러 시비 걸었어. 촌스러운 80년대 영화처럼. (목소리 낮게 깔며)어 그림 좋은데 하고..왜겠어? 그냥 지 재미 보겠다 이거 아니야

니가 무슨 상관이지? 니 말이 맞다고 쳐도 너는 아무 상관없어.

이서상관없어? 그럼 알리안사 아저씨는?

알리 뭐?

이서혼혈 아저씨 이름이 알리안사야! 그 아저씨 간섭한 거는 뭐라 안하고 이거는 왜 그러냐?

점심 챙겨준 거랑 때린 거랑 같냐? 유치하게 굴지 마.

이서유치라...맞어. 나 유치해. 그럼 똑똑한 천씨는 혼혈 아저씨 이름도 왜 몰라?

(생각하다가)몰라. 근데 모르는 건 죄가 아니지.

이서정확히 말하면...모를 려고 하는 거지. 수준 떨어지는 사람은 상대도 안 하겠다는 거 아냐?

니 눈에는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냐?

이서너...너를 포함한 이 마을 사람들 모두. 다 그렇지. 다 똑같은 시선을 가지고 있지. 같은 등급...같은 생활수준을 공유하고 있다는 믿음. 그 믿음에서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모를려고 안 보려고 해. 봐도 무시하려 하지. 맞어 죄 아냐. 니가 정상이야.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가려 보니까.

천, 이서의 말을 듣고 팔짱을 끼더니 생각에 잠긴다.

이서주점 뒤 창고알지? 거기서 우는 거야. 내가 맨날 술 찌꺼기 치우니까 한번 들렸는데 하도 서럽게 울더라. 이유를 물어봤어. 힘 약하다고 말 좀 못한다고 사람 그 따위로 대하는 게 정상이야? 내가 다 들어주고, 돌아서는데 주점 안이 슬쩍 보인거야. 지윤이한테 익준 그 새끼가 사냥감 본 사냥꾼처럼 미소 지으며 또 시비 걸고 있는 거야. 나는 그 미소 절대 못 잊어. 씹새끼. 지는 높은 수준 안에서 안정적이라는 미소. 처음부터 끝까지 우월하다고 믿는...역겨워서 내가 한방 날렸어. 이제 알아듣겠어?

들었어. 주먹으로 난도질을 했다고.

이서한방 날리니까. 얼굴이 붉어져 눈가에 눈물이 고이더라고. 왜 때리냐고 묻길래 씨발놈아 다시는 지윤이 건들지마라고 소리 지르니. 지도 알았다고 하더라 근데 왜 폭력으로 문제 해결하냐고 징징댔어. 그게 얼마나 웃겨? 지는 힘쎄니까 약한 애들 괴롭히다가 지가 당하니 그제서야 폭력은 나쁘다고 말하는 게. 비겁자고 위선자야! 그래서 신나게 두들겨 줬다!

틀린 말은 아니네.

이서지가 질만한 상황이니 나쁜 거 겠지. 사람은 자기가 질 확률이 높을 때 엄청 착해져.

거 괜찮은 말이네. 질 확률이 높을 때 사람은 선해진다라..

이서뭐? 내 말 듣고 있어

어. 듣고 있어. 직업병이야. 배우들은 원래 좋은 말이 나오면 이렇게 곰씹어.

이서(순간적으로 기가 약해진다)그렇구나. 넌 배우가 되려 하지...(다시 기를 살려서)아무튼 넌 배우도 아닌데 무슨 직업병이야!

아니야. 난 늘 내가 배우라고 생각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런 마인드를 가져야해. 될 수 있다는 을 넘어 됐다는 긍정적인 마인드.

이서뭐 임마? 마인드

나는 익준이를 너처럼 극단적으로 안 봐. 익준이는...사람들이 흔히 그러지 나대기 좋아한다고 맞어. 나서는 거 좋아해. 하지만 나서는 만큼 모두의 일에 도움을 주지. 옛날에 마을 제방 쌓을때 기억나? 너도 왔을 텐데..거기서 익준이는 두 사람의 몫을 해냈어. 그렇게 나서는 만큼 자기가 책임질 줄 알아.

이서웃기고 있네. 두 사람의 몫은 얼어 죽을..너와 이장아저씨 다른 데 가니 언덕에 올라가 담배 피면서 니네 오나 안 오나 망봤어. 오니까 갑자기 포대 두 개를 옆구리에 끼며 일하는 척 했고....

천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서안 믿기지? 상식적으로 생각해봐. 계단 오를 때도 헉헉대는 그 돼지놈이 어떻게 계속 포대를 나를 수 있었겠어. 그것도 두 개나. 체력이 안 되잖아? 계산이 안 나와? 그때 이장 꼰대가 나보고 뭐라 했는지 알아? 허우대는 멀쩡해가지고 힘알이가 없다 하드라. 당연하지. 너와 이장은 격려 밎ㅊ 지휘 한답시고 뒷짐지며 소풍 다니고 익준 그 돼지 새끼는 눈치만 보는데..누가 일해. 내가 다 해놓고 기운 빠지니까 옆에서 깐죽 거리긴.

알았어. 너도 마을을 위해 애썼다는 거. 섭섭 했어?

이서누가 지금 생색내려 해? 너 제방쌓기가 다방 오봉순이 허벅지 위에서 나왔다는 거는 알고 있냐?

제방 쌓기는 마을 모두를 위한 결단이었어. 네 수준으로 끌어내리지 마.

이서(소리 지른다)내 수준? 내 수준이 뭐 어때서. 너 같은 사람들이 더럽다고 천하다고 하는 일. 다 해주는 게 나야. 내 수준이 뭐 어때서? 다방에서 시내 시청 사람들하고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하다가 제방 쌓기하면 이장 선거에 도움 되겠다 싶어서 다방 레지 허벅지 더듬다가 오케이 한 거 였어. 네가 봤어? 난 봤어!

남자가 일하다보면 여자 나오는 술집이나 다방이나 갈 수도 있는 거야.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흔들지마. 그 결정은 결국 옳았잖아.

이서그래. 옳았지. 왜 히필 그때 했을까? 제방 쌓자는 얘기는 예전부터 있었는데? 제방 얘기만 나오면 빙 말돌리다가 갑자기 하자고 했을까? 난 봤다니까!

그래. 너 봤어. 인정해. 본론으로 가자. 말이 너무 다른 데로 가는 것 같다.(침묵)갑자기 생각나는 일이 있는데, 아리가 주점에서 알바할 때 술통 옮기기 힘들어하니 익준이가 가서 도와주더라. 그것도 친구들이랑 술 먹을 때 혼자 가서. 여러 번이나 왔다갔다하면서 도와줬어. 한창 놀 때 빠져서 돕는 거 쉬운 일이 아니잖아. 장난이 심했을지도 모르지만...익준이는 본성은 선량한 애야.

이서그건 아리가 니 여자 친구니까 그랬지! 익준 그 놈은 머리로 엄청 계산하는 놈이야. 어떻게 해야 선해 보일지. 이미지에 좋아 보일지 아는 놈이야.

선량한 행동을 보면서 그렇게 꼬인 생각을 한다는 게 타인을 설득할 수 있을 거 같아? 심한 억측이야.

이서익준이 어떤 놈이냐 하면 햄스터를 삽으로 때려죽이는 놈이야. 단지 재미로...아리 햄스터 였어. 아리가 햄스터를 손바닥위에 올려놓고 모두에게 자랑하러 왔는데...삽 위에 올려 보라 하더니 휙 튕기더니 후려쳤어. 넋 나간 아리를 내버려 두고 웃으면서 가버렸어. 그 후로 아리와 익준은 다시는 서로를 아는 체 안 했어. 그러다가 아리와 네가 사귀니...아리 눈치를 슬슬 보면서 어떻게든 도우려 하더라. 아리는물 론 싫어했지만 티내면 너랑 익준 사이에 금갈까봐.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어. 아리는(작은 목소리로)착한 애지.

잠깐...언제 일이야? 난 그런 얘기 못 들었는데?

이서재미로 햄스터를 때려죽이는 놈이 선량한 놈이야?

언제 일이냐고? 어떻게 알고 있지?

이서우리 어렸을 때..

너 어렸을 때부터 아리랑 친했던 거야? 이상하다. 둘이 얘기 하는 걸 전혀 못 봤는데

이서그래. 못 봤지. 얘기 한 적 없어. 최근까지는...아니 커서. 잠깐..너 기억 안나?

뭐가?

이서(혼잣말)아니다. 정말 모르구나. 몰라도 돼! 알아서 뭐하게?!

왜 소리 질러?

이서아무튼 익준이는 네가 지켜보고 있다는 거 계산하고 있었어. 그러니까 네가 보고 이렇게 옹호하지.

무슨 소리야? 행동할 때 왜 날 의식해?

이서넌 인기 많으니까. 영향력이 있으니까. 너에게 인정받을 려고. 그게 다 힘이야. 그 놈은 힘 있는 놈한테 잘 보이려 하는 놈이고.

(생각하다가)그래. 네가 모든지 그렇게 극단적으로 보면 어쩔 수 없지만.

이서극단적이 아니래도!

(위엄있게)내 얘기 들어. 네가 본 게 맞을 지도 몰라. 보는 관점이 시니컬하지만, 긍정하는 부분도 있어.

이서시느컬.

시니컬. 냉소적이라고.

이서(기가 죽는다)그래. 넌 많이 배웠지.

(침묵)그렇게 많이 배우지는 않았어. 상식이야.

이서난 그것도 몰라. 마인드도.

(침묵)설사 네 관점이 맞았다 하더라도. 그래도 상식이란 게 있잖아. 보통 사람들은 이런 일이 있으면 주변에 알리거나 권위 있는 사람을 찾아가 해결이나 중재를 요청해.

이서네가 말한 보통 사람들 중 몇 명은 지윤이가 우는 것을 봤는데도 그냥 못 본체 했어. 아무 일 없이 창고에 오줌 갈기고는 계속 술 마시러 가버렸어.

그런 사람도 물론 있어. 자기 일 아니면 신경 안 쓰는 사람들.

이서(혼잣말)난 도와주려 했어.

그렇겠지. 하지만 결과적으로 똑같이 됐어. 네가 익준이를 때린 순간 너도 똑같은 놈이 된 거야.

이서내가?

그래. 너랑 익준이랑 다른 게 뭐야? 너는 지윤이를 감싸려 했다지만 그런 식의 감싸줌이 과연 도움이 될까? 익준이가 세다고 괴롭혔다고 했지? 너도 세다고 익준이 억누른 거야. 목적이 좋아도 폭력은 정당화 할 수 없어. 호의든 부탁이든 받아들이는 건 받는 이의 선택이야. 이런 소동을 지윤이가 고마워 할 것 같아? 정신 좀 차려!

이서 말없이 의자에 앉는다. 천 한발 짝 다가간다.

내가 왜 이러지? 원래 이러지 않는데...좋게 못 갔군. 이해해.

이서(혼잣말)그러네.(침묵)바보 같네.

걱정 마. 내가 왔으니 됐어.

이서뭐? 니가 뭔데

너 정말 내가 왜 왔는지 몰라? 아무 얘기 들은 거 없어?

이서니가 나 만나러 왔다며? 의사가 징징대서 온 거 아냐?

(고개를 가로젓고)모르는 구나.(바구니를 연다)쿠키나 먹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서뭘 알아서 해!

(생각하다가)아냐. 넌 몰라도 돼. 나 간다. 대화...좋게 갈 수 없었지만 널 위해서 였으니 이해해라.(나가려 한다)

이서(소리 지른다)뭘 몰라도 돼! 뭐야. 이 새끼야. 너만 얘기하고 가면 땡이야? 니가 뭘 알아서 해.

넌 욱하는 게 있어. 치료 받으면 될 거야. 내가 좋게 얘기 해줄게.

이서장난해? 내 일. 인생이 걸린 문제를 니가 얘기 한다면 내가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 할 것 같아? 니가 나에 대해 뭘 알아?! 넌 몰라!

말싸움 받아줄 시간 없다. 나중에 알게 돼. 나 간다.(나가려 걸어간다)

이서 탁자에 붙은 벽면의 창문을 주먹으로 부신다. 날카로운 소리에 천 놀라서 뒤돌아본다.

이서너 늑대가 스스로 자기 발을 물어뜯는 그 심정을 알아?! 피가 줄줄 흘러도, 아파서 죽을 것 같아도 악착같이 자기 살점을 찢어내는 이유를 알아?!

(당황한다)야야.

이서(악을 쓴다)이 수수께끼 답을 알겠어?! 왜겠냐고?!

암전.

무대 밝아진다. 부서진 창문 신문지로 대충 가려져 있다. 이서 탁자에 앉아 쿠키를 먹고 있다. 사이. 생쥐가 들어온다.

생쥐(이서를 보고)이씨. 뭐야.

이서너 뭐냐? 아파?

생쥐뭐야. 멀쩡하네.

이서그럼. 멀쩡하지.

생쥐너 언제 철들래

이서뭐? 거 참 니 입에서 그런 소리 들으니 웃기네.

생쥐뭐야? 이 무식한 새끼가!

이서무식한 건 너지. 너 학교 문턱 밟아본 적도 없잖아.

생쥐내가 왜 없어!

이서없잖아. 다 알어. 너 까막눈인거.

생쥐미친 놈. 지는.

이서 고개를 돌리고 씁쓸하게 웃는다.

생쥐뭐 묻은 놈이 뭐 묻은 놈 욕한다고.

이서있어.

생쥐지랄! 구라까고 있네.

이서왜 왔어? 아프냐?

생쥐아프긴 니미. 의사 어딨어?

이서몰라. 어디 가더라.

생쥐씨발. 약 주기로 해놓고.

이서뭔 약?

생쥐몰라도 새끼야. 니 걱정이나 하세요.

이서니 입에서 그런 소리 나오니 참 듣기 거북하다. 너희 어머니는 아직도 남들이 버린 양말 꿰고 있어. 제발 어머니 생각해서 정신 차려라.

생쥐이 새끼가. 이 형님은 큰 거를 노리고 있어. 다 때를 위해 기다리는 거야.

이서그거 오기 전에 니네 가족 굶어 죽겠다. 바보야.

생쥐너 같은 놈이 뭘 알겠냐? 쓰레기나 줍는 놈이.

이서먹고 살려면 무슨 짓이라도 해야지. 나라고 날 때부터 그런 줄 알아

생쥐너 없는 집 자식이잖아?

이서옛날에는...아니었어.

생쥐 몸을 긁적인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자세히 살피기 시작한다.

생쥐씨발. 어디다 뒀을까?

이서뭐 찾어?

생쥐 여기저기 뒤지며 부산하게 돌아다닌다.

이서야. 그러고 보니 말야. 내가 여기...짱 박혀 있다가 생각난 건데...봄에 뒷산에서 등산로 공사 한 거 기억 나냐? 일찍 끝나서 절벽에서 로프타기 했잖아. 근데...아무도 섣불리 뛰어 내리지 못했잖아. 다들 두려워하고. 그때 천이 혼자 나서더니 거침없이 로프 타고 내려갔지. 마치 옛날부터 해왔다는 듯. 자연스레 몸에 뱄듯이 아름답고 멋있게. 사실 나도 그때 나서려고 했는데...뭐 찾아?

생쥐(신음소리)아 나. 추워. 뭐 없냐.

이서이 날씨에?(안쪽 방을 가리킨다)저쪽에 담요 있어.

생쥐맞다. 저 방.(안쪽 방으로 뛰어 들어 간다)

안쪽 방안에서 뒤지는 소리가 들린다.

이서나중에 꼰대가 지랄해도 나 모른다. 어디까지 했더라. 나도 나설려 했는데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나는 거야. 두려움이었지. 무서웠어.(침묵)녀석은 안 무서웠을까? 어떻게 그렇게 당당히 해낼 수 있지?

생쥐 목소리(짧은 비명소리)아아악. 없어. 어디다 둔거야. 개새끼.

이서뭐? 나보고 한 소리야!

생쥐 부들부들 떨며 안쪽 방에서 나온다. 팔뚝을 걷어 북북 긁는다.

생쥐아. 아. 제발 어디 있는 거야.

이서뭐 찾어?

생쥐몰라도 돼. 새끼야.

이서그래? 도와줄 수도 있는데..뭐 찾아?

사이. 생쥐는 불안한 걸음걸이로 사무실 안을 왔다갔다 한다.

이서녀석은 뭘까? 뭔데 그렇게 겁도 없을까? 혼자서 로프타기 연습이라도 한 걸까? (침묵)무슨 일이 있든 사람들은 녀석을 찾았어. 양아치 새끼들 마을공사 꾀써서 빠지려 할때도. 이장이 뭔 일하러 사람들 모을때도...여자애들이 새로 산 옷을 자랑할 때도..줏대 없는 돌팔이 의사는 말할 것도 없고, 뭘 하든 이 좁아터진 마을에서 녀석없이 안됐어. 녀석이 뭐 길래? 이장도 아니잖아.

생쥐(신경질적으로)여자 애들한테 인기 많으니 부럽냐?

이서지랄. 니 수준으로 맞추지 말고.

생쥐내 수준이 어때서.

이서유치하게 굴지 마. 애 같아.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왜 녀석이 중심이냐 이 이야기지.사람들은 자존심도 없나?

생쥐(발을 동동 구른다)아 죽을 것 같아. 어딨어

이서야. 내 얘기 듣는 거야?

생쥐 후다닥 뛰어 나간다.

이서그러고 보니 저 양아치 새끼. 매번 공사 때 안 왔지. 나쁜 새끼.

생쥐, 밖에서 부서진 유리창을 막아 놓은 신문지를 뚫고 고개를 들이민다. 이서 놀란다.

생쥐여기도 없어.

이서뭐야? 미쳤어?

생쥐 다시 뛰어 들어온다.

생쥐(무릎 꿇고)제발. 신이시여.

이서(주머니에서 알약을 꺼낸다)이거 찾냐?

생쥐어! 이리 줘!

이서싫어.

생쥐달라고 새끼야.

이서(놀린다)싫어요. 생쥐씨.

생쥐내 이름은 성진이야!

이서본명 부르는 사람이 몇이나 있다고?

생쥐 달려들어 이서에게서 약을 뺏으려 하지만 이서의 힘에 밀려 나가떨어진다.

이서에헤. 막일로 살아온 몸인데 너한테 질 것 같아?

생쥐약 줘. 제발.

이서대답해. 왜 녀석이야

생쥐(흐느낀다)내가 어떻게 알아? 나 죽을 것 같아.

이서이거 도대체 무슨 약이야. 돌팔이가 나보고 시내에서 이거 운반 할 생각 없냐고 하기에 거절했어. 왠지 찜찜해서. 이거 뭐냐?

생쥐제발. 불쌍히 여겨 주세요.

이서웃기고 있네. 너희 어머니나 불쌍히 여겨라. 말해.

생쥐(몸을 뒤틀고, 악을 쓴다)몰라. 이 새끼야.

이서모르면 못 줘. 너도 공사 빠지거나 양아치 질 하러 갈 때 몇 번이나 천을 찾아 갔잖아. 마치 선생님께 허락 받으려는 애들같이.

생쥐제발. 그거 지금 못 먹으면 죽어.

이서내가 예상하는 약이면. 죽지는 않을 것 같아. 그럼 그때 생각이라도 말해.

생쥐(소리지른다)걔는 우리랑 다른 애야. 뭔가가 있다고. 걔는 머리 위에 고리 달린 것 같아. 우리랑 다르다고!

이서천사로 보여?

생쥐(악을 쓴다)수준 낮은 새끼야! 그거 말고. 특별한 거 같다고. 몰라. 그냥 원래부터 사람들이 몰려들었어. 원래부터 중심이었다고. 마치 그렇게 태어난 듯.

이서그렇게 태어난 사람이 어딨어?

생쥐걔한테 물어봐! 사람들이 그랬어. 천 옆에 서면 비가 내려도 안 맞을 것 같다고...여자들은 질질 싸고..애나 어른 할 거 없이 모여들고...잘난 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이서궁금해서...사람들이 왜 쉽게 자존심도 없이 기대고 따라 다니냐 해서..(약을 주려 자리에서 일어난다)그렇게 보인다는 거지(혼잣말)하긴 나도 그렇게 느낀 적이 있었지. 옆에 서면 비가 내려도 안 맞을 것 같았어.

생쥐감방 갈 새끼가 궁금한 것도 많다.

이서내가 감방을 왜가?

생쥐너 폭행했잖아.

이서주먹질은 저번에도 있었어. 이 시골구석 일 처리하는 거 모르냐? 이번에도 깽값 물어주고 사과하라 하겠지.

생쥐병신아. 술 먹고, 가볍게 투닥 거린 거와. 턱이 부러진 게 같아? 넌 기회도 날렸어. 천이 널 구해주러 왔는데 그 지랄하다니.

이서날 구하러 와?

생쥐의사는 니가 미쳤댔어. 너 무슨 병 있다고, 승질 내는 병인가? 아무튼 그런 거 있다고..파출소장은 안 믿었고. 둘이 내기를 했는데...내세운 사람이 천이야.

이서미쳤다고!

생쥐미쳤다면 감방 안 갈 수도 있대. 그래서 천이 너 미쳤나 보러 온 거야.

이서누가 그래?

생쥐벌써 온 마을에 소문 다 났어! 니가 또 지랄한 것도.

이서씨발. 좁아터진 마을. 이런 건 빨라. 왜 돌팔이가 나를 구하려 했을까(생각하다가)아! 나한테 빚을 지게해서 이걸(약을 본다)운반하게 하려고. 개새끼.

생쥐파출소장도 니가 운반책이라고 생각해.

이서내가 왜?

생쥐네가 허구헌날 병원 들락거리고, 시내도 거의 매일오가니까...파출소장이 의심하는 게 당연하지...이번에 의사가 감싸니까 더욱 심해졌을 걸?

이서고작 그거 가지고...

생쥐네 이미지를 생각해봐. 넌 또라이야!

이서(침묵)안돼. 갈 수 없어. 가면 끝장이야. 영영 이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어.

생쥐(떨리는 목소리로)약 줘. 제발.(신음소리)남자라면 빵에 한번 가야지.

이서지랄마. 너나 가. 나 결백해. 가서 자수할 거야.

생쥐네 말을 믿어 줄 것 같아? 내가 파출소장 그 인간 잘 알아. 옛날부터 거기 들락날락 했지. 그 인간은 자기가 틀린 걸 절대 인정 안해. 약 운반책이 아니다 하더라도 폭행으로 엮어 버릴걸? 어쨌든 때렸잖아.(헐떡이는 기침소리)넌 끝났어.

사이. 이서 의자에 가서 얼굴을 감싸 쥐고 생각에 잠긴다.

생쥐(바닥을 뒹굴며, 고통스럽게)약 줘!

이서 생쥐에게 다가가 약을 내민다. 생쥐 약을 받으려고 손바닥을 내밀자 이서 약을 쥐어주면서 생쥐 손까지 강하게 쥔다. 생쥐 비명을 지르며 고통스러워한다.

이서약 줄게. 가서. 당장 천 불러와. 의사한테도 가서 전해. 지금 안 오면 다 불어 버린다고, 이판사판이야!

무대 암전.

무대 밝아진다. 이서 창문에서 뜯어낸 신문지를 꽉 쥐고 생각하면서 왔다갔다 하다가 구겨 버리고 바닥에 던진다.

이서제길!

아리 들어오다가 이서를 보고 놀란다.

아리어머!

이서어? 아리야?

아리미안해.

이서뭐가?

아리와서.

이서(웃으며)너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짜증나서 그랬어.

아리정말?

이서그럼. 쿠키 잘 먹었어.

아리그래? 고마워. 맛있었어

이서어.

대화가 끊기자 어색한 침묵만이 돈다. 사이. 이서, 아리 동시에 말을 하려다가 멈춘다. 이서가 먼저 말하라고 손짓한다.

아리그림 정말 괜찮았어?

이서그림? 뭔 그림?

아리전에 본 그림 말이야.

이서(생각에 잠긴다)한 3개월 전이던가? 뜬금없이...어 예뻤어.

아리그래 다행이다.

이서왜?

아리그거 물어보고 싶었거든.

이서삼 개월 내내?

아리정말 괜찮았어?

이서그냥 물어보지.

아리물어보기가 좀 그래서.

이서아. 내가...평판이 좀 그렇지....본의 아니게 폐 끼쳤네.

아리아니야. 내가 소심해서 그런 거야.

이서소심? 누가 그래. 넌 섬세한 거야.

아리천이...소심하다고 그랬어.

이서나쁜 놈. 지 애인한테 할 말이 있지. 소심이라고 하냐. 같은 말이라도 섬세 있는데.

아리정말 그런 거 같지?

이서(손을 내젓는다)아냐. 그냥 그렇다는 거야. 너는..너는 소심아냐. 정말 섬세야. 빈말 아니야.

아리고마워.

이서(망설이다가)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내가 전에 주점 아저씨랑 싸운 거 알지?

아리그때 고마웠어. 정말 넌 변한 게 없더라.

이서그랬지? 그랬던 거지.

아리(고개를 끄덕인다)어렸을 때 그대로야. 여전히 사람들 돕고 착하기까지.

이서(쑥쓰러워 한다)아냐. 지금 이 꼴을 봐.

아리근데 그 일을 왜?

이서아무것도 아니야. 왜 왔어?

아리너 괜찮나 보려고...그래도 우리 친구인데..

이서정말? 그렇게 여겨주면 내가 고맙지.

아리천은 늘 나보고 그림 관두고...경리나 회계 배우라고 하거든...내가 아직도 그림 그리는 거 싫어해. 몰래 그리는데..네가 칭찬해주니.

이서(웃으며 놀린다)뭐야? 그림 때문에 온 거네

아리아니래두.

이서알아. 와줘서 고마워. 천이 그림 못 그리게 해?

아리(생각하다가)싫어해. 나도 주판알 굴리는 거랑...계산하는 거 싫은데...꿈만 보며 사는 사람이 왜 그렇지?

이서하긴. 녀석도 배우가 되고 싶어 하는데 왜 화가는 말릴까?

아리자기는 내 말 안 들으면서...다른 여자 만나면서...

이서집으로 데려가더라.

아리누굴?

이서말 안할래.

아리왜?

이서너 상처 받잖아. 미안. 못들은 걸로 해줘. 내가 괜한 말 했네.(자기 머리를 때린다) 에잇.

아리하지마. 나도 알아.

이서봤어?

아리그게 아니라. 피해 줄까봐 못 말하는 심정 말이야...나도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데...말하면 괜히 어색해 질까봐.

이서익준 그 놈. 개썅놈. 호로새끼지.(욕설에 아리 놀란다)미안. 미안. 내가 미쳤나봐.(자기 머리를 때린다)

아리괜찮아. 넌 변한 게 없어. 그때나 지금이나...남들 잘 돕고, 정직해. 성격이 욱하지만..

이서너도 변한 게 없어.

아리왜 나한테 말 안 걸어? 우리 옛날에는 함께였잖아? 나는 네가 그림 칭찬 해주길래.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어.

이서사람들 사이에는 선이 있거든. 돈이나 지위, 혹은 명예 같은 게 있어. 그런 선들 사이에서 떨어지면...누군가에게 말 거는 자체가 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으로 여겨질 만큼 몰락해.

아리자학하지마. 너는 아직도 귀여워.

이서(크게 웃는다)고마워. 정말 고마워. 이렇게 웃어 보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

아리(삐진 표정으로)진심이야. 너 정말 귀여워.

이서나도 모르게 너하고 눈이 마주친 순간. 네 그림 얘기가 나왔어. 진심이었어. 네 그림 최고야. 그런데 여태까지 그걸로 혼자 고민하다니.(웃는다)

아리우리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거지? 다시 친구지.

이서그럼. 화가가 친구라니. 이야. 정말 멋있는데! 나도 뭐라도 된 느낌이야.

아리처음이야. 화가라고 불린 게. 나 관둘려고 했는데...

이서정말? 천 말 따위는 무시해버려. 지는 배우하려고 촌 동네에서 쇼하면서 너한테 뭐라 그래.

아리말하고 싶고, 의논하고 싶은데...속내 털어 놀 사람이 없더라. 다들 천하고 너무 친하게 지내니. 천 말리는 거 한다고 말을 못하겠어.

이서괜찮아. 이제 내가 있잖아. 까짓거 주판 던져버려.

아리너 외로웠지?

이서뭐야? 엉뚱하게.

아리너한테 말 걸고 싶었는데...항상 뭔가를 등에 메고 있는 거 같았어. 너무 어두웠어. 말을 걸고 싶어도 사람들이 너를 너무....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런 분위기에 짓눌려서 말 못했어. 내가 바보지. 친구한테 말을 왜 못 걸어. 미안.(고개를 숙인다)지금에서야 용기가 났어. 너무 늦었지?

이서괜찮아. 지금부터 말하면 되지. 내가 사실 좀 그랬잖아. 나도 왜 너한테 말을...아니 난 너한테서 멀어지는 게 나은 거라고 생각했어. 널 위한 거라고..나도 바보네.

아리그러니 이서야. 제발 이번 일 좋게 끝내.

이서걱정 마. 곧 의사와 천이 올 거야. 오면 너 보고 뭐라 할지 모르니까. 이만 가.

아리너 외로웠지?

이서아니.

아리거짓말. 내가 왜 왔겠어?

이서그래. 거짓말이야. 나가서 만나러 가도 되지

아리응. 당연하지. 그 말하러 왔어.

이서또 쿠키 구워죠.

아리그림 칭찬해주면.(나간다)

이서 웃으며 손 흔들고 아리 나간다. 이서 안쪽 방으로 들어간다.

사이. 의사 안쪽 방에서 나온다. 천 들어온다.

의사녀석은 자 쉬잇.

선생님. 죄송하지만 저는..

의사천! 그런 소리하지 말게. 자네 밖에 없어.

마을에 소문 난 거 아시잖아요. 이서는 영영 틀렸어요. 저도 곤란합니다. 사람들이 저만 보면...

의사천 내가 미쳤나봐.(비틀거린다)

선생님!

의사(천에게 다가가 팔을 잡는다 애원조로)이깟 촌 동네의 소문에 신경쓰지 말게...우린 더 중요한 일이 있단 말이야.

선생님 의도는 알겠는데..

의사그러지마. 내가 돈에 미쳤나봐...왜 그 따위 더러운 짓을..

무슨 소리입니까?

의사오. 내가 이걸 어떻게 말할까...자네한테 부끄러우이.

또 무슨 일 있었습니까?

의사천 돈 필요하지? 내가 돈 줄게.

(얼굴이 굳어진다)저를 그 정도로 보십니까?

의사아냐. 당연히 아니지. 자네가 없으면 난 죽는단 말이야.

(안쪽 방을 본다)이서가 죽인다 협박 합니까

의사녀석은 자. 악마 같은 녀석. 나한테 그런 말을 전하고 잠이 와?

뭐라 했습니까?

의사아. 어떻게 말해? 제길...딴 사람도 아닌 자네한테...

아시다 시피 저는 시간이 없습니다.

의사알아. 그렇지. 이서 나 좀 살려주게. 자네 밖에 없어.

제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건 시간낭비입니다.

의사아냐 그래도...자네 밖에 없어. 자네 말을 들을 거야. 이제는 달라.

어떻게 확신 하십니까?

의사녀석이 자네를 원하니까. 나 역시 원해. 우리를 살려줄 사람은 자네 밖에 없어. (무릎 꿇는다)부탁하네. 살려주게.

선생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의사(횡설수설 한다)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야. 나도 모르게...어쩌다 보니...그렇게 된 거야. 처음부터 이럴려구 했던 거 아니야.

(선생을 일으켜 세우려 당긴다)차근차근 말씀하시죠. 일어서세요.

의사내 부탁을 들어 준다 약속하면.

(망설이다가)예. 그럴게요.

의사(일어서서 천의 손을 잡는다)...사실은 말야..

암전.

이서 의자에 앉아 있다. 깨진 창문을 다시 신문지로 막아 놨다.

사이. 천이 들어온다. 이서 벌떡 일어난다.

이서천 왔어?

그래 왔다. 제길...나 지금 안 좋다. 자극 하지마.

이서알았어. 어서 앉아. 마실 것 갖다 줄까?

천 자리에 앉고 신문지를 보다가 고개를 가로 젓는다. 이서 미안해서 부끄러워한다.

이서그래. 와줘서 고마워.

내가 뭔 죄를 지었다고...

이서너 밖에 없거든.(신문지를 슬쩍 본다)지금 와서야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미안해.

그것 때문에 난리야. 이 좁아터진 마을에서는 소문만 빨라. 반나절도 안 걸렸어.

이서(맞장구 친다)세상에! 공사하라고 모이면 그렇게 안 모이더니. 이런 것 어떻게 알았대?

나도 그걸 알고 싶어. 사람들이 나만 보면 붙잡고 얘기 좀 해달래. 얼마나 시달렸는지 말야.

이서미안. 내가 나쁜 놈이야. 너 죄 없어. 다 내 잘못이지.

사람들은 늘 그래. 나 밖에 없다고...솔직히 관심 받는 거 좋아해. 배우의 자질이거든...음...내가 뭐라 하는 거야? 사람들은 관심을 주는 대가로 나에게 도움을 청하지. 난 언제나 도와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거든.

이서맞어. 넌 특별해.

기대에 부응할수록 사람들은 더 모여들지...그래. 귀찮을 때도 있었어. 하지만 그래도 해줬어.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기는 그렇지만 난 남들이 못하는 일을 내가 해낼때 쾌감을 느껴. 날 증명하는 거지. 그래서 어제도 왔었고..

이서내가 미친 놈이지. 원래 그러잖아.

(버럭 소리 지른다)그러니까! 도발하지마. 좋게 가자고. 난 지금 내 선의가 이용당해서 기분 나빠. 이용당하는 건 기분 나쁘고 하기 싫지만 그래도 누군가를 돕기 때문에 하는 거야. 누군가는 너고. 너에게 부탁할게 있어. 듣기 싫어도 들어. 그리고 반드시 받아들여야 해. 널 위한 거야. 제길 내 부탁도 아냐.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서의사. 돌팔이야. 개새끼고.

그걸...이제 알게 됐다.

이서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 그럼 그 부탁 따를게.

지금 거래할 입장이 아니야.

이서(단호하게)아니 들어줘야 해.

(이서를 바라보다가)자존심은 세가지고...해.

이서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바로 농약통을 나르는 일을 했어. 민증 나오기 전까지 취직이 안 되니까..밭으로 가는 오르막 길 알지? 하루는 거기를 내려가는데 네가 교복을 입고 올라가는 거야. 교복 멋있더라. 여자애들하고 같이 웃으며 가는데, 차마 고개를 못 들겠더라고. 네가 알아 볼까봐. 그때 네가 나를 못 봤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나를 잊어 버린 거 였어. 씨발. 맞아. 그게 우리 인생이었어. 너는 위로 나는 아래로. 엇갈렸어.

또 이러지마. 왜 극단적인 얘기를 해...근데 잊어버리다니?

이서네 친구랑 왜 싸웠냐면..엇갈린 날로부터 시간이 지나 술 마셔도 될 나이가 됐을때 나는 혼자서 쓸쓸히 내 성인식을 축하하고 있었는데 네가 나타났지. 넌 내게도 누구에게나 그렇듯 정중하게 자리를 양보해 달라 말한 뒤 친구들과 성인식을 축하했어. 역시 넌 친구들 사이에서 빛나더라. 친구들은 네 빛에 기대려 아부를 늘어 놓으며 너와 가장 친한 친구가 되려고 기를 썼지. 그때 한 녀석과 눈을 마주쳤는데 나를 비웃더라. 내가 태어날 때부터 못났다는 듯. 불쌍하다는 듯. 그게 말이 돼? 저 혼자 빛을 낼 수 없어, 너에게 들러붙는 기생충주제에 누굴 비웃어.(격하게)나도 너처럼 될 수 있었다고! 네 자리에 내가 있을 수도 있었어! 우린 출발점이 같았다고!

출발이 같아?

이서네가 21번이고 내가 22번이었지. 우린 같은 반이었어. 아리는 여자 3번.

이런 세상에..생각나. 우린 같은 반이었어. 너랑 나랑 동창이었어. 남이 아니라.

이서내가 왜 몰라도 된다고 화냈는지 알겠지? 설마 잊어먹을 줄은..예상은 했지만..

미안.(침묵)내가 왜 잊어 먹었지? 아무튼 미안해.

이서지금에라도 생각났다면 내가 고맙지. 잊은 건 네 잘못 아냐. 내가 선에서 도태 돼서야.

선?

이서사람들끼리는 선을 공유하고 있어. 돈..생김새..지위 든 뭐든 사람들은 서로가 비슷하게 가진 것들을 확인하며 수준을 맞추며 선을 유지하지. 하지만 그 선에서 떨어지면...잊혀지게 돼. 우린 분명 같은 출발점에 서 있었지. 내가 선에서 떨어지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어?

이서아버지가 빚만 남기고 도망쳤어. 남은 건 병든 어머니와 나...내가 어떻게든 해야 됐어. 국민학교 졸업이 끝나자마자 나는...공장이든 쓰레기장이든 돈만 벌 수 있다면 어디라도 무슨 일이라도 했어. 나는 낮은 곳으로 추락하고 넌 위로 날아올랐지. 난 우리가 엇갈린 날을 한시도 잊은 적 없어. 인생은 불공평해.

그렇게 쉬운 비행도 아니었어.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지만...이런 촌구석에 극단이 있을 리 없잖아. 교재도 선생도 없고. 집에서 인정도 못 받았어. 네가 보는 것처럼 무작정 빛나고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랑스러운 길이었어.

이서스스로 자랑스러워하는 인생이라..나는 만질 수도 볼 수도 없어.

스스로 대본도 쓰고, 포스터도 만들어 돌렸지. 좋아하는 일을 하면 정말 밥을 안 먹어도 되더라. 그냥 우유로만 끼니 때웠어. 너무 즐거우니. 배고픈 것도 몰랐지. 즐겁긴 하지만 쉽지는 않았어. 이제 곧 완전한 비상으로 만들 거야.

이서그래. 내가 봐도 넌 될 것 같아. 미리 축하할게.

고마워. 내일 서울로 갈 거야.

이서아리는 어떡해?

같이 갈 거야.

이서뭐? 안돼.

가서 같이 생활해야지. 벌써 아리 일자리도 알아놨어. 아리가 고생하겠지만...그래도 될 거니까...

이서서울에서 아리가 뭘 할 줄 안다고?

회사 경리 자리 알아놨어. 날 부양할거야.

이서진심이야?

알아. 이 생각이 나쁘다는 걸...배우로 성공하려면 시간이 걸릴 거야. 어딘가에 취직할 수도 없으니 그동안 아리가 날 도와줘야 겠지. 하지만 확실히 보상할거야. 난 될 테니까.

이서너무하지 않아? 어떻게 된다고 확신해?

눈을 뜨고 꾸는 꿈은 바람결에 사라져. 일장춘몽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꽉 붙잡고 있어야 돼. 다른 직업하며 어영부영 하다가는 안돼. 꽉 붙잡기 위해서라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내 중심적인 생각이라는 걸...물론 알지. 나쁘다는 것도.

이서(얼굴을 감싸쥔다)아...(침묵)반드시 행복하게 해줘야 돼.

넌 꿈이 뭐야?

이서꿈이라...난 꿈을 꿀 수 없어. 일단 선까지 다시 올라가야 꿈을 꿀 수 있어. 난 꿈을 꿀 자격을 위해 하루하루 싸워나가고 있어. 국민 학교 졸업 후 신문 보급소였어. 민증 나올때까지 신문 돌리고 폐지 줍다가 공장에 취직했지. 니가 오더군. 친구와 함께. 너희는 알바 찾으러 왔다가 월급을 듣고는 바보 아니면 누가 일하겠냐며 그냥 갔지. 난 몰랐어. 내가 받을 돈이 그렇게 적을 줄은...무식하면 착취 당하는 거야. 젠장. 당장 때려 쳤는데 받아주는 데가 없더라. 무식한 놈을 누가 받아줘? 나 원래 이렇게 까지 소문 안 좋지 않았어. 사람들은 없고, 못나면 욕해도 되는지 알아. 나는 나라는 인간은 그대로인데 내 주변 상황만 바뀌었다고 나까지 바꾸려 해. 비웃고, 피하고..무시하고...그래도 난 필사적으로 살아왔어. 못 배우고, 가진 것 없지만 어떻게든 다시 선으로 돌아가려고..난 너처럼 주위에 빛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 그래서 나름대로 주위 나랑 같은 사람들을 어떻게든 도우려 했지..선과 거리가 멀어진 사람들. 결과가 어떤 지 알아? 여기 갇혀 있잖아. 돕고 싶어도 무식하니까 어떻게 도울지 몰라서 내미는 건 주먹 밖에 없어. 알아. 욱하는 내 성격 탓도 있지. 하지만 남들은 아는 걸 모르는 탓이지. 벗어나려 할수록 내 손은 피투성이야. 나보고 극단적이라 했지? 삶이 이런데 무엇이 온전하게 보이겠어? 남을 태연히 고생시키겠다고 하는 네 자신감의 끝을 모르겠다. 하지만 부러워. 나도 너처럼 되고 싶었어. 나 밑바닥에서 맨주먹으로 살아왔어. 나에게 자존심이 있어. 난 간도 쓸개도 없이 네 앞에서 헤헤 거리는 바보들처럼 네게 기대지 않고 네가 무언가 해주리라 기대하지 않아. 못 배워서 모든 게 거칠고 지저분하지만 내 손으로 이룰 거야. 그래서 언젠가 너랑 마주볼 거야. 어제 그랬잖아. 언젠가 알게 된다고. 내 가슴속 불 이야기가 바로 이거야. 네가 뭐가 잘났는데? 네가 뭔데 그리 존경받아? 같은 출발점에 있었어.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너보다 잘난 존재가 될 자신이 있어. 너는 내가 박탈당한 기회가 살아서 저 혼자 움직이는 것 같아. 사실 너의 것은 나의 것이었다고. 그래서 널 볼 때마다 미쳐버릴 것 같아. 내 안에서 불이 타고 있다고. 네가 두려워! 무섭다고!

이서 무릎 꿇는다.

이서(흐느낀다)이제 선에 거의 다 왔어. 어머니도 대견해 하셔. 이제 더 이상 지저분하고 무식하게 살지 않아도 돼. 조금만...아주 조금만...다시 선에 오를 수 있단 말이야. 불쌍한 우리 어머니 고생만 하셨는데 이제 효도 할 수 있고, 꿈도 다시 꿀 수 있어. 아주 조금이면 돼. 많지도 않아. 사실 지금도 생각해. 운이 좋아서 내가 아니고 네가 선에서 떨어졌다면 성실히 일해서 모든 좆 같은 걸 끝낼 지금 이 시기까지 못 왔을 거 라고..무릎 꿇고 무슨 병신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끝까지 자존심은 세우려 해. 병신이지? 내 처음이자 마지막 내 부탁이야. 가서 사람들에게 나 미쳤다고 병신이라고 해줘. 내가 미친 놈이란 걸 원하잖아. 제발. 지금 잡히면 다시는 선으로 돌아갈 수 없어. 사람들에게 가서 날 미친 놈이라 해줘.(앞으로 쓰러져 천 발목을 잡는다)

그래. 알았어. 그랬구나. 이제 알겠어. 다른 사람들과 얘기하면 좋게 끝났는데 너와는 안된 이유가. 난 선 안에 있기에 널 기피했던 거야. 세상에 나도 모르게 너한테 반말하면서 우리가 같은 반 친구였다는 것도 잊었어.(침묵)더 이상 엇갈리지 말자. 우리 같은 방향으로 나아 가자.

이서(침묵)천. 부탁 말해.

(생각하다가)아파서 죽을 것 같아도 피가 철철 흘러도 자기 팔을 물어 뜯는 이유가 뭐야?

이서늑대무리 중 한 늑대가 덫에 걸리자 무리는 늑대를 버리고 가. 낙오되지 않으려 늑대는 있는 힘껏 자기 발을 물어뜯어. 버림받지 않으려...다시 무리 안으로 들어가려고 자기 발을 잘라버려. 고통과 피보다 두려운 건 외로움이니까.

솔직히 말해줘서 고마워. 이게 내 부탁이야. 수수께끼 답을 푸는 것.

이서정말 부탁이 이거야? 아닐 텐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는다. 나가다가 돌아서서)지윤이가 고맙대.(엄지를 치켜세운다)푹 쉬어. 나만 믿어. 내가 잘 말할게.(나간다)

이서고마워. 정말 고마워. 가서 내가 미쳤다고 해줘.

암전. 무대 밝아진다. 천 누군가를 기다린다. 아리 들어온다.

금방 간다고 역에서 기다리라 했잖아.

아리아직 안 끝났어

얘기 다 끝났어. 좋게 끝날 거야. 그것 때문에 온 거야

아리아니...어제 너랑 얘기하려 했는데...네가 피곤하다고 역 얘기만 하고 그냥 들어 갔잖아.

기차 타고 가면서 해도 되잖아

아리난 안 갈 건데.

뭐?

아리난 안 갈래. 계속 그림 그릴거야.

너 그림 못 그려.

아리(침묵)그래도 나 화가가 되고 싶어.

시간낭비하지 말자. 역으로 가 있어.

아리넌 참 신기해. 가능성 없어 보이는데..배우가 되려해. 그것도 흔들림 없이.

된다고 스스로 믿으면 돼.

아리그래 넌 그래서 더 신기해. 어떻게 그렇게 자신감 있어? 난 몰라. 아직도 흔들리고 있어. 이 결정이 맞는지.

지금도 후회하잖아. 넌 안될....힘들어. 못 들은 걸로 해줄게.

아리난 흔들리는 사람이야. 네 말대로 소심할지 몰라. 그래서 누군가 나를 믿어주고 응원해줄 사람이 필요해. 날 화가라 불러줬어. 태어나서 처음 인정 받았다고.

(안쪽 방을 슬쩍 보고는)저 녀석이?

아리사실 좀 됐는데 예전에 내가 혼자 그림 그리는 거 보고는 잘 그린다고 해줬어.

그래서 여기 왔어?

아리응...거짓말 했어. 다시 친구가 되려 왔다 했지만...실은 결정하기 전에 용기를 얻으려고...

그런 칭찬으로 인생을 바꿀려고?

아리내 인생이 어때서?

다 준비되어 있어. 나만 따라서 서울로 가면 돼.

아리집에 누굴 데려 갔어?

누굴 데려가?

아리다 알고 있어. 넌 항상 네 말만 해. 내 말은 듣지 않으면서.

이서 소문 몰라? 저 녀석 정상 아니야! 그 칭찬을 믿어?

아리알아. 살다보면 그림자하고 친구하고 싶을 만큼 외로울 때가 있어.

니가 외로워? 내가 있잖아.

아리아니. 네가 그림을 빼앗은 이후로 외로워 졌어.

무슨 궤변이야?

아리너 연극 준비할 때 밥 안 먹고도 살겠다며? 그것도 말이 안 되잖아.

나는 나고. 넌 다르지.

아리그래. 넌 참 특별해. 나는 평범해서 매일 불안해. 내가 아무리 못 그려도 나를 믿고 지지해줄 사람이 필요해.

결국 저 녀석 때문이야? 이용하는 거네?

아리그래.(침묵)친구가 되는 걸로 보상 되겠지.

(웃는다)너 여우네. 이렇게 영악한지 몰랐다. 그동안 어떻게 숨겼니? 옛날에 착했잖아.

아리네가 연극한다고 돌아다닐때 나는 하루 8시간씩 주점에서 술꾼들 술주정 받아줬어. 그 정도면 사람이 충분히 변해.

그래. 그렇다 치자.(침묵)그래도 서울 가자. 화가 되고 싶다며? 성공하려면 서울 가야 돼. 거기서 그림 그려.

아리왜 꼭 서울가야 해? 난 그냥 친구들 사이에서 그림 잘 그린다 소리 들으면 돼.

(고개를 가로 젓는다)이래서 니가 안돼는 거야. 잔말 말고 역에 가 있어.

아리안 가. 너 혼자가.

뭐? 다 준비되어 있어. 망칠 셈이야

아리뭐가 준비되어 있다는 거야? 한 번도 말해 준 적 없잖아? 넌 세상이 네 중심으로 도는 것에 익숙해. 아니라는 걸 몰라. 지금 배워.

가면서 설명...(침묵)제길.(안쪽 방쪽을 본다)저 놈이 발목을 잡네. (아리에게)이렇게 엇갈리면 안 돼. 같은 방향을 봐야 돼.

의사 들어온다.

의사어이구. 우리 아리 인사하러 왔니.

아리안녕하세요.(천 목례한다)

의사(웃으며)그래 인사하고 떠날려고? 내가 가슴이 아프다.

아리(빠르게)아니요. 저는 안 떠나요. 천에게 인사하러 왔어요. 저 이만 가볼게요.

아리 나간다.

거기서!(나가버리자)너 역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

의사무슨 일인가?

아무것도 아닙니다.(혼잣말)망칠 수 없어...모든 게 되기로 준비되어 있어.

의사그래? 자 이거 보게나 내 부탁을 들어준 자네에게 줄 선물일세.(가운 속에서 지폐다발을 꺼낸다)짜잔 놀랐지? 이제 자네가 가는 길에 파출소에 들려서 자네 견해를 밝혀 주면 되네. 너무 번거롭나?

이서전 받을 수 없습니다.

의사(호들갑스럽게)이건 뇌물이 아냐. 미래의 배우님에게 드리는 후원금이지.(손에 쥐어주려 한다)

이서 뿌리치고 나가려 한다.

의사자네 어디가나?

이서아리네 집에 가....기전에 파출소 들를게요.

의사내 편 들어 줄 거지? 잘 말해 줄 거지?

이서선생님. 녀석은 죄값을 치러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빼낼 수 없습니다.

의사내가 자네에게 잘해준 거 기억 안나나? 어떻게 되는지 알잖아. 놈이 불거야. 그럼 난..(돈을 쥔 손을 내민다)내 호의를 무시 할 셈인가

이서호의든 부탁이든 받아들이는 건 받는 이의 선택입니다.(나간다)

의사(비명지른다) 소외되고 무력한 사람들을 돕는 게 마땅한 도리 아닌가? 세상에 사랑이 너무 부족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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