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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능소화

2020.12.31 10:0012.31

 

능소화

이경희

 

 

— 명종 즉위년 시월

 

“그래, 이번엔 꽃 이야긴가?”

손수 우려낸 뜨거운 차를 잔에 따르며 토정(土亭)이 물었다. 안(安)은 반상 위에 놓인 찻잔을 집어 조심스레 입으로 가져갔다. 첫맛이 썼다.

“능소화(凌霄花) 라네.”

“허어.”

모른 척 짐짓 놀라는 말투였으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미 소문을 들어 알고 있는 거겠지. 또 시작이었다. 안은 친구의 이런 능글맞은 태도에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혹시 이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는가?”

안이 물었다.

“예쁜 꽃이지.”

토정은 능청스레 받아치며 찻잔을 집었다.

“무섭기도 하고.”

“무섭다?”

“능소화란 이름을 찬찬이 풀어보면 하늘을 능멸하는 꽃이란 뜻을 품고 있으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마당에 몇 송이 심었다가 역모로 몰릴지도 모르는 일이니.”

토정은 후후 잔을 불어가며 단숨에 꿀꺽 차를 삼켰다. 향에 취한 코끝이 새빨갰다. 혼자만 몰래 술을 마시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찻잔을 내려놓은 토정은 접시에 놓인 고기를 한 점 손으로 집어 입에 가져갔다. 안은 인상을 찌푸렸다.

“차 마실 때 고기 안주를 곁들이는 사람은 아마 조선 팔도에 자네뿐일 걸세.”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자네나 나나 술은 한 잔도 입에 대지를 못 하니, 이렇게 기분이라도 내야지.”

토정은 그리 대꾸하며 고기 한 점을 창밖으로 던졌다. 마침 마당에서 기다리던 고양이가 이를 받아 물었다. 고양이는 마당 한쪽으로 고기를 가져가 또 다른 고양이와 반씩 찢어 나눠 먹었다. 고양이들은 서로의 뺨을 부비고 핥으며 털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자네 집 고양이들은 참 사이가 좋아. 전생에 백년가약을 맺었다 해도 믿겠네. 저리 사이가 좋은데도 어찌 연분을 맺지 않는지 신기할 정도야.”

“이미 맺고도 남았지. 밤마다 아주 난리도 아니라네. 마루 밑이 어찌나 시끄러운지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어. 그런 지도 벌써 반년은 되었네.”

“그런가? 그런데 어째 새끼를 본 적이 없는 거 같구먼.”

“그야, 둘 다 수컷이니 그렇지.”

토정은 느긋한 표정으로 또 한 점 고기를 집어 먹고는, 쪽쪽 손가락을 빨았다.

“고양이 이야기는 그만 하세. 어차피 자네는 능소화 이야기를 하러 온 것 아닌가? 뜸 들이지 말고 어서 사연을 말해보게나. 내 들어줄 터이니.”

안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는 열흘쯤 전에 시작된 일인데…….”

 

 

* * *

얼마 전, 교태전(交泰殿)⁠1 뒷길 좁은 골목에 능소화가 피었다.

처음 꽃을 발견한 것은 수방(繡房)⁠2에서 일하는 견습 나인이었다. 나인은 꽃을 보자마자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전날까지 본 적도 없던 붉은 꽃이 갑자기 만발해 한쪽 담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인은 소리를 지르며 사방에 이를 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골목은 꽃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궁녀들로 가득 찼다. 허나 다들 조용히 수군거리기만 할 뿐, 꽃을 만지거나 꺾으려 시도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결국 상궁 하나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서 꽃 한 송이를 꺾었다. 상궁은 곧장 중전께 꽃을 보이며 이 일을 소상히 아뢰었다. 그러자 중전께서 한참 고심 끝에 답하기를,

“꽃잎이 마치 핏빛처럼 붉은 것이 보기에 불편하구나.” 

하였다.

상궁의 명에 따라 교태전 궁녀들이 모두 동원되었다. 한 시진 만에 황급히 꽃이 치워졌고, 걷어낸 꽃은 궁궐 밖으로 옮겨져 흔적 없이 불살라졌다. 꽃을 치운 궁녀 중 몇몇이 그날 밤 열병을 앓았다고도 하는데, 이는 갑자기 무리하게 몸을 쓴 탓일 가능성이 높다. 꽃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희박하다.

밤새 부제조상궁(副提調尙宮)과 감찰상궁(監察尙宮)이 직접 궁녀들의 입단속을 하였고, 꽃에 관한 이야기는 외부로 발설되지 않도록 철저히 함구 되었다. 이로써 사건은 조용히 정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사태는 한층 심각해졌다.

능소화가 다시 만발한 것이다. 전날 걷어낸 바로 그 자리에, 이전의 모습 그대로 꽃이 자라나 수놓듯 담장을 물들이고 있었다. 겁에 질린 궁녀들이 또다시 꽃을 걷어내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꽃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자라나 담장을 가득 채웠다. 몇 번을 걷어내 본들 마찬가지였다.

그러는 사이, 기이한 꽃에 관한 소문은 조금씩 궁내에 퍼져 이윽고 주상 전하의 귀에까지 전해졌다.

 

 

* * *

“호오, 그래서 자네에게 명이 떨어진 게로군.”

“내 괴력난신(怪力亂神) 따위는 믿지 않는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도….”

“자네는 항상 그런 일이 꼬이는 체질이니까.”

토정은 찻잔을 쥔 손으로 안을 가리키며 흐흐 웃음을 흘렸다.

“웃을 일이 아닐세. 정말 난처하단 말이네. 대체 무슨 소문이 어떻게 난 것인지 이제는 요강 하나만 깨져도 여기저기서 나를 찾을 지경이니.”

안은 불편한 표정으로 찻잔을 기울였다.

“꽃이 자란다는 골목은 정확히 어디인가?”

“수다문(受多門) 너머, 나인들의 처소로 향하는 통로라네.”

“그거 참, 상(上)께서 고민이 많으시겠구먼.”

“전하께서?”

“그렇지 않은가. 수다문에 능소화가 피었다 하니.”

“능소화가 어떻다는 겐가.”

“그 꽃은 임금을 흠모하는 여인의 원망을 먹고 피어나거든. 그래서 ‘구중궁궐 꽃’이라 부른다네. 옛날에 소화라는 후궁이….”

안은 손사래 치며 토정의 말을 잘랐다.

“설명은 됐네. 그 이야기라면 나도 알고 있으니. 임금을 흠모하던 후궁이 죽자 무덤가 담장에 능소화가 폈다는 내용 아닌가.”

“한 달쯤 전에 나인 하나가 목을 맸다지? 그것도 새빨간 단풍나무 아래서. 이제 곧 겨울인데, 어째선지 그 나무만 단풍잎이 한 장도 떨어지질 않는다던데.”

이 친구는 대체 어디서 그런 내밀한 소문을 얻고 있는 것일까? 안은 대답 대신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어느새 둘 모두 잔이 비었다. 토정은 식어버린 찻주전자의 태엽을 감았다. 그러자 주전자 안에서 물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몇 번을 보아도 기이한 광경이었다. 원리에 대해 설명을 들어도 이해되지 않았고.

갓 끓인 듯 뜨거운 차가 다시 잔에 부어졌다. 잔 위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그래서, 조사는 얼마나 했는가?”

잔을 집어들며 토정이 물었다.

“조사라니?”

“자네는 기사관(奇事官)⁠3이 아닌가. 명이 떨어지기 전부터 이미 이 일을 기록하고 있었을 게지. 꽃에 관한 소문이 내 귀에 들어온 지도 벌써 일주일이니, 자네는 그보다 며칠은 빨리 알았을 테고, 그 정도 시간이면 자네 성격에 나름 뒷조사도 충실히 해두었을 게 아닌가.”

“아니 자네, 이미 다 알고 있었으면서….”

안은 더 말할 기운도 없어 이마를 감싸 쥐었다. 기분이 상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골탕 먹인 적이 한두 번도 아니었으니. 하지만 당할 때마다 왠지 속았다는 생각에 배신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흐흐, 아무래도 뜬소문만으로는 부족해서 말이야. 괴력난신을 믿지 않는 자네의 관점으로 정리된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 그래, 어떤 것 같던가?”

안은 한숨을 쉬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뜨거운 차를 한 모금 삼키고 나니 기분이 조금 진정되는 듯했다. 이제는 뒷맛도 썼다.

“일주일간 쭉 꽃을 관찰했었네. 밤마다 말일세. 장소가 장소인지라 특별히 중전마마의 허락을 구해야 했지. 나인 하나를 대동하는 조건으로 꽃을 지켜볼 수 있었다네.”

“나인이라.”

“수방(繡房)에서 일하는 견습 나인인데, 감시역을 나서서 자청했다더군. 꽃을 처음 발견한 것도 그 사람이라 들었네. 어제도 밤새 둘이서 꽃을 지켜보았지.”

“나인과 있었던 게 확실한가?”

“그렇네.”

“산 사람이 맞던가?”

“물론이네. 내 그것도 구분 못 할까.”

“…정말 확실한가?”

토정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빤히 안을 쳐다보았다. 안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조금 특이한 사람이긴 했네. 얼이 빠져있다 해야 할지, 외려 지나치게 집중력이 높다 해야 할지. 표정 한 번 짓지 않고 종일 꽃만 바라보더군.”

“대화는 나눠 보았는가?”

“딱히.”

“꽃에 대해 무언가 알지도 모르잖은가. 어쩌면 목을 맨 나인에 대해서도.”

“모른다면 물어도 소용이 없을 테고, 안다면 굳이 상처를 들쑤시고 싶지 않았네.”

“허, 자네 답구만.”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네. 목을 맨 나인과 같은 방을 쓰던 사이라는 귀띔을 들었거든.”

안은 찻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이제 꽃 이야길 해도 되겠는가?”

“아, 그렇지. 능소화는 어떻던가?”

“꽃이 담장 아래서 자라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네.”

“어째서 그런가?”

“뿌리가 없거든.”

“허어.”

“담장 끝에서 끝까지 모두 살펴보았으나 어디서도 뿌리를 찾을 수가 없었네. 줄기와 꽃만 자라고 있네.”

“줄기의 끝을 더듬어가다 보면 뭐라도 잡힐 게 아닌가.”

“줄기는 또 다른 꽃으로 이어지네. 꽃에서 꽃으로. 그뿐이네.”

“그거 참.”

“기이한가?”

“아니, 그렇지는 않다만… 일단은 좀 더 이야기해보게.”

“우선은 나인들을 일일이 찾아가 꽃에 대해 추궁해 보았네. 그런데 누구도 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보질 못했더군. 걷어낸 꽃이 언제부터 다시 자라났는지, 어느 지점에서부터 피어나기 시작했는지 아는 이가 아무도 없더란 말일세.”

“누군가는 골목을 지켰을 게 아닌가.”

“처음 며칠간 상궁들이 돌아가며 감시했네. 골목 양 끝을 병졸들이 지키기도 했고. 헌데 그들 중 누구도 꽃이 피어나는 순간을 기억하지 못했네.”

안이 말했다.

“그래서 하루는 내가 직접 지켜보았다네. 일부러 꽃을 전부 걷어내도록 요청하고는 텅 빈 골목에 남아 밤새 담장을 노려보았지.”

“그랬더니?”

“나 역시 꽃이 피는 순간을 확인할 수 없었네.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노려보고 있었는데도 말이네. 아무런 전조도 없다가 문득, 어느 순간 깨닫고 보니 꽃이 담장에 덩굴을 잔뜩 뻗친 채 만발해 있더군. 이는 곁에서 함께 지켜본 나인도 마찬가지였네.”

“또? 외에도 특이한 점이 있었을 터인데?”

이미 알고 있다는 듯, 토정은 안을 채근했다.

“그렇네.”

“말해보게나.”

“조금씩 줄어들고 있네.”

“줄어든다?”

“꽃송이의 개수가 처음엔 아흔아홉 송이였는데, 날이 지날수록 조금씩 줄어들더군. 대략 하루에 네댓 송이씩 줄어드는 모양이네. 지금은 스무 송이가 채 되지 않네.”

“물론 크기도 그렇겠지?”

“그렇다네. 꽃의 크기도 조금씩 줄어들고 있어. 마치 누군가 꽃의 생기를 빨아들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어째서 걱정인가? 꽃이 사라지면 좋은 거 아닌가?”

“이대로 흐지부지 자취를 감추어버리면 내 입장이 난처하단 말일세. 원인이 무엇인지 파악해 주상 전하께 보고를 올려야 해. 게다가 아무 일 없이 끝난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만에 하나 꽃이 소멸하는 날 큰 변고라도 일어났다간….”

“흠, 그도 그런가.”

토정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식은 차를 홀짝였다.

“그래서, 앞으로 며칠이나 걸리겠는가?”

“무엇이 말인가?”

“꽃 말이네. 완전히 소멸하기까진 얼마나 걸리겠는가 말이야.”

안은 속으로 날짜를 헤아렸다.

“지금 추세라면 나흘 정도?”

“그럼 나흘 후에 보도록 하지. 지금은 가봐야 아무 소용이 없으니.”

“나흘 후라니, 나는 지금 한시가 급하단 말일세.”

안이 무어라 더 말하기도 전에, 토정은 귀찮다는 듯 허공에 손사래 치며 벌러덩 바닥에 드러누웠다.

“걱정 마시게. 별일 아닐 테니. 사람 사는 일이란 게 다 똑같지. 막상 진상을 알고 나면 시시해서 기분만 잡칠 걸세. 자, 그럼 이만 돌아가시게나. 나는 낮잠이나 자야겠네.”

토정은 그리 말하며 얼굴에 주전자 뚜껑을 덮고 팔베개를 했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는 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다만 피를 조심하게나.”

“피?”

“능소화 꽃잎이 지나치게 붉은 것을 보면, 아무래도 누군가의 피를 빨아먹는 모양이니.”

“꽃이 사람 피를 빨아먹는단 말인가?”

“아마도 고결한 자의. 그 정도는 되어야 하늘꽃이 하루아침에 훤히 자라나지 않겠는가.”

겁을 집어먹은 안이 다시금 토정을 추궁했으나, 토정은 희미한 미소를 흘릴 뿐 더 설명해주진 않았다.

 

 

* * *

그 후로 나흘간, 안은 밤낮으로 골목을 지켰다.

핏빛으로 물든 꽃잎이 불길하다며, 궐 내를 오가는 모두가 이 길목을 피해 다녔기에 골목에는 언제나 안과 나인 둘뿐이었다. 아무도 꽃을 건드리거나 걷어내지 않았음에도, 꽃의 양과 크기는 일정하게 줄어들었다.

꽃이 처음 발견된 날부터 보름이 흘렀다. 그동안 딱히 특별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꽃이 사람을 해하는 일도, 사람이 꽃을 해하는 일도 없었다. 꽃은 그저 햇살을 먹고 달빛을 받으며 담장을 수놓듯 피어있을 따름이었다. 물괴(物怪)나 인요(人妖)라 불릴 법한 기이한 현상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굳이 기이한 일을 찾자면 오히려 저 나인 쪽이 아닐까.

첫인상부터 어딘지 조금 특이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하였으나, 지켜보면 지켜볼수록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함이 느껴졌다. 나인은 마치 사람으로 둔갑한 기둥 같았다. 꽃에 홀려버리기라도 한 듯, 종일 한자리에 서서 입꼬리 한번 움직이는 일 없이 고집스레 꽃잎만 바라보고 있었다.

낮밤으로 찬 기운을 쏘인 탓인지 나인의 얼굴은 갈수록 파리해졌다. 식사를 하긴 하는 것인지 몸에 기운이라곤 느껴지지 않았고, 푹 꺼진 눈 밑으로 깊은 그늘이 생겨 그 안에 서리가 끼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나인의 몸 상태가 걱정된 안은 조심스레 휴식을 권해보았으나, 나인은 대답조차 없었다.

더 기이한 것은, 보름 동안 나인에게 말 한마디 붙이는 사람이 없더라는 점이었다. 물론 꽃의 불길한 기운을 덮어쓸까 걱정되는 마음이야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으나, 겨우 그런 이유라고 하기엔 지나칠 정도로 분위기가 묘했다. 단지 거리를 두고 따돌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작정하고 존재를 지워버리려는 듯한…….

나인의 상태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안은 부제조상궁을 찾아가 골목에서 근무할 나인을 교체해달라 요구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상궁은 안의 요청을 거절했다.

“이는 그 아이의 원에 의해 결정된 것입니다. 워낙 불결한 사안인지라 대신할 사람을 찾기도 어렵고요.”

“상궁께서는 그 나인의 상태를 보지 못하셨습니까?”

“본래부터 마음이 성치 못한 아이입니다. 걱정하실 것은 없습니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어딘지 얼이 빠져있는 것이, 이대로 두었다간 마치 꽃에 홀려버릴 것만 같단 말입니다.”

“그럼 그냥 홀리게 내버려 두시지요.”

상궁의 태도는 기이할 정도로 차가웠다.

“어찌 그리 야속한 말씀을 하십니까?”

“차라리 얼이 빠져버리는 것이 그 아이에게 나은 일인지도 모릅니다.”

“대체 그게 무슨….”

상궁은 안의 말을 잘라버렸다.

“이는 내명부(內命婦)⁠4의 일이니 기사관께서 간섭하실 사안이 아닙니다.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이만 물러가시지요.”

안이 거듭 부탁했으나 상궁의 태도는 단호했다. 결국 안은 나인을 모른 척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가끔은 나인이 몇 남지 않은 꽃송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입속으로 무어라 중얼거리기도 했다. 워낙 목소리가 작은 탓에 내용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저 여인에게도 무언가 사연이 있는 것일까. 궁금했으나 굳이 캐묻고 싶진 않았다. 자신에게 내려진 명은 어디까지나 꽃이 자라난 원인을 조사해 규명하라는 것이었지, 수상한 나인의 사연을 밝히라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여인의 마음속까지 헤집고 어지럽힐 자격은 없다고 생각했다.

목을 맨 나인에 대해 여기저기 추궁하지 않은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안은 사람의 원망이나 감정 따위가 기이한 일을 일으킬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으므로, 이에 대해 조사할 이유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요괴는 존재한다. 괴수와 귀신도. 삼라만상을 조작하는 신묘한 힘들 또한 분명 실재한다. 허나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질 나쁜 이야기에서처럼 작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뿌리 없는 꽃이 자라난 현상 자체는 분명 기이하게 여겨질 만하나, 그 이치를 규명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여기에도 분명 숨겨진 원리와 법칙이 존재할 것이 분명했다. 죽은 궁녀의 저주니 원망이니, 요술이니 악귀니 하는 세간의 추잡한 소문을 굳이 자신까지 주워다 퍼뜨릴 필요는 없었다.

안은 눈앞에 보이는 현상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거면 충분했다. 꽃의 상태를 관찰하고, 경과를 기록하고, 무엇이 꽃을 틔우고 소멸하는지 설명할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더디지만 진전은 있었다. 꽃이 점점 사그라지면서 뿌리라 부를만한 지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꽃은 명백히 특정한 지점을 중심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담장의 중심에서 조금 왼쪽으로 치우친, 어른의 허리 높이 정도 되는 위치였다. 물론 그곳의 덩굴을 들춰보아도 뿌리를 찾을 수는 없었으나 그곳에서부터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음은 분명해 보였다.

그리하여 나흘째 되던 밤, 토정이 궐에 들었다. 언제나처럼 무쇠로 된 갓을 뒤집어쓴 토정은 지팡이를 짚으며 버드나무처럼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자네, 취한 것은 아니겠지?”

그러자 토정은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그럴지도.”

“오늘은 빈손인가?”

“딱히 준비할 것이 없네. 그저 소소한 일화일 뿐이니.”

토정의 대답을 들은 안은 조금 실망했다. 언제나처럼 토정이 무언가 신묘한 목각 장치를 챙겨오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장치의 힘을 빌어 능소화 뿌리를 찾으려나 싶었건만, 이 친구가 대체 이번엔 무슨 꿍꿍이인지.

삼경(三更)⁠5에 이른 늦은 시각. 멀리 백악산(白岳山)에서 흘러나온 밤안개가 궁내에 자욱이 내려앉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둘러 수다문으로 향했다.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크고 작은 건물을 증축해온 탓에 궁궐 내부는 미로처럼 복잡했다. 빼곡하게 채워진 건물 사이마다 구불구불 되는대로 통로가 지어졌고, 그나마도 사방이 벽체로 둘러싸여 너머가 보이지 않았다. 빼꼼 머리를 내민 키 큰 나무들만 담장 너머로 흐느적댈 뿐이었다. 규칙성 없이 심어진 다종다양한 나무들 덕에 궐 내는 마치 진짜 숲속에 와 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어쩌다 짙은 안개 너머로 여우라도 마주칠 때면 자신이 선계(仙界)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착각될 정도로.

끝없이 늘어선 궁녀들의 처소를 지나, 두 사람은 이윽고 수다문에 도착했다. 골목에 가까워질수록 스산한 안개가 점점 짙어졌다. 겨울밤의 차가운 습기가 살갗에 닿을 때마다 체온이 아닌 생기 그 자체를 빼앗기는 것만 같았다.

“미리 말해두지만, 내가 가봐야 별 도움은 안 될 걸세. 그저 지켜보는 것 외엔.”

골목에 들어서기 전, 토정이 말했다.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건가?”

“나야 그렇지. 자네는 아닐 걸세.”

“나는 아니라고?”

“아마도.”

안은 속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속 시원히 말 좀 해보게. 오늘 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것인가? 대체 내가 무엇을 하면 되겠는가?”

“아직은 나도 알지 못하네. 허나 곧 알게 되겠지.”

토정은 그리 말하며 방향을 꺾어 골목으로 들어섰다. 언제나처럼 골목에는 나인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나인은 말없이 담장 앞에 쪼그리고 앉아 꽃봉오리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이제 꽃은 한 송이밖에 남지 않았다.

“저 여인이 홀려도 단단히 홀렸구나.”

토정이 안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홀리다니, 무엇에 말인가?”

“임금이겠지. 능소화가 핀 것을 보면.”

“임금? 주상 전하 말인가?”

토정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나인의 곁으로 다가섰다.

“당신이 토정 선생이신가 보군요.”

나인이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렇소.”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혹여 저를 말리러 오셨습니까?”

“아니, 그건 저 친구가 하게 될 것이외다.”

“저분께서?”

나인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꽃을 향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무어라 속삭이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허나, 토정은 그 뜻을 이해하는 모양이었다.

“소용없소.”

토정이 말했다.

“어제 묻힌 임을 내일 찾아서야 되겠는가.”

그러자, 나인은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인은 거의 울먹이는듯한 목소리로 힘겹게 토정에게 맞섰다.

“아아, 어찌 그리도 잔인한 말씀을 하십니까?”

“그대의 임은 떠났소. 아무리 간절히 바라본들 재회할 수 없을 것이오.”

“허나 눈앞에 있지 않습니까. 이토록 아름다운 꽃이 말입니다.”

“꽃은 그대의 임과는 무관하오. 오직 그대의 미련에 관계되어 있을 뿐.”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 일에는 분명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궐 내의 무수한 여인 중에 하필 제가 처음 이 꽃을 발견한 데에는….”

“의미 따윈 없소.”

두 사람이 대체 무슨 대화를 주고받는 것인지, 안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안은 꿀꺽 침을 삼키며 집중했다.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아마 곧 마지막 꽃송이가 떨어지리라. 그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며 꽃을 바라보았다.

뚝.

꽃이 떨어졌다.

그러자 나인이 더 크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사그라든 꽃을 내려다보며, 나인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안은 처음으로 여인의 속삭임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밉다. 보름을 이리 기다렸는데 어찌 한 번을 안 나타나니?”

갑자기 나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품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을 꺼내 들었다. 장도(粧刀)였다. 달빛을 받은 예리한 날붙이가 푸르스름한 빛을 발했다. 나인은 바닥에 떨어진 마지막 꽃송이를 발로 짓뭉개며 소리쳤다. 정성스레 자수가 놓인 하얀 꽃신이 핏물로 물들었다.

“왜! 왜! 대체 왜 그랬어!”

나인이 칼을 거꾸로 쥐고 담장을 긁어대기 시작했다. 벽체에 깊은 칼자국이 새겨졌다. 여인이 혹여 날붙이로 누군가를 해하기라도 할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안은 나인의 칼을 빼앗으려 조심스레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나인이 거세게 팔을 휘두르는 통에 쉬이 붙잡을 수가 없었다. 뒤로 고꾸라진 안은 급한 마음에 토정에게도 도움을 요청했으나, 그는 팔짱을 낀 채 바라만 볼 뿐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이는 오롯이 자네가 해결해야 할 일이네. 여즉 저 여인을 내버려 둔 자네의 업보란 말일세.’ 입을 꾹 다문 토정이 눈빛으로 그리 꾸짖는 듯했다.

이제는 거의 쉬어버린 목소리로, 나인은 정신을 놓고 서럽게 울분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칼을 휘두르는 몸짓이 점점 빨라졌다. 어깨가 빠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한겨울의 싸늘한 날씨인데도 나인의 이마에선 비 오듯 땀이 쏟아졌다.

“제발 가지 마! 이대로 사라지지 마!”

나인은 담장에 남은 마지막 꽃가지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가느다란 줄기가 이내 사그라들었다. 능소화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꽃이 사라진 담장엔 거무스름한 씨앗 하나가 덩그러니 박혀 있을 뿐이었다. 힘이 빠져버린 나인은 털썩 바닥에 무릎 꿇었다.

“이리 허망히 끝날 거라면 나도…”

나인이 자신의 목을 향해 장도를 겨누었다. 안은 황급히 나인을 가로막았다. 마음이 앞선 탓에 저도 모르게 양손으로 칼날을 움켜쥐었다. 깜짝 놀란 여인은 두 눈을 치켜뜨며 쥐고 있던 칼을 휙 끌어당겼다. 저린 통증과 함께 허공에 붉은 피가 튀었다.

모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웬 소란이냐!”

뒤늦게 소리를 듣고 달려온 병졸들이 주변을 둘러쌌다. 이내 상황을 파악한 병졸은 거칠게 나인을 추포해 오랏줄을 묶기 시작했다.

“괜찮으십니까?”

병졸 하나가 다가와 안에게 물었다. 그제야 쓰린 통증이 손바닥에 퍼졌다. 안은 상처를 허리 뒤로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괜찮네. 그런데 저 여인은….”

“아마 겁을 집어먹고 실성한 모양이지요. 걱정 마십시오. 소란을 일으킨 정도이니 큰 벌을 받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일단 저희가 데려가 진정토록 한 다음 자초지종을 묻겠습니다.”

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병졸들은 순식간에 나인을 데리고 사라졌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인은 온몸을 바둥거리며 꽃이 사라진 담장을 향해 알 수 없는 외침을 쏟아냈다.

사방에 금세 정적이 내려앉았다. 안은 불쾌한 표정으로 토정을 노려보았다.

“자네는 일이 이리될 줄 알고 있었군.”

토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그런데도 어찌….”

“미리 막지 않았느냐고?”

토정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이는 결말이 이미 정해져 있는 이야기였기 때문일세.”

“정해져 있다? 웃기는 소리 말게. 자네가 미리 언질을 주기만 했어도 내가 막을 수 있었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더라면 억지로라도 저 여인을 쉬게 했을 것이야. 저 여인은 보름이나 이곳을 지키다 실성하였네. 꽃의 기이한 기운이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게지. 방금 전 꽃이 사라진 자리에 씨앗이 박혀있는 것을 보았네. 어느 궁녀가 임금을 그리워하다 한이 맺혀 담장에 요사스런 꽃을 심고는 목을 매 영영 떠나버린 것이 분명하네.”

“그게 아닐세.”

토정이 말했다.

“꽃은 죽은 궁녀가 틔운 것이 아니네. 그랬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꽃이 자랐어야 옳겠지.”

“그럼 누가 꽃을 틔웠단 말인가?”

“꽃은 자네가 틔운 걸세. 저 나인과 함께. 이제 막 담장에 뿌리를 내렸지.”

토정은 담장에 흩뿌려진 안의 핏자국을 가리켰다. 피를 머금은 꽃씨가 그 안에 박혀있었다.

“능소화는 여름꽃일세. 여름을 향해 뻗어가야만 했겠지. 주어진 이름대로 하늘의 법칙을 거스르려 한 것이네.”

토정이 말했다.

“꽃은 시간을 거슬러 자랐네. 그래서 자네의 눈에 점점 사그라드는 것처럼 보인 게지. 실은 어제를 향해 점점 크게 꽃을 틔운 것인데도, 자네는 꽃과 뒤집어진 시간을 사는 탓에 이를 거꾸로 바라보고 말았네.”

“꽃이 어찌 시간을 거스른단 말인가?”

“아마 죽은 인연을 그리워한 나인의 마음이 그러한 성정으로 꽃을 피운 것이겠지. 떠난 이가 어찌할 수 없이 그리워 꽃이나마 어제로 틔워 보내야 했었는지도.”

“이해가 되질 않네. 능소화는 임금을 그리워하는 꽃이라 하지 않았는가. 저 나인은 주상 전하를 흠모하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네.”

“목을 맨 궁녀가 저 여인에겐 임금만큼이나 귀한 존재였는가 보지.”

토정은 그리 말하며 벽에 박힌 씨앗을 뽑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맥이 풀린 안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미리 말 좀 해주면 오죽 좋은가.”

“미안하이. 나도 피를 보게 되리라는 것 외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네.”

“어쩌면 이보다 심한 피를 보게 될 수도 있었네.”

“그랬더라면 꽃이 저리 순하게 자라지 않았겠지.”

“하여튼 자네는 뭘 제대로 파악하는 법이 없어.”

안은 상처 입은 양 손바닥을 내보이며 투덜거렸다. 그러자 토정은 씨익 웃으며 안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래도 한가지는 맞히지 않았는가.”

토정이 말했다.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지?”

토정은 그리 말하며 미리 준비해온 헝겊을 안의 상처에 대고 꽉 감아주었다.

 

<끝>

 

 

1 왕비의 생활공간. 다른말로 중궁전(中宮殿)이라고도 한다. 왕비를 이르는 말인 중전(中殿)은 중궁전을 줄인 말이다.

2 침방(針房)에서 만든 옷가지 등에 수를 놓거나 장식을 다는 일을 하는 궁내 부서.

3 도성 내의 기이한 일을 기록하는 사관으로, 공식적인 사초를 다루는 기사관(記事官)과는 한자만 달리하여 쓴다.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직책이다.

4 궁중에서 생활하는 여관(女官)들을 총칭하여 이르는 말

5 도성에서는 해가 지고 다시 떠오르기까지 시간을 다섯 등분하여 각각 초경(初更)부터 오경(五更)까지 헤아린다. 삼경은 하룻밤의 중간에 해당하는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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