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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륜 수명의 끝

2003.07.26 03:1407.26

  햇빛이 방을 비스듬하게 잘라놓았다. 붓을 든 우현은 예민하다. 소맷자락을 고정시킨 밴드, 밴드가 받치는 손목의 움직임이 불만스럽다. 나는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친다. 그는 더욱 불만스러웠지만 참고 글씨를 쓴다. 쓰는 동안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우현은 며칠간 침묵할 것이다. 침묵으로 불만을 삼키고 신경질을 짓누르고 후회를 뭉갠다. 그러나 나는 지금 침묵으로 그녀를 옭아매었다. 우현이 글씨를 쓰는 여자는 내 안에서 불안하다. 위아래로 날뛰지만 그녀는 도망갈 수 없다. 여자는 튀어나가려 애쓰며 울부짖는다. 우현의 근육이 서서히 삐걱이기 시작한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근육은 남은 힘을 억지로 짜내어 글씨를 쓴다. 우현은 한계에 거의 다다르고 있다. 나는 쓰지 않으므로 우현이 어떻게 쓰는지 알 수 없지만 우현의 목에 땀이 배어나오기 시작하고 귀가 붉게 달아오르면 그의 한계와 우리의 일이 끝나는 것을 본다. 우현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벌린 입술로 땀이 흘러든다. 붓이 얼굴에서 떠오르고 다시 내려앉는다. 끝났다. 우현의 등이 순식간에 흠뻑 젖었다.
  
  “땀냄새가 나.”

  무슨 말이든 상관없다. 내가 그녀의 목소리로 말한다. 팟 여자가 내게서 튕겨나와 빙글빙글 방을 맴돈다. 몇번이고 시신에 돌진하던 그녀는 울면서 대기에 녹아버렸다.
  시신은 벌써 탄력을 잃었다. 죽은 직후, 사람들은 많이들 죽음을 부정하려고 울부짖지만 그건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보는 순간 이제 그는 더이상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챈다. 죽음의 순간부터 시신은 썩기 시작한다. 공기에 섞이기 시작한 시체냄새. 우현은 비스듬히 고개를 숙이고 자신이 걸터앉은 시체의 얼굴을 쳐다본다. 아, 아직 작업은 끝나지 않았다. 우현의 마지막 인사가 안 끝났다. 몰라. 어쨌든 난 모른다. 난 쓰지 않는다. 난 기다린다. 이제 우현은 쓰러질 것이다. 쓰러진다. 나는 우현의 양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서 끌어냈다. 손에 땀이 질척하게 묻었다. 시신의 허벅지에 걸려 우현의 뒤꿈치에서 신발이 떨궈졌다. 구두, 신어야 해.

  “빨리 나가자.”

  우현은 힘겹게 늘어진 몸을 추스려 신을 신고 일어섰다. 문을 열자 우리에게서 죽음을 감지하고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함께 있는 우리에게서 사람들은 너무 빨리 죽음을 눈치챈다. 냄새가 나는지도 모른다. 집을 나와 우리는 등을 돌렸다. 우현은 다시 발을 절뚝이며 걸어갔다.
  햇빛이 벌써 노을의 기미를 띤다. 엄마가 들어올 때 순두부를 사오라고 했었다. 한 번의 일을 끝내고 나면 몇 날 며칠의, 내가 응당 누려야 할 꽤 많은 날수의 일상을 뺏긴 것 같다. TV를 보고 밥을 먹고 책을 보고 게임을 하다가 약간 지루해하는, 오늘 뭐했는지 한숨쉬며 내일 할 일을 계획해보는 일상. 그건 내가 아주 좋아하는 지루함이지만 일상을 빼앗기기 때문에 좋아하게 된 건지 좋아하기 때문에 빼앗긴 느낌인 건지는 모르겠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일을 해온 듯하다. 기억이 뒤섞였다.
  별 생각없이 순두부를 사러 동네 할인마트에 갔는데 의외로 사람이 많았다. 사람들의 냄새와 얼굴들이 혼란스러웠다. 계산하고 빠져나오기까지 나는 몹시 허둥댔다. 집이 보이는 골목에 들어섰을 때에서야 등뒤에 따라붙은 것을 알았다. 놈은 내가 혼자일 때를 노렸다. 혼자인 나는 그저 한 사람일 뿐. 놈이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웃었다. 골목으로 들어가기 위해 내 곁을 스치던 여고생 둘의 발걸음이 갑자기 뻣뻣해지더니 급하게 뛰어간다. 대기에 놈의 웃음이 스산히 흐른다. 그러나 두렵지 않다. 놈이 나에게 덤벼들고 발길질을 날리지만 놈과 나는 세계가 다르다. 혼자 있어도 이미 일을 끝마친 나는 한 사람일 수가 없는지도. 한가지만은 확실하다.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을 방해받았다는 것.

  “백순천씨?”

  대문옆을 서성이던 여자가 있었다. 나를 보고 얼굴이 밝아져서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던 그녀는 헉 숨을 들이키며 물러섰다. 놈은 이를 드러내고 여자에게 달려들었다. 여자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핸드백에서 부적을 꺼내어 날렸다. 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엄마, 나!”
  “잠깐만요!”
  “지금은 안돼요.”
  “백순천씨!”
  “엄마! 문열어!”
  “금방이면 돼요! 가지 마세요! 얘기 좀 해요!”
  “지금은 안돼요!”

  순두부 찌개가 먹고 싶어. 나는 대문을 쾅 닫고 현관으로 급하게 들어갔다. 인터폰을 누른 엄마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을 앞치마에 닦고 있었다. 나는 벼락같이 소리질렀다.

  “왜 이렇게 늦게 열었어!”

휴대폰으로 여자한테서 전화가 왔지만 난 귀찮았다. 주어지는 일만으로도 우리 둘 다 힘들다. 버겁다. 괴롭다. 이 모든 표현이 걸맞지는 않지만 근접은 하니까 그렇게 말한다. 주어지는 일 외의 것은 짜증스럽고 하기 싫다. 하지만 우현은 집으로 찾아왔다. 내 착각이었다고 뒤통수를 두들겨맞은 기분이었다. 보통 회복에 일주일이 걸리던 그가 삼일만에 나를 찾았다.

  “난 보고 싶어.”

  혼자 가면 그는 쓸 수 없다. 나는 우현과 여자를 따라나섰다. 여자는 차를 몰며 어딘가에 계속 전화를 했다. 우현은 표정이 영 좋지 않았고 나 역시 그랬다. 남의 차에 앉아 남의 전화를 듣고 있는 상황도 불쾌했다. 시외로 빠져나가 20분 가량을 달려 어느 요양원 안으로 차가 들어갔다.
  흰 현관에 서 있던 건 십대 남자애였다.

  “누나, 이 사람들이에요?”
  “응, 인사해. 순천씨, 우현씨. 경서예요. 이쪽이 백순천씨, 그리고 김우현씨.”

  고개만 까딱하는 그 애를 우현은 슥 훑었다. 아, 이 애도 보나. 그녀, 이름이- 희연은 경서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따라오세요.”

  부적이 방문에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무척이나 거슬렸다. 창문에도 마찬가지였다. 방은 건물의 모서리에 자리잡았고 방 크기에 비해 큰 창문이 두 개나 있어 햇빛이 눈부시게 방을 밝혔다. 침대위에 누워있는 얼굴.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저 얼굴은 내 몫이 아니다. 이미 씌어있는 글씨와는 별개로 저 죽음은 내 몫이 아니다. 우현이 침대에 다가서서 이마에 손끝을 댔다. 글씨는 완성되어 있었다. 수명의 끝을 천지에 고함.

  “읽고 있어?‘

  우현은 글씨를 보고 있었다. 나는 경서를 쳐다보았다.

  “너야?”

  다른 자들을 만나는 것이 처음은 아니다.

  “짝도 못 만났는데 썼어? 어떻게 읽었지?”
  “연습해봤을 뿐이야!”

  경서는 되바라지게 대꾸하며 의자를 걷어찼다. 희연이 불안해했다.

  “어때요? 지울 수 있어요?”

  우현이 물러섰다. 나는 이마를 찌푸렸다.

  “읽어야 해? 피곤하고 귀찮아. 봤으니까 그만 가자.”

  혼이 떠났는데도 아직 죽지 않은 얼굴. 살아 있다. 읽을 수 있다.

  “싫어, 꼭 읽어야 돼?”

  나는 인상을 쓰며 한숨지었다. 지저분한 피부의 이마, 짙은 눈썹, 불룩한 눈, 펑퍼짐하지만 끝만 날렵한 코, 약간 짧은 인중과 입술. 나는 손으로 얼굴을 더듬었다. 다소 손톱이 툭툭 걸리는 피부를 손끝으로 쓸었다. 혼이 근처에서 맴돈다. 남의 몫을 읽으려니 저항이 거세다. 이 사람은 오래 살았다. 그러나 아직 때가 아니다. 통과. 경서와 희연은 아는 사람이다. 통과. 이 글씨는 이 사람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다. 이 글씨의 몫은 이 사람이 아니다. 글씨는 몫이 없다. 이 사람은.

  “부적따위 없어도 그는 여기로 못 들어와요.”

  나는 창에 붙은 부적을 잡아뜯었다.

  “이거 봐요, 백순천씨!”

  어찌나 단단히 붙여놓았는지 종이들이 두텁게 층을 이루고 있었다. 어느 정도의 틈이 생기자 남자의 혼이 쐐액 쏘아져들어왔다. 드러누운 육체에 안타깝게 들어서려고 몇번이고 시도하지만 소용없다. 희연이 입술을 깨물면서 고개를 매몰차게 돌렸다.

  “말 좀 해봐요, 지울 수 있겠어요?”

  도와줘요. 그 사람은 아직 목숨이 남았는데 글씨를 받았어요. 하지만 그는 아직 살아있어요. 글씨를 지울 수 있는지 한 번 봐줘요. 보기만이라도.
  희연은 나를 쳐다보면서 경서를 의식하고 있었다. 나도 경서를 힐끗 돌아보았다.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초조해하던 그는 문득 손을 뒤로 감추었다. 애매 모호한 감각. 부적을 올려다보고 있던 우현이 나한테 바싹 다가왔다. 저 얼굴은 나의 몫. 내가 읽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경서는 벌떡 일어섰다. 건방진 빛만을 띄우고 있던 표면에 드디어 공포가 떠오른다.

  “백순천씨!”

  시간이 비틀렸다.
  여자는 눈물을 흘릴 듯한 표정으로 멈춘다. 우현은 아이의 몸을 바닥에 눕힌다. 아이는 내 안에서 얌전하다. 부적을 뜯어낸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 움직이지 않는 그림자.
  이런 경우를 무어라 말해야 하는 것일까. 우현은 쓴다. 나는 읽고 기다린다. 우리는 짝 없이는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내 안으로 불려온 이 애는 가만히 저항도 않는다. 이 애의 몫은 없다. 이 애의 몫은 남자로 끝났다. 붓을 들어 짝에게 쓰고 몫을 끝내버렸다. 기다렸던 것일까. 이애가 저항을 않으니 나는 나로 있을 수 있다. 이 시간에 있는 나는 낯설다. 우현도 풀어진 채 붓이 젖기를 기다린다.
  이애는 처음부터 이러했다. 글씨를 쓰려고 태어났지만 그 글씨는 임자가 없다. 자신의 짝의 얼굴에 글씨를 쓰고, 이렇게 죽으려고 했다. 희연의 눈동자 저 안쪽에 눈물이 보인다. 그녀는 동생의 수명을 알고 있어서 막으려고 애썼던 건지도 모른다. 그녀는 나의 몫이 아니라서 나는 그녀를 읽을 수 없다. 원했던 것은 글씨를 지우는 것. 시간이 바로잡히면 그녀는 절규할지도 모른다. 희연은 동생을 원했던 거지 저 남자가 살아나는 것을 원한 게 아니었다.
  토할 것 같아. 위액이 목까지 치밀어오르는데 나는 소리를 낼 수 없다. 소리는 내 안의 혼을 풀어버린다.
  나는 아직, 일하는 중이다.
  우현은 산뜻하게 팔을 놀려 글씨를 써내려간다. 기다렸다는 듯한 표정으로, 어쩐지 기쁜 것도 같다. 순식간에 글씨를 쓰고 나를 쳐다본다. 그 눈빛에 어린 묘한 쾌감.
  욱하고 소리가 입술 밖으로 흘러나왔다. 나는 입술을 막았다.
  망설이며 경서가 내 안에서 빠져나가고 나는 바로 달렸다. 스치듯이 쳐다보았지만 이미 경서의 얼굴을 읽었다. 글씨를 받은 이 때가 결코 죽음의 때가 아니다. 글씨를 받는 이 순간 경서는 자신의 몫을 찾았다. 그는 우리처럼 남자와 짝을 이루어 남자가 읽고 기다리고, 경서가 글씨를 쓰며 오랫동안 일할 것이다……. 나는 남자의 얼굴에서 글씨가 지워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눈에 띄는 나무 아래로 달려가 무릎을 꿇었다.

  “백순천!”

  일어서려고 했지만 다시 한 번 욕지기가 치밀었다.
  죽은 나. 허공을 부유하는 나. 아니, 그렇지 않았어. 나는 끝없이 떨어졌다. 하늘이 멀어져가고 심장은 미친듯이 뛰었다. 누워있는 내 얼굴을 만지는 손가락, 얼굴을 적시는 붓. 하지만 나는 으깨지고 부숴졌어.

  “백순천씨!”

  노란 위액까지 토하고 일어선 나를 보고 여자는 누그러졌다. 손에 들고 있던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필요없어.”

  아무리 침을 뱉어도 입안의 냄새는 가시지 않았다. 여자는 뭔가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입을 벌렸지만 나는 등을 돌렸다. 뒤에서 우현의 성한 발소리가 들렸다.

  “백순천.”

  그가 내 팔을 잡았다.

  “치워!”

나는 거칠게 뿌리치며 거리를 벌렸다.

  “왜 이래? 일이잖아?”

  어눌한 말투로 우현이 물었다. 당혹감만으로 가득찬 눈빛이었다. 아무런 생각없이, 의심도 없이, 불안감도 없이.

  “두 번 다시 일없이 찾아오지 마.”
  “일 없이 찾아간 게 아니잖아?”
  
  언제까지일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일을 하는 한, 내가 일을 해야 하는 한, 우현과 나는 더불어 한 몫.
  나는 우현에게서 눈을 피했다. 저 눈이 혐오스러웠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다해도 우현은 대항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어떤 짓으로도 관계는 깨지지 않는다. 나는 도망치듯 걸었다. 우현은 쫓아오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쫓아올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걸음을 서둘렀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거리가 툭 끊길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 후에야 나는 이상하게 고요한 길의 한가운데에서 우현의 한쪽 운동화가 끌리는 소리를 들었다. 누구도 따라오지 않았고 누구도  앞서가지 않았다. 우현은 천천히 발을 절뚝이며 걸었다. 나는 우현을 짓밟고 싶은 충동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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