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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t android is a wizard!


illustration by 라지



  '되먹지 못하고 불경(不敬)하기 짝이 없는 환상소설가들에게’







  1. 사라진 소화전

  내가 물벼락을 맞는 것은 횡단보도에 서 있다가 이제 막 길을 건너려 했을 때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택시에 내려서 호들갑을 떨면서 구두에 먼지를 털고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는 허겁지겁 모퉁이를 돌아서 이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고 그것은 정말로 바보짓이었다. 잘못 되도 한참은 잘못된 짓이었다. 차리라 택시를 타고 환상소설 관리국 정문까지 갔어야 했다. 그리고는 건물로 들어가서는 경비에게 초라한 몰골이 어떤 것인가를 몸소 보여주고 신분증을 아무렇게나 꺼내서 내밀고는 가까운 화장실이라도 들어가서 넥타이를 매고 옷을 단정하게 입었어야만 했다. 그리고 찬물에 세수를 하면 좀 나아졌겠지……. 그랬다면 이렇게 물벼락을 맞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 전까지 소화전이 있어야할 자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더 이상 소화전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세차가 뿜어져 나오는 굵은 물줄기뿐이었다.
  사람들은 미친 듯이 뛰어 다녔는데. 그래봤자 대부분 나처럼 물에 흠뻑 젖어 있었을 뿐이었다. 멀찌감치 떨어진 사람들은 멍하니 그 광경을 쳐다볼 뿐이었다. 어디선가 비명아지가 들렸다. 급기야 누군가와 쿵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조그만 여자 아이였다.
  “아저씨, 하늘에서 물이 떨어져요?”
  아이는 말했다. 아이는 활짝 웃고 있었다. 그래 나도 그건 아주 잘 알고 있단다. 안 그러면 미쳤다고 물을 맞고 서 있겠니? 그래서 ‘원래 소화전 물이 이렇게 쏟아져서는 안 되는 거란다’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은 뭐가 신났는지 대부분 펄쩍 펄쩍 뛰어 다니며 좋아하고 있었다. 이 심각한 상황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이 일의 첫 발단은 택시 따위가 아니었다. 어제 오후 늦게 반장이 난데없이 내 책상 앞까지 쳐들어와서는 내일 당장 환상소설관리국장을 만나야 한다고 말했을 때였다. 내가 그때 무슨 말을 했더라?
  “언제요?”
  그때 이런 말을 하지 말아야만 했다. 반장은 ‘10시까지는 보자는 군.’ 그렇게 말하고는 부리나케 사라져버렸다. 최소한 내가 잠복근무와 끔찍한 업무 때문에 이 주 내내 잠 한번 제대로 자본적이 없다고 흥분하며 떠들어 대고는 주말엔 죽어도 침대에 꼼짝없이 시체처럼 쓰러져있어야 한다고 주장할 시간조차 없었다. 게다가 더 최악인 것은 그 날도 도망친 안드로이드 때문에 밤새 길거리를 쏘아 다니다가 새벽쯤이나 집에 들어왔다는 점이다. 그리고는 아침에 반장이 전화를 해됐다. 그리고는 수십 번 했는데 왜 이제야 받냐고 마구 화를 내는 것이었다. 정각 10시였다. 그때 차를 몰고 갈수도 있었지만 택시를 잡아탄 것은 30분이나마 달콤한 잠을 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포켓컴퓨터로 반장이 두 번이나 전화하는 바람에 제대로 잘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반장은 모든 일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투였다. 어떻게 약속시간을 늦을 수 있냐며 그곳 국장이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 사람인지 몰라서 그러는 거냐며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그리고 단정하게 하고 가라는 충고였다. 예의바르게 행동하고 요구사항을 뭐든 들어주라고? 확실한 것은 최소한 내가 단정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내 꼴은 정말 말이 아니었다.

  일부러 몇 블록 앞에 내린 후, 처음 몇 분은 주머니 속에 구겨 넣은 넥타이를 매보려고 안간힘을 써봤지만. 보기 좋게 시간만 허비했다. 손수건으로 구두의 먼지를 턴 다음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머리를 대충 매만지면서 횡단보도에 서 있었다. 어쩌면 세수 정도는 할 필요가 있었다. 이 몰골로 환상소설관리국 국장 앞에 서면 ‘자네, 어제 밤새 안드로이드에게 무슨 짓을 한건가?’라고 물어 볼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물벼락은 더 도움이 안됐다. 약속시간에 한 시간이나 늦은데다 몰골은 말이 아니고 물벼락까지 뒤집어썼다. 반장이 아침 내내 떠들어 된 단정하고 품위 있는 안드로이드 전담반의 대원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환상소설 관리국 정문에 들어서자 경비 표정은 봤어야 했는데. 그 사람은 내가 이제 막 바다에서 튀어나온 인어공주로 보였는지 넋을 잃고 쳐다보는 거였다. 물론 내 처참한 몰골을 보자 그는 조금은 측은한 눈길이 되었지만 말이다.  
  길 건너 소화전이 터지는 바람에 이 꼴이죠.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증거품이라도 된다는 듯 그에게 물에 흠뻑 젖은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그는 의외로 침착하게 아무 말 없이 외부인 출입증 내게 건넸다. 엘리베이터에서 경비원에게 했던 말을 수없이 반복해야만 했다. 망할 놈의 국장실은 103층에 있었고 엘리베이터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때 마다 사람들은 놀란 눈을 했고 매번 경비에게 했던 말을 대풀이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젊은 아가씨에게 멀쩡한 소화전이 터지는 일도 종종 있다고 얘기하고 있을 때 그녀는 98층에서 내리고 있었다.

  내가 내린 층은 엘리베이터와 긴 복도 밖에 없었다. 멀리 길게 늘어선 복도와 창문들 밖에 없었다. 그래서 복도 끝자락에 있는 국장실까지 걸어가다 보면 되먹지 못한 건물 구조에 대해서 한번쯤 진지하게 생각할 시간이 충분해 보였다. 물론 그 길이 너무 멀어서 내가 국장실 문고리를 잡고 있을 때 쯤 젖은 옷이 다 말아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국장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여전히 비서로 보이는 아가씨는 이제껏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놀란 눈을 하고 나를 쳐다봤다. 그녀는 손톱을 다듬고 있었는데.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또다시 했던 말을 반복하려니깐 지겨웠다. 그녀는 내가 바다 속에 이제 막 기어 나와 국장의 간이라도 빼앗으려고 하는 거북이라도 된다는 듯한 표정 이였다. 국장님 계신가요? 저희 용왕님이 위독하셔서 간을 가져오라고 해서요. 이렇게 말하면 그녀는 ‘하지만 국장님은 토끼가 아닌데요?’라고 말할 것만 같았다.
  “국장님 계신가요? 조금 늦었습니다. 10시가 약속이었죠.”
  “네. 안...안에 계신데요.”
  그러자 그녀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리곤 그녀는 한참동안 나를 쳐다보았다. 보통 같으면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인터폰을 누르고는 ‘온몸에 물을 뒤집어 쓴 사람이 30분이나 늦게 도착했는데요. 어떻게 할까요?’라고 물어봐야 하는데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아마도 왜 아침부터 물벼락을 맞았는지 이유를 설명해줘야 할 것만 같았다. 그건 내가 이 망할 놈의 건물 로비에서부터 엘리베이터 안까지 열심히 반복했던 말들이였다. 사실 사람들은 별로 그 일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다만 나는 그들이 멋대로 상상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내가 이런 쓸데없는 망상을 하고 있을 동안 내가 여기 왜 왔는가를 상기시켜줄 만한 목소리가 국장실의 고급스런 목재 문을 비집고 들려왔다.
  “빌어먹을 요정! 요정의 짓이라고 하지! 되먹지 못하고 불경(不敬)하기 짝이 없는 환상소설가들 같으니! 불순한 공상가들이 날뛰는걸 보고 있자는 건가!”
  외침소리는 높고 날카로웠지만 노쇠한 늙은이의 목소리였다. 최소한 나 때문에 화난 것 같지는 안군 나는 생각했다. 비서는 그 소리에 깜짝 놀라서 인터폰을 누르고는 30분이나 지각한 나를 소개했다. 즉시 돌아오는 반응. 어쩌면 화났을지도 모르겠군. 왠지 불길했다.
  “자네는 그 꼴이 뭔가?”
  국장이란 사람이 나를 보고 한 첫마디였다. 물론 한낮에 소화전이 난데없이 사라져서 물벼락을 맞았다는 설명을 이것이 마지막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그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에 하나같이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사내들이 줄지어 서 있었는데 모두 다 검은 가방을 외판원 마냥 들고 서 있었다. 국장은 무척이나 깐깐하게 생겨먹은 노인네가 틀림없었다. 희끗한 머리나 잔뜩 주름잡힌 이마가 늙다리 노인네 같았지만 깡마른 체격에 부릅뜬 두 눈은 언제든지 잔뜩 화를 내며 큰소리칠 준비를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축축하게 젖은 몸에서 시도 때도 없이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몹시 신경 쓰였다. 왜냐하면 국장실 구석구석에는 값비싸 보이는 고급 양탄자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 한낮에 이 모양 이 꼴인지를 설명해야만 했다. 무엇부터 설명하지? 그래 그 빌어먹을 소화전. 그게 난데없이 터지는 바람에…….
  내가 소화전이 터졌다는 말을 하자마자. 반응은 폭발적 이였다. 국장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으며 국장을 둘러싼 사내 중에는 들고 있던 가방을 떨어뜨린 사람도 한명 있었다. 하나같이 불쾌하고 당혹스럽고 놀란 얼굴이었다.
  “그 망할 소화전! 또 다시 사라졌구먼! 빌어먹을 공상가 놈들 같으니라구!”
  나는 내가 소방국장실이라도 잘못 찾아온 게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국장은 안절부절 못하더니 곧장 내게로 재빨리 다가왔다.
  “소화전이 터졌다구? 터진 게 확실한가? 사라진 건 아니구?”
  “글쎄요. 제가 봤을 땐 소화전은 없었습니다.”
  잠시 생각하고 대답을 했다. 사라지든 터지든 그게 무슨 상관인지 알 수 없었다. 중요한건 대낮에 무고한 시민이 물벼락을 맞았다는 것이다. 국장은 그곳으로 달려가 소화전이 사라졌는지 아니면 터졌는지 당장이라도 확인해 보자는 그런 기세였다.
  “그러니깐 소화전이 터진 게 아니라는 말이군?”
  그가 다시 물었다.
  “글쎄요. 터진 건 터진 거겠죠. 그렇지 않다면 물벼락을 맞을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그는 나를 외면하고 휙 돌아서더니 큰 지도가 걸려 있는 벽 쪽으로 걸었다.
  “자넨? 소화전이 왜 사라졌다고 보나?”
  그는 아주 사라졌다고 단정하고 있는 듯 했다.
  “글쎄요. 노화된 소화전일지도 모르죠.”
  멀쩡한 소화전이 왜 터질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는 나를 한번 힐끔 보더니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6개월 전에 전부 새 소화전으로 시 전체를 교체했다는 말을 했다. 왜 환상소설관리국이 소화전에 그렇게 집착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왜 이렇게 늦었나? 시간관념이란 게 자네 머릿속에 없나?’라고 화를 낸 후에 ‘안드로이드관리국은 이렇게 일을 하는 게 통상적인 업무처리인가 보군.’이라며 비아냥거리는 게 더 날 것 같았다. 소화전이 사라졌든 터져든 누가 몰래 훔쳐가든 그게 뭐가 어쨌다는 것인지…….
  국장은 지도를 한참 동안 째려보고 있었는데. 그 지도는 시 전체를 아주 세밀하게 그려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군데군데 빨간 점들이 눈에 띠었는데 나는 그것이 환상소설 작가들의 위치쯤 인줄로 알았다.
  “소화전이 사라진 위치가 어딘가?”
  국장은 나에게 얼굴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천천히 다가가 물벼락을 맞은 장소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도는 너무나 자세히 그려져 있어서 찾는데 어렵지는 않았다.
  그는 그곳에 조그만 원형 스티커를 붙였다. 그것은 다른 점들과 마찬가지로 붉은색 이였다.
  “자넨, 이게 뭘 의미한다고 생각하나?”
  그는 지도를 쳐다보며 턱을 매만지며 질문을 던졌다. 한참동안 붉은 점들을 쳐다 보다 한 발짝 물러서서 전체적인 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단지 지도위에 붉은색 점모양의 스티커들을 덕지덕지 붙여 놓은 것에 불과했다. 달리 뭘 생각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는 내 대답에는 별 관심 없어 보였다. 마치 일요일 아침에 정신없이 자고 있는데 문을 두들기면서 세상이 당장이라도 종말이 올 것처럼 떠들어 대면서 ‘이제 해야 할일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떠버리고 다는 선교사들과 비슷했다. 결국엔 내가 뭐라고 대답하든 상관없다는 식이였다. 그녀들은 언제나 한낮에 평온한 낮잠보다는 종교적 구원이 더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하곤 했었지.
  “이것은 오만함이네. 그리고 불순한 도전이지. 사회를 전복시키려는 그런 위험한 짓거리지.”
  그 부분에서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지난밤에 한숨도 못잔 것과 택시를 타고 한 블록 뒤에서 내린 나의 어리석음, 그리고 한낮에 새로 설치한지 불과 6개월 밖에 안 된 소화전이 터진 일과 그리고 지도위의 붉은 점들이 왜 오만과 불순한 사회 전복을 의미하는지를? 그리고 그것들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상상해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우리는 환상소설가들을 관리하고 있네.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아는가?”
  그가 다시 물었다. 이번에도 대답할 필요가 없는 질문이었다. 가만히 얌전을 빼고 그의 말을 들을 준비만 하면 되는 거였다.
  “환상소설을 쓰는 자들은 지난 한 세기 동안 가장 위험한 자들이었네. 자네도 익히 들어서 조금은 이해하리라고 믿네. 환상소설가들의 불건전한 상상들이 얼마나 많은 위험을 초래하는가에 대해서 말일세. 그들은 자신들의 상상에 대해서 대부분 무책임하다네. 무고한 시민들을 위험하고 불순한 생각으로 물들이는걸 주저하지 않는다네. 소화전이 사라진 것은 바로 그런 이유이지? 한낮에 물벼락을 맞은 시민들은 불쾌했겠지만 녀석들에겐 조그만 즐거움에 불과 했겠지 환상소설가들은 종종 자신들의 상상 속에 진실이 숨어있다고들 말을 하지 그런 말 들어본 적이 있는가? 자넨 어떤가? 환상소설을 읽어본 적이 있는가?”
  “글쎄요. 어렸을 때 동화를 몇 편 읽었을 뿐입니다.”
  “그렇군, 이런 이야기겠군. 끝없이 높다란 탑에 갇힌 공주를 구하는 이야기라던가 세상을 구하겠다고 몰려다니는 난장이와 마법사들의 이야기이거나 숲 속에서 세상걱정 없이 낮잠을 자고 있는 미녀의 이야기겠군.”
  그중에서 숲 속에서 세상 걱정 없이 낮잠을 늘어지게 자고 있을 철부지 미녀가 맘에 들었다. 나도 가능하다면 숲 속이 아니라도 내 방에서 주말을 늘어지게 잠을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떠한 악조건에서도 정신없이 잠에 빠질 준비가 단단히 되있었다.
  “환상소설가들의 상상력이란 건 때론 너무나 위험하다네. 가만히 두면 주체할 수 없을 정도지 선량하고 어수룩한 시민들이 다치고 마는 거네. 너무나 불순할 뿐 아니라 너무나 감상적이지. 이리와 보게. 이 사진들을 봐주게.”
  그는 책상 서랍에서 흑백사진을 하나 꺼내서 나에게 보여주었다. 사진은 조금 흐릿했지만 젊은 여자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언 듯 보기에도 이제 갓 20대에 들어섰거나 아직은 10대로 보이는 아가씨였다. 소녀는 길 한가운데서 웃고 있었는데. 주변을 보니 어두워진 도심이 틀림없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건물의 간판들도 뒤쪽으로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짐작컨대 이 사진은 족히 100년 전쯤 찍은 것 같았다.
  “사진 전문가들이 분석해서 사진속의 시간을 계산했다네. 이 사진은 2012년의 6월과 7월 사이에 찍은 것이네.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이 아가씨가 안드로이드 같아 보이나?”
  국장의 질문은 너무나 이상한 것이었다. 사진속의 인물을 가지고 안드로이드인가를 알 수는 없었다. 운이 좋다면 2010년 이전의 제조된 안드로이드 자료들이 남아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2010년 이전에는 안드로이드는 불법으로 제작되는 일이 허다했으니 자료들 찾는 일 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글쎄요 라는 대답으로 한 발짝 물러나서는 사진만으론 안드로이드를 가려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다시 오른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눈이 호기심에 가득 찬 아이 마냥 반짝였다.
  “흥미롭군. 들어오다가 젊은 비서를 봤겠지? 그녀는 어떤가? 안드로이드인가? 인간인가?”
  “그녀는 안드로이드가 아닐 겁니다.”
  내가 단호하게 대답하자 그는 매우 놀란 눈을 했다. 그리고는 더 눈을 반짝이더니 어떻게 알아냈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안드로이드를 판단하는 일은 그리 까다로운 일은 아니었다.
  “대개는 대화를 나누거나 행동 양식을 분석해서 판단합니다. 하지만 공식적인 판결은 안드로이드 목록에서 일일이 대조를 하곤 하죠.”
  “비서와 얼마나 얘기를 나눴나?”
  “아니요, 그녀는 놀란 눈을 하고는 손톱을 다듬고 있더군요. 만약 그녀가 안드로이드라면 놀란 눈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냥 마른 수건을 건넸을 겁니다. 안드로이드는 늘 그런 식이죠.”
  그는 조금은 실망한 눈빛이었다. 뭔가 더 그럴싸한 어떤 것을 바랬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이 사진을 봐주게.”
  그는 다시 사진 한 장을 꺼내서 내게 건네주었다. 그 사진에는 조금 전 사진속의 여자보다 더 어린 소녀의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사진은 매우 선명했고 최근에 찍은 듯한 인상을 풍겼다. 사진을 유심히 쳐다본 후 국장에게 도로 건넸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그 소녀는 어떤가? 안드로이드 같은가?”
  “죄송하지만 사진으론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인간일수도 안드로이드일수도 있겠죠.”
  국장은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푹신해 보이는 자신의 의자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몸을 깊숙이 의자에 넣더니 나를 응시했다.
  “그 소녀는 세상에 가장 위험한 존재일세. 우리가 찾고 있는 위험인물중 하나지.”
  “그녀의 이름은 진아입니다. 필명이죠. 원래 이름은 박애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생년월일은 저희 쪽 데이터로는 최소한 1980년 이전입니다. 그녀의 아버지 또한 환상소설가였죠. 위험등급이 2등급 이였습니다.”
  이제껏 아무 말 없이 주위에 둘러싸고 있었던 사람 중에 한사람이 포켓PC를 보면서 말했다.
  “어떤가? 자네 생각은? 그녀의 위험등급은 1등급이네. 그녀의 불순한 상상력이 어떤 위험을 초래 할지 모르지. 소화전이 사라진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네. 그녀의 동조자들조차도 소화전 따위는 손쉽게 사라지게 할 수 있지. 여름에 내리는 눈은 어떤가? 며칠 전에 그녀는 눈을 내리게 했다네. 눈은 사라진지 오래거든. 자네 눈을 본적이 있는가?”
  딱한 번 본적이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 일이라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그녀가 어떻게 늙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가?”
  “불가능한 일입니다. 안드로이드가 노화가 느린 점은 분명하지만 어떤 안드로이드도 200년 넘게 살아남지는 못합니다.”
  “그럼 더미는 어떤가?”
  어쩌면 더미는 가능할지도 몰랐다. 기계로 만들어진 인형이라면 인간들 사이에서 200년 넘게 살아 갈수도 있었다. 하지만 더미라 해도 나이를 거꾸로 먹진 않았다. 더미는 장식용 마네킹 마냥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였다. 2016년에 찍은 사진속의 여인과는 너무 대조적으로 몇 달 전에 찍은 사진속의 인물은 너무나 어린 소녀였다. 도대체 두 사진속의 인물이 동일인물인지 조차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만약 문제의 소녀가 어렸을 때 복제됐다면……. 그렇다면 가능성은 있었다. 더미의 복제는 과거 200년 사이 법으로 엄격히 금지됐었다 쳐도 2000년 이후 출생한 사람들은 충분히 복제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더미는 더미일 뿐이다. 더미가 상상력을 동원해서 소화전을 없앤다던가. 길가에 꽃을 피운다던가. 한겨울에도 내리지 않는 눈 따위를 내리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애초에 환상소설 관리국을 신용할 수가 없었다. 상상 속에 진실이 숨어있다? 사람이 글 따위를 써서 어떻게 그런 일들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상상을 하면 이루어진다? 환상소설가가 글 속에 여름에도 눈이 내린다라고 쓰면 정말 눈이 내린다는 말인가? 그들의 위험한 글들이 마법 같은 일들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자네가 이 사건을 맡아주겠나?”
  “하지만 저는…….”
  “알고 있네. 다만 우리가 찾는 인물이 안드로이드인지? 더미인지 확인만 해주면 되는걸세.”
  그는 확신에 차있는 듯 했다. 그리고 그는 안드로이드 관리국의 윗줄에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의미의 말들을 교묘하게 하고 있었다. 꼼짝없이 이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 내내 반장이 떠벌린 것처럼 그는 매우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다. 면담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졸지에 이상하리만큼 교묘한 사건하나를 떠맡게 되었다. 환상소설관리국을 떠나기 전에 그들은 나에게 끔직하다 싶을 정도의 사진들과 문서 자료들을 넘겨주었다. 그것들은 모조리 그 진아라는 소녀에 대한 자료들 이였다. 그녀가 쓴 책들은 물론이거니와 그녀의 아버지가 쓴 책들 심지어는 그녀가 읽을 책들까지 모조리 내 포켓PC로 전송되었다. 그녀의 출생기록들과 그녀의 개인적인 모든 기록이 다 들어 있었고 가족과 주변 인물들 심지어는 별 관계도 없어 보이는 인물들의 데이터들도 있었다. 사진은 말할 것도 없었다. 졸지에 나는 그 소녀의 팬클럽이라도 당장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2. 잉여생산물(剩餘生産物)

  사람들은 종종 안드로이드를 잉여생산중 하나라고 떠들어 대곤 한다. 전적으로 동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꽤나 그럴싸하게 들렸다. 내 앞에 서 있는 이 안드로이드 소녀가 꼭 그런 경우였다. 특히나 오전 내내 환상소설관리국 패거리에게 시달리고 온 나로썬 말이다. 적어도 이것이 지극히 평범한 내 업무 중 하나라고 해도…….
  “책을 모조리 가져가야 해요! 책들은 주인님이 가장 아끼시던 물건인걸요.”
  소녀가 주장했다. 대꾸하지 않았다. 이런 말장난에 말려들면 한도 끝도 없었다. 안드로이드는 대개 무엇을 주장하는 일은 드물었다. 어쩌면 소녀는 어리광을 부린다던가. 칭얼대는 성격이 주입됐을지도 몰랐다. 이러면 차라리 소녀의 말을 무시하고 주변을 둘러보는 척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쓸데없이 형사에게 말을 건네거나 말이다.
  “타살 같소?”
  “글쎄요. 자살 같군요. 아직은 단정할 수 없겠지만요.”
  소녀는 어느새 다가와 내 앞으로 가로 막았다.
  “글쎄, 책은 그냥 둬도 없어지지 않는단다. 당분간은 말이다.”
  나는 그렇게 말했다. 소녀는 금세 뽀루퉁하게 얼굴이 부었는데. 감정표현이 능숙한걸 보니 최신 모델이 틀림없었다. 이것 또한 잉여생산의 하나일 것이다. 소녀가 가져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수많은 책들도 잉여생산물이겠지. 그냥 두면 환상소설관리국에서 수거를 해갈지도 모르겠군. 소녀가 몹시 화를 내겠는데. 아주 짧은 순간이겠지만. 나는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소녀가 화내는 것도 잉여생산물 중 하나였다.

  내가 환상소설관리국에서 잔뜩 일을 싸질 머 매고 아파트에 도착한 시간은 1시가 훨씬 넘어서였다. 그리곤 곧바로 침대로 직행했는데. 샤워조차도 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달콤한 꿈속이 너무나 그리웠다. 물론 나는 지금 소녀 안드로이드의 미움을 받고 있지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은 아니다. 곧 형사들이 들이 닥쳤고 다짜고짜로 안드로이드 때문이라고 그들은 변명했다. 그들은 난처한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자신들에겐 안드로이들 신문할 권한이 없다고 투덜거렸다. 두 가지가 의심스러웠다. 첫째는 사건 현장이 어딘지 모르지겠지만 안드로이드 관리국에 연락을 하지 않았다는 점과 왜 하필 그 많은 요원 중에 내 아파트 문 앞까지 쳐들어왔는가 하는 점이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먼저 사건 현장은 같은 아파트 옆 동 이였고 안드로이드 관리국에 연락했더니 곧장 나를 추천했다는 거였다. 이것은 아마도 환상소설관리국의 농간이 틀림없었다. 국장이 전화를 해서는 환상소설가와 관련된 모든 사건은 나에게 일임하라고 반장에게 말했겠지. 그래 그게 틀림없어. 소녀의 주인은 여류 환상소설 작가였고 아침에 자살한 것 같았다. 유일한 목격자는 소녀였고 그 일은 이제 내 일이 된 것이다.

  “주인님은 굉장히 화가 나 있었어요.”
  “왜 화가 나 있었지?”
  “몰라요. 검은 양복을 입은 아저씨들이 왔다간 후로는 굉장히 화를 냈어요.”
  "그게 언제였는데?”
  “일주일 전에요.”
  “그 뒤로 또 누가 찾아온 사람 없니?”
  “아뇨. 아무도 안 왔어요. 주인님은 방안에서 꼼짝도 않고 계셨어요.”
  “주인님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있니?”
  “아뇨. 저는 책을 읽고 있었는걸요.”
  “주인님이 죽어버리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니?”
  “아뇨. 누굴 죽인다는 말은 했어요. 죽일 놈들이라고 하곤 했죠.”
  “그게 누군데?”
  “검은 양복을 입은 아저씨들이요.”
  소녀에 말에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창백한 얼굴로 소녀를 쳐다봤다. 그 중 내 초인종을 사정없이 눌러 되던 남자가 다가와서는 조그맣게 속삭였다.
  “안드로이드의 진술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나요?”
  ‘거의요.’라고 말해줬다. 덧붙여서 형사님이 가지고 있는 소형 녹음기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말해줬다. 그는 내가 너무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에 신물이 나있는 듯 했다. 그는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너의 성격코드를 보여주겠니?”
  소녀는 나에게 바짝 다가와 무릎을 끌고 앉아서는 원피스의 단추 몇 개를 풀어서 왼쪽 어깨를 보여주었다. 어깨에는 조그맣고 검은 특수문자 코드들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포켓컴퓨터에서 소형 입력기를 꺼내서 코드를 읽어드렸다.

  솔직하고 여린 성격, 위험등급 6급, 제조년도 2212년 초기 정신연령 12~16세

  “거짓말을 할 확률이 희박하군요.”
  “그것 말이요? 얼마나 정확한거요?”
  그는 성격코드를 손으로 가리켰다. 통상적으로 성격코드의 유효기간은 5년 정도이다. 그러니깐 적어도 제조 된지 5년 이하의 안드로이드의 성격 초기 설정값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물론 예외는 있지만 그럴 확률은 거의 희박했다. 게다가 소녀는 작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정확합니다.”
  내 대답은 다시 단정적 이였다. 그는 여전히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소녀가 거짓말을 할 가능성은 없었다. 소녀가 말한 것처럼 마지막 방문자였던 검은 양복의 사나이 무리들이 갔다간 이후로 이 아파트에서 아무도 나가거나 방문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안드로이드는 인간에게 헤를 끼치는 일은 아주 드문 일이였다. 적어도 이 소녀형 안드로이드는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 결론은 그는 자살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일을 빨리 마무리 짓고 싶었다. 형사들이 쓸데없이 흰 가루들을 온통 사방 벽에 쳐 바르고 있는 동안 소녀를 데리고 안드로이드 관리국으로 가서 몇 가지 서류만 꾸미면 그만인 것이다. 그리곤 안드로이드 관리국에서 보관증을 발급받아서 소녀를 보관소에 데려다 주면 그만인 것이다. 여기서 사소한 문제가 생겼다. 소녀가 갑자기 거실 마루 바닥에 주저앉더니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책 없이는 절대로 아파트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때를 쓴 것이다. 이 빌어먹을 죽은 작가 녀석이 밤낮으로 세뇌를 시켰는지 도통 말이 안 통했다. 아마도 2026년 전에 안드로이드보호법(合成人間保護法)과 상응인권법(相應人權法)이 재정되기 전엔 말이다. 번쩍 들어올려서는 엉덩이를 몇 대 때려준 후 차 뒤 트렁크에 구겨 처넣으면 그만이겠지만 지금은 그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런 행위는 안드로이드 인권 보호과에서 바로 내사에 들어올 일이고 그 뒤에서 시민 단체들이 피켓을 들고 벌 떼처럼 몰려들 일이였다. 난 쪼그리고 앉아서 소녀에게 애원이라도 할 참이었다. 내 침대가 절대적으로 그리웠다.
  “하지만 이 책을 다 가져갈 순 없어. 나중에 가져가면 안 될까?”
  “안돼요.”
  소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제길 어디가? 여린 성격이란 말이야! 빌어먹을 성격코드가 잘못 표기된 거 아냐? 그래서 어떻게 했을 것 같아? 하는 수없이 안드로이드 수거팀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수거팀장이 책을 나르는 대원들을 보면서 ‘저 책이 안드로이든가?’ 하고 두 번이나 물어볼 때 옆에서 ‘씨익’하고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천진난만한 소녀가 내 대신 대답해주었다.
  “어머, 저 책들은 안드로이드가 아니에요. 주인님이 가장 아끼시던 거예요.”  


  3. 새로운 동거인.

  “글쎄, 안된다니깐요? 책들은커녕 안드로이드 소녀도 받아줄 수 없어요. 눈이 있음 좀 보라구요. 여기는 보관할 수 있는 정원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구요.”
  보관과 직원은 무척이나 뚱뚱한 노처녀였는데. 나이는 서른 살이 조금 넘었을까? 그녀는 작고 가느다란 눈으로 나와 소녀를 번갈아 보면서 팔을 가로저었다. 내 생각엔 그녀가 살을 좀 빼면 이 자그마한 소녀가 너끈히 들어가도 남을 것 같았다.
  “이봐요.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그럼 소녀를 저 복도에 재울까요? 아님 이 접수대는 어떨까요? 여기에 담요를 좀 깔면 참으로 아득하고 따뜻한 잠자리가 되겠군요.”
  그녀는 복도며 접수대며 대기실 소파들을 마구 사대질 하며 소리쳤다. 계속 그녀에게 말을 걸면 그녀는 사무실의 모든 가구와 빈자리에 대고 삿대짓을 하는 걸 멈추지 않을 것만 같았다. “좋아요. 빈자리가 나면 연락주세요.” 접수대 안쪽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보관접수증 한부를 집어 들고는 말했다. 접수증에는 보관자와 보관되는 안드로이드의 신상에 대한 잡다한 질문들이 채워져 있었다. 부지런히 빈칸들을 채워 나갔는데. 안드로이드의 이름을 쓰는 항목도 있었다. “애야, 이름이 뭐니?” 내가 물었다. 소녀는 소파에 앉아 발장난을 치고 있었다. “이름은 없어요.” 소녀가 말했다. “이름을 어쨌는데?”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어요.” 소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럼 주로 뭐라고 불렸니?” “많아요. 이리와 라던가 밥 먹어 그만 TV보고 자야지라던가 쿵쾅거리며 뛰어다니지 마라던가…….” 소녀는 자신이 가장 자주 들었던 말들을 온통 떠들어 댔다. 그 이름들 중에 써먹을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냥 진아 라고 해두자. 알았지?” 이름 란에 진아 라고 쓰면서 말했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진아란 이름은 환상소설관리국 일당들이 의례한 내가 조사해야할 이상한 소녀의 이름이였다. 그들은 진아라는 소녀가 50여개나 되는 소화전들을 몽땅 훔쳐가 버렸다고 단단히 믿고 있었다.

  사람이란 예상치 못하는 일을 당하기 마련이다. 오늘 아침에도 멀쩡한 대로에서 소화전이 사라지는 바람에 물벼락을 맞기도 했고 오후쯤엔 환상소설관리국 일당에게 골치 아픈 사건도 떠맡는 그런 일들 말이다. 게다가 자정이 다 되가는데 무거운 책을 낑낑거리며 옮기고 있는 일들 말이다. 어제 밤에 잠자리에 들면서 이런 걸 생각이나 했을까?
  “안돼요. 책들은 소중한 것이라고 늘 주인님이 말씀하셨는걸요?”
  어련하시겠니? 책들을 잠시 차에 두자고 제안했다가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물론 이 일은 전적으로 그 망할 보관과 직원에게 있는 것이다. 아니면 내가 왜 그 책들과 소녀를 내 차에 구겨놓고 다시 아파트로 돌아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거절한 후 책들을 다시 차에 실고 아파트로 돌아와서는 다시 책을 집까지 날라야 했다. 소녀는 내 뒤꽁무니에 붙어 다니면서 콧노래를 부르는 것이 전부였다. 무려 열댓 번이나 책들을 들고 힘겹게 차와 아파트 현관 사이를 왔다 갔다 했는데. 동료들이 이 꼴을 보고 있었다면 아마 내가 안드로이드 사냥꾼을 그만두고 책장사로 직종을 바꿨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 그 망할 주인님의 소중하고 끔찍하게 중요한 제기랄 책들을 내 아파트 현관까지 옮겨 놓았으니 이제 만족하니? 사실 소녀는 책들은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잔여 기억이겠지. 전 주인이 주입시킨 기억의 찌꺼기 일뿐이다. 신발장 옆에 책들을 탑처럼 쌓아 올려두었다. 소녀는 만족했는지 콧노래를 부르면서 거실을 뛰어 다니고 있었다. 잔업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침대에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이끌고 서재로 들어갔다. 사진을 전부 대조해 봐야 하기 때문이다. ‘진아’라고 추정되는 소화전을 몽땅 사라지게 했다고 단단히 믿고 있는 소녀의 사진과 안드로이드 목록의 사진을 전부 대조해서 결과를 내일까지 환상소설관리국장에게 제출해야만 했다. 이것은 원래 오전에 충분히 잠을 청하고 나서 가뿐한 마음으로 할 계획이었다. 물론 거실에서 뛰어다니는 소녀를 만나기 전엔 말이다.
  단말기에 자동비교를 걸어 놓고 소녀에게 쿵쾅거리며 거실을 뛰어다니지 말라고 주의를 준 후 주전자에 커피 물을 올려놨다. 소녀는 얌전히 거실에 TV를 보고 있었다.

  안드로이드 소녀가 나를 깨운 것은 조금 후였다. 그만 잠이 들었는데. 시간은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
  “아저씨 물이 다 끓였어요.
  주방으로 달려갔더니 주전자는 텅 비어 있었다.
  “물을 다 어쨌니?”
  “물이 다 날아갔어요. 뽀글뽀글 끓더니 사라져 버린걸요.”
  참으로 고맙구나. 물이 사라지는걸 보고 있었단 말이지. 자동 사진 대조 작업은 아직도 한참은 더 있어야 끝날 것 같았다. 남은 시간동안 소녀를 내 방 침대에 눕히고 소파에 누웠다. 힘겨운 하루가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에 다시 날 깨운 것은 안드로이드 소녀였는데. 이 아이는 정말로 사람 깨우는 것은 천부적으로 소질이 있는 듯 했다.
  “아저씨, 아저씨, 전화가 왔는데요. 어떤 아저씨가 무척 화를 냈어요. 아저씨가 잠을 잔다고 하니깐 그 화가 난 아저씨가 지금 당장 깨우라고 마구 화를 냈어요.”
  그래서 나는 집을 나섰다. 이번에는 택시를 잡아타고 환상소설 정문까지 갈 참이었다. 어제와 몰골을 비슷하지만 최소한 사라진 소화전 때문에 찬물을 뒤집어쓰고 가진 않겠군.
  나는 생각했다.


  4. 그 안드로이드는 마법사.

  “그 안드로이드는 마법사인가요?”
  그녀가 다짜고짜로 물었다. 그 질문은 환상소설관리국장이 다짜고짜로 사진을 내밀면서 ‘이 사진속의 소녀는 어떤가? 안드로이드인가?’라고 했던 질문은 연상케 했다. 내가 그때 뭐라고 대답했더라.
  “글쎄요.”
  물론 안드로이드가 위대한 마법사가 될 수 없다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멀쩡한 소화전을 사라지게 하는 일과 한여름에 눈 따위를 내리는 마법을 도대체 누가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안드로이드든 인간이든 말이다. 내가 가장 이해 안 되는 것이 이 점이다. 환상소설국장이 누누이 알고 싶었던 것들 말이다. 도대체 그 진아란 소녀가 안드로이드든 인간이든 무슨 상관이냐 이 말이다.
  소화전은 터졌거나 누군가의 장난이거나 한여름의 눈송이는 환각에 불가하겠지. 그런 설명 말고는 도무지 이성적인 면이 전혀 없었다. 이 원장이란 아줌마만 해도 그렇다. 마치 지금도 눈이 내리는 것처럼 대화 내내 창밖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녀도 환상소설 관리국장 마냥 모든 게 그 소녀의 짓이라고 단단히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알았다구, 전부 소녀의 짓이라 이거지. 소녀가 글을 써서 마법을 부린다 이거지. 주문 따위를 쓰거나 큰 솥에 형형색색 가루를 뿌리며 국자로 휘휘 젓는 것이 아니라. 그까짓 환상소설을 써서 말이다.
  “여기서 했던 일이 뭐죠?”
  내가 물었다.
  “그녀는 매주 한번씩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곤 했죠. 아이들이 그 시간을 아주 좋아
  했어요.”
  “그녀가 거기서 마법을 부렸답니까?”
  “글쎄요. 제가 본건은 아닙니다. 아이들이 그랬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날은 다들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원장은 이부분에서 약간 뜸을 드렸다. 창밖을 한번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분명히 눈이 내렸죠. 눈을 본적이 있나요?”
  “네, 어렸을 때. 한번 본적이 있죠.”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은 내리지 않았다. 과거 20년 동안 눈은 단 한번도 내리지 않았다. 눈은 이제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날씨는 능숙하게 조절 되고 있었다. 더 이상 비나 눈 따위를 아무데나 뿌릴 필요는 없었다. 필요한 만큼 강이나 호수에 혹은 농지에 뿌릴 수 있었다.

  원장은 그녀가 동화책을 읽어주었던 아이들을 몇 명 소개시켜 주었다. 신통치는 않았다.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여자애는 곧 자기가 TV에 출연할거라면서 아기 곰 3형제란 동요를 율동과 함께 2번씩이나 보여줬고 사내아이 한 녀석이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예쁜 누나 언제 와요?’라구 물어봤다. 그리고 눈이 큰 여자애는 나에게 반쯤 먹다 남은 비스킷 한 개를 말없이 내민 것이 전부였다.
  오전에 환상소설관리국장을 만났을 때 모든 걸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당신이 찾는 진아 라는 소녀는 확실히 마법사 기질이 있어보여도 안드로이드는 아니라고 말이다. 지난 200년간 안드로이드 목록에도 없었고 이젠 내 업무 밖의 일이라고 말이다. 내가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환상소설관리국장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날 신임하고 싶다는 알 수 없는 말을 해가며 나를 이곳으로 보냈다. 결국 별 소득은 없었다. 원장의 넋 나간 소리를 들었고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소녀의 아기 곰 3형제를 율동을 곁들어 두 번이나 보았을 뿐이다. 그리고 반쯤 먹다 남은 비스킷 하나를 얻었을 뿐이다. 그리고도 나의 존경스런 업무는 이걸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100년쯤 더 훨씬 전에 태어난 소녀의 행방을 좇는 것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게다가 그 환상소설관리국일당들이 넘긴 자료에는 진아란 소녀의 가족들이나 친척들의 대한 자료는 단 한 줄도 없었다. 가장 중요한 자료는 아무것도 없는 셈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녀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들을 일일이 만나서 얘기를 나눠둘 필요가 있었다. 내 계획은 이랬다. 그 진아라는 100년도 족히 넘어 이젠 땅속에 묻혀있을 어떻게든 찾아내서-물론 그녀는 이미 차디찬 묘비석 밑에서 편히 잠들어 있겠지-이제 그녀는 죽었으니 소화전은 잊어버리라고 말하고 싶었다. 밤새 미친 듯이 거리를 쏘다녔다.

  지친 몸을 이끌고 아파트 현관문을 열었을 때. 내가 과다한 업무에 지쳐서 그만 집을 잘못 찾아온 줄만 알았다. 거실에 한번도 본적이 없는 애들이 아주 크게 소풍 판을 벌려놓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니 내 집이 틀림없었다. 코흘리개 쌍둥이 형제가 신나게 뛰고 구르는 건 분명히 내 소파가 틀림없었다. 원피스를 입은 예쁘장한 꼬마 소녀는 거실바닥에 크레파스로 낙서를 하고 있었고 TV앞에 애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쿵쾅거리고 뛰어다니는 애들, 시끄럽게 우는 애들, 왁자지껄 떠드는 애들, 그 틈에 분명히 어디선가 본 듯한 소녀가 있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앞치마를 하고 애들과 함께 뛰어 놀고 있었다.
  나는 소녀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너 이 애들 다 어디서 났니?”
  내가 상상했던 것 보다 애들은 더 많았다. 거실은 물론이고 각 방마다 부엌이며 심지어 화장실과 옷장 안까지 애들이 득실거렸다.
  소녀는 마치 엄마처럼 사내 아이 하나를 꼭 끌어안았다.
  “애들은 전부 엄마, 아빠가 늦게 온데요. 그래서 집으로 데려왔어요.”
  그래 어련하시겠어.
  “그래 알았다. 이제 다 돌려보내는 게 어떻겠니?”
  소녀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입을 삐쭉 내밀었다.
  “네, 이제 돌려보내야죠.”
  소녀는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그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생각해 보라.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애들은 모두 육십 여명이나 됐고 그 애들 중에 혼자서 집을 찾아갈 애들은 몇 명 없다. 그래서 어떻게 했을 것 같아. 밤새 애들을 집으로 데려다 줘야 했다. 그 일은 밤새 계속 됐고 마지막 사내아이를 데려다 주고 나니 벌써 시간은 한밤 중이였다. 소녀에게 화를 낼 기력조차 없었다. 집안은 쑥대밭 이였다. 집안에 있는 가구든 가전제품이든 뭐든 제자리에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가장 절망적인 것은 침실에 침대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너 침대한테 무슨 짓을 한거니?”
  “베란다에서 마지막으로 봤어요.”
  소녀는 피곤하다는 듯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벌써 소파에 쓰러져 있었다. 마음을 독하게 먹고 거실 바닥에 널브러져 자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결국 새벽까지 가구들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고 집안을 대충 치웠다. 저 아이는 재앙이 틀림없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폭풍과 장마 같은 자연재해 같은 거 말이다. 소녀의 전주인이 왜 자살했는지 생각해볼 필요도 없어보였다. 소녀가 로봇 같은 거였다면  전원을 내려서 창고에 처박아 두고 싶었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냉장고 문에 메모지를 잔뜩 붙여 놓았다. 소녀가 즉석 음식을 꺼내 먹으려고 냉장고 문을 열대 마다 한번씩 읽어 보라고 알려줬다.
  메모 내용은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첫째 애들을 데리고 오지 말 것.
  둘째 가구를 옮기지 말 것.

  소녀의 손을 꼭 잡고 거의 애원하다시피 애들은 제발 데려오지 말라고 신신당부 하고 집을 나섰다. 뒤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소녀는 손을 흔들었다. 왠지 불길했다.
  너무나 피곤했기 때문에 오전에 약속이 잡혀있는 환상소설가 협회에 들려서 탐문조사를 몇 가지하고는 곧장 집에서 쉴 생각이었다.

  환상소설가들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기타 등등 악랄하고 되먹지 못한 일들을 밥 먹듯이 하고 있다는 환상소설관리국 일당의 주장은 뭔가 설득력이 없어보였다. 그들이 글을 써서 소화전을 가뿐이 사라지게 하고 한겨울에도 내리지 않는 눈을 내리게 하고 사람들에게 불손하고 위험천만한 사상들로 가득 차게 만들 정도로 악랄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진아란 소녀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중에 가장 현실적으로 보였다.

  “당신은 환상소설관리국 직원 같지는 않구먼.”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노인이 나를 보고 한말이다. 협회 사무실에는 머리가 희끗한 노인과 중년의 아저씨 한분 그리고 내 또래의 청년이 있었는데. 사무실은 무척이나 깨끗하고 검소하게 느껴졌다.
  “저는 안드로이드 관리국에서 나왔습니다.”
  신분증을 건넸지만 그들은 크게 신경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모조리 얘기했다. 물론 소화전 얘기와 악랄하기 그지없는 안드로이드 소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진아라는 이름이 거론되자 머리가 희끗한 노인이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아무래도 이 사람이 협회 회장인 듯싶었다.

  “그 이름 오랜만에 들어보는군. 환상소설관리국은 아직도 그 아가씨를 찾던가?”
  그는 서랍 속에서 파이프용 담배를 꺼내서 속을 채웠다.
  “실은 그 소녀가 안드로이드인지 아닌지 의례가 들어왔을 뿐입니다.”
  내 말에 그는 소리 내어 웃느라 말린 담배 입을 체우는 일을 잠시 멈췄다.
  “재미있군. 이 보게 젊은이. 그녀가 실종된 지 한참 됐지. 이젠 다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의외로군.”
  그는 답배 입을 다 채우고는 라이터를 찾느라 서랍을 뒤적거렸다. 그가 말을 꺼낸 것은 한참 후였다. 담배에 붙을 붙이고 한 목음 깊숙이 빨더니 말을 이었다.
  “그녀는 동화작가였지. 아버지에 대해서 알고 있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훌륭한 환상소설작가였다네. 물론 세상이 우리를 두려워하지 않을 때 말일세. 우리의 상상력이 순진한 시민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고 심지어 불순한 상상력으로 사회를 전복하려는 의심을 받지 않았을 때 말일세. 그분은 정말 대단한 작가였지. 그분의 작품을 읽은 적이 없겠지? 아마도 그럴게야. 모든 책들을 금지했으니깐 말일세.”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서랍 속에서 아주 얇은 책 한권을 꺼내서 내게 보여주었다. 그 책은 아주 얇은 회색표지의 책이었는데. 겉표지에 검은 글자로 “환상소설 작법 규정”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는 담배를 한 모음 더 빨고는 말을 이었다.
  “이 얇고 고약한 책을 보게나. 이게 우리가 환상소설을 쓸 때 반듯이 지켜야할 소재와 주제가 써 있는 책일세. 이걸 어기지 않을까 해서 환상소설관리국 같은 게 생긴 거지.”
  그 책을 펼쳐 보았다. 흰 백지에 깨알 같은 글자들이 가득했다. 목차엔 환상소설 작법시, 금지할것, 금지된 주제, 금지된 소제, 금지된 대사, 금지된 배경, 금지된 인물, 금지된 사건, 금지된 종족과 상상동물, 인용이 금지된 신화, 종족, 마법과 검술 등등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 뒤로 허용된 것들에 대해서 나열돼있었다.
  “우리는 과거 그들이 시키는 대로 잘 지켜왔네. 그들이 허용한 이야기로만 환상소설을 써왔지. 이것은 지난 200년 전쯤 서기 2000년 이후부터 그래왔던 거라네. 진아의 부친이 그것을 깼지.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네. 그 후로 많은 일이 있었지.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네. 환상소설관리국에서 왜 그녀를 위험하게 취급하는지 왜 또 그녀를 찾으려 하는지 알겠나?”
  그는 마른기침을 한번 했다. 그가 다시 말을 꺼낼 때까지 꽤나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는 숨을 고르게 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죽은 후 그녀는 동화를 쓰는 걸 그만 뒀지. 아버지의 유고작을 완성하려고 몰래 글을 쓰려고 했던 거야. 아버지의 소설을 모두 압수돼서 불태워져 버렸지만 그 아이의 머릿속엔 글자 하나하나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거든 그걸로 문장을 만들고 단락을 만들었지. 한해 겨울동안 그녀는 작은 오두막에서 잠도 줄여가며 오직 그 일에만 매달렸다네. 그녀가 그 글을 완성했는지는 알 수 없지. 그녀는 실종된 지 벌써 100년이나 넘었으니깐. 우린 이 이야기를 알고 있지. 모든 책이 불태워지고 금지 되도 입에서 입으로 이 일화는 전해져 온다네. 자네는 그녀가 안드로이드라고 생각하는가?”
  “글쎄요. 저는 그다지 가능성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살아있다면 전혀 나이를 먹지 않았다면 그녀가 복제 되거나 안드로이드일수도 있겠죠.”
  최근에 찍은 진아라는 소녀의 사진을 환상소설작법규정이라는 책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그것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피곤한 듯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젊은이, 피곤하구먼, 이제 그만 돌아가 주겠나.”
  사진을 도로 집어넣고 발길을 돌렸다. 서무실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자 그는 나지막하게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신경을 안 쓰면 무슨 소린지 모를 정도였다.
  “사람들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걸 믿으려 하는구먼. 어떤 진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네. 또 상상해야만 알아챌 수 있는 진실도 있는 법이지.”

  협회 사무실을 나와서 내내 생각에 잠겼다. 환상소설이란 것이 그렇게 위험한 소설일까? 그렇지 않다면 왜 환상소설관리국 같은 권력조직이 우리가 낸 세금으로 지탱될 이유가 없지 않는가? 하지만 독을 맛보기전엔 그게 독인지 약인지 알 수 없는 것 아닐까? 나는 누적된 피로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포근한 침대가 절대적으로 그리웠다. 그 사악하기 그지 않는 안드로이드 소녀가 침대에 몹쓸 짓만 안했다면 말이다.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5. 안드로이드 소녀에게 메모-내 거실을 들판으로 만들지 말 것.

  현관문을 열었을 때 황량한 들판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전에 한번도 본적이 없었던 들판이었다.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여전히 안쪽은 들판이었다. 이것은 안드로이드의 짓이리라 냉장고 문에 붙여둔 메모에 가구를 멋대로 옮겨놓지 말 것 바로 아래 집안을 들판으로 만들지 말 것이라고 적어 뒀어야만 했다.
  극도의 수면부족의 후유증이 뭐였더라? 생각에 잠겨서 거실의 한가운데쯤이라고 여겨지는 곳의 걸어 나가서 침실이 어디쯤 인지를 가늠해 보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침대 따위는 이제 없었다. 대신 이름모를 나무 한 그루만 버티고 서 있었다. 나무 밑으로 걸어가면 이 못쓸 환각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렇다. 나는 극도로 피곤한 상태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숙면(熟眠)을 취한 것이 언제였더라. 그래 아무리 엉뚱하고 꾸미기 좋아하는 안드로이드라도 방안을 들판으로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주치의가 내 얼굴만 보면 귀가 아프게 경고 했었지. 가중한 업무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를 말이다. 이 빌어먹을 환각 같으니!
  절대적으로 필요한건 수면뿐이었다. 나무 밑 그늘에 편안한 자세로 누워서 생각해 보았다. 그래 내가 마지막으로 숙면을 취한 건 그 빌어먹을 환상소설관리국에 가기위해서 탔던 택시 안에서 이겠지. 그리고 거기서 내려서 소화전이 사라지는 바람에 물벼락을 맞았었고 그 일들이 까마득하게 멀게만 느껴졌다. 이리저리 뒤치덕 거리다가 겨우 몰려온 잠들을 맞을 자세를 찾았다. 천장은 높았고 짙은 파란 색이였다. 구름이 몇 점 떠다녔고 태양이 전등마냥 나뭇잎과 가지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곧 잠이 몰려왔다.

  내가 깬 것은 늦은 오후쯤 이였다. 햇살은 감쪽같이 사라져있었다. 갑자기 먹구름이 하늘 전체를 덮고 있었다. 빗방울이 하나둘씩 얼굴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바뀐 게 하나도 없었다. 아무래도 길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어디든 걷기로 했다. 이 보다 더 나빠질 수 없겠지. 조금은 숙면을 취했더니 약간은 긍정적인 생각이 떠올랐다. 들판의 끝으로 걸어갈 때 쯤. 하늘은 꾸물꾸물 거리며 당장이라도 세찬 소나기를 쏟아 부을 것만 같았다. 벌써부터 빗방울이 하나둘씩 내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저 멀리 건물이 몇 채 보였고 비를 피해보려고 들판을 달렸다. 가까이 다가가자 요란한 쇳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건물 안쪽에서 힘차게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 다가갔다.
  “당신도 공주를 구하러 온 얼간이요?”
  그가 다짜고짜로 물었다. 그래서 나는 침대를 찾고 있었다고 말할 참이었다. 내가 구하고 싶은 건 조그만 안식뿐 이였다. 하지만 그는 신나게 망치질 하고 있어서 내말이 들릴 것 같지가 않았다.
  “밤이 되면 숲으로 들어가는 게 좋을 거요. 아니라면 밤이 될 때까지 저 망할 숲 속을 헤매고 다닐 거요.”
  말이 끝나가 그는 재빨리 망치질을 해됐다. 그리곤 잠시 멈춰서 또 이야기 하곤 했는데 내가 대답한 여유를 주지 않았다.
  “망할 숲이 밤에만 탑을 보여준다지. 한낮에는 헤맬 뿐이지! 힘만 축낼 뿐이요.”
  힘을 축낸다는 말이 꼭 그 대장장이가 붉고 기다란 쇳덩이에 신나게 망치를 두들기는 일 말고는 뭐가 또 있다는 말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뭘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는 붉게 달구어진 기다랗고 넙적한 쇠막대기를 연신 큼직한 망치로 두들기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알 수 없는 짓을 한동안 쳐다보고 있어야만 했다. 그가 그 짓을 그만 둔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그는 제법 날렵하게 다듬어진 쇳덩이를 물속에 구겨 쳐 놓고는 한숨을 돌렸다. 가만히 보니 그것은 칼 같기도 했다. 그는 목에 감고 있었던 걸레 같은 수건으로 흐르는 땀을 닦아 냈다.
  “칼이라도 가져가는 게 어떻겠소? 아님 나뭇가지라도 주워가는 게 좋을 거요.”
  “칼은 뭐에다 쓰게요?”
  내 말에 그는 한참을 쳐다봤다.
  “전 뭘 찾으러 온 것뿐이에요.”
  차마 침대를 찾고 있다는 말은 못하겠다. 침대 사진이라도 찍어 뒀으면 그걸 보여주고는 이런 침대 혹시 못 봤소? 라고 물을 수는 없었다. 그래, 환각이겠지. 환각이 아니면 뭐겠어. 그 놈의 업무 때문에 드디어 내가 미친 거야. 그래 좋다구! 일을 하라 이거지. 일을 해주겠다고! 안주머니에서 환상소설관리국 일당들이 떠맡긴 소녀의 사진을 꺼냈다. 그 중에 가장 최근에 찍은 사진을 그에게 내밀었다.
  “이 소녀를 찾고 있는 중이죠. 혹시 본 적 있나요?”
  그는 사진을 받아들고는 한참을 노려봤다.
  “당신도 결국 공주를 구하러온 얼간이 중 하나군.”
  그래, 솔직히 그가 사진을 받아들고는 ‘이 아이는 내 딸이잖아. 뒤뜰에 가보게 거기서 동생이랑 놀고 있을 걸세.’따위의 말들은 기대하지 않았다.
  “공주를 구하겠다는 말이군. 그래? 칼을 가져가는 게 좋을 거야.”
  그는 정확히 그렇게 말했다. 그는 마치 이곳이 공주를 구하러 오는 얼간이들이 자주 들리는 관광지쯤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래! 칼은 관광 상품이겠군. 공주를 갇혀있는 탑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기념으로 칼을 꼭 사가세요.
  “이 소녀를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냐고? 탑에 갇혀서 왕자님을 기다리는 공주님이지? 뭘 알고 싶은 게요?”
  “이 소녀가 사는 곳이요.”
  “이제껏 뭘 들은 게요? 저 망할 숲 너머에 탑이 있고 그 꼭대기에 공주가 있다는 정도는 알고 찾아왔어야지? 당신은 정말로 공주를 구할 거요?”
  그의 질문에 한참 생각해봤다. 구할 거냐고? 내가 왜? 나는 그녀가 안드로이드인지 인간이지를 판단해 달라는 의례를 받은 것뿐이다. 환상소설관리국 일당들은 그녀가 소화전을 몽땅 사라지게 했다고 믿고 있었고 보육원 원장은 그녀가 눈을 내리게 했다고 단단히 믿고 있었다. 그리고 이 사내는 그녀가 탑 안에 갇혀 얼간이들이 구원해주길 기다리는 공주라고 단정 짓고 있었다. 어째든 그녀가 소화전 절도범이든 마법사든 공주든 간에 그녀를 만나볼 필요가 있었다. 그녀에게 안드로이드 테스트를 해서 양성 반응이 나오면 수거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지난번 소녀처럼 가득 찬 보관소 때문에 내 집에 온갖 만행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 해도 말이다. 그것은 이 환각 속에서도 계속 되는 내 존경스러운 업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등을 돌렸다. 그러자 그는 칼 하나를 내가 던졌다. 그리곤 내가 이제껏 찾아온 얼간이들 중에 가장 멍청하다고 말하면서 칼을 공짜로 주겠다는 거였다. 그래 기념품으로 하나 가져가라 이거로군. 그 말 안 듣는 안드로이드 소녀에게 주면 이걸 들고 온통 집안에 가구들과 바닥을 치고 다닐지 모를 일이였다.

  숲은 조잡하게 날조한 것이 틀림없다. 나무들 모양이 전부 똑같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것은 진짜 나무도 아니었다.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똑같은 모양의 나무들 이였다. 마치 그것은 일부러 조잡하게 만들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싸구려 테마 공원에 가면 볼 수 있는 삐거덕거리며 날갯짓하는 비둘기들, 계속 똑같은 동작을 하는 다람쥐들, 시끄럽게 나무위에서 울어 되는 까치들, 플라스틱 나무들은 두어 가지 모양들뿐이라 한눈에 가짜라 는걸 알 수 있는 그런 장소 말이다. 여기가 꼭 그런 느낌이었다. 날조된 숲 뒤쪽으로 우뚝 솟은 탑이 보였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탑은 원기둥형에 가까웠고 멀리서 보기엔 그럴싸해보였다. 숲으로 나있는 오솔길을 무시하고 탑을 향해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칼을 쓸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쯤 되자 이 모든 게 환각이 아니라 꿈속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너무나 피곤한 나머지 아파트로 돌아오는 길거리에서 쓰러져 자고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빌어먹을 꿈같으니……. 누군가 나를 깨워줄지도 모를 일이였다. 내가 칼을 휘두르며 싸워야할 것은 이 빌어먹을 환각밖에 없었다. 탑을 향해 걸어가면서 내내 그 생각뿐이었다.
  어디서 잠에 취해서 쓰러져 있는 것일까? 환상소설협회에서 나오자마자 길거리에서, 혹은 집에 다 와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쩌면 현관문을 열기 전에 복도에서 쓰러져 있을지도 모르지.  


  6. 과거의 유산.

  탑에 도착했을 때 사방에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결국 탑까지 오는데 칼은 눈곱만큼도 필요성이 없었다. 탑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게 작게 만들어놓은 문을 열었다. 탑 안에서 나를 반기는 것은 어둠과 희미한 계단들뿐이었다.
  탑을 구비 돌아 휘감겨 있는 계단은 마치 다람쥐의 쳇바퀴처럼 끝이 없어 보였다. 올라가고 또 올라가도 도무지 어둠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보이는 건 희미한 윤곽만 들어나 있는 계단뿐 이였다. 빌어먹을 대장장이 같으니 차리라 칼 대신 램프 따위라도 줬으면 좋잖아. 도대체 칼이 왜 필요한거야. 칼을 벽에다 후려쳐서 빛이라도 내면서 계단을 오르라는 건가.
  오름은 끝도 없이 계속됐지만 탑 꼭대기에 내 침대라도 있기라도 하는 것 마냥 기를 쓰고 올라갔다. 탑 안쪽으론 어둠과 끔찍할 정도의 적막밖에 없었다. 내 발자국 소리, 지팡이처럼 무딘 칼을 집고 걸어갈 때 칼끝이 돌에 부딪히는 소리, 숨이 차 헐떡거리는 내 숨소리 밖에는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내가 탑을 다 오른 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계단 끝자락에는 역시 나무로 된 작은 문이 있었는데. 문을 열 때마다 알 수 없는 공포감이 들곤 했다. 이것이 다 친애하는 소녀 안드로이드의 영향이다. 그 애는 혼자두면 정말 위험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에 비해서 한낮에 소화전이 없어지는 일 따위나 한여름에 눈 따위가 내리는 것, 따위의 일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었다.

  문이 삐거덕거리며 조심스럽게 열렸다. 한발을 드려놓자 등 뒤가 서늘해졌다. 익숙한 적막과 어둠을 보려고 뒤돌아봤지만 거기엔 더 이상 탑을 구비 돌아 놓인 계단 같은 것은 없었다. 대신 작은 오솔길과 병풍처럼 겹겹이 둘려 쌓인 크고 작은 산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길 위에 숲 위로 함박눈이 한없이 오고 있었다.
  세상에! 한참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상상도 못했던 풍경이다. 어렸을 때 눈을 본적이 있긴 했다. 작은 눈송이들이 공중에 떠다니다가 땅바닥에 닫자마자 녹아 버렸던 일들이 생각났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세상이 온통 흰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갑자기 한기가 느껴졌다. 그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름이었지. 내가 알기론 말이다. 문을 닫았다.
  추운 건 여전했지만 견딜 만 했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작은 오두막이었다. 진짜 나무로 만든 오두막이었다. 나무로 집을 짓는 것은 벌써 수십 년 전에 금지된 일이다.
  바닥에는 붉은색 둥근 양탄자가 깔려있었고 테이블과 작은 침대하나가 놓여있었다. 작은 벽난로도 있었다. 벽난로에는 장작들이 틱틱 소리를 내며 타들어가고 있었다. 벽난로 앞에 푹신해 보이는 소파도 놓여 있었다. 벽난로 앞에 저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추위가 잦아들었다. 희미하게 몸이 따듯해짐을 느꼈다. 어디선가 탁. 타닥. 경쾌한 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소리 나는 곳으로 따라 걸었다. 작은 방 이었다. 문이 비스듬히 열려있었다. 문을 슬며시 열고 들어갔다. 소녀가 큰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저것은 구식 타자기가 틀림없다. 언젠가 박물관에서 본적이 있다. 소녀는 손때 묻은 구식타자기위에 가느다란 두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잠시 만요.”
  소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하마터면 “당신이 공주인가요?”라고 말할 뻔 했다. 소녀는 내가 마치 옆집 사는 이웃이라도 되는 것처럼 친근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어머, 그 칼을 아직도 가지고 있나요? 짓궂은 대장장이 같으니…….”
  그 부분에서 소녀는 살짝 웃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그 망할 칼을 오른손에 쥐고 있었다.
  소녀는 다시 타자치는 것에 열중했다.
  “그 쪽에 아무 의자에 앉으세요. 방이 지저분하죠?”
  소녀는 타자기에서 종이를 빼들고 다시 새 종이를 조심스럽게 끼어 넣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안드로이드 소녀가 어디론가 숨겨놓은 내 침대를 찾으러 왔을 뿐이다. 공주를 구하러 온 것은 아니었다. 손에 칼을 쥐고 있어도 말이다.
  “당신은 누구시죠?”
  나는 의자를 찾아 앉지도 않고 칼을 손에서 놓지도 않고 질문을 던졌다. 내 질문에 소녀는 잠시 타자기에서 손을 땠다.
  “저는 당신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지는 몰랐어요. 저는 당신이 찾고 있는 사람이랍니다.”
  소녀가 말했다. 이 대답은 매우 애매모호 했다. 일단 내가 찾는 것은 많았다. 가장 먼저 찾아야 하는 것은 내 침대고 시간이 허락한다면 맹랑한 안드로이드 소녀도 찾아서 엉덩이라도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나는 지난주까지 도망친 안드로이드를 찾고 있었고 최근에는 진아라는 소녀를 찾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공주를 찾고 있었다.  
  “그래서…….”
  소녀는 내 표정을 살피며 뜸을 드렸다. 그러다 말을 이었다.
  “절 체포 하실 건가요? 아님 안드로이든인지 테스트 해볼 참인가요?”
  “무슨…….”
  내가 어리둥절해 하자.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먼저 왼손에 꼭 쥐고 있는 칼을 뺏어서 문 옆 벽에 세워두었다. 그리고 의자 하나를 가져와 책상 앞에 놓았다. 그리고 나는 앉았다. 소녀는 자신이 ‘진아’이고 내가 그토록 찾아왔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 부분에서 동의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가진 사진속의 진아 라는 소녀, 즉 환상소설관리국에서 그토록 위험하다가 침을 튀기며 떠들어댔던 그 소녀의 사진을 아직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속의 소녀와 전혀 닮지 않았다. 나는 사진들을 책상위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그녀는 사진들을 보지 않았다. 눈길도 주지 않았다.
  “제가 진아란 것을 못믿는 것은, 단지 이 사진이 이유인가요? 그 환상소설관리국 사람들이 건네준 사진 두어 장 때문인가요? 제가 제 자신이란 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네요. 아쉽게도 저에겐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답니다. 한때 저는 동화를 썼었죠. 지금은 아버지의 미완성된 글들을 이어 쓰고 있답니다. 또 불태워진 이야기들을요. 밤새 써도 모자랄 것 같아요. 시간은 너무 빠르거든요.”
  나는 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죽은 아버지의 유고작과 불 태워진 이야기들을 이름 모를 숲속 어딘가의 작은 오두막 안에서 온힘을 다해 썼다는 이야기 말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침대 빼고 모든 것을 찾았다. 그녀는 ‘진아’였다. 탑 속에 갇힌 공주였고 소화전을 간단히 없애버린 위험인물 중 하나였다. 한여름에 눈을 내리게 하는 마법사였고 안드로이드는 아니었다.

  “당신은 마법사인가요?”
  나는 유치원 원장이 그랬던 것처럼 작은 창문 밖의 한없이 내리는 눈들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말을 꺼냈다. 그녀는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그냥 평범한 환상소설가일뿐이에요. 그러나 어떤 상상들은 그걸 생각하는 동안 진실로 믿는다면 현실과 다를 것이 없지요. 그 순간에는요.”
  소녀의 일을 더 이상 방해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여기는 내가 있을 만한 곳이 아니었다. 나는 작별인사 없이 조용히 거실로 걸어 나왔다.
  “그녀를 잘 돌봐주세요!”
  오두막을 나가기 위해 문고리에 손을 올렸을 때. 그녀는 어느새 거실에 나와 있었다.
  “당신의 안드로이드요. 그녀의 이름도 진아지요?”
  “네, 당분간은요.”

  나무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다시 내가 살던 아파트 거실로 이어져 있었다. 다시 뒤돌아 봤지만 거기에는 오두막도 소녀도 틱틱 소릴 내며 타들어가던 장작불도 없었다. 거실에는 전에 안드로이드 소녀가 잔뜩 어디서 데려온 애들로 가득 차 있었다. 코를 찔찔 흘리며 소파를 위를 마구 뛰는 쌍둥이 형제, 원피스를 입은 예쁘장한 꼬마 소녀는 거실바닥에 낙서를 하고 있었고 TV앞에 모여 있는 아이들. 이틀 전에 내 거실과 매우 흡사했다. 좁은 현관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문을 다시 열고 아파트 복도 쪽을 쳐다봤다. 하지만 거기는 긴 복도가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문을 닫았다. 여전히 거실은 왁자지껄 정신이 없었다. 나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아이들 중에서 앞치마를 두른 소녀를 찾아냈다. 하지만 그 소녀는 사고뭉치 안드로이드 소녀가 아니었다. 그 소녀는 오두막에서 보았던 소녀였다. 물론 더 앳된 모습이였지만. 그녀는 진아였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는데 누군가 나를 보고 소리쳤다.
  “누구시죠?”
  안경을 낀 중년의 남자가 아이들을 비집고 나에게 다가왔다.
  “애들은 다 뭐니?”
  그가 소녀에게 소리쳤다. 소녀는 거실이 너무 시끄럽기 때문에 전혀 들리지 않는 듯 했다.
  “진아야! 진아야! 애들은 어디서 데려온 거니?”
  사내는 소릴 질렸지만 윽박지르거나 화내는 투는 아니었다. 말투엔 부드러움과 자상함이 묻어났다. 소녀는 가까스로 알아들었는지 사내 쪽을 쳐다봤다.
  사내아이를 마치 엄마인양 꼭 끌어안았다.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애들이에요. 애들은 엄마 아빠가 다들 밤늦께 오신데요.”
  진아란 아이가 대답했다.
  “이렇게 시끄러워선 안돼요. 아빠가 중요한 원고를 쓴다고 했잖니.”
  소녀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이제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죄송합니다. 딸애가 워낙 말괄량이라 서요. 그런데 어떻게 오셨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진아라는 소녀를 오랫동안 쳐다봤을 뿐이었다.
  “아닙니다. 제가 집을 잘못 찾아온 것 같군요. 실례했습니다.”
  이윽고 나는 입을 열었다. 뭔가가 잘못됐어.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 엉키는 것 같았다. 나는 뒤돌아서 현관문을 열었다. 문 뒤로 탑을 오르기 위해 올라왔던 어둠 속에 파묻힌 계단이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계단에 발을 올려놓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계단들은 하나둘 힘없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그 뒤에 정신이 들었다. 나는 좁은 현관에 신발짝들과 함께 쓰려져 있었는데. 안드로이드 소녀가 나를 마구 흔들어 깨웠다. 눈을 떴을 때 처참하게 어질러진 낯익은 거실이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애들은 데리고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질러진 거실에 한동안 누워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소녀는 쉴 새 없이 거실을 어질어놓고 있었다. 어디서 필기도구를 잔뜩 가져와서 거실 바닥에 온통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그래서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대로 누워있을 필요가 있었다. 내일 아침에 환상소설관리국에 가서 이 일에서 손을 때겠다고 말할 참이었다. 그리고 안드로이드 관리국 보관소로 가서 보관소 접수증 찾아서 찢어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냉장고 문 메모지에 바닥에 낙서하지 말 것이라는 메모를 하나 더 추가해야겠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mirror
댓글 3
  • No Profile
    Jay 03.06.30 12:07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느낌이 좋은 단편이네요.
  • No Profile
    oz 09.08.29 19:32 댓글 수정 삭제
    잘봤어요. 상냥하고 귀여운 느낌의 이야기네요. 그리고 이 이야기에 대해 조금 더...더 자세히 들여다 보고 싶군요.
  • No Profile
    생생새우깡 13.09.06 20:02 댓글

    앗 끝났네요..


    상상하며 읽을 수 있는 신나는 글이었어요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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