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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 단편 봄ㆍ봄

2004.10.30 00:3910.30

readingfantasy.pe.krwingmn1k@hotmail.com  " 압다,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빠져 있을 심보냐, 망할 자식. "

  호되게 내지르는 소리에 그만 눈을 떴다.
  밤새 덕지덕지 눈꼬리에 붙은 눈곱 때문인지, 눈을 몇 번 끔벅이자 비로소 문간에 턱 하고 선 심술보 사납게 생긴 할아범의 모습이 온전히 보였다. 그러나 아침이다.

  " ......... "

  " 옌장할 것, 퍼뜩 일어나지 않으면 다리 뭉댕이를 분지를테다. "

  잠이 덜 깬 얼덜덜한 머리로도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재빨리 알아챘다. 허둥지둥 일어나려니 어제 이곳저곳 싸돌아다니며 자못 심하게 다뤘는지 다리가 정말로 삐그덕, 휘청하면서 목각 인형처럼 간신히 매달리듯 일어섰다. 뒷짐을 턱 진 채로, 꼬장거리는 얼굴을 하고성은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주인집 할아범의 얼굴이 내려다보이고,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나도 조금 분이 올라 몇 마디 대꿔줬다.

  " ..동도 채 안 텄는데 중천은 무슨, 안직도 멀었는데 무단히 난리를 부린답니까? "

  " 동이 안 트긴, 이렇게 날이 훤한데 어디서 게으름질이야. "

  " 아고르들도 나보다는 아침잠이 많을테니 걱정 붙들어 매십슈.."

  몹시 투덜거리며 밖으로 나섰다. 그렇지 않으면 저 모진 노친네가 자고 있는 놈에겐 무슨 짓을 할 지 모르니까. 혹시 아나, 겨울에 금방 뜬 정화수처럼 냉기가 확확 도는 찬물을 들여 놨을지.

  " 그러구설랑은 섯이고 넛이고도 물어가지 않던! "

  아침상에나 앉으려고 짚신을 탁탁, 섬돌 위에서 흙을 털어내는 놈의 등짝 뒤에까지 와서 끝내 말시비를 하는 것은 무에란 말인가. 한 마디 날서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냥 입을 국 다문 채 짚신을 끌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아침마다 할아범 잔소리를 들으니 원, 팔자도 드세구나, 허두말지 괜스리 맞대거리를 오래 붙었다간 피차 손해보는 것이니, 이 쯤해서 나라도 아량스럽게 참아야 하는 것이다.
  할아범은(영감 소리를 좋아하지만 영감은 무슨, 그냥 할아범)이 곳 로오스 토백인데, 마을 내에서는 제법 내로라하는 목축꾼이다. 앞고개에서부터 저어기 물 흐르는 뒷 새벌까지 커다란 말뚝으로 비잉 둘러놓고는, 몰이꾼 아이놈 몇 명을 데려다가 양 떼들을 풀어 막 돋은 풀 따위를 뜯게 하는 것이다. 참 말이지, 윗 산 마루에서 내려다 보면 양 떼들이 몰랴다니는 수가 어찌나 많아보이냐면은, 흐린날 하늘에 밀려다니는 솜털구름만치 보인다. 거기다가 쬐그마해서 제 구실이나 할까 의심스러운 말에다 젖소에다, 무릇 가축들은 다 풀어놓고 키우니, 어찌보면 할아범은 그래, 갑부다 할 만 했다.
  그러나 그만큼 차려놓고 살면은 사람이 좀 후덕하고 느슨하게 속마음도 채릴 줄을 알아야지, 이건 내일 굶어죽을 거지놈마냥 소갈머리가 아주 못됐다. 여북하면 그 많은 양 떼들 중에 거저 한 마리 물려갈까봐 초사스러워서 꼭두새벽부텀 자는 놈을 후드려 깨울까. 그 놈의 할아범도 참, 재수 메유로다.
  그래서 성질 드세고 악다구니 좋아하는 그 할아범을 껌벅 죽게 하는 게 딱 하나 있다면, 그건 온통 몸뚱이가 시퍼런 아고르뿐이다. 아고르는 봄에만 움직인다는 커다란 새인데, 날개는 마른 날 널어놓은 이부자리만침이나 크고, 거기에 발톱은 승냥이나 범만침 억세서 한 번 부리를 꼿꼿이 세우고 쌩, 내려꽂듯 지나가고 나면 그 둔해보이는 양의 몸뚱이를 어김없이 낚아채어 유유히 날아가는 것이다. 표도 안나건만 그럴 때마다 할아범이 얼마나 발광을 하는지, 그것 참 나만 괴로운 일이다.

  " 어이구, 망할 자슥. 자빠져 있기를 한참이더니 쳐먹는 것도 이리 뜸을 들이니! "

  밥술을 다 뜨자마자 악귀같은 할아범의 독촉에 쫓기듯 일어섰다. 옌장할, 마땅할 보수는 언제나 구랭이 담 넘어가듯 스리슬적 넘어가면서 돈 안주는 나를 노비처럼 훅닥이는 것이 또 어느 나라 법도란 말이냐, 참을려다 참을려다 나도 모르게 볼멘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 돈만 쥐어줘보시오, 내가 영갬보다 빨리 일어날터니. "

  돈 얘기가 나오자 노친네 그제야 조금 움찔, 찰나지만 잠잠해졌다. 툭 쏘아놓고 할아범이 무던히 섰는 게 민망스러워서 나도 얼른 돌아섰다. 할아범도 흙으로 빚어진 사람이라믄 뜨끔했겠지만, 돌아서서 활을 가지러 광으로 뚜벅뚜벅 걷기 무섭게 특유의 심술처럼 뒤통수에 대고 두어마디, 중얼거리듯 대꾸를 던지는 걸 보니, 지독한 노친네, 아직두 돈 줄 생각은 없다.

  " 계약이라구성은, 압다, 내가 무단히 부려먹든? "

  나는 활 쏘는 사냥꾼이다. 그래두 내 딴엔 가닥 한다는 활 사냥꾼. 동리 사람들 중에도 활 쏠 줄 아는 사람들이 두엇 있지만, 낚아챌 때는 바람만침 빠르다는 아고르를 쏘아 맞출 수 있는 건 역시 나 뿐이다.
  가만히 따져보면 첫인상부터 께름칙했던 저 할아범과 애최 계약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이 곳에서 좀 떨어진 카시미르 마을 사람인 내가 돈을 벌러 이 산골짝으로 흘러들은 것이나, 햇살도 따뜻한 봄이 되면서부텀 시퍼런 아고르들이 두 날개 좍 펼치고 사위를 떠는 서슬에 애간장이 바짝바짝 탔을(그 성질에) 할아범이 나를 만난 것이나, 장난처럼 애최부터 다 어긋날 일이었다.
  나는 이번 늦봄이 끝나기까지ㅡ그러나까 4월달 말일까지ㅡ는 어떤 수작으로든 1200갤런이 필요했고(1200갤런은 약 7200만 원에 해당한다ㅡ지은이), 하지만 그 때는 이미 벚꽃도 분분이 지고난 1월 말이었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어려서부텀 버릇처럼 뚱기던 활질 밖에 없던 내가 아 무슨 수로 3개월 동안 1200갤런을 벌겠는가. 여우같이 고 때 내 속사정을 빤히 들여다보고설랑은 계약을 하자며 달겨들던 게 저 할아범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고(줄여서)들을 전부 잡아달라' 라는 계약부터가 틀린 수였다. 아따, 그 놈의새가 커다랗게 생겼길래 한 열 댓마리 고작하고 말 줄 알었지, 그래 그 때부터 꼬박꼬박 한 마리씩 쏘아뜨려왔는데도 2개월도 더 지난 지금꺼정 여전히 날아다닐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거기에 아고란 놈들이 하루에 한 대엿마리씩 날아다니면 오죽이나 좋겠건만은, 덩치만 큰 것이 눈깔 커단 황소마냥 겁은 많아가지고 제 동료하나가 풀썩, 쓰러지면 개미떼 흩어지듯 황황히 꽁무니를 뺄 줄은 누가 알았겠느냔 말이다.
  그림의 떡이라, 앞 뒤 안 따진 채 1400갤런을 주겠다는 말만 듣고 덤벼들었던 나도 허물이 있다지만, 고걸 이용해서 언제까지고 부려먹으려는 할아범도 영 교활한 데가 없지 않았다.

  1

  요전번에 내가 할아범하고 대판 싸운 것도 사실 내 잘못은 아니다. 아, 그 놈의 목장이 좀 넓은가. 그 목장을 일일이 다 돌아댕기며 양 떼들을 지키다간 그 대체 얼마난 수고냐. 그저 산마루에 올라가 하늘에 쇅ㅡ아고 놈을 기다렸다가는, 기어코 저으기 하늘편에 아고르 비뚝한 놈이라도 나타나야 부리나케 쫒아가 화살을 재어 당기는 것이 내 방식이었다.
  2월 하순쯤이었든가ㅡ지금이 4월 중순이니깐, 어림 한 두어 달 전쯤ㅡ그 때는 한창 못 견딜 '파사루스 여명의 주' 기간이었다. 그거이 뭔고하니, 일년에 가장 춥다는 '시셀라 새벽의 주'와 함께 극악히 몰아닥치는 봄의 마지막 한파를 물리치고, 비로소 새해를 틔워올린다는 바로 그 주간이다. 헌데 언 땅을 녹이려면 기름 끼얹은 화덕만치는 후끈거려야 하는지, 그 때만큼은 세상이 개벽했나 의심살스럴 정도로 어찌나 확 더워지냐면 한창 여름간에나 온다는 '루파닌 주'와 견줄만 할 거라는 생긱이 들 정도다(정말이다).
  인지 말이 샜다만 각설, 그 '파사루스 주'의 끄트머릿날에 내가 인제 뒷산마루에 턱ㅡ누워서 하늘만 바라보고 있지 않았겠느냐. 아, 가만히 있어도 머릿동이가 새카맣게 탈 지경인데 어디 시러배아들놈이 고 태양 아래 섰을까. 당연사 그늘에 대자로 죽 뻗어서 한가롭게 손부채질이나 둬 번 갸웃거리고 있는데, 그 놈의 더윌 모르는 주인 할아범이 멀리서 보기에도 씨근거리며 저 밑부터 올라오는 게 아닌가. 저 놈의 할아범, 집에서 수박이나 깎아먹제 왜 우정 올라오나 싶었더니, 다 올라와설랑은 눈을 요렇게 치켜뜨고 쩌렁쩌렁(참 기운도 좋은 노인네다, 파사루스 주인데 속에다 얼음을 채워넣었나)소리를 지르는데 자못 사나울 뿐만 아니라 행여하면 손에 든 나뭇작대기로 한 대 후려칠 기세이다.

  " 일 시키러 내보낸 놈이 어디 이러구 자빠졌니, 응? 사지가 꼬이지 않고설랑 퍼뜩 일어나지 못해! "

  그렇지 않아도 봄날 아지랭이에 주근주근 땀이 솟는데, 갑자기 올라와 되게 악다구니부터 쓰는 할아범 소리에 나도 제법 성이 났다.

  " 내가 발 여덟 개 달린 토토르인줄 아시유, 이 던 날 저 들판을 다 돌아다니게? "

  " 그렇다구 여기 이러구 있으문, 아고가 니 거북이 발걸음을 기다려라두 준대니?
  봐라, 한 마리라두 잡혀가믄 두 대리를 비틀어놀테니. "

  " 맘대루 하시유, 아고르도 오늘맨큼은 제 집에서 부채질을 하고 있을테니깐. "

  노친네 참, 허구헌날 가르릉거리나, 그렇게 쏘아주고 요렇게 돌려 누웠는데, 아 정강이가 순간 딱, 찌르르 하면서 눈물이 핑 도는게 분명 모진 노인네가 작대기로 내려친 것이 틀림없었다. 뼈다구에 맞았는가 어찌나 아펐던지 비명도 채 못내지르구 데굴데굴, 그러구 있을라니 할아범이 다시 호령하는 것이 아닌가.

  " 게으른 놈팡이는 맞아야 쓰지, 어데, 나머지 다리도 분질러줄테니 거기 섰으라구. "

  그러구성 침을 퇘, 하고 뱉는 게 예삿 빈 말이 아니다. 한 대 더 맞을라치면 어이쿠, 제 정신이 영영 안들 성싶어 벌떡 일어났는데, 고개를 온전히 치켜드니 아뿔싸, 저어기 목장 위에서 퍼덕거리는 것이 바로 아고르가 아니냐. 나는 그만 아픈 것도 잊고 딱 멈춰가지고설랑 황황히 소리를 질렀다.

  " 주인님! 주인님! 저으기 글쎄...! "

  " 맞기 싫으니까 웬 헛소리가 나오니! "

  " 아 글쎄 저기, 저어으기..."

  발을 사뭇 동동 구르니 그제야 할아범이 고개를 슬며시 돌렸다. 아, 노인네 흐리멍덩한 눈에도 그게 보였는지, 그 때부터 얼굴이 새파랗게 변하는데 섣 달 똥구녕막힌 놈마냥 그렇게 파르르 질렸다.

  " 저...저...저 눔이! 어이쿠. "

  깍쟁이 노인네가 오죽하랴, 아고르가 그 큰 날개를 퍼덕거리며 잽싸게 한 마리 낚아채구설랑 날아오르니까는, 그저 혼비백산 해가지구 펄펄 뛰었다.

  " 내려놔라, 이 놈! 저게 얼마인 줄 알구설랑..."

  그리구는 방금 후려친 놈에게 돌아서서 꽤나 다급하게 훅닥이는 게 아닌가.

  " 얘, 얘, 얘, 빨리, 저 놈좀 어떻게 해 보아! "

  나도 급해져서 허둥지둥 활을 재어매고 화살통도 매었다지만, 얼른 발에 불이 나도록 달릴려구 작정하려니 막상 싱겁다. 아, 그 양새끼가 내 입에 풀칠이라두 해 준 게 아닌데ㅡ노인네 돈궤짝에는 어떨지 몰라도ㅡ뭣하러 파사루스 주에 그리 달릴 성이란 말인가. 더군다나 지금 눈썹이 휘날리도록 뛰어서 한 놈 잡느니 나중에 천천히 기달렸다가 새로 한 놈 잡느니 어차피 하루에 한 놈 잡기는 매한가지 아니냐. 고런 영악한 타산이 머리를 스쳤다.
  거기에다 아직도 화끈거리는 정강이에 고약한 복수심도 불쑥 일었다. 아따, 남의 집 아들놈을 그리후려패는데, 이따 온전히 물려가 버려서 영감쟁이가 펄펄 뛰는 것을 보는 것도 좀 삼삼한 일이 아닌가. 그렇게 이성(理性)과 감성(感性)이 합의를 보아 문득 재기려던 발을 멈춰버렸다.

  " 아, 왜 그러구 섰니, 망할 자식! 빨리, 저,저,저, 거진 다 날아가는데! "

  " 어채피 늦어버렸는데, 오늘 재수에 옴 붙었다 치지유. 남 귀찮게스리. "

  슬그머니 약올리듯 대꾸면서 탁 주저앉아 버렸다. 참말로 양 한 마리를 꿰어찬 아고르 하나가 쉬익쉬익 하늘을 나는데, 나는 은근히 통쾌하지마는 할어범 그 속은 오장육부가 거꾸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지 거듭 소리를 질러댔다.

  " 저 놈의 새! 저 놈의 새! 저 육시할 놈의 새! 어이구..."

  그러구 펄펄 뛰다가는 문득, 제 성을 못 이기겠는지 나뭇작대기를 사뭇 꼬나쥐며 날 돌아보는 게 아닌가ㅡ선뜩했지만 뭐, 아까도 쳐 놓고 설마 또 한 대 치겠느냐ㅡ그리구는 잡아먹을 듯 이를 부득부득 갈며 호통을 친다.

  " 너! 그리구 앉았으문 남의 집 양떼를 망쳐놀 요량이지! 에라, 이 자식ㅡ "

  이 때 나는 도망가야 된다는 것을 번쩍 알았으나, 채 일어서지도 못하고 따악, 꽥 하는 소리를 내지르구는 그냥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눈 앞이 어찌나 번쩍하던지 식은땀이 쪽 끼치면서 정신이 번쩍 들 정도였으니, 필시 등을 후려맞은 겔 게다ㅡ싶으니 이제는 도망가야 겠다는 생각보다는 분이 슬금슬금 치밀어 올랐다. 제 속셈으로 남을 막 이용해 먹구성, 마땅히 대가를 받았으면 뉘우칠 벱이지 그래 되려 내려친단 말인가ㅡ내 이 놈의 할아범을 그냥, 성이 난 김에 벌떡 일어서려 했다.
  아, 나뭇작대기를 빼앗아버릴(암만해도 한창인 내가 힘이 셀테니)심산으로 섰는데, 문득 보이는 게 방금 양을 꿰어찬 아고르, 그 놈이 이 쪽으로 날아오는 게 보이지 않겠는가ㅡ

  " 저,저,저기! 아니 그래 이 쪽으로 날아오지 않니! 퍼뜩ㅡ "

  다행인지 아고르가 양을 문 채 날아가는 곳은 얼마 멀지 않은 숲 쪽, 충분히 재인 화살이 날아가 맞을 정도의 거리였다. 방금 쳐놓고도 그걸 구세주다 싶어 불같이 몰아대는 할아범의 성화에 나도 등맞은 것은 잠시 잊어버리고 화살을 하나 쑥 빼어성은 얼른 활줄에 재었다.
  아고르가 우는 소리ㅡ시조새마냥 작지만 날카롭다ㅡ가 잠시 후 내 귀에까지 들리고, 그만침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겠다. 지금은 그냥 서서히 날고 있지만 낚아챌 때는 바람만치나 빠르다는 새이다. 숨을 탁 멈추고 조심조심 겨냥을 해가지구는 이제 다 되었다ㅡ하구 화살 쥔 손을 놓은 참인데, 이제 또 이러구보니 싱겁다.
  계속 한 발 늦게 타산이 드는 건 나도 좀 어리숙하지만, 아까 저 몹쓸 할아범에게 복수라도 해주자
하고 다짐해놓고는 이게 또 무슨 동업이란 말인가, 아 글쎄 대체 저걸 맞춘다고 뛸 듯이 기쁜 건 할아범이지 내가 아니잖는가, 하구 생각이 점점 들고 나니 화살을 놓기는 커녕 계속 뜸만 들였다.

  " 아, 뭐해ㅡ 놓치겠구먼! "

  보통 때라면 그래 제가 아끼는 재산이 물려 날아가는데 내지르는 소리를 좀 측은하게라도 여기어 주겠다만, 이 때는 그저 내가 지 수족인마냥 마구 몰아세우는 것처럼 들리고 그것 참 아니꼬운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활을 이럻게 들구 계속 서있기만 하니 할아범이 혀가 바짝바짝 타는지 자꾸 성화인데, 이제 아고르가 점점 시야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나도 이럼 안되니 싶어서 그만 겨냥한 화살을 놓을까 망설이는데, 거기서 할아범이 참 그따우로 외친 게 퍽 나빴다.

  " 쏴,쏴,쏴라 안하든! 멀쭉히 섰고만 있으니 배냇병신이니! "

  망할, 배냇병신은 또 어디서 배워먹은 욕지거리인가. 그냥 성이 훅 나버려서 활이고 화살이고 그냥 놔버렸다. 노인네 멀뚱하게 놀랄 눈이(뒤돌아서진 않았지만 뻔했다)보이듯 선하고, 양을 문 아고르가 동시에 저기 옆 산 숲 속으로 쑥 들어가 버려 인제는 쏘려 해도 못 쏘게 되어버렸다.

  " .......... "

  거 참, 하나뿐인 아들놈이 어디서 뒈졌더래도 저런 표정은 안나오갑다 싶을 멍한 표정이다. 내 부러 한 일이었지만 영감쟁이 그런 얼굴을 보고 섰으라니 또 민망스러워서 그냥 머릿께를 두어 번 긁적거리며 변명하듯 둘러댔다.

  " 아따, 그 놈의 새가 어찌나 시퍼런지 거저 나뭇닢하고 헛갈려서 못 쏘겠더라구만유. "

  말해놓고 보니 아 그럴듯한 변명이다, 싶어서 삼삼히 자축하고 있는데ㅡ실상 그랬다, 아고르란 놈 깃털 색깔이 어찌나 시퍼러냐면 정말 옆 산 숲 색깔하고도 많이 닮았다ㅡ그 놈의 할아범에게는 씨도 안 먹힐 말이었나부다, 조금 뒤에 얼굴이 스스로 일그러지더니 콧김을 씩씩 뿜어내는게 아닌가.

  " 너이ㅡ너, 그걸 이바구라구 해? 저 놈의 새가 뭐 나뭇닢 색깔하고 비슷혀, 놓쳐버린 것두 분한데 노인네 앞에서 거짓부렁을ㅡ한 번 견뎌봐라! "

....노친네, 그렇게 그 날 도망가는 놈을 쫒아와가지구는 마구 후려팼었다. 망할.

  2

  그리구 그 날 다음으로는, 할아범과 나 사이엔 모종의 계약이 성립되었다. 하루에 양 한 마리가 물려 가면 끼니 한 번 걸리기(참 더럽다, 먹는 걸 가지구 협박을 하나), 그러나 하루에 아고르를 두 마리씩 잡으면 대신 끼니 한 번 더 차리기로. 뭐, 내가 있을 때엔 아고르가 양을 물어갈 수 있는 건 거의 없으니, 참 뜸한 일인 두 마리씩 잡기가 그리 손해보는 계약은 아니었다.
  아고르란 놈은 참 성질이 특이한 새이다. 덩치 큰 게 사자나 범은 저어하지 않으면서, 유난히 사람에게는 겁을 잘 집어먹고는 영 가까이 오지를 않는다. 거기에 아무 일이 없으면 목장에 두 놈 서 놈 어느날은 다섯 놈까지 날아오지마는, 일단 내가 척 버티고 있다가 첫째 놈을 맞춰 거꾸러 뜨리면 겁을 집어먹고 제 놈들 스스로 연략을 하는지 모두 도망가버려 다시는 오지 않는다. 이게 내가 하루에 기껀해야 하나 잡는 이유이지만서도, 거기에 보태어 영영 안왔으면 나와 할아범 피차 좋으련만 아 그 놈들 기억력이 붕어 머리인지 그냥 하루만 지나면 똑 잊어버리고 다시 날아오는 게 아닌가. 이러니 미칠 노릇이라는 거다.
  하루에 하나씩 거꾸러 뜨려도 날아오는 건 계속되니, 결국 그 놈들 씨를 뽑아버리는 것은 산 속 어딘가 덩그러니 자리잡고 있을 둥지를 직접 찾아가는 것 뿐이다. 나야 한창 나이니 오른편엔 주먹밥 담은 그릇 하나 매어놓고, 왼편엔 사시사철 차갑다는 물 시르를 담아 물통을 매어놓고, 활 하나 화살통 하나 지고성은 찾아가면 될 요량이지만, 문제는 수지 안 맞는다는 할아범의 속셈이었다.
  내가 그렇게 태평히 나가 있는 동안에 빈집털이 식으로 아고들이 이 짝으로 날아오믄 어쩌겠느냐, 안 된다 하는게 할아범의 주장이었다. 허긴, 제 가축들을(아니 그것보다는 제 재산을) 목숨처럼 애끼는 영감쟁이이니 내가 나가있는 걸 어찌 사위스러워서 두고 참는단 말까.
  하지만 대판 맞아논 날로 한 달이나 제법 지나가고 퍽 잔잔한 봄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산마루에 올라가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속에서 뭔가 불쑥 솟아오르는 게 내가 왜 이리고 있나, 싶은 답답함이었다.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라든 4월 말까지(그 때는 아마 3월 말이었을 게다)는 1200갤런을 분명코 얻어야 할진대, 그 아고르란 놈들이 언제 씨가 마를지 기약할 수도 없는 일이고, 이리다 영영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 그만 답답한 마음이 온통이었다. 아고르들이 봄에만 움직이는 새라고 알려져 있지라마는, 그래서 할아범이 4월 말꺼정 되면 이젠 더 이상 안 보일거라고 말하지마는, 그거이 순 거짓부렁이다. '세실라 새벽의 주' 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새인데, 4월달 지나가고 5월달 온다해서 봄볕에 눈녹듯 사라져 버릴 거라고 누가 장담한단 말인가.
  그 때는 한창 봄볕에 나도 깜빡 이성을 잃어버렸었나 보다. 에잇, 까짓거 저 많은 양떼인데 한 댓놈 물려갔다고 사람을 찔러죽이지는 않겄지, 하고 누워있던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하루종일 산을 헤매자면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겠지마는, 몰래 빠져나갈 일인데 밥이랑 물이랑 가지러 할아범 집으로 기어들어갈 수도 없으니, 그냥 나무열매나 옹달샘을 믿어보면서 그 길로 저벅저벅, 드디어 그 둥지들을 한 번 찾아보려고 산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아 물론, 활줄이 단단한 활을 지어서는 말이다.
  그 때 참 내가 생각을 잘못했나부다, 이왕 몰래 갈 것이면 나중에 매나 좀 덜 맞게 한 놈 쏘아뜨리고 길을 떠나든가 했을 일인데, 그냥 한 마리도 채 안 잡은 뒤였으니 어찌 되었겠는가. 나도 들은 말이지만(영감이 후에 씨근거리면서 말해줬다) 목장이 아주 발칵 뒤집어졌다고 한다. 그 놈이 아고르들이 지키고 섰는 사람이 없으니 얼씨구나, 두 놈 서 놈 댓일곱 놈 까지 날아왔었댄다.
  거기다가 부러 산 속에 찾아든 소득도 영 없었다. 어찌어찌 길은 찾아 온전히 돌아왔지만서두 둥지는 커녕 산 속을 날아다니는 아고르 비뚝한 놈도 못 찾았고, 어디선가 승냥이 한 마리를 보구 혼비백산 도망질을 쳤는데, 아따 달리다보니 나는 사냥꾼 아니냐, 마음을 고쳐먹고 조심조심 화살을 재어서 거꾸러 뜨렸을 뿐, 별 다른 소득이 없었다.
  차라리 그 때 다리라도 하나 부러져 왔으면, 병자랍시고 그리 얻어맞지는 않았을텐데, 마을로 들어오는 솔길을 할아범이 어찌 알았는지(아이놈이 일러바쳤나)척 버티고 있다가는, 참말 복날 개패듯이 타작을 당했더랬다. 지은 죄ㅡ양 여덟 마리ㅡ가 있으니 끽 소리 못 허구 맞았지마는, 그 참나무 굵은 가지만한 몽둥이가 헛방망질을 해서 그만 활대를 뚝, 허구 분질러 놓았을 때는 할아범도 커다랗게 놀랐다. 아, 활이 부러졌는데 어찌하나. 행여나 저녁이지만 아고르가 또 날아오면 어쩌나 해서 후드려 패는 것도 그만두고 활을 안고설랑 부랴부랴 옆동네 대장간까지 달려갔더랬다. (그러고보면 내 활이 구세주이다)
  그래두 할아범이 착할 때도 더러 있다. 내가 담날 아침, 하루종일 돌아다닌 몸살에다 정신없이 얻어맞은 매독에다, 그리 끙끙 앓고 누웠으니 그 날은 아예 양을 풀어놓지 아니하고 늦게까지 보살펴 줬더랬다. 그리구성 차근차근 하는 말이, 그렇게 훌쩍 도망가버리면 나도 안 좋고 니도 피차 안 좋으니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라, 4월 말까지는 어떻게 해서라도 1200갤런을 챙겨줄터이니. 하자 나도 그 때는 할아범이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래설랑 다음날 거뜬히 일어나 아예 산마루는 커녕 들판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아고르 한 놈이 나타나기 무섭게 쏘아뜨리지 않았는가.

  3

  그러나 그런 기특한 일두 잠시, 곧 봄볕만 나른히 내리쬐는 지겨운 날이 계속되니 그만 싫증이 나면서, 거기에 비례해 나도 할아범도 곧 원수지간으로 돌아서 툭 하면 말쌈을 벌였다. 얼마 전까지두
애탐을 못 참고성 한 판 말쌈이 붙었는데, 그것 참, 항상 반복되는 내용이다.
  그 날두 할아범이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자는 놈을 크게 깨웠댄다.

  " 문둥이 자식, 나 몰래 아고랑 계약이라두 해 놨니, 낮꺼정은 안 날아오기루? "

  " 아 그거야 아고놈 생리가 그렇다니까유...새벽부텀 깨울 일이 뭽니까? "

  머리를 북북 긁으며 영 짜증스러워 하니까ㅡ노인네는 원체 새벽잠이 없나, 심심하면 날 깨우는 것 같다ㅡ두 눈 말짱하게 뜬 노인네는 일단 두말접고 알밤부터 딱 메기구 본다.

  " 정신채려, 이 눔아. 사내 놈이 게을러가지구성은...쯧. "

  머리가 뜨끔거리며 아픈 게 영 기분이 짜증스럽다. 그리구성 뒷짐을 진 채로 뒤돌아서는 할아범을 콱 떼다밀어 버릴 수도 없고, 그냥 나도 모르게 뒤통수에다 대고 툭 내뱉어 버렸다.

  " 돈 주시유, 이러구성은 도저히 못 참겠으니. "

  " 돈은 무신! 아무개 집에나 가보아, 너같은 하인이 있더래두 사경 한 푼 주기 싫어할 벱이니. "

  " 아, 꼬박꼬박 나가서 잡아오는데, 뭘 게으르다구 하슈? "

  " ..다 집어치우구, 계약만치 한다구, 애최 다 잡아주기루 했었던 걸 어디서 수작이야, 미친 눔. "

  " 계약도 공정해야지, 기껀해야 열댓 마리 있는 것처럼 애최 쇡인 게 누구라지유? "

  " 쇡이긴 누가 누굴 쇡여, 나두 그만침 많을 줄 알았니? "

  이러구설랑 옥신각신 하려니 노인네 말주변에 내가 말려드는 기분이다. 평생 협잡질만 해왔나, 무신 놈의 말귀신인지, 원.
  그 할아범 집에는 나말고 머슴 두엇과 아이놈 네댓이 있는데, 아이놈들은 양 치러 다 나갔다마는 머슴놈들도 아직 쿨쿨 곯아떨어져 있다. 나를 그 놈들보담 늦게 재우고 일찍 깨워 부려먹는 건 대체 날 머슴 이하로 본다는 게 아니구 무언가. 그냥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디립다 한 대 칠 수도 없는 노릇이구, 그냥 꾹 눌러참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터벅터벅 목장으로 향하는 길을 걷고 있자니, 문득 터무니없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어차피 저 악귀같은 영감 골려주는 건 아고르 밖에 없으니, 어디 한 번 동업해보자는 생각이었다. 그것두 후일에 욕먹을 일 없는데다가, 첨엔 그저 터무니없다구 생각되더니만 가만가만 생각해보니 잘만되면 아주 썩 좋을 성도 싶어서 같아서, 그 날은 산마루에 있지 않구 들판에 요렇게 버티고 있었더랬다.
  어김없이 쇄액, 아고르 한 마리가 날아왔다. 오늘만큼은 대강대강이 아니라 제대로 쏘아야한다, 싶어서 한쪽 눈을 꽉 감고 조심스럽게 겨냥했다. 아직 하늘을 빙빙 날고만 있어서 그리 빠르지 않기 때문에, 잘만 하면 된다ㅡ신중에 또 신중을 기해서, 천천히 손을 놓았고, 화살이 하늘로 강하게 쏘아져 올라간 동시에 곧 그 놈이 제법 구슬픈 소리로 빽, 소리를 지르며 몇 번 채 퍼덕이지도 못하고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ㅡ얼른 달려가서 땅에 축 늘어진 그 놈의 상처를 살펴보았고, 그렇지, 의도했던 대로 화살끝이 급소를 아슬아슬 빗나가 생명엔 지장을 주지 않을 만큼 꿰뚫려 있었다.
  그렇지 싶어서 얼른 그 놈을 들쳐매려니, 어이구 보통 무거운 놈이 아니다. 깃털은 흡사 비로드처럼 부드럽고 따시해서 좋다만은, 그걸 즐기고 있기보다는 할아범 눈에 띄기 전에 얼른 숨기는 것 부터가 먼젓일이었다.
  이리 끙끙, 저리 끙끙대며 겨우 내가 잘 가는 산마루 위로 올려놓았다. 한 마리 맞췄으니 더 날아올 걱정도 일단은 없겠다, 나는 정신을 잃은 아고르를 냅두고 얼른 달음박쳐서 할아범 집으로 달려갔다.

  " 얘, 너 고약이랑 붕대 어디 가지고 있는 것 없니? "

  마침 싸리문을 벗어나던 머슴아를 하나 붙잡고 급히 물었다. 다행히 머슴들은 다치는 일이 많은지 별 말 않구 제 방에 가져다놓은 붕대랑 시꺼먼 고약을 내주었고, 그걸 받아들고 나서 다시 산마루로 엎어질 듯 자빠질듯 달음박쳐서 올라갔다. 다행히 아고르 그 놈은 그래도 숨을 쌕쌕, 용케 안 죽고 날개를 펼친 채 여전히 엎어져 있었고, 가슴을 쓸어내린 나는 이것저것 살필 것 없이 고약을 상처에 가져다 대고 붕대로 이리저리 둘러줬다. 시퍼런 새라 몸뚱이도 좀 차갑지 않을까, 했더니 은근히 따뜻한 게 어찌 보면 귀엽기도 하고, 참 그리 모를 측은함같은 것도 일었지만, 그래도 그 발톱이랑 부리를 문득 보고나니 다시 무섬증이 일었다. 내가 혹 제정신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성.
  하지만 어찌됐건 사람에겐 해꼬지 안 하는 새라, 그 날부텀 숲 속에 숨겨놓고 매일마다 올라가서 살펴주었다. 그 담날에는 눈을 못 떴지마는, 차차 나아지면서 눈도 뜨고 제법 피를 많이 흘렸던 그 상처도 아물어 가기 시작한다.
  얼마 전ㅡ한 열흘 전 부터는 이제 조금씩 파닥거리는 게 이젠 날개 근육이 온전히 돌아왔는 성싶다.
애써 보람도 없이 훌쩍 날아가버리면 어쩌나 싶어서 걱정했다만, 그 놈이 내가 항시 올라와 보살펴 주니 정이 들었는지, 제 은인이라고 생각하는지 흡사 옛날 동화처럼 안 도망가구 그 자리에 종종 거리다가 내가 오면 꽤 반기는게 강아지 한 마리를 들여논 듯하다.
  이제, 4월말도 다 되었는데 슬슬, 위험하지만 해볼까나.

  4

  아참, 그리면 내가 그동안 잡아뜨려왔던 수많은 아고르들을 다 어찌했을지 궁금할 것이다. 그 새도 보통 큰 새는 아니니까, 참새 하나 죽은 것 마냥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노인네는 뭐 그런 것에는 상관않고(일단 그 놈이 죽었다는 게 중요하니까) 나에게 맡기지만, 나도 실상은 퍽 귀찮다. 저번에 사로잡은 아고르말고는 모두 달구지를 일일이 끌고 와 실고성은, 집으로 가져와 대강대강 잘라낸 후에 저어기 뒷 새벌에 묻는 거다. 다들 끔찍스러운 일이라고 하지마는 고향에서 소 모가지 비틀기를 밥먹듯이 했던 나인데, 뭐 그 쯤은 이제 아무렴, 묻어 놓고 돌아서서 비위좋게 점심도 먹는 걸.
  아, 그런데 사실 노인네에게 감추고 있는 거이 하나 있다. 그 새의 깃털 말이다. 온통 시퍼런 색이라지만 그래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꽤나 반지르르한게 이뻐서, 그대로 묻지 않고 숱이 많은 날개 부분만은 깃털을 죄 뽑아서 한 두어 달 전부텀 꾸준이 모아두고 있다. 다 모아서 뭣에 쓸지는 잘 모르겠다만, 그래도 이제는 제법 모여서 수북이 쌓인 게 몇 수레는 되겠지, 했다.
  그리 모으다가 아따, 이걸 모아서 정말 뭣에 쓰나, 하며 내동댕이칠 뻔도 했지만, 그냥 삼삼한 취미 모냥으로 삼기로 하고 여태껏 모아왔다. 시퍼런 색이 아니라 그래도 뻘건 색이라면, 그거이 무엇이냐,
귀족들이 아주 비싼 값으로 사 입는다는 그 귀족옷처럼이나 솜씨 좋게 꿰매서 입을 수 있을텐데. 뭐, 밤에 보기 무서운 시퍼런 색이니 이건 여름철 반바지로도 못 쓰겄다.
  각설, 그렇게 아고르 시체를 하루하루 뭍어 오던 중 한 사흘 전인가 뒷 말 촌장님이 찾아왔다.

  " 아, 이 목장에서 그 새ㅡ이름이 무엇이드라, 아구르?ㅡ들을 쏘아잡는다는 게 자네인가? "

  뜻밖에 일이라 멀뚱멀뚱했었지만, 문득 생각해보니 아, 뒷말까지도 내 귀신같은 활솜씨가 소문이 났나보다, 우쭐해서 얼른 대답했다.

  " 그렇지라유. "

  " 자네 이리 좀 따라오게. "

  촌장은 두말 않고 헛기침을 한 번 험, 하더니 뒤돌아서서 뚜벅뚜벅 어디론가 걸어가는 게 아닌가. 요사이 이 산골짝에 담당 영주가 새로 온다더니 나를 데리고 가서 자랑시키려나, 하고 따라나서려니, 문 앞에 우두커니 섰는 할아범이 보였다. 아하, 저 할아범이 내가 행여나 영주님께 칭찬듣고 다른 일하러 훌쩍 가버리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고 있는 게로군, 하고 생각하니 아닌게 아니라 할아범이 좀 불쌍해졌다.
  촌장은 한참 이어진 길을 걷더니, 뒷 말에 들어서는 입구에 다다르자 턱 제자리에 섰다. 멋모르고 나도 따라 섰지만, 말 입구에 심술사나운 불독마냥 생겨먹은 사람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척 앞으로 나서자 좀 움찔했다.

  " 네가 그 썩은 시체를 묻어온 놈이지! "

  으르렁 거리는 폼이 영 좋은 일 시켜주려는 사람의 태도는 아니다. 일단 시체를 묻어오기는 묻어왔으니 쭈뼜거리며 대답했다.

  " 그렇지...라유. "

  " 너 이놈, 오늘 잘 만났다. "

  그리구성 그 돼지 족발같은 손을 들어 멱살을 번쩍 잡아올리는데, 순간 숨이 컥, 막히면서 어찌나 손아귀 힘이 그 모양으로 좋은지 그저 공중에 매달려 버둥버둥거리고 채 아무 짓도 못하겠더라.

  " 네ㅡ 그것 때문에ㅡ일년 농사를 망쳐놓을 심보지! 이 놈ㅡ "

  " 어이구...무슨...커컥..."

  정신을 못 차리겠는게 그냥 아득했다. 아, 옆에 섰는 점잖은 촌장은 뭘하나, 그만치 비굴한 생각이 들 때가 되니까 그 때야 촌장이 느지막히 나서서 말렸다.

  " 이 사람, 너무 그러지 말게. 알고 그랬는가, 놔, 놓고 얘길 하든가ㅡ "

  그렇게 말려도 한참을 씩씩거리더니, 그제야 손아귀를 탁 풀어 나는 섰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자빠져 버렸다. 한참 힘이 쭉 빠져서 일어나질 못하고 있으니, 그 불독같은 놈이 호령하기를,

  " 시체를 얼마나 많이 묻었으면 그래 강물이 썩은 내가 나! 육시할 자슥..."

  씩씩거리는 소리를 듣자하나, 아, 아닌게 아니라 뒷 새벌에 조그만 냇물이 하나 흐르긴 흐른다. 그게 뒷말까지 흐르고 있는지는 몰랐지마는, 참말이라면 그 시체 썩은 내가 강물에 좌악 퍼졌을 게 아닌가. 이건 멱살 한 번 쥔 걸로 끝날 게 아니라 좀 있다 뒷말 사람 모두에게 짓밟히게 생겼다, 싶어서 그 자리에 엎드려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그렇게 전부 사과하고 영 체면도 구기고, 터덜터덜 할아범 집으로 돌아오니 문 께에 다시 할아범이 서 있다. 그리구 풀이 죽은 놈에게 보자마자 냅다 호령하는 것이,

  " 그러게 누가 그딴 식으로 일을 하라던! 꼴도 퍽 좋다. "

  하고는 홱 외면한 채로 들어가 버리는 게 아닌가. 이것 참, 내 편은 하나도 없고 죄다 원수에다 적이니, 더 이상 이 곳에는 못 있겠다 싶은 마음이 든 것은 그 날이었다.
  그 날 밤새도록 그 썩은 시체들을 죄다 파내어 딴 곳에 묻느라 고생한 것도 내 마음을 단단히 굳히는 데 영향이라두 미치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오래전부터 계획해오던 일을 하겠노라 마음을 먹은 것은 바로 오늘 저녁께에 편지 한 통을 받고 나서이다.

  5

  오늘은 이상하게도 기분이 착잡했다. 아침에 영감쟁이랑 싸우기도 했더랬지만, 늘상 있는 일인만큼 저녁 때까지 염두에 두고 기분 나빠할 일은 아니었다. 그냥, 오늘은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예감, 그냥 그런 알 수 없는 예감이었다.
  저녁 해가 느지막이 질 때까지 나는 터덜터덜 목장을 걸어다녔다. 아고르도 오후께에 하나 쏘아뜨렸고, 이제는 또 날아올 리도 없다 싶었다. 그만 거두고 가자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 다시 집으로 돌아가 방바닥에 눕는 것조차 괜스리 귀찮았다.
  석양. 산 너머로 구분하기 힘든 석양이 진다.
다른 사람들은 석양을 '연시같이 붉은색' 이라고 하지마는, 내가 보기엔 석양은 언제나 푸르다. 여기가 산골짝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ㅡ뭐, 내 고향에서도 석양을 붉다고 느껴본 적은 없지만ㅡ산 너머로 지는 태양은 어두워지는 검은 하늘에 핀 낮의 하늘처럼 그저 마냥 푸르다…
  봄. 이렇게 따뜻하고 아늑한 봄인데, 왜 이리 가슴 한 쪽이 훵하고 답답한지.
  할아범 집으로 터덜터덜 걷고 있는데, 저어쪽 오솔길에서부터 웬 사람 하나가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ㅡ커단 가방을 짊어진 것이나, 옷차림을 보아서나, 가끔씩 이 산골짝에도 다녀가는 우체부가 틀림없어 뵈였다. 순간 저만치 앞에서 걷고 있는 우체부에게 정신없이 뛰어가, 우체부가 뒤를 돌아서자마자 얼른 물었다.

  " 저으기, 편지ㅡ 어디로 가는건가요? "

  우체부는 잠시 갸웃하더니 편지를 꺼내보고는 나를 다시 올려다 보았다.

  " 아, 그 분이시로군요? 저번에 편지를 가져다 드렸던? "

  " 예, 예, 맞아요(도시 사람에겐 도싯말을 써야한다). 편지가 왔습니까? "

  " 동생 분 보호자에게서 한 통 왔군요. 지금 드릴까요? "

  뭔가 불길한 느낌이 스쳤지만, 그래도 안 받을 수는 없는 일인가. 긴장되는 마음으로 말없이 손을 내밀어 우체부가 건네주는 편지를 받았고, 고맙다는 인사를 꾸벅하니 우체부도 웃으며 잘 가라고는 제 갈 길을 다시 총총히 떠났다.
  편지를 어둑한 들판에서 뜯어보기는 싫었다. 편지를 그대로 쥐고 할아범 집으로 들어갔지만 내가 쓰고 있는 방에 호롱불이 안 켜져 있어서, 부싯돌을 탁탁 치느라 조금 시간이 걸렸다.
  이윽고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뜯었고, 그러나 역시 막막한 내용 뿐이었다.

  [ 친애하는 레핀 군 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이제 곧 아실리아 이슬의 주인데, 어떻게 지내고 계실지 궁금하군요.
  동생 분의 증세는… 이런 말씀 드리기가 죄송스럽지만, 여전히 심각하신 상태입니다.
  만약 5월달 초에 세번째 수술을 받지 못하시면, 생명을 보장하기 힘드실 것 같습니다.
  그동안은 제가 어떻게 병원 원장님께 잘 말씀드려서 미뤄왔지만, 4월 말일 이상으로는 더이상 늦출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방금 원장께서 말일까지 1200갤런이 들어오지 않으면 강제라도 퇴원을 시키겠다고 하셨으니, 힘드시겠지만 꼭, 1200갤런을 마련해 주시길 부디 바랍니다.
  심려의 글을 드려 죄송합니다. 그럼 이만.

  4월 19일 동생분의 담당 의사 케드린 드림. ]

  구겨버릴 듯 편지를 접어버렸다. 강제 퇴원이라니. 그 원장의 고양이같은 낮짝을 한 대 후려쳐주고 싶다. 돈, 그까짓 돈이 뭐길래 결핵으로 다 죽어가는 그 조그마한 아이를 내쫓는다고. 개 같은 자식.
  1200갤런… 그래, 내가 4월 말일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1200갤런을 벌어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었다. 내 능력으로는 3개월만에 그 큰 돈을 마련할 길이 없어 이런 짓을 하고 있지만, 답답하다. 욕지거리를 매일같이 얻어먹고 채이고 맞아도 좋으니, 제발 그 날 전까지만 어떻게 돈을 받아낼 수 있다면. 얼굴을 한 손으로 감싸쥐고 있으려니, 비로소 아침부터 착잡했던 그 이유를 알겠다.

  " 돌아오자마자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 거냐? 퍼뜩… "

  할아범이 잔소리를 늘어놓을 요량으로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가, 내가 편지를 든 채 고개를 조금 들어올려 보이자 말을 뚝 멈추고는 무안한 듯 방문을 다시 닫고서 나가버렸다. 들고 있는 편지를 본 것일까. 저게 그래도 할아범의 착한 구석이다. 한바탕 쏘아대려다가도 내가 편지를 읽고 있는 걸 보면 침을 삼키고는 암 말 안한채 돌아서곤 한다. 할아범이 아무리 모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 병원 원장같은 족속은 못되나 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이젠 더이상 물러설 수도, 미룰 수도 없는 거다. 사람을 측은하게 여긴다면 얼른 돈을 건네줄 것이니와, 그렇지 않은 걸 보면 측은히 여기기는 해도 돈이 아까운 것이 틀림없다.
  나는 소리없이 일어서서는, 내가 자주 가는 산마루로 올라가기 위해 짚신을 신었다.

  6

  " 무는 게 아니고, 그냥 낚아만 채는 거야. 알았지? "

  아고르는 얌전하게 날개를 접고 있었지만,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는 당최 알 수 없었다. 그저 끼익하고 불평같은 소리를 지르기만 할 뿐, 여러 날 훈련시켜왔건만 영 못 미더웠다.

  " 그리고 내가 휘파람을 불면 다시 내려오는 것 알지? 알아 듣는거야? "

  어둠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야광마냥 아고르의 깃털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턱을 두어 번 쓰다듬어 주니 고개를 끄덕끄덕, 에, 모르겠다, 그냥 알아들은 셈치자 하고 일어섰다.

  " 잘 되야 할 텐데…"

  나는 걷고 있고, 아고르는 날고 있다.
  부러 속도를 맞춰 나는 건지, 날개를 좍 펼치고 휘젓는다만 그리 빠르지 않아서 이윽고 할아범 집으로 동시에 들어갈 수 있었다. 손짓을 하자 알아들은 것처럼 신기하게 할아범 집 지붕에 사분히 내려 앉았고, 그것 참 신통한 일이다 생각하면서 조심스럽게 할아범이 잠자는 안집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리고ㅡ

  " 웬 놈이 저녁이 다되어서 이리 들어오니? "

  부엌에서 바가지같은 것을 들고 나오던 할아범은 눈이 흐리멍덩해서 그런지 내 쪽을 보고 크게 소리를 쳤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하지만 어차피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하니 용기를 얻어 곧 손을 입에 넣고 크게 삐익,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아고르의 날개가 푸덕이는 듯 싶더니, 번개같이 날아올라 할아범을 요렇게 노리고 달려들었다. 훈련도 몇 번 안 시켜봤는데 참 대단한 새다, 하고 혀를 내둘렀다만 오직 할아범은 웬 새가 갑자기 날아들어 사위를 떨치니 정신이 다 빠져가지고 죽는 소리를 했다.

  " 어이구. "

  낚아채지는 못했어도 커다랗게 놀란 할아범이 쿵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고르가 성난 비명을 지르며 재차 휙, 허공을 지나 정확하게 할아범의 옷자락을 꽉 물고 드디어 하늘로 날아올랐다.

  " 사, 사람 살려! 커단 새가 사람 죽이네! 아이구우.. "

  됐다, 하고 탄성을 지르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참은 채 기대 찬 눈으로 아고르를 바라보았다. 할아범이 혼이 다 빠져서 소리소리 지르는 것 같았지만, 공중에 매달린 데야 뭐 어떻게 할 도리가 있을 리 없지. 이 쯤 되자 나는 썩 앞으로 나서면서 손을 모아대고 할아범에게 소리를 쳤다.

  " 내려줄테니 곧 돈을 줄거지라유! "

  그러나 죽고 사는데 정신이 온통 빠져있어서 그런지 내 말을 귀에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 사람, 사람 살리라! 사람… "

  목청도 고래고래 좋아서 옆 집 사람들 다 깨우게 생겼다, 아고르가 막 옷자락을 물고 처마 주변만을 빙빙 돌다가, 갑자기 뜻하지 않게 하늘로 부웅, 솟아 올랐다. 저런, 저럼 못 쓰는데 하면서 나는 더욱더 넉이 나간 채로 소리소리 지르고 있는 할아범에게 재차 외쳤다.

  " 내려어 주울테니이, 곧 도온 줄거지라유우! "

  하지만 역시 혼잣말백에는 더 안됬나보다. 하긴, 곰방이라도 뚝, 떨어져서 낙사당할 것 같은데 언 놈이 온전한 귀로 남의 말을 듣겠느냐, 싶어서 나는 마지막으로 크게 외쳐보기로 했다.

  " 주인님! "

  " 아이고, 그래, 너ㅡ 빨리 이 놈 좀 어떻게 해 보아! 빨리ㅡ "

  " 그러문 약속한 돈 줄 거지라유우! "

  할아범이 전수이 알아먹은 듯 해서 옳지하고 다시 외쳤더니, 아니 웬걸, 채 대답을 듣기 전에 갑자기 이 놈의 새가 훌쩍하고 저 높이높이 날아오르는 게 아닌가.

  " 사람 살리라! 사람…"

  바락바락 악을 쓰는 듯한 할아범 목소리도 그만 너무 멀어져서 들리지를 않게 됬고, 나는 멍청하게 점점 멀어져 가는 아고르를 바라보고만 섰다. 하지만 곧 옌장, 정신이 번쩍 들어서 내려오라는 뜻으로 휘파람을 다시 크게 불어봤지만, 이미 건너간 물, 들리지도 않는지 그 망할 아고르는 들은 척 안하고 저 산너머를 향해 계속 날아가고 있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아고르가 사람에게 해꼬지를 안 한다지마는 저러다가 귀찮으면 턱, 까마득한 높이에서 할아범을 쥔 발톱을 펴버릴 것이 아닌가. 당장에 그 자리를 박차고 달려 나와, 어디로 가야할 지도 모른 채 그저 밤하늘에 희미하게 시퍼런 색으로 빛나고 있는 아고르를 따라 달리려 했다. 그러나ㅡ
  옳지, 나는 문득 할아범이 양떼 뿐만 아니라 쬐끄마한 말도 풀어놓고 키운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말을 몇 번 타본 일이 없다는 사정을 살필 겨를도 없이 당장에 마굿간으로 타다다 달려갔는데, 다행히 고 말들이 마굿간에 얌전히 서서 여물을 먹고 있었다. 발 하나를 들어 빗장을 탕 쳐서 열고, 안장이고 뭐고 없이 얼른 올라타서 배를 걷어찼다.

  " 이러! 이러! 달려, 달리라고! "

  운수에 없게 말을 타게 된 내가 고삐를 함부로 잡아 당겼더니, 이 놈의 말이 히힝거리고 앞발질을 두어 번 하고 아주 발광이 났다. 그래두 원체 사람을 태우고 다니는 종류인지, 곧 달리기 시작하는데 흔들흔들, 일단 나부터 정신이 사납다.

  " 젠장, 이리 꼬이니..."

  밤하늘, 아고르가 날고 있고, 그제서야 말을 좀 듣기 시작한 말이 그 뒤를 쫒아 달린다.

  7

  …시체 마냥 뒷산 숲 속에 쓰러져 있던 할아범이 다행히 눈을 뜬 것은 오늘 아침이었다.

  " ……. "

  그래도 살았으니 다행이련만은, 할아범이 의식을 깬 다음 나를 도둑놈으로 몰아세우면 어찌하나, 고런 눈 앞이 깜깜한 생각도 들어서 그저 조금만 있다 깨지, 하고 얄미운 생각도 들었다.

  " …깼어유…? "

  다행히 아고르는 제 집을 찾아가려던 모양이었나보다. 할아범을 뭐 절벽이나 이런데서 떨어뜨리진 않았고, 그냥 아무 숲에나 대강 집어던지고 갔던 모양인데, 할아범은 하늘에 매달려 있는 동안 무서움증을 이기지 못하고 고만 기절했던 모양이랬다.

  " …그래도 자네가 얼른 발견하지 않았더라문, 숲 속에 승냥이가 얼마나 많은데. "

  의사 양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렇게 말했지마는, 이제 할아범이 깨어나서 뭐라고 소리를 지를까, 이 생각이 드니 그만 내가 탁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았다.

  " …여기가 어디라던? "

  " 집이지유, 어디라니…"

  엉겁결에 뻔뻔한 대답이 나와버렸다. 이런 주둥이를, 하고 머리가 쥐어뜯는데 할아범이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더니 나지막히 말했다.

  " 압다, 바쁘신 데 뭣하러 이리들 오시오. 그냥 그만한 일 가지고. "

  " 그런 말 마시게, 뭐 다쳤다는 소리를 듣고 곧장 달려왔는데. "

  할아범의 눈이 나를 흘낏 바라봤다가, 다시 마을 사람들에게로 돌아갔다. 저런, 인제야 일러받칠 심사인가 싶어서 덜컥했지만, 다행히도 아니었다.

  " 마을 양반들, 고맙지만 나는 이 자슥과 할 말이 있으니께, 잠시 자리를 물러다고. "

  섬짓해버렸다. 저 할아범이 다 내보낸 담 나에게 협박을 하려나ㅡ조금 전에는 제발 마을 사람들에게 도둑놈 여기 있다고 소리만 안 질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참 사람 마음이란 묘하다.

  " …그럼, 그려. 저 놈아가 은인이랑게. "

  하나 둘씩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방문으로 나가고, 이윽고 병자를 돌본답시고 후끈후끈하게 뎁혀놓은 방안에는 고개를 떨구고 앉아있는 나와 누운 할아범만이 남았다.
  갑자기 할아범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무슨 짓을 하려나, 하고 불안해하고 있는데, 한 대 냅다 후려치지는 않고 주섬주섬 단단한 금고로 다가가더니, 손가락을 놀려 금고 문을 따는 것이 아니냐.

  " 옛다. "

  짤그랑. 나는 눈을 허옇게 뜨고 할아범이 내던진 주머니를 바라보았다.
  돈, 그것도 저 주머니에 가득 차서 짤그랑 소리가 묵직하게 날 정도의 돈이라면 1200갤런은 충분히 되고도 남을, 그런 돈 아니냐.
  놀라고 어안이 벙벙해서 그 돈주머니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으려니, 조금은 힘없고 조금은 부드러운 할아범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 아, 그렇게 조르던 거인데 왜 챙겨넣지를 않어. "

  " 주인님… 이게…"

  이렇게 받을 것을, 무에 이 할아범을 그렇게도 미워하고 의심하고, 또 그런 짓까지 벌였단 말인가.

  " 네 동생아가 수술 받는다는 거, 다 알구 있었다. 그래서 어젯밤에 그걸 챙겨주려고 했는데, 고 사이를 못 참고 난리를 떨었니, 허허. "

  …딴판이다. 날 부려먹지 못해서 안달을 하던 그 모진 목소리가 아니라, 그냥 너그러운 노인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다. 순간 내가 딴 사람을 구해왔나 싶기도 하고, 아니믄 기절했다가 이 할아범이 머리를 크게 다쳐버렸나 싶었지만, 그런 쓸데없는 상상도 잠시, 괜시리 슬퍼졌다.
  어제 할아범은 내가 편지를 읽고 있는 걸 보고, 더 이상 미뤄두면 안 되겠다 싶어서 곧장
방으로 들어가 1400갤런을 챙겨서 주머니에 넣어두었댄다.

  " 화… 안났에유? "

  " 망할 자식, 첨에 눈 떴을 땐 그냥 때려죽이고 싶었다니껜. "

  말은 험하지만 그래도 할아범이 웃고 있는 걸 알겠다.
  방금 말대로, 처음엔 그냥 괘씸하고 화가 났었더랜다. 그런데 차차 생각해보니 오죽하면 그런 짓을 했을까 싶은 생각도 들고, 미처 챙겨주었어야 하는데 그동안 부려먹은 게 괜스리 미안하기도 하고, 그랬단다. 제길.

  들을수록, 그냥 화가 났다. 나란 놈에게 화가 났다. 같이 아웅다웅하면서도 할아범은 다 나를 생각하고 준비해두지 않았느냐. 양 한 마리가 물려갔어두, 그래서 작대기로 되게 후드려 팼어두, 그 담날에는 구스르고 붕대랑 고약이랑 발라주지 않았느냐.

  그런데 내가 기껀 한 짓이라고는 아고르란 놈을 길들여서 되려 협박하는 짓이 아니었던가. 갑작스럽게 1400갤런이라면 할아범이 제아무리 갑부라도 얼마 동안은 양 떼를 퍽 줄여나가야 할, 그런 돈일진대, 그런 걸 계약으로 걸어놓고 딴청만 부렸던, 그게 나 아니냐.

  갑자기 그 앞에 덩그러니 놓였는 그 돈, 그 갤런이라는 돈이 혐오스러워졌다. 그냥 그 돈자루에 고양이 새끼같은 원장 얼굴도 겹쳐 보였다. 돈이 뭐길래, 젠장. 돈이 뭐길래 하면서 내가 한 짓은 뭐였더랬지.
  봄, 그 날도 따스한 봄날이었다.

  8

  봄을 색깔 하나로 표현하자면, 그건 파릇파릇한 초록색이다. 온통 주위는 양 떼들이 뜯어먹기 좋은 풀 투성이고, 꽃들도 그렇고, 하늘도 그렇다. 일 년 중에서 가장 안개가 많이 낀다는 '아실리아 이슬의 주' 주간이 곧 시작되었고, 4월 하순에 접어 들어 나는 이제 이 곳을 떠나기로 했다.

  " 괜찮겠니? "

  그 날 이후로 나와 할아범 사이는 영 곰살맞아졌다. 하지만 그게 그 돈을 받아든 내가 고맘을 느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그 돈을 한사코 안 받은 채 나왔기 때문에 그리 된 것이리라.

  " 동생아 수술비는 그래 어떡하고? "

  " 빛을 내서라도, 십 년 머슴이라도 계약해서 일단은 꾸어야겠지유. 걱정 놓으세유. "

  봄날 웃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할아범 주름진 얼굴도, 요사이 통 웃어본 적이 없던 나도 그냥 활짝 웃어버렸다. 내가 든 건 활대 하나에 화살통 하나, 그리고 이것저것 주워넣은 괴나리봇짐 하나. 나는 그만 이제 내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

  " 어, 저런. "

  이제 길을 떠나려고 작대기 지팡이를 하나 쥐어들던 나는, 하늘을 무심코 올려다보고 눈을 찌푸렸다. 아고르ㅡ얄밉기도 하고, 정답기도 한 놈ㅡ 한 놈이 양 떼들을 노리는지, 마지막으로 저 하늘을 날아다니 있는 것이었다.

  " 그러나저러나, "

  활을 꺼내들었다. 이제 이 짓도 마지막이겠지.

  " 주인님은 이제 아고르들을 어찌하시려구유? "

  왠지 그 날따라, 하늘에 점처럼보이는 아고르를 정통으로 맞춰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화살을 하나 빼어재이고, 눈 하나를 질끈 감은 채 활을 들어올렸다.

  " 어떡허기는, 한 놈 사서 부려야지. 헌데, 니 자슥처럼 잘 쏘는 놈이 있을까 몰르겄다. "

  휭.

  맞았다. 쏠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ㅡ
  푸드덕하며 아고르가 떨어져 내렸다. 안녕, 마지막의 아고르.
  봄날 햇볕이 몹시도 내려쬐는 날이었다.


  - 뒷 이야기 -

  " 어이쿠! "

  나는 그만 길모퉁이를 돌다가, 거세게 달려오는 마차를 보고 화들짝 놀라 발을 헛디뎠는지, 그만 쿵하구 넘어져 버렸다. 덕분에 화살통에 든 활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리고, 괴나리봇짐도 운수 나쁘게 돌에 맞아 터졌는지 들었는 게 모두 쏟아져 나왔다.

  " 이 놈! 정신 똑바로 차리고 다니지 못할까! "

  마차가 멈춰선 것도 같은데, 나동그라진 나는 누군가 호령하는 소리에 사뭇 기분을 잡쳤다.
  아, 내가 잘못혔나, 그토록 거세게 말을 몰던 게 누구인데 되려 난리질이야, 해서 고개를 치켜들었더니, 아뿔사, 마차 생긴 게 귀족 마차 모냥으로 화려한 것이 아니냐.

  " 무슨 일이냐? "

  마차 안에서 누군가 고개를 내밀었다. 척, 생긴 것도 위엄있게 생긴 품이, 어이구, 내가
  요번에 새로 오신다는 로오스 말 영주님 마차랑 부딪혔었나부다.

  " 죄… 죄송하지라… 아, 아니, 죄송합니다… (도시 사람에겐 도싯말을 써야 된다) "

  " 앞으로는 주의해서 다니도록 하라. 음…? "

  갑자기 영주님의 눈이 나를 보고서는 크게 뜨였다. 왜 또 저러지, 얼굴에 뭔가 묻었나 싶어서 손으로 얼굴을 만지작만지작 거리고 있는데, 영주가 좀 뜸을 들이다가 내게 묻는 게 아닌가.

  " 저 깃털… 자네 것인가? "

  깃털? 아, 내가 그동안 모아왔던 아고르 깃털? 그거라면 두고 가기 아까워서 한 움큼 봇짐에 넣어가지고 왔었는데, 아차, 아까 봇짐이 터지면서 깃털이 튀어 나왔나보군, 싶었다.

  " 예에, 제 것입니다만…"

  급기야 아직도 눈이 커다랗게 놀라 있는 영주가 마차 문을 열고 나왔다. 깃털이 뭐가 잘못 되었나 싶어서 어쩔 줄 모르고 황황하게 있는데, 영주가 내 옆에 한 쪽 무릎을 굽혀서 앉더니 그 시퍼런 깃털을 하나 집어 들었다.

  " 이런 귀한 물건을… 평민처럼 보이는데, 이렇게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 "

  귀한 물건…? 저게 귀한 물건이면 길가에 지나가는 다람쥐 털도 귀한 물건이겠구먼, 순간
그런 생각이 들어 피식, 나도 모르게 막말을 해버렸다.

  " 아따 영주님도, 그거이 흔한 물건이지 어찌 귀한 물건이랩니까? "

  " ……. "

  말해놓고 그제야 이 놈의 주둥이가 또 미친 짓을 했구나, 사무치게 깨달아버렸다. 저번처럼 머리를 쥐뜯을 수도 없고, 그냥 얼굴만 새빨갛게 붉히고 절이라도 할까 했는데, 영주가 곧 조용히 입을 열었다.

  " 그대는 이런 빨간 깃털이 귀족들의 귀한 옷이 된다는 것을 모르는가? "

  빨간털…? 아니, 이렇게 시퍼런데 무슨 빨간털…? 물론 빨간 깃털이 귀족들의 귀한 옷이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니 이렇게 시퍼런데야.

  " 빨간털…이라굽쇼? 이건 새파란 깃털인데…."

  그러자 영주 뒤에서 입을 벌리고 섰던 사람들이 갑자기 킥킥 웃어대기 시작한다. 영문을 모르고 뚱하니 바라보고 있자, 영주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 정말… 그대에게는 이게 새파란 깃털로 보이나? "

  " 아, 물론… 새파란 깃털이지유. "

  " …그대 혹시…"

  영주가 깃털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 색맹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

  색맹…?
  영주는 갑자기 내 옆에 난 풀을 몇 번 뒤적이더니, 녹색 꽃 하나를 꺾어들었다. 그래놓구 그걸 내 앞에 들이밀구는 또 이렇게 물었다.

  " 그대는 이게, 무슨 색으로 보이나? "

  나는 영주가 미쳤나. 했다. 멀쩡히 녹색 꽃을 두고 그게 무슨 어린이 놀음인가.

  " 파란…꽃입니다. "

  또 영주 뒤에 섰는 놈이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아, 저것들이 허파에 구멍이 뚫렸나.

  " …적록 색맹이군. 그렇지 않나? "

  적록 색맹…?
  아, 그러니까 퍼뜩 스쳐가는 게 몇 가지 있었다.
  파랗다고 생각했던 석양.
  아고르가 나뭇잎 색깔과 비슷했다고 둘러댄 변명이 들어먹히지 않았던 것.
  온통 푸른색의 봄.
  …아고르는 파란 새가 아니라, 따뜻한 체온만큼 붉은 새였다.

  [ 친애하는 케드린 선생님에게.

  아실리아 이슬의 주도 다 끝났군요, 그동안 제 동생을 끔찍이 위해 주셨던 점, 감사합니다. 저번에 송금한 1200갤런은 잘 받으셨는지요? 지금쯤 동생의 수술이 진행되리라 믿습니다. 아, 그 1200갤런에는 웃지 못할 사연이 있었습니다. 다 쓰기에는 뭣하고...
  다행히 마음씨 좋은 영주님께서 그 빨간 깃털을 전부 팔아주시고, 1600갤런을 내주시더군요. 손해봤는지 이익봤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며칠 내로 병원에 들릴 예정입니다. 그리고서는, 다시 아고르를 잡으러 로오스 마을로 가고 싶군요. 거기 마음씨 착한 할아범이 계시거든요.

  그럼, 다시 한번 은혜에 감사드리며, 이만 쓸까 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5월 3일, 레핀 드림 ]


  …도시 사람들에게는, 도싯말을 써야 한다. 후후.



  -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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