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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달 윤회의 끝

2003.07.26 03:2207.26

어둡고 조명이 낮은 카페.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친구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는 당신만이 생생하다. 당신은 나를 모른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기억한다. 나는 홀로 앉아 쓴 커피를 홀짝이다 담배를 한 모금 뿜어낸다. 뿌연 연기에 가려 시선이 흐려지지만 나는 당신의 동작 하나하나를 다 잡아낼 수 있다. 당신은 커피를 한 모금 삼키고 음악을 따라 흥얼거린다. 눈은 당신의 친구에 고정되어 있다. 당신은 턱을 괴고 묘한 미소를 짓는다. 팔을 따라 흘러내린 블라우스 자락을 만지작거린다.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손은 다시 커피잔으로 간다. 당신은 쓴 커피를 좋아한다. 설탕이나 프림은 넣지 않는다. 잔을 쥐는 손은 언제나 조심스럽다. 그건 손이 미끄러져 몇 번 커피를 쏟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커피잔에 올라앉은 손가락엔 엷은 색의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의 손톱은 약해서 잘 부러진다. 당신의 이는 그렇게 고른 편이 아니다. 당신은 치과를 무척 싫어한다.
나는 당신을 잘 알고 있다. 당신은 나를 모른다. 나는 아직 당신이 앉은 테이블에서 몇 미터 떨어진 구석자리에 홀로 앉아 있는 타인에 불과하다.
나는 나의 거의 모든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당신과 관련된 나의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 첫 생에서 당신을 만났을 때 나는 당신을 사랑했다. 두 번째 생에서 당신을 만났을 때 나는 기뻐하며 당신을 사랑했다. 세 번째 생에서 당신을 만났을 때 역시 나는 당신을 사랑했다. 그렇게 이백 육십여 번의 생이 돌고 도는 동안 나는 당신을 사랑하며 내 생에 숫자를 매겼다. 덕분에 나는 당신을 잘 알고 있다. 나는 고민한다. 새로운 생에서 과연 당신과 어떤 식으로 해후해야 하는지.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다. 당신은 당당한 사람을 좋아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언제나 당신의 기준에 못 미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난 당신을 사랑했고 당신의 곁에 끝까지 있었다. 당신은 힘든 상황이 닥치면 이백 육십여 번의 생에서 매번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당신의 옆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당신의 사랑을 얻을 수 있었다.
첫 생에서 내가 당신을 만났던 것은 올해 이 달 오늘 이 시간 이 카페에서였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올해 이 달 오늘 지금으로부터 30분 후이다. 두 번째 생에서 당신을 만났던 것도 올해 이 달 오늘 지금으로부터 30분 후 이 카페에서였다. 세 번째 생에서 당신을 만났던 것도 올해 이 달 오늘 지금으로부터 30분 후 이 카페에서였다. 이번 생에서도 나는 지금 당신을 보고 있다.
처음 봤던 그 때도 당신은 블라우스 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커피를 앞에 놓고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당신은 커피를 다 마시고 새로운 커피를 시켰고 당신보다 늦게 카페에 들어온 내가 시킨 커피와 당신이 시킨 커피는 바뀌고 말았다. 당신은 아르바이트생에게 항의했다. 내가 시킨 커피에는 휘핑과 잼이 가득했다. 아르바이트생은 내 커피를 들고 내 테이블로 왔지만 나는 무지하게 쓴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였다. 아르바이트생을 좇던 당신의 눈동자가 나에게 와서 닿았다. 나는 당신의 검은 눈동자가 매우 예쁘다고 생각했다. 나는 용기를 내서 당신에게 커피를 사주었다. 당신은 신기하게도 그 쓰디쓴 커피를 맛있게 마셨다.
그 날 밤 나는 잠을 잘 수 없었다. 그건 카페에 오래 머물러 있던 당신을 보느라 마셔댔던 커피 때문이었고 당신의 검은 눈동자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당신을 만나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몇 번을 부딪친 끝에 당신은 어떤 눈물 젖은 날 마침내 나의 이름을 물었다. 그 날 이후 나는 당신의 친구가 되었고 연인이 되었고 동반자가 되었다. 나는 당신을 사랑했다. 당신도 나를 사랑했다. 나는 당신을 끝없이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랐다. 다음 생에도, 그 다음 생에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일 것이고 나는 당신을 끝없이 찾아 헤맬 것이라고 맹세했다. 당신은 웃었다. 당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까. 이백 육십여 번, 나는 당신을 기억하고 당신을 찾아 당신을 만나러 오지만 당신은 먼저 나에게 말을 건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감사했다. 당신을 찾을 수 있는 나의 기억에. 당신과 함께 자주 이 카페를 찾는 당신의 친구에게. 매 생마다 당신과 나의 커피잔을 바꿔주는 아르바이트생에게. 수많은 생 동안 바뀌지 않고 쓰디쓴 커피를 좋아하는 당신의 입맛에.
시간이 흐른다. 손목시계의 분침이 당신이 새로운 커피를 시키는 시간을 향해 달려간다. 나는 고민하고 있다. 언제나처럼 당신에게 새로운 커피를 사줄까, 아니면…. 모든 생에서 시작은 늘 같았다. 끝도 한결 같았다. 당신과 나는 부부였고 서로를 오롯이 의지하다가 당신과 나는 죽고 나는 같은 모양의 세상에 다시 태어나 당신을 만날 날을 기다린다. 이백 육십여 번. 삶은 부정형으로 뭉그러지고 한없이 단순한 것으로 변해간다. 이백 육십여 번. 자신 없고 대략적인 헤아림. 나는 지쳐간다. 내가 다시 태어난 것은 오로지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일 것인데도. 나를 움직이는 것은 관성이 붙은 마음뿐이다.
대략 백 번째 생까지 나는 당신을 지켜보는데 나의 모든 것을 쏟았다. 두 번째 생에서 나는 동해의 일출에 붉게 물든 당신의 얼굴을 보았다. 일곱 번째 생에서 일본으로 건너가는 비행기안에서 만족스런 표정으로 잠든 당신을 보았다. 열 번째 생에서 남국의 붉은 꽃을 머리에 꽂고 깔깔대는 당신을 보았다. 열 두 번째 생에서 당신은 루브르 박물관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당신은 언제나 좀 더 자주 여행을 다니자고 불평을 했다. 하지만 백 번째 생이 지난 뒤, 우리는 히말라야를 정복하고 몽골 초원을 달리고 태평양을 건너 모든 자연의 경이와 문명의 유산을 향유한 뒤였다. 당신은 언제나 기억하지 못했다. 우리가 함께 갔던 많은 곳들을. 내가 당신의 웃는 얼굴에, 우는 얼굴에, 화내는 얼굴에 얼마나 감탄했는지도.
나는 커피를 마신다. 당신의 커피잔은 비어있다. 당신은 친구와 이야기하느라 십 육분 동안은 커피를 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 안전한 시간동안 나는 고민한다.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백여 번째 생 이후 나는 당신에게 꽤 못되게 굴었다.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했지만 앞서 말했듯이 나는 지쳐갔다. 당신은 내가 지친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과 끝이 한결같았던 것처럼 당신도 한결같았으니까. 나는 당신이 부러웠고, 당신이 나와 같은 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에 안도했고, 그래서 증오했다. 미안하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흘깃 당신을 본다. 당신은 내가 바라보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백 이십 번째 생에서 나는 당신에게 의도적으로 상처를 주었다. 나쁜 남편이 되어 당신을 홀로 집에 두고 어디에도 함께 가지 않았다. 나는 세계의 여기저기 서 있는 당신의 모습을 기억할 수 있으니 상관없었다. 당신은 눈에 띄게 우울해졌고 내게서 등을 돌렸다. 나는 조금 기대했다. 하지만 백 이십 일 번째 생의 당신은 날 미워하지 않았다.
이후로 나는 방향을 잃고 헤맸다. 내가 많은 생을 거쳐 당신을 만나는 이유는 퇴락하고 황폐해졌다. 나는 당신과 싸웠다. 나는 당신을 때렸다. 나는 당신을 떠났다. 끝없이 겹쳐지는 인연 속에서 당신은 내가 바라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고, 인연이었나 보다, 운명이었나 보다. 그렇게 한 번만 말해주었다면 나는 지겨움을 벗고 앞으로 사백여 번의 생까지는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 궁리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에게 나는 이백 육십여 번의 생 동안 최후의 기댈 곳에 지나지 않았다. 이번 생에서도 당신이 내 이름을 묻는 것은 당신의 운명을 잃고 눈물을 흘리던 날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당신과 함께 한 지겨운 날들을 사랑한다.
나는 마지막 커피를 마신다. 담배를 비벼 끈다. 슬슬 당신이 새 커피를 시킬 시간이 된 것 같다. 나는 아르바이트생을 부른다. 커피를 시킨다. 잠시 후, 당신도 손을 들어 커피를 시킨다. 나는 당신을 쳐다본다. 시작의 당신, 젊은 당신은 아름답다. 나는 잠시 후회한다. 그러나 곧 고개를 젓고 커피를 기다린다. 음악은 나른하다. 당신과 친구는 이야기를 한다. 아르바이트생이 커피를 날라 온다. 아르바이트생은 이백 육십여 번째 똑같은 실수를 했다. 그가 가져온 커피잔의 무늬를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말없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커피는 매우 쓰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한다. 당신은 항의하지 않는다. 맛있게 커피를 마신다. 당연하다. 당신과 함께 한 이백 육십여 번의 생 동안 나는 쓴 커피를 잘 마시게 되었으니까. 어쩌면 나는 이것을 위해 당신을 사랑해왔는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을 지나쳐 카페를 나선다. 당신은 나를 보지 못한다. 당신은 그저 테이블 옆을 지나간 타인에게 관심을 둘 사람이 아니다. 이걸로 된 거다. 나는 서글픈 미소를 짓는다. 다음 생에서는 당신을 기억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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