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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륜 왕의 결혼식

2004.03.26 20:4003.26

  나연은 버스정류장에 서 있었다. 집에 가는 버스는 항상 그렇듯이 빽빽하게 여고생으로 들어찼다. 버스 한복판에, 버스가 급정거해도 몸이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빼곡한 틈에서 나연은 땀냄새에 숨이 막혔다. 얼마전에 상습적인 치한을 책가방으로 두들겨패던 친구를 떠올리다가, 급작스런 충격에 앞으로 주루룩 밀려갔다. 여기저기서 꺄악꺄악 비명을 올렸다. 다음에는 뒤에서 충격이 왔다. 앞뒤로 올리던 비명들이 찢어지기 시작했다. 나연은 무슨 일인지 파악하지 못한 채 자신도 같이 고음의 소리를 질러댔다.
      
  사람들의 무게에 온몸이 압착기에 들어간 것처럼 눌려버린 고통을 버티던 그녀가 더이상은 못참겠다고 생각할 때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간신히 빠져나와 돌아보고, 나연은 그대로 도망쳤다.
      
  버스는 참혹했다. 피묻은 유리조각이 사방에 터져나와 널렸고 형체를 알 수 없는 피와 덩어리들이 흩어졌다. 운전석이 있는 앞부분과 뒷부분이 눈에 들어왔을 때 나연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돌렸다. 얼굴과 팔, 다리, 버스 자재들이 뒤엉켜 무엇이 누구의 것이고 무엇이 살아있는 것이며 무엇이 무기질인지 알 수 없었다.
      
  나연은 많이 달렸다고 생각했으나 기실 많이 떨어지지 못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나연은 관자놀이와 정강이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을 깨닫고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때 눈에 보인 것은 흐릿한 달이었다. 공기가 싸늘하니 추웠고 살갗은 축축했다. 눈에 비쳐드는 달은 달빛을 주위로 퍼뜨리듯 뻗쳐내고 있었으나 그 빛은 흐려 금세라도 어둠에 잡아먹힐 듯했다. 팔다리가 무거워 늘어졌다. 사람들이 몰려와 나연을 땅에서 파냈다. 나연은 가슴께 아래서부터 흙에 덮여 있었다. 그 흙은 두텁지 않아 몇 개의 손이 나연의 몸 위를 쓸어내자 털려나갔다. 흙이 사라지자 나연은 추위를 느꼈고 누군가가 천으로 감싸주엇다. 나연을 마차에 태워 데려간 곳은 궁전이었다. 보석과 비단을 휘감은 기둥이 지붕을 견고하게 떠받치는 궁전.
      
  "왕이여, 신부를 데려왔나이다."
      
  사람들이 나연을 왕 앞에 두고 물러가자 왕은 일어섰다. 사람들이 씻기고 예복을 입힌 나연은 눈에 비쳐드는 왕의 얼굴을 보았다.
      
  왕은 미소지으며 나연의 뺨에 손가락을 가져다대어 살짝 끌어당겼다. 부드러운 감촉과 입김이 이마에 머물렀다가 멀어졌다.
  나연은 손을 들어 아직 뺨에서 떠나지 않은 왕의 손을 만져보다가 상처가 나은 것을 불현듯 깨달았다.
      
  왕은 얼마 있지 않아 나연을 돌려보냈다. 나연의 멍한 시선, 뚜렷한 피로에 까닭이 있었지만 그녀가 빨리 돌아가기를 바라는 칼릴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왕은 칼릴의 어두운 표정을 보았다. 칼릴을 팔로 감싸안자 칼릴은 왕의 가슴에 어깨를 기댔지만 우울한 표정을 고치지 않았다.
      
        
      
  시종이 와서 고했을 때, 칼릴은 자신이 만든 대례복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달, 아니 두달 전부터 한땀한땀 자수를 놓아 만든 대례복이었다.
      
  "신부께서 향유를 아니바르겠다고 하시나이다."
      
  칼릴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문득 일어나는 무언가를 느꼈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들며 그것이 무엇인지, 뭐라고 이름붙일 감정인지를 헤매다 퍼뜩 놀라 대답했다.
      
  "신부의 뜻대로 하라."
  "신부께서 단장도 거절하시나이다."
  "식사는 하시는가?"
  "예."
  "잘 보살피도록 하라."
  "예."
    
  시종이 물러갔다. 칼릴은 대례복에서 불안하게 흔들거리는 깃털 한 장을 다시 꿰매었다. 짜증. 그 단어를 떠올리고 칼릴은 바늘로 손가락을 찔러버렸다. 칼릴은 손가락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칼릴은 이번에도 신부에게 가지 않겠노라 한 스스로의 다짐을 어겼다.
      
  나연은 궁중복식을 차려입고 앉아 있었다. 오도카니 앉아있는 나연은 아직까지 흙에 반쯤 묻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연이 고개를 돌렸다.
      
  "누구세요?"
  "칼릴입니다, 신부여."
        
  칼릴은 공손하게 두손을 엇갈리며 허리를 숙였다.
      
  "...그의 동생이세요? 아니면 누나?"
      
  시종이 의자를 갖고 왔다. 칼릴은 왕을 '그'라고 표현하는 나연이 당혹스러웠다.
      
  "아닙니다. 왕을 모시는 사람 중 하나일 뿐입니다, 신부여."
      
  나연이 웃었다.
      
  "정말 닮았는데도 아니에요? 하긴."
      
  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스스로 납득했다.
      
  "여기 사람들은 다 닮은 거 같으니까."
  "닮았습니까?"
  "응, 닮았는걸요. 다들 친척같아요."
      
      
      
  나연은 시종들이 목욕 시중을 드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시종이 칼릴에게  찾아온 것도 그 때문이었지만 칼릴이 신부에게 맡겨두라고 한 이후로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칼릴은 나연이 목욕하는 시간에 찾아가 욕탕의 문을 열었다.
      
  "칼릴? 싫어요!"
      
  뜨거운 습기, 자욱하게 서린 김 사이에서도 나연은 칼릴을 알아보았다.
      
  "같이 하는 건 괜찮겠습니까, 신부여?"
      
  칼릴은 나연이 반대하기 전에 옷을 벗어던지고 탕안에 몸을 담갔다.
      
  "하지만 싫은데..."
  "괜찮습니다. 잘 보이지도 않으니까요."
      
  나연이 머뭇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칼릴. 여기서는 누구도 죽지 않는다면서요?"
      
  칼릴이 소스라치는 바람에 탕의 물이 요동쳤다. 물방울이 나연의 뺨과 코에 튀어 짙은 향기를 남겼다. 그 향은 달콤하면서도 청량한 내음이었으나 나연은 적응할 수가 없었다. 나연의 얼굴이 찡그려지는 것을 보고 칼릴은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신부여."
  "왜 그렇게 다들 놀라죠?"
      
  나연은 손을 들어 얼굴의 물을 훔쳐냈지만 오히려 더 짙은 향만을 남겨놓았다.
      
  "난.... 그럼..... 나만 죽는 거예요?"
  "왜 그런 걸 물으십니까?"
      
  칼릴은 나연과 하루에 꼬박꼬박 한 번씩 얼굴을 마주하는 왕을 떠올렸다. 신부가 온 다음부터 왕과 칼릴은 같은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다들 대답을 안하잖아요. 말로만 신부여, 신부여 하면서, 뭐든 들어줄 것같이 하면서."
      
  나연의 입술이 움찔거렸다. 이로 입안을 깨무는 것같은 움직임이었다.
      
  "정말 내가 하는 말은 하나도 안 듣잖아요! 이름도 부르지 않고, 그가 보고싶다고 해도, 칼릴을 불러달라고 해도, 한번 말해선 안듣잖아요! 밖에 나가는 것도 안된다고만 하고!"
      
  나연이 벌떡 일어서려다 미끈 균형을 잃었다. 칼릴은 나연의 무릎을 팔로 안아 끌어당겼다. 첨벙, 첨벙 하는 소리가 습기와 김이 잔뜩 서린 욕탕 안을 텅텅 울렸다.
      
  "칼릴!" "칼릴!"
  "신부여!"
      
  놀라서 세 개의 문을 일제히 열어젖히고 달려온 시종들의 목소리는 칼릴을 부르는 것이 더 컸다.
      
  "괜찮으니 물러가라."
      
  못미더운 눈치였으나 시종들은 조용히 떠났다. 넘쳐난 탕의 물이 배수구로 흘러드는 소리, 천정에서 물방울이 맺혀 떨어지는 소리, 나연의 커진 숨소리가 칼릴이 일어서는 물소리에 묻혔다.
      
  "카... 음, 칼릴은 중요한 사람인가 봐요?"
      
  쇳소리로 시작된 질문은 동요가 역력했다.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걸음을 옮기던 칼릴은 나연을 돌아보았다.
      
  "나같은 거보다 훨씬 더 중요하죠?"
      
  한껏 물속에 파고들며 턱 위를 간신히 내놓은 나연의 어깨는 움츠러들어있는 것이 분명했다.
  결혼식은 내일이었다.
  칼릴은 걸음을 돌려 탕속으로 발을 딛었다.
    
  "신부여, 당신은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칼릴?"
  "우리는 죽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왕이 영원하듯 우리도 영원합니다. 왕에게 영원을 주신 우리의 유일한 주께서 왕의 신부를 원하십니다. 이계에서 죽을 운명인 신부를 왕께서 맞아들이십니다."
  "내....가? 내가?"
  "이계에 가실 수 있는 우리의 왕은 죽음끝에 선 신부를 데려오십니다."
      
  나연의 반응은 느렸다.
  궁의 모든 사람들이 나연의 비명과 울부짖음을 들었다.
      
      
      
  "칼릴."
      
  준비를 마친 왕이 칼릴을 불렀다. 나연은 웃는 듯 우는 듯한 표정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따금 속눈썹이 오르내렸다. 나연에게 대례복을 입힌 후 나연의 관에 향주머니를 꽂고, 머리카락을 향으로 듬뿍 적시던 칼릴은 왕을 돌아보았다. 왕은 잠자코 칼릴의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계의 여인들은 향에 적응하지 못하고, 농도를 높이면 움직이지 못했다. 향돌로 만든 목걸이와 이마장식을 걸어준 후 관을 씌웠다. 나연은 의자에 앉혀진 그대로 몸에 걸쳐진 무게를 견디고 있었다.
      
  "어째서?"
      
  칼릴과 왕은 둘 다 나연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살고 싶다고 화내고 따지고 소리치고 울부짖다가 애원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는 나연의 것만은 아니었다. 목소리들은 한결같았다.
      
  "그녀가 신부니까요, 왕이여."
      
  햇빛아래 일곱가지 빛을 내는 물고기의 비늘을 엮은 술을 늘어뜨리고, 공작새의 깃털을 엮어 이은 비단을 걸음마다 끌며 나연은 왕에게 인도되었다. 그 뒤를, 칼릴을 선두로 세운 사람들이 따랐다. 관목의 키가 점점 낮아지고 공기가 답답해지는 지점에 이르지 시종은 칼릴을 세웠다. 사람들은 모두 그 자리에 섰다.
      
  왕과 나연은 늪으로 걸어들어갔다. 진흙탕을 걷듯 느리게 발을 떼던 그들은 얼마 들어가지 않아 걸음을 멈추었다. 왕과 나연의 키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풍성하게 공기를 머금은 나연의 비단이 둥그렇게 부풀다가 왕의 머리가 묻혀들었을 때 줄어들기 시작했다. 칼릴이 신부의 키가 왕보다 크든 작든 항상 신부는 왕보다 늦게 잠겨든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을 때, 나연의 관을 따라 비단이 묻혔다. 태양이 졌다.
      
  사흘 후, 왕은 긴 결혼식을 마치고 태양과 함께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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