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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달 나하의 거울

2003.12.26 19:2712.26

  쑥을 뿌리 채 뽑아 피운 모깃불 연기가 맵다. 자욱한 연기가 바람에 실려 검은 하늘로 치솟지만, 그래도 하늘은 넓어 연기를 품에 안고도 별이 반짝일 구석자리가 남아있다. 대청에 앉은 노인은 짧은 소매 밑으로 드러난 팔이 밤바람에 으슬으슬하기도 하련만, 한 쪽 무릎에는 금(琴)을, 다른 쪽 무릎에는 자고 있는 아이의 머리를 올려놓고 둘을 번갈아 쳐다보는데 여념이 없다. 노인은 한 손을 들어 무심히 현을 어루만지다가 아이가 움찔하자 금을 무릎에서 내려놓는다. 무슨 꿈을 꾸는지 아이의 눈꺼풀은 파르르 떨리고 피맺힌 작은 손가락은 움찔거린다. 노인은 그만 뭉클해져 주름진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어린것이 고생도 심하지. 아이가 손이 아프다며 울먹거리면 버럭 노기를 드러내 억지로 금을 안겨준 노인이지만, 작은 손끝에 꽃몽우리처럼 맺힌 피를 보면 가슴이 턱턱 막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노인은 아이가 깰라 조심스럽게 아이의 손을 쥐어본다. 앞으로 이 작은 손은 갈라지고 터지기를 셀 수 없이 반복해야 할 것이고 노인은 몇 번이고 아이에게 화를 내야 할 것이다. 손끝이 단단하게 굳어 금을 만지기에 자유로워지기까지 노인도, 노인의 스승도 그리하였으니까.
  한숨 같은 흐느낌이 노인의 밝은 귀에 스며든다. 고개를 숙여 바라본 아이의 입술은 부모를 찾고 있다. 노인이 아이를 데려온 것은 아이 어미의 장례식 날이었다. 생전에 아이 어미에 대해 생각하기 꺼려했던 노인은 그날 처음으로 아이 어미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기억 속의 흐려진 얼굴은 제법 희고 고왔다. 아이 어미가 죽은 것은 불 때문이라고 했다. 다행히 아이 아비는 일하러, 아이는 친구와 놀러 나가 있어서 무사했지만 아이 어미는 집과 함께 형체도 찾을 수 없을만치 스러져버렸다. 아마도 그녀의 이름 뒤에 놓여있던 관에는 뼛조각 몇 개밖에 들어있지 않았을 것이다.

  "요망한 년, 도리어 잘 된 일이지."

  노인의 입술이 바르르 떨린다.

  아이 아비는 노인의 네 번째 제자였다. 그의 맑디맑은 재능은 노인이 '채해'라고 부르며 귀여워할 정도로 출중한 것이어서 나름대로 뛰어나다고 자부했던, 다른 세 명의 제자들이 둔해 보일 지경이었다. 노인은 아이 아비 이후로 더 이상 제자를 받지 않고 그에게만 매달렸다. 돈을 털어 이름난 명산과 계곡에 데리고 다녔고 명인의 연주가 있다하면 자신은 못 가도 아이 아비를 대신 보냈다. 현에 손가락 얹는 방법 하나 소홀히 가르치지 않았고 아침저녁으로 금을 다룰 때의 마음가짐을 단단히 일렀다. 결국 다른 제자들은 노인에게 진력을 내고 떠나버렸지만 노인은 아침저녁이 다른 아이 아비의 성취를 보며 마냥 기뻐할 따름이었다.
노인은 아직도 눈을 감으면 아이 아비의 금음(琴音)을 또렷이 떠올릴 수 있다. 그 소리는 강처럼 도도하고 장중해서 어느새 노인을 뛰어넘고 있었다. '그래, 너만은 진음(眞音)을 얻으리라' 노인은 아이 아비 몰래 뜨겁게 뺨을 적시었던 것이다.
  그러던 아이 아비는 아이 어미를 만나자 금을 팽개치고 세상에 나갔다. 사람들과 부대끼고, 돈을 벌고. 아이 아비의 맑디맑은 재능으로는 그리 살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는 깨어진 거울을 버리듯 쉽게 금을 포기했다. 이후로 노인은 다른 제자를 키울 생각도 못하고 십여 년을 흘려보냈다.

  아이 아비의 집에서 난 불은 멀리 살던 노인의 귀에 내리꽂힐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노인은 소문으로 아이 아비의 이름을 듣고 기가 막혀 입만 벌리고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추스르고 아이 아비를 찾아갔다. 아내를 잃고, 집을 잃었으면 마음이 바뀌었을 만도 하련만 오랜만에 본 아이 아비는 금을 버리겠다고 선언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당돌한 눈을 하고 있었다.

  '이래도 금을 버린 것이 후회되지 않는단 말이냐?'

  라는 힐문에,

  '금을 잡았던 때보다 지금이 낫습니다. 금을 잡았을 때는 혹여 틀릴까, 듣는 이의 심기가 어떠할까싶어 금을 타기가 두려웠고 금의 소리가 마음을 할퀴었지만, 금을 놓은 지금은 금이 편하고 금 소리가 아름답습니다.'

  라 받아칠 정도였다. 그때 노인의 눈에 구석자리에 누워서 자던 아이가 들어왔다. 노인은 생활고를 구실 삼아 아이를 빼앗듯 안고 나왔다. 아이 아비는 다시 살 곳을 마련할 때까지 만이라고 정색을 했지만 노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더라면 노인의 대에서, 노인의 음악의 계보는 끊겼을 것이다.

  누구에게 말한 적은 없으나 노인은 울서(蔚西) 사람 이현(李現)의 전인이었다. 이현은, 음은 잊혀진, '백색의 눈이 땅을 씻기고, 녹색의 비에 초목이 물든다'는 구절로 유명한 계절가의 작자로 510년에 태어났다. 그는 당대의 문인으로도 유명했으나 스스로는 악사를 자처했으며 임금의 총애를 받아 왕실행사에는 그의 연주가 빠지는 적이 없었다고 한다.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는 데 인색하지 않은 그였지만, 그의 연주를 듣기 위해서는 쌀 백 가마니라도 아깝지 않았다고 하니 사실이라면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다만, 그의 이후로 어지간히 금을 탄다하면 개나 소나 이현의 전인을 자처해, 그의 명성이 흐려진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노인에게 금을 가르친 것은 윤명원(尹明原)이라는 사람으로, 그의 집안은 고조부 윤훤(尹萱)때부터 대대로 금을 연주했다. 윤명원은 자식이 없어 대가 끊길까 걱정하던 차에 노인의 재능을 알아보고 자기 밑에서 금을 배우게 한 것이다. 윤명원의 고조부, 윤훤의 스승은 기람(基覽)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이 생소한 이름의 야인은 궁중악사였던 유상(柳想)이 늘그막에 거둔 유일한 제자였다. 유상은, 역시 궁중악사였으며 최초로 자신의 악곡집을 남겨서 유명한 단립(但立)과 함께 당대의 재인, 송하(宋河)의 문하였는데 송하는 금이면 금, 적(笛)이면 적, 고(鼓)면 고, 다루지 못하는 악기가 없었다고 한다. 송하는 음악을 사랑하는 어느 사대부의 집안에 얹혀살았던 금영(金英)의 여섯째 제자였다. 금영을 아꼈던 사대부가 요경록(要經錄)의 관희상(罐熙嘗)이란 이야기도 있고 후세 사람이 쓴 관희상전(傳)에는 그것이 참인 양 써있지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바로 이 금영의 외가가 '울서 이'씨 가문으로 금영은 이현의 후예가 되는 것이다.

  노인은 차근차근 머리 속을 더듬어 거미가 줄을 타고 오르듯 계보를 타고 오른다. 노인의 계보는 유명하기 짝이 없는 이현에 이르러서도 멈추지 않는다.

  이현은 아버지, 이경(李境)의 친구였던 당익(唐翊)에게 금을 배웠는데, 기록은 평인이었던 당익이 당시 관직에 있었던 이경에게도 거리낌없이 술주정을 할 정도로 언동과 행실이 무례했다고 전한다. 이를 보면 당익도 전성기의 이현 못지 않게 금을 다뤘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이경이 신분이 다르고 고상하지 못한 당익에게 아들을 맡길 턱이 없지 않은가. 당익에게 금을 가르친 것은 당익의 어머니, 두연(豆蓮)이었는데 그녀는 진덕(陣悳) 사람 채해(採海)의 아내, 나하(那荷)의 딸이었다.    

  채해에까지 이르러야 노인의 계보는 더 이상 오르지 못하고 막힌다. 그러니 정확히 말해 노인은 이현의 전인이 아니라 채해의 전인이라 해야 할 것이다.

  채해는 이현과 다른 의미로 유명하다. 기록을 확실하게 남기고 부요한 생을 살았던 이현과 달리 제대로 남긴 기록하나 없으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그의 삶도 그리 행복한 것이 못되기 때문이다. 이현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채해는 전설이고, 이현이 음악의 큰 열매였다면 채해는 음악의 씨앗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만큼 채해가 음악을 하는 사람들에게 의미하는 바는 오히려 이현보다 크다.

  진덕 사람 채해는 상제가 세상에 천상음을 전하라고 내린 것처럼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의 밝은 귀는 십리밖에 겹뭉쳐 흐르는 풀벌레 소리와 풀잎소리, 바람소리의 미세한 차이를 구분해 냈고, 그의 날랜 손은 그 소리를 금으로 연주해 냈으며, 목소리는 청아하여 한번 입을 열면 온 마을의 새들이 날아올라 하늘에서 춤을 출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고 한다. 나라 안으로 그의 명성이 닿지 않은 곳이 없고 사립문 밖으로는 그의 연주를 듣기 위해 한 겨울에도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집안에서 흘러나오는 금음과 노랫소리에 기뻐하며 채해가 자신의 마을에 산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비록 작은 초가집에서 살았고 가족은 홀어머니와, 보기 드문 옥거울을 가지고 시집온 조용한 아내가 전부였지만 그의 집은 언제가 활기가 넘쳤고 채해는 부러울 것이 없었다.

  어느 날, 지방의 유명한 귀족이 그의 연주를 듣기 위해 진덕 땅을 찾았다. 혹자는 이 귀족이 허식차리기로 소문난 경임왕(經任王)이라고 하지만 경임왕이 태어난 것은 260년경이고 노인의 계보로 따져볼 때 채해는 430에서 440년경의 사람이니 시대가 어긋난다. 제법 풍류를 안다고 자부하던 이름 모를 귀족은 채해의 초라한 집안에 앉아 음악을 청했다. 채해는 성심성의껏 연주하였다. 과연 봄 햇살 떨어지듯 맑고 밝다가 바다가 출렁이듯 깊고 넓게 퍼지는 금음에 새들이 날아오르고 사람들이 일손을 멈췄다. 귀족은 내심 감동하였지만 금을 거두고 앉은 채해가 당연하다는 듯 빙그레 웃자 자존심이 상해 마음에 없는 소리를 꾸며내었다.

  "공의 솜씨는 실로 뛰어나오. 그러나…."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험험, 진정한 음은 단순히 귀에 들리는데 있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곳에 있소. 종이의 흰색보다도 먹의 검은색이 실로 풍요해 만가지 색을 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인 것이오. 그대의 연주에는 들리지 않음, 침묵이 부족하오."

  귀족의 말을 들은 채해는, 마침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있던 터라 귀족에게 엎드려 절을 했다.

  "어찌하면 가음(假音)에 진음(眞音)을 더할 수 있겠습니까."

  "일단은…, 그렇지. 침묵을 들어보시오."

  채해의 태도에 귀족은 도리어 부끄러워하며 자리를 떠났다.

  귀족의 말이 꾸며낸 것인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해는 그날부터 침묵을 들으려 무던히 애썼다. 채해는 아내와 비슷할 정도로 말수가 줄었으며 그의 집밖으로 흘러나오는 금소리와 노래소리가 줄었다. 그를 찾는 사람도 점차 줄었다. 사람들은 쓸데없는 짓을 한다며 혀를 찼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채해는 거동을 조심할 뿐이었다. 그러나 잊을 만 해지면, 채해의 금음을 타고 새들이 날아올랐다. 잊을 만 해지면 채해의 노래소리에 사람들이 일손을 멈췄다. 손닿는 자리에 기대어있는 금은 더욱 유혹적이 되었고 입을 벌리면 튀어나오는 목소리는 더욱 달아져, 채해는, 몇 번을 다짐하여도 어느새 금을 타고 노래하는 자신을 깨닫는 것이다. 침묵을 듣기에 그는 너무나 약한 사람이었다.

  채해의 생활은 날로 달로 어려워졌다. 부엌 아궁이에는 거미가 줄을 쳤으며 독에는 먼지만 그득했다. 그의 금음과 노래를 잊지 못한 몇몇이 보다못해 보리 몇 줌과 옷가지를 보내 도와주었지만 예전만 같지 못했다. 사람들은 살림이 그 지경이 되어도 방안에 틀어박혀 입도 벙긋 않는 채해를 미쳤다 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채해 스스로도 침묵이 과연 존재하는지, 바보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워졌다. 그러나 그는 포기할 수 없었다. 침묵만이 정체된 그의 음악을 바꾸어줄 실마리였으니까.
  자식의 모습이 답답한 채해의 노모는 가슴을 치며 예전처럼 금을 타고 노래하라 했지만 채해는 죄송스럽게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결국 울화와 고생이 겹친 노모는 몸져누워 다 죽게 되었다. 집을 벗어난 적이 없던 채해는 그제야 밖으로 나와 사람을 찾으며 도움을 구했지만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세상의 인심을 절절이 느낀 그는 집으로 돌아와 노모의 손을 붙들고 눈물만 흘렸다.

  "얘야, 고집부리지 말고 다시 금을 잡아라. 너는 금을 놓고 살 사람이 못된다."

  노모는 와병중에도 채해를 걱정하였다.

  "하지만 어머니, 저는 아직 침묵을 듣지 못했습니다. 침묵을 듣지 않고는 금 소리에 침묵을 녹여낼 수 없지 않습니까."

  "금이 아니면 누가 너를 돌아볼 것이냐. 금을 타고 노래하던 시절에는 많은 사람이 너의 음악에 감탄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냐. 궁핍해진 살림을 보고도 깨닫는 바가 없단 말이냐?"

  노모는 역정을 내었다. 채해는 부르르 떨리는 노모의 마른손을 꼭 쥐었다.

  "그 시절의 제 음은 거짓음이었습니다. 얄팍하기 짝이 없는 소리로 사람의 귀를 혹했던 것을 생각하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입니다.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참음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하면 이제보다 더 많은 새가 날아오르고 이제보다 더 많은 사람이 돌아봐 주겠지요."

  "말은 잘하는구나."

  노모는 채해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깨닫고 슬피 울었다. 노모는 채해의 손을 놓고 저리 가라 손을 저은 뒤 이불을 뒤척이며 바로 눕고는 자는 듯 떠났다. 채해는 구석자리로 물러나 웅크리고 자다가 다음날이 되어서야 노모의 죽음을 알고 망연하였다. 이리도 허무하게 가실 줄이야. 채해는 조용히 누운 노모를 바라보다가 무언가가 부족한 것을 느끼고 노모의 머리카락을 쓸어보았다. 노모가 덮은 이불을 뒤척여보았다. 그러나 생전 그분의 연약한 손이 내던 소리와 같지 않았다. 이것이로구나. 채해의 마음속에 희미한 무엇이 스치고 지나갔다.
  채해는, 드디어 침묵의 한 자락을 붙든 것이다.

  만일 채해가 소리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노모의 죽음에서 깨우침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채해가 화가였다면 노모의 껍데기만 남은 싸늘한 시신을 화폭에 그려넣어 빈자리를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채해가 문인이었다면 노모의 생을 돌아보고 '그런 이가 있었는데 모월, 모일에 북망으로 떠났다' 라는 구절로 빈자리를 채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채해는 화가가 아니었고 문인도 아니었다. 그는 오로지 악사였고 그의 귀는 노모의 기침소리와 숨소리가 들리지 않음을, 이불 뒤척이는 소리가 나지 않음을, 머리카락 쓰다듬는 소리가 나지 않음을 확실하게 인지시켜 주었던 것이다. 노모는 죽었고 그 빈자리는 침묵과 통했다.
채해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노모의 시신에 세 번 절한 뒤, 금을 애써 벽에 기대놓고 아내의 옥거울만을 품에 넣은 채 진덕을 떠났다. 침묵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집에 앉아 기다릴 수는 없었다. 험한 세상을 돌다보면 더 큰 침묵과 만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채해는 시끄러운 사람을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그가 간 곳이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인적 없는 바닷가나 깊은 산 속이었을 것이다. 그의 걸음은 십여 년이나 이어져 나라 안에 그의 발이 닿지 않은 곳이 거의 없게 되었다. 채해라고 확신할 수 있는 바는 아니지만 저 남쪽, 여비(餘比)에서 동굴에 은거한 어느 악사의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십 년 동안 세상을 구른 채해의 모습은 그의 아내라 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버렸다. 산에서는 뱀과 벌레를 잡아먹고 마을에 나와서는 밥을 빌러 구걸을 하고 텁수룩한 수염과 산발한 머리, 더러운 입성과 얼굴을 한 그를, 누가 감히 아름답던 채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그 자신도 품속에 있는 아내의 옥거울을 만져 확인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누구인지 잊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고생을 했어도 그는 침묵을 만날 수 없었다. 어딜 가든 그의 밝은 귀에 붙은 풀벌레 소리와 풀잎 사각대는 소리, 바람소리, 물소리가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채해는 언제고 돌아가 침묵을 녹여 금을 연주하는 것을 꿈꾸며 비참한 생활을 이겨냈다.

  어느 날, 강가로 간 채해는 화려한 일행이 커다란 바위 위에서 술을 기울이며 가무를 즐기는 것을 발견했다. 금 소리가 제법 유려하고 흥이 도도한 것에 마음이 끌린 그는 조심스럽게 일행에게 다가갔다. 자신의 솜씨에 비하면 과히 훌륭하다 할 수 없는 소리였지만 오랜만에 듣는 금음은 피로를 씻어주는 듯 했다. 채해는 일행의 가운데 앉은 연주자를 쳐다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주가 멈추자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사람이 연주자에게 술을 권하며 '좋다, 아름답다' 칭찬을 연발하는데 목소리와 얼굴이 낯익었다. 채해는 안력을 돋우어 그 사람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 사람도 채해의 시선을 눈치채고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왠 걸인이 무엄하게 꼿꼿이 서있는 것을 본 그 사람의 얼굴이 불쾌함으로 일그러졌다. 마침내 채해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소리내어 외쳤다.

  "어르신! 접니다, 진덕 사람 채해입니다!"

  "채해?"

  그 사람은 채해에게 침묵을 들으라 말했던 귀족이었다. 귀족의 얼굴에 의심이 가득하자 채해는 자신의 행색을 돌아보며 쓰게 웃었다.

  "예전에 제 누추한 집을 찾으셔서 침묵이 부족하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자네였구료."

  귀족은 비로소 얼굴을 펴고 아는 척을 했다. 사람들은 둘의 대화를 듣고 저것이 그 유명한 채해인가 싶어 눈을 크게 뜨고 쳐다봤으나 꾀죄죄한 차림과 생김이 실망스러웠다. 특히 금 연주자는 귀족에게 들은 칭찬에 우쭐해 '채해를 부족하다 평한 이가 내 연주를 극찬하였다. 그러니 내가 그보다 나으리라'라고 대놓고 떠들었다. 그것을 들은 채해는 기분이 과히 좋지 못했다.

  "한가지 여쭙겠습니다. 아까, 저 사람의 연주를 듣고 칭찬을 하셨는데 그의 연주는 저의 연주보다 나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의 연주에 과연 침묵이 녹아있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말일세. 침묵이란 것이 있기는 하던가? 있더라도 사람이 되어서 그것을 음속에 녹이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하도 옛날에 말했던 것이라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가물가물허이."

  자신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돌아온 어물쩡한 대답을 듣고 채해는 귀족의 안목이 그리 높지 못하며 자신에게 말했던 것이 모두 꾸며낸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흘려보낸 십 년과 참고 참은 노래와 연주는 어찌 되는 것인가. 분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청자의 안목도 알아보지 못하고 곧이곧대로 믿은 그가 어리석은 것이 아닌가. 침묵을 들었다 여겼던 것은 단순한 착각이었던 것인가. 허망하게 돌아가신 노모와 남겨둔 아내에게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금을… 만져보아도 되겠습니까?"

  채해는 금연주자에게 물었다. 연주자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귀족의 한마디에 군소리 없이 금을 내주었다. 채해는 바위에 올라앉아 금을 무릎 위에 얹었다. 숨을 고르고 현에 손을 얹었다. 사람들은 유명한 채해의 연주를 듣게 된다는 생각에 떠들기를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채해는 첫음을 뚱긴 순간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손을 거두고 금을 쳐다보았으나 금은 멀쩡했다. 손을 놀려 다른 줄을 건드려 보았다. 역시 소리는 공기 중으로 힘없이 사라져버렸다. 사람들은 그가 두어 번 줄만 튕기자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채해는 차마 금을 더 이상 만지지 못하고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오?"

  "아닙니다."

  "허, 사람하고는. 뭐가 아니라는 거요?"  

  귀족이 물었으나 채해는 고개만 젓고는 발길을 돌렸다. 사람들은 '거 싱거운 사람일세'하고 돌아서 금새 잊고 여흥을 즐겼다.
  채해는 강을 따라 걸었다. 한참을 걸어 사람들의 모습과 떠드는 소리가 사라지자 한숨을 지으며 품을 더듬어 거울을 꺼냈다. 거울에 비친 모습, 거울을 든 손은 예전의 그의 것이 아니었다. 특히 잔상처가 가득하고 손톱이 길게 자란 더러운 손은 악사의 손이 아니었다. 그저 걸인의 손일 따름이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찾아 헤맨 십 년은 참으로 긴 세월이었다.

  더 이상 미련이 없는 채해는 진덕 땅으로 돌아가리라 결심했다. 진덕에 돌아간다 하여 어찌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그는 바람을 벗삼아 열심히 걸었다. 막연히 떠돌 때와는 달리 서두른 보람이 있어 산을 하나 사이에 두고 고향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때 그는 산을 넘으면서 큰 사건을 겪게 된다. 여기에는 세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산중에서 호랑이를 만났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시기를 잘못 타서 산을 내려가는 도중 폭풍을 만났다는 것, 세 번째는 앞의 두 가지를 다 겪었지만 호랑이를 만난 것은 진덕이 아니라 진덕 동쪽의 덕영(德零) 근처이고 폭풍을 만난 것이 진덕이라는 설이다. 셋 다 결과적으로는 같은 내용이지만 전후관계를 보아 가장 그럴 듯 한 것은 세 번째이다.  

  진덕으로부터 삼십리가 떨어진 덕영. 채해는 마음놓고 산을 올랐다. 그 동안 사람으로부터 숨기위해 다녔던 험준한 산들에 단련된 그에게 이름도 없는 야산은 별 것도 아니었다. 덕분에 유람이라도 나온 기분이 되어 찬찬히 주위를 돌아보며 걸음을 옮겼다. 때는 여름이라 좋은 철을 맞은 벌레와 새들이 귀가 따갑게 울어댔다. 문득 사람하나 안 보이는 산 속도 이렇게 요란한데 무작정 침묵을 찾으려 한 자신이 우습게 생각되었다.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산을 반쯤 올랐을 때였다. 갑자기 새소리가 뚝 그쳤다. 벌레도 울기를 멈췄다. 바람마저 숨을 죽인 것 같았다.

  '아뿔싸, 산신님인가?'  

  코를 찌르는 노린내가 풍겨왔다. 오랜 산 경험으로 많은 산짐승들을 마주쳤지만 이런 경우 생각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였다. 호랑이. 분명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덕영에서 호랑이라니. 채해는 다리가 풀려 풀숲사이에 털썩 주저앉았다. 식은땀이 흐르고 오싹 소름이 끼쳤다. 호랑이의 기운에 질려 시간이 멈췄다. 얼이 빠져 아무 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끝없이 계속 될 것 같은 침묵이 깨진 것은 쾌애액 하는 짐승의 비명과 함께였다. 무언가가 서걱대는 풀을 밟고 나타났다. 부리부리한 눈, 커다란 발. 파들파들 떨며 피를 뚝뚝 흘리는 작은 사슴을 입에 문 호랑이였다. 채해는 저도 모르게 호랑이와 눈을 마주치고 그 시퍼런 눈빛에 겁을 먹었다. 머리 속은 텅 비어서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호랑이는 잠시 채해를 쳐다보더니 웃는 듯 콧잔등을 들어올리고 풀숲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천천히 사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리가 돌아왔다. 정신이 돌아왔다. 채해는 일어설 생각도 못하고 호랑이가 그를 쳐다보던 그 자리만 쳐다보았다. 붉은 피가 점점이 풀을 물들이고 있었다.
  채해는 자신이 찾던 침묵의 실체를 조금 엿보았다. 노모의 죽음으로 침묵의 한 자락을 붙잡았을 때 왜 깨닫지 못했을까. 그것은 사람이 넘보아서는 안될 것이었다.
  산을 내려오자 채해는 침묵에 쫓기듯 사람 속에 섞였다. 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는 아무나 붙들고 끊임없이 말했다. 누군가가 말 걸어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덕영에 호랑이가 산다고 이야기했으나 아무도 믿지 않았다. 한 사람이 미친 사람을 보는 눈으로 그에게 붙들린 소매를 낚아채고 가버리면, 그토록 듣기 원했던 침묵은 그의 어깨를 타고 앉아 까르륵 요요한 웃음을 터뜨렸다. 채해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다른 사람에게 매달렸다. 차라리 내게 화를 내어라. 때려도 좋다. 제발 내게 말을 해다오. 그는 웃음소리를 누그러뜨릴 만큼 커다란 소리를 듣기 원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상대해 주지 않았다.
  채해는 시끄럽고 번화한 곳을 골라 길을 걸었다. 사람이 없는 길을 가야할 때면 손으로는 풀잎을 훑고 쉰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풀어헤친 머리와 멍해진 눈동자, 쉴새 없이 중얼거리는 입. 누가 보아도 그는 미쳤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진덕에 어렵사리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하늘이 흐리군."

  하늘이 이상하게 검은 것을 발견한 채해는 눈을 비볐다. 분명 낮이고 다른 사람들은 칠일장이 열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하늘 끝에서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여보시오. 비가 올 것 같소."

  "무슨 소리요? 하늘이 이렇게 맑은데."

  분명 채해의 눈에 비친 하늘은 불길하게 요동치고 있는데 다른 이의 눈에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모양이었다.

  "여보시오, 하늘 좀 보시오! 저렇게 검지 않소!"

  채해는 모두 들으라 크게 소리쳤지만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지나가 버렸다.

  "하늘이…."

  채해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순식간에 엄청난 바람이 그의 몸을 덮쳤다. 날카로운 빗방울이 그의 뺨을 때렸다. 하늘이 쪼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퍼런 벼락이 바로 앞에 떨어졌다. 그는 무력하게 몸을 웅크렸다. 그의 눈앞은 아비규환이었다. 사람들은 난데없는 상황에 비명을 지르며 몸을 숨겼다. 노점상의 물건들은 하늘로 치솟았다. 채해는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침묵이 깔깔대며 웃어젖혔다. 웃음소리는 더욱 커지고 커져서 마침내 그의 머리 속을 가득채웠다. 아니, 그의 머리 속을 가득 채운 것은 빗소리와 바람소리, 천둥과 사람들의 비명이었다. 마침내 그의 머리 속에 빈자리가 사라지자 소리는 서로 엉겨붙더니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본 것은 마른땅과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새파란 하늘이었다. 대기는 고요했고 모든 것이 가지런했다. 채해는 비척비척 일어났다. 사람들의 시선이 이상했다. 그의 몸은 물에 푹 젖어있었다.

  기이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그의 체험이 복인지 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선인들의 해석은 명쾌하다. 십 년을 고생한 채해를 불쌍히 여긴 하늘이 그에게 호랑이와 비바람을 보내 침묵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낮고 울창하지 못한 덕영의 산에서 호랑이를 만나고 기후가 온화하기로 유명한 진덕 땅에서 때아닌 폭풍을 만나겠는가. 더구나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고 그 혼자 체험한 것도 침묵을 다른 이에게 알리기 꺼린 하늘의 뜻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채해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침묵에 직면하게 된다.

  채해는 비틀거리며 그리운 집으로 발을 옮겼다. 초가집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마당이 깨끗하고 싸리울이 멀쩡한 것이 그의 아내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사람이 살고 있음을 가르쳐 주었다. 물에 젖은 발을 벗고 집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축축한 품에서 옥거울이 떨어진 것은 하늘의 조화라고 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순간 품이 허전해 진 것을 느낀 그는 거울을 잡으려 했지만 이미 늦어 거울은 댓돌에 부딪혀 깨진 뒤였다. 채해는 몹시 놀랐다.

  "거울 깨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당혹스러웠다. 입은 말하였으나 그의 귀에는 자신의 중얼거림도 공허하게 비어있었다. 채해는 두 손으로 귀를 움키었다. 모든 것이 먹먹하고 답답했다.

  "사람의 몸으로 들어서는 아니 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인가."

  먹의 검은색이 실로 풍요해 만가지 색을 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라. 검은색이 풍요하여 만가지 색을 품은 것이 아니라 만가지 색을 품었기에 풍요하여 검은색이 된 것이었던가. 머리 속으로 폭우가 몰아쳤다. 구름이 울고 비가 내리고 번개가 치고 바람이 성내고 땅이 진동하였다. 아이가 울고 산짐승은 도망치고 둑은 무너지고 나무가 부러졌다. 그리하여 더없이 맑고 밝고 고요하였다. 산에서 노린내를 맡은 이후 그렇게 두려워하여 피하려 했지만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천둥소리에 귀가 먼 것이다.
  채해는 거울을 줍지 않았다. 댓돌 위에 헤어진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지도 않았다. 그는 물을 절벅거리며 방안으로 들어갔다. 아쉽게 두고 갔던 금이 먼지도 타지 않고 벽에 얌전히 기대있었다. 노모가 덮었던 오래된 이불은 방구석에 잘 개어져 있었다. 변한 것은 그 뿐이었다. 목이 메었으나 울음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는 시원한 미소를 얼굴 가득 띄웠다.  
  채해의 아내가 집에 돌아와 물 발자국과 깨어진 거울을 보고 놀라 방문을 열었을 때, 채해는 이미 목을 매어 죽은 뒤였다. 나하는 남편의 시신을 끌어내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문고리를 잡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녀는 얼굴도 알아보기 힘든 그의 얼굴을 보았다. 손톱이 길게 자란 그의 손을 보았다. 더럽고 물에 젖은 옷을 보았다. 고개를 돌려 댓돌 위에 떨어진 거울을 보았다. 그녀는 조용히 안으로 들어가 채해의 시체에 마주 앉아 금을 무릎에 올렸다. 현에 손가락을 대었다. 입을 벌렸다.
  그녀의 애도가(哀悼歌)에 온 산천의 새가 하늘로 날아오르고 온 천하의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고 눈물 흘렸다한다.

  노인은 주름진 입으로 미소를 짓는다. 전하기로 나하는 거울에 비친 양 창백하고 흐릿했지만 그녀의 밝은 귀는 십리밖에 겹뭉쳐 흐르는 풀벌레 소리와 풀잎소리, 바람소리의 미세한 차이를 구분해 냈고, 그녀의 날랜 손은 그 소리를 금으로 연주해 냈으며, 목소리는 청아하여 한번 입을 열면 온 천지의 새들이 날아올라 하늘에서 춤을 출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고 한다. 음 속에 침묵을 녹여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후, 그녀는 두규와 혼인하여 두연을 낳았고 두연은 당익을 낳았으며 당익은 이현을 길렀고 이현의 후예는 금영을, 금영은 송하를, 송하는 유상을, 유상은 기람을, 기람은 윤현을 가르쳤고, 윤현의 고손자 윤명원은 노인을 가르쳤다. 이제 노인은 아이를 가르칠 것이다. 그리하여 노인의 음 속에 면면히 흐르는 윤명원의, 윤훤의, 기람의, 유상의, 송하의, 금영의, 이현의, 당익의, 두연의, 그리고 채해와 나하의 음은 끊기지 않고 흘러갈 것이다. 쌓이고 쌓여 더욱 큰 줄기를 이룰 것이다.
  구전으로 나하는 채해의 아내였다 하지만, 이 다시없을 재녀의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두규와의 혼인뿐이고 당시 그녀의 나이는 갓 열 일곱이었다. 노인은 생각한다. 아마도 그녀는 거울 속에서 나온 사람이었으리라. 채해의 옥거울 속에 흐리고 얌전하게 깃들어 그와 함께 세상을 두루 돌고, 마침내 채해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찾아낸 티끌하나 없이 맑은 침묵에 또렷이 비추이자 거울을 깨고 나왔으리라. 그녀는 채해의 그림자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형상이었으리라. 노인은 쥐고 있던 아이의 손을 본다. 아이의 손은 어릴 적 아이 아비의 손과 거울에 비춘 것처럼 닮아있다.

  '금이 좋아요. 다른 거 다 안 해도 좋으니까 금만 타면서 살래요.'

  어린 얼굴로 해맑게 웃던 아이 아비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오냐오냐 기쁜 마음으로 답하던 자신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버려야 하는 법. 노인의 입술이 달싹인다. 아이 아비는 자신의 재능 중 가장 맑은 부분을 쪼개 던지고 세상의 혼탁 속으로 가버렸지만, 이제 그 조각은 노인의 손에 있다. 노인은 이 조각을 더욱 공들여 닦으리라 다짐한다. 더럽고 뿌연 부분은 없애고 맑고 맑은 부분만 남기리라 다짐한다. 그리하면 언젠가 아이가 자기 속의 나하를 비춰내리라 믿는다.    
  사람들은 말한다. 채해와 나하는 둘 다 실존의 인물이 아니었으며 음을 익히는 자들의 이상- 진음과 가음에 대한 비유에 불과하다고. 아무려면 어떠랴. 그도 아이도 나하의 후예, 나하의 거울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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