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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주지 않는 것은 쾌락도 주지 않는다.
-몽테뉴-

선생님: 오서방. 너는 어째 역사 과목을 그렇게 못하냐?
오서방: 제가 뭘 어쨌다고 그래요.
선생님: 어디 그럼 1945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봐.
오서방: 우리나라가 일본한테서 독립만세 했잖아요. 광복절이죠.
선생님: 우와. 지지리도 공부 안 하는 네가 웬일이니?
        그럼 1950년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니?
오서방: 네, 광복절 5주년 기념식이 있었습니다.
-KBS 한바탕 웃음으로: 봉숭아 학당-

가면을 벗으시오! 가면을 벗으시오!
-스티븐 킹, 샤이닝-



공포소설을 쓰는 남자



     공포소설가 김수분 씨의 집에 형사 두 명이 찾아왔다.

     김수분은 두 형사를 집 안으로 들이고, 구석에 있는 나무 탁자로 안내했다. 탁자에는 의자는 없고 벽에 등을 대고 있는 긴 소파만 있었다. 형사들이 그 소파에 나란히 앉아있는 동안 김수분은 커피를 대접한다며 창가 쪽에 있는 커피 포트에 물을 끓였다.

     형사들은 신기한 듯 집 안을 두리번거렸다. 대문이 열리고 온갖 나무와 꽃과 잔디가 깔려 있는 화려한 정원을 지나오며 기대했던 집의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다. 잔디 사이로 징검다리 마냥 일정한 간격으로 박혀 있는 보도 블록을 따라 한참을 걸어왔을 때 별다른 특징없는 아담한 단층집이 서있는 것을 보고 의외라고 생각했었지만, 실제로 집 안에 들어와보니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간소한 모습이었다. 집 안에는 별다른 방이 없이 통째로 확 트여 있었다. 원룸 스타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단층집 전체가 대상이다보니 상당히 넓었다. 마치 지하 주차장이나 비행기 격납고 안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밖에서는 드넓은 정원에 비해 아담하다고 생각했던 집에 들어와보니 비행기 격납고를 연상시킬 만큼 거대하게 보이는데는 빈약한 실내 장식도 한 몫 했다. 시멘트 바닥에 콘크리트 벽이 장판이나 벽지도 없이 그대로 노출된 실내에는 별다른 가구가 없었다. 형사들이 앉아있는 구석탱이의 탁자와 창가에 있는 평범한 철제 사무용 책상이 전부였다. 그 외에는 가구라고 부를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소설가의 집에서 기대해 봄직한 책들로 가득찬 책장 같은 것도 없었다. 벽에도 시계나 달력 같은 장식물이 일절 없으니 썰렁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저 텅 빈 공간과 탁자와 책상이 전부였다. 그러고 보니 공포소설가가 물을 끓이고 있는 커피 포트가 신기했다. 별다르게 차려 놓고 사는 건 없어도 커피 포트는 소설가의 당연한 필수품이었나?

     집 안이 어두침침했다. 창문이 다섯 군데 있었지만, 블라인드를 쳐 놓았다. 천장에 달린 형광등 세 개가 빨간 빛을 내보내고 있는 것이 조명의 전부였다. 텅 빈 공간을 어두운 빨간 조명이 내리누르고 있으니 답답하고 우울한 분위기가 났다.

     “드시죠.” 공포소설가가 인스턴트 커피를 탄 종이컵을 형사들이 있는 탁자에 내려놓았다.

     넓은 실내가 텅텅 비어있는데도 사람의 말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작가님도 드시죠.” 정형사가 종이컵을 쥐며 말했다.

     “아, 저는 커피를 안 마십니다. 커피 말고도 물 같은 건 잘 안 마시는 체질이라서요.”

     커피도 안 좋아하는 사람이 커피 포트는 데리고 살아? 벽에 시계 하나 걸어놓지도 않으면서? 아, 사발면 물 끓일 때 꼭 필요한가 보지? 정형사는 종이컵에 든 커피를 홀짝이며 잡생각에 빠졌다. 그러고 보니 여긴 화장실도 없잖아? 싸고 싶을 땐 밖에 있는 저 화려한 정원에서 처리하나 보지? 천연 비료야? 햐, 이 사람 사는 걸 보니 참 자린고비인가 보구만.

     김수분이 책상에서 바퀴 달린 의자를 끌고 와서 탁자 앞에, 형사들 맞은 편에 앉았다.

     “저희가 불쑥 찾아와서 놀라셨겠습니다.” 정형사가 말했다.

     “아, 예. 조금 놀라긴 했습니다.” 두 손을 무릎에 대고 약간 긴장한 듯 허리를 곧게 펴고 앉은 소설가가 말했다. “심하게 죄를 지은 기억도 없고 해서...” 어색하게 웃는다.

     “사실은 저도 놀랐습니다. 밖에 외근 나왔다가 시간이 남아서 뭐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최형사가 갑자기 자기랑 함께 여길 오자고 그러지 뭐겠습니까?”

     “네, 제가 여길 오자고 했습니다.” 앞에 놓인 종이컵에는 손도 안 대고 가만 있던 최형사가 말했다. 그는 공포소설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까 전화로 말씀드렸다시피 일 때문에 온 게 아닙니다. 제가 팬으로서 사인을 받고 싶어서 이렇게 실례를 했습니다.”

     최형사가 옆에 두고 있던 서류봉투를 툭툭 쳤다. 속에 든 소설책이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걸 본 수분은 미소 지었다. 활짝은 아니고 그저 약간. 그러나 조금 전 보다는 좀 더 여유있게.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최형사와 김수분의 눈길이 오랫동안 서로 마주쳤다. 어색한 시선이 오고 갔다. 한참 동안의 침묵을 깨고자 공포소설가가 무언가 말을 하려는 순간 정형사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런데 상당히 검소하십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공포소설가시라고 최형사한테서 들어서 집 안이 상당히 으리으리할 줄 알았는데.”

     “값비싼 이태리제 가구가 소설을 써주는 것은 아니죠. 저한테는 이런 단순한 환경이 소설 쓰기에 딱 좋습니다. 혼자 사는 독신 남자가 다른 사람한테 잘 보일 필요도 없고, 집 안을 잘 꾸며 놓고 살면 오히려 정신만 산만해져서요.”

     커피를 다 마셔버린 정형사가 빈 종이컵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우리 최형사한테 듣기로는 돈도 엄청 많이 버신다던데 집을 새로 지으시는 건 어때요? 2층짜리 집으로 새로 건축해서 1층은 쉬는 공간으로, 2층은 소설 쓰는 공간으로 활용하면 좋으실 것 같은데.” 건축업을 하는 동생을 위해 정형사는 슬쩍 운을 띄워 보았다.

     “아니 뭐, 그럴 생각은 전혀 없어요. 지금 이대로가 소설 쓰는 데 제일 좋은 환경입니다. 이 집은 공포소설 쓰기에 최고의 환경을 갖추고 있거든요. 이유가 뭔지 궁금하세요?”

     “글쎄, 뭘까요?” 동생의 사업에 도움을 주려는 장남의 배려가 꺾여버린 정형사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이 집에는 귀신들이 살고 있습니다.”

     시무룩하던 정형사도, 무표정하게 공포소설가를 바라보던 최형사도 순간적으로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래도 김수분의 표정은 자못 진지했다.

     “네, 그렇습니다. 이 집에서는 귀신들이 나온다구요. 공포소설가에게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이 어딨겠습니까? 매일 같이 이 집으로 몰려드는 원혼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공포소설이 저절로 써질 수 밖에 없는 거죠.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수많은 작품을 발표할 수가 있느냐고, 비법이 뭐냐고 말들 하지만, 사실 간단한 겁니다. 누구든지 타인의 속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좋은 소설의 소재를 얻을 수 있어요. 타인의 내면에 귀 기울여라! 하물며 저같이 귀신의 속내를 관심있게 들여다 본 사람이 공포소설을 많이 쓸 수 있는 건 당연한 겁니다.”

     그는 말하다 말고 고개를 숙였다. 앞에 있는 탁자를 쳐다보았다. 탁자 가운데에는 커다랗게 눈동자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야광 그림인 듯 빨간 형광등 불빛 아래서 그 눈동자는 새하얗게 빛을 발했다. 그 눈동자에게서 무언의 메시지라도 전달받고 있는 사람처럼 한동안 조용히 눈동자를 바라보던 수분이 다시 고개를 들고 말했다.

     “아, 뭐...... 말이 그렇다는 거죠. 믿거나 말거나 입니다. 믿으라고 강요는 하지 않겠습니다. 아무튼 공포소설가인 제게는 이 귀신 나오는 집이 너무도 소중해서 새 집 같은 걸 지을 생각은 없습니다. 오늘 날 공포소설로써 저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일등 공신이니까요.”

     소설가는 또다시 고개를 숙이고 탁자 위의 눈동자를 보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정형사는 김수분이라는 이 소설가가 공포소설을 너무 많이 쓰다보니 정신이 헤까닥 돌아버린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돈 잘 버는 미친 놈이라니 부럽기는 했다. 독신이라니 여자들도 많겠지?

     “이런 데서 혼자 사시면 외로울 때도 많이 있으시겠어요?”

     “아, 뭐 별로요.” 탁자의 눈동자를 보던 시선을 거두고 소설가가 말했다. “알고 지내는 여동생들이 많아서요. 어제도 동생들 둘이 여기서, 아 지금 형사님들이 앉아 계시는 그 소파에서 자고 갔어요. 이 탁자를 소파에 붙여 놓으면 넉넉하게 잘 수 있죠. 걔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아주 자유분방하더라구요. 어찌나 자극적이던지, 회포 한 번 풀려다 온몸에 진이 다 빠졌어요.”

     김수분이 한숨을 내쉬며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정형사는 왠지 모르게 자기가 앉아있는 소파가 뜨거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역시 돈많은 놈이라 여자들이 막 달라붙는 구만.

     그런 정형사의 생각을 읽기나 한 듯 수분이 말했다. “그래도 그렇게 젊은 애들이 저같이 늙은 아저씨한테 오는 건 돈 때문이 아니에요. 섹시한 아가씨들한테 다가가서 제가 공포소설가라고 신분을 밝히면 거의 다들 관심을 보이더라구요. 아마도 걔들은 공포소설에서 연상되는 강렬하고 자극적인 에너지가 저의 섹스 능력에서도 분출될 거라고 생각하나 봐요. 뭐 한 번 잤던 애들이 계속 저와 만나는 걸 보면 제가 아직까진 걔네들의 기대를 만족시켜주나 봅니다.”

     김수분이 살짝 키득거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탁자의 눈동자로 얼굴을 돌렸다. 그러다 정형사가 팔꿈치로 최형사를 툭툭 치는 몸짓에 반응해 고개를 들었다.

     “이봐 최형사, 뭘 그리 잠자코 있어? 여기 와보자고 한 게 누군데. 소설가님, 아 글쎄 이 사람이 말이죠, 양아치들이나 때려잡던 손으로 어느 날 부턴가 김 작가님 책을 잡고 있더라구요. 책이라곤 승진시험 볼 때 문제집이나 뒤적거리던 양반이 말이죠. 물어보니까 자기가 최근에 아주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는 재미있는 소설가라나요. 아, 이 사람아, 뭐해. 뭐라고 말 좀 해봐. 다 늙어서 부끄럼 타나?”

     최형사는 아까부터 계속 공포소설가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소설가는 집에 귀신이 나온다느니 자신의 매력에 이끌려 미녀들이 들러붙는다느니 처음 만난 상대에게는 - 더욱이 그 상대가 형사인데도! - 어울리지 않는 쓸데없는 잡담을 잘도 늘어놓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말이 끊기면 세상만사가 귀찮은 듯 탁자 위의 눈동자 그림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소설가는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면 그만인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하긴 이렇게 썰렁한 공간 속에서 글만 쓰고 사는 사람이니 동굴 속에 틀어박혀 사는 자칭 도인들과 무엇이 다를까. 그들이 대화 상대를 배려하는 기술을 구사하길 바란다는 건 욕심일 것이다.

     어쨌든 최형사는 말을 시작했다.

     “얼마 전부터 김 작가님의 소설을 여러 권 읽고 팬이 됐습니다.”

     “민생치안을 돌보시느라 바쁘실텐데 제 소설을 읽어봐 주시고 이것 참 고맙습니다.” 공포소설가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공포소설이 그리 대중적인 읽을거리도 아닌데.”

     “별 말씀을요. 사실 옆에 있는 정형사와 저는 별로 바쁘지가 않아요. 명예퇴직을 한 달 앞두고 있는 몸이라서요.” 옆에 앉은 정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지작거리던 종이컵을 손으로 움켜쥐어 찌그러뜨렸다. “매일 경찰서에 출근하긴 해도 말년이라 별다른 임무 없이 빈둥거리고 있습니다. 점심 때 설렁탕 한 그릇 먹고 신문 보고 잡지 보고 장기 몇 판 두다 집으로 퇴근하는 거죠. 오늘도 기껏 내려진 임무란 게 본청에 급한 서류 전달하는 거라서 외근 나왔다가 이렇게 들른 겁니다.”

     “아마 우리가 이대로 영원히 없어져도 서에서는 전혀 눈치 못 챌거야. 구내 식당에서 숟가락 몇 개 없어진 거랑 같은 거지. 우리 신세가 참....”

     정형사와 최형사가 서로 마주 보고 씁쓸하게 웃었다. 최형사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몇 달 전에 김수분 선생님의 소설을 알게 되어 읽어봤는데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팬이 됐어요. 지금까지 한 15작품 정도 읽은 것 같네요. 집에서든 서에서든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읽었어요. 그래서 말인데, 아까 전화통화에서 밝혔다시피....” 최형사가 옆에 두었던 서류봉투를 열고 두툼한 소설책을 한 권 꺼냈다. “사인 좀 해주세요.”

     그는 책을 탁자 위에, 야광으로 빛나는 눈동자 그림 한가운데에 올려 놓았다. 그 책은 김수분이 쓴 소설 <낚시터의 산고양이 두 마리>였다. 표지에는 안개 낀 낚시터에 덩그라니 놓여있는 낚싯대 옆에 안개만큼이나 하얀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있었다.

     “아, 이 책 상당히 오래된 거라 절판일텐데, 어떻게 용케도-” 소설가가 의자에 뻣뻣이 앉아서 말했다.

     “사실은 우리 막내딸 책장에서 슬쩍 해왔습니다. 사실은 저보다 제 딸이 더 작가님의 왕팬이라서요. 제가 선생님 작품을 알게 된 것도 다 제 딸내미 덕분입니다. 어느 날 보니까 우리 막내가 컴퓨터 앞에 앉아서 뭘하고 있더라고요.” 공포소설가 김수분이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는 최형사의 눈을 주의깊게 응시했다. “그래서 막내한테 뭐하냐고 물어봤더니 홈페이지 업데이트한데요. 그래서 무슨 홈페이지냐고 물어봤더니 자기가 중학생 때 만들어서 지금까지 관리하는 홈페이지인데 그것도 몰랐냐고 핀잔을 주더라구요. 그 홈페이지가 바로 공포소설가 김수분 작가님을 소개하는 홈페이지더군요. 우리 막내가 그러는데 김 선생님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공포소설가인데, 자기 홈페이지가 김 선생님 관련 사이트 중에 가장 오래되고 가장 많이 알려진 곳이라고 자랑하더라구요. 그래서 전 그 날부터 우리 딸이 어디다 그렇게 정성을 쏟는 건지 궁금해서 서에 출근해서 틈틈이 컴퓨터로 그 홈페이지를 살펴 보았죠.”

     “아, 그런 거야? 난 또 오락하는 줄 알았는데.” 정형사가 궁시렁거렸다.

     “홈페이지가 참 내용이 많더군요. 우리 딸이 그렇게 열심히 파고 드는 성격이란 것을 그 때 처음 실감했고, 우리 딸이 왕팬을 자처하는 작가님이 그렇게 대단한 분인 걸 처음 알았습니다.” 김수분은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래서 선생님 책을 딸애한테 빌려서 읽어봤는데 그게 참 재미있더라구요. 그러다보니 다른 작품을 찾아서 읽게 되고, 결국 팬이 되버렸습니다.”

     최형사가 잠바 주머니 속을 뒤져 사인펜을 꺼냈다.

     “사인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이거 너무 쑥스럽군요. 제가 쓴 소설들을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공포소설가가 최형사에게서 사인펜을 건네 받고, 눈동자 위에 있던 <낚시터의 산고양이 두 마리> 표지를 들췄다. “사인은 어떻게 해드릴까요? 특별히 원하시는 거라도.”

     “저보다 우리 딸이 더 팬이고 하니, 딸애 이름으로 사인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가 사인할 내용을 천천히 불러주었고, 작가는 별로 예쁘지 않은 글씨로 책 속에 받아 적었다.

     최은주 양에게
     별처럼 빛나고 꽃처럼 아름다운 은주 양이 앞으로도 맑고 예쁘게 생활했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하세요.
     2004. 10. 25.
     김수분

     “감사합니다.” 최형사가 사인을 적은 책을 서류봉투 속에 조심스럽게 집어넣었다.

     “이 친구, 집에 가서 어깨에 힘 좀 주겠구만.” 정형사가 최형사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러나 최형사는 동료의 농담에 반응하지 않은 채 소설가를 주시했다. 그렇게 몇 초가 흘렀다.

     정형사가 재촉했다. “용무가 끝났으면 이만 일어나세.”

     “아니 잠깐만. 할 얘기가 좀 남았어.” 그는 잠시 서류봉투를 손으로 두드리다 말을 시작했다. “우리 막내의 홈페이지에서 작가님 소설의 줄거리를 보았을 때도 느꼈지만, 책으로 직접 읽어보니 역시 흥미로운 점이 보이던데요.”

     소설가의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뭐가요?”

     “지금 사인해주신 이 소설 <낚시터의 산고양이 두 마리>말인데요, 배경이 시골 낚시터죠. 낚시터에 온 손님들이 호수 속에 사는 물귀신의 유혹에 빠져 차례로 죽어가는 내용이구요. 그 소설 속에 나오는 낚시터 주인은 근처에 여관도 운영해서 낚시꾼들이 그 여관에 묵어가기도 하죠. 책을 통해 이런 내용을 접하니까 제가 20여년 전에 충북 진설군에 근무할 때 맡았던 살인사건이 생각났어요.”

     “그래요?” 김수분이 뻣뻣하던 자세를 풀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완전히 기댔다. 그의 눈이 최형사의 눈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사건이 참 잔인해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진설군에서 사설 낚시터를 운영하던 사람이 살해당했어요. 그도 역시 낚시터 근처에 여관을 운영하고 있었구요. 자기가 운영하는 여관방에서 머리가 터진 채로 죽었습니다. 두개골의 위쪽 절반이 완전히 산산조각 났어요. 특이하게 두개골 속의 뇌는 다 사라지고 없었고.”

     “그래요?” 빨간 불빛 아래서 의자에 누워 형사를 바라보는 공포소설가의 눈빛이 거만해 보였다.

     “작가님의 소설 <낚시터의 산고양이 두 마리>에 나오는 낚시터나 여관에 관한 묘사를 보면, 제가 겪었던 그 사건의 범행장소와 아주 흡사하더군요. 아니 솔직히 말해 범행장소를 사진으로 찍어 소설 속에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았습니다. 정말 실감나던데요.”

     “그래요?”

     “실제 사건의 낚시터 주인은, 이건 그 당시 언론에도 발표되자 않은 사실인데, 낚시꾼들을 상대로 여관과 낚시터에서 매춘을 알선하다 그 지역 폭력조직과 다툼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폭력배들이 원한관계에서 저지른 살인으로 보고 수사를 했지만, 결국 범인은 밝혀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작가 님의 소설을 보니 낚시터 주인과 폭력배의 유착관계가 실제 살인사건에서의 경우와 똑같이 그려져 있더군요. 소설 속에서는 낚시터 주인이 보름달 밤에 폭력배들을 인적없는 낚시터로 유인해서 물귀신한테 몰살당하도록 만들지만요.”

     “그래요?”

     “그렇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정형사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명예퇴직이 결정되고부터 느슨해졌던 온몸의 신경이 힘차게 뻗치는 기분을 느꼈다. 이건 분명 뭔가 냄새가 난다. 범죄의 냄새가. 그는 최형사한테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책하고 담쌓은 양반이 대뜸 공포소설을 끼고 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최형사의 감각이 부럽고 샘났다. 이런 인재가 명예퇴직 대상자라니!

     “<낚시터의 산고양이 두 마리>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겁니까?” 최형사가 물었다.

     김수분은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약간 뜸을 들인 후 짧은 대답을 내보냈다. “아닌데요.”

     “그래요?”

     “그렇습니다.” 수분의 손이 탁자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렸다. “지금 최형사님이, 아 최형사님 맞죠? 최형사님이 말씀하시는 요지는 제 소설이 하필이면 최형사님이 맡았던 실제 사건을 연상시킬 정도로 실감나게 묘사를 하고 있어서 감탄했다, 뭐 이런 건가요?”

     최형사는 공포소설가의 질문을 무시하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당신은 공포소설가로 데뷔한 이래로 50편이 넘는 장편소설과 1000편에 육박하는 단편소설을 썼습니다. 이건 소설 쪽에 문외한인 제가 봐도 엄청난 작품수가 분명하죠. 그런데 제가 접한 당신의 작품들 속에서 <낚시터의 산고양이 두 마리>와 마찬가지로 흥미로운 점들이 몇 가지 보이더군요.

     당신의 1982년 장편 <이상한 흡혈귀>는 윈인 모를 이유로 거대해진 왕빈대가 사람들의 피를 빨아 말려죽이는데, 사람들은 그걸 흡혈귀의 소행이라 착각하고 혼란에 빠진다는 내용입니다. 그 소설에서는 지방 대학의 생물학 교수가 왕빈대를 물리치는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소설 속에서 곤충학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이어지죠. 그런데 1978년에 광주의 민서 대학교 생물학과 교수 연구실에서 불이 나 교수 한 명이 불에 타 죽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시체는 몸뚱이만 남고 머리는 없어진 채였죠. 그 교수가 쓴 논문 중에 <빈대의 진화론: 사라져가는 끈질긴 생명력>이 있더군요."

     “형사님, 그거 아세요? 암빈대는 말이죠, 성기가 따로 없어요. 그래서 숫빈대는 날카로운 성기를 암빈대의 몸통에 푹 찔러놓고 섹스를 한답니다. 사람이 그렇다고 생각해 보세요. 웃기잖아요? 남자가 자지를 여자 몸뚱아리에 푹 찔러놓고 허리를 돌리는데, 여자는 밑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 신음하고. 하하하!”

     “당신의 1997년 장편 <주먹에 피를 묻혀라!>에서는 폭력조직의 주도권 다툼에서 패한 조폭 두목이 오래 전 실크 로드를 통해 아라비아에서 고려로 전해졌던 죽음의 마법서를 손에 넣습니다. 고대 아랍어를 한문으로 풀이한 그 책을 통해 그는 상대편 폭력조직에 죽음의 저주를 풀어 놓죠. 그 소설에서는 조폭과 부패경찰의 공생관계가 적나라하게 묘사됩니다. 그런데 1996년 부산에서는 실제로 조폭두목과 부패한 경찰간부가 호텔방에서 살해된 채 발견되었습니다. 온몸이 칼로 난자당한 채였고, 머리는 깨지고 뇌 상당수가 없어졌습니다. 죽은 경찰간부는 바지 사장을 내세워 나이트 클럽을 2개 운영하고 있었는데, 당신 소설에 나오는 부패경찰도 나이트 클럽을 운영하더군요. 소설에선 5개였죠. 소설적 과장법인가요?

     당신의 2001년 장편 <죽음의 크리스마스>는 새로 지은 신축 교회 건물에서 크리스마스 예배를 보던 신도들이 악마의 설교를 듣고 감동받아 목사를 죽이고 악마를 새로운 지도자로 받아들인다는 내용입니다. 부패한 교회 목사의 비리가 자세히도 나오죠. 그런데 1999년 크리스마스 날에 강원도에 있는 한 교회의 목사가 실종되었습니다. 끝내 찾질 못했죠. 경찰 수사로 서울에 있는 그 목사의 으리으리한 저택이 교회에서 빼돌린 비자금의 은신처라는 게 밝혀졌습니다. 마당에 비밀 지하실을 만들어서 돈을 관리하는 과정이 실종된 목사와 소설 속 목사가 똑같더군요. 심지어 비자금을 보관하는 독일제 금고의 상표이름까지 똑같고.

     당신의 1985년 단편 <신고식>에서는 고등학교 폭력서클 ‘백만 볼트’의 리더가 조직폭력단에 들어가기 위해 신고식을 치르려다 공포의 시험을 치르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고등학교 내의 폭력실태가 잘 드러난 작품이죠. 그런데 1980년에 인천의 한 고등학교 폭력서클 ‘고압선’의 리더가 새벽에 골목길에서 살해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머리가 터지고 뇌가 흘러나와서 죽었죠. 그 새끼는 가출한 여학생들을 모아서 유흥업소에 공급하는 보도방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소설에서도 그렇게 나오더군요.

     당신의 1993년 장편 <신음하는 팬클럽>은 인기 절정의 댄스 그룹 ‘크레이지 포’의 공식 팬클럽 회장인 여대생이 기획사와 댄스 그룹 멤버들에게 농락당하다 자살한 뒤 귀신이 되어 복수하는 내용입니다. 팬클럽의 비리가 자극적으로 묘사되고 있죠. 그런데 1986년에 별로 인기는 없던 댄스 그룹 ‘환타스틱 칠드런’의 공식 팬클럽 회장을 지내다 물러난 지 얼마 안 된 여대생이 자취방에서 살해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옷이 다 벗겨지고 온갖 물건들이 온몸에 박힌 채로. 아, 그러고 보니 김수분 씨 당신이 방금 말했던, 암컷의 몸에다 자지를 박아넣는다는 빈대가 연상되는 군요. 아무튼 실제 사건에서는 살해된 여학생의 두개골이 터지고 그 속에 빨대가 꽂혀 있었습니다. 범인의 짓궂은 농담인지는 몰라도, 시체 머릿 속에는 정말로 빨래로 빨아먹은 것처럼 뇌가 다 없어졌어요. 그 여대생은 남자친구를 시켜 맘에 안 드는 팬클럽 회원을 성폭행한 혐의를 받다 흐지부지 풀려난 적이 있었는데, 소설 속에서도 그런 사건이 벌어지죠.

     당신의  1987년 장편 <내 귀에 도청장치>에서는 한 소설가 지망생이-“

     의자에 기대 최형사의 숨가쁜 연설을 듣고만 있던 공포소설가가 벌떡 일어섰다. 갑작스런 움직임에 최형사도 정형사도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일어선 수분은 열광적으로 박수를 처댔다.

     “와우! 브라보! 놀랍습니다! 대단합니다! 최형사님, 혹시 옛날에 배우 지망생이셨어요? 그렇게 긴 대사를 숨 한 번 안 쉬고 단 번에 쏟아내다니 대단하십니다. 그 대사들 어제 밤새 쓰시고 달달 외우셨습니까? 기억력 왕이네요. 그 대사들은 막내 따님의 홈페이지에서 따오셨나요? 아니면 제 소설들을 직접 읽고 요약한 겁니까? 어쩌면 그리도 제 소설들을 잘 압축해 놓았던지, 문학 평론가 하셔도 되겠습니다. 아, 요즘 유행을 따라 문화 평론가로 해야 될까요? 아무튼 멋지십니다!”

     김수분이 다시 의자에 앉았다.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가 빨간 형광등 불빛 아래서 음흉스럽게 빛났다. 그 눈동자가 최형사를 핥고 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뜨겁게, 즐겁게. “그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건들은 어떻게 찾아내신 겁니까? 잘은 모르지만 찾으시느라고 힘드셨을 것 같은데.”

     소설가의 뜨거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최형사가 눈길을 마주치며 말했다. “요즘은 컴퓨터 시대니까 비교적 편하게 찾을 수 있죠. 경찰청 수사기록 전산망 검색창에 핵심단어를 처넣으면 그와 관련된 사건들이 줄줄이 나옵니다. 아직 전산화가 진행 중이라 과거의 모든 사건 수사기록들이 저장돼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눈이 돌아갈 정도로 수많은 사건들이 검색결과로 쏟아집니다. 그러면-”

     “그 결과로 나온 사건들을 일일이 읽어보고 소설과 관련이 있는 사건들을 가려내셨다? 상당한 노가다였을 것 같은데.”

     “성가신 일이기는 했지만, 뭐 남는 게 시간이니까. 아까 말했듯이 명예퇴직자라서 별로 할 일도 없으니까. 전산실을 들락날락거렸죠.”

     침묵이 흘렀다. 옆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는 정형사의 입술이 바짝 타들어갔다. 두 사람의 맞대결에서 형식적인 탐색전을 끝내고 과연 누가 먼저 총을 뽑아들 것인가? 형사가 먼저 범인을 지목할 것인가, 범인이 먼저 자백할 것인가?

     총을 뽑아든 주인공은 최형사였다.

     “네 놈 새끼가 그랬지? 사건을 저지르고, 살인을 저지르고, 그걸 경험으로 소설을 써냈지?” 최형사가 탁자 앞으로 몸을 내밀고 호전적인 태도로 소설가에게 말했다.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 돈을 벌어먹고 살다니 공포소설가답구만. 왜? 내 말을 부인하고 싶나? 더 말해 볼까? 네 놈 새끼가 저지른 죄들을? 응? 말해 보라고. 뭐라고 말 좀 해봐, 새꺄."

     공포소설가가 의자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손을 뻗어 탁자 위의 커다란 눈동자 그림 위로 움직였다. 야광으로 빛나는 눈동자 한가운데를 그의 활짝 펴진 손바닥이 덮었다. 눈동자를 가린 손바닥은 야광으로 하얗게 빛났고, 빨간 형광등 빛에 노출된 손등은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그는 눈을 감았다.

     정형사한테는 소설가의 그런 모습이 마치 쭉 뻗은 팔을 통해 눈동자 그림으로부터 지령을 받는 것처럼 보였다. 무슨 지령? 야, 들통 났다. 완전 좆 됐다. 잘못 했다고 똑똑하신 형사님들한테 싹싹 빌어라! 손바닥 손금이 참회의 피눈물을 흘릴 때까지.

     한편으로는 소설가가 약간 고개를 수그리고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갑작스레 호통치는 최형사의 모습과 대비되어, 꾸중 듣는 어린 아이의 모습 같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런 심각한 상황 속에서 정형사는 동료를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든든한 힘이 돼주어야만 했다. 외근 나왔다 갑자기 자기를 여기로 끌고 왔던 것은 최형사가 그를 의지하고자 했음이 너무도 분명했다. 정형사는 힘을 주어 김수분에게 외쳤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소설가는 꿈쩍도 안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최형사가 정형사를 흘낏 쳐다보더니 별 말 없이 금새 소설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정형사는 왠지 좀 무안해졌다.

     “짜증나네요.” 수분이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손을 거둬들이며 눈을 떴다. “맨처음에 말할 때는 팬이라느니 사인 좀 해달라느니 별별 소리를 다하다가 이젠 너무도 희안한 소리를 하시네요. 형사님이 젊은 시절에 해결하지 못했던 사건에 대한 분풀이를 이제 와서 엉뚱하게 저한테 하시는 겁니까? 힘 좀 쓰는 기관에 근무하신다고 힘 없는 소설가를 이렇게 갖고 노셔야 되겠습니까? 아니, 소설 속에 나오는 내용이 실제 사건과 비스무리하니까 소설가가 범인이라니, 그렇게 따지면 이 세상에 얽혀들지 않을 소설가가 어딨습니까?”

     “그래?”

     “솔직히 최형사님이 갑자기 조폭 똘마니 다루듯 저한테 반말하시는 것도 맘에 안 듭니다.”

     “그래?”

     “할 수만 있다면 아까 한 사인을 취소하고 싶은 정도에요.”

     “그래?”

     “최형사님, 도대체 이렇더니 저렇더라는 식으로 뜬구름 잡는 얘기만 하지 마시고 구체적인 증거라도 보여주세요. 없죠? 없겠죠. 있었으면 이렇게 사인 받을 책 한 권 달랑 들고 왔을까나? 체포 영장을 들고 오셨겠지.”

     “증거는 내 머리 속에 다 들어 있어, 그 딴 걱정 하지마.” 최형사가 손가락으로 자기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참 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발언하시네. 그럼 최형사님 머리 하나만 없어지면 증거가 다 없어지는 거네요? 참, 어처구니가 지구를 떠나는 소리가 들리네요.”

     두 사람이 팽팽한 눈싸움을 벌였다. 그러다 소설가가 정형사를 바라보았다.

     “어디 정형사님은 어떠세요? 최형사님이 어거지 쓰는 거 맞죠? 그렇죠?”

     최형사도 김수분도 정형사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무게 중심이 자기에게로 쏠리자 정형사는 뭐라 말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솔직히 소설가의 말이 맞다. 지금이 무슨 서슬퍼런 공권력 남용의 시대도 아니고 어떻게 구체적 증거 없이 심증, 그것도 막연한 심증만으로 범인을 지목한단 말인가. 하지만 일단은 일이 이 지경까지 왔으니 어찌됐든 동료 형사의 자존심은 세워주고 보는 게..... “그러니까 나는 우리 최형사가-”

     “하도 억울해서 목이 타네. 그거 안 드실 거에요?” 공포소설가가 최형사 앞에 있는 종이컵을 가리켰다. 정형사는 커피를 다 마시고 자기 종이컵을 구겨 놓기까지 했지만, 아직도 김이 올라오는 최형사의 종이컵은 손도 안 댄 채 처음 그대로였다. 최형사가 아무 말 없이 가만 있자 김수분이 최형사의 종이컵을 집어들었다. “안 드실 거 같으니 제가 좀 마시겠습니다.”

     공포소설을 쓰는 남자가 김이 올라오는 커피를 최형사 얼굴에 뿌렸다.

     앗! 뜨거!

     뜨거운 커피가 최형사의 얼굴 한가운데를 덮쳤다. 최형사는 갑작스런 충격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얼굴에 손을 댔다 너무 뜨거워서 뗐다 다시 댔다 또 뗐다, 이러기를 몇 차례 반복하며 소파 위에서 몸부림쳤다.

     그러나 곧이어 커피가 뜨겁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차갑다는 말이 아니다. 커피는 미지근했다. 공포소설가가 커피를 내온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커피가 미지근해진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종이컵에서 김이 올라오는 것을 봤기 때문에 갑자기 얼굴에 커피가 뿌려졌을 때 펄펄 끓는 금방 끓인 커피를 연상하고 뜨거움을 느꼈던 것이다.

     그래도 놀라서 감았던 눈이 떠지질 않았다. 눈 속으로 커피가 들어가서 따갑고 간지럽고 쓰라렸다. 손으로 눈을 비비고 눈물을 흘려도 쉽사리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최형사는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무거운 물체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정형사의 비명소리, 김수분의 웃음소리.

     최형사가 간신히 눈을 뜨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너무 놀래서 머리 속에서 윙윙거리는 소음이 메아리쳤다. 어둠이 영원히 계속되는 줄 알고 죽을 힘을 다해 눈을 떠보니 세상이 온통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무심코 천장 쪽을 올려다 보고 형광등에서 내려온 빨간 불빛이란 것을 새삼 깨달았다.

     혼란스런 정신을 진정시키고 천천히 앞을 내다보았다.

     빨간 조명 속에서 탁자 위의 거대한 눈동자는 순백의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옆으로 소설가가 앉았던 바퀴 달린 의자가 쓰러져 있었다. 그 옆으로 소설가가 바닥에 쭈구려 앉아 있었다. 그 옆으로 정형사가 시멘트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었다.

     햐. 카. 크. 햐. 아. 끅. 햐.

     뚝뚝 끊어지는 숨소리가 정형사에게서 나왔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목‘구멍’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턱 밑으로 목젖 있는 곳이 뜯겨져서 검은 구멍이 큼지막하게 뚫려 있었다. 정형사는 아무 말도 못하고, 넋나간 눈으로 천장의 빨간 형광등을 바라보며, 숨을 몰아쉬는 가슴이 심하게 출렁거릴 때마다 목에 터진 구멍에서 짧은 바람소리와 함께 피를 뿜어댔다. 그가 흘리는 피는 빨간 조명으로 인해 까매 보였다. 그 까만 피가, 숨을 쉴 때마다 목에 난 구멍에서 솟아나오는 피가 목둘레를 지나 시멘트 바닥에 흘러내려 넓게 퍼져 있었다.

     최형사가 약간 비틀대며 소파에서 걸어나왔다. “이 새끼, 이 씨발 새끼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정형사의 피 토하는 목‘구멍’ 속을 유심히 살펴보던 김수분이 최형사를 보고 웃었다. 소설가의 옷에도 군데군데 정형사의 피로 얼룩졌다. 수분이 정형사의 가슴을 손으로 꾹 누르자 금새 형사는 숨이 끊어졌다.

     “최형사님과 단 둘이 조용히 얘기하고 싶어서, 정형사님을 먼저 좋은 곳으로 보내드렸습니다.” 그가 피범벅이 된 오른손을 누워있는 정형사의 잠바에다 대고 싹싹 문질렀다.

     “우주 비행사에 대한 소설을 써보자고 작정했다 쳐요. 소설가는 뭘 할까요? 그냥 대충 상상으로 쓸 수도 있겠지만, 잘 모르는 분야니까 자료 조사를 해봅니다. 우주 비행사와 관련된 책, 신문기사, 다쿠멘터리, 영화, 드라마, 논문 별의별 것들을 구해다 읽고 보고 기록하겠죠. 하지만 사실 그런 걸로는 우주 비행사를 대충 아는 정도에 불과해요. 물론 그런 걸로도 ‘대충’ 소설을 쓸 수는 있겠지만, 누가 뭐라든 ‘대충’은 대충인 겁니다. ‘진짜’ 우주 비행사의 속마음을 알고 싶다. 이럴 땐 어떡할까요?”

     쭈그리고 앉아있던 공소소설가가 천천히 일어서서 최형사를 마주 바라보았다. 최형사는 가만히 제자리에 서있었다.

     김수분이 말을 계속했다. “우주 비행사를 직접 찾아가서 만나보는 게 최고죠. 하지만 그런다고 우주 비행사의 진면목을, 그의 모든 것을 알게 될까요? 천만에요. 아, 그러고 보니 소설가가 취재대상을 인터뷰하는 것은 형사가 범인을 취조하는 거랑 비슷합니다. 상대방은 묻지 않는 말에는 절대 자발적으로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뭐하러 수다를 떨겠어요? 자기한테 별로 이득이 될 것도 없는데. TV에 나올 것도 아닌데. 심지어 묻는 말에도 답변을 회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뭔가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커다란 비밀을 간직한 사람일수록, 어둠의 매력으로 똘똘 뭉친 사람일수록 말을 아낍니다.

     제가 이제껏 소설을 쓰기 위해 찾아갔던 사람들 대다수는 인터뷰에 응하는 듯 하면서도 결정적인 질문에는 입을 다물었고, 제가 미처 생각지 못한 질문을 자발적으로 끄집어내 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너무 안타깝습니다. 앞에 있는 타인의 비밀을 나도 알 수만 있다면, 그 비밀을 마음껏 소설로 풀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때마다 저는 앞에 있는 그 타인의 머리를 쳐다 봅니다.“

     김수분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최형사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아까 최형사님은 제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형사님의 머리 속에 다 들어있다고 말하셨죠. 마찬가집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기억, 모든 경험, 모든 지식, 모든 비밀이 바로 각자의 머리 속에 다 들어있다구요.” 최형사가 그랬던 것처럼, 수분이 손가락으로 자기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제가 살인범이라고 그러셨죠? 맞아요, 제가 그랬습니다, 인정합니다. 맘에 드는 사람들의 머릿 속이 가지고 싶어서 그랬어요. 저는 그들의 두뇌를 가지면, 그들이 과거에 어떤 일을 했는지, 그 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도 다 알 수 있어요. 심지어 무의식 속에 잠자고 있어서 본인들도 잊고 있는 아련한 기억까지도 저는 다 알 수가 있단 말이에요. 완전히 저는 그 사람들과 하나가 되는 것이죠. 캬! 그리고 그들의 멋진 기억들을 소설로 씁니다. 본인들 조차 감탄할 만큼 아주 멋지게!

     제가 양심의 가책을 느낄까요? 아니죠, 전혀 아니죠. 모든 예술은 결국 인간의 희생을 바탕으로 피어나는 것이고, 뛰어난 예술가란 그저 뛰어난 흡혈귀란 말과 같은 뜻입니다. 사랑하는 연인의 고통스런 이별이 비극적인 로맨스 소설이 되고, 전쟁터에서 생긴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이 전쟁 영화가 되고, 임신 8개월의 임산부가 살인마에게 유린당한 그 참극이 스릴러 소설이 되고, 환경오염으로 죽을 병에 걸린 사람들의 모습이 다큐멘터리가 되는 겁니다. 인간의 고통을 흡입해서 예술가는 뻔뻔스럽게도 작품으로 만들어 냅니다. 미안하냐구요? 아니오. 국가가 언제 국민들한테 세금 거둬서 미안하다고 한 적 있었나요? 국가가 국민들 쥐어짜서 생명을 지속하듯, 예술가는 타인의 고통을 쥐어짜서 예술을 지속시킵니다.

     그리고 저는 그저 그 타인의 고통을 통째로, 티끌 만큼의 손실도 없이 체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제가 두려우신가요?” 김수분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최형사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당신은 사실 혼자서도 저를 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저같이 나이 들고 비쩍 마른 소설가를 상대하는데 뭐가 그리 힘들까요? 그런데 당신은 동료형사를 데리고 왔어요. 뭔가 마음에 걸렸겠죠. 당신 추측대로 저같이 약해빠진 놈이 그토록 오랫동안 살인을 해왔다면 뭔가 대단한 위험성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으니. 그렇다고 추측만 가지고 상부에 지원을 요청할 수도 없으니, 놀고 있는 동료형사라도 데리고 왔겠죠.

     그래요, 저를 두려워 하세요. 저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지금 당신한테 무척 매력을 느끼고 있으니까요.”

     김수분이 또 한 발 앞으로 나서자, 형사가 또 뒤로 한 발 물러났다. 갑자기 수분이 몸을 앞으로 움직여 달려들 듯한 자세를 취했다. 당황한 최형사가 몇 걸음 뒤로 서둘러 움직이다 멈췄다. 등이 벽에 닿았다. 당황해서 우왕좌왕하는 형사의 모습을 보고 수분이 웃음을 터뜨렸다.

     “최형사님의 머릿 속이 궁금해요. 정말로 저는 어느 누구든 제가 벌인 살인들을 추적해 올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했거든요. 항상 꼬리잡힐 만한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고 조심했는데. 그런데 당신은 딸아이의 홈페이지에서 본 내용을 단서로 자신이 젊은 시절 담당했던 사건과 연결시키고 점차 그 범위를 넓혀가서 결국 여기까지 온 거란 말이에요. 멋집니다, 너무 멋져요. 그런 당신의 머리 속에는 어떤 멋진 비밀들이 숨어있을지 기대가 되요. 당신만큼 매력적인 비밀들이겠죠?”

     “허튼 수작 부리지 말고 가만 있어!” 최형사가 재빨리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바지 속 종아리에 차고 있던 가죽띠에서 단검을 빼냈다. 그것은 오래 전에 ‘백화점 뒷골목파’를 소탕하러 조폭의 근거지를 습격했을 때 26살 먹은 조폭 중간 보스가 휘두르던 칼이었다. 그 칼에 동료형사가 찔려 죽었다. 최형사는 범행 증거물로 압수한 그 칼을 나중에 슬쩍 빼돌려서 자신의 부적으로 삼았다. 그 이후로 최형사 앞에서 흉기를 들고 꼴깝떠는 조폭은 최형사의 부적 맛을 보는 영광을 누렸다. 이제는 꼴깝떠는 공포소설가가 부적의 맛을 보는 영광을 누릴 수도 있었다. “더이상 다가오면 다친다. 조폭들 배때기 쑤시던 칼에 한 번 맞아 볼래?”

     소설가기 피식 웃으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아니, 이 새끼가. 최형사는 단검을 꽉 쥐고 앞으로 돌격할 태세를 취했다.

     그런데 손이 물컹거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손에 잡고 있는 것은 단검이 아니라 살찐 두꺼비였다. 형사의 눈과 두꺼비의 눈이 마주쳤다. 끼루꾹! 두꺼비가 트림을 하더니 긴 혓바닥을 내밀고, 최형사의 손등을 핥았다. 미끌거리면서도 거친 두꺼비의 혓바닥이 손등에 달라붙는 그 혐오스런 느낌에 최형사는 소스라치며 두꺼비를 내던졌다.

     두꺼비는 바닥에서 몇 번 튕겨나가더니 배를 천장으로 향한 채 뒤집혔다. 빨간 형광등 불빛 아래 드러난 두꺼비의 허연 배가 꿈틀거렸다. 팔다리를 몇 차례 흔들더니 금새 몸을 제대로 뒤집었다. 등가죽에 난 여드름 같은 돌기들을 징그럽게 씰룩거리며 두꺼비는 소설가에게 조용히 기어갔다. 발 밑에까지 오자 소설가는 몸을 숙여 두꺼비를 향해 손을 내밀었고, 기다렸다는 듯 두꺼비가 그의 손바닥 위로 올라갔다.

     “최형사님 취향 참 특이하시네.” 김수분이 손을 들어 두꺼비를 최형사한테 내밀었다. “평소에 이런 걸 바지 속에 감추고 다니세요? 어린애들이 보면 좋아는 하겠네요.”

     최형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놀라운 일들이 정신없이 터지니 제대로 된 상황판단이 어려웠다. 이건 악몽이었다.

     “어디, 두꺼비를 도로 바지 속에 집어넣어 보시죠.”

     김수분이 최형사를 향해 두꺼비를 집어던졌다. 소설가는 얼마 전엔 형사의 얼굴에 커피를 퍼붓더니 이제는 두꺼비까지 덤으로 날려보냈다.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두꺼비가 최형사의 얼굴로 날아왔다. 소설가의 손에서 커다란 야구공처럼 보이던 그 징그러운 생물체가 그의 눈 바로 앞에서는 쟁반만한 크기로 확대되어 보였다. 냉면 그릇을 일곱 개 올려놓아도 넉넉하게 여유가 남는 커다란 식당 쟁반만한 크기로 말이다. 두꺼비가 쩌억 벌린 입 속에서 바늘 같이 뾰족한 수많은 이빨들이 번쩍거리고 있는 것까지 순간적으로 볼 수가 있었다.

     최형사는 무기력하게 팔로 눈을 가렸다. 그 즉시 두꺼비가 형사의 오른쪽 뺨을 강타했다. 그 억센 충격에 최형사는 등을 기대고 있던 벽에 뒤통수를 부딪혔고, 감고 있던 눈 속에서 따끔거리는 불똥이 튀었다.

     갑작스런 불똥에 놀란 그는 이윽고 그의 오른쪽 뺨에서 불이 난 것 같은 펄펄 끓는 고통을 느꼈다.

     두꺼비다, 두꺼비야! 그 망할 것이 내 뺨을 물어 뜯었구나.

     그는 얼굴을 움직일 수 없었다. 움직이려 할 때마다 그렇잖아도 극심한 고통이 더욱 극심하게 달아올랐다. 오른뺨에 추가 달린 듯 무거웠다. 최형사는 두꺼비가 날카로운 이빨로 그의 뺨을 악물고 있으면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 놈은 그에게 더 쓰라린 아픔을 주기 위해 우주공간에서 헤엄치듯 팔다리를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힘들게 눈알을 굴려 아래쪽을 내려다보았을 때 그의 뺨을 뚫고 나온 단검의 손잡이가 보였다. 단검이 그의 턱 아래쪽에서 위쪽 뺨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한 때는 단검이었다가 두꺼비로, 이제는 다시 단검으로 돌아왔냐? 너 세상 참 맘대로 편하게 사는 구나. 이런 씨팔!

     최형사는 오른손으로 단검 손잡이를 잡았다. 뺨에서 흐른 뜨끈한 피가 손에 들러붙었다. 오른손에 힘을 주어 뺨에서 단검을 빼내려 했다.

     꿈쩍도 않는다.

     이번엔 왼손까지 동원해서 빼내려 했다.

     꿈쩍도 않는다.

     얼굴에는 열이 오르고 식은 땀이 넘쳐나고, 손에는 더 많은 피가 묻을 뿐이었다.

     그의 오른뺨을 뚫고 들어간 단검은 그가 기대고 선 콘크리트 벽에 단단히 박혔다. 게다가 칼날을 둘러싼 단검 손잡이 윗부분의 돌출한 테두리는 그의 뺨가죽이 단검 손잡이 쪽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막고 있다. 그는 핀에 몸통을 관통당해 굳어버린 표본실의 나비처럼 어느 쪽으로도 움직일 수 없는 신세였다.

     공포소설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최형사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단검 손잡이를 쥔 양손에 힘을 준 뒤, 얼굴을 왼쪽으로 끌어당겼다. 칼날에 뺨이 찢어졌고, 급격이 고개를 휘두른 반동으로 왼쪽으로 몇 걸을 휘청대며 걸어갔다. 아픔과 함께 어지럼증이 왔다.

     그리고 무릎을 꿇으며, 두 팔로 몸을 지탱하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밝은 미래를 향해 힘차게 기어갈 준비를 하는 갓난 아기처럼 두손두발로 바닥을 짚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의 냉기가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그 순간적인 차가움은 칼날에 찢어져 너덜너덜해진 오른뺨의 아픔도 잊게 할 정도였다. 비록 그 순간이 너무도 짧았다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후두두두두두둑!

     찢어진 오른뺨에서 피가 쏟아졌다. 시멘트 바닥 위로 경쾌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빨간 형광등 조명 아래서 보이는 피는 누군가 잉크를 뿌려댄 듯 선명한 검은색이었다. 바닥을 짚고 있는 양팔 사이로 자신의 계속 흘러내리는 것을 보며, 최형사는 생각했다.

     이건 아니었는데. 내가 바라던 것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물론 최형사는 애초에 이런 불행한 상황을 초래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막내딸 최은주가 운영하는 김수분 홈페이지에서 <낚시터의 산고양이 두 마리>라는 소설의 줄거리를 읽고서 자신의 오래 전 미해결 살인사건을 떠올린 뒤 스스로도 우습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수사관으로서의 본능에 이끌려 소설가의 작품을 읽고 실제 사건을 뒤져 보길 수개월 째. 그 동안 본의 아니게 명예퇴직 대상자가 되어 경찰생활이 얼마 안 남았지만, 큰 놈이 걸려들었다는 깨달음은 그의 의욕을 북돋아 주었다. 그렇지만 혼자서 하는 수사에는 한계가 있었다. 50편이 넘는 장편소설과 1000편에 육박하는 단편소설. 그 모든 김수분의 작품들을 언제 다 읽을 수 있을 지도 몰랐고, 경찰청 수사기록 전산망의 검색결과로 나오는 수백 수천 수만 개의 사건들을 일일이 대조해보는 것은 죽어서도 이루지 못할 불가능한 임무였다. 그리고 이렇게 구체적 물증이 나올 가능성도 없이 심증만으로 해야하는 손이 많이 가는 수사를 명예퇴직하는 그의 뒤를 이어 누가 대신 맡아주려 하겠는가?

     그래서 최형사는 마지막 수단으로 소설가를 직접 찾아왔던 것이다. 뭔가를 크게 바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수사를 벌여왔다는 사실을 밝히고, 그 뒤로 소설가가 어떻게 나올지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가 다녀간 뒤로 소설가가 당황해서 어떤 실수를 벌이고 그래서 구체적 증거가 나올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라도 겁먹은 소설가가 어디선가 지켜보는 눈이 있다는 것을 의식해서 다시는 살인행각을 벌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한다한 들, 그는 그저 경찰생활에서 물러나 먹고사는 일에나 신경쓰면 그만이었다.

     될대로 되라지.

     하지만 그는 지금과 같이 피를 보는 상황이 오리라곤 전혀 생각도 못했다. 다 늙어서 이런 꼴을 당할 줄 미리 알았더라면 애초에 소설가에 대한 관심을 껐을 텐데.

     뺨에서 시멘트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피의 양이 눈에 띄게 줄었다. 최형사는 밖으로 나오고 싶어하는 피는 이제 다 나왔나보다고 생각했다.

     소설가가 무서웠다. 소설가의 집에서 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집에 가고 싶었다. 그래서 막내딸을 마구 때려주고 싶었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이렇게 무시무시한 놈의 팬이나 되다니!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가슴에 끌어안고, 손으로 출혈이 심한 오른뺨을 감싸며 일어섰다.

     소설가의 모습이 보였다. 웃고 있는 소설가는 무척 행복해 보였다.

     형사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벽에 있는 철문이 보였다. 이제는 고인이 된 정형사와 함께 들어왔던 문이다. 이제는 최형사 혼자서라도 그 문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그가 비틀대며 문으로 걸어갔다.

     “왜요? 벌써 가시게요?” 김수분이 말했다. “갑자기 중요한 약속이라도 생기셨어요? 허허, 이걸 어쩌죠? 저는 최형사님을 붙잡고 싶은데.”

     형사는 문 앞에 왔다. 철문 한 쪽으로 동그란 손잡이가 나와 있다. 그는 왼손으로 계속 뺨의 상처를 감싸고, 오른손을 문 손잡이로 뻗었다.

     그의 오른손이 문 손잡이를 뚫고 지나갔다.

     대책없이 몸이 아래로 쏠리며, 최형사는 다시 무릎을 꿇으며 엎어졌다. 그리고 머리가 철문에 부딪혔다. 하지만 우습게도 민감한 그의 머리 피부는 자신이 부딪힌 것이 철문이 아니라 콘크리트 벽이란 것을 순간적으로 느꼈고, 마땅히 철문과 부딪쳐야 옳다는 상황논리가 그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그 놈의 어리둥절은 부딪혀서 머리가 까지고 머리통 속이 울리고 뺨을 감싸고 있던 왼손가락들이 뺨 속으로 들어가 상처를 들쑤셔 놓는 상황에서도 최형사의 시선이 철문을 향하게 만들었다.

     분명 눈 앞에 있는 것은 철문이었다. 무릎을 꿇은 채로 반쯤 엉거주춤하게 일어선 상태에서 최형사는 손을 뻗어 철문을 이리저리 쓰다듬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신중하게. 아마존 정글 속 깊고 깊은 동굴 속에서 원시인이 취미로 그려놓은 동굴 벽화를 발견하고 꿈인가 생시인가 싶어 손으로 확인해 보는 어느 고고학자의 손길과도 같았다.

     최형사의 눈에 보이는 것은 철문이었지만, 그의 손이 느끼는 것은 콘크리트 벽이었다. 맨벽에 영사기로 철문의 영상을 비추고는 그것이 진짜 문인 줄 알고 만지는 기분이었다. 시각과 촉각의 불일치는 그의 마음 속을 안절부절 못하게 만들었다. 철문 어디를 만져봐도 벽이 느껴졌고, 분명히 튀어나온 문 손잡이는 손이 뚫고 지나가 버려 잡히질 않았다. 아무리 두드려봐도 단단한 벽만 있었다.

     못 나가는 거야? 어이없는 절망이 형사의 마음 속을 덮쳤다.

     “최형사님, 감사합니다.” 어느 새 공포소설가는 무릎 꿇고 서있는 최형사의 뒤에 와있었다. “맛있게 먹겠습니다.”

     김수분이 오른팔로 형사의 목을 감았고, 왼손으로 형사의 양쪽 관자놀이를 움켜쥐었다. 수분의 손바닥에 가려 최형사는 앞이 보이질 않았다. 형사는 반항하지 않았다. 반항할 힘도 의욕도 없었다.

     수분이 입을 벌렸다. 위쪽 앞니들이 꽃잎이 벌어지듯 앞으로 튀어나왔다. 입천장 속에 접혀있던 거대한 송곳니 하나가 펴지면서 입 밖으로 나왔다. 벌어진 앞니들을 약간의 틈을 둔 채 지나며 그 길고 약간 아래 쪽으로 구부러진 송곳니가 그의 턱까지 내려왔다.

     그는 한 동안 그의 손에 잡혀 가뿐 숨을 몰아 쉬고 있는 최형사의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원하는 삽입지점을 눈여겨 봐둔 후 그는 천장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힘껏 내리꽂았다. 그의 송곳니가 일격에 형사의 정수리 한가운데를 깨뜨리며 들어갔다. 그 순간 형사의 온몽이 요동쳤으나 잠시 뿐이었다. 형사의 머리통 속으로 들어간 송곳니에 나있는 미세한 구멍들이 열렸다. 그리고 억센 힘으로 주위의 모든 것을 빨라들이기 시작했다.

     뇌도, 뇌수도, 피도, 근육도, 세포도 모두 다. 그리고 최형사의 두뇌가 간직하고 있던 막대한 양의 정보도 함께.

     그렇게 송곳니를 통해 흡입되어 미세한 구멍을 통과하느라 잘게 부서진 최형사의 물질들은 김수분의 코 밑을 지나 눈 밑을 지나 그의 두뇌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 김수분의 눈에서는 눈물이, 코에서는 콧물이, 입에서는 침이 흘렀다. 과히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타인의 기억과 지식을 흡입하는 일이 그 동안 (최형사의 지적대로) 여러 차례 있어왔지만, 늘 흡입의 과정은 힘이 들었다. 마치 커다란 볼링공들이 줄을 서서 그의 얼굴 속으로 돌격해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그 커다란 압력에 그의 두개골이 터져나가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속이 메스껍고 울렁거렸다. 참아야 한다. 기껏 힘들게 흡입하는 도중에 토하기라도 하면 위장 속의 음식물 뿐만 아니라 뇌 속에 들어갔던 타인의 흡입물 마저도 함께 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그의 두뇌를 다시 빠져나온 흡입물은 아무 쓸모도 없는 오물에 불과했다. 그러니 매번 흡입할 때마다 토하고 싶어지는 마을을 잘 다스려야 했다. 수십 번 경험했던 실패를 이번에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보다 몇십 배는 더 경험했던 성공을 재현하고 싶었다.

     그는 최형사의 머릿 속이 너무도 탐났으니까.

     겨우 흡입의 과정이 무사히 끝났다. 이미 숨이 끊어진 최형사의 몸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수분의 송곳니가 빨아들이는 힘이 너무 강해서 형사의 얼굴살이 두개골에 바싹 붙어있었다. 특히 뺨이 쑥 들어가서 그냥 보면 최형사가 굶어서 말라죽은 듯이 보일 법도 했다. 그의 머리 위에 난 부서진 구멍에서는 뇌수도 피도 아무 것도 흘러내리지 않았다. 나올만한 것은 이미 공포소설가가 다 가져가 버렸다.

     힘들었던 흡입으로 기진맥진해진 김수분이 눈물, 콧물 등으로 어질러진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시멘트 바닥 위로 벌렁 드러누웠다. 어느새 진공청소기 같은 이상한 송곳니는 입 속으로 접혀 들어가고, 벌어졌던 앞니들도 제자리로 돌아왔다.

     머리 속이 새로운 물질의 흡수로 욱씬욱씬 쑤셨지만, 김수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 토하지 않았다. 원하는 사람의 머릿 속을 모조리 긁어모아 자신의 뇌 속으로 흡수했다. 최형사에게는 얼마나 놀라운 기억들이 숨어 있을까? 멋진 소설을 5편 정도 쓸 수 있을 정도일까? 아니 그 이상일까?

     흡수한 지 하루나 이틀 정도 지나면 서서히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시멘트 바닥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말없이 누워있는 형사들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집 안 청소 좀 해줘.”

     시멘트 바닥으로부터 조금씩 조금씩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용암이 분출하듯 하얀 연기는 사방으로 튀어올랐다. 어떤 연기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또 어떤 연기는 짐승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연기는 특별히 고정된 형태 없이 아메바처럼 끊임없이 전신을 변형시켰다. 그런 이상한 흰 연기들이 시체들 위로 들러붙었다. 이제 형사들의 시체는 연기로 뒤덮여 하얀 미이라가 되었다. 그리고 형사들의 시체가 천천히 시멘트 바닥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맨바닥만 남긴 채 시체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나머지 연기들이 실내를 돌아다니며 바닥, 벽, 탁자에 묻어있는 핏자국들을 감싸고, 바닥과 벽과 탁자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러고 나면 핏자국의 흔적은 감쪽같이 찾아볼 수 없었다.

     김수분이 피가 묻은 자신의 옷을 벗었다. “이것도 갖고 가서 맛있게 잡수시지.” 벌거숭이가 된 그가 옷가지들을 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옷들에 금새 연기들이 달라 붙어 바닥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수분은 형사들이 앉았던 소파에 서류봉투 하나가 누워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사인을 한 소설책이 그 봉투 속에 들어 있었다. “이건 디저트로 먹으라고.” 그가 서류봉투를 던졌고 이번에도 연기들이 모여들어 흔적을 없앴다.

     “아!” 소파에서 나오려다 뭔가 생각난 듯 공포소설가가 다시 소파로 몸을 돌렸다. 소파의 쿠션을 들추었다. 소파 속에서 어젯밤 열광의 섹스를 함께 즐겼던 미대 다닌다는 여동생들의 브래지어와 팬티를 꺼냈다. “새벽에 걔네들 시체 처리하면서 이걸 깜빡 했네. 나도 이젠 치맨가. 옜다! 니들이 군침을 흘리며 좋아하는 여자 속옷이다.”

     그가 던진 속옷에 연기들이 모여 들었는데, 이번에는 쉽사리 바닥 속으로 가라앉지 않았다. 서로 쟁탈전을 벌이는 듯 속옷들을 감싼 연기들이 서로 얽혀들어 꿈틀거렸다. 그래도 결국에는 속옷도 지하로 사라졌다.

     수분은 실내를 두리번거렸다. 깨끗했다. 분주히 돌아다니던 연기들도 사라지고 없었다. 쓰러져 있던 바퀴 의자를 일으켜 세우고 나니, 오후에 형사들이 찾아오기 전과 똑같이 실내가 말끔했다. 아니, 어제 저녁 미대 다니는 여학생 둘이 오기 전과 똑같다고 해야 할까? 하! 하! 하!

     그는 철문으로 갔다. 아무렇지도 않게 문 손잡이를 돌리고 문을 열었다. 실내의 침침한 빨간 조명과 대비되는 눈부신 오후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는 정원으로 나가 벚꽃나무들 사이에다 오줌을 누고, 그 근처에 있는 단촐한 수돗가에서 벌거벗은 몸을 씻었다. 그러고 나서 물을 뚝뚝 흘리며 집 안으로 들어왔고, 철제 책상 서랍에서 수건을 꺼내 몸을 닦고, 역시 책상 서랍에서 새 옷을 꺼내 입었다.

     그리고 바퀴 의자를 책상으로 끌고 와서 앉았다.

     생각했다. 최형사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해치워버린 것은 경솔하고 위험한 행동이었다고. 이제 곧 경찰들이 몰려와 아우성을 칠 것이라고. 그러나 경솔하고 위험한 행동이었다고는 해도 너무나 만족스러운 행동이기도 했다. 맛있는 먹잇감을 바로 코 앞에 두고 일부러 멀리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한 번 놓친 먹잇감을 다음 번에도 잡을 수 있다고 단정짓는 것은 오만이었다. 더욱이 그 먹잇감이 자기를 잡아먹으려는 맹수의 정체를 낱낱이 알고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그는 실내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너무도 평온한 실내의 모습이었다. 여기서 형사가 죽었으리라고 어느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나? 증거 있나? 누가 물어보면 잡아떼면 되지.

     그는 책상 서랍에서 사각 거울을 꺼냈다. 거울 속에 보이는 자신의 얼굴 표정을 차분하게 유지시키며 말했다. “네, 왔다 갔습니다. 제 사인을 받고는 그 형사분들이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셨다고? 안 돼. 꼭 죽었다는 말 같잖아. 괜히 말 꼬투리 잡힐라. ‘돌아가셨다’ 보다는 ‘떠나가셨다’로 하자. 아직도 뉘앙스가 좀 그렇긴 하지만 앞에 것보다는 훨씬 낫다.

     *   *   *   *   *

     그러고 나서 며칠 간 공포소설가 김수분은 글을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언제든 경찰들이 들이닥쳐 그에게 알리바이를 꼬치꼬치 캐물을 것 같아 불안했다.

     네, 왔다 갔습니다. 제 사인을 받고는 그 형사분들이 떠나가셨습니다.

     이 말만을 되뇌이며 집 정원을 서성거렸다.

     그리고 자신의 뇌에 흡수했던 최형사의 물질들이 비밀을 하나 둘씩 풀어내기 시작했다. 최형사의 뇌 속에 담겨 있던 지식과 기억들이 김수분의 것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   *   *   *   *

     일주일이 흘렀을 때, 김수분은 얼빵한 정형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마 우리가 이대로 영원히 없어져도 서에서는 전혀 눈치 못 챌 거야. 구내 식당에서 숟가락 몇 개 없어진 거랑 같은 거지.

     결국 최형사와 정형사는 구내 식당의 숟가락 몇 개였나? 어쨌든간에 그들을 찾으러 경찰이 들이닥치는 일은 없었다. 신문과 방송에서 실종된 형사들을 찾는 보도가 몇 번 나왔다. 하지만 더 이상 크게 이슈가 되지는 않았다. 그 뿐이었다.

     수분은 책상 서랍에서 샴페인을 꺼내 홀로 축배를 들었다. 완전범죄를 위하여 건배.

     *   *   *   *   *

     그 다음날부터 그는 하루 10시간씩 글을 썼다. 행복했다.

     *   *   *   *   *

     3년이 흘렀다.

     그 동안 공포소설가 김수분 씨는 4편의 장편소설과 20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장편 <호기심이 형사를 죽였다>를 펴냈다. 도망친 범인을 쫓아 유령호텔에 들어가게 되는 베테랑 형사의 이야기였다.

     <호기심이 형사를 죽였다> 출간 기념으로 대형서점에서 수분의 사인회가 열렸다. 7년 만에 열리는 사인회였다. 서점 중앙홀에 마련된 사인대 뒤에 앉아 김수분은 줄 선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었다. 그의 옆에는 출판사와 서점 관계자가 서있었고, 출판사와 서점 홍보팀이 부른 언론매체의 기자들이 사인회 사진을 찍고 김수분과 간단한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연예가 중계’에서 취재를 나온다고 했으나, 아쉽게도 취소되었다.

     사인을 받으러 많은 이들이 줄을 섰다. 하지만 그 중 일부는, 어쩌면 대다수는 출판사가 고용한 아르바이트생들이라는 것을 김수분은 알고 있었다. 사인회를 대형서점에서 개최하는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이유 중 하나는 서점에 놀러온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책 판매량을 늘리려는 것이었으니 알바생이라도 동원하는 출판사의 극성에 수분도 별 불만이 없었다. 오히려 사인 받으러 온 사람이 별로 없으면 이 무슨 개망신인가!

     수분이 30여명 정도 되는 사람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나서 고개를 든 순간 심장을 찌르는 충격이 전해졌다.

     그의 앞에 최형사의 막내딸이 <호기심이 형사를 죽였다>를 들고 서있었다. 김수분이 간직한 최형사의 두뇌 기억으로는 막내딸이 머리를 어깨까지 길렀지만, 지금 앞에 있는 젊은 여자는 와인색으로 염색한 귀여운 단발머리였다. 그러나 얼굴은 예전과 똑같았다. 최형사의 눈으로 바라보는 김수분이 그걸 착각할 수는 없었다.

     “안녕하세요. 저 정말 김선생님 팬이에요.” 막내딸이 수줍게 책을 내밀었다. 수분이 떨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고 책을 받아들었다. “이제까지 나온 김선생님 작품들 다 읽어봤어요.”

     “아, 그래요?” 그는 약간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이번에 나온 이 책도 벌써 다 읽었는 걸요. 정말이지 소설 속에 나오는 주인공 형사가 너무나도 생생하게 실감났어요.” 막내딸이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다 말을 이어갔다. “저희 아빠도 형사셨거든요. 예전에 아빠가 수사현장에 관해서 들려주셨던 얘기들이 소설 속에서 언뜻언뜻 비슷하게 나와서 더 재밌었어요. 어쩌면 그렇게 소설을 재밌게 잘 쓰세요?”

     김수분의 마음 속에 문득 짓궂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아버님께서는 아직도 형사일을 하세요?”

     그 순간 그는 막내딸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속으로 미안해 하면서도 이런 잔인한 인연에서 재미를 느꼈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 뿐만 아니라 사인회에서도 만난다.

     “아니오..... 아빤 이젠 관두셨어요.” 마음이 불편해진 막내딸이 화제를 돌렸다. “사인 멋있게 해주세요. 친구들한테 자랑-”

     최은주 양에게
     별처럼 빛나고 꽃처럼 아름다운 은주 양이 앞으로도 맑고 아름답게 생활했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하세요.
     2007. 7. 18.
     김수분

     또다시 공포소설가의 짓궂은 장난기가 발동한 것이었다. 그의 두뇌 속을 뒤져 3년 전 최형사가 불러주었던 사인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 하지만 자신의 사인을 휘갈기고 나자마자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들었다. 놀란 눈을 하고 있는 최은주의 얼굴이 보였다.

     “어, 어떻게 제 이름을 아셨어요? 지금 제가 아직 선생님한테 이름도 밝히지 않았는데.....”

     김수분은 짓궂은 장난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사인 받으러 온 팬이 이름을 불러주기도 전에 성급히 사인을 해버린 것이다.

     “김수분 선생님은 절 아세요?” 최은주가 소설가를 빤히 쳐다보았다.

     소설가는 속이 뒤틀렸다.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자고 괜히 쓸데없는 장난을 벌였을까? 조심해야 한다. 형사의 딸이 뭔가 냄새를 맡을 수도 있는 것이다. 여우 같은 형사에게서 나온 딸이니 여우 같은 감각을 물려받았을 것이다.

     최형사의 망령이 그를 비웃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 놈의 형사는 어찌나 영악하던지. 사실 최형사가 3년 전에 찾아와서 <낚시터의 산고양이 두 마리> 책에 수분의 사인을 받았던 것은 형사의 말대로 막내딸에게 선물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사실 더 큰 목적은 따로 있었다.

     낚시터의 실제사건에서 살인범이었던 김수분은 낚시터 주인이 운영하는 여관에 묵으면서 숙박장부에 인적사항을 남겼었다. 거기에 쓰여진 이름과 주소 모두 가짜였지만, 필체는 고스란히 남아 경찰의 증거물로 남았던 것이다. 그래서 최형사는 소설책에 사인을 받아 숙박장부에 있는 필체와 대조해 보려 했던 것이고.

     여우 같은 형사 새끼. 분명히 딸도 여우일 거다. 지금 여기서 어떻게든 납득이 가는 대답을 해주지 못한다면, 최은주는 이상하게 여길 것이고, 그것이 발단이 되어 결국에는-

     최은주가 공포소설가의 대답을 기다리며 서있었다.

     비상! 비상! 김수분은 자신의 머릿 속에 저장된 최형사의 기억들을 모조리 뒤지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많은 기억들을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뒤지고 있었다. 이렇게 서둘러서야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최은주의 눈치를 살피며 식은 땀을 흘리고 있을 때, 마침내 원하던 것이 걸려들었다. 벼락이 내리치는 쾌감이 그를 전율하게 했다. 만세, 만세, 만만세!

     그의 머리 속에 있는 저장고에서 뽑아낸 최형사의 기억은 한 장의 사진처럼 보였다. 생전의 최형사가 경찰서 자기 책상에 앉아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경찰청 전산망을 검색하는 것인가? 아니다. 최형사는 막내딸이 운영하는 홈페이지를 보며 그 방대하고 꼼꼼한 내용에 감탄하는 중이었다. 막내딸이 운영하는 홈페이지!

     그 즉시 최형사가 읽고 보았던 최은주 홈페이지의 내용 모두가 김수분의 두뇌 속 최전방으로 보내졌다. 말하자면 즉석 다운로드인 셈이다.

     “은주의 김수분 팬사이트.” 소설가가 한결 여유로운 모습으로 말했다. “그 홈페이지 운영하는 최은주 씨 맞죠?”

     “어, 어떻게 제 홈페이지를-” 최은주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자기도 모르게 오른손으로 달아오른 뺨을 만졌다. 오른뺨을.

     “아, 그 홈페이지 저는 자주 가보는데 왜 모르겠어요. 고맙게도 저를 널리 홍보해주는 곳인데.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 홈페이지 보면 최은주 씨가 머리 길렀던 사진이 올라와 있잖아요. 그걸 본 기억이 있어서 여기 앞에 있는 분이 바로 그 최은주 씨구나 하고 알았죠.” 이 정도면 너의 의문에 충분한 해명이 되었겠지? “지금은 머리가 짧지만 얼굴을 보니까 딱 감이 오더라구요. 워낙 미인이셔서.”

     “하하, 감사합니다. 근데 제 홈페이지에 있는 그 머리 긴 사진, 단발머리 사진으로 바꾼지 꽤 됐는데.” 그녀가 혀를 약간 내밀었다.

     김수분은 그 혀를 보고 생각했다. 깜찍한 것 같으니라고. “네? 아, 이거 홈페이지 자주 방문한다는 말 거짓인 거 들통났네요. 에, 사실 바빠서 요 근래는 최은주 씨 홈페이지를 잘 들르지 못했습니다.”

     “괜찮아요. 선생님께서 제 홈페이지도 들러 주시고, 얼굴하고 이름도 기억해 주셔서 너무 기뻐요.”

     김수분이 사인한 책을 건네 주었다. 엄청난 태풍이 자기한테 접근하다 다른 곳으로 비껴간 것 때문에 저절로 안도의 한숨 소리가 작게 새나왔다.

     책을 받아들고 그래도 아쉬운지 사인대 앞에 서있는 최은주에게 김수분은 뭔가 멋있는 한 마디를 해주고 싶어졌다.

     공포소설을 쓰는 남자가 열렬한 팬에게 해줄 수 있는 멋진 말이 뭐가 있을까?

     “앞으로 좋은 작품으로 성원에 보답하겠습니다. 기대해 주세요.”

     생각만큼 멋진 말을 아니었지만, 그 순간 떠오른 최선의 말이었다.

     최은주는 활짝 웃으며 꾸벅 인사하고는 뒤돌아서서 갔다.

     김수분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앞으로 더욱 열심히 작품을 써야겠다는 의욕을 다졌다. 그리고 걸어가는 그녀의 청바지 위로 드러난 탱탱한 엉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자지가 슬그머니 부풀어 올랐다. 쟤랑 섹스하고 싶다.

     앞에 사람이 서있는 기척이 느껴져, 아쉽지만 최은주의 엉덩이로부터 시선을 거두었다.

     김수분은 자신의 사인을 받으려고 사인대 앞에 서있는 사람을 보았다. 책은 물론이고 세상 모든 것에 무관심할 것처럼 생긴 - 돈만 빼고 - 젊은 남자가 무성의하게 책을 내밀었다.

     아르바이트생이로군.

     수분은 책에다 사인을 하고 다시 건네주었다. 책을 받은 남자가 아무 말 없이 떠나갔다.

     수분은 사인대 앞으로 늘어선 줄을 흘낏 쳐다보았다. 꽤 긴 줄이었다. 서점 복도를 가득 메운 줄이 출입문 바깥에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는 옆에 서있는 출판사 직원을 바라보았다. 그 직원이 수분을 보고 미소 지었다.

     웬 알바생들을 이리도 많이 데려왔냐?

     공포소설을 쓰는 남자는 다시 사인대 앞에 줄 선 사람들에게 사인을 해주기 시작했다. 공포소설을 쓰는 남자도 고달픈 사회생활을 무작정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저 고달픈 순간을 빨리 끝내고 집에 가서 쓰던 소설을 마저 쓰고 싶은 생각이 간절할 뿐이었다.

     - 끝 -

     2004.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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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7
  • No Profile
    무한슬픔 04.09.24 22:44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어요. 재형님 공포 소설은 특징이 있네요. 지난 번 작품도 그렇고 이번 작품도 그렇고. ^^ 다음 작품 기대하겠습니다.
  • No Profile
    이야기 04.10.01 20:59 댓글 수정 삭제
    멋지군요...
  • No Profile
    수오 04.10.19 09:46 댓글 수정 삭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사실 소설 분위기 자체는 재미있게 읽을 분위기는 아니지만 =ㅁ=)
  • No Profile
    식스센스 04.12.20 23:06 댓글 수정 삭제
    일상과 초현실성을 잘 섞은 분위기는...
    스티븐킹의 적자가 아닐까 생각이 드는군요.
    조금만 각색하면 호러영화의 소재로도 만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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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위스롤 05.06.22 19:57 댓글 수정 삭제
    정말 재미있게 단숨에 읽었습니다^^
    아... 정말 대단하세요..재형님.... 정말로요..
  • No Profile
    MOMO 05.09.15 03:26 댓글 수정 삭제
    단편한곳에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들어있어 더 재미있게 읽었내요.그리고 마지막...결국 밝혀지지 않는 아슬아슬함과 허무함.재형님 글 처음 읽었어요^^
  • No Profile
    시간을 할애해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소설입니다.^^
    소설 속의 소설도 소설로 보고 싶다고 생각되는 건;; 저 뿐인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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