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갈원경 우주로

2021.10.01 00:0010.01

우주로

갈원경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건조한 기후에 내리는 빗줄기는 가늘어도 반가워서, 나는 길가의 돌멩이 위로 먼지를 함께 떨어뜨리는 비를 그대로 맞고 서 있었다. 뿌연 풍경 너머 길 건너편에 한 사람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주 잠깐 하늘을 올려다 본 사이의 일이었다. 인적이 드문 거리, 무채색의 거리에서 언뜻 그 사람의 옷이 희게 보인 듯했다.

"이봐요! 거기 서 있으면 안 됩니다!"

내 소리에, 그 사람이 스르륵 돌아서서 나를 보았다.

"거기, 그거, 철거할 건물이라니까요! 접근 금지 줄 둘러놓은 것 안 보입니까?"

샛노란 줄이었다. 노랑과 짙은 감색의 줄무늬가 눈에 띄는, 어른의 손바닥 두 개는 될 만큼의 폭을 못 보고 지나쳐갈 사람이 있을까. 그는 자신이 서 있는 바로 앞에 있는 줄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나를 보고, 그리고 빙긋 웃으며 줄을 넘었다.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오랜만에 번잡한 곳에 나와서 정신이 없었어요."

내 바로 앞에 서서 그가 말했다. 그의 옷이 희다고 느낀 것은 단순한 착시였던 듯, 옅은 회색이었을지도 모를 그의 옷은 벌써 짙은 빛으로 젖어 있었다.

"…혹시, 노모스Nomos 요원이십니까?"

젖은 옷을 털지도 않고 그가 물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원이란 거창한 호칭으로 불리는 나는 세계연합 직속의 불평등조사위원회 소속이다. 세계연합 직속의 위원회는 20여 개에 육박하고, 불평등조사위원회는 사실 그렇게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도 아니었다. 정식 호칭이 중간관리직인 '위원'이든지 실무를 담당하는 '요원'이든지 그 이름값을 한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어쨌든,

"잘 부탁합니다. 아난케Ananke라고 합니다."

그는 아주 오래전의 인사법대로 허리를 굽혔다. 성직자들은 부담스럽다. 그들이 드러내는 저 이름만 해도 그렇다. 원래 자신이 갖고 있던 이름은 묻혀버리고 그들은 신전에서 받은 이름만을 사용했다.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니라 신이 준 이름이 그들의 이름이라고 하면서.

윗사람들이 생각해낸 아이디어였을까. 다인종으로 구성된, 국적까지도 다양한 이 위원회의 실무담당 요원들에게 특수분야의 사람들을 함께 다니게 하자는 것은. 게다가 하필이면 내가 속해있는, 재개발 지역이 전체의 80%에 육박하는 이 지역이 성직자들과의 연계 지역이었다는 것은 나로서는 끔찍한 일이었다.

나는 무신론자다. 세계가 하나가 되고 모든 사람이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이 세계화 시대에도 나는 불평등조사위원회가 결코 없어질 리 없다고 믿는다. 결코 사람과 사람이 완전히 평등하게 살아가는 낙원같은 미래는 올 리 없다. 그러므로 그런 미래를 줄 수 있다고 말하는 신의 이름은 내게 아무런 매력도 없었다. 그런 내가 신전의 옷을 입고 과장된 동작으로 허리를 숙이고 인사하는 이 남자와 같이 일을 해야 한다니.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아파지는 일이다.

"철거할 건물인 거 모르셨나 봅니다?"

그 사람을 일으킬 심산으로 내가 물었다. 그 사람, 아난케는 물끄러미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여기저기 금이 가 있는 건물을 응시했다.

"예전 추억이 되살아날 것 같아서…라고 해 두죠. 건물이 흐느끼는 소리가 너무 컸기도 했고."

그러니까 성직자들이란, 돈독이 오른 사업가거나 몽상가라는 거다.

"신전이 가까이 있는데… 차라도 한 잔 하시겠습니까? 비도 피할 겸."

감사합니다만 사양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생각이었지만 머리를 끄덕여 버렸다.

 


신전은 정말로 시내에서 가까이 있었다. 언덕 위에 있거나 한 것도 아니고 그저 길가에 서있는 흔한 건물 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다른 건물보다 조금 한 층이 높게 생겼다는 것, 둥근 지붕을 올렸다는 것 정도가 달랐을 뿐이었다. 신전의 입구에 장식된 글씨로 L자가 걸려 있었다.

"Logos…, 우주 이성이라는 뜻이죠."

아난케가 문을 열며 말했다. 신전의 내부는 완전히 풀숲처럼 푸른 초록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신단에 드리워진 진한 암록색 휘장도, 바닥에 깔린 황록색 카페트도 모두 이 신전이 마치 풀숲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이 지역의 사람들 열 명 중 일곱 명 이상이 Logos를 믿었다. 그러나 그 결과 그들이 얻은 게 무엇인가. 세계에서 가장 뒤떨어진 지역 중의 하나, 다른 지역의 정부가 이 지역에 경제적인 미끼를 던지면 외면하지 못하는 곳. 사람들은 안일하고 순응적이고 소극적이다. 이 지역 담당은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직서를 낸다는 것이 과장이 아니다. 나처럼 5년을 넘기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우주라."

내 헛웃음에도 아난케는 엷은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이 신전 안에서 보는 아난케는 마치 이 신전의 일부인 듯이 옅게 흐려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 표정만큼은 변함없이 내 머릿속에 각인되듯이 박혀오는 것이다.

"여기, 58지역이 이렇게 낙후된 채로 있는 것도 로고스에 의한 것인가요?"

"노모스 요원은 58지역 출신이시지요."

대답 대신 아난케가 말했다. 58지역 출신은 심지어 세계연합의 산하에 취직을 하더라도 29지역이라든가 15지역 같은 부유한 지역은 담당하지 않는다. 그들은 내가 58지역에 얼마나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한지를 이야기할 때마다 지역성을 벗어나지 못한 편파적인 발상이라거나 출신으로 인한 콤플렉스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얼마나 편리한 방법인가. 그렇지만 뜻대로 도태되어줄 내가 아니다.

"저는 이 지역이 좋습니다. 풀이 살아있고, 바람 내음이 아직 건강하고. 오히려 재건축으로 새로 들어설 신형의 건물들이 더 염려스럽지요."

"사제께서는 이 지역 출신이 아니시니까요."

그를 흉내내는 말투로 내가 되받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건물을 철거하는 폭발물의 소리가 들리죠. 사람들은 근처에 오질 않으려고 하고, 마켓도 문을 닫아버려요. 그런 곳이 여기 58지역입니다."

조금 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만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평온하게 웃음을 짓고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난케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옷이 어느새 말라 있다는 것을 문득 알아챘지만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사제들이 어느 정도의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어느 종교의 사제이든지 말이다.

"이 별 바깥에 다른 생명체가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믿으십니까?"

평온하게 그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세계연합에서 추진하는 우주화 계획은 분명히 요원들 위주로 진행할 거라고 했었습니다만."

"그렇다곤 해도 저 같은 다른 위원회 소속까지 관련될 일은 없겠죠."

그가 어떻게 해서 세계연합 내부의 일을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어쩌면 이 지역의 가장 대중적인 종교인 Logos의 사제를 세계연합의 일원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미끼로 제공된 정보일지도 모른다. 그에게 우주화 계획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요원들이 반대하고 있는지 설명해줘야 할까 망설일 때, 어린 소년 사제 하나가 우리에게 찻잔이 놓인 쟁반을 가지고 나왔다.

차를 부탁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신전에 들어올 때는 누가 있는 낌새조차 없었다. 이 소년이 우리를 숨어서 볼 만한 공간도 없었을 것 같다. 하지만 사제들이 가지고 있는 이상한 능력이라는 것은 깊이 생각할수록 이쪽만 성가셔진다. 나는 쟁반을 놓고 가볍게 목례한 후에 돌아서는 소년의 하얀 목덜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이가 열 네다섯쯤 되었을까. 아니 그보다 어릴지도 모른다.

"고맙습니다, 사제님."

내 말에도 소년 사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셀 주니어는 귀가 들리지 않습니다. 집안의 유전이죠."

그를 돌아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셀은 이 신전을 지키는 가문의 이름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사제라고나 할까요. 1대인 셀 1세 셀 시니어, 2대인 셀 2세, 3대인 셀 주니어. 본명들은 다 있지만 보통은 그렇게 부릅니다."

셀이라는 이름이 이 신전을 지키는 사람들의 것이라면 아난케는 왜 셀이라는 이름이 아닌 걸까. 그가 이 신전에 속해 있는 사제라면. 아난케는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하는 듯이, 정말로 그럴지도 모르지만, 덧붙여 말을 이었다.

"저는 이 신전의 사제지만, 셀 가문 사람은 아니어서요. 셀 시니어가 이 종단의 첫 번째 사제가 되었을 때부터 저는 여기 있었지만. 지금 와서는 군식구인 셈입니다."

그가 가볍게 웃었다. 셀 시니어가 지금 저 소년의 할아버지라고 한다면 아난케는 보기보다는 나이가 많다는 뜻이겠지만, 사제들이 언제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사제들의 ‘이상한 능력’이 그들의 외양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그러니 내게 이렇게 경어를 쓰는 사제 아난케의 실제 나이가 얼마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 노모스 요원께서는 우주화 계획에 관련되실 겁니다. 제가 장담하죠. …차가 식겠습니다."

아난케의 뜬구름 잡는 것 같은 말들을 들으며 나는 꽤 오랫동안 신전에서 머물렀다. 차는 향긋했고,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알 수 없는 노랫소리는 단순하면서도 감미로웠다. 아난케는 그 노래가 1대 셀의 허밍이라고 알려 주었다. 신전의 벽을 울려 나와서인지 오래된 관악기처럼 깊은 울림으로 신전을 채웠다. 그렇게 그 소리에 취해 있다가 신전에서 나와 다시 위원회 건물로 돌아올 때는 어느새 해가 저물어 있었다.

 

 


그와 같이 일한 지 사흘째 되던 날에, 아난케의 예언은 적중했다. 우주화추진위원회에서 실시한 첫 번째의 시범 비행이 실패해, 탑승했던 요원 열 명이 모두 사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외부에서 추가 인원을 모집하는 안은 부결되었고 각 위원회에서는 두 세 개 팀의 요원들을 우주화추진위원회의 파견 요원으로 보냈다. 그리고 나와 아난케는 예상대로 그 우주화추진위원회로 파견되었다.

로고스 사제 뿐 아니라 다른 종교까지 합해도 종교계의 사람은 아난케 혼자였기 때문에 그는 금방 우주화추진위원회의 유명인이 되었다. 처음에는 그가 목에 걸고 있는 사제의 장신구 때문에, 그리고 다음에는 언제나 웃음을 머금고 있는 표정 때문에,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언제나 확신에 차서 말하는 그의 어투 때문에.

"아난케는 적응훈련은 받지 않나요?"

"아아…, 저는 나가진 않을 겁니다."

아난케는 교육장 맨 뒷자리에 앉아서 그 모든 교육을 빨아들이기라도 하는 듯이 경청했고, 훈련장에서는 정작 자신은 탑승하지 않으면서도 훈련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조용히 지적해주곤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포함한 요원들 대부분이, 이 Logos의 사제가 천문학이나 물리학, 심리학에까지 상당히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사제님 말이죠, 사실은 나이가 500살이 넘는대요.

양성평등보장위원회에서 온 요원 한 사람이 진지하게 이렇게 말했을 때,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리기는커녕 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몇 번인가 우주여행을 계획했었다. 벌써 몇 백 년 전의 역사에는 달에 발을 디딘 사람이 있었다고도 전해져왔고, 많은 인공위성들이 우주 위를 순환하며 우주의 정보를 제공하고, 수명이 다해 폐기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 속에서도 실제로 살아있는 사람들이 탑승하여 우주에 있는 다른 별에 착륙한 것은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소설에만 등장했던 우주로의 이주 이야기가 기치를 들기 시작한 것은 내가 태어났던 50년 전의 즈음이라고 한다. 발달한 지역의 사람들은 낙후된 지역의 사람들과 자원을 공유하는 것보다는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다른 대안을 찾아주기를 바랐다. 그들이 제시한 것이 우주화였다. 한정된 이 땅에서 서로의 생명을 담보로 할 것이 아니라 넓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 보라고. 젊은 기업가 한명이 전재산을 우주화에 투자한다고 발표하는 자리에는 참가자 모두 꿈에 부풀어 열광의 함성을 보냈다.

< 우주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분명 사람이 살 수 있는 별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전문가들은 이미 가능성이 있는 수십 개의 별을 선택해 두었습니다. >

우주화추진위원회 소속의 요원 10명을 태운 셔틀이 처음으로 우주를 향해 출발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곧 우주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대기권을 벗어나고 달의 인력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려는 그 시점에서 셔틀은 갑작스럽게 조종사의 제어에서 완전히 이탈해버렸고, 사람들은 발사 직후 흥분을 서로 나누고 있던 생방송 중 셔틀에서 보내오는 긴급신호를 들었다. 이후 방송은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셔틀 탑승자의 가족들이 오열하고, 방송 진행자는 무슨 말을 이어야 할지 모른 채로 갈팡질팡했으며, 방송은 먼 하늘에서 추락하는 우주선으로 보이는 한 줄기 연기를 모든 시청자들에게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꿈꾸던 미래 대신 좌절의 순간을 실시간으로 목격했다.

 

일 년 가까운 시간을 요원들 20명이 함께 지내며 훈련을 했다. 선발된 요원들이 모두 식구가 없는 홀홀단신들이라는 것을 알고서도 우리는 반발하지 않았다. 세계연합에서는 두 번의 실수를 원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절망을 다시 방송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두 번째의 실패가 있더라도 피해는 최소한으로 할 방법을 모색했다. 사람들의 충격을 포함해서. 우리들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이 땅에서 완전히 혼자인 우리들은 실패의 순간이 오더라도 남아있을 누군가를 걱정하지 않을 것이고, 다른 별에 도착하더라도 이 땅을 그리워하지 않고 살 수 있으리란 것을.

 

"노모스, 들어가도 됩니까?"

달까지의 왕복 운행을 하기로 한 전날의 밤, 저녁 느즈막하게 아난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대답 대신에 문을 열어 주었다. 늘 풀빛의 옷 위에 사제의 목걸이를 늘어뜨리고 있는 그가, 어쩐 일로 새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그 옷이 이상하게도 눈에 익었다.

"내일은, 정말로 가지 않을 건가요."

"저는 가지 않습니다."

아난케는 커튼을 열어 놓은 창밖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훈련소는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는 지역, 누구도 내부를 염탐하기 어려운 곳에 지어져 있어서 창밖에 보이는 것은 검푸른 밤하늘 뿐이었다. 막 만월에서 벗어난 달이 푸르게 빛났다.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저 중의 하나라는 것은 압니다만."

재미없는 농담에 아난케는 빙긋 웃었다.

"실례하겠습니다."

휘릭. 내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그의 흰 옷자락이 내 눈을 가리고, 그의 손이 내 이마를 덮었다. 따스한 온기 속에서 흰 옷자락은 보이지 않고 내 앞에는 드넓은 밤하늘이 펼쳐졌다.

- 보이나요?

멀리서, 아니 머릿속에서, 아난케가 물었다. 내 눈앞에서 금방이라도 닿을 듯한, 달이 눈앞에 있었다. 땅 위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깊고 맑은 푸른 빛의 달이. …아니, 아니었다. 달의 빛깔은 저렇게 선명하지 않다. 푸르도록 흰 달과는 전혀 다른 별. 그것은…, 우리가 살고있는 바로 이 별, 네메시스와 훨씬 더 닮아 있었다.

- 좀 더 가까이 갑니다.

어질, 시야가 급하게 속도를 낸 듯이 변화했다. 그 별이 내 시야를 가득 채우고, 나는 그 별의 하늘을 지나 별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마치 사람 같은 생명체들이 살고 있었다. 돌로 정교하게 세운 제단이 있고, 아난케가 지금 입은 옷처럼 휘장을 두른 것 같은 옷차림을 하고. 거기엔 높은 건물도 없고 정신없이 움직이는 기계들도 없었다. 나는 어느새 그들에게 손을 뻗으려 하다가, 화들짝 현실로 돌아왔다. 시야에는 다시 유리창 너머의 밤하늘이 보이고, 내 옆에는 한결같이 엷게 웃고 있는 아난케가 서 있었다.

"뭐죠 이건? Logos 신의 전언인가요?"

"당신이 가게 될 곳. 거기 사람들은 자신의 별을 '지구'라고 부릅니다. 여기, 네메시스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바다로 채워진 별인데."

"내가 갈 곳은 여기서 몇만 광년이나 떨어져 있습니다. 아직 저런 근거리 촬영은 성공한 적도 없었어요. 전 신도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은 어떻든지, 이런 걸로 사람을 현혹하지 마십시오."

"아니오, 당신은 믿고 있습니다."

단호하게 아난케가 말했다.

"당신은, 우주에 사람이 살 수 있는 별이 있다는 것도 처음부터 믿고 있었죠. 당신이 가려고 하는 저 변방의 별 SA-428, 초 원거리 촬영에서도 푸르게 빛나는 별에 벌써 몇 달 전에 매혹되었습니다. 그래서 지원한 거 아닙니까?"

"무슨……!"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가장 먼 지역인 그 별에 지원한 것은 단말기를 통해서였고, 그 단말기 자료는 본인조차 검색 이력을 알 수 없게 보안처리 되어 있었다.

"노모스 요원. 내가 여기 왜 있는지 알고 싶습니까? 아니, 알고 싶죠?"

그 순간, 나는 아난케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불평등조사위원회 안에 독신이고 식구라곤 없는 사람이 나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외부와의 협력 작업에 뽑힌 것이 하필이면 나였는지. 나는 지금껏 그것이 내가 담당하는 구역에서 Logos가 가장 대중적인 종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 지역을 종교와의 연합지역으로 정한 것은 누구였을까?

"이 모든 것을, 당신이 계획한 거군요."

대답 대신에 아난케는 가볍게 웃었다.

"알려 주고 싶었습니다. 심장이 왼쪽에 있는 사람들, '인간'들이 살고있는 별에 갈 사람에게. 그 푸른 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별을 어떻게 지킬 수 있는지. 그건 네메시스 안에서의 나 외에는 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내 오른쪽 가슴에 손을 얹었다. 쿵쿵 박동 소리가 격하게 들려왔다.

"우주를 횡단해서 저 별, 지구까지 가려면 시간과 공간의 역류지점을 지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시점에서 모든 것이 반대로 바뀌어요. 심장의 위치, 피가 도는 방향까지."

시간의 역류점. 1년의 훈련 중에도 들은 적이 없었던 이야기지만, 나는 이제는 믿지 않는다고 자신을 속이지 않았다. 아난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었다. 그 신전에 들어섰을 때부터, 나는 이로서 완전히 다른 삶을 시작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당신도, 거기에서 왔군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난케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 나는 거기에 있습니다. 여기와는 다른 모습이지만.

 


아난케는 그 다음 날 아침, 우리의 시험 비행을 보기 전에 신전으로 돌아갔다. 처음부터 종교계의 인물로서가 아니라 그는 여러 가지 우주에 관한 정보제공을 위해서 온 것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시험비행은 성공적이었고, 곧바로 다음날 우리는 각자의 우주선에 올랐다.

외지인 '지구'를 지원한 사람은 나 혼자였다. 우주화위원회에서는 내가 실패할 확률이 가장 높다는 것을 몇 번 당부하면서 다른 별로 진로를 수정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그러나 나는 SA-428로 목적지가 설정된 1인용 우주선에 올랐다.

아쉬운 것은, 내가 몇 달의 운항 후, 바로 그 '시간역류지점'을 지나는 순간에 잠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지구의 대기권 안에 있었다.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내 모습도, 우주선의 모습도.

착륙은 그날 저녁이었다. 나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흰 우주선에서 뛰어내렸다. 변화된 우주선은 대기권 속의 흔한 구름과 똑같은 모습이었으므로 내가 떠나온 우주선 때문에 지구인들이 혼란스러워할 리는 없을 것이다.

한시간 쯤 지났을까, 누군가가 나를 일으켰다.

[ 저런, 누가 여기다가 갓난아이를 버리고 갔을까. ]

[ 아주 영특하게 생겼네요, 우리가 데리고 가서 키워요. ]

여자가 나를 꼬옥 끌어안았다.

[ 이 아이, 웃고 있네. 사내아이가 없어서 걱정이었더니 잘 되었군 그래. ]

[ 분명 이게 Ananke죠. 이름, 이름을 뭐라고 지을까요? ]

Ananke, 아난케, 당신은 여기에서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거군요.

[ 아리스토텔레스. 그걸로 합시다. ]

나는 자랄 것이다, 좋은 스승을 만나 이 별의 지식을 얻고, 나는 이 별이 네메시스처럼 되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다. 사람은 모두 다 똑같아야 한다는 것을, 머릿속 지식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또 이야기할 것이다. 어떠한 것에도 우주이성Logos는 존재하고, 또 모든 것에는 아난케가 작용하고 있다고.

 
댓글 0
분류 제목 날짜
곽재식 우주선 유지 장치 특별 프로그램2 2022.10.31
서계수 인생서점 2022.10.01
박도은 돌고래 앨리 2022.10.01
갈원경 마지막 가을에 경서랑은1 2022.09.30
곽재식 소원의 정복자2 2022.09.30
박도은 겨울, 내 사랑 2022.09.04
빗물 추석이니까요 2022.09.01
곽재식 소설 쓰다 그만두는 이야기3 2022.08.31
갈원경 여름의 섬 2022.08.01
노말시티 꿈에서 읽은 이야기 (본문 삭제) 2022.08.01
전삼혜 시간을 넘어도1 2022.08.01
곽재식 극기4 2022.07.31
곽재식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4 2022.07.01
김산하 상태창! 2022.07.01
갈원경 수국의 꽃 2022.06.30
곽재식 우제점2 2022.06.01
갈원경 신사의 밤 2022.06.01
노말시티 최악의 변신 2022.06.01
강엄고아 별의 기억 (본문 삭제) 2022.06.01
미로냥 그때 흰 뱀 한 마리가 2022.06.01
Prev 1 2 3 4 5 6 7 8 9 10 ... 52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