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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체온이 있으니까

노말시티

  


내가 미친 게 아니라는 증거가 필요해. 그가 말했다. 속삭였다. 아니 생각했다. 나도 정확히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미친 게 아니라는 증거가 필요해. 이 모든 게 나의 상상이 아니라는 증거. 너는 분명히 세상 어디엔가 존재하고. 그리고 너의 고양이는 검은 색이라는 거.

사람이 사람을 만날 수 없게 된 지는 이미 오래 되었다. 짙은 안개가 도시를 감싼 뒤로는 아무도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자칫 다른 사람과 마주치게 되면 안개를 타고 건너온 치명적인 바이러스들이 상대방의 몸에서 폭주한다. 까마득히 높은 고층 아파트의 중간 층에 갇힌 지 이 주 만에 전기가 끊기고 세상은 단절되었다. 전기가 없으면 이렇게 많은 것들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세상은 멈춘 거나 다름 없었다.

그래도 인간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분명히 살아 있고 지구상에 살아남은 유일한 인간도 아니다. 짐작컨대 꽤 많은 사람들이 어딘가에서 외롭게 살아남아 있는 모양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문 앞에 최소한의 생존을 이어나갈 수 있는 생필품을 배달해 줄 정도의 조직을 유지한 채.

그 어떤 행동 지침이나 짦은 메시지도 없이 생수와 통조림을 던져 놓고 가는 이유를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할 말이 없었는지도. 어쩌면 그런 하찮은 일로 낭비하기에는 종이와 펜이 아까웠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찾은 해답은 이렇다. 아무런 희망도 없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그 어떤 희망도 없이 인간은 그저 생존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건 어쩌면 인간의 특기였다. 필멸의 운명을 깨닫고도 생을 포기하지 않는 연습을 지겨울 정도로 이어왔던 인간. 다른 사람과 만나면 그 즉시 생명을 잃는 전대미문의 바이러스에 처절하게 무너지고도 인간은 완전히 멈추지 않은 채 어딘가에 숨어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생필품 패키지는 그 증거이자 명령이었다. 내가 살아 있으니 너도 살아 남으라는 명령.

야옹. 유우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하얀 색의 털뭉치가 공처럼 튀어와 능청맞을 정도로 사뿐하게 무릎 위로 올라 앉는다. 단언컨대 지금 살아남아 있는 인간들에게는 적어도 하나의 인간이 아닌 친구가 있으리라. 생필품 패키지에는 거의 매번 애완동물용 사료가 끼어 있었다. 그 사료까지 먹어가며 자신의 생명을 이어갈 사람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자신 몫의 음식을 덜어내 애완동물을 살릴 사람이 훨씬 많을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무엇보다 이 작고 따뜻한 생명체가 곁에 없다면 고독하고 단절된 삶을 계속해야 할 이유를 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나는 살아 있다. 유우와 함께.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다른 인간의 존재. 만날 수도 없지만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다른 인간의 체온은 그렇게까지 절실하지 않았다. 다만 어딘가에 다른 인간이 존재한다는 흔적을 확인하고 싶었다. 생필품 패키지를 배달하는 게 과연 인간일까 아니면 드론일까. 그걸 확인할 용기는 없었다. 그리고 그건 배달자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확인하는지는 몰라도 패키지는 내가 깨어있을 때는 절대로 배달되지 않는다. 만에 하나 발생할 수 있는 인간끼리의 밀접 접촉을 방지하기 위해서겠지. 실수로라도 다른 사람과 삼 미터 이내로 가까워지면 즉시 바이러스가 활동을 개시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패키지를 배달하는 건 인간이다. 다른 인간이 살아 있다는 하나의 증거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인간이 멸종하지 않았다는 논리적인 증거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이 남기는 의미를 담은 흔적이다. 지적 생명체가 남긴 것이 분명한 어떤 흔적. 나와 동등한 수준의 지성을 지닌 생명체가 명확한 의도로 내게 보내는 메시지. 그게 내가 다른 인간에게 원하는. 유우가 줄 수 없는 신호였다.

그리고 나는 그 신호를 받았다. 내가 미친 게 아니라면.

처음에는 꿈이라고 생각했다. 눈을 감고 있었는데도 집안의 광경이 보였다. 가위에 눌리나보다. 그렇게 생각했다. 무섭지는 않았다. 대체 무서울 게 뭐란 말인가. 만일 진짜로 귀신이 나타난다면 눈물을 흘리며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차라도 한 잔 대접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종이에 그려진 그림 이상의 실제감을 줄 수 있는 인간의 형태라면 그게 망상이든 귀신이든 상관 없이 무조건 환영이었다.

가위가 아닌 건 확실했다. 눈을 뜰 수 있었으니까. 생생한 시각 정보가 들어오자마자 눈을 감았을 때 보이던 희미한 광경은 사라졌다. 다시 눈을 감자 아까의 광경이 흔들리는 수면에 반사된 것처럼 서서히 떠올랐다. 소파에 기대 부엌 쪽을 바라보는 광경이었다. 고개를 텔레비전 쪽으로 돌려 보았지만 시선은 반응하지 않았다.

역시 가위인가. 아니었다. 눈을 뜨니 검은 화면이 보였다. 고개는 텔레비전 쪽으로 정상적으로 돌아가 있었다. 다시 눈을 감았지만 이번에는 눈앞에 장면이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부엌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그제야 서서히 빛과 색이 들어차며 형태가 잡히기 시작했다. 고개를 움직여도 시선은 여전히 반응하지 않았지만 단단히 감은 눈이 부엌이 아니라 다른 쪽을 보고 있을 때는 장면이 서서히 흐려지며 사라졌다.

눈을 감아야 보이는 광경. 놀랍게도 나는 이상하다거나 소름이 끼친다는 생각보다는 이 기회를 놓치면 안된다는 생각이 앞섰다. 너무도 오랜만에 느껴보는 새로운 자극이었다. 말이 되든 안 되든 상관없었다.

나는 마치 장난감 낚싯대에 걸린 미끼를 잡기 위해 튀어 오르는 고양이처럼 사방으로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순간적으로 잡히는 장면들을 쫓아가면서 나는 몇 가지 사실들을 알아냈다.

눈을 감았을 때 보이는 장면은 특정한 위치와 고개의 각도에서만 선명하게 보였고 그 지점을 벗어나면 급격하게 흩어졌다. 그 지점은 눈을 떴을 때 실제로 그 장면이 보이는 위치와 각도였다. 다시 말해 눈을 떠도 그 장면이 보이도록 시선을 맞추고 눈을 감아야 그 광경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역시 착각이었나 싶어 조금 실망하려던 순간 시선이 움직였다. 내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눈을 감았을 때 보이는 광경이 마치 카메라를 돌리듯 옆으로 흘러갔다. 동시에 장면은 다시 흐려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그 시선에 맞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장면이 다시 선명해졌다. 감은 눈의 안쪽에서 흐르는 장면에 맞춰 몸과 시선을 실제로 움직여야만 선명한 장면을 유지할 수 있었다. 어색하게 따라 움직이던 나는 결국 얼마 가지 못해 그 장면을 놓치고 말았다. 아무리 몸을 옮기고 고개를 돌려봐야 선명한 광경은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환상이 사라지고 무언가를 경계하는 듯한 유우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리자 나는 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현실 감각이 돌아왔고 내가 얼마나 어이없는 짓을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눈을 감아야 보이는 광경이라니. 미쳤나보다. 드디어 미쳐가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다. 갑자기 무서워진 나는 유우의 따뜻한 체온에 한동안 의지하고 나서야 겨우 두근대는 심장을 가라 앉힐 수 있었다.

환상은 그 뒤로도 수시로 찾아왔다. 어떤 조건에서 어떤 식으로 보이는지 깨닫기 시작하자 더 자주 보였다. 사실 그 전에도 보였었는데 미처 알아채지 못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나는 점점 깨어있을 때 눈을 감고 있는 시간이 늘어났고 장면이 잡히기 시작하면 그에 따라 몸을 움직였다. 익숙해지자 눈을 감고 있다는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눈을 감고도 내가 거실에 있는지 방에 있는지 화장실에 있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었으니까.

눈을 감고 보이는 광경이 점점 선명해지면서 나는 그 광경이 실제의 내 집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집의 구조는 완전히 똑같았고 커다란 가전제품들의 위치도 대체로 일치했지만 희미하게 보이는 소품들은 달랐다. 나는 조금씩 내 집의 가구들을 환상과 맞추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품들이 더 또렷하게 보였다. 식탁을 약간 옆으로 옮겨 환상과 일치시키자 식탁 위에 놓인 통조림이 보였다. 내가 패키지로 받았던 것과 같은 통조림이었다. 그 위치에 실제로 통조림을 가져다 놓자 뚜껑이 따진 통조림과 그 안에 든 옥수수알이 보였다.

그리고 나는 드디어 눈을 감으면 보이는 환상 속에서 나를 보았다. 정확히는 내 손을 보았다. 그 손은 숟가락을 들어 통조림에 든 옥수수을 떠먹고 있었다. 그건 내 손이 아니었다. 다른 누군가의 손이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보고 있는 게 단지 나의 상상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보고 있는 실제의 시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눈을 감고 보고 있는 건 다른 누군가가 눈을 뜨고 보고 있는 광경인 셈이었다.

누군가의 시각 중추에 새겨진 영상이 어떻게 내 머릿속으로 전송될 수 있는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과 만나면 그 즉시 심장이 멈춰 죽어 버리는 바이러스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확실한 건 바이러스는 존재하고 그것때문에 인류가 멸망을 목전에 두고 있으며 나는 눈을 감은 채 누군가와 시각을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그 원리는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만일 조물주가 뒤늦게 이 현상이 물리 법칙에 어긋난다는 걸 발견하고 오류를 수정하려 든다면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멱살을 잡거나 아니면 제발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두 손 모아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건 내가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세상에서 다른 사람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기적같은 길이니까.

만일 이게 정말 다른 사람이 실제로 보고 있는 광경이라면 아마 그 사람은 나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실내 구조와 벽지와 이제는 켜지지 않는 형광등의 위치까지 똑같았으니까. 그리 멀지 않은 곳. 살아 남은 사람이 있었다. 어쩌면 바로 위층이나 아래층은 아닐까. 그곳에 누가 살고 있는지는 모른다. 아니 위층은 아닐 것이다. 발자국 소리가 들린 적은 없으니까.

다른 사람의 흔적을 발견하고 심지어 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적잖이 흥분했다. 이제는 화석처럼 굳어버린 도덕 관념 사이에서 이건 누군가를 훔쳐보는 범죄라는 죄책감이 잠시 피어오르기는 했지만 이내 털어버렸다.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세상이었다. 만일 누군가가 내 생활을 속속들이 들여다 보기를 원한다면 나는 얼마든지 허락할 용의가 있었다. 그렇게라도 다른 누군가와의 관계가 만들어진다면 기쁘고 감사할 일이었다. 직접 찾아와 해코지를 할 수도 없고 동네방네 소문을 낼 일도 없으니 애초에 무서워 할 이유도 없었다.

나는 내 집을 눈을 감고 보이는 장면 속의 집과 점점 비슷하게 만들어갔다. 가구들의 위치를 맞추고 소품들도 최대한 비슷한 것들을 찾아서 그 자리에 배치했다. 이제 나는 눈을 감은 채로 머릿속에 보이는 장면을 따라서 움직이며 찬장에 넣어 놓은 통조림을 꺼내 먹을 수도 있었고 책상 위에 쌓인 책 하나를 집어들어 읽을 수도 있었다.

머릿속의 시야를 따라 실제로 움직이고 있으면 촉각을 비롯한 다른 감각들은 모두 내 집에 있는 물건들을 통해 전해지지만 오직 시각만큼은 다른 사람의 집을 보고 있게 된다. 내가 넘기는 책장은 내 집에 있는 내 책이지만 머릿속에 보이는 글자는 다른 사람이 읽고 있는 책에 써 있는 글자가 되는 셈이다. 하필이면 내 책이 조금 더 얇아서 넘길 책장이 없어진 탓에 결말 부분을 놓친 적도 있었다. 그런 식으로 감각에 괴리가 생기면 머릿속에서 보이던 책은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시야를 따라 움직이는 일은 어느새 내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차지해 버렸다. 유우와 놀아주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나는 하루 종일 눈을 감은 채 누군지 모를 사람의 시야를 따라다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머릿속 시야에서 그 누군가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손과 발이 살짝 보이는 정도였고 거울처럼 얼굴이나 전신이 보이는 장면에서는 모자이크를 한 듯 흐릿해졌다. 아마도 나의 실제 몸과 불일치 하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었다.

내가 주변의 모든 물건을 머릿속 광경과 똑같이 배치하고 시야를 완벽하게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은 다시 말하면 눈을 감았을 때 보이는 광경과 눈을 뜨면 보이는 실제 광경에 별 차이가 없다는 뜻이었다. 혹시 나는 실제로는 눈을 뜨고 있으면서 눈을 감고 있다고 착각하는 건 아닐까. 너무도 외로운 나머지 내 집에서 내 물건들을 보면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라고 믿게 되어 버린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생생했다. 나는 실제로 내 집에 있는 것과 다른 책을 읽었고 가끔은 옥수수 맛이 나는 파인애플을 씹기도 했다. 그러니까 내가 씹고 있는 건 분명히 옥수수였지만 눈에 보이는 음식은 파인애플이었다. 그것조차 모두 착각일까. 나는 상상 속의 책을 읽고 상상 속의 음식을 먹고 있는 걸까.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목소리가 들렸다.

- 누구세요?

그건 꼭 내 목소리 같았다. 귀로 들린 소리가 아니라 머릿속에서 생각으로 들린 목소리였기 때문일까. 역시 난 환상 속의 나를 보고 있었던 걸까. 하지만 그 단어들은 맹세코 내 머릿속에서 튀어나온 단어가 아니었다.

- 당신... 거기 있죠? 내 머릿속에. 분명히 있어.

목소리가 다시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머릿속으로. 생각으로.

- 네. 안녕하세요.

- 진짜!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을 거라고 상상은 되었지만 그 느낌이 전해지지는 않았다. 공유되고 있던 시각 중추에 언어 중추가 살짝 더해진 정도인 모양이었다.

- 제 말이 들리세요?

- 들려요! 너무 또렷하게. 이상한 느낌은 얼마 전부터 있었는데. 그러니까. 물건들이 자꾸 다르게 보였거든요. 분명히 파인애플을 먹고 있었는데 콩으로 보이기도 하고. 책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다른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기도 하고. 정말 이상해서. 내가 드디어 미친 건가 싶었는데. 저 제정신이죠? 이거 뭐예요? 무슨 초능력이에요? 텔레파시? 아니 그보다 그 쪽. 사람이에요? 살아있는 사람?

- 네. 사람이에요. 드림하나 아파트에 살아요. 그 쪽도. 여기 살죠?

- 맞아요! 당신. 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라고요? 그래요? 그런데 어떻게? 텔레파시를 쓰는 거예요?

- 저도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요. 그냥 어느날 갑자기. 당신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아니 당신이 보인 게 아니라 당신이 보는 게. 당신이 먹는 음식을 보고 당신이 읽는 책을 읽었어요. 그런데 이제. 이렇게 대화를 할 수 있네요. 세상에. 이게 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어요.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게.

- 이유는 상관 없어요. 제가 미친 거라도 상관 없어요. 당신이 내 상상이고 이게 다 내 착각이라도 상관 없어요. 그냥 이 느낌을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저기요! 제발 가지 말아요. 사라지면 안 돼요!

- 그러지 않을 거예요. 그러지 않을 수만 있다면.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건지는 저도 몰라요. 몰라서 약속할 수는 없지만. 가능만 하다면. 저도 이렇게 계속 얘기하고 싶어요.

- 약속해요! 약속을...

목소리가 점점 흐려지다가 완전히 사라진 순간. 나는 내가 인간이 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 집중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온 몸의 피가 모두 머리에 쏠려 있다가 순식간에 다시 몸으로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면서 나는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눈을 뜨자마자 나는 깨질듯한 머리를 붙잡고 집 안을 돌아다니다가 식탁 근처에서 겨우 다시 누군가의 시야를 잡아낼 수 있었다. 위치와 시선을 맞추고 몸의 자세까지 일치시킨 뒤 바이올린을 켜듯 서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를 몇 번 반복한 끝에 나는 다시 목소리를 전송할 수 있었다.

- 들려요?

- 대체 어디 갔었어요!

나는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최대한 간단하게 내가 알아낸 사실들을 설명했다. 눈을 감았을 때 보이는 시야. 그 시야를 또렷하게 만드는 방법. 그리고 목소리를 전송하는 느낌까지. 그건 무척이나 피곤한 일이어서 설명을 끝낸 뒤 나는 한동안 식탁 위에 엎드려 있어야 했다.

- 이봐요. 정신이 들어요?

그 사람의 목소리였다. 내 목소리와 같지만 내게서 나오지 않은 목소리. 아까보다 훨씬 차분해진 목소리가 조용히 나를 깨웠다. 그는 이해가 빨랐다. 말도 안 되는 이 사실에 금방 적응해서 시야를 유지하고 내게 목소리를 전해오기 시작했다. 그가 집중할 수록 나는 더 적게 힘을 쓰면서도 접속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 많은 이야기를 했고 정말 오랜만에 외롭지 않았다. 유우가 달래주는 부분과는 다른 구석에서 켜켜이 쌓여 있던 외로움이었다. 그렇다. 유우. 나는 그 사람만큼이나 반가운 친구를 하나 더 만났다. 그 사람도 고양이를 기르고 있었다. 검은 고양이. 이름은 초코였다.

초코가 보이는 건 시야에서 유우의 위치와 완전히 겹쳐있을 때 뿐이었다. 고양이를 한 자리에 붙잡아 두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주 가끔 유우가 내 무릎 위에서 몸을 돌돌 말고 따뜻한 체온을 전해 주고 있을 때 초코가 그 사람의 무릎 위로 올라오면 그제서야 검고 매끈한 그 사람의 고양이가 눈에 들어왔다. 무릎으로 전해지는 체온은 초코의 체온도 그 사람의 체온도 아닌 유우의 체온이었지만 나는 왠지 멀리 떨어져 있는 그 둘의 체온 역시 유우와 마찬가지로 따뜻할 거라고. 그 둘은 내 상상이 아닌 실제로 존재하는 생명이라고 굳게 믿을 수 있었다.

- 우린 만날 수 없는 거지.

그가 말했다.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 그렇겠지.

- 만나면 바로 죽게 될까? 혹시 바이러스에 면역이 생기진 않았을까?

- 면역 같은 건 안 생기잖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단 한 차례의 예외도 없이 근접 접촉한 사람들은 모두 죽었어.

-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 아닐거야. 바이러스는 그대로일 거야.

- 왜 그렇게 생각해?

그가 물었다. 이렇게 계속 물어보는 걸 보면 그가 내 머릿속 상상이 아닌 건 분명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대답했다.

- 생필품 패키지가 계속 배달되잖아. 여전히 우리가 잠든 사이에. 그걸 배달해 주는 사람들은 아마도 바이러스에 대해 우리보다 훨씬 많은 걸 알고 있을 거야. 그 사람들이 지금도 우리와 접촉하지 않고 있다는 건 바이러스도 그대로라는 뜻이겠지.

- 그래 그렇겠지. 너. 똑똑하구나. 이렇게 똑똑한 걸 보면 넌 내 상상이 아닌 게 분명해. 난 너처럼 똑똑하지 않거든.

- 무슨 소리야. 너 엄청 어려운 책 보던데. 나 그거 따라 보다가 몇 번 졸았어.

- 읽을 게 그거 밖에 없으니까.

나는 웃었다. 웃음도 전달이 될까. 아마도 아닌 듯했다. 감정은 전달되지 않았다. 나는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 나 웃는다.

대답이 돌아왔다.

- 나도 웃는다.

나는 정말로 소리내어 다시 한 번 웃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 동시에 끝을 모르는 탐욕의 동물이기도 하다. 달콤한 봄비 같았던 그와의 대화가 계속될 수록 다른 종류의 갈증이 밀려왔다. 시각 중추와 언어 중추에 이어 뇌의 다른 부분도 공유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촉감은 공유될 수 없는 걸까. 유우의 체온을 느끼듯이 그의 체온을 느낄 순 없을까.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채워지지 않는 갈증은 불안과 의심이 되어 돌아왔다.

- 내가 미친 게 아니라는 증거가 필요해.

그가 말했다. 우리는 번갈아가며 불안을 쏟아내고 또 달래 주었지만 그 주기가 정확히 맞아 떨어지지는 않았다.

- 넌 미치지 않았어.

- 어떻게 확신해?

- 난 네가 모르는 걸 말해 줄 수 있으니까?

- 머릿속으로? 생각으로? 네가 정말 내게 무언가를 말해 준 걸까? 그냥 말해 줬다고 내가 믿는 건 아닐까? 어떻게 확신하지? 넌 정말 실제로 어딘가에 살고 있는 거야? 내 상상이거나 내 또 다른 인격이 아니라? 넌 정말 내가 존재한다고 확신하니?

- 아니.

그렇게 말해 버렸다. 아니 생각해 버렸다. 입으로 하는 말이라면 이렇게 쉽게 내뱉지는 않았을 텐데. 이미 해 버린 생각은 거둬 들일 수 없었지만 나는 애써 변명했다.

- 확신은 못하지만. 그렇게 믿어. 나도 존재하고 너도 존재해. 유우도 존재하고 초코도 존재해. 유우는 하얀 색이고 초코는 검은 색이잖아. 초코가 존재하면 너도 존재하는 거야.

- 그래 맞아!

그의 생각이 머릿속에 또렷하게 새겨졌다. 시선이 휙 돌아가서 나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그의 시야를 쫒아가야 했다. 그가 무언가를 팔에 안았지만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초코였다. 초코를 보기 위해서는 나도 유우를 팔에 안고 체온을 느껴야 했다. 유우의 이름을 불렀지만 멀리서 대답하는 울음소리가 들릴 뿐 내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나는 눈을 떴다. 그제야 소파 위에 앉아 있는 유우가 보였다. 유우에게 천천히 다가가 팔에 안았다. 그리고는 다시 눈을 감고 그와 시선을 맞췄다. 장면이 점점 또렷해지면서 팔에 안긴 고양이가 보였다. 초코였다.

- 갑자기 왜 그래?

- 우린 만날 수 없지.

- 그렇지.

- 하지만 고양이는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을 멸종으로 몰고가는 이 바이러스는 고양이에게 전염되지 않았다. 사람은 만나면 죽지만 고양이는 만나도 죽지 않는다. 하지만.

- 어떻게 하려고?

- 유우를 보고 싶어.

- 나도 초코가 보고 싶어.

그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 이렇게 하자. 너 케이지 있지? 유우를 케이지에 넣고 내 집 현관 앞에 놓는거야. 생필품을 배달하듯이. 아니. 내가 갈께. 내가 너희 집 현관 앞으로 갈께. 유우를 케이지에 넣어서 현관 앞에 둬. 그럼 내가 가서 초코의 케이지와 유우의 케이지를 바꿔 오는 거지. 어때?

- 하지만...

유우가 없으면 살 수 없다. 유우를 집 밖에 내 놓는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만일 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가져가기라도 한다면. 하필 그때 생필품 배달하는 사람이 나타나 유우를 데려간다면. 그가 여기까지 오는 건 안전할까. 초코를 데리고 오다 다른 사람을 만나기라도 한다면. 유우를 데리고 가다가 사고라도 난다면. 내가 망설이며 말했다.

- 너무 위험해. 여기까지 오다가 누군가를 만나면 어쩌려고.

- 위험한 건 나도 알아 아는데.

그의 말이 끊겼다. 시야가 조금 흐릿해지려고 해서 나는 얼른 정신을 집중했다. 갑자기 불안이 밀려왔다. 최근 그의 감정 기복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내가 그랬던 건가. 그의 말이 다시 들렸다. 끊길 듯 희미한 목소리였다.

- 솔직히 나. 한계야. 더 이상은 못 버틸 것 같아. 어떤 게 상상이고 어떤 게 현실인지 점점 모르겠어. 말이 안 되잖아. 이런 거. 텔레파시라니. 미친 거지. 너무 외로워서. 살 이유가 없는 거야. 이렇게는. 살아 남은 사람들이 있을까. 아니 난 살아 있는 걸까. 요즘은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 난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고.

- 무슨 소리야! 멀쩡히 살아 있잖아! 살아서 나하고 말하고 있잖아!

- 너? 네가 누군데? 넌 그냥 내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잖아.

- 난 살아 있어! 여기 분명히! 유우가 살아 있듯 나도 살아 있다고!

- 증거가 필요해. 믿음이. 아니 난 그냥 체온이 필요한 거야. 초코. 그래 내게는 초코가 있지만. 너 그거 아니? 초코도 요즘 이상해. 그렇잖아. 고양이라고 외롭지 않을까. 고양이가 내 외로움을 완전히 달래줄 수 없듯이 나도 고양이의 외로움을 완전히 달래줄 수는 없겠지. 그래. 이건 초코를 위한 거야. 어쩌면. 그래. 초코와 유우가 만나야 해.

- 어쩌려고!

- 나 갈게. 너희 집으로.

목소리가 끊겼다. 나는 벌떡 일어나며 눈을 떴다. 유우가 놀란 듯 무릎에서 뛰어내려 책장 위로 올라갔다. 야아옹. 나는 문득 유우와 초코의 위치가 겹쳐졌을 때 유우도 초코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초코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을까 궁금해졌다. 외로워서 그런 거라면. 이 이상한 현상이 내가 너무 외로워서 시작된 거라면. 유우도 나만큼이나 외롭다면.

그가 여기로 오고 있다. 초코와 함께.

견딜 수 없이 가슴이 뛰었다. 만나야 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와 나. 그리고 유우와 초코. 죽을지도 몰라. 하지만 유우와 초코는 죽지 않을 거야. 적어도 그건 확실하니까.

정신이 나간 걸까. 심장 박동이 가라 앉지 않았다. 나는 현관으로 달려가 외시경으로 밖을 바라보았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철문에 귀를 가져다 댔다. 아예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귀를 박았다. 쿵쿵쿵.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아니 심장 소리인가. 야옹. 어느새 다가온 유우가 내 뺨을 핥았다. 따뜻해. 내가 살아 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유우의 체온. 살아 있는 유일한 가치였다. 그와 초코는 따뜻할까.

쿵쿵쿵. 이제는 확실히 소리가 들렸다.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였다. 죽어도 좋았다. 다른 사람과 삼 미터 이내로 접근하면 바이러스가 활동을 시작한다. 중추 신경계를 마비시키는 바이러스는 불과 몇 초 내로 심장을 멈추게 한다. 몇 초. 그의 체온을 몇 초나 느낄 수 있을까. 몇 초면 목숨을 걸 가치가 있을까. 나는 현관 손잡이를 잡았다.

야옹. 유우가 날카롭게 울었다. 나는 유우의 눈동자를 보았다. 서로의 체온이 살아있다는 증거라면 서로의 눈빛은 믿음의 증거다. 유우의 눈은 내가 옳은 결정을 내렸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내가 믿었다. 야옹. 유우가 다시 한 번 울었고 나는 손잡이를 돌려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열린 문 틈으로 나보다도 빨리 유우가 튀어나갔다.

문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 미안해.

그가 말했다.

- 괜찮아.

내가 대답했다.

- 정작 나가려고 하니까 용기가 안 났어. 무엇보다 초코가...

- 그래. 나가지 말라는 눈으로 널 바라 봤겠지. 말 안 해도 알아.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의 시선이 돌아가는 방향으로 나도 시선을 돌렸다. 소파 위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시선을 멈추고 있던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 역시... 보이지 않는 거야?

- 응. 여기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 미안해.

- 괜찮다니까. 잘 된 거야. 얼마나 다행이니. 유우와 초코가 만났으니.

- 너도 쟤네들이 함께 노는 걸 봤어야 하는데.

- 네가 봤잖아. 그럼 됐지 뭐.

그는 또 잠시 말이 없었다. 그가 침묵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난다. 뭐 상관 없었다. 유우가 떠난 뒤로 내 삶에서는 체온이 사라졌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체온이 없어도 살 수는 있었다. 나는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하고 책을 읽고 무언가를 끼적거리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눈을 감고 있으면 그가 찾아왔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유우와 초코가 뭘 하고 놀았는지 시시콜콜 내 머릿속에 속삭여 준다. 나는 어렴풋한 꿈을 꾸듯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 사람들은 언제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가 물었다. 나는 떠다니듯 대답한다. 입을 벌려 소리를 내지 않고도 대답할 수 있다는 게 좋다.

- 글쎄.

- 왜 우리에게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는 걸까.

- 답이 없으니까?

왜 사람들은 만나지 못하게 된 걸까. 그가 물었는지 아니면 내가 물었는지 모르겠다. 사람은 말야. 나는 생각했다. 원래 다른 사람은 만나지 못하는 것 아닐까. 위치를 맞추고 시선을 맞추고 나서야 우리는 겨우 서로 만날 수 있어.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어서야 우리는 만나는 거지. 그래서야 다른 사람을 만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냥 자신의 복제본과 만날 뿐이잖아.

- 그래도 체온이 있으니까.

그가 말했다. 내 말을 아니 내 생각을 들은 걸까. 나는 긴 잠을 자기 시작했다. 유우와 초코가 따뜻한 작은 몸을 내 옆에 기대고 있는 꿈을 꾸면서.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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