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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 단편 곱하기 무한대

2004.11.26 21:2711.26

판타지 랜드823543@hanmail.net  물론 흐린 날이다. 그야, 흐린 날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비가 내릴 수 있을까. 다만 놀란 까닭은 비가 오기는 왔는데, 딱 한 방울만, 내 손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저 뽀얀 하늘 어딘가 둥실거릴 구름에서 고작 한 방울의 비를 만들어낼 확률이 얼마나 될까. 또, 그게 내가 아무 생각없이 펼친 손바닥에 떨어질 가능성은.
  혹시 이 빗방울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지지 않을까, 별똥별을 볼 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지는 것처럼. 그게 아님, 이 순간에 무슨 어려운 주문같은 걸 외우면 지구가 폭발한다던가, 아스팔트에서 삶은 달걀 나무가 자라난다던가 하는 마법같은 일이 생기는 건?
  그런 생각을 하며 지하철역 입구 계단에 들어서자마자 비가 쏟아진다. 근처의 사람들은 우산을 펴는 것보다 지하철역 계단으로 빨리 들어가는 방법으로 비를 피한다. 비가 오니 갑자기 추워지고, 달려가는 사람 사이에서 오줌이 마렵다. 걱정할 것 없다. 지하철엔 화장실이 반드시 있다.
  쏴아아아, 툭. 한 남자가 어깨를 부딪히고 달려간다. 계단으로 굴러떨어질 뻔 했지만, 내겐 멀쩡한 양쪽 발이 있으니 넘어지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 없이 달려간다. 기분 나쁘지는 않다, 비가 오니까, 기분 좋으니까. 내 어깨를 치고 간 남자는 흰 색 바지를 입고 있다. 비오는 날에 흰 색 바지라……, 얼룩 지겠네. 하긴, 비는 곧 그치겠지. 그는 화장실로 달려간다. 나는 화장실로 걸어간다.
  쪼르르르, 수돗물이 주전자 물 흘리듯 구멍 속으로 흐른다. 저 수돗물도 하늘에서 땅으로 끝없이 퍼부어대면, 쏴아아아 - 하는 소리를 낼까.
  아까 그 남자는 거울 앞에서 한 다리를 세면대 위에 올린 채, 하얀 바지에 묻은 얼룩을 지우고 있다.
  나는 흰 치마를 입고 계단을 내려가던 누나를 떠올린다. 아, 그래, 그 누나는 치마에 얼룩이 생길까봐 걱정을 했던 거구나. 그래서 우산을 그렇게 털었던 거구나.
  어린 시절, 나는 늙은 아빠를 하나 가지고 있었다. 아빠라는 건 지금의 내겐 없다. 아빠 대신, 아버지가 존재할 뿐이다. 이러나저러나 나는 늙은 아빠가 있었고, 내 어린 시절의 그 아빠라는 사람은 왼쪽 발목이 잘려나가서, 발이 없었다. 지하철 계단 중턱 즈음에 나를 끌어안고 주저 앉아서, 사람들이 작은 바구니에 동전을 넣고 지나가길 기다리며 자랑스럽게 다친 다리를 내놓고 있던 사람이었다.
  나는 추우면 더욱더 더러운 아빠 품으로 파고들었다. 내가 춥다고 하면 아빠는 추워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렇게 추운 척 하지 않아도 충분히 추워 보인다면서, 그렇게 파고 들어 추운 척 하지 않아도 그런 계단 한 가운데 아빠랑 앉아 있으면 분명히 불쌍해 보인다면서. 그 말 뜻을 나는 알 수 없었지만, 아빠는 여러 번 그 말을 들려주었다.
  간혹 즐겁게 이야기를 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면 나는 마치 국어 듣기 평가를 하는 고등학생처럼 귀를 기울였다. 정확한 내용은 파악하기 힘들기 마련, 나는 그렇게 많은 어휘를 알지 못했다.
  "아빠, 애정결핍증이 뭐야?"
  나는 애정결핍증같은 건 걸릴 틈이 없었다. 나는 이 역에서 지하 교통을 이용하는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아이였다. 온 도시의…… 사랑을 받는 아이였는지도.
  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사람들은 우산을 접느라 걸음이 느려졌다. 앞에 가는 사람은 느려도 좋지만, 뒤 오는 사람은 불편했다. 사람들은 모두 우산을 어떻게 접을지, 우산을 어떻게 털지, 우산 접을 때 계단은 제대로 딛을 수 있을지를 가늠하느라 구석에 앉아있는 사람은 볼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바구니에 떨어지는 돈이 적었다. 그런 날은 으레 점심이나 저녁 빵 하나는 나 혼자 먹었다. 아빠는 굶었다.
  그렇게 내가 점심 빵을 먹고 있는데, 어떤 누나가 하얀 치마를 입고 지하 세계의 입구를 내려왔다. 나는 일곱 살이었고, 누나의 다리를 훔쳐보고 있었는데, 그런 것은 그녀의 상관할 바가 아니었나 보다. 그 누나는 옆으로 팔을 쭉 뻗어서 우산을 털었다. 그 동작은 매우 희한했다.
  누나의 눈은 자신의 발이 계단을 잘 밟고 있는가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는 바람에 우산의 물기가 내 빵과 얼굴에 튀었고, 나는 '아' 하고 감탄사를 토했다. 나는 빗물의 차가움이나 빵에 대한 아쉬움보다, 그 누나가 그렇게 이상한 동작으로 우산을 털었던 것이 더 불만이었다. 나는 분노한 입으로 누나에게 외쳤다.
  "왜 그래!"
  누나는 어쩔 줄 몰라하더니 -
  "괜찮니?"
  나는 찡그린 표정으로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누나는 우산을 계단 위에 살포시 놓고는 가방을 뒤졌다. 처음엔 휴지를 꺼내어서 물기 묻은 내 얼굴을 닦았다. 누나가 내 얼굴을 닦는 동안 나는 빵을 씹으며 누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누나는 휴지를 넣고는 다시 가방을 뒤졌다. 아빠와 바구니를 본 탓이리라.
  "어, 지갑이…… 어디 있지?"
  누나는 이제 가방을 뒤지는 것을 그만 두고 치마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었다. 한 쪽 주머니에선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고, 반대쪽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죄송해요. 집에 지갑을 두고 왔나 봐요."
  아빠는 자고 있었다. 나는 아빠를 한참 보다가 빵을 꿀꺽 삼키고 찌푸린 표정을 풀었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괜찮아, 누나."
  아빠는 계속 자고 있었다.
  "근데 그건 왜 다시 집어 넣어?"
  누나는 꺼냈다가 집어 넣은 십원짜리 동전을 다시 꺼내어 내게 주었다. 나는 바구니에 집어넣었다.
  비는 계속 쏟아졌다. 점심시간 이후로 바구니가 먹은 돈이 천원이 넘지 않았다. 나는 바구니에 있는 백원 세 개와 오백원 하나를 아빠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남아있는 십원을 바라보았다. 그 누나 얼굴이 어떻게 생겼더라. 그 누나는 무슨 옷을 입고 있었지? 치마는 하얀 색이었는데, 위에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런 식으로 우산을 털었던 거지? 나는 그렇게 우산을 터는 사람은 처음 보았고, 그런 동작은 나에게 하나의 미스테리로 남았다. 그 뒤의 큰 사건이 있기 전까지 내 머리속은 그녀가 우산을 터는 동작으로 가득했다.
  다음 날도 비가 내렸다. 그 날 아침, 나는 아빠가 내려놓은 바구니에, 주머니에 넣고 조물락거리던 따뜻한 십원을 넣었다. 그런데 어떤 아저씨가 예의도 없이 십원짜리 하나를 바구니에 넣고 갔다. 바구니 왼쪽에 있는 것은 그 아저씨의 동전이었고, 오른쪽이 누나의 동전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또 다른 아저씨가 십원을 넣었다. 그렇게 십원만 연속으로 들어오는 것은 처음 보았다. 양심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백원도 아니고 십원을, 그렇게 하나씩 넣어가지고는 50개나 넣어야 빵 하나 값을 한다. 그 다음에 어떤 아줌마가 애들 셋을 데리고 지나가면서 십원을 네 개나 바구니에 넣었다.
  나는 누나의 십원에 의심을 품었다. 그 십원에는 분명 다른 십원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평소에는 한 개도 볼까말까한 십원짜리 동전이 그 날 아침에는 열 일곱개나 바구니에 들어갔다. 백원 두 개랑 오백원 하나를 빼곤 다 십원짜리였다. 점심때는 그보다는 적었지만, 백원짜리보다 역시 십원이 많았다. 나는 흰 치마를 입고 이상하게 우산을 털었던 누나가 마법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생각은 더욱더 자주, 그녀가 우산을 터는 모습이 떠오르게 한 장본인이리라.
  나는 마법의 십원을 찾으려고 했고, 그 년도의 십원은 두 개였다. 나는 그 둘 중 하나가 마법이 걸린 십원이므로 간직했다. 그리고 매일 아침 표시해놓은 그 십원 두개를 바구니에 넣었다. 둘째 날, 스무 개의 십원이 들어왔고, 다음 날은 서른 몇, 마흔 몇 하는 식으로 십원짜리 동전의 수가 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백이 넘었고, 그 다음엔 셀 수가 없었다.
  나는 무거운 십원짜리들을 겨우 들고 슈퍼마켓에 가서 빵 두개를 사다가 아빠에게 갔다. 아빠도 신기하다고 했다. 그런데 그 신기함이 아빠에게 기쁨이 되지는 않았나 보다. 아빠는 늘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그 날도 십원짜리들 때문에 바구니를 몇 번 비워야 했다. 내가 낮잠을 자고 있는데, 아빠가 깨웠다. 한 아줌마가 서 있었다. 아빠는 그 아줌마를 따라가라고 했다. 나는 그 아줌마가 평범한 아줌마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 아줌마는 내게 손을 내밀었고, 그 손바닥에 빗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어쩌면, 나는 마법 세계와 관련된 곳으로 가게 되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호기심에 따라갔다.
  나는 지금 그 아줌마를 어머니라 부르고 있고, 그 남편을 아버지라 부른다. 크면서 조금씩 알게 된 게 있다. 나는 그 지하철역 계단을 지나던 많은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이끌었다. 그 계단을 지나던 사람들은 학생, 직장인, 주부 할 것 없이 어린 나이에 구석에서 쪼그려 앉아 구걸하는 나의 운명이 불쌍해서, 그래서 돈이 아니라 무엇으로라도 도와주려고 했다. 아마, 그것은 나를 입양한 어머니와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그 근처의 노점상 상인들도 그랬을 것이다.
  하여튼, 나는 한참을 그 아줌마, 지금의 어머니를 따라서 걸었다. 그리고 검고 커다란 자동차에 탔다. 일곱 살의 나는 부잣집 차가 신기했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문으로 본 세상은 움직였다. 내가 다리를 놀리지 않아도 움직였다. 문 손잡이에는 버튼들이 있었다. 호기심에 눌렀다. 창문이 열렸다. 자동차가 멈추었다. 창문 밖의 세상도 멈추었다. 햄버거 냄새가 났다. 어디에서 햄버거를 파는 걸까? 주위를 둘러보았다.
  「햄버거 990원」이라는 종이가 붙은 노점을 보았다. 그 주위에 사람이 많이 모여있었다. 비가 쏟아졌다. 사람들은 어딘가 비를 피할 곳을 찾아 달렸다. 부잣집 차가 움직였다. 비를 피하는 사람들과 자동차는 같은 방향으로 달렸다. 몇 초의 거리를 가자, 내 집이 보였다. 지하철역, 내가 살던 곳. 그 세계의 입구에 아빠가 마중나와있었다. 아빠는 활짝 웃고 있었다. 비를 피해 햄버거 가게에서부터 달려오던 사람들이 아빠를 스쳐 지나갔다. 지하 세계는 비를 피하기엔 제격이었으니까.
  어떤 남자가 굉장히 급하게 지하철 역 문을 향해 달렸다. 그 남자는 아빠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아빠는 균형을 잃더니 계단 아랫쪽을 향해 넘어졌다. 고꾸라지면서도 웃고있었다. 비가 오는 날이었으니까, 넘어져도 기분이 좋았나 보다. 그 순간에 어떤 마법의 주문을 외쳤다면 좋았을까?
  그 후로 아빠를 본 적이 없다. 일곱 살 꼬마였던 나는 즐비한 노점 종이간판들을 보았다. 990원, 1490원, 1990원, ……. 틀림없이, 난 온 도시의 사랑을 받는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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