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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박시은 특급

2006.04.03 21:1704.03

지금 기차 옆 자리에 앉아 자고 있는 박시은을 닮은 그녀를 내가 만나게 된 것은, 좀 거창하게 부풀려 말하면, 외계 문명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일하는 "한국 천문 정보 해석 연구소"라는 그럴듯하게 들리는 기관에는 원래 연구소 전체를 통틀어서 단 3명의 직원밖에 없었다. 동동주 반주를 좋아하는 영감님인 소장님과, 연구소의 연구비를 따오기 위해 온갖 인맥을 동원해 고생하시는 김옥자 박사님, 그리고 실무연구원인 나. 셋 뿐이었다. 천체 분광 정보학을 전공한 나는 NASA의 제트 추진 연구소에서 공개한 자료를 해석해서 되돌려주는 일을 주로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구체적으로 허블 우주 망원경이 수집한 여러가지 우주를 싸돌아다니는 전파, 빛, 방사선 같은 것들의 주파수와 강도를 이리저리 따져 보는 일이었다.

당장 느껴지는 것처럼, 작살나게 재미없고 심심한 일이었으며, 도대체 이런 연구소가 있는지 없는지 조차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최악의 비인기 분야였다. 그나마, 전쟁놀이를 그만둔 미국 대통령이 인기관리를 위해 JFK 흉내를 내기 시작했고, 다시 우주관련 연구개발 활동에 돈을 때려넣으면서 미국쪽에서 많은 자료가 쏟아졌기에 대강대강 유지만 되고 있는 수준이었다.

때문에 우리 연구소의 세 사람은 과학기술부 장관이 바뀌거나, 선거 결과에 따라 정책 결정권자들이 바뀔 때 마다 혹여 연구소가 없어지지는 않을까 항상 두려워 했다. 그들이 졸면서 서명하는 한 장의 가벼운 문서 때문에 예산이 삭감되고, 그러면 우주 저편의 별들을 연구하는 우리 연구소 같은 것이 가장 먼저 사라질 가능성이 있었다. 회식때마다 그런 점들을 서로 한탄하며 우리는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마치 사라예보에 울려퍼진 한 발의 총성이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듯,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상황은 급반전 되었다. 여느 때 처럼 내가 분석해서 NASA에 보낸 자료를 미국 SETI의 연구진이 다시 가공해서 살펴본 결과 그것이 외계인의 메세지라는 결론이 나왔던 것이다. 전세계의 언론들은 지구를 녹여 액체로 만들듯 달아 올랐다.

"우리의 과학기술로 외계문명을 발견해낸 것입니다. 우리 과학기술부의 꾸준한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와, 의지. 바로 그것이, 오늘날 인류문명사와 지구 생명의 흐름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 순간을 있게 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과학기술부 장관은 이것이야말로 한국 과학계의 위대한 과업이라면서 대통령, 미국 대통령, UN사무총장, 교황, 심지어 스티븐 스필버그와 보아까지 만나고 다니면서 자기 자랑을 했다. 순식간에 "한국 천문 정보 해석 연구소"에 대한 전국민의 관심은 집중되었고, 과학기술부와 정보통신부가 우리 연구소를 서로 자기 관할로 하기 위해 싸우기까지 했다.

결국, 대통령 후보를 꿈꾸고 있던 정보통신부 장관의 힘이 더 강했기에, 우리 "한국 천문 정보 해석 연구소"는 정보통신부 관할로 바뀌었다. 3명이었던 우리 연구소의 직원은 한 달 사이에 무려 2천 40명으로 늘었다.

이를 계기로 한국 천문 정보 해석 연구소의 소장은 정보통신부 차관이 직접 맡게 되었고, 우리 소장님은 "기초연구팀"이라는 팀의 팀장이 되었다. 우리 연구소는 교외의 한적한 건물에서 28층짜리 빌딩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새 빌딩으로 이사를 가면서 내 자리는 지하1층 보일러실 옆이 되었다. 좋아진 점으로는, 외계문명을 발견한 덕택에 나의 연봉이 8% 인상되었다는 것과, 내 컴퓨터의 모니터가 세로로 돌려도 그림은 바로 나오는 신제품으로 교체되었다는 점이 있었다.

지금 기차 안에서 잠이 들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그녀는 우리 연구소에 새로 배치된 2천 37명의 직원 중 한 명이었다. 나와 그녀를 비롯한 10 여명의 연구원들이 대전에서 열린 "세계 우주 문명 과학 회의"라는 정부 선전행사에서 심부름을 하기 위해 출장을 가게 되었던 것이다. 하루 종일 책상 줄을 맞추고,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명찰을 나눠 주었던 것이 피곤했던지, 그녀는 기차안에서 졸기 시작했고, 덩치큰 몸집 탓에 어깨가 넓었던 나는 그녀가 고개를 대면 딱 베게 처럼 받쳐 주기 좋았기에 우연히 그녀는 나에게 기대어 자게 된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잠든 그녀를 빤히 보고 있기 좀 뭐해서 창 밖을 보았다. 기차는 넓은 들판이 펼쳐진 농촌 지역을 지나치고 있었다. 저녁 시간, 해질녘이 되어 저녁놀이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 빛이 비치어 넓은 들판 전체가 다 타오르는 듯 느껴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는 괜히 시간이 지나가는 것이나 세월의 무상함 같은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곧 옛날 기억도 마구 떠올라 막 슬퍼지기 까지 했다. 타오르는 노을의 붉은 빛은 기차 안에도 가득 쏟아져서, 사람들의 얼굴과 기차의 금속들에 저녁 햇빛을 어리게 하고 있었다.

"으음...."

그녀는 자다가 입을 한번 열었다가 닫으며 소리를 냈다. 약간 주근깨가 있는 그녀의 볼 위에 눈부신 저녁놀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녀의 귀에는 기차창의 그림자가 드리워 졌다. 그녀는 쌀밥에 찌개는 머슴처럼 잘 먹지만, 조금이라도 느끼한 음식은 젓가락으로 두어번 찌르고 다 먹었다고 하는 식성 때문에, 목이 가늘고 턱선이 뚜렷했다. 그렇게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녀의 나이보다도 한 몇 살은 더 어려 보였다.

"어라라."

그녀를 깨우기 싫어 나는 그냥 그렇게 가만히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녀는 침을 흘리며 자고 있었다. 그녀의 오른쪽 뺨을 타고 흘러내린 침이 내 옷에 닿을 듯 말 듯 했다. 별로 좋은 옷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딱 한 벌 밖에 없는 정장 양복인데 이런 어처구니 없는 계기로 눈에 잘 뜨이는 어깨에 얼룩을 남기게 되면 약간은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슬쩍 몸을 돌려 그녀를 깨워야 하나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그러기가 좀 싫었다.

"어어...?"

그런데, 그녀가 부시시 눈을 뜨면서 스스로 깨어났다. 그녀는 일어 나면서 오른손으로 침을 닦았다. 나는 그녀에게 내 손수건을 꺼내 주었다. 그녀는 아직도 잠결인지 무심결에 내 손수건을 받아 얼굴을 닦았다. 그녀는 점차 정신을 차리며, 나와 내 어깨를 바라 보았다.

"어? 뭐예요. 어... 이거 무슨 속셈있는 거 아니예요? 어디, 이 양가집 규수를 말야."

그녀는 갑자기 나에게서 최대한 먼 방향으로 몸을 빼며 말했다.

"뭐가 무슨 속셈은 속셈이야. 여기가 무슨 초등학교 학원가입니까. 미술찾고 속셈찾게."
"또, 안 웃긴 개그 억지로 한다."
"자기가 멀쩡한 사람 덥치고 자면서 옷에 침까지 흘려 놓고 어디 남한테 속셈이니 주산이니 합니까?"
"아니. 자기가 등에 살이 많아서 이렇게 보면 자리에서 좀 옆으로 튀어나와 있잖아. 그러니까 자연히 이렇게 몸이 쏠리다 보면 그렇게 될 수도 있는거죠. 딴 사람 이목도 생각하고 예의가 있는 사람이었으면 슬쩍 피해 주는게 예의 아니겠어요? 예?"
"그러다가 잠깨우면 분명히 또 잠깨웠다고 괴롭혔을거야."
"그건 자기 생각이지."

그녀는 장난스런 표정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차가운 이온 음료캔을 건넸다.

"자고 일어나니 인제 또 목마르다고 투덜투덜하겠지."
"오오. 예측외의 배려. 너무나 예측하기 쉬웠던 당신 특유의 비아냥 거림 없이 친절히 건네 주었다면 하마트면 고마움을 느낄뻔 했음."

그녀는 이온 음료 캔을 땄다. 그녀가 한 모금 두 모금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연구기획팀의 연구원 박승유가 나타난 것이었다.

"오늘 우리 서울에서 행사 뒤풀이 할건데. 어때요? 어디가 좋을거 같아요? 칵테일 바 같은데 가까?"

박승유는 그녀를 보면서 말했다. 하루 종일 시달려서 피곤해 미치겠구만, 또 뭘 술먹고 밤새고 난리친다는 이야기인가.

"뒤풀이요?"
"예. 행사활동비 좀 남았는데 그걸로 뒤풀이하려고요."
"오늘 쫌 피곤한데......"
"피곤해서 술먹으면 또 저 때 처럼 취해서는, 택시타고 가면서 버스로 착각하고 막 버스카드 찍으려고 지갑들고 미터기에 들이미는거 아냐?"
"내가 언제 그런적 있다고 그래요."
"내가 볼 거 못 볼 거 전부 다 봤다고."

박승유는 마음에 안드는 웃음을 덧붙이며 그녀와 재잘거렸다.

나도 분명히 오늘 행사에서 일한 사람인데, 왜 박승유는 나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그녀와만 떠드는 지 그것도 좀 속보이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왠지 지금 이 대화의 관계를 비집고 들어가려거든 뭔가 한 마디 끼어들어야 할 거 같아서 대뜸 박승유를 보며 말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이 그런 적 있어요? 그거 옛날에 왜... 배우 박시은 나오는 SBS TV단막극에서... 박시은이 그러던 건데. 거기서 보면, 박시은이 술 취해 가지고, 택시 타고 버스 탄 줄 착각해서 버스 카드 막 찍으려 그러거든요. 그 때 옆에 있는 사람이 말리면, 박시은이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놓아라. 버스는 선불이다. 아저씨~ 버스 카드가 안찍힙니다~' 그러거든요."

나는 웃긴 말이라고 생각하고 히죽 웃었다. 그러나 박승유의 모습은 엄청나게 냉랭했다.

"그런 게 있었어요?"
"예. 몇 년전에, SBS TV단막극 중에 '남과 여' 라는 거 있었잖아요. 그 중에 에피소드 하나 였는데."
"그런거 없었던 거 같은데요."
"지금은 없어진거 같은데.... 왜 MBC에는 베스트극장 있고, KBS에는 드라마시티 있고, SBS에는 '남과 여'라고 있었는데요."
"아니아니. '남과 여'라는 단막극 시리즈가 있었다는 거는 기억 나는데. 박시은 나오는 그런 편은 없었어요."
"없었다뇨. 그게 박시은이 택시엔터테인먼트로 소속사 바꿀 무렵에 찍은 거라서 나름대로 굉장히 분위기 잘맞는 재미있는 편이었는데."
"박시은 열혈팬이세요?"

박승유는 그렇게 말하면서 비웃는 듯한 웃음을 살짝 흘렸다. 그리고는 그녀의 얼굴을 한 번 보았다.

"굉장히, 나이에 안 어울리시게... 여배우한테 막 빠져서 팬클럽 활동하고 그러시나봐. 의외로 젊게 사십니다."

박승유는 그렇게 말하면서 히죽히죽 웃었다. 그녀도 그 웃음에 따라 웃어줄까 말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박승유는 말을 이었다.

"제가 원래, 신인 PD들 작품에 관심 많거든요. 그래서 단막극 같은 거 꼭꼭 챙겨 보는데, SBS 단막극에 박시은 나오는 거 없었어요."
"아뇨. 아뇨. 있었어요. 그게.... 그게... 제목이 뭐냐면........"

나는 가히 초조하기까지한 마음으로 머리를 쥐어뜯을 듯 고민했다. 겨우겨우, 그러나 매우 선명하게 제목이 떠올랐다. 나에게 용기를 불어 넣기 충분했다.

"제목이, '멋지게 세이 굿바이' 였습니다."

좀 유치하게 들리는 제목에, 그녀는 픽 웃었다. 박승유는 다시 한 번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녜요. 제가 기억력은 좀 좋은 편이었거든요. 박시은이 '쾌걸 춘향'하면서 다시 자리잡기 시작했고.... 그런 어린이 소설 같은 제목 단막극은 찍은 적은 없어요."
"아니라니까요. 그게 누구냐... 그 코메디언... 예. 그래, 김진수하고 같이 나왔던 건데......"

거기까지 말했을 때, 박승유의 옆에, 그를 항상 '오빠'라고 부르며 따라다니는 그의 팀의 다른 연구원, 김자경이 나타났다.

"맞아. 오빠가 기억력 하나는 짱이지. 어때요? 오늘 뒷풀이 갈거죠?"

김자경이 박승유 편을 들면서 그녀를 보고 말했다. 나는 억울한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이 뒤섞여 얼굴이 붉게 달아 올랐다.

"제가 사실 박시은 좋아하는 건 맞는데....... '멋지게 세이 굿바이' 라고 진짜 있거든요. 그거 제가 녹화까지 해서 여러번 본 건데......"
"녹화까지 해서 돌려보고 돌려보고 그랬다구요?"

박승유는 핫핫핫 하고 짧게 웃었다. 김자경도 같이 웃고 있었다.

"뭐, 사람마다 여러가지 취미나 열정이 다를 수 있는 거니까. 정 아직까지 정신이 정리가 안되시면, 언제 SBS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멋지게 세이 굿바이'라는 게 있는지 없는지 한 번 검색해 보세요. 혹시 너무 박시은 생각 열심히 하다가 꿈에서 본거 아녜요?"
"그게 아니라......"
"언니, 우리 뒷풀이 어디서 할지 계획 세우게 쫌 와봐요."

김자경은 그녀의 손목을 끌어 내 옆자리에서 일어나게 했다.

박승유는 그녀와 김자경과 함께 자신의 원래 자리로 사라졌다. 연기기획팀 연구원들이 주축이 되어 오늘의 뒷풀이 계획을 의논하고 있는 기차 저편 자리로 가버린 것이다. 그녀는 일어서서 떠나면서 잠깐 나를 쳐다 보았다. 나는 발갛게 변한 내 얼굴과 당황한 표정을 감추고 싶어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저녁놀을 자랑하던 해는 완전히 져서, 밤이 되어 있었다. 곧 지직거리는 방전 소리가 종치는 소리처럼 울려퍼지면서 기차 안에 형광등이 켜졌다. 순식간에 박시은이라는 여배우에만 광적인 집착을 할 뿐, 대인관계도 정상적인 어른스러움도 갖추지 못한 정서불안자로 나는 몰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두 모금 마시다 말고 남겨놓은 이온음료 캔만 쓸쓸히 내 옆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이튿날. 연구소에 출근해보니, 나를 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약간씩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빠, 어제 그거 진짜예요."
"오빠가 남얘기 하는 거 참 싫어하는데. 몰라. 그런 말이 있긴 하더라고. 그런데 오빠가 좀 더 들은게 말이야......"

박승유와 김자경은 4,5인과 함께 연구소 휴게실에서 그렇게 쑥덕쑥덕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자판기 커피를 뽑으러 나타나자 갑자기 대화를 멈추고 딴전을 피웠다. 어색하게 대화가 중단되자, 나는 박승유에게 목례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박승유가 답으로 말을 걸었다.

"어제, 그 박시은 나오는 뭐냐... 굿바이 어쩌고 하는 단막극 있죠? 그거 찾아보셨어요? 이제 아셨죠. 그거 언제 꾼 꿈입니까?"

박승유는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게 뭐가 재미있다는 건지 김자경도 옆에서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나는 이사람들이 단체로 나를 놀리고 있음을 알았기에 좀 화가 났다.

"그 단막극 제목은 '멋지게 세이 굿바이' 고요. 꿈이 아니라, 정말로 있는 겁니다."
"아.... 아직도 고집이시네. 그럼 우리 내기라도 할까요. 10만원 내기 어떻습니까?"

그의 여유 있는 답에, 휴게실에 모여 있던 연구원 모두가 웃기 시작했다. 나는 그 반응들을 보고 박승유가 다른 사람들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짐작이 갔다. 나는 대답 없이 휴게실을 벗어 났다.

휴게실을 벗어나 지하1층 보일러실 옆 내 자리로 다시 가려고 하는데, 가는 길에 나는 그녀와 마주쳤다. 그녀는 창백한 안색에 찡그린 표정이었다.

"안녕하세요. 어? 표정 왜 그래요?"
"몰라요. 어제 술 너무 많이 마셨나봐."
"어째 그럴거 같더라니."
"같더라니... 할 게 아니라, 자기가 정말로 부녀자를 배려하는 마음이 있다면 동행해서 집에 잘 들어가는가도 보고 그래야 한거 아니었던가?"
"아니... 뭐.... 어제 분위기가 내가 낄 분위기도 아닌거 같고... 해서 뭐...."
"자기, 맨날 술 퍼먹고 다니지. 해장국집 좋은 데 있으면 소개 좀 해줘요."
"어.... 해장국.... 해장국의 맛? 효력? 어떤걸 더 중요하게 치는 상황인가요?"
"둘 다."
"맛이 있으면 효과가 없고, 효과가 있으면 맛이 없는게 세상의 이치 아니겠어요?"
"몰라. 그냥, 자기가 생각하기에 제일 잘하는 해장국집 가르쳐 줘요. 있다가 점심시간에 방으로 갈테니까 해장국 사줘야 돼요. 알았죠?"
"아니, 내가 왜 당신 해장국을 사줍니까?"
"어제 혼자 도망간 벌이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사라졌다. 그녀는 여전히 밝은 태도로 나를 대해 주었지만, 거기에는 예전처럼 단순한 친근함과 거기에 겹친 존경의 마음이 아니라, 적잖이 풍부한 동정심과 연민이 대신 깃들어 있었다. 그녀도 어제 "뒤풀이" 술자리에서 나에 대해 쑥덕거리는 소문을 또 한 번 들은 모양임에 분명했다. 때문에 그녀가 해장국을 사달라고 한 것은 약간은 반갑고 또 약간은 착찹했다.

나는 어두컴컴한 지하실로 내려가면서, 그녀와 함께 벚나무 아래를 걷던 그 때를 기억해 보았다.

그 때는 막 외계 문명이 발견된 직후, 우리 연구소가 정보통신부 관할로 넘어가면서 크게 확대된 무렵이었다. 외계 문명 발견이라는 대사건이 벌어지자, 국회에서는 온갖 과학 관련 정부 관료들에게 갖은 질문을 퍼부으면서 이 일에 대한 정부의 나아갈 길에 대해 떠들어 댔다. 그래야, 그 충격을 얻어 타고 국회의원들이 얼굴과 이름을 알릴 것 아닌가?

우리 연구소의 관련자들은 수없이 국회를 들락거리면서 온갖 자료를 준비해서 갖다 바쳐야 했고, 그렇게 정신없이 오가면서 나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일했다. 내가 그녀와 친해진 것도 국회 청문회에서 였다.

연구원인 나 역시 청문회 증인으로 국회에 한 번 출석해야 했다. 그녀의 역할은 내가 증인으로 발언을 하면서 정보통신부 장관에게 해가 되는 발언을 하지는 않는지 검열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청문회에서, 특히, 야당 쪽에서는 유력한 대선 후보인 정보통신부 장관을 견재하기 위해 최대한 외계 문명 발견이라는 대사건의 문제점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그랬기에, 이러한 머리싸움은 필수적이었다. "입 바른말 잘한다"는 점을 자신의 "이미지 메이킹"으로 삼고 있던 한 젊은축에 끼는 야당 의원이 나의 주 상대였다.

"증인은 외계문명을 발견했으면서, 왜 그것을 우리 정부에 알리지 않고, 미국에 먼저 알렸습니까?"
"저는 전파망원경이 수집한 정보에서 외계문명의 가능성만을 찾아 냈을 뿐이고, 그 내용을 미국에서 해독했기 때문에 우리가 외계문명이 보내는 메세지를 찾아내게 된 것입니다."
"'우리'라뇨? 증인은 증인과 미국측이 한 무리라는 겁니까?"
"여기서, '우리'란 사람 전부, 인류 전체를 말한 겁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미국 쪽에서 해독한 내용은 뭡니까."
"외계문명이 지구에서 몇 광년 떨어진 곳에 있으며, 이들이 우리 지구인들의 존재를 알고 오랜 세월 관찰해 왔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들과 통신하는 방법에 대한 이론을 담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미국이 정확하게 외계인의 메세지를 해독할 수 있다는 겁니까?"
"이번 미국 대통령이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었으니까요."
"~요. 로 끝나게 말씀하지 마세요. 여기가 무슨 장난하는데인줄 아세요? 증인은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 앞에서 예의를 지켜서 꼭 '습니다'로 끝나게 대답하세요."
"알겠습니다."
"미국이 몇 광년 떨어진 외계문명의 메세지를 해독할 기술을 갖고 있다면, 사실 우리나라의 모든 기밀 사항도 다 해독할 수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첨단 기술 연구자로서 미국과 긴밀히 협조한 과학자로서 책임감을 느끼시지는 않으십니까?"
"아니, 무슨 미국사람들이 암호 해독 잘하는 걸 왜 저한테 탓하려고 하십니까?"
"증인. 증인은 질문을 하려고 나와 있는게 아니라 답변을 하려고 나와 있는 겁니다. 예의가 없으시군요."

이 국회의원은 정보통신부 장관이 화려한 미국 유학 경력을 자랑하고 다니는 점을 역이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정보통신부 장관을 맹목적인 친미 주의자로 몰아가려는 계획에 항상 노력하고 있었다. 당연히, 나의 청문회 역시 무슨수로든 그런 방향으로 얽어 보려고 하고 있었다.

"외계문명을 발견했으면, 이것이 우리나라의 안보에 중대한 위협을 적일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당장 정밀 조사에 들어가는 것이 순서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런 조사는 일절 없이, 미국과 협력으로 이 외계문명이 알려준대로, 그대로, 그대로 따라서 통신기계 개발에 갑자기 착수한 겁니까?"
"외계문명은 지구로 부터 빛이 닿는데만 오랜 시간이 걸리는, 몇 광년 떨어진 아주 머나먼 우주의 저편에 위치해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의 초음파 레이더나 전파 스캐너 같은 것으로 조사를 할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레이저로 신호를 보내도 도달하는데만 몇 만시간이 걸립니다. 보통 방법으로는 조사하기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초광속 통신으로 외계문명과 전화처럼 교신할 수 있는 통신장치를 가장 먼저 개발해야 했던 것입니다."
"증인은 어려운 전문 용어로 국회의원을 농락하려 하지 마십시오."
"무슨 전문용어를 썼다고 그러십니까."
"알아 들을 수 있게 설명하세요."
"외계문명은 너무 멀어서 정밀 조사는 너무 오래 걸립니다. 그러니까 초광속 통신 기계부터 먼저 만드는 겁니다."
"너무 멀어서 조사가 어렵다니요. 그게 말입니까? 옛날에 아무 장비 없을 때도, 우리는 평양에서 무슨 일 일어나는지 손바닥 보듯 알았다구요! 증인, 국가에 대해 불순한 불만을 품고 있는 거 아닙니까?"

답답한 마음에 나는 속이 탔지만, 그녀는 그냥 차분하게 진행해야 누가 안될 거라며 수신호를 보내 가라앉히라며 알렸다. 대강대강 답해서 청문회를 끝내고 나니, 어느새 시간은 자정을 넘어 새벽으로 가는 깊은 밤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동생이 차를 가지고 와서 그녀를 국회에서 데리고 가기로 했는데, 그것을 기다리자니 시간이 좀 남았다. 나는 그녀와 함께 국회의사당 뒤 쪽 한강변 길을 산책하게 되었다.

"그래도 이제 다 끝났네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저야 보조 자료 준비랑 검열 밖에 안했잖아요. 거기가 질문 답변 준비하느라 고생 많이했지."
"어쨌거나, 같이 몇 날 며칠 밤새면서 참 고생 많이 했네요. 다시는 이런거 안했으면 좋겠습니다."
"적극 동감."

한강변의 길은 가로수로 심어놓은 벚나무가 그 꽃을 가득 펼치고 있었다. 길 위의 허공에 복실복실하게 꽃구름을 띄워 놓은 듯 보였다. 그래서 나무와 나무가 맞대고 있는 듯 하얀 벚꽃이 가득했다. 가로등 불빛을 받은 벚꽃은 그 흰빛이 눈부시게 밝아서, 마치 안개처럼 꽃 색깔의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 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하얀 벚나무들은 강건너편에 한가득 빛을 발하는 도로 조명과 어우러져서 조용한 운치와 화려함을 동시에 느끼게 하였다.

"으어어."

갑자기 그녀는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한 두발쯤 앞으로 뛰었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벚나무 길에 그녀의 소리만 메아리쳤다.

"왜 그래요?"
"아니, 뭐 이상한거 벌레 같은거 머리에 떨어진 거 같어."

그녀는 자기 머리칼을 잡아 당겨 보았다.

"이렇게 봐봐요."

나는 그녀의 머리칼을 보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긴 편은 아니었지만, 몹시 검고 부드러웠다. 나는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뭐가 떨어졌는지 더듬어 보았다. 그녀는 얼굴상을 찌푸린채로 아무말 없이 가만 있었다.

"뭐가 벌레야. 벚꽃 꽃잎이구만."

꽃나무에서 나풀거리며 떨어진 꽃잎이 머리에 떨어지자 착각한 것이 었다. 그녀는 머쓱해 했다.

"뭐... 나의 티없이 맑은 미모를 고려하면, 떨어져 흩어진 벚꽃잎 따위, 마치 송충이처럼 느껴지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지."
"그대는 내면의 아름다움이 외면의 아름다움을 덮어버리는구료."
"어찌 이 미모를 덮고 자시고 할 수 있을지?"
"그대의 마음이 이처럼 우주의 저편까지 뻗어나가는 끝없는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으니, 이 또한 따지고보면 일종의 아름다움이라. 그 강도와 충격을 생각해보면 아름다움에 대한 나의 판단력이 상실되오."

서로 양 옆으로 붙어서 같이 걷고 있자니, 그녀와 나는 걸을 때마다 서로 손등이 부딛혔다. 거기까지 말했을 때, 그녀는 가볍게 웃음소리를 내며, 그녀의 둘째 손가락과 셋째 손가락 사이에 내 넷째 손가락을 끼웠다. 내 손가락 하나를 붙든 그녀는 잠깐 고개를 들어 머리 위에 가득한 흰 4월의 벚꽃을 보았다.

나는 드문 드문 꽃잎이 떨어진 길 위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이 잡고 있다는 사실. 나는 가슴이 뛰었다. 그러면서 나는 손바닥을 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손을 벌려 내 손과 그녀의 손이 깍지를 끼게 만들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한동안 엄청 어색하게 말이 없었다. 아홉걸음 반만에 그녀가 침묵을 깼다.

"손이 심하게 따뜻하네. 어디 열 있어요?"
"상사병 류의 사랑의 열병이 걸리기에는 이미 사춘기는 지난 듯 하고......"

하는데, 그녀는 또 "으어어~" 하면서 두발짝 앞으로 뛰어나갔다. 또 떨어지는 꽃잎을 벌레 떨어지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스치는 그녀의 눈은 정말 전성기 시절 박시은과 닮아 보였다.

그날 저녁 나는 별별 달콤한 상상을 다 하며, 심지어 혼자서 집으로 오는 길에서 "Love From Me To You" 노래까지 크게 부르면서 즐겁게 춤추며 집에 왔다. 그 들뜬 노랫소리는 거의 고성방가 죄목으로 가볍지 않은 벌금을 물 정도였다. 그렇거나 말거나, 며칠 동안 밤새 국회에서 시달림을 당한 피로를 단숨에 녹여 없앨 정도로 그녀와 정감있는 시간들에 대한 기억은 즐거웠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김치국을 마신 것이 되어 버렸다. 김치국을 마셔도 아주 210리터짜리 김치냉장고를 통째로 마시듯 제대로 김치국을 마신 셈이었다. 그녀와 나는 그날 이후로 아무런 진전도 없었으며, 내가 약간 조바심이 나서 그녀에게 저녁이라도 같이 먹자고 전화 했을 때는, 그녀는 먼저 약속이 있어서 안되겠다는 말로 거절했다. 나는 가만 내 왼손을 들여다보며, 혹시 그날 내가 그녀의 손을 잡고 벚꽃 만발한 강변을 걸었던 것이 꿈이 아닌가 생각했을 정도 였다.

얼마후, 나는 문제의 내막을 알게 되었다. 그 바탕은 새로 들어온 2천여명의 연구원들이 원래 우리 연구소의 직원 3명을 무슨 기이한 괴물처럼 여긴다는데 있었다.

달랑 3명이 전부이던 연구소에서 가히 인류 문명사를 뒤흔드는 발견을 해버렸다니, 이 사람들은 분명히 정상인이 아닌 뭔가 엄청나게 특이한 사람들이라는 고정관념이 퍼져 버린 것이었다. 특히, 방송국에서 "지구의 운명을 바꾼다. 천문 정보 해석 연구소 태극 전사들!!!!" 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송한 영향은 컸다. 그 프로그램은, 아무런 근거 없이, 우리가 전세계에서 가장 독하고 끈기있고 예리하게 연구를 진행하는 집단이며, 인생의 모든 것을 오직 연구에만 바치고 뇌의 모든 부분을 외계문명 탐색에만 바친 사명감에 불타는 십자군이라고 떠들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에 대해서도 터무니 없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나는 작년에 어느 정도 결혼을 생각하고 있던 사람과 헤어진 일이 있었다. 결혼에 대해서 그쪽 집안과 우리 부모님이 생각하시는 것이 좀 달랐고, 거기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나는 그쪽 부모 탓을 하고, 그쪽에서는 우리 부모가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했기에 한 번 크게 싸웠던 것이다. 그게 겨우 진정될 즈음에는 내가 깜빡하고 만나기로한 약속시간을 어겨 버리는 일이 생겼고, 그게 다시 옛날일을 다 들추어내서 결별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이 사건을 두고, 연구소에 도는 이야기는 이러했다.

"그 처음 외계인 메세지 잡아낸 그 사람있잖아. 걔 완전 싸이코래매? 머릿속에 외계인 전파 숫자만 가득하데."
"걔네 집에서 그래도 억지로 결혼시켜 볼려고 돈으로 밀어 붙여서 선 봤는데, 그래도 여자쪽에서 좀 의심스러워서 혼인신고는 안하고 그냥 동거만 했데나봐."
"그러다가 도저히 못살겠어서 여자쪽 집에서 남자쪽 집이랑 막 패싸움하면서 치고박고 싸워서 여자를 빼내왔다던데......."
"듣자하니까 정신분열증도 있고, 기억상실증도 있고 그런가봐......."
"쯧쯧... 아무리 지가 외계 문명을 찾아내면 뭘해... 그러느라 사람이 돌아버렸는데......"

나는 그런 이야기를 퍼뜨리고 다니는 사람들 중에 박승유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리라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었다. 근거 없이 사람을 의심하는 게 옳은 일은 아니었지만, 어쩐지는 나는 그가 주도하는 사람들의 무리와는 이상하게 친해질 수가 없었다.

이런 저런 소문 덕분에, 직원들이 수십배로 늘어났지만, 나는 친한 사람이라고는 오히려 더 없어진 느낌이었다. 그녀도 바로 그런 소문을 듣고 나와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나는 추측하고 있었다. 다만, 그녀는 나와 함께 가까이서 몇날밤을 같이 새면서 일한 적이 있기에, 정말로 그 소문이 사실인가 하는 의심은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나는 오기가 생겼다. 어느 새 점심시간이 되어가고 있었고, 나는 인터넷에서 SBS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박시은이 주인공으로 출연한 "멋지게 세이 굿바이"라는 단막극을 검색했다. 이미 종영된 시리즈 였지만, SBS 홈페이지에는 "남과 여"라는 단막극 시리즈의 페이지가 남아 있었다. 나는 "다시보기" 메뉴로 들어가서 예전 방송분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 때, 지하 보일러실 옆. 이 소음 가득한 방에, 그녀와 또 다른 한 사람이 들어왔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망할 박승유였다.

"아, 점심 같이 먹으러 가자 그랬더니, 해장국 잘 하는데 아신다고 하셔서, 저도 따라왔어요. 저희 어제 술 진짜 많이 먹었거든요. 그래서 저도 해장국 잘 하는 집 알아 놓으려고요."
"그래요?"

나는 그녀와의 점심식사에 왜 저 인간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는지 못마땅해 했다. 나는 어떻게 박승유를 떼어놓든지, 아니면 이 어색할 것이 분명한 점심식사 따위 그냥 없던 일로 취소할 수는 없는지 고민하였다. 거기에 아랑곳 하지 않고, 박승유는 내 컴퓨터 모니터를 훔쳐 봤다.

"어, 뭐보고 계세요. 이거 뭐야. SBS 홈페이지네. 어, 정말로 단막극 있는지 찾아보고 있었어요?"
"그게......"
"야, 진짜 대단하다. 이거 얼마나 열정이 컸으면, 근무시간에 이렇게 SBS드라마 다시보기를 뒤지고 있어요. 햐아."
"지금 점심시간 인데요......"

나는 이상하게도 자신 없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박승유는 싱글 거리며 웃고 있었다.

"말 나온김에 한 번 봐요. 내가 기억하기에 박시은 나오는 '세이 굿바이' 어쩌고 그런 거는 없었어. 맞아요. '세이 굿바이'는 이휘재의 망한 노래 제목 아닌가?"
"'세이 굿바이'가 아니고 '멋지게 세이 굿바이' 거든요."
"하여간. 한 번 보자구요."

박승유는 내 컴퓨터의 마우스를 지가 손에 쥐고 SBS홈페이지의 다시보기 목록을 뒤졌다. 계속 옛날 편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에피소드들의 제목을 살폈다. 그런데, 목록의 끝까지 뒤졌지만, 결코 박시은 주연의 "멋지게 세이 굿바이"는 없었다.

"없잖아. 내기 내가 이겼죠. 10만원 줘요."

나는 이 사소한 일에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자세히 날짜와 횟수를 보니, 목록의 마지막 에피소드가 시리즈의 첫번째 에피소드가 아니었다. 너무 옛날에 방영된 에피소드들은 "다시 보기" 목록에 들어가 있지도 않았던 것이다.

"'멋지게 세이 굿바이'는 너무 옛날 편이라서 여기 목록에는 없는 거 같은데요."
"야... 진짜 고집 세시다. 그냥 승복하세요. 여기 홈페이지에도 안 나오잖아요."
"그래도, 정말 있는 거거든요. 그거 제가 꽤 재밌게 본 거 였어요. 여기 홈페이지는 그런 옛날 기록은 안 남아 있는 거고."
"혹시, 무슨 약 드시거나, 주사 맞으셔야 되는데 시간 놓치시고 있는거 아니예요? 꿈속에서 보신거랑 착각하신거라든가, 책이나 인터넷 팬픽으로 보시고 착각하시는 거 아녜요?"

놈은 노골적으로 나를 정신 이상자로 몰아 붙이고 있었다. 팬픽이라면, 박시은 팬들이 자작으로 써 올리는 소설을 말하는 것이었다. 박시은은 그렇게 열정적인 팬층을 거느리고 있지도 않거니와, 나는 평생 박시은 팬픽 같은 것은 구경조차 해 본 적 없었다.

"그게 아니고요. 진짜 몇 년 전에 그런 에피소드가 있었거든요."
"알았어요. 알았어. 그럼 제가 내기돈 10만원은 안 받는 걸로 하죠 뭐. 그거 10만원 받아서 내가 무슨 큰 호강하겠어요. 팬픽도 요즘에는 잘 쓰면 책도 출판되고 한다던데. 팬픽 열심히 읽고 쓰고 하세요. 핫핫핫."

그러면서, 박승유는 지가 무슨 대단히 호탕한 사람이라는 척, 웃어댔다. 나는 좀 흥분되어서 고개를 떨구고 내 심장이 벌렁거리는 소리를 느끼고 있어야 했다. 나는 도저히 그녀가 지금 나를 쳐다보는 표정이 어떠할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는 설마 설마 했는데, 과연 내가 정신병자로구나 하면서 실망하고 있을 성 싶었다.

결국 나는 이런 분위기에서 그녀와 박승유와 함께 점심을 먹을 수가 없어서, 나는 갑자기 바쁜일이 생겨서 점심시간에도 일을 해야 겠노라고 둘러댔다.

"점심시간이라서 SBS홈페이지에서 박시은 찾는다고 아까 그러지 않았어요? 바쁜일이 박시은 스토킹 하는거 아냐? 하하."

박승유는 그렇게 농담을 찔러댔지만, 나는 그냥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해장국집 위치를 박승유에게 알려주고 그녀와 둘이 해장국을 먹으라고 했다. 내가 걸어서 15분 정도 걸린다고 하자, 박승유는,

"에에. 숙녀분을 그렇게 오래 걸릴 수 없지. 제가 제 차로 모시겠습니다. 내려가시죠. 아니, 여기가 지하 1층이니까 그냥 걸어 나가면 되는구나."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의 등을 떠밀며 그녀와 함께 연구실에서 사라졌다.

나는 "울분"이라고 표현하면 딱 어울릴 감정을, 용오름하는 물줄기처럼 느꼈다.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는 열등감도 강하게 느껴졌거니와, 어려운 조건에서 성실히 일하고 거기에 행운이 따랐던 것이 근거가 되어 좋은 결과를 얻었기로, 그것 때문에 미치광이로 몰리는 것도 열 받는 일이었다. 거기다 그 결과로 가장 얄미운 녀석에게 그녀를 빼앗기는 형국으로 나아가고 있으니 어찌 치미는 마음을 달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인터넷 검색 엔진으로 들어가서, "멋지게 세이 굿바이"를 검색해 보았다. 검색 결과가 많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있었다.

다음날. 약간의 분노와 자신감에 찬 나는, "멋지게 세이 굿바이" 검색 결과를 인쇄해서 뽑아들고, 당당히 19층. 박승유가 일하는 방을 찾아갔다.

"박승유씨. 보십시오. 여기, 분명히. '멋지게 세이 굿바이' '박시은' 이라고 쓰여 있지요?"

내가 나타나 A4용지 한 장을 눈 앞에 들이밀자, 그는 놀랐다. 그는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이거 하나 보여주자고, 지하1층에서 19층까지 올라오셨어요?"

그 웃음에는 은근히 지하 1층을 무시하는 듯한 느낌마저 묻어 있었다. 그는 낄낄거리며 웃더니 내가 인쇄한 내용을 한 번 훑어 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거 보세요. 이건 공식 문서가 아니라, 블로그에 올라온 감상문이잖아요. 개인이 그냥 자기 느낌을 웹사이트에 올린거라고요."
"그래서, 어쨌다는 겁니까. 그래도 증거는 되지 않습니까?"
"아니죠. 이건 그냥 팬픽 감상문일 수도 있어요. 그리고, 이 사람도.... 지금 처럼.... 약간 기억과 정신이 헷걸라니느 사람일 수도 있는거고......."

그는 그렇게 말을 흐리면서 괜히 헛기침을 하였다. 그러고 있는데, 연구기획팀장이라는 늙은이가 다가왔다.

"박승유씨, 뭐하고 있는거요?"
"아예, 이 분이요. 지금 꼭 증명하고 싶어하는게 있나본데요. 박시은이라는 배우가 나온, '멋지게 세이 굿바이'라는 텔레비전 단막극이 방송된 적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거든요."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지금 업무시간에 이러는 겐가."
"그렇지만, 여기 이렇게 우리 연구소 연구원 하나가 목을 메고 있으니까, 인력관리 차원에서 어떻게 진정시켜주는 일도 필요한 거겠죠."
"......"

연구기획팀장은 나를 쳐다 보았다. 나는 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갑자기, 박승유는 웃음과 함께 큰 소리로 방안의 모든 사람이 듣도록 소리쳤다.

"여기 기초연구팀에서 오신 연구원 분이 계신데요. 궁금한게 있답니다. 텔레비전에서 몇 년 전에, 박시은 이라는 여배우가 주인공으로 나온, 에... 제목이 뭐냐.... 예, '멋지게 세이 굿바이' 라는 단막극을 방영한 적이 있는 것 같다는데요. 혹시 그런 단막극 기억나시는 분 계십니까?"

박승유가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자, 방안의 모든 사람들은 일제히 나를 쳐다 보았다. 나는 내 자신을 바라 보았다. 아뿔싸. 그제서야 나는 허겁지겁 출근해서 이곳으로 뛰어올라 오느라, 내가 입고 있는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엇갈려 잠근 것을 깨달았다. 전형적인 허둥대는 바보의 모습이었다. 일제히 나를 보고 있는 이 방의 연구원들은 모두 웃고 있었다. 나는 어쩔줄 몰라하고 있는데, 박승유는 계속 말했다.

"아무도 그런 단막극 생각나지 않으시죠?"

박승유가 재차 묻는 소리에도 아무런 대답은 없었다.

"박시은... 걔, 옛날에 무슨 음료수 광고에 나오던 애 아니야?"
"박시은이 '토지'에서도 잠깐 나왔지 아마."

그런 잡담을 하며 다른 연구원들을 고개를 돌렸다. 박승유는 나를 보며, 내가 뽑은 A4용지를 돌려 주었다.

"보세요. 착각이라고요. 기억이 좀 꼬인거 아닙니까."
"아니예요. 그냥 단막극이라서 다들 기억을 못하는 거 뿐이지......"

뭐라고 말을 둘러대려고 하는데, 연구기획팀장의 모습이 보였다. 더 이상 박시은 나오는 단막극을 주제로 일을 방해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그렇게 비참한 몰골로 19층에서 나가야 했다. 나가는 길에, 나는 이 사무실에 들어오다 말고, 문 앞에서 멈춰 있는 그녀와 마주쳤다. 그녀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려다 말고, 박승유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 멈춰 선 것이었다. 나는 박승유가 그녀가 오는 기척을 발견하고, 일부러 다른 연구원들에게 큰 소리로 외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순간 엇갈리게 잘못 잠근 단추가 생각나 팔로 내 앞을 가렸다.

"안녕하세요......"

나는 인류 역사상 1,2위를 다툴만큼 어색한 말투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고,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빗겨 지나가 사무실로 들어갔다.

보일러실 옆 연구실로 돌아오니, 김옥자 박사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어디 갔다 돌아오는거야?"
"아,예. 좀 다른 사람한테 물어 볼게 있어서요."

나는 풀이 죽은 소리로 무성의하게 답했다.

"이번 주말, 스카이오픈 데이인거 알죠?"
"예. 뭐, 우리나라에서, 아니 세상에서 그거 모르는 사람 있겠습니까? 그런데, 저희도 스카이오픈이랑 상관 있습니까?"
"아무래도, 천문 정보 해석 오랫동안 해온 연구원이 국내에는 아무도 없다보니까, 그래도 관련 지식이 있는 사람이 한 두사람은 필요할 것 같아서 우리 기초지원팀도 옥시토시녹스에 오라고 하네요."
"예정대로 되어 가나보죠?"
"뭐, 워낙 정보통신부랑 과학기술부에서 돈을 많이 때려 넣고 있는데다가, 미국이랑 유럽, 일본쪽에서도 어마어마하게 밀어 주고 있으니까요."

스카이오픈 데이란, 외계문명과 첫 통신을 시도하는 날을 말하는 것이었다. 한국정부와 미국정부는 이 작업을 대대적인 정부 선전으로 쿵작쿵작 자랑하고 있어서, 온 세계 사람들이 외계문명과의 통신을 떨리는 마음으로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던 것이다. 옥시토시녹스란, 바로 외계문명과 통신할 수 있는 새로 제작된 설비의 제목이었다.

"어려울 줄 알았더니, 그래도 꽤 순조롭게 공사가 끝났네요."
"뭐, 설비 제작 작업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으니까. 문제는 이 엄청난 일을 두고, 미국이랑 중국이랑 일본이랑 러시아가 힘겨루기를 한 건데... 결국 네 나라가 중간에 있는 우리나라에 설비를 두고 공동감시하는 형태로 가기로 했으니까 아슬아슬하게 균형이 유지된 거죠."

옥시토시녹스는 외계문명에서 보낸 메세지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장비였다. 이 장비를 돌리는 이론은 사실 우리의 현대 물리학을 그렇게 초월하는 기계는 아니었다. 다만 우리가 미처 생각하고 있지 못한 방식으로, 교묘하게 입자들의 파속을 조절하여 머나먼 외계문명과 간단한 디지털 통신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일 뿐이었다. 옥시토시녹스는 전송량도 적어서, 겨우겨우 채팅 수준의 문자메세지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이 간단한 장비는 어마어마한 양의 전력을 필요로 했고, 그것을 위해서는 한국 표준형 원자력 발전소 2기 정도는 통째로 전기를 쏟아부어야 했다. 덕분에, 영광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전라남도의 한 평야지역에 옥시토시녹스가 건설된 것이었다.

"그럼, 이번 주말도 연구소 일로 반납인 겁니까?"
"전라남도까지 출장가야 하니까."
"에효......"
"뭐 어때요. 어차피 집에 있어도, 텔레비전으로 외계 문명이랑 첫 교신하는 거 그거 볼 거 아녜요. 그럴바에야 현장에서 생생하게 분위기 느끼면서 보는게 더 재밌을 거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만......"

나는 잠시 연구소와 이 곳 사람들을 떠나서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그다지 이 출장이 반갑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정보통신부 장관이 직접 외계문명과의 첫번째 교신을 하는 것으로 행사는 기획되어 있었고, 그 장면은 전 세계에 중계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자면 장관님에 대한 예우니 보안이니 하는 문제 때문에 굉장히 여러가지로 시달리고 심부름도 발이 닳도록 해야 할 것이 뻔했기다. 때문에 더 귀찮게 여겨졌다. 하기야, 차기 대통령을 노리는 정보통신부 장관이라면, 전세계의 사람들이 모두 지켜볼 그 순간을 반드시 차지하고 싶은 욕망이 있긴 할 것이다.

김옥자 박사님이 주말 출장 일정을 정해주고 가신 후, 나는 잠시 동안 멍하니 보일러실 옆 내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한참 그렇게 있다가, 나는 아직까지도 단추가 잘못 잠궈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단추를 풀어서 다시 잠구었다.

주말까지, 즉 역사적인 스카이오픈 데이가 될 때까지, 나는 틈만 나면, 박시은의 출연작 "멋지게 세이 굿바이"에 대해 조사했다. 자료는 극도로 부족했으며, SBS에서 이미 종영된 프로그램을 기억하는 담당자를 찾아 연락하는 것도 아주 어려웠다. 그렇다고, 박시은이나 박시은의 매니저와 직접 연락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결국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나는 박시은의 공식 팬 카페라는 다음 포털 웹사이트에 있는 "하얀 아침 이슬 속 시은이네"라는 곳에 가입했다. 그리고 자유게시판에 "여러분, 혹시 박시은 님이 예전에 출연한 SBS단막극 '멋지게 세이 굿바이'에 대한 자료를 얻을 수 있는 곳 아시는분 계십니까."하고 글을 올렸다.

그런데, 그곳은 주로, 박시은을 '시은 언니 짱 예뻐요'라고 부르는 10대 여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활동하는 곳이었다. 내가 올린 글에 달린 답글은 '말투 열라 딱딱 ㅋㅋ 아저씨 같아요.' '아저씨 맞으심. 회원정보 보면 으와... 우리 영어 선생님이랑 동갑' 'ㅋㅋㅋ 아저씨 팬도 많네요 우리 시은언니 짱!!' 뿐이었다. 내가 원하는 "멋지게 세이 굿바이"라는 단막극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고 있자니, 나는 이상하게 부끄러워져서 그만 그 글을 지워버리고 말았다.

너무나 답답해진 나는 박시은의 소속사인 "택시 엔터테인먼트"에 나와 있는 박시은의 팬레터 주소에 편지를 보냈다. 최대한 빨리 답을 알고 싶었기에 나는 등기 특급으로 편지를 배달했다. 편지의 내용은 당연히, "예전에 출연하신 SBS 단막극 중에 '멋지게 세이 굿바이' 라는 것이 있었습니까? 제가 어디서 그에 대한 다른 자료를 구할 수는 없겠습니까?" 라는 짧은 것이었다. 의외로 주말이 오기전에 박시은으로부터 굉장히 빠른 답장이 왔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답장을 개봉했다.

답장에는,

"항상 시은이를 사랑해주는 님. 너무 감사드려요~ 계속 관심 부탁드려요~"

라는 컴퓨터로 인쇄된 메세지가 쓰여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커다랗게 박시은의 서명이 덧붙여져 있었다.

나는 정말 좀 정신에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보일 정도로, 백방으로 박시은의 '멋지게 세이 굿바이'라는 단막극에 대해서 물어보고 다녔다.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보는 사람마다, 전화 연락이 닿는 사람마다 "몇년 전에 방송한 '멋지게 세이 굿바이'라는 SBS 단막극을 기억 하느냐"라고 물었다. 심지어, 전화회사에서 데이터 통신 요금 할인 하는 요금제에 대해 선전하는 안내원이 전화했을 때도 다짜고짜 박시은 이야기부터 물어서 안내원이 당황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단막극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이러한 박시은에 대한 갖가지 조사를 하는 중에 나는 몇몇 이상한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출판한 "세계 진문 기담"이라는 책에 실려 있는 짧은 이야기 중에는 이런 것이 있다. 20세기 초반, 미국의 어떤 여자가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호텔에 투숙하게 되었다. 갑자기 어머니가 병이 걸렸기에 여자는 의사를 부르러 갔고, 의사와 함께 호텔에 돌아왔다.

그런데, 호텔에 돌아와 보니, 모든 호텔 종업원들이 그녀를 본적이 없으며, 그녀의 어머니도 본 적이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자기가 묵었다는 방에는 아무도 묵은 흔적이 없으며, 호텔 밖  근처 사람들도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가 이곳에 와서 머문적이 있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분명히 자기는 어머니와 함께 이곳에 와서 머물렀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에 대한 어떠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고, 그녀는 도무지 자신이 이곳에 머문 시간과 어머니가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알아낼 수 없었다고 한다. 결국, 그녀는 정신이상으로 잘못된 기억을 갖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사의 의심을 사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나 스스로를 한 번 돌아 보았다. 여러 모로 보건데, 결코 나는 내가 정신적으로 그렇게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정도로 위험한 상태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분명히 내가 텔레비전에서 본, 단막극을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기억하고 있지 못한 것인가.

사람들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두가 다 함께 짜고 나를 속이려 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왜. 그것은 그냥 특별한 내용 없는 가볍게 웃긴 한 편의 단막극일 뿐이었다. 도대체, 그런 단막극의 존재를 이 세상 사람 모두가 부인해야할 무슨 심각한 이유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반대로 정말 내가 기억이 이상하게 된 것일까? 하지만 왜. 그 별 대단한 내용도 없는 단막극이 왜 환상처럼 내 기억 속에 자리잡게 된 것일까. 거기에 무슨 이유가 있을 수 있을까. 박시은. 김진수. 두 주인공들.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사랑싸움 이야기에 불과하다. 시청률은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았을 것이 뻔하며, 딱히 박시은이나 이 드라마를 본 사람에게 엄청난 인생의 영향을 미쳤을 내용도 없다.

나는 스스로 매우 거부감을 느꼈지만, 그래도 정말 박승유가 말한대로, 내가 꿈에서 본 것이나 팬픽을 읽고 착각하게 된 것인지도 의심해 보았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내가 생각나는데로, "멋지게 세이 굿바이"라는 단막극의 줄거리를 차례대로 짚어 보았다.

박시은은 오랜 세월 연애 해온 애인이 있다. 이 애인은 그런데 다른 여자랑 결혼하기 위해 박시은과 헤어지려고 한다. 이 애인은 박시은과 헤어질 핑계를 만들기 위해서, 심부름센터 사장 김진수를 고용한다. 김진수는 명령을 받고 박시은과 애인이 헤어질 핑계를 만들기 위해 공작을 펼치다가 그만 박시은과 사랑에 빠지고 만다. 모든 것을 알게된 박시은은 김진수에게 배반감을 느끼지만, 결국 김진수의 진심을 이해한다. 헤피엔딩. 끝. 종료. 피날레. 대단원.

아무 이상할 것 없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분명히 그것은 내가 텔레비전에서 본 단막극이었다. 나는 정확한 영상의 일부 장면들이 떠올랐다. 나는 장면장면의 화면, 그 그림의 모양을 떠올려 보았다.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유머들. 박시은이 "당신은 모르실 거야"를 노래하는 장면. 박시은이 꽃향기를 맡으면 재채기를 하는 체질로 묘사된 점. 박시은이 잘못해서 자기 콘택트 렌즈를 먹는 장면. 김진수가 밥풀로 박시은을 찍은 사진을 자기 사는 방 벽에 붙여 놓으며 라면을 먹는 장면.

이런저런 장면들을 모두 돌이켜 보았지만, 도저히, 이 한 편의 단막극이, 국가적인 거대한 음모나 초자연적인 현상의 틈바구니로 사라질 이유를 짐작할 수는 없었다. 나는 어디 높은 빌딩 옥상에 올라가서,

"나는 박시은의 '멋지게 세이 굿바이'를 보았다!"

하고 목청껏 길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래서 누구라도 한 명 "그래, 나도 그거 봤어" 할 때까지 계속 울부 짖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 그랬다가는 바로 정신병원행일 것이다.

도대체 왜. 무엇때문에, 내가 이 이상하게 꼬인 작은 기억 하나에 휘말려 버린 것일까. 수없이 나왔다 사라지는 많은 텔레비전 이야기 중에서. 왜 하필 내가, 박시은이 이렇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야기의 그물 사이에서 자리를 비워 버린 것일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따지고보면, 여전히, 가장 간단한 설명이 가장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사실,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도 몇년전에 잠시 방송된 별볼일 없는 단막극 따위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박시은이 무슨 초특급 수퍼스타도 아니고, 그저 그런 평범한 TV 배우이니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니, 우연찮게 그 내용을 내가 기억하고 있을 뿐, 주위에서 그 단막극을 기억하는 사람을 찾기란 어려울 뿐이다. 아무것도 잘못된 것 없다. 그게 가장 간단한 해답이었다.

하지만, 당장 지금 내가 박시은을 만나서 그녀에게 옛날에 "멋지게 세이 굿바이"를 찍었던 경험담을 듣지 않는 한, 정말 그게 해답이라는 것을 확신하기란 힘들었다. 나는 "멋지게 세이 굿바이"라는 단막극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해서 지금, 내기에서 져서 10만원을 빚지고 있으며, 수많은 동료 연구원들에게 정신이상자로 몰린 상태이며, 더군다나 내 사랑하는 그녀마저 밥맛 떨어지는 남 흉보는 놈에게 빼앗기지 않았는가.

어쩌면, "세계 진문 기담"이라는 책에 실린 그 여자와 나는 도저히 알아서는 안되는 어떤 비밀 지식에 접근했기 때문에, 그 기억 전체를 의심하게 하기 위해서 이런 일을 겪게 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조직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을 음모에 가담하게 할 수 있는 것인가. 혹시, 이 지구와 나의 존재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어떤 방안에 묶여서 가상현실을 경험하고 있을 뿐인 것이 아닌가. 그래서 가상 현실 장치의 오류로 나는 잠시 기억에 착각을 일으킨 것이 아닐까. 별별 역사적 정치적 가설과 존재론적 의문까지 머릿속에서 오갔다. 하지만, 결코 그 답을 찾아 낼 수는 없었다.

어느새 스카이 오픈 데이가 찾아 왔다. 자정으로 예정된 첫 통신은 전세계에 생중계 되며, 그 전에 옥시토시녹스 앞에서 스티비 원더와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참가하는 특별 축하 공연이 열릴 예정이었다. 이미 어제부터, 방송국에서는 "E.T." "미지와의 조우" "어비스" 심지어 "스타트렉" 영화판들까지 줄줄이 특집 영화로 방영 중이었다.

나와 연구원들은 기차를 타고 전라남도의 옥시토시녹스로 향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내 옆에는 그녀가 앉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는 그녀와 말도 몇마디 나눌 수 없었고, 그녀 역시 말을 걸지도, 잠을 자지도 않고, 조용히 서류를 넘겨 보고만 있었다.

그녀 옆에 박승유가 나타나 몇 마디 긴치 않은 농담을 하고 사라졌을 무렵. 나는 곁눈질로 살짝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한 손에 손수건 같은 것을 쥐고 있었다. 그 손수건은 지난 번 출장 때 내가 자고 있던 그녀에게 침닦으라고 준 것이었다. 그녀는 그걸 돌려주지 않고 챙겨 갖고 있었다. 아마 그걸 지금 나에게 돌려주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뭐라고 말하면서 돌려줘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듯 했다.

"저......"
"?"

내가 "저...."하자,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나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간신히 나는 그냥 평범한 대사를 만들어 냈다.

"오늘은 많이 안 피곤한가 보네요. 잠도 안자고."
"예, 오늘밤에 중요한 일이잖아요. 설레기도 하고 별로 안 졸리네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가만 말을 끊었다. 나는 어떻게 말을 더 이어나갈 방법이 없었다. 나는 존재하지도 않는 텔레비전 단막극에 집착하고 있는 정신 나간 놈일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아무리 그녀가 나에게 한 때 친밀함을 느낀적이 있다곤 하지만, 분명한 거부감을 느낄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서 기차 창밖을 보았다. 어느새 해질녘이었다. 기차는 중소도시의 도심을 지나치고 있었다. 약간 오래된 듯 보이지만,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파트 건물 사이로, 지는 해의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그 햇살은 파란 저녁 하늘에 어울려 다시 한 번 붉은 저녁놀을 서편 하늘에 가득 비치게 하였다.

저녁놀이 기차 안에 쏟아 졌다. 나는 그녀가 눈치채지 않게 그녀를 쳐다 보았다. 서류를 읽느라 그녀는 테가 가는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 모습은 정말 완전 박시은 분위기였다. 특히 '멋지게 세이 굿바이' 속의 박시은 분위기였다. 선명히 기억이 날 정도였다. 기차가 지나가느라 안경의 반사광이 눈을 살짝 보이지 않게 했다가, 다시 붉은 햇빛이 비치어 그 은은하고 따뜻한 광선아래 그녀의 눈동자가 보였다. 마른 목에 비해서 살짝 통통한 그녀의 뺨은 서류의 글을 읽느라 웅얼웅얼 하고 있었다. 나는 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행동일지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기차가 전라남도 옥시토시녹스에 도착한 직후, 점심 때 반주로 지역 토속 동동주를 마셨음이 분명한 옛 소장님, 그러니까 기초연구팀 팀장님이 나를 찾아 왔다.

"축하하네. 자네 집안에 경사났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 동생이 경찰 시험 준비한다더니, 드디어 경사가 되었단 말씀이십니까?"
"이 기쁜 때에 또 무슨 썰렁한 언어유희인가. 자네에게 엄청나게 좋은 일이 생겼단 말이야."

옛 소장님은 그 술기운 감도는 붉은 얼굴이 마냥 함박 웃음이었다.

"정보통신부 장관이 대통령 후보로 너무 유력하기 때문에 야당에서 굉장히 싫어하는 거 알지?"
"예. 그게 저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미국쪽 연구진 총 책임자가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데이비드 그로스 박사거든."
"예. 그건 압니다."
"그런데, 데이비드 그로스 박사가, 가장 중요한 일을 실제 연구에는 하나도 공헌 없는 정부 고위 인사가 맡았다는데 반대의사를 표시한거야. 인류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일중에 하나를 진행하는데 국제적으로 과학자들에게 그만한 결례가 없다는거지."
"그래서요?"
"데이비드 그로스 박사가, 처음 외계문명 전파를 발견한 자네가 외계문명과 처음으로 통신하는 일을 맡아야 된다고 주장했다네."
"예? 정말요?"
"말이야 바른 말이지. 자네가 그 메세지를 처음으로 잡아낸 사람 아닌가. 해독이야 미국에서 했지만. 그래도 발견자는 자네란 말이야. 자네에게 그 정도 기회가 오는 건 당연한거야."

나는 터무니 없이 기쁜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이런 좋은 일이 생기려고 그동안 그런 어림없이 힘겨운 소동에 내가 휘말렸던 것인가.... 하는 아무 인과관계도 생기지 않는 주술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요. 어떻게. 보일러실 옆에 자리 있는 저 같은 사람에게 정보통신부 장관이 쉽게 양보를 한거예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일단, 이번 일로 정보통신부 장관이 인류문명사에 발자국을 남긴 영웅이 되면,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이 너무 불리해지니까, 얘네 들이 모두 자네를 지지해버린거야. 한국 기술을 이끈다면서 연구원의 업적을 가로채는 장관이라고 욕을 해댄 거지."
"그래도 그만한 일에 정보통신부 장관 그 양반이 꼬리를 내릴 분이 아닌 거 같은데......"
"그 사람이 옛날에 중국기업들에게 굉장히 공격적으로 나갔잖아. 그래서 이 사람을 중국측에서는 위험인물로 보고 있어. 그래서 중국쪽에서도 이 사람이 대통령되면 안되겠다 싶어서 이 사람을 모두 반대한거야. 덕분에 자네가, 자네가 옥시토시녹스에서 처음으로 외계문명과 교신하는 사람이 된거야."

옛 소장님의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저편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백여명의 건장한 사람들이 나에게로 몰려왔다.

"옥시토시녹스 최초 교신 담당 연구원 분이시지요? 지금부터, 저희 국가정보원 쪽에서 모시겠습니다."

그들이 갑자기 내 주위를 애워싸면서 나는 옛 소장님과 멀어졌다. 그리고, 저만치 보이던 그녀와도 더더욱 멀어 졌다. 나는 박승유가 미친듯이 부러워 하는 동경의 눈빛과 정신나갈 듯이 배아파하는 시기의 눈빛을 양쪽 동공에 정확히 절반씩 나누어 발산하고 있는 그 모습도 보았다.

밤이 깊어 오고, 드디어 교신 예정 시각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축하 공연 마지막 순서로, 빈 필하모닉과 베를린 필하모닉이 합동으로 장중하게 "스타워즈"의 주제곡을 연주했다. 연주하다가,

"외계 문명과 평화로운 첫 교신을 하는데 무슨 재수없게 스타 '워즈'냐!"

라며 관객들이 일제히 야유하기 시작해서, 주제곡은 채 반을 연주하기 전에 끊겼다.

지휘자와 단원들은 당황하고 있다가, 결국 어이가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장엄하게 편곡된 모차르트의 '작은 별 변주곡'을 연주했다. 공연장에 운집한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과 텔레비전 중계를 보고 있던 세계 각국의 사람들은 연주에 맞춰 "반짝 반짝 작은별 아름답게 비치네"하는 가사를 각국의 번안판으로 다같이 합창했다. 그 노랫소리는 광화문 앞에서도, 런던 트라팔가 스퀘어에서도,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도, 뉴욕의 타임스퀘어에서도, 수많은 축구 경기장과 야구 경기장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울려 퍼졌다.

나는 테러를 대비하기 위해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는 육군 특전사 대원들 사이로, 국가정보원 요원들의 경호를 받으며 옥시토시녹스의 핵심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불과 몇 분후면, 오랜시간 동안 우주 저편의 문명과 접촉하기 위해 우리에게 메세지를 보내왔던, 저 머나먼 친구들과 처음으로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는 것이었다. 참으로 오랫동안 우리 문화의 면면을 관찰해온 그들은, 한국어로 보내는 나의 메세지를 처음으로 수신하고 해독하며, 또 거기에 대해 자신들의 생각을 담아 응답을 보내올 것이었다.

"옥시토시녹스, 장비 예비 완료 기동 개시합니다."

장내 방송을 맡은 KBS 김경란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는 인공위성으로 중계되어 지구 전체에 퍼져나갔다.

곧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찰칵거리는 기계음이 장내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실, 장비에 별로 그런 소음이 날 부분은 없었는데, 그래도 무슨 로보트 출격하는 듯한 소리가 나야 멋있을 것 같다는 청와대측의 의견에 따라 그런 효과음이 나도록 건설된 것이었다.

옥시토시녹스가 예비 완료 기동에 들어가자, 이 장비에 어마어마한 전력을 공급해주기 위해서 일대의 변전소 회로가 일제히 닫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전력을 안정화하기 위해서, 전라남도 일대의 모든 주민들이 중계를 보기 위한 텔레비전을 제외하고 일제히 전기제품을 끄고 전기를 소비하지 않기 시작했다. 때문에 옥시토시녹스를 제외한 주변 일대가 순식간에 칠흙같은 암흑으로 변하였다.

CNN은 군사 정지 위성하나를 임대해서, 우주에서 한반도의 남쪽을 생중계로 찍어 전송하고 있었다. 전력 공급을 원할히 하기위해, 전라남도 도민과 광주 시민이 모두 전기를 끊고 소등하자, 한반도의 남서부가 일순간 갑자기 불빛이 없어지며 깜깜해졌다. 그 모습을 우주에서 촬영해서 중계하니 경이로운 장관이었다.

"인류를 대표하여, 조르주-주세페 성계의 외계문명과 처음으로 교신할 자랑스런 우리 대한의 연구원이 걸어오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김경란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의 엄청난 환호성과 박수소리가 들렸다. 내 앞에는 해군 의장대에서 나온 병사들이 총검을 꽂은 총을 들고 일제히 도열하여 통로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들 앞을 통과해 나아가면 옥시토시녹스 교신기계가 있었다.

곧, 경호원들의 배치가 달라졌다. 내 앞에 옥시토시녹스 건립에 참가한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나타나 나와 악수하고, 격려의 한 마디를 건네는 시간이었다. 중국 주석과 일본 총리, 러시아 대통령이 악수를 하면서 한 마디씩 인사를 건넸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저 연구소 지하에서, 지금 옥시토시녹스에 흘러드는 엄청난 양의 전기와 옥시토시녹스의 발열을 조절하느라 진땀빼고 있는 기술자들을 격려하고 응원해 줘야지, 그냥 기계에 앉아서 자판 타이핑이나 할 나에게 격려할 필요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어쨌거나, 이렇게 해야 텔레비전에서 그림상으로 멋지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옆에서 계속, 나와 함께 걷고 있던, 데이비드 그로스 박사님이 나에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뒤에서 바삐 따라오던 통역이 그 말을 통역해 들려주었다.

"긴장되나? 긴장 풀고 편하게 하게. 에디슨이 처음 녹음해서 공개한 세계 최초의 레코드가 '떴다 떴다 비행기'라는 거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네. 벨이 처음으로 성공한 전화 통화 내용도 '와트슨 군. 이리 좀 빨리 와주게' 라는 거 알고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처음 외계문명에 보내는 메세지도 너무 거창하고 철학적인거 말고, 그냥 간단하고 평범한 인삿말로 해주게."

데이비드 그로스 박사는 벅차오르는 감동에 자기가 더 떨면서 그렇게 말했다. 하필이면, 예로드는 기술자들이 모두 미국사람이라는 점도 역시 이 사람도 긴장하고 있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나는, 미국 대통령에 이어, 지금 무척이나 질투심에 불 탈 우리나라 정보통신부 장관과 악수를 하고, 우리나라 대통령과도 악수를 했다. 그리고, 옥시토시녹스의 키보드 앞에 앉기 직전에는 심지어 문근영이 뺨에 뽀뽀까지 해 주었다. 도대체 어떤 특이한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 오늘 행사를 기획했는지는 몰라도, 어쨌거나 나는 다리가 후들거릴만큼 들뜨고 기뻤다.

나는 옥시토시녹스의 키보드 앞에 앉았다. 지구에서 생명이 탄생하여 30억년이 흐른 지금. 드이어 지구의 생명이 최초로 지구가 아닌 다른 곳의 생명과 연락을 취하는 역사적이고, 생물학적이고, 지리학적이고, 천문학적이고, 심지어 철학적이고, 나아가 정치적이며, 결국 축제-연예적인 순간에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긴 시간 지구의 문명을 관찰해오며, 우리에 대해 도무지 어떠한 생각을 품고 있을지 모를, 외계문명의 존재들을 향하여...... 그들에게 뭐라고 첫마디를 꺼낼지 고민하고 있었다. 여러 사람의 조언들이 머릿속에서 한 데 어울어진 결과, 나는 그 4월의 봄, 처음 국회의사당에서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던 그 날 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울화가 치밀게 하던 국회의원에게 지구에서 아무리 전파를 쏘아도 외계문명에 도달하려면 몇 년이나 걸린다고 이야기 했던 것을 생각했다.

나는 옥시토시녹스에 타이핑을 시작했다.

"지구에서 조르주-주세페로:
혹시 전에 SBS TV에서 단막극으로 방송했던 '멋지게 세이 굿바이'라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는가?"

질문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을 지켜 보고 있는 60억 인류중에서 정말 극소수에 불과할 뿐일 것이다. 하지만, 그 소란하던 장내는 일순간 엄청나게 조용해졌다.

과연, 외계문명이 우주 저편에 존재하며, 우리가 이 엄청난 자원을 들여 만든 초광속 통신 장비가 제대로 작동할 것인가? 그래서 그들이 우리가 보낸 메세지를 이해하고, 그에 대한 답신을 보내 올 것인가? 그러면, 우리 장비는 그때까지도 아무런 고장없이 정상적으로 작동해서 답신을 포착할 것인가. 그러면, 우리 인류는, 우리가 외계에 보낸 최초의 메세지가 정상적으로 도달했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 답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모두가 가슴조리며 옥시토시녹스가 수신할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가슴 조림에, 60억 사람들 중에 나는 또 색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더욱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몇 년 전에 SBS 방송국에서 방송된 "멋지게 세이 굿바이"의 전파는 망망한 우주로 계속 퍼져 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충분히 외계문명이 지구를 관찰하고 있는 조르주-주세페 별 근처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들은 아마 며칠전이나 지난주 쯤에 이 TV프로그램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가 그냥 기억이 헛갈린, 미친 사람이거나.

옥시토시녹스의 화면과, 여기에 연결된 수십억개의 텔레비전 화면에, 답신이 표시되기 시작했다.

"조르주-주세페에서 지구로:
엊그제 방송 전파를 잡아서 시청할 수 있었다. 지구인의 예술과 미적 감각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그 단막극에서 여자 주인공으로 나온 배우 박시은이 무척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다."

정상적으로 수신된 답신과 누가 봐도 명명백백한 의미에 다시 한 번 굉장한 환호성이 사방을 울렸다. 그럼 그렇지. 주변을 살펴 보니, 수많은 과학기술자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서로 얼싸 안고 있었다.

이튿날. 나는 박시은과 함께 SBS 토크쇼에 출연하여, 처음으로 외계문명을 발견했을 때의 감상과 처음으로 교신을 성공했을 때의 느낌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리고, 이날 저녁, 전세계의 107개 방송국에서 세계 각국 판으로 번역된 단막극 "멋지게 세이 굿바이"를 우주 문명 특선으로 재방송 해 주었다.


- 2006년, 광화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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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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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06.04.03 21:48 댓글 수정 삭제
    모든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옛날 오페라 가수들의 이름에서 무작위로 따왔습니다. 따라서 비슷한 이름, 같은 이름의 실제 인물과 어떠한 연관도 없습니다.

    이번 호에는 "흡혈귀의 여러측면"이라는 글을 보내드리려고 했는데, 갑자기 뱀파이어 엔솔로지로 빨려드는 바람에 뒤늦게 새 글을 업데이트하게 되었습니다.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아울러, 이 글 "박시은 특급"은 지난호 웹진 거울, 시간의 잔상에 실린 무한슬픔 님의 "최민주가 왜 그랬을까?"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온 오마주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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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한슬픔 06.04.05 06:27 댓글 수정 삭제
    글 잘 봤습니다. ^^ 박시은은 중국에서 드라마 촬영 중이 아니었던가요? 중국 붐에 이끌려 그녀도 떠났다는 소문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나는데... 그러고 보니 언젠가 촬영 중에 그녀도 가릉이가 가릉가릉이라고 중얼거렸을지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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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06.04.05 09:17 댓글 수정 삭제
    박시은은 중국에서 "열애"와 "백우지련" 두 편의 드라마에 주인공으로 출연하고 돌아왔습니다. 곧 우리나라 새 드라마 "닥터 깽"에 조연으로 출연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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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문 06.04.05 11:44 댓글 수정 삭제
    멋진 글 잘읽었습니다. 제 생전에 스카이 오픈데이가 왔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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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06.04.05 22:23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찬찬히 살펴보니, 이번 글은, 공교롭게도 이번 시간의 잔상에 올라온 가연님의 "선물"의 주인공과 비슷한 사람이 배명훈님의 "청혼"과 비슷한 소재로 모험을 겪는 내용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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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naor 06.04.06 14:41 댓글 수정 삭제
    그래서, 여기서는 알 수 없는 뒷이야기에서, 그는 그녀에게 합격점을 받았을까요? 아니면 그녀는 그가 정말 대단한 obsse라는 데 질려서 그를 완전히 잊어버렸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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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06.04.06 21:56 댓글 수정 삭제
    그러게 말입니다. tnaor님의 판결은 어떠하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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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로즈 06.04.07 00:01 댓글 수정 삭제
    유쾌하군요. 한 번에 끝까지 재미있게 읽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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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06.04.07 23:55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사실 이번 글은 두 개의 소재가 매끄럽게 연결된다기보다는 중간에 좀 걸리적거리는 느낌이 강한 것 같아서 좀 아쉬운 면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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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ech 06.04.09 03:54 댓글 수정 삭제
    끝에서 미친듯이 웃었습니다. 근데 뭔가 아쉬워요. 월드스타가 된 박시은에게 감사를 받는 얘기건 뭐건 후일담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암튼 tv 단막극으로 만들면 좋을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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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06.04.09 23:19 댓글 수정 삭제
    tnaor님이 이야기하신, 뒷이야기에 대한 의문을 살리고 싶었는데, 페로즈님에 대한 답으로 한 이야기에서 말씀드렸듯이 두 소재의 연결이 좀 뻑뻑한데가 있어서 결말이 좀 허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5월호를 기대해 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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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6.04.13 16:05 댓글 수정 삭제
    "청혼"과 비슷한 소재로 모험을 겪는다는 말씀이 잘 이해가 안 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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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06.04.13 22:09 댓글 수정 삭제
    두 소설 다, 빛의 속도가 무한하지 않다는 점을 모험의 재미를 돋구는 소재로 응용하고 있는 점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덕분에 주인공의 진가가 드러난다는 점까지 비슷한 데가 있어서 더 잘 들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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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04.16 01:08 댓글 수정 삭제
    멋지게 세이 굿바이 ... 저도 보고 싶어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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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06.04.19 13:42 댓글 수정 삭제
    주인공이 했던 길을 한번 걸어보시며 그 존재 가능성을 탐지해 보시는 것도 해 볼만한 일로 말씀드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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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금이 06.04.23 13:52 댓글 수정 삭제
    영화 contact 보다 재밌고 유머러스하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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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rles 06.04.25 18:09 댓글 수정 삭제
    구글에서 멋지게 세이 굿바이로 검색해 보면... 곽재식님의 감상문이 제일 위에 나오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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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이 06.04.28 10:20 댓글 수정 삭제
    곽재식 님의 글은 카타르시스가 있다는 게 좋은 점 같습니다. 첫 편부터 현재까지 너무 즐겁게 읽고 있어요. 이번 글도 마지막 부분에서 하하하~ 하고 웃음이 소리가 나올 정도로 웃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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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 07.08.22 20:10 댓글 수정 삭제
    잘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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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팬 08.06.13 11:26 댓글 수정 삭제
    아.. 이렇게 통쾌할 수가 있나요... 방송에 실리지 않는다고 스케일을 줄이는 식의 타협을 하지 않으시는 점이 너무 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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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현종 11.10.06 02:51 댓글 수정 삭제
    '"멋지게 세이 굿바이"를 우주 문명 특선으로 재방송 해주었다.'
    많이 웃었습니다. :)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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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gabrand 14.02.10 17:08 댓글

    아 통쾌하네요 박승유 저 자식 망연자실할 표정을 생각하니 속이 다 시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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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야 18.03.22 12:33 댓글

    솔직히 주인공이 메세지를 보내게 된걸보고 바로 이렇게 될거라고 예상하긴했는데 중간에 정통부 장관의 질투심이나 이런 묘사가 너무 재밌어요ㅋㅋ뭔가 작가님 특유의 특별한 악의는 없지만 평범하게 소심하고 소소한 복수를 즐기는 주인공이 귀엽습니다ㅋㅋ

  • 청야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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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18.03.22 20:56 댓글

    이 소설은 많은 분들에 관심에 비해서는 저는 별 좋은 지 잘 모르겠는 것인데, 지금 생각해 보면 "보잘 것 없는 연구소에서 어마어마한 일과 엮인다"는 배경을 쓴 비교적 초기작이라는 점과 초장에 열차 안 장면 묘사 솜씨 정도는 괜찮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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