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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xk160 바지니에게 2/2

2006.02.24 23:0002.24

3



1.

11월이다.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는 거리였다. 얼마나 따사로운지 흰 눈처럼, 먼지와 어젯밤의 잔재가 남아있었다. 어제 양 쪽의 전진, 붉은 머리띠와 검은 고무 곤봉은 모두의 승리로 끝났다. 단순한 줄다리기다.
그는 걸어갔다. 건물들이 잠시 그 그림자를 삼켰다가 뱉어냈다. 도로는 왼쪽에서부터 덮쳐져 있었다. 인리히는 그림자들을 따라 왼쪽으로 걸었다. 그런데도 그의 이마는 찌푸린 채였다. 그는 슬그머니 이발소에 들어가서 신문을 보고 나왔다. 주인이 그가 신문만 보고 나가버리자 입을 벌리고 멍하니 쳐다보았다. 주인은 늙은 남자였다. 그는 죄책감을 느꼈다.
인리히는 잠시 신문 5면의 기사에 대해 생각했다. 그 기사는 크게 나와있지는 않았다. 1면의 기사에 비하면 말이다. 1면의 기사와 기본적으로 같은 사건에 관계하고 있었지만, 1면은 복지를 약속하는 것이었고 5면은 복지의 대가에 대한 것이었다. 십년 전 제국의 왕이, 승리를 약속하며 국민들에게 빚을 졌을 때처럼.
열 여섯 살의 인리히는 도로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일년 반 후에는 졸업해야 했다. 열 여덟살이 되면 세상에 나갈 것이다. 보통은 열 다섯 살 때부터 일을 하지만. 의무 교육이 도입된 후부터 나이를 속이는 애들은 적어졌다. 아직은 그렇다. 소년단에서는 열 네살 이하의 단원들에게 숙박소를 준다.
그렇다고 해서 식사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어디서나 공급이 넘쳐난다. 수요가 넘쳐나는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어디서든 돈을 빌려올 수 있고, 갚지 않고 기다리면 어차피 돈가치는 떨어진다. 투자를 망설일 요인은 없다.
인리히는 양 쪽 거리 사이를 걸었다. 시위를 하는 사람들과 협상을 하는 대신에 기업가들은 점점 더 정당과 친분을 가지려 애쓰고 있다. 직접 기부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그러느라 그들이 정당에 대는 돈이 복지금으로 돌아온다. 인리히가 지낼 때는 풀죽은 야채를 고기 몇 점과 함께 삶아주었는데, 지금은 간식도 나온다고 들었다.
인리히는 계속해서 신문에서 본 내용을 되새긴다. 바나 건너 서쪽의 - 사람들이 말하기로 <속물들 뿐인> 그러나 젊은이들 말투로 <멋진> 나라에서는, 피부 색이 다른 사람들에 게 비율을 정해 일자리를 나누어주고 복지 자금을 확충했다. 그러자 그 수혜자들은 원치도 않았던 구걸 행위를 강요당한 데에 폭력적인 시위를 일으켰다. 맞아, 그건 멍청한 짓이야. 인리히는 생각했다. 애초에 그런 더러운 종족에게 복지 자금을 나누어주는 안에 반대했던 사람들도 뒤이어 폭동을 일으켜 피를 보았다. 지금 이 나라에서는 그런 폭동이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은 모두가 일자리가 있으니까, 더 좋은 직업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일자리가 있으니까. 이 사회는 씩씩하게 돌아가고 있다. 숙련공들 덕분에 협상은 피고용자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 시장 - 자유 경쟁 시장은 정치적이지 않다. 의회도 정치적이지 않다. 투표는 3년에 한번씩 치루어지고 결과는 매번 다르다. 의회는 언제나 색깔에 시달리느라 색깔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늘 상황 자체가 정치적이다.
복지금은 학생들에게도 할당된다. 우수한 학생들에게, 인리히는 우수하다는 말에 대해 즉 학교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공부를 해야 한다. 공부를 해야 학자금이 나오기 때문이다. 인리히는 일년 반은 더 공부를 할 것이다. 사실은 대학에 가고 싶다. 하지만 대학에 가서도 학자금이 나오게 하려면 정말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한다.
<열심히> 인리히는 생각했다. 그는 그런 짓을 할 수가 없다. <열심히>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생각했다. 낯이 뜨거워졌다. 찬 바람이 얼굴에 닿았다.
공부를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성적은 이럭저럭 나오고 있다. 사실 성적이 이럭저럭 나와주지 않는다면 학교를 그만두어야 한다. 그래서 공부하고 있다. <돈이 필요하다>그는 생각한다. <그런데 왜?>
인리히는 희미하게 생각했다. 내일 공부하기 위해 오늘 공부한 값을 물려주고 있다. 그런데 오늘보다 내일이 천 배쯤 더 비싸져버리면, 어떻게 내일을 사야 한단 말인가? 어제가 언제나 오늘보다도, 내일보다도 훨씬 행복했다. 그럼에도 내일을 사야 한다. 그렇잖으면 어제를 물려줄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팔아야 하는가? 어제를? 아니, 내일이 오지 않으면 어제도 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내일을 사는 거야. 어제를 갖기 위해. 목표가 되는 물품을 팔아서 그 물건을 살 수는 없다. 그렇다면 훨씬 쉽겠지. 돈같은 건 필요하지도 않을 거야. 그러나 내일이 온다. 어제를 사야 한다. 그래서 규범을 팔아 넘긴다. 규범의 가치는 점점 내려가, 내일이 최소한 어제보다 값이 싸게 계산될 수 있을 때까지 내려간다. 실질 물가 지수의 계산. 하루 하루가 지날수록 규범은 왜소한 광대가 되리라, 이제 공들을 던질 수 없는. 시간은 비웃으며 암흑 천지로 떨어진다. 규범만이 어제와 오늘을 연결할 수 있었다. 그래도 모든 것은 돈으로만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규범이 휴짓조각처럼 거리에 버려진 후로는, 소년단은 그것을 주으려 어린 다리로 뛰어다닐 것이다. 인리히는 열 두어살짜리 소년단원들을 생각했다. 그러나 규범은 전 세계의 먼지처럼 많아져서 아무리 애써도 주워모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사소한 것을 가지고 계속 살아야 한다. 1천 텔 짜리 지폐가 1텔 가치도 없어져버려도, 그걸 들고 천만장을 모아 빵을 사러 가야 한다. 물론 천만장을 모을 수는 없다. 작은 손은 동전 열 개로도 꽉 차 버린다. 그러면 규범은 전설이 되고 규범이 있었다는 것은 다시금 천국의 공리가 될 것이다. 열심히 일해 천만장을 모을 수 없었기 때문에 너희들이 살 수 없는 것이다. 일을 하면 규범은 돌아온다. 천상의 일을. 예전에 일들이 규범으로 대체되었듯이 이제 규범을 일들이 일들을 존재가 대체한다. 어깨가 넓은가, 눈 색깔이 어떠한가, 머리 색깔이 어떠한가, 턱선이 어떠하며 코끝이 뾰족한가, 그런 것들이 <근본적인> 문제다. 규범은 너무나 사소해진 나머지 먼지가 되고, 빛입자가 되어 온 도시를 둥둥 떠다닐 것이다. 소년단원들은 일렬로 서서 태양을 주워모을 재능이 있는가 평가받을 것이다. 나머지는 대포에 넣고 자기 자신을 쏘아올리는 것이다.
인리히는 길거리에서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는 슬쩍 그것을 주워들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아직 딱딱하고 차가운 그것을, 손 안에서 몇 번 만지작거렸다. 그건 너무 작은 숫자가 새겨진 동전이라 거의 돌처럼 느껴졌지만, 아직 분명히 숨을 쉬고 있었다.
인리히는 도로를 걸었다. 날은 선선하다. 학교가 끝나고 나면 구원 소년단 활동이 있다. 인리히는 오늘은 가지 않을 생각이다. 오늘은 그가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하는 날은 아니다. 그는 오늘 다른 곳에 들러볼 생각이다. 그는 요즘 여기저기 들러보고 있다. 말했다시피, 열 여덟살이면 그는 세상에 나갈 것이다. 일년 반이 남았다. 인리히는 어깨 옆을 스쳐가는 기척 때문에 고개를 들었다. 놀랄 정도로 빠른 움직임, 작은 몸에 담긴 기운. “늦었어!” 그 놈들은 헐떡이면서 뛰어가다가, 소년단의 선배를 보더니 얼른 돌아서서 인사를 했다.
인리히도 찌푸린 채 가볍게 손을 들어주었다. 그 놈들은 소년단원이지만, 소년단 숙소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별로 친절하지는 않을 친척집이나 부모 집에서 온다. 어쨌거나 사람들은 피가 닿는 자들과 함께 살고 싶어한다. 그 애들의 가느다란 다리나 팔, 맨손 맨발처럼 떠오른 <늦었어!>라는 외침, 둘이 손을 잡지 않고 가다가 손을 잡고 뛰어가는 모양이 인리히의 마음을 생각보다 깊게 건드리고 지나갔다.
그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을까? 소년들은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는 이제 내리막길을 걸어 좀 더 섬세한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학교는 아직도 보이지 않았다. 한 모퉁이만 더 돌면 된다는 걸 알고 있다. 포스터 몇 개가 보였다. 그들은 말을 파는 사람들이다. 내일을 사기 위해 그들은 끊임없이 무어라 지껄이는데, 내일이 마침내 손에 들어올 때 즈음이면 모든 진기한 말을 다 팔아치워버려서, 이제는 도무지 그걸 말할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 인리히는 대륙 북부 어느 나라의 상표나 다름없는 황색 표식이 찍혀있는 국제당 포스터 두 개를 지나 - 그 나라는 십여년쯤 전 아주 광포한 방식으로 그 상표에 대해 전매권 신청을 했는데, 주변국들은 다들 두려워하며 그대로 넘겨주었다 - <온건한> 주변국들이 그래도 조금쯤은 신뢰하는 당의 아주 커다란 포스터 한 개 - 이 정당은 처음에는 좀 더 급진적인 당과 한 패거리였는데, 온건해지기 위해 그들 중 몇 명을 죽여서 시체를 강에 바쳐야만 했다 -를 지나, 애국당 포스터를 지나, 손으로 그린 것 같은 투박한 포스터를 보았다. 의원 투표는 12월에 있다.
인리히는 한참동안 그 포스터를 들여다보았다. 여기저기 작은 구직 광고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전당 대회들이 있다. 인리히는 지긋지긋한 그림자 위를 걸었다. 마지막 모퉁이를 돌자 햇살이 눈보라처럼 그의 안면을 강타했다.
주임 선생이 운동장 가장자리에 아까 그 꼬마 둘을 무릎꿇려 앉혀놓고 있었다. 둘은 넥타이도 매지 않고 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셔츠는 바지 밖으로 빼고, 여자애들처럼 손은 꼭 맞잡고. 낄낄 웃으면서 뛰어왔는데, 주임 선생이 쳐다볼 때만 주눅든 척 하다가 다시 서로 보고 웃었다. 둘의 뺨은 붉었고 소매는 짧았다. 인리히는 햇살 때문에 무지막지하게 찌푸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도 복장 검사를 받고 건물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대해 충고받았지만 나머지는 괜찮았다.
<일어난 일은 모두 일어나는 것이지> 인리히는 되뇌었다. <하지만 그런 말은...>



학교가 끝나고 그는 다른 곳에 갈 거라고 했다. 선배가 쳐다보았다. “어딜?” “당 설명회에.” 선배가 씩 웃었다. “국제당?” “아니.” “그럼 어디? 설마 애국당? 아니, 그건 내일인데. 그리고 거기 간다면 넌 나한테...” 선배가 장난스럽게 주먹을 흔들어 보였다. 인리히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손으로 그린 곳.” 선배가 되물었다. “설마?” 인리히가 끄덕거리자 선배가 이번에는 고개를 흔들며 가 버렸다.
인리히는 중앙 도로를 올라가서, 저물어가는 햇빛을 적갈색 머리로 맞으며 골목으로 들어갔다. 모퉁이를 돌자 작은 황색 건물이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어두워졌다. 누군가가 연설을 했다. 네모난, 별로 크지도 않은 방 안에 서른 명쯤 사람이 모여 있었다. 지금 어떤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그들은 불을 어둡게 해 두었다. 인리히는 잠시 어지럼증을 느꼈다. 연단 쪽의 벽에 횃불이 타올랐다.
방의 네 모퉁이는 거의 암흑에 싸여 있다. 벽들은 캄캄하고 고요해졌다. 원형의 회랑에서 사람들은 모여앉아 연설자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두 번째 연설자의 목소리는 힘차고 아름다웠다. 사람들은 연설자를 바라보며 배정된 의자 위에 약간 다리를 벌린 채 앉아있었다. 대표자들의 연설 후에 청중들은 모여 서서 두런거렸고, 간단한 질문을 받았다. 인리히는 그들이 어떤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 그 내용만은 그의 흥미를 끌었다. “그 경우, 육체의 단련,” 누군가 물었다. “그게 무엇을 위한 단련이 되는지는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런 모순점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겁니까?” “아! 그건 모순이 아닙니다.” 당원이 대답했다. “그건 완벽함입니다.” “그들도 제복을 입습니다.” “그 제복은-” 당원이 답했다. “전혀 거들먹거리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말씀하신 이유와 마찬가지로 인해서입니다.”
“환영합니다. 당신은 무슨 흥미로 이 곳에 오셨습니까?” 당원 중 한 명이 인리히 앞에도 다가와서 물었다.
“연설자들의 발언을 들으셨지요?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더 있으십니까? 왜 이 자리에 오셨는지요? 우리는 젊은이들의 고귀한 발언을 듣는 걸 즐깁니다...” 그는 차례차례 거쳐 인리히앞에 섰다. “좋은 눈입니다. 튼튼한 젊은이군요. 어떠셨습니까?” 그는 물었다. “어떠셨습니까, 성함이...?”
“인리히.” 그는 대답했다. “성은 없습니다.” “그렇군요.” 그는 끄덕거리면서, 흰 이빨이 잘 보이도록 웃어보였다. “그래, 어떠셨습니까? 건강한 젊은이. 당신의 고백을 들려주십시오!”
인리히는 못박힌 듯 서 있었다. 그는 매일 밤 숲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순찰자가 무죄했을까 생각했다. 그는 그 애가 정말로, 자신이 쥐어주었던 쪽지대로 그날 밤 순찰자에게 자신의 처지를 고하지 않았던 걸까, 순찰자는 밤마다 정말로 아이들에게 속아주었을까 생각했다.
인리히는 정신을 차린 듯이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회랑 안은 둥글고 어스름했다. 복도 한 켠에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서서 두런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기사단이다. 임시 정찰대를 당원들끼리는 그렇게 부르는 듯 했다. 숲의 의식. 인리히는 문득 한걸음 물러나더니, 자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빗을 잃어버렸습니다.”
상대가 바싹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비싼 물건입니까? 이 곳에 오신 분들은 남의 주머니를 뒤지지는 않으셨으리라고 믿습니다만.” “아니, 아침에 잃어버렸습니다.” 인리히는 답했다.
“다시 찾지는 못할 겁니다. 찾는다면 그건 빗이 아니라, 교문으로 들어서는 단정한 내 모습이겠지요.” 인리히는 문득, 머리 뒤를 뭔가 뾰족한 것에 찔린 것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그것이 어디에 놓여있었는지 모르는데, 그것을 구해내는 것이 가능합니까? 그것은 거기에 있기 때문에 그 물건이 되는 겁니다. 오직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요. 맥락이 없는 단어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물건을 구하겠다고 다른 소설을 써댈 수가 있겠습니까?” “그 물건이 스스로 존재한다고 믿으려고 애쓸 수는 있을 겁니다.” 당원이 진지하게 답했다. “그 사실을 믿기 위해 하나의 이야기를 찾으려고 할 수는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구해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왜 그 자리에서 구해내지 않는 겁니까?” 인리히가 말했다. “다른 곳에서 구해내야 한다면 당신은 이 세계의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는 겁니다. 그가 사라져버린 세계를. 그래, 그것은 사라졌습니다. 내가 정말로 빗을 찾고 싶다면, 이제와서 다시 찾아낼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것이 있었다고 믿을 수 밖에요. 그런 것이 있었다고. 그렇게 믿으려면, 지금 찾아야 할 장소는 뻔합니다.” “오늘 들으신 얘기가 마음에 맞지 않으셨나 보군요.” “여기는 당신들의 극장이야. 당신들이 회부될 재판장이 아니지.” 인리히는 쏘아붙이듯이 했다.
당원이 사려깊게 응시하고 있더니 미소지었다. 그는 가만히 인리히에게 흰 장갑을 낀 손을 내밀었다.
그는 잿빛 제복을 입고 있었다. 인리히는 굳은 듯이 서 있었다. 그는 아쉬운 듯 모자챙을 당겨 인사해보이고는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



인리히는 어둠 속을 걷고 있었다. 별들이 가끔 연기 속에서 반짝거렸다. 멀찍이 공장 지대에서 푸른 연기가 올라갔다. 야간 근무를 하는 사람들도 낮처럼 열심히 일했다. 인리히는 누군가 멍청한 녀석에게 담배를 권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 놈은 속삭였다. “하지만 냄새가 옷에 밸 텐데...”
인리히가 픽 웃자 죄책감에 못 이긴 그 멍청한 놈은 담배를 물었다. 기침을 하며 연기를 들이마셨다. 제대로 피우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나서 냄새를 뺀답시고 그 놈이 추운 거리를 이리저리 걸어다니는 통에, 인리히도 같이 걸어주어야 했다. 젠장할, 높은 탑의 공주님이! 글을 쓰시겠다! 역시 공주님 답다, 너는 또 내려다보시겠지! 인리히는 피우려고 꺼냈던 담배를 바닥에 던져버렸다가, 주춤하고는 다시 주웠다. 그렇잖아도 선생 사무실 서랍에서 훔친 물건이다. 애들이 다 같이 훔칠 계획을 짜면서 히히덕거릴 때 그 혼자 몰래 들어가서 훔쳐버렸다. 인리히는 주워들고는 그 놈을 다시 피울까 말까 생각했다. 신문 5면에 난 게 사실이고, 어림어림 정기간행물실에서 주워 읽었거나, 심지어 사년 전 당 설명회 때 그 유명한 급진 인사로부터 들은 게 사실이라면 앞으로 이 나라 원화의 가치는 형용할 수 없게 떨어진다. <매일매일 임금 협상을 하느니 담배로 거래하는 게 나을> 거라고 국제당의 어느 인사는 복지 정책과 과잉 투자, 특히 파업 강요를 비판하며 날카롭게 말했다. 인리히는 지금도 가끔 담배를 훔쳐 팔아먹고 있지 않은가!
어느 학원에서 청소일을 맡아 해 주고는 있지만, 소년단 활동을 하다 가끔 눈이 마주치곤 했던 그 여주인은 인리히를 귀엽게 봐서 일을 맡기고 있을 뿐이다. 그런 사적인 동기로 성사된 일이다. 한번 인리히가 펜 몇 개를 훔친 걸로 오해받은 적이 있다. 그 여자는 인리히에게 한번쯤 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인리히는 아니라고 답하든지 그러고도 기분이 언짢다면 차라리 임금에서 빼 달라고 신경지를 부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손해를 보더라도 깨끗하게 자르고 지나가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그 여자는 연민어린 눈초리로 쳐다보기만 했다.
국제당 인사의 지적처럼 된다면, 그 여자는 인리히의 시급을 매일의 물가 지수에 맞추어 매일 올려주려고 하겠지. 그러다가 결국 인리히를 미워하게 될 거다. 인리히가 직접 협상을 시도할 때까지 시급을 가만히 두는 대신 인리히를 미워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게 아니라. “웃기는 짓거리야.” 인리히는 투덜거렸다. 그러면서 그는 슬쩍 담배를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리페에 대해서라면, 인리히는 답을 알고 있다. 그 놈이 공주님이 되지 않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 멍청한 죄책감을 버리는 거야. 그래, 너는 잘 살고 있다. 돈이 많다. 그러니까 할 수 있는 한 자신을 위해서 행복하게 살아라. 그렇게 한다면 너도 훌륭한 시민이다. 네가 조금만 당당했더라면 나는 너를 놀리지 못했을 거야. 너는 조금만 가슴을 펴면 순식간에 세상을 다 가질 수 있지 않았느냐? 우스운 자식이다. 네 죄의식은 네가 아닌 곳에 있었다. 그걸 너라고 아무리 착각하려고 해도, 돌아오지 않아. 너는 너의 역할을 했어야지.
글을 쓰면, 네가 아닌 것도 쓸 수 있을 것 같았어? 초역사적 도덕을 쓰는 것처럼? 도덕은 너와 내가 묵묵히 자기 일을 하면서 세상을 파멸시켜가는 데에 있다. 시장이 건강하면 건강할수록 시민 세계는 망가지기 마련이야. 너는 죽을 존재로 태어난 자신을 버렸다. 너는 불멸하는 작품을 남기고자 한다, 예술가들의 어리석음... 그래서 너희들은 늘 아무곳도 아닌 곳에 있다. 자신들이 언젠가는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리라 속이면서. 너희들은 희망 속에, 희망 속에, 늘 저 높은 곳에 있다. 겁쟁이들! 늘 도망치고 있다! 인리히는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았다. 그는 역시 담배를 피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대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어디 당원이 될 거란 말이야?>
인리히는 자유 노조원의 표식 따위를 옷깃에 단 자신을 상상하다가 웃어버렸다. “미치겠군.” 노조원은 월급을 더 많이 받기는 하지. 그는 담배를 피우면서 잠시 되뇌었다. 그러자 그는 차라리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인리히는 담배를 문 채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는 척을 해야 했다.
소녀가 지나가고 나자, 그는 다시 고개를 내렸다. 그는 유령들이 지겹다고 생각한다. 인리히는 당원 따위가 될 생각은 때려치우고, 노조원이 아니고서는 먹히지도 않을 공장 일도 생각지 말고, 어딘가로 내려가서 밭이나 갈까 하는 다소 공상적인, 허파에 대한 믿음을 집어치운다. 그의 허파는 그런 연기는 태울 줄 모른다. 대신에 그는 담배를 몇 모금 더 빨아들여 분홍빛 말랑말랑한 허파를 증오하기 시작했다. 인리히는 부모가 있었던 때를 기억했다. 친부모 얘기가 아니다. 고아원 말이다.
아이들은 오후에는 마음대로 밖에서 놀 수 있었지만, 원장 신부의 명에 따라 아홉시까지는 꼭 숙소에 돌아와야 했다. 열 시에 젊은 순찰자가 와서 아이들이 잠을 자고 있나 확인했다. 그 순찰자는 지금의 자신보다 세 살이 많았다. 왜 아홉시까지 돌아와 지하실에서 자야 했느냐, 밖은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녁 때 가끔 가까운 하늘에서 굉음이 들렸다. 아이들은 안전해야 했다. 처음으로 그 아이들이 이 세상이 과연 그런 구호를 외칠 자격이 있는가를 의심했던 게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른다. 그들은 미술관 밖으로 빠져나와 열 시가 될 까지 버티었다. 그러고 나자 그들은 미술은 미술관 안에만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자유로워졌다.
성가대 맨 앞에 서서 노래하던 아이는 금방 들어도 알 수 있을 만큼 목소리가 아름다웠고, 신부는 그 애에게 은총을 받았다고 말했지. 젊은 순찰자는 그 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시내에 갈 때면 가끔 신부 몰래 데리고 나가 이것저것 구경시켜주곤 했다. 그 착한 애는 꼭 자기가 얻은 감자같은 것을 애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이불 빨래를 발로 밟으며 그 애가 미사곡의 고요한 부분을 홀로 흥얼거리고 있을 때 아이들은 힌트를 얻었다. 그 애는 미술관 밖에서도 그림일 수 있었다. 그 애 자신이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탈장된 개가 수해 지역에서 도망쳐나와 고아원까지 올라왔다. 아이들은 그 개가 개라는 사실을 비웃었다. 그건 빠져나온 항문이었다. 의사는 그 개가 다른 병을 전염시키기 전에 주사를 놓아야 했다. 개는 바둥거리다가 안락사했다. 개에게 물었더라면 다르게 반응했을지도 모른다. 예컨대 “아프니?”라고 묻는 것이다. 그러면 개는 대답을 선택해야 했기 때문에 고민했을 것이다. 인간의 자유.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걸까? 아마도 그 애에게 물었던 것 때문이겠지? 작은 사람들은 그 애를 고아원 뒤편 숲으로 불러냈다. 그 애가 처음에 개처럼 저항하자 작은 사람들은 물었다. “네 부모는 어디에 있니?” 그러자 그 애는 조용해졌다.
몇 달을 이 무한한 재능을 지닌 예술가는 고뇌하고 골몰해야 했던가. 우리는 모두 진지했다. 고아들은 모두 진지했다. 그들 중 아무도, 결코, <그들은 죽었습니다>따위로 그 질문에 대답할 만큼 그렇게 어리석고 가볍지는 못했다... 작은 사람들은 끊임없이 예술가에게 재료를 공급했다. 엄숙한 인간 사회 때문에 인리히는 몸을 떨었다. 인리히는 홀로 되길 원했고 양쪽 사회 모두에 그 강령을 통보했다. 그는 그 애의 손에 쪽지를 쥐어주고 신부를 찾아가 설교했다. 그는 자유롭게, 자유롭게 뛰쳐나와서... “전당 대회!” 인리히는 걷다가 문득 외치듯이 했다.
그는 자기 옷깃에 이미 무슨 표식이라도 달려있다는 듯이 매만지며 진저리를 쳤다. “인플레, 디플레, 파업 승리, 재정 위기, 정상배들, 독재자들...” 중얼거리다가 찌푸린 채 담배를 빨아들였다. 동전이 무슨 쓸모가 있는 생명이었다면 동전에 대해서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리히는 그 무지렁이 태아를 가만히 주머니에 품고 있었다.
그는 다 타버린 담배를 바닥에 놓고 밟아 문질렀다. 포스터 한 장이 눈에 띄었다.
그 그림은 바닥에서 반쯤 얼어 있다가 담뱃불에 구석이 눌어버린 상태였다. 인리히는 쪼그리고 앉아서 포스터를 집어들었다. 포스터가 아니다. 팜플렛이다. 어딘가에서 전당 대회를 했는지도 모른다. 인리히는 금방 국제당 인사의 지적을 떠올린다. 인리히는 감탄한 얼굴로 그림을 들여다본다. 이것, 아주 강한, 훌륭한 예술이야.
인리히는 그림을 들여다본다. 누군가 모자를 눌러 쓴 사람이 수레를 끌고 간다. 그림 밑에는 황색 표식과 함께 문구가 새겨져 있었지만, 여러 사람 발에 밟혀서 알아보기 힘들다. 그림이 그려진 부분은 어느정도 매끈하게 남아 있어서, 종이 더미가 수레에 쌓여 있는 섬세한 모양이 더 잘 보였다. 푸른 지폐들. 인리히는 눈을 찌푸렸다. 순간 그 더미는 시체들처럼 보였다. 그리고 직전에 인리히는 과연 그 지폐들을 난방비로 내느니 한 군데 쌓아놓고 태워버리는 게 더 효율적이겠노라고 농담처럼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두 생각이 섞여서 기괴한 장면이 떠올랐다. 인리히는 잔뜩 찌푸린 채로 머릿 속의 그 장면을 바라보았지만, 마음 어느 구석에서인가는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것을 막을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 떠올랐다. 무슨 수로?
누가 그런 어리석은 질문에 답을 하고 있단 말인가? 이 멍청한 포스터다. 늘 실패하는 문학가들이다. 인리히는 화가 치밀었다. 가슴에 표식을 하나 달면 당장에 기사가 되어 굴뚝이라도 찌를 수 있다는 식의 당 설명회에 다녀왔다. 다른 쪽에서는 자동차가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면 고속도로가 이미 놓여있는 것으로 가정해야 한다고 우기고 있다. 세계를 걸고 문학을 하고 싶으면 너희들이나 해라. 백년 전의 기사가 되고 싶고, 백 오십년 후의 자동차 장인이 되고 싶으면 너희들이나 해라. 너희들이 무언가 되고 싶다고 해서 세계를 공중에 띄워놓지 말아라. 바로 지금 외에는, 어디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나을 것이다. 시계 바늘을 한 바퀴 돌리면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죽음 외에는.
인리히는 일어날 수 있는 단 한가지 일을 생각했다. 그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어떤 것이 자신의 몸을 담배처럼 물고 태워버릴 때, 그는 사실상 무슨 일인가를 스스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닐 테니까. 일어나는 일 자체.
인리히는 찡그린 채 걸음을 옮겼다. 다시 무슨 일인가가 일어날 때 나는 나를 완벽한 도덕에 맡기리라... 다시는 지껄이지 않고... 네 어깨를 흔들지 않고... 네게 말을 하라고 채근하지 않고... 나는, 아무 당원도 아닌 채로도 총을 맞을 수는 있다... 그건 허파가 건강한 것 만큼이나 당연한 일이다. 인리히는 자신의 양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훌륭한 직업인이 될 것이다. 인리히는 공상에 잠겨 무심코 미소지었지만, 곧 찡그린 얼굴로 돌아갔다.



2.

길레트는 문을 두 번 두드렸다. 그녀는 화가 나 있다. 여전히 바지를 입고 있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바지. 이 바지 하나를 입으려고, 대체 왜 국가와 서쪽 대륙의 속물적 침략, 마약과 같은 물신주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정당, 의사 시험, 여자들의 허영, 양쪽 뇌 기능의 차이, 교육 제도에 대한 비판과 현대 의학에 대한 찬탄 등등 일관성도 없는 주제들에 대해 사십 분 동안 설교를 들어야 하는가! 많은 말을 한 건 아버지 쪽이다. 길레트는 내내 한가지밖에 말한 것이 없다. <이 옷이 좋다니까요! 이 옷이 좋아! 이 옷이 좋다니까요!> 가끔씩 어미를 바꾸며 사십 분 동안.
아버지가 말한 내용 중에 반박하고 싶은 것이 없는 게 아니다. 눈 앞이 빨갛게 될 정도로 많다. 그래도 길레트는 계속 허리에 손을 얹고 같은 말만 반복한다. <이 옷이 좋다니까요!> 좀 더 가슴을 펴고, 어깨를 곧게 하고, 턱을 쳐든 채로, 더 정확한 발음으로, 잡티없는 목소리로. 아버지 앞에서 그 바지를 입은 채로,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충분히 보여주었다. 아버지는 마침내 머리를 저으며 책 쪽으로 돌아섰다. 그 책. 길레트를 직접 보는 것보다도 훨씬 모욕적인 그 책. 아버지가 읽는 책들. 길레트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잠시 보고 있다가 돌아서서 집을 나왔다.
걷다 보니 희미하게 연민이 생긴다. 아버지가 요즈음에 읽는 책들. 늘 걸음하는 황색 건물. 아버지의 누런 안구. 그래, 나도 그 설명회에 가 보아야겠어. 무슨 얘길 하는지 들어봐야지. 그렇잖아도 바로 내일 설명회가 있다던데, 여기서 멀지도 않아. 아버지같은 사람은 무슨 얘길 듣고 사는지... 그러다가 바지 생각이 나자 진저리를 치고 만다. 제기랄! 길레트는 문을 두 번 두드렸다.
연갈색 머리를 짧게 깎은 소년이 문을 열어주었다. “길레트.” 그는 미소지었다.
길레트는 아델마이어의 얼굴을 보자 빙긋 웃었다. 그녀는 집 주인이 여기까지 안내해주었느라고 짤막하게 말했다. 계단을 올라오느라 좀 힘들었다. 아델마이어는 문을 여느라고 의자를 책상 앞에서 치워야 했다. 그는 문을 닫고 나서 의자를 이번에는 침대가 있는 쪽의 벽에 바싹 붙여 두었다. 그는 길레트에게 침대에 앉기를 권하고 자신은 의자에 앉았다. 길레트는 구두를 벗어버리고 냉큼 침대 위에 앉았다.
길레트는 가방을 한쪽 허벅지 위에 놓고, 가져온 바구니는 침대 옆에 두었다. 그녀는 장갑을 낀 채로 양 손을 서로 비볐다. 아델마이어가 책상 쪽에서 주전자를 가져다가 물을 따라주었다. 길레트는 고맙게 받아 마셨다. 아직 따뜻한 물이었기 때문이다. 길레트는 잔을 침대 옆의 책상 가장자리에 올려놓고 가방을 뒤졌다. “전에 네가 빌려주었던 책이야, 아델.”
아델마이어가 받아들었다. “주인 아저씨게 맡겨 주어도 돼. 여기까지 올라올 필요는 없었는데.”
아델마이어는 월세를 내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옛날 건물 칠 층에 살고 있다. 걸어올라오기 수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델마이어 자신도 요즈음은 계단을 오르기가 수월하지 않다. 그러나 아델마이어는 길레트의 얼굴을 보았다. “고마워.” 그는 조용히 말했다.
“아델.” “응?” “뭘 하고 있었어? 머리가 젖어 있어.” 아델마이어가 웃어버렸다. “머리를 감았지.” “수건이...” 길레트가 둘러보았다. “수건 없어?” “옷장에... 문 여는 곳에 걸려 있어. 내가 할게.” 아델마이어가 일어나서 목에 수건을 걸치고 왔다. 길레트는 그새 바구니를 열어젖히고 있었다.
그들은 과일을 꺼내면서 이야기했다. “집주인이 네가 아픈 거 알아?” “응. 감염되는 건 아니니까. 진단서를 가져다드렸어.” “진단서?” “소년단 건물에 보건소가 있어. 믿을만한 곳이야.” “먹는 건 어때? 그럼 주인이 좀 도와주지 않아?” “가끔 죽을 올려보내 주셔.” “어떤 거? 뭘로 만들었는지 물어봐.” “아주머니는 좋은 분이셔, 길레트.” “알아. 하지만 의사는 아니시지.” 아델마이어가 얌전히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있었다. 길레트가 입을 툭 내밀고는,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나도 좋은 사람이야. 말 들어. 아픈 사람한테 식사는 중요한 거야. 어떤 걸 먹어야 하는지는 나도 골라줄 수 있으니까...” 아델마이어가 미소를 떠올린 채 있었다. 길레트가 과일을 꺼내 깎으려다가 그 모양을 보고 손을 멈추었다. “아델!”
길레트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래, 집주인은 좋은 분이셔! 나도 좋은 사람이야. 그리고 네 생각엔 병도 좋은 것이야. 병이란 길잃은 고아들처럼, 사랑스럽게 대우받아야 하는 순진하고 연약한 것이지. 네가 아프다는 건 네가 그 애를 구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거란 말이야. 좋은 사람들이 모두 고통받는 건 네가 병을 구해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야. 그 병은 네 병이 아니라 사실 모든 사람들의 병이지. 넌 조금도 반대로 생각하지 못해. 병은 나쁜 거고, 넌 죽어가고 있고, 사람들은 병에 걸려서가 아니라 너 때문에 슬퍼해. 젠장, 애초에 넌 건강해야 했어! 병이 널 아프게 하는 거지 네가 병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게 아니야! 그렇다면 내가 이걸 왜 가져온 거야?” 길레트가 과일 바구니를 한번 들었다 놓았다. “네가 기침을 하면 병이 피를 흘려내는 게 아니야. 네가 아픈 거야. 너는 건강해야 했어! 세상엔 행복이... 그걸 망쳐놓는 것은... 왜 이해하지 못하지? 왜 사람들에게 당연한 게... 너는 병과 분리되느라 태어난 게 아니야. 너는 애초에 건강한 너였고, 병은 틈입자에 불과해. 너는 죽어가기 전에도 살아가고 있었단...” 길레트가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을 마쳐놓고 길레트는 아델마이어와 눈이 마주쳤다. 아델마이어가 푸른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미소지었다. 길레트는 시선을 피해버렸다. 마지막 문장에 대해서는, 길레트는 조금 후회하는 듯 했다. 아델마이어가 길레트의 무릎에 있던 과일을 가져가서 종이 접시 하나를 의자 손잡이에 올려놓고 자기가 깎기 시작했다.
아델마이어가 조각을 잘라서 접시 위에 대충 놓았다. 그들은 한 조각씩 집어먹었다. 그들은 이야기했다. 주로 길레트가 말하고, 아델마이어는 들었다. 아버지 흉을 조금 보다가 결국 길레트가 선언했다. “어쨌든 난 의사가 될 거야.”
“그래.” 아델마이어가 미소지었다. “수업은 잘 듣고 있어?” “해부학을 못 들어.” 길레트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어차피 지금 듣긴 어렵긴 하지만, 듣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쓸데없는 수업을 들으라고 해서 그래.” 아델마이어가 아버지의 안부를 물었다. 길레트가 고개를 저었다. “여전하시지 뭐.” 그녀는 찌푸린 채 아델마이어의 얼굴을 보았다가는 고개를 내렸다. “널 한번 봐 주시겠다고 했는데 네가 안 온다니까, 자존심 상하셨어. 너보고 웃기는 애래.” 아델마이어가 숙인 채 웃었다. “그 후로도 매일 환자들을 보셔. 아직 바쁘실 때지.” 길레트가 과일 조각을 잠시 입에 물고 있다가 어금니로 부수고, 목 뒤로 넘겼다. “논문들도 계속 몰래 읽고 계시고... 너도 흥미있으면 몇 개 복사해서 빼돌려줄까?” 아델마이어가 웃음을 참듯이 하고 있었다. 길레트는 어깨만 으쓱해보였다. “재미없긴 할 거야.”
아델마이어가 아버지가 들으라고 하신 게 금융학이냐고 물었다. 길레트가 끄덕거렸다. “그래. 하지만 그런 거 흥미없어. 꼭 아버지같아. 거들먹거리는 게 그대로 보여. 사람들이 돈을 벌고 싶어할 거라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 덜 자란 애 취급해. 그래, 난 덜 자란 애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가끔은 그 덜 자란 애가 자라게끔 교육받기 싫다는 이유로 죽어버리면, 우리 부모님께서 그 시체는 무슨 돈으로 사실 건지 궁금해.” 길레트가 금방 어투를 바꾸어 말을 이었다. “물론 난 그럴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말이야. 너한테만 얘기하는 건데, 아델, 난 아버지가 환자들한테 하는 말하고 동료들에게 하는 말하고 좀 비슷하기나 했으면 좋겠어. 이 쪽에서는 환자들을 눕혀놓고 당신의 억압된 기억 운운, 자유 연상을 휘갈기게 한단 말이야. 헌데 저 쪽에서 학회 따위를 열 때면 렌취 씨의 논문따위 한 건도 참조하지 않은 양 해몽꾼이 과학자인 척 한다고 비웃어대지. 하긴 우리 아버지는 렌취 씨의 논문은 읽지 않았을 지도 몰라. 그걸 가지고 남들이 이리저리 실험해 놓은 결과만 보니까. 내가 재미없을 거라고 한 말뜻 알지?”
길레트가 찌푸린 채로 모직 바지에 손을 탁탁 털고, 아델마이어 쪽으로 팔을 뻗었다. “손 내밀어봐.” 아델마이어가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길레트가 손가락 끝을 찬찬히 살폈다. “아프지 않아?” 아델마이어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손가락 끝은, 잘 들여다보면, 반쯤 눌린 것처럼 납작하고 둥글었다.
아델마이어는 길레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길레트가 다시 말했다. “난 의사가 될 거야.” 그녀는 고개를 들어 아델마이어의 얼굴을 보았다. 아델마이어는 여전히 웃고 있었고, 다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길레트가 그 얼굴을 보며 따라 웃었다. “너도 걱정했지, 내가 여자이면서 의사가 되려고 한다고?” 아델마이어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하지만 아델, 넌 내가 열심히 공부해놓고도 일을 구하지도 못할까봐 걱정하는 거야. 아버지는 결혼하기도 힘들 거라고 하시더라... 난 의사가 될 거야, 아델.” 길레트가 힘있게 말했다.
“넌 자격이 있어, 아델. 넌 내가 힘들까봐 걱정하는 거야. 넌 날 걱정해주는 거야. 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부터 그런 비슷한 짓을 해 왔어. 환자들을 그들이 상처를 얻어온 곳으로 되돌려보내기 위해 상처를 치료해주었어. 치료하기 위해서 렌취 씨의 결과를 이용하고 있으면서도, 학계에서는 받아들여지기 힘들다는 걸 알아. 아버지는 학계에서 의사이고 싶어하고, 환자들이 찾아오는 사무실에서는 의사인 양 하지만, 의사가 아냐. 아빠가 갈고리를 달아 준 환자들이 아직도 남의 집 대문을 박박 긁고 있지 않은가 몰라. 우리 집에 고름을 묻혀놓은 자국이 있긴 했어. 복수극이지.” 길레트가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자격이 없어. 자기가 엉터리 의사니까 의사라는 직업이 가치가 있게 해 줄 사회를 찾는 거야. 한 시대를 찾는 거고, 엄격한 교육에 매달리는 거야. 자기가 제대로 된 의사이면 될 거 아냐! 그렇다면 무엇이건 뭐가 그렇게 겁이 나겠어! 자기 환자들이 찾아온 건데, 커튼 아래로 보면서 쓰레기같은 놈들이라고 욕을 하는거야! 그런 건 절대로 의사가 아냐. 난 의사가 될 거야. 내가 여자건 남자건 상관없잖아. 단 한마디 말을 믿는 데에는 결코 음탕한 진리를 섬길 필요가 없다는 걸 보여주겠어.” 길레트가 말하면서 빙긋 웃었다. 아델마이어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길레트는 그 눈과 마주쳤다.
아델마이어는 창 쪽을 보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창을 통해 저녁 햇살이 들어와서 길레트의 등을 찌르고 있다. 길레트의 얼굴과 눈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아델마이어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웃었지만, 완전히 다른 성격의 것이 되어 있었다. 아델마이어는 그녀의 금빛에 가까운 갈색 눈과 마주쳤다. 그 눈은 곧 색깔 뿐인 것이 되어, 원래의 빛을 잃어버렸다.
침묵이 이어졌다. 아델마이어는 겉옷을 걸쳐 입고 나자 곧 길레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길레트가 그림자처럼 마주 손을 내밀었다. 그는 길레트를 바래다주고 돌아왔다. 길레트의 집 앞에서 헤어지기 전에 그들은 가볍게 서로 뺨에 입술을 대었다 뗐다. “잘 가.” 길레트가 말했다. 아델마이어는 그녀가 계단을 올라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아델마이어는 돌아와서 세수를 했다. 그는 사층 복도에 있는 화장실에 갔지만 했지만 누군가 있었다. 그가 나온 다음 아델마이어는 들어가서 토했다. 과일은 너무 시고 단 맛이 났던 것이다. 그 변기에 아침에도 머리를 넣고 있었다.
그는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그는 자신이 무심코 손등으로 입술을 문지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목에 걸친 수건을 입술에 가져다 대고 닦아냈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같은 층에 사는 사람이 아델마이어 앞으로 전화가 왔다고 알려주었다. 아델마이어는 복도 끝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그는 벗겨진 입술로 뭐라고 달싹거렸다.



4



1.

리페는 짐을 올려놓았다. 소년단 옷도 가방 안에 들어있었다. 기념으로 가져오기로 한 것이다.
그는 인리히와도 딱히 인사를 하지 못했다는 점을 다시 상기했다. 학교 친구들과 손을 한번씩 마주잡고 온 것이 전부다. 마지막 소년단 활동 때 이야기를 하자 인리히는 픽 웃었다. “비행기가 지나가면 손을 흔들어주지, 아가씨.” 리페는 인리히에게서는, 막상 떠나기 직전이 되면 좀 더 괜찮은 반응이 나올 줄 알았기 때문에 실망했다.
인리히도 리페가 실망한 걸 알아차린 것 같았지만 더 말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계속 옆에 있을 때에나 경멸하는 눈초리를 통해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것이지, 다른 대륙으로 건너가버린 사람은 그가 자신의 경멸 때문에 내쫓긴 게 아닌 한 아무 관계도 없다... 인리히는 이제 리페에게서 관심을 거두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리페는 자신이 실망했다기보다는 안타까워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왠지 억울해져서, 리페는 자신도 인리히에게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방금 또 떠올려버린 것을 알고는 볼이 불룩해졌다.
부모는 이미 무릎에 담요를 덮고 앉아있었다. 그들은 리페가 짐을 올려놓고 창가 자리로 들어오도록 다리를 조금씩 끌어당겨 주었다. 아버지는 잡지를 꺼내놓고 있었다. 어머니가 친구들에게 연락은 다 하고 왔느냐고 물었다. 리페는 무심코 눈썹을 찡그렸다. 그건 인리히와는 또 다른 기억 때문이다. 리페는 간신히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는 걸었다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곧바로 내려놓아버린 검은 수화기를 기억했다. “연락은 다 하고 왔어요.” 리페가 중얼거리면서, 창가 자리에 앉았다.


비행기는 좀처럼 출발하지 않았다. 리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의자는 불편했고, 리페의 몸은 삐걱거렸다.
리페는 요 일년 사이에 옷을 두 번 맞추었다. 덕분에 지금 입고 있는 옷도 새 것이고 신발도 새 것이라, 여간 불편하지 않다. 엔진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다. 리페는 자신의 양 팔을 내려다보았다.
성장하면서, 시간은 점차 유년기를 향해 흐르고 있다. 그는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고 그것이 원래 안아들어야 할 것을 생각했다. 그러고는 편안하게 팔을 늘어뜨렸다. 그는 아이들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가져도 아버지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어렴풋이 그런 점을 깨닫는다.
이런 것들은 어린 시절의 치기어린 생각으로 판명이 날 지도 모르지만, 리페로서는 누군가의 미소가 머릿속에 떠오를 때면, <이걸 내가 가져가도 될까?>하고 다정하게 묻는 목소리가 떠오를 때면 결코 글을 쓰겠다는 것이 어린 시절의 지나가는 꿈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창 밖의 풍경이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몸에 압력을 받자 가볍게 신음했다. 리페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도시가 내려다보였다.
리페는 한동안 창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곧 창 아래로 바다가 내려다보이기 시작했다. 비행기에 함께 탄 몇몇 아이들이 마음껏 들뜨려고 하면서도, 또 또래들로부터 조롱받을 만한 방식으로는 흥분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걸 리페는 웃음을 띈 채로 바라보았다. 고수머리를 이마에 늘어뜨린 대여섯살짜리 아이들은 무서워하면서 어머니의 가슴에 매달리기도 했다. 안경을 낀 아이 아버지가 그 모양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다가, 다시 신문으로 눈을 돌렸다.
공항을 떠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았다. 리페는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속이 이상해지려고 했다. 그는 다시 창 밖을 보기로 했다. 비행기는 아직 난기류따위를 만나지 않고 안전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리페는 창 밖을 내려다보았다. 바다가 한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저 멀리 수평선이 있었고, 수평선은 거의 둥글게 보였다. 수평선은 마침내 흐릿해져가더니, 갑자기 조금씩 타오르는 것처럼 변했다. 리페는 눈가에 들어온 햇살 때문에 흠칫 놀랐다. 여기에서도 석양이 지고 있는 것이다.
비행기는 저녁 쪽으로 조금씩 다가갔다. 아버지가 찡그린 채 보고 있더니 커튼을 치라고 하고, 리페에게 시차에 대해 설명해주려고 애썼다. 그러나 리페가 커튼 사이를 조금 벌리고서라도 열심히 석양을 바라보려고 애쓰자 어깨를 으쓱해보이더니 그만두었다. 어머니는 이미 잠들어있었다.
리페가 글을 쓰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는 실제로 머릿속에서 그렇게 가정해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런 가정은 의미가 없다. 리페 자신도 그 점을 알고 있다. 음악은 시간을 떠벌댄다. 시간은 음악을 떠벌대지 못한다. 시간은 그들을 떠벌대지 못한다. 그들이 시간을 쓴다. 하나의 미소짓는 얼굴과 하나의 찡그린 얼굴, 하나의 상처입은 목소리와 하나의 상처 준 목소리, 하나의 기침 소리와 하나의 담배 연기가 끊임없이 리페를 쓴다. 비행기는 전진한다. 시간의 상이 되돌아와 그의 망막에 맺힌다, 문학적으로.
리페는 눈을 찡그렸다. 그 석양에 감동받았던 것이 갑자기 역겹게 느껴졌다. 그는 갑자기 자신이 아델마이어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이 대륙을 떠난다는 걸 알게 된 밤 꿈에 아델마이어가 나왔는데, 그는 아델마이어인 게 분명하면서도 동시에 아닌 것 같기도 해서, 리페는 그와 함께 겪게 된 일에 만족하면서도 끊임없이 그가 누구인가 의심해야 했던 것이다... 비행기는, 날개를 편 채 석양 쪽으로 끊임없이 전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리페는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았다. 어쨌거나 꿈 속에서 아델마이어는 여전한 사신의 모습으로 나왔다. 리페는 왜 그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던가 생각했다.
비행기는 바다를 건너 한없이 전진했다. 그것은 삼분 전으로 날개를 접었으며, 한 시간 전으로 손님들을 모두 자리에서 내보냈다.
다섯 시간 전으로 그것은 갈색 셔츠를 입고 담배를 입에 문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일곱 시간 전으로 서남쪽의 하늘이 주름살처럼 모여들더니, 한 줄기 뚜렷한 연기 구름이 떠올렀다. 그건 점점 새하얗게 짙어지면서 집 뒤로 저물더니 완전히 져 버렸다. 집 안에는 방이 있었고 방에는 검은 전화기와 콘솔이 있었다. 삐걱거리며 키가 작아져가는 소년이 문이 꼭 닫힌 방 안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전화가 끊임없이 오분 전으로 걸렸다. 문이 끊임없이 십분 전으로 열렸다. 서남쪽이 완전히 잠잠해지자, 순간 하늘이 새파랗게 변하더니 쏟아져내렸다. 아버지가 중얼거렸다. <의회의 배신자들은...> 그들은 새 집에서 치즈 케익을 먹고 있었다.
비행기는 바다를 건너 전진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전진한다. 일어난 일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일들은 하나씩 손을 맞잡고 진실이 되어버린다. 굉음. 찻잔들. 누군가 여럿이 속삭인다. 비행기 안에 앉아 담요를 무릎에 덮은 소년은 잠들어있다. 꿈 속에서 그는 마지막 목소리로, 마지막 솔로이스트로, 최초의 고백자로서 속삭이고 있었다. 합창은 소년의 찰나에 맞추고 있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속삭인다. <모든 일어난 일은, 일어난다> 합창은 언제나 마지막으로 울려퍼진다. 숱한 사람들이 합창한다. 합창으로 가득 차 <비행기>라는 요란한 소리가  오직 울려퍼진다. 소리가 그치고 유일한 침묵 가운데에는 위대한 예술가가 있다.
리페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귀에 꿈의 잔해가 남아있었다. 그는 숨을 고르며 옆자리를 본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둘 다 몸을 젖히고 잠들어있다. 리페는 조금 마음을 놓는다. 리페는 미소짓는 얼굴 하나를 떠올려보려고 애쓴다. 그러나 어머니와 아버지를 내려다보고 있는 채로는 그러기가 쉽지 않다. 리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지금 꿈에서 겁을 먹고는 이 둘을 먼저 찾지 않았던가! 그는 그러나 이번에는 아델마이어의 얼굴을 확실히 보았다. 그리고 여전히 그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던, 동시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가 사신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는 어머니가 덮은 담요 한 쪽에만 손을 대고 다시 등을 기대고 앉는다. 비행기의 동체가 진동하는 것이 등을 통해 전해져 왔지만, 움직인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건 그저 숨을 쉬듯이 한 자리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비행기 안은 아주 조용했다. 석양은 이미 사라지고, 커튼 틈으로는 시들어가는 푸른빛만 들이치고 있었다. 리페는 그 틈새를 응시했다.
비행기 안의 사람들은 감각을 잃은 것처럼 자고 있었다. 리페는 어머니에게서 손을 떼고, 담요를 끌어올려 자기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는 잠을 자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조용한 졸음이 그의 눈을 덮었다. 리페는 저항하려 해 보았다. 지금 깨어있어야 한다. 지금 잠들면 깨어나야 하리라. 깨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저항할 수 없으리라. 꿈 속에서 아델마이어는 미소짓고 있었고, 혹은 미소짓고 있었지만 아무 표정도 없었고, 그러나 그가 분명 웃고, 울고, 찡그리고, 미소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건 모두 지나버린 일이다. 리페는 아델마이어의 얼굴을 보았다. 그 얼굴은 커다란 상처가 새겨져있고 번져 있어서, 이목구비랄만한 것은 모두 날아가버린 후였다. 그 얼굴은 절대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느때처럼. 리페는 가만히 신의 정체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신화를 낳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는 리페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거절한다,” 리페는 외쳤다. “거절한다, 거절한다, 나는 태어나지 않는다!” 리페는 소리쳤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리페는 땀으로 젖어, 고개를 창 쪽으로 돌렸고, 그의 콧등을 지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삼십분 쯤 후 그는 진정했다. 리페는 어머니가 승무원에게 부탁해서 가져다 준 초콜렛을 눈 앞에 두고 있었지만 포장을 뜯지는 않았다. 어머니가 그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왜 그렇게 영 딴 사람을 보듯이 하느냐고 물었다. “아니예요.” 리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예요, 어머니.”


2.

아버지는 그녀의 이빨을 확인했다. 길레트는 긴 의자에 누워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집게로 어금니의 오톨도톨한 면을 더듬어보았다. “좋구나.” 그는 끄덕거렸다. “깨끗해. 사랑니도 똑바로 나고 있어, 교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하지만 이 면은,” 아버지가 어금니 사이를 긁어냈다. “치석이 생기기 쉬워. 조심해라. 하지만 잇몸이 상해선 안 된다! 부드러운 칫솔을 써라. 여러번 닦는 거야. 손에 힘이 들어가면 안 된다.” 길레트는 알았다고 간단히 답했다. 양보할 수 없는 몇가지 주제를 제외하면, 말싸움하기가 점점 더 귀찮아지고 있다. 조수로 취직하고 나면 집을 나가버려야지. 그녀는 몇 번이고 다짐했다. 검사가 끝나자 아버지는 길레트더러 물로 입을 씻으라고 했다. 길레트는 서너 번 헹구고 뱉어냈다. 아버지도 손을 씻었다.
길레트는 아버지를 한참 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보았다. 길레트는 눈을 깜박거렸다. 아버지가 눈치채고는, 주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자선 사업도 아니고 말이야.”
“별로 비싸지도 않잖아요.” “가망이 없는 병인 걸 알면, 네 마음을 끊는 거다. 약을 계속 주는 게 아니야.” “내 마음은 사람한테서만 끊어져요. 병에게서는 끊어지지 않아요.” 길레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버지는 얼굴을 찡그렸다. “너는 병을 숭배하는 거냐?” “그  약은 병을 낫게 하고, 병은 누구나 걸릴 수 있어요. 통로가 되지 못하는 건 늘 사람이예요. 사람이 사람을 낫게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니까 아버지는 그런 말을 하는거야. 그렇다면야 누구는 낫고, 누구는 낫지 못하지. 환자든 의사든 사람은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을 뿐이예요. 난 의사가 되겠다고 했잖아요. 언제 어디서나 의사가 된다구요. 사람은 그럴 수가 없어요. 의사가 되려면,”  길레트가 말했다. “사람은 사라져버려야죠.”
“어디로?” “직업 속으로요.” “누구한테서 배운 말을 하는거냐?” 아버지가 찌푸린 채 있었다. “그러나 동감이다.” 아버지가 장갑을 벗어놓고 나서, 묵묵히 답했다. “이 나라엔 질서가 필요해.” “그건 달라요. 아버지.” 길레트가 날카롭게 답했다.
“어디가?” 그는 돌아서서 길레트에게 찡그린 얼굴을 내보였다. 길레트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는 자신이 마음에 안 들게 굴 때면, 그가 어머니 탓을 하는 걸 보기가 두려웠다. 아버지는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양 눈썹을 모으고 있는 걸 보면 특정한 생각이 그의 이마에 두드러지는 듯 했다.
아버지가 돌아섰다. 길레트는 나갔다 오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불평했지만 딸을 내보내주었다. 아버지는 요즈음은 늘 찌푸리고 있었다. 그는 화가 났다기보다, 그 표정이 근엄해 보인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는 턱에 조금 남은 금발 수염을 매만진다. 그는 자기 딸의 머리카락이 너무 검다고 생각한다. 검고,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인생 일대의 실수였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 어머니는 칠년 전에 죽었거나, 집에 찾아온 머리 검은 병사에게서 무언가를 느껴 집을 떠나버린 것이다.
아버지는 지침서를 들여다본다. “턱이 약간 들어간 얼굴...” 그는 자기 턱을 매만진다. “둥글게 눈썹 위로 튀어나온 이마와 함께, 그건 천재의 징후지만...” 아버지는 딸의 이마를 떠올린다. 천재의 턱과 검은 머리카락, 그건 좋지 않다! “사회의 틀에 잘 적응하지 못할 위험이 있다.” 그는 보고서를 읽어나간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딸과 외모상의 특징이 일치하는 데가 있는, 그러나 좀 더 먼 피를 받은 검은 곱슬머리 남자아이에 관한 보고서를 읽고 있다. 보고서는 서부에서부터 건너온 것이다. 그 애는 고아원에서 살고 있다가 최근에 감호소로 옮겨졌다. 심각한 비행 때문이다. “같은 원생을 추행,” 그는 읽어내려갔다.
“단체로 수행... 이 원생이 주도... 그는 교육할 수가 없었다. 사실 우리는 교육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감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네 살 때 고아원에 받아들인 후, 우리는 그가 파괴적인 행동을 보이는 점이 주목했다. 다른 원생들이 나무토막을 쌓기를 즐길 때 그 애는 오로지 부수기 위해서만 쌓는 듯 했다. 쌓아놓고 그 애는 발로 차서 다시 바닥에 흩어놓곤 했다. 그는 그 과정을 즐기는 듯이 보였다. 우리는 그가 약간의 분열증이 있지 않나 하고 상담 치료를 해 보려 했다. 그는 나아진 듯이 보였다. 그러나 사년 뒤 우리는 그 애가... 영악해졌다... 몰래 괴롭힘... 자기가 물건을 훔쳐놓고, 서로 이간질해서 아이들 전부를 조작했다. 발도 빨리 커졌으며 키는 또래 신장을 훨씬 웃돌았다. 그 애는 여전히 여덟 살짜리였지만 사학년인 척 하면서 자기보다 높은 학년의 아이들까지 좌우할 수 있었다. 오학년짜리 아이들한테는 고분고분했으며, 가끔 훔친 돈으로 군것질거리를 바쳤다. 학교에서는 이 아이가 행실이 바르다는 평판이 있었다... 이 아이는 가끔 사학년이 아니라는 게 선생에게 들키면, 또래 아이들은 자기가 키가 크고 몸이 크고 손발도 커서 따돌린다는 식으로, 슬픈 눈빛을 보냈기 때문이다. 선생들과 지도부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며 필자는...” 아버지는 중얼거렸다. “비슷한 경우와 비교해 보아도 알 수 있다. 금발의 고수머리에 얇은 입술을 가진 이 아이는, 전형적인 어린애의 모습을 하고 있고, 성장도 느린 편이었다. 그의 성장판은 충분히 여지가 있었고 골반의 구멍도 막히지 않았으나, 열 두 살때까지 키가 작은 편이었다. 이 아이도 비행을 일삼았으며, 다른 아이들의 물건을 훔치는 일도 잦았다. 이 아이는 다섯 살 때 고아원에 버려졌으며, 이전에는 미혼모가 아이를 정신적, 육체적으로 학대해온 것 같다. 열 두 살 때 좋은 곳에 입양되었으며, 이후 빠른 속도로 진척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아이의 키는 일년 사이에 열 두마디가 자랐다. 이런 식의 대조표가 아래 작성되어 있다. D. 박사의 도움을 얻어 특정한 염색체 위치의 구성을 - 예컨대 OA인가 AA인가 - 구성해보는 게 가능했다. 따라서 세 가지 분류를 통해 대조표가 작성되어 있다.” 아버지는 대조표를 살폈다. “비행, 키가 작다, 발이 작다, 뇌하수체가 덜 발달되어 있다. 특수 비행, 키가 크다, 발이 크다, 뇌하수체가 극도로 발달되어 있다, 성장이 빠르다. OO형 검은 머리와 교정이 필요한 E형 치열, 두개골 BB형의 경우 성장과 비행이 함께 기능한다. 좋은 환경과 공공의 교육을 제공하면 비행은 조직화된다. 다음 단체 행동의 경우를 보면...” 아버지는 페이지를 넘겼다. “물론 AA형 아이들의 경우에도, 이들이 비행을 저지르는 경우는 매우 적지만 - 특히 두개골 AA형의 경우 - 간혹 단체 비행에 이들이 가담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면밀히 조사해보면 늘 주동자가 따로 있기 마련이다. 심지어 그들 교사가 주동자인 경우가 있다. 이런 교사들은 정치적 성향이 강해서... 아이들에게조차 어떤 견해에 의해 행동하지 않으면 그 존재 자체는 무의미한 것처럼 가르친다. 그러므로 이들 성향은 폭력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어떤 행동의 성향이란 아이들을 한 가지로 계도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아이들을 존중하는 것이 되어야 할 일이다.” 아버지는 페이지를 다시 넘겼다. “... 지향하지 않고는 존재를 무의미하게 보는 것, 어떤 행동을 선택하지 않고는 살아있다는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만드는 것, 이것이 소위 어떤 ‘정치적 성향’을 택하는 기본적인 의식으로 남아있다. 각 개인은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고유의 가치를 띄고 있다. 그들은 분명 살아있는 것 만으로도 고유한 의미를 암시한다. 행동이란 그 가치를 스스로에게, 공공을 통해 돌려주는 것이며, 교육 또한 그러하다. 개인은 공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요 - 공공에 종사함으로서 각자 자신으로 귀환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멈추고 그 부분을 접어두었다. “우리의 아들들은 존중받아야 한다. 일련의 논문들을 통해, 두개골 연구가 진행된 바 있다. 나의 학생들도 좋은 보고서를 올려주고 있다. 물론 그 보고서를 제출하는 태도에 관해서도 나는 기록하고 있다. 모두 같은 능력이 있다고 믿을 때, 그리고 마치 선거 한 표를 통해서 모두 같은 권능을 행사하고 있다고 믿을 때, 그런 보편성의 지옥같은 현장에서 개인들은 묻혀버린다. 저 검은 곱슬머리 아이와 조그만 금발머리 아이는 같은 어린애요 후일에는 같은 성인으로 취급될 것이다. 이 경우 금발머리 아이만을 살리고, 검은 머리 아이는 구해내지 못한, 즉 둘 다를 구해내지 못한 <보편적이여야만 했을> 성장기 의무 교육의 내용이 책망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대조표에서 보았듯이 성장 과정은 보편적이지 않다. 성장이란 누군가에게는 이러한 방향으로 커 가는 것을, 누군가에게는 저러한 방향으로 완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교육을 믿고 선거를 믿을 때 사회는 하나의 모습으로 통합될 수 없다. 존재 자체가 아닌, 존재가 정치적이기를 선택하는 ‘자유’라는 권리의 보편성을 - 인간의 보편성을 믿을 때 결코 사회는 하나의 모습으로 통합될 수 없다. 개개인은 서로 다르다. 다양성을 존중하기. 거기서부터 우리는 출발해야 한다. 과감한 부정은 평화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부정은 한 사회가 통합되는 방식이지, 부인되는 방식이 아니다. ...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그러한 정당에 속한 교사들과는 나는 정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가 모든 개인들의 차원으로 격상되는 문제이지, 결코 개인이 사회의 차원으로 짓눌리고 격하되면서, 가장 고귀한 자가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그 부분에 밑줄을 그으려고 했으나, 다음 몇 줄이 눈에 띄었다. “교육은 선생들의 것이 아니라, 의사의 일이 되어야 한다.”
아버지는 그 부분에 크게 밑줄을 긋고, 한숨을 쉬며 내려다보았다. “의사라.” 그는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고, 거울을 보았다. 과거에는 금발이 나 있던 자리에 귀 위쪽의 털 약간만 남아있었다. 그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자기 얼굴을 보고, 어린애들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생각했다. “지킬 수 있지.” 그는 양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러보며 중얼거렸다. “아기들, 그렇지.”
아버지는 보고서의 표지를 잘 눌러서 책상 구석에 놓았다. 그는 거실로 올라와서 담배 한 대를 물었다. 그러나 그는 곧 불을 붙이지도 않고 내려놓았다. 그건 너무나 나약한 일로서, 그에게 있어서는 발육을 적게 하고 사람을 왜소하게 하는 것이다. 그의 허파는 회색빛으로 물들고 쪼그라들고 말 것이다. 아버지는 아직도 자신이 무한히 완성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그는 건강해지면 된다. 온전히 건강하고 훌륭해지면, 육체 자체는 훌륭한 정신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사이비 물건으로 육신을 모욕할 이유가 없다. 육신을, 생명을, 한 사람의 생을.
그는 운동을 해야겠다고 느낀다. 옆구리의 살이 벨트 바깥으로 늘어지는 것 같다. 너무 오래 담배를 피우고, 아내를 잃은 고통에 차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아내가 그를 버렸던 것을! 그는 눈 앞에 담배가 놓여있는 것을 보고 모욕감을 느낀다. 연기가 - 제 살을 태우는 연기가 - 정신이라도 되는 양 향기를 맡게 했던 것. 모두 연기를 뻑뻑 내뿜으며, <향이 참 좋습니다>따위로 대화했지 - 기만이다! 그는 품에서 담배곽을 통째로 꺼냈다. 그는 그 상표를 보며 비웃었다. 이런 것이 나를 피우게 놓아두었던가! 그는 잠시 친구들을 생각했다. 그러나 담배를 휙 던져 쓰레기통에 넣었다. 사실 그만 해서는 분이 풀리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는 아이들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의사야.” 그는 중얼거렸다. 그는 생생한 노란 털이 나 있는 자신의 손가락들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손을 약간 뻗어 신문을 집어들었다. 신문의 열 일곱 번째 면에는 시와 단평이 실려있었다. 그는 단평은 읽지 않았다. 어차피 단평란의 글씨들은 안경을 끼지 않고 보기에는 너무 작았다. 무슨 큰 상을 받은 시인인 모양이다. “쪼그라진 얼굴, 솜털 대가리, 주름투성이, 벗겨진 발목...” 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는 자기 왼쪽 귀 위의 머리카락들을 괜히 가다듬으면서, 그렇다, 늙으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생각했다. 그는 다음 연을 읽으며 얼굴이 환해졌다. “그 모든 것을 그려낸 천재.”



“아버지는 엉망이야.” 그녀는 눈살을 찌푸린 채 말했다. 아델마이어는 언제나와 같이, 그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아버지는 어떠시냐고 물었던 것이다.
사실 길레트는 아델마이어가 지나치게 자신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듣고 있어서, 그녀가 무얼 물어주길 원하는지 다 알고 잇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그렇게 되고 나면 아델마이어에게는 길레트가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게 중요하지, 대답의 내용따위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길레트에게는 중요하다... 길레트는 아델마이어가 듣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단어 하나하나가 쑥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제대로 말해야 하리라. “아버지는 의사잖아. 내가 전에 말했지, 아버지는 자기 직업을 가치있게 해 줄 시대를 찾고 있다고. 마치 젊은이들이 자기 자리를 찾듯이 말이야. 그 젊은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잖아. 아버지도 마찬가지야. 나는 직업이 거리라고 했어. 잠기어있는 거리를 열어주는 거야. 그렇다고 거리를 없애는 건 아니지. 약과 병 사이, 치료와 병 사이의 잠겨있는 통로. 그건 사람들이야. 사람들이 그 거리를 잠그어버려. 하지만 사람들 때문에 그 둘은 연결되어야만 하는거야. 선한 것은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아직 선하지 못한 것도 한 사람이지. 그래서 의사란 말이야 - 그건 선해진 사람이란 말이야.
아버지는 반대야. 아버지는 자신이 원래부터 선하다고 믿게 해 줄 것을 원해. 아버지는 세계관을 원해. 아버지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버지는 전 세계적인 진리를 원해. 자기 육체가 그대로 직업이길 원해. 금발이니 두개골이니, 얘기하는 걸 들으면 속이 터질 것 같아. 아버지는 자기 스스로가 의사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병을 생각하지 않아도! 자기가 누굴 만나건 <누가> 환자이고 누가 아닌지 가를 수 있다고! 그게 무슨 짓인지- 아델, 알잖아. 아버지는 <아프니?>하고 묻지도 않을거야. 아버지는 인간이 그런 질문에 대답할 자유를 갖고 있다는 걸 경멸하시거든. 아버지는 <너는 아프다>하는 선고를 원해. 물론, 아델마이어, 그가 병에 걸렸는지 아닌지는 의사가 잘 알 수 있어. 나도 어떤 병이 그 사람의 육신을 잡아먹고 있는지 가장 정확하게 알아보는 의사가 되고 싶어. 하지만 아버지는 병과 사람을 분리하지 않아. 아버지는 환자 자체가 병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거기에 대해 진단을 내리는 거지. 어떤 아이는 감화소로 보내야 하고, 어떤 아이는 교육 시설로 보낼 탄원서를 써 주겠지- 아, 젠장, 나도 검은머리야!” 길레트가 눈을 찌푸렸다. “이제는 널 만날 때처럼 바지를 입고 다닐 수도 없어.”
길레트가 뭉툭한 구두를 신은 발을 까닥거렸다. “그런 짓을 할 때마다 아버지가 내 머리털만 노려보는 거 같아서야. 구제 불능이라고 생각하고 농장으로 보내버리면 어떻게 해? 아버지는 모든 것에 대해 공평무사하신 의사 선생님이셔!” 길레트가 입을 삐죽거렸다. 아델마이어가 미소짓고 있었다. 길레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델, 겉옷만 좀 벗어봐.” 길레트가 말했다.
늘 하는 진찰이다. 의사놀이에 불과한 것도 같지만, 길레트로서는 최선을 다해서 진지하게 굴고 있다. 아델마이어는 단추를 하나씩 끄르고 겉옷을 벗었다. 길레트가 그의 등에 손을 얹었다. 길레트는 아델마이어의 갈비뼈 앞 쪽을 매만졌다. 가슴은 앞 쪽으로 둥글게 튀어나와 있었다. 길레트는 아델마이어에게 기침을 해 보라고 했다. 소리는 아주 나빴다. 길레트는 겉옷을 입으라고 하고, 아델마이어의 어깨에 담요를 둘러 주었다. 문득 손이 그의 뺨에 닿았다.
거의 무심코였다. 길레트는 담요를 꽉 붙잡고 있었고, 아델마이어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녀는 눈을 뜨고 자신이 무얼 보고 있는지 생각해보려 애썼다. 자신이 지금까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아델마이어가 푸른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금 아델마이어의 입술에 가 닿았다. 이번에는 의식적이었고, 길었다. <맙소사> 그녀는 생각했다.



“쪼그라진 얼굴, 솜털 대가리, 주름투성이, 벗겨진 발목...” 아버지는 중얼거리면서 탁자 주위를 걸어다니고 있었다. “그것을 그려낸 위대한 천재.” 아버지는 양쪽 입꼬리를 당겨 보기좋게 웃었다. 가정부가 식사를 마련해놓고 떠나버렸다. 아버지는 가끔씩 스프 그릇 쪽을 바라보았다. 생크림을 너무 많이 넣은 것 같긴 했지만, 맛있어 보였다. 아버지는 몇 숟갈 들고 나서 숟가락을 씻어놓을까 말까 고민했다.
벨 소리가 울렸을 때 그는 움찔했다. 길레트가 발을 털고 들어왔다. “얼굴이 좋아보이지 않는구나.” 아버지가 말했다. “자, 식사나 들자꾸나.”
“기분이 좋아보이시네요.” “이 시를 볼래, 얘야?” 아버지가 말했다. 그러나 곧 접어넣었다. “네 취향은 아닐 것 같구나. 그나저나 오늘은 더 늦게 왔구나. 대체 너는 이 아버지를 사랑하기는 하는건지 모르겠다. 물이나 좀 따라오거라.”
그들은 자리에 앉았다. 길레트는 아버지가 흥분해있다고 생각했다. 무슨 시를 읽었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노력을 포기해버린지도 꽤 되었다.
아버지는 일부러 벨트 구멍을 하나 더 당겨서 차고 있었다. 벨트가 너무 조이기 시작하면 아버지는 그만 먹어야 한다는 신호로 생각하리라. 그러나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허리가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뜻을 잘못 해석하고서 길레트가 조심스레 말했다. “조금 심각한 얘기를 하느라고요, 아버지.”
“또 무슨 얘기를 한 거냐?” 아버지가 딸이 못 보는 사이 벨트를 끄르려고 애쓰며 물었다. “넌 언제나 그 애만 찾아간다. 그 애한테 영혼이라고 판 게 아닌가 걱정이야. 넌 병자가 그렇게 좋으냐? 그 애를 몇 번 만나더니 의사를 한다고 했지. 이제 평생 병을 숭배하며 살겠구나 생각했다. 오, 저 사람도 환자야. 그 애가 저기에도 있어. 저 사람도 환자야. 병은 누구나 걸린다고? 직업 속으로 사라져야 한다? 그래, 참 오래된 얘기지! 그 애 자체가 네게는 병이었던 거야. 너는 죽고 싶었고, 죽고 싶었고, 죽고 싶은 나머지 <사라진다>는 말을 대신 사용했을 뿐이야. 너는 공적으로 죽고 싶었던 거야- 전 세계가 장례식 사업장이길 원했던 거지!”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딸한테 죽는다는 말 자꾸 쓰지 마세요. 아버지를 위해서 그건 좋지 않아요.” 길레트가 쏘아붙였다.
“그래, 내가 좀 흥분했다.” 하고 아버지는 간신히 벨트를 끌러놓았다. “내 딸이 병자에게 집착하는 걸 보고 좀 무서웠단다. 전에 네가 물었지, 죽어가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느냐고. 아버지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대답하지 못하셨어요.” “그래, 오늘 대답하마.” 그는 구멍 두 개를 더 늦춰놓고 식탁 위로 손을 올렸다. “그 두 개는 전혀 다른 게 아니란다, 얘야. 넌 여자애니까 이해하기 힘들 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건강한 육체를 상상해보렴. 더없이 단련된 육체 말이다. 아니, 큰 정원 구석에 세워놓은 그런 것들이 아니다! 그건 우스워. 그건 장난이고, 놀림감이야! 하지만 말이다- 실제로 살아있는, 극도로 단련된 육체는... 색깔이 뚜렷한 표식과, 깃발, 나팔소리, 제복과 경례, 원활한 신진대사처럼 조직화된 사회... 그 몸뚱아리가 어디로 가겠니? 그건 무엇을 위한 것일까? 거기서 한 인간은 일체화되어 있단다. 사실상 거기서 사람은 단 하나의 인간으로 새로 태어난단다. 우리는,” 그가 컵을 들며 말했다. 길레트가 작은 주전자를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경험을 함께 했단다. 완벽한 도덕을 보았단다.” “그런 게 직업이라면 저도 같잖아요.” “그래.” 아버지는 끄덕거렸다. “그러니까 거짓말을 하지 말잔 말이야. 인간은 그런 곳에서만 실현되지. 인간이라는 직업은 말이다! 병은 아니다, 길레트. 병이란 육체에 정신이 제대로 결합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단다. 그것은 죽음과 삶 사이에 거리를 벌려놓지. 죽는 데에는 꼭 삶이 마모되어야 하고, 살아나려면 죽음을 거부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간격이 바로 악이다. 그 간격 때문에 인간은 분열되어 버리고, 어디에도 있을 수 없단 말이야.”
아버지가 포크를 들고, 계속 말했다. “너는 의사로서 그 간격 자체가 되고자 했다지만, 불가능하다는 걸 나는 늘 알고 있었다. 내가 얘기했지, 얘야, 넌 여자애야! 네가 친하게 다니는 그 애야 널 꼬드겼겠지. 자신도 병자니까 말이다. 그 애는 일을 열심히 한다고? 그렇다고 해도 다른 애들보다 열심히 하지는 못 하겠지. 나도 그 책방에 간다, 얘야! 가끔은 구하기 힘든 외국 서적도 들어오거든. 주인은 그 애를 지난 주에 해고시켰다는구나!” 길레트는 그 순간 숟가락을 떨어뜨릴 뻔 했다 -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그 애는 저주받은 것 같은 얼굴로 자리를 떴다고 한다. 그런 표정은 처음 보았다는구나. 그게 본성이었던 것 아닐까? 길레트, 너는 그 애가 잘 웃는다고 했지? 약한 사람들은 잘 웃는다. 병자들은 자신이 병에 걸린 것 만으로도 구원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지. 결코 자신들 자체가 가치있다고 믿지 않아. 결코 어떤 진리를 갈구하지 못해. 그들은 자신들이 고통스러워하고 있기 때문에, 진실되지 못하기 때문에, 약하고 악하기 때문에 구원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야. 아, 그들의 선은 악에 기인한다! 그런 선은 대체 있기나 하니? 그런 선은 악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분열을 사랑하고, 도덕의 부재를 - 비굴하게 웃으면서 조장한다. 그런 웃음은 상대 앞에 무릎을 꿇는 것과 같지. 간격은 없어져야 한다, 길레트. 완전한 사회에서라면 말이다. 아버지도 운동을 좀 할 생각이란다!” 아버지가 깨끗한 이를 드러내보였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그 사람은, 소위 가장 뛰어난 금발머리 아이들을 골라내서- 훌륭하게 죽이고 죽을 수 있도록 단련시킬 계획을 짜고 계시는 거군요.” 길레트가 비웃듯이 말했다. “그 조그만 정당이 아버지같은 바보 빼고는 지지자가 없어서 다행이예요. 정권에 요만큼이라도 가까이 갈 가능성은 없으니까, 그만 두세요.”
아버지는 들은 척 만 척 스프를 퍼먹고 있었다. 사실 그는 배가 많이 고팠을 것이다. 길레트는 시선을 내렸다. 아까 아버지의 이마에서 어렴풋한 고통을 읽었기 때문이다. 길레트는 사실, 아버지가 입으로 뭐라고 말하건 자기 뱃살을 빼기 위해 운동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행동을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길레트도 아버지 몰래 당 설명회에 가 본 적이 있다. 회랑 안은 어두웠고, 횃불 네 개만 밝혀져 있었다. 숲의 집회를 모방한 게 아닌가 싶었다. 두 번째 연설자가 연단에 올라왔다. 그는 키가 작았고 표정에 기분나쁜, 혹은 감동적인 힘이 있었다.
그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입을 열자 그 자리가 얼마나 마술적인 효과를 노린 자리인지 알 수 있었다. 아니면, 그는 사실 연단에 올라간 것이 아니라 내려온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착각은 횃불이 점차 낮게 타오르고, 그의 목소리가 점차 들끓으며 잦아질 때 즈음에 절정에 이르렀다. 무대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던 가수는, 평소에는 양복을 입고 거리를 쏘다니는 사람으로 분명 어떤 음악에 고무받아 그 무대 위에서만 튼튼한 목신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고용되어 있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무대에서 내려온 목신 자신이 세상을 쏘다니며 사실 세상은 무대였노라고 알리고 있는 것이다. 그의 노래가 퍼져나왔다. 그는 회색빛 제복을 입고 있었고, 횃불의 그림자가 그의 번쩍이는 눈 위로 어른거렸다. 그는 강하고, 슬프고, 어두운 보석같은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아니다> 길레트는 생각했다. <아버지는 잘못 알고 있다. 병자는 자신을 구원하길 바라지 않는다> 그는 병을 구원하길 원한다. 그는 세계가 통합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는 자기 팔에 안긴 아이들을 알고 있다... 작은 아이들... 구원받아야만 하는 아이들을 알고 있다. 길레트는 그의 정맥이 튀어나온 팔에 새겨진 상처들을 기억했다. 가끔 소매가 걷어올려지고 붉거나 흰 상처가 드러날 때면, 그는 얼굴을 붉혔다... 부끄럽고 소중한 기억들. 길레트는 그의 장갑 낀 손에 남은 흔적을 알고 있다. 그 손에 아이들을 안아들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길레트는 숟가락을 들고 가끔 딸깍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가 알아챌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스프를 입에 넣었다. 그것은 목구멍을 타고 흘러들어갔다. 아버지는 빵을 맛있게 먹었다. 그는 샐러드로 나온 과일의 살점마저 뜯어서, 입에 넣고 몇 번 씹지도 않고 삼켰다. 길레트는 미소지었다. 아버지의 논리대로라면, 그건 얼마나 굴종적인 행위인가! 빵을 뜯어서, 입에 넣는 것! 과일의 살점을, 입에 넣는 것! 아버지는 한번도 의심해보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고개를 들고 보고 있으면, 얼마나 신기한 일인지. 음식을 손에 들고 입에까지 가져간다는 것. 도대체 그것을 코나 눈이나 뺨의 일부가 아닌 입으로 가져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음식이 들어가는 곳이 입이 되지 않는 한. 아버지는 자신의 창자는 자신의 육체가 아니라고 생각한단 말인가!
그래, 물론 자신의 육체가 아닐지도 모르지. 칼이 빠져나간 곳에 살과 뼈가 생겼다. 이름이 귀를 만들었다. 빛이 처음 그를 본 순간에 눈이 불려나왔다. 그가 신음한 순간 직업이 생겼다. 칼이 빠져나간 곳에 살과 뼈가 생겼다. 길레트는 스프를 삼켰다. 식도와 위장과 창자가 순식간에 생겨났다. 몇 번이라도.
창자와 음식. 외부에 던져넣는 외부. 입부터 뱃속까지를 한 몸으로 꿰어둔 구멍을 그녀는 따라갔다. 몇 번이라도. 귀부터 머리. 입술부터 가슴. 잃어버린 이름을 따라갔으며, 그를 따라갔으며, 모세 혈관과 심장, 허파 꽈리의 모든 구석을, 숨을 돌리는 순간 다시 잊혀지고 생성되는 빈 공간을 따라갈 수 있었다. 칼이 빠져나간 순간 살과 뼈가 생겼다. 하나의 일어난 일은 하나의 기억을 남겨야만 했기 때문에. 유일하고 특수한 도덕적인 책무 때문에 그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 아들에게서 물려받은 아버지는 자신의 양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자신의 양 손을, 직업을, 인간을, 육체를, 개인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거기에 있었다.
길레트는 포크를 들고, 샐러드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그녀는 그것을 종이처럼 씹으면서 한 얼굴을 떠올렸다. 누군가가 한때 아픈 얼굴로, 창백한 입술로, 정맥이 튀어나온 팔로, 장갑을 낀 손으로, 낮고 정확한 목소리로, 심지어 쉬어버린 속삭이는 목소리로, 불렀던 단 한번의 목소리로도 평생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그러므로 결코, 자신이 말한다고 믿지 않으리라. 네가 아니고서는. 자신이 고백한다고 믿지 않으리라. 네가 아니고서는. 내가 존재했다고 증언하지 않으리라. 네가 아니고서는. 결코, 그리고 너는 증언될 수 없는 - 아직 태어나지 못한 내 아들이다. 그녀는 차가운 뺨의 촉감을 기억했다. 햇빛 아래, 잠시 감았다 뜨던 푸른 눈과.
아들로부터 물려받은 아버지는, 자신의 양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이들은 아직 태어나지 못했다. <원래 그들이 태어나있다면> 길레트는 생각했다. <금발머리의 그들이 태어나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하나씩 신화의 벼랑으로 떨어뜨려 죽이면 그만이다. 그런데 죽음이 애초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거기에서 그들의 죽음은 자신의 육신이 아니라 모두의 육신이니까. 죽음이 모두에게 보편적이라는 것은 어떤 방식의 삶이 보편적이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어디에서든 모두가 죽을 수는 없다. 그들이 다만 살해당할 수 있다면, 그 곳에는 누군가의 야망과, 진리에의 강요가 있다. 금발머리의 그들이 태어나 있다면, 이 말은, 과거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숲의 집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더 지독한 것은 미래에 이미 그들이 태어나있다고 믿는 것이다. 어쨌거나 아들들이 이미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 아들들은 늘 우리를 신화에로 초청한다. 고통에로 초청한다. 얼굴에 새겨진 상처처럼.
얼굴을 지워버릴 정도로 강하게 새겨진 상처에 대해, 그 상처를 얼굴 이후에 일어난 일로 간주한다면, 원래의 얼굴이라는 확고한 물질이 자리잡고 만다. 그 얼굴은 형체는 없지만, 지금의 상처입은 얼굴보다 강할 것이며, 선명할 것이다. 개개의 죽음이 얼마든지 유일한 진리를 선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삶은 늘 과거로 사라질 것이다. 모든 일어난 일들은, 일어날 것이다. 몇백 몇천만번이라도. 우리는 우리가 원래부터 인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모두 함께 자살해버리지 않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거절한다. 글을 쓰지 않고도, 침묵하지 않고도. 삶으로서 거절하고 싶다. 그렇게는 태어나지 않으리라. 결코, 나는 그렇게는 태어나있지 않으리라. 모든 일은 지금 일어나고 있어야 한다.
지금. 너는 네가 무엇인지 관심을 가져본 적 없다. 너는 병에서 너를 구원해내려 하지 않았다. 너는 치료를 거부한 것이 아니다. 너는 모두가 같은 병에 걸릴 수 있으리라고 믿지도 않았고, 치료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너만의 아이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 태어나지 못한 - 전세계이다. 그런데 그래서 너는 어쩌면 스스로만을 믿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모르겠어, 아델. 왜 그 사람을 보았을 때 너를 생각했을까? 그 광대같은 예술가 -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목신을 보았을 때? 아냐, 그건 나 때문이야. 나는 너를 알 수 없어. 나는 너를 존경해. 그 뿐이야. 하지만 나 때문이야. 너를 위해 직업을 가진다고 생각했어. 네가 아프기 때문에 의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네게 입맞추고 나서야 깨달았다. 어쩌면 나도 분리되어 있지 않은 거라고. 직업이 뭐지? 의사가 뭐지? 그건 언어 - 한마디의 말이었을까, 아니면 너였을까?>
길레트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게 만약 너였다면, 진리와 다른 점이 뭐지?>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델마이어의 잘못이 아니다. 그는 잘못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늘 마지막으로 보았던 아델마이어의 얼굴을 떠올렸다. “너는 아픈 게 맞아, 길레트.” 그는 말했다.
길레트는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오늘 헤어지기 직전에 그는 그렇게 말했다. 길레트의 손을 잡은 채. 그는 달래듯이 말했다. 길레트는 울컥 화가 났다.
그때 그가 다정하게 웃고 있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는 전에도 한번 그런 말을 했다. 똑같은 달래듯한 말투로. 길레트가 병원에 가자고 졸랐을 때. 그때 그녀는 울기도 했지. 아델마이어의 앞에서는 울지 않으려고 했다. 책을 좋아한다는 그의 친구, 키 작고 늘 수줍어하는 그 애는 아델마이어를 설득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나 그 애는 멍청히 서 있기만 했다. 모두가 아델마이어가 죽기를 원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녀는 상처를 신성시하는 사람들의 풍습 때문에 화가 났던가? 왜 화가 났던가? 그저 견딜 수가 없었던 것 뿐이다. 그저 견딜 수가 없었던 것 뿐이다. 떠올리면 머리가 폭발해버리기 때문에 떠올릴 수 없는 기억처럼. 길레트가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떨구고 있자 아델마이어는 그녀를 달랬다. 울고 싶었던 건 아니다. 특히 그의 작은 친구에게는, 그런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 왠지 그에 대해서는 그런 완강한 마음이 들었다. 그 작은 친구는 그녀의 이름을 언급할 때면, 이상하게 얼굴빛을 굳히고, 연극에서처럼 손을 쳐들었던 것이다.
그의 작은 친구도 그녀를 달래려고 애썼다. 하긴 그랬던 것도 반 년은 지난 일이다. 아델마이어는 작은 친구에게 어머니가 걱정하시기 전에 그만 가 보라고 했다. 바로 그 어머니가 두달 전에 그 작은 친구를 채권 증서들과 함께 비행기에 실은 채 떠나버렸다. 작은 친구는 그 때 책방 앞에서도 머뭇거리다가 힐끔힐끔 돌아보며 가 버렸다. 길레트는 화를 냈지만 아델마이어는 결국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들은 걸었고, 길레트의 집 앞에서, 헤어지기 전에 아델마이어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현관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잠시 후에야 그의 얼굴에 익숙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전까지는 다정하게 웃고 있지 않았다는 건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응시했을 뿐이다. 그러나 오늘 들은 것과 같은 말을 들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너는 아픈 게 맞아, 길레트.”
오늘도 그는 웃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그가 그런 표정을 한 건 그때와 오늘, 두 번 뿐이었다 - 나는 뭘 하고 있었지? 울고 있었다. 오늘도, 그 때도.
길레트는 냅킨을 꽉 쥔 채 식탁 밑으로 손을 내렸다. 그릇들은 비어 있었다. 아버지가 손으로 턱을 가리고 트림을 했다. 바보같으니. 그의 흉곽에서는 아주 나쁜 소리가 났다. 허파가 섬유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병원에 가지 않았다. 그에게는 병이 소중했기 때문이다. 그의 손에 미래의 아기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도저히, 도저히 나아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가지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프니?> 그 질문에 입맞춤해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는 아픈 거라고! 집으로 가라고! 데려다 주겠다고! 네가! 감히 네가, 아델마이어! 울게 될 뿐이니까, 다시 찾아오지 말라고! 부탁한다고! 누구에게 뭘 부탁하는 거야? 나는 너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너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너는 그것 때문에 함께 있을 수 없다는 듯이.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했단 말인가?
“다 먹었니?” 아버지가 물었다. “네.” 길레트는 대답했다. “접시를 씻어두어라.” 아버지가 말하면서 일어났다. 그는 가운을 입은 채로 서재로 걸어들어갔다. 그는 새로 생긴 라디오 채널을 들으리라.
길레트는 한숨을 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물론 그런 요청을 조금도 부당하게 여기지 않았다. 아버지는 늘 바쁜 데다가, 자신은 아직 학생인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타이르는 듯한 어투 때문에 심기가 상했다. 아버지가 접시를 씻기 싫다면, 그건 좋지. 길레트는 생각했다. 그러나 뻔히 보이는 의도라면 질색이다. 이상한 증오 비슷한 고통이 그녀의 뱃속에서 치밀었다. 길레트는 아버지의 서재로 들어가서 라디오를 내던져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 아버지도 무슨 말이든 그녀에게 손쉽게 한다. 어떤 잔인한 말 까지도. 그건 다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길레트가 자기 눈알을 빼어서 던진다 한들 아버지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리라. 길레트가 라디오를 그의 슬리퍼 옆에 집어던진다 해도 그는 결코 한 사람이 화가 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리라. 그는 그녀의 검은 머리채를 바라보리라 - 근심스러운 눈으로 - 지극히 선하고 순진한 고통을 이마에 담고, 자신의 딸을. <너마저 날 교육시키려 하다니, 아델!> 다시금 가슴이 쪼개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식탁 주변은 조용했다. 빗방울이 멈춘 것 같은 침묵이 지나갔다. 길레트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거실 벽에 걸린 시계가 소리를 냈다. 여덟시 정각이었다. 길레트는 그 소리가 접시 위에 쌓여가는 것을 듣고 있었다. 사물은 너무나 깨끗했다. 갓 세계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그것들을 다시 씻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뒤늦은 눈물이 그녀의 뺨으로 흘러내렸다. 아버지가 서재에서 나오면서 투덜거렸다. “수신 상태가 영 안 좋아. 편성표를 보내기 전에 기본적인 점검부터 했어야 할 거 아닌가!” 아버지는 길레트가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걸 보았다. 그는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얘야, 괜찮니?” 그는 슬리퍼를 끌고 가까이 다가왔다. “기분이 좋아보이지 않는구나. 얘야, 왜 그래? 영 딴 사람을 보듯이 하고 있어.” 아버지는 가까이 와서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뺨을 두드리고, 눈물을 닦아주었다. “네 아버지다, 얘야. 나야.” “알아요.” 길레트가 속삭이며 그를 마주보았다. “알아요, 아버지.”


3.

아델마이어는 장갑을 벗어서 책상 한 쪽에 놓았다. 그는 의자에 앉았다. 공기가 그의 눈에 부딛쳤다. 날은 추운 편이었다. 그는 책상을 짚고, 그의 조건이 불리하다는 점을 생각했다. 그는 보조금은 받을 수 있을지언정, 일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실직자 대부분은 보조금을 받고 있었다. 사직자라도 보조금을 받기는 쉽다. 멀지 않은 도시에는 파업을 해 주는 댓가로 임금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국가를 대표한 파업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신문에는 그에 대해 짧은 논평이 매일 5면 정도에, 커다란 기사가 1면이나 2면에 나곤 했다. 아델마이어는 오늘치 조간을 받아왔다. 그는 구직 광고란을 보았다. 서점 주인은 아델마이어가 더 이상 일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는 아델마이어의 어깨를 꽉 붙잡고 말했다. 그는 아델마이어가 자기네 다락에서라도 살겠다면 청소를 하고, 식사와 난방을 넣어주겠다고 했다. 그의 아내도 그 일에 찬성했다. 그들은 자식이 없다. 아델마이어는 그들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느꼈다. 그는 고맙다고 말하고 주인과 악수했다.
아델마이어는 구직란에서 적당한 것을 찾아 동그라미를 쳐 보았다. 액수는 터무니없이 적었다. 다행히 나이 제한이 없었고, 불행히도 학력이 요구되지 않았다. 아델마이어는 기침을 했다.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는 수건으로 피를 닦아냈지만 코피는 쉽게 멎지 않았다. 아델마이어는 천장을 보도록 고개를 쳐들고 코뼈 양 쪽을 눌러보았다. 몇분 후 코피가 멎었다.
그는 다시 신문을 보았다. 소년단 활동은 그만둔 지 오래다. 간부들은 그를 자꾸 공공 요양소로 보내려고 했다. 그의 병은 아이들에게 전염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진단서를 제출했지만 나쁜 소문이 퍼졌다. 특히 소년단이 보살피게 될 아기들은 무방비상태인 것이다. 아기를 마구 흔들어서 눈알 양 쪽이 실제로 반쯤 빠져나오게끔 한 어머니가 있었는데, 어쨌거나 그녀는 아델마이어에게 아기를 맡기기는 거부했다. 그녀는 아기를 바로 눕히고 손바닥으로 눈알을 밀어넣었다. 여전히 아기의 눈은 약간 튀어나와 있어서, 소년단 동료들은 그 애를 <개구리>라고 친근하게 부르곤 했다.
아델마이어는 구직란에 세 군에 동그라미를 치고 그만두었다. 내일 이 곳에 찾아가보면 된다. 간단한 구두 면접을 할 뿐이다. 기침이 아델마이어의 몸을 꺾어놓았다. 그는 의자에서부터 떨어져서, 바닥에 웅크리고 누워있었다. 그는 술이 달린 이불에 감싸여 누워있었다. 불빛이 깜박거렸다. 특유의 냄새가 났다. 그들은 집에 있었다. 어머니가 깔깔거렸다. 초콜렛 냄새가 확실하다. 갈색도 아니고, 고동색도 아니고, 초콜렛 색의 초콜렛 냄새.
그는 몸을 한마디라도 움직이려고 애썼다. 그는 노래해야 한다. 그것이 그의 직업이었다. 그는 숲에 누워있었다. 등잔이 깜박거렸다. “아프니?” 그들이 물었다. 아델마이어는 생각했다. 아프지 않다. 아프지 않지도 않다. 그들이 두런거렸다. 그들은 그가 죽은 것 같다고 속삭였고, 숲에 시신을 감추기로 했다. 그의 몸이 바닥에 닿았다. 아델마이어는 몇 바퀴 굴러 구렁 쪽으로 떨어졌다. 아프지 않다. 아프지 않지도 않다. 네, 아니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는 생각했다. 그는 다만 거기에 있었다. 그 자체에 대해 질문이 던져졌을 뿐이다. 그 모든 필연에 대해.
아델마이어는 구렁의 바닥에 있었다. 숨을 쉬자 구렁은 점점 더 아래로 꺼지는 것 같았다. 위아래로 일렁거렸고, 촛불처럼, 그의 몸을 태웠다. 그는 어떻게 해야 질문과 함께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일어나는 일이 아닌 것에 대해. 그것은 연약하고, 순수하고, 가늘게 떨고 있고,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는 노래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시간이 멎어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은 일어나야 한다. 지금. 너를 위해서. 이 시간을 멈춰놓은 것이 너이기 때문이다. 이 육체만큼의 시간. 나라는 것. 아델마이어는 고개를 들었다. “아프니?” 그녀는 물었다. 그렇게 묻고 있는 너와, 그 물음 만큼의 간격. 아델마이어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는 자신이 아직도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나무로 된 그 바닥은, 축축한 냄새가 났고 청소를 해도 틈새에서 먼지가 끊임없이 기어나왔다. 길레트가 찾아올 때, 그는 왁스를 조금 빌려서 문질러두곤 했다. 아델마이어는 기침을 했다. 형광등이 깜박거렸다. 그는 병원에서 깨어났다. 카스트라 신부가 그를 발견했다고 한다. 신부가 찾아왔다. 그는 아델마이어의 손을 잡으려다가 자신의 손을 그만 늘어뜨렸다. 아델마이어는 신부의 표정을 보았다. “아프니?” 길레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아델마이어의 손가락들을 살폈다. 끝이 둥글어져 있었고 기침을 하면 나쁜 소리가 났다. 아델마이어는 바닥에서 고개를 들려고 애썼다. 그는 소리를 내며 숨을 쉬었다. 책방 주인이 악수에 응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델마이어는 그의 표정을 보았다. 발작이 지나갔다.
아델마이어는 일어나려고 했다. 팔다리가 떨렸다. 몸의 무게가 그를 짓눌렀다. 아델마이어는 다시금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공기가 그의 딱딱하게 굳은 허파를 건드렸다가 그대로 빠져나갔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너는 아프다.” 아델마이어는 중얼거렸다. “너는 아프다.” 그는 흐느끼듯이, 복종하듯이 바닥에 엎드려 되뇌었다. “대답은 정해져 있었어.”
그리고 대답에 대해 질문으로 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너무 많은 일어난 일들이 일어났다. 문이 닫히자 문은 끊임없이 열렸다. 전화가 끊기자 전화는 끊임없이 걸려왔다. 사라진 시간 속으로. 그리고 시간은 확고해지고 섬유질화되었다. 그의 허파는 숨을 쉬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아델마이어는 기침을 했다. 시간은 굳어지기 위해서만 그에게로 돌아왔다. 그는 보드라운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이 그 이목구비를, 빛나는 갈색 눈동자, 가무잡잡한 얼굴, 발랄한 목소리를 닮아서 하나의 얼굴을 찾을 수도 있었을 사람을 생각했다. 아델마이어는 기침을 했다. 너무 늦었다.
그는 침대의 다리 부분에 매달리다시피 해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침대에 올라가 상체를 뉘였다. 한동안 길게 숨을 쉬고 나자 간신히 정신이 돌아왔다. 아직 시야 한 쪽에 번쩍이는 부분이 남아있었지만 그는 일어나 앉았다. 창은 침대 바로 옆에 붙어있었고, 화재시에 한 사람이 사다리 쪽으로 빠져나가려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게 넓었다. 좋은 방이었다. 아델마이어는 어떤 소설의 제 3권의 결말을 생각했다. 2권에서 시인이 되고자 했던 청년은, 책의 결말부에서야 비로소 서른 두 살의 의사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결코 그의 시적인 언어를 포기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작은 친구는 그 3권을 읽지도 않은 채로 돌려주었다. 끼워두었던 메모들이 그대로 있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아델마이어는 그 작은 친구가 다른 대륙에서는 더 행복하게 살길 바랬다. 3권을 돌려줄 때 즈음부터, 친구는 영 낯색이 나빴다. 키가 많이 크긴 했지만.
아델마이어는 한숨을 내쉬고는 창가로 다가갔다. 3권에서 주인공은 의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 전체 책을 쓴 사람이 작가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으리라. 아니, 그것도 물론 의심할 수 있다. 어쨌거나 그것이 하나의 이야기였다는 점은 의심할 바 없으리라. 1권, 2권, 3권으로 이 세상에 머무르던 책 말이다. 그는 자신이 혹시 망가져버린 인간인가 아주 잠시, 그런 생각은 처음 해 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실마리를 붙잡듯이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망가져버린 인간이라면 어차피 그 전에는 인간이었다는 뜻이다. 그런 것은 질문이 아니라, 질문에는 전혀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실없는 말놀음에 불과하다.
그는 창가로 다가가서, 다리 한 쪽을 창틀에 걸쳤다. 그는 자신도 그런 말놀음에 동참하려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는 그는 지금까지 너무 진지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진지한 영역은 하나씩 손을 맞잡고, 그를 일들의 바깥으로 던져버린 것이다. 그는 사건들의 맨 마지막에 내몰려 앉아있었다. 그는 다리 양 쪽을 다 걸치고 몸을 내빼고 있었다. 곧 그는 완전히 밀쳐져 떨어질 것 같았다. “본원적 개념.” 아델마이어는 창틀을 붙잡고, 한쪽 손을 든 채 연극에서처럼 되뇌었다. 그리고 그는 뛰어내렸다. 그는 그림처럼 떨어졌
고, 머리부터 떨어졌으며, 얼굴을 바닥에 묻은 채 비교적 옳은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5



리페는 무릎께를 주먹으로 탁탁 두드렸다.
그는 이착륙 예정표를 흘끔 보고는 주머니에서 표를 꺼내어 확인해보았다. 자신이 혹시 다른 비행기를 타고 있고, 그 비행기는 아직 공항에 도착하지 않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표에 적혀 있는 번호는 113번이였고, 사십 분 전에 도착한 비행기도 113번이 맞았다. 리페는 자신이 무슨 바보같은 짓을 하고 있는가 생각했다.
그는 한시간을 더 기다렸다. 비행기들이 다섯 대 쯤은 더 도착하고 떠났다.리페는 창가의 세발 벤치에 앉아 있다가, 마침내 세련된 몸짓으로 시가를 한 대 꺼내 불을 붙였다. 직원이 다가와서 그에게 흡연실로 떠나길 권했다. 리페는 눈살을 찌푸리며, 멋진 상표가 붙은 상자에 시가의 재를 털어냈다. “이 곳은 자유로운 나라 아니었소?”
“자유로운 나라입니다만, 선생님. 자유란...” “내가 이 곳에 온 이유는 그거 하나란 말이오.” 리페가 여전히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자유, 자유, 자유.” “압니다, 선생님. 저희들은 다만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할 뿐입니다.” 직원이 당황해서 말했다. “그 친구는 당신이 그 친구 얼굴을 알아본 것 때문에 불안해진 거요.” 나즈막한 목소리가 말했다.
리페는 돌아보았다. 친구가 웃음을 띄고,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리페가 벌떡 일어났다. “뭘 하다 온 거야?” “미안하네. 막 채비를 하던 차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지 뭐야. 오래 기다렸나?” “두 시간은 지났을 걸세.” 리페는 투덜거렸다. 친구는 웃으면서 직원에게 눈을 돌렸다. “다른 담배를 피우는 손님들도 많은데요. 엄하게 단속하는 것 같진 않은데, 굳이 당신이 당신 구역에서부터 걸어오는 걸 보았습니다. 이 친구가 쓴 책을 읽어보았습니까?” “네.” 직원이 얼굴을 붉힌 채 대답했다.
“저는 책을 잘 읽지 않지만, 이 분의 소설들은...” “남의 책은 왜 읽는 겁니까?” 리페가 투덜거렸다. 친구가 웃음을 터뜨렸다. “미쳐버렸구만.” “자네도 그 나라에 좀 더 머물렀다면... 아니, 솔직한 심정일세. 사람들이 내 책 따위 왜 읽고 있는지 모르겠어. 서점에 갔다가 그런 꼴을 보면 그 미친놈들한테 싸움을 걸고 싶단 말이야.” “그래도 계속 쓰고 있잖아?” “그래도 계속 쓰고 있다네. 정신을 차려보니 내 직업은 작가였거든.”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친구가 문득 엄숙하게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래, 자넨 그 일로 먹고 살고 있네. 그런데 그게 행복한 일이라는 걸 알아야 하네- 끔찍하지만 행복한 일이야. 보통은 글을 쓰는 일로는 먹고 살 수가 없다네. 타국에 있는 작가들은 더욱 그렇지.” 친구는 숨을 길게 내쉬고는 미소지었다. “그러니 너무 섭섭하게 여기지는 않았길 바라네. 솔직히 그 땅에 머물기는, 딱히 심문실에 가는 것 외로도 힘들었어... 그러면서도 영화로 만들어질 글을 써 보려고 그 거리에서 어린애들과 어깨를 부딪치는 것도 질렸다네. 여기서도 생활은 지난하네. 하지만 여긴 글을 쓸 자유가 있고, 모국어로 글을 써도 되고, 예레친이 있고,” 친구가 리페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젠 자네도 있지.”
“예레친은 여전히 그런가?” “여전히 그렇지. 온갖 후학은 다 몰려들고 있고... 후학들을 돌보아주고도 있지만, 자기 식대로 잡아먹고 있기도 하다네.”
“정말이지 여전한 게로군.” “그래도 나로서는 그의 잡지에 글을 실을 수 있고 그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게 훨씬 숨통이 트인다네. 감시가 더 심해지기 전에 온 거지만, 왜 더 전에 오지 않았을까 싶어... 좋은 제안도 받고 말이야.” 그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가세. 그는 자네를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반겨주긴 할 거라네.” “왜, 인세와 유산 때문에? 예레친의 재단에 넣어줄 생각은 없어.” “정말 없는 건가?” “어쩌겠나? 넣어야지.” 리페가 빈정대듯이 말했다. 그러나 리페는 여전히 고개를 한 쪽으로 돌리고, 입술을 삐죽대며, 수줍은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친구가 미소지었다. 친구는 지팡이를 다른 손으로 바꾸어 잡으며 직원에게 인사했고, 남은 손으로 리페의 등을 밀었다. 리페는 계속 뭐라고 투덜대면서 걷기 시작했다.
친구가 따라 걸으면서 그를 달랬다. 친구는 가끔씩 걸음을 늦추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은 공항 바깥까지 나와서, 혼잡한 교차로들을 지나쳐, 가지들이 번갈아 나 있는 웃자란 식물 줄기같은 도로로 들어섰다. 그쯤 해서야 그들은 서로에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난 자네처럼 튼튼하지도, 자네처럼 그 나라 말에 익숙하지도 못했어. 자넨 열 여섯 살 때 옮겨갔잖아.” “그래, 그러면 북부 언어엔 익숙할 거 같나? 그 얼어붙은 기후에는?” “그 나라에 머무르겠다는 게 아니야. 그 쪽을 통해서 모국으로 돌아갈 거라네.” “모국은 이제 두 동강이 나 버렸네.” "영원히 그렇지는 않을테지. 그리고, 내가 어느 쪽을 선택할 건지 자넨 잘 알지 않나.“ ”젠장, 예레친이라도 자네같은 선택을 하진 않을 걸세. 거기서는 원하던 글을 쓸 수 있을 거 같나? 어용 작가라도 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어느 쪽이든 똑같은 얘기네.“ 친구는 말이 없었다.
리페가 다시 물었다. “정말 그 제안을 받아들일 건가?” “그렇네.” 친구가 대답했다.
리페가 끄덕거렸다. 그는 신호등을 올려다보고 길 하나를 더 건넜다. 리페는 땅에 그려진 새하얀 선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선들이 그의 눈동자를 한 걸음씩 밟고 지나갔다. 친구가 뒤에서 불렀다. 친구는 멈추어 서 있었다.
리페는 돌아보고는, 짐을 끌지 않는 손으로 그의 한쪽 어깨 밑을 받치고 그가 걷도록 도와주었다. 친구는 간혹 경련을 일으킬 때가 있었다. 오랜 병 때문인데, 그는 경련 따위 때문에 병원에까지 투자할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친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더니 리페에게 이제 손을 떼어 달라고 했다. 리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 떠날 건가?” “사흘 후. 급하게 결정했어. 역은 조금 더 걸어야 나오는데, 식사나 하고 갈 텐가?” 친구가 손가락질했다. 그들은 작은 건물들이 모여있는 곳을 향해 걸었다. 길을 반 바퀴정도 돌아가야 했다.
“예레친은 괜찮네.” 친구가 말했다. “그 사람은... 쉬운 글을 쓰지. 나는 말이야, 모국에 돌아가면 국가의 가사를 쓰고 싶어... 아니면 일을 하면서 부를 노래라도 좋아. 자네라면 질색을 하고, 저 친구가 그렇게까지 정신나간 인간이었을 줄은 몰랐다고 말하겠지? 예레친은 그저 웃어넘길 걸세. 예레친은 대단한 사람이지만 너무 많은 자유를 원하네. 하필이면 글을 통한 자유를 말이야.” “국가의 가사라.” 리페가 비로소 웃음지었다. “안 되지, 안 돼. 그런 건 다른 사람이 이미 꽉 잡고 있어. 그는 벌써 그 땅에 닿았다네. 자네 섬세한 글투로는 안 된단 말이야... 난 도무지 자네가 거기서 뭘 할지 상상할 수가 없어.” “모국의 다른 쪽으로는 돌아가지 않겠네.” 친구가 아주 빠르게 말했다. “자넨 어쩔 건가, 리페? 자네가 소식은 나보다 잘 알겠지. 그 녀석들 중에 수용소가 없어진 걸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아. 평당원들은 새로운 당에 충성하겠다는 약속을 댓가로 속속 용서받고 있어. 그 평당원들을 재판의 관리자들로 써먹었단 말이야. 그 재판도 이미 끝났네. 청산 작업은 넉 달 만에 종결되었어. 그런 곳에는 가지 않아. 내가 가려는 곳에서는 최소한 교수대에 걸어야 할 놈들의 목은 다 걸어버렸네.” “그것도 소문에 불과해. 미안하지만 자네가 교류하는 사람들이란 북부 쪽에서 온 소식통들 아닌가? 예레친이라면 그 쪽 이야기만을 듣지는 않을 텐데...” “예레친은 한동안 여기 머무를 거네!” 친구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 그는 정황을 조심스럽게 걸러내고 있네. 그는 책임져야 할 사람들도 많으니까. 나는 아니네.”
그들은 한동안 침묵한 채 걸었다. 그들은 작은 시내로 들어섰고, 밥을 먹을만한 건물 몇 개를 지나쳤지만 허기가 지지 않다는 점을 깨달았다. 리페가 친구의 팔을 붙잡았다. “괜찮다니까.” 친구가 말했다. 리페는 주춤거리다가, 겨우 팔을 놓아주었다. 친구는 리페의 수줍은 듯한 시선과 마주쳤지만, 리페는 묘한 얼굴로 시선을 내려버렸다.
“이 쯤에서 간단하게 때우지. 리페, 자네가 고생을 많이 한 건 알겠어. 얼굴에 드러나는 걸. 자네도 마흔 하나야.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가서, 잘 정착했으면 좋겠어... 나도 편지는 보낼 수 있을 테니 말이야.” “원하는 곳으로 가서?” 리페가 되뇌었다. “귀화하란 뜻인가?” “모국으로 돌아가든지. 자넨 외국인으로 그 땅에서 이십 삼년을 살았어.” “내 잘못인가? 그 자들은 시민권에 인색해.” “자네가 굳이 얻으려 하지도 않은 점도 있네. 시민권에 인색한 거라면 이 곳도 덜 하진 않아.” 친구가 웃고 있었다. 리페는 그 친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내가 원하는 곳은 여기에 있네.”
“그래?” 하고 친구가 놀란 듯이 되물었다. 리페가 끄덕거렸다. “그래. 늘 여기에 있고, 여기에 있어왔지... 그 간격이 수억년처럼 느껴질 때가 있을 뿐이네. 너무 긴- 아니 무한한 시간은 시간도 아니야. 반짝반짝한 거울처럼 되어버려서, 어떤 빛도 내게 되튕겨오네. 나는 가시들을 피해서 강제로 몸이 세워져있는 기분이 들 때가 있어. 그런데 내 발밑 그림자로부터는 꼬챙이가 꿰인 것처럼. 그래, 어쩌면 누구나 그럴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역시... 마지막 것이... 그리고 맨 처음의 것이 용납되지 않아... 다른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지 않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고도 생각지 않고 싶네. 하지만 어딜 가도 그건 마찬가지야. 하나 묻겠네, 하인스. 버스에 타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닌가 깨닫는 순간, 내가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가 날 증오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있나?”
친구가 한참 눈을 찌푸리고 있더니 되물었다. “그게 무슨 상징인가, 아니면 새로 쓰려는...?”
리페가 웃음을 터뜨렸다. 친구가 급히 덧붙였다. “자네 글에서 비슷한 걸 보았던 거 같기도 한데.” “맞아. 그런 부분을 끼워넣은 적이 있었지. 그 부분은 마음에 들었나?” “아주 좋았네.” 친구가 진지하게 답했다. 리페도 미소지었다. “좋아. 난 글이나 쓰겠네.”



리페는 예레친과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그는 문까지 배웅을 해 주었는데, 등을 돌리자마자 리페는 뭐라고 궁시렁거리기 시작했다. 예레친은 대단한 사람이고, 인간적으로도 끌리는 면이 있고, 글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상성이 맞지 않는다. 하긴 예레친도 그를 싫어한다. 자기 잡지를 통해 매서운 비평을 한 적이 있지, 아무렴. 그 건을 계기로 비평가들간에도 논쟁이 있었는데, 리페는 거의 귀를 막고 있었다. 그 짓은 다 사나운 놀음처럼 여겨졌다. 예레친은 결국 친구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 한쪽의 모국에서 노년을 보내겠지.
지난 봄, 가장 추웠던 몇 년의 겨울이 지난 다음, 리페는 서점에 갔다가 자신의 책을 집어들어 읽고 있는 청년을 보았다. 청년은 중간의 몇 페이지를 넘겨다보며 손가락들을 입가에 얹고 골몰하고 있었다. 리페는 그의 목을 조르고 싶어졌다. 그를 죽이고 싶기까지 했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확실히,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보다는, 청년의 야들야들한 목덜미에 양 엄지를 대고 꽉 누르고 싶어하는 것이 더 가능성이 높다. 죽이고 싶다는 감정은 - 사실 그런 감정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욕망이란 그저 이런 저런 행위들을 정리하기 위한 상자에 불과하다.
어두컴컴한 상자들을 뒤지며 겨울을 보냈다. 리페에게는 뒤늦게 찾아온 겨울이었다. 부모는 연을 끊었던 아들에게 유산을 남겨주었고, 모국의 사람들은 이미 상자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가로수들에 꽃이 피기 시작하고, 청년의 목을 조르고 싶다는 꿈을 양 손으로 꾼 후에, 그는 자신에게 내내 화가 나 있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책을 읽었다는 청년들 하나 하나를 찾아가서 싸움을 걸고 싶었다. 주먹을 휘둘러보이면서 그 미친놈들을 감방에 처넣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배에 실어 그의 모국으로 보냈더라다면 확실히 처넣을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폐허 더미가 되어버린 모국으로. 족쇄를 발목에 채워서 하루 열 여섯시간동안 일을 시키고 싶다. 물에 한 마디씩 더 깊이 넣으면서 귓 속의 압력을 측정하고 싶다. 엄지만 묶어서 팔을 뒤로 꺾어 매달아두고 싶다. 수레를 끌고 가다가 넘어지면 머리를 총으로 쏘아 버리고 싶다. 일을 시키고 싶다. 죽여버리고 싶다. 일을 시키고 싶다. 죽여버리고 싶다. 리페는 마침내 양 손을 잃어버렸다. 그는 거대한 두개골처럼 주저앉은 채 상자들을 뒤지며 봄을 보냈다. 일 년이 지나고 여전히 그런 상태로 심문실에서,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몇 번쯤 받은 다음, 리페의 동료들은 다른 대륙으로 즉시 떠나가든가... 아니면 훨씬 나쁜 입장이 되었다.
리페는 손을 들어 차를 멈추게 하려고 했다. 차 한 대가 그냥 지나가버렸다. 리페는 얼굴을 찌푸렸지만, 뒷창을 통해 이미 다른 손님들이 타고 있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다시 손을 들어올렸다. 노란 차 한 대가 그의 몸 앞에 멈추었고 리페는 기사가 짐을 싣는 걸 멀뚱히 바라보았다.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그 친구는, 북부로 가게 된 것을 반기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야 이 나라 저 나라, 불안정한 나라들만 골라서 떠돌아야 했겠지. 아니면 이 물가 비싼 나라에서 예레친과 리페의 호주머니를 번갈아 털어가며, 그 순순하지만 자존심 강한 심성을 매일같이 다쳐 가면서 - 금이 가도 여전히 접시들을 올려놓을 수 있는 탁자처럼 이용하면서. 그 겨울에, 라디오 한 대에서 나오는 소식을 들으며, 친구와 그는 그저 무릎에 손을 얹고 앉아있었다.
리페는 친구의 푸른 눈을 보았다. 시계가 여덟 시 정각을 울렸다. 하루에 두 번. 친구의 뺨에 뒤늦은 눈물이 흘렀다. 리페는 그런 순간에 그런 감정에 사로잡힌 것에 대해 결코 죄책감을 느끼지도, 후회하지도 않았다.
<아니다> 리페는 생각했다. <그런 감정만을 느껴야 했다. 나는 영원히 내 집으로 돌아가겠지만, 그러므로 그러한 감정만을 느껴야 한다. 답하는 언어가 아닌, 너를 너로 남겨놓는 말을. 네가 지독하게도 네가 되어버리는 말을. 그래서만 나는 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의 그림자 위로, 나의 말로. 언어가 집을 지어서는 안 된다. 언어가 사물을 지칭해서는 안된다. 이야기가 시간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시간으로 하여금 말들을 지껄이게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 모든 일은 지금 일어나야 한다. 지금. 그리고 그 멎어버린 시간은, 너와 나 사이에, 단 한마디로 남아있어야 한다. 그건 너를 물어서도, 나를 물어서도 안 된다. 어떤 추악한 답변이나 절대적인 답변과도 결합해서는 안 된다. 말이란 일어나는 일이 아니므로. 한 마디의 말은. 하나의 질문은. 그것은 거리가 되어야만 한다. 양 쪽의 필연을, 양 쪽에서 뛰어들어와 마치 같은 벼랑으로 떨어지려는... 두 필연의 사이에 있어야 한다. 어떤 말도 시간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말은 시간을 - 침묵을 - 열어주어야 한다. 그래서 시간은 너에게로 흐르도록, 영원히 너에게로 흐르도록, 우리가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서로에게 인사를 건네며 영원히 살아가도록. 서로에게 말하며 영원히 살아가도록. 너에게 말하며, 또 말하며, 언제나 네가 내 곁에...>
리페는 뒷칸에 올라타서 거리 이름과 번호를 말했다. 그 친구에게 부탁해서 미리 전세로 구해놓은 집이 있다. 예레친의 집에서도 멀지 않다.
리페는 눈을 감았다. <글을 써야지>그는 다짐했다. 다시 눈을 뜨면서, 그는 창 여러 개가 거꾸로 꽂혀있는 걸 보았다고 생각했다. 비가 쏟아지던 그대로 멈추어버린 것 같은 모습이었고,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리페는 눈을 깜박거렸다. 다음 순간 그는 차창 너머로 가로수들을 보고 있었다.
도로를 따라서 세 블록은 더 가로수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리페는 도로 양 쪽의 나무들을 올려다보았다. 희미한 소리가 들려와서 리페는 창가에 머리를 바짝 댔다.
“잠시만,” 하고 그는 기사에게 물었다. “이 근처에 교회가 있습니까?”
“신자 되십니까?” 하고 기사가 쾌활하게 되물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리페의 모국어로 취급되는 언어를 구사하고 있었지만, 본국 사람으로서는 알아듣기 힘든 방언이었다. 리페가 답했다. “아니오, 하지만 들러보는 것은 좋아합니다.” 기사가 갸웃하다가 되물었다. “혹시 방금 종소리를 들으신 건가요? 그건 학교 종소리일 겁니다. 종탑이 있어서 꼭 그런 소리가 나지요. 이 지역 공립 학교에서는 저런 종탑을 많이 씁니다.”
“그렇군요.” 리페가 한참만에 대답했다. “ 혹시 교육자는 아니신지? 들렀다가시겠어요?” “아니오.”
리페는 이제 익숙해진 대답을 내놓았다. 그는 차장에서 고개를 돌렸다.
더 아무 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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