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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azyjam Jumping Child

2005.05.28 00:4405.28

  선명한 원색의 티셔츠가 잘 어울리는 짙은 갈색 피부의 청년이었다. 그는 반쯤 감은 눈으로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빛으로 가득 찬 도시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빌딩 옥상 난간에 올라서서 청년은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다.
  이윽고 기다리고 있던 바람이 불어온다. 청년은 가볍게 발을 구른다. 그 발을 지탱하고 있던 점핑 보드가 낮은 발진음을 낸다. 청년이 다시 한번 구른 발짓에 저항하듯 보드가 하늘로 튀어 오른다. 청년의 신장보다 조금 작을까 싶은 길이의 얇은 보드는 청년의 체중을 가뿐히 받친 채로 허공을 가른다. 좀 더 강해진 바람을 타고 청년과 점핑 보드는 나란히 늘어선 고층 빌딩을 넘어, 하늘로, 하늘로 날아오른다.
  앞을 가로막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부수어 버릴 것 같이 강렬한 청년의 눈동자. 광고는 짙은 갈색 피부의 청년의 얼굴을 가득 담은 채 끝났다. 청년의 눈동자 아래로 짧은 카피와 메이커명이 남는다.
  화면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광고를 보고 있던 소년이 한숨을 내쉬었다. 회색 피부를 가진 소년에게 짙은 갈색 피부를 가진 광고 속 청년이 살고 있는 테라는 꿈의 행성이었다. 너무나 빛나는 꿈의 장소여서, 차마 자신이 그 안에 있는 모습조차도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장소. 소년은 테라의 계산법으로 열 세 해 밖에 살지 않았지만, 실제로 자신이 테라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손이 닿지 않는 꿈보다는 좀더 이룰 가능성이 있는 꿈을 꾸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쿤. 지난 한 주도 수고했다."
  소년은 잡화상 주인의 부름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잡화상 주인이 아르바이트 주급을 계산하는 동안 가게 구석의 TV에서 흘러나오는 테라의 방송에 정신이 팔려버린 것이었다. 쿤의 집에서는 테라의 방송은 고사하고 그가 살고 있는 행성인 바마나의 방송조차도 볼 수 없다. 아주 오래 전에는 그의 집에도 낡은 TV가 있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병으로 앓아 누웠을 때 돈이 될만한 것들은 모두 다 전당포로 보내졌었다. 결국 어머니는 돌아오지 못했지만.
   "이 야채를 가져가렴. 어차피 시들시들해서 팔기도 곤란하니까."
   "고맙습니다, 스키아 아저씨. 누나가 기뻐할 거예요."
  얼마 안 되는 아르바이트 주급을 주머니에 소중히 넣고, 덤으로 얻은 야채를 품에 안은 채 쿤은 잡화점을 나섰다. 주급이 나오는 날은 일주일 중에서도 가장 기쁜 날이다. 잡화점에서 잔심부름과 물건 배달을 하고 얻은 돈의 절반은 생활비에 보태도록 누나에게 주고, 나머지 반은 빈 깡통 안에 소중히 모은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닿을 수 있는 꿈에 한 발짝씩 다가가고 있다는 성취감이 몹시 행복했다.
  그의 꿈은 점핑 보드였다. 점핑 보드는 본디 테라가 아니라 바마나 행성의 스포츠였다. 그것도 쿤처럼 가난한 소년들이 시작한 놀이였다. 테라에 비해 중력이 훨씬 약한데다 낮은 건물뿐인 뒷골목 소년들이 아무렇게나 잘라낸 판자를 디디고 바람과 약한 중력을 교묘히 이용해 이웃 건물 옥상으로 날아 건너는 것. 점핑 보드는 본디 그런 놀이였다.
  그러나 이 놀이는 테라에 알려지면서 중력 제어와 추진 장치가 부착된 값비싼 장비로 변형되어 버렸고, 이제는 더 이상 쿤 같은 가난한 소년들의 놀이가 아니게 되었다. 테라의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지금 점핑 보드가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고 했다. 바마나에 살고 있는 소수의 테라 청소년들도 모두 브랜드 명이 반짝반짝 광택을 발하는 점핑 보드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쿤과 그의 친구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나무 판자를 자르고 칠을 해서 꾸민 점핑 보드를 창고나 쓰레기통에 밀어 넣은 지 오래였다. 이제 직접 만든 점핑 보드는 웃음거리가 될 뿐이었다.
  쿤이 살고 있는 라하 구는 바마나 최초의 우주항이 들어섰던 곳이었다. 테라로부터 쏟아져 들어온 문명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장소. 바마나 행성 최초의 번영을 누린 라하. 그러나 쿤이 태어나기도 훨씬 전, 그의 아버지가 아직 소년이었을 무렵에 우주항은 다른 지역으로 이전되었다. 우주항을 잃고 난 뒤로 라하 구는 쇠락의 길을 걸을 뿐이었다.
  쿤네 옆집에 살고 있는 성난 독수리라는 이름을 가진 노인은 우주항이 아직 라하 구에 있었을 무렵에 흘러 들어온 테라인이라고 했다. 그는 며칠의 막일을 해서 돈 몇 푼을 쥐게 되면 테라에서 가져왔다는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은 채 술을 마셨다. 그리고 술에 흠뻑 취하면 테라에 대한 욕을 하곤 했다.
   "알고 있니, 쿤? 테라인들은 말이다. 정신을 상실해버렸어. 스피릿 말이야. 그래서 테라인들은 제정신이 아닌 채로, 의미도 모르고 목적도 없이 온 우주를 날아다니고 있을 뿐이야. 어리석은 놈들이지."
  점핑 보드를 창고에 감춰버리고 잡화점에서 일을 돕게 되기까지의 몇 달 동안, 쿤은 종종 성난 독수리에게 붙잡혀 온종일 테라를 향한 그의 원망과 조소를 들어야 했다.
   "테라인들은 약자의 것을 빼앗는 기질이 그 DNA 안에 각인되어 있어. 약한 자는 짓밟고 그 소유물을 빼앗아라. 그렇게 낑낑거리고 모아봤자 자신보다 강한 이를 만나면 짓밟히고 빼앗기는 거야.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니? 스피릿이다. 테라 놈들은 스피릿을 잃어버려서 그렇게나 형편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야."
  성난 독수리가 자주 말하는 스피릿이 무엇인지 쿤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인 듯 하지만, 스피릿 같은 것이 없어도 빛나는 장소에서 즐겁게 살아가는 듯한 테라인들이 성난 독수리의 초라한 몰골보다는 훌륭한 게 아닐까 하고 생각되는 때가 더 많았다. 하지만 그런 기색을 입 밖에 내기라도 하면 성난 독수리는 빠져버린 앞니 사이로 침을 튀기며 화를 내곤 했다.
   "이, 이런... 멍청한 바마나 꼬맹이 같으니! 네 녀석도 스피릿을 잃어버리고 얼빠진 테라인들처럼 살아갈 생각인 게냐! 잘 들어라, 꼬맹아. 나는 말이다. 테라에서 가장 뛰어난 스피릿을 지닌 인류였던 아메리카 인디언 최후의 후손이다. 성난 독수리라는 이름이 바로 내 혈통을 나타내는 증거인 거야! 테라인들은 우리 인디언들의 강렬한 스피릿을 두려워해서 인디언들을 멸종시켜버리고 말았어!"
  성난 독수리가 아무리 화를 내어봤자 조금도 무섭지 않았기 때문에 쿤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종종 다른 생각을 하곤 했다. 성난 독수리의 이름은 하늘을 나는 동물인 새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했다. 바마나에는 새라는 동물이 없었기 때문에 쿤은 독수리라는 짐승을 멋대로 상상해보곤 했었다. 그 상상의 모습은 늘 달랐지만 공통점은 있었다. 굉장히 시끄러운 소리로 온종일 울어대는 짐승일 거라는 점.
  하지만 쿤은 성난 독수리를 좋아했다. 테라인들끼리 통하는 곳이 있는지 어디선가 가끔 테라의 사탕이나 초콜릿을 구해와서 슬쩍 주머니에 찔러 넣어주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크긴 했지만. 어쨌든 쿤은 그를 좋아했기 때문에, 몇 년 밖에 다니지 못했던 학교에서 보았던 아메리카 인디언의 사진과 성난 독수리의 모습이 몹시 다르다는 것은 절대 말하지 않았다. 성난 독수리의 모습이 인디언보다는 테라-코카시안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테라 출신의 선생님과 더 비슷하다는 것도.



  집을 향해 해안가를 둘러싼 둑 위를 걷고 있을 때, 쿤은 기묘한 사람을 발견했다. 이 근방에서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이 근방 사람이라면 밀려오는 바다를 피하거나 하지 않는다. 작은 결정으로 이루어진 이곳의 바다는 물이 가득 차 있다는 테라의 바다와는 달라 젖거나 하지 않으니까. 해안의 남자는 노을 빛을 받아 옅은 핑크색으로 물든 바다를 들여다보다가는 파도가 가까워지면 펄쩍 뛰어 물러나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약한 바마나의 중력에 아직 익숙치않아 뛰어오를 때마다 팔을 허우적거리며 균형을 잡아 내려서려고 하는 우스운 모습은 외지인이라는 생각에 확신을 더해주었다. 혹시 테라의 사람은 아닐까. 광고에서 보았던, 밤이 되면 온통 반짝이는 그 세계에서 사는 사람일까. 한참 동안 밀려오는 핑크색 파도를 따라 다가갔다가 뛰어 물러나는 행동을 반복하는 동안 그 외지인은 차츰 바마나의 중력에 익숙해져 가는 모습이었다. 마지막으로 크게 뒤로 뛰어오른 그는 양팔을 쭉 펴고 사뿐하게 해안에 내려섰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려 돌아보았다.
  눌러쓴 모자와 세운 셔츠 깃 사이로 나와있는 얼굴은 짙은 갈색이었다. 그 갈색 얼굴 가운데에 선명한 하양과 검정, 두 가지 색으로 이루어진 눈이 쿤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쿤은 하마터면 안고 있던 채소를 둑 위에 떨어뜨릴 뻔했다.
   "이 근처에 사니, 꼬마야?"
  짙은 갈색 피부를 가진 테라인이 말을 걸어온다. 꿈에 그리는 점핑 보드의 광고 모델과 비슷한 느낌의 테라인. 쿤은 결국 소리를 내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테라인은 성큼 성큼 걸어 둑 위로 올라왔다. 성난 독수리보다, 테라 출신이었던 학교 선생님보다 훨씬 더 키가 큰 듯 했다.
  갈색 피부의 테라인은 기껏 둑까지 올라와 놓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핑크색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만족스러운 듯 얼굴 가득 미소를 띄운 채로 말했다.
   "너는 정말 아름다운 곳에 사는구나.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것 같은 걸."
   "저, 저... 테라에서 오셨나요?"
  긴장한 나머지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 나왔지만 테라인은 그런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다시 웃었다.
   "그래. 테라에서 왔지. 이곳의 사진을 찍으러 왔어."
  테라인의 말을 따라 쿤의 시선도 바다를 향했다. 하지만 매일같이 보아온 풍경이 새삼 아름답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렇게나 반짝이는 세계에서 온 사람이 왜 이런 곳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걸까. 밤이 되면 온통 캄캄해지고, 암염으로 이루어진 해안은 먼지를 빨아들여 지저분한 회색이고 하루종일 소금 결정으로 이루어진 바다가 사각거리기만 하는 곳인데. 사진을 찍는다면 반짝이는 테라를 찍는 것이 더 멋있을 텐데.
   "이곳의 이야기를 미리 듣긴 했지만 깜짝 놀랐어. 이곳의 인류도, 풍경도 모두 오래 전의 테라같은 느낌이야. 세세한 부분은 다르긴 해도. 하지만 이 곳은 이 나름대로 충분히 아름다워."
   "오래 전의 테라가 바마나 같았어요? 테라에도 여기처럼 낡은 건물과 먼지 일어나는 거리와 소금으로 가득 찬 바다가 있었나요?"
  쿤의 질문은 반쯤은 호기심을 담고 있었고, 반쯤은 볼멘 소리였다. 점핑 보드의 광고모델 같은 테라인은 소리내어 웃었다.
   "오래 전까지도 아니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갔었던 할아버지 댁은 낡은 건물이었고 거리에는 바람이 불면 먼지가 일어났고...... 그리고 여기처럼 깨끗한 해안이 있었지. 바다는 노을 빛에 물들어서 황금빛으로 빛났고. 아, 물론 테라의 바다는 물로, 해안은 모래로 이루어져 있긴 하다만."
  테라인은 계속해서 바다와 하늘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중력 변화 적응이 덜 된 탓으로 이따금 어긋나곤 하는 우스운 걸음걸이였다. 쿤도 그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지만 그의 시선은 테라인의 옆얼굴과 보풀 하나 일지 않고 색 바랜 곳 하나 없는 옷을 살피고 있었다.
  얼마 걷지 않아 테라인은 둑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그 아래에 짐을 두었던 모양이었다. 테라인은 익숙한 동작으로 커다란 숄더 백을 둘러메고 또 하나의 커다랗고 얇은 가방을 집어들었다. 무심히 얇은 가방으로 시선을 보낸 쿤은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벗겨진 커버 귀퉁이 안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은 노을 빛을 반사하여 반짝이고 있는 점핑 보드였다.



  점핑 보드를 옆구리에 끼고 찾아온 테라의 손님은 곧 부근 바마나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수줍어서 테라의 손님에게 말을 붙일 용기가 없는 순진한 사람들, 그리고 테라의 손님이 귀찮아할까 봐 말을 걸지 못하는 점잖은 사람들이었지만 그들 역시 호기심을 만족시키고 싶어했다.
  쿤이 잡화점의 아르바이트를 하러 오기 전 두어 시간 정도, 소문의 테라인에게 부근 안내를 해주게 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스키아씨의 잡화점에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손님이 들락거렸다. 손님들 대부분이 쿤에게 한 두 마디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쿤 역시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어머니를 대신해 쿤을 길러준 누나는, 할 수 있는 한 쿤을 예의바른 아이로 키우고 싶어했다. 누나가 가르쳐준 나름의 예절교육 중에는 상대가 직접 말하기 전에는 그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지 말라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쿤도 사람들의 궁금한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는 만큼은 몇 번이고 되풀이해 참을성 있게 대답해주었다.
   "테라인은 자신의 이름을 데릭이라고 했어요. 코스모 그래픽스에 사진이 실린 적도 있대요. 이 부근의 풍경을 찍고 싶어하는 모양이에요. 오늘은 내내 바다의 사진을 찍었어요"
  쿤의 대답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가곤 했다. 이따금 잡화점 문을 나서면서 중얼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 테라인은 왜 바마나까지 사진을 찍으러 온 걸까. 여긴 대단한 것도 없는데."
  그러한 말은 사실 쿤의 속마음과 같은 것이었다.
  데릭이라는 테라인에게 라하 구를 안내하게 된 지 사흘째, 쿤은 결국 속에 담아두었던 질문을 입밖으로 꺼내고 말았다.
   "바마나에는 별로 대단한 것이 없어요. 왜 여기까지 사진을 찍으러 왔어요?"
   "테라에 없는 것이 많으니까."
  데릭은 낡은 건물들 위로 하늘이 자리잡은 풍경에 셔터를 계속 눌러대며 대답했다. 그는 카메라를 들어올린 팔을 내리더니 길가 바위에 걸터 앉아있는 쿤을 돌아보며 웃었다.
   "테라인들은 말이지. 가진 것들을 아까운 줄 모르고 험하게 다루고 망가지면 바로 버리는 습성이 있어. 그리고는 얼마 못 가서 버린 것이 그리워 울곤 하지. 그런 바보 같은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버린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깨달으라는 생각에 사진을 찍으러 온 거야. 바마나에는 테라인들이 버리고 만 소중한 것들이 다 남아있으니까."
  쿤은 데릭의 말이 어쩐지 성난 독수리의 이야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테라인들은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일까. 쿤은 곰곰이 생각해보고 물었다.
   "하지만 테라는 부자고, 바마나는 가난해요. 우리의 생활은 힘이 들어요. 데릭의 사진을 보고 테라인들은 우리를 부러워할까요?"
   "조금은."
  데릭의 카메라가 쿤을 향했다. 사진을 찍을 때는 움직이지 말고 웃는 거란다. 벌써 사 년 전에 그만둔 학교에서 테라인이었던 선생님이 가르쳐주었었다. 쿤은 어깨를 움츠리고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카메라에 달린 작고 붉은 램프가 두 번 점멸했다.
   "하지만 테라인들은 바마나를 부러워해도, 자신들의 지금 생활을 버릴 마음은 먹지 않을 거야. 그냥 마음 깊이 그리워하면서, 그런 그리움을 느낄 수 있는 자신을 대견하게 여길 뿐이지."
  카메라의 전원을 끄고 접어 정리하며 데릭이 대답을 마무리지었다. 데릭의 이야기는 성난 독수리보다 더 어려웠다. 이해할 수 없는 이유가 자신이 테라인이 아니기 때문인지, 아니면 어려서인지도 알 수 없었다.
  데릭은 숄더백에 카메라를 넣고는 금이 가고 먼지가 낀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가늘게 금이 가고 페인트는 바람과 햇빛에 벗겨져 나간 건물들로 데릭의 시선이 향할 때마다 쿤은 얼굴이 화끈해졌다. 자신이 태어나고 살아온 마을을 부끄럽게 여긴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마을을 둘러보는 데릭의 얼굴에는 조금의 우월감도, 동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는 난생 처음 보는 기분 좋은 풍경을 본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쿤은 테라에서 온 광고 모델같은 사진기자가 조금 더 좋아졌다. 불쑥 데릭이 물었다.
   “테라에서 듣기로, 여기 바마나의 라하 구가 점핑 보드가 시작된 곳이라지? 너도 점핑 보드를 탈 줄 아니?”
  쿤은 동경하는 테라의 손님과 자신의 꿈에 접점이 생겼다는 반가움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쿤은 몰려오는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푹 떨구었다.
   “테라에서 점핑 보드를 배우긴 했는데, 나는 아직 서툴러서 말이야. 여기에서는 점핑 보드를 타는 아이들을 많이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 하나도 안 보여서 좀 놀랐어.”
  데릭은 쿤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계속해서 경쾌하게 말하고 있었다.
   “점핑 보드 타는 것도 몇 장 찍고 싶은데. 아마 스포츠 지에서도 사줄 거고,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점핑 보드 모임에도 보여주고 싶고 말이야. 찍게 해주겠니, 쿤?”
  이유를 알 수 없는 억울한 감정과 분한 마음이 뒤섞여 가슴 안에서 부풀었다. 숨이 막혔다. 쿤은 고개를 들어 데릭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짙은 청녹색으로만 이루어진 눈동자와, 하양과 검정 두 가지 색으로 이루어진 눈동자의 시선이 부딪쳤다. 데릭은 갑자기 뻣뻣해진 쿤의 태도를 그제서야 알아챈 모양이었다. 조금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아, 오늘은 일단 점핑 보드도 없고 하니까...... 다음에 네가 마음이 내키면......”
  쿤은 확고하게 고개를 저었다.
   “특별한 보드는 필요 없어요. 여기는 테라가 아니라 바마나니까요.”
  바마나의 소년은 가까운 건물로 달려갔다. 예전에 목재상을 했었던 가게다. 뒤로 돌아가면 휘거나 구멍이 난 나무 판자 정도는 아직도 얼마든지 주울 수 있다.
  뒤따라온 데릭은 쿤이 집어든 나무 판자를 보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못 구멍이 몇 개나 나 있고, 모서리는 부러져 나간 판자였다.
   “잠깐만, 쿤. 혹시 해서 묻는 건데, 그런 걸로 타 보이겠다는 건 아니겠지? 무리할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야. 내 점핑 보드를 빌려줄 수도 있고...”
   “괜찮아요. 여기서는 다들 이런 판자로 놀아요.”
  허둥지둥 토하는 데릭의 말을, 쿤은 단호하게 잘라버렸다. 데릭은 아직 불안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말이야, 그 판자로는... 중력 제어 장치나 추진 장치는 고사하고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잖아. 위험할 텐데...”
  쿤은 대답을 하지 않고 건물 옥상으로 통하는 낡은 외부 계단에 발을 디뎠다. 잠깐 머뭇거리던 데릭은 씩 웃고는 쿤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세운 주먹을 내보였다.
   “그럼 부탁한다, 꼬마야. 좋은 컷을 잡게 되면 모델료를 낼 테니까 말이야.”
  그 말에 쿤은 데릭이 조금 미워지는 것을 느꼈다. 모델료라는 것은 돈을 준다는 의미이겠지. 아르바이트 급료의 반을 모으는 것에 추가로 돈을 벌게 된다. 그것은 꿈에 한발 더 빠르게 다가갈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런데도 왜 데릭이 갑자기 밉게 느껴지는 지 알 수 없었다.
  옥상에서 내려다보자 다시 큰 길 쪽으로 돌아온 데릭이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데릭이 카메라를 들어올렸다. 쿤은 5미터쯤 떨어진 옆 건물을 가리켜 보이고 난간 위에 판자를 끌어올렸다. 판자 위로 올라가서 착지점이 될 옆 건물 옥상을 보고 있자니 차츰 기분이 가라앉았다.
  바람을 기다리면서 숨을 골랐다. 반쯤 눈을 감자 그렇게 동경해왔던 점핑 보드 광고 속의 청년이 떠올랐다. 테라의 그 사람도 바람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는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온 몸의 신경을 최고로 끌어올려 바람의 조짐을 알아채는 것.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있을까.
  날카로워진 신경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함을 알렸다. 해안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다. 점점 강해질 것이다. 바람이 가장 강해지는 그 때가 뛰어오르는 타이밍이다. 약하게 한들거리던 바람이 낡은 옷자락과 머리카락을 한껏 흐트러트리는 순간, 쿤은 판자의 뒤쪽을 강하게 내리 찼다. 영원한 듯한, 그러나 아주 잠깐의 도약. 점핑 보드 실력은 조금도 녹슬지 않았다. 쿤을 태운 판자는 가볍게 하늘을 가르며 옆 건물의 옥상 정 중앙에 멋지게 내려앉았다.
  착지와 동시에 쿤은 숨을 들이켰다. 등이 아팠다. 찌르는 듯한 통증, 그리고 그 뒤를 잇는 둔한 통증. 아픔은 곧 사라졌지만 쿤은 데릭이 환호를 지르며 달려 올라올 때까지 숨을 죽인 채 등에 느껴졌던 아픔을 되새기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쿤은 돌아보지 않았다. 병원비를 걱정하느라 한층 어두운 얼굴이 된 아버지여도, 직장과 집안일과 쿤의 간호를 한꺼번에 하느라 녹초가 되어버린 누나여도 보기 괴롭긴 마찬가지였다.
  쿤은 묵묵히 잡지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이미 셀 수도 없이 들여다보아 책장 가장자리가 헤어지고 찢어져 나간 곳까지 있었고, 읽기 힘든 테라어 대신에 가득한 사진들은 이미 자잘한 부분까지 모두 외우고 있는 잡지였다. 4년 전에 담임이었던 테라 출신 선생님께 빌려서 돌려주지 않은 것이었지만 이미 죄책감도 옅어지다 못해 사라진지 오래였다. 테라 특집호였던 그 잡지에는 화려하고 빛나는 테라의 도시 풍경이 가득 담겨 있었다. 테라를 향한 쿤의 동경이 시작된 잡지이기도 했다.
   “그거, 코스모 그래픽스?”
  들려온 것은 웃음기가 섞인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쿤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스키아 아저씨네 잡화점의 종이 봉투에 담긴 병문안 선물을 안은 데릭이 서 있었다.
  데릭의 시선은 쿤의 등을 향해 있었다. 일어나는 바람에 이불이 흘러내려 뒷 부분이 트여있는 병원복 사이로 등이 드러나 있었다. 쿤이 급히 이불을 끌어당겨 등을 가리자 데릭은 겨우 굳은 얼굴을 폈다.
   “...미안. 처음 봤거든. 그런 건... 아, 나쁜 의미가 아니라, 그러니까...”
  눈에 뜨이게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는 데릭을 보고 쿤은 키득 웃어버렸다. 그 웃음에 데릭도 따라 웃으면서 난처한 듯 스스로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쿵쿵 내리쳤다.
   “테라에는 없는 거죠, 이런 건. 바마나에만 있는 거예요.”
  가벼운 쿤의 말투에 데릭은 한층 긴장이 풀어진 모양이었다. 그는 안고 있던 종이봉투를 침대 구석에 내려놓고 가까운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걱정이 되어서 너희 집을 찾아가 봤더니 이웃집에 산다는 사람이 달려들어서는 욕을 퍼붓더라고.”
   “아하하, 성난 독수리 아저씨에요. 그 아저씨는 테라 출신이지만 테라인을 싫어해요.”
   “그렇더군. 테라에서 왔다는 이유로 한참을 혼났어. 어쨌든 그 사람이 이야기 해주더군. 바마나인들의 그... 병에 대해서.”
  데릭은 고개를 숙였다. 그는 깍지 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솔직히 바마나에 대해서는 잘 몰라. 이쪽의 인류는 테라인과는 달리 조류에 훨씬 가깝다거나 하는 것도 전혀 몰랐어. 설마 날개가... 나오는 병이라니. 생각도 못했어...”
  쿤은 자신의 등에 튀어나온 두 개의 혹과 그 곳을 덮은 솜털, 이후에는 깃털이 될 어린 털을 떠올렸다. 병원에 입원한 첫날, 화장실에서 고개를 비틀어가며 겨우 거울을 통해 볼 수 있었던 아직 작은 날개였다.
  진화가 완료되지 않은 종의 증명. 바마나인 남성 백 명 중 하나는 날개가 자라난다. 테라인들이 처음 바마나에 도착했을 때에도 이미 바마나인의 날개는 퇴화하여 몸을 지탱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테라의 문명이 들어오면서 날개는 더욱 쓸모 없는 것이 되어갔다. 하늘을 날 수 없는 테라인들은 땅을 기초로 하고 공간을 쪼개어 쓰는 문명을 이루었다. 그 문명 안에서 날 수 조차 없는 날개는 사방에 부딪치는 거추장스러운 혹에 지나지 않았다.
  테라의 의료기술이 들어오면서 날개가 자라난 바마나인은 수술로 그 날개를 제거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테라의 문명 안에서 살아갈 수 없었으니까.
  데릭의 짙은 갈색 얼굴은 평소보다 더욱 어두웠다. 쿤은 데릭을 향해 고쳐 앉았다. 그리고 오래 전, 어머니가 누나에게 들려주었고, 누나가 어린 자신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바마나의 최초의 인간이었던 마라는 아주 커다란 하얀 날개를 가졌다고 해요. 그는 땅에 발을 디디는 법이 없었어요. 그는 구름과 바람을 먹고 마시며 하늘을 날고, 더 높은 하늘을 올려다 볼 뿐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우연히 땅을 내려다보고 말았죠. 마라는 그 땅에서 자신을 올려 보고 있는 한 소녀를 보았어요.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 곳에 서서 소녀는 계속 마라를 올려보고 있을 뿐이었대요. 마라는 점점 그녀에게 끌려 땅에 가까워졌지요. 그리고 결국은 땅에 발을 디디고 소녀에게 입을 맞췄다고 해요. 그 순간 마라의 날개는 더 이상 바람을 가르고 날아오를 수가 없었죠.”
  데릭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쿤은 잠깐 생각하다가 최초의 인간 마라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누나가 마지막에 늘 덧붙여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마라는... 자신의 의지로 땅에 발을 디딘 거예요.”



  입원비와 수술비로 아버지의 빚은 더 늘어나게 되었다고 했다. 누나의 얼마 안 되는 예금액과 쿤이 점핑 보드를 위해 저금한 돈까지 모두 다 모았지만 테라인들이 운영하는 병원에 치러야 할 돈에는 턱이 없이 모자랐다. 누나는 그 이야기를 해주고는 걱정 말라며 엎드려 누운 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보다 퇴원하면 동네 분들께 감사 인사를 해. 스키아 아저씨는 네가 입원한 동안에 매일 밤 우리 집에 들러 팔고 남은 야채를 나눠주고 가셨어. 그리고 성난 독수리 아저씨는 라디오를 팔아 버리셨단다.”
   “성난 독수리 아저씨는 테라에서 마음에 드는 유일한 물건이 그 라디오라고 했는데?”
   “아버지가 네 병원비 때문에 돈을 빌리러 오면 조금이라도 꿔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셨대... 그래서 라디오를 파셨어. 고마운 분들이야. 모두. 꼭 동네 분들 모두에게 인사를 해.”
  라디오를 틀어놓고 술을 마시고 테라에 대해 욕을 퍼부을 때가 가장 즐거워 보였던 성난 독수리 아저씨. 쿤은 고맙고 미안해서 가슴이 뜨겁고 아파지는 것을 느꼈다. 누나는 쿤의 이불을 고쳐주고 일어섰다.
   “잠깐 집에 가서 아버지 식사를 봐드리고 올게. 밤에는 돌아올 테니까...”
  누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크도 없이 병실 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문가에 숨을 몰아쉬고 있는 데릭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열어 젖힌 병실 문에 매달린 것처럼 서서 헐떡이는 것이 꽤나 달려온 모양이었다.
   “쿤. 좋은 소식이 있어!”
  겨우 숨을 고르자마자 데릭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는 쿤의 누나에게 목례로만 인사를 하고 쿤의 침대로 다가왔다.
   “네가 너를 찍은 사진 말이야. 네가 입원하기 전에 바마나 식으로 점핑 보드를 탔던 그 사진. 바마나에서 찍은 사진들을 편집부의 친구에게 보냈더니 그 녀석이 몇 장을 무슨 공모전에 냈다고 하는 거야. 그리고 네 사진이 공모전에서 준우승을 했다고 해. 연락을 받자마자 바로 달려오는 길이야. 너는 정말 멋진 녀석이라고!”
  데릭은 기쁨으로 얼굴을 빛내며 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손은 분명 힘든 일로 거칠어진 누나의 손보다 부드러울 텐데도 쓰다듬는 손놀림은 누나보다 거칠었고 어색했다. 하지만 데릭이 쓰다듬는 것은 그 나름대로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말인데. 너에게 주겠다고 했던 모델료도 훨씬 많이 줄 수 있을 거야. 어쨌든 상금이 나오니까 말이야. 그렇게까지 많은 돈을 줄 수 있는 정도는 아니겠지만.”
  쿤은 어쩐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번 데릭이 모델료 이야기를 했을 때는 왜 그렇게 그가 미웠을까. 왜 지금은 밉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쿤은 데릭과 떨어져 조용히 서 있는 누나를 향해 몸을 비틀었다. 그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누나... 데릭이 모델료를 주면, 조금은 내가 가져도 돼?”
  누나는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이유를 묻듯이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쿤은 훨씬 더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나... 역시 점핑 보드가 갖고 싶어... 퇴원하면 다시 열심히 일할 테니까...”
  누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하게 고집을 부리고 있다는 것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쿤은 역시 꿈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저금은 몽땅 날아갔지만, 저금을 담아온 빈 깡통 안에 다시 시작할 돈 약간이라도 넣어둔다면 얼마든지 다시 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누나가 집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데릭은 병실에 남아주었다. 테라에 대한 이야기, 바마나에 대한 이야기. 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테라의 잡지인 코스모 그래픽스에는 데릭이 처음으로 돈을 받고 판 사진이 실려있다고 했다. 데릭의 사진은 다른 사진들에 비해 아주 작은 조각 컷 두 장일 뿐이었지만.
  한참의 잡담을 나눈 끝에 병원의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데릭은 슬슬 돌아가야겠다며 일어섰다. 문까지 걸어간 그가 멈춰 서서 쿤의 침대를 돌아보았다. 데릭의 시선은 다시 쿤의 등을 향해 있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날개를 잃어서 슬프진 않니?”
  쿤은 한동안 데릭을 마주 보았다. 데릭이 무슨 의도로 질문을 한 것인지, 그 질문이 무슨 의미인지 쿤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쿤은 확고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날개가 있으면 점핑 보드를 탈 수 없어요.”
  데릭은 갈색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띄우고 손을 흔들었다. 쿤은 자신의 방으로 병원의 저녁 식사가 도착할 때까지 코스모 그래픽스에 실린 데릭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작은 사진 두 장은 모두 반짝반짝 빛나는 테라의 야경을 담고 있었다.



  그 날 밤, 작은 소리가 얇은 잠이 빠져 있던 쿤을 깨웠다. 문이 조금씩 열리고 병원 복도의 불빛이 길쭉한 자국을 내면서 자라났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 빛을 가로막고 서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사람. 그는 문 안쪽 벽에 무언가 크고 얇은 물건을 기대 세워놓고 물러났다. 문이 닫히기 전, 문가의 사람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너한테는 완전히 졌다는 기분이 들어버렸어. 그럼 안녕, 꼬마야.”
  문이 닫히고 복도의 불빛도 사라져버리자 쿤은 문을 등지고 돌아누웠다.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테라의 손님이 왜 고작 바마나의 꼬마인 자신에게 졌다고 생각하는지, 그가 왜 반짝이는 점핑 보드를 자신의 병실에 두고 가버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렴풋이 알 수 있는 건, 데릭이 주고 간 값비싼 점핑 보드가 성난 독수리 아저씨의 낡아빠진 라디오보다 가치가 적다는 것이었다. 그런 방식으로 가치를 따지는 법도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어쩌면 데릭도 그걸 처음 깨달았을 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는 쿤이 자고 있을 시간에 몰래 와서 두고 간 것일지도 몰랐다.
  어쩐지 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쿤은 베개에 깊이 얼굴을 묻었다. 그래도 왠지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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