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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영 판타스틱 용서

2005.08.26 20:3008.26

꼭대기 17층까지 승강기는 조용히 올라간다. 속도가 그다지 빠르지 않은 탓에 은근하게 어깨를 누르는 느낌조차 들지 않는다. 너무나 고요한 탓에 쾌적하다는 만족감보다는 불안한 마음이 든다. 정말 제대로 올라가고 있는 건지, 아니면 어디 다른 곳으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눈에 띄는 변화는 문 위쪽에 달린 작은 전광판의 숫자뿐이다. 숫자를 천천히 하나씩 가산해가며 표시하는 전광판 역시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17층 입니다.’

전광판 숫자 놀이가 멎고, 벽을 보고 말하는 것만 같은 어여쁜 여자 목소리가 승강기 구석 어디에선가 들려온다. 승강기 문까지 또 소리 없이 조용히 열린다. 급하게 나서는 내 발소리가 단단한 아파트 복도 바닥과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낸다.

‘문이 닫힙니다.’

내 발소리에 놀라 걸음을 멈추고 나니, 등 뒤에서 승강기 문이 굳게 닫힌다. 잠시 숨을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다시 걷는다. 승강기가 올라갈 수 없는 곳에서 그녀가 나를 기다린다. 마치 위에 또 다른 층이 있는 것처럼 능청스럽게 뻗어 올라간 계단을 딛는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울리는 발소리가 귀에 걸린다. 특별한 날이라 구두를 신고 온 탓이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내디뎌도 돌과 돌을 세게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입술을 깨물고 자신에게 속삭여 본다. 신경 쓰지 말자, 신경 쓰지 말자. 그렇게 시끄러운 걸음을 몇 번 더 옮기고 나니, 옥상으로 나가는 문이 보인다. 대부분의 아파트에서는 쇠사슬과 두꺼운 자물쇠로 무슨 봉인처럼 막아두는 곳이지만, 이 옥상 문은 활짝 열린 체다. 원래부터 이렇게 개방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녀가 억지로 열어 젖혔을까? 문을 지나 옥상으로 나가려는데, 복도 구석에 놓인 자물쇠와 사슬이 슬쩍 눈에 띈다. 망치나 그런 도구로 때려 부순 듯싶었다. 힘도 좋지.

“정말 왔네?”

철문을 나서 옥상에 발을 딛자 마자 멀리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몸을 돌려보니 그녀가 보인다. 친구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낯선 그녀, 3학년 2반의 김 영미가 나를 보며 웃는다. 하교를 하고도 한참이 지났는데도 그녀는 아직도 교복을 입고 있다. 안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내어 시계를 보니 8시 3분이다. 약속 시간은 8시 10분이니까 늦지 않은 셈이다.

“와줘서 고마워.”
“중요한 일이라며?”

영미와는 그다지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저 초등학교 때부터 서로 마주치기를 고등학교 때까지 쉬지 않았을 뿐이다. 같은 동네에서 가까운 거리에서 살았지만, 친해지거나 할 기회도 계기도 없었다. 그래도 서로의 존재는 잘 알고 있었다. 가끔 몇 마리를 나누는 일도 있었고, 언젠가는 돈도 빌리고 갚기도 했다. 그래도,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누구와 친한지, 성적은 어떤지, 뭘 좋아하고 또 뭘 싫어하는지- 그런 사소하지만 친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건 하나도 모르고 지냈다. 도대체 내가 왜 머릿속에서 친구라 정의하고 있는지 의아할 만큼이나 남남이었다. 오늘 점심께 잠시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그녀가 말했다. 오늘 몹시 중요한 일이 있으니 와 주지 않겠느냐고. 나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그러니까 꼭 와달라고. 8시 15분, 삼영 아파트 112동 옥상에서 만나자고. 정말 특별한 날, 특별한 순간이 될 테니까. 그런 말을 하면서도 그녀의 얼굴은 전혀 절실하지도 않았고, 절박하지도 않았고, 하다못해 안타깝지도 않았다. 나는 그보다도 ‘몹시’라는 표현에 몹시 신경이 쓰였다. 흔히 글에서나 가끔 쓰는 표현을 실제로 입으로 표현하는 사람을 처음 만났기 때문이었다. 내가 지금 몹시- 저 사람은 몹시- 몇 개의 예문을 만들어 조용히 중얼거려 보았지만, 역시 소리 내어 말하기에는 너무나 어색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하지만, 그게 마음에 걸려 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녀, 영미는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 얼굴로 고맙다고 말하고는 자기 반으로 돌아가 버렸다. 나의 묘한 오기를 불러 일으키고 싶었기 때문이었을까?

“아직 눈치 못 채겠어?”
“뭘?”
“날 잘 봐.”

학원도 가지 않고 애써 찾아왔건만, 그녀는 의뭉스러운 대답을 하며 능글맞게 웃는다. 그런 행동은 아무런 매력도 없다. 자기 자신은 어딘가 멋지지 않을까 생각하고, 남들이 그렇게 생각해주기를 바랄지 몰라도, 남에게는 그저 짜증나는 투정으로 느껴질 뿐이다. 날 좀 봐줘, 나 여기 있어- 그렇게 쇳소리 내며 외치는 마냥 느껴진다. 특별한 날이라더니……. 들키지 않게 긴 숨을 내쉬고 시선을 더듬는다. 오후 8시지만 여름이라 아직은 노을 빛이 보랏빛으로 진하게 남아 있다. 영미에게 특별히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지만, 오직 옥상 펜스 너머에 서있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위험해.”
“상관없어.”

삼영 아파트의 옥상 펜스 너머에는 짤막한 처마가 있지만, 그래도 위험하다. 처마라고 해봐야 장식일 뿐이고, 끝에 걸릴만한 돋움도 없다. 미끄러지면 당장 18층 높이에서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상관 없다고 해도 보는 사람에게 좋지 않다.

“나 자살 할거야.”

그렇게 말하고는 미소를 짓는다. 잠시 생각이 멎는다. 많은 짜증과 적은 놀람이 머리를 휘어 감는다. 수많은 생각과 감정이 얽히고 설켰지만, 결론은 설마 고등학교 삼학년이 이런 유치한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는 짧은 문장이었다.

“농담이야, 진심이야?”

하도 어이가 없어서 기초부터 하나씩 따져 묻기로 했다. 그녀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한다.

“진심이야, 하늘에 맹세할게.”

무어라도 읽어보려 했지만,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도대체 왜 이러는지,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이런 행위를 벌이도록 밀어붙였는지 알 수가 없다. 심지어 저 미소와 간결한 듯 하면서도 하늘이란 군더더기를 붙이는 대답이 정말로 진심인지 아닌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무섭지 않아?”
“괜찮아.”

내 나이 또래 아이들이 자살을 택하는 이유에는 오만 가지 핑계가 있기 마련이다. 나쁜 성적, 불화, 충동, 불행, 임신 등 그럴듯하지만, 이해할 수 있을 듯도 싶지만, 결국 어이없는 핑계로 매년 그렇게도 많은 숫자가 죽음을 택한다. 그냥 누군가의 말처럼 사회가 그렇게 만들어 버렸다고 표현하는 편이 백배는 쉽다. 몹시도 저열한 결론이지만 말이다.

“자살하는 이유는 뭐야?”

이번 질문에는 대답이 없다. 그저 표정이 무심하게 변할 뿐이다. 근거는 어디에도 없지만, 그녀의 자살 의지가 진심이라는 사실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걸음을 옮겨 그녀에게서 조금 떨어진 옥상 펜스 앞에 멈춰 섰다.

“날 부른 이유는 뭐야?”
“그냥, 너한테 어울릴 것 같아서.”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그녀는 다시 웃고 있다. 장난기가 잔뜩 피어 오르는 웃음이다.

“어울린다고?”
“사실은 필요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몰라.
어쩌면 딱 너하고 나 정도 사이의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아.”

몸을 기울여 펜스에 고개를 괴며 능청스럽게 대답한다.

“무작위? 그냥 내가 눈에 띄었다는 거야?”
“뭐 어때, 너 그런 거 신경 쓰지도 않잖아, 그렇지?”

먼 곳을 보며 고개를 괴고 웃던 그녀가 나를 돌아본다. 내 말문이 멎는다.

“니 얼굴을 보면 알아. 니가 어떤 애인지.”
“안다고?”
“모든 것에 무관심하려고 애쓰지? 한 발 물러나서 관망하는 자세 같은 거 좋아하지?
그렇게 서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루 종일 할거야.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가 하는
의구심을 문득문득 떠올리면서 불안해하지? 무관심 하려고 애쓰지만, 실은 스스로가
무의미해 지는 게 싫어서 미친 듯이 보고 듣고 끊임없이 생각하고 그러는 애야, 너는.”

알아 들을 수 없을 만큼, 붕 뜬 이야기를 길게도 늘어 놓는다.

“기쁜 일이 생기면, 일단 주변을 살펴 보고 기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도 좋은가
아닌가 판단부터 하는 거야. 귀찮게 감정을 표현해야만 하더라도, 거기서 또 생각하지.
아, 나는 이런 일이 있어서 이런 방식으로 어떤 감정을 느끼며 기뻐하는구나. 그래,
하지만 억지로 감성을 표현 해야만 하다니 좀 불쾌하네. 이 정도 기뻐했으니 슬슬
가라 앉은 척 해도 괜찮겠지? 하고.”
“아니야.”
“물론 아니지. 넌 생각을 많이 해야만 하니까. 거기서 뜬금없이 생각을 한 겹
더 덧붙이는 거야. 나는 왜 이럴까? 그냥 순수하게 기뻐하면 될 텐데. 그러면
인생이 덜 피곤할 수도 있는데.”
“나는…….”
“아직 마무리가 남았어. 마지막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를 꾸짖어야 하니까.
스스로가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돼. 아영아, 아영아, 넌 그냥 보통
사람이야. 단지 생각이 좀 많을 뿐이야. 이건 어쩌면 고쳐야 하는 병일지도 몰라.
이런 자신을 즐겨서는 결코 안돼. 그건 몹시 위험한 짓이야. 살짝 물러나서 스스로를
바라보면, 정신병 환자에 불과할 수도 있잖아?”

그녀의 목소리로 내 이름을 들어보는 건 처음이다. 긴 이야기에서 유독 내 이름만이 강하게 귀를 찌른다. 그건 아마도 그녀의 이야기가 진실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어쨌거나 불리한 이야기를 듣기 싫어하고, 인지하기도 전에 스스로 망각하는 동물이니까. 그래서 내가 이렇게 내 이름을 연거푸 부른 그녀의 목소리에만 몰입하고 있는 걸까? 아니다, 이런 자세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의연하게 받아 들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중한 내가 상처 받는다. 내 영혼의 소중한 부위가 상처 받는다. 그렇다고 내가 대단한 영혼을 지녔다고는 할 수 없다. 그저 나름대로 지키고 싶은 스스로의 모습이 있을 뿐이다. 그 정도의 객관성은 유지 해야지. 그래야지, 중학교 때부터 흔들림 없이 지켜온 철칙이니까.

“난 그냥…….”

말문이 막힌다. 언어 중추가 겁을 먹은 탓이다. 스스로를 표현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지금처럼 나를 알고 있는 것만 같은 사람을 만났을 때는 더욱 그렇다. 부정하는듯한 표현은 은폐하려 드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 싫고, 긍정하는 듯한 표현은 맥없이 무릎 꿇는 것 같아서 싫다.

“그냥 공정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거야, 너는.”
“……그럴지도 몰라.”

나보다 먼저 그녀가 나쁘지 않은 결론을 내린다.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고민으로 지쳐버린 탓에 가만히 수긍했다.

“그래서 널 부른 거야.”
“공정해서?”

그녀는 또 고개를 가로 젓는다.

“반쯤은 그렇기도 해.”
“나머지는?”
“설명하기 복잡해.”
“정리해봐.”

웃음 섞인 한숨 소리와 함께 그녀는 두 손으로 펜스를 꼭 잡은 체로 등을 뒤로 쭉 편다. 엷은 보랏빛 노을에 그녀의 단발이 일렁인다.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 너는, 아니다, 너라면 확인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불렀어.”
“뭘?”
“예를 들면, 자살 같은 거.”
“네가 죽는 걸 확인해 달라고? 지켜봐 달라고?”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너는 공정하려고 노력하는 애라서, 굉장히 무신경 하거든.
사람이 죽는 걸 봐도 그다지 충격 받지 않을 것 같았어. 물론 충격이야 받겠지만,
넌 또 생각할거야. 아, 난 충격 받았어. 남의 죽음을 받아 들이는 자세는 어떤 걸까?
아무렇지도 않은 건 인간답지 않은 일이야. 그러니까 어떻게든 무슨 감정이라도 품어야지.
하지만, 그런 충격에 내 인생을 망치는 일은 없어야 해. 거기에만 주의하자.
그러니까, 아영아, 아영아, 이런 계산은 그만 두고, 일단은 충격 받는 데만 집중하자.
인간답게 말이야.”

어째서 내 이름을 연거푸 부르는 걸까. 명찰 덕분이겠지만, 내 이름을 외우고 있긴 있었구나. 내 성도 외우고 있을까?

“너라면 내가 죽는 모습을 보여줘도, 그다지 충격 받지 않을 테니까.
나도 죄를 하나 더는 셈이잖아. 안 그래?”
“확인하고 싶어하는 건 뭔데?”

그녀가 은근히 숨기려는 이야기를 붙잡아 본다. 미안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즐겁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다.

“별거 아냐.”
“부끄러운 거야?”
“아니야.”

고개를 숙인 체로 고개를 가로 젓고는 이쪽을 본다. 살짝 울 것 같은 표정이지만 눈빛만은 단단했다.

“먼저 말해 둬야 할게 있어. 난 여기서 꼭 자살 할거야.”
“확인 하고픈 게 있다며? 확인하지 못하면 그만 두는 거 아니야?”
“그런 확인이 아니야.”
“어떻게 다른데?”
“이건 잔걱정 같은 거야. 모의고사 답안 체크랑 비슷한 거지. 맞은 문제인데,
나도 모르게 두 번이나 거듭 확인하는 심리? 무의식? 뭐 그런 거야.”
“답이 아주 틀렸을 수도 있잖아.”
“이건 내가 나에게 낸 문제야. 답을 틀릴 이유가 없잖아?”

그렇다면 그 문제 자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봤어? 자꾸만 맴도는 이야기가 싫어서 머릿속으로 떠올린 또 다른 질문을 슬쩍 무시했다. 그녀의 이야기가 맞다. 어차피 자살이라는 답을 정했다면 굳이 그 문제를 파고 들 필요는 없다. 결국 그녀는 벌써 몇 번이나 확인한 답안에 대해서 성적표를 받고 싶은 것뿐이다. 아니면 옆에서 누군가 ‘아, 나도 그게 답이라고 썼어.’하고 맞장구를 쳐주거나, 아무튼 역시 남들도 같은 생각과 같은 답을 내놓았구나-하고 안도할 수 있는 핑계를 말이다.

“답이 뭔데?”
“예전에 중학교 때, 생물 선생님이 투표일이 다가오니까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거야.
나는 투표하지 않을 거다. 투표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권력 행사다. 권리를 포기한다고
말하고 매도하지만 그것만이 나의 진심이다. 나는 세상에게 너희들 가운데 내 소중한
표를 버려줄 마음도 들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새로운 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행위다.
그렇게 십분 정도 떠들다가 수업을 했어.”

멀고 먼 경험담이지만, 충분히 유추해서 답을 끌어낼 수 있다. 그녀의 답은 자살이다. 조금 더 의미를 두자면, 세상을 향해 무언가 의지를 표출하는 행위다. 세상에서 죽음은, 특히 자살은 의지를 드러내기 위하여 흔히 쓰는 방식이기도 하다. 언제나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점이 씁쓸하지만, 적어도 알베르 카뮈가 말했듯이 자기 자신만큼은 온전히 지켜낼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나도 비슷해. 더 살 수 있고, 더 살지 않으면 죄를 짓는다고 말하지만,
그냥 더 살고픈 마음이 없을 뿐이야.”

문득 단조로운 음악이 그녀의 교복 속에서 퍼져 나온다. 그녀는 교복 치마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더니, 바로 옥상 저 아래쪽으로 던져 버렸다. 유행가 반주 소리가 금새 귓가에서 멀리 사라진다. 한참을 기다려봐도 핸드폰이 부서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옥상이 너무 높은 탓일지도 모른다.

“집이야.”

그녀가 하늘을 올려다 보며 짧게 말한다. 금새 굳은 표정을 보면, 집이야 말로 그녀가 그만 살자고 마음 먹은 이유인 것만 같다. 우스울 정도로 멋진 순간에 전화가 걸려온 셈이다. 아마 언제나 그런 식으로 그녀를 괴롭혔을지도 모른다. 즐거움은 끊고, 괴로울 때는 괴로움을 더 하는 집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이렇게 섣불리 판단해서는 곤란하다. 넘겨 짚고, 거기에 동조해서는 곤란하다.

“집이 싫어?”
“좋아하지 않아.”
“그래서 자살하는 거야?”

하늘을 올려다 보는 체로, 그녀가 먼 곳을 바라보며 한숨처럼 웃는다.

“이유는 많아. 열거하는 것도, 곰 씹어 보는 것도 아무런 가치 없는 짓이야.”

많은 이야기를 한 번에 정리해 버린다. 이미 자기 합리화의 결론에 도달할 때까지 몇 번이고 곰 씹었을 이야기다. 자질구레한 이야기는 혼자 품고 사라지려 한다. 혼자서 완성해야만 하는 그 자기 합리화의 결론에 구질구질한 의미를 남겨놓고자 나를 불렀지만, 그래도 가능한 깨끗하게 마무리하고픈 욕망의 발로인지도 모른다. 남이 자살하는 이야기를 듣고, 지켜봐야 하는 처지에 놓인 나로서는 조금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굳이 캐묻는 것도 역시나 구질구질한 일이다.

“사실 다른 길이 없는 건 아니야. 참고 견디면, 언젠가는 끝날 테니까.
아니면 남들이 볼 때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다른 길을 택해 노력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어.”
“근데?”
“그건 답이 아니잖아.”

대안은 없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니까. 그녀는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다. 한쪽 다리를 살짝 구부려 발로 옥상 처마를 툭툭 내리찍는 모습이 부끄러운 고백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다.

“살아 남아 버티면, 그 대가를 얻을 수 있다고 하지.
하지만, 살면서 요행 같은 건 바라지 말라고 또 그러잖아.
결국 거짓말이야 둘 다. 내가 살아 남기를 종용하기 위한 수단이야.
난 알아. 나는 언니처럼 속아 넘어가지 않을 거야.”
“언니?”
“언니 있어. 나보다 여덟 살 많아, 결혼도 했어.”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굵게 변한다. 추스르고 남은 감정의 편린이다. 고작해야 조금 남아 흐르는 감정인데도 목소리를 그렇게나 짓누른다.

“언니랑 사이가 안 좋아?”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아. 사실 여덟 살이나 차이가 나다 보니까.
이모 같은 느낌도 들고 그래.”
“그런데?”

침묵이 짧게 흐른다. 보랏빛 석양은 어느 사이 엷게 변하고 그 위로 어둠이 드리운다. 바람에 흔들리는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어둠이 스며 들어 검은 깃발처럼 나부낀다.

“언니는 쓸데없이 태어난 여자야. 쓸데없이 많이 먹고, 쓸데없이 책을 읽고,
쓸데없이 공부하고, 쓸데없이 드라마를 보고, 쓸데없이 만화나 보고, 쓸데없는
대학에 붙었지. 그래서 쓸데없으니까 대학에 가지 못하고, 쓸데없이 제빵 학원에
다녀서 쓸데없는 빵집에 취업해서 쓸데없는 돈을 벌어 집에 가져다 바치다가,
쓸데없는 남자와 선을 봐서 쓸데없는 돈을 들여서 쓸데없는 결혼이나 했지.”
“뭐가 그렇게 쓸데 없는데?”
“나는 잘 몰라. 낳아준 사람이 언니를 그렇게 부르고 또 만들었어.”

순간 가슴이 저려온다. 그다지 먼 이야기는 아니다. 친척 중에 그런 집이 하나 있었으니까. 나보다 두 살 어린 그 애도 그랬다. 그저 되도 않기 위해서 태어난 아이 같았다. 되도 않는 소리나 하고, 되도 않는 짓을 하는 아이였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아이를 낳은 친척 어른은 그 말을 쉬지 않았다. 그래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되도 않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아이라고 쏘아 붙이기도 했다.

“쓸데없는 남자와 결혼 생활도 그다지 좋지 못해서, 가끔 집으로 도망쳐 오면
또 쓸데없는 짓이나 한다고 구박 받았어, 언니는.”

나는 할 말이 없다. 상상은 할 수 있지만, 경험은 하지 못했다. 분명히 상상으로 가늠할 수 없는 아픔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그리고 위로를 하는 것도 부질없는 짓이다.

“언니가 울었어. 두 달 전에 와서 울었어. 다른 건 기억하지 못하는데,
남편 복 없는 년은 자식 복도 없다는데 내 인생은 이제 끝났다고 하던 말이랑
못 죽어서 산다는 비명 소리만은 똑똑히 기억해. ”

그녀는 입을 다물고 코로 한숨을 쉰다. 입을 다물어야 할 만큼, 커다란 감정이 온몸을 휘감아 도는 탓이다.

“그때 느꼈어.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언니가 참고 있는 줄 알았어.
기회를 노리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 근데 그게 아니라, 언니는
단지 세상을 증오하고 있을 뿐이었던 거야. 정말로 쓸데없이 말이야.”

몸을 살짝 돌려 펜스에 등을 기대고 서서, 그녀는 목을 뒤로 젖혀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 본다.

“생각했어. 저건 너무나 비참하다고, 스스로 쓸데없는 사람으로 변해버리다니.
언젠가 그걸 벗어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때가 언제일지 알 수도 없고,
벗어난 다음 그렇게나 어긋나 온 길을 어떻게 되돌아가야 할지도 막막하고.
내 미래를 보는 것 같아서 끔찍했어. 몹시 화도 나고, 억울하기도 하고.”
“그래서 죽는 거야?”
“세상을 용서하려면 그 수밖에 없어.”

신선하지도, 그렇다고 구태 의연하지도 않은 자살의 의미다. 용서, 그녀는 세상을 용서하기 위해 자살한다.

“예전에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는 문제가 있어. 멈춰있는 시계와 5분 늦는 시계.
둘 중에 어느 시계가 더 정확할까?”
“그거, 멈춰 있는 시계지? 하루에 두 번은 정확히 들어 맞으니까.”
“응. 인생도 그래. 답은 없고, 구질구질한 다른 길만 있을 때는,
단호하게 접어야지. 그래야지, 사람다운 거야. 민주주의나, 자유나,
충성...... 그런걸 위해 희생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난 내가 사람답기
위해서 죽음을 택한 거니까.”
“용서로서?”

하늘을 바라보던 그녀가 몸을 세우고, 나를 본다.

“세상은 나를 증오하는 바보로 만들어 버리려고 하니까, 용서하는 수 밖에 없어.”

말을 마친 그녀는 옥상 처마 가장자리로 몇 걸음 나아간다.

“여기까지 결론을 내리는데 한 달도 넘게 걸렸어. 어떤 것 같아?”

그녀의 얼굴은 이제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난.”

말을 띄워놓고 생각한다. 그녀는 옳다고 할 수 없지만, 틀렸다고 할 수도 없다. 빈틈을 그대로 드러내는 논리와 결론이지만, 그 확고한 결단 앞에 그 틈을 들쑤실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나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하는가. 비겁한 대답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말려야 하는가. 오히려 용감한 그녀의 등을 떠밀어 주어야 하는가.

“니가 옳다고 생각해.”

더 이상 망설일 여유가 없다는 판단이 들자마자, 무의식이 멋대로 하나를 골라 대답해 버린다. 대답을 들은 그녀는 잠시 아무 말 없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고마워.”

그리고는 남은 걸음을 옮긴다. 각오하고 있었던 장면인데, 숨이 멎는다. 고개를 돌리고 싶다. 네가 옳다고 말해놓고는, 이제 와서 말리는 것도 우습다. 아니, 우습긴 하지만 말려야 하는가? 호흡이 가쁘게 올라오는데, 한 발자국을 남겨놓은 그녀가 멈춰 선다.

“그리고.”
“응?”
“너도 용서해 줄게.”
“날?”

지금에 와서야 긴 이야기를 처음으로 나누었을 만큼, 그녀와 나의 만남은 적었다. 그런데 내가 그녀에게 미움 받고, 증오 받고 있었단 말인가. 아니, 그럴 이유라도 있었단 말인가.

“내가 쓸데없이 읽는 책, 너는 그냥 읽고 싶어서 읽었지?
중학교 때부터 줄곧 미워했어. 나는 쓸데없었지만, 넌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가까이 살면서도 친구가 되는 게 싫어서 피해 다녔어.”

의문이 하나 풀린다. 그랬구나, 그래서 우리는……. 하지만, 그래도 나는,

“난 널 친구처럼 느꼈어.”

그녀가 뒤돌아 선다. 어둡지만, 얼굴 윤곽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것도 용서해 줄게.”
“응.”
“세상에게 먼저 이기는 건 내가 되는구나. 너도 지지마.”
“응.”
“그럼 안녕.”

대답할 사이도 없이 그녀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나는 뒤늦게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한참을 기다려도 비명 소리나, 사람이 어딘가에 부딪히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겨우 눈을 떴지만, 눈을 감았을 때와 똑 같은 어둠이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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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냥 이방인 (인간의 틈새)9 2005.12.30
초청 단편 마지막 여름의 추억 2005.11.25
초청 단편 위협의 발견, 혹은 발현 2005.11.25
배명훈 다이어트18 2005.11.25
김이환 변신!5 2005.11.25
초청 단편 지지부(Zizibu) 2005.10.29
초청 단편 이야기 하나 2005.10.29
정대영 그녀와 할머니 - 그러지 마 2005.10.29
정대영 그녀와 영희 - 거짓말 하지마2 2005.10.29
곽재식 마녀의 피7 2005.10.29
초청 단편 누가 폴 오스터를 죽였나 2005.09.30
초청 단편 달 가르기 2005.09.30
정대영 판타스틱 평행선 - 미안해요 2005.09.30
곽재식 낙하산8 2005.09.30
갈원경 하늘의 거울 - 본문 삭제 -1 2005.09.30
곽재식 최악의 레이싱18 2005.08.26
초청 단편 이 달은 초청 단편이 없습니다. 2005.08.26
정대영 판타스틱 용서 2005.08.26
미로냥 초토(焦土) 2005.08.26
갈원경 푸른 불의 얼음 - 본문 삭제 -2 2005.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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