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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냥 이방인 (인간의 틈새)

2005.12.30 22:5212.30

이방인
 - 인간의 틈새

 

 


 두루마리 휴지에 눈금 있는 거 알지? 그걸 따라 뜯으면 얇은 휴지가 실은 두 장이라는 걸 알 수 있잖아. 그런데 말야, 이따금이지만 두 장이 잘못 맞물려서 눈금 따라 뜯어 보면 딱 맞아 떨어지는 게 아니라 두 장으로 흐물흐물 떨어져 버릴 때가 있어. 잘못 뜯어 비스듬히 찢겨진 스카치 테이프만큼 짜증나는 일이지.
 한 장과, 또 한 장의 그 간격.
 “그러니까 그게 무슨 상관인데?”
 나는 정우에게 말했다.
 정우는 ‘세상의 틈새’를 발견했다는 메시지를 남겨 놓고 모두의 곁에서 멀리 떠난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 왔다고 생각했는데 내 휴대전화에도 단 한 개의, 다른 모두가 받은 것과 같은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 나는 세상의 틈새를 발견했다!
 일백 일.
 나는 정우가 죽었다고 말하는 친구들과 도망쳐 버린 거라는 친구들과 혹은 잊겠다고 험담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혼란해 했다. 어떻게 됐든 관계 없으니까 한 번쯤 만나고 싶다는 생각뿐 나중에는 서운하다는 감정도 휘발된 양 남지 않았다.

 “서정우. 나는 지금 너한테 한 번 더 만나고 갈 수 없냐고 묻는 거야. 이번에 가면 다시 오지 않을 거라면서.”

 거짓말처럼 내 앞에 나타난 정우는 떠나기 전과 마찬가지로 조금 쓸쓸하고, 조금 덧없고, 또 조금 아름다웠다. 물들 만큼 물들어 이제 지는 일만 남은 단풍잎처럼 정우에게는 화려하고도 어딘가 우수 어린 분위기가 있었다.
 “그래. 난 이제 여기선 이방인이니까 멋대로 돌아올 수는 없어. 틈새를 골랐으면 틈새에서만 널 만날 수 있는 거야.”
 전보다 긴 머리카락이 정우를 좀 더 창백해 보이게 만들었다. 헐렁한 쥐색 니트 위로 언젠가 함께 골라 구입한 갈색 머플러를 둘렀다. 정우는 어디를 보아도, 이 세계를 떠난 사람 같지 않았다. 나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만나고 싶었다.
 만나고 싶어 밤마다 기도 했다. 신을 믿지 않는 탓 그저 막막한 허공을 뚫어져라 바라 보면서 정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가 떠올려 온 얼굴보다 좀 더 새파란, 정우의 입술이 눈 앞에서 미소 짓고 있으니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왈칵,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혼자만 틈새로 떠나 버리면 그만이니?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니?”
 “희야.”
 놀라울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로 정우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걸로 충분하다. 아무래도 좋다. 그런데도, 눈물이, 계속 흘렀다. 나는 정우를 떠나 보내고 싶지 않았다. 소매를 당겨 눈물을 닦았다. 피터팬처럼 열린 창문에 매달린 정우와 내 사이에 방범창이 있었다. 정우는 커튼처럼 너울거렸다. 희고, 부질없고, 참으로 아름다웠다.
 “희야. 세상엔 인간이 정해 놓았기 때문에 틈새가 생기는 것이 있어. 12월 31일이 지나면 나이를 먹는다고 하잖아? 새로운 한 해가 시작한 거라고 하잖아?”
 “그런데?”
 “그치만 음력 설이 기다리고 있는 걸 아니까 그때까지는 정말 한 해가 시작한 건가 아닌가, 나이를 먹은 건가 아닌가, 하고 혼자 고민하게 된단 말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시간이 되는 거지. 말하자면 꼭 지금처럼.”
 정우는 시계를 가리켰다. 야광 기능이 있는 시계는 어렴풋한 그늘 사이에서 숫자만은 선명해서 기괴한 인상을 주었다. 새벽 두시 반. 정우는 푸른 입술로 싱글거렸다.
 “오늘이라고 하기도 뭣하고 내일이라고 하기도 뭣하지? 지나간 낮을 두고 어제라고 말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 오늘 낮에, 하고 말하게 되지? 그건 인간이 그어 놓은 선 때문인 거잖아.”
 네 개똥철학 듣고 싶지 않아.
 나는 입을 다물고 정우를 바라 보았다. 정우는 방범창을 쥔 손 한 쪽을 놓았다. 바람이 불고 커튼이 살랑거렸다. 정우의 머리카락이 투명하게 부풀어 올랐다.
 “날짜 변경선을 넘는 순간의 기묘한 감각. 비행기를 타고 먼 나라로 떠났을 때 사라져 버리는 몇 시간, 혹은 덧붙는 몇 시간. 연말에 태어난 아이의 나이를 헤아리는 법. 희야, 나는 그 틈새로 떠난 거야. 사람이 정해 놓은 선에서 비롯하는 틈새 말야.”
 “……난, 떠나기 전에 널 다시 만나고 싶다고 말했어. 그 뿐이야. 네가 틈새로 떠나 버리든 말든 난 이제 몰라.”
 “만나러 와 줘야 해, 네가. 내가 올 수는 없어.”
 “끝까지 그런 식이구나.”
 “미안해.”
 왜 정우는 날 두고 가 버린 걸까.
 왜 정우는 틈새를 찾아 날아가는 수밖에 없었던 걸까.
 나는 묻고 싶었지만 이미 너무 늦은 질문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나야말로 물었어야 했다. 진작, 조금 더 빨리 눈치를 챘어야 했다. 웃으며 손을 흔들고 시시한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가끔 밥을 함께 먹을 때 한 번이라도 물어 봤어야 했다.

 왜 떠나려는 거니?
 어째서 굳이 틈새를 찾아 사라지려는 거니?
 나를 두고 가지 말아 줘.

 나는.
 정우를 떠나 보내고 싶지 않았는데.
 “만나러 갈게. 마지막이니까.”
 “고마워, 희야.”
 정우는 웃었다. 이렇게 꿈처럼 만났을지언정 쭉 웃어 주어 고마웠다. 조금이라도 아파 보였다면 나는 화를 냈을 테니까.
 “언제 만날 수 있어?”
 “11월 31일이 좋겠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꼭 만나러 와 줘.”
 십 일월 삼십일 일.
 입 안으로 낯선 언어로 된 단어인 양 외었더니 혀 뿌리가 매캐하게 달아 왔다. 콧잔등이 비로소 시큰거렸다. 눈 앞이 흐렸다. 눈이라도 내리는 듯이. 열린 창으로 찬 바람이 새어 들고 커튼만이 흩날려, 바깥은 끔찍할 정도로 고요했다. 아무도 없었다. 정우야. 서정우. 나는 불러 보았다. 내 목에서 나온 것 같지 않게 기괴한 목소리.
 야아옹.
 멀리서 고양이 울음 소리가 들렸다. 뺨이 시렸다. 입김은 아직 얼어 붙지 않는데 손을 내밀어 잡아 본 방범창은 한 겨울만큼 찼다.
 “너 바보니? 십 일월은 삼십일 까지야.”
 “엉?”
 “정말 바보구나? 봐, 이거 초등학교 때 안 배웠어?”
 나란히 앉아 밥을 먹던 친구는 수저를 내려 놓고 주먹을 쥔 다음 하나하나 짚으며 ‘일월 이월 삼월’을 외웠다. 초등학교 때 배웠지, 우리 땐 국민학교였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입 안으로 우겨 넣은 수저마저 찼다. 펄펄 끓는 국을 떠 넣었는데도.
 끝내 인사 할 생각 없었던 걸까.
 나는 정우에게 무어였을까. 이 세상을 떠나 틈새로 사라질 작정을 하고 있었던 녀석에게 ‘친구’라며 그렇고 그런 문자 메시지나 보내고 전화를 걸어 귀찮은 이야길 늘어 놓고 정작 괴로울 땐 아무 것도 몰라 곁에 남아 주지도 못했던 나는 무어였을까. 말을 붙이면 씨익 멋쩍은 듯 웃고 낯을 붉히는 것이 귀여웠던 정우. 키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자라지 않더라는 정우. 나란히 서면 어깨가 서로 부딪혔던 정우. 자주 감기에 걸렸던, 여름이 끝날 무렵이면 꼭 한 번씩 앓아 누웠던 정우. 내 친구 정우…… 나는 친구라고 불렀던, 친구라고 믿었던, 그 정우.
 찾아와 준 것으로 된 거야. 그게 마지막 인사였다고 생각하면 돼.
 십 일월 삼십일 밤 열 한시 오십 오분. 나는 잠이 오지 않아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창 쪽으로 의자를 돌리고 창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찬 바람이 밀려 들었다. 감기에 걸릴 거야. 나는 생각했다. 초침 흐르는 소리가 유난스레 컸다. 이대로 십 일월 삼십일 일은 오지 않고 곧장 십 이월 일일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이다.
 이걸로 된 거야.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소매로 눈가를 부비는데 찬 손가락이 뺨에 닿았다.
 “만나러 와 줬구나.”
 “……정우야?”
 놀란 눈으로 마주 보자 조금 더 부질없고 조금 더 하얀 정우가 조금 더 긴 머리카락을 밤 바람에 맡긴 채 방범창 저쪽에서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웃는 입술이 처음 내린 눈만큼 창백하고 두 눈은 사붉었다.
 “정우야. 정우야. 정우야.”
 “고마워, 희야. 만나러 와 줘서.”
 정우는 똑바로 벽에 걸린 시계를 가리켰다.
 “봐, 지금이 바로 틈새야. 희야. 실은 지금은 십 이월 일일 영시 일 분이거든. 네 방 시계는 표준 시각보다 육 분 정도 느린 거야.”
 “그래서 틈새가 된 거야?”
 “그래서 틈새가 된 거야.”
 “진작 알았다면 이십 분쯤, 아니, 세 시간쯤…… 열 한 시간쯤 느리게 바꿔 놨을 텐데.”
 “그건 안 돼. 반칙이니까.”
 정우는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후드득 떨어져 내릴 때와 똑 같은 소리를 냈다. 웃음 소리였다. 열한 시간 오십구 분 오십구 초를 함께 했어도 아마 나는 똑 같은 분량의 아쉬움으로 입술을 깨물었을 테지.
 “만나러 와 줘서 고마워. 희야가 참 좋아.”
 거짓말 같은 정우가 거짓말 같이 웃어서 나는 거짓말 하듯이 정우의 이름을 불렀다. 내 목소리마저 꼭 정우만큼 부질 없어서 청 보랏빛 어둠 사이로 흔적도 없이 흘러 나가 온 세상으로 흩어졌다. 아무 것도 낳지 않는 부질 없는 이야기만, 도란도란, 방범창 사이로, 오갔다.
 오 분이 흘러 내 방 시계가 열두 시를 가리켰을 때 정우는 빛과 함께 어둠 사이로 흩어져 이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나는 참았던 눈물을 한 바탕 쏟아 놓고서야 창 밖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있었다. 불어 놓은 입김이 흐릿하나마 흰 빛을 띠고 날아 드는 허공, 구름이 천천히 흘렀다. 달이 없는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정우처럼 희고 부질없고 아름다운, 첫 눈이었다.

 아하.
 그래, 십 일월 삼십일 일이었구나.
 손을 뻗어 첫 눈을 가리키자 세상의 틈새로 정우의 뒷모습이 보였다.

 

 

mirror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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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한슬픔 05.12.31 01:11 댓글 수정 삭제
    마음에 들어오는 글이네요.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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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로냥 06.01.01 23:51 댓글 수정 삭제
    무한슬픔/ 실은 이번 호에서 저만 소품이라 민망해하는 중이랍니다^^; 무한슬픔님 마음에 들었다니까 무척 기뻐요!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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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6.01.03 00:39 댓글 수정 삭제
    신기하네요. 저와 같은 주제를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서 뚫으셨네요. 작년 마지막 날에 윤초가 1초 더 붙어 있었다던데, 12월 31일 오후 11시 59분 60초라는 게 있었대요. 사실 확인은 안 해 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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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로냥 06.01.09 14:35 댓글 수정 삭제
    배명훈/ 앗, 그런 것도 있었군요! 그런 걸 알게 되면 기분이 묘해져서 재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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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림 06.01.12 07:45 댓글 수정 삭제
    앗앗앗, 저도 늘 왜 2월은 28일에 끝나고 29일은 있다말다 하고. 말일은 30일이나 31일 사이에서 오락가락 하는지 이상하게 생각했었어요^^ 특히 그 비행기 넘나드는 시간 절대 공감^^;;; 영국으로 열세시간 거슬러 가는데 거의 10시간 가까이 동트는 새벽 하늘을 나는 것이 묘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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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림 06.01.12 07:46 댓글 수정 삭제
    정확히는 동트는 시간부터 이른 오전사이의 두시간 정도를 열시간쯤 길~게 늘여놓은 것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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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원경 06.01.21 06:29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오랜만의 글 정말 반갑고 기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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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완 06.01.25 14:19 댓글 수정 삭제
    아, 이 글 좋네요. 잘 읽었습니다. 일상적인 듯 하면서도 독자의 호기심을 곧장 파고드는 도입부에 특히 감탄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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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로냥 06.01.26 11:23 댓글 수정 삭제
    은림/ 정말 기분 이상하죠;; 사람이 정해 놓은 건데도 1월 1일로 넘어가는 순간에는 뭔가 있어야 할 거 같고...;; 참 사람이란 묘해요.
    갈원경/ 오랜만입니다 ㅠ_ㅠ 정말... 안 써지네요 ㅠ_ㅠ
    이수완/ 감사합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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