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1.
  어떤 미친놈이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 누군지는 몰라도 완전히 정신 나간 연쇄 살인범일 것이다. 아직 두 번째 살인이 일어나진 않았지만 범인은 반드시 살인을 저지를 것이다. 아니, 벌써 저지른 건지도 모른다. 다섯번째, 열번째 살인이 일어났는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아 미친놈이야 미친놈.
  이웃집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때문에 요 며칠은 미칠 지경이었다. 어떻게 내 옆집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날 수 있나? 그것도 목을 깨끗하게 잘라서 죽였고 잘린 머리는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니, 얼마나 소름 끼치는 일인가. 내가 멀쩡히 밥 먹고 텔레비전보고 누워서 자는 동안에도 옆집에는 목 없는 시체가 굴러다녔다는 이야기 아닌가. 생각할수록 끔찍하다.
요즘은 잠도 안 오고 밥맛도 없다. 당연하지, 이런 상황에서 즐겁고 유쾌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살인 사건 같은 건 알고 싶지 않았는데. 살해당했느니 머리가 없느니 하는 정보는 특히 듣고 싶지 않았다. 나흘 전 옆집에 형사들이 드나들기 시작하고, 아파트 주차장에 경찰차와 구경꾼이 가득해도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알려하지 않았다. 형사가 찾아와 지난 며칠 동안 밤에 무슨 소리들은 적 없느냐고 물었을 때도 왜 물어보냐고 되묻지 않았다.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났고 정황을 알게 되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은 예감에서였다. 나는 소심한 사람이다. 정말로 그렇다. 괜히 남의 일에 신경 곤두서고 싶지 않았다 특히 살인사건처럼 끔찍한 일이라면 더욱.
  모를 수도 있었는데! 모르고 넘어갈 수 있었는데! 그 놈의 인터넷만 아니었다면! 다음과 네이버가 메인에다가 '소설가 목 잘라진 변사체로 발견'이라는 기사를 며칠동안 걸어놓지 않았다면 정말 신경 안 쓰고 넘어갈 수 있었을 텐데. 호기심에 기사를 클릭 했다가 그게 옆집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이었음을 알았을 땐 이미 늦어있었다. 인터넷 웹진의 기사들은 서울 ○○동에서 목을 자르는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자극적인 문구를 시작으로 사건의 정황을 기분 나쁠 정도로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그것이 모두 내 머리에 각인된 다음에야 나는 그게 옆집에서 일어난 일이란 걸 알아차렸다. 아 씨발 놈의 다음과 네이버 사장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다.
  그 후로 며칠을 공포에 떨었다. 혹시 범인이 노리고 있는 다음 사람이 나 일까봐 밤마다 두려움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가 증인이거나 혹 증거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그래서 나를 죽이려 하면 어쩌지? 경찰에 보호요청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진짜 범인의 표적이 될까 봐 그럴 수도 없었다. 이사도 생각했다. 방 구하기만 쉬웠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내가 갚아야 할 할부금만 좀 적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아니, 살인 사건이 일어난 집의 옆집으로 이사 오려는 사람만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결국 이사도 못하고 경찰에 신고도 못하고 밤마다 무서워서 잠도 제대로 못 자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2.
  그때쯤 나는 비가 오거나 바람이 으스스하게 부는 날이 아니면 살인 사건은 생각나지 않을 만큼 둔감해져 있었다. 동사무소에 출근하고, 집에 돌아오고, 저녁을 먹고, 자고, 그렇게 하루를 밀어내면 다른 하루가 흘러왔다. 시간은 같은 속도로 흘러와 같은 속도로 흘러갔다.
  살인 사건에서 한 달이 지난 어느 토요일이었다. 비디오를 빌리러 대여점에 갔는데, 점원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내가 무슨 책을 빌려가서 한달 째 반납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럴 리가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나는 한번도 반납기한을 어긴 적이 없었고, 책 같은 건 빌리지 않았다. 나는 책을 읽지 않는다. 일하고 놀기도 바빠 죽겠는데 웬 독서? 점원이 내가 한달 전에 책을, 그것도 버지니아 울프의 책을 빌려갔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
  “난 버지니아 울프가 누군지도 몰라요."
  누군지는 안다. 여자 소설가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때는 모른 척 했다. 사실 모르는 것과 다름없었다. 여자 소설가라는 것 이외엔 아무 것도 몰랐으니까.
  “이상하네, 319호 ●●●씨 아니세요?"
  “320호인데요."
  “아, 죄송합니다. 다른 분으로 착각했습니다."
  점원이 무엇 때문에 나와 319호의 남자를 착각했는지 모를 일이다. 그것이 신의 뜻이거나 운명의 장난이었다고 해도, 여전히 모를 일이다. 모를 일은 모를 일이다. 모를 일인 것이다. 점원은 나와 모니터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319호가 어째 낯익다 했더니 그 소설가 죽은 아파트였구나."
  '소설가가 죽은 아파트' 부분에서 내 등엔 소름이 돋았다. 그 소름은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눈치 없고 멍청하고 호기심만 많은 점원이 계속해서 319호의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이다. 어려운 영화와 책만 빌려가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비명횡사했다, 남자의 시체가 실려나가는 걸 봤는데 흰 천이 덮인 실루엣을 보니 진짜 목이 없었다, 여전히 수사는 오리무중이라던데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 혹시 옆집에 가봤는가, 옆집 남자와 친했는가, 죽기 전 마지막 모습을 봤는가 등을 물었다. 하루종일 가게에서 빈둥거리기나 하는 비디오 가게 점원이 살인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그리 잘 알고 있는지 놀라울 뿐이었다. 역겹기 짝이 없는 녀석, 왜 그런 거에 관심을 가진 담. 주말 밤이면 인터넷으로 스너프 동영상 같은 거나 보는 녀석이겠지.
  녀석은 이렇게까지 말했다.
  "혹시 그 집 들어갈 일 있으면 버지니아 울프 책 있는지 좀 봐주세요."
  "댁이 직접 가요."
  나는 딱 잘라 말하고는, 내가 빌린 하소연의 에로 비디오 두 개를 휙 집어들고 대여점을 나왔다. 따뜻한 여름 바람이 이마를 쓸고 갔지만 등줄기의 소름은 내려가지 않았다. 조용한 복도와 혼자 탄 엘리베이터를 지나 집으로 가는 동안에도, 이제는 비어있을 319호의 문을 바라보다가 내 집으로 들어가는 동안에도 소름은 가라앉지 않았다. 간신히 잊었는데 그 점원 때문에, 쳇.
  버지니아 울프라니, 도대체.



  3.
  비디오 가게 점원이 살인 사건에 대해 왜 잘 알고 있는가는 나중에 알았다. 정보의 출처는 인터넷이었다. 다음과 네이버 뉴스 살인사건 기사 페이지의 코멘트엔 살인 사건에 대한 모든 정보가 있었다.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가 아니라 자극적인 정보의 바다였다. 더 자극적인 정보만이 표면에 올라갈 수 있었다. 머리가 잘려진 소설가 살인 사건은 안성맞춤으로 자극적인 정보였다.
  319호에 사는 남자는 소설가였다. 책도 두어 권 냈다고 했다. 어느 날 목이 잘린 채로 살해됐고, 연락이 두절된 것을 이상하게 여긴 가족이 시체를 발견했다. 목은 찾지 못했다. 범인도 찾지 못했다. 특별한 원한 관계에 의한 살인은 아니었다. 없어진 물건이 없는 걸로 봐선 강도가 저지른 일도 아니었다. 없어진 물건이 없는 건 아니다, 목이 없어졌으니까…… 하지만 경찰은 사람 목을 탐낼만한 범죄동기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사건은 오리무중이었다. 소설가의 글을 좋아하던 사람들은 (그다지 많은 숫자는 아니었으나) 코멘트에서 열성적으로 정보를 주고받았다. 그들의 코멘트를 통해 나는 소설가의 싸이월드 미니 홈페이지 주소까지 알 수 있었다.
  그때쯤 돼서 나는 공포를 잊고 호기심을 따라가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홈페이지의 방명록을 훑어보고 있었다. 내가 미쳤구나,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내 호기심은 너무나 강렬하게 내 이성을 자극했다. 호기심이 주는 스릴은 하소연의 비디오보다도 더 짜릿했다.
  홈페이지에는 작가의 죽음을 추모하는 조문객들이 웅성거렸다. 천국에서 행복하세요, 범인이 꼭 잡히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등등의 인사가 모든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작가가 홈페이지에 남긴 글을 조용히 읽었다. 마우스 클릭 하는 소리가 방에 유난히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글은 대부분 지루했고 딱딱했다. 딱딱했던 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창작의 고통, 문학의 근원, 예술의 존재 이유 등등이 그의 글 주제였다. 나는 그것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저 딱딱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지루했던 건 작가의 감정에 내 감정을 이입할 수 없어서였다. 작가는 무슨 고민이 그렇게 많은지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짜증이 나서 나라도 작가를 죽이고 싶을 정도였다. 그 살인범이 독자 중 한 명일지도 모르겠군, 나는 혼자 중얼거리고는 혼자 킬킬 웃었다.
하지만 작가의 고통은 진짜였다. 내가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없을진 몰라도, 작가는 정말 그 고통을 겪었다. 자신의 글을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고통, 돈을 벌지 못하는 괴로움,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자학, 그런 이야기가 얼마나 구구절절 하던지 나중엔 측은한 마음이 생겼다. 그렇게 굶고 살 거면 아르바이트를 하지, 꼭 글만 써서 돈을 벌어야 하나, 그게 무슨 고생이람. 나는 웃었던 것이 미안했다.
  모든 글이 다 지루했던 건 아니었다. 재밌는 것도 있었다. 작가는 마지막으로 단편을 하나 남기고 죽었는데, 유작이라는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이상하게 그 작품은 재미있었다. 그건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제목은 '구멍'이었다.

  남자가 있다. 남자는 소설가다. 소설가는 낡은 아파트에 살며 팔리지 않는 글을 쓴다. 소설가는 늘 배고프고 외롭다. 어느 날 베란다의 화분을 실내로 옮기던 작가는 구멍을 하나 발견한다. 사람 머리가 간신히 들어갈 크기의 구멍이 베란다 바닥에 있었다. 소설가는 구멍을 들여다보지만 속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긴 나무 막대기로 안을 휘저어보지만 막대기는 벽도 바닥도 만나지 않았다. 허공에 있는 베란다 바닥에 난 구멍에 어떻게 밑이 없단 말인가? 그는 막대기를 떨어뜨리고, 여전히 막대기가 바닥에 닿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 구멍은 모든 것을 삼키는 구멍이었다. 그는 공포에 질린다.

  "재미있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의 다른 글과 달리 ꡐ구멍ꡑ은 장르문학을 읽는 쾌감 같은 것이 있었다. 모호한 결말의 도시 괴담들과 비슷하다고 할까. 그 모호한 결말 때문인지 글에는 많은 코멘트가 달려 있었다. 코멘트에서 사람들은 이 결말이 완성된 결말인지, 작가가 불의의 사고로 죽는 바람에 제대로 마무리짓지 못해 모호해진 결말인지를 토론하고 있었다. 나는 완성된 글이라도 상관없었고 미완성된 글이라도 상관없었다. 그냥 무섭게 끝나도 재밌었고, 미완성이라면 그 뒤의 이야기를 상상하는 재미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코멘트를 남겼다. 재밌네요. 좋은 글 읽었습니다. 작가 분의 명복을 빕니다. 범인도 빨리 잡혔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한참을 더 홈페이지에 머물면서 글을 읽었는데, 흥미로운 글도 몇 개 읽었다. 몇몇 사람이 작가가 살해된 것이 아니라 자살한 것이 아니냐고 주장한 것이다. 작가의 글엔 자살이 강박적으로 등장하고, 작가가 죽인 범인의 증거물을 하나도 찾을 수 없고, 작가를 죽일 범행 동기 역시 찾을 수 없다는 점이 주장의 근거였다. 하지만 백번 양보한다고 해도 작가가 자살했다는 주장에는 허점이 많았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자기 목을 잘라서 자살한단 말인가? 그것도 목이 어디 있는지 찾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자살은 아니겠지, 나는 생각했다. 홈페이지의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4.
  사흘 후, 하소연의 영화를 대여점에 돌려주던 때였다. 점원은 가게에 들어오는 나를 보자마자 버지니아 울프 책을 가져왔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것도 비디오 테잎을 고르고 있던 다른 손님들이 다 돌아볼 정도로 크게 말이다.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어. 짜증나는 녀석이었다. 옆에서 저녁식사로 짜장면을 먹고 있던 주인까지 가세해서 떠들어대는 바람에 짜증은 배로 치솟았다. 두 사람은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면서 흥분하느라 내 비디오를 반납 받을 생각도 않았다. 내가 빌린 에로 비디오를 다른 사람들이 힐끔거리는 통에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주인은 도둑이 버지니아 울프의 책에 머리를 받쳐서 가져간 모양이라며 단무지가 입에서 튀어나오도록 웃었다. 주인장의 무례한 농담에 나는 치를 떨었다. 농담할게 따로 있지 죽은 사람을 갖고 농담하다니.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동안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집은 어떻게 됐을까? 텅 비어있을까? 누가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사람이 사는 기척이 없었으니까. 가끔 친척인 듯한 사람이 오가는 것 같긴 했다. 하지만 이제는 경찰도 찾아오질 않았다. 집은 비어있을까? 버지니아 울프의 책도 그럴까?
  호기심은 사람을 왜 그리도 무모하게 만드는지, 나는 어느새 소설가의 집 앞에 있었다. 복도를 걸어가는 이웃이라도 있었으면 들어갈 엄두를 못 냈을 텐데, 그런 사람도 없었다. 문이라도 잠겨있으면 단념할 텐데 어찌 된 일인지 문까지 열려있었다. 들어갔다가 누구에게 들키면 어쩌지, 손잡이를 천천히 돌리며 나는 침을 삼켰다. 그러면 버지니아 울프의 책을 찾으러 왔다고 변명할까. 그렇지만 그 따위 변명을 누가 믿는단 말인가. 한심했다. 내 평생 가장 무모하고 한심한 사람이 되어 나는 집으로 들어갔다.
  집은 어둡고, 공기는 말라있고, 바닥은 먼지로 껄끄러웠다. 내 집과 똑같은 구조의 아파트인데 이 곳은 내 집과 달리, 살인 사건이 일어났고, 버려졌고, 공포가 벽과 천장에 묻어있다는 사실이 기묘했다. 바닥에 흰 페인트로 사람 모양이 그려진걸 보고 나는 더 조심스럽게 숨을 쉬었다. 흰 페인트 사람은 머리가 없었다. 그건 정말 무서웠다. 집에는 핏자국도 없고 어질러진 물건도 없었다. 그건 그냥 외로운 남자가 혼자 사는 쓸쓸한 집이었는데, 목 없는 시체가 더해지면서 공포와 살육이 집이 되었다. 범인이 빨리 잡히기를.
  그때 내 시선은 베란다로 향했는데, 버지니아 울프의 책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빌리긴 빌렸군. 책 위에는 마른 먼지들이 얇게 쌓여있었다. 한달 넘게 베란다를 굴려다녔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베란다 위에 있을까? 나는 베란다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모든 일이 빠르게 진행됐다. 복도에서 발걸음 소리가 난 것이다. 이 집을 향해 걸어오는 소리였다. 허둥대던 나는 황급히 책을 집었다. 누가 들어와 왜 여기 있냐고 물어보면   책을 찾으러 왔다고 대답하기 위해서였다. 그게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판단이었다.
  모든 일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책을 집는 순간 책 밑에 있던 구멍 하나를 보았다. 그건 검고, 언뜻 보았지만 밑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은 듯 했고, 사람 머리가 하나 들어갈까 말까 할 정도 크기의 크다면 큰 구멍이었다. 그 구멍을 살펴볼 틈은 없었다. 그대로 거실을 가로질러 아파트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발걸음 소리도 갑자기 사라져서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집으로 들어갔다. 버지니아 울프의 책을 손에 든 채. 다시 소설가의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못했다. 나는 그렇게 간이 크지 않다. 나는 소심한 사람이다. 정말로 그렇다.




  5.
  그 책은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대표작이라는데, 죽은 소설가의 글만큼이나 딱딱하고 재미없는 글이었다. 역자는 버지니아 울프의 글에 대단히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추켜세웠지만 나로서는 지루할 뿐이었다.
  그래도 책을 읽어보길 (혹은 훔쳐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책 안에서 종이 한 장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낡은 A4 종이였는데, 개발새발 글자가 써있었다. 그런 악필은 생전 처음이었다. 당연히 그냥 낙서인줄 알았다. 하지만 찬찬히 읽어보니 소설이었다. 그것도 소설가의 유작 '구멍'의 뒷부분이었다! 구멍은 모호한 결말의 소설이 아니라, 미완성 작이었다. 깜짝 놀라 열심히 글을 읽었다. 힘들었다. 말했다시피 그런 악필은 처음이었으니까. 작가가 자기 글씨를 알아보기나 했는지 의심스러웠다. 낑낑대면서 읽은 ꡐ구멍ꡑ의 뒷부분은 이런 내용이었다.

  남자는 구멍에 넣었던 막대기가 거실을 걸어 다니는 것을 본다. 남자는 까무러칠뻔 하다가 곧 이성을 되찾는다. 그는 막대기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막대기는 구멍 속이 이 현실 세계와 다른 비현실의 세계이며, 그곳에서는 자신도 무생물 막대기가 아닌 생각할 수 있는 존재라고 설명했다. 비현실의 세계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했다. 막대기가 구멍으로 돌아가자 소설가는 구멍에 머리를 넣어 안을 들여다본다. 그곳은 무엇이든 가능한 세계였다. 소설가는 자신이 생각한 문장들이 머리를 빠져 나와 허공을 춤추며 생명력을 얻은 다음 그것이 또 다른 세계를 만드는 광경을 본다. 그건 소설가가 꿈꾸던 것이었다. 남자는 현실 세계에 있는 배가 주는 엄청난 배고픔을 느낀다. 그건 소설가가 꿈꾸던 것이 아니었다. 소설가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목을 걸친 채 고민한다. 결국 소설가는 몸에서 머리를 분리해내 구멍 속의 세상으로 떠난다.


  희한한 결말이면서도… 오싹했다. 실제로 작가의 죽음과 비슷했으니까. 작가는 머리가 잘린 채 죽었다. 그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이런 글을 썼던 것일까? 아니면 이 휘갈겨 쓴 종이는 작가를 죽인 살인범이 쓴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작가의 필체를 모른다 그냥 추측했을 뿐. 거기에 생각이 미치니 더 오싹했다.
  오싹한 기분은 그때까지였다. 그 후로는 모든 일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모든 일이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 책 좀 돌려주실래요?"
  나 밖에 없어야 할 집에서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나는 바람에 나는 깜짝 놀랐다. 고개를 돌리니 침대 위에 낯선 사람이 있었다. 아니 낯선 사람의 목이 있었다. 낯선 사람의 목이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목은 말했다.
  "그 책 좀 돌려주실래요? 아직 다 못 읽었거든요."



  소설가의 목은 콩콩 마루를 뛰어, 문을 밀어 열고 복도로 나갔다. 그의 목만이 살아 움직이는 걸 보는 경험은 기괴했다. 나는 내가 어째서 기절하지 않는 건지 신기했다.
  "문이 안 잠겨 있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소설가는 복도를 콩콩 뛰며 말했다. 나는 조용히 버지니아 울프의 책을 들고 뒤를 따라갔다. 소설가는 319호 앞에 멈췄고, 나는 그를 위해 문을 열어주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나는 낮에 호기심에 들어갔다가 이제는 집 주인의 초대를 받아 돌아오게 된 집에 들어갔다. 새벽의 아파트는 빛의 농도만 다를 뿐인데도 훨씬 쓸쓸해 보였다.
  소설가는 구멍 앞에서 말했다.
  "안에 넣으시면 돼요."
  그래서 나는 구멍에 '자기만의 방'을 쑤셔 넣었다. 어둠이 책을 덮었다. 책이 바닥에 닿는 소리는 (정말로) 들리지 않았다.
  소설가의 목은 감사를 표했다.
  "책을 다 못 읽었거든요. 그래서 다시 나와서 구멍으로 가지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구멍보다 책이 크더라고요. 손이 없으니 말아서 넣을 수가 없고 해서 나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책을 넣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머리를 집어넣기 전에 책을 먼저 넣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텐데, 귀찮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 구멍은 실제로 존재했군요."
  "네?"
  소설가의 목은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말했다.
  "소설에 나온 구멍이 현실에도 실제로 존재하는 게 신기해서요.."
  "네. 베란다에서 화분을 옮기다가 이 구멍을 봤습니다. 처음엔 무서웠는데 막대기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무섭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머리를 넣어보게 됐죠."
  "구멍에 들어갔다 나올 수도 있습니까?"
  "마음만 먹는다면. 저 책도 안에서 생명을 얻어 이 곳으로 다시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제 소설의 주인공들이 구멍에서 튀어나올 수도 있으니 조심하세요."
  소설가의 목은 웃었다.
  "더 궁금한 건 없으십니까?"
  "음…… 왜 머리만 살아 있고 나머지 부분이 없는지가 궁금한데요."
  "그건 글에 쓴 그대로예요."
  그러니까 소설가는 정말 구멍에 머리를 집어넣었고, 머리를 몸에서 떼어냈다. 그래서 목 없는 시체만 이 외로운 집에 남았고, 옆집에 살던 나는 일어난 적 없는 살인사건을 두려워하며 벌벌 떨었다.
  "제 말은 어떻게 그렇게 됐냐는 게 아니라 '왜' 그러셨는지가 궁금해서요."
  "그것도 글에 나와있어요."
  "읽긴 했지만 잘 모르겠어서……"
  나는 더듬더듬 말했다.
  "글을 재밌게 읽긴 했는데…… 잘 모르겠어요…… 작가 분이 힘든 건 알겠는데…… 그걸 이해할 순 없어서…… 그래서…… 힘들고 외롭다는 건 알겠는데…… 저도 가끔 그러니까요……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한 것처럼…… 그 여자가 자살한 것 맞죠…… '자기만의 방'을 다 읽진 못하고 앞에 조금이랑 해설을 읽었거든요…… 거기에서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했다고…… 그 여자도 작가님처럼 힘들 것이고…… 물론 저 구멍이 구멍이 아니라 다른 세상으로 가는 통로로 느껴졌다고 글에 써있긴 한데…… 하지만 저런 무서운 구멍에 들어갈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왜 자살했는지 이해할 순 없었어요…… 고통을 겪었다는 건 아는데……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세상과 더 의사소통을 해보려고 할 수도 있었잖아요…… 그걸 알긴 알겠는데 이해할 순 없었습니다…… 작가님을 비난하려는 뜻이 아니라……"
  나는 말을 어떻게 마무리지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얼버무리고 말았다.
  "이 세상에 다른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존재한다는 건 슬픈 일이에요."
  소설가의 목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한동안 나를 올려다보기만 하다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글 잘 읽었다는 코멘트 다셨죠? 그 코멘트 무척 고마웠습니다.'
  그는 구멍으로 들어갔고 그것으로 마지막이었다.



  6.
  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시간은 같은 속도로 흘러와 같은 속도로 흘러갔다. 동사무소에 출근하고, 집에 돌아오고, 저녁을 먹고, 자고, 그렇게 하루를 밀어내면 다른 하루가 흘러왔다. 그렇게 얼마가 지나서였다.
  한 밤중 하소연의 비디오를 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뭔가 어깨를 쳤다. 집에 혼자 있는데 누가 건드리는 바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돌아보니 웬 나무 막대기가 내 어깨를 치고 있었다.
  어깨를 친 막대기는 총총 걸음으로 마루를 걸어갔다. 막대기와 함께 서있던 사람은 나에게 다가왔다. 버지니아 울프였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을 들고있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책을 주며 말했다.
  "만약 우리가 백년정도를 더 산다면, 그리고 우리 각각에게 일년에 500파운드의 돈과 자기만의 방이 주어진다면, 만약 우리가 자유를 습관화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바를 정확하게 그대로 글로 쓰는 용기를 지녔다면, 무엇이든 그 자체로서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가 있다면, 인간은 누구나 문을 닫고 앉아 현실속의 광경을 외면해서는 안 되는 만큼 만일 우리가 밀튼의 유령을 넘어서서 사물을 볼 수가 있다면, 만일 우리가 사실을 직시하고, 힘들 때 의지할 대상이 없음을 깨닫고, 궁극적으로 혼자서 현실에 대처해야 하며 현실세계와 우리의 관계가 중요함을 인식한다면, 그러기만 하면 셰익스피어의 누이는 그녀가 그토록 자주 포기하고 버렸던 그녀의 육신을 다시 입고 우리 앞에 그녀의 모습을 드러낼 날이 언젠가는 반드시 올 것임을 나는 믿습니다. 그녀의 오빠가 그랬듯이 그녀의 이름 모를 조상들의 삶에서 생명을 이어 받아 그녀는 태어날 것입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말을 끝냈다.
  나는 그녀에게서 책을 받았다. 얼마 전 구멍에 넣어준, 먼지 쌓인 그대로였다. 이걸 어쩌라는 걸까, 대여점에 돌려주라는 걸까. 아마도 그렇겠지, 소설가의 목이나 막대기가 갖다 줄 순 없으니까. 나는 버지니아 울프에게 물어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버지니아 울프는 없었다.






- 끝-


'자기만의 방' 인용 부분 출처는
http://www.drama21c.net/cyber/karticles/woolf0k.htm
이며 원본과 미묘하게 차이가 있습니다. (패러디 했습니다)
mirror
댓글 2
분류 제목 날짜
jxk160 왕의 행방1 2005.08.26
정대영 판타스틱 입맞춤2 2005.07.30
초청 단편 변덕 2005.07.30
곽재식 하얀 이빨 (본문 삭제)16 2005.07.30
미로냥 Moonshiny lamp 2005.07.30
초청 단편 착시현상3 2005.06.25
갈원경 안개의 성 - 본문 삭제 - 2005.06.25
jxk160 성장소설 -본문삭제- 2005.06.25
김이환 버지니아 울프 가라사대2 2005.06.25
초청 단편 당신의 뇌, 당신의 유전자1 2005.05.28
bluewind 어떤 미운 오리 새끼의 죽음 2005.05.28
가는달 그들은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다 2005.05.28
crazyjam Jumping Child 2005.05.28
미로냥 꽃, 열매2 2005.05.28
갈원경 매미의 노래 - 본문 삭제 -3 2005.05.28
초청 단편 모든 우연에 관한 변증법 - 우주 복고 로맨스 2005.04.29
김수륜 투명한 뱀 - 본문 삭제 -1 2005.04.29
pena 가지 못한 길3 2005.04.29
아밀 송신 - 본문 삭제 - 2005.04.29
갈원경 나무각시의 꿈 - 본문 삭제 -1 2005.04.29
Prev 1 ... 41 42 43 44 45 46 47 48 49 50 ... 52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