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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azyjam 낮과 밤만 있는 세계

2004.02.27 22:5702.27

  빵을 사들고 나오는 길이었다. 무심코 시선이 간 낮은 관목 그늘 아래에서 무언가 움직이고 있었다. 조그맣고 지저분한 회색 털 뭉치. 자세히 볼 틈도 없이 그것은 나의 존재를 눈치챈 듯 몸을 긴장시키더니 다음 순간 날쌔게 관목 아래로 사라져버렸다.
  쥐였다. 여기에 와서는 처음 보는.
  이 곳은 만들어진지 한 세기 가까이 지난 낡은 콜로니다. 쥐가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도 없는, 오히려 쥐가 있는 것이 당연하게 보일 정도로 빛 바랜 곳이다. 그러나 지구에서 콜로니로 오는 셔틀의 복잡한 세관절차를 어떻게 피해 이 곳에서 살게 된 것일까.



  내가 살고 있는 이 곳은 아주 작은 세계다. 낡아버려 한 달에 단 하루만 입장이 허가되는 관람 탑이 하나 있고, 라디오 지역 방송국이 하나, 고만고만한 건물과 상점이 몇 개. 본디도 차를 타고 한바퀴 빙 도는데 한 시간도 채 안 걸리는 정말 작은 곳이었으나 이제는 대부분의 구역이 폐쇄되어 정말로 아주 작은 세계가 되어버렸다.
  지구 연합은 92년 전에 타 행성 개발을 위한 포석으로서 달 궤도 안쪽으로 첫 민간인 거주 콜로니 네 개를 건설했다. 지금은 32개로 불어나 버린 거주 콜로니 중에서도 내가 살고 있는 곳은 가장 최초로 지어진 네 개 중의 하나다.
  나는 이곳에서 아주 작은 카페를 하고 있다. 이 콜로니 내에서는 몇 개 되지 않는 카페지만, 지역 라디오 방송국의 근처에 위치한 곳이라 손님이 아주 없을 정도는 아니다. 느지막히 일어나 가게 안을 청소하고, 가게문을 열어 Open 패널을 내걸고, 카운터에 앉아서 지역 라디오 방송을 켜고, 이따금씩 들르는 손님을 기다리며 온종일 책이나 읽는 것이 일과다. 손님들 대부분은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 라디오 방송을 듣게 되는 것이 지겹다며 질색을 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그런 사소한 불평은 웃어 넘기고 만다. 어차피 나는 음악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까.
  처음 이 곳으로 오려고 결정했을 때 친구들은 모두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니냐는 소리도 들었다. 그들이 옳을 지도 모른다. 그 아이가 죽고 난 이후로 나는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닐까.



  저녁 일곱시가 되면 늘 들르는 손님이 있다. 매일같이 들르는 것이나, 늘 비슷한 시간에 오는 것으로 보아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이겠지. 늘 동행 없이 혼자 찾아온다는 점이나, 이 낡은 콜로니와 어울리지 않는  요란한 차림이라는 것 이외에도 독특한 면이 있다. 가게의 전 주인에게서 다른 집기와 함께 인수한 낡은 메뉴판에 적힌 몇 개 되지 않는 커피들을, 매일 위에서부터 하나씩 내려가며 주문하고, 가장 마지막에 적힌 아이리쉬 커피를 마시고 나면 다시 제일 위의 브랜드 커피부터 다시 마셔 내려오기 시작한다. 그가 매일같이 일곱시에 들르는 통에, 이제는 그가 도착하면 곧 밤이 되겠구나 라고 느끼게 되었다.
  처음으로 만들어진 네 개의 콜로니는 늘 태양광을 받는 방향으로 위치해있다. 아침 여섯시부터 저녁 여덟시까지는 태양광이 투명한 돔을 통과해 콜로니를 비추고, 저녁 여덟시가 되면 돔 위로 패널이 깔리기 시작한다. 패널은 콜로니의 밤 동안에 태양열을 받아 비축하고 낮 동안에 사용할 여분의 전기를 만든다. 밤이 되면 세 차례의 신호음과 함께 돔이 어두워지고 일제히 가로등이 들어오는 매일의 행사는 콜로니 건설 초기에 대단한 구경거리였다고 한다. 지금에 와서는 이 콜로니가 고전적인 방법으로 건설되었다는 것의 증명일 따름이지만.
  오늘 저녁에는 저녁 일곱시의 고정 손님 하나 뿐이었다. 여덟시가 되고 신호음이 들리자 그는 몹시 미간을 찌푸린 채로,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가로등에 일제히 불이 들어오는 것을 창을 통해 노려보고 있었다. 창 밖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그는 무엇에 화가 난 것인지 벌떡 일어나 카운터로 걸어왔다. 계산서를 받아들고 체크하는 내 얼굴 가까이로 그가 고개를 숙였다.

  "이 콜로니, 철거 결정된 것 알고 있어요?"

  깜짝 놀라 고개를 드는 나를 향해 그는 웃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씁쓸한 맛이 나는, 비웃음이 섞인 얼굴이었다. 예상치 못한 이야기로 입은 타격이 가라앉고 났을 때 이미 그는 사라진 후였다.



  빵을 고르는 동안 빵집 주인 러셀 씨는 내내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운을 띄워야 저 말수 적은 아저씨가 이야기를 시작할까를 고민하고 있는데, 결국 러셀 씨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소식 들었나?"
  "무슨 소식요?"
  "콜로니가 철거된다는 군. 아침 뉴스에 나왔는데 못 봤나?"

  러셀 씨는 늘 무뚝뚝했던 얼굴을 온통 근심으로 구기고 있었다. 보기좋게 다듬어진 갈색 콧수염 아래 감춰진 입술도 불안으로 비틀려 있겠지.

  "아… 예, 들었어요."
  "난데없이 철거라니. 이게 무슨 날벼락이람. 거주민들은 어떻게 하라는 거지? 자네는 어쩔 생각인가?"

  어쩔 생각인 거지, 나는? 무작정 이곳으로 건너올 때는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자신의 결정에 도움이 되어줄 만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러셀 씨를 향해 그저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봐야지요."

  빵집 모퉁이를 돌다가 낮은 관목 그늘로 시선이 갔다. 오늘은 쥐가 보이지 않았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어지고, 인류가 쉽(ship)을 물을 건너는 도구로만 사용했던 시기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배가 너무 낡아 상했거나, 난파될 것 같으면 쥐들이 가장 먼저 눈치채고 도망친다는 이야기. 쥐들은 콜로니가 철거될 것을 알고 있을까. 그들은 이곳에 찾아왔을 때처럼 세관의 눈을 피해서 무사히 다른 곳으로 도망칠 수 있을까.
  들고 있던 봉지에서 빵을 한 조각 잘라내어 처음 쥐를 보았던 낮은 관목 아래로 던졌다. 빵 조각은 관목 그늘에 조금 못 미쳐서 떨어졌다. 빵 조각은 갈색 빵 껍질에 둘러싸인 흰 속을 드러낸 채로 잔디 위에 구르고 있었다. 어쩌면, 쥐들은 이미 다 눈치채고 이곳에서 도망쳤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저 빵 조각은 저기서 말라비틀어져 있다가, 콜로니 철거 때 다른 쓰레기들과 함께 우주를…
  아! 쥐가 다른 관목 아래서 고개를 내밀었다. 잠시 눈치를 살피고 주위를 경계하던 쥐는 미리 점찍어두고 있었다는 듯이 곧장 빵 조각을 향해 달려왔다. 아직 떠나지 않고 남아있었구나. 어딘가 씁쓸한 안도감이 잠시 스쳤다.
  문득, 누군가가 이 모습을 본다면 몹시 이상하게 여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러셀 씨는 정성껏 막 구워낸 빵을, 쥐 같이 해악한 생물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보고 웃을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도 같이. 가게로 돌아가야겠다.



  이곳에서는 시간이 흐르는 것을 거의 느낄 수 없다. 매일같이 신호음과 함께 아침이 오고, 밤이 오지만 그 뿐이다. 계절의 변화가 없는 세계란 그런 것이다. 이런 곳에서 오래도록 살수 있다면 몹시 태평해지지 않을까.
  그렇게만 생각해 왔었는데, 콜로니의 거주민들은 급작스런 사건에 내 생각보다 빠르게 적응해나갔다. 철거가 발표된 지 고작 열흘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콜로니는 급속히 황폐해져가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문을 닫는 가게와 철수하는 회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 속에서 나만 아무 대책 없이 당황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철거 발표 하루 전에 왔었던 저녁 일곱시의 고정 손님은 그 날 이후로 한번도 들르지 않았다. 벌써 일곱시 반이니 그는 오늘도 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라디오에서는 앞으로 한달 뒤면 지역 라디오 방송국이 방송을 중단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매일같이 내보내고 있었다. 오랜 역사를 가진 우리 방송국이 한달 후에는 어쩌고저쩌고. 정말 슬프고 안타깝네요 운운. 아마도 그 손님 역시 라디오 방송국의 직원이 아닐까 싶었으니, 떠날 준비로 바쁘겠지. 그래도 여전히 들러주는 다른 손님들처럼, 그 역시 한번쯤은 다시 와주었으면 싶었다.
  신경이 쓰였다. 왜 철거 결정 소식을 미리 말해준 것인지 듣고 싶었고, 얼굴을 기억해두고 싶었다. 나는 이제까지 그의 얼굴을 한번도 똑바로 본 적이 없었다. 철거 발표 하루 전에 보았던 그의 얼굴은 '그 아이'와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나에게서 조언을 구하고 싶어했던 러셀 씨처럼, 나 역시 그 손님에게서 겹쳐지는 '그 아이'의 이미지로부터 조언을 구하고 싶었다.
  카페의 이전 주인이 매달아 놓았던 낡은 금속 종이 녹이 섞인 소리로 딸랑이고, 문이 열렸다. 문 쪽을 바라보니 놀랍게도 저녁 일곱시의 손님이 복잡한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그는 가게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카운터를 향해 곧장 걸어왔다.

  "얘기 좀 할 수 있어요?"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바에 걸터앉았다.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할까라는 고심이 얼굴에 다 드러나고 있는 그의 표정은 그 아이와 꼭 닮아 보였다. 성별도, 외모도 완전히 다른데도.
  내가 마시기 위해 막 뽑아낸 옅은 커피를 잔 두 개에 따라서 하나를 밀어주고 나자, 그가 오늘 마실 차례의 커피는 카푸치노였다는 것이 생각났다. 어깨를 잠시 으쓱 하고 카운터 안쪽의 자리에 앉자 그가 불쑥 입을 열었다.

  "나, 사실은 커피 안 좋아해요."
  "그러면 다른 걸로 줄까요? 뭐 마실래요?"
  "됐어요. 못 마시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십대 초반. 그 또래의 아이들은 다 저렇게 비슷해 보이는 걸까. 그 아이도 예전에 저런 표정을 지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가 민망해하지 않을 정도로 주의해가면서 그의 앞으로 설탕을 슬쩍 밀어주었다.

  "당신, 샤론 웨이드와 연인이었죠?"

  다시금 그의 불쑥 내던진 말에 나는 하마터면 커피잔을 놓칠 뻔했다. 그는 턱을 괸 채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요. 샤론을 알고 있나요?"
  "나는 그녀를 좋아했어요. 꼬박 이 년 동안이나."

  내 표정에서 무엇을 읽었는지, 그는 히죽 웃고는 곧 덧붙였다.

  "나, 그녀가 레즈비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당신의 연인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뭐, 결국은 짝사랑이라는 거죠."
  "…그랬군요."
  "그보다, 나 기억 못해요? 당신이 샤론과 같이 지구에서 하던 카페에 자주 갔었는데."

  나는 사람을 잘 기억도 못하는 편이고, 좀더 솔직해지자면 가게에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거의 관심이 없었다. 손님을 응대하는 쪽은 주로 샤론이었으니까. 대답이 없자 그는 두 손을 둥글게 구부려 자신의 눈가에 원을 만들어 보였다.

  "하긴 그때는 이만한 안경에 빨강머리였으니까요."
  "빨강?"

  되묻자 그는 멋쩍은 표정이 되어서는 자신의 검은 머리칼을 긁적여 보였다.

  "염색했어요. …샤론이 검은머리를 좋아한대서."

  그는 나의 검은머리를 턱짓으로 가리켜 보였다. 검은머리? 샤론은 나에게 그런 이야기 한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그는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미간을 찌푸렸다. 설탕은 계속 그의 잔 옆에 놓여있을 뿐이었다.

  "말이죠, 나 사실은 샤론과 몇 번 개인적으로 만난 적 있어요. 샤론은 별 생각이 없었겠지만 나로서는 그게 데이트 같은 거였죠. 한 번은 그녀에게 물은 적이 있었죠. 일곱 살이나 더 나이가 많은 여자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거냐고."

  그의 말에 난처해져 웃고 말았다. 그랬다. 샤론은 일곱 살이나 더 나이가 많은 여자인 내 어디가 좋았던 걸까.

  "샤론은, 당신이 커피를 끓이는 모습이 말할 수 없이 좋다는 거예요. 당신의 카페에 처음 아르바이트 신청을 하러 갔었을 때, 당신이 커피를 끓여주는 모습에 반해버렸다고 하더군요. 사실은 그전까지 그녀는 커피를 싫어했다고 했어요."

  샤론이 커피를 그리 즐기지는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커피를 끓이는 모습이 좋았다는 이야기 역시 나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는 내가 대답하지 않아도 별 상관없다는 듯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 매일 들렀던 거예요. 매일 커피를 주문하고, 커피를 끓이는 당신을 보면서 대체 어디가 좋았던 것일까 생각했죠. 어차피 이제는 샤론에게 더 물을 수 없으니까."

  일년 전, 그 아이는 집에서 카페로 나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즉사였다. 이제 그녀를 사랑했던 두 사람만 남아있고, 그녀는 없다. 뭐라고 말을 더 이어야 할지 몰라서 커피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그가 내 쪽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샤론이 죽은 건 물론 당신에게 엄청난 충격이었겠죠. 나 역시 놀랐고, 무척 슬퍼했으니까. 당신은 아마도 더 했겠죠. 그렇다고 해서 이런 곳으로 도망칠 필요가 있었나요?"

  그의 얼굴은 몹시 진지하고, 조금의 자극만 있어도 화를 낼 것 같은 표정이었다.

  "도망이라니… 나는…"

  조심스럽게 대답하는 내 말을 자르고 첫 번째 신호음이 콜로니 전체에 길게 울렸다. 여덟시가 되어 있었다. 일어나서 가게 안과 간판에 불을 켜고 다시 카운터 안쪽 자리에 앉았을 때는 두 번째 신호가 울리는 중이었다. 내 자리 앞에 놓인 커피는 거의 손도 안댄 채 식어 있었고, 그의 잔은 이미 비어있었다.

  "커피 한잔 더 줄까요?"

  약간 짓궂게 물은 내 질문에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 메이커에 물을 부어 스위치를 넣고 자리에 앉았을 때 세 번째 신호가 울렸다. 그는 의자를 돌려 내가 앉은 카운터 안쪽 자리에서 정면에 보이는 창문 쪽을 향했다. 그의 어깨에 한쪽 귀퉁이가 가려진 사각 창 너머로 하늘이 일제히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하늘이 반쯤 가려지고 나자 거리의 가로등들이 일제히 불을 피워 올렸다. 낮에서 단숨에 밤으로.
  콜로니가 완전히 밤이 된 이후에도 그는 의자를 되돌리지 않고 나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나, 오늘로 방송 계약이 끝나요."
  "방송?"

  그는 여전히 되돌아보지 않은 채로 어깨를 들썩이며 키득거렸다.

  "그래도 조금은 알아봐 주기를 바랬는데. 나 9시부터 11시까지의 음악 방송 DJ예요. 이렇게 보여도 꽤 유명인이라고요."
  "그래요?"

  방송국 직원이라고는 생각했었지만, 유명 DJ라. 내가 쿡 하고 웃어버렸을 때에야, 그는 의자를 돌렸다. 그는 바 위에 양팔을 올려 턱을 괴고 나를 마주보았다.

  "사실, 당신이 이곳으로 도망가버렸다는 얘기를 듣고, 억지로 계약일을 조정해서 이곳의 구닥다리 방송국으로 온 거라고요. 이쪽의 계약은 6개월뿐이었고, 콜로니 철거도 결정이 되어버렸으니 이제는 별수 없이 문 시티(Moon city)의 돔으로 끌려 가야죠."
  "끌려가는 사람치고는 즐거운 말투군요."
  "들켰나요? 이런 구석보다는 좀더 즐겁겠죠. 솔직히 이 콜로니는 좀 지루했거든요. 당신과 만나서 얘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으면 안 왔을 거예요."

  아하.
  그가 나보다 샤론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생겨난 울적함이 단숨에 사라졌다. 이 콜로니는 샤론의 고향이었다. 그 아이는 그녀의 부모가 그녀를 데리고 지구로 내려올 때까지 13년 간 이 콜로니에서 살았었다. 이야기 해줄까 말까.

  "지구로 돌아갈 건가요?"

  매일 일곱시의 고정손님인 DJ는 아무래도 돌발적인 질문이 특기인가 보다.

  "글쎄… 생각 중이에요."
  "어차피 이 콜로니는 철거될 건데, 계속 미적거리고 있을 수도 없잖아요. 도망이라는 것이 너무 길어져 익숙해져 버리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고요."

  그는 이십대 초반의 청년들만이 가질 수 있는,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지만, 지구로 돌아가면 다시 또 내내 그 아이가 생각날 것 같아…

  "문 시티, 가지 않을래요?"
  "문 시티에?"
  "카페는 어디서든 할 수 있는 거잖아요? 뭐, 문 시티는 동성애자에 대한 인식도 꽤 좋은 편이고…"

  그는 이제껏 해왔던 거침없는 말투와 다르게 말끝을 흐리며 무언가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뭐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커피 따위는 누가 끓이던 다 쓰기만 하니까, 기왕이면 커피를 끓이는 모습이 좋은 사람이 하는 카페에 계속 가고 싶다고요."
  "오, 그건 고마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나는 다이크*인걸."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요!"

  그는 버럭 화를 내었다. 그리고 이내 우리는 함께 큰 소리를 내어 웃었다. 다 끓은 커피를 그의 잔에 새로 부어줄 때까지 그는 내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오늘 밤 안에 결정을 해보도록 하죠."
  "그래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너머로 보이는 창 밖에는 가로등불이 빛나고 있었다. 하늘은 패널로 덮여 별 같은 건 일년 내내 볼 수가 없다.
  나는 이 콜로니의 최후와 함께, 일곱 살이나 어렸던 이제는 죽어버린 연인을 잊어버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마도 내일 그에게로 전화를 해서, 별을 볼 수 있는 문 시티로 가겠다고 대답할 것이다.
  어쩌면… 어쩌면, 쥐들은 이곳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남아서, 철거용 폭탄이 설치되고, 폭발하는 순간까지 콜로니를 지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nd.

* Dyke: 레즈비언의 속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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