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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wk.com이번 호부터 드림워커 (http://www.drwk.com/) 단편란과 거울 초청 단편란을 연계하기로 했습니다.
드림워커는 작년 꿈의 신발이라는 자체 제작 단편집을 출간하였으며, 많은 출판 작가가 활동하고 있는 사이트입니다.

드림워커에서는 매달 추천 단편을 뽑습니다. 24호부터 그 단편을 거울 초청단편란에 게재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시작으로 <드림워커 첫 번째 춘계응모>에서 우수상을 수상하신 니힐님의 단편 “당신의 뇌, 당신의 유전자”를 게재하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니힐님께 우수상 수상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리며 드림워커 운영진 여러분, 사이에서 수고해주신 은림님께 감사하다는 말씀드립니다.

이 일을 시작으로 드림워커와 거울 양 사이트가 서로 도움이 되고 더욱 발전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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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뇌, 당신의 유전자

니힐 (nihil)



  “끄으…”

  입술을 깨물었지만 신음은 괴상하게 일그러지며 새어나왔다. 다리에 힘이 빠져 무릎을 꿇고, 왼손은 이미 반사적으로 가슴을 누르고 있다. 나는 손을 떨며 오른쪽 주머니에서 전기충격기를 꺼냈다.

  딸깍. 딸깍딸깍.

  스위치를 켜는 손끝이 여러 갈래로 겹쳐보였다. 겨우 심장 위로 전기충격기를 갖다 대자 내 몸은 싸구려 디젤엔진차 뒷좌석에 앉혀진 인형처럼 펄쩍 요동쳤다.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눈앞에 별이 왔다 갔다 하는 이런 기분은 정말 지긋지긋하다.

  하아. 나는 겨우 숨을 내쉬었다. 심장박동은 아직은 멈추지 않았다. 하아. 아직 나는 괜찮다. 이렇게 위기신호가 온다는 건 아직은 내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맥박이 점차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긴장과 공포는 뒷걸음질치고, 뭔가 한심스럽고 나른한 기분이 다가오는 순간. 나는 전기충격기를 껐다.

  안녕, 빌어먹을 심장발작. 아직은 내가 이겼어.

  언제까지 이기느냐가 문제지만. 나는 전기충격기를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먼지와 구김 범벅이 된 경비원 제복 바지를 털었다. 몇 년 전 심장이 고장 나고부터 제일 곤혹스러운 때가 바로 이런 순간이다. 좀 중요한 일이 있다싶으면 꼭 이놈의 발작 때문에 시선을 끈단 말이지. 나는 담배를 꺼내는 척 하며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며칠째 비를 퍼부어대고도 잔뜩 낀 먹구름 탓인지, 낮인데도 지상 보행도로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운은 괜찮은 편이군.”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눈앞의 빌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이드 부]에선 4만 명의 시민들에게 물어본 결과 가장 가지고 싶은 것으로 지상형 아파트와 하딘 빌딩 이용권이 나란히 공동 1등을 차지했다고 했었지. 5티커만 내면 한 달 구료권이 나오는 [사이드 부]에서 무슨 돈으로 그런 조사를 했는지야 모를 일이지만, 어쨌거나 그 꿈의 하딘 빌딩 1층은 이름값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전체와 2층 반쯤을 터서 만든 이 넓고 멋진 로비라니. 웅장하다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규모, 세계적인 건축가 차오가 빚어낸 놀라운 설계, 일부러 녹을 낸 철골기둥들은 몇 년 전부터 유행하는 20세기 복고풍 건축을 거의 완벽하게 재현해내고 있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찾다가, 이 멋진 로비를 과시하기 위해 3층까진 에스컬레이터만 운행된다는 사실을 알고 욕을 뱉을 뻔 했다.

  “지상 3층 건강센터입니다. 브레인 클리너 센터, 서바이벌 3000, 칼라치 호르몬 클리닉, 킹 오브 필드, 헬스 앤 헬스를 이용하실 분께서는 지상 3층 건강센터에서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희 빌딩을 찾아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더욱 편안하고 즐거운 서비스를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지상 3층 건강센터입니다. 브레인 클리너 센터, 서바이벌 3000, 칼라치 호르몬 클리닉, 킹 오브 필드, 헬스 앤 헬스를 이용하실 분께서는 지상 3층 건강센터에서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서바이벌 3000에서는 개장 3주년을 맞아 6만 크레디트 이상 포인트가 쌓이신 고객 분들께 골드카드를 만들어드리고 있습니다. 서바이벌 3000 골드카드를 소지하신 고객께서는 더욱 다양한 시뮬레이션을 소개받으실 수 있으며, 한 달에 한 번 무료로 최신 시뮬레이션을 즐기실 수 있는 혜택을 누리실 수 있습니다. 지상 3층 건강센터입니다…”

  2층의 천장이 높은 로비 때문에, 3층으로 연결되는 에스컬레이터는 무척 길었다. 내 발이 3층 바닥에 안착할 때까지 안내방송은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단조로운 광고 문구조차 귀 기울이게 만드는 매력적인 목소리였다. 차분하고 매끄러운 어조, 정확한 발음, 풍부한 성량에서 느껴지는 안정감 있는 편안함. 그건 육감적인 몸매를 감싸는 부드러운 피부에 교양 있는 말씨를 쓰고 녹아내리는 눈웃음을 짓는 젊은 정부처럼, 누구나 꿈꾸는, 그러나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사치스러운 안락함을 대변하고 있었다.

  사치스러운 안락함… 그래, 그게 어떤 건지 궁금하다면 여기로 달려오면 될 거다. 하딘 빌딩 3층 건강센터 전체 휴게실로 말이다. 밝은 회색과 세련된 감색으로 꾸며진 벽과 천장은 신소재 강화벽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바닥은 푹신하게 묻히는 기억섬유 카펫이었다. 고감도 의자는 언뜻 보기에도 매끄럽고 안락해 보였다. 뿐인가, 시선이 갈만한 곳엔 빌딩 구조도와 안내등이 설치되어 있어, 사람들은 그 앞에서 턱을 문지르며 갈 곳을 찾고 있었다.

  “지상 3층 건강센터입니다. 브레인 클리너 센터, 서바이벌 3000, 칼라치 호르몬 클리닉, 킹 오브 필드, 헬스 앤 헬스를 이용하실 분께서는 지상 3층 건강센터에서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칼라치 호르몬 클리닉이 세계특허 수면요법으로 여러분의 고민을 해결해드립니다. 순수 호르몬으로 세포노화를 방지하는 DNA를 활성화시켜 언제나 싱싱한 성생활을…”

  이런 제길. 호화스럽고 섬세한 인테리어, 멋진 안내방송, 그 세련된 포장을 벗겨내면 우글우글 벌겋게 들끓고 있을 부자들의 과시욕. 이런 것들과 내가 손톱만큼이라도 상관이 있었다면 밸 꼴리는 표정이라도 지어줬을텐데.

  상관이 있을 리가 없지.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입고 있는 경비원 제복을 내려다봤다.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경비원 제복은 조금 작았기 때문에 약간 불편했고, 허리춤에 찬 전자곤봉은 초짜 웨이터의 손 마냥 제대로 처리를 못하고 어설프게 매달려있지만, 이 정도면 괜찮았다. 급하게 입은 데다 지상 보행도로에서 뒹군 것치곤 나쁘지 않은 편이지. 이 휴게실을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부자들이지 경호전문가나 경찰나부랭이가 아니니 사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제발 전자곤봉의 충격설정이 제대로 되어있고 심장이 앞으로 얼마간은 조용하기를. 아멘. 인샬라. 나무아미타불.

  3시 30분. 나는 초조하게 휴게실로 들어서는 사람들을 훑었다. 유행하는 금색 펄을 머리에 잔뜩 뿌린 여자들이 꽉 끼는 제복 아래서 두드러지는 내 어깨와 가슴을 짓궂은 시선으로 흩어 내리며 지나쳤다. 나는 그 시선을 무시하고 오른손을 허리에 찬 전자곤봉에 갖다 대면서-내가 생각해도 꽤 경비원 같은 동작이었다― 흘깃 안내등을 쳐다봤다.

  첨단장비와 시뮬레이션을 갖춘 헬스클럽, 서바이벌 게임장, 골프클럽의 위치를 가리키는 안내등에서 ?브레인 클리너 센터?가 현란하게 깜박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가 나타났다.

  현재시각 3시 40분. 예상보다 10분쯤 늦은 시각이다. 약간 지친 듯 한 인상에 편안한 슬리퍼를 끌고 천천히 걷고 있는 30대 초반의 남자. 하지만 이런 겉모습만 보고 남자를 얕잡아봤다간 재미없어질 거다. 뭐니 뭐니 해도 엔간한 부자가 아니면 발도 못 드미는 이 건강센터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나오는 부류니까. 직직 끌면서 나오는 슬리퍼도 자세히 보니 지압기능을 강화하고 가죽밑창을 댄 최고급품이었다… 제기랄.

  남자는 내 삐딱한 시선을 느끼지 못했는지 젖은 머리를 손으로 흩트리며 무심하게 빈자리를 찾고 있었다. 좋았어.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경비제복의 칼라를 끌어당겼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나는 긴장을 감추며, 천천히, 서두르지 않으려 애쓰면서 그에게 다가갔다. 자연스러운 게 최선이니까.

  “운동은 잘 되가십니까?”

  “아, 예. 그럭저럭 할 만합니다.”

  남자는 건성으로 대꾸하며 젖은 머리를 털다가 동작을 멈추고 나와 눈을 맞췄다. 남자의 눈동자는 좌로 우로 바쁘게 움직이면서 서서히 의아한 빛을 띠었다. 반응이 느린 편이군. 나는 느긋하게 씩 웃어보였다.

  “머리가 젖어있어서요. 헬스클럽에서 나오셨지요?”

  “네. 그렇습니다만…”

  남자는 말을 흐렸다. 이 정도면 상식적인 반응이다 못해 뻔하다고 할 수 있다. 분명히 이 남자 머릿속에선 ?절 아십니까??와 ?왜 갑자기 친한 척이요??가 목구멍까지 치솟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본심을 감추고, 진땀을 흘리며, 이렇게 말하는 거다.

  “…누구신지?”

  빙고. 나는 좋은 패를 감추는 도박꾼처럼 음흉하게 웃었다. 진짜 꾼들은 좋은 패가 나와도 얼굴색 하나 안 변하는 법이지만, 이 느린 남자한테는 좀 음흉한 속셈이 있는 것처럼 구는 게 좋겠지. 나는 오른손을 격의 없이 내밀며 말했다.

  “잠깐 얘기 좀 하실까요?”

  남자는 황망히 내 손을 잡고 악수를 나눴다. 나는 사람 좋게 웃어 보이며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남자는 불안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는데, 표정이나 폼이 꼭 인사부장 사무실에서 앉으라는 말을 들은 사람 꼴이었다. 꽤나 소심한 양반이군. 이렇게 불안해하면 얘기가 진전되질 않는데.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남자 옆 의자에 등을 기댔다. 고감도 의자가 등에 착 감겨왔다.

  “요새 날씨가 영 엉망이죠?”

  남자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미 이틀이나 비가 내렸는데도 하늘은 한바탕 퍼붓기 직전의 시커먼 배를 빵빵하게 부풀리고 있었다. 당분간 아무도 빌딩 밖으로 나오지 않을 거다. 그러나 휴게실 안은 더없이 안락하고, 깨끗하고 적절히 데워진 습도 낮은 공기에 휩싸여 있었다.

  “좋은 날씨 같진 않군요. 뭐, 그래도 별 상관없잖습니까.”

  사실 날씨가 삶에 별 영향을 주지 않는 이런 시대에 날씨 운운하면서 말을 걸거나 인사하는 건 좀 웃기는 일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요즘 나온 수면프로그램은 어떤가요??하면서 말을 걸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여기는 ?생체온도? 어쩌고 하면서 냉방에 너무 신경을 안 쓰는 거 같아요.”

  “따뜻한 건 몸에 좋고 서늘한 건 머리에 좋다잖습니까. 이 건물에서야 머리 쓸 일이 있나요. 헬스에, 골프에… 건강센터 아닙니까.”

  나는 남자의 말을 정정했다.

  “브레인 클리너도 머릴 안 쓰는 건 아니죠.”

  “그야 그렇지만, 얘기가 좀 다르지요.”

  나는 흐응하면서 인상을 약간 찌푸렸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머릴 쓰는 것 중에서도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자칫 잘못해서 사고라도 나면…”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이 만든 건데 문제가 없을 순 없죠. 그래도 사고확률이 3천만분의 일 정도라니… 그 정도면 굉장히 작은 수치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요. 확률은 낮아도 그 확률에 걸린 사람은… 아니, 제가 괜한 얘길 했군요.”

  “괜찮습니다.”

  남자는 성의 없이 웃더니 불쑥 물었다.

  “새로 오셨나보죠?”

  “그럴싸해 보입니까?”

  남자는 이런 식으로 반문할 줄 몰랐는지 잠시 주춤했다.

  “…아, 예. 경비제복이 잘 어울리시는군요.”

  “급하게 구한 것치곤 괜찮죠.”

  나는 시선을 창 쪽으로 돌렸다. 남자가 내 뺨이 따끔따끔해질 정도로 쳐다보기 시작했으니까. 불안, 의심, 경계. 남자의 시선 끝에 모두 묻어있었다. 나는 내심 애매하게 대꾸한 스스로의 화법에 찬사를 보내면서 말했다.

  “날씨가 장난 아닌데요. 여기서 오래 서 있다 보면 뭔가 붕 뜬 것 같은 기분이겠습니다. 바깥 날씨는 저렇게 컴컴하고 스산한데 이 안에선 그런 걸 전혀 느낄 수 없으니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말이죠.”

  “…뭐하자는 겁니까?”

  “얘기나 좀 하자는 겁니다, 커티스씨.”

  남자는 갑자기 얌전해졌다. 나는 웃지 않고 방금 전에 한 말을 똑같이 반복했다.

  “날씨가 장난 아닌데요. 여기서 오래 서 있다 보면 뭔가 붕 뜬 것 같은 기분이겠습니다. 바깥 날씨는 저렇게 컴컴하고 스산한데 이 안에선 그런 걸 전혀 느낄 수 없으니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말이죠.”

  “요즘엔 누구나 그렇죠.”

  나는 계속 하라는 듯이 거들었다.

  “그렇습니까?”

  “인공적인 환경 안에서의 심리적 공황이 어쩌고 난리들이지만, 딱히 이 시대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편리하고 쾌적하고 효율적인 환경을 원하는 건 인간 본능이나 마찬가진데… 그 부작용이 문제라고 난리치기 시작한 게 벌써 몇 세기 전이지만  지금도 도시엔 사람들이 버글버글하잖습니까.”

  남자는 침을 크게 한번 삼키더니, 양팔을 팔걸이에 걸쳐놓으며 덧붙였다.

  “사실 문제 없던 시대란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거야 맞는 말씀이지. 나는 입술 끝을 만지작거렸다. 자연스럽게, 객관적인 근거 없이 불만을 말하는 것처럼 말해나가야 한다. 얘기를 꺼내는 타이밍이란 건 의외로 중요한 문제니까.

  “옳은 말씀입니다만… 정도의 문제겠지요. 사람 사는 건물이란 건 사실 자연과 인간 사이에 놓인 다리 아닙니까. 근데 요새 건물들은 다리가 아니라 캡슐 같아요. 이 하딘 빌딩만 해도 그렇지요. 꼭꼭 들어앉혀놓고 안에서 다 해결하게 하면서 공기여과도 온도도 습도도 알아서 해주니. 비약인지 모르겠지만, 발전한 게 하나 없다 싶기도 하고요. 편리하면서도 자연친화적인 공간이 아니라 편리하자고 자연에서 도망치는 공간이 되어가니, 어떻게 보면 꼭 옛날 선사시대로 돌아간 것 같지 않아요? 이거야 비를 피해 동굴로 숨어드는 거랑 다를 게 없잖습니까.”

  남자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어보였다. 좀 전의 불안한 얼굴과는 전혀 다른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역시 저런 표정이 되는군. 표정만 보고도 지금이 어떤 상황이겠구나 짐작할 수 있는 묘하게 솔직한 얼굴들이 몇 있다. 상대한테 심리적으로 한 방 먹은 얼굴, 지루함을 억지로 숨기는 얼굴, 좋게 생각하던 상대가 아주 거슬리는 짓을 했을 때 저도 모르게 찌푸리는 얼굴, 또는 전문가가 자기 분야에 대해 일반인에게 설명할 때의 얼굴-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눈빛, 자신도 모르게 무시하는 미소를 짓고 있는 입술 같은 것 말이다. 분명 직업이 건축설계 쪽이라고 했었지.

  “무슨 소리십니까. 이건 획기적인 시스템이죠. 지금의 편리함과 안락함은 괜히 성취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교통수단이 지하로 숨겨진 덕분에 우리는 두 배의 효율성과 쾌적한 환경을 얻게 된 것이거든요. 지하에서 빌딩과 빌딩이 빈틈없이 연결되어 있는데도, 우리는 그에 아무 영향도 받지 않고 빌딩 사이의 숲과 공원과 운하를 즐기고 지상 보행도로를 마음껏 걸을 수 있지 않습니까? 지금의 도시는 1~2세기 전보다 훨씬 넓은 여유 공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환경의 질이 개선된 건 당연한 결과고 말입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세요. 도시가 발전하면서부터 항상 인구과잉과 그에 따른 열악한 환경이 문제였던 건데, 지금은 많은 인구를 수용하면서도 환경의 질과 여유 공간은 오히려 최고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꿈꾸던 효율성과 쾌적함의 극치지요. 실제로 파리지앵들이 라데팡스를 만들면서 이 방법을 실천하기 이전까지 사람들의 삶이란 자연에 너무 쉽게 영향을 받았거든요. 생각해보십쇼. 바짓단을 다 적신 채 사무실에 들어와 눅눅한 공기 속에서 일한다면 그 일이 제대로 되겠냐- 이 말씀입니다. 능률성을 잃는다면 현대사회는 시체에요. 전 세기의 생존전략이 적응이었다면, 지금은 창조- 인간에게 맞는 환경을 창조하는 겁니다.”

  모름지기 전문직업인은 자기분야 얘기가 나오면 수다스러워지고 경계심이 허물어지는 법. 나는 낮게 휘파람을 불며 감탄했다.

  “거창하시군요. 그렇지만 맞는 말이죠, 지금 시대가 인간에게 맞는 환경을 창조하는 시대라는 건.”

  나는 안내등에서 점멸하는 ?브레인 클리너 센터? 글자에 눈을 주며 덧붙였다.

  “인간에게 렘수면을 늘려주고 뇌를 상쾌하게 정리해주는 브레인 클리너 같은 사업이 성공하는 걸 보세요. 100년 전까지만 해도 기계 속에 머리를 디밀고 자기 뇌를 컴퓨터마냥 디스크 정리하는 건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설명해주는 식으로 말하면 안 된다. 사람들은 바보취급 당한다고 느끼니까. 단정적으로 말해서도 안 되지. 사람들은 명령받는 걸 싫어하니까. 남자가 말했다.

  “브레인 클리너를 싫어하시는군요.”

  “딱히 좋아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남자는 잠시 어디서 떨어진 골동품인가 하는 눈길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변명하듯 덧붙였다.

  “사람의 뇌처럼 복잡다단한 기관을 기계에 맡긴다는 게 영 꺼림칙합니다. 컴퓨터 인공지능이래 봤자 결국 1과 0으로 나뉜 부호에서 시작한 것 아닙니까. 그것들은 절대 인간의 머릿속에 있는 카오스를 이해하지도 읽어내지도 못해요.”

  “사람 뇌도 결국 신체기관과 호르몬과 연계해서 움직이는 거 아닙니까.”

  이래서 배운 티내는 인간들과는 얘기하기가 피곤하다니까. 나는 한 발 물러났다.

  “…뭐, 제가 싫어한다고 해서 브레인 클리너가 성공하는 데 지장 있었던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너도 나도 브레인 클리너를 찾아 대서 지점들마다 기계물량이 달린다고 난리라던데.”

  남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어보였다.

  “요즘은 진보를 강요하지 않죠. 그래도 사람들은 더 좋은 것을 귀신같이 알아냅니다.”

  남자는 경험자의 아량 같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적당한 관대함과 약간의 오만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남자는 자신이 대화의 주도권을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부드럽게 말했다.

  “일 문제로 심신이 피곤할 때 브레인 클리너로 머릿속 잡념을 말끔히 청소하면, 그것만큼 시원한 게 없어요.”

  “운 없이 머릿속 기억이 포맷되지만 않으면 그렇겠죠.”

  남자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빙고. 나는 일부러 남자의 시선을 피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미끼를 제대로 물었다. 물게 할 때까지도 어렵지만, 확실하게 걸려든 고기를 당기는 것도 만만찮은 일. 나는 남자의 다리 쪽으로 시선을 내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말 그대로 기억이 깡그리 날아가는 거죠. 깨끗이, 포맷.”

  나는 양손을 들어 올리며 남자와 눈을 맞췄다.

  “부스러기 하나 남지 않죠.”

  “그럴 리가?!”

  “쉿.”

  나는 입을 닫는 시늉을 하며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휴게실은 개미 한 마리 없이 조용했다.

  “여긴 우리밖에 없어요.”

  남자가 안심하라는 듯이 말했다.

  “설마?”

  “매달 첫째 주 수요일 4시부터 6시까진 2층부터 5층까지 시스템 점검시간이거든요. 그보다, 방금 그 얘기 정말입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죠?”

  “숱하게 일어나는 에러죠. 기계들의 특권.”

  “그런 일이 일어나는데 브레인 클리너가 저렇게 멀쩡할 리가…”

  나는 남자의 말을 잘랐다.

  “실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브레인 클리너의 보험회사에서 그 운 없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막대한 보상금을 쏟아 붓는지 알면 까무러칠걸요.”

  돈이 누구보다 믿을만한 증인이다. 이제야 남자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그게 어떻게 보상이 됩니까? 기억을 지운다는 건, 살인입니다!”

  “살인이죠.”

  “보상으로 끝낼 일이 따로 있죠! 돈을 얼말 내놓던 간에 사람을 죽인 건데, 사람 하날 사라지게 한 건데! 사고였던 어쨌건 간에 그건 변할 수 없어요!”

  “비밀엔 돈이 들죠.”

  나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며 말했다. 한 개비에 170티커나 하는 담배였다. 당장에라도 세계인권협회로 달려갈 기세던 남자는 그제야 내게로 주의를 돌렸다.

  “…천연담배로군요.”

  나는 불을 붙이며 비죽 웃어보였다.

  “특정루트 아니곤 구하기 힘들죠.”

  남자는 주춤하며 짜낸 듯 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경비원이 아니죠?”

  휴게실의 공기필터는 담배연기를 탐욕스럽게 빨아들였다. 나는 니코틴이 듣지 않는 내 몸을, 쉴 새 없이 돌아가는 휴게실의 공기필터를 생각했다.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화학적으로 만들어낸 담배들도 비슷한 맛을 내긴 하지만, 어딘가 빠진 느낌이란 말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죠.”

  나는 깊이 한 모금 빨면서 남자의 시선이 초조하게 내 뺨에 박히는 느낌을 즐겼다.

  “보험회사와 브레인 클리너에선 최대한 노력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성공을 물거품으로 만들기 싫으면 당연히 그래야했죠. 막대한 보상을 하고… 무엇보다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만드는 게 우선이었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죠.”

  “실종신고를 냈나요?”

  “아니요.”

  “이민신고를 하고 다른 행성으로 빼돌렸군요.”

  “그런 방식은 너무 거칠죠. 이러니저러니 해도 금방 눈에 뜨입니다. 변화가 나타나지 않아야 하죠. 눈앞에 존재하면 의심은 사라지는 겁니다.”

  “무슨 소립니까?”

  나는 담배를 의자 팔걸이에 비벼 껐다.

  “포맷당한 당사자가 멀쩡히 돌아다닌다면 어떨까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겁니다.”

  “기억이 지워진 사람이 무슨 수로 멀쩡히 돌아다닙니까?”

  “모두를 속이기만 한다면야 가능해지죠. 브레인 클리너 사(社)엔 꽤 많은 자회사가 있습니다. 눈에 안 띄게 유령회사가 세워졌죠. 그리고 프로그래머들과 심리학자들과 인간생태학자들을 잔뜩 불러들인 겁니다. 사고당사자의 기록, 사고당사자의 주변인들로부터의 경험 수집… 이보다 더 한 인간에 대해 알 수는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지독하게 모았죠. 그리고 최대한 사고당사자 본래의 기억과 유사하게 복구시켰습니다.”

  나는 이제 애써 이걸 차고 있을 필욘 없겠죠―하는 눈빛을 보내면서 허리춤에 걸린 전자곤봉을 풀어서 옆자리에 올려놓았다. 남자는 곤봉을 흘깃 보고 다시 내 얘기에 집중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죠.”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합니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했습니다. 가족들과 추억을 얘기하고, 예전과 다름없는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행동하고…. 브레인 클리너 쪽에선 만족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죠. 그렇게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들은 사고 전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나는 손가락으로 턱을 쓸며 정정했다.

  “아니- 인간으로 돌아가지 못했다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들은 사고당사자와 ?유사?한 개체일 뿐 사고당사자 본인이 될 수 없었어요. 꿈조차 무의식이 얕아서 다채롭게 꾸지 못하는, ?유사인간?들이 되어버린 겁니다. 인간의 몸을 가지고 인간과 비슷하게 행동하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들.”

  남자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보통 사람들도 그냥 그런 꿈들을 꾸지 않습니까? 꿈같은 무의식만으로 인간이 아니라고 하기엔…. 사고 당사자 본인과는 다를지 몰라도, 그들도 나름의 인간이 아닐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기억은 못하지만, 누구나 꿈에서만은 다양한 욕망을 변주해내죠. 인간이라면.”

  목소리가 조금 떨려나왔다. 나는 팔짱을 끼었다.

  “a에서 b로 백번을 가다가도 종종 c로 빠지곤 하는 게 인간입니다. 하지만 ?유사인간?들은 백번이고 천 번이고 a에서 b로만 왔다갔다 반복할 뿐이죠. 몸은 인간의 몸이고 머리는 기계의 뇌랄까요.”

  남자는 중얼거렸다.

  “그런…”

  남자의 중얼거림엔 아무 뜻도 없었다. 그건 그저, 습관화된 감탄사일 뿐이었다. 마음에 없는 말들.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쓰일 수 있는 말들. 나도 그런 말들을 잔뜩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이 남자가 ?그런…?이라고 중얼거리는 건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정말로 어울리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숙이자, 남자는 불안하게 내 머리통을 쳐다보았다.

  “그 회사에서 프로그래머로 2년이나 일했죠.”

  머리위에서 남자가 꼴깍 침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한 사람의 인생을 다시 복구해낸다고 생각했습니다…. 미친 듯이 매달렸죠. 어쩌면 사고당사자 그 사람보다, 내가 더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모든 환희의 순간부터, 자신도 돌이키고 싶지 않은 치부까지, 모든 순간의 복원에 내가 있었습니다. 나는 마치… 창조주가 된 것 같았어요. 하얗게 표백되어버린 한 사람을, 내가, 내가 새로 주무르고 그림을 그렸죠.”

  남자가 내 말을 잘랐다.

  “그렇지만 완벽하지 않았다면서요.”

  난 쓰게 웃었다.

  “그렇죠. 내가 해낸 건 결국 완전한 복원이 아니라, 얕디얕은 모방프로그램이었습니다.”

  담배를 태울 땐 맹렬하게 돌아가던 공기필터가 지금은 너무 조용했다. 침묵이 남자와 나 사이를 비집고 앉았다.

  “내가 잘한 걸까요?”

  나는 자신 없이 내뱉었다.

  “난 모르겠어요. 하지만 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것 하나만은 정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남자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난 열심히 일했어요. 최선을 다했다구요. 그런데 내가 왜 잘려야 합니까.”

  남자의 얼굴이 미미한 경멸로 일그러졌다. 나는 고개를 들고 그런 남자를 노려보았다.

  “내가 실수를 했다고 생각하겠죠. 그래요, 다들 일벌레에겐 그런 식으로 뒤집어씌우죠. ?업무량이 너무 많았어, 그래서 실수한 거야, 하지만 회사 측에선 그것까지 봐줄 순 없다네.? 그런 거였으면 이러고 있을 필요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달라요. 그놈들은 위협을 느낀 겁니다.”

  “그놈들이라뇨?”

  “당연히 브레인 클리너 사(社)와 보험회사죠. 흔한 얘기죠. 사고사례와 복구과정이 유출될까봐 미리 벌벌 떤 겁니다. 프로그래머를 교체하라더군요. 이렇게 열심히 일해 왔는데, 그놈들의 불안감 때문에 애꿎게 된서릴 맞은 겁니다. 그 빌어먹을 심리학자 팀장이 말했죠. ?자네가 가장 고참이야.? 비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으니 나가란 거죠. 제기랄, 무마할 땐 돈을 들이부어 놓고, 열심히 그 일을 도운 사람에게는 이런 보상이 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남자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물었다.

  “어쩔 생각입니까?”

  “비밀엔 돈이 들죠. 그건 예외가 없는 겁니다. 그놈들에게 그걸 똑똑히 가르쳐줄 셈입니다.”

  남자는 다급하게 재차 물었다.

  “그래서 어쩔 생각입니까?”

  “폭로해버릴 겁니다. 2년입니다. 볼 건 다 봤죠. 인권협회에도 방송국에도 떠들 내용이 모자라진 않거든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가 혼란스런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나는 심호흡을 하면서 초조하게 숫자를 세었다. 하나. 이런 순간은 질색이다. 둘. 불안해서 심장이 멈춰버릴 것 같다. 셋까지 센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그의 눈을 피했다.

  “당신한테는 얘기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남자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왜 나한테 그런 얘길 합니까?”

  “미안합니다.”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웃으려고 했다.

  “뭐가 미안하단 겁니까?”

  “…….”

  “그게 무슨 소리에요.”

  나는 묵묵히 남자를 쳐다봤다. 더 덧붙일 말도 없었다. 남자는 목소리를 키워야할지 죽여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잖아요. 왜 나한테 그런 얘길 하는지…”

  나도 알 수 없었다. 이럴 땐 어떤 목소릴 내야 하는지, 어떤 표정으로 말해야 하는지.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남자는 겨우 웃어 보이는 데 성공했지만 웃음소리는 나지 않았다.

  “허… 내 참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얘기 상대나 해줄까 했더니 이거 참…”

  “내가 당신을 복원했습니다.”

  남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이 사람이 보자보자 하니까!”

  나는 남자의 어깨를 잡았다. 그는 혼란스러워하고 있었고, 바로 이럴 때가 빗장을 여는 때였다. 나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당신은 그때 울고있었어요.”

  남자는 무슨 말인지도 모른 채 움찔했다.

  “선배는 쓰러져있었죠.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면서.”

  남자의 눈이 번들거렸다. 나는 더욱 더 낮게 속삭였다.

  “당신 잘못은 아니었어요. 당신은 그저, 들어가서 본 것뿐이었죠. 이미 죽은 뒤였어요. 그리고 당신은…”

  “그만해.”

  “…당신은 경찰에 전화하는 대신 선배의 컴퓨터를 켰죠. 울면서, 그의 도면을 모조리 당신에게로 전송했어요. 그 도면으로 8학기 톱을 따냈죠. 그리고 그 학점과 포트폴리오로 루미컬에 입사했어요.”

  남자는 나를 쳐내려 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어깨를 꽉 잡고 놔주지 않았다.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누구도 모를 거라고. 알 필요 없다고. 하지만 난 압니다. 가끔 설계도면을 켜둔 채 그날을 떠올렸죠. 그래요. 어차피 죽은 사람 거였죠. 시체가 썩기 전에 발견해준 것치곤 괜찮은 대가였으니까.”

  남자는 부들부들 떨었다. 분노와 공포가 그를 반씩 점령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놓고 천천히 몇 발짝 물러났다. 시간을 끌수록 공포가 이길 테니까.

  “난 압니다. 당신의 기억이 뭔지, 꿈이 뭔지 누구보다도 잘 알아요. 내가 당신을, 당신 자신으로 돌려놓으려고 그렇게 애썼으니까. 3개월을 당신에게 쏟아 부었어요. 누구도 나처럼 당신에게 이해와 연대감을 느낄 순 없었을 겁니다.”

  나는 손을 내밀었다.

  “당신 인생을… 당신을, 진짜가 아니게 만든 놈들은 그놈들입니다. 그놈들 때문에, 그걸 모두 잃어버리고, 당신은 CG와 프로그램으로 가득한 허구의 인간이 돼버렸습니다.”

  나는 조용하게 덧붙였다.

  “그놈들에게 엿 먹이는 겁니다.”

  남자는 울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는 함락 당했다. 기억 속에서 반짝이던 것들이 부서진다. 모든 기억, 트라우마, 그의 삶에서 붕 떠오른다. 나는 늘 궁금했었다. 사람을 자신으로 존재하게 했던 것들이 휘발되는 이 순간… 그는 뭐라고 할 것인지.

  “…당신은 날 복원하지 않았어.”

  “아니요, 내가 했습니다. 그들 때문에 백지가 된 당신을, 내가- 우리 팀이 다시 채워넣었습니다. 난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실제기억을, 실제 행동패턴을 넣으려 애썼습니다. 당신은 훌륭하게 원래 커티스씨를 대체해냈죠. 우리가 같이 하면 해낼 수 있어요. 고발하는 겁니다. 그놈들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를 알리는 겁니다!”

  남자는, 커티스라 불리는 사람이었던 남자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놈들은 성공을 누릴 자격이 없어요, 그들의 욕심에 당신이 어떻게 됐습니까? 왜 가만있으려고 합니까. 매스컴에 휘둘리는 게 싫은 겁니까? 사회적으로 매장당할까 두려운 겁니까? 당신을 꿈도 못 꾸게 만든 건 그들입니다. 당신은 피해자라구요!”

  남자는 핏기가 하나도 없는 얼굴로 말했다.

  “내 인생은 멀쩡해.”

  남자는 주저했다. 그리고 곧 그런 자신에게 배신감을 느낀 듯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그의 입술은 이미 달싹이며 떨고 있었다.

  “난 멀쩡하다구.”

  나는 그의 말을 기다렸다.

  “내 아내는, 그러니까 유조는 말이야… 아니, 이건 그만두지.”

  그는 억지미소를 지었다.

  “그만두자고. 제기랄, 내가 왜 여기서 또라이한테 이런 얘길 하고 있어야 되는 거지?”

  “당신도 멀쩡하지 않다는 걸 아니까요.”

  “미친 소리. 난 멀쩡해. 유조는 말이야, 여전히 날 사랑하고 있다구. 그녀는 여전히 아침마다 내가 갖다 주는 핫초콜렛을 마시면서 행복해해. 그리고… 그 달착지근한, 그런 냄새가 나는 입술로 내 볼에 뽀뽀한다구. 말이야, 그녀 손등은 약간 꺼칠한데 말이야, 내 뺨을 쓸면서 말한다구. ?당신이 다정하게 웃을 땐 소년 같아.? 난 정말, 그럴 때면… 세상 중심에 있는 것처럼 행복하지……. 그녀는 변하지 않았어. 내가 이상해졌다면 그녀가 제일 먼저 알았을 거야. 나한테 말했을 거라구.”

  난 그의 말을 반복했다.

  “당신한테 말했을 거라구요.”

  “그래. 말했을 거야. 말이지… 내가 자길 보는 얼굴이 싫다거나, 뭐 그렇게 말했을 거라구. 사랑하는 표정이 아니라고. 자길 사랑하지 않는다고. 젠장, 내가 무슨 말을 하고있는거지? 유조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내 말은, 그저 예일 뿐이라구. 알아듣겠어? 유조는 날 여전히 사랑한단 말이야.”

  남자는 히스테릭하게 웃었다.

  “큭… 알아듣겠냐고 물었잖아. 응? 당신이 날 누구보다 이해한다며. 내 아내보다… 믿지 않는다는 유조보다…….”

  남자가 고개를 떨어뜨렸고 난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나는 아니라고 했지만… 제길, 나도 자신이 없었어. 그녀를 믿게 할 자신이 없었다고. 나더러 어쩌란 말이야? 꼰대처럼, 말했어. 내 나이 서른셋이라고. 내가, 내가 말이지… 사랑에 빠진 걸 광고하고 다니는 애송이들이랑, 똑같을 순 없지 않겠어? 그래. 내가 유조한테 청혼할 때도, 이미 애송이는 아니었으니까. 나는, 우리 사이는 차와 물 같은 거라고. 서로, 있으면 서로를, 변화시키면서 우러날 수밖에 없다고… 그렇게….”

  난 기다렸다. 횡설수설 하고 있었지만, 나는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늘 그랬으니까. 믿지 않는다고. 내가 변했다고. 내가… 하지만 난 멀쩡하잖아? 안 그래?”

  그는 애써 미소 지었다.

  “내 인생은 멀쩡하다구.”

  “커티스씨.”

  내 가라앉은 목소리에 그는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커티스씨.”

  “…….”

  “커티스씨.”

  “닥쳐!”

  그가 확 몸을 일으켰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눈이었다.

  “내가 고백하면 내 인생이 달라져? 유조가 날 믿어줄까? 내가 예전처럼 꿈을 꿀까?”

  나는 대답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더 빨랐다.

  “그럴 리 없지.”

  남자의 목소리는 절망과 회의로 차있었다. 아마 그 자신도 그렇게 들리길 바랐을 거다. 하지만 그 속에 깔린 건 거대하고 맹목적인 두려움이었다. 나는 남자와 눈을 맞추려했다.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치료를 포기한 환자를 설득하는 의사가 된 기분이었다.

  “커티스씨. 당신이 몇 살입니까? 겨우 서른셋이에요! 앞으로 수십 년을, 당신의 한번뿐인 평생을 그렇게 괴로워하며 살 겁니까? 그렇게 옛날 커티스와 지금 당신의 괴리 사이에서 헤매다 끝낼 겁니까? 인정해요. 당신이 알게 된 이상 폭로해야 합니다! 당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 기억 속의 커티스로만 살 순 없다고요! 모르겠어요? 당신은 겨우 서른세 살이고, 이건 단순한 복수가 아닙니다. 옛날의 커티스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인정받을 기회에요!”

  “…나 자신?”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꿈도 못 꾸는, 몸만 인간이고 머리는 프로그램인 불쌍한 반쪽인간, 인간을 흉내 내다 만 커티스 말이야?”

  “…….”

  “……당신은… 내가 지금 어떤 걸, 상상하는 지 알아? 유조가, 부모님이, 날 진짜 커티스를 몰아내고 그 몸을 차지한 도둑놈, 아니 도둑프로그램으로 몰아도… 난 할 말이 없어. 알아? 난 그들에게 해줄 말이 없다고!”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당신은 엄연한 피해자예요!”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껍데기만 똑같아도 상관없어… 아무도 모르잖아! 내가 진짜 커티스가 아니라도, 그걸 사람들이 모르면 무슨 상관이야. 난 인간이야 - 여기 있는 대로 살 거야, 내 삶을! 그게 커티스의 인생이 아니라도, 제기랄, 어쩔 거야?”

  남자는 흐느꼈다.

  “…어쩌라는 거야?”

  나는 달래듯이 말했다.

  “고발하는 겁니다.”

  “평생 동정 받으며 살라고? 평생 모자란 인간 취급을 받으라고? 나는… 나는 이렇게 여기 있는데…”

  반쪽 인간의 모습으로 말이지. 나는 생각했다.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꿈을 제대로 못 꾼다고, 아내가 날 믿지 않는다고… 내 인생을 잃어버릴 수는 없어. 생생하지 않아도 돼. 꿈같은 거 안 꿔도 돼. 무의식, 그딴 게 없어도, 사는 덴 지장 없어….”

  나는 냉정하게 되물었다.

  “당신이 무슨 얘길 하고 있는 지 압니까?”

  “알아.”

  “당신의 남은 인생을 허깨비, 예전 커티스의 껍데기로 살아도 된다고요?”

  “…그래.”

  “그렇다면 우리 얘긴 끝났군요.”

  나는 등을 돌렸다.

  “기다려!”

  남자가 다급하게 외쳤다.

  “방송국에 가려는 거지? 가지마. 내 인생을 더 망치지 마!”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프로그램 팀은 나름대로 잘 해냈다. 남자는 굴절되고 허구로 판명난 자신의 삶에 거의 본능적인 애착을 보이고 있었다. 대부분의 인간들처럼.

  “얼마면 돼?!”

  돌아보게 만드는 비명소리였다. 남자의 얼굴은 너무 간절해서 그의 편한 옷차림과 어울리지 않았다. 최악은 그의 고급 가죽 슬리퍼였다. 남자는 자신이 맡았던 건축공사가 브레인 클리너 사(社)의 자회사에서 의뢰한 것이라는 걸 몰랐을 것이다. 자신의 통장잔고가 원래는 그렇게 두둑하지 않았다는 것도, 하딘 빌딩 이용권은 그에게 꿈일 뿐이었다는 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기억하지 못해도 그는 인간이었으니까. 그건 살인이었으니까. 그는 보상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제기랄.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 멋진 3층 휴게실을, 브레인 클리너 센터를, 그의 고급 슬리퍼를 쳐다봤다. 남자의 얼굴에서 핏기가 서서히 가셨다.

  딩동-

  벨소리가 들렸다. 텅 빈 휴게실에 여자 목소리가 울렸다.

  “지상 3층 건강센터입니다. 브레인 클리너 센터, 서바이벌 3000, 칼라치 호르몬 클리닉, 킹 오브 필드, 헬스 앤 헬스를 이용하실 분께서는 지상 3층 건강센터에서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희 빌딩을 찾아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더욱 편안하고 즐거운 서비스를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차분하고 매끄러운 어조. 풍부한 성량.

  “칼라치 호르몬 클리닉이 세계특허 수면요법으로 여러분의 고민을 해결해드립니다. 순수 호르몬으로 세포노화를 방지하는 DNA를 활성화시켜 언제나 싱싱한 성생활을 즐기실 수 있습니다. 당신의 젊음과 열정이 떠나가지 않도록 칼라치 호르몬 클리닉이 지켜드립니다.”

  이런 것이 안락함이다. 이런 것이. 나는 눈을 감고 싶었다. 그러나 남자는 온 몸을 떨면서 굳은 몸으로 굳은 얼굴로 굳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만사가 귀찮으십니까? 항상 두통과 피로에 시달리십니까? 의학계에서는 늘 스트레스를 질병의 원인으로 꼽아왔습니다. 모든 것은 뇌에 달렸습니다. 수면 프로그램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뇌의 피로, 브레인 클리너에게 맡겨보십시오. 과학적으로 검증된 렘수면 유도 프로그램으로 당신의 머릿속을 깨끗하게 정리해 드립니다.”

  “닥쳐!”


  딩동-


  벨소리가 방송시스템 점검이 끝났음을 알렸다.

  정적이 쇳가루처럼 차갑게 떨어져내렸다.

  남자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이마와 둥근 콧망울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허공을 긁는 것같이도 나를 잡는 것처럼도 보이는 동작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한 발짝 물러났다. 안된 남자다. 그러나 내 일은 아니었다. 나는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어보이고 등을 돌렸다.

  “기…기다려! 기다려!”

  발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하는 순간 등이 확 달아올랐다. 열은 위로, 위로 올라왔다. 아니, 열은 사방으로 퍼지고 전류는 위로 올라오는 건지도……. 나는 애써 고개를 좌로 돌렸다. 남자가 귀신같은 얼굴로 내게 전자곤봉을 찔러대고 있었다. 남자의 입에선 뼈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양팔을 휘둘렀다.

  “으악!”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넘어져 나를 올려다보았다. 눈을 깜박이자 세상이 붕 떴다 가라앉았다. 남자가 부들부들 떨면서 일어났다. 두 눈이 내게 고정돼 불타고 있었다. 그는 전자곤봉을 오른손으로 잡고 왼손으로 그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죽어….”

  제기랄. 나는 남자 쪽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그리고 쓰러졌다.










  남자가 도망친 뒤, 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또 가슴에 엘리베이터가 추락하는 것 같은 아찔한 통증이 일었다. 그래도 이젠 괜찮다. 곧 나아질 것이다.

  나는 남자가 떨어트리고 간 전자곤봉을 주워들고 에일(입술, 귀 등 신체에 장착하는 실시간 통신장비의 브랜드명)을 켰다. 신호가 가기 무섭게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마리카입니다.”

  “납니다.”

  마리카의 목소리가 사근사근해졌다.

  “아, 그잖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잘 됐습니까?”

  “잘 됐습니다.”

  “다른 목격자는 없는 거겠죠?”

  “그쪽에서 정보를 워낙 확실하게 줘서 변동사항이 거의 없었습니다. 동영상파일과 지문이면…”

  “충분합니다. 저희에게 넘기시는 대로 입금시켜 드리겠습니다. 물론,”

  나는 마리카의 말을 가로챘다.

  “물론 카피본은 남겨놓지 않습니다.”

  “하하하.”

  마리카는 유쾌하게 웃었다.

  “말이 통하는군요. 담백하십니다.”

  “신용문제니까요.”

  “맞는 말씀입니다. 사업은 결국 신용과 도박이죠.”

  마리카가 말했다.

  “사실 저희도 이렇게 하기로 결정하기까지 꽤 고민이 많았습니다. 괜히 모르고 있는 사람한테 사실을 알려줘서 일을 더 시끄럽게 만드는 거 아닌가 하고 말이죠.”

  나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하이로드 사(社) 소송만 안 터졌어도 가만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선례가 있는 이상, 저희로서도 조치를 취해야 해서 말이죠.”

  “시뮬레이션 도중에 발작 일으킨 일을 피해자에게 숨겼다고 패소한 사건 말이죠.”

  “네, 그 사건 말입니다. 하이로드 사(社)가 그 피해자 입 막으려고 얼마를 쏟아 부은 줄 아십니까? 자그마치 5만 티커였습니다. 그렇지만 피해자는 끝까지 버텼고, 하이로드 사(社)는 회사신용도 추락을 메우느라 트로이소행성대의 소행성 8개와 외행성 위성 3개를 매각했습니다.”

  나는 혀를 찼다.

  “부동산이 거덜 났겠군요.”

  “완전히 거덜 났죠. 만약에, 뭐 물론 저희쪽 프로그래머와 심리학자, 인간생태학자들도 뛰어난 인재들이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프로그램이란 게 에러가 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저희 쪽에서 미처 조치를 취하기 전에 피해자가 포맷 사실을 알아버리면 저희로선 방법이 없는 겁니다.”

  그건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망할 때까지 매스컴에 물어뜯기겠지. 거액의 소송에, 엄청난 보험비 지출은 기본일 테고. 나는 머릿속으로 처음 남자에게 말 걸었을 때부터 남자가 날 쓰러트릴 때까지의 고스란히 찍힌 동영상파일의 용량을 계산해 보았다. 이 빌딩의 시스템점검시간이 끝나기 전에 모든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십분 내로 내 크레디트 카드에는 상당한 액수가 들어올 테고, 파일은 브레인 클리너 사(社)의 소송관련자료실에 보관되어 변호사와 보험사직원을 만날 때를 기다리게 되겠지.

  “커티스가 각본대로 반응하지 않았다면 어쩔 작정이셨습니까?”

  “글쎄요. 어쨌든 쓸데없는 모험은 아니니 안심하셔도 될 겁니다. 그를 그냥 내버려 둔다는 건 저희 입장에선 시한폭탄을 하나 키우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뭐…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사람이란 게 큰일을 혼자 감당하려 드는 경우는 드물어요. 자기가 피해자일 때는 더 그렇죠. 커티스가 가족이나 친구한테 포맷사실을 알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브레인 클리너 사(社)는 그 순간 공중분해 돼 버리는 겁니다.”

  난 커티스였던 남자가 뭘 묻어버리고 싶어 했는지 안다. 아마 마리카도, 그들의 심리학자와 인간생태학자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마리카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커티스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랬다. 그는 비밀이 묻히길 원했던 거다. 날 죽여서 입을 막고싶어할 정도로 간절하게.

  “뭐, 그의 입장에서야 그럴 수밖에 없었겠죠. 클론에게 본체의 기억을 비슷하게 주입시켜 놓는다고 해서 그 클론이 본체가 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나는 중얼거렸다.

  “포맷사고의 피해자들은 클론이 아닙니다.”

  마리카가 대답했다.

  “그렇지만 결코 본인 자신도 아니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사람을 그 자신으로 보는 건 신체 때문이라고, 그 자신의 고유한 몸과 고유한 DNA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인간이라는 종의 한 개체로서 존재하기에 한 사람의 인간이 되는 거라고. 하지만 그 남자를, 커티스를, ?그 이름과 기억을 가졌던? 본인이라고 볼 수 있을까. 유사한 기억을 가진, 같은 신체의 사람을 본인이라고 볼 수 있을까.

  어차피 내가 알 필요는 없었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마 절 죽였다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마리카는 흡족하게 웃었다.

  “하하하. 약속된 보수 외에 성형수술비와 수고비도 얹어드리겠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전송해드리겠습니다.”

  “예, 수고하셨습니다. 다음에 또 연락드리죠… 아, 준비됐습니다. 전송해주시죠.”

  브레인 클리너 사(社)에선 남자의 약점을 확실하게 잡았다. 남자가 나중에 소송을 제기하고 싶어 한다 해도, 브레인 클리너 쪽에선 그가 인간으로 인정받지 않을 거란 두려움을 자극할 수 있다. 내 살해현장 동영상도 확보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 아마도 적절한 보상을 미끼로 남자의 입을 영원히 다물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회사나 브랜드 이미지가 실추되는 일도 없을 테고. 나는 그 사이에서 돈을 얻은 셈이다.

  죽일 놈이라고 욕해도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난 새 심장을 살 돈이 필요했다.





  나는 뇌에 저장되어있는 동영상을 마리카에게 전송하고 안드로이드 장기판매 사이트를 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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