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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eas111@hotmail.com  저주받은 불멸이로다. 에이드라의 비통한 노래는 그녀의 이름과도 같은 서쪽의 작은 섬나라, 에이드라의 밤하늘에 휘몰아치고는 했는데 그런 날이야말로 바다가 들끓고 바람이 흉폭한 날이었더라. 죽음을 뭉쳐 두르고 공포를 이겨 바른, 높은 산 위의 신들이 손수 완벽히 지은 탑 속에서 에이드라는 삼천 년을 슬퍼하며 지내오던 것인데, 그녀가 태어났을 때 얼굴과 눈이 없는 세 여신이 저승 강의 이름을 걸고 예언한 바- 가련한 딸이로다. 이 아이가 낳는 아이는 반드시 그 아비보다 강대히 자라나서 결국 죽이리라. 끔찍한 사랑이라는 것이 그렇다고 해서 이 아이에게 너그럽지도 아니할 터이고 오히려 아프로디테가 슬퍼할 정도로 잔인하리니, 신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 운명의 세 자매들이야 그대를 애도할 뿐이로세.
  모든 신이여, 애도하며 이 재앙의 씨앗을 가두시오.
  이러한 연고로 에이드라는 태어나자마자 그림자, 저승의 흙, 신의 손길로 빚어진 탑 속에 유폐되었던 것인데 목숨 붙은 이라고는 신이든 인간이든 아무도 함께 가두지 않았으므로 죽은 자의 망령이 일어나 시종 노릇을 하고 바람이 인간의 언어를 가끔 실어다줄 뿐, 오로지 홀로 남았던 것이다. 너는 신의 딸이나 신을 알지 못하리라. 산 것이나 삶을 모르리라. 가슴 적막하여도 손 내밀어 위안해줄 이 없을 것이고,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그것을 보고 감탄할 이 없으리. 그러나 사랑은 잔인하리니, 운명의 세 목소리가 예언한 대로 아무리 적요롭고 어두운 영혼에라도 사랑 무덥고 그 때문에 심장 찢기고 불타 재만 남게 되더라도 반드시 찾아들고 말 터이니, 너 역시 사랑하리라. 오래도록 후회하리라. 그러나 돌이킬 수 없도다.
  운명이니 그러하리라.
  세 운명의 자매가 내린 예언이 마침내 시작되던 날이더니라. 오래도록 탑의 창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과 새 날갯짓 소리뿐이던 고요한 바깥 세상에서부터, 요란하고도 극심한 전쟁의 소리가 날아든 것은.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소리에 에이드라는 무심코 덩굴을 치워내고 깃털을 밀어내고 땅을 내려다 보았던 것인데, 그때, 불타는 숲 속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보게 되었다. 칼과 창과 방패가 부딪히고 부서지고 퉁겨 나뒹굴고 사람 역시 그처럼 짓밟히며 죽어가는 검은 피로 자욱한 전쟁터였더라. 죽음이 날뛰는 숲의 시체 속에서, 난자되는 바람과 흙의 속살 속에서, 온통 그림자로 일렁이는 죽음과 흩어져 달아나는 유령들 속에서 에이드라는 결국 그를 보고야 만다. 풍성히 펄럭이는 깃발 아래서 살육을, 전투를 감상하는 인간의 왕.
  저 사람은- 에이드라가 중얼거리며 창살을 힘껏 틀어쥐고서 전투를 바라보는 왕을 바라보는 동안 신들은 높은 산에 모여앉아 운명을 원망할 따름이었다. 세상을 바라보아 어느 영혼에게든 한 번 마음을 빼앗긴다면 아무리 견고한 탑이라도 그녀를 막을 방도가 없으리라고 운명의 자매들이 말한 바 있기에.

*

  에이드라는 밤마다 탑을 두른 돌과 불안과 저주와 운명의 타래를 풀어내려 시간 속으로 흘러내리고, 한없이 아래로 추락해 내려가다가 식물의 뿌리와 우거진 나무를 타고 기어올라가 결국에는 땅에 발길을 두었다. 안개만큼이나 자욱한 꿈의 흔적을 일일이 세어 에이드라, 자신의 이름과 같은 이 섬을 온전히 지배하기 위해 전투를 그치지 않는 인간의 왕을 좇아 고요히 바람 속으로 움직였더라. 세상이 지나치게 어둡고 지나치게 무거운 탓에 신의 딸은, 저주스러운 운명을 타고난 탓에 신의 이름조차 부여받지 못한 그녀는, 매일 밤마다 긴장하여 모든 것에 놀라고 모든 것에 가슴 설렜다. 늦은 밤 달은 어느 나뭇가지로 내려와 걸리는가. 어떤 새가 그림자 없이 나는가. 흙 위로 날렵히 달리는 짐승의 눈은 얼마나 선명한 금빛이련가. 시체 타는 냄새와 살아남은 인간들이 풍기는 더운 피 냄새, 짐승의 시체로 끓는 음식과 식물의 시체로 색을 달리하는 음식, 불길은 어떻게 피어나는가. 그는 어디 즈음에 있을까. 오늘도 두 팔을 벌리고 반가워할까, 영영 돌아보지도 않고 손도 내밀지 않을까. 혹 그 사이에 부상을 당한 것은 아닐까. 에이드라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불안하고 도무지 견딜 수 없이 행복해서 웃을 수도 없고 눈물 흘릴 수도 없었다. 언덕 위로 고이 이어지는 죽은 꿈, 산 고통의 행렬을 따르며 에이드라는 밤마다 그를 찾기 위해 온 섬을 방황했고, 반드시 그를 찾아내어 만났으며, 새벽이 오기 전에 일어나 탑으로 돌아갔다. 이것은 왕에게나 그녀에게나 괴로운 일이었는데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마침내 길었던 전쟁은 끝을 맺었다. 침략에 반항하여 일어선 세력은 남김없이 제거되었고 모든 이가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 모여든 날, 한낮의 햇살 아래서 그는 자신의 신부를 만천하에 공개하였다.
  에이드라는 막 결혼하는 인간의 새신부처럼 수줍어하며 왕에게 손을 맡겼다. 진주가 알알이 영롱한 백색 예복과 찬란한 금관, 온갖 보옥에 휘감겨 왕비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화려한 에이드라의 손을 잡고서 왕은 비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선언하였고, 오랜 고락을 함께 나누어온 신하들은 드높은 함성으로 그에 화답하였다. 왕의 옆자리에 앉으며 에이드라는 햇살이 무색하리만치 찬란히 미소지었던 것이고 그녀의 뒤에서, 숲 가운데 홀로 남은 회색 탑은 균형을 잃고 힘을 잃어 처참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더라. 운명이여, 신들은 비로소 안심하며 목소리만으로 존재하는 세 자매의 이름을 부르고, 부름 받은 운명에게서는 아무런 목소리도 돌아오지 않는다.
  이후 에이드라의 시간은 미처 돌이켜 잡아챌 수 없으리만치 빠르게 흐른다. 그의 눈 속에서 에이드라는 지난 삼천 년 세월이 감기는 것을, 열리는 것을, 손가락 사이로 모래 흘러내리듯 흘러내리는 것을 본다. 그 누가 이것을 막아 멈출 수 있을까.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믿을 수 없으리만치 놀라워 가끔 지금 이 세상이 혹시나 몽땅 꿈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하였다. 하늘의 누구든 저승의 누구든 이 순간을 붙잡아 멈추게 하라. 혹시 그 탑도 예언도 모두 거짓이 아닐까. 하룻밤 꿈이 아니었으랴. 오로지 지금 이 순간만이 진실이라면 과거에 흘러간 것들에는 더 이상 돌아볼 것도 미련 둘 것도 없으리로다. 인간이 되어야 한다면 인간이 될 것이고 모든 것을 잊어야 한다면 잊으리라. 무슨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해도 이곳에 남아 그와 더불어 행복한 채, 더없이 아름다운 때에 머무르리. 운명이 있다면 이러한 바람을 마땅히 이해하지 않겠는가.
  에이드라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섬의 주민들이 자신의 시선만 닿아도 두려워하며 몸을 떠는 것을 알지 못한다.

  다음 해 여름, 왕비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왕은 크게 기뻐하며 연회를 베풀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에이드라의 꿈이 무참히 부서져 더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던 것인데, 그것을 그녀가 예상했을 리는 없었다. 서쪽 하늘로 노을 사붉게 내릴 즈음, 층층이, 침략당해 살해당한 자들의 원한 쌓이듯 어둡게 붉게 하늘 물들 그러한 때였는데, 연회장 한복판에서는 반라의 무희들이 불꽃을 휘날리며 춤을 추었고 그 빛이 그리는 선 위로 술잔이 나들었다. 북소리가 울렸고 목 잘린 짐승이 통째로 불에 익으며 기름을 족히 흘렸다. 왕의 뜰 안으로 먼 곳에서 나는 과일과 화려한 깃털을 지닌 낯선 새, 쇠사슬에 묶인 사자가 오고 가고 금으로 빚은 포도나무가 운반되어 심긴다. 온갖 진귀한 물건과 향료가 왕과 왕비 앞에 쌓이고 잘 익은 술 냄새가 곧 사방에 진동하였다. 밤이 오고 달이 하늘 위로 흐르고 그로부터 술에 취한 객들이 쓰러져 잠들고 악사들이 지쳐서 가락을 어긋낼 정도로 시간이 흐른 어느 때 즈음, 막 술잔을 내려놓던 왕은 어지러운 웃음 소리와 망설이는 리라 소리 사이로 지극히 고요히, 품 속에서 칼을 꺼내드는 자를 눈치채지 못한다. 시녀들에게 둘러싸인 채 옷감을 들추어 보고 이집트에서 들여온 금목걸이와 터키석 팔찌를 둘러보던 왕비가 불현듯 일어나 서서 왕에게 달려들어 끌어안은 것은, 좌중 모두가 암살자를 알아본 것은 이미 단검이 그 손을 떠난 후였으나.
  별안간 뜰을 모조리 쓸어내려는 기세로 몰아치는 바람에 나뭇가지가 꺾이고 탁자가 엎어졌다. 흙먼지가 날리고 어디선가 술항아리가 줄줄이 깨지며 시끄러웠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무엇이든 붙잡기 위해 허둥거렸는데 바람은 갑작스럽게 일어났던 것만큼이나 갑자기 뚝 끊기고 말아서, 놀라 땅에 엎드리고 서로를 붙잡고 나무 둥치를 끌어안은 채 떨던 이들을 기막히게 한다.
  왕은 잠시 휘청였지만 탁자가 어디론가 날아가고 없었으므로 손을 내려놓거나 두드릴 장소가 없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내게 이것을, 왕은 피곤함과 경악과 분노가 한데 뭉친 목소리로 말한다, 믿으라고 하지는 말게. 자신을 향해 단검을 던진 오랜 친우를 향해.
  그것은, 왕이시여. 전쟁터에서 서른 해도 넘는 세월을 보낸 노장은 천천히 답한다. 소인이 올려야 하는 말씀이외다.
  무장하고 몰려드는 병사들을 손짓으로 물러 세우며 왕은 다시 묻는다.
  연유를 말해라.
  왕께서 일생 일대의 실수를 저지르는 꼴을 차마 가만히 앉아서 구경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었소.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오래 부려온 노예들이 저들끼리 지껄이는 말을 귓가로 흘렸을 뿐이나 얼마 전 키테라로 보낸 사자가 가져온 소식을 듣고 더는 그리할 수 없었던 게요. 지금 허리에 차고 있는 그 칼로 저 여자를 죽이시오.
  왕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젓고, 병사들은 창을 들이대며 늙은 장수에게 겨눈다.
  할 말이 없으니 별 헛소리를 해대는구나. 결박하라.
  저 여자의 이름이 무언지 왕께서는 아시오, 다리아라는 이름이 거짓이니 진짜 이름이 따로 있지 않겠소이까?
  뭣들 하느냐, 결박하라!
  아느냐고 물었다 팔라스! 네 아내의 이름이 무엇이냐! 그 가족은 다 어디로 가 있느냐?
  결박하라고 하지 않느냐!
  에이드라!
  모든 것이 얼어붙는다, 고, 에이드라는 생각한다. 그래,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 차게 얼어붙는다고. 그녀가 바라던 정지가 이런 식의 것은 아니었던데, 사방을 둘러 보며 에이드라는 가만히 깨닫는다, 아아- 이제는 돌이킬 수 없으리로다. 파국이 여기 있으니. 정체를 알 수 없는 남편의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며 에이드라는 또한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바란 것이 무엇이었지?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았던데, 어째서, 모든 것이 멀어지고만 있을까. 왕은 굳은 얼굴로 비를 바라보며 노장을 향해 질문한다. 지금 내 아내의 이름이, 내 아들을 잉태한 비의 이름이, 에이드라라고 하였던가? 질문을 받은 장수는 답하지 않고 고개를 떨굴 뿐이었더라. 그 역시 왕이 얼마나 마음을 쏟아 비를 아꼈는지, 사랑하였는지 익히 아는 까닭에 그러하였다. 차마 왕에게 그러하외다 왕이여, 일찌기 전쟁터를 드나들며 차가워질대로 차가워진 그대를 첫사랑에 몸달아 어쩔 줄 몰라하는 소년으로 훌렁 바꾸어 놓고, 밤마다 찾아들었다가 아침이면 흔적없이 사라져 애태우게 하였고, 그러다가 결국 혼인성사를 맺게 되었을 때 기쁘기 그지없이 웃게 하였던, 그 여인이, 사랑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그 저주이외다. 지금 저 뱃속에 잉태된 아이가 그 저주이외다. 그 아이가 태어나 자라 강대해져서 왕을 죽이리다. 배신하리다. 신들에게 버림받은 신의 딸 에이드라의 소생은 그리 운명지어졌으니 반드시 그리 될 것이오- 하고, 말할 수 없었던 것이라. 그 대신 한숨만이 허공을 채운다.
  왕은 돌아서며 비의 이름을 부른다. 다리아. 답은 도무지 돌아오지 않으며, 그러자 또다시 부른다.
  에이드라.
  그리고 에이드라는 절망하는 자신을 자각하였다. 거짓 이름 아래서 가끔 생각해보고는 하였더니라. 만약 그가 나를 내 이름으로 불러 준다면 어떨까. 내 저주받은 이름을 그대로 받아들여 준다면, 사랑해 준다면 어떨까. 나를 알아도 그 따스한 시선은 변하지 않을까. 심장을 두드리며 울리는 그 고동이, 붉은……사랑이, 그 비참한 것이 변함없이 그대로 있을까. 단 한 번이라도 그가 나를- 신들이나 회색 탑이나 말하지 못하는 그림자가 아니라 오로지 그로서 나를, 온전한 나로 불러준다면 어떨까.
  에이드라.
  그러나, 에이드라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왕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저주하듯 씹어 내뱉고 있다는 것을. 에이드라, 에이드라…저주받은 여인. 신의 산에서 쫓겨나 영원토록 홀로 살 것을 명령받은 불길한 여인. 에이드라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가 가장 참담해하는 시선으로 자신을 훑어보는 것을, 시선을 움직여 아직 부르지 않은 배에 가져다 놓는 것을 안다. 네 아들이, 또한 왕이 병사의 창을 빼앗아 드는 것을 알고, 나를 죽이려 들 것이다! 외치며 왕이, 붉은 기가 감도는 눈으로 자신을 겨냥하는 것을 안다. 멀리서 파도 높이 부서지는 소리를 듣는다. 에이드라, 이것이 네 운명이로다. 아까의 그 바람은 네가 부린 것이리라, 왕은 또다시 외치고, 에이드라는 금빛 햇살을 받아 빛나는 창날을 본다. 왕의 외침은 비통하고도 분노로 가득하였고 그 가운데 처참하여 마치 말발굽에 짓밟혀 죽은 어느 소년을 연상케 하였다. 지난 날 무심히 지나쳤던 어느 소년. 길 한가운데 널려 그대로 썩어가던 어느. 에이드라, 하고, 부르는 그의 말에 그녀는 바람 지나는 소리 들어 고개 기울이며 답하였다.
  그것이 내 이름이오.
  당신에게서 그 이름을 듣고 싶기도 하였고 영영 듣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지요, 라는 말은, 세상 모든 이름과 거짓과 저주와 운명과 힘과 전쟁과 죽음보다도, 당신을, 사랑했던데, 하고 말하고 싶었던 에이드라는, 그 자리에서 창에 꿰뚫린다. 아까 바람에 휘말려 날아간 단검의 자취를 그리며 에이드라는 자신의 몸이 찢기는 것을 느낀다. 뱃속의 아이가 이리저리 잘리는 것을, 인간의 것이나 다름없는 붉은 피가 쏟아져 내리며 비단과 보석과 흙을 적시는 것을 알고, 이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그 끝이라는 것을 알고, 시야를 온통 메우는 금색 햇빛이 문득 지나치게 강렬하다고도 생각하고 시간이 한숨 서미며 무너지는 것을, 하늘과 함께, 석양 죽어가듯 종말하는 것을 느낀다. 멀리- 탑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죽음이 살을 파고들며 웃던 때 에이드라는 그의 시선을 붙잡고서 침묵으로 애원하였고 이별하였으며, 재로 부서져 영영 소멸하였다. 그녀의 죽음은 이러하였다. 불사의 몸인 그녀가 죽은 이유는 절망이었으며 슬픔이었으며 또한 사랑이었더라. 신들은 더더욱 안심하여 별자리를 휘저어 연회를 베풀었으며 왕은 그로부터 일주일 후 새로운 비를 얻었다. 에이드라는 온 머리카락이 뱀으로 꿈틀거리는 사악한 마수로 기억되었으며 붉은 핏자국이 스무 해가 지나도록 생생히 남은 왕의 뜰은 오래도록, 왕이 섬의 괴물을 퇴치하였다는 증거로 남았다. 그렇게 모든 일은 모두가 동의하는 대로 흘러가는 듯 보였다. 에이드라가 죽은 날로부터 스무 해가 되던 날이 오기 전까지는.

*

  그날은 팔라스의 역사에 길이길이 전해지는 기적이 일어난 날이더니라. 보아라, 세상을 후회하는 인간들의 숨소리가 어찌나 곤한지 이루 헤아릴 길 없도다. 술에 마음을 담고 한탄에 절어 그저 동정할 것도 위안할 것도 없는 인생, 그 인생들에게 내려온 축복을 들으라. 늙은 왕이 연 장엄한 축제 속에서 사자가 산 채로 가죽을 발려 빼앗기고 아직 숨 붙은 멧돼지의 생살이 베여나가 금접시 위에 장식되던 때, 현숙한 왕비에게서 태어난 일곱의 자식이 각자 용맹함과 지혜로움과 아름다움을 뽐내려 모여든 장소에서, 달빛도 밝았으며 구름 한 점 없이 말끔한 검은 밤하늘이던데 그날 운명이 세 뭉치, 그 광영의 자리에 찾아들었던 것이라. 바람을 타고 흘러 미세한 소리, 흔적 이상이 아닌 운명이, 그 세 자매가 둥글게 감겨 종국에는 끊기는 저주의 끝을 감상하기 위해 모여들었던 것이다. 이것은 에이드라만의 저주가 아니었건만 그리 되고 말았던가. 운명이 그녀의 죄였다면 그녀의 죽음은 누가 갚으리오? 한할 것이라고는 도무지 없구나. 모이라이는 존재하지 않는 손가락을 나란히 엮고서 세상이 스스로 풀려나가는 모양을 바라본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다, 세상이 어찌 목졸려 죽게 되리라는 것을.
  처음에 왕은 아무 것도 감지하지 못했다. 젊은 장수들의 의기는 흐뭇했으며 지나간 세월 동안 정복한 땅 역시 자랑스럽기 그지 없었다. 딸들은 고왔으며 아들들은 강인하고도 용맹했는데, 하나같이 우애가 돈독했으며 부모를 지극히 섬길 줄 알았다. 오랜만의 잔치라 그래서인지 모든 것이 훨씬 더 흥겨웠으며 바람마저 맑아 가히 흥취가 대단하였다. 그러던 중, 왕은 문득 무엇인가 이마께에 묻은 느낌이 들어 손을 올려 문질러 보았다. 미끈거리는 느낌이 들어 손가락 끝을 바라보니 붉은 피가 흥건하여 잠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라. 낭창맞게 울려퍼지던 음악 소리가 우뚝 멈추고 춤사위가 잦아들고 좌중의 모든 시선이 공포로, 경악으로, 온통 뭉쳐 형용할 수 없이 어두운 그러한 빛깔-왠지 모르게 무척이나 익숙한 시선-으로 왕에게 집중된 채 미동하지 않았다. 왕은 뼈가 갈라지는 것을 알고 신음소리를 흘린다. 당황한 눈을 이리저리 굴리지만 세상이 그대로 얼어붙은 듯 꼼짝조차 하지 않는다. 어째서인가, 왜 아무도 살아있는 듯 보이지 않는 것인가. 불현듯 눈동자 아래서부터 올라와 진하게 물드는 죽음의 얼굴을, 왕은 대면한다. 그는 이를 악물며 숨을 잇는다. 지난 세월 동안 흔적없이 찢어내어 기억조차 할 수 없었던 시선이 심장 아래서부터 거꾸로 찔러 올라오는 느낌에 피를 토하고 만다. 지난 날의 햇빛과 손길과 꿈이 발걸음을 맞추어 뼈를 두들기고, 죽음이 스미어 무참하였다. 왕은 죽음- 이라는 말을 내뱉으려 한다. 사람들은 왕의 머리가 갈라져 부서지는 모양을 보고 숨조차 쉬지 못하고, 피에 젖은 미끈한 손가락이 그 속에서 뻗어오르는 모습을 또한 지켜본다. 뇌수가 쏟아지고 늙은 피부의 파편이 떨어지고 뼈가 드러나다가 부러져 나가고 그 속에서 다른 손목이 일어나는 것을 본다. 오래 죽었던 망자들의 원한 서린 비명 소리가 찢어지는 왕의 시체 속에서부터 핏물 쏟아지듯 무서운 기세로 터져 내리는 것을 듣는다. 미처 죽지 못한 죽음이 망울져 굴러내리고 어둠이 새어나오는 그 속에서, 피에 젖은 긴 머리채가 일렁이며 빠져나오는 것을 본다. 젊은 여인의 얼굴이 죽은 심장을 밀어내고 올라오는 것을 본다. 풍만한 유방과 허리와 엉덩이와 다리와 발가락까지 남김없이, 죽어 무너져 내린 왕의 내장을 밟고 올라서는 것을 바라본다. 죽음을 바라보는, 탄생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저승을 흐르는 강만큼이나 침묵을 지켰던 것인데 그때 세 운명은 실패를 쥐고서 저주를 막 둘러감고 있었다. 이렇듯 사랑이 패배하였으니 아무도 돌이킬 수 없으리로다. 이것이 운명이 마지막으로 자아내는 예언이리라. 비탄으로 부서져 죽은 에이드라는 떠도는 바람 중에서 들으라, 네 운명이 비로소 완전해졌음을. 후회하고, 기억하고, 애도하라. 사랑을 견디지 못한 탑이 몸을 열던 때를 되새기고 사랑하는 이와 지복을 누리던 찰나를 회상하라. 네게 남은 것은 그뿐이니라.

  이것이 시체 속에서 태어난 여신이 인간들을 향해 선언한 바로다.
  내 아버지의 피가 내 갑옷이로다, 내 아버지의 죽음이 곧 내 삶이로다. 투쟁으로 얼룩진 늙은 뼈가 나의 창이요, 증오와 아집으로 뭉친 피부가 내 방패이다. 오래 전 예언되었던 대로 에이드라가 아이를 잉태하여 그 아버지의 살인을 끌어안고 태어났으니 저주받은 신의 딸에게서 태어난 딸이 이 자리에 온전히 서게 되었도다. 죽음이 여기 담겼으니 내 눈을 바라보는 이는 살아남지 못하리라, 나는 이제부터 이 자리에 거할 것이라. 돌로 나의 신전을 세우라. 금으로 나를 두르라. 엎드려 경배하고 두려워하며 귀기울여 들으라, 이제부터 이 섬을 지배하는 여신의 이름을 선포하리니,
  곧 전쟁의 여신 팔라스 아테나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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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비에서 활동하시는 amusa님의 단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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