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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wk.comgreybone@hanmail.net  이런, 저 미치광이 할아범이 배 바닥에다 온통 구멍을 뚫어놨군. 구멍 만 아니라면 멀쩡히 도망갈 수 있는 것인데……. 저 늙은이가 꿈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를 노려 해변에 나왔던 나는 허탕을 치고 다시 벼랑 위의 성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빨리 가서, 늙은이가 부르기 전에 내 자리에 가 있어야 하니까.
  "아이카루스! 어디 있나!"
  저 빌어먹을 목소리. 타이달로스, 그 늙은 영감탱이는 이 시간까지도 침대에서 일어날 줄을 모르는구나. 또 내 나이 만한 그 계집아이를 옆구리에 끼고 누워있겠지. 밤새도록 그랬듯이.
  크레테의 공주씩이나 되는 계집아이가 뭐하러 저 탐욕스런 늙은이에게 몸을 내맡기고 사는 건지.
  "곧 가요!"
  난 가슴에 붕대를 감으면서 퉁명스런 비음으로 대답한다. 적어도 저 크레테의 공주라는 저 계집애는 내가 아이카루스라는 이름의 남자아이라고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타이달로스는 내가 남자처럼 보이게 하고 다니도록 지시를 내린 적이 있었다. 지금은 그걸 잊어버렸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놈의 비위를 거스르는 건 절대 추천할만한 일이 아니니까.
  "무슨 일예요? 아침부터."
  타이달로스는 역시 내 상상대로 그 계집애와 함께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로 날 불렀었나 보다.
  "창고에 가서 래비린토스의 지도를 가져오려무나."
  그는 게슴츠레하게 뜬눈으로 날 쳐다보면서 얘기한다. 계집애는 날 보고는 이불을 끌어당겨 드러난 어깨를 가리며 얼굴을 붉히고. 쳇, 별꼴이군. 그렇지만, 네 덕분에 그 자리에 내가 있지 않아도 되니 감사하는 맘도 있다구.
  "예, 그리고요?"
  "아, 날개 배양 상태를 봐라."
  날개. 날개. 빌어먹을 날개. 타이달로스는 미노스가 하사해 준 이 영지에서 평생 호의호식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자, 그 탐욕스런 식욕과 색욕을 거침없이 드러내었고, 이전과는 달리 전혀 쓸데없는 것을 만들어대며 연구랍시고 국왕의 금고에서 황금을 축내고 있었다. <날개>도 그 중의 하나로 녀석은 사람에게 날개를 달아 하늘을 날게 하겠다고 큰소리를 탕탕 치고 있는 것이다.
  미치광이 老 과학자. 그렇지만 나의 아버지. 그리고 이미 죽은 내 아들의 아버지.
  "알았어요."
  쾅 소리가 나도록 침실의 문을 닫고 돌아서는 내 귀에 어울리지 않게 앙탈을 부리는 계집아이의 소리가 들린다. 그래, 그렇게 그 늙은이를 만족시켜 주렴. 내가 그 늙은이를 죽이기 전에.
  보글거리는 배양액이 가득 담긴 질그릇 토관 속에서, 등에 날개를 단 채로 눈을 감고 몸을 웅크린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물보다 가벼운 배양액의 밑에는 두꺼운 바닷물 층이 쉴 새 없이 흐르면서 저 빌어먹을 날개 단 남자가 흘리는 분비물과 배설물들을 쓸고 에게해의 바다로 나가 저 바다를 오염시킨다. 또 그 바닷물의 아래에 있는 두꺼운 납유리는 물과 배양액과 저 실험의 희생양이 아래로 쏟아져 내리는 것을 막아주고 있다.
  "아름다워."
  확실히 아름답다. … 그리고, 구역질난다. 저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청년의 얼굴과 몸을 보라. 불과 2달 전만 해도 갓 태어난 주먹만한 갓난아이였는데. 그는 내 아들인데!
  빌어먹을, 나와 내 아버지의 아들. 나의 아들이자 내 동생. 저 저주받은 아이는 채 눈도 뜨기 전에 타이달로스의 손에 저런 꼴이 되고 말았다.
  날개를 키우는 숙주. 표본 3번.
  그것이 지금의 내 아들의 이름, 그리고 내 동생의 이름.
  "미안해…."
  난 머리 위에서, 연두색의 배양액에 잠겨 자고 있는-혹은 죽어있을지도 모를-내 동생이자 아들에게 중얼거렸다.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은 채로 올려다보면서.



  그 계집애가 돌아갔다. 그제 타이달로스가 날려보낸 까마귀가 가져간 편지에는, 크레테의 공주의 정성과 도움으로 겨우겨우 미노타우루스를 해치울 방법을 발견했노라고, 그 기쁜 소식을 전하게 되어 미천한 장인 타이달로스와 그의 아들 아이카루스는 기뻐 어절 줄을 모르고 있으며 공주님께 그 방법과 래비린토스의 지도를 드렸으니 이젠 공주님의 안전만을 걱정하라는 내용이 씌여 있었다.
  분명히 알고 있다. 내가 쓴 것이니까.
  오늘 아침, 새벽의 여명 속에서 공주는 나에게 말했다.
  "아이카루스님, 그 동안 신세 많았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봐, 난 너 도와준 것 없다구. 그 보기 싫은 상판을 어서 내 눈앞에서 치워버려. 애인을 구해낼 방법으로 그 늙은이에게 몸을 주는 것 말고는 아무 생각을 못 했던 거냐? 멍청한 계집애. 그녀가 나에게 자신이 타이달로스에게 몸을 내맡긴 이유를 울면서 얘기하던 그 날 밤. 난 타이달로스에게라기보다는 이 철없는 계집아이에게 화가 났었다.
  "안녕히……."
  공주라는 계집애는 배에 오르면서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이 섬에서의 생활이 서러워서? 아님 그 늙은이에게 농락당한 것이 분해서? 집에 가는 것이 기뻐서? 아니면… 사랑하는 남자를 구할 수 있게 되어서?
  같이 배에 오르고 싶었다. 나도 저 늙은이의 손을 벗어나 나만의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내 아들, 내 동생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이 섬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이런 배로는 어림도 없을 테지만. 타이달로스의 감시자들이 모두 잠이 들었을 때에, 쾌속 갤리선이라도 있어야 겨우 이 곳을 빠져 나갈 수 있으리라. 그의 교활한 감시자들은, 항상 굶주려 있으니까.  
  그렇지만, 이번처럼 타이달로스의 욕망이 가득 채워진 밤의 끝자락이라면, 또 나가는 자가 그 욕구를 채워준 당사자라면, 그의 눈은 짐짓 그 움직임을 모른 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저 공주는 인신우두(人身牛頭)의 괴물이 된 자기 연인을 구할 수 있는 마법의 약물을 담은 호리병을 가슴에 품은 채로 크레테로 돌아 갈 수 있는 것이리라.



  "기류가 좋구나."
  수치스럽게 지낸 지난밤의 기억을 어둠이 빠져나가는 창문으로 던져 버리고 싶었지만, 등뒤에서 넘어오는 그 목소리를 들으니 수치스러운 기억이 그 목소리에 밀려 다시 머릿속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욕지기가 밀려나오는 것을 억지로 눌러 내리면서, 짐짓 밝은 목소리를 꾸며 말한다.
  "그래요? 오늘 하실 건가요?"
  "… 그래……. 그럼 '날개'의 배양 상태를 보고 오너라. 토관을 가득 메울 정도의 크기는 되어야 할 것이야."
  난 일어나 그의 눈앞에서 옷을 입는다. 제발, 토가의 천이 더 두꺼워서 그의 빌어먹을 시선이 나의 몸에 닿지 못하게 해 주길 바라지만.
  토관 속에, 푸르스름한 액체에 담겨 잠을 자고 있는 나의 아들, 나의 동생. 머리카락은 이미 키보다 더 자라 바닷물에 살랑거리고 흔들리고 있었다. 푸른 용액 속에서, 그 머리카락은 묘하게도 생기 넘치는 연두색으로 보인다. 죽은 자로부터 발해지는 생기라. 날개는, 이젠 그의 존재보다도 더 중요한 의미가 되어버린 저 날개는 이제 토관을 거의 가득 메울 정도로 커져 있다. 그것이, 저 아름다운 날개가 의미하는 것은 이제 내 아들의 몸이 존재할 가치는 없다는 것. 이미 다 자란 기생생물은 숙주를 필요로 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거부 반응은 없을거야. 일부러 네 동생이자 아들의 몸을 숙주로 택했던 거니까. 걱정하지 마라, 아이카루스."
  나에게 최면 주술을 걸고 효력이 나타나기 직전에 타이달로스가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건넸다. 그것 때문에 날 범하고, 내 아들이자 동생인 그 아이의 몸까지 그 지경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타이달로스, 나의 아버지이자 저주받을 남편이여. 이번 일로 내가 깨어나지 못하고 죽기를 바라는 것이 좋을지도 몰라. 내가 살아난다면, 당신을, 아니, 널 죽이고 싶은 마음에 미쳐버릴지도 모르겠으니 말이야…….

  똑.
  똑.
  똑.
  계속되는 물방울 소리. 사방이 깜깜하다. 난 죽은 것일까? 아니면? 조심스럽게 눈을 떠보니 눈물이 날 정도로 밝은 빛이 내 망막을 파고든다. 답답한 느낌이 들어 몸을 움직이려 했더니 내 몸은 엎드린 자세로 묶여 있었다.
  바스락.
  등뒤에서 뭔가가 움직여 소리가 난다. 뭔가 묵직한 것이 달려있다. 아프다……. 이 빌어먹을 것이 뭐길래.
  - 날개.
  머릿속에서 그것이 대답한다.
  - 난 날개야.
  날개…? 내가 놀라서 귀를 기울여본다. 귀로 들리는 소리는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 네 아들이자 동생의 몸에서 그의 피와 살을 먹고 자란 날개. 너도 날 알지 않아? 매일 날 만나러 왔었잖아?
  닥쳐. 널 보러 간 게 아니라 내 아들을 만나러 간 거야. 그리고, 내 동생을 보러 간 거고. 저 망할 타이달로스의 실험에 희생된 어린 생명을 애도하기 위해서 간 것이었어. 너 따위를 보고 싶은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어.
  - 모른 채 하지마. 네 아들이자 동생의 몸에서 자란 나는, 네 동생이자 아들의 몸이야. 그렇다면 나를 보러 온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가?
  닥쳐, 닥쳐! 닥치라구!
  난 이를 악 물고 몸부림친다. 날 침상에 묶어놓은 가느다란 가죽끈이 살갗을 찢고 피에 젖어 더 큰 상처를 부르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 가죽끈이 느슨해지는 것도 느껴진다.
  풀었다!
  난 일어서자마자 손목과 발목, 목에서 피를 흘리면서 문을 박차고 성의 테라스로 나간다.
  넌 날개지?
  - 그럼, 난 날개야.
  날 수 있지?
  - 그럼, 날 수 있어.
  그럼 날아! 날아! 제발 날 이 빌어먹을 성에서, 저 저주받을 나의 아버지의 탈을 쓴 내 저주받은 남편으로부터 날 데리고 가 줘!  
  - 어렵지 않아. 어렵지 않지. 이렇게, 이렇게 쉽잖아?
  나의 몸이 쑥, 하늘로 솟아오른다. 잠시 쉬는 것같다가 다시 한 번 쑥, 그렇게 나의 몸은 하늘로 날아오른다.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니 타이달로스의 교활한 감시자들은 그 까만 주둥이를 밤의 옷자락과 같은 색의 날개에 파묻고 아직 달콤한 잠의 독을 마시고 있다.
  이 때다. 확실하게 이 곳을 벗어날 수 있는 때가.
  더 힘을 내! 힘차게 솟아올라! 저 밤의 날개를 가진 흉칙한 새들이 쫓아오지 못할 정도로!
  - 그래, 그래. 날개란 존재는 날기 위한 것. 이 이상 뭘 바라겠어?
  동이 터 온다. 위에서 보는 일출은 신기한 걸. 지평선이 둥그스름하게 휘어져 있고 그 너머에서 실험실의 풀무 바람에 힘을 얻은 불꽃이 도가니의 틈으로 비집고 나오는 것 같은 불덩어리가 솟아오른다. 넓게 퍼져 있는 것 같더니 급기야는 둥글게 뭉쳐서 태양이 된다.
  - 빛이 느껴지는데? 저거 태양인가?
  그래.
  - 빛… 난 높은 빛을 쐬면 안 돼. 아직 적응이 안 되었다구.
  높은 빛?
  - 높은 빛. 그 빛은 날 태우고 쓰라리게 하지. 내 몸이 죽게 돼.
  그럼?
  - 내려가야 해. 아래로 내려가야 해.
  그럼, 내려가. 떨어지면 안 되잖아.
  - 나는 날개. 날아오르는 것은 알지만… 내려가는 법은 몰라.
  어떡하지?
  - 내려가야 해. 아, 내 몸의 끝이 타고 있어. 깃털들이 빠져나간다…….
  내려가야 해.



  타이달로스는 습관대로 늦게 일어나 버린 자신에게 투덜거리며 아이카루스의 방으로 들어갔다. 날개의 접합이 끝나고 조직 융화제를 주사한 채 재워 놓았던 그의 딸의 상태를 보러 갔던 것이다.
  "이런, 망할 계집애!"
  아이카루스의 침대는 비어 있었다. 묶어놓았던 가죽끈은 피가 흥건히 묻은 채 풀어져 있었고.
  "안 돼, 아직 자외선에 대해서는 방책을 세워두지 못했단 말이야. 햇빛을 쐬면 안 돼. 젠장.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나?"
  타이달로스는 날개를 잃은 슬픔에 잠겨 그 자리에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일생을 바쳐 만든 날개와 그에 적합한 샘플을 동시에 잃은 그의 상심은 너무나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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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워커에서 활동하시는 kain님께서 보내주신 단편입니다.
이 자리를 통해 감사말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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