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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그가 엄밀한 학자라는 사실이었다. 과에서 가장 근엄한 인상을 주는 진 교수님의 세미나에 들어갈 때면 우리는 말을 함부로 흘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자주 걸리는 함정은 nationalism의 번역어였다. 민족주의라고 해 버리는 게 좋을 때가 있고, 그냥 내셔널리즘이라고 해 두는 게 좋을 때가 있었다. nation은 때로는 민족으로 번역해야 하지만 생물학적인 의미가 강한 ethnic group과는 구분해야 할 때가 많았고, 어떤 경우에는 그냥 국가라고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경우에 적절하게 그 말들을 번역해서 쓸 수 있는 대학원생은 거의 없었다. 진 교수님은 실수를 쉽게 용납하지 않는 편이었다. 밤이라도 새면서 책을 읽어오느라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지 못하는 상태인 어떤 대학원생이, 자기 입으로 불쑥 튀어나와 버린 말을 다시 주워 담아 보기라도 하려는 듯 허공에 팔을 내젓고 있는 순간에는 어김없이 진 선생님의 날카로운 지적이 이어졌다. 지적은 때로는 혼을 쏙 빼 놓을 만큼 오래 계속되곤 했다. 충분히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신입생 중에는 스물 몇이나 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찔끔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 모라는 후배가 어느 날 들려준 꿈 이야기 하나가 진 교수를 대하는 우리의 마음 자세를 가장 잘 대변해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이 후배는 어느 날 진 선생님의 세미나에서 거의 쫓겨나다시피 심하게 혼이 났던 것이었다. 그 전날에, 그는 1차대전 초기 전황을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연구실에 비치된 세계지도에서 독일-프랑스 국경 부근을 찾아 열심히 자로 재더니 이런 이상한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계산을 해 낸 이 모 군은 주위의 극렬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문건을 다음날 진 교수의 세미나에 가지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 사본을 우리 모두에게 나누어 주더니 발표해 버렸다. 진 선생님은 그의 발표를 말없이 듣고 있다가 중간쯤 가서 그 문건을 손에서 놓더니 눈을 감고 팔짱을 낀 다음 고개를 숙였다. 발표가 끝나고 그 눈이 번쩍 열렸을 때 우리는 촉망받는 대학원생 이 모 군의 파멸과 몰락 비슷한 것을 직감했는지도 모른다.
  “좋아. 일단 몇 가지 물어보지. 행군 거리가 늘어나면 전투력이 감소한다는 건 클라우제비츠 이론을 보고 한 건가?”
  “예. 공격 측은 적 영토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전투력이 감소한다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 선생님의 질문이 이어졌다.
  “단위 거리 당 전투력 감소율을 f로 잡은 건 클라우제비츠의 friction(마찰)이라는 단어 때문이겠군. 자네 클라우제비츠는 읽었나?”
  “예? 예. 읽었습니다.”
  이 군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진 교수는 이번에도 오래 기다리지 않고 지적의 포문을 열었다.
  “클라우제비츠의 friction이 전투력이 감소되는 현상을 설명하는 말이던가? 내가 알기로는 순수한 폭력의 논리가 작동하지 못하게 되는 의외의 상황들을 설명하는 단어인 것 같은데. 영어로 읽었나? 어디서 이상하게 번역된 해적판으로 읽었나. 내 거기까지 관심은 없지만은······.”
  이렇게 시작된 지적은 대략 20분 뒤에 리에주(Liege)의 첫 번째 e 위에 점을 안 찍은 것에 대한 신랄한 지적을 끝으로 겨우 마무리되는 듯 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다른 화제로 옮겨가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뒤에 진 교수는 갑자기 생각난 듯 하던 말을 멈추고 이 군을 보면서 말했다.
  “클라우제비츠가 전쟁 이론을 기하학적인 계산으로 바꾸는 짓거리를 반대한다고 쓴 부분은 읽었나? 자네가 본 책에는 없었어? 그렇게 수식으로 복잡하게 적어 놓고는 우리한테 어쩌라는 건가? 겁주는 건가? 수학 좀 했다고 자랑하는 건가?”
  그쯤 되자 자신감 넘치던 이 군의 피부색도 붉은 빛을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진 교수의 말은 10분쯤 더 이어졌다. 그러다 세미나 시간이 아직 30분이나 더 남아 있었을 때쯤 진 선생님은 급기야 책을 챙겨 들고 세미나실을 휑하고 떠나버린 것이었다. 이 모 군은 다행히 울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그의 영혼이 지지대를 잃고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우리는 그를 혼자 있게 남겨 두고 조용히 방을 나왔다.
  다음날 이 군은 나를 보더니 이유 없이 실실 웃기만 했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도 대답이 없었던 그는, 한참 뒤에야 전날 밤에 꾸었다는 꿈 이야기를 꺼냈다. 꿈에 이 군은 다음날 세미나를 준비하기 위해서 연구실에 혼자 밤을 새다시피 앉아 있었다. 화장실에 가려고 어두운 복도에 나서자 저 뒤쪽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겁에 질려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원래키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커 보이는 진 선생님이 서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자기 손에 칼이 쥐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칼을 거대한 진 선생님의 배에 푹 찔러 넣었다. 그런데 피가 나지 않아서 당황스러웠다고 그는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는지 알아?”
  그는 정신을 반쯤 빼 놓은 사람처럼 실실 웃으면서 말을 계속 이어갔다.
  “고개를 들어서 얼굴을 보니까 진 교수가 허허허허 웃고 있는 거야. 그러더니, ‘자네는 칼 쥐는 법부터가 틀려먹었어. 찌를 때 손가락을 안 다치려면 손잡이하고 칼날 연결되는 부분에 보호 장치가 있는 칼을 가지고 오던가, 손잡이 끝을 잡고 밀던가 했어야지.’ 하면서 자기 배에 꽂힌 칼을 뽑아서 내 배에서 푹 쑤셔 박는 거야.”
  그러면서 이 군은 실실 웃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는 경악하고 말았다. 이 군은 곧 휴학계를 내고 미국에 있는 부모님에게로 돌아갔다.
  미국에 가서 두 달 만에 그는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그러니까 아마도 돌아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는 행복하게 잘 지낸다고 말했다. 진짜로 행복해 보이는 사진도 우리는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떠나가서 행복해지는 데 성공한 그를 보면서 남겨진 사람들은 생각에 잠겼다. 나는 왜 여기에 이렇게 버티고 있는 걸까? 다른 길을 찾을 용기가 없어서일까? 계속 학교에만 있어서 내가 학교를 가장 좋아한다고 생각하게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것은 한두 명만이 하는 생각이 아니었다. 그 무렵의 우리는 모두 비슷한 종류의 음울한 공감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 선생님이 엄밀한 학자였다는 사실은 비난의 사유가 아니라 존경의 원천이 될 수 있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사실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빼면 살아남을 확률 자체도 대단히 높았다. 그러니까 시간이 적당히 지나고 나면 우리는 진 교수에게 당했던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할 수가 있게 되리라는 기대를 할 수가 있었다. 물론 적당하다는 것이 어떤 경우에 적당하다는 것인지는 안 겪어본 사람은 알 수 없다.
  진 선생님이 등장하는 악몽은 우리의 수요일 아침을 더욱 음울하고 비굴하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오후 1시에서 4시까지 있는 세미나를 준비하려면 점심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7명이 다 아침은 별로 챙겨먹지 않는 편이라고 치더라도 2명은 전날 저녁부터 위가 떨려서 아무것도 못 먹겠다며 굶기 시작했다. 수요일 오전의 연구실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머리를 감지 않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세미나가 끝나고 나서 우리끼리 뭉쳐서 다니기 시작한 술집에서는, 어느새 우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내 평생 술집 단골이 되어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몇 달을 보내고 나면, 효과가 있었다. 더 행복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더 음울해진 만큼 눈이 맑아졌다. 뭔가 보는 눈이 길러지는 느낌이었다. 물론 그러고 나서는 가끔 허깨비를 본다. 시력도 떨어졌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을 보는 눈이 맑아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뭔가가 맑아지긴 맑아졌다.
  그날도 나는 어김없이 진 선생님의 악몽을 꾸고 나서 가벼운 가위눌림에 시달리다 잠에서 깨어났다. 가을 학기가 다 마무리되어 가는 12월의 아침은 해가 짧은 만큼 쌀쌀했다. 꿈에서 3시간을 날 잡아 잡수 하고 시달린 후에 눈을 떴을 때, 그 모든 것이 몇 시간 뒤에 다시 펼쳐지리라고 상상하는 것은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나는 역시나 아침을 거르고 일찌감치 학교로 향했다. 나는 사람들이 들이닥쳐서 연구실 프린터 앞에 줄을 서기 전에 그날 발제문과 기말에 발표할 페이퍼 중간 발표문을 미리 출력해 놓기 위해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오타는 없는지, 인용하고 나서 주석은 제대로 달았는지를 검사하고 나서 나는 과감하게 그것들을 프린트했다. 그것도 사람 숫자대로, 그러니까 더 이상 고치지 않겠다는 의미의 최종 본으로 프린트했다. 다른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지 않는 나를 신기하게 생각했다. 그것은 분명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위험하기는 끝까지 잡고 있는 쪽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뒤에 줄을 서서 조바심을 내면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여유 있게 마무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실수를 하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혹시 종이나 토너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촉박한 시간에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하는 불편까지 생긴다.
  무엇보다도 나는 폭풍 전야의 그 고요한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어쩔 수 없는 최종 본을 만들어 놓고 나서, 미리 세미나실에 올라가 난방기를 켜 놓고 자리를 잡고 앉아 있으면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그러면 사람들이 시간에 맞춰서 나타날 때까지 테이블에 엎드려서 잠을 잘 수가 있었다. 전날 밤의 모자랐던 잠을 생각하면 이 시간 동안의 잠은 꿀맛이었다. 점심을 먹을 수 있을 만큼 대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졸음은 끝없이 밀려왔다. 밖에는 눈이 꽤 오래 내리고 있었다. 나는 세미나실 한쪽을 가득 채운 커다란 창문을 통해 보이는 눈 내리는 풍경을 말없이 앉아서 바라보고 있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조금 있다가 누군가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세미나 시간은 아직 30분이나 남아 있었기 때문에 나는 시계바늘을 몽롱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가 그 모양 그대로 다시 잠이 들었다. 진 선생님은 언제나 정시보다 7분 늦게 들어오신다. 처음에는 저런 분도 시간을 어기실 때가 있구나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시보다 늦을지언정, 아무튼 진 선생님이 나타나는 시간의 오차는 15초 이내이다. 7분을 늦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 나름대로 무슨 곡절이 있는 것인 셈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눈을 감은 채로 엎드려 있는데 아까 들어온 사람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소리 나는 곳의 위치가 선생님 자리 쪽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는 화들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진 선생님은 내 행동에 순간 깜짝 놀라신 듯 하더니 시선을 계속해서 테이블 위에 고정시킨 채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찍 나왔어. 감기 걸렸나? 피곤한가 보네.”
  전날 잠이 부족해서 졸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은 진 교수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가 두세 시간밖에 못 잔 날에는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괜찮습니다. 일찍 나오셨네요.”
  그렇게 대답하고 나자 다시 침묵이 내리깔렸다. 바람 없는 바깥에 눈이 내리는 소리쯤은 커다란 유리창에 전부 다 방음이 되고 있었다. 나도 책을 펴서 뒤적거렸다. 그러나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졸음이 밀려왔다. 전설의 모 선배처럼, 진 교수님 수업 중에 바로 앞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게 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막상 닥치고 보니 왜 그렇게 되는지 알 것 같았다.
  갑자기 진 교수가 침묵을 깨고 나에게 말을 건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나는 다시 순간적으로 잠이 확 달아났다.
  “읽어 봤어?”
  “예.”
  당연히 읽지 않고 들어올 수는 없었다.
  “어때?”
  간결한 질문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재미있었습니다.’ 하고 튀어나오려는 것을 틀어막았다. 그렇게 대답했다가는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기도 전에 만신창이가 되어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새벽까지 읽었던 글들을 떠올려 보았다. 잠이 부족해서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 주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1차대전 첫 해인 1914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와 러시아 군이 맞서 싸웠던 카르파티아 산맥의 눈 덮인 전장을 떠올려낼 수 있었다.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있었던 전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래? 어떤 점이?”
  짧고 강한 어투의 반문. 시작이었다. 혼자서 30분을 이런 식으로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실제 교전보다는 얼어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는 이야기가 재미있었는데요. 일단 안 죽고 오래 많이 버티는 쪽이 이기는 싸움이라는 거잖아요. 가끔 영화에서 소련군인들 곰같이 뚱뚱한 외투를 보면 저거 입고 어떻게 싸웠나 싶은데, 이런 식으로 싸우려면 그 정도는 돼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던데요. 그래도 얼어 죽으면 늑대 밥이 된다는 건 좀 현실성이 없는 것 같습니다. 1914년이면 그 정도로 옛날은 아니잖아요.”
  일단은 거기까지만 말했다. 그리고 반응을 살폈다. 진 교수님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순간 위기임을 느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자네, 군대는 안 갔다 왔지?”
  “갔다 왔습니다.”
  “그래? 뭘로 갔다 왔지? 육군이었나?”
  “아니요. 공군 장교로 갔다 왔습니다.”
  “그래?”
  그는 묘한 미소를 떠올리더니 말을 이었다.
  “요즘 공군은 힘들지 않지? 시험 봐서 갔나? 시험 봐서 간다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소리겠지. 요즘 애들은 좀 너무 편한 걸 찾드라. 군대 가서 눈은 치워 봤나?”
  나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오래 침묵하는 것은 전혀 좋을 게 없었다.
  “너무 많이 오는 날에는 장교들도 나가서 치웠습니다.”
  “그랬겠지. 폭설이 내릴 때도 있겠지. 그런데 요즘 눈 내리는 거 가만히 보면 옛날같이 그렇게 많이 오는 일은 별로 드문 것 같애. 자네도 뭐 3년 있으면서 서너 번은 해 봤겠지. 그렇게 많이 와서 일손이 모자랄 정도라고 할 것 같으면은 그날 일과는 다 접어놓고 다들 삽하고 그 넉가래라는 걸 들고 나가서 해질 때까지 붙어 있을 정도는 돼야 된다는 얘기인데. 그런 날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어. 해가 갈수록 그래. 지구 온난화 온난화 하는데 그게 다른 걸 봐서는 감이 잘 안 잡히는데, 눈 내린 걸 과거 우리 시대하고 비교해 보면은 이게 무슨 현상인지 감이 좀 잡히데. 그냥 과학자들 이야기하는 수치 변화 그래프로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 감을 잡을 수 있는 감들이 좀 있어야 사회과학도 좀 눈에 보이고 그래. 그러려믄은 나이를 좀 먹어야 되겠지. 나이를 먹는다는 게 고 절대적인 시간을 들여서 책을 많이 읽고 생각을 많이 한다는 면에서도 그렇지만은 내 이야기는 수십 년을 단위로 해서 이루어지는 변화를 직접 체험한다는 게 어떤 의미에서는 책에서 읽는 것보다는 더 공감이 갈 거라는 이야기지.”
  “예전에는 눈이 더 많이 왔나요?”
  나는 효과적으로 화제를 돌리는 데 성공한 것 같아서 안도감을 느꼈다.
  “아이구. 우리 때는 말도 못했어. 가난하면 더 춥다 그러지. 옛날에는 못 입어서 그런지 춥기도 더 추웠던 것 같어. 도시에만 있으면은, 열섬이라 그러지. 도시가 시골보다 기온이 1, 2도 더 높다고. 또 뜨뜻한 데 들어갈 데도 도시가 더 많지. 그렇다고 칩시다. 그래도, 내 생각에는 아마 그 문제만 갖고는 해결이 안 되는 데가 있을 거야. 기온이 더 낮았다고. 눈도 더 많이 왔어. 내가 군대 있을 때는 눈이 왔다하면 무릎까지 푹푹 빠졌지. 밤에 눈이 오면은 새벽에 눈 치우라고 다들 깨운다고. 그러면 그거를 깜깜할 때부터 나가서 치는데, 치는 동안 눈은 또 내리고 있지. 치다가 뒤를 돌아보면 눈 위에 발자국이 없어져버린 거야 이게. 그새 덮여버리는 거지. 눈이 밟으면 금방 얼잖아. 얼면 또 그걸 삽으로 깨야 된다고. 삽으로 얼음인지 언 땅인지를 뚜드려서 깨야 되는데, 이거를 칠 때마다 삽이 울려가지고 손이 나중에는 얼얼해져.
  춥기는 또 좀 추워. 옷도 변변하지가 않지. 옷감 자체가 요즘하고는 달랐다고. 모양만 봐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 옷이 그 옷이지. 동상 걸리는 사람들이 수두룩했지 뭐. 기온이, 그때는 평년 기온이 지금보다 더 떨어졌었거든. 그래서 눈 치울 때 말을 하지 말라 그랬다고. 전부들.”
  “말은 왜 못하게 했나요?”
  “거 자네는 모르지? 여러분들 세대만 해도 그런 건 모른다. 그때는 하도 추워서 입김이 나오면 바로바로 얼어버렸다고. 군대 와서 겨울을 안 나 본 사람들은 눈 치면서 입으로 숨을 쉬거든. 힘드니까 입으로 숨을 쉬었겠지. 그런데 그렇게 한참을 제설작업을 하다 보면 걔들만 앞에서부터 눈에 덮이는 거라. 본인은 힘드니까 잘 모르는데, 수증기가 공급이 자꾸 되면은 자기 얼굴 앞이 바로바로 얼어가지고 눈이 돼 가지고 자꾸 발밑으로 떨어져요. 기진맥진해 가지고 눈 감고 입으로 헥헥거리다 보면은 어느새 발이 눈 속에 폭 빠진다고. 그래서 겨울 되면은, 요즘은 상상도 못하는 일이지만은, 병력이 중대마다 몇 명씩 줄어 있다고. 나중에 눈 녹고 발견되면 그걸 어떻게 해? 실종 처리하는 거지 뭐. 그 옛날에는 그래도 군대가 아직 우리 사회에서 끗발이 있었기 때문에 요새같이 의문사 진상 조사 위원회 같은 걸 만들어서 군부대 안에 들어가서 조사하겠다 그런 이야기는 꺼내기도 힘들었지.”
  거기까지 듣고 나서 나는 당혹감에 사로잡혔다. 이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내가 지금 혼나고 있는 것일까.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어야 되는 것일까. 나는 진 교수의 표정을 살폈다. 진지했다. 그리고 멀쩡해 보였다.
  “자네 형설지공이라고 알지?”
  “예.”
  “형설지공(螢雪之功)할 때 형이 뭐야? 반딧불이지. 그 불을 모아서 밤에 책을 읽었다는 이야기인데, 그러면 설은, 눈 가지고 어떻게 했다는 이야기인지 아나?”
  “잘 모르겠습니다.”
  “나도 몰랐어. 눈[雪]에 반사된 빛으로 책을 봤다는 얘긴데.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상상이 잘 안 가더라고. 그걸 내가 언제 알았냐면은, 군대 가서 알았는데. 병장 갓 달고 얼마 안 돼서 알았어. 경계 근무를 밤에 돌아가면서 서는데 깜깜한 데 서서 할 게 뭐 있겠어. 책을 쪼끄만한 걸 들고 다녔거든. 요새도 병장되면 무서울 게 없다 그러지. 근무 중에 딴 짓 한다 그러면 말도 안 되는데, 나는 그렇게 했어. 다들 그랬지 뭐. 2인 1조로 포스트에 가서 서 있는데, 사실 지붕 정도만 있는 데였거든. 말이 포스트지. 겨울에 바람이 그냥 들이쳤다고. 주변이 다 깜깜하고 마음대로 불을 킬 수도 없으니까 달뜨는 날에만 그 어두침침한 데서 뭘 좀 들여다 본 거지. 요즘 생각하면 그때 뭘 그렇게 많이 보겠다고 추운 데서 그러고 있었는지 몰라. 군대에서 3년 동안 공부한답시고 들여다 본 거 다 합쳐 봐야 그거 제대하고 1주일만 앉아서 보면은 다 보거든. 근데 이게 이게 그때는 그걸 알 턱이 없지. 그래서 옆에 쫄따구보고 잘 보고 있으라 그러고 달빛 아래 눈을 이렇게 뜨고 영어 단어 같은 걸 봤다고. 쫄따구보고 보라고 하는 게 적군을 보라는 게 아니라 하사들, 고 다음에 중사나 상사쯤 되는 간부들, 한 번씩 장교들 지나다니는 거 감시 잘 하고 있다가 혹시 내가 졸고 있으면 깨우라는 소린데. 그렇게 일러놓고 우리는 자기만의 세계에 빠지는 거지. 그렇게 한참을 서 있는데, 그때 달도 보름달도 아니었을 거야. 상현인지 하현인지 반달이 떠 있었는데, 한참 영어 단어를 외다 보니까 이게 이상하게 점점 밝아지는 거야.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정신을 탁 차려서 보니까, 머리 위에는 지붕이 있으니까 그 옆으로 눈이 쌓여 있는데, 우리 포스트를 둘러싸고 내 턱 밑에까지 오는 높이로 쌓여 있는 거야. 내가 책을 이렇게 바짝 들고 봤거든. 침침하니까 별 수 없지. 그래 한 한 시간이나 됐나. 그동안 눈이 무릇 밀에까지밖에 안 쌓여 있던 게 그까지 쌓였으니까 한 100센치는 왔지 싶은데. 그러고 있다가 구름 사이로 달이 비치니까 한밤중인데도 온통 다 환하지. 눈이 반짝반짝 했거든. 그래 거기에 취해서 넋을 잃고 이렇게 있는데, 갑자기 정신이 버쩍 들더니 이 눈을 어떻게 뚫고 돌아가나 그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옆에 쫄따구한테, 당신 도대체 이렇게 될 때까지 왜 아무 말도 안 했소 그랬더니, 허허, 그때는 그렇게 점잖게는 말 안 했지. 된소리로 된 말을 좀 듣더니 이 쫄따구라는 작자가 하는 말이 ‘진 병장님 공부하실 때 절대로 방해하지 말라고 들었습니다.’ 그래 거기 갇혀서 구출될 때까지 사흘 동안 눈만 파먹고 쪼그리고 버텼지.
  카르파티아에서 죽으면 늑대 밥이 됐다고 그랬는데, 내가 늑대는 못 봤어도 그때 여우는 봤어. 그때만 해도 여우들이 산에 흔하게 살았거든. 여우들이 영물이잖아. 그래서 사람이 있는 데서는 일단 눈에 띄는 데 나타나지를 않아. 그런데도 우리가 한 이틀을 꼼짝없이 갇혀 있으니까 먹을 거 구하러 나온 여우가 얼씬얼씬 하는 게 보여. 밤에는 눈에 불 들어오는 게 보이는데 다음날 아침에 보니까 낮에도 나는 없는 사람인 것처럼 하고 돌아다니더라고. 가만 보고 있으니까 이 놈이 눈 위를 살짝살짝 걸어 댕기는데, 저 숲 쪽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이렇게 보고 있는 거라. 호랑이가 가만히 보고 있으니까 이 쪼끄만 여우 놈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맹수가 보고 있는데 눈밭에 드러누워서 일광욕을 하고 있거든. 기가 차는 거라. 그렇게 한참을 보고 있다가 기회다 싶었는지 이 호랑이가 갑자기 훌쩍 날아오르는데. 호랑이가 얼마나 날 수 있는지 모르지? 제자리에서 서전트 점프로 한 2미터를 위로 솟구치는데 그런 장면은 나도 그때 처음 봤어. 그때는 호랑이가 많았거든. 많다고 해도 한 마리 사냥 구역이 워낙 넓으니까 동네마다 한두 마리나 새끼 몇 마리밖에는 없는 건데, 마을에 피해가 많았지. 이놈이 소를 입에 물고는 담벼락을 훌쩍 뛰어 넘거든. 힘이 아주 세. 그래 그 호랑이라는 놈이 훌쩍 날아서 달려드는데 내가 가만 보니까 여우란 놈이 옆으로 두 바퀴정도 굴렀나. 호랑이 앞발을 살짝 비켰지. 그 다음에 어떻게 됐는지 아나? 호랑이가 감쪽같이 사라진 거 있지.”
  “사라졌어요?”
  “눈 속에 파묻혔지 뭐. 허허허. 백두산 호랑이가 엄청나게 거구거든. 소보다 더 크니까. 여우 정도 돼야 눈 위에서 걷지, 사람만 해도 푹푹 빠지거든. 여우라는 놈이 일어나서 몇 걸음 떨어져 있다가, 호랑이가 허우적거리다가 지친 것 같아 보이거든. 그러니까 가까이 가서 코를 킁킁거리다가 돌아서서 갈 길을 가는데, 영물은 영물이야 그 놈이.”
  나는 말문이 막혔다. 진 선생님의 천진난만한 얼굴을 보면서, 나는 군대 허풍이라는 게 저런 찔러도 먼지 안 나고 털어도 피 한 방울 안 흘릴 것 같은 사람보다도 더 강한 마력을 갖고 있단 말인가 하고 생각했다. 도무지 혼자 듣기 아까운 이야기였다. 내가 그런 이야기를 들었노라고 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 뻔했다. 진 선생님이? 설마!
  그의 이야기는 일단 거기에서 끝났다. 누가 세미나실 문을 열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세미나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다들 그 주의 읽을거리들에 대해서 전혀 과감하지 않은 무난한 해석을 내 놓았고 진 선생님은 불만스럽고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점점 더 답답하고 험악하게 변해 갔다. 세 명이 혼나고 나머지가 총평 비슷한 핀잔을 들었다. 그래도 한 주만 더 버텨내면 종강이었다. 문제는 어떤 페이퍼를 써 내느냐이기는 했지만.
  그날은 세미나가 끝나고 나서도 술자리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다들 기말이라 한두 개 정도의 페이퍼를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시험을 보는 과목도 있었지만 흔하지는 않았다. 학교 여기저기에 있는 도서관으로 책을 구하러 다니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그날 내가 목격한 것을 들어줄 사람을 찾아보았다. 홍 모라는 후배가 잠깐 시간을 내 주었지만 역시 내 말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 주지는 않았다.
  “남자들 군대 이야기가 다 그렇지 뭐. 오빠는 도서관 안 가요? 책 반납할 거 있으면 나 줘요. 할인가로 반납해 줄게. 영어책 1000원, 우리말 책 500원. 아, 마감 1주일만 더 늦춰졌으면 좋겠다. 나 가요.”
  마지막 주는 거의 매일 잠을 충분히 자지 못했다. 페이퍼 때문에 마음이 다급한 것과는 별도로 진도는 진도대로 원래 나가기로 했던 만큼 주저 없이 나가게 되어 있었다. 마지막 수업 전날에는 세 시간 정도 잠을 자고 버스에서 약간의 잠을 보충한 다음에 학교에 가자마자 커피를 주입해야 했다. 설탕도 안 들어간 자판기 커피를 약물처럼 주입하고 나서, ‘수업 때마다 카페인 복용 여부를 도핑테스트처럼 검사한다면 나는 맨날 실격이겠군.’ 하고 생각하면서 짐을 챙겼다. 이번에도 역시 남들보다 일찍 출력할 것들을 출력해서 세미나실로 올라갔다. 창밖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어쩐지 묘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또 나타나실까? 진 선생님.
  수업 시작하기 30분쯤 전에 다시 진 교수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이번에는 준비하고 기다렸던 만큼 침착하게 인사를 할 수 있었다. 한 5분쯤 서로 침묵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내고 있다가 갑자기 진 선생님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자네, 퍼스트 네임(first name)이 뭐였더라?”
  “ㅇㅇㅇ입니다.”
  “어 맞어. 자네가 그 지난주에도 일찍 와서 자고 있던 사람 맞지?”
  “네.”
  “아. 그날 그러고 나서 집에 갔는데 다른 이야기가 또 생각이 나더라고. 요새 눈이 하도 와서 그런가. 잘하면 그 시대로 돌아갈 것 같은 기세로 저 남쪽 지방에는 눈이 왔다고 그러대. 여름에는 비 오지, 겨울에는 그래도 눈 때문에 그렇게 며칠동안 떠들썩하게 될 만큼 골탕 먹는 일이 흔하지가 않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을 깼지. 옛날에는 원래 그랬어. 당연히 겨울 되면 그런 건 다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따로 보도를 안 했지. 옛날식 전통 가옥들 보면은 눈 쌓이는 거에 대비해서 설계가 다 돼 있다고. 양옥집은 어때? 안 그렇지. 요새 우리가 살고 있는 서양식 집들이 다 어디서 생겼어? 유럽에서도 살기 좋은 동네에서 생겼지. 핀란드 같은 데서 만약에 19세기 20세기 패권을 장악해서 그 사람들 식민지가 전 세계로 퍼졌으면 어떻게 됐겠어? 우리도 뾰족한 지붕으로 된 집에서 살고 있었겠지. 지붕이 높고 뾰족하면 눈이 덜 쌓인다고. 그래야 무너지지도 않지. 또 한 가지 중요한 게, 지붕이 문 바로 위에까지만 덮는 게 아니지. 비를 피하려고 그런 건지, 그늘이 지라고 그런 건지 대문을 열고 나갔을 때 바로 비를 맞지 않을 만큼 약간 더 앞으로 나와 있거든. 그래야 밖에 눈이 쌓여도 대문이 열리지. 눈이 많이 쌓이면 마을에 집들이 전부 격리가 되거든. 울릉도 같은 데는 요즘도 그렇게 눈이 쌓이데. 요즘 같으면 격리가 돼도 전화나 잘 터지고 하니까 좀 낫겠지만 그때만 해도 누가 죽는지 사는지 알 수가 없지. 격리되는 공포라는 게 어마어마하다고.
  우리 군대 있을 때 한번은 그렇게 격리될 만큼 눈이 왔었지. 군대에 있으면 눈이 와도 길은 안 막히게끔 미리미리 치우는 작업을 계속 하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격리되는 일은 드물지만 그때는 기지 안에서 다닐 수 있을 정도로만 길이 뚫리고 나머지는 손도 못 댔다고. 기지 바깥으로는 완전히 격리가 됐지. 그런데 그때 무슨 소문이 돌았냐면은 북괴 특작군이 대거 남파됐다는 소리가 돌기 시작했거든. 그런 소문이 돌면 어떻게 반응하게 돼 있어? 안 믿지. 다들 나이 살씩이나 먹은 데다가 그런 거 있지, 안보 불감증. 안전 불감증. 우리는 전쟁이 언젠가 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지금은 아니라고들 그러지. 그래 다들 태평으로 앉아서 한 이틀을 보냈는데 그때 일이 하나 터진 거야. 외곽 순찰을 하던 병장 하나하고 일병 하나가 안 돌아와서 실종됐다고 난리가 났어. 탈영인지 눈에 빠져서 어디 묻혀 있는지 그때는 몰랐지. 그게 작은 일이 아니거든. 비상사태 비슷하게 해 가지고 밤에 간부들부터 해서 다들 나타났다고. 불 비추면서 찾으러 다녔지.”
  “찾았나요?”
  “찾기는 찾았는데, 그때부터 진짜 큰 일이 터진 거야. 얘들이 길에 엎어져서 쓰러져 있는데 피를 흘리고 죽어 있었다고. 직접 보지는 못했는데, 날카로운 칼날에 한 사람마다 두세 군데씩 베이고 찔려서 죽었다고 그러대. 진짜 난리가 난 거지. 그런 식으로 어디 한 군데가 뚫렸는데 어디서 어떻게 뚫었는지 모른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됐겠어? 내부인 소행인지, 누가 침투해 들어온 건지, 어디까지 들어가서 뭘 가지고 갔는지, 아니면 아직도 어디 웅크리고 숨어 있는지 아무도 모르겠지. 그때부터 완전히 뒤집어졌지 뭐.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상부에다 보고들을 안 했지 싶은데. 일단 그냥 실종이라고 했던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던가 그랬겠지. 그랬다가 침투한 애들이 무슨 큰일이라도 한 건 했다 그러면은 줄줄이 모가지지. 모가지 아니라 총살이래도 할 말이 없어지는 거 아니겠어?
  그러니까 어떻게 됐겠어? 윗대가리들이 그놈 잡아야 된다고 눈이 벌게진 게지. 그날부터 교대로 계속 수색 나가고, 나갔다 들어오면 불려가서 면담하고, 면담이 면담이 아니라 조사지. 그때 조사가 어땠는지 알아? 일단 대학 다니다 왔다 그러면 몇 대 맞고 시작해야지. 면담도 하고, 병사들은 또 병사들끼리 모아서 서로 의심 가는 사람 적어 내라 그래가지고 또 쥐도 새도 모르게 두세 명 불려갔다 왔지. 그러고 사흘인가 나흘인가를 잠도 별로 못 자고 시달리면서 있으니까 진짜 욕이 이까지 딱 올라오는 거 있지. 잡히기만 해 봐라, 내 손으로 어떻게 만들어 주마 그랬겠지.”
  그렇게 말하면서 진 선생님은 벽에 걸려 있는 시계 쪽으로 흘깃 시선을 던지곤 했다. 아직 시간은 좀 남아 있었다. 그는 하던 말을 꼭 끝마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여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그는 말을 이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외부에 대해서는 그런 내색을 못하지. 우리가 피해를 당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은 그 불명예라는 건 우리한테도 그대로 해당되는 거였다고. 그래서 말은 못하고 꾹 참고 있는데, 어디 사람 마음이 그렇게 칼같이 나눠지나? 길 뚫리고 나서 총기 수리 때문에 다른 데서 우리 쪽으로 파견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만 보면 그 말을 하고 싶어서 나중에는 이게 서러움이 맺히는 것 같애. 거기다 폭로하는 게 답은 아니겠지. 밖에서 알면 또 불려가서 시달리는 건 마찬가지겠지. 그런데도 걔들 돌아갈 때 차타고 멀어지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데, 눈물이 맺히데.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흐르다가 턱 근처에 가서 또 바로 얼어버리니까 고드름이 맺히는데 그게 웃기다가도 서럽다가도 그래.”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나서 진 교수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는 당시의 기분을 다시 떠올리기라도 하는 듯 오묘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중에 결국 범인은 잡았지. 진범 잡히기 전에 사실은 얼렁뚱땅 해 가지고 범인을 하나 날조해서 만들어 놓고, 위에다 보고할 준비까지 다 돼 있었는데 진범이 나타난 거야. 그때 생각하면 아주.”
  “내부자였나요?”
  “내부자는 아니고, 공중으로 침투했다고 해야 되나.”
  그는 창밖에 드문드문 내리는 눈을 보면서 한숨 비슷한 것을 흘렸다.
  “자네 눈송이 본 적 있어? 6각형으로 생겼지. 눈송이가 시작할 때는 아주 미세한 6각 기둥 모양이라고 보면 될 텐데, 그게 물 분자 속성 때문에 그렇다고 하거든. 이게 공중에서 습도나 온도에 따라서 수증기를 어떻게 공급받느냐가 결정되는데 그래서 다 다른 모양으로 자라나. 똑같은 눈송이는 확률적으로 하나도 없다고 그러지. 물론 그 여섯 개의 팔이 뻗은 모양을 보면 마치 서로 교신이라도 한 것처럼 똑같은 모습이지. 요즘 눈은 저기 창밖에 봐도 알겠지만 대개 작지. 우리 때는 손톱만한 것들도 꽤 있었거든. 내 평생 본 것 중에서 제일 큰 게 아마 그때 그 범행 현장 근처에 있었다는 그거 아닐까 싶어. 팔뚝만 했지. 6각형 팔 하나가 손바닥 길이쯤 될라나, 그게 날아와서 몇 개가 그냥 목 같은 데 찍혔으니 당해낼 재간이 없었겠지. 그게 예리한 게 꼭 칼날 같거든. 그런데 이게 또 다른 눈에 닿거나 땅에 닿거나 하면 눈송이가 원래 형태는 다 잃어버리고 그냥 얼음처럼 뭉개져서 얼어버리거든. 그러니까 현장에 증거는 없지. 가짜 범인 잡아서 넘기려는 바로 그날 아침에, 대대장이 뭐가 윙 하고 하늘에서 날아오는 것 같아서 얼른 피하고 봤더니 눈송이라. 녹기 전에 그 근처에 있는 것 중에서 제일 상태 좋은 놈들을 골라 가지고 사진을 찍었는데, 크기 비교하려고 옆에다 손을 대고 찍었어. 그런데 그게 진짜 팔뚝만하더라니까. 그 시대는 그랬어.”
  진 교수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어이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평소의 나였다면 절대로 그런 표정을 지어 보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나도 이성을 잃어버릴만한 충분한 요건을 갖추고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점차 원래의 딱딱한 표정으로 돌아가 책을 뒤적거리기 시작한 진 선생님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이 일이야말로 누구에게 말해도 믿어 주지 않을 말이다. 어쩌면 내가 수면 부족으로 환각을 본 것일지도 모른다.
  그날 수업 시간 내내 진 교수는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나도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홍 모라는 후배가 나에게 말했다.
  “오빠, 뭐 못 볼 거 봤어요? 왜 아까부터 혼자 실실실 웃고 그래요?”
  내가 웃고 있었나. 헤헤헤.
  해 지기 조금 전부터, 도서관에 올라가는 길에 다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눈송이 하나가 검은 색 파카 위에 떨어졌는데 그 여섯 개의 똑같이 생긴 팔들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였다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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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8
  • No Profile
    jxk 06.01.28 20:11 댓글 수정 삭제
    이거 조아요 :3
  • No Profile
    배명훈 06.02.01 08:01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그냥 어설퍼요.
  • No Profile
    제이 06.02.01 11:01 댓글 수정 삭제
    좋습니다!
  • No Profile
    추선비 06.02.01 13:36 댓글 수정 삭제
    우와- 재밌게 봤습니다 아하하하하!!!
  • No Profile
    배명훈 06.02.02 09:06 댓글 수정 삭제
    고맙습니다. 그냥 군대 허풍이라, 재미있어하실 줄은 몰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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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문 06.02.27 19:34 댓글 수정 삭제
    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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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6.02.28 10:41 댓글 수정 삭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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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echre 06.02.28 11:45 댓글 수정 삭제
    앞쪽에 나오는 이모 후배는 '연애편지'의 주인공인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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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6.02.28 16:39 댓글 수정 삭제
    이 모 후배는 가상 인물이랍니다.
  • No Profile
    autechre 06.03.01 06:45 댓글 수정 삭제
    허구인건 알겠는데 연애편지의 주인공은 '생활하는 데도 큰 지장이 없죠, 당연히. 1914년에 독일이 메츠에서 곧바로 파리로 진격하지 않고 주력을 리에주 요새를 지나 파리까지 빙 둘러가게 했을 때 병력 소모가 얼마나 컸을까를 계산해 내는 데에도 아무런 이상이 없는 두뇌였단 말입니다'라고 말하잖아요. 이 단편에서 이모 후배는 똑같은 짓을 수업시간에 하고요. 그래서 두 작품이 이 인물을 매개로 연결된 우주가 아닌가 하는거죠. 아무튼 재밌게 읽었습니다.
  • No Profile
    배명훈 06.03.01 14:26 댓글 수정 삭제
    앗, 거기까지 읽어내시다니. 사실 그짓은 요즘 제가 한동안 하던 짓이었거든요. 그래서 살짝 넣어 봤습니다.
  • No Profile
    배명훈 07.03.19 15:06 댓글 수정 삭제
    아래 글에 달아놓은 것처럼 이 글도 판타지란 무엇인가에 대답하기 위한 글입니다. 이 글은 여기에 실릴 무렵에 쓴 거였고, 앞의 글은 쓴지가 좀 됐는데, 같은 메세지를 담고 있는 거여서 같은 호에 실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판타지의 미학을 알고 있습니다. 일상 속에도 수많은 판타지들이 있죠. 제가 군대에 있을 때 우리 사무실 선임부사관이 조종사들 구조하는 훈련을 받다가 부상으로 행정 일을 하게 된 분이었는데요, 일 없고 비오는 토요일이면 담배를 한 대 물면서 그 훈련받을 때 이야기를 풀어 놓는데, 과장 섞어서 한다는 거 뻔히 알고 듣는데도 이야기를 어찌나 재미있게 하는지... 우리 주변에는 글로 쓰라 그러면 절대 못 쓴다 그면서 실제로는 굉장한 이야기꾼인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런 일상의 판타지가 어떻게 발생할 수 있는가를 쓰고 있는 글입니다.
  • No Profile
    볼티 08.03.10 15:36 댓글 수정 삭제
    진교수님이 확 인간처럼 보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 No Profile
    자하 08.11.21 01:02 댓글 수정 삭제
    언제나 칼처럼 날카로워서, 꿈에서 칼에 찔려서도 제대로 좀 해보라고 독설을 내뱉는 교수님과, 그 치하에서 신음하는(...) 학생들이 너무 리얼해서, 교수님이 말하는 군대 판타지가 더 신선하게 사는 느낌입니다.

    ... 흑흑, 이 글 읽다가 로그인 풀려서 덧글 두 번 써요.
  • No Profile
    영식 09.08.04 14:29 댓글 수정 삭제
    작가님 저랑 같은 수업 들으신 거 같습니다.. 잊고있었던 악몽들이 떠오르네요. 하하.
  • No Profile
    배명훈 09.08.05 09:54 댓글 수정 삭제
    설마 외교학과....?
    리얼하게 안 쓰려고 캐릭터를 좀 많이 건들어서 제가 아는 실제 인물은 아닌데요, 근데 독자들이 하나같이 자기가 아는 실제 인물을 쏙 빼닮았다고 하더라고요. 리얼리티란 알 수 없어요.
  • No Profile
    길손 12.06.23 11:17 댓글 수정 삭제
    엄청난 쎈스쟁이시군요. 너무너무 재밌습니다. 학자와 군대뻥을 저렇게 연결할 수 있다니........
  • No Profile
    서희권 17.06.24 00:09 댓글
    와 ㅋㅋㅋㅋㅋ ㅠ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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