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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냥 초토(焦土)

2005.08.26 20:2808.26

미로냥 ( d a m k i n a @ h a n m a i l . n e t )

- 화조풍월(花鳥風月) 바깥 이야기. <명적> 편



“처신 제대로 하게! 자네가 무슨 직을 받들었는지 잊었는가?”
“잊을 리 있는가.”

결이 고운 검은 머리카락을 정갈하게 정리하여 관을 쓴 사내가 싱긋이 웃었다. 그 밝은 웃음이 못마땅한지 붓을 쥐고 있던 동료는 다시 낯빛을 준엄히 하였다.

“명적. 사관은 권세에 기울어서는 아니 되네. 우리는 저울 가운데 앉아 양쪽 추를 재는 역할이란 말일세.”
“알고 있어. 나는 권세에 몸을 기울인 적 없네.”

사관된 자, 한 모금 물과 한 웅큼 곡물로 배를 채우면 그로 족할 뿐 일신의 안녕을 구하지 아니할지니 매운 손끝과 차운 눈과 정결한 혀로 푸른 글월로써……
그리 배우고 그리 자라왔다. 태어나 흰 종이와 검은 문자를 익히고 지난 역사를 짚는 것에 가슴 뛰는 시절이 있었다. 이미 지나간, 만날 수 없는 사람을 연모하고 숭앙하여 감히 잠들지 못했다. 하여 과시(科試)에 임한 후 정해진 수순처럼 사관의 직을 받들었을 때 얼마나 설레었던가. 명적은 새 붓에 먹을 적시고 값 나가는 비단 천에 초고를 휘갈겼다. 다만 정해진 말을 받아 쓰고 하달된 단어를 매길 뿐이다. 규칙은 엄격하고 섬세한 비단결보다 더 많은 수의 틀이 박혀 있었다.

“사관은 중립자야.”
“……누가 그렇지 않다 하던가.”
“자네는 중립을 어그러뜨리고 있네. 자네가 근래 천둥벌거숭이모양 그 허울 좋은 관복 펄떡이며 다니는 통에 온 궐 안이 불온한 냄새로 가득하다 지탄이 하고 하네. 자네가 그를 모르지 않을 테지?”
“불온한 냄새라? 이 너른 궐을 이 놈 너절한 옷자락 바람 한 자락으로 메울 수 있다니 그 참 신통하네 그려.”
“명적! 모른 체 말게! 자네는……”

동료는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이다 이내 얼굴을 붉히며 잔 기침을 냈다. 그의 손에 잡힌 붓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 명적은 제 손에 들린 붓을 보았다. 깨끗한 새 것이다. 닳을 기미는 조금도 없고 먹은 곱게 젖는다. 명적은 한 없이 먹을 적시고, 그러나 아무 것도 쓰지 못한다.

“명적. 자네는 운 모(某)의 편인가?”
“……”
“구름이 누른 하늘을 덮는군. 허, 참, 황금을 깨치고 사관이라는 자가 요사한 혀를 놀려 구 흰 구름에 봉사코저 하는 세상이라니.”
“나는 하늘에도 끝이 있다 생각하네.”
“그 말, 역모의 죄를 물을 수도 있을 것이네.”
“그런가.”

동료가 한 장의 사초를 끝낼 때까지 명적은 반듯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동료가 제 몫의 일을 마치고 바깥으로 걸어 나가며, 어서 끝내지 아니하면 시간에 댈 수 없을 것이라 경고 할 때 까지도 그는 미약한 웃음만 걸고 앉았을 뿐이었다. 동료가 소리도 내지 않는 걸음으로 방을 빠져 나가고 문이 닫히자 은은한 빛만 비뚜름 비쳐 들었다. 바람 한 점 없어 후덥지근하기까지 한 공기 속에서 명적은 꾹 쥔 두 주먹을 스스로 단도리하지 못하는 양 부르르 떨었다. 무릎에 얹힌 손을 들어 한참만에 쭉 펴 보인다. 먼지 알갱이들이 구름처럼 흐른다. 명적은 웃었다. 그는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붓을 떨어뜨리지 않을 자신이.

어찌하여 그리도 냉염할 수 있는 것일까, 동료들은.
그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하여 처음 피가 들끓던 때에는 자신이 사관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 아닌가 불안을 지울 수 없었다. 사관이라 하면 목에 날카로운 것이 들이닥쳐도 한 치 떨림이 없어야 하며 무슨 말을 들어도 반듯하여야 하거늘 자신은 어찌하여 그리도 마음이 천둥방둥대는 것인지.

이 하늘은 끝날 거야.
그리 말하면 담박에 공기가 얼어 붙었다. 감히 황상을 모독코저 하는 게냐, 일개 사관 녀석이? 난처한 듯 얼굴을 굳히고 돌아서는 사람도 있었다. 왜 고요한 수면에 돌을 던지는 것인가, 고 누군가 물었다. 그런가. 고요한가.
두 손을 뻗어 하늘을 가려 보곤 했다. 구름을 태우고 저 누른 하늘도 함께 흐르고 있다. 하늘은 강처럼 유유히 흘러 먼 지평선에 닿아 끝을 맺고 하염없이 새 물이 깃드는 강과 같이 새 하늘이 구름을 잣는다.
이 하늘도 끝이 날 거다. 모든 하늘에는 끝이 있는 것이다, 구름을, 더는 푸르름을 자을 수 없는 하늘은 하루 치의 숨이 다하면 끝나야 마땅하다. 단단한 왕의 땅에서 짐승이 고개를 들이밀고 각지의 백성은 제 자식의 살을 삶아 먹었다. 본 적 없는 풀이 자라 사람을 죄어 죽였다. 강은 거슬러 흐르고 바람은 비를 싣고 물 어머니를 거슬러 사라졌다. 용을 자처하는 자들이 얼기설기 서툰 글씨로 왕을 칭하였다. 옥좌는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제궐의 화려한 집기들 틈에서 명적은 틈을 비집고 돋아난 풀을 보았다. 잔 바람에 고개를 흔들며 풀은, 희고 작은 꽃망울을 피웠다.

그런데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거지. 한 치 흔들림도 동요도 없이 붓을 쥐고 정해진 것을 써 내려갈 수 있는 것인가. 질이 좋은 종이에 ‘역사’의 이름을 단 이야기들이 건조하게 기술되고 그것은 백년 후의 사람들에게 오늘을 반추할 것이다. 백년 후와 천년 후의 사람들이 자신의 동요 따위를 알아줄까. 손에 붓을 들 수 없고 감히 정해진 말을 뱉을 수 없어 가슴이 휘청휘청 꺾여 쓰러지는 기분을 이해해 줄까. 역사라는 건 또 무언가. 명적은 웃었다. 붓을 들어 붉은 천에 제 몫의 사초를 적고 그것을 시간에 맞추어 내밀어야 한다. 엄정한 얼굴로 나란히 앉은 동료와 전배들 앞에 몸을 낮추고 시국을 걱정하는 이야기에 끼어들 것이다.

“법도를 지킨즉 보천이 평안한 것. 잠시 황상께서 미혹하시다 한들 감히 세간의 혼란에 사관까지 경거망동하여서는 아니 된다. 사관이란 굳건히 냉염한 것으로하여 옥좌를 수호하는 것이니.”
“……”
“어찌하여 대답이 없는가, 명적! 알아 듣겠는가!”
“말씀이신즉.”

그래서는 아니 된다 여기면서도 피가 들끓고 만다. 웃는 낯을 들어 심장의 격렬한 불꽃을 내 보이고 만다. 한 때 혈기라 하더라. 아직 교목 드높은 걸 바라다 보며 이파리 푸른 것만 생각할 줄 아는 어린 놈이라 같잖은 이상론에 우쭐우쭐 어깨 들이고 싶어하는 것이라더라. 시끄러운 세상 따위 한갓 말 많은 놈들의 선동일 뿐 이러한 때일수록 평정을 지켜야 한다더라. 그리 말하더라. 세상을 더 살아 보지 못해 네 놈은 모르는 것이라고, 아직 어린 놈은 입을 다물라고, 그리들 이르더라. 그 호통 앞에서 버르장머리 없이 고개 디밀고, 손목쟁이 놀려 쳐죽일 헛소리를 지껄이니 차려 입은 사관의 옷을 부끄러워하여야 마땅하단다.
헌데도 말하고 만다.

“말씀이신즉 사관도 결국은 황상의 신(臣)됨이니 봉교(奉敎)함에 어긋남 두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옵니까.”
“허면? 허면 무엔가? 명적 자네는 딴 마음을 품고 감히 황상의 신하로 녹을 받아 먹고 있다는 겐가?”

따앙, 서탁이 울린다. 평정을 제일로 삼는 사관 어르신으로는 대단한 질타다. 명적은 괜히 배가 고팠다. 눈물이 솟는 것도 아니며 겁이 나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겁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이다. 무릎 위에 죽을 듯이 힘을 주어 쥐고 있는 주먹에 땀이 배었다. 피가 뚝뚝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터다. 눈을 감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였다. 부리부리한 어르신의 시선이 자신의 시선을 마주 보고 있음을 아는 탓이다. 시선을 피하면 자신이 품은 말과 행동조차 굳게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길이 될 뿐이다.

“명적, 네 놈은 감히 운 모(某)라는 자를 흠모하고 있는 겐가? 자네도 그 흉폭한 무리인가 묻는 것이다!”
“……태 모(某)라는 자마저 운 모 앞에 기세를 접고 스스로 신 됨을 자처하였다 하더이다.”
“이, 이 놈이! 태 모라는 자가 누군가! 태 모는 선왕 대에 대죄를 짓고 사판에서 적이 지워진 놈이 아닌가. 뿌리도 굳지 못한 불한당 한 놈이 왕토를 유린하다 다만 그 괴수의 이름을 갈아 치웠을 뿐이건만 자네는 그를 들어 운 모에게 하늘의 뜻이 있다 말하려는 겐가?”
“허나 그 태 모야말로 황상 아래 기라성 같은 장수들 중에서도 가장 기량이 있는 자가 아니었습니까? 무관으로 봉사코저 하는 이를 가문 탓으로 시일을 끌더니 변방에 내친 것은 다른 뉘도 아닌 태……”
“이 놈!”

다시 서탁이 울렸다. 둘러 앉은 동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명적은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 이름이 안이라고 하였던가, 그 운 무어라는 사내. 한 번도 본 일이 없지만 소식만은 다리도 달리지 않았는데 바람보다 빨리 궐로 젖어 든다. 수도의 모든 뒷골목에서 빠짐없이 그이의 이름을 입에 올리고 목소리를 낮추어 수군댄다. 술 한 잔을 얻어 마시는 자들도 집을 잃고 전화 아래 황무를 떠도는 자들도 그이의 이름을 입에 붙이며 모진 숨을 잇는다 전하였다.

“명적 네 놈의 혀 놀림은 붉은 칼과 다를 바가 없다! 더는 네 놈이 사관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궐을 어지럽히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으니 정녕 자네가 운 모를 따르고자 하거든 당장 그 관복을 벗어 놓게!”
“……과연 그 말씀 옳으시니 따르겠습니다.”

자식을 삶는 자의 머리 위에도, 궐에 앉아 상아 수저를 다루는 자의 머리 위에도, 하늘 빛은 푸르고 밤에는 같은 달이 비추었다. 죽어 뼈를 드러낸 자의 몸에 들러 붙은 파리떼의 날개 빛은 옥색으로 번뜩이고 부용잠 드리운 방에서 비단 관복을 벗어 시비를 부르는 자의 속살도 달빛 받아 옥색으로 번뜩였다. 같은 하늘이 구름을 안고 흘렀다. 모래 먼지가 일어 시야를 부옇게 가리고 짐승들의 멀건 배가 구름마저 지워 놓는 날 하늘에 닿은 양 치솟은 제궐 담장은 더욱 굳건했다. 명적은 하늘을 보았다. 어차피 평온하게 붓을 들 수도 없었던 처지다. 냉정을 지키며 정해진 말을 뱉을 수도, 차갑게 세간의 원성을 진단할 줄도 몰랐던 인간이다. 헌즉 사관의 재주 따위 타고난 바 있었을 리 없는 것. 다만 껍덕으로 위장하였던 관복 한 장 벗어 내 주었을 뿐이건만.

[안이라는 그 자가.]

관복을 벗고 사판에서 적을 물리려 방으로 건너 왔을 적에 퍽 친밀하던 동료 하나가 고개 들이밀고 나직이 물어 왔다. 운 모라 칭하여 비껴가는 것이 일반적인 자리에서 안, 이라는 그 사내 세명을 불러 놓는 것에는 명적마저 놀라 버렸다.

[명적. 자네는 그 사내가 새로 황상이 되시어야 한다 여기는 건가?]
[……글쎄.]
[제 아무리 정의라 하여도 전란에 죽어 나는 것은 민초들일 뿐일세. 자네도 그걸 알지 않는가? 어찌하여 바람에 들리는 몇 마디 말로 미혹 당하는 건가, 자네 만한 청년이?]
[……]

미혹인가.
미혹이기에 평온하지 못한가. 미혹이기에 붓을 쥐지 못하는 것인가. 붓을 드는 때마다 가슴이 죄어 오고 목구멍으로 울음이 솟아 자기 자신이 부끄러운 것인가. 손에 쥔 붓 앞에 낯이 뜨거워 감히 자신이야말로 사관이다 천명치 못하여 한 줄 사초도 적어 놓을 수 없는 것인가. 그 모든 것이 유취한 자신의 미혹 탓인가.

[명적. 감히 황상을 휘두르며 용상을 어지럽히는 자가 없다 하지는 않겠네. 허나 그렇다 하여도 세상을 뒤엎는 건 안 되네. 명(命)을 엎는 것은 결국은 피일 터. 그 피는 뉘 것이겠는가? 비록 기이하고 요사한 일이 잦아 하늘의 뜻이……]
[짐승이 튀어 나오고 하늘의 기후가 심상치 아니하여 천명이 그예 옮겨 갔다 말하려는 게 아닐세. 그런 것이 아냐.]
[허면?]
[당연하지 않은가? 그리 생각하지 않는 건가?]

결이 깨끗한 관복을 벗어 개는 손끝이 흔들렸다. 목으로만 거스르는 울분도 있음을 처음으로 알았다. 눈으로는 물을 맺지 아니하고 그저 심장으로 쏟아지고 입술을 꾹 물게 하는 분이었다. 지금도 이 땅 어딘가에서는 왕의 백성이라는 허울 받은 자가 이름도 받기 전에 숨을 잃는다. 지금도 이 땅 어딘가에서는 옥좌 놓인 쪽을 향해 손 한 번 뻗어 보다 고스란히 짐승에게 몸을 찢기우는 자가 있다. 지금도, 끝 없이, 태어나는 이가 있고 죽는 이가 있을 것이다. 정해진 명이 아니라 다만 백성으로 태어나 이 땅에 두 발 붙인 탓으로 하여 불행한 자가 있다. 그것은 사서에 기록되지 않는다. 하늘이 폭정을 용서치 못한다면 어이하여 제궐이 무너지지 않는가. 용을 수놓은 잘난 침장과 여덟 색깔 보석으로 지은 옥좌에 불이 붙지 않는가. 어이하여 첩첩 담장 너머 다만 태어난 탓으로 고통 받는 자가 있는 것인가. 그것이 하늘의 뜻인가. 뜻이라 하는가.

[짐승이 두렵고 정체 모를 괴이한 풀이 두렵고 하늘의 재앙이 두려운가? 허면 왜 죽은 자의 원성은 두릴 줄 모르는 겐가? 왜 변방에 죽어 나자빠져 묘 하나 꾸리지 못한 자는 두릴 줄 모르는 겐가? 왜 여기 두 다리 두 팔 멀쩡하게 붙어 잘난 척 붓이나 놀리는 내가, 아직, 세상은 살만 하다, 뒤엎는 것은 백성을 다친다 말할 자격을 얻는 것인가? 왜? 어째서?]

그래, 안이라는 사내가 어떤 자인지 모른다. 만난 일도 없으면서 미혹되어 평온을 저버렸다. 그러나 본디 평온이란 없었다. 사관으로는 실격인 자로 태어나 단지 한 줄의 문자들 사이를 유영하며 배워온 알량한 앎이 있어, 그것이 자신을 평온치 못하게 하였다. 유취 가시지 않은 놈이라 혈기방자하여 그러는 것이라 하였지. 그럴 지도 모른다. 부화뇌동하는 무리의 말에 솔깃하여 무지렁이 백성들이나 가벼이 몸 놀리는 데 묻어 나가다니 부끄러운 줄도 모르느냐 무게가 없다 하였지. 그렇다고 해 두어라. 무어라 말하든 얌전히 앉아 붓을 들 수가 없다.

[정사(政事)에 참여하는 게다, 자네도 나도. 그리고 황상도. 하늘이 황상을 내시어 치세를 이루라 하였거늘 그에 충심치 못하거늘 그릇되는 것이 당연한 게다. 하늘이 짐승을 내지 아니 해도, 기후가 바뀌지 아니 해도, 저 담장 너머 땅에서 사람이 죄 없이 죽고 죽인다는 것이 하마 그 증거다. 이 하늘이 끝날 거라는 증거란 말이다. 젠장!]

중간에 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영리하며 가장 고귀하다 하더라. 어떻게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가 있는가. 자신만은, 어리고, 약하고, 피가 붉은 탓에, 담장 안에 얌전히 앉아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제 자리로 돌아 오리라 말할 수가 없다. 감히 하늘을 뒤엎으면 백성만이 죽어 나간다 떠들며 헌 창에 깃발을 매달아 몸을 일으킨 안이라는 사내를 비웃으며 비난할 수 없다.

[명적.]
[젠장! 그래, 나는, 사관의 붓이 부끄럽단 말일세! 안이라는 자가 정답인지 아닌지, 그런 것 따위 알게 뭔가! 누가 최선을 안다 장담하던가? 하지만 적어도 이 담장 안은 아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남의 피를 걱정하는 척 하고 싶지 않은 거라네. 최악이 싫어 차악을 고르려는 나를, 자네가 이해하든 비웃든 그건 알 바 아니라네.]

분명한 것은 하늘이 흐른다는 것이었다. 하늘은 흐르고 끝에 닿는다. 한없이 높고 푸른 새 하늘이 흘러 온 땅을 덮는다. 어두운 하늘에서 빗방울이 쏟아질 때, 하늘이 씨를 뿌리누나, 하고 마른 종아리를 두드리며 노래를 하는 자들이 저 담장 너머에 있다. 태어난 죄로 죽는 자들이. 그 피를 걱정하여 망가진 하늘을 붙들고 평정을 찾는 재주 같은 건 타고 나지 못했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말하는 것. 가슴에 타는 불로 제 목구멍을 태워, 스스로의 혀를 붉은 날로 세우는 것 뿐이었다. 자신의 혀로 하여 죽겠다. 사관이란 피로 한 줄 글을 남기니 모든 자에게서 잊혀져도 스스로 가치 있는 법이려느니.

“잘 가게.”
“다시 보세나.”
“이 하늘 아래서.”

관복을 입은 친우의 작별을 등 뒤로 담장 바깥으로 걸었다. 하늘은 높고 어딘가에서 사람이 태어났다. 구름은 흐르고 어딘가에서 사람이 죽었다. 태어난 죄로 찢기고 상처 입고 죽는 땅에, 명적은 두 다리를 디디었다. 황폐한 땅에 인적이 드물고 길이 완전히 그치자 그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어째서 그리도 다치고 싶어 하는 겐가? 명적. 나는 자네를 이해하고 싶지 않네. 입을 다물면 모든 것이 평온하거늘.]
[미안하네.]

살아 붓을 드는 순간순간이 그저 타는 듯이 목이 말랐다. 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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