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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 단편 햄릿

2006.01.28 00:2101.28

drwk.com내 죄가 너무 많아서 나는 죽을 수도 살 수도 없어. 내 죄가 너무 깊어 다른 사람마저 끌어들이고 말았어. 내 죄가 너무 깊고, 내 죄가 너무 많고, 내 죄가 가이없어......




반들반들 닦여진 복도를 걸으며, 문득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스스로의 그 미소에 놀랐다. 저도 모르게 움직여지는 얼굴근육이라니 생각만 해도 오싹해지는 점이 있다. 입가가 저도 모르게 올라가고 볼근육이 당기어 오는 것이 자신의 몸 아닌 것 같아, 입가를 어루만지고 괜히 볼을 잡아당겨 보았다. 어른인 남자가 할 짓치고는 변변찮은 짓거리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이 안심이었다.

두꺼운 장화를 신고 있어도, 발 아래 닿아오는 복도의 느낌은 너무 익숙한 것이라 온몸을 꽉꽉 죄어오는 정장 차림에도 기분은 어느 정도 아늑하다. 하기사 아늑한 느낌을 즐길 여유는 없지만.

복도의 모퉁이를 꺾어 돌자 눈에 익은 남자가 얼굴을 찌푸리고 황급히 걷고 있었다. 이마에 주름이 생기고 칼자루를 꽉 쥔 채로 눈앞에 있는 자신도 보이지 않는 모양으로, 바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탁, 하고 어깨를 치자 스쳐 지나가려 하던 그가 화들짝 하고 고개를 든다.

"......아, 왕자님이셨습니까-"

지나치게 놀라는 모습도 그렇거니와, 재빠르게 눈을 돌려 버리는 그 모습이 수상쩍어 나는 빙글 웃으며 지나치려는 그의 어깨를 잡아 당겼다.

"왕자님, 급한 일이 있어서....."

"그 급한 일 정도야, 내가 들어도 되지 않을까. 나에게 말할 수도 없는 일인가?"

"........저, 많이 곤란한 일이라 일단 폐하께 아뢰고....."

"뭐 좋아."

손을 떼자 노골적인 안도의 빛을 얼굴에 띄우는 그에게 나는 다시 심술궂게 웃어 보였다.

"왕께 같이 가자."

그의 얼굴이 사색이 되건 말건, 내 알 바 아니다.





사람을 붙들어 묻는다. 왕께서는 어디 계시지? 시종은 대답한다. 옥좌 있는 천공의 홀에 계시지요. 그 순간, 등이 따갑다. 그는, 호레이쇼는 대답한 시종을 잔뜩 화가 나서 노려보고 있을 게다. 시종은 갑자기 받게 된 분노의 눈길에 놀라고 억울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히죽 웃고 호레이쇼의 뒷덜미를 잡아끌었다. 호레이쇼는 질질 끌려 가며 말했다.

"왕자님, 지금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중대한 비밀이시라.....폐하께라면 몰라도 왕자님께는 말씀드리기가 곤란할 듯 하여....."

"유감스럽게도 난 들어야 하겠네. 비밀을 듣지 못하고 있는 건 건강상 좋지 않거든."

"하지만 왕자님!"

항의와, 벗어나려는 버둥거림, 그리고 말돌림을 모두 무시하고 나는 홀까지 그와 함께 왔다. 아니, 그를 끌고 왔다는 말이 적절할 것이다. 호레이쇼의 칼을 풀어 복도 한구석에 던져놓고 홀의 문을 열자 홀의 입구부터 옥좌까지 깔려 있는 붉은 비단이 보인다. 그리고 계단과, 그 위의 옥좌, 그 위의 남자가 보인다. 한 손에는 칼자루를 한 손에는 양피지를 쥐고 있었다. 홀에서 검의 소지가 허용되는 것은 왕뿐이다. 하지만 그건 '검을 소지해도 되는 것은 왕뿐'이라는 의미일 뿐 '검을 소지해야만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 어느 덴마크의 왕이 칼자루를 손에서 놓지 못한 채 왕좌에 앉아 있을까. 그 어느 덴마크의 왕이 모든 신하들을 의심하고 수족들을, 시종들을 그리고 모든 백성들을 의심할까.

"폐하."

내가 그를 부르자 호레이쇼는 움찔 몸을 떨었다. 옥좌 위에 앉아 고개를 구부리고 무릎 위의 양피지를 보고 있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지?"

"여기 호레이쇼가 긴히 아뢸 커다란 사건이 있다 하여 같이 왔습니다."

호레이쇼를 돌아보고 다시 한 번 히죽 웃어 보자 그가 자지러진다. 그리 기겁할 필요는 없잖아, 라고 생각했지만. 왕이 가볍게 손짓하자 나는 비단 위로 호레이쇼를 질질질 끌고 갔다.

"말하라."

조용하지만 묵직히 울려퍼지는 목소리, 조용한 눈빛에 호레이쇼는 몸을 떨었다. 왕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들릴 그 비밀, 그것이 두려운 것이겠지. 무엇인가. 대체 무엇일까. 짐작가는 것을 하나하나 말해 보았다.

"호레이쇼, 전 왕의 아들인 나를 누군가 죽이려 든다던가?"

호레이쇼가 다시 자지러졌다. 왕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구겨졌다. 호레이쇼가 고개를 세차게 절레절레 흔들어 댔다.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아니고 말고요!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를 왕자 자리에서 내쫓는 무리라던지..."

"아녜요, 아닙니다! 아니 결코 그런 놈들이 있을 리가! 그런 흉악무도한 놈들이..."

"아니면 전 왕을 죽인 지금 왕을 죽이려 든다던지..."

"...........갸아하가아아아아아아악-!"

해독될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내 입을 막으려고 달려드는 호레이쇼를 슬쩍 밀쳐냈다. 왕이 어이가 없는 듯 그저 웃었다.

"장난은 그만 해라, 햄릿. 그래, 호레이쇼. 무슨 일이지? 대답하기 힘들다면 햄릿의 마지막 추리가 옳다고 제멋대로 생각하도록 하지."

숙부 장난도 여간 아닌데요.....아무튼 호레이쇼는 잠시 동안 입이 마비된 모양인지 입가가 마구 경련하더니 한참 후에야 제대로 된 말이 터져 나왔다.

"나온답니다!"

".....뭐가?"

숙부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는 비죽거리며 동시에 물었다. 호레이쇼는 다시 입이 마비된 모양인지 아에라이....어쩌고 하는 소리를 토해내더니 다시 한 번 외쳤다.

"유, 유령이 나온다구요!"

숙부는 무릎 위의 양피지에 다시 시선을 떨어뜨렸다. 나는 뺨을 긁적였다.

"어디서?"

"서, 성에서! 성의 난간 위를 걷고 있다고, 병사들이 많이들 목격했다고...."

"성의 수비 책임자를 불러서 적당히 캐물어 봐. 뭔가 비리의 냄새가 나는걸. 병사들의 음식에 톱밥을 섞는다거나 병사들의 옷에 솜 대신 갈대껍데기를 넣는다거나....병사들의 불만이 헛것을 보는 것으로 촉발되었을 가능성이...."

"저, 정말이라니까요! 햄릿 왕께서 나오신다고-!"

양피지를 짚어내려가던 숙부의 손이 정지했다. 호레이쇼는 자신이 말해 놓고 스스로가 움찔했다. 나는?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통제 불가능이 되어 버린 얼굴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형님께서 성의 난간 위를 돌아다니신다고?"

숙부는 태연하게 물었다. 이봐요, '형님'이란 말이 당신 입에서 나오니 어지간히 곤욕스러운걸. 호레이쇼도 곤욕스러운 얼굴이었다.

"그, 그렇다고......병사들이 다가서면 사라져 버린다고.....아니 그래도 확실히 나온다고...."

나는, 그저 웃었다. 하기사 나올 만 할지도 모른다. 뭐어 나라도, 귀에 독물이 부어져 독살당하고 차가운 땅 속에 묻힌다면 편히 눈은 못 감겠지. 만일 그 짓을 한 자가 자신의 동생이며 아내까지 가로채 결혼하고 왕위에 올랐다면 더욱 그럴 게다. 더욱이 아들이라는 녀석은 복수할 생각 하나 없이 아버지를 살인한 자와 희희낙락거리며 농담 주고받으며 잘 지낸다면 더욱 그럴 테고.

"헤에, 진짜란 말이지. 오늘 밤 성벽 쪽으로 나가 볼 만한 이유는 충분할 것 같군."

"........그그그그그그그그그극---!"

"그 유령인지 뭔지가 안 나올 때까지, 얌전히 방에 있는 편이 낫겠구나, 햄릿."

"아니 뭐 어떻습니까."

입꼬리를 올려 연극적인 미소를 지어 주고 정중히 허리를 굽혀 보았다. 양피지를 접어 구긴 왕은 말없이 나를 노려보았다.

"다른 병사들이라면 몰라도 아들인데요. 왜 땅 속에서 쉬지 못하시고 싸늘한 밤 공기 맞으며 성벽을 헤매시는지 대답해 주실 법 하지 않습니까."

".......진담이냐, 햄릿?"

"진담입니다, 폐하."

"너라는 녀석은....."

왕은 얼굴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호레이쇼는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나와 왕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왕은 양피지를 다시 집어들고 고개를 숙였다.

"마음대로 해라. 어린애도 아니니."

"폐폐폐폐폐폐폐하아아아아아-!"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자자자자자잠깐마마마만요! 저저저저저전하하하하!"

"........그만 나가 보거라, 호레이쇼."

왕의 준엄한 명령에 호레이쇼는 입을 뻐끔거렸고 나는 호레이쇼의 목뒤를 잡아 질질질 끌었다.




서늘하고 오싹한 한기가 등골을 흐르는 밤이었다. 가느스름한 그믐달이 교교한 빛을 뿌렸다. 그믐달 아래의 엘시노어 성은 거대한 짐승과도 같았다. 잿빛 짐승의 이빨처럼, 성의 난간이 날이 섰다. 이 성벽 위를 걸을 수 있는 자가 인간일 리 없다. 설령 저 성벽 위를 걸었다는 것이 내 아비의 유령이 아니라도, 인간이 아닌 존재임은 분명하다.

"이쯤에서 보았다 했느냐."

"네, 왕자님....그만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성의 난간 위로 유령이 계속 돌아다닌다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텐데. 일은 빨리 해결하는 편이 좋겠지."

"하지만 전하.....위험하옵니다. 전하!"

호레이쇼는 나의 망토 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렇다. 성의 난간 위에 뭉글뭉글 흰 연기가 치솟으면서 천천히 모습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달빛에 윤이 나는 투구와 전신 갑주와.....투구가 들어올려지며 나타난 얼굴은.....아아 그래. 잿빛 머리카락과 잿빛 수염과, 마르고 앙상하지만 살을 좀더 붙이고 젊게 하면 나와 똑같아 보일 이목구비. 전신 갑주를 입고 긴 창과 방패를 들고 투구를 쓰고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던 나의 아버지는 타고난 전사였다. 호레이쇼가 숨 넘어가는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잡아당기던 망토 자락을 손에서 빼내고, 나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타는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성벽으로 다가갔다. 난간 위를 오를 배짱은 없어, 그저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죽은 아버지와 마주했다. 아아, 저 창으로 후려치려나. 저 긴 창을 들어올려 콱 하고 어깨를 찌르기만 해도 저 성벽 아래로 그대로 떨어져 사망할지도 모른다. 이 괴괴한 잿빛 성의 성벽에서 부자상봉이라니 뭔가 삭막하잖아. 달은 그믐달에 뼛속이 시릴 만큼 바람이 불기까지 하니.

-햄릿.....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햄릿......햄릿, 햄릿......

"네, 말씀하시오소서. 아버지."

호레이쇼와 몇몇 병사들이 뒤에서 끽끽대는 소리를 냈다.

-따라오너라, 햄릿.

나는 말없이 뒤를 따랐다. 인적이 없는 곳으로, 아버지는 가만히 걸음을 옮겼다. 가느다란 흐린 달빛이 공기 속을 흐늘흐늘 작은 입자로 흘러나린다. 괴괴하니 소름 끼치는 밤이다. 아버지의 발걸음은 소리 하나 없고 창도 방패도 갑주도 철컥거리지 않는다. 들리는 것은 내 발소리, 내 망토가 바닥을 스치는 소리. 내 소리, 내 소리, 내 소리들.

아버지가 멈춰서자 나 역시 멈춰섰다.

-햄릿, 원수를 갚아 다오.........햄릿, 햄릿! 내 아들아, 내 원수를 갚아 다오!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아버지는 비통한 목소리로, 울분을 쏟아냈다.

-나는 그날 오후에, 늘 그랬던 것처럼 정원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렇게 마음놓고 자는 틈에 네 숙부가 독약 병을 들고 살금살금 내게 기어왔다. 살을 녹이는 그 흉악한 헤보나의 독약을 내 귀에 부어넣은 것이다. 이 독약은 사람의 피를 썩게 만드는 극약. 수은과 같이 삽시간에 사람의 전체 핏줄을 돌아, 우유 속에 식초가 한 방울 떨어진 것처럼 맑고 깨끗한 피를 순식간에 굳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나의 피도 당장 그렇게 되어 깨끗하던 온몸에 징그러운 부스럼들이 문둥이처럼 솟아났다. 이렇게 나는 낮잠을 자다가 아우의 손에 생명과 왕관과 왕비를 한꺼번에 빼앗기고 말았다. 아직 내 죄과가 무성한 한창 때에 목숨이 꺾여 성찬식도 못하고, 신부의 위안도 받지 못했다. 임종의 기름조차 바르지 못하고, 주님 앞에서 참회도 하지 못했다. 결국 온갖 죄악으로 몸과 마음이 더렵혀진 상태로 지옥의 심판대에 끌려가고 만 것이다.

아, 정말 끔찍하다, 끔찍해! 너에게 조금이라도 효심이 있거든 그대로 참아선 안 된다. 덴마크 왕의 침상을 패륜과 치욕 속에 버려두지 말아라. 햄릿, 알겠느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몸을 부르르 떨며 외쳤다.

-맹세해라, 햄릿! 복수를 맹세해 다오! 맹세해라! 맹세해라!

".........폐하."

나는 무릎을 꿇었다.

"폐하, 아니 아버지. 저는 정의가 올바로 설 날이 올 것을 믿습니다. 정의에, 이 한몸 다 바치겠습니다. 덴마크의 왕자로서!"

저도 모르게 얼굴근육이 움직이기에 고개를 깊숙히 숙여 얼굴을 가렸다. 입가가 저도 모르게 올라가고 볼근육이 당기어 오는 것이 자신의 몸이 아닌 것 같았다.





왕의 알현실은 장중하고 위압적이다. 손만 대도 더러워질 것 같은 하얀 대리석과 하얀 빛깔들의 물결. 방 안에 햇빛이 사정없이 들이친다. 나는 눈을 감았다. 몸이 너무 차갑다. 그나마 햇빛이, 핏속의 얼음덩이를 자근자근 녹여주는 느낌이었다. 그 흐린 그믐 아래에서 교교히 나리던 그 빛들이 내 피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 이후로, 녹여도 녹여도 녹지 않는 핏속의 얼음덩이가 혈액의 순환을 방해하고 온몸을 굼띠고 느리게 한다. 이대로 계속 이 자리에 앉아있다간 의자 아래로 뿌리를 내리고 녹색 잎을 틔울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랬다면 얼마나 좋으랴. 차라리 그랬다면.

등 뒤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른다.

"햄릿."

"예, 폐하."

그는 내 앞으로 다가왔다. 갑자기, 턱이 확 쳐들려진다. 그는 불쾌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턱을 잡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냐?"

나는 그저 웃었다. 잡힌 턱이 욱신거릴 정도로 아파도 그냥 웃었다.

"레어티즈는 배신자입니다. 왕을 배신하고 새로운 왕에게 붙은 배덕자입니다."

"레어티즈는 네 약혼녀의 오빠다. 너는, 오필리어의 죽음에 그토록 울부짖지 않았느냐! 무슨 생각이지, 햄릿? 성벽에서 그 유령을 만났다는 그 날 이후, 너는 사람이 아주 달라져 버렸구나. 네 아버지를 죽인 나를 죽이고 싶은 거라면 그렇다고 말햇! 내가 죽인 남자의 아들이 나에게 도전한다면 기꺼이 그 도전을 받아들여 주마. 너는 왜 돌고돌아 엉뚱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거냐!"

그의 눈빛이 조금 슬퍼졌다고 생각했다. 그는 목에 커다란 덩어리가 걸린 것처럼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도 너에게 소중한 사람과 연관된 사람만 골라서 말이지. 폴로니어스를 죽이고, 그로 인해 오필리어를 자살케 하고, 왕비에게 상처를 입히고, 이제는 레어티즈와 결투냐. 햄릿, 나는 너를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내가 네 아비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을 때 너는 분명 사태를 알아차리고 있었다. 헌데 너는, 나를 적대시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네 아버지를 죽인 나를, 묵인하고 섬긴 폴로니어스를 죽였다면, 나 역시 죽여야 하지 않겠느냐!"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나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리고, 왕의 거친 손목을 잡아 턱에서 손을 떼어냈다.

"죽느냐, 사느냐, 죽은 자의 편을 드느냐, 산 자의 편을 드느냐.......숙부, 말씀하십시오. 왕을 죽인 일에 대해 숙부는 한 점 부끄러움도 없으시지요?"

"부끄러움은 없다."

그는 당당히 말했다. 나는 가만히 귀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귓볼을 만지고 귓바퀴를 쓸며 나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귀는 괜찮으십니까, 숙부."

그는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귀를 만지작거렸다. 그가 픽 웃었다.

"그래, 알고 있었느냐. 그래서 넌 내가 네 아버지를 죽인 것을 묵인했느냐. 글쎄.....아주 멀쩡하다 할 수는 없겠지. 헤보나의 독약은 한 방울 떨어뜨린 것만으로도 한쪽 귀를 충분히 못 쓰게 만드는구나. 하기사 몇 방울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독약이니 말이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장중하고 위엄있는 알현실에도 먼지는 돌아다닌다. 들이쳐 퍼부어지는 눈이 멀 정도로 뜨겁고 하얀 빛 속에서 먼지무리가 빛알갱이처럼 반짝거렸다. 앉았다 다시 둥실 떠오르고, 휙 휘몰아치고 동실동실 떠오른다. 저것이 우리네 인생인가 싶어 나는 괴로워졌다.

"언제 알았느냐, 햄릿."

"그저 어쩌다가......입니다. 숙부, 나는 그 성벽에서 아버지의 유령을 만났습니다. 아버지는 복수를 저에게 맹세시키려 하셨습니다."

아득 하고 이 악무는 소리가 났다. 그는 탁자를 주먹쥔 손으로 거세게 내리쳤다. 쿵-!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저는 정의는 올곧게 설 것이다, 하였고....정의의 편에 서겠다 하였습니다."

숙부는 메마르게 웃었다.

"이 상황에 어디에 정의가 있느냐, 햄릿? 동생의 귀를 멀게 만들었던 형과, 그것을 용서 못해 형을 죽이고 왕위와 아내를 가로챈 동생 그 어디에? 너 역시 정의는 아니다. 폴로니어스를, 오필리어를 생각해라."

"그래요, 정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전 이렇게 헤매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둠 속에서....."

머리가 어찔하고 어질어질해 나는 의자에 힘없이 몸을 기댔다.

"정의가 없으니 내 맘대로 행동하여도 무관하지 않을런지요. 나는, 숙부에게도 아버지에게도 화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쪽도 탓하고 나무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나는...."

"왕비를 상처입히고 폴로니어스를 죽였느냐. 두 명의 죄인 사이에서 방황했던 두 명의 인간을 단죄하였나. 가련한 오필리어-"

그는 나지막히 한숨을 쉬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망막 너머 밝은 빛이 아른아른하면서 하나의 형체를 만들고 있었다. 굽실굽실한 아름다운 금발의 머리채와, 동그랗고 사랑스러운 이목구비를 가진 소녀를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가늘고 나붓한 팔다리를 가지고 있었고, 엷으면서도 뚜렷한 눈썹을 가졌다. 입술은 약간 얇으면서도 발갛게 물들어 있었고 손가락은 얇고 길었다. 그녀의 모습은 어떠했다, 그녀의 모습은 이랬다 하는 것은 사실 어느 하나의 형체보다는, 특징들이 드문드문 퍼즐처럼 자리를 메워가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지상의 여인이 아니라 요정이었기에, 나는 그녀를 단 한 번만에 형체로 떠올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는 미쳐서 숨을 거두었다. 나무 위에서, 마치 꽃이 바람에 살랑거리듯 낙화하여 천천히 물 아래로 가라앉았다던 그녀. 하얗고 아름다운 옷자락이 물을 흠뻑 빨아들여 그녀의 몸은 천천히 부드럽게 수면 아래로 잠겨들었다 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그녀는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했다.

가련한 소녀. 그녀에게는 죄가 없었다. 그녀에게는 한 점 티끌도 없었다. 나는 그녀의 사랑을 거절했다. 아버지도 숙부도 단죄할 수 없다면 내 칼은 어머니와 폴로니어스에게 향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폴로니어스는 아버지의 죽음을 알아차리고 있었음에도 숙부를 묵인했고, 숙부가 나를 그 다음의 왕위계승자로 인정하자 자신의 딸을 기꺼이 내주려 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묵인하면서도, 그 아버지의 아들에게 딸을 주는 자. 기회주의자. 비겁자. 폴로니어스의 딸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나는 폴로니어스를 죽이고, 그녀를 미치게 만들고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기실, 그녀를 그리 냉정히 내쳤을 때 내 머릿속도 반쯤 미쳤으리라. 완전히 미쳤다면, 미친 그녀를 끌어안고 어린아이 달래듯 토닥토닥 달래어, 미친 꿈 속으로 빠져들 수도 있었으랴만. 아버지도 숙부도 어머니도 폴로니어스도 모두 잊고, 그럴 수 있었으랴만. 이대로 그녀를 따라 죽어버릴까. 그녀의 관을 내려놓은 구덩이 속에서 절규하던 레어티즈에게 쏟아부은 것처럼......다시 무덤을 파내어, 그녀의 시체를 끌어안고 함께 묻혀 죽어버릴까.

죽느냐 사느냐. 어느 것이 옳은 것이냐. 나는 하마 죽는 것이 나은 인간인가. 오필리어. 내가 아무런 죄악도 고뇌도 모를 때 눈처럼 새하얬던 그녀는, 내가 죄악과 고뇌에 찌들어 추해지자 나를 남겨놓고 눈처럼 새하얗게 호수 속으로 사라졌다. 하얀 옷과 금발로, 녹색 나무에서 낙화하여 푸른 물결 사이로 사라졌다.

"정말 레어티즈와 결투할 생각이냐."

"허면 농담으로 결투를 결정했을 성 싶습니까."

"너는 나와 네 아비 사이에 방황하던 인물을 모두 단죄할 셈이냐. 모든 백성들을 죽이고 덴마크를 망하게 할 셈이냐. 차라리 나에게 덤벼들라 그리하지 않았더냐!"

"레어티즈가 마지막입니다. 이것으로 아마 다 끝나게 될 겁니다."

"......레어티즈가 죽은 이후, 결정하려 함이냐? 벌받을 자가 나인지 형인지 말이다."

그의 질문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다시 웃었을 뿐이다. 나에게 있어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었다. 그저 나는 걸어들어갈 뿐이다. 어차피, 어차피, 모든 것을 알게 된 그 때부터 그 어떤 것도 나는 바꿀 수 없었다. 우유부단하고 나약한 나는, 내 앞에 길게 가로놓인 저 좁은 길을 주의깊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짚어 걸어가는 일밖에 하지 못한다. 다른 길로 빠지면, 돌아들면, 무슨 일이 생길지 생각만 해도 두려워서, 나는.....





레어티즈는 죽었다. 어머니, 왕비도 숨을 거두었다. 왕은 망연한 얼굴로 죽은 아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독이 들었다-!'라는 단말마의 외침을 토하고 숨을 거둔 어머니의 모습을 나는 처연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아아, 이로서 아버지의 죽음을 묵인해 준 자, 숙부의 죄를 묵인한 자는 나밖에 남지 않았구나. 그리고 나 역시, 이제 곧 죽을 것이다.

"레어티즈가 선사한 진주에 독이 묻어 있는 것을 몰랐습니까. 이 싸움에서 누가 이기건간에, 진주를 선물하여 저와 화해하고 싶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신 모양이군요."

"......레어티즈는, 오필리어의 오라버니가 아니냐."

"오필리어의 오라버니이고, 폴로니어스의 아들이지요. 복수심에 불타는 자에게 정의를 바라시면 아니되옵니다."

숨이 차고, 뱃속에서 이글이글 불길이 내뛰는 듯싶었다. 레어티즈는 죽기 직전 솔직히 고백하였다. 누이동생과 아버지의 복수로, 나를 죽이려 했다고. 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진주엔 독이, 그리고 날 찌른 그의 칼에도 독이 묻어 있다고. 그 독은 헤보나의 독약. 나는 그저 웃었다. 헤보나의 독이여, 이 요망하고 아름다운 아가씨야. 지금까지 몇 명의 건장한 남성을 쓰러뜨렸나!

"숙부, 어머니를 사랑하셨습니까."

"아니다..... 가련한 거트루드. 그녀에겐 미안한 일이로구나."

"덴마크의 왕위가 탐이 나셨습니까."

"탐이 났다. 형이 그것을 가지고 행복해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탐이 났다. 나는 형이 가진 모든 것을 앗고 싶었다. 덴마크의 왕위든, 아름다운 아내든, 그 무엇이든."

비명 소리와 슬픔 소리가 회장 안을 가득히 메우고 있었지만 숙부와 나는 단 둘만 있다는 듯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전하, 전하! 이게 어찌 된 일이옵니까! 호레이쇼의 목소리가 주변을 때려 왔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입 안으로 내뱉는 숨결은 불을 붙인 듯 뜨거워 입술을 태우는 것 같았다. 이마에 땀이 맺혀 눈가로 흘렀다.

"숙부. 나는 숙부에게 말하지 못한 바 있습니다. 제가 숙부에게 손 대려 하지 않았던 진정한 이유를. 숙부를 단죄할 수 없었던 진정한 이유를."

"그게 무엇이냐."

"그 반짝이는 아름다운 가루, 물에 녹이면 은하수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가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숙부께서 왕의 정원에서 오수를 취하실 때, 그 아름다운 가루를 물에 타 숙부의 귀에 흘려넣은 자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숨이 헐떡거렸다. 그는 의아한 듯 눈썹을 치켜세우다 그제서야 깨달은 듯 말했다.

"네 아비가 내 귓속에 그 저주받은 독약을 흘려넣는 것을 보았느냐. 그래서 너는, 나를 죽이려 할 수가 없었던 거구나......."

"아니오, 아닙니다. 숙부, 그 날 정원에서, 숙부의 귀에 독약을 흘려 넣은 것은 저였으니까요."

쾅! 그가 강하게 테이블을 쳤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왕에게 집중되었다. 시끄럽던 소란이 어느 정도 잠잠해졌다. 숨이 점점 차 왔다. 나는 숙부의 분노에 찬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안 그러면 쓰러질 것만 같았다. 숨이 헐떡거려지고, 손끝에서 땀이 흘렀다. 피처럼 끈적한 땀이었다.

"그 아름다운 오후에, 그 아름다운 날에....나의 아버지께서 어린 제 손에 병을 쥐어 주시고, 장난이라도 치시는 양 제 귀에 속삭이셨죠. 햄릿, 햄릿. 이 약을 말이다, 숙부의 귀에 떨어뜨리는 거다.....그렇게, 달콤하게 웃으시면서. 오, 숙부. 단 한 방울만으로도, 살이 녹아 버리는 독약.....고통이 지극할 터인데도 그 독약에 마비되어 몸도 움직일 수 없게 만드는 그 엄청난 독약.....나는, 약병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아비의 파멸을 예감했었다.

그리고, 나의 파멸 역시.

"이런 개같은 새끼-!"

숙부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진노를 토해냈다. 그것은, 분명 내 아버지 햄릿에 대한 진노일 게다. 아아 그러나 숙부는, 어쩌면 예감하지 않았을까. 헤보나의 독약은 몇 방울만 떨어뜨려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약. 애시당초 장애를 지워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이기 위한' 약. 독약에 마비되어 몸을 떨고 있는 숙부에게 몇 방울만 더 헤보나의 독약을 떨어뜨렸어도 모든 것은 끝났을 테지.

그런데 그리하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살 타는 냄새와 하얗게 마비되는 숙부의 모습에 놀란 나는 병을 뒤엎고 도망쳤으니까. 파랗게 질려 독약을 쏟아버리고 자신을 혼 빠진 눈으로 바라보는 아들을 보며 햄릿 왕은 입가를 비틀며 웃고 뭐어 어쩔 수 없지, 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의 어깨를 안던 더러운 자. 더러운 속삭임. '잘 했다, 내 아들.'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피가 섞인 눈물이었다.

"숙부, 나는..... 미워하십시오, 숙부. 내가 당신에게 그리했습니다. 당신의 귀를 멀게 만들고 증오에 불타게 만들고 이제 당신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가련한 거트루드. 가련한 오필리어, 가련한- 햄릿."

그는, 허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는, 네 아버지에게 살인 도구로 이용되고 복수 도구로 이용되어도 괜찮으냐. 그리 묻는 그에게 나는 눈빛으로 대답을 되돌렸다. 이미 지은 죄가 너무 커서, 어쩔 수가 없어서-

당신의 귀를 멀게 한 것은 내 죄. 당신을 복수에 불타게 한 것도 내 죄. 당신이 죽인 내 아버지도, 당신이 죽인 수많은 사람들도 엄밀하게 말하면 나의 죄. 폴로니어스를 죽인 죄. 오필리어를 죽인 죄. 레어티즈로 인해 어머니를 죽게 한 죄. 레어티즈를 죽게 한 죄-

너무 죄가 많아, 내 시체는 썩지도 않을 게다. 푸릇푸릇한 시체로 남아, 머리카락도 눈동자도 살도 뼈도 썩지 않고 그대로 남아, 흙으로 돌아가지도 못할 게다.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죽고 싶었다. 때때로 내가 지은 죄가 나를 짓누를 때 참으로 죽고 싶었다. 그러나 살고 싶었다. 때때로 더운 바람을 맞으며 찬 빗물을 맞으며 그저 참으로 살고 싶었다. 그러나 죽어도 더럽고 살아도 더러워서, 어떻게 할 수도 없었어. 그 날의 내 실수가, 너무 많은 죄로 불어나서 참으로 무섭고 또 무서웠다.

푹, 하는 손의 익숙한 감촉.....아아 이 익숙한 감촉. 폴로니어스를 죽일 때처럼....용서해라. 레어티즈, 폴로니어스, 오필리어. 아아 어머니 용서하세요. 그리고 숙부.... 아아 뜨거운 피. 입 안에 튀어든 피가 쇠비린내가 났다. 손에 끈끈하게 묻어드는 질척한 감촉. 늪의 진흙처럼 절망스러운 감촉. 뜨겁고 끈끈하고 지독하게 질척거리는 이 생명의 냄새. 아니 죽음의 냄새.

내 죄가 너무 많아서 나는 죽을 수도 살 수도 없었어. 내 죄가 너무 깊어 다른 사람마저 끌어들이고 말았어. 내 죄가 너무 깊고, 내 죄가 너무 많고, 내 죄가 가이없어......





클로디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없이 햄릿의 두 눈을 쓸어 감겼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혼란에 빠져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 그 혼자만 침착했다. 두 손을 풀어 복부 깊숙히 박힌 검을 뽑아 주자, 등 뒤에서 째지는 비명 소리가 들려 왔다.

"손 떼십시오!"

등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낯익은 목소리였다. 클로디어스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호레이쇼."

"당신......당신.....이..... 당신이 선왕 폐하를 죽인 거야! 선왕 폐하를 죽이고, 햄릿 왕자님을 죽이고! 왕비 전하를 죽이고, 레어티즈까지....."

"왕비와 햄릿을 죽인 것은 레어티즈다."

"당신의 흉계에 빠진 거야! 당신의 흉계에 빠진 거라고! 뭐, 햄릿 왕자님이 네 귀에 독약을 부었다고? 거짓말이야! 당신이 햄릿 왕자님을 세뇌시킨 거야! 햄릿 왕자님은 착각.....거짓 착각에 빠져 계시는 거야!"

"그래."

클로디어스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햄릿 왕자는 착각에 빠져 있었지. 내 귀는 전쟁터에서 다친 거다."

"역시!"

호레이쇼는 환호성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클로디어스에게 달겨들었다.

"왕자님은, 선왕 폐하는 고귀하고 다정다감한 분이셨다. 모두 당신의 꾀임에 빠져 이렇게 된 거야! 이 더러운 자, 이 가증한 자!"

"네 이 무례한 놈, 무슨 짓이냐!"

혼란에 빠져 있는 와중에 호위기사들이 호레이쇼를 붙잡았다. 호레이쇼는 고래고래 고함쳤다.

"당신이 선왕 폐하를 죽였어! 당신이 햄릿 왕자님을 죽였어! 당신이......"

"감히 이놈이...이자의 목을 베라!"

"멈춰!"

클로디어스는 벽력같이 외치며 돌아섰다. 호레이쇼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절망의 눈물이 뺨을 덮고 있었다. 차디찬 돌바닥에 무릎이 꿇려지고 목이 내밀어져도 자신을 노려보는 눈은 형형하기만 했다. 그로서는 당연한 것이다. 햄릿과 젖형제로 큰 호레이쇼는, 햄릿이 클로디어스의 귀를 멀게 했다는 것을, 그로 인해 이 많은 죄가 저질러졌다는 사실을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눈앞의 진실도 부정할 것이다. 그에게 햄릿은 언제나 고결하고 기품 있는 왕자인 것이다.

"풀어 줘라."

호위 기사들이 말없이 눈으로 반대를 표시했지만, 그는 두 번 말하지 않았다. 병사들에 의해 회장의 문으로 질질 끌려가면서 호레이쇼는 절규했다.

"내 반드시 이 일을 기록하리라, 클로디어스! 이 왕위 찬탈자, 더러운 놈아! 내 이 일을 반드시 후세에 전할 것이야!"

클로디어스는 신경쓰지 않고 다시 햄릿의 시체 옆에 무릎을 꿇었다. 헤보나의 독은, 피부에 문둥병처럼 부스럼이 나게 할 텐데 기이하게도 햄릿은 조각상같이 깨끗한 피부로 살아있는 것처럼 누워 있었다. 죄책감이 너무 커, 고뇌가 너무 커 헤보나의 독약도 그의 숨만을 앗아가고 그 이외에는 범치 못한 것일까.

"잔인한 복수군, 햄릿."

그는, 조카 햄릿에게 그리고 햄릿 왕에게 속삭였다. 햄릿의 흩어진 갈색 머리카락을 쓸어올려 주며 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딘가에서, 미소를 지으며 햄릿이 나타날 것만 같았다. 심장이 타들어갈 정도로 무거운 죄책감에 짓눌려서 그저 웃기만 하던 그가.

'..........귀는 괜찮으십니까, 숙부.'

알현실에서, 심상하게 자연스럽게, 그렇게 웃으며 건네왔던 그 물음이 문득 심장을 잔잔히 때려왔다. 클로디어스는 눈을 감았다. 웃음이, 그 웃음이 무엇을 뜻했는지. 그 하얗고 투명하던 웃음이 무엇을 뜻했는지 자신은 몰랐다. 행여나, 알았다면.....

클로디어스는 햄릿의 흐트러진 옷을 바로잡아 준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득 귀에 손이 갔다. 귀가 시큰하다고 생각하면서, 클로디어스는 그저 웃었다. 눈물 같은 웃음이었다.





내 죄가 너무 많아서 나는 죽을 수도 살 수도 없었어. 내 죄가 너무 깊어 다른 사람마저 끌어들이고 말았어. 내 죄가 너무 깊고, 내 죄가 너무 많고, 내 죄가 가이없어......아아, 괴롭다. 괴롭다. 너무도 괴롭다. 이 깊은 죄 속에 침몰해서, 끈끈하고 혼탁하고 쇠비린내 나는 죄가 내 몸을 감싸안아서, 이젠, 빠져나갈 수도 없어.

이젠, 빠져나갈 수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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