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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wk.com귀찮은 일을 맡았다. 진은 한숨을 쉬며 집게 손가락으로 자판을 톡톡톡 두드려 공지를 공용게시판에 띄웠다.

[이 시각 이후 4시간 동안, 레어르(leurc)사(社)에서 임시 감사관(監査官) 직책을 받은 저 진(Jin)이 탑을 한바퀴 돌며 각 컴퓨터실과 개인 방의 청결상태 및 근무조항 실태를 검사하겠습니다. 각 가드(Guard)들은 개인 방 상태를 점검하시고 혹여 계약사항에 어긋나는 물품이나 상황이 있을 경우 눈에 띄지 않도록 신속하게 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공지사항이 띄워지는 즉시, 탑에 있는 인터폰들이 동시에 울리며 공지사항이 올라왔음을 알린다. 근무조항 위반 유무를 확실하게 체크하려면 공지사항을 띄워서는 안되겠지만, 인간사 가끔 느슨하게 풀어줘야 하는 것이다. 탑 운영 초반에는 감사관이 위반 현장을 아무 예고 없이 급습하는 형식으로 실시되었다가 가드들의 격한 반발을 겪고 - 사생활 침해라는 것이었다 - 공지사항을 미리 띄워주는 식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공지사항을 띄운지 10분도 지나지 않아서 들이닥치면 예고의 의미는 없다. 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별다른 악의 없이, 공지를 띄운지 정확하게 15초 후에 휘의 문 앞에 섰다.

"휘? 접니다."
"그 빌어먹을 감사 때문에 왔나?"
"빌어먹을, 은 좀 떼시죠. 그냥 한바퀴 둘러보는 겁니다."
"이건 분명히 계약조건에 어긋나는 사생활 침해야. 그리고 자네는 더해. 어떻게 연 13회 연속해서 감사관을 맡을 수 있나? 자네는 법을 어기고 싶은 욕구나 비정상적인 억압을 무릅쓰고라도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은 사라진 건가?"

냉동인간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레어르사는 냉동캡슐 안전성의 완벽함을 선전하기 위해서 냉동 캡슐의 생명유지장치를 보호, 관리할 가드를 고용할 때 '외부의 물자지원이 풍부할 시, 격리된 공간에서 독자적인 생활 가능'을 우선순위로 꼽았다. 한 대당 300명의 생명을 취급하고 있는 컴퓨터와 접촉하는 인간 수가 적을 수록 사고 가능성은 줄어들었다. 프로젝트를 반대하는 급진주의자와 종교인들이 방해공작을 펼 가능성을 대비하여, 회사는 탑을 관리하는 인원수와 자격을 극도로 한정했다.

가드들은 유능한 프로그래머들이었으며 침입자를 대비해 총기 소지를 허가받고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건물 안에서 자신들의 주거 구역을 정해 각자 혼자 독신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필요한 일상용품은 배달로 조달했으며 각 층마다 온갖 기구가 다 갖춰져 있었다. 외부와의 통신은 허락되지만 가족, 친구와의 면회는 한달에 한번씩만 허락된다. 사회와 격리된 채 오로지 혼자서 독자적인 생활을 해야 했으며 그 대가로 주어지는 것은 높은 봉급과 관리업무에 지장이 가지 않는 한도 내의, 사생활 보호였다.

그러나 그 '사생활'이 때로 가드 본인이 모르는 새에 업무에 지장을 주고 있는 경우를 대비하여 비정기적으로 감사가 행해졌다. 탑의 감사관은, 운영 초기에는 본사에서 나온 직원이 맡았으나 가드들의 반발 후 가드 중 뽑는 식으로 바뀌었다. 이때 무작위 대상은 '회사에 불평불만 건의 횟수가 최소인 사람'으로 한정되었는데, 제도가 바뀐 이후 휴가기간을 빼놓고는 진이 대부분 감사관을 맡았다.

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패널 위 화상(畵像)에게 손짓했다.

"단순한 취미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직장을 날려먹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만 문 열어주시죠? 아직 덜 치우셨습니까?"
"5분만 기다려!"
"제 ID카드가 찍힌 후 문이 열릴 때까지 지연되는 시간도 체크될 겁니다. 들어가서 눈 감고 있을 테니 문 여십시오."
"깐깐하긴. 열어!"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으나, 진이 아니라 문 개폐의 지연시간까지 체크하는 레어르사를 향한 것이었다. 샤악, 하고 시원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자 진은 들어오다가 차가운 공기에 눈살을 찌푸렸다.

"저어, 휘?"
"뭐야, 뭐가 문젠가?"

음성 명령만 내리고 바로 방으로 들어갔는지, 안쪽에서 묵직한 유리가 서로 부딪쳐 딸깍대는 소리에 섞인 빈정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은 눈을 감은 채 더듬더듬 발걸음을 옮겼다. 실내 구조는 층마다 똑같았으므로 그는 컴퓨터에 가볍게 발이 걸려 멈췄다. 등 뒤를 보지 않도록 조심스레 눈을 뜨고, 몇 가지 버튼을 눌러 알고 싶은 것을 알아냈다.

"뭔가?"

걸리는 것은 대충 다 치웠는지, 휘가 다가오며 물었다. 진은 화면에 떠오른 실내기온을 보며 대꾸했다.

"냉방병 걸리겠습니다. 온도 조절 장치가 이상한 겁니까, 아니면 냉혈동물로 진화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겁니까?"
"......가벼운 감기 증상이 있어서 자체 치료중일세. 열이 나는데 물수건 갈아줄 사람이 없으면 기온을 내리는 수밖에 없지 않나?"

처방을 알려주듯 천연덕스럽게 늘어놓는 사설에 진은 뒤를 돌아보았다. 가드의 옷차림은 제한되지 않았지만 비상시를 대비하여 움직이기 편한 차림을 할 것을 권고하고 있었다. 휘는 전(前)직업 탓인지 항상 의사 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오늘은 그 위에 계절에 맞지 않는 털목도리를 둘둘 말고 있었다. 진은 주름이 지는 미간을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유감스럽게도 감기는 천연두같이 세기를 넘으며 사라진 질병이 아니기 때문에 저도 기본적인 지식 정도는 갖고 있습니다. 감기는 분명히 추운 날씨가 지속되는 겨울에 걸린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동료가 얼토당토 않는 거짓말을 하며 애써 진실을 외면하려 하면 같이 고개를 돌려주는게 예의 아닌가?"
"두번째 유감스럽게도, 저는 제 자신보다 훨씬 연장자이신 휘 당신이기 때문에 좀 더 실질적인 변명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납득할 만한 대답을 해 주시면 기록에 남기는 건 고려해보죠."

본사 직원 못지않은 깐깐한 진의 대답에 휘는 한숨을 남기고 돌아섰다.

"따라오게나."

개인 방으로 들어간 진은 쌓여있는 의학 저서와 연구장비를 보며 감탄했다. 휘는 침대 아래에서 긴 관 같은 나무 상자를 끄집어냈다. 뚜껑을 열자, 두 팔이 십자형태로 꺾여있고 하체가 물고기 비늘로 덮여있는 비쩍 마른 미라가 드러났다. 보통 사람보다 상체가 지극히 짧아 인간인지 원숭이인지 구별가지 않았다. 진은 숨을 짧게 들이쉬었고, 잠시 후 물었다.

"이게 뭡니까?"
"내 수집품이네. 알잖나."

분명히 기형 물고기나 거대 쥐 등의 시체를 알코올에 담근 유리 항아리를 본 기억이 났지만 이렇게 큰 건 처음이었다. 진은 한동안 빤히 미라를 바라보다가 휘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래서요?"
"죽은지 일주일도 안 된 거라 아직 부패 중일세. 완벽하게 미라화 되기 위해선 낮은 온도와 건조한 대기가 반드시 필요하지."

취미를 위해 건강을 포기한다라. 진은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것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한숨 섞어 말했다.

"냉장고에 넣으시죠."
"이제까진 그랬는데 이 녀석은 너무 크지 않나?"
"그럼 온도조절장치가 달린 건조기를 하나 사시죠?"
"맞춤형으로 신청해뒀네. 아마 이틀 후쯤 도착하겠지."

그러니까 봐 달라, 는 소리였다. 진은 휘의 진중한 얼굴을 한번 보고 관자놀이를 누르며 고개를 끄떡였다.

"잠시 컴퓨터 좀 써도 되겠습니까?"

[공지사항 추가 : 앞으로 5분 후, 무작위로 감사 들어갑니다. 문 지연시간이 30초 이상 길어지면 무조건 기록 남길 테니 알아서 하십시오. 각자, 소지품 잘 처리 바랍니다.]

간만의 감사니 아무래도 전체적으로 느슨할 것이었다. 분명히 근무조항을 어겼는데도 붙잡고 아무 말이나 늘어놓으며 은근히 눈치를 보는 사람들이 진은 질색이었다. 감사 시간 동안 수당이 늘어난다고 해도 원래 가드직의 봉급은 바깥의 일반 직업과 비교한다면 경악스럽게 높았다. 지폐 몇장 더해져도 별 감흥은 들지 않는다. 게다가 진은 개인시간을 잡아먹는 건 질색이었다. 감사관 자리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불평불만 사항을 제출해야 할까, 라고 건성으로 생각한 진은 정확히 5분 후 다음 문의 패널에 ID카드를 그었다.

그 뒤 7명은 요령있게 숨겼는지 원래 어긴 것이 없는지 진이 흠잡을 얼룩 하나 없었다. 내심 다행이라 여긴 그가 마음 속 챠트에 '이상무' 체크를 하며 복도를 도는데, 뜻밖의 인물이 나타났다. 진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왜 여기 있어."
"어이, 이봐. 안 도망치니까 얼굴 좀 피라구."

이안(李岸)은 손을 휘휘 저으며 넉살좋게 웃어보였다. 그러나 진은 같이 웃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주름이 간 미간을 손으로 꾸욱 누르며 위쪽으로 턱짓했다. 그는 자신보다 3층 위였다.

"가서, 빨리, 방에 틀어박혀 있어. 감사 끝날 때까진 못 나오는 거 알잖아?"
"알지. 근데 그거 그냥 형식적인 거잖아?"
"사람들이 그 형식을 안 지켜서, 첫 감사 때는 안 열리는 방 주인 찾아 삼만리였지. 고맙게도 단지 7시간 동안 복도를 방황했을 뿐이지만."

당시 가장 마지막에 발견됐던 사람인 이안은 웃지도 못하는 난감한 얼굴을 했다.

"아직까지 신경 쓰고 있냐. 그런데 내 방은 언제 해?"

진은 속으로 숫자를 헤아려 보고 말했다.

"마리아(Maria)와 수지, 타치야나(Tatiana) 다음으로 할 건데, 왜?"
"아니, 그냥."

저런 말 하는 사람치고 아무 이유 없는 사람 못 봤다. 진은 힘껏 눈에 힘을 줘 째려보자 이안은 천연덕스레 허허 웃으며 손을 내젓고, 그를 스쳐 지나갔다. 진은 미간을 찌푸리고 목에 힘을 줘 그의 뒤통수에 대고 외쳤다.

"검사 끝날 때까지 방에 들어가 처박혀 있어!"

OK, 라고 가벼운 대답이 날아왔으나 진은 악력이 허용만 된다면 당장 이안의 목덜미를 질질 끌고 층마다 연결된 세탁물 수거기에 처박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면 적어도 발발대며 돌아다니진 않을게다.

마리아&수지, 라는 명찰이 붙은 문 옆 패널에 카드를 그었다. 문이 스륵 열리고 귀청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음악소리가 진의 고막을 때렸다. 익, 하고 잇새로 신음소리를 내며 진은 반사적으로 귀를 막았다. 한쪽 벽을 다 차지하는 홀로그램 화면에선 한창 지휘자가 열정적으로 오케스트라 앞에서 지휘대를 휘두르고 있었다. 문을 열어준 마리아가 미안한 얼굴을 하며 손짓으로 소리를 껐다.

진은 아직도 울리는 머리를 짚으며 괜히 화면을 노려보았다. 아직 푹신한 에어소파에 반 누운 자세인 수지가 고개만 휙 돌리고 어깨를 으쓱하며 헤드셋을 꼈다. 소리가 한꺼번에 사그라들었다. 입체적으로 펼쳐지는 홀로그램의 빛에 메탈 블루의 머리칼이 거듭 현란하게 색깔을 바꾸는 것을 눈살을 찌푸리며 보고 있자 마리아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수지는 오늘 조금 피곤하대요. 제가 안내할께요."
"예. 그럼 우선 컴퓨터부터 체크하지요."
"그 다음에......"

마리아는 수지 쪽을 흘끗 살피고 진에게 눈짓을 했다. 진은 잠깐동안 의아했지만 곧 상황을 눈치챘다.

간단하게 컴퓨터 상태를 체크한 다음 그는 마리아의 방으로 건너갔다. 문을 닫자마자 마리아는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그 메일, 제가 보냈어요."
"......내용을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죠. 더 자세히."

앞뒤 잘라먹고 '메일'이라 단호하게 말하는 것을 보니 불평불만 사항 메일 중 하나 같았다. 그러나 들어오는 불만사항이 어디 한두개던가. 진은 섣불리 짐작하는 짓을 않고 그녀에게 서술을 부탁했다. 그녀는 포옥 가벼운 한숨을 내쉬더니 손을 뒤로 돌려 문을 잠궜다. 진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뒷걸질 쳐 의자에 앉았다. 레이스가 달린 꽃잎 무늬 방석이 푹신했다.

그녀는 주저없이 말을 꺼냈다.

"저와 수지가 방을 거의 같이 쓰는 건 알고 있지요?"
"아......예."

진이 어물거리자 마리아는 푸훗 웃었다.

"동성애자는 아니지만. 그냥 친한 친구죠. 사람들 말 많아요?"
"별로......"

어차피 휘와 이안을 제외하면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탑은 넓고 높았으며 격리된 환경과 고독에 지친 사람들은 금방 바뀌었다. 휘와 이안과 진은 드문 장기 근무원이었다. 이제 탑 1년차인 마리아는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라고 말하듯 고개를 가볍게 젓고 입을 열었다.

"여자들은 일단 친해지면 많은 걸 공유해요.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잠자리도. 그래서 가끔 사생활에 비밀이 없어져 불편하기도 하지만......그만큼 편하기도 해요. 옷도 두 배로 늘어나고, 음식도 두배로 주문하면 좀 더 싸지잖아요? 이런 밀폐된 환경 속에서 행동반경도 좀 더 넓어지구요."

서로가 맡은 구역을 합하면 평소 자유스럽게 다닐 수 있는 공간이 두 배로 늘어나니 확실히 편하긴 할 것이다. 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건 그렇죠. 그런데 문제가?"

마리아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수지가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 같아요."

진은 눈을 잠시 깜빡거렸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메일에 써 놨잖아요!"

그제사 메일 하나가 생각났다. 진은 미간을 찌푸리고 머릿속의 기억을 더듬었다.

"......냉장고 음식이 잘 없어진다고 하셨죠. 하지만 그것만으로 애완동물이라 단정하기는 무리 아닙니까? 요리를 두 분이 같이 해서 먹기 때문에 냉장고도 두 명이서 같이 쓴다고 하셨죠? 그럼 한쪽이 요리를 할 때 음식을 조금 많이 쓴 게 아닙니까?"

마리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에요. 음식이 한 뭉텅이씩 매일 밤 없어지는게 확연하게 눈에 보이는 걸요."
"그럼, 밤중에 냉장고문을 열고 몰래 먹는......"
"그.러.니.까."

딱딱 끊어지는 음절에 진은 말을 멈췄다. 마리아는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음식을 같이 산지 8개월 정도 지났는데, 예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구요. 게다가 수지가, 밤에 몰래 음식을 꺼내 먹는 스타일로 보여요? 차라리 제게 직접 말하고 눈앞에서 꺼내 가겠죠."

보통 잘록한 허리를 짧은 청 핫팬츠로 강조하고, 일부러 소매를 뜯어낸 듯한 옷을 주로 입고 거리낌없이 돌아다니던 수지를 떠올린 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아마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시원시원한 자기주장을 펼치는 성격일게다. 한가지 면만으로 사람 성격을 규정하는 건 잘못이지만 대강 짐작할 수는 있는 일이다. 마리아는 건너편에 동거인이 있는 문을 돌아보고 말했다.

"게다가 한가지 종류만 계속 사요. 어느날은 계란만 서른 판을 사서 냉장고에 쟁여두고, 오렌지 주스 병을 세 개 사더니 하루만에 다 비워요. 어느날은 수박이나 바나나가 한아름 배달될 때도 있는데, 하룻밤만에 다 없어진다니까요. 그것도 제가 안 볼 때만. 슬쩍 얘기를 흘려봐도 짜증을 내며 넘어가서 자세히 물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몰래 먹이를 줘야 하는 애완동물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애완동물에게 먹일만한 음식은 아닌데요. 게다가 애완동물은 상당히 심각한 근무조항 위반입니다. 동물털, 배설물......컴퓨터를 망가뜨릴 수 있으니까."

들키면 당장 해고다. 여인은 어깨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제 기우였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있든 없든 결과를 말해주세요. 있으면 제가 설득해 보겠고, 없으면 없는 대로 탁 터놓고 말해 볼테니까..."

진은 뭔가 말하려고 했다가 그냥 입을 다물고 문을 열었다. 애완동물이 나오면 당연히 기록에 남겨야 하는 것이 의무였지만, 감사를 대비해 미리 치웠을 것이다. 필시 흔적만 발견되고 수지는 천연덕스레 잡아떼겠지. 그때는 마리아에게 맡기면 잘 처리해 줄 것이다. 진은 대강 절차를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마리아의 방을 대강 검사한 다음, 층을 내려가 수지의 방으로 넘어갔다. 수지는 '대충 해요.'라고 손을 내저으며 여전히 시선을 홀로그램에 두고 있었다. 진은 수지의 방을 살폈다. 수상한 털 하나, 냄새 한톨도 없다. 그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고 생각에 잠겼다.

"멍하니 뭐하는 거야?"

날카로운 목소리에 진은 거의 튕기듯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내려온 수지가 불쾌한 얼굴로 문간에 기대서 있었다. 진은 어색하게 웃음지으며 문을 나섰다.

"이상한 거 있어?"
"아니요, 그저......"

진은 원색의 옷과 현란한 전자기 포스터가 눈을 아프게 했지만 깔끔하고 단정하게 정리된 방을 돌아보고, 헛기침을 짧게 했다. 쓰레기통에서 빼낸 흰 막대를 들어보이자 수지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당신, 지금 뭐하자는 거야? 왜 남의 방을 함부로 뒤져?"
"그게 제가 하는 일이니까 그렇잖습니까. 마리아씨도 걱정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동거인에겐 알려줘야 하지 않습니까?"

수지는 입술 끝을 비틀어 올리더니 쳇, 하고 쓴소리를 내며 시선을 돌렸다. 몸을 움직이자 거의 잠옷 같아 보이는 헐렁한 티셔츠가 흔들렸다. 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게다가 아직 확실한 연구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전자파는 태아에게 좋지 않습니다. 개인방 주위에 전자파 차단기가 설치되어 있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이 탑 전체가 컴퓨터 덩어리나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근무조항엔 분명히......"
"적당히 해 둬.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으니까."

날카로운 목소리에 진은 입을 다물었다. 기세에 눌린 것은 아니었다. 진도 수지도 냉동캡슐이라는 생명과, 그 생명을 유지하는 컴퓨터를 보호하는 가드로 뽑힌 이상 여러 분야에 대한 실력은 충분하고도 넘치는 엘리트였다. 까다로운 근무조항 내역은 철저히 숙지하고 있을 것이다.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진은 미간에 진 주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상부에 보고하겠습니다. 이의 없으시죠?"
"석 달만 봐 줄 수는 없어? 아직 직장 잘릴 시기가 아닌데."
"태아에게 해롭습니다."

수지는 코웃음을 쳤다.

"웃기고 있네. 이보다 더한 환경에서 열달 동안 시달리고도 애 쑥쑥 낳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오히려 지금 쫓아내면 병원 갈 돈 한푼없이 거리를 헤매다가 애도 못낳고 아사해 버릴 거라구. 괜히 아는 척 하다가 사람 둘 죽일 거 아니면 그냥 넘어가. 왜, 뇌물이라도 줘?"

진은 별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그러나 눈은 수지가 말하는 내내 여전히 의아함을 품고 있었다. 그의 눈빛을 눈치챈 그녀는 피식 웃었다.

"들어오는 돈이 있으면 나가는 돈도 있는거지. 돈 쓸데는 많아."
"......그렇습니까?"

웬만한 기업 고위직에 가깝게 나오는 봉급을 어디에 다 썼는지 진으로선 짐작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그는 그저 고개만 끄떡였다. 각자 나름대로 사정이 있는 법이니까.

개인방을 먼저 하느라 빼놓았던 컴퓨터 시스템 체크를 하고, '꼭 마리아씨와 얘기하세요. 걱정하고 있으니까.'라는 말을 남긴 후 진은 자리를 떴다. 감사를 마친 후에 휘에게 살짝 귀뜸을 해, 신체검사를 받아보게 하리라, 고 가슴에 새겨두고 위로 올라간다.

타치야나는 백옥같은 피부에 벌꿀같은 금빛 머리칼을 가진, 전형적인 서구 미인이었다. 다만 진은 매력적인 여인이다, 라고 막연하게만 생각했을 뿐인데, 그 이유는 서구인답게 키도 훌쩍 커서 진이 고개를 뒤로 젖혀야 겨우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뾰족한 턱과 광대뼈, 그리고 큼직큼직한 몸은 다분히 위압적이기까지 해서 진은 그녀를 만난 후에는 목과 어깨가 아팠다.

다행이도 배려심 많은 그녀는 진을 컴퓨터 앞자리에 앉아서 맞이했다. 스커트 아래로 느긋하게 뻗은 종아리가 매끄럽다. 진은 인사로 가볍게 고개를 숙이다가 흠칫 뒤로 물러섰다. 팔꿈치에 걸린 탁자 위의 꽃병이 툭 떨어졌다. 형상기억 합금이 섞여있는 유리 꽃병은 다행히 도르르 바닥을 구르기만 했다.

진은 한참 입을 뻐끔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이게 뭡니까?"
"알아 맞춰 봐요, 진."

진이 허둥지둥하는 모습이 재미있는지,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손등에 턱을 괸 채 그를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진은 입을 달싹거리다 조심스레 왼 무릎을 꿇고 손을 뻗었다. 반투명한 남빛 털의 고양이는 그의 손이 닿자 쫑긋 귀를 세우며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그를 응시한다. 보송보송할 것 같은 등에 손끝이 닿으려는 순간 고양이는 휙 빠져나가 타치야나 쪽으로 뛰어갔다. 유연하게 굽혀졌다 펴지는 허리와 리듬감있게 바닥을 딪는 발을 보고 있자니 움직이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다.

의심 반 의아 반으로 미간을 움츠리고 어깨를 굳힌 진 앞에서 타치야나는 파하하 웃어젖혔다.

"정말 못말려. 뭐하는 거예요, 진? 홀로그램이에요, 홀로그램! 모르겠어요?"
"......홀로그램?"

반투명한 형상에 기척도 소리도 없다. 만져지는 감촉도 없으니 홀로그램이 분명하지만, 진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되물으며 부드럽게 움직이는 남빛 형상을 눈으로 쫓았다. 느긋하게 꼬리를 한들거리며 타치야나가 앉은 의자 주위를 돌다가, 주인의 매끈한 다리를 타고 무릎 위로 올라간다. 등을 둥글게 옹송그리고 앉아 삼각꼴의 귀를 노곤하게 내리고 눈을 가느스름하게 감는다. 금방이라도 기분 좋은 목울림을 낼 것 같은 표정이었다.

"......엄청나게 자연스럽군요."
"당연하죠. 홀로그램 생성부터 프로그램 제작까지 전부 다시 했으니까. 이주일을 꼬박 투자했어요. 어때요, 멋지죠?"

그녀의 손이 털 위를 슬슬 쓸자, 분명 만져질리 없는 홀로그램 고양이는 귀를 뒤로 젖히며 야옹, 하는 소리를 내는 것 같이 입을 열었다 닫는다. 프로그램 제작까지 완벽하게 맞춘 고양이를 진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쳐다보다가,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에......시스템에 부담이 가는 건 아니죠?"
"전혀요. 간단한 광(光) 시스템을 사용한 장난이니까. 프로그램 용량이 좀 많긴 하지만 내 개인 컴퓨터를 사용한 거니까 걱정없어요."

명쾌한 그녀의 설명에 진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떡이고 메인 시스템을 빠르게 점검했다. 어느새 그녀의 무릎에서 내려온 고양이가 그의 주위를 소리없이 돌아다녔다. 점검을 끝마친 그는 무심코 손을 뻗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훌쩍 피해낸 고양이는 큰 검은 눈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괜히 머쓱해진 그는 손을 거뒀다. 뒤에서 그녀가 웃음소리를 냈다.

"외부인에겐 가까이 안 가도록 설정해 놨으니까 친해지려는 속셈이라면 일찍 포기해요."
"......그런 것까지 진짜를 쏙 빼닮았군요."

진은 한숨을 쉬며, 개인 방 쪽을 가리켰다.

"잠깐 둘러보겠습니다. 괜찮으시죠? 어차피 걸릴 것도 없겠지만."
"이 애는 괜찮나요?"

진은 그녀가 '이 애'라고 부른 홀로그램 고양이를 잠깐 들여다보고 고개를 끄떡였다.

"실제적인 애완동물은 아니니까요. 그런데 소리는 왜 안 넣은 겁니까?"

타치야나는 푸른 눈에 놀라움을 가득 띠우고 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넣어도 될까요?"
"예?"
"애완동물은 규정상 반입 금지잖아요. 소리가 나면 다른 사람들이 불평할 것 같은데."
"어디까지나 홀로그램이잖습니까. 가드 한명 당 3, 4층을 차지하고 있는데 고양이 울음소리가 어디까지 들릴 거라고 생각합니까? 게다가 각 문은 완전 방음. 컴퓨터 경고음이나 인터폰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라면 소리쯤이야 별 상관없습니다."

진은 착실하게 말하며 방 검사를 대충 마쳤다. 고양이는 주인 외에 처음 보는 사람이 신기한지(아니면 신기하게 설정되어 있는지) 가까이 오지 않으면서도 일정 거리를 두고 그를 따라다니며, 가끔 그가 돌아보면 '뭘 봐?'라고 하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만 살짝 기울였다.

마지막까지 다가오지 않는 고양이에게 약간의 섭섭함을 느끼며, 동시에 그 섭섭함이 말도 안돼는 것임을 반복해서 일깨우며 진은 문을 나섰다.

"고양이- 귀엽네요."

예의상이 아닌, 절반은 진심으로 말하자 그녀는 가볍게 웃었다.

"고마워요. 참, 그런데 혹시 고양이 울음소리 못 들었어요?"
"예?"

그녀의 올라가는 입매에 뜻모를 미소가 묻어나왔다.

"제 컴퓨터 방어벽에 바이러스를 심어놨거든요. 정식 경로로 접근한다면 아무 문제없지만, 해킹 같은 비정상적인 경로로 들어온다면 바이러스가 곧장 상대방에게 넘어가서 시스템 깊숙이 파고들어 새로운 프로그램을 설치하게 되어있죠. 효과는 고양이 울음소리가 스피커 볼륨과 상관없이 24시간 나오게 하는 것. 스피커 전원만 들어가 있다면 비상벨같이 끊임없이 울려퍼지죠. 한 사흘쯤 내버려두면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일텐데......아직 아무도 못 들었대요?"
"......맙소사. 지옥이겠군요."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과연."

들어서자마자 나긋나긋하고 작은 고양이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고막을 간지럽혔다. 바닥에 널브러진 온갖 디스크들을 밟지 않도록 조심스레 들어갔다. 이안은 한숨을 쉬었으나 귀를 막은 헤드셋은 빼지 않았다. 선이 없는 이유는 무선이어서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정적을 느끼고 싶어서일 게다. 진은 벌써부터 이명이 윙윙거리는 귀를 막으며 물었다.

"역시 네놈이었군. 언제부터인거야?"
"사흘 전인가."
"뭐 하다가? 일기장이라도 훔쳐보려고?"
"그럴리가."

이안은 새집같은 머리를 지친 듯 내저으며 컴퓨터 앞에 다시 앉았다. 아무래도 바이러스가 걸린 이후로 계속 컴퓨터를 붙잡고 앉아있었던 모양이다. 어둑한 복도가 아닌 방 조명 아래서 본 이안은 머리만 아니라 옷도 구깃구깃했고 잠을 못 잤는지 목도 쉬어있었다.

"모 기업 시스템에 침입하려 했는데 내 IP주소가 걸려서 안되더라구. 저번에 하다가 한번 걸렸었거든."

진은 한심하다는 감정을 최대한 담아 이안을 노려봐주었다. 야옹야옹 소리가 고양이 목에 핏대라도 서지 않았나 싶게 날카롭다.

"그래서 경유주소로 타치야나씨 컴퓨터를 이용하려 했단 말이지?"
"그래."
"같은 가드가 장난삼아 만든 바이러스 하나 해결 못하면서 기업을 해킹? 자알 하는 짓이다."
"익, 네가 한번 해 봐!"

이안은 바닥에 흩어진 디스크와 프린트 종이들을 진의 얼굴에 던져버렸다. 그는 잠시 열이 뻗쳐오르는 관자놀이를 누른 후 이안 대신 컴퓨터에 덤벼들었다. 열없는 컴퓨터 모니터 빛에 비친 이안의 얼굴은 추궁하기가 미안할 정도로 초췌해보였고, 어쨌든 분풀이를 할 상대는 있어야 했던 것이다.

약 4시간을 매달린 끝에야 간신히 진은 고양이 울음소리를 걷어냈다. 두어시간 정도 복도에서 달디단 잠을 자고 나온 이안까지 매달려서야 겨우 소리는 그쳤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바이러스의 마지막 흔적은 물론 타치야나의 컴퓨터와 연결된 경유로까지 말끔하게 지워낸 진은, 고막 안에서 뜀뛰기를 하듯 맴도는 고양이 울음소리를 고개를 저어 떨쳐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리가 끊기자마자 헤드셋을 벗어던지고 잠에 빠진 이안의 머리통을 시원하게 후려쳐 버리고, 자다가 날벼락을 맞은 그가 투덜대며 뭔가를 집어던지기 전에 얼른 밖으로 피신했다.

한잠 푹 잔 후에, 진은 본사로 '모두 이상 무'라는 의미인 서류 24장의 메일과 함께 감사관 자격을 반환했다. 성가신 임무는 무사히 끝났다. 여러 헤프닝이 있었지만 어쨌든 끝난 것이다. 진은 크게 기지개를 켜다가, 화면 아래쪽에 깜빡거리는 새모양이 뜬 것을 보았다. 지정하자 새가 포로록 날아오르며 음성이 재생된다.

[어이, 진! 수고했다. 지금쯤 완전히 골아떨어져 있겠지? 일어나면 연락하라구]

이안의 목소리였다. 진은 의아해하며 인터폰으로 연락을 넣었고,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문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진이 '열어.'라고 마뜩찮게 말했으나 이안은 전혀 개의치않고 슥슥 걸음을 잘도 옮겼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던 진은 어느 순간 벌떡 일어났다.

"어이, 야, 지금 뭐하는 거야!"

서슴없이 진의 개인방 문을 벌컥 열어버린 이안은 주저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몇걸음 되지 않는 거리를 황급히 뛰어간 진은, 문간에 우뚝 멈춰섰다. 침대 머리맡의 화분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던 이안이 흘끗 곁눈질을 했다.

"근무규정 상에 분명 실제 식물은 금지일텐데?"
"아......그게."

화분 모서리를 손톱으로 긁자 마른 흙이 떨어져 내렸다.

"흙, 꽃가루, 벌레, 마른 이파리, 먼지, 지푸라기, 박테리아 등이 컴퓨터 시스템에 큰 혼란을 미칠 수 있으니..."

화분 밑을 손으로 슬쩍 쓸자 젖은 흙과 모래 알갱이가 묻어나왔다.

"애완동물과 동급으로, 실제 식물을 키우는 것 또한 중대한 규정 위반에 속한다, 고 어디선가 읽은 것 같은데 말이지."

화분에 가득 담긴 흙을 비집고 뻗어나온 낭창한 잎사귀를 가볍게 튕기자 부드럽게 휘었다가 흔들리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진은 입술을 꽉 다문 채 그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이안은 히죽 능청스레 웃었다.

"위쪽에 바로 찌르면 실직자 신세는 금방이란 건 전직 감사관 나으리께서 더 잘 알고 계시겠지?"

기름을 마디마다 친 것 같이 유려한 위협 대사를 끝까지 들은 진은 아무 말 없이 침대 위의 베개를 집어들었다. 이안의 눈썹이 조금 일그러졌다. 진은 가볍게 한숨을 쉬어보이고, 이안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당장 그 애 내려놓지 않으면, 친다."
"쳐 봐."

인정사정없이 이안의 머리를 후려친 진은, 그의 손에서 떨어지는 화분을 얼른 받아들어 화분 받침에 잘 돌려놓았다. 전자파를 막는다는 광고 때문에 통신 구입했던 숯베개로 호되게 얻어맞은 이안은 무릎을 꿇고 신음했다. 진은 잠시동안 등을 밟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침대에 앉았다.

"그냥 죽어버려, 빌어먹을 군인자식."
"전직 군인이다......으윽."

이안은 신음소리를 삼키며 겨우 일어나 더듬더듬 의자를 찾아 기어올랐다. 이안이 제대로 앉을 때까지 기다린 진은 손에 턱을 괴고 이야기를 들을 자세를 취했다.

"어떻게 안 거냐?"
"으으윽......일부러 찾아온 사람한테 차도 안 끓여주냐?"
"들어오자마자 인질극을 벌인 놈이 뻔뻔스럽다. 그냥 불어."

이안은 작게 투덜거리며 맞은 부위를 문질렀다.

"레어르사 항의메일들을 보니 유독 네 메일만 없더군. 감사 제도가 바뀌기 전에는 그나마 꼬박꼬박 불편사항 메일을 보냈었지? 아마 이렇게 해야 후진들이 좀 더 편하고 합리적인 환경에서 일할 수 있을 거라는 착실한 성격 때문이었겠지. 그런데 제도가 바뀐 이후, 갑자기 한통도 안 보내더군. 그걸 보고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걸로 때려잡았지. 일단 그렇게 생각하니 나머지는 쉽더군. 감사관이 받는 이득은 두가지인데 넌 돈은 안 써서 썩어날 지경이잖아?"

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감사관은 자기 방 감사는 안하지."
"그래. 완전히 근무 태만이야."

이안은 혀를 차며 햇살을 한가득 받는 화분을 바라보았다. 환기구에서 빨아들이는 공기의 흐름에 녹색 잎줄기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왜 가져온 거야? 들키면 그 자리에서 해고라구. 인공 식물이 왜 있는지 모르냐."
"그건 키우는 맛이 없어."

진의 단정적인 말에 이안은 코웃음을 치며 그를 돌아보았다.

"키우는 맛?"
"실제 식물은, 어떻게 자라날지 예측할 수가 없어."
"그거야 인공식물의 성장패턴을 랜덤으로 설정하면 되잖아?"
"달라."

진은 손가락으로 허공에 식물이 자라나는 모양을 그려보였다.

"실제 식물은 자랄 때......뭐라고 할까. 내가 원하는 대로 자라나면서도 미묘하게 달라. 그러니까, 음, 주인 말을 조금 들어주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말까지 걸어가며 키우냐? 완전히 애 아빠로군."

이안은 헛웃음을 지으며 낭창하게 휜 녹색 이파리를 만지려다가, 진이 다리를 차자 넘어질 뻔했다. 이안이 확 인상을 찌푸리자 진도 마주 노려보았다.

"함부로 만지지마. 엄청나게 민감한 애야."
"......유츄프라 카치아냐."
"난(蘭)이야."

보기는 좋지만 키우기 까다로운 꽃이름을 들은 이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제자리에 앉았다.

"너답군. 아무튼, 어떻게 할 거야?"

진은 어깨를 조금 움츠렸으나, 곧 그를 바라보았다.

"그건 내가 할 말 같은데."
"음......저거, 관리는 제대로 되는 거냐?"

진은 천장과 가깝게 붙은 환기구를 가리키며 말을 시작했다.

"환기 시스템을 약간 손봤기 때문에 지금 이 방 상태는 무균실과 비슷해. 외부와 격리되어 있고, 항상 깨끗한 공기만 공급되고, 또 흡입되지. 방 안 공기 순환과 컴퓨터실 공기는 애초에 다른 환기구를 통하고 있기 때문에 기기에 손상이 갈 가능성은 거의 없어. 화분을 옮기는 일도 없고."
"OK. 그럼 키워."

너무 선선한 통과에 진이 눈을 크게 뜨자 이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녁 한번 거하게 차려라. 어차피 이 안에선 너도나도 다 찔리는 신세 아니냐."
"아니, 그래도......"

진이 어물어물하는 사이 이안은 시원스런 발걸음으로 방을 걸어나갔다. 고개를 갸웃하면서 난 화분이 놓인 위치를 바로잡던 그는 문득 손을 멈췄다.

탑의 항의메일은 레어르사의 본사에 먼저 도착하고, 그 쪽 직원들이 감사관이 점검해야 한다고 판단되는 메일만 선별하여 점검 사항으로 따로 분류, 감사관에게 보낸다. 즉, 탑의 가드들이 서로가 무슨 메일을 보냈는지는 절대 알 수 없다. 모든 메일은 본사의 서버로 전송되니까.

진의 컴퓨터 속에는 이번 회기에 필요한 항의메일들만 들어있었다. 그런데 감사관 제도가 바뀌기 훨씬 전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기간을 통틀어서 메일을 보낸 사람 명단을 조사해봤다는 이안의 말은-

"......이 자식, 설마......"

갑자기 참을 수 없는 두통이 일어나 진은 관자놀이를 꾹 누른채로 신음했다. 단순한 궁금증 때문에 자기가 일하는 기업 본사 서버를 해킹하는 녀석은 빌어먹을 놈의 군인 녀석밖에 없을게다.

"......그러니까 말야, 란. 너도 이해하지? 아무래도 툭 터놓고 말할 상대 한명쯤은 있어야 되지 않겠어? 애초에 이안이......"

화분 받침 위에 다소곳이 놓인 난초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진의 푸념을 들으며 소리없이 잎을 한들거렸다.


-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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