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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훈 냉동인간과의 인터뷰

2006.02.24 22:4502.24

  “눈을 뜨고 보니까 지저분한 셔츠 위에 흰 가운을 대충 덮어 씌워 놓은 것 같은 청년이 축하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어. 무슨 노래였냐고? 글쎄.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어. 거의 270년 만에 빛을 본 순간이었다고. 270년이라. 한 순간이었어. 장난 같았지. 마치 내가 잠든 사이에 모두들 다른 방으로 숨어 버리고 의료진 중에서 제일 어수룩한 바보 하나만 병실에 집어넣어 뒀는데 내가 갑자기 눈을 떠버린 것 같았어. 상상이 되나? 그 기나긴 시간을 꿈도 꾸지 않고 지나오는 것 말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와인 잔을 정신 사납게 살랑살랑 흔들었다.
  “닥터 디겐스가 수술 전에 말해 준 것도 그 비슷한 것이었어. 백까지 세라고 하더군. 세다가 잠깐 잠이 들 텐데 정신이 들면 마저 세라고. 그러다가 눈을 뜨면 아마 다른 세상에 와 있을 거라고. 그 비슷한 느낌이기는 했는데, 다시 정신이 들고 나서는 숫자가 기억이 안 나더군. 내가 어디까지 세다 말았는지가 기억이 안 난다는 게 아니라 그 다음 숫자가 뭐였는지가 기억이 안 났던 거야. 닥터 디겐스 말로는 한 2030년 안에 우리 모두를 살아 있을 때와 똑같은 상태로 되돌려 놓을만한 기술이 개발될 거라고 했어. 그런데 웬걸. 1973년에 들어가서 2241년에 깨어날 때까지 한 200년이나 시간을 더 줬는데도 사람들은 1973년에 했던 것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더라고. 멀쩡한 사람 갖다가 바보 만들어서 내 보내는 짓 말이야.”
  “쉽지 않았을 겁니다. 나노 기술이.”
  그가 내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그래. 그 어수룩한 청년이 그렇게 말해 주더군. 나노 기술, 저온 생물학. 처음에 내가 냉동실에 들어갔을 때는 후세 사람들이 어떻게 해 주겠지 하고 워낙 얼렁뚱땅 얼려 놓는 바람에 손상된 뇌세포를 분자 수준에서 일일이 수리할 만큼의 나노 기술이 필요했다고. 그 말을 알아듣기까지 3년이 걸렸어. 머릿속에서 언어 능력이 몽땅 지워져 있었거든.”
  “그건 옛날 사람들이 너무 낙관했기 때문이지 우리 잘못은 아니죠. 이만큼 해낸 것만 해도 기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 뒤로도 쭉 선생님처럼 냉동되거나 인공 동면된 사람들은 많았지만 다시 살려내는 데 성공한 경우는 하나도 없었으니까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열광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그렇게 항변 비슷한 말을 하자 그는 특유의 냉소적인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비웃음 비슷한 것을 흘리고는 벽에 걸려 있는 그림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가? 하긴. 기억은 서서히 다 돌아왔으니까. 잘 났네. 잘 났어.”
  “선생님.”
  그는 말없이 그림을 응시하고 있다가 불쑥 말했다.
  “내가 왜 선생님인가? 나는 그런 말을 들을만한 일을 해 본 적이 없네. 평생 단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었어. 존경이라니 어울리지 않아. 나 같은 멍청한 늙은이를.”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가 냉동 상태로부터 깨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2245년 가을이었다. 그 소식이 일으킨 반향은 처음에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흐르느냐가 문제지 언젠가는 냉동 보관 중인 과거의 부자들을 모조리 깨워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쯤은 누구나 해 볼 수 있었다. 현실에서 그 일은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다. 충분히 기술이 쌓였다고 생각하고 막상 개봉해 보면 내용물은 얼렸다 녹인 딸기처럼 흐물흐물해져 있는 수가 많았다. 아무리 조심을 한다고는 해도 냉동시킬 때 팽창하는 수분 때문에 세포벽이 깨어지곤 했기 때문이다. 시간만 몇 백 년이고 몇 천 년이고 충분히 쓸 수 있다면 무슨 기술인들 얻어내지 못할까 만은, 깨어진 세포를 하나하나 다 기워서 사람으로 만드는 일은 장난이 아니었다. 깨어지기 전에는 어떤 모양이었는지를 나노 로봇이 파악할 수 있으려면 도대체 어느 정도의 기술이 필요한 것일까.
  나는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나는 그저 성직자일 뿐이다. 나는 온 마음을 다해 창조론을 믿고 인간의 구원과 영원한 삶을 믿는다. 심지어 구세주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사실까지도 나는 진실이라고 믿고 있다. 굳게 믿고 있다.
  “기자 아니었소? 의사도 아니고? 그럼 당신 나를 왜 만나러 왔소?”
  내가 성직자라고 말했을 때 그가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당신을 만나야 했습니다.”
  “왜? 반대할 거 아니요? 나라는 자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당신네들한테는 말도 안 되는 일 아닌가.”
  확실히, 마음에 안 든다. 주교님 같은 분조차도, 섣부르게 해동시켰다가 실패했던 수많은 전례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고소하다는 생각을 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냉동인간 재생 실패 소식이 전해질 때면 그날은 내내 어쩐지 유쾌한 표정을 짓곤 하셨던 것이다. 생명이 냉동 보관되었다가 해동 가능하다니. 절대로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입으로는 이렇게만 말했다.
  “무슨 말씀을요. 생명의 고귀함을 저희가 함부로 재단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나를 죽이려고 온 거 아닌가?”
  “무슨 섭섭한 말씀을. 이래 보여도 성직자입니다.”
  그는 내 마음을 이미 다 읽었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한 바퀴 돌았다. 마치 그렇게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을 보는 게 약 오르지 않느냐는 듯한 동작이었다. 나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 자가 깨어났다는 것 자체는 사실 큰 문제가 아니었다. 좀 더 큰 반향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당연히 그가 깨어나는 것을 보고는 다른 냉동 인간 후원자들도 해동을 시도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 후로 3년이 지나도록 단 하나의 성공 사례도 추가로 발견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한때 엄청난 부와 명예를 거머쥘 것만 같았던 그 꾀죄죄한 청년 의사 베제만은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이 사람 하나만 성공했단 말인가. 그리고 왜 다른 사람은 살려내지 못하는 것인가. 결국 궁지에 몰린 그가 던진 한마디는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고 말았다.
  ‘이 자는 인간이 아닌 것 같다.’
  인간이 아닌 것 같다니. 그럼 뭐란 말인가. 그 무책임한 말 때문에 주교님은 심기가 불편해지셨다. 그리고는 나를 보내셨다. 그래서 나는 이 자에게 꼭 좀 들어야 할 이야기들이 있었다. 내가 이렇게 말을 꺼냈다.
  “슈베린 씨. 당신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 사실 나도 처음에 깨어났을 때는 나에 대해서 대단히 궁금했네. 모국어도 다 잊어버린 상태였으니까. 나에 대해 궁금하거든 저걸 읽어 보지.”
  그는 책꽂이에 꽂혀 있는 서류 뭉치 한 다발을 꺼내어 내 앞에 내밀었다.
  “자서전이야. 죽기 전에 썼더군. 나는 냉동 상태에서 다시 깨어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안 했거든. 닥터 디겐스라는 작자 말이야, 낙관적인 건 좋았지만 그렇게 믿음이 가는 인물은 아니었어. 우리한테는 미래를 볼 수 있어서 좋겠다고 노래를 불러 댔지만 정작 본인은 냉동 보관되기보다는 그냥 죽는 걸 택했을걸. 그렇게 죽으면 장례라도 치를 수 있지 않겠어. 나는 닥터 디겐스의 말은 믿지 않았어. 다시 한 번 살아나게 해 주겠다는 이야기 말이야. 못 믿겠더군. 그래서 날 받아 놓고 한 달 동안 내내 우울해하다가 잠이 들었지.
  그때 쓴 거였어. 깨어나고 나서 한참동안 아무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을 때, 베제만이 이걸 나한테 내밀더군. 오토 슈베린(Otto Schwerin) 자서전이라. 처음에는 할 줄 아는 언어가 하나도 없어서 읽지도 못했지, 물론. 그래도 그냥 보고 있기만 해도 뿌듯한 물건이었지. 언젠가는 읽을 수 있게 될 줄 알았거든. 나는 뿌리를 뽑히지 않고 270년을 건너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아 뭐 결국 모국어는 기억이 안 났고, 새 언어를 배웠지. 그러니까 내가 쓴 걸 번역해 놓은 걸 다시 읽어야 했어.”
  나는 그가 건네는 것을 받아서 한두 장 펼쳐 보았다. 물론 그 정도는 이미 구해다 읽은 상태여서 더 궁금하지는 않았다. 내가 이 자에게 물어야 할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고맙습니다만 저도 한 부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같은 경우는 의료 기록들도 자세하게 볼 수가 있었거든요. 그렇지만 선생님. 그 이야기가 다가 아닐 거라고 믿은 분들이 계셔서 말이죠.”
  “벌써 읽었어? 그럼 뭐야? 옛날이야기라도 해 달라는 건가?”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그는 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궁금한 것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본격적으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병명 말인데요. 진단을 못 내렸더군요. 베제만 박사가 요전에 선생님을 검사하고 나서는 역시 진단을 못 내리겠다고 말했던 것 때문에 문제가 됐던 것은 아시죠?”
  “닥터 베제만? 그랬더군. 나라는 작자에 대해서도 진단을 못 내리겠다고 말했다더군.”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설명하라고? 미안하네. 나는 환자야. 의사였던 적은 없어. 닥터 디겐스는 말이야, 2030년쯤 되면 동네 병원에 가서도 내 병쯤은 치료할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그 돌팔이가 또 사기 친 거지 뭐. 아직도 아무도 못 알아내다니. 목숨이 위태롭군. 하지만 다시 냉동실에 들어갈 생각은 없네. 지금이나 그때나 못 믿기는 마찬가지야. 그리고 공기가 바뀌어서 그런지 다시 깨어나고 나서는 한결 상태가 좋단 말이야.”
  “선생님. 전혀 좋아진 것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저걸 끊으면…….”
  나는 끊임없이 수혈 중인 혈액 봉투를 가리켰다. 그가 재빨리 말 꼬리를 자르면서 대꾸했다.
  “그렇긴 하지만 죽어가는 병은 아니지 않나? 그냥 좀 불편할 뿐이지.”
  “그렇죠. 좀 불편할 뿐이죠. 찢어진 세포 하나하나를 다 기워서 멀쩡한 사람으로 만들어 내는 기술이라는 게 있는 시대에 해결하지 못하는 병도 있으니 불편해 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죠. 베제만 박사는 거의 돌아버렸다는 소문도 있어요.”
  “그 친구 아직 경험도 없고 사람이 좀 강하지가 못해. 디겐스라는 작자는 그래도 그럴듯하게 꾸며서 딴소리 못하게 입막음하는 재주는 있었는데.”
  “어디 본인이 직접 한번 해 보시죠.”
  그는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뭐가 그렇게 궁금한가?”
  “수혈을 받으셨더군요. 그것도 거의 내내 수혈을 받으셨더군요. 수혈을 끊으면 발작, 시력 저하, 경련, 죽기 직전까지 갔다고도 하고. 디겐스 박사가 뭐라고 기록해 놓은 줄 아십니까? ‘수혈을 밥 먹듯이 했다’고 썼는데요……. 베제만 박사도 이렇게 말했더군요. ‘그 많은 혈액이 다 어디에 저장되는지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면 혈액들이 어디에서 그렇게 지속적으로 고갈되어 가는지 모르겠다.’ 다른 의사들 소견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요. 모르겠다는 결론.”
  “그랬지. 고통스러웠네. 그래서 냉동실을 택하는 바보짓을 했지. 왜 그런 증상이 나타나는지를 아무도 알 수 없었으니까.”
  나는 그가 계속해서 딴청을 피운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망설이지 않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참전하셨더군요. 꽤 큰 전공을 세우셨던데.”
  “젊었을 때 이야기야.”
  “대단한 전공이었더군요. 정권이 바뀌고 정치체제나 세상 자체가 다 바뀌는 와중에도 독일 정부에서는 선생님 치료비를 계속 댔던데. 물론 저 수혈 비용까지 말이죠. 나중에 냉동 비용을 댄 것도 결국은 서독 정부와 관련된 무슨 기관이었어요. 그렇죠?”
  “그랬지. 가끔 영웅을 만들 필요가 있었던 시대였으니까.”
  “그런데 말이죠. 1937년에 이미 미국 쿡 국립 병원에 입원해 계셨더군요. 혈액은행이 있는 데가 거기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리고는 신기하게도 2차대전 내내 미국 의료 시설에 계셨네요. 적국인데도 독일 정부는 계속해서 송금을 한 모양이고. 대단한 전공이었던 모양이죠.”
  “글쎄, 그런 내막까지는 모른다네. 한창 때 이야기일 뿐이야. 그것도 다 부질없었어. 전쟁에 갔다 온 뒤로는 이런 몹쓸 병만 얻었다고. 나는 이용당했을 뿐이야.”
  “하지만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은 말이죠. 선생님이 참전하신 전쟁이 2차대전이 아니라 1차대전이었다는 겁니다.”
  내가 거기까지 이야기하자 그는 드디어 말문이 막혔는지 날카롭게 내 쪽을 쏘아보기만 했다. 나는 그가 뭐라고 대꾸를 하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아무런 대답이 없었으므로 다음 질문을 계속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베르됭(Verdun) 전투? 이건 뭐라고 읽는 거죠? 아무튼 이런 데서 살아 남으셨더군요. 프랑스군 55만 명, 독일군 43만 4천 명 사상자를 냈는데 그 중 반이 죽어버렸다고요. 그런데 이 1917년에 도대체 몇 살이셨던 겁니까? 그때 열일곱만 됐어도 1973년이면 일흔 셋인데 당시에 부인께서는 33세.”
  그러자 그가 억지로 웃음을 지으면서 사태를 모면해 보려는 듯 말을 다른 데로 돌렸다.
  “허허허. 젊은 여자 꼬여 낸 도둑놈이라는 소리를 하고 싶은 건가? 구속하게.”
  나는 그의 이야기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갔다.
  “2241년에 깨어나서 지금이 2250년이니까 한 10년은 지난 거고. 당시 사람들 건강 상태나 노화 속도는 지금보다 더 안 좋았을 것을 감안하면, 제가 묻고 싶은 이야기는 딱 나오죠. 선생님, 피부 관리 비결은 도대체 뭡니까? 어디를 봐서 그 얼굴이 여든세 살 먹은 노인이라는 겁니까? 1973년 사람들은 선생님 나이가 몇인지 아무도 묻지 않았습니까? 어디 봅시다. 닥터 디겐스는 그때 이미 82세라고 적고 있는데, 그것도 사실이 아니죠?”
  그는 말이 없었다. 바닥만 바라보면서 발끝을 땅에다 비비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할 말은 더 있었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베제만 박사의 소견은 더 기가 막혔다. 혈액형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도 없고, 사람의 유전자가 왜 그렇게 생겨먹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런데 나노 로봇들은 도대체 뭘 믿고 이렇게 생겨먹은 세포들을 고치려고 달려들었단 말인가? 완전히 잘못된 설계도를 가지고 시작한 그 말도 안 되는 작업이 왜, 어떻게 성공했던 것일까? 결국, 저 자는 어떻게 살아 있는 것일까? 나는 그런 것들을 더 캐묻지는 않았다. 이미 상대를 제압하는 데에는 성공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휴식시간 같은 긴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기 위해 그의 자서전을 넘겨보고 있었다. 그것을 읽으려고 애쓴 것은 아니고 다만 편안하게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인상을 그에게 주고자 한 것이었다. 물론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상태로 굉장히 긴 시간이 흘렀다. 심지어는 내가 집으로 돌아가서 아침에 먹다 남은 케익을 먹어도 다이어트에 지장이 없을까를 고민하고 있었을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 그가 갑자기 편안해진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네.”
  도대체 몇 주 만이었던가. 나는 그가 드디어 진실을 말하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43만 4천 명이라고 했나? 베르당은, 수학을 싫어하는 나 같은 사람한테도 말이야, 숫자로 읊어주는 것 이상으로 끔찍한 지옥이었다네. 1917년에는 전황이 좋지가 않았어. 팔켄하인은 미치광이였지. 1914년에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우리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어. 다들 그랬다고. 자네 그거 아나? 그 해 크리스마스에 전선 여기저기에서 프랑스 군과 우리 편 사이에 축구 시합이 있었던 거. 금방 끝나고 말았지만, 우리는 다 그런 기분이었어. 1914년 8월에 벨기에를 거쳐 프랑스 북부로 진격할 때만 해도 우리는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어. 프랑스 놈들하고는 싸워 봐서 알아. 질 리가 없지. 1870년에 보여줬잖아. 그때도 우리를 이끈 영웅의 이름은 몰트케였어. 1914년에는 이름만 똑같은 그 조카 놈이 맡았지만.
  승리의 비법이 있다는 소문은 모두가 다 알고 있었어. 정말이야. 다들 알고 있었어. 프랑스에서도 우리가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거쳐서 침투할 수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 우리가 프랑스를 칠 때 러시아가 동쪽에서 동프로이센을 유린할 수도 있었지. 동프로이센에서 러시아 놈들이 학살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들렸기 때문에 우리도 벨기에를 지날 때 흥분했던 것은 사실이야. 무리한 강행군이었지만, 우리는 ‘만세, 황제 만세(Hoch, Hoch Der Kaiser)’같은 노래를 부르면서 다만 이기려고 전쟁에 가 있었다고. 불쌍하게 끌려 나간 게 아니었어. 한 판 붙어볼 때가 됐었지. 영국 놈들 으스대는 꼴이 말이 아니었거든. 우리가 어땠는지 아나? 잔지바르를 내 주고 헬리고란트 섬을 받았단 말이야. 우리 티르피츠 나리 말고는 아무도 거들떠도 안 보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섬을. 그런 거래를 하고도 영국 놈들은 프랑스 편에 가서 달라붙더군.
  단기간에 결전을 치르겠다는 생각은 실패로 돌아갔지. 참호가 스위스 국경에서부터 대서양까지 쭉 늘어섰고, 어느 쪽도 전진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어. 그래서 카이저가 몰트케를 잘랐다고. 사실은 카이저가 말이야, 전쟁이 커지는 게 두려워서 몰트케더러 프랑스하고는 안 싸우면 안 될까 하고 물었거든. 그런데 이미 동원은 시작했고, 몰트케도 별 수 있나. 이제 와서는 어쩔 수 없다고 대답했지. 그때 카이저가 그 자식한테 뭐라고 했는지 아나? ‘자네 삼촌이었다면 다른 말을 해 주었을 걸세.’ 하하하. 그래도 몰트케가 나았어. 팔켄하인은, 미친놈이었거든.
  팔켄하인 생각은 우리가 베르당 요새를 공격하면 조프르 쪽에서도 프랑스 국내 여론 때문에 응전을 안 할 수는 없다는 거였어. 베르당 요새 앞에 작은 언덕이 하나 있었거든. 그 언덕을 장악하고 그 위에서 포격할 수 있으면 우리 쪽이 훨씬 유리하다는 거였지. 물론 우리 쪽의 희생도 피할 수는 없었어. 다만 우리보다 프랑스가 더 많이 죽는다는 계산이 섰던 거야. 어차피 참호를 돌파할 방법은 없으니까 어서 서로 죽게 만들어서 먼저 병력을 소진하는 쪽이 지는 전쟁을 하는 수밖에 없다는 게 그 인간의 생각이었어.”
  나는 잠시 그런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도대체 다른 인간을 어떻게 보는 건지가 궁금했다. 그리고 그런 시대가 있었다는 것이 낯설었다.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악마란 그런 자를 두고 하는 말이었겠지. 그래서 1917년에 그 작전이 시작이 됐는데, 문제는 우리가 그 언덕을 장악하지를 못 한 거였어. 그래서 계획 전체가 틀어지고 말았지. 베르당 전투는 결국 그 언덕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가 되고 만 거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언덕 하나 때문에 말이야.
  아마도 역사상 가장 좁은 구역에 가장 많은 사람이 가장 짙은 독가스에 둘러싸여서 가장 많은 수의 포탄이 떨어지는 것을 봐야만 했던 몇 달이었을걸. 소리? 빗소리를 생각해 봐. 그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하나하나를 포탄 떨어지는 소리로 바꿔 봐. 시체? 그런 데서 한참을 있다 보면 사람 팔다리가 몸통에 붙어 있는 게 꼭 당연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고. 나는 아직도 궁금한 게, 43만 몇 천 명이라는 숫자는 도대체 어떻게 셀 수 있었나 하는 거야. 몇 달을 있었어도 전장에 널려 있는 팔다리를 주워 모아서 세는 사람은 본 적이 없거든. 신부들이 가서 세 봤을라나. 자네 신부라고 그랬지?”
  나는 잠깐 그 장면을 상상해 보다가 별로 감이 잡히지 않아서 그만 두었다. 그는 와인 잔을 다시 흔들면서 말했다.
  “안 미치는 인간이 비정상이었지. 그거 아나? 그런 데 몰아넣으면 공장에서 일하던 놈들이 농사짓던 놈들보다 몸은 허약해도 훨씬 잘 적응한다는 거. 어느 날 저녁에, 시골 촌구석에서 온 클라우스라는 병사가 참호 속에서 와인을 근사하게 마시고 있는 거야. 다들 눈이 번쩍 뜨였지. 재빨리 기어가서 그 촌뜨기가 마시고 있는 걸 빼앗았는데, 그게 뭐였는지 알아? 잉크였어. 죽기 전에 마누라한테 열심히 편지나 써 두라고 주는 잉크 말이야. 그래서 그걸 던져 버리고 그 녀석을 흠씬 패 줬지. 정신 차리라고. 결국 그 놈은 미쳐서 후방으로 보내졌는데, 꾀병이라고 정신과 의사들한테 고문만 당하다가 다시 돌아왔더군. 전쟁터가 안 무섭다고 할 때까지 거의 죽을 만큼 고문하고는 치료가 됐다는 자백을 받아 낸다는 소문이 있었지.
  그 녀석은 포탄이 한 번 떨어진 자리에는 다시 안 떨어진다고, 포탄 구멍만 찾아서 열심히 몸을 날렸지. 물론 거기는 죄다 포탄 구멍이었으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였어. 클라우스가 죽던 날에 나도 배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 정신을 잃었지. 피를 많이 흘렸다더군. 죽을 만큼 많이. 누구 말로는 사람 몸에 어떻게 그렇게 많은 피가 들어갈 수 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고도 하더라고. 그때 미리 당겨서 흘린 피를 채우느라 끊임없이 수혈을 해야 하는 병에 걸린 거라고 어떤 오스트리아인 의사가 농담을 지껄였어. 나중에 전쟁이 끝난 다음에 말이야.
  아무튼 그날 일은 잘 기억이 안 나. 사실 제대로 봤다는 사람도 아무도 없어. 다만 독가스와 포연이 사라지고 나서 그 구역에 아직도 살아서 낑낑대는 사람은 적군 아군 포함해서 나밖에 없었던 거지. 내가 전쟁영웅이 될만한 행동을 했는지 안 했는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그냥 다 소문이었지. 그냥 소문이었어.
  그날 이후로 피를 공짜로 얻어먹기 시작했어.”
  순간 그의 눈이 번뜩였다. 갑자기 방 안을 둘러싼 어둠이 짙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잔뜩 예민해진 오감을 거쳐 어둠 속에 파묻힌 방 안의 모든 것들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다만 그의 존재만이 희미하게 가려져 있다가 그가 다시 입을 열자 소리부터 뚜렷하게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피를 주더군. 하하. 그런 방법이 있었던 거야. 천재적이었어.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수혈을 받으면서 생각했어. 이렇게 하면 더는 번거롭게 사냥을 할 필요가 없구나. 인간의 피를 사냥해서 얻는 데도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였거든. 물론 신선한 피를 얻는 것은 신비롭기도 하고 흥미 있는 일이기도 했지. 하지만 시체가 그렇게 빠른 속도로 대량생산되는 곳에 있다 보니 자연히 환멸을 느낄 수밖에 없었어. 나는 그런 천박한 대량생산에 완전히 질려 버렸지. 그건 그저 천박한 찍어내기에 지나지 않았어. 전장의 피비린내가 후각을 거의 마비시켜버릴 것 같았거든. 도저히 더는 구역질이 나서 사냥을 할 마음이 안 들더군.
  진짜로 그랬던 거야. 처음부터 누구를 속이거나 할 생각은 아니었어. 수혈을 끊으면 정말로 갑자기 늙어버리기 시작했으니까 병원 쪽에서도 어쩔 수가 없었지. 계속해서 먹여 살릴 수밖에. 그렇게 해서 무위도식의 꿈이 이루어지고 말았지.”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그는 이야기의 여운을 느껴 보라는 듯 말을 멈추었다. 일단 가장 궁금했던 문제에 대한 자백은 받아낸 셈이었다. 그러나 주교님으로부터 받은 질문 리스트는 아직도 몇 개가 더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왜 전쟁터에 가신 거죠?”
  “왜냐고? 사실 그때는 왜 전쟁터에 나갔느냐를 묻는 사람이 더 이상한 사람이었어. 왜 전쟁터에 안 나가느냐고 물으면 또 몰라도.”
  “그걸 물으려는 게 아닌 줄은 아실 텐데요.”
  “물론 그걸 묻는 게 아니겠지. 이유. 있었지. 알아야 할 게 있었어. 내 영생을 끊을 방법을 알아야 했지. 그 전쟁만큼 종말에 가까운 것은 없었으니까.”
  “종말이라면, 개인적인 종말을 말하는 것인가요?”
  “나 개인의 것이기도 하고 인류 전체의 것이기도 했지. 피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2만 년쯤 전이었을까. 나는 그때도 꽤 번화한 도시에 살고 있었어. 악마 누알을 숭배하던 도시였지. 에리두 근처였어. 지금은 도시 전체가 흔적조차 남지 않은 곳이지만 당시에는 누알을 모시는 거대한 신전이 있었지. 누알에 대해서 들어본 적 있나? 놀라운 능력과 지혜를 가진 진정한 학살자 누알에 대해서 말이야. 아마 없겠지. 누알에 대한 기록은 그 도시에 대한 기록만큼이나 남아있지 않으니까. 누알께서 갑자기 사라지신 후에는 그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도 끔찍한 죄악이 되고 말았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렸어. 소문만 무성했지. 우주로 돌아가 버렸다고도 하고 갑자기 병에 걸려 죽어버렸다고도 했지. 하지만 가장 그럴듯한 소문은 어느 강력한 신 중 하나가 그를 봉인해버렸다는 것이었어. 신선한 피의 제사로 영생을 주는 악마 누알이 죽어버렸다면 누가 믿겠나. 멎어버린 시간 속에 누군가가 그를 영원히 가두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그 누알이 사라지기 전의 일이었어. 어느 날 나는 이상한 꿈을 꿨지.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 하늘이 금이 가고 대지가 무너져 내리는 꿈이었어. 너무나 생생한 꿈이었지.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 폭발 장면이었어. 폭발이었다고. 무슨 말인지 알겠나? 당시에는 폭발이라는 게 없었어. 세상 어딘가에는 아직 불도 못 다루는 야만인들이 수두룩했으니까. 더구나 그렇게 거대한 폭발이라는 건 아무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거였거든. 그 꿈은 달이 기울고 다시 차오르기까지 일곱 번 반복되어 나타났어.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나를 사람들이 누알에게 데리고 갔지. 누알이 내 꿈 이야기를 가만히 듣더니 ‘폭발을 봤구나.’ 하고 말했어. 그때 폭발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지. ‘이수나.’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그 광경을 설명하기 위해서 거대한 불덩이가 하늘과 땅을 삼키려고 했다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었거든. 그 뒤로는 폭발을 봤다고 말할 수 있게 됐지.
  ‘네가 본 것은 예언이다. 하지만 언제 실현될 징조인지는 나도 모르겠구나. 오늘 갑자기 실현될 수도 있고 아주 먼 미래에 실현될 수도 있다.’ 하고 누알이 말했어. ‘그러면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내가 물었지. 누알은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더니 나에게 물으셨어. ‘영원히 살 수 있겠니?’ 내가 감히 다시 물었어. ‘얼마나 오래 살아야 합니까?’ 그렇게 되물었던 건 영생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누알이 말했지. ‘네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넘어설 것이다. 그냥 영원히 살아야 한다고 해 두자.’ 나는 영생을 받아들이기로 했어.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래서 영원히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육체를 얻었지.”
  “왜죠? 왜 악마는 당신더러 영원히 살라고 한 거죠?”
  “그분께서는 위협을 느끼고 계셨어. 뭔가를 알아낸 것 같다고 하셨지. 자신이 수백 년에 걸쳐서 알아낸 일을 나는 한 달 동안 꾼 꿈으로 가만히 드러누워서 알아냈다며 온 신전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웃으시더군. 그걸 알아내는 바람에 ‘그 자’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고. 소문에 누알을 봉인했다는 신을 말하는 것이었겠지. 누알은 나에게 말했어. 자신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남아 있어야 한다고.”
  나는 주교님과의 대화를 생각하면서 그에게 다시 물었다. 주교님의 질문 리스트에 이런 것까지는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완전히 새로운 상황이었다.
  “그 예언에 따르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어떻게 되다니. 뭐가?”
  “세상이.”
  “이수나! 전멸하게 돼. 하지만 내 지혜가 모자라서인지 꿈에서 본 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어. 폭발이 폭발인 줄을 알기 위해서는 누알의 지혜가 필요했던 것처럼 말이야. 그래도 지혜를 쌓을 시간은 충분히 있었지. 2만 몇 천 년을 더 살았으니까. 꿈에 본 장면 자체를 어느 정도는 잊어버리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어. 그런데 말이야, 2만 년 전에 궁금했던 문제들은 지금도 여전히 풀리지 않고 남아 있단 말이야. 누알은 내가 영원히 살아남아서 어떻게 하기를 바랐던 걸까? 세상 끝 날이 왔다고 예언하기를 바란 걸까? 끝까지 살아남아서 그날을 눈으로 봐 주기를 바랐던 걸까?”
  “글쎄요.”
  “아무튼 2만 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폭발이라는 것을 내 두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어. 사람들이 폭탄을 만들기 시작했거든. 전쟁에 뛰어들었던 것은 그래서였어. 제대로였거든. 하지만 베르당의 참호 속에서나 적진을 향해 무모하게 진격하면서 나는 2만 년이나 기다려 온 내 영원한 삶의 종말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거야. 이게 뭐야. 이건 그냥 허무일 뿐이잖아. 영원한 삶의 의미 같은 건 절대 아니잖아. 그래서 그 뒤로는 절대로 전쟁터에 나가지 않기로 했지. 방법은 간단했어. 내 손으로 사냥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었어. 전쟁에서 얻은 원인모를 난치병으로 영원히 침대 위에 머무를 수 있었지. 하긴 영원히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겠지. 나이를 안 먹었으니, 언젠가 떠나기는 떠나야 했을 거야. 피 냄새를 맡아도 구역질이 나지 않게 되면 떠나야 했겠지. 하지만 진짜로 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어. 죽고 싶었어. 이제는 나도 쉴 때가 됐다고 생각했거든. 진짜 영원한 시간처럼 긴 시간을 기다렸어. 영원히.”
  “그럼 도대체 왜 냉동된 거죠? 저로서는 그 부분이 도저히 이해가…….”
  “하하. 왜 다시 살 길을 택했냐고? 들어봐. 그러던 어느 날에 닥터 디겐스가 그런 제안을 한 거야. 그때 닥터 디겐스가 뭐라고 말했는지 아나? ‘영원한 삶을 드리죠.’ 하하. 하지만 내가 보기에 닥터 디겐스가 설명하는 수술 과정은 영원한 삶의 굴레를 지고 있는 나 같은 존재도 확실하게 보내 버릴 수 있는 방법으로만 들렸어.
  심장을 서서히 정지시켜 가면서 피를 다 뽑아내고 순환 계통을 정지시킨 다음 부동액을 주입하면서 순식간에 꽁꽁 얼려버린다는 것 말이야. 그러는 동안에도 수분이 약간은 팽창할 것이기 때문에 세포가 손상을 입기는 할 거라고, 별 것 아닌 것처럼 말하더군. 끔찍하지 않나? 이번에야말로 제대로라는 생각이 들었어. 제대로 죽을 수 있겠구나. 결국 다시 이렇게 되고 말았지만 말이야.”
  그는 자신의 멀쩡한 두 팔을 들어 무슨 낯선 물건이라도 들여다보듯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직자라고 했지? 자네는 나를 죽일 수 있나? 영원한 안식처로 인도하는 것 같은 건 안 해 줘도 돼. 그냥 이걸 끝내 주지 않겠나?”
  “선생님.”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만 부탁하자고. 나를 이 갑갑한 지하실 밖으로 한 번만 내보내 주겠나? 내 정체를 짐작은 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확실히 알게 될 때까지 밖으로 내보낼 생각이 없었던 거겠지. 하지만 벌써 10년이 다 돼 간다네. 여보게. 한 번만 사정 좀 봐 주게. 그래서 자네한테는 특별히 솔직하게 다 이야기해 주지 않았나. 닥터 베제만한테도 이런 건 이야기해 주지 않았단 말이야.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저 바깥세상을 보는 게 소원이라네. 파란 하늘을 본지가 너무 오래 됐어. 푸른 언덕이 아니어도 좋아. 콘크리트와 금속으로 덮인 삭막한 도시 풍경이어도 상관은 없네. 세상의 상쾌한 공기를 들여 마시기만 하면 돼. 한 사흘만 주게. 혼자가 아니어도 좋아. 도망칠 생각은 없지만 누군가가 따라다니면서 감시를 해도 상관없어.”
  그는 정말로 애절하게 사정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고 있자니 안쓰러운 생각이 들면서 마음 한 구석이 갑갑해졌다.
  “그 마음은 알겠습니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그의 눈빛이 다시 한 번 매섭게 이글거렸다. 그러다가 이내 그는 안정을 되찾고는 다시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런가? 알았어. 자네 신은 생각보다 자비롭지 않군. 그렇다면 좋아. 어디 지하 감옥에서 화형이라도 시켜 주게. 심장에 말뚝을 박든지. 아무래도 상관없어.”
  “슈베린 씨.”
  그는 체념한 듯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뭐라고 말씀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에게 바깥세상을 보여줄 능력이 저에게는 없습니다.”
  “알았네. 다 이해하네. 그냥 갑갑해서 한 소리야. 자네는 자네 일을 하게.”
  “제 일은 그냥 여기까지였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돌아가서 이 이야기를 보고해야 합니다. 그러면 무슨 조치가 있을 겁니다.”
  “좋아.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겠지?”
  “장담은 못 드리겠습니다만. 주교님께서 관심을 많이 가지고 계십니다.”
  “그만하면 됐어.”
  “슈베린 씨, 정말이지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난감하네요.”
  “괜찮아. 이래 보여도 이해심 많은 늙은이라네. 늙은이라고. 저 피를 끊어 봐. 며칠만 있으면 금방 2만 살 늙은이로 돌아갈 걸세. 허허허허허.”
  호탕하게 웃고 있는 그를 보자 나는 그 이야기를 꺼낼 용기가 생겼다. 여기저기 연락을 취해서 그를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도록 허락을 받기까지는 2주가 걸렸다. 모든 허가를 받고 나서 그를 다시 찾아갔을 때 그는 아직 젊음에 대한 일말의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여전히 수혈 중이었다. 그는 의외로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내가 그에게 바깥세상을 구경시켜 주겠다고 이야기하자 그는 거의 천진난만하기까지 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옷장으로 가더니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 왔다.
  “지금쯤 가을이겠지? 아직 그렇게 춥지는 않지? 바깥에 나가게 되면 꼭 이걸 입고 싶었어. 아내가 마지막으로 해 준 선물인데, 어때? 스타일이 너무 구식인가? 2030년에 깨어나면 좀 구식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꼭 입어 달라고 그러면서 줬어. 유행은 원래 돌고 돈다고.”
  나는 환하게 웃고 있는 그를 보면서 그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시대의 인간미를 느꼈다.
  “현명한 아내셨군요. 지금도 그렇게 이상해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그가 외출 준비를 다 끝내자마자 나는 그를 데리고 밖으로 통하는 출구 쪽으로 갔다.
  “선생님 생각과는 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응. 그래그래.”
  “놀라시거나 상처받으시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괜찮아. 2만 살 늙은이라고 했잖아. 놀라긴 뭘.”
  밖으로 나가는 기나긴 통로를 걸어 올라가면서 나는 놀라지도 말고 섭섭해 하지도 말라는 이야기를 세 번이나 더 해 주었다. 그는 한껏 들떠서 가볍게 대답할 뿐이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이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숨길 수는 없었다. 그냥 눈으로 직접 보는 게 제일 낫겠지. 나는 말없이 앞장섰다.
  통로는 여러 겹의 문으로 막혀 있었다. 두터운 철문을 하나씩 하나씩 지날 때마다 그는 문을 지키고 서 있는 사람들에게 해맑게 인사를 건넸다.
  “지금도 저 문을 저렇게 힘들게 수동으로 여나? 이 시대쯤 되면 사람은 손 하나 까딱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가 나에게 속삭였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 구역에 다다랐을 때 보안 요원이 보호복과 헬멧을 건넸다. 그는 그것들을 들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손짓으로, 입으라고 말하고는 내 보호복을 착용했다.
  “규정입니다.”
  “그렇군.”
  그의 표정이 약간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보호복과 헬멧을 착용하고 마지막 문 앞에 서 있는 그의 표정은 더 딱딱해져 있었다. 내가 눈짓을 보내자 보호복을 입은 보안 요원 두 사람이 마지막 철문을 힘겹게 열었다. 나는 문이 열리는 동안 그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문이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그의 눈에 서서히 세상의 모습이 들어오기 시작했을 것이다. 나는 그의 표정을 읽었다. 그렇게 씌어 있었다.
  절망.
  놀라움.
  그렇게나 열심히 마음의 준비를 시켰건만 역시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의 눈으로부터 완전한 침묵과 절망이 얼굴 전체로 서서히 퍼져나가는 장면을 나는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의 눈이 사방을 둘러보더니 심하게 떨리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여러 번 멈추는 모습과,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은 모습도 보였다. 그의 입에서는 말 대신에 한숨이, 깊고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치 푸른 하늘이라는 것을 실제로 보고 있는 것처럼 반짝반짝 빛나던 그의 눈 속에 절망의 빛이 어려 왔다.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따로 확인하지 않아도 그의 눈에 비치는 것이 폐허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순간에 나는, 2만 몇 천 년을 버텨 온 그의 강인한 생명의 불씨가 거의 다 사그라졌다가 가까스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참동안이나 그러고 있다가 드디어 그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 표정은 나에게 많은 것을 묻고 있었다. 나는 무슨 대답을 해 주어야 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
  “이수나라고 하셨죠. 2027년입니다. 폭발이 있었습니다. 원인은 아무도 모릅니다.”
  “뭐?”
  “2027년, 정확하게 어디에서였는지조차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는 정말 다 죽는 줄 알았습니다.”
  “다 죽어?”
  “보시다시피, 땅 위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핵무기는 아니었습니다. 그때 일부가 따라서 폭발하기는 했지만 세상을 날려버리고 문명을 뒤로 되돌려 놓은 건 그게 아니었습니다. 세상을 집어삼킨다고 말할 정도의 폭발은.”
  “그럼?”
  “저도 잘 모릅니다. 저는 그냥 성직자일 뿐입니다. 저희는 선생님께 그 이야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이수나라는.”
  그는 말없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도 다 죽지는 않았습니다. 천만 명쯤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연이 균형을 완전히 잃어버려서 인구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생님 케이스가 진짜로 성공적이었으면 남은 사람들을 냉동시켜버릴 생각이었습니다. 바깥에 생태계가 회복될 때까지라도. 하지만, 그건 아직은 힘들어 보이는군요.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는 어이없다는 듯 내 얼굴을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바깥 세계를 돌아보았다. 나에게는 그 풍경이 낯설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 예전에 그곳이 낙원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사실 아무도 없었다. 전해 들어서 알 뿐이었다.
  “내가 깨어 있을 걸 그랬나. 하필 그때 잠이 들었어.”
  그가 말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아무 일도 하실 수 없었을 겁니다. 깨어 있었다고 해도. 아무도 막지 못했을 겁니다. 미리 알았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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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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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echre 06.02.28 10:28 댓글 수정 삭제
    좋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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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6.02.28 16:39 댓글 수정 삭제
    어설픈데요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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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금 혈중환상농도에서 이거 하나만 읽었습니다. 재밌었고, 무엇보다 쉽게 읽혔습니다. 반전과 결말은 진부하다면 진부한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독사는 참신하고 소름끼치는 얘기보단 다소 진부하더라도 진솔한 감정이 느껴지는 얘기를 더 좋아합니다. 슈베린이 마음에 듭니다. 아주 착한 사람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흡혈귀가 흔히 그렇듯)사람 목숨은 뭣도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왕재수도 아니고(광기나 분노가 아닌)인간적인 감정을 보이는 그런 모습이...좋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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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 뭣도 모르는 고3놈의 막나가는 감상이었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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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6.10.28 21:51 댓글 수정 삭제
    헛, 언제 이런 걸 다 남기고... 두 달 반이나 지나서 봤습니다. 음, 혈중환상농도에 안 들어가 있었으면 좀 덜 진부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 No Profile
    배명훈 07.03.19 15:18 댓글 수정 삭제
    이 글은 특별히 혈중환상농도에 실으려고 의도하고 쓴 글은 아니었고, 그 무렵에 거울에서 맨날 그런 이야기들이 보이다보니 무심코 쓰게 된 글 같습니다. 이 글의 테마는 "대화"입니다. 주절주절. 대화에서 대화로 이어지고. 대화로 사건이 전개되고. 대화체로 최대한 많은 것을 쓰는 연습을 가끔 하는데 그 중 하나였습니다. 주인공이 멋있는 말 한마디 던질 때만 " " 요게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대화체로 이어가는 게 읽기는 더 좋은 것 같거든요.
    "이수나"는 인간존재폭발이라고, 아직 공개된 적 없는 <누알, 멈춰진 시간 속의 악마>에 나오는 그 폭발인데요, 그 연관관계에서 읽어야 의미가 더 제대로 나오겠지만, 꼭 그렇게만 읽으라고 쓴 글은 아닙니다.
    슈베린 가문은 나중에 알고 보니 굉장히 잘 나가던 융커 가문 중 하나였더군요. 아무나 주워다 기를 것 같은 집안은 아닌데, 그런 가문에 양자로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 No Profile
    볼티 08.03.11 11:06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슈베린이 정말 끝장나기 위해서였다면, 굳이 냉동인간의 길을 선택할 필요가 있었는가 의문이 남긴 하지만요.^^
  • No Profile
    배명훈 08.03.14 05:55 댓글 수정 삭제
    슈베린이 다른 선택을 했다면 다른 글이 됐겠죠. 저는 그런 장르의 선에는 동의할 수가 없어요. SF는 외적타당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전제 때문인 알겠는데, 그렇다고 작가가 내적 동인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외적타당성을 기계적으로 맞출 수는 없죠. 그건 최소한 나사 조종사 채용 기준급의 학위가 필요한 일이라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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