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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훈 다이어트

2005.11.25 22:4711.25

  
1.


  그는 동생이 레이싱 게임을 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세탁기 돌리는 소리가 게임 속 자동차 엔진 소리에 섞여서 짜증스러운 소음을 만들고 있었다. 그는 소파에 드러누워 화면을 아무 생각 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게임 속에서 차가 코너를 돌 때 동생도 옆으로 몸을 기울였다. 다른 방에서 진공청소기 소리가 더해졌다. 어머니에게 짜증을 낼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짜증이 치밀어 오른 것은 사실이다. 그 누구도 그에게 잔소리를 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모든 소음이, 모터나 엔진이 돌아가는 그 모든 소음이 사람을 송구스럽고 민망하게 만들었다.
  진공청소기 소리는 일상이 만들어내는 소리다. 말하자면 지구가 돌아가느라고 내는 소리와 같다. 해야 할 일을 하느라 어쩔 수 없이 소음이 생길 수도 있지만 그것에 대해 굳이 해명하지는 않겠다는 입장을 가진 소리다. 그렇다고 갑자기 박차고 일어나 청소를 돕기도 그렇고, 동생 옆에 나란히 앉아서 같이 놀기도 그랬다. 모두가 편히 쉬라고 말했지만, 각자가 만들어내고 있는 일상의 소리들은 지구 위의 모든 궤도를 점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비어 있는 궤도를 찾아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니까 그의 귀에는 그 소리들이, 집구석에 그러고 있지 말고 얼른 나가라는 소리로 들렸다.
  스물여덟. 남들은 결혼도 하고, 돈도 벌고, 아니면 더 성공하겠다고 밤늦게까지 애도 쓰는 나이인데, 평일 오전 점심때가 다 돼 가도록 소파 위에 드러누워 뒹구는 것밖에 할 게 없는 그에게는, 스물여덟이 부끄러운 나이였다. 밖에 나가서 술이라도 퍼마시고 다니면 대낮에 민망하지는 않으련만, 다친 발목은 잘 낫지 않았다.
  “중학교 가고 나서는 집에서 푹 쉰 적도 없지 않어. 마음 편하게 푹 쉬어. 발목 다 나으면 이제 재활해야지.”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네.”
  하고 대답하기는 했지만, 안 될 말이다. 나이 스물여덟에 재기라니. 축구선수를 해 먹기에는 틀려먹은 나이다. 그렇다고 부상당하기 전까지 대단한 선수이기나 했던 것도 아니고. 차태지 이름 석 자가 신문에 크게 실렸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차마 그 말을 입에 담지 못했지만, 사람들이 재기를 빌어줄 때마다 속으로는 늘 그렇게 대답하고 있었다. 끝났어요! 끝!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 놓은 것도 아니고, 사람을 많이 알아 놓은 것도 아니었다. 말도 넉살 좋게 잘 할 줄 모르고, 외모가 빼어난 것도 아니다. 이제 뭘 하나. 이제 뭘 하나.
  퇴원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왔지만, 집 떠나 산지가 벌써 8년이었다. 자기 방도 없고, 식탁에는 자기 의자도 없었다. 다른 행성들이 평화롭게 잘 돌아가고 있는 태양계에 불쑥 끼어든 방랑자 혜성처럼, 그는 깁스한 다리를 꼬리처럼 길게 늘어뜨리고 TV 앞에 눌러 앉아 시간을 보냈다. 동생은 태양계의 중심이라도 되는 듯 아끼던 TV를 그에게 뺏기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날이 갈수록 드라마와 만화에 익숙해져가는 그가 한심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늘 시간표대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에 익숙했던 그였다. TV에서 규칙적인 시간표를 지켜주는 것은 그런 것들이다. 동생도 그 점은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무엇을 보든 옆에 앉아서 말없이 같이 화면을 들여다 봐 주곤 했다.
  마찬가지로, 동생이 하는 레이싱 게임을 그는 먼 산 보듯 들여다보고 있었다. 상대에 대한 존중이자 예의랄까. 그러나 어색한 존중이고 예의였다. 동생도 그도 어느 쪽도 재미있지가 않았다.
  전화가 걸려오자 동생은 게임을 멈춰 놓고 자기 방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그는 정지한 채로 남겨진 화면 속에서 무엇인가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빼서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게임의 배경은 실제 서울 시가지 도로였다. 정교하게 재현된 익숙한 시가지 한쪽, 어느 골목으로 접어드는 모서리에 그의 눈을 확 잡아끄는 낙서가 보였다. 낙서까지 재현했으니 그 정교함에 감탄할 만도 하지만 그의 시선을 끄는 것은 그런 식의 느낌은 아니었다. 그는 그 그림을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에서 봤을까. 기억나지 않았다. 곧 동생이 다시 돌아와서 등으로 화면을 가려버렸다.

  걸을 수 있게 되기까지 몇 주가 더 걸렸다. 그 몇 주 동안 살이 찌기 시작했다. 먹는 양은 줄지를 않고 운동은 전혀 할 수가 없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배가 나왔다고 하거나 얼굴이 좋아졌다고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쯤 갔으면 이제 끝이다. 실패한 인생의 흔적이 온 몸에 더덕더덕 붙었다. 솔직히 스스로도 움직이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걸을 수 있게 되고 나서 밖에 나갈 일이 생기자 그는 예전에 입던 바지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운동할 때는 운동복밖에 안 입었고 집에 있는 바지는 다 몇 년 전에나 입던 것들인데, 계절이 바뀌면서 새로 꺼내 입었을 때 허리가 꽉 조이면서 바지 위로 두툼한 맨살이 삐져나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냥 입었다. 솔직히 조이고 불편했다. 그러나 그는 불편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많이 작지는 않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게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 외출하려는 그에게 어머니가 새 바지를 꺼내 주셨다. 딱 맞았다. 한 치수 큰 사이즈였다. 그는 집을 나와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길에 어느 건물 어두침침한 계단에 앉아 서럽게 울었다.
  금방 다시 건물을 나와서 가던 길을 갔다. 선배 몇 명을 만나서 술을 마셨다. 진창 마셨다. 아마도 고액에 프로 입단한 어떤 새파란 후배의 인간성이 안주거리였던 것 같다. 술은 도대체 어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계속해서 들어갔다. 왜 그렇게 살쪘냐는 선배에게 욕을 퍼부을 정도로 마셨다. 그는 혼자 빠져나와서 찬바람을 맞으며 어느 버스 정류장 앞 벤치에 잠깐 앉아 있다가 집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걸어갈 거리가 아니다. 그래도 그는 밤새 걸었다. 한강을 건너서 찬바람에 비틀거리며 계속 걸었다. 걷다가 가끔씩, 과음한 흔적을 길에 남겼다. 사람들이 피해 갔다.
  걷다가 걷다가 동생이 레이싱 게임 속에서 차를 몰고 왔다 갔다 하던 근처도 지났다. 거기를 지나는데 또다시 길에다 술 마신 흔적을 남길 일이 생겨서 어느 골목으로 접어드는 모서리에 붙어 섰다. 그 일을 처리하고 나서 골목을 나오다가 그는 모서리에 그려져 있는 그때 그 낙서를 발견했다. 그는 그 앞에 멈춰 섰다. 이걸 어디서 봤더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니 기억이 났다. 잘 모르겠다. 아니 기억이 난다.
  “뎁뎁답 수르수르지 시시투 바담바드딤.”
  그는 그 낙서를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드디어 미쳤구나. 차태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낙서를 읽을 수만 있는 게 아니라 무슨 뜻인지도 알 것만 같았다.
  「데브데브다브들이여 시시투를 되찾자.」 그런 의미인 것 같은데, 여전히 알 수 없는 말이다. 고개를 갸웃하며 골목을 나와 가던 길을 갔다. 그러나 20미터쯤 걸어갔을 때 그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갑자기 술이 깨는 것 같았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서 그 골목으로 돌아갔다. 갑자기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평생 기억이라는 것을 잃었던 적은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잃어버린 기억들이 돌아왔다. 그는 갑자기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그림은 원시 데브데브다브 종족의 2차원 문자였다.

  
2.


  조약이 잘못됐다. 조약이 문제였다. 시시투 행성 이용에 관한 조약을 체결할 때만 해도 전 우주의 지성체들은 우주 보편의 원칙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시시투 항성에 모든 생명체의 자유로운 접근을 허용한다는 일반원칙은 비단 이 행성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었다. 그뿐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수많은 우주 분쟁에서 우주 공동체가 어떤 관점에 서서 문제를 다루기 시작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기본 합의였다. 우주와 그 속에 있는 천체는 누구의 소유도 아니므로 누구의 접근도 막을 권한이 없다고 각 우주 문명권의 대표들은 선언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원칙을 보장하기 위한 몇 가지 추가적인 사항들에 대해서도 합의했다. 시시투 행성과 이 행성의 공전궤도, 그리고 행성 주위를 도는 가능한 모든 위성 궤도상에 무기 배치를 금지하는 것이 그 주된 내용이었다.
  문제는 거기에서 시작되었다. 배치가 금지된 무기 중에는 행성의 물리적 천체 운동의 균형을 파괴하는 무기, 대기와 액체, 맨틀과 행성 내부의 순환 활동에 변경을 가하는 무기, 행성 내에 거주하는 생명체들의 연쇄 관계를 심각하게 변경하거나 하나 이상의 종의 개체수를 절멸 수준까지 줄일 수 있는 무기 등이 포함되었다. 그러다 보니 생물 무기 역시 금지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새로운 무기 금지 원칙은 모든 종의 자유로운 접근에 관한 일반원칙과 모순이 된다. 다른 종에 의해 세균이라고 규정되는 종은 자유 접근 원칙에서 밝힌 권리에 따라 시시투 행성에 살 권리를 보장받아야 할까, 아니면 생물 무기 금지 원칙에 따라 시시투에서 쫓겨나야 할까?
  우주 최고의 지성, 사랏사랏 사랏찬드는 종족의 운명이 걸린 이 회담을 담담하게 지켜보았다. 조약 내용에 따라서는 동족 전체가 시시투 행성에서 제거될 수도 있었다. 그의 종족 데브데브다브는 우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지적 생명체였다. 다른 종의 관점에서 볼 때 데브데브다브는 ‘세균’으로 인식될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열등한 하등동물에 그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다른 종족들도 물론 알고 있었다. 처음 우주에 나타난 지 130억년이나 되는 이 미생물 종족은, 항성의 수명이 다해서 팽창할 때 그들의 고향 행성이 흔적도 없이 흡수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고도 아직 살아남아 있었다. 그때 이미 그들은 행성을 이탈해서 식민지 행성을 개척할 수 있을 만큼 지적인 생명체였던 것이다.
  사랏사랏 사랏찬드 자신이 우주 최고의 지성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117억 년 전에 이 종족은 지성을 가지기 시작했고, 115억 년 전에는 최초의 문자를 만들었다. 그것은 물론 우주 최초의 문자로 알려져 있다. 다른 종들은 시각이든 후각이든 촉각이든 그 어떤 감각으로도 데브데브다브 개체를 알아볼 수 없다. 너무 작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실상 서로 만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랏사랏 사랏찬드의 위대한 사상은 전 우주에 알려져 있었다. 가장 작은 육신에 가장 광대한 우주의 진리를 지니고 있는 존재. 그것이 그의 이름에 붙여진 찬사였다.
  그런 위대한 지적 존재가 생물무기로 분류된 것은 기가 막힌 모순이었다. 그들은 실제로 그렇게 분류했다. 조약도 그렇게 작성되었다.
  「모든 종들은 시시투 행성을 자유롭게 이용할 평등한 권리가 있다. 단, 기생체 혹은 생물 무기로 간주될 수 있는 생명체에 대해서는 예외로 한다.」
  이제 남은 것은 파멸이었다. 물론 이 우주에 이 종족 전체를 전멸시킬 수 있을 만큼 강한 종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데브데브 문명권의 중심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진 시시투 근방의 데브데브다브들은 이내 절멸의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물론 그들도 군대를 동원했다. 데브데브다브의 정예군은 시시투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절반을 제거했다. 적들은 그런 대규모 공습을 당하고도 군대를 동원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방역체계를 가동시켰다.
  수도 카이카이칸 호수가 함락되던 날의 쓰라린 좌절감을 사랏사랏 사랏찬드는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동족들은 끝까지 저항했다. 탈출을 꿈꾸는 자는 거의 없었다. 모두가 최후의 순간까지 항전했다. 사랏사랏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긴박한 순간에도 사랏사랏 사랏찬드의 죽음을 바라는 자는 전 우주를 통틀어서 단 하나 뿐, 사랏사랏 자신밖에 없었다. 양측 진영 사이에 이상한 휴전 상태가 만들어지고, 1대의 우주선이, 적들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을 크기의 우주선이 시시투를 빠져나갔다. 그 안에는 누군가에 의해 정신을 잃고 동면 상태에 빠진 사랏사랏이 타고 있었다. 그것이 그가 기억하는 데브데브다브 족 시시투 이민사의 결말이었다.
  사랏사랏이 망명한 뒤에, 시시투에서는 인구의 반이 죽어버린 대재난의 책임을 데브데브다브의 위대한 정신적 스승 사랏사랏 사랏찬드에게 돌렸다. 그의 망명에 직접 개입했던 보건 당국자들을 가장 중요한 전범을 빼돌린 혐의로 해직되었다. 수사 당국에서 그를 추적하기 시작했지만 그가 지구로 망명해 있다는 사실은 훨씬 나중에 가서야 알려졌다.
  그를 실은 우주선이 선택한 망명지는 에리두 모라는 행성이었다. 그곳에는 게르게르기르라고 하는 종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 스스로는 지구인이라는 식의 이름으로 불렀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 행성을 지배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사랏사랏이 도착한 곳은 그리 넓지 않은 그들의 지배 영역 안이었다. 미리 치밀하게 계획된 바와 같이 우주선은 호흡기를 통해 어떤 인간의 체내에 침투했다. 면역 체계의 포위를 따돌리자마자 우주선은 감수 분열이 이루어지는 곳, 난소 근처로 침투했다. 그곳에서 7년간 아무런 활동 없이 잠복한 뒤에, 이 개체 안에 다른 개체의 유전자가 들어와 유전 정보 결합이 이루어지는 무렵에 우주선은 활동을 재개했다. 얼마간을 더 지켜보고 있다가, 서로 조합된 유전 정보 덩어리에 정신이 깃들기 직전에 우주선은 사랏사랏을 강제로 세포 분열시켰다.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지성이 둘로 갈라졌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나기 전에 둘 중 하나는 정신적 죽음에 이르렀지만, 나머지 하나는 손상된 기억과 정신을 가진 개체로나마 살아남았다. 어려졌다는 의미였다. 우주선은 새로 태어날 인간 개체에 정신이 깃들기 전에 사랏사랏의 젊은 정신을 주입했다. 그 뒤로는 다른 영혼이 깃들지 않았다. 새 개체는 우주선을 둘러싸고 세포분열을 하면서 성장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추적자들로부터 사랏사랏을 완벽하게 숨기기 위해서였다. 사랏사랏 사랏찬드 고유의 정신은 말끔하게 지워졌고, 어떤 뇌파 신호도 방출하지 않았다. 또한 게르게르기르의 두뇌는 데브데브다보다 물리적으로 수백억 배나 크지만 담을 수 있는 정신의 크기는 수천만 분의 1에 불과했다. 사랏사랏의 온전한 정신을 담았다가는 정지해 버릴 수도 있을 만큼 작은 용량이었다. 그러므로 이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를 유년기로 되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어쩌면 이 일의 윤리적 측면 때문일지도 모른다. 기술적으로 어떻게 정의가 되든지 이 일은 명확히 기생 작용이었다. 사랏사랏이 이런 일을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의 존재를 변질시켜야 했다.
  새 개체는 태어나서 건강하게 자라났다. 아기의 두뇌 어딘가에는 사랏사랏의 우주선이 자리 잡고 있어서 중추신경계의 전기 신호를 우주선 내부의 사랏사랏에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갑자기 이 모든 기억을 떠올리고는 이 모든 과정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3.


  그가 만취상태로 쓰러져 있다는 연락을 받고 그의 부모님들과 동생이 응급실로 달려왔다. 고열에 의식 불명. 원인은 알 수 없었다. 뇌 손상이 일어난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에 가족들은 며칠 동안을 그가 깨어나기만 기다리면서 보냈다. 축구하는 선배들, 동료들, 그리고 감독이 찾아와 하나같이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갔다. 그의 어머니는, 그 우락부락한 무리들 틈에 섞여서 병실로 찾아와 먼 데서 안타까운 눈을 하고 있다가 나중에 조용히 무리와 함께 돌아간 어떤 아가씨를 눈여겨보았다. 저 애가 묵희라는 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태지한테 듣던 것보다 참하게 생겼는데. 안 그래도 아들은 숫기가 없어서 말 한번 제대로 못 걸어 볼 성격인데, 이제 더 내세울 게 없어졌으니 저 아이도 곧 내 아들을 마음 아프게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아들이 측은하게 느껴졌다.
  “어서 일어나야지. 태지야.”
  그의 어머니는 그 말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사랏사랏 사랏찬드는 지구 시간으로 34년이나 되는 시간이 자신의 기억에서 사라진 것에 대해 화가 나 있었다. 긴 잠에서 깨어나, 우주선의 인공 정신과 연결되어 있는 단자를 스스로 뽑아버렸을 때, 인공 정신은 그렇게 하면 기체 외부에 있는 게르게르기르의 육신이 정신으로부터 분리된다고 경고했다. 사랏사랏은 그 경고를 무시하고 우주선 조종석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며칠 동안 우주선에 기록되어 있는 각종 비행일지와 주요 임무 수행 일지 같은 기록들을 읽었다.
  무엇보다도 강제로 세포분열을 당하면서 자아가 분할되고 그 일부가 사멸해버린 것이 화가 났다. 그에게는 이제 우주를 다 이해할 것만 같았던 예전의 지혜가 없었다. 세포분열을 당하다니. 그는 세포분열을 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따지자면 그의 신체도 단세포였지만, 둘로 나눈다고 처음과 똑같은 두 개가 되는 단순한 생명체는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군인들에게나 해당된다. 숫자를 급격하게 늘릴 수 있는 단세포의 장점은 군대에나 필요한 것이지, 사랏사랏 사랏찬드 같은 고결한 정신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가 화가 나 있는 동안에도 우주선 인공 정신은 차태지의 육체가 정신으로부터 장시간 분리되어 있는 것은 좋지 않다고 거듭 경고했다. 그래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이 불쌍한 육신을 빼앗지나 말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공 정신이 마지막으로 그에게 설득을 시도했을 때는 그 역시 계속 고집을 부리지 못했다.
  “어머니께서 걱정하시고 기다리십니다.”
  사랏사랏은 촉수를 뻗어 신경 연결 단자를 외골격처럼 단단한 세포벽 속으로 찔러 넣었다.
  차태지가 손끝을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눈을 떴다. 그리고는 어머니를 불렀다. 아버지와 무슨 이야기인가를 하고 있던 어머니는 표정을 환하게 바꾸면서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았다. 아버지는,
  “일어났냐?”
  하고 한마디 던지시고는 짐을 챙겨서 나흘 만에 집으로 들어가셨다.

  집에 돌아온 날부터 그는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태지야. 다이어트부터 한다고 그럴 때는 언제고, 그렇게 그냥 정신없이 먹어?”
  하고 말씀하시기는 했지만, 그렇게 쓰러진 이후로는 그저 잘 먹는 게 약이겠거니 했다. 하루 네 끼 식사를 하고 중간에 간식까지 달고 살았어도 그의 식욕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앓아누워 있는 동안 많이 빠져버린 몸이 건강해지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걸렸다.
  어느날 걸신들린 사람처럼 눈에 불을 켜 가며 식탁을 비우고 있는 그에게 묵희가 말했다.
  “잘 먹어서 다행이다. 금방 건강해지겠네.”
  “어.”
  그는 대답하기도 번거롭다는 듯이 짧게 끊었다. 그녀가 말했다.
  “이제 어쩔 거야? 재기해야지.”
  “재기는 무슨. 재기해 봐야 차태지지.”
  “그래? 그럼 어쩔 거야? 믿는 구석이라도 있어? 뭐라도 시작해야지.”
  그는 말없이 먹기만 했다.
  “잘 먹는 거 좋은데, 너 이제 그렇게 많이 먹으려면 돈도 많이 벌어야 되겠다. 뭐라도 시작하자. 운동하기에는 나이 많아서 그만둔다고 쳐. 그래도 이제 나이 스물여덟밖에 안 된 놈이 세상 끝났다고 방구석에 쳐박혀서 찔찔 짜는 꼴은 못 봐주겠거든.”
  “왜 갑자기 화를 내고 그래?”
  “화는 누가 화를 낸다고 그래. 몰라. 너 알아서 해. 내가 무슨 상관이냐!”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는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버리는 그녀의 뒷모습이 그의 눈에 그대로 맺혔다. 사랏사랏은 그 경이로운 생명체를 새삼 신비스러운 듯 찬찬히 살폈다.
  42억년 전, 데브데브다브의 우주 탐사대가 처음으로 외계 지적 생명체를 발견하던 날, 탐사 대장이자 역사가였던 위알위루알이 남긴 운문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데브데브다브보다 3470만 배나 더 큰 그것이 지적 정신을 담을 수 있는 신체기관을 가진 생명체라는 사실을 레이더가 확인해 주었을 때, 이 위대한 역사가가 남긴 경탄의 시는 사실 그저 초라하기 그지없는 감탄사의 나열에 지나지 않았다. 운율도, 사상도, 정신의 고매함이나 지성으로서 갖추어야 할 품위마저도 결여한 이 보잘 것 없는 운문은, 데브데브 문명 110억년 역사상 최고의 명문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 외계 생명체의 지적 능력이 자신들보다 현저히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그들은 실망하지 않았다. 그들은 분명히 선언했다. 새로운 지적 생명체는 데브데브다브가 이 광대하고 외로운 우주에서 만난 첫 번째 ‘친구’라고. 그러나 나중에 그 ‘친구’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데브데브다브의 호의를 배반하곤 했다.
  게르게르기르와 데브데브다브 역시 현미경이나 레이더가 없다면 결코 서로 식별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 만남의 신비로움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사랏사랏을 흥분시켰지만, 아마도 그 여자는 영원히 사랏사랏이라는 존재를 만나지는 못할 것이다. 게르게르기르 개체와 데브데브다브 개체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만난다는 것은 서로에게 아무 의미 없는 일이다. 그 여자가 눈물을 흘린다고 해도 사랏사랏은 차태지의 육신과 감성을 빌리지 않고서는 전혀 숙연해질 수가 없었다. 사랏사랏은 숙연해졌다.
  그러나 사랏사랏의 고민은 다른 데 있었다. 그를 각성시켰던, 데브데브 고대 문자로 된 격문이 내내 의심스러웠다. 도대체 누가 적어 놓은 것일까. 추적자가 그를 잡기 위해 파 놓은 함정일까. 아니면 지구에 망명한 동족이 혼자가 아닌 것일까. 그 글자가 데브데브다브에 어울리는 크기가 아니라 인간이 알아보기에 적당한 크기로 적혀 있었다는 점 역시 마음에 걸렸다. 그가 인간의 몸을 빌려서 몸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이 이미 알려져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되도록 빨리 지구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시시투로 돌아가려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먼 곳, 데브데브 문명의 중심으로 가야만 했다. 그러려면 준비가 필요하다. 우주선에는 시시투로 돌아갈 수 있을 정도의 연료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게 고도로 정제된 에너지는 다른 생명체들의 영역에서는 구할 방법이 없다. 다른 연료를 이용해야만 했다. 인간의 육체를 점유하는 것이 핵심인 이 우주선의 임무에는 처음부터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사랏사랏의 정신이 인간의 몸을 점유하게 하는 것, 그리고 장거리 우주여행을 위한 연료를 확보하는 것.
  인간의 몸은 에너지로 활용할 수 있다. 조그만 데브데브다브 우주선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연료 탱크를 부착한 것 같은 모양으로, 우주선은 장거리 비행을 할 수 있다. 사랏사랏은 차태지의 체중이 충분히 늘어나는 대로 지구를 떠날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질량이 6500000000 마르미라 정도는 되어야 한다. 지구의 중력 가속도를 생각하면 135kg 정도는 되어야 안정적으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병원 신세를 지는 바람에 원래의 체중보다 많이 줄어서 지금은 체중이 겨우 그 절반에 불과했다. 반 년 안에 출발 준비를 마치려면 부지런히 준비해야 한다. 그에게는 한시의 여유도 없었다. 질량의 절대적인 증가 뿐 아니라 구성 성분 비율도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효율 좋은 지방의 비율을 훨씬 더 높게 하고, 체액 중 알콜의 비율도 훨씬 더 높여야 한다.
  더 길게 끌 수는 없었다. 추적자가 근처에 와 있다면, 그리고 그의 위치를 끝내 알아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에리두를, 지구를 공격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지구를 빠져나가야 한다. 그것도 아주 요란하게, 추적자가 알아채도록.

  
4.


  한편 어머니의 고민은 아들에 관한 것이었다. 건강은 더 이상 나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완전히 자포자기해버린 것 같았다. 돈을 벌 생각도, 새 인생을 준비할 생각도 없이 집구석에 틀어박혀서 멍하게 앉아만 있는 아들을 보고 있자니 한숨만 새 나왔다. 저러다 나아지겠지. 그러나 아들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날이 몸이 불어가는 아들을 보면 걱정이 앞섰다. 절대 살 같은 것은 찌지 않을 것 같은 아이였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어려서부터 늘 운동을 했기 때문에 살이 찔 틈이 없었던 모양이다. 운동을 그만두자 아들은 하루가 다르게 뚱뚱해졌다. 먹기는 또 얼마나 먹어대는지, 이제는 간식 같은 것은 챙겨주지도 않건만 알아서 찾아먹고, 만들어 먹기까지 한다. 볼이 부어서, 갸름하던 얼굴형이 오뚝이가 되고 어깨와 머리 사이가 나날이 가까워졌다. 팔뚝은 다리통만하고 다리는 허리통만하고 허리는 출렁거렸다.
  아들이 외모에 대해 놀림 받는 것을 싫어하는 눈치를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돼지라느니 곰 같다느니 하는 말을 아들은 굉장히 싫어했다. 패배감에다 자존심만 강해져서 그런 이야기들을 참지를 못했다. 아들이 듣는 곳에서 혹시 말실수라도 할까봐 어머니는 늘 조심했다. 그러다 너무 의식적으로 주의를 기울인 나머지, 아들 듣는 데서 남편을
  “돼지 아빠.”
  라고 부르는 실수를 범하기도 했다. 그러면 태지는 밥 때가 될 때까지 어딘가에 틀어박혀서 나오지를 않았다. 어머니는 잠겨 있는 문 앞에 서서 안절부절 못하곤 했다.
  묵희를 만난다면서 아들이 집을 나선 뒤에, 어머니는 어쩐지 그날 아들에게 더 안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두 달 새 몰라보게 둥글둥글해진 그를 보고는 흠칫 놀랐다. 소문대로였다. 사정은 대충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비대해진 그를 직접 보고 나니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몸은 건강해?”
  하고 그녀가 물으나마나한 것을 물었다. 그는 고개만 까닥 했을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묵희는 그의 날렵했던 턱 선이 둥근 곡선에 가려지고, 그의 듬직해 보이던 가슴이 탱글탱글하게 늘어져 있는 모양을 흘끗흘끗 훔쳐보았다. 한창 열심히 운동하던 시절, 축구선수로서 그렇게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어도 공을 노려보는 그의 눈을 보고 있으면 사람들은 이 선수가 얼마나 집요한 눈으로 공에 집중하고 있는지를 이내 깨닫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눈빛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주 가끔 그의 눈이 번뜩였을 때, 그 시선이 닿는 곳에는 먹을 것이 놓여 있었다. 손등은 물론 손가락까지 뚱뚱해져버린 그를 보고 있다가 그녀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말았다.
  “나 결혼해.”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 그는 고개를 들고 약간 민망하다 싶을 만큼 오랫동안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예전 같지 않은 얼굴이어서 표정도 예전과 같이 읽어낼 수가 없었지만, 그의 표정은 아마도 방금 한 말에 대해 해명을 들어야겠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왜?”
  하고 그가 물었다. 그녀는 누구를 비웃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비웃음 섞인 웃음을 흘렸다.
  “왜냐고? 스물여덟이야. 나도 좀 있으면 값 떨어져.”
  “언제?”
  “두 달 있다가.”
  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하고?’ 하고 묻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가, 이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자기에게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그걸 왜 따로 불러서 나한테 가르쳐주는데?’ 하고 묻고 싶은 생각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 말 역시 자기가 할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 두었다.
  “축하해.”
  그녀는 기가 막혔다. 그도 역시 기가 막혔다. 그녀가 말했다.
  “너라는 애를 잘 안다고 생각했어. 다른 사람들하고는 다른 뭔가가 니 안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 알았나.”
  사랏사랏이 우주선 안에서 생각했다. 너는 나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으니까. 사랏사랏은 이 경이로운 생명체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모습을 눈에 새기기 위해, 시간이 멈춘 듯 아무 움직임 없이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어떤 생명체가 자신의 행성 밖에서 발생해서 진화한 다른 생명체를 만났을 때 드는 느낌은 보통 역겨움에 가깝다.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랏사랏 앞에 있는 이 기적 같은 생명체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무한한 관심과 환희뿐이었다. 이마를 살짝 덮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그리고 있는 완만한 곡선, 매끄러운 피부에 덮여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내려오는 코, 더할 나위 없이 적당하게 붉은 빛을 띤 입술, 그리고 눈물을 머금은 눈. 절대로 감정을 숨길 수가 없어서 불규칙하게 떨리며 점점 더 촉촉해져가는 그녀의 눈은 우주만큼이나 깊고 깊었다.
  “잘 살아.”
  그녀가 멀어져갔다. 그는 길 한가운데 서서, 점점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랏사랏은 넋을 잃고 있는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은 데브데브다브가 고향 행성 파르파르바를 떠나야만 했던 무렵에 남겨진 무수한 기록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파르파르바가 속한 항성계는 슈리타 항성의 수명이 다하면서, 팽창해버린 슈리타 속에 흡수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전에 이미 뜨겁게 달구어져서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지옥으로 변해 갔다. 데브데브다브 족들은 어렵지 않게 새 정착지를 찾았다. 어떤 의미에서 그 확장은 시련이 아니라 성장의 기회였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고향별을 지키다가 마지막 순간에 우주선으로 파르파르바의 중력권을 이탈하던 무리들은 누구나 다 시인이 되고 역사가가 되었다.
  「행성이 그저 생명체의 삶을 유지시키는 데 필요한 중력과 자양분을 제공하는 곳일 뿐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데브데브다브의 탐사대는 저 우주 너머에 존재하는 미지의 생명체를 찾아 수십억 년을 여행했으면서도 정작 가장 가까운 곳, 자신들의 발아래에서 그들과 함께 해 온 동반자를 찾지는 못했다. 행성이 너무 조용해서 우리가 알아볼 수 없었던가. 그렇지 않다. 파르파르바는 수십 억 년 동안이나, 데브데브다브가 지성을 갖추고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 이래로 겪었던 것 중 가장 놀라운 기적과 신비를 베풀고 있었다.
  저 아래 멀어져가는 행성이 영혼을 가진 지적 생명체가 아니라고 누가 말했던가. 그러면 저 아래에서 아쉬워하고 슬퍼하고 있는 분은 도대체 누구이신가. 우리의 지성을 거치지 않고, 우리가 간직한 가장 오래된 기억인 유전자에다 직접 축복의 말들을 속삭여주시는 이 누구이신가. 파르파르바! 파르파르바!」
  그녀가 멀어져갔다.

  
5.


  6200000000 마르미라. 127kg 가까이 체중이 늘었다. 마지막 준비를 남겨두고 체액 중 알콜 비율이 지나치게 낮게 측정되었다. 나중에 에너지를 합성해 내는 데 문제가 있을 정도로 지나치게 낮았다. 사랏사랏은 마지막으로 이 비율을 맞추는 데 집중했다.
  어머니는 묵희를 만나고 와서 이유도 말하지 않고 술만 마시는 아들이 더없이 걱정스러웠다. 아들은 이제 집에서는 거의 말도 하지 않다. 말하지 않아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뻔했다. 어머니는 그 참하기만 하던 아가씨가 원망스러웠지만 이내, 탓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은 오후가 다 되도록 정신없이 잠들어 있다가 늦게 일어나서는 처량하게 앉아서 무엇인가를 계속 먹다가 저녁이 되면 누구를 만난다며 밖으로 나가서 새벽 늦게 잔뜩 취해서 돌아왔다. 진짜로 누구를 만나기는 하는 건지, 만난다면 그 사람을 만나서 아들을 달래 보라고도 말하고 싶었지만 아들은 누구를 만나는지 이야기하지 않았다.
  “돈을 주지 마.”
  하고 남편은 말했지만, 어머니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사춘기를 지내면서도 반항 한 번 없던 착한 아들이었다. 스물여덟 나이에 뒤늦게 방황하는 아들에게 그 정도 자존심은 지켜주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아들이 걱정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저러다 낫겠지. 저러다 낫겠지.
  그러나 며칠 전부터 아들이 안하던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는 어머니도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방 정리는 왜 하니?”
  하고 물었을 때 아들은,
  “정리할 때가 돼서요.”
  하고 대답했다. ‘때’라는 말이 어머니의 직감을 예민하게 건드렸다. 이런저런 물건들을 동생에게 줘 버렸다는 말을 듣고 난 뒤부터 어머니는 밤이면 눈물을 흘렸다. 그러다 혼자 일어나서 아들의 방으로 갔다. 문을 살짝 열어서 아들이 자는 모습을 보고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깊은 잠은 오지 않았다.
  136.5kg이 되던 날에, 어머니는 도저히 안 되겠다며 아들 전화기를 뒤져서 그 여자, 묵희에게 전화했다. 그녀는 결혼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고, 두 말 없이 집으로 가겠노라고 말했다. 사랏사랏은 몰래 옥상으로 올라가려고 했으나, 날렵하지 못한 거구의 몸으로 한창 예민해진 어머니를 따돌리기는 어려웠다.
  어머니가 심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러 세웠다.
  “태지야. 어디 가니?”
  사랏사랏이 돌아보며 대답했다.
  “옥상에요. 별 만나러 가요.”
  어머니가 자리에서 털썩 주저 않자, 그는 온화하게 웃으며 금방 갔다가 돌아오겠다고 말하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 아무도 없는 집안에서 어머니는 서럽게 흑흑 흐느껴 울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신발도 신지 않고 문을 열고 아들을 쫓아 달려 나갔다.
  묵희는 차를 아무렇게나 세워 놓고 그의 집을 향해 달려갔다.
  ‘바보같이 죽긴 왜 죽어! 지가 뭔데 그렇게 죽어! 남자가 말이야, 이때까지 살면서 뭐 해 놓은 게 있다고!’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그의 집에 도착했을 때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대문도 잠겨 있지 않았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다시 아파트 아래로 내려왔다.
  소주 한 병을 비우고 나서, 사랏사랏 사랏찬드는 게르게르기르의 육신으로부터 우주선과 정신을 분리한 뒤 엔진을 점화했다.
  ‘다시 돌아오면 오래 있다 갈께요. 어머니. 묵희.’
  위쪽에서 굉음이 들렸다. 묵희는 고개를 들었다. 눈이 아프도록 밝고 가느다란 섬광이 빛처럼 빠른 속도로 하늘을 향해 뻗어갔다.
  어머니는 옥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문이 열려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24층 아파트 아래에도 아들은 없었다. 어머니가 온 아파트 단지 옥상을 다 돌아다니며 아들을 애타게 찾고 있는 사이 사랏사랏 사랏찬드는 지구를 스물 세 바퀴나 돌고 나서 궤도를 벗어나 목적지를 향해 전속력으로 날아갔다. 그러자 멀리서 지구를 봉쇄하고 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함대가 역시 무수히 많은 굵은 섬광들로 변하더니 사랏사랏의 가느다란 섬광을 뒤쫓아 날아갔다.
mirror
댓글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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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ol 05.11.28 13:56 댓글 수정 삭제
    와.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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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림 05.11.29 14:05 댓글 수정 삭제
    숨쉴틈도 없이 후르륵 다 읽었습니다. 현실이 너무 적나라하게 맞물려서 깜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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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unn 05.12.01 17:29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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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5.12.01 20:51 댓글 수정 삭제
    감탄사들이... 호평이라고 믿어버려도 될까요? 시간 내서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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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mku 05.12.13 01:04 댓글 수정 삭제
    와아...순식간에 빠져들어 정신없이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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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7.03.19 11:26 댓글 수정 삭제
    이 글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름은 백 년쯤 전에 인도 작가 사랏찬드라 차터지가 쓴 소설 <데브다스>의 등장인물들에서 따왔습니다. 몇 해 전에 히트한 발리우드 영화의 원작입니다. 부잣집 아들 데브다스와 소꿉친구 파로바티, 꼴까따의 창녀 찬드라무키 세 사람의 이루어지지 못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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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하 08.01.05 17:55 댓글 수정 삭제
    음... 체내의 알콜은 몇시간 후면 산화되어 없어지는데
    체내 알콜 비율이라는건 조금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술을 진창 마셔도 며칠 후에는 거의다 분해되 버릴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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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8.01.09 17:47 댓글 수정 삭제
    음... 문제가 있는 게 어디 알콜 뿐이겠습니까.
    그래도 이 글에는 알콜이 필요한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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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티 08.03.06 17:55 댓글 수정 삭제
    슬프고도 소박한 스페이스 오페라네요. (덜덜덜)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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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8.03.07 10:13 댓글 수정 삭제
    네. 슬픈 눈을 한 여인들이 나오죠.
    하지만 원래 의도한 메시지는 훨씬 더 긍정적인 이야기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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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새랑 08.03.27 15:42 댓글 수정 삭제
    작가님의 상상력에 찬사를 보냅니다 ^^

    태지가 24층 아래에서 발견됐으면 무척 슬펐을 것 같습니다.
  • No Profile
    배명훈 08.03.28 10:43 댓글 수정 삭제
    고마운 말씀이네요.
    네. 그래서 차태지가 아래에서 발견되지 않게 했어요. ㅎ
  • No Profile
    최고입니다. ^^b
  • No Profile
    중간자 08.04.20 14:49 댓글 수정 삭제
    -타임머신 덧글이긴 하지만-

    잘 읽었습니다~
    역시 시험기간중에는 단편이 눈에 잘 들어오네요^^
  • No Profile
    배명훈 08.04.20 21:25 댓글 수정 삭제
    저도 예전에, 시험 기간에 단편을 더 많이 썼어요.
    딴 짓 하고 싶은 욕망을 참지 못하고..
    날짜가 정해져 있는 뭔가가 주기적으로 닥쳐온다는 건 축복일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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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식 09.08.04 14:40 댓글 수정 삭제
    날짜가 정해져 있는 뭔가가 주기적으로 닥쳐오지 않는 나날이 고작 반년 지나니 사람이 멍해지는군요. 명훈님의 글을 읽으면서 나태한 일상 한 구석이 살짝 비일상적으로 변하는 기분입니다. 좋은 글 계속 써주셨으면 합니다.
  • No Profile
    입자들 09.08.05 02:38 댓글 수정 삭제
    어떻게 소재를 생각했을까, 나름 추측해봅니다.

    어느 날 술을 드신 작가님이 집으로 가는 길에
    속이 울렁거려 담벼락을 잡고 토하다가 낙서를 발견합니다.
    그걸 보고 "유레카" 하셨다는...ㅎㅎㅎ

    #
    덧 :
    제목을 <다이어트>로 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지요?

    - 한 문장 한 문장 이어나갈 때마다 무척 스릴을 느끼셨을 듯. 작가님 글을 읽으면 "쓰는 자"의 무한한 행복이 그대로 전해져, 읽을 때마다 유쾌해집니다.

    잘 읽었습니다. 꾸벅~
  • No Profile
    배명훈 09.08.05 10:00 댓글 수정 삭제
    대학원 다닐 때, 어느날 조교실에서 신상명세서를 써 내라고 그랬거든요. 근데 거기에 키, 몸무게, 이런 야만적인 문항이 떡하니 있는 거예요. 입학원서도 아니고, 이미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 애들한테 그게 무슨 짓인가 하고 생각하다가 몸무게의 의미에 대한 소설이 나왔어요.
    몸무게의 의미보다 존재의 무게가 더 중요하니까 외면에 너무 신경쓰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았는데, 말씀하신대로 아주 재미있게 썼던 기억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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