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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냥 소원

2006.03.31 21:0903.31

소원

 

 

 그 절 복판에 탑이 하나 있었는데 위용이 하도 좋고 모양새가 아름다운 탓에 그림자 끄트머리까지 마냥 신성하였다. 나라 안 방방곡곡에 소문이 돌아 부러 보러 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그 탑에는, 특히나 정월이 되면 탑돌이를 하러 각지의 인파가 모이니 한 자리 차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탑돌이를 잘 하면 좋은 색시를 얻는다는 소문을 듣고 어느 댁 종살이 하던 떠꺼머리가 짚신 몇 켤레 삼아 가지고 먼 길을 왔는데 하도 사람이 많아 제대로 치성을 못 드리고 말았단다. 치성 못 드린 탓인지 떠꺼머리는 과연 그 해엔 장가를 못 갔다.
 오기가 솟은 떠꺼머리는 내친 김에 아예 그 고을에 뿌리를 박고 앉아 이 집 저 집 치다꺼리를 해 주거나 절 불목하니 일을 좀 거들고 밥술이나 얻어 먹으며 다음 정월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것도 모자라 해 저물기 이레 전부터는 중들이 아우성 치는 것도 귓잔등으로 흘려 가며 절 마당 구석에 아예 자릴 깔아 버렸다. 세밑인 지라 바람이 차고 서리가 잦아 주지 스님까지 나서 걱정을 해 주시는 판인데 떠꺼머리는 한 해 고생해 가며 기다린 걸 허사로 만들기가 싫은 탓, 소 귀에 경 읽기다. 결국 주지 스님마저 네 녀석 좋을 대로 하라며 갈 하고 자리를 거두시고 말았는데 그래도 가엾은 놈 하나 절 마당에서 죽어 나갈까 싶으셨던지 자비롭게도 거적이며 덮을 걸 좀 얻어다 주셨다. 그걸 덮고 앉아 낮이면 일을 하고 밤이면 마당 자릴 지키면서 이제 사흘이면 탑돌이를 첫번째로 할 수 있다며 떠꺼머린 싱글벙글 댔다. 코가 다 얼어 터지고 입술이 부어 밥을 제대로 못 먹어도 힘이 펄펄 났다. 중들도 이젠 그 놈 참 신통하다고 야단이었다.
 드디어 섣달 그믐날.
 집집마다 제석이라 등불을 식구 수대로 밝히고 해지킴을 하느라 까무룩 들었던 잠마저 깨치는 판인데 정작 떠꺼머리는 그간 무리를 한 탓인지 슬핏 잠이 들고 말았다. 챙겨서 깨워줄 피붙이가 하나 있길 하나 그렇다고 중들이 수행 안 하고 내내 떠꺼머릴 내다 보고 있길 하나, 맹탕으로다가 그냥 잠을 쿨쿨 자고 만 것이다. 이렇게 한잠 잘 자다가 부스럭부스럭 요란한 소리가 들린 참에야 떠꺼머린 비로소 ‘에고, 내가 깜박 잠이 들었구나’ 하면서 몸을 푸다닥 일으켰는데, 이게 웬일! 눈 앞에 시퍼런 불을 은은히 밝히고 하마 탑돌이가 한창인 게 아닌가. 새해 오려면 멀어 아직 동도 채 뜨지 않았는데 요런 식으로 선수를 앗기다니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다. 떠꺼머린 당장에 팔딱 일어나설랑 탑 주위를 훼훼 도는 그 앙큼스런 무리에게 다가 갔다. 등불을 앞세워 머리 쓰개를 쓴 묘령의 여인이 하나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그 뒤로는 여인 몇이 시중을 들 듯 줄줄이 따랐다. 떠꺼머리는 앞선 여인네가 좋은 가문 낭자인 것 같아 차마 말을 붙이지 못하고 수행원으로 보이는 사내에게 가서 들으란 듯이 일갈했다.
 “내가 첫 번을 하려고 이레나 기다렸는데 이렇게 선수를 치는 법이 어디에 있소?”
 가느다란 눈에 사내답지 않게 뽀얗게 분을 바른 수행은 말쑥한 두루마기 소매를 흔들며 듣기 좋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이고, 나리. 탑돌이야 먼저 도는 게 제일이지 어디에 등수가 따로 있답디까? 하도 달게 주무시기에 깨우지 못하였던 것이니 그저 너그러이 보아 주사이다.”
 “그러지 못하겠수. 이거야 천한 놈이라고 우습게 본 것이 아니고 무어란 말입니까? 저기 탑을 도는 분이 얼마나 귀한 댁 아씨인가는 모를 일이나 이 놈에게도 절박한 소원이 있어 한 해를 예서 기다린 거란 말이오!”
 수행은 빙글빙글 얄미운 미소를 흘리며 떠꺼머리의 기색을 흘깃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한 해를 꼬박 기다리셨다면 탑을 첫 번으로 돌고 싶으신 것도 당연한 일입지요. 그럼 우리 아씨께 말씀 드려 꼭 첫 번으로 탑돌일 하게 해 드릴 터이니 노여움 푸십시오.”
 “댁네 아씨가 벌써 탑을 돌고 계신데 어떻게 새로 첫 번을 할 수 있단 말이오?”
 “그거야 두고 보시면 알 일입지요.”
 그가 소매를 펄럭이며 이름을 부르자 아씨 뒤를 따르던 여인 하나가 포르르 이쪽으로 달려왔다. 그는 여인에게 무언가를 수군거리며 소리를 낮춰 새득새득 웃었다. 떠꺼머리는 괜히 불쾌하여 낯을 찌푸렸으나 제법 곱게 생긴 여인이 다음 순간 눈을 마주치며 상긋, 함박꽃 이슬 맞은 것 마냥 웃어 보였기 때문에 그만 기분을 풀고 말았다.
 ‘꼭 저런 예쁜 색시를 얻어야 할 터인데.’
 “진심이십니까?”
 들은 것처럼 사내가 말했다. 떠꺼머리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 보자 사내는 모르는 척 탑 쪽을 가리켜 보였다.
 “자, 보십시오.”
 탑은 어둠 속에서 훤히 빛나고 있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탑을 몇 명의 동자가 번쩍 들어 올리더니 놀랄 새도 없이 이쪽으로 가지고 왔다. 탑 속에서는 또 탑이 하나 나왔다. 그 탑 속에서는 또 탑이, 그리고 또 그 탑 속에서 새로운 탑이…… 점점 작은 탑이 차곡차곡 튀어 나왔다. 떠꺼머리가 입을 따악 벌리고 있는 사이 동자들은 와르르 복숭아처럼 굴러 사라져 버렸고 떠꺼머리 앞에는 여러 개의 탑이 큰 것부터 작은 것까지 도란도란 늘어 서 있었다.
 “마음에 맞는 탑을 골라 도십시오. 저희들은 작은 쪽도 괜찮으니까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사내는 날카로운 웃음소리를 내며 재주를 넘었다. 아씨와 다른 일행들도 눈 깜짝할 새 사라지더니 자그만 탑 쪽에서 탑돌이 하는 소리가 들렸다.
 떠꺼머리가 놀라 깨어 보니 한 바탕 꿈인 지라, 비로소 새로운 한 해가 시작할 즈음임을 깨닫고 숨을 몰아 쉬었다. 날 밝고 탑을 첫 번으로 도는데 하나 둘 모여든 사람들이 떠꺼머릴 두고 눈썹이 희다고 말하거늘 그는 여우가 아니면 어디 산돗가비 장난질이려니 여기어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기원 들인 보람이 있었던지 그 해에 떠꺼머리는 썩 고운 처자를 만나 가약을 맺었는데, 색시가 그 밤에 웃어 보인 시녀와 과연 닮았더냐 물어도 끝내 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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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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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6.04.13 15:57 댓글 수정 삭제
    우리식 판타지 미학!
    전에 누가 저한테 우리나라에는 판타지 전통이 없어서 영국 사람들처럼 쓰기 힘들다고 그래서 말해 준 적이 있었어요. 우리나라 옛날 이야기는 전부 다 판타지라고. 구운몽, 홍길동, 전부 다. 재발견해야 할 전통적인 판타지 미학들이 무궁무진하게 남아 있는 걸 보면, 우리는 남의 것들 따라잡는 데만 너무 몰입하는 것 같아요.
  • No Profile
    미로냥 06.04.14 23:43 댓글 수정 삭제
    우리식 판타지... 식으로 거창하게 말하기엔 함량미달이지만요. 훌륭한 게 얼마든지 더 나오지 않을까- 하면서 뒤쪽에서 모래산만 쌓고 있습니다. :-)
    동양 고전은 진짜 정말 엄청 재미있는데 말입니다 ㅠ ㅠ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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