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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a 적백화면

2006.04.29 22:4504.29

1

빨간 머리카락, 빨간 토마토. 약간 뭉그러진 느낌의 토마토를 하얀 손가락이 움켜잡고 있다. 하긴, 저 머리카락과 토마토를 빼면 화면은 온통 희었다. 토마토의 꼭지, 여자아이의 눈동자, 그 아이의 속눈썹 정도나 다른 색깔일까. 온통 하얀 백지에 선명한 빨간 색. 그러나 원색은 아니다. 자주색에 더 가까워, 오점 하나 없는 흰 바탕으로 그 색깔이 스멀스멀 퍼져나갈 것 같다.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윤곽선을 흐리게 만들어 버려서 더한 것 같다. 사진이 아니라 마치 판화 같다. 그렇군. 아마 당신도 어렸을 때 색판화 정도는 해봤겠지. 그게 가장 어울리는 표현이다. 흰 바탕에 찍힌 붉은 여자아이와 토마토.

“예쁘군.”

그것은 지하철 승강장에 걸린 광고였다. 그 커다란 사진이 흔히 말하는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나는 약속 장소에 가느라 전철을 갈아타던 참이었고, 광고판은 갈아타는 곳으로 가는 통로 입구에 있었다. 내가 그 광고판을 보고 있는 동안 몇 대인가 전철이 왔고, 내장처럼 사람들을 꾸물럭꾸물럭 토해놓고 갔다. 나는 무척이나 한참만에 광고에서 눈을 떼었다. 그리고 다시 가야 할 길을 가면서, 이렇게나 오랫동안 광고를 보고 있었으므로 그 광고는 나의 망막을 거쳐 시신경을 지나 대뇌에까지 이르렀으리라 생각했다. 안약처럼 눈에 담아둘 수 없으면 머리에 담아가면 되는 것이다.

“안녕.”

나의 친구는 날 꾸중하는 눈으로 바라보지도, 무언가 얻어낼 것을 바라면서 비릿하게 웃지도 않았다. 당연하다. 나는 제 시간에 도착했다. 내가 가는 길에 그런 일이 생길까 미리 예상을 하고 일찍 나섰던 것은 아니다. 무척이나 오랫동안 광고판 앞에 서 있었다고 생각했고, 전철도 많이 지나간 것 같았지만 실제로 내가 거기 있었던 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지는 답하기 어렵다. 다만 그것은 순간과 영원의 문제이다. 사람이 정신을 집중하면 주위의 모든 것에 상관하지 않을 수 있고, 바로 그 순간은 시간과 상관없이 흘러가는 이계의 공간이다. 그러고 보면 그렇게 혼잡한 환승역에서 아무도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치고 지나가지 않았단 건 이상한 일이다. 결론은 하나뿐. 누가 밀치고 지나갔어도 나는 알아채지 못했단 것이고 그것은 내가 그 순간에 이계에 영혼을 두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현실의 시간은 얼마 흐르지 않았어도 나는 충분히 오랫동안 그 사진을 감상했다고 생각했던 것이고, 그래서 아직까지 대뇌 속에서 뚜렷이 그 사진을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이다.

“뭘 그렇게 생각해? 메뉴 감상 중이야?”
“응. 뭐 빨간 거 없을까?”

생각할 사이가 있어서 저런 대답을 했던 건 아니다. 대뇌에 스며들어온 빨갛고 하얀 영상은 이제 운동신경에까지 영향을 끼쳤고, 내 얼굴 근육과 혀를 움직여 저런 말을 내뱉기까지 했다. 약간 싫은 기분이 든다. 마치 빨간 악마가 들린 것 같다.
그러나 친구는 언제나 그렇듯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가끔 가다 왜 이 아이만이 내 친구로 남아있는가 생각해볼 때가 있는데, 개중 신빙성 있는 생각은, 이 아이만은 나에게 놀라지 않기 때문이란 거였다.

“몇 개 있어.”
“그렇군.”

레드가 붙은 칵테일이 몇 개 있었다. 빨간 색일 법한 체리 종류의 음료도 있었다. 그렇지만 다 차가운 음료뿐이었다. 약간 몸이 녹긴 했고, 차가운 걸 더 좋아하는 성격임에도 오늘 같은 혹한에는 뭔가 뜨거운 걸 먹는 게 좋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그것은 어쩌면 나의 생존본능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잠시 홍차와 체리차 사이에서 망설이다가, 의도에 충실하게 홍차를 골랐다. 그러나 사실 이름을 보고 고른 것일 뿐, 둘 다 마셔 본 적도, 심지어는 본 적도 없었다.

“근데 갑자기 빨간 건 왜 찾아? 이제 늙은 거니?”

종업원이 주문을 받아간 후에야 친구는 그렇게 물었다.

“홍차랑 홍삼이랑 구분을 못하는 네가 늙은 거겠지.”
“내가 늙었으면 동갑인 너도 늙었지.”
“한마디도 안 지는구나.”
“이유를 말해 주면 한 번쯤 지는 척할 수도 있어. 그것도 감지덕지지?”

말도 안 된다고 말하려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고 친구를 보았다. 나는 슬슬 화가 치미는 기색이 보이고 있고, 친구는 너무나도 평온한 표정이다. 원래 요리의 고수는 손에 집히는 대로 양념을 넣어도 예술이 되는 법이다. 친구도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낼 수 있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나에게서 짜증이나 화라는 낯선 감정을. 같은 말을 남이 했을 때에도 같은 느낌이 날지 몹시 궁금하다. 그러나 당분간 이 의문은 답을 찾지 못하고 어딘가 둥둥 떠다닐 것이다. 아직까지 나는 이 친구와 비슷하기라도 한 인간조차 찾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그건 결국 나는 정말로 이 친구가 무엇을 하든지 감지덕지해야 한다는 소리가 된다. 나는 굴복했다.

“그냥, 백설공주의 엄마 같은 기분이 되어서 말이야.”
“백설공주의 엄마?”
“그래, 백설공주의 엄마. 까만 석탄과 하얀 눈 위에 떨어진 피를 보고, 석탄처럼 까만 머리에 눈처럼 하얀 피부, 피처럼 빨간 볼을 가진 아기를 원했던 그 백설공주의 엄마 말이지.”
“아, 그래. 아기 갖고 싶은 모양이네?”
“아직 안 끝났으니까 그렇게 수준 이하의 결론을 내리지는 말라구.”
“그래그래, 계속해.”
“그렇다고 별 게 더 있는 건 아니야. 그냥 난 오늘 붉은 색과 흰 색이 아주 예쁘게 조화를 이룬 인상적인 사진을 봤고, 백설공주의 엄마처럼 거기에 빠져들었단 말이지.”
“그리고 그래서 그렇게 빨간 것에 집착한단 말이지. 안됐네.”
“응? 왜?”
“주문한 거 나오면 알 거야.”

얼마 지나지 않아 종업원이 우리들이 주문한 음료들을 가지고 왔다. 친구가 주문한 코코아와 내가 주문한 홍차. 친구는 우유 거품이 이는 코코아를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집어 들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당신도 아마 흔한 카페에서 아무런 이름도 붙이지 않고 홍차라고 붙여서 파는 것이 어떤 물건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것을 몰랐다. 유리로 된 투명한 잔 안에 붉은 티백이 둥실 떠올라 있었다. 피처럼 붉은 색이었다. 그러나 많이 희석된 핏빛. 티백에서 빠져나온 실을 잡고 물 속에서 흔들어대니 붉은 빛이 티백으로부터 피어오르는 것이 보인다. 꼭, 씻고 씻어도 다시 물을 부으면 핏물이 배어나오던 갈비 같다.

“무슨 말인지 이제 알았지?”

내가 마시지는 않고 티백을 쥐고 이리저리 휘두르고만 있으니까 친구는 여지없이 그런 말을 꺼냈다. 나는 긍정도 부정도 않고 찻잔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티백을 손에 쥐고 오른쪽으로 움직여보았다. 피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가늘고 빨간 선이 오른쪽으로 틀어진다. 왼쪽으로 움직여보았다. 왼쪽으로 선이 틀어진다. 그렇게 여러 번을 움직여 빨간 선이 물 속으로 녹아들어갔는데도 전체적인 색깔은 그리 달라진 것 같지 않다. 가느다란 선만으로는 무엇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이걸 좀 더 빨갛게 하고, 그리고 흰 것 속에 띄울 수 있다면, 상당히 비슷할 텐데.”
“아직 포기 안 했군.”

친구는 대수롭지 않게 한 마디 던지고는 다시 코코아를 홀짝거렸다. 나는 여전히 홍차를 내려다보면서 티백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한 모금도 마시지는 않았다. 다만 얼마큼 티백을 우려내면 내가 원하는 색으로 변해 줄까 생각할 뿐이었다. 별로 특별한 목적을 가진 약속은 아니었지만, 너무나 특별하지 않게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2

눈이 많이 내렸다. 그러고 보니 계절도 백설공주의 엄마가 그런 생각을 했던 바로 그때쯤이다. 저렇게 흰 눈 위에 떨어지는 피란 말이지. 그런 식으로 구체적인 생각을 해 보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정말로 그게 그렇게 이쁜 색이었을지 의심이 드는 거다. 사람의 피란 그렇게 낭만적인 색이었던가. 아니면 TV나 영화에서 만들어 보여 주는 것처럼 시커먼 멍울과 같을까. 딱 한 번, 피가 솟구치는 상처를 본 적이 있었다. 동생 친구가 BB탄 총으로 놀다가 다쳐서 가까운 우리 집으로 왔는데, 그 상처에서 피가 지긋지긋하게 뿜어져 나왔다. 피의 색깔은 비현실적인 다홍색. 주의의 모든 색을 무력하게 만들 정도로 원색적인 피. 액체라기보다는 젤리처럼 보일 정도로 피는 짙었다. 겉을 조금 다친 상처와, 정말로 안에서 뿜어져나온 피는 그렇게 다르다. 혹은 내 눈에 그렇게 각인되었는지도 모른다.
전화가 왔다. 아는 사람이 스키장에서 다쳤다고 했다. 빨간 사람이었어. 그 사람은 말했다.머리부터 발끝까지 빨갰다고. 그 사람이 쓰고 있던 스키모자부터 고글의 테, 입고 있던 윗도리와 스키바지, 슈즈와 스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빨갰다고 했다. 희고, 장애물 없이 고른 설원에서 고속직하강하는 빨강. 그런 사람과 맞부딪치면 불꽃이 내 눈앞에서 튀었는지 그 사람 옷에서 튀었는지도 못 알아볼 노릇이다. 그때만은 흰색과 붉은색이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온전히 조화를 이루었을 것이다. 딸기와 바닐라 꽈배기 아이스크림처럼. 그 꽈배기가 풀리면서 정신이 돌아왔을 때, 그 사람은 흰 색과 빨간 색의 조화를 징글맞게 생각할까, 집착하게 될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난 붉은색과 흰색에 집착하고 있다.
며칠째 나는 홍차를 가지고 놀았다. 우선, 그 까페에서 본 브랜드의 티백을 한 통 사들였다. 그리고 물의 양과 티백의 수를 조절해가면서 내 맘에 드는 빛깔을 내기 위해 무던히도 많은 실험을 했다. 어차피 그 사진과 똑같은 빛깔을 낼 수는 없을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선명하게 각인된 영상이라 해도 다시 머릿속에서 돌려보는 사이 변한다. 잔가지는 없어지고 굵은 줄기만 남는다. 좀 더 마음에서 바라고 있었던 상에 가깝게 자동으로 조정된다. 그렇게 자신만의 상을 조정하다가 다시 한 번 원본을 접하게 되면 새삼스럽게 충격을 받는다.

“이게 이런 색이었나?”

다시 한 번 같은 자리에서 그 사진을 보았을 때 소리 내어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영원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나를 툭툭 치고 지나갔다. 발뒤꿈치를 슬며시 밟고 지나가는 뱀같은 작자들도 있었다. 곰들이 몸집보다 더 큰 보따리를 들고 가면서 습관처럼 팔을 앞뒤로 휘둘렀다. 엉덩이에 둔탁한 충격이 와 닿았다. 올빼미들이 꺼떡꺼떡 흔들거리며 지나가는데, 꼭 내 쪽으로 쓰러질 것만 같아 불안했다. 하이에나 새끼들이 무리지어 뛰어갔다. 휩쓸리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혼잡한 정글 속에서 사진은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비로소 시선을 떼고 짐승들의 피난길에 동참했다. 아니, 휘말렸다. 사실 그곳은 그저 지하철을 갈아타는 환승역이었을 뿐이다.

붉은색에 대해서 드디어 완벽하게 포기를 해 버린 날, 흰 색을 내기 위한 실험에 착수했다. 이제 내 상상 속에서 좀 더 완벽해진 색깔의 홍차는 언제든지 어느 분량이든 만들어낼 수 있었다. 물론 실험을 위해, 대량으로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둔 '샘플'이 네댓 병 대기하고 있었다.
우선 무늬 하나 없는 흰 잔에 샘플을 따라보았다. 멋지다. 하지만 흰색과 붉은색의 조화를 보기 위해서는 위에서 봐야만 했다. 그렇게 되면 잔의 윤곽선만 겨우 보이기 때문에 흰색과 붉은색의 비율이 아름답지 않다. 게다가 완전한 둥근 모양이라니. 완전함처럼 끔찍한 건 없다. 이건 아니다. 혹은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저 변치 않는 붉은 빛에 얼룩을 내볼까.
아이스크림을 떠넣었다. 잠시 둥실 떠오르더니, 조금씩 모나게 스러져간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이 퍼져가면서 붉은 빛에 흰 물결이 인다. 실패.
새 잔에 새 샘플을 따랐다. 그리고 이번엔 생크림을 떠넣었다. 처음에는 성공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조금 지나자, 아래로부터 반역자가 고개를 들었다. 허옇고 더러워 보이는 파편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실패.
무엇을 넣을 수 있을까. 최대한 조작은 피하고 싶었다. 조작을 하고 싶다면 처음부터 미술도구함을 뒤졌을 게다. 사진을 그대로 빼다 박은 그림을 그렸을 수도 있다. 언젠가 희고 흰 바탕에 레드 와인이 쏟아지는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 컬러 만화 원고를 계획했었다. 그것은 지금 원하는 색보다는 훨씬 차갑고 단아하고 도시적이었다. 살인에 관계된 색이었다. 망각에 관계된 색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원하는 색은 그저 얼룩일 뿐이다. 대뇌에 쏟아진 얼룩.
마요네즈는 좀 더 신속하고 추한 결말을 맞았다. 박하는 속물이었다. 그렇게 빨리 물들어 버리다니. 스티로폼은 훌륭했다. 그 밥알 같은 무늬만 아니었으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잘못해서 그걸 먹어버릴 이에게 너무 위험한 물건이었다.
우습다. 왜 먹어버릴 이를 생각하는 건지 알 수 없다. 이것은 내가 혼자 보자고 하는 짓이고, 이제까지 실패한 모든 실험도 그렇게 생각하면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색깔은 충분히 났으니까, 사진으로 찍어서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면 될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나는 무언가를 꺼리고 있었다. 곧 스러져 버릴 흰색을, 추하게 사라져갈 순수함을, 먹는 이를 질식시킬 가벼움을.
애초에 물감을 꺼냈어야 했다. 그건 그러라고 있는 물건이니까.


3

“그건 아직도 해?”

친구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물었다. 저번에 만난 후로 꼭 일주일 만이었다. 그동안 나는 몇 가지 생존에 필요한 일을 제외하고는 두문불출했다. 예를 들어 정기적으로 마시지 않으면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콜라를 사온다든가, 실험에 필요한 재료가 떨어져서 사러 나간다든가 하는 종류의 일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았다. 사실 실험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생각을 하면서 보냈다. 어떤 재료를 쓰면 좋을까.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미술도구함 앞에서 보냈다. 우두커니 그것들을 바라보고, 실험실의 시약처럼 배열된 칼라잉크들을 손으로 매만져보기도 했다. 스칼렛. 보이는 것과 같은 색이 나온다면 이걸로 만사 해피 엔딩이다. 그러나 결국 거기에 손을 뻗지는 못했다. 그리고 일주일. 친구가 불러서 다시 세상으로 나갔다.

“누구한테 들었어?”

나는 대답을 안다. 누구한테서 들은 것은 아니다.

“네가 잠꼬대로 나한테 전화했잖아. 그래서 만나기까지 했는데? 혹시 몽유병 있었어?”
“아, 그게 이제야 발병한 모양이군.”

친구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 순간 나는 몹시도 친구가 그리워졌다. 바로 앞에 두고서.

“그래, 그 때 네가 말해 줬잖아.”
“그렇다고 쳐. 난 실험하느라 바쁜 몸이야. 뭘 해 주려고 부른 거야?”
“튕기긴.”

오늘 친구는 나에게 메뉴판을 넘겨주지 않았다. 자기가 혼자서 보더니 알아서 두 개를 시키고 메뉴판은 치웠다. 애써 억울하단 어필을 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무엇이 있는지 알아야 아쉽기도 한 법이다. 다만 궁금할 뿐이었다. 친구와 나는 서로의 선택에 간섭을 한 적이 없었기에, 이런 일이 더욱 도드라지게 이상했다. 친구는 내 눈길을 피하는 듯 가게 구석구석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종업원이 다가와 무언가 많이 내려놓고 갔다. 친구는 하나하나 자신이 먼저 시범을 보이면서 설명했다. 모래시계를 엎어놓는다. 모래시계의 모래가 아래로 다 떨어지면, 찻잎이 들어간 주머니를 꺼낸다. 그리고 잔에 따르고 굳은 설탕을 넣어 저어 주며 식힌다. 생각보다는 간단한 절차였다. 그러나 그걸 위해 각자에게 도자기 포트가 나왔고, 찻잎 주머니를 놓을 작은 접시, 모래시계, 찻잔, 우유, 굳은 설탕 등 여러 개가 어지러이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나는 친구의 손길을 주의 깊게 살피며 따라했다. 친구의 손은 별것 아닌 동작에도 아름다운 선을 그렸지만 나에게는 무리였다. 엉거주춤 따르자, 황금빛 물이 졸졸졸 흘러나왔다.

“이게 뭐야?”

요즘 빠져 있던 붉은색은 아니었지만, 그 자체로도 상당히 평화로운 색깔이었다. 친구는 웃으면서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조금 뜸을 들이다 말해 주었다.

“이거? 총칭 홍차라 하지.”

나는 잠깐 놀라서 잔에 고개를 박을 뻔했다. 그리고 친구의 얼굴과 찻잔을 번갈아 보다가 고작 한마디를 내뱉었다.

“노란데?”
“따르면 따를수록 점점 더 빨개져. 그리고 사실 맛은 더 없어지지.”
“그래?”
“홍차를 그렇게 많이 샀으면서, 한 번도 마신 적은 없지?”

친구는 이가 빠진 자리에 이쑤시개를 꽂는 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리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금 멍한 얼굴로 내 앞에 놓인 찻잔을 내려다봤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황금빛 물. 나의 샘플들은 그지없이 아름다웠으나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것에 입댈 생각은 전혀 없었다. 먹지 못하는 것을 쓰는 것은 꺼림칙했지만 그냥 그뿐이다.
그러나 친구는 나에게 이 황금빛 물을 마시라고 한다.
나는 수저를 들어 굳은 설탕을 떠넣었다. 뜨거운 물 속에서 설탕이 탁탁거리며 장작처럼 녹았다. 호박 같은 설탕이 불을 일으키고 있었다. 나는 한 모금 들이켰고 그 따뜻한 황금빛을 입 속 가득히 머금었다. 붉은색과 흰색. 아직 그것이 나를 놓아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선은 황금빛 오후를 맛보자. 그리고 집에 돌아가 다시 실험을 하자. 이번엔 따뜻하게 데워서, 내 혀로 맛보며.

세상이 설마 내가 실험을 끝내기 전에 멸망하지는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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