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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 단편 씨앗을 품는 자

2006.02.24 23:0702.24

drwk.comCopyright a 2005 by박 찬일(Chaneel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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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방랑자다. 나의 업은 떠돌아 다니는 것이며 여행을 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꿈꾸는 것처럼 늘상 멋진 모험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신기하고 기이한 일을 많이 겪게 되겠지만, 그것이 언제나 즐거운 모험이라고 할 수는 없다. 생사의 경계에도 여러 차례 다가가 보았으며 지독한 고생도 늘상 있는 일이었다. 그 모든 일들 중 몇 가지 큰 일들은 물론 글로 남겼다. 이것은 남겨진 작은 이야기들 중의 하나이다.

   독자들이여, 이 글을 바람에 띄워 보낸다. 이것은 소소한 이야기며, 한 알의 씨앗만큼이나 작은 이야기이다. 이 바람의 끝에 부디 당신이 있기를 바란다.

  그날도 바람 많이 부는 날이었다. 마지막으로 보급을 했던 것이 나흘 전이었던가, 식량도 바닥났지만 그보다 흔들어 보아도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 텅 빈 수통이 더욱 큰 문제였다. 나의 준비성 문제는 아니었다. 어찌되었건 나는 떠돌아 다니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고, 보급을 하면서 이미 내가 건너가야 할 메마른 평야의 넓이 정도는 충분히 계산해 두었다.

  그러나 준비와는 전혀 다른 문제로, 목마른 쥐떼가 내 물자루를 갉아먹을 줄은 전혀 생각도 못했다. 굶주린 쥐떼보다도 더욱 위험한 목마른 쥐떼는 내가 잠든 사이 다가와 물주머니를 갉어먹었다. 내가 이마를 적시는 무언가의 느낌에 일어났을 때, 쥐떼는 삽시간에 도망갔고 남은 것은 흥건히 젖은 바닥과 구멍난 물주머니 뿐이었다.

  한번 내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 없듯, 엎질러진 물을 주워담을 수 없었다. 아쉬운 대로 물주머니에 약간 남은 물을 마시고, 오직 예비용으로 가지고 있던 수통 하나에 의지하여 이틀을 걸어온 것이다. 괴로운 이틀이었다. 꼭 물을 마셔도 될 만큼으로 나눠서 하루에 단 세 번만 마셨다.

  평소라면 한번에 벌컥벌컥 마셔도 시원찮을 양을 이틀간 나눠먹자니 죽을 맛이었다. 그러나 분명이 이틀 후면 다음 마을에 도달했어야 하는데, 수통이 텅 비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마른 나뭇가지나 굴러다니는 평원의 한 가운데에 서 있었던 것이다.

  나의 많은 여행 중 절망스러운 기억은 많았다. 동료와 함께 길을 가다 미궁에서 사흘 간 헤맸던 것이라던가, 사방에서 덥쳐드는 늑대 무리와 밤새도록 혈전을 치루던 일이라던가, 절벽에서 굴러 떨어져 하루 종일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일이라던가…

  혼자 들판에서 길을 잃는 경험은 그 모든 것들보다도 더 절망스러운 경험이었다. 그것도 물 한 모금 없는 상황에서 말이다. 바람은 세찼지만 조금도 시원하지 않았다. 숨구멍을 턱턱 막아오는 메마른 바람은 그나마 남아 있는 입안의 물기마저 앗아갔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쓰러진 것은 결코 우스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창피하게도, 쏟아지는 햇살 아래서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은 아무 저항 없이 햇살을 통과시켰고 나는 그 무자비한 열기의 공격에 두들겨 맞았다. 머리가 너무 뜨거워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무릎이 꺾인다고 느끼는 순간 시야에 갑자기 누렇게 말라붙은 대지만이 가득 찼다. 나는 비참하게도 탈진하여 쓰러진 것이다.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간신히 눈을 뜨고 있고, 손을 움직여 말라 비틀어진 풀을 움켜쥐는 것 뿐이었다. 억지로 힘을 짜낸다고 없는 힘이 나오지는 않는다. 나는 버텼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나는 입을 다물고 몸을 웅크렸다. 그 버르적거리는 것 마저도 너무나 힘들어 쓰러질 것 같았지만, 최대한 햇빛에 노출되는 면적을 줄이고자 했다. 그것이 내 목숨을 조금이나마 더 연장했는지도 모른다.

  방랑자가 되어서 위험한 일을 여러번 겪었지만 그때마다 나는 운 좋게 살아날 수 있었다. 방랑자에게 행운은 제 2의 동료와도 같은 것, 나는 이미 여러 차례 그 행운의 도움을 받았고 이번에도 행운은 나를 저버리지 않았다.

  “여보시오…”

  누군가가 나의 몸을 두드렸다. 낯설은 목소리지만 너무나 반가운 사람의 말소리, 나는 그 반가운 소리에 기뻐하며 정신을 잃었다.

  내가 깨어났을 때 내 머리 위에는 차가운 물수건이 얹혀져 있었고 나는 시원한 그늘 아래 누워 있었다. 처음 접하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자주 있는 일도 아니었다. 익숙한 낯설음, 그렇게 말하면 좋을까. 늘 어딘가를 떠돌아 다니는 방랑자이기에 새로운 곳을 가도 낯설음 보다는 일상적임을 느끼는 나이지만 쓰러져 있다가 깨어났을 때 느끼는 것은 좀 다른 느낌인 것이다.

  아늑한 집안에서 누군가의 병간호를 받으며 있는 것은 우리들 방랑자에게는 정말로 일상이 아닌 느낌을 주는 것이다. 마치 보통 사람들이 산길을 끝도 없이 걷다보면 느끼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미지의 세계가 아닌데도 잘 알 지 못하는 곳, 어떤 것이 있을지 알면서도 낯선 것, 뭐 그런 느낌을 말한다.

  내가 알고 있는 몇몇 친구들에 비하면 나는 초보 여행자일 뿐이지만, 어쨌든 나름대로 여러 해를 방랑자로 지내온 나는 이럴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가 잘 알고 있었다. 일단 몸은 움직일 만 했기에 나는 일어나 옷을 입었다. 지독한 병을 앓고 났을 때 처럼 온몸에 기운이 없었지만 어쨌든 움직일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이럴 때는 우선 나를 구해 준 사람을 찾아 인사하는 것이 먼저였다. 예의바른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옷을 입느라 한참을 부스럭거렸는데도 들여다 보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누워있던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누군가가 자다 일어났는지 어지럽혀진 침상이 있는 것을 보니 분명 누군가가 있었던 모양이었는데 말이다. 방 안은 내가 누워있던 침상과, 그 옆의 또 한 사람을 위한 침상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는 휑한 방이었다. 단지 두 개의 침대만을 놓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커서 나는 의아해했다. 그렇다고 깨끗한 방도 아니었다. 분명히 쓰던 흔적이 있는 그런 방, 한 구석에 무엇인가 놓여져 있었던 자국이 있는 그런 방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 밖으로 나왔다. 이 지방에서 볼 수 있는 주택은 보통의 집과는 조금 틀렸다. 방바닥이 땅과 어느 정도 떨어져 있었고, 마루도 마찬가지였다. 방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마루가 있고 그 마루는 아무런 벽도 문도 없이 마당으로 이어지는 구조였다. 물론 마당에는 돌을 쌓은 담장이 있고 담장의 중간쯤에 문이 있었다.

  툇마루에 누군가가 걸터앉아 있었다. 이 이야기는 바로 그 사람에 관한 것이므로 그의 첫인상에 대해 묘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 그는 상체에 얇은 조끼 하나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여름이고 매우 더웠으니 시원하게 입는 것이 무어 문제될 것이 있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물론 조끼 한 벌만 입는 것은 괜찮다. 아예 웃통을 벗어도 좋고 말이다. 다만 그가 입고 있는 조끼는 마치 그의 것이 아닌 것처럼 매우 컸다. 그의 깡마른 체구에는 어울리지도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의 드러난 어깨와 팔은 한겨울의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고 가늘었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는 휘익 하고 쓸려 날아가 버릴 것 처럼 가냘픈 사람이었다. 머리도 제멋대로 자라 덥수룩한 그 사람은 마치 나를 구해 준 사람이 아니라 나와 같은 병자가 아닐까 싶어보였다. 반쯤은 맞은 짐작이었으니 내 눈도 아주 쓸모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무어라 말을 해보려 했지만 나는 그가 하고 있는 일을 방해할 수 없었다. 그가 무슨 신성한 의식이라도 치르고 있는 것처럼 감히 범접치 못할 만큼 진지한 기색이었기 때문이었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서 그는 물그릇을 들어올려 천천히 입에 가져다 대었다. 마치 그 물 마시는 행위를 신에게 바치기라도 하는 양 아주 느릿하고 진지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는 잠깐 입에 그 물을 대었다 떼었을 뿐 다 마시지는 않았다. 그릇의 크기로 보아 물을 꽉 채워 봐야 벌컥벌컥 한 번에 들이킬 만한 양이었는데 그는 그것을 나눠마시려고 하고 있었다. 아니, 두 번째는 마시는 행위가 아니었다.

  물 그릇은 엎질러지지 않게 소중히 들고 있는 채로 그는 뒤로 누웠다. 툇마루에 길게 누운 그는 물그릇을 가슴께에 가져갔다. 계속해서 뒷모습만을 보이고 있던 그가 누우면서 보인 앞모습에 나는 놀라고 말았다. 물론, 그제서야 내가 뒤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도 놀라긴 했지만 살짝 웃어보였을 뿐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러나 나는 완전히 입을 벌린 채 경악했던 것이다.

  그는 조심스레 물그릇을 기울여 가슴에 물을 붓고 있었다. 아주 조금씩, 방울지지 않을 정도지만 실선처럼 가늘게 물이 흐를 정도로. 그 기이한 행위가 어떤 목적을 갖고 있는 가는 곧 알 수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흉측한 흉터가 길게 나 있었다. 마치 악마가 뿔로 한차례 들이받은 듯 가슴을 길게 찢어놓은 일그러진 흉터의 가운데 부근에 놀랍게도 녹색의 이파리가 보였다.

  그것은 가슴 위에 얹혀진 것도 아니었고, 이파리가 날아와 붙은 것도 아니었다. 가운데 부근에 진한 초록빛이 아주 슬쩍 보이는 연두빛의 가녀린 새싹은 그의 가슴에 뿌리를 박고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새싹의 밑둥 언저리에 물을 주고 있었다.

  가슴의 새싹에 물을 주는 작업은 아주 오래 걸렸다. 고작 반 그릇의 물이었지만 혹여 한꺼번에 물이 쏟아지지 않도록, 상처의 틈새로 스며들어 새싹의 뿌리를 적실 뿐 넘쳐 흐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물을 흘려넣는 그 작업은 일견 지루하기까지 보였다.

  마침내 마지막 한 방울의 물 까지도 모두 붓고 난 그는 잠깐 그렇게 누워있다가 일어났다. 그가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시오, 선생. 일어났나 보오.”
  “아, 예. 아, 안녕하십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나를 선생이라고 불렀다. 그의 나이를 물어본 적은 없었지만 그가 나보다 연장자였음은 확실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나를 선생이라고 불렀다. 내가 나 자신은 별 볼일 없는 떠돌이라고 하자 그는 나를 모험가 선생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일어나셨소? 아니 그래 어쩌다 그 지경이 되었는지 원, 걱정했소이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죽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도와주시니…”

  앞섶을 여미지 않았기에 그의 가슴에서 자라는 새싹은 여전히 눈에 잘 띄었다. 도대체 그게 뭐냐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목숨을 구해 준 사람에게 인사도 덜한 터라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아직 몸이 안 좋을텐데 무리하지 마시구려. 아, 물을 좀 떠 줄 테니 앉아계시오.”

  그가 툇마루에서 일어나더니 마당 한구석으로 걸어갔다. 마침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고 있던 터라 고마워 하려는데, 그의 걸음걸이가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절뚝거리며 걷고 있었다. 그제서야 그의 다리에 난 끔찍한 상처를 볼 수 있었다. 가슴에 난 커다란 흉터보다도 더욱 무서운 상처였다. 사나운 짐승이 덥썩 물어가 버린 듯 정강이가 한 웅큼 떨어져 나가 있었다. 살도 뼈도, 마치 점토흙을 떼어 낸 듯 그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뼈가 다 드러나 보 이는 그런 상처인데도 기이한 것은 피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상처가 바싹 말라버린 양 뼈와 살점만이 보였다.

  “잠깐만요, 제가 하겠습니다.”

  나는 재빨리 뛰어나갔다. 신발도 벗고 있는 맨발이라 뜨겁게 달아오른 땅바닥에 닿자 후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작열하는 태양에 다시 현기증이 생기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조금 탈진해 있다고 해서 그렇게 심한 부상을 입은 사람에게 물을 떠오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니, 무리하지 말라는데두… 거 참.”

  마당의 한 구석에는 우물이 있었다. 우물가의 흙은, 습기가 차서 그런지 아니면 그늘이 져서 그런지 차가웠다. 뜨겁게 달아오른 발바닥을 기분 좋게 식혀주는 흙을 밟으며 나는 우물 안을 들여다 보았다. 우물은 상당히 깊었고, 지붕이 있어서 바닥이 어떤 지 잘 보이지 않았다.

  “선생, 그 두레박을 쓰시구려.”

  절뚝거리며 다가온 그가 손가락으로 우물가의 두레박을 가리켰다. 나는 그것을 우물 안으로 던져 넣었다. 촤르르 도르래 풀리는 소리에 이어져 풍덩 하고 두레박이 우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려야만 했다. 그런데, 줄이 풀리는 소리까지는 맞았는데 두레박이 빠지는 소리가 이상했다. 풍덩이라기 보다는 철퍽에 가까운 소리였다.

  “내 생각엔 안에 물이 얼마 없는 것 같소. 조심히 퍼올리시구려.”

  절망스럽게도 두레박을 이렇게 저렇게 당겨보고 흔들어 본 결과 두레박은 우물 바닥에 닿아 있었다. 두레박을 기울여 물을 퍼올린 후 줄을 잡아당겼다. 두레박은 내려갈 때의 무게보다 그다지 무거워 지지도 않았다. 정말로 물은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물이 조금씩 보충은 되는 모양이외다. 내가 계속 퍼냈는데도 그 정도 수위를 유지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오.”

  나는 도대체 뭐라고 말을 해야 할 지 몰라, 퍼올린 물을 작은 물그릇에 옮겨 담으며 침묵을 지켰다. 물그릇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와 툇마루에 앉았다. 나는 가장 그늘이 많이 져서 시원한 자리에 앉았고, 그는 볕이 드는 자리에 앉았다. 겨울도 아니고 날씨는 더워 숨이 턱 막힐 것 같은데 볕 드는 자리에 앉길래 의아해져 물었다.

  “시원한 쪽으로 오시지, 왜…?”
  “아, 햇볕도 조금씩 쐬어 줘야 하니까 그렇소이다.”

  그가 자신을 가리켜 그 말을 하는 게 아니고 가슴에 자라는 싹을 가리켜 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 까지 좀 오래 걸렸다. 잠깐 멍해져 있던 나는 그제서야 하고 싶었던 질문을 할 수 있었다.

  “아니 저, 실례입니다만… 가슴에 나 있는 그건… 뭡니까?”

  그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그가 웃으며 답했다. 나에게는 좀 실망스러운 대답이었다.

  “보시다시피 싹이오.”

  그다지 이야기 하고 싶지 않은 듯한 분위기여서 나는 일단 캐묻는 것은 그만두었다. 그는 툇마루에 걸터 앉아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는 나를 돌아보지 않은 체로 물었다.

  “그래 어디를 가는 중이셨소?”
  “서쪽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만 길을 잃었습니다. 어리석은 여행자의 말로지요. 쥐들이 물자루를 갉아먹어서 그만…”
  “아, 그래서 물을 안 가지고 계셨던 것이로구만. 쥐들이라.”

  그는 느긋했지만 나는 그가 몹시도 쇠약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슴의 흉터와 다리의 상처도 심했지만 그가 몹시 깡말라 있었던 것이다. 마치 제대로 먹지도 못한 양으로 헐렁한 조끼 사이에 드러난 갈빗대가 처량해 보였다.

  “그런데 혼자 사십니까?”
  “음? 혼자 살다니, 무슨 뜻이요 선생?”
  “아니, 저… 집이 꽤 큰데 다른 분은 아무도 안 계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는 하하 웃었다. 밝고 명랑한 웃음이었지만 어딘지 공허한 웃음이었다. 그는 과장되게 손을 저어 보이며 말했다.

  “선생, 이거 내 집이 아니라오. 내가 사는 마을도 아니고, 사실은 나도 이 곳에는 이방인이오.”
  “예?”
  “나도 지나가는 길손이었는데 쓰러져 있는 선생을 데리고 와서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외다.”

  이미 전부터 약간 이상한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채고는 있었지만, 그때서야 나는 이것이 평범한 상황이 아님을 확실하게 인지했다. 나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워 져서 잠시간 그의 가슴에 나 있는 싹에 대해서는 잊어버렸다. 나는 일단 내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어, 그럼 마을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처음부터 없었소. 여긴 아마도 사람들이 버린 마을인가 보지. 짐작인데 가뭄을 피해 떠났나 보우.”
  “여긴 어디쯤… 아니, 제가 얼마나 오래 쓰러져 있었습니까?”
  “이틀쯤? 내가 선생을 발견하고 이 마을에 데려오는 데 한나절, 그리고 그 다음 날이 오늘이외다. 그러니 선생은 이틀쯤 정신을 잃으셨던 게지.”

  나는 속으로 날짜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보급을 하고 들판으로 나와서 사흘, 그리고 이틀이 지난 것이다. 그 정도 거리에 있는 마을이라면 지도를 보건데 들판의 딱 정 가운데 즈음이었다. 사람이 사는 큰 마을, 그러니까 이 메마른 들판의 저편까지 가려면은 빨라도 사흘은 걸릴 터였다.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일단 물이 적긴 하지만 우물도 있고 마을 사람들이 버리고 간 식량도 좀 있소이다. 당분간 체력을 회복하고 여행길로 오르는 것이 좋을 게요.”
  “아, 예. 말씀 고맙습니다. 그런데 저… 통성명이나 합시다. 제 이름은 M이라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떠돌이지요.”
  “오, 모험가 선생이셨구만. 나는 F라고 하오. 글쎄, 나는… 일단 사냥꾼으로 해둡시다.”

  그날은 그 정도의 이야기로 끝났다. 비록 정신을 차리긴 하였으나 워낙 심하게 탈진했던 터라 몸이 휘졌다. 또한 그가 자꾸 누워서 쉬라고 재촉하는 통에 자리에 누웠고, 눕자 마자 곧 잠이 들었다.

* * * * * *

  잠에서 깨었을 때는 이미 다음날 낮이었다. 그는 또 툇마루에 앉아 있었는데, 이번에는 약간 그늘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 보건데 그는 하루 종일 가슴의 싹에 물을 주는 일 말고는 양지와 음지를 적당히 오가며 앉아있는 일 밖에는 하지 않는 듯 싶었다.

  “그래, 도대체 그 싹이 무엇입니까?”

  내가 그의 옆 자리에 걸터앉자 그가 졸고 있다가 깜짝 놀라 깨었다. 하도 기겁을 하며 놀라기에 나도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그는 곧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미안해했다.

  “아니, 난 또 누구라고. 모험가 선생이었구만.”
  “예, 조금 전에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서요.”
  “물어보시게나.”
  “그, 가슴에 나 있는 싹 말입니다.”

  그는 잠깐 하늘을 올려다 보더니,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괜히 물었나 싶었지만 역시 궁금한 것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방랑자의 기질이라고 해도 좋다. 미지의 것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공통점 아니겠는가.

  “이 싹 말인가… 글쎄, 나도 잘은 모르겠소. 가슴에 큰 상처가 났는데 이 씨가 날아와 상처에 박힌 모양이지. 처음엔 몰랐는데 조금씩 싹이 자라더군. 상처가 아물면서 씨는 뿌리를 단단히 내린 모양이고… 사람의 몸에서 어떻게 싹이 나나 싶어 나도 놀랐는데, 보니까 내 피를 빨아올려서 양분으로 삼는 듯 하구만.”
  “피를 빤다구요-!”

  피를 빤다는 소리에 나는 기겁을 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나는 그것을 좀 더 신비한 어떤 것 ? 요정이 선물한 씨앗이라던가- 하는 쪽으로 짐작을 했었다. 실제로 나는 여행 중에 요정을 본 적도 있었으니까 그런 쪽으로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니 그렇다면 그걸 당장 뽑아 버려야…”
  “선생, 왜 그렇게 흥분하시나. 괜찮소. 그리고 어차피 그리 크지도 안잖소.”
  “사람의 피를 빠는 식물입니다. 괜찮다니요, 이런 무서운 식물이 있다니…”
  “글쎄 괜찮다니까, 자꾸 그러시마시오 그래. 그보다 밥이나 먹읍시다, 배고픈데.”

  웃고 있었지만 워낙 완강한 터라, 나는 그 싹을 뽑아 버리자는 말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나는 사람의 몸에 기생하는 몇몇 식물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 물론 그 식물들을 내가 다 겪어본 것은 아니고, 모험을 많이 하는 나의 다른 친우로부터 들은 적이 있는 이야기였다. 그는 괴물 이야기를 좋아해서 수집하는 사람으로, 사람의 몸에 기생하는 식물에 대항해 싸운 이야기도 나에게 해 주었다.

  나중에 그 식물이 거대하게 자라 주변 사람들까지 잡아먹으려 했었다던가. 나는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하지만 F는 웃고 있었고, 솔직히 말해서 그의 가슴에서 자라고 있는 새싹은 너무나도 연약해 보였다. 그런 무서운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여렸다. 극도로 가물은 이 지역의 거친 환경을 견디기에는 터무니 없을 정도로, 단지 바람만 세차게 불어도 꺾여버릴 듯 약했다.

  그래서 나는 그 싹을 뽑으라고 강요하지 못했다. 아무리 조금이더라도, 그 씨는 사람의 몸에 기생하고 있는 것. 세상에 흉측한 생물은 많고, 무차별로 사람을 살육하는 괴물도 많지만 그 중 가장 간악한 것은 기생하는 생물이라고 친구는 말했었다. 정면에서 대 놓고 공격해 들어오는 괴물은 아무리 강해도 쓰러트릴 수 있지만, 은밀하게 달라붙어 어느새 한 사람을 자신의 숙주로 삼아 잡아먹는 기생체들은 스스로의 힘도 없으면서 남의 힘을 빨아먹는 간악한 자라고.

  원래부터 우리들 방랑자들은 남의 도움만 받고 도움을 주지 않는 자들을 싫어하는 습성이 있다. 그리고 내 친구는 그것이 특별나게 강했다. 아마 그가 있었다면 단박에 검을 뽑아 F의 가슴에 난 싹을 잘라버렸을 것이다.

  “자아, 밥 먹읍시다. 이거 참 맛있겠구만.”

  마을사람들이 버리고 간 식량은, 버려진 것이든 어쨌든 훌륭했다. 내가 여행용으로 짊어지고 다니는 건포라던가 훈제 고기라던가 하는 것들도 좋은 음식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여행용으로 좋은 음식이지, 이렇게 차린 음식과 비교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F가 어디선가 가져온 콩을 볶고, 갖은 야채도 충분히 넣었다. 고기도 물론 얼마간 있어서, 좀 큼직한 덩어리를 썰어 넣고 함께 볶자 맛있는 볶음이 완성되었다.

  양념은 구할 수 없었던 모양인지 내가 배낭에서 소금을 꺼내자 F는 반색을 했다. 지난 며칠간 전혀 간이 되지 않은 음식만을 먹어 좀 곤란했다던가. 그러나 요리를 마치고 나서 먹기 시작했을 때, 의외로 그가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아 난 놀라고 말았다.

  “저, 맛이 없습니까? 왜 드시질 않습니까?”

  겨우 한 두어점 집어먹고 물러나 앉는 그에게 놀라 묻자 그가 이상하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꽤 배가 부른걸 뭐, 선생이나 좀 많이 드시오. 빨리 기운 차려야지.”
  “솔직히 말해 기운을 차려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당신입니다. 그렇게 먹질 않으니… 몸이 많이 쇠약해 진 것 같은데…”

  그가 잠시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았다. 확실히 그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헐렁한 조끼 사이로 드러난 갈비뼈, 앙상한 팔다리는 그가 불쌍히 여겨질 지경이었다. 나도 결코 편하지만은 않은 방랑생활로 말랐다고는 했지만 그는 전혀 먹지 못한 사람처럼 빼빼 말라 있었다. 혹 가슴에 난 씨에서 영양을 빨아드려서 그런 것이 아닌가 했더니, 그 영향은 모르겠지만 그가 먹는 양을 보건데 마르지 않으면 이상할 것 같았다.

  “나 말이오? 뭐, 사실대로 말하면 지금 먹은 것도 무리해서 많이 먹은 거라오. 어차피 죽어가는 몸이라서 말이오.”

  그가 하도 당연하다는 듯이 그 말을 했기에 나는 한순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죽어가는 몸이라니, 뭐가? 나의 시선이 그의 가슴에 꽂힌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시선을 의식한 그는 재빨리 손을 내저으며 싹의 옆을 가리켰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다리를 가리켰다.

  “아아아, 그 싹이 문제가 아니라, 이 상처들이 문제인 거요.”

  그 상처들. 악마가 물어뜯고 찢어버린, 그 기괴한 상처들. 하지만 그 상처들은 아주 오래된 상처처럼 보였다. 이미 예전에 아물 수 있는 데 까지 아물어 버린 오래된 상처의 흔적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세상에는 기존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런 일들을 보통 사람들 보다도 자주 접하는 나조차 곧잘 잊어버리는 사실이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이 세계의 온갖 기이한 일들에 비추어 볼 때 얼마나 알량한 것인지를 늘 가슴에 새기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옥에서 돌아온 망자들이 물어뜯은 상처라서, 뭐 어쩔 수가 없소이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어차피 난 죽을 자리 찾아온 사람이라는 소리외다. 여행자 선생도 빨리 몸이 나아서 내일 중으로는 떠나시는게 좋을 것이오.”

  그는 처음으로 매몰차게 등을 돌렸다. 나는 몇번 눈만 껌벅이다가, 입맛이 떨어져서 수저를 놓아 버렸다. 그는 나에게서 등을 돌리고 멍하니 햇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투덜거리면서 자리를 박차고 그 집에서 나와 버렸다.

  도대체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가 어떤 사람인지 거의 알 길이 없다는 것은 화나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극심한 가뭄으로 물을 구하기 어려운 지역에 단 둘이 고립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일수록 나는 방랑자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F와 같이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과는 어떻게 해 나가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나의 방랑자 친구들은 모두 그 속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들과 나는 방랑자라는 점에서 일치했고, 이럴 때에 대처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일치했다.

  방랑자는 때로 지나칠 정도로 감성적이 될 수도 있지만 필요에 따라 극도로 냉정한 이성을 유지하는 자들이다. 적어도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 그런 사람이 아니면 방랑자로써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언뜻 방랑자와 비슷한 냄새를 풍기던 F는 사실은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마을을 거닐고 있었다. 텅 빈 마을은 몹시 을씨년스러웠다. 간간히 바람이 부는 소리를 제외하면 마을은 깊은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고백하거니와 공포란 반드시 어둠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공포는 정적 속에서도 찾아온다. 바람에 밀려 삐그덕거리는 문짝의 모습에도, 누군가가 버리고 간 부서진 의자 다리에도 공포는 숨어 있곤 한다. 나는 갑자기 무서워졌다.

  아무도 없는 마을에 나 홀로 내팽겨져 있는데, 그림자가 져 어두운 빈 집에서부터 무언가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우스운 일이었다. 나는 동반자가 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대부분의 여정 동안 고독을 동반자 삼는 방랑자였다. 그런 내가 홀로 있는 것을 두려워 하는 것은 어부가 배를 타기를 두려워 하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도 나는 오싹한 공포를 느꼈다. 지독한 위화감과 공포가 마을을 지배하고 있었다.

  후에 깨달은 것이지만 그것은 산 자가 죽은 자에 대해 갖는 기본적인 공포였다. 마을 사람들이 가뭄을 피해 모두 떠나버린 빈 마을에 망자들의 원혼이 하나 둘 또아리를 틀은 것이다. 낮에는 햇빛이 무서워 나오지 못하는 원혼들이 호시탐탐 산 자의 목숨을 앗아갈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화를 내듯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도 잊고 나는 볼썽 사납게 달려서 집으로 돌아갔다. 내가 돌아갔을 때 그는 그늘진 자리 근처에 앉아 해를 피하고 있었다. 하루종일 그렇게 볕을 쬐다 말았다 하는 일만을 반복하는 그에게 질려 나는 아예 말을 걸지 않았다.

  나는 아까 먹다 남긴 음식들을 모조리 먹어치워 버렸다. 식어서 맛이 없기도 했는데다가 두 사람 분을 혼자 다 먹자니 배가 터질 것 같았지만 꾸역꾸역 삼켜버렸다. 내가 무엇을 하던 말던 해만 따라다니는, 혹은 피해다니는 그가 얄미워서 나는 아예 자러 들어가 버렸다. 아직 해가 중천인데도 자러 들어가 버린 것은 그다지 현명한 결정이 아니었지만 나는 빨리 체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자기위안을 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당연하게도 나는 몇 시간 자지 못하고 밤중에 깨어 버렸고, 그래서 그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죽은 자들의 원혼들이 F를 공격하는 장면을, 그리고 그가 애써 그것을 피하는 장면을. 너무 일찍 잠자리에 든 탓에 밤중에 나는 무언가 소란스러움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어둠에 적응하지 못한 눈이 사물을 구분해 내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슴푸레하게 윤곽이 보이게 되었을 때 나는 내 옆자리에 아무도 없음을 발견했다. 아무렇게나 팽개쳐져 있는 이불은 내가 잠자리에 들어갈 때 보았던 모양새 그 대로였다. 즉 F는 애초부터 자리에 누운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 시간에 안 자고 뭐하나 의아함을 느낀 나는 방문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가 뭐하나 보는 동시에 우물에서 물을 좀 떠먹을 심산이었다. 물이 부족하긴 했지만 한 모금 더 마신다고 얼마나 티가 나겠나는 생각에서였다.

  “가까이 오지 마시오!”

  그때였다. 그 깡마른 체구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벽력같은 목소리로 그가 소리질렀다. 나는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제자리에 멈추어 설 수 밖에 없었다. 한손에는 횃불을, 다른 한 손에는 길다란 막대기 같은 것을 들고 있는 그는 양 팔을 휘둘러 무엇인가가 다가오는 것을 저지해내고 있었다. 아, 싯푸른 달빛에 드러난 그것들의 흉칙한 모습이란!

  일렁이는 횃불은 그것들이 흘리는 죽음의 한기에 한없이 초라해졌다. 그것들은 음산했으며 잔인했고 또한 흉폭했다. 그의 마른 몸을 물어뜯어 짓이겨 버리고 싶은 듯이 그것들은 미친듯이 그의 주변을 날뛰었다. 공포와 충격으로 굳어있던 나는 겨우 목소리를 짜내었다.

  “이, 이, 이게 어떻게 된…?”
  “망자들이오! 절대 가까이 오면 안되오! 큭!”

  그것들은 희무끄레한 연기와도 같았으며 형체가 쉴 새 없이 변하였다. 그러나 F가 휘두르는 횃불이 지나칠 때마다, 또는 달빛이 그것들을 비출 때 이를 드러낸 사나운 짐승의 아가리 형태가 분명하게 나타나 덤벼들었다. 한둘이 아니었다. 한번에 덤벼드는 것은 서넛 뿐이었지만 그 주위를 끊임없이 맴도는 것들이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그 희무끄레한 형체들이 거기 있다는 존재의 사실이 나를 꼼짝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는 도저히 그 무리들을 뚫고 그의 곁에 다가갈 용기가 없었다. 이미 죽은 자들이 움직일 때 산 자는 영혼 깊숙한 곳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간신히 방으로 달려들어와 내 배낭을 뒤집어 엎었다. 그동안 지니고 다녔던 온갖 잡다한 물건들 중에 분명 축성받은 성수가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 요긴하게 쓰일 거라며 한 병 건네주던 옛 길동무의 얼굴이 떠오르며 한없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배낭의 밑바닥 언저리에서 작은 나무상자를 하나 찾아내었다. 깨질 것을 염려해 나무 상자 안에 넣어 둔 것으로, 상자 뚜껑을 열자 어둠 속에서도 은은하게 빛나는 성수병이 모습을 나타내었다.

  머뭇거릴 새가 없었다. 다시 밖으로 뛰쳐나오자 F는 여전히 그 희무끄레한 망령들에 둘러쌓여 공격받고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횃불과 막대기 같은 것이 어찌어찌 그를 지키고 있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오래 갈지 짐작할 수 없었다.

  성수의 뚜껑을 열면서 힘차게 휘두르자 반짝이는 성수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를 향해 몰려들던 망령들이 성수에 닿았다. 과연 이것이 제 구실을 할까 반신반의하던 나조차도 놀랄 정도로 성수의 효과는 확실했다.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망령들을 이루는 시커먼 연기 대신에 새하얀 연기가 치솟았다. 노란 불꽃이 여기저기서 번쩍거리며 튀어올랐고 망령들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스러졌다. 나는 뱀이 몸을 비틀듯 꿈틀거리며 물러나는 망령들의 사이로 당당히 걸어 F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감사의 인사도 칭찬도 아닌 성난 질책이었다. 그의 화난 얼굴을 대하면서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아니 도대체 무엇하는 짓이오! 오지 말라고 했잖소!”
  “위험에 빠진 걸 도와주려는 것인데… 보세요, 이 성수면 이깟것들은 금방입니다.”

  나는 아직 반 병쯤 남은 성수를 높이 들어보였다. 그리고 성수에 의해 소멸 직전에 이르러 버르적거리는 망령들을 가리키며 주위를 휙 둘러보았다. 다시 내가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의 성난 표정은 더더욱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성수의 효과는 확실했지만 성수는 너무 적었다. 반 병이나 쏟아부었는데도, 방 안의 망령들은 여전히 많았다. 아니, 이번에 성수에 당한 놈들을 대신해 더 많은 망령들이 나타난 듯, 나와 F는 완전히 망령들에 둘러쌓여 있었다. 그것들은 꿈틀거리며 우리 주위를 맴돌았다. 성수로 인해 오히려 분이 나는 듯 망령들은 이전보다 더 격렬하게 움직였다.

  기습적으로 무엇인가가 내 발목께를 스치고 지나갔다. 얼른 발을 뺐지만 망령에 스친 발목이 차가운 겨울바람을 쐰 듯 얼얼했다. 죽음의 본질은 차갑고 적막한 것, 움직임을 빼앗는 것이었다. 나는 성수병을 꽉 움켜쥐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등이 나의 등에 밀착해왔다. 그의 등골에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고는 나는 약간 안도했다. 나 혼자 망령들을 무서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내고 나서의 저열한 안도였다.

  “이, 이것들은 대체…”
  “죽은 망령들의 원한이지. 그 성수 뿌리지 말고 아끼시오. 대충 아침이 올 때까지는 버텨야 되니까.”

  시커먼 연기가 갑자기 나를 노리고 덮쳐들었다. 형체가 없이 다가선 연기는 내 코앞에 이르러 갑자기 거대한 입을 드러낸 짐승의 형상이 되어 나를 물어뜯었다. 뚜껑이 열린 체의 성수병을 들이밀자 놈은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물러났다. 놈이 물러나며 스쳐지나간 팔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아, 아침까지요?”
  “정확히는 동 틀 때까지요. 앞으로 서너시간만 버티면 되오.”

  망령들이 다시 덤벼들었다. 그는 자신의 앞쪽은 횃불을 휘저어 막으며 다른 손의 막대 같은 것으로 나를 덮쳐오는 망령을 쫓아내었다. 성수와 횃불과 그의 막대 중 가장 쓸모가 없는 것은 횃불이었다. 놈들은 단지 횃불을 뚫고 들어오지 못할 뿐 그것을 그리 두려워하지 않았다. 놈들은 성수는 두려워 했는데, 이미 망령들이 성수에 당한 것을 봐서인지 아니면 본능적으로 성수를 두려워 하는지 그건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망령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F가 들고 있는 이상한 막대였다. 어둠 속이었고 워낙 정신없이 휘둘러 대는 통에 어떻게 생겼는지 잘 볼 수는 없었지만 평범한 지팡이는 아닌 모양이었다. 하기사 성수 이상으로 망령들을 멀찍이 쫓아낼 수 있는 물건이 평범한 것일 리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그 긴박한 상황속에서도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물었다.

  “그게 도대체 뭡니까? 손에 들고 계신 것 말입니다.”
  “이것 말이오? 활이오.”
  “활?”

  성수로 얼굴께를 덮쳐오는 망령을 물러나게 하는 동안 그가 ‘활’이라 불린 것을 휘둘러 내 몸을 지켜주었다. 나는 그제서야 가까이서 그것을 보았는데, 곧게 펴져 있어서 단지 막대로만 여겼던 그것의 끝에서 시위를 걸 만한 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자세히 볼 수는 없었으나 그것은 단순한 활도 아니었다. 그로테스크하게 얽히고 뒤틀린 나무로 만든 듯 표면이 온통 기괴한 문양 투성이었다.

  “그렇소, 활이오.”

  그는 그것을 몽둥이처럼 휘둘러 망령들을 쫓아내었다. 물론 망령들은 다시금 덤벼들었으나 어쨌건 그 활을 들이밀고 있는 쪽으로는 망령들이 감히 접근하지를 못했다. 망령들이 성수보다도 더 두려워하는 활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그것을 물을 틈이 없었다. 동이 틀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고, 나는 점차로 지쳐가고 있었다. 망령들의 공격은 점점 더 거세어졌다. 그들도 곧 동이 틀 것이라는 것을 아는 모양이었다.

  “크악!”

  무엇인가가 내 발목을 훑었다. 망령 하나가 땅 밑을 미끄러지듯 날아들어 내 발목을 물어뜯은 것이다. 나는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며 무릎꿇었다. 망령들이 미친듯이 회전하며 나에게로 달려들었다. 그 앞을 F의 활이 막아서며 망령들은 물러났지만 나는 여전히 아픔으로 거의 정신을 놓고 있었다. 발목이 아예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성수를, 어서! 죽음이 퍼지겠소!”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지를 걷어올렸다. 어둠 속에서도 발목이 새카맣게 변해 있는 것이 확 눈에 띄었다. 손가락 한 개도 안 될 정도로 작은 상처가 나 있었지만, 거기서부터 독이 오르는 듯 점차 주변이 시커멓게 변하고 있었다. 성수를 그 위에 뿌리자 다시 한번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끔찍한 고통이 엄습했다. 망령이 물어뜯는 순간보다 더한 고통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나를 뒤흔들었다. 나는 그대로 기절했다.

* * * * *

  “좀 정신이 드소?”

  나는 찬란한 태양 아래 누워 있었다. 찬란하고 찬란한 태양, 그래서 뜨거운 태양이었다. 평야를 횡단하려 할 때는 그렇게 싫었던 태양이지만 이렇게 보니 감개가 무량했다. 저 태양이 하늘에 떠올라 나를 구해낸 것이다.

  “우으윽… 물, 물을…”

  그는 미리 준비해 둔 물을 한 그릇 내주었다. 정신없이 그것을 받아 마시자 찬물이 뱃속으로 내려 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 시원함이 내 몸 안의 내장들을 일깨우는지 정신이 좀 돌아왔다. 나는 겨우 숨을 몰아쉬고 몸을 일으켰다. 허리를 굽히고 바지를 걷어올리자 발목이 드러났다. 상처는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다행이요 그래, 여행자 선생은 빨리 성수를 부었으니까 아마 아무 문제 없을 테요. 햇빛도 좀 쐬었고 하니까 말이오.”

  나는 내 발목을 쓰다듬다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정말로 다행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가슴과 다리에 난 흉측한 상처는 그대로였지만 그는 웃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까 좀 물어봐야 겠습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어젯밤의 그 망령들은 뭡니까?”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만 아니었다면 진즉 꾸벅꾸벅 졸고 있었어야 할 그의 눈가에는 피로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점은 몹시 미안했지만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것은 들어야 했다. 그 끔찍한 상황을 일단 함께 겪었으니 나에게는 그럴 만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선생보고 푹 쉬다 빨리 떠나라고 한 거요…”
  “알았습니다. 떠날 테니 좀 설명을 해 달라는 겁니다. 이대로 아무 것도 모른 체 이상한 일을 겪고 떠나라는 말씀은 아니겠지요?”

  그는 몇번이고 말을 꺼내려다 멈추고, 다시 말을 꺼내려다 멈추었다. 나는 재빨리 주머니를 뒤졌다. 예전에 우연히 얻었던 것이지만 내가 취미가 없어 가지고 다닐 뿐 거의 버린 것이나 다름 없는 물건이었다.

  “연초라도 한대…?”

  나에게는 별 쓸모가 없는, 가끔 벌레들을 내쫓는 데나 쓰는 독한 냄새의 궐련은 그에게는 천상의 선물이었나 보다. 얼굴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진 그는 재빨리 그것을 낚아채고 입에 물었다. 한켠에는 나를 위해서인지 죽과 같은 것이 끓고 있었는데 그는 그 장작불에 궐련을 가져다 대어 불을 붙였다.

  “후-아. 이거 정말 오랫만이로구만, 감사하오 선생.”

  그렇게 느긋하게 궐련을 즐기던 그는 곧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후로도 자주 써먹은 수법이지만, 마음이 잘 놓이지 않아 말을 꺼내지 못하는 이들의 입을 열기 위한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술이고, 다른 하나는 고문이며, 마지막 하나가 연초였다. 술을 구할수도 없고 고문은 어불성설이었으니 연초만이 제일이었다. 물론 연초는 피우는 사람에게나 쓸모 있다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F는 아주 애연가였던 모양이었다.

  “별로 재밌는 이야기는 아니라오 선생. 그래도 듣고 싶소?”
  “꼭 들어야겠습니다.”

  그는 훅 하고 연기를 뿜었다. 더운 공기 속으로 회색 연기가 퍼져나갔다.

  “내 직업은 사냥꾼이었소. 그냥 사냥꾼은 아니었지. 정확히 말하자면 현상금 사냥꾼이었소. 범죄자를 잡아 넘기면 현상금을 받곤 하는 그 현상금 사냥꾼 말이오. 젊은 시절에 그 일을 몇년 하다 보니 적이 좀 생기더군.”

  그렇게 말하며 그는 씩 웃었다. 그는 담뱃재를 모랫바닥에 털며, 혹여나 재가 가슴의 싹에 떨어지지 않는지 주의했다.

  “뭐 되도록이면 현상금을 위해 죽이지 않고 생포해서 잡아가는 거지만 생포해도 미움받고 죽이면 더더욱 미움받기 마련이지. 원한도 많이 받는 직업인데다가 집에 잘 들어오지 않다 보니 내 나이 서른이었나 그쯤에 마누라가 도망갔더구만. 뭐 그렇게 시시껄렁한 현상금 사냥꾼 노릇을 하면서 세월을 보냈더니 글쎄 원한 가진 자가 꽤나 많아져서… 뭐 그래서 공격받았다, 이런 이야기요.”

  그는 활을 집어올렸다. 밝은 햇빛 아래 드러난 활은 섬칫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활줄이 걸리지 않은 체 곧게 펴져 있는 모양새였지만 그 활은 전혀 매끄러운 모양이 아니었다. 아아, 어젯밤에 그 대략적인 실루엣으로 이미 짐작한 바였지만 그 활은 뒤틀리고 추악한 모양새였다. 일부러 그렇게 새긴 것인지 아니면 그런 나무를 꺾어 만든 것인지, 일견 오래된 고목의 엉킨 뿌리와도 같고 일견 악마의 얼굴을 새긴 것처럼 보이는 문양이 빼곡했다.

  “이 활은 내가 범죄자를 쫓기 보다 원한을 품은 자들에게 쫓기는 시간이 더 많아지기 시작할 때 쯤에 얻은 활이오. 산속의 어느 동굴 안에서 주웠소. 처음에는 몰랐는데, 몇번 이 활을 쓰다보니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지. 이 활로 쏘아낸 화살에 맞은 자는 틀림없이 죽게 되어있소. 정통으로 맞으면 물론 죽고, 설사 빗맞더라도 며칠 후에 끙끙 앓다 죽게 되어 있는 거요. 모양새대로 저주가 걸린 물건인 모양이지.”

  그가 활을 내밀었을 때 나는 그것을 받아들 용기가 없었다. 저주가 걸린 위험한 물건에 손을 대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런 나를 이해하고 활을 거두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고, 곧 희희낙락하게 되었소. 나는 절세의 활을 얻었구나 하고. 하지만 이 활을 얻은 것이 저주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았어야 했소. 이 활에 죽은 자들은 모두 저승으로 가지 않고 망령이 되어 나를 쫓아오기 시작했지. 그다지 많은 숫자가 아니었지만 놈들은 밤마다 나를 찾아왔소. 아무튼 이 활을 가지고 있는 한 놈들은 나에게 접근하지 못했소. 아무리 깊은 원한을 갖고 있어도 자신들을 죽였던 이 활이 무서운 것인지, 아니면 이 활 자체에 있는 저주스러운 죽음의 기운이 무서운 것인지 활의 근처에도 못 오더군.”

  거기까지 말한 그는 조심스럽게 가슴의 상처를 쓰다듬었다. 악마가 찢어낸 것 같은 그 상처는 깊었다. 상처를 쓰다듬던 그의 손길이 가운데에 나 있는 싹의 근처를 피해 지나쳤다.

  “그렇지만 놈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소. 아무튼 이 활이 있는 한 나에게 접근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밤마다 고생하면서도 별다른 탈 없이 있었지. 그러나 나는 생각했소. 이 활이 그렇게 두려운 것이라면, 망령들을 퇴치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그날 밤 난 이 활에 시위를 걸고, 화살을 매겼소. 자정이면 망령들이 나타났지. 한대 쏴갈겼소. 망령은 피하지 못하더군.”

  거기까지 말한 그는 눈을 감고 다시 연초를 한모금 빨아들였다. 빨갛게 명멸하는 그 작은 불꽃은 하늘에서 이글거리는 태양에 비해 너무나도 초라해 보였다.

  “여행자 선생, 당신은 혹시 이미 죽은 자가 또 한번 죽는 것을 본 적이 있소?”

  그는 나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말을 이었다.

  “나는 보았소. 이 활로 죽었던 자를, 다시 이 활로 죽여버렸소. 당신은 그런 기분을 모를 것이외다. 그때까지 나는 단 한번도 내가 죽인 자들에게 미안해 한 적이 없었지만, 그날 밤 난 참담한 기분이었소. 이미 죽었던 망령은 그 화살에 맞자 끔찍한 비명을 질렀소. 망령 자체가 소멸해 버리는 반동으로 주변이 새카맣게 물들더군. 그리고는 나는 보았소. 그 망령의 살아왔던 삶을.”

  그의 눈동자가 깊은 우울로 흔들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모든 기억들이 한꺼번에 보여졌소. 처음이었소. 내가 죽였던 자들에게도 다 모두 그럴듯한 삶이 있었다는 것을, 다들 그럴듯한 이유를 갖고 있었고 다들 행복했던 기억과 슬픈 기억을 갖고 있었고, 또, 그들에게도 죽음을 슬퍼해준 사람과 그들을 사랑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을 나는 그 때서야 깨달았소. 멍하니 서 있는데 다른 망령들이 달려들더구먼.”

  그는 거기서 한참을 말하지 않았다. 연초 연기가 햇빛 속으로 마냥 스러지고 있었고, 작은 바람에 흐트러진 그의 머리칼이 그의 눈을 잠시 가렸다. 마침내 연초의 끝까지 모두 태워 없앤 그는 그제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깨어났을 때 나는 정말 겨우 살아남아 있었소. 이 가슴과 다리의 상처를 얻고 말이오. 지나가다 나를 구한 여행자들은 내 상처에 성수를 뿌려주었고 그래서 상처 자체는 커지기를 멈췄소. 다만 너무 늦었기에 이미 죽음은 내 몸 안으로 상당히 퍼져 있는 상태라더군.”

  나는 그의 마른 몸을 바라보았다. 그의 몸에는 이미 죽음이 드리워져 있었다. 천천히 그의 생명을 깎아 먹으며 미소짓고 있었다. 죽음은 그렇게 자리잡고 있었다.

  “죽어야 겠다고 생각했소.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망령들이 나타나도 별 피해를 줄 수 없는 곳으로 가서 죽어야 겠다고. 그런데 죽을수가 없었소. 여행자 선생, 웃기지 않소? 나는 사람을 아무렇게나 죽였던 놈이오. 내가 누군가를 잡을 때 산 체로 잡는 것은 단지 돈 몇푼이 더 필요할 때 였소. 사람의 생사는 내게 돈 몇푼 차이였던 거요. 그러던 내가, 정작 내가 죽여온 목숨들의 무게를 깨달은 순간 나 자신은 죽을 수가 없었소. 고작 한 알의 씨앗 때문에 나는 죽을 수가 없었단 말이오. 불쌍해서, 너무 불쌍해서, 좋은 흙에 안착하지 못하고 사람 몸에 뿌리내린 것 만으로도 불쌍한 데 그 사람이 바로 악령의 노림을 받는 몸이라 너무 불쌍해서 죽게 놔둘 수가 없었소. 내가 죽으면 말라 비틀어져 죽어 버릴 것 같아서, 그게 불쌍해서 죽을 수가 없어서…”

  그는 울고 있었다. 그는 무너지고 있었다. 그가 쓰러지기 전에 나는 그를 붙잡아 줘야 했다.

  “선생, 사람 목숨을 우습게 여기던 내가 정작 이 싹을 소중히 하는 것이 우습지 않소? 아니, 아예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인가? 고작 이 새싹이, 손가락 두 개로 지그시 잡아 뽑아버리면 죽어버릴 이 새싹이 너무 불쌍해서, 그래서 내가 죽어버릴 수가 없단 말이외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망자들을 저 끔찍한 활로 후려치고 겁주어 내쫓고 있소. 그들의 정당한 복수를 막고 있단 말이외다.”

  무엇을 해야 하나,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나는 말솜씨가 좋지 못했다. 그래도 방랑자로 굶어죽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보면 아주 지독하게 말을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럴 때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저는 떠돌이입니다. 떠돌이는 목적지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아, 어디까지 가야 한다, 그런 것을 갖지 못했기에 떠돌아 다니는 떠돌입니다. 그러나 목적지는 없다 하더라도 목적은 있는게 저 같은 떠돌이 입니다.”

  사실대로 말해, 많은 방랑자들이 목적조차 갖고 있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방랑 자체가 목적인 방랑자들은 세상에 셀 수도 없이 많았다. 한때 나도 그런 방랑자였으며, 목적을 완수할 경우 다시 그런 방랑자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때의 나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있었다.

  “저는 영웅을 찾고 있습니다. 괴물이 아니면서도 무기를 부수는 자, 폭력이 아닌 것으로 폭력을 꺾는 자, 승리를 거둘 때 남에게 패배를 안기지 않는 사람. 그래서 영웅이라고 불리는 사람 말입니다. 원래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는 충고해주신 대로 떠나려 했습니다만, 당신 이야기를 듣자니 떠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말했을 때 F의 얼굴은 너무나 묘하게 일그러져 있어서 나는 의아해졌다. 그의 얼굴이 빨갛게 변하더니, 곧 폭소를 터트렸다. 나는 당황하여 그가 할 말을 기다렸다. 한참을 웃던 그는 겨우 정색하여 나에게 물었다.

  “그래, 여행자 선생은 지금 나를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거요?”
  “물론 아닙니다.”

  그의 얼굴이 다시 한번 이상하게 변했다. 물론 이번에는 폭소하지 않았다. 나는 약간의 부연설명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당신이 영웅이 아니기에 남는 것입니다. 영웅이라면 저의 도움 없이도 괜찮을 테지만, 당신은 영웅이 아니니까 제가 도와드려야 겠습니다.”

  그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 참 이상한 사람이군, 하는 듯한 눈빛이어서 나는 괜시리 얼굴이 붉어졌다. 한참이나 나를 들여다 보던 그가 말했다.

  “나는 당신이 떠났으면 하오만… 그렇다면 한 가지 부탁 좀 합시다. 남아주되, 이 싹이 열매를 맺을 때 까지만 기다려 주시오. 그래서 그 씨를 받아주었으면 하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의 동거는 그렇게 연장되었다.

* * * * * *

  그와의 동거는 처절한 사투의 연속이었다. 나는 그의 목숨을 연장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우선 억지로라도 그에게 음식을 먹였다. 여전히 만족할 만한 양을 먹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목숨을 연장할 만큼은 먹게 되었다. 별로 먹고싶어하지 않는 그에게 충분한 양의 음식을 먹이는 것은 반찬투정하는 아이에게 밥을 먹이는 것 만큼이나 치열한 싸움이었다.
  
  먹는 것 다음은 자는 것의 문제였다. 일단 기본적으로 망령들은 자정이 되면 나타났다. 망령들은 오직 F만을 집요하게 노렸을 뿐 나는 그다지 노리지 않았다. 그날 밤에는 내가 그들에게 성수를 뿌리며 공격했기 때문에 나도 노렸던 것이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밤새도록 그가 망령들에게 공격받는 데 혼자 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일단 망령들이 공격해 오는 시간 동안은 둘 다 깨어 있기로 하였다. 나는 그때처럼 그의 곁으로 다가가 함께 싸우거나 하지는 않고, 망령들이 그를 둘러싼 사이에 방 밖에서 망령들의 움직임을 보며 그의 반대쪽을 보아주는 눈이 되어주었다. 내가 왼쪽, 뒤쪽 등등 소리를 질러주어도 망령들은 내 목소리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렇게 밤새도록 망령들과 대치하고 나면 심한 피로를 느꼈다. 지금까지 그는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왔다. 조금씩 졸고는 있었지만 너무 그늘에 오래 있으면 싹이 해를 못받아 죽을까봐, 너무 햇빛에 오래 있으면 싹이 말라 죽을까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보니 전혀 깊은 잠을 자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둘이 교대를 하기로 했다. 밤에는 물론 둘 다 깨어 있고,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절반은 내가 깨어 있고 나머지 절반은 그가 깨어 있기로 말이다. 다른 사람이 깨어 있는 동안에는 깊은 잠을 자면서 피로를 회복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다. 깨어 있는 동안에는 나도 그의 가슴에 난 싹을 잘 관리해야 했다. 적당히 그늘을 드리워 주기도 하고, 약간씩 물을 주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마침내 열흘이 지났다. 싹은 조금씩 자랐다. 나와 함께 있으면서 전보다 좀 잘 먹고 잘 자고 있다고 하더라도, F의 몸이 쇠약해져 간다는 것은 쉽사리 알 수 있었다. 이미 죽음이 깃든 몸이 얼마나 더 오래 살 수 있을지 장담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그 열흘째 되는 날, 그는 기쁜 목소리로 나를 깨웠다.

  “선생, 선생! 여행자 선생!”
  “으… 음? 아, 교대 시간입니까…”

  잘 시간이 되어 그는 매우 피곤해 보였지만, 만면에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나는 흐리멍텅한 눈을 비비며 정신을 차려보려 애썼다.

  “이것 좀 보시오! 꽃이, 꽃이 피었소!”

  찬 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그의 가슴을 들여다 보았다. 확실히 꽃이 피어 있었다. 아주 작은 싹, 만약 정상적으로 땅에서 자라는 것이었다면 이제 겨우 새싹을 내민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작은 싹이었지만 그것은 꽃을 피워내었다. 손톱만한 꽃잎을 다섯 장 가진 빨간 꽃이었다. 핏방울이 아롱아롱 맺힌 것처럼 붉고, 죽어가는 이가 흘린 피처럼 애처로웠다.

  “예쁘군요.”
  “그렇군, 예쁘구먼.”

  그는 싱글벙글 웃었다. 교대시간이었으니까 이제 그가 잠을 잘 차례였는데도 그는 쉽사리 자려 하지 않았다. 꽃을 보느라 여념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저 꽃이 핀 만큼, 이제 꽃은 열매를 맺을 것이었다. 정상적으로 땅에 뿌리를 내린 것이 아니라서인지, 아니면 영양이 부족해서인지 싹은 놀랍도록 빠르게 꽃을 피워내었다. 어떻게든 빨리 씨를 만들어 살만한 땅에 뿌리려는 생존의 욕구였을가. 그러나, 마침내 꽃이 지고 씨가 여물면, 그렇게 되면 그는 죽을 것이었다. 겨우 그를 삶의 끝자락에 매달아 놓은 마지막 의무를 다하고 그는 죽어버릴 것이었다. 그것을 잘 알았기에, 그렇게 되기로 정하고 있었으면서도 나는 우울해졌다.

  그는 밤이 되면 더더욱 필사적으로 싸울 것이다. 겨우 꽃을 피워 낸, 그의 가슴에 찾아든 불청객 씨앗을 위해 삶을 더더욱 불태울 것이었다. 아, 씨앗이여. 그것이 그토록 중요한 것일까.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났다.

* * * * * *

  “그러면 마지막으로 좀 도와주시오.”

  이미 전날 밤의 지독했던 사투로 전신히 노곤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잘 수가 없었다. 그는 겨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동안 계속 쇠약해진 그는 지난 밤 두 번이나 망령들의 공격을 허용했다. 내가 재빨리 상처에 성수를 부어 주었지만, 원래 있던 상처와 죽음의 기운에 더해 그는 급속히 힘을 잃고 있었다.

  나는 그의 가슴에 맺힌 열매를 건드려 보았다. 그때 맺힌 꽃보다도 훨씬 작은 열매가 세 알 맺혀 있었다. 처음에는 초록빛이었던 그것들은 사나흘만에 새빨갛게 영글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것들을 따내어 작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는 조용히 그것을 내려다 보았다.

  “이거, 손에 힘이 없구만 그래, 활시위 거는 것좀 도와주시오.”

  나는 활을 쏘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활이라는 것이 어마어마한 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잘 몰랐다. 양 다리로 한쪽 끝을 꽉 잡고, 팔로 다른 끝을 잡고 온몸의 힘을 다해 활을 굽혔다. 잘못해 그 끝을 놓치기라도 하면 탄성으로 튀어오른 활대에 맞아 어디 한 군데 단단히 부러질 것만 같았다. 내가 낑낑거리며 구부린 활에 그가 시위를 걸었다. 이미 잔뜩 구부러진 활을, 시위를 당겨 더더욱 구부러트린 뒤에 살을 쏘아낸 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는 화살의 촉을 빼고 대신 그 끝에 씨가 담긴 작은 자루를 매달았다.

  “선생.”
  “예.”
  “그동안 고마웠소.”
  “별말씀을.”

  활대가 구부러지자, 나는 그 가운데 부분에서 울부짖는 해골의 모양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구부러졌을 때 활에 음각된 듯한 문양들이 겨우 알아볼 수 있을 만한, 그래서 더 끔찍한 악마들과 온갖 무서운 어둠의 자식들의 그림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그 활시위를 당겼다.

  “잇…”

  그는 이를 악물고 시위를 당겼다. 그러나 이제 정말로 모든 기운이 다 빠진 그에게 활을 당긴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시위를 당겼다. 당기는 것은 그렇게 어려웠어도 쏘는 것은 한순간의 일이었다. 씨를 담은 자루는 화살에 매달려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아.”

  그는 멀어져간 화살을 보면서 쓸쓸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풀썩 뒤로 쓰러져 버렸다. 나는 그를 받아들었다. 그의 몸은 너무 말라 아주 가벼웠다. 내가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는 이미 눈을 감은 체였다. 그의 가슴에 난 싹은 노랗게 변해 있었고, 나는 기운을 잃고 있었다.

  나는 그의 시신을, 전에 미리 파 두었던 구덩이에 묻었다. 혼자 힘으로는 비석을 세울 수가 없어서 쓸만한 널판지를 하나 가져다 꽂아두고 그의 이름을 써 넣어 주었다. 나는 주섬주섬 내 짐을 모두 챙기고, 그의 것이었던 물주머니에 우물에서 퍼올린 마지막 물을 모두 채워 넣었다.

  홀로 걷던 길에, 화살 한 대가 땅바닥에 꽂혀 있었다. 화살의 끝에는 찢어진 주머니가 매달려 있었고, 그 화살의 곁에는 빨간 열매가 몇 개 구르고 있었다. 나는 두 알을 집어들었다. 나는 홀로 걸었고, 그건 긴 여정이었다. 여전히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다.

  겨우 그 황야를 빠져나와, 사람이 사는 마을에 도착했을 때 나는 콩알만한 열매 하나를 적당한 곳에 심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열매는 계속 간직하고 있다가, 내 고향 마을 근처에 심었다. 고향 마을에 심은 것은 기후가 맞지 않은 모양인지 싹이 트질 않았다. 나중에 땅을 파보니 씨가 썩어 있었다.

  그것이 벌써 몇년 전의 이야기다. 두 번째로 찾아온 이 황야는, 여전히 비가 잘 오지 않는 가물은 지역이었다. 황야로 진입하기 직전에 있던 마을에서 나는 여관 주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몇년 전에 한길에 왠 나무 한 그루가 자라나길래 베어버렸다는 이야기였다.

  이것은 작고 소소한 이야기, 또한 슬픈 이야기다.

  지금도 이곳에는 바람이 많이 불고 있다. 나는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커다란 나무의 그늘에 앉아 이 이야기를 바람에 띄운다. 이 바람의 끝에 당신이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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