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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 단편 인간의 왕

2005.12.30 23:4412.30

drwk.com긴 밤이었다.

춥고 긴 밤이었다.

아일로스 드 유느다는 약간 피로함을 느끼고 성의 난간에서 몸을 일으켰다. 발코니의 차가운 돌벽의 한기가 뼛속을 흘러내리는 느낌이다. 머리끈이 풀어져서 검고 긴 머리가 출렁이며 뺨을 스쳤다. 선뜻한 느낌이 자기의 머리카락임에도 불쾌했지만 그는 굳이 묶으려 하지 않았다. 춥고 긴 밤이었고, 모든 것이 다 귀찮았다.

"폐하, 여기 계셨사옵니까."

눈에 충성과 감사의 빛을 담고, 마흔이 넘지만 아직도 건장한 키노린 백작이 다가왔다. 머리카락은 마흔이 넘어도 아직까지 붉다. 께느른하던 몸의 감각이 그제서야 여기가 백작의 성임을 기억해 낸다. 아, 그래.....엊그저께인가, 아니 더 옛날이었던가.

"디유르트 공작 전하께서 폐하를 찾으시옵니다. 많이..."

살짝 말끝을 흐리다 백작이 조심스레 말했다. 죄책감과 난처함이 얼굴에 서려 있었다.

"많이 대노해 계시옵니다."

"아아, 디유르트....."

왕궁에 떨구어 놓고 온 충실한 자신의 기사를 떠올리며 아일로스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말이 좋아 '많이 대노'지 디유르트는 키노린 백작을 향해 자신의 불같은 성격을 아낌없이 보여 주었을 것이다. 아마빛의 색이 엷은 아름다운 금발에 하늘빛에 가까운 옅은 색의 눈, 그리고 깔끔한 이목구비를 갖춘 그의 기사는 겉보기엔 냉정침착해 보이건만 그것은 겉보기일 뿐, 그의 성격은 말 그대로 '불'이었다. 심지어 왕인 자신에게도, 그는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않았다. 혹자는 왕과 소꿉친구로 키워져 그의 오만함이 하늘을 찌른다고 뒷담하지만, 아일로스는 그것이 자신과의 친분에 기인한 자신감이 아닌 그의 천성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 엄청난 분노는 자신이 왕이건 아니건 그대로 쏟아지리라.

"한바탕 잔소리를 듣겠군."

키노린 백작은 마치 자신의 죄인 양 고개를 숙였고, 아일로스는 그것이 영 언짢았다. 늘어진 망토 자락을 들어 휘감고, 홀을 들어 짚은 후 아일로스는 명령했다.

"안내하거라, 백작."




방 안은 난롯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더운 공기는 디유르트를 위한 키노린 백작의 배려임을 아일로스는 알 수 있었다. 뼛속을 흘러 목덜미를 관통하던 한기가 조금 수그러드는 느낌이었다.

아일로스는 혀를 쯧쯧 찼다. 그의 기사는 정말이지 꼴이 말이 아니었다. 난롯가에 앉아 있는 디유르트는 흙탕물에 굴렀다 왔다 해도 무방할 정도의 모습이었다. 왕국의 아가씨들이 찬탄하던 옅은 금발에 흙이 뒤엉켜 있고 붉은 제복은 본래 색깔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으로 흙탕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디유르트, 그렇게 나와의 알현을 급히 요구하기 전에 좀 씻는 게 어떠냐."

안쓰러운 마음에 내뱉고는, 곧 후회했다. 낯익은 음성에 디유르트는 아일로스를 향해 뒤돌아섰고, 속모르는 왕국의 아가씨들이 '수레국화같다'고 칭송하는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었다.

"아일, 로스, 님......!"

뚝뚝 끊어져 불리우는 이름의 무시 못할 박력에 전장의 맹호로 불리던 키노린 백작까지도 한 발 물러섰다. 아일로스는 자신이 사자의 입 안으로 걸어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에 사로잡히며 손을 들어 싱긋 웃었다.

"디유르트, 일단은 씻고 이야기하지. 이 추운 날, 참으로 고생했네."

"아하, 고생, 이라고 하셨습니까?"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아일로스는 한숨을 쉬었다.

"다 내가 잘못했네."

"또, 또 그 소리! 이제 그런 말이 먹힐 줄 아십니까? 보자보자 하니까 아주! 이보세요 국왕 폐하!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역마살 붙은 국왕의 기사 따윌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의 기사를 하느니 차라리 말의 기사를 하지. 말이 아무리 빨라도 공마냥 분간없이 튀지는 않으니까요! 게다가 말이 차라리 당신보단 품위가 있을 테니!"

"이, 이, 이보게! 어찌 그런 무엄한 소리를 하는가!"

발끈한 키노린 백작을 향해서도 디유르트는 그 엄청난 성질머리를 그대로 드러냈다.

"시끄럽소 키노린 백작! 그대가 감히, 무얼 잘했다고! 이 나라의 왕이신 국왕 폐하를 성에 머무르게 해서 왕성을 며칠이나 비우게 만들어! 국왕 폐하의 잘나신 성격을 잘도 부추겨 참 잘하시겠소이다! 이런 젠장, 당신이 저 잘난 왕의 기사를 하든지! 왕의 기사로 고생 한 번 해 보라고! 이 개같은 인생을 당신이 겪어 봐야 아무 말도 못할 테지!"

"어, 어찌 그런...."

강직하고 대쪽같고, 예의범절에 엄격한 키노린 백작은 왕을 향해 쏟아진 무엄한 단어의 파도에 질식하기 직전이었다. 한숨을 쉰 아일로스는, 백작을 내버려 두고 디유르트의 뒷목을 질질 끌었다. 디유르트는 반항했지만, 어렸을 적 기사 수업을 함께 받을 때부터 디유르트는 검술의 기술적인 측면을, 아일로스는 힘 자체를 중시하는 성격이었다.





질질 끌려와 반강제로 욕실에 처넣어진 후에서야 말끔히 옷을 갈아입고 아일로스가 기거하는 방으로 들어온 디유르트는, 잔뜩 분노하고 있었다. 아일로스는 잠시 궁리하다가 엄숙하게 말했다.

"디유르트, 또 삐졌나?"

크악 하고 반 야수가 되어가는 디유르트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까닥하며 아일로스는 한숨을 쉬었다.

"안 삐졌다고?"

"안 삐졌습니다!"

"삐졌잖나."

"이건 화를 내고 있는 거라고요!"

"역시 삐졌구나."

당신, 너, 이 국왕아....등등으로 시작되는 온갖 분노와 욕설의 퍼레이드를 아일로스는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보냈고, 결국은 지쳐 떨어진 디유르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정말 잘못했다. 급한 일이 있었다."

"급한 일이요? 백작이 영애의 병문안을 안 오면 반란이라도 일으킨다고 하덥니까? 아니면 백작 영애가 폐하의 아이라도 가졌답니까? 허, 그 참. 그렇다면야 정말이지 급한 일이지요!"

앓아누운 백작 영애는 이제 열두 살이었고 귀엽고 조용한 소녀였으므로 디유르트의 말은 심한 면이 있었다. 그것을 디유르트도 깨닫고 있어서, 화나서 무작정 내뱉고 나서 곧 후회하고 입을 다물었다. 무책임한 국왕에 대한 분노도 자신의 말실수와 함께 입 안으로 밀어넣고, 잠시나마 침묵을 지켜 주었기에 아일로스는 조금은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백작 영애의 병문안을 온 건 잠시의 유희....가 아닌 어린 소녀를 걱정하는 마음......아니 그냥 기분전환.....인 건 인정하지만, 머무르게 된 것은 급한....아니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다는 거다."

아일로스는 '수레국화 같은 아름다운 하늘색 눈'에 결코 아름답지 않은 지옥의 불꽃이 피어날 때마다 말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아직 화가 가라앉지 않은 디유르트였지만, 춥고 긴 밤을 말을 달린 탓에 몸은 지쳐 있었고 그나마 남은 원기를 아일로스에게 퍼부은 탓에 기운이 빠져 있었다. 덕분에 디유르트는 지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 사정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충실한 기사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마음 속 깊이 안도하며 아일로스는 싱긋 웃었다.

"일단은 뭐부터 먹어야지."

"말 돌리지 마시고!"

"말 돌리는 게 아냐. 긴 밤이지 않는가."

"왠 엉뚱한 소릴!"

발끈하여 항의하던 그는 문의 노크 소리에 겨우 성질을 죽였다. 아일로스가 '들어오라'고 말하자 문을 열고 들어온 시종은 결코 시종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소년의 얼굴임에도 장신에 잘 짜여진 체구, 붉은 머리카락은 잘 손질되어 있고 눈동자엔 긍지가 있었다. 디유르트는 펄쩍 뛰었다.

"사가스 공자!"

"......아니, 디유르트 공작이 아니십니까."

약간 난처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아일로스의 눈치를 힐끗 보는 사가스였지만 아일로스가 싱긋 웃자 안심한 듯했다. 디유르트는 젖은 금발에서 물방울이 튈 정도로 거칠게 바닥을 쾅 굴렀다.

"행방불명이 된 그대가 이곳에는 어찌된 일이오? 이런 곳에서! 그대의 아버님이 얼마나 걱정하고 계시는지 알기나 하고 있소?"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하옵니다.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서...."

"폐하와 똑같은 소릴 하는군!"

"그래, 내가 얽힌 사정과 사가스 공자가 얽힌 사정은 똑같은 종류니까."

아일로스가 시원스레 말하자 소년의 눈동자가 불안에 젖었다. 그러나 곧 소년은 신뢰의 눈길을 보내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공작 전하를 위해 백작께서 만찬을 준비하셨습니다. 식사하러 나오시지요."

"아이고, 참으로 충실하신 백작이시군요. 폐하의 속마음을 이리도 꿰뚫어 보시다니! 저보단 제 말이나 챙겨주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번 달 들어 다섯 번째로 바뀐 말이거든요. 폐하 덕분에 저는 말귀신의 혼령이 붙어 일찍 죽을 것 같습니다!"

"자, 자아, 디유르트."

아일로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불같은 성격의 기사를 달랬다.

"그나저나 사가스 공자, 비아셀 양은 어떠한가?"

"완전히 회복되었다 합니다. 방에서 식사를 들고 계십니다."

아직 열두 살로 괴로운 질병에 시달린다던 비아셀 키노린, 키노린 백작 영애의 병이 나았다는 말을 전하는 사가스는 미묘하게 비뚤어진 미소를 지었다. 아일로스는 위로하듯 사가스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렸다.

"자, 식사하러 가세나. 좀 늦은 시각이긴 하지만 밤참도 때로는 괜찮아."




식사는 왜인지 무거운 분위기로, 키노린 백작의 외동딸인 백작 영애가 다 나았다는데도 사람들은 다들 침울해져 있었다. 사가스 유라나-유라나 자작의 아들로 백작 영애와 막역한 사이로, 소꿉친구로 자랐다는 사가스 공자 역시 침울한 표정이었다. 백작의 동생인 유다는 침울한 정도가 아닌 죄책감에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어, 디유르트는 먹을 것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마치 공녀가 죽기라도 한 분위기잖아!'

성격으로서는 무언가 비뚤어진 말이 튀어나올 법도 했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몸이었다. 디유르트는 넘어가지 않는 음식을 억지로라도 씹었다. 배는 고프고 몸은 지치고 신경질은 날 대로 나 있어 최악의 상태였다. 식기들은 얇고도 아름다웠고, 음식은 정갈하고 맛있었다. 포도주는 달콤하게 목구멍을 흘러내려갔다. 그러나 디유르트에게는 '입에 밀어넣는 수준'의 식사였다.

그의 지독한 왕은 느긋하게 포도주만 홀짝대고 있었다. 길게 출렁대는 검은 머리카락과 가늘게 뜬 보랏빛 눈동자. 모습만으로도 눈에 띄는 그의 왕.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자객의 습격을 받음에도 천방지축으로 나돌아다니는.....

".....디유르트, 잔이 찌그러진다."

왕의 경고에 발끈하여 잔에 들어 있는 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속이 뜨거워져 쿨럭 하고 기침을 하자 사가스가 저도 모르게 웃어 버리고 재빨리 입을 가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모든 게 저 지독한 왕 때문이다. 디유르트가 노려보자 아일로스는 억울하단 표정을 짓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저래 식사가 끝나고 나자 우울한 얼굴로 일어선 백작의 동생 유다가 왕에게 다가섰다.

"폐하."

"응?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저를, 죽여 주시렵니까."

키노린 백작의 얼굴이 굳었다. 사가스의 얼굴은 찌푸려졌다.

"그 이야기는 이미 끝나지 않았던가."

아일로스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남들이 보기엔 자애로운 미소.....라지만 디유르트가 보기엔 연극용 배우의 미소였다. 그러나 유다는 그 미소에 감복한 듯했다.

"저는,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저는, 폐하...."

"백작이 이미 용서한 것을 어찌 내가 끼어들겠는가."

"하오나 폐하!"

순간 유다가 자신을 곁눈질하는 것을 디유르트는 확신했다.

"내가 당신의 망나니요? 내가 목 베는 망나니로 찾아온 거라 생각하오?"

"디, 디유르트 경...."

"난 폐하를 찾아온 거고 당신이 키노린 백작에게 무슨 죄를 지었던간에 관심도 없소. 내 관심사는 단 하나, 폐하를 왕성으로 끌고 가는 것뿐이오. 그대와 키노린 백작 간에 무슨 죄짓고 정죄함이 오고가든 내가 신경쓸 바 아니오."

"아니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유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는 이 모든 일이 비밀로.....비밀로 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을 바쳐도 괜찮다고...."

"꺄아아아아아---!"

순간 자리에 앉아 사태를 살펴보던 사가스가 벌떡 일어섰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식당을 빠져나가는 사가스의 뒤를 아일로스가 뒤쫓았다. 디유르트는 자신의 신세를 저주하며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묵직한 방의 문은 비틀고 발로 차고 해도 열리지 않았다. 사가스는 미친 듯이 방의 문을 두드렸다.

"비아셀, 비아셀! 내 말 들려? 문 열어, 비아셀!"

"비아셀 공녀, 문을 열어! 내 말 들리나? 비아셀!"

한 번의 비명 이후에 문 너머는 조용하기만 해서 더욱 소름이 끼쳤다. 아일로스 역시 방문을 미친 듯이 잡아당기고 두드리고 했지만 문은 그대로였다.

"비켜요, 다들!"

디유르트는 단 한번 경고한 다음 사가스와 아일로스가 비키던 말던 문의 경첩을 칼을 뽑아 그대로 내리그었다. 키잉! 하고 소름끼치는 쇳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그 다음, 문 한쪽에 그대로 체중을 실어 어깨로 부딪쳤다. 쾅! 하는 소리와 요란스레 문 한쪽이 떨어져 나갔다.

"너....날 죽일 셈이냐?"

졸지에 문 한쪽에 얻어맞을 뻔한 아일로스가 소름에 끼쳐 하며 물었지만 디유르트는 흥, 하고 코웃음치고 방에 뛰어들었다.

"비아셀 공녀, 괜찮으십니까?"

공녀는 침대 아래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허둥지둥 달려온 키노린 백작과 유다가 비아셀을 안아 일으켰다.

"애야, 아가야! 비아셀, 비아셀!"

디유르트는 방 안을 훑었다. 딱히 이상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문득 창문으로 다가갔을 때, 디유르트는 눈을 찌푸렸다. 방 밖은 비가 오고 있었고 방 안은 따뜻해서 창문은 흐려져 있었다. 그리고 커튼이 드리워진 그림자 속에 사람의 흙손바닥 자국이 커다랗고 연하게 나 있었다.

디유르트는 자신의 손을 조심스럽게 대어 보았다. 역시나, 자신의 손보다 훨씬 컸다. 아니, 인간의 손이 아닐 정도로 컸다. 검으로 단련된 자신의 손은 보통보다는 큰 편에 속했지만 이 손바닥 자국은 자신의 손가락보다 한 마디 이상 길었다. 인간의 손자국이 아닌, 비정상적이고 인위적인 손자국이었다.

"골치아프군."

옆에서 디유르트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아일로스가 한숨을 쉬었다. 디유르트는 주군의 목을 움켜쥐었다.

"자, 숨기는 것 없이 다 털어놓으셔야겠습니다!"

".....일단 목은 놓고 얘기하지 그러나."

디유르트도 키가 큰 편이었지만 아일로스가 더 장신이라, 아일로스는 디유르트를 애 다루듯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그리고 더욱더 격노한 디유르트가 주군의 멱살을 잡고 늘어지는 것을 유다가 말렸다.

"공작 전하, 진정하십시오. 이번 일은, 제가 털어놓아야 하는 일입니다. 불민한 소신 때문에 폐하께도 이리 폐를 끼치고, 공작 전하까지 이리 번거롭게 하여 너무도 부끄럽습니다. 게다가 형님께도...."

얼굴 가득 내려앉은 죄책감과, 퍼석해진 얼굴을 보고 디유르트는 아일로스의 멱살을 놓았다. 아일로스는 목을 쓰다듬으면서 작게 투덜투덜 불평하다가 디유르트가 노려보자 그만두었다.

"곧 눈을 뜨실 겝니다. 몸이 조금 쇠약해지긴 하셨지만, 쉬면 나으실 듯 합니다"

공녀의 진찰을 마친 의사가 그렇게 말하자 유다의 얼굴에 다시 죄책감이 차올랐다. 지겹다, 하고 디유르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 이제 불청객을 위한 설명이 필요한 때입니다. 여기서 더 설명이 없다면 남은 문 한짝도 부숴놓고 저 손자국의 주인을 찾아 성 주변을 쪼개놓도록 하죠."

"자네는 그 성격이 흠이야, 디유르트...."

"매일 성 밖을 신나게 놀러다니며 신하를 고생시키는 주군보단 백 배 낫다고 봅니다만?"

"이제 그만하시죠."

한숨을 쉬며 사가스가 중재했다.





자리를 옮겨 앉은 디유르트는 유다를 빤히 바라보았다. 괴로워하고 고민하던 그는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일의 발단은, 사실 아주 사소한 것이었습니다...주변 사람들이, 비아셀 양은 키노린 가의 적갈색이 아닌 아름다운 금발인 것을 보니, 어머니를 많이 닮으신 듯하다, 하는 말이 나돌았었지요. 처음에는 무심히 넘겼습니다. 헌데 그 말이 너무 자주 떠돌아, 은근히 비아셀의 얼굴이며 생김새를 유심히 보는 버릇이 생기고 말았지요."

"갑자기 그게 무슨 엉뚱한 소..."

"유다, 계속하게나."

기사에게 꿀밤을 먹인 아일로스가 온화하게 말했다.

"점점, 의심이 깊어져만 갔습니다. 어머니를 닮는다 하는 게 이상한 일은 분명 아닐진대, 점점 생각이 괴상하게만 돌아가서....그런데 어느 날, 노파 하나가 찾아왔습니다. 이것저것 잡화를 늘어놓고 팔려 하더군요. 필요없다 내치려고 하자...약 하나를 권하는 겁니다."

디유르트는 뚱해져서 가만히 말을 듣고 있었다. 별반 대단할 것도 없는 이야기를....하고 생각했다.

"핏줄 이어진 것을, 시험할 수 있는 약이라고 말입니다."

잠시 멍했다. 그러다 문득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깨닫고 펄쩍 뛰었다.

"유다 경, 그 말은...!"

"얌전히 있게나, 디유르트."

아일로스가 가볍게 책망한 후 말끝을 이었다.

"약에다 피를 한 방울 떨어뜨려 시험하고자 하는 이에게 먹인다면- 만일 그 시험하고자 하는 이의 핏줄이 떨어뜨린 피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독약이 된다고, 그렇게 말했다더군."

"그래서 비아셀 양에게? 떨어뜨린 피는 키노린 백작의 피입니까?"

키노린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제 피를 썼지요. 4촌 안의 피라면 괜찮다기에 말입니다."

풀이 죽어 유다가 말했다. 디유르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렇다면 유다 그대가 키노린 백작 가문의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비아셀 양이 아니란 말인가?"

방 안 사람들은 일순 침묵에 잠겨들었고 결국 아일로스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다각도로 사태를 관찰하다니 과연 디유르트, 그대다워! 상식적으로, 유다 경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 뻔하지 않나."

"키노린 백작 부인이 바람을 피웠단 말씀입니까?"

뻔뻔스럽게 디유르트가 묻자 유다와 사가스는 마음이 불편한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아일로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약을 썼고, 독약이 되어 비아셀 양이 쓰러졌고...그래서 병에 걸렸다고 소문을 내고 그 사이에 비아셀 양을 치료하고.... 비아셀 양은 치료되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다 된 것 아닙니까? 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제가 그 약을 받아들면서 그 노파와 약속한 일 때문입니다. 그 빌어먹을 노파가, 만일 약이 독약이 되어 당사자를 죽이게 되면 그 시체는 자신이 받아가겠다 하고, 그것이 약값이라 했습니다."

유다는 잔뜩 풀이 죽어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디유르트는 힐끗 아일로스를 돌아보았다.

"그 판국에 폐하와 사가스 공자가 끼어들어, 결국 저를 주군을 찾아 온갖 성으로 말을 달리게 하셨단 말씀이군요."

"사정이 참 곤란하게 되지 않았는가.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함부로 도움을 청할 수도 없는 일이고 말이지. 디유르트, 비아셀 공녀의 생명이 달린 문제야."

"왕국의 생명이 달린 문제라서 말씀드립니다만, 당장 귀환하십시오, 폐하! 왕궁을 이리 비워 두고 어찌하실 작정이십니까? 폐하께서 남는다고 뾰족한 방도가 생기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비아냥거리는 디유르트를 무시하고 아일로스가 말했다.

"이 일이 해결될 때까지는 이곳에 있을 생각이야. 디유르트, 그리 알게나."

"폐하 마음대로 일이 되어가나 어디 봅시다! 폐하께서 거처하시는 곳을 알았으니 왕궁에서 사람을 불러 오겠습니다. 비아셀 공녀의 일은 저도 안타깝고, 함부로 입 밖에 낼 생각은 없지만서도 더 이상 왕궁을 비워 두시는 것을 묵과할 수 없습니다!"

"디유르트."

아일로스가 디유르트의 손목을 잡고 간절히 말했다.

"왕이 아니라 친구로서 부탁하네, 디트. 정말 아니 될 말인가?"

"그걸 말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폐하! 폐하를 끌고 가는 무례를 저지르는 한이 있더라도 이대로는 못...."

철컥, 하는 쇳소리가 들렸다. 디유르트는 얼빠진 얼굴로 자신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손목에 묵직하게 채워진 수갑이 절그럭거렸다. 아일로스는 어깨를 으쓱하고, 열쇠를 키노린 백작에게 던졌다.

"내 한 몸의 불편함 정도야 공녀를 위해서는 감수해야겠지."

"........전 공녀를 위해 제 몸의 불편함을 감수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 열쇠 어서 이리 주게, 백작! 폐하, 폐하! 정녕 이러실 겁니까! 이봐요, 폐하! 이 수갑 못 풀러!"

"디유르트, 수갑을 흔들지 말아 주게. 내 손목이 아프다네."

수갑의 한쪽은 디유르트의 손목에, 한쪽은 아일로스의 손목에 걸려 있었다. 유다는 망연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아일로스는 싱긋 웃었다.

"자, 이제 공녀를 살릴 방도를 강구해 보기로 하세. 아주 단단한 수갑이라네, 디유르트. 그대 역시 이 일에 몸을 던져 공녀를 살릴 방도를 강구해 내는 쪽이, 나를 왕궁으로 돌아가게 할 가장 빠른 길이 될 걸세."





씩씩거리는 디유르트가 한 명 더 늘었다 한들 마땅한 방도가 나올 리는 없었다. 이래저래, 비아셀 공녀의 곁에 붙어서 호위하자-라는 것 외엔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함부로 이야기를 꺼낼 사안이 아니라 누군가를 부를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참으로 난감했다. 키노린 백작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고, 유다도 형의 모습이 더 풀이 죽어 있었다. 디유르트는 손목이 벗겨질 정도로 수갑을 흔들면서 씩씩거리고 있었고, 사가스는 영 불안한 얼굴이었다. 느긋해 보이는 것은 아일로스 하나뿐이었지만 아일로스도 별반 생각해 둔 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적들이 나타나기를 밤새워 기다리는 것 외엔 방법이 없을 듯합니다. 노파를 수소문해 봐도 아주 깨끗하다 하지 않습니까."

스물 세 번째로 수갑에서 발버둥치다가 지친 디유르트가 내뱉듯 말했다. 잠든 비아셀 공녀의 금발은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저 금발이 모든 의혹의 불씨가 되어서....문득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헌데 뭔가 좀 괴이쩍습니다만...."

디유르트가 문득 입을 열었다.

"노파는 분명 심상찮은 자입니다. 그 손자국 역시 그러하고 말입니다. 헌데 왜 공녀의 신분을 밝히고자 모두 안달복달 하는 걸까요. 공녀는,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아들이 아니니 어차피 키노린 가문을 물려받을 수도 없는데 말입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지?"

"간단히 말해서, 유다 경이 비아셀 공녀의 출생을 의심하게 된 것부터가 무언가 흉계가 아닐까 합니다. 이 일은, 원한으로 시작된 일이 아닐까요."

"원한이라..."

아일로스는 마음 속으로 쓰게 웃었다. 성질이 불 같고, 다소 급한 면은 있어도 디유르트는 일의 인과를 확실히 짚어내고 있었다.

"말도 안 됩니다. 원한 품을 것이 대체 뭐가 있겠습니까? 형님께서 죄 지은 것이 있을 리가 없는데요."

유다가 강하게 반박했다. 아일로스는 흘깃 유다를 돌아보았다. 유다가 비아셀을 약으로 시험한 것은 형을 존경하기 때문이었다. 형을 존경하기에, 형수가 형을 배신하고 외도했다는 것을 참을 수 없었고, 그 결과인 비아셀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키노린 백작이 아내의 외도도, 비아셀의 핏줄도 신경쓰지 않겠다는 것을 확실히 하자 유다의 마음은 형과 비아셀에 대한 미안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키노린 백작, 짚이는 건 없는가?"

디유르트의 말에 유다는 얼굴을 찡그렸다. 키노린 백작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 때, 흘깃 바닥으로 떨어진 디유르트의 시선에 희미한 안개 같은 것이 슬금슬금 바닥에 차올라오는 것이 잡혔다.

"물러서세요!"

디유르트는 호기 있게 일어서다가 아일로스와 바닥을 굴렀다. 키노린 백작은 잠자고 있는 비아셀을 재빨리 안아들고, 유다와 사가스는 칼을 뽑아들었다. 그러나 안개는 자욱하니 바닥을 차올라 온몸을 꽁꽁 옭아매고 있었다. 듣기 싫은 거친 여자 목소리가 웃어젖혔다. 방 안에 웃음소리가 퍼져 나갔다.

"키노린 백작!"

디유르트가 소리질렀지만 눈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수갑이 걸린 손목이 아파 디유르트는 아일로스에게 이를 갈았다. 순간 안개 속에서 손이 나와 디유르트를 떼밀었다. 쾅! 다시 한 번 디유르트는 아일로스와 바닥을 굴렀다.

"죽겠다..."

"이게 누구 때문인데요!"

"날 끌고 가려는 그대 때문 아닌가..."

"그냥 뇌진탕으로 죽어 버려요!"

머릿속이 멍해져 왔다. 왕에게 뇌진탕으로 죽어버리라 한 저주가 그대로 돌아온 것은 아닐까, 하고 디유르트는 엉뚱하게 생각했다. 하여튼 얄밉고 뺀질거리고 지독하게시리 생각 없이 움직이는 왕이지만 운은 엄청나게 좋으니까....아득해지고, 뿌옇게 흔들리고, 그리고 모든 것이 까매졌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머리에 혹이 나 있었고 온몸이 지끈거렸다. 수갑은 풀러져 있어서, 디유르트는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이 못된 왕은 어디로 갔을까. 여기저기 멍들었는지 쑤시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문을 열었을 때, 문득 복도 저편쯤에 키노린 백작과 아일로스가 보였다. 디유르트는 살금살금 걸어갔다.

".........입니다. 그럴 리는....."

"그럴 리 없다라, 글쎄 어떨까. 정작 소문의 당사자가 그 소문을 모르는 일은 많지.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는 법일세. 오랜 시간 지나지 않아, 곧 모두 알게 되어버려."

"허나 설마!"

"모르는 일이라네. 하기사.....그저, 입 다물고 있게나. 나에게도 생각이 있다네."

"폐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앞으로 걸어가는 키노린의 뒷등이 수상쩍어 노려보고 있는데, 아일로스가 디유르트를 불렀다.

"엿듣는 재미가 어떠한가?"

"온몸에 멍이 들었는데 뭐든 재미있을 턱이 있겠습니까?"

"나를 위해 한몸 희생했으니 기쁘게 여기게."

"저를 위해 한몸 희생한 말에게 저런 소리 했다간 꿈속에서 뒷발굽으로 차이거나 지근지근 밟혀서 납작한 케이크 꼴이 나겠죠. 헌데 별 일 없었습니까?"

"큰 일이 있었지. 왕의 충성스러운 기사가 마음 편히 기절해 있는 동안 왕은 사건을 해결하고 있었다네."

"대체 그게 누구 때문이냐고요! 제가 제 손목에 수갑을 채웠습니까!"

"진정하게, 디유르트. 잠시 산책이나 할까."

바짝 성이 난 디유르트에게 아일로스는 비식 웃어 보였다.

"이제 거의 끝나가네. 왕궁으로 돌아갈 때야."




아직 날씨는 흐렸지만 빗물에 젖은 새싹들은 상쾌해 보였다. 정원은 축축하고 쌀쌀했지만, 아늑하고 조용했다. 젖은 공기가 피부를 찐득하게 했지만, 차갑고 시원했다. 아일로스와 디유르트, 사가스는 말없이 정원을 걷고 있었다. 사가스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어제 저녁 저는 갑자기 차올라온 물에 의해 정신을 잃었습니다만....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고, 다들 말이 없으시니."

물? 하고 눈을 치뜨는 디유르트의 발을 사정없이 밟아 문지르며 아일로스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 일은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네, 공자. 공자는 소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갑자기 바뀐 화제에 사가스는 적응하지 못했는지 잠시 눈을 깜박거렸다.

"소문 말입니까?"

"그래, 소문 말이야. 대부분의 소문은 말이지, 소문의 당사자들은 모를 때가 많지. 그래, 보통 소문이란 그런 거야. 그러나 언젠가는, 소문의 당사자들도 그 소문을 알게 되고 말지."

"무슨 말씀이신지....죄송하지만 폐하, 소신이 우매하여 폐하의 말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런 거라네, 공자. 만일 유다의 귀에 들어갈 정도로 '비아셀 공녀는 키노린의 핏줄이 아니다'란 소문이 퍼졌다면, 당사자인 비아셀도 그 소문을 들었을 거란 얘기야. 소문은, 그 당사자를 기점으로 원 주변을 빙빙 돌지. 당사자의 측근이 그 소문을 들었을 때, 이미 당사자는 그 소문을 들었으리라고 봐도 틀림없다는 거야."

사가스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디유르트는 밟힌 발에 대한 원망도 잊어버리고 당황한 눈을 했다.

"그렇다면 비아셀 역시 그 소문을 들었다는 말씀이십니까? 설마 그럴 리가!"

"글쎄, 유다에게 약을 판 그 노파의 뒤를 탐문해 보았나? 아주 깔끔하다 하더군. 깔끔해서 손을 댈 수 없었다고. 글쎄, 왜일까. 전혀 의심할 수 없는 상대라서가 아니었을까. 어린 비아셀 양이 노파를 시켜 유다에게 약을 팔게 했다는 것을 뉘라서 생각할 수 있을까 말일세."

"폐하, 무례하지만 잠시만... 폐하의 말씀은, 비아셀이 자살할 요량으로 삼촌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독약을 먹이게 했단 말씀입니까? 그건 당치도 않습니다!"

사가스가 강하게 반발했다. 디유르트도 발끈했다.

"키노린 백작에게 원한을 품은 자의 짓이 아니냔 말에 고개를 끄덕여 놓고, 폐하, 무슨 생각이십니까?"

"디유르트, 생각해 보게. 자신이 정말 친딸이 아니라, 어머니의 외도로 낳은 자식이라고.....사랑하는 아버지의 딸이 아니라는 소문을 들었을 때 고뇌에 가득 찬 소녀의 심정을. 소녀는 시험하고 싶었던 게야. 자신의 핏줄을...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핏줄이 설령 거짓이라도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해 줄 것인가를."

"전 아직도 이해가 안 갑니다...."

"소녀는 약을 구한 걸세. 핏줄을 확인하는 그 약을 말이지. 그리고 그 약으로 아버지가 자신을 시험하게 하고 싶었던 거야. 이미 소문을 들어 알고 있을 아버지가, 그 약으로 자신을 시험할 것인지.....아버지가 핏줄에 관계없이 자신을 사랑한다면, 약을 쓰지 않겠지. 아버지가 핏줄에 집착한다면, 그 약을 쓸 거야. 소녀는 자신을 죽일 칼을 아버지에게 맡기고, 머리 위로 칼이 떨어질지 아닐지를 체념한 채로 기다리고 있었던 게지."

"폐하, 뭔가 좀 이상합니다만...."

사가스가 고개를 저으며 끼어들었다.

"하지만 약을 산 것은 유다 경 아닙니까? 노파가 약을 판 것은 비아셀의 아버지가 아니라 삼촌이었습니다."

"그래, 그거라네. 디유르트, 베라."

이슬비가 점점이 떨어지는 정원에서 하얀 불꽃이 치솟았다. 툭, 하고 사가스의 목이 떨어져 정원의 바닥을 구르고, 목이 떨어진 몸통에서 피가 분수처럼 흘러나왔다. 디유르트는 검을 휘휘 저어 피를 털어내고 검집에 검을 꽂았다.

"솔직히 저는 아직도 이해가 안 갑니다만."

디유르트는 옅은 금발을 손으로 헝클어뜨리고 부볐다. 정말이지 피곤하고, 조금은 어이없고, 너무도 복잡한 밤이다.

"사가스 공자가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비아셀 양을 꼬셔 저 약을 쓰게 만들었을까요? 게다가 왜 아버지가 아닌 유다 경에게 약을 팔도록 노파에게 손을 쓴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거야 간단한 얘기잖은가. 아까부터 계속 얘기하고 있는데, 모르나? 소문은 당사자 주변의 원을 둘러싸고 빙빙 도는...."

"그러니까 비아셀 양 얘기는 이해하겠습니다만 사가스 공자의 이야기가 이해 안 간단 말입니다."

".......자네가 사교계에 조금만 더 관심이 있었다면 사가스 공자의 붉은 머리카락이 키노린 백작과 닮았다는 소문 정도는 들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네."

디유르트는 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면 사가스 공자가?"

"키노린 백작의 외도의 결과였지. 아내의 외도를 키노린 백작이 탓할 수 없는 것도 그래서야. 키노린 백작은 외도의 상대가 아이를 낳자 그 아이를 그대로 둘 수 없어 친구인 자작에게 양자로 들이도록 했다네. 그 꼴을 보는 백작 부인의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그렇다면 사가스 공자는 키노린 백작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겁니까? 핏줄을 이었다 하나 어차피 정실의 자식도 아니고, 더구나 자작의 양자로 들어갈 길까지 열어 줬는데도? 거 참, 만족할 줄 모르는 젊은이군요."

".......상식적으로, 자신을 부정하고 어머니를 외면해 버린 아버지에게 아들은 보통은 원한을 품으리라 보네만?"

"상식적이지 못한 주군 아래 있어서 그렇습니다."

디유르트는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발로 시체를 밀었다. 점점이 붉은 피와 쇠비린내가 시각과 후각을 메웠다.

"그렇다면 유다 경에게 약을 팔게 한 것은...."

"사가스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지. 그리고 키노린 백작의 성품도 알고 있었어. 키노린 백작의 성격상, 자신의 죄를 참회하면 참회했지 같은 죄를, 더구나 자신 때문에 죄를 지은 아내를 탓하진 못해. 키노린 백작에게 약을 주었다면, 그 약은 쓰여지지 않았을 거야. 그래서 유다 경을 노린 거지. 백작을 무척이나 존경하는 그 남자는 분명히 약을 썼을 거야."

"그래서, 사가스가 원하는 것은 대체 뭐죠? 키노린 백작이 사가스의 핏줄을 암묵적으로 부정하고 있으니, 백작가를 물려받지도 못할 테고....그렇다고 진짜 원한의 대상인 키노린 백작을 노린 것도 아니었잖습니까."

"비아셀 양이 죽고, 괴로워하는 키노린 백작을 보고 죄책감을 느낀 유다 경의 자살이지. 뻔한 것 아니겠나. 사가스는 백작가의 핏줄도 아니면서 백작에게 사랑받고 있는 비아셀을 미워하고 있었어. 그리고 백작이 신뢰하고 믿고,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점에서 유다도 미워하고 있었지. 백작이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을 모두 죽게 만들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백작의 모습을 보고 싶었겠지."

"........왕국에 손꼽히는 유망주였던 소년이 사랑받고 싶어 칭얼대는 애였다는 소리군요. 거 참, 왕국이 망해 가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디유르트의 비아냥에도 아일로스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디유르트는 한숨을 쉬고, 다시 물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이해 안 가는 게 산더미입니다. 그 손바닥 자국도 그렇고 그 안개도...."

"손바닥 자국? 이런, 디유르트. 그대는 정말 비아셀 양이 비명을 지르고 있을 그 때 손바닥 자국이 생겼으리라고 믿나? 하루 전에 손바닥 자국이 창 위에 생겼다 하더라도 비아셀 양이 생사를 헤매는 이 때, 한가하게 창이나 살펴보고 있을 시녀는 없을 걸세. 시간만 있다면 그런 손바닥 자국이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 더군다나 일이 생기고 방 안을 구석구석 찾아봐야 나타날 정도로 숨겨져 있지 않았었나.

"비명은?"

"내 짐작이지만 비아셀 양에게 사가스가 무엇인가를 먹인 것이겠지. 의사가 와 있어 독극물을 다시 먹일 수는 없으니 연한 환각제를 먹여 공포 속에 미쳐버리게 하고 싶었던 게야. 아버지가 자신에게 약을 먹였으리라 믿고 있는 비아셀의 마음이 평온할 리야 없지."

디유르트는 이를 빠득 갈았다.

"그럼 그 안개는 뭡니까?"

"글쎄, 뭘까."

아일로스는 작게 웃었고, 디유르트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디유르트는 소리질렀다.

"설마 폐하께서!"

"그게, 어쩔 수 없었다네. 나 역시 밤을 새며 말을 달려 온 호위 기사에게 환각약 섞인 밤참을 먹이고 싶진 않았어. 게다가 자네가 피곤해 보여서, 환각약의 효과가 빨리 일어나지 않을까 싶어서 요리사에게 눈짓하느라 고생도 많이 했다네. 일정 시간 후에 다들 똑같이 환각을 봐야 하니까 말이지."

"대체 왜!"

".....뭐어 글쎄, 사가스에게도 마지막 기회를 주고 싶었네. 키노린 백작이 외도하여 그를 낳고, 자신이 거두지 않고 친구에게 양자로 떠맡긴 것은 분명 잘한 짓은 아니니까. 그래서 나는, 사가스에게 먹인 양은 적당히 조절했지. 모두가 쓰러져 있는 이 때, 사가스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살펴보았어....그리고 최후의 결정을 내렸지. 방법이 없더군."

"비아셀 공녀와 유다 경이 사가스의 손에 죽을 뻔했단 말입니까! 아무리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지만 어쩔 뻔했습니까!"

"약을 적당히 먹여 놨다니까. 그리고 내가 깨어 있기도 했으니.....자, 이제 왕궁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군."

아일로스는 분개하는 디유르트를 모른 척 하고 하늘에 시선을 주었다. 아직도 하늘은 흐릿하니 어둡기만 했다.

"키노린 백작은 사가스를 잊어버리려 하거나 내동댕이쳐 둔 것은 아니었어. 그는, 사가스를 비아셀과 결혼시킬 결심이었지. 기실 피가 섞이지 않은 둘이니까....비아셀과 사가스는 친하게 지냈고, 비아셀은 사가스를 신뢰했으니 어쩌면 잘 되었을지도. 사가스가 키노린 백작의 결심을 알았다면 뭔가가 달라졌을까."

"별로 달라지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만? 키노린 백작이 아무리 잘못했다곤 하지만 그 원한으로 멀쩡한 사람들까지 잡아죽이려 하는 근성 빠진 인간은 갱생될 수 없어요."

디유르트는 투덜거렸다. 아일로스는 그저 웃었다.

"뭐 그럴지도. 말을 끌고 오게, 디유르트. 키노린 백작 몰래 떠나도록 하지. 아무리 그래도 자식을 죽인 자들이라면, 반갑지는 않겠지."

"듣던 중 반가운 말이군요, 왕궁으로 출발이라! 냉큼 말 두 마리를 끌고 오죠!"

충실한 기사가 몸을 꼿꼿이 세우고 절도 있는 걸음이 허락되는 최대한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을, 아일로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바라보았다. 피에 덮여 굳은 시신은 시종에 의해 까마귀밥으로 던져지겠지. 아일로스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기대를 했었다. 사건의 진상을 어느 정도 알아차린 후에도 기대를 하고 있었다. 사가스는 마음 깊숙한 상처로 인한 원한만 아니면 죽이기 아까운 인물이었다. 그는 긍지가 있었고 강인한 기사였다. 그러나 그런 그의 긍지도, 원한 앞에서는 버티지 못했다. 가냘픈 공녀를 악랄한 말로 혼란시켜 죽음에 이르게 하려 하고, 아버지의 동생을 계략으로 밀어넣었다.

환각제에 취해 모두가 쓰러진 그 때, 아일로스는 마지막까지 수갑을 풀지 않았다. 사가스가 비아셀 공녀를 향해 검을 들고 다가서는 그 때까지 아일로스는 초조해져 차가워진 손끝을 문지르며 참고 또 참았다. 부디, 사가스! 상처 입은 가련한 소년이여. 내 손으로 그대를 죽이지 않도록. 그대의 긍지를, 백작가의 핏줄에 서린 긍지를 되살리도록!

최후의 최후까지 기다렸음에도, 사가스는 흔들리지 않았다. 망설임 없이 증오를 가득 담고 비아셀에게 다가갔다. 환각제로 인해 흔들리며 쓰러질 때까지 그 증오의 눈길은 비아셀을 향하고 있었다. 끝내, 꿋꿋하게.

긴 밤이었다.

춥고 긴 밤이었다.

춥고 긴 밤이었고, 피로하고, 모든 것이 다 귀찮았다. 온몸이 께느른하기만 했다. 애시당초 사가스의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수순이었나. 예상했던 것과 달라진 것 없는 결과를 앞에 두고 그는 허탈하기만 했다. 무엇 때문에 나는 이 곳에 남아 있었을까. 키노린 백작이 사가스와 비아셀을 결혼시킬 결심을 했다는 것을, 백작이 사가스를 결코 버린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사가스가 알았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비아셀이 사가스를 사랑했다는 것을 사가스가 알았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알릴까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마음을 바꿀 인물이라면, 밝아질 미래로 원한을 푸는 인간이라면 애시당초 쓰레기다. 결국 아무 것도 알리지 않고, 사가스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그리고 그 선택권은, 유예한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이전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아일로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인간의 왕. 단지 인간의 왕일 뿐. 과거를 바꾸는 것은 내 재량의 일이 아니다. 형편없는 결과지만, 최선을 다했다. 내 능력이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늘어진 망토를 들어 휘감고, 홀을 들어 짚은 후 아일로스는 흐린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가득한 하늘에서도, 빛이 한두 줄기 흘러나오고 있었다. 해가 뜨고 있다. 이제,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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