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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wk.com                우리는 동물을 동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간주한다.
                     그 거울이 지나치게 일그러져 있으면,
                          우리는 거울을 구부려서라도
                   우리에게 편리한 모양으로 바꾸려 한다.

                        -D.Morris, '털없는 원숭이'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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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협의 발견, 혹은 발현
                               -Welcome Home-

                                                                Written  By 異衆燐
                                                     Produced By Highwoo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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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았을 때, 나는 나의 눈을 의심했다.
설겆이를 마치고 수도 밸브를 잠근 후 고무장갑을 벗으며 화장실쪽으로 고개 돌리던 나는 시선에 스치는 '무엇'에 놀라 다시 눈을 돌려 싱크대 모서리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곳에 있는 것이 쥐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쥐가 아닌, 분명한 사람의 형태였다. 모서리 끝에 쭈그리고 앉아 퀭한 눈으로 앞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 나는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내 손바닥에 들어갈 듯 자그마한 체격의 그는 축 쳐진 양어깨와 낡은 체크무늬 남방이 가진 초라함이 흡사 노숙자같았다. 굉장히 호기심을 느끼게 하는 존재였지만 불쾌감을 주는 것은 쥐와 다를 것이 없어서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안깨지는 스테인레스 쟁반을 집어서는 그를 내리쳤다.
그런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내가 휘두르는 쟁반을 왼손의 검지 하나로 막아낸 채 그는 윗입술을 씰룩거리며 말했다.

-거 참..쉬고 있을 때는
  괴롭히지 맙시다.

담배를 많이 핀 것처럼 가래끓는 목소리와 건방진 어투에 나는 다시 한번 놀라 쟁반을 떨구며 뒤로 물러섰다. 그는 자신의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히 눕힌 채 나를 보며 물었다.

-내 모습이 보이우?
-..네.
-이상하네.
-뭐가..요.

나도 모르게 존댓말로 그의 말에 답하고 나자 그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눕히며 말했다.

-사람은 원래 우릴 볼 수 없는 건데..
  어떻게 보고 있는 거지?
-당신은..뭐죠?
-'뭐죠'가 아니라 '누구죠' 겠지.
  내가 당신보고 그냥 인간이라고 하면
  기분 나쁠 거 아냐. 이름을 물어야지.
-당신은..누구죠?

그는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죠메넌 백작.
-백작?

그는 자신의 허름한 옷차림을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느꼈는지 손을 설레질쳤다.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는 마슈.
  도박하다 집 날려먹기 전만 해도
  명품 브랜드로 쫙 빼입고 다녔어.
-아니 내가 궁금한 것은..
-응?
-당신 정체가 뭐고
  왜 우리집 싱크대에 앉아있죠?
-정체라..

그는 피시식 웃었다.

-어릴 때 동화 안봤어?
  딱 보면 삘이 오지 않아?

그는 나의 무표정한 눈을 보더니 쳇하는 외마디를 냈다.

-하긴 요즘 누가 동화를 봐야지..
  가슴 큰 미소녀 나오는 18금 망가나
  보고 티슈나 낭비하니까 상상력이
  생길 리가 있나.
-아, 아니..저..꼭 그렇지 만은..

머뭇거리는 나를 보던 그는 쓴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더니 말했다.

-내 입으로 내가 악마다!
  라고 말해야 직성이 풀려?
-악마?
-응.
-..동화를 봐도 악마인 줄은
  모를 것 같은데요.
-체격으로 판단하지는 마.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입술을 구기다가 조용히 말했다. 점점 그의 옷 색깔이 붉은 빛을 띄우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그런데 여기 왜 왔죠?
-아까 말했잖아.
  쉬고 있어.

나는 그 말에 마땅히 할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계속 쉬세요.
-싫어.

갑자기 단호하게 대답하며 그가 일어섰다. 일어섰음에도 손바닥 한 뼘 정도 될 것 같았다.

-이제 놀아야지.

나는 그의 머리 양쪽에 뿔이 나 있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앙증맞은 그것을 보며 쥐뿔이라는 것이 있다면 저런 느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눈동자를 붉게 빛내며 힘을 주자 체크무늬 남방이 뜯어지며 날개가 펼쳐졌다. 어릴적 학교 뒷산에서 봤던 박쥐의 날개보다 더 작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웃었다. 웃고 있는 내 모습을 보던 그도 씨익하고 웃었다. 그의 썩은 미소와 동시에 나는 웃음이 멈추었다.

-불꽃!

갑자기 그의 목에서 나오는 소리가 THX 인증 서라운드 시스템처럼 집안 전체를 울렸다. 그가 앞으로 내민 손바닥에서 불티나 라이터처럼 불꽃이 튀겼다.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 등 뒷쪽 벽의 도배지가 담배를 비벼끄며 내리그은 듯이 타들어가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나는 그를 다시 보았다. 죠메넌 백작은 말했다.

-다음에는 얼굴이다.

그가 다시 손을 뻗었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피했다. 오른쪽 귓불 옆에 뜨거운 것이 스쳤다. 벽은 또다시 타들어갔다. 내가 그만하라고 손을 뻗을 때 그는 양손을 휘저으며 외쳤다.

-불꽃!
  무한한 불꽃!

나는 뻗으려던 손을 움츠려 얼굴을 가리고 몸을 숙였다. 조그마한 불꽃은 직선 혹은 포물선을 그리며 계속해서 날아왔다. 벽지를 그슬리고 장판에 구멍을 만들었다. 하지만 불꽃의 목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백작은 집요하게 나의 얼굴을 노리고 있었다. 얼굴을 가린 손바닥과 손등이 덴 듯 화끈거리는 느낌에 나는 옆으로 구르다시피 창고로 쓰는 작은 방으로 피했다. 죠메넌은 작은 날개를 빠르게 펄럭이며 따라 들어왔다.

-불꽃놀이는 별로 재미없지?

그는 말했다. 나는 입술을 일그리며 손을 뻗어 죠메넌을 잡으려 했지만 날개를 이용해서 이리저리 피하는 그를 잡기란 힘들었다. 그가 방향을 급선회한다 싶더니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그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고통과 함께 그를 찾아내었다. 언제 꺼내었는지 책상 위의 필통에 있던 펜을 들고 양말도 신지 않은 발등을 찔러대고 있는 황급히 내리치려 했지만 그가 옆으로 물러나면서 내 손은 발등에 박혀있는 펜촉만 더 깊게 밀어넣었다. 그는 다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중저음 우퍼로 울리는 듯 키득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나는 외쳤다.

-왜 나를 괴롭히는 거야!
-저런..진정해.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악마가 이유를 가지고 괴롭히면
  인간하고 다를 게 없잖아?

그 말과 함께 옷걸이가 부메랑처럼 회전하며 날아왔다. 옷걸이 끝이 내 눈으로 향하는 것을 가까스로 피하며 나는 일어났다. 그리고 옷걸이가 걸려있던 간이 옷장을 헤집었다. 몇벌 안되는 옷이 허공을 날으는 동안 그런 나를 비웃는 듯 그는 커터칼로 내 왼쪽 어깨쭉지를 푹 찌르고 아래로 그었다. 등이 축축히 젖는 것을 느끼며 나는 어깨를 엉거주춤하게 움켜쥐고 비명질렀다. 몸을 비틀며 칼을 뽑으려는 데 그가 내 얼굴 앞으로 다가왔다.웃고 있는 그의 입 안에 날카로운 이빨들이 보였다. 그에게 깨물린 코에서 너덜거리는 살점들이 만져졌다. 나는 얼굴을 가리며 쫓기듯 욕실로 들어와서 황급히 문을 닫았다. 내가 문에 등을 기댄 채 방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을 아는지 그는 키득거리며 말했다.

-그 문 너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하지 않아?
  아주 재밌는 것을 해보려고
  하는데..

그의 목소리가 조용해졌다. 그의 목소리가 안들리는 것은 목소리가 들릴 때보다 불안하다. 그도 그 사실을 잘 아는 듯 했다. 문 밖에 나가면 또다시 공격을 당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곳이 안전하다고 볼 수 만도 없다. 그가 진짜 악마라면,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내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생각하던 나는 문을 열어보기로 했다. 나는 방문을 조그맣게 열고 틈새로 밖을 보았다. 끊어져 있는 가스관, 공중에 떠서 손 끝을 비비고 있는 백작의 모습. 그는 내가 문 틈새로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나를 주시하며 휘파람을 부는 그를 보다가 나는 본능적으로 문 손잡이를 꼭 움켜쥐었다.
백작이 손끝을 튀기자, 불꽃을 일어났다. 그리고 가스는 그 불꽃에 반응했다. 나는 문을 잡은 채 뒤로 날아가서 허리가 반 접힌채 욕조에 눕혀졌다. 천정을 타고 창문으로 나아가는 불꽃 중 일부가 문 윗쪽을 태우며 열기가 전해졌다. 가스의 압력과 함께 날아온 식칼과 유리 접시 조각 등이 방 문 위를 찍어누르듯 박혀 들어왔다. 천정을 타고 흐르는 가스에 깨져나가는 타일조각들이 욕조 옆 틈새로 쏟아져 들어왔다. 문과 욕조로 이루어진 조그마한 공간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는 내 귀에 그의 웃음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문을 집어던졌다. 양손은 둘 다 붉게 부어서 감각이 없었다. 욕실에서 비틀거리며 나와서 보니 부엌은 제 모습이 아니었고 창문이 제대로 열려 있지 않았던 큰방은 아직도 불타고 있었다.

-체격으로 판단하지 말라니까..

그는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그가 양손으로 들고 있는 이쑤시개를 보던 나는 힘없이 풀리는 다리를 느끼며 주저앉았다. 그가 이쑤시개를 투창하는 포즈로 들고 나에게 던지려고 할 때,
또 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백작님. 어디 계세요?

그는 목소리를 듣더니 쳇하는 외마디와 함께 이쑤시개를 내던지고 열로 꾸겨져 있는 싱크대 모서리에 주저앉았다. 곧 이어 비슷하게 생긴, 하얀 의사 가운을 입은 자가 날개를 펄럭이며 나타났다. 의사 가운을 입은 자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나는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싱크대 모서리에 있는 그의 옆에 앉더니 말했다.

-백작님. 주사맞을 시간이
  지났습니다.
-난 힘이 없어..너무 연약해.
-네에, 알고 있습니다.
  어서 돌아가시죠.
  제가 부축해드릴께요.

그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힘없이 손을 올리며 말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들 좀
  설명해줘요.

내 질문에 의사 가운을 입은 자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우리 모습이 보여요?
-그런 이야기는 넘어가고..
  당신들 도대체 뭐하는 거죠?
-보면 알잖아요.

의사 가운을 입은 자는 말했다.

-요정이에요.
-요정?
-네, 동화 안봤어요?
  이분은 엄지나라 죠메넌 백작님.
  저는 주치의 죠그맨입니다.
-악마..가 아니고?

죠그맨은 피식 웃었다.

-요정은 꼭 나비날개 달고 비오는 날
  광년이처럼 웃고 다녀야 하나요?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아까 저 쪽이 악마라고.
-아..

죠그맨은 내 손가락이 가르키는 방향을 따라 옆에 앉아있는 백작을 보더니 말했다.

-백작님은 원래 농담 잘하세요.
-농담 문제가 아니잖아!

나도 모르게 외치며 일어섰다.

-집안 꼴 안보여?
  이렇게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연극하는 거야!

죠그맨은 내 말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했다.

-설마, 당신 집의 지저분함을
  요정 탓으로 돌리는 거에요?
-탓으로 돌리는 게 아니라
  백작인지 백수인지가 이렇게
  해놓았다니까!

죠그맨은 백작을 보았다. 그는 아까 집안을 파괴할 때는 잊었다는 듯이 퀭한 눈으로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죠그맨은 그를 부축해서 일으켰다.

-말도 안되요.

그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진 나를 두고 죠그맨은 아까까지 나를 죽이려 하던 악마를 데리고 날아올랐다.

-우리는..

죠그맨은 인사 대용이라는 듯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인간도 아닌데 뭣하러
  인간을 괴롭히겠어요?

작은방 창문이 있었던 자리에 넓게 뚫려있는 구멍으로 날아간 그들은 금방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나는 밖에서 들어오는 더운 바람을 얼굴로 맞으며 굳은 듯 서 있었다. 내 집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누가 신고했는지 멀리서 소방차 사이렌이 들려왔다. 그 사이렌이 이 집과는 무관한 다른 방향으로 가는 소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 나는 부엌 바닥에 떨어져 있는 냄비를 들어 큰방 침대에 남아있는 불씨 위에 얹고 라면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요정을 믿지 않는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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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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