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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냥 과회상(過回想)

2007.04.28 00:3404.28

과회상(過回想) -Reminiscence

 

 


As soon as they're out of sight, you are out of their minds.
고양이가 집을 나가면 그것은 당신이 그놈한테서 잊혀졌다는 뜻이다.
- Walter De La Mare

 

 # 1.
 멍청한 작가가 잔뜩 폼을 잡고 슬럼프의 바다에 빠지던 날 말야, 하필 운 없는 고양이 별 하나가 고양이 사냥꾼의 별사탕에 맞아 긴 꼬리를 달고 지상으로 떨어지는 장엄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 전 우주 고양이 네트워크를 통해 생중계되는 사고가 벌어지고 말았지.
 그 운 없는 고양이별에 대한 애도가 고양이 네트워크를 통해 쇄도하고, 우유 투입구를 통해 정원을 돌아다니기엔 너무 살이 쪄 버린 늙은 에도가와마저 고양이용 쇠고기 간식 캔을 반이나 남길 정도로 충격을 받고 말았단 말야. 동네 사거리에서 고양이 두 마리가 모이기만 하면 그 이야기를 나누며 삼십 년 만에 발생한 그 불행한 고양이별을 걱정했단다.


 「……잠깐 잠깐, 멋대로 이야기하면서 자상한 할아버지인 척 하는 당신, 누구야?」


 # 2.
 친애하는 전 우주 고양이 네트워크 시청자 여러분, 멍청한데다 생명체를 향한 넘치는 박애주의 따윈 엿 바꿔 먹은 작가들은 세상에 수도 없이 많습니다. 거기다, 요즘 인간들은 컴퓨터니 뭐니의 등장으로 인해 한 페이지의 시시콜콜한 편지글을 써 올리고도 작가라고 자칭할 수 있는 시대를 만들어 버렸단 말입니다. 참으로 고양이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계속 제기되어 오는 문제입니다만 그 인간이란 종자들은 과연 다른 생명체들이 우주에, 아니 하다못해 자기 집 담벼락 옆에 살고 있다는 걸 인식이나 하는 걸까요? 여하간에, 슬럼프의 바다에 떨어져버린 고양이별은 아름다운 털을 가진 자랑스러운 고양이 일족이 되지 못하고, 가장 불행한 희라기-마법사가 되어서 세상을 떠돌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 바보 같은 인간들의 소원이나 들어주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이 집 저 집의 쇠창살을 두드리고 방충망에 손톱을 꽂아야 하는 희라기의 탄생을 다 함께 애도합시다.
 묵념!


 # 3.
 「그러니 조금쯤 책임감을 통감한다면 말야, 멍청한 삼류 작가씨. 당신 창가에 앉아 말랑말랑한 분홍색 발바닥을 핥는 한 마리의 고양이를 내게 주지 않겠어?
 우리 희라기-마법사들이 꿈꾸는 건 언제나 가장 우아한 한 마리의 고양이. 쓰레기통을 뒤적이고 인간들의 원성에 고달파 살과 피가 말라가도 긍지를 잃지 않는 고양이의 족속이 되는 거라네. 오늘도 내일도 날개를 펼치고 여러 숙녀들의 창을 두드리지. 의심과 추격을 피해 이렇게 늦은 시간에만 말야.」
 「그게, 멋대로 숙녀의 창가에 시커먼 엉덩이를 들이 밀 핑계거리로 합당하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포크로 찔러 주기 전에 잽싸게 밤공기 속으로 사라져 주세요. 감히 미도리 여자 앞에서 희라기 핑계를 대다니, 피라도 빨리고 싶은 모양이군? 쇼크사로 천국 구경을 하고 싶은가요?」
 「이런, 겨우 한 시간 지각일 뿐이잖아. 파티에 데려가지 못한 건 전적으로 그 빌어먹을 놈의 상사, 우리 팀의 신임 팀장 때문이라구! 젠장, 한갓 인간이 미도리를 상대로 농담 한 번 못한다는 법 있나, 있어? 그것도 연인 사이에서는 적절한 농담은…… 아아, 잘못했어. 이거야 원, 우리 귀여운 미도리 일족의 아가씨, 이 내가 스킨 냄새나는 목을 선선히 내 줘야 화가 풀릴 기세로군.」


 # 4.
 하수구 속에 모여 앉은 이종(異種)들이 서로의 살을 문지르는 시간이 있다. 도시의 환락은 붉고 푸른 한 아름의 네온사인으로 생산되는 것, 지하의 낮고 음울한 공장 기계를 돌리며 오 촉 전구가 달린 천장에 고개와 등을 대인 이종들이 여기에 있다.
 「오십칠 미터짜리 네온사인이 필요하다는 거야.」
 「어째서 오십 칠 미터지? 육십 삼 미터 정도는 요즘 기본이야, 오십칠 미터 따위 보이지도 않을 걸?」
 「그야 우리가 알바는 아니지. 최소한 스물다섯 가지 색을 넣어서 일 초에 열 번은 깜박이게 해야 한다고 입이 부르트게 말해 보았자, 그런 소심한 치들은 안돼. 안된다고. 공격적인 마케팅이란 게 뭔지 도무지 모른다니까!」
 「……이쪽 장사도 만만하지 않다는 걸 아셔야지.」


 꼭 하루치의 대화를 소비하고 돈을 세듯 네온사인 마디와 마디를 세어 하수구의 길쭉한 틈으로 밀어 올린다. 한 뼘 한 뼘 네온사인은 지상의 빛을 만나는 순간 높은 웃음소리를 터뜨리는 미친 여자처럼 요란하게 반짝이며 지상의 별이 된다. 지옥과 천국을 망각하고 지옥과 천국을 뒤엎으며 심장이 쿵덕거리는 한 순간조차 타인에게 허비하지 않는, 이, 더없이 충실한 미혹의 시간이 왔다. 인간의 몰입, 황홀경의 하이힐이 냄새나는 맨홀 뚜껑을 치근덕거린다. 사도 마조히즘에 몰입한 이처럼 구두 뒤축이 높아질수록 번들거리는 이마를 들이 미는 일족이라 해도, 여기서는 결코 이를 드러내고는 웃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 최고의 발명품은 치약, 그리고 칫솔이라네.」
 그는 이 거대한 지하 공장의 사장.
 위대할 손 그 이름 펭, 귄, 맨! 이라고 말한대서 믿어 버리는 착한 어린이, 이제 그만, 텔레토비들도 거대한 그들의 방공호로 돌아갈 시간이랍니다. 한 번 더, 같은 건 세상에 없어! 터지는 건 메가 잭팟! 일 이 억에 연연하지 말라구, 인간 세상 사느니 한 순간과 같은 거야. 불면 깃털 날리듯 사라지고 말지. 허망한 거라, 이 말씀이지!
 「흡혈에도 고급화 전략이 필요해. 멸치에도 디에이치에이를 코팅해 줘야 하는 세상에 흡혈이라고 해서 안일한 생각을 가지면 못써. 범죄도 한 탕, 일 억, 치사하게 그까짓 일 이 백에 손을 대다 은팔찌를 찼다 하면 뉴스거리도 안 된다네. 기껏 휴지통 따위에 실리고 싶어? 이왕이면 칼라, 이왕이면 아홉 시 뉴스 메인에 한 컷, 이왕이면 네놈을 잡은 경찰관이 일 이 계급 특진쯤은 할 수 있도록 크게 한 탕 터뜨리란 말야! 세상은 명품, 명품, 브랜드의 힘! 알아? 알겠어? 이를테면 말이지, 한 번 물리면 우리들 이의 아로나민실버멘탈홀리데이선데베스킨라빈스게보린에 의해 혈액순환이 잘 된다거나, 혹은 살이 빠진다고 친절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네. 우리는 고객 관리도 철저하고, 사후 애프터 서비스도 확실하다구. 도시의 환락을 만들어 주는 게 누구지? 바로 우리, 우리들이란 말이다. 천국과 지옥, 사후의 모든 세상을 봉인하고 하나의 출구도 없이 별빛을 죄다 지워준 것이 우리란 말야. 멍청한 희라기들 따위 신경 쓸 필요란 없어. 인간들은 그 놈들을 잊었지. 고양이가 되지 못해 안달이 난 못난 놈들 말야. 누가 그깟 놈들에게 물리고 싶어 하지? 누가 물게 해 주면 소원을 들어 준다며 궁상스레 쇠창살 쳐진 창문 바깥에서 잉잉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단 말야?」


 거대한 지하 공장을 돌며, 허리를 펴지 못하고 네온사인 제작에 골몰한 수백 수천의 이종들을 향해 그는 외친다. 이종들은 언젠가는 그와 같은 흡혈귀 일족이 되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끽끽댄다. 떨어진 별들은 이런 곳에 모이는 일도 있는 법이다. 고양이가 되기란 쉽지 않다. 고양이들이라 해도, 분명, 이곳에 모여든다. 하얗고 긍지 넘치는 뒷다리를 추적추적 하수구 오수에 담그고 지상의 네온사인 불빛이 반사되는 이 지하 공장으로 모여들고 또 모여든다. 보석에게 이름을 빌려 주었던 빛나는 눈동자에 피로가 어리어, 그와 그녀들은 더 이상 고양이의 긍지를 지키는 거룩한 숙명을 연모하지 않는다. 의무는 방기되고, 이내, 팽개쳐 진다.
 의무 방기는 눈부시고도 건조하며, 그러므로 기술이 필요한 작업이 된다.
 「……이쪽 장사도 만만하지 않다는 걸 아셔야지.」


 # 5.
 “그 고양이, 도둑고양이지?”
 처음에는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을 만큼 작고 애처롭게 생긴 녀석이었다. 벌꿀 색 얼룩이 등을 가득 덮고 있고 눈과 입 쪽에도 줄무늬와 얼룩이 있었다. 황록색을 띄웠다가 어둠이 깔리고 나면 소의 눈처럼 새카맣게 반짝거리는, 튀어나올 듯 커다란 눈을 가지고 있었다. 낚시 줄로 쓸 흰 나일론실처럼 광택이 나는 반질반질한 발바닥 털을 간질이면 골프채 모양으로 발을 옹크리며 힘을 다해 야옹야옹 울어댔다. 폭신폭신한, 한 번도 카펫 이외의 땅을 디딘 일 없는 것처럼 여리고 보드라운 분홍빛 발바닥이라니. 그 분홍빛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연민으로 가득 차게 만드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처음 물들기 시작하는 진달래 빛처럼, 누군가 안타까운 선홍색 피를 방울방울 쏟아 놓은 것처럼, 꼭 그렇게 박혀 있는 그 폭신한 분홍 젤리. 첫 생리가 터졌을 때처럼 비밀스러운, 아름다운, 풋내 나는, 그 발바닥을 향해 여자가 세모눈을 뜨고 입술을 쫑긋댔다.
 그건, 분명 도둑고양이야. 귀여운 강아지도 얼마든지 있는데 어째서 그딴 걸 가져다 기르지? 저리 치워, 우리 햄스터를 물어 가 버릴 지도 몰라.
 반투명한 사각의 상자 안에는 고르게 찢은 젖빛 휴지들이 가득했다. 햄스터는 잘게 썬 사과와 콩들 사이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바늘 끝처럼 자그맣고 고운 손가락을 갈퀴처럼 펴고, 햄스터는 앙증맞은 눈을 깜박이며 상자에 기댔다. 햄스터가 든 상자를 품에 소중히 안은 그녀의 딸이 고양이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겁을 준다. 저 고양이가 우리 작은 햄스터를 물어 뜯을 것이며, 그 야생의 본능이 기분 나쁘고도 사나운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햄스터는 갈기갈기 찢겨져 저녁 밥상에 올라갈 생고기마냥 새빨갛게 흐트러질 거라고. 그녀의 딸은 상자를 등 뒤로 감춘다. 회색과 검정색이 뒤섞인 아스팔트 색 계단을 밟고 그녀의 딸은 앞장서서 뛰어 간다.


 # 6.
 전 우주 고양이 네트워크 시청자 여러분, 고양이별이 안전하게 고양이로 태어나는 비율이 엄청나게 급감하고 있습니다. 현재 연방수사대에서 여러 루트를 통해 고양이 별들이 축복 받은 탄생에 이르지 못하는 원인을 추적하고 있습니다만, 도무지 수사의 폭이 좁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고양이에 대한 애정은 아시는 바와 같이 높지 않고 차라리 개로 태어나거나 희소가치가 높은 쌍두뱀으로 태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고양이 별이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에도가와는 주인이 자물쇠를 여는 소리에 뚱뚱한 몸을 일으켜 전 우주 고양이 네트워크 방송을 끄고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큰일이군. 삼십 년 만에 희라기가 태어난 것도 불길한데 누군가 고양이별을 빼돌리고 있다니. 에도가와는 한 파운드의 걱정을 하면서도 코를 들이대고 주인이 내 놓은 새 간식 캔을 살핀다. 역시 아스쿠가 최고야, 지난 번의 위스카스에 비길 게 아니지, 그건 정말 도무지 먹을 수가 없다니까. 에도가와는 주억거리며 아스쿠의 참치 캔에 고개를 박았다.
 희라기, 희라기 따위 아무려면 어때!


 # 7.
 잿빛 머리칼에 검은 빌로도 망토를 갖춰 입은 희라기 한 마리가 제비처럼 날아든다.
 「헤이, 아가씨, 문 좀 열어봐.」


 # 8.
 「꿈도 야무지군.」
 한심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며 희라기는 창틀에 주저앉는다. 여고생은 그저, 피터팬을 기다리는 웬디처럼 문을 열어 두고 잠을 자는 귀엽고 착한 아가씨를 만났으니 당신에게는 참 다행이지 않느냐고 물었을 뿐인데.
 이 잿빛 머리의 희라기가 모닥불에 달려드는 날벌레처럼 날아든 것은 몇 주 전, 공부하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는 절대적 필요성에 따라 중간고사 준비를 하던 밤이었다. 여고생은 늘어진 수험생 뱃살이 드러나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는 관조의 자세로 무릎 나온 츄리닝과 몸매 드러나는 파란색 중학교 체육복을 껴입었다. 옆이 터져 노란 스펀지가 튀어 나온 의자에 한쪽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복까지 닥닥 긁어 내보내려는 양 맹렬하고 끈덕지게 다리를 달달달 떨었다. 창문을 열었지만 방충망도 남아있겠다 방충망 바깥엔 굵은 철창도 쳤겠다, 아니 그런 걸 다 차치하고라도 어느 정신 나간 도둑이 훤히 불 밝힌 집을 털까, 하고 여고생은 생각했던 것이다.
 「이봐, 사람이 있을 때 터는 놈들도 있어. 그걸 강도라고 하지.」
 그리고, 희라기가 날아들었다. 그림자 잡으러 달려든 피터팬처럼, 아니, 피터팬이라고 봐주기엔 대단히 날렵하지 못한 동작에 칙칙하기 짝이 없는 차림새로 날아들었다. 여고생은 비명을 지를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희라기는 반가워야 할지 황당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여고생은 뒤로 질끈 당겨 묶은 꽁지머리의 고무줄 주위를 연필 뒤쪽으로 득득 긁어댔다. 머리를 긁을까요, 미스터 소오오온? 오백 년 동안 머리를 감지 안았다면, 떡이 된 머리로도 페로몬을 폴폴 풍기는 어느 유명한 레인저 왕자님보다 더 심하지 않을까요, 뭐, 일행이 괜찮다면야 상관없지만.
 ……조금쯤 놀라 주지 그래?
 희라기는 그렇게 말했다. 여고생은 투철한 탐구심을 발휘하듯 어째서냐고 물었다.
 어째서 놀라야 하는데? 넌 쇠창살 바깥에 있잖아.
 희라기는 고심하는 표정을 짓더니 싱긋, 창살을 들어 올렸다. 이야, 육백만 불의 사나이! 반가워요, 아직 돌아가시지 않았네요? 여고생은 반갑게 소리쳤다. 희라기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저, 부실공사의 흔적이랄까. 그래도 불 나면 도망갈 때 참 좋을 거야.
 부실공사 하나에도 그런 깊고 긍정적인 면이 존재하는 법이지. 여고생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감탄했다. 그야말로 삶의 이면이로군. 소시민의 애환.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나서, 그런 의미에서, 그, 희라기는, 방충망에 손톱을 꽂고 쭉 소리가 나게 찢어 내린 후 여고생의 방으로 들어섰다. 여고생은 손톱으로 찢어져 나갈 정도의 방충망이라면 어째서 자신이 잠을 이기지 못해 머리를 들이 밀었을 때는 출렁, 뱃살 흔들리는 소리를 내며 멀쩡하게 버텨냈던 것인가 고민했다.
 자, 나는 희라기의 일족, 불행한 마법사라네. 아가씨의 별로 아까울 것 없는 목 한 번만 물게 해 주면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네.


 「……잠깐, 무슨 소원이든? 대체 그거 어떤 원리야?」


 # 9.
 오늘도 일백 두 마리의 고양이들이 고양이의 모습을 버리기 위해 지하 공장을 찾아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백구십칠마리의 고양이가 지금 이 순간에도 우주를 떠나고 있다는 것은, 더욱 큰 비극입니다. 친애하는 전 우주 고양이 네트워크 시청자 여러분, 지금 고양이들은 중대한 역사의 기로에 봉착해 있는 것입니다. 고양이들의 이 위기에는 토요일이나 일요일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은행 문이 닫힌 주말이니까 은행이 망하지 않겠지. 월요일엔 돈을 찾을 거야. 천만의 말씀, 고양이들의 위기! 고양이들의 위기! 이 위기에는 주말도 없습니다. 공휴일도 없습니다. 언제 우리의 이 위기가 고양이들을 덮쳐 멸망으로 이끌어갈 것인지 그 누구도 모릅니다. 얼마 전 한 명의 희라기가 태어났다는 비보는 우리 고양이들을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으며, 이종 생물체들을 착취하여 인간의 향락을 지어내는 엄청난 지하 공장이 대규모로 운영되고 있다는 미확인 제보가 신빙성을 얻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친애하는 전 우주 고양이 네트워…….
 에도가와는 리모컨을 껐다. 주인 여자가 고양이용 미용 빗을 가지고 와 긴 털을 빗겨 주었다. 오늘 저녁 메뉴는 뭐냐. 이제 연어 캔은 질렸다고! 마따따비 가루 따위로 고양이를 흥분시켜 즐겁게 관람할 생각 따위 버리란 말이다. 안일한 주인 같으니라고. 한 바퀴 뛰고 나면 얼마나 숨이 차는데.


 # 10.
 ……고양이네.
 희라기는 반가워했다. 침대 위에 구겨져 있는 터키 블루 이불 사이에서 모래 언덕에 파묻힌 순례자처럼 방황하며, 고양이는 희라기를 향해 달려왔다. 희라기는 창백한 달과 같은 손을 뻗어 고양이를 들어 올렸다.
 우리 희라기들은 말이지, 고양이가 되는 것이 삶의 목표라네. 세상 어느 구름보다 보드랍고 세상 어느 케이크보다 달콤한 고양이가 되어 사뿐사뿐 담장 위를 걸을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지불할 태세가 되어 있지. 하지만 목을 내 놓아도 그건 이루어지기 힘든 소원, 설사 번개를 일흔 일곱 번 연달아 맞는다 해도 이루어지지 않아.
 수험생 소녀는 연필을 입에 문 채 희라기의 손 위에서 빼액빼액 시끄럽게 울어대는 고양이를 받아 안았다. 희라기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수험생 소녀는 바둥바둥 작은 팔을 흔드는 고양이를 두 손으로 어르며 희라기를 향해 말했다.
 다른 마법사를 찾아서 목을 내주고 소원을 들어 달라고 하면요? 혹은, 내가 당신을 위해 소원을 빌어 준다면?
 희라기는 웃었다.
 위험한 생각이군, 어린 아가씨. 첫 번째 경우는 불가능하고 두 번째 경우는, 아마 아가씨가 그렇게 행할 수 없을 거야.
 어째서 그럴 수 없다는 말이지요?
 그건 나도 설명할 수 없어. 고양이별에서 태어난 희라기의 규칙에 위배되거든. 궁금해 하지 말지어다, 인간의 아이여.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인다네. 인간의 호기심도 고양이의 호기심만큼이나, 대개 좋지 않은 결말을 가져오거든.


 # 11.
 역시, 도둑고양이였어. 이젠 돌아온다 해도 다시 기를 수 없을걸. 바깥의 맛을 알아 버린 녀석 따위 품고 있어서 뭣해?
 두꺼운 옷을 입고 랜턴을 들었다. 이웃집 여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화단과 화단 사이를 헤치고 다녔다. 없다. 이제 고양이는 없다.
 그렇게 커다란 고양이라니, 벌써 도둑고양이가 다 되었다 했어. 나갈 만 하니까 나간 거지. 고양이가 다 그렇다니까.
 없다. 이제 고양이는 없다. 베란다에 캥거루처럼 앉아 목을 빼고 여기저기를 보는 고양이가 없다. 안으로 들이치는 눈을 잡기 위해 뒤쪽으로 고개를 젖히다 넘어지는 고양이가 없다. 이불 사이로 고개를 박고 숨었다고 생각하던, 타조처럼 멍청한 그 고양이가 없다. 귀를 대면 꾸륵꾸륵 소리가 나는 배와, 쓰다듬으면 보드레한 털로 뒤덮인 하얀 넓적다리와 쉴 새 없이 바닥을 탁탁 쳐 대던 긴 꼬리와, 먹이를 먹다 지저분해진 턱을 가진 고양이가 없다. 토끼처럼 커다란 귀를 뒤로 젖히고 애교를 부리던 고양이가 없다. 때리려고 손을 들어 올리면 잽싸게 귀를 뒤집고 천방지방 도망치던 고양이가 없다. 한 번 자른 후 다시 길게 자라 피아노 줄처럼 팽팽한 긴 수염, 긴 눈썹, 입을 다물면 웃는 모양이 되던 고양이가 없다. 눈을 감고 스핑크스 모양으로 곁에 와 기대 잠들던 고양이가, 커튼 뒤에 숨어있다 달려 나와 종아리에 매달리던 고양이가, 이제는 없다. 볼 수 없다. 안을 수 없다. 만져볼 수 없다. 식구들의 등에 두 다리를 가져다 대는 장난도, 비닐봉지를 던져 놓고 들어가 몸을 말고 잠드는 걸 엎드려서 지켜볼 수도 없다. 핸드폰을 만지고 있으면 달랑거리는 장식을 보고 달려 오르는 고양이가 이제는 없다. 식사 시간에 빈 의자에 와 앉아 젓가락이 오가는 대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고양이가, 밤마다 울어대 잠을 깨우고는 소파 구석으로 들어가 숨는 그 고양이가 없다. 이제 어디서도 그, 야옹, 하는 높고 가는 소리와 드러누워 구르던 모습을 볼 수 없다. 옷에 고양이털이 붙어 화를 낼 일도 없고 아침이면 어서 일어나라고 달려 들어와 이불 속에서 팔을 물어뜯는 통에 짜증을 낼 일도 없다. 색이 변한 사과 빛깔에 벌꿀색을 한 스푼 섞은 것 같은 얼룩을 가진, 커다란, 도둑 고양이 같다고 너나할 것 없이 무서워하던, 그 고양이는 이제 여기에 없다. 없어져 버렸다. 버린 적도 없는데, 그는 영영 없어져 버렸다. 마치 날아간 것처럼 열린 현관문 사이로 빠져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 12.
 ……금방 돌아올 줄 알았어. 이따금 현관문을 열면 나가곤 했거든. 나가서는, 멀리 가지 못하고 아래층 계단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어. 문을 닫으면 문 앞에 와서 야옹야옹 시끄럽게 울어댔어.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어.
 이제 밤늦게 돌아왔을 때 현관 앞에 숨어 있다 튀어 나오는 녀석도, 밤늦게 불을 켜고 있으면 달려와서 다리에 매달리는 녀석도 없어. 무릎에 앉혀 놓고 낮잠을 잘 수도 없어. 품에 안으면 두 앞발을 내밀어 팔뚝을 휘감던 녀석도, 엎드려 있으면 등에 올라와 노곤하게 늘어져 잠이 들 녀석도 없어. 욕실에 들어와 세면기 위에서 물을 틀어 달라고 애웅애웅 울어 대는 소릴 듣지 않아도 돼. 화장실을 치우는 문제로 싸우지 않아도 되고, 잊어버리고 밥을 주지 않았다고 귀찮게 구는 녀석도 없어.
 「목을 주면, 소원을 들어 줄게.」
 「그래, 네 말이 맞았어. 널 위한 소원을 빌 수가 없어.」
 「괜찮아. 희라기는 그런 거 신경 안 써. 여하간 네 피를 빨 수 있게 해 주면 그걸로 좋은 거니까.」


 # 13.
 고양이가 집을 나갔다는 것은 당신이 그 놈에게 잊혀졌다는 뜻이다.


 # 14.
 벌꿀 색의 포근하고 폭신폭신한 고양이는 담벼락 위를 걷고 있을 거야.
 수험생 소녀는 힘없이 말했다. 그녀의 창가에는 웃는 입과 웃는 눈을 가진 거대한 체셔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수험생은 고양이를 바라보지 않았다.
 이봐, 기껏 소원을 들어 주었는데 한 번쯤 시선을 줘야지.
 아직은 희라기 목소리네.
 그렇지. 아직은 고양이화가 다 진행되지 않았거든. 지금은 머리와 꼬리, 손바닥 정도지만 곧 폭신한 분홍 젤리도 생기고 폭신폭신한 털과 넓적다리도 생길 거야. 꼬리에 아직 듬성듬성한 이 털도 훨씬 조밀하게 돋을 테고 말야.
 응.


 # 15.
 수험생 소녀는 하수구 뚜껑 위를 걸었다. 바로 앞서 가던 여자가 높은 굽이 하수구 구멍에 끼어 다리를 접질렸다. 소녀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 16.
 「이봐, 이제 그만 작별할 시간이야.」


 # 17.
 들었어요? 희라기 하나가 결국 꿈을 이루었다는 군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길고양이가 되었답니다. 검은색과 잿빛의 줄무늬를 가진 코리아 숏헤어 종 고양이랍니다. 참치회처럼 얇고 습기가 많은 혀와 희라기의 자랑인 우유색 치아, 쭉 뻗은 네 다리와 혀를 대보고 싶을 정도로 달콤한 젤리 빛 발바닥을 가지게 되었다는 거예요.
 이것으로, 나도 약간은 희망이 생긴 기분이에요.
 「아니, 잠깐, 달링. 당신, 미도리 일족을 포기하고 고양이가 되는 게 꿈이었어? 쓰레기통을 뒤지고 쓰레기 봉투의 옆구리를 찢다 약을 먹고 쓰러지기도 하는 그 고양이. 한 밤 담장 곁에 웅크리고 있다 더럽고 추접한 몰골로 사라지는 몸이 퉁퉁 부은 고양이가 되는 게 꿈이었냔 말야. 나와의 교제는, 나와의 미래는 뭐지? 앞으로 생길 우리 아이들은 뭐가 되는 거야?」
 어머나, 어떻게 미도리 여자에게 아이를 기대했던 거지요? 미도리들은 인간과 아이를 만들지 않아요. 미도리의 삶을 포기한 종자만이 인간과 가약을 맺지요.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미도리 일족의 기억을 가지고 태어나지도, 미도리의 삶을 살지도 않아요. 뭐어, 그런 것도 나쁘지는 않겠죠. 열성 유전을 몇 만 년 거듭하고 있는 인간들의 유전자엔 요정이나 여우 말고 미도리가 좀 섞여 드는 게 좋은 걸지도. 그러면 언젠가는 인간들도 그 멍청한 짓거리들을 조금쯤 관두고 진화란 걸 하게 될지도.
 「여하간, 고양이가 되는 게 꿈이었냐고!」
 고양이는 아름다운 동물이기는 하지요. 하지만 이봐요, 내 꿈은 그게 아니에요!


 # 18.
 이종 생물체들이 꿈을 키워가는 터전을 엿보게 된 걸 축하하네, 인간. 어째서 우리를 볼 수 있는 건지는 모르지만, 내 모습을 보고도 놀라지 않다니 경의를 표한다네. 무얼 찾고 있지? 여기, 담뱃불에 지져져 애꾸가 된 이구아나? 배가 갈린 비단뱀이나 일곱 종류와 교배된 거미? 귀뚜라미? 다리 부러진 족제비나 펭귄, 원숭이와 침팬지? 다른 것도 얼마든지 있어. 다만 아마존 쪽에는 분점이 있어서 그쪽 친구들은 없다네.
 ……벌꿀 색 얼룩이 있는 고양이에요. 빛바랜 귤 색깔과 오래된 사과 과육 색깔 얼룩 말예요. 아주 평범한 고양이랍니다. 하지만 그 고양이는…… 그 고양이는, 네, 제가 보면 알아볼 수 있어요! 꼭! 다리가 부러졌다 해도, 눈이 보이지 않게 된다 해도 전 알아볼 수 있을 거예요. 만일 찾게 되면 한 가지만 물어보고 싶어서, 그래서 그래요. 고양이는 아무 말 없이 작별하는 게 본디의 습성이라고 하지만. 긍지를 품고 살아가는 고양이란 인간을 잊는 법이라고 하지만…….
 ……고양이? 고양이라고? 고양이란 말이지. 하, 하, 하, 고양이! 하루에도 일백 마리씩 몰려드는 그 못생기고 쓸모없는 고양이! 적당한 전봇대 옆 쓰레기 투척장소에서 몰래 잠복이라도 해 봐, 밤새도록 기다리면 최소한 다섯 마리 정도는 볼 수 있다네. 고양이 따위는 말야. 저기를 봐, 녹색 네온사인을 만드는 곳에 있는 저 녀석들. 고양이별에서 태어난 것들도 이제는 고양이로 살기를 거부하는 시대라네. 차라리 좀 특이하고 아름다운 동물이 되거나 비싼 품종의 강아지가 되는 편이 사는 데에 낫다는 걸, 잘 아는 게지.
 저어, 하지만 제가 찾고 싶은 건 고양인걸요. 꼬리가 길고 통통한 고양이요. 잠자는 걸 좋아하는 평범한 고양이예요. 어릴 때처럼 발바닥의 분홍젤리가 말랑말랑하지 않고 조금 딱딱해져 버렸지만, 그리고 흰색에 가까워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폭신폭신하고 보들보들한 털이―.
 아가씨, 우리도 일을 할 시간이라네.


 # 19.
 하수구 속에서 공장을 봤어. 고양이가 되고 싶지 않은 고양이가 그렇게나 많은데, 희라기, 고양이가 되게 만들어서 미안해.
 「아니, 희라기에게 고양이란 꿈이라니까.」


 # 20.
 내 꿈은 목도리 도마뱀! 목도리 도마뱀이에요! 불타오르는 것처럼 달궈진 사막 위를 재빨리 뛰어 횡단하는, 피부가 거칠고 몸집이 자그만 목도리 도마뱀 말예요.


 # 21.
 그리고 다시, 고양이가 없다.
 고양이란 작별인사를 하지 않는 법, 털이 무성한 양탄자 위를 사뿐히 걷듯 소리를 내지 않고 사라지는 법이다. 고양이는 없다. 고양이는 가 버렸다. 인사 없이 사라지는 것이 고양이의 예의. 불러도 대답하지 않고 안으면 도망치는 것이 고양이의 긍지. 신조차 경배하지 않고 충성을 배우지 않는 것이 고양이의 본능이다.
 고양이는 없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길고양이, 검은색과 잿빛의 줄무늬를 가진 코리아 숏헤어 종 고양이도 이제 없다. 참치회처럼 얇고 습기가 많은 혀와 희라기의 자랑인 우유색 치아, 쭉 뻗은 네 다리와 혀를 대보고 싶을 정도로 달콤한 젤리 빛 발바닥을 가지게 된 그는 떠나 버렸다.


 # 22.
 고양이가 집을 나갔다는 것은 당신이 그 놈에게 잊혀졌다는 뜻이다.


 # 23.
 ……하나쯤 묻고 싶었어요.
 내가 당신에게 베푼 사랑이, 당신에겐 조금도 행복이 아니었나요? 비명을 지르고 싶을 만큼 아프고 힘들던가요? 나는, 인간의 오만으로 당신을 괴롭힌 것일 뿐인가요?
 고양이씨,
 나와 나의 가족들이 당신과 함께한 시간들은 고양이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건가요?


 # 24.
 아가씨, 이제 작별할 시간이야.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작별하는 것이 고양이의 예의.
 시간이 흘러도 흐르지 않아도 잊고 돌아서는 것이 고양이의 긍지.


 # 25.
 「고양이들은 원래 다 크면 집을 나간대.」
 마트 이름이 크게 박힌 비닐봉지 두 개를 내려놓으며, 어머니가 말했다. 어머니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나가서 잘 살겠지.
 그렇게 힘없이 덧붙이고, 나는 홈쇼핑 채널로 맞춰진 텔레비전에 눈을 가져갔다. 양면 팬 세트를 팔기 위해 그것이 얼마나 실용적이고 우수한 제품인지, 두 명의 남녀가 나와 쉴 새 없이 선전하고 있었다. 네 마리의 생선이 한꺼번에 노릇노릇 구워져 접시에 올라가고 쇼핑 호스트가 젓가락을 가지고 가 매끈매끈 기름이 흐르는 생선살을 헤집었다.
 ……잘 살겠지.
 응, 그래, 잘 살겠지.
 나는 무의미하게 되뇌었다.
 잘 살아야 할 텐데.
 고양이가 집을 나간 지 구 일이 지났다. 가족들은 아직도 문득 고양이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든 것은 몰라도 난 것은 안다고, 아버지가 말했다. 그가 요즘 출근할 때 십 분씩 일찍 나서는 것은, 고양이를 찾아 근처 수풀을 뒤져 보기 위해서라는 걸 가족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잠이 많은 남동생이 새벽녘에 잠을 깨 베란다 새시 문을 여닫는 것은 혹여나 싶어 바깥 화단을 내다보기 위해서라는 것도, 가족들은 알고 있었다.
 문을 열 때마다 거기 고양이가 있을 거 같은데.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바깥에서 아이들이 커다랗게 웃는 소리가 고양이 울음소리로 들려, 몇 번이나 현관문을 열어 보곤 했다.
 고양이는 없었다. 고양이가 예사롭지 않게 비명소리를 내며 우는 것을, 이웃집 사람이 들었다고도 했다. 어디 가서 죽었을 지도 모른다는 말을, 누군가는 해야 했지만 누구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남동생이 외투를 껴입고 비명소리가 들렸다는 앞 동 아파트 근처를 돌아다녔다. 날이 밝았을 때, 나는 아버지와 함께 비닐봉지에 사료를 담아 근처 놀이터와 화단에 뿌리고 다녔다. 벌꿀 색 얼룩이 있고 꼬리가 긴 고양이가, 밤늦게 옆 통로 근처를 서성거리는 걸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한 번도 데리고 나간 적이 없어서 그 녀석은 우리 집을 찾지 못할 거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어릴 때부터 버릇을 잘못 들였어. 주머니에 넣어 데리고 다녀 버릇 하는 게 아니었어.
 그렇게도 말했다.
 좀 자라서 주머니에 넣을 수 없게 되었을 때부터는, 한 번도 데리고 나갈 수 없었다. 바깥에 안고 나서기만 하면, 현관문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커다란 소리로 울부짖으며 품속을 파고들곤 했기 때문이었다. 죽으러 가는 것처럼 두 앞발을 커다랗게 벌려 품을 더듬고, 고개를 묻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애처롭게 우는 게 불쌍해서 데리고 나갈 수 없었다. 꼭 한 번 바깥까지 나갔을 때는 주차된 차들 사이로 도망 다니는 바람에 다시 잡는 데 두 시간이나 걸렸다.
 어째서 남들 눈에는 보이는데 우리 눈엔 보이지 않을까.
 부르면 얼른 달려올 일이지…… 바보 같은 녀석.
 벌써 멀리 가버린 모양이야.
 가족들은 간헐적으로 한 마디씩 던졌다. 지쳤다. 그 많은 동네 고양이들마저, 찾으려고 들면 눈에 띄지 않았다.
 어디로들 숨어 버린 걸까.
 어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면, 당장이라도 고양이가 달려 들어와 어서 일어나라고 팔뚝을 물 것 같았다. 아침에 방문을 열면, 당장이라도 소파 위에 늘어져 잠들었던 고양이가 크게 하품하며 입맛을 다실 것 같았다. 느릿느릿하지만 경쾌한 걸음으로 풀쩍 뛰어 커튼 뒤에 고개를 박고 눈치를 볼 것 같았다. 어두운 방에 불을 켤 때면, 펴 놓은 이불 한 가운데 세상모르고 길게 늘어져 두 앞발을 가지런히 모두고 잠이 든 고양이가 보일 것 같았다.
 ……고양이 키우는 집이 하나 있는데, 그 집 고양인 이틀 만에 돌아왔다고 하던데 말야. 이 녀석은 어딜 간 걸까.
 우리 동 앞 쓰레기통 주변은 점박이 고양이 영역인 거 같아. 그 자식이 걔를 쫓아낸 거야.
 뭘 훔쳐서 먹을 줄도 모를 텐데. 둔해 빠진 녀석이니까.
 바보, 바보, 바보, 바보, 바보…….
 남동생이 베란다로 사료를 뿌려 본 적이 있다고 실토했다. 아버지가 청소기를 돌려도 고양이털이 떨어져 있지 않아 치울 게 없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이젠 집으로 들어서도 고양이 비린내가 전혀 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이젠 어쩔 수 없잖아, 라고 재잘거려 놓고선 다들 잠든 밤에 베란다에 나가 운 적이 있지만 털어 놓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베란다에 나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베란다에는 아직, 고양이 비린내가 남아 있다. 사 놓은 사료가 아직 한참 남아 있고, 고양이 화장실 모래도 뚜껑만 뜯은 채로 놓여 있다. 화장실 모래로 쓰던 다른 모래도 포대 가득 남아 있다. 그 녀석이 아직 집을 나가지 않았을 때, 저 포대 속에 들어가 푸드덕거린 적이 있었다. 베란다 안쪽, 바깥으로 난 커다란 창문은 아직 빠끔 열려 있다. 그 앞 나무판 위에는 여전히 가지런히 개킨 수건이 놓여 있다. 그 녀석은 언제나 저 자리에 앉아 긴 꼬리를 늘어뜨리고 고개를 바깥으로 길게 빼낸 채 오가는 새들을 구경하곤 했다. 거실에 서서 이름을 부르면, 고개를 돌리고 동그란 황록색 눈을 빛내며 야옹, 하고 대답했다.
 이제는 찾지 않겠다.
 아버지는 말했다. 하지만 아버지 외투에는 여전히 랜턴이 들어 있었다.
 고양이는 다 그래. 배은망덕한 놈.
 어머니는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괜히 마감 시간이 가까운 밤에 마트에 가곤 했다. 옷깃을 여미고 걸음을 옮기며 으슥한 놀이터와 성긴 덤불 사이를 들여다보며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열흘 째 되는 날 늦은 시간이었다. 혼자 깨어 작은 방에 형광등을 켜고 있는 내게 그가 찾아 왔다.
 「안녕, 희라기.」
 나는 미소하며 낯익은 태비 고양이에게 인사했다. 날씬하고 유연한 허리를 자랑하며, 태비 고양이는 열린 창으로 사뿐 들어섰다.
 아직 고양이가 돌아오지 않았나 보군?
 너도 인사 없이 떠났잖아.
 흐음, 그거야 나는 네 고양이가 아니니까. 물론, 모든 고양이는 인간에게 속하지 않긴 하지만 말야.
 희라기는 고양이별이 잘못 떨어지면 태어나는 저주 받은 마법사 일족이라고 했다. 내가 만난 희라기는 그 하나였기 때문에 다른 희라기들이 어떤지는 알 수가 없지만, 적어도 그는 잿빛 머리에 퍽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청년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희라기들의 꿈은 긍지 있는 고양이의 족속이 되는 것이었고, 그것은 이루어지기 힘든 꿈이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이 희라기는 운이 아주 좋았기 때문에-그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그렇다-다행히 귀여운 태비 고양이가 될 수 있었다. 고양이를 악마의 하수인쯤으로 여기는 사람이 본다 해도 탄성을 지를 만큼 윤기 있는 털과 화사한 녹색 눈을 가지게 된 그는, 긍지 있는 고양이답게 작별 인사 없이 내 곁을 떠나갔다. 그것은 우리 집 고양이가 집을 나간 지 며칠 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며칠 지내다 보니, 내게 아직 마법 능력이 남아 있다는 걸 깨달았어. 일단 나를 도와준 사람은 너니까 조금이라도 너를 도와주고 싶어서 찾아온 거야. 물론 남은 능력이란 게 그야말로 흔적 같은, 그러니까…… 자국눈처럼 아주 조금만 남은 거지만 말야.
 나는 몸을 일으켰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지? 나는 우리 고양이를 찾고 싶어. 그러자 희라기는 녹색 눈을 깜박이다 명랑하게 소리쳤다.
 외투를 입어.
 외투를 입으라니? 외출할 준비를 하란 말야?
 응. 갈아입을 시간 없어, 그냥 외투를 입어.
 나는 살금살금 다른 방으로 가 걸려 있는 외투를 더듬거렸다. 손에 집힌 것은 유행이 지난 아이보리색 코트로, 중학교 때 입던 것이었다. 나는 모자를 쓰고 코트를 입었다. 코트의 단추를 채우기도 전에, 희라기는 재촉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빨리 가야 돼. 끝나 버리기 전에 말야.
 ……끝나다니?
 자, 빨리 따라 와.
 이봐! 따라 오라니!
 나는 비명을 질렀다. 희라기는 서슴없이 창틀에서 날아올라 하늘을 가로질렀다. 나는 창틀에 매달려 희라기를 소리쳐 불렀다. 희라기는 다시 돌아오지 않고 저만치 앞선 허공에 떠오른 채 내게 앞발을 흔들었다.
 고양이를 찾기 싫어? 이건 말하자면, 팅커벨 같은 거야. 어서 날아! 지금의 넌 날 수 있단 말야! 희라기를 믿어!
 눈을 질끈 감고 창틀에서 위태위태 한쪽 발을 내딛었을 때, 심장이 철렁 하며 아래로 떨어지는가 싶더니 무언가 물컹한 것이 느껴졌다. 꼭 물을 수직으로 내리칠 때 손에 와 닿는 막 같은 감촉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희라기를 따라 밤하늘을 횡단했다. 그리 높이 떠오르지 않아 누가 보면 어떻게 하냐고 걱정했지만, 그는 큰소리를 치며 나를 안심시켰다. 별 하나 떠 있지 않은 아파트촌의 하늘은 타르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불을 켜지 않은 시골의 허방 같은 그 하늘을 날아, 희라기는 천천히 곡선을 그리며 낙하했다. 아파트 촌 뒤쪽에 있는 거대한 대나무 밭이었다. 이름 있는 산맥의 가장 끝자락과 맞붙은 그곳은 산맥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야트막하고 편평해서, 누구도 그 곳과 산맥의 이름을 연관지을 수 없을 정도였다. 누군가 산맥의 이름을 말하면 처음 듣는 이는 고개를 저으며 실없는 소리로 치부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대나무 숲으로는 좋은 곳이어서, 대나무들은 어른 팔뚝 굵기보다 더 굵직굵직하게 자라나 바람이 불면 계곡 물이 흐르는 것 같은 소리와 와작와작하는 거친 소리를 내곤 했다.
 어디로 가는 거야?
 나는 희라기에게 물었다. 희라기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대꾸 없이 앞으로 나갔다. 대나무들을 헤치고 한참을 나간 희라기는 쉬잇, 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분명 바람이 불어 대나무들이 소리를 내고 있었는데, 희라기가 멈춰선 곳은 대나무 흔들리는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자그만 방 크기의 공터가 앞에 있었다. 드문드문 풀이 자랐지만 대개 붉은 흙이 그대로 드러난 곳이었다. 본디 그곳에 있었음직한 푸른빛의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고, 그 위에는―
 ……고양이?
 나는 탄성을 질렀다. 희라기가 다시 쉬잇, 소리를 냈다.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바위 위에는 커다랗고 늙수그레한 검정고양이가 앉아 있었다. 네 발은 양말을 신은 것처럼 하얗지만 몸통과 얼굴은 온통 검은 색 일색이어서, 형형하게 빛나는 두 개의 하늘색 눈동자가 이쪽에 숨은 내게도 위압적으로 보였다. 커다란 고양이는 주위를 둘러보며 나지막하고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무어라 말을 하는 중으로 보였다. 이를테면 연설을 하는 중이랄까, 반듯한 자세로 앉아 힘을 주어 외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앞쪽 공터 가득히, 크고 작은 형형색색의 고양이들이 빼곡하게 들어 앉아 고개를 들고 큰 고양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른 고양이를 찾아 봐. 몰래 데리고 나올 수 있으면 좋을텐데…….
 희라기가 속삭였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우리 집 고양이는 꽤나 흔한 색깔을 가진 녀석이었기 때문에 비슷하게 생긴 대여섯 놈을 놓고서는 도무지 골라낼 수가 없었다. 어두운데다 고양이들이 가득해서 몸 전체가 보이지도 않고, 그나마 뒷모습뿐이었기 때문에 한 녀석을 찾아낸다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잘 모르겠어.
 그래도 찾아 봐. 그러고도 가족이야? 시간이 없어, 들키면 끝장이라구.
 ……아무래도 저 녀석 같아.
 나는 자신 없이 한 녀석을 가리켰다. 인연이 닿는다면 맞을 지도 모른다는 정도의 생각을 했을 뿐, 마음이 다급했기 때문에 확신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희라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레 앞으로 튀어 나갈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숨소리도 한 번 내지 않고 잽싸게 그쪽 녀석을 앞발로 채어 이쪽으로 데리고 왔다.
 쉬잇, 나야!
 나는 두근거리며 말했지만, 가까이서 본 고양이는 우리 집 고양이가 아니었다.
 뭐야, 네 놈들은!
 고양이는 큰 소리로 울어댔다. 야옹, 야옹, 야아아아옹, 그리고 소리쳤다.
 인간이다! 인간이 숨어들었다!
 일대 소란이 일었다. 그 와중에도 이제 끝이다, 하고 중얼대는 희라기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들렸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을 질끈 감고 고양이들의 발톱이 달려들기를 기다리며 가슴을 죄였다.
 「다들 물러 서!」
 바람 새는 발음의, 낮고 힘 있는 목소리였다. 쇳소리가 섞인 전형적인 노인의 목소리와도 비슷했지만 한편 호탕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나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수십 마리의 고양이가 모여 아직도 사나운 눈길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고양이가 잔뜩 화가 났을 때를 지켜본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만, 그 표정이란 영화에서나 나오는 구미호가 달려 들 때의 표정보다 무서우면 무섭지 결코 덜하지 않다. 고양이를 제 몸보다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아마 그 표정 앞에서는 심장이 덜컥덜컥 소리를 내고 말게다.
 흐음, 인간 아가야, 네 이름이 뭐지?
 나는 조심스레 이름을 말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아직도 눈을 뜰 용기는 나지 않아서 고개를 돌리고도 모자라 눈을 감은 채였다.
 하아, 다들 물러 서. 이 아가씬 일전에 나와 술을 마신 적도 있는 각별한 인간이시다.
 나는 비로소 눈을 떴다. 희라기는 이제 살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봐, 왜 고양이들의 왕과 친분이 있다는 얘길 안했지? 진작 알았으면 그런 짓을 안 해도 될 뻔 했잖아.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 했다.
 글쎄, 나도 처음 알았어. 내가 고양이들이 왕과 술을 마셨던가? 게다가 난 아직 고등학생이야. 술을 마실 수 있었을 리 없잖아.
 고양이들의 왕이라는 그 큰 고양이는 다시 푸른 돌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는 앞발을 구부려 나를 향해 손짓을 했다. 입 밖에 내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 모양이란 일식 집 앞에 장식용으로 놓인 ‘어서오세요 고양이’를 퍽이나 닮았다. 물론 웃을 분위기가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으니까 차마 웃을 수는 없었지만, 솔직히 너무나 닮았다.
 어서 오게, 인간 아가씨. 일전에 만났을 때는 ‘국민학생’이라고 하더니, 지금도 ‘국민학생’인가?
 아뇨. 지금은 고등학생이에요.
 그렇군, 인간들은 무언가 자주 변하는 모양이야.
 ……지금은 국민학교라는 명칭도 바뀌었다구요. 나는 속으로 외쳤지만 굳이 말을 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나는 기억에 없지만 국민학교 때 저 고양이들의 왕과 무슨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저 고양이는 그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로 명칭이 바뀐 것이 초등학교 5학년이 될 무렵, 그러니까 천 구백 구십 육 년 정도니까 그 이전에 만난…….
 이봐, 왕이 왜 여기에 왔냐고 묻잖아.
 희라기가 종아리를 두들겨 대서 나는 꼬리를 무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나는 뺨을 붉히고 잠시 말을 더듬은 후에 비로소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을 설명해 낼 수 있었다. 벌꿀 색의 얼룩을 가진, 아주 평범한 종류의 고양이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여기에 와 있다고. 왕은 얼굴 가득 웃음을 띄우더니 마침내 껄걸 소리 내어 웃었다. 고양이에게 ‘껄걸’ 이란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다른 표현을 생각해 낼 수 없는 웃음소리였다. 호탕하고 커다랗고 시원한, 막혔던 물줄기가 터지는 웃음이어서 나는 그 이전에는 한 번도 그런 웃음소리를 들어본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고양이들의 왕은 한참을 웃은 후에야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뒤통수까지 구멍이 뚫릴 것처럼 날카롭고 커다란 하늘색 안광이 어둠을 사르며 빛났다. 몸 색이 검은색인데도 불구하고 그 눈동자 덕분인지 주변은 할로겐 램프를 켠 것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왕은 주위를 휘이 존재감 있게 둘러보았다. 그리고 중량감이 있는 앞발을 움직여 무리 가운데를 가리켰다. 몽켜 선 고양이들이 좌우로 갈라지고, 주춤주춤 초췌한 고양이 한 마리가 이쪽으로 걸아 나왔다. 잔뜩 겁에 질린 데다 때국물이 줄줄 흐르는 볼품없는 모습이었지만 분명 우리 집 고양이였다. 나는 그 녀석을 만나면 꼭 덥석 안아 주리라 생각해 왔는데도, 어쩐 일인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뭉클 코가 비틀어진 것처럼 짠 해 오고 눈앞이 환해졌다. 나는 뺨을 타고 눈물이 주룩주룩 볼썽사납게 떨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걸 닦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는 고양이의 이름을 불렀다. 고양이는 대답 할 힘도 없는지 비쩍 말라 뼈가 드러난 몸통을 흔들며 마냥 서 있었다. 낯익은 황록색 눈동자는 아직 빛을 완전히 잃지 않았지만 조금도 힘이 없었다. 나는 그것이 불쌍하고 애처로워서 멈추려던 울음 끝이 도로 터져 버리고 말았다.
 자자, 진정하게나. 모처럼 왔는데 한 잔 대접할 경황이 없네 그려. 하지만 다음번엔 꼭, 전처럼 술을 한 잔 하세나.
 고양이들의 왕은 호탕하게 웃었다. 나는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지 가로 젓는지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다. 왕은 우리 집 고양이에게 손짓 하여 푸른 돌 위로 올라서게 한 다음 무리들에게 외쳤다.
 다들 이 고양이를 잘 봐둬. 다음번에 외출하면 되도록 친절하게 대해 주고, 상처를 내거나 멀리 쫓아 보내거나 하는 놈은 가만히 안 둘 테다. 알았냐?
 고양이들이 입을 모아 야아옹, 하고 소리쳤다. 개중에는 높은 소리도 있고 낮은 소리도 있었다. 고양이 왕은 히라기와 코를 부볐다. 히라기는 꽤 으쓱해 했다.
 고양이로서는 고양이들의 왕을 뵌 것만 해도 좋은 일이야. 좋은 일이지. 역시 너는 내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모양이다.
 나를 도와준 희라기가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나도 기분이 좋았다. 나는 우리 집 고양이를 안고 어두침침한 대나무 숲 사이를 걸었다. 고양이들의 공터를 벗어나자 다시 바람 소리가 들리고 대나무들이 맞부딪치며 와르르와르르 요란한 소리를 냈다.
 「희라기, 고마워.」
 그렇게 말했을 때, 가늘게 눈을 뜨고 웃으며 희라기는 말했다.
 그렇게 너무 고마워하지 마. 이게 내 마법의 한계란 말야.
 뭐가? ……뭐가 한계야? 내 소원을 이렇게나 잘 이루어 줬잖아.
 희라기는 웃고 있었지만 그리 밝게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시선을 피하며, 내게 인사했다.
 안녕.
 응, 안녕. 다음에 찾아오면 맛있는 걸 줄게.
 나는 행복하게 웃었다.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떠났다. 총총히, 산호 색 가로등 빛이 쏟아지는 보도 블럭 위를 차분히 걸어 저 끝 모퉁이를 지났다. 나는 웃으며 돌아섰다.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베개가 흥건히 젖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뺨은 온통 눈물로 짓물러 있고 눈은 차마 뜨기가 힘들 지경으로 부어 있었다.
 밝은 아침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창문은 열려진 채 커튼은 안쪽으로 부풀어 올라 계곡 물처럼 반짝거렸다. 나는 몸을 일으키고 눈을 비볐다. 이불을 개며 마음껏 먼지를 일으키고 가만히 거실로 통하는 문을 연다. 지나치게 맑은 거실 공기가 어젯밤과 똑 같은 냄새를 풍기며 나를 맞는다. 빛은 환하게 쏟아지고, 더 이상 고양이 비린내가 남아 있는 않은 거실은 잡지에서 막 튀어 나온 것처럼 정돈되어 있다. 이제 소파는 더 찢어지지 않고 방석을 떨어지지 않으며 신문과 휴지도 어제 놓아 둔 대로 가지런하다.
 희라기.
 나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런 꿈은 꾸지 않는 편이 나았어.
 얼굴을 손바닥에 묻어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르기 전에, 눈물이 먼저 떨어졌다. 털 재질의 옷가지들에서 더 이상 고양이털을 발견하지 않게 될 때쯤이면 나도 아무렇지 않게 될까.
 「이제 다시는 고양이 같은 건 안 키울 거야.」


 # 26.
 하나쯤 묻고 싶었을 뿐인걸요. 랜턴을 들고 동네를 헤매도, 베란다에 나가 밖을 내다보아도, 찬 바람 사이로 환청을 듣고 불을 켤 때마다 이불 구김 사이에서 환영을 보아도 이젠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알고 있어요. 부질없는 행위의 반복, 추억의 부스러기에 불과하다는 것도 잘 알아요. 그저 하나쯤, 나는, 묻고 싶은 것뿐이에요. 손을 대면 보드라운 털의 감촉이 살아오는 상상을 하게 될 때나 품에 가득 안았을 때 훅 풍기는 오래 묵은 고양이 비린내가 기억날 때, 옷장에서 옷을 꺼냈을 때 아직도 붙어 있는 고양이의 털들을 떼어 낼 때, 그럴 때면 꼭 하나쯤,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어.


 「나는 인간의 오만으로 당신을 대했던가요?」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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