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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관광행성의 역사는 짧고 화려했다. 홀로그램을 이용해서 실제나 다름없는 즐거움을 제공한다는 광고는 삼천육백만에 달하는 시스템에 퍼져나갔고, 각종 생명체들이 모여들었다. 실리콘 텁 속에 들어가서 전혀 다른 세계와 다른 자아를 갖추고 즐기는 시스템은 이미 대중화되어 있었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완전히 잊는다는 일(그게 단 한 시간뿐이든 하루든)에 적잖은 부담을 느꼈다. 일종의 틈새시장 공략이 대박으로 이어진 셈이다. 거의 모든 이들이 그 관광지의 이름을 알았다. 그곳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이는 시대에 뒤떨어진 양 취급되던 때도 있었다.
   모든 영화는 전쟁으로 인하여 한순간에 끝났다. 대화로 사태를 해결하지 못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생명체들이 모여 사는 행성들이 하필이면 그 관광지 근처에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우주의 누구라도 "그 악명높은 살육자"라는 말만 해도 스물 여섯 개에 이르는 이름자를 줄줄 외울 만큼 유명한 총통은 아무 예고 없이 이웃 행성을 공격하며 아무 상관없는 관광지한테 폐업을 명령했다. 관광객들은 알아서 돌아가야 했다. 더러는 돌아가지 못했다고 전한다. 시끄럽던 전쟁이 끝난 후 관광행성은 재기하지 못했다. 그대로 눈먼 홀로그램 프로그램이 돌아가는 가운데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싼값에 행성을 처분하려 했으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기에 관광지의 주인은 관리인을 하나 고용해서 던져둔 채 신경쓰지 않았다. 그 관광지는 아주 망한 것이다.

   그로부터 백 년 후, 한 청년이 문득 잠에서 깨어나고 보니 전혀 모르는 곳에 와 있었다. 머리 위로는 고대의 백열전구가 깜박거렸고, 차가운 타일 바닥은 먼지로 희게 덮였다. 청년은 아직 잠이 다 깨지 않은 눈을 들어 철제 책상과 정돈되지 않은 서류 뭉치, 많은 잡동사니들을 보았다. 그는 책상 건너편 벽에 길게 붙은 플라스틱 벤치에 비스듬히 누운 채였다. 공기는 전혀 환풍이 되지 않는지 탁하고 답답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어째서인지 알 수는 없으나 피곤함이 온몸에 넘쳐흘렀기에 아주 천천히 움직여야 했다. 눈을 깜박이다가, 무릎을 폈다 접었다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가, 일어났다가 앉았다. 그때 사무실 문이 열렸다.
   "뭐하러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내 일은 다 끝났소."
   안경!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었던 고대의 유물! 을 착용한 사람이었다! 청년은 입을 벌린 채 그 신기한 광경을 바라보았다. 안경인은 청년이 뭘 어쩌든 전혀 신경쓰지 않고 책상으로 다가가 서류를 정리했다. 한참 후 피곤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다시 "아 글쎄 돌아가라니까는," 이라며 청년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손을 휘젓는다. 청년은 엉거주춤 일어섰다. 그 역시 슬슬 이 알 수 없는 곳을 떠나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죄송합니다만 여기가 대체 어딥니까?"
   "아니 지금 대체 무슨 말을-"
   까지 말하며 안경인은 청년을 돌아보았다. 번쩍거리는 안경알 위로 백열전구의 빛과 청년의 그림자가 한데 섞인 채 어른거렸다. 안경인은 잠깐 의아해하는 표정이었다. 그것은 곧 어딘지 조심스러우면서도 놀라워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혹시 자네 외지인인가?"
   "전 그저 잠에서 깨어나 보니 이곳이라,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난생 처음 와보는 곳이라는 건 알겠는데요."
   "외지인이야! 거 참, 정말로 외성인이군!"
   어째서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안경인은 청년이 외지인이라는 사실에 크게 기뻐했다. 그는 연신 거 참, 거 참을 연발하며 좁은 사무실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먼지 날리며 이리저리 서랍을 열고 닫다가 백색 플라스틱 손목 밴드를 꺼냈다.
   "이걸 손목에 차게. 어느 시스템의 어느 별에 사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이곳에서 배를 띄울 만한 곳은 여기서 꽤 멀지. 마침 오늘 정기 화물선이 오는 날이니 그걸 타고 가까운 정거장까지 가서 다음 배를 기다려 보게. 그나저나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건지 모를 일이구먼, 이런 쓸데없는 곳에는 뭐하러 왔나?"
   "이건 꼭 차야 하는 겁니까?"
   밴드를 집어들고 이리저리 살피며 묻는 청년에게 안경인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동력원이 아직 죽지 않은 터라 유원지 시설들이 아직도 돌아간다네. 이리저리 어지러워서 길 잃기 딱 좋으니 차고 가게."
   둘은 먼지 투성이 사무실 밖으로 나섰다. 깜박이는 조명이 이어지는 복도를 지나 바깥문을 밀치자 제일 먼저 둘을 맞이한 것은 기묘한 향기로 가득한 바람이었다. 안경인은 손을 들어 눈앞을 가렸고 청년은 옆으로 돌아섰다. 은은한, 이름을 알 수 없는 향풍의 기세는 문이 열릴 때 부풀어 올랐고 문이 닫힐 때 잠잠해졌다. 바람이 가라앉은 후 그는 발치에서 출렁이는 빛물결 속으로 첫 걸음을 옮겼다.
   반짝이거나 휘몰아치거나 흘러내리는 빛의 뭉치들은 이미 유행이 지나가도 한참 지나간 홀로그램들이었다. 홀로그램들은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유원지를 채운 채 쉼없이 움직였다. 청년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펼쳐지는 부채, 꽃송이, 치맛자락, 분수, 혹은 이 모든 것들을 다 합친 것 같은 무늬가 거기 새겨져 있었다, 작은 전구들의 배열 속에. 회전목마는 경쾌한 음악과 함께 느긋이 회전했으며, 공중유람열차는 구름에 휩싸인 채 천천히 허공을 지나다녔다.
   안경인은 유원지 건너편으로 가로질러야 정거장으로 통하는 엘리베이터가 있다며 앞서 걸었다. 청년은 주변을 구경하며 천천히 가고 싶었지만 관리인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곳에 볼 것이 뭐가 있느냐며 빨리 가자고 재촉할 따름이었다. 그때 누군가 청년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젊은이, 잠깐 나 좀 보게."
   그를 붙잡은 사람은 아찔한 미인이었다. 붉은 머리칼은 틀어올려 머리꾸미개로 고정했고, 날렵한 눈매를 따라 맵시있게 자주색 아이셰도우를 칠했다. 콧날은 오똑하고 두 뺨은 진주 빛깔인데다 육감적인 입술이 꽃물을 들인 듯 붉었다. 풍만한 가슴을 드러내는 깃털 옷을 입은지라 흰 속살이 가끔 비치며 시야를 어지럽혔다. 이 모든 외양에도 불구하고 말투는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의 그것이었다.
   "보아하니 이곳에 처음 오는 사람 같은데,"
   그늬는 뭐라 말하려는 안경인에게 손을 휘휘 저어대며 말을 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기다렸는지 자네는 모를게야. 내가 지금까지 이 말을 전하기 위해 도대체 얼마나 오래 이런 형편없는 곳에 갇혀 허송세월했는지 짐작할 수 있겠는가? 내가 지금까지 보아 온 관리인만 해도 수백 명은 족히 될 걸세. 사정을 설명할 테니 내게 딱 십분만 시간을 줄 수 있겠나?"
   "그것이, 저는 이곳에 정기적으로 온다는 배가 언제 도착하는 건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혹시 놓치기라도 한다면 곤란해서요."
   청년의 말에 그늬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전혀 염려할 필요 없네! 내 알기로 그 배라는 건 앞으로도 몇 시간은 더 있어야 오니까. 게다가 한 번 오면 족히 하루는 머물다 간다네. 그럼 내 개인적인 길을 구경해 보시려는가?"
   개인적인 길이 뭘 말하는 것인지 청년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어리둥절해 하는데, 그늬가 장난스레 웃으며 제자리에서 빙글 돌았다. 곡선과 곡선으로 이루어진 그늬 몸을 감싼 채 깃털과 붉은 비단 치맛자락이 둥글게 회전했다. 일순 만물이 덩달아.
   "이 유원지에 내가 위촉되어 온 것이 아주 오래 전인데, 제일 먼저 사장이란 작자가 내게 소개한 것이 바로 이것이라네. 지금 이 자리에서 백 미터 가량 정도 되는 길바닥, 길에 늘어선 건물, 허공, 천장에 이르기까지 다 내 취향대로 꾸밀 수 있다는 것. 덕분에 한참동안은 지루하지 않았네만 이제는 뭔들 지루하지 않을 수 없고만. 하지만 오랜만에 손님에게 보여주게 되었으니 흐뭇하다네."
   그늬 목소리는 분홍색, 주홍색, 진홍색, 하늘색, 자주색으로 가득히 어지럽게 깜박이는 도로와 건물들의 간판과 벽과 허공을 떠다니는 홀로그램들 속으로 서서히 파묻히는 듯했다. 소리도 궤적을 그릴 수 있다면. 청년은 마치 산 채로 꿀단지 속에 처박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공기는 달고 형상과 색은 화려하며 요염한 여주인은 문득 어디로 갔는지 자취를 찾아볼 길 없다. 문득 등 뒤에서 안경인이 피곤한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또한 한숨 섞인 연인들의 속삭임이 공중을 장식한 채 이리저리 흘러다녔다. 도로를 밝힌 조명 속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문구, 행복에 겨운 고백 문구 등이 물결처럼 일렁였다. 이러한 도로의 주인이자 청년을 초대했던 여인은 문득 화려한 홀로그램 장식 속에서 걸어나왔다. 반짝이는 금색 드레스와 보석이 박힌 힐을 신고서, 벌새 모양으로 조각된 금귀걸이를 달고서 웨이브진 흑발을 찰랑이며. 먹먹한 눈으로.
   모를 일이다.
   청년은 그늬를 멍하니 응시하며 그리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어쩌다 여기 오게 되었는지,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사방을 장식한 미사여구와 화려난만한 환영들은 기묘하게도 쓸쓸한 분위기를 엮어냈다. 허공을 물들인 모든 꽃의 환영들은 회색 그림자를 지녔다. 그늬는 무수히 미세한 펄의 입자로 빛나는 입술을 열어 스스로의 이름을 발음했다.
   "이시스, 아프로디테, 비너스, 그외 다수."
   조금은 어색히.
   "힘들겠지만 이해해 줘요," 그늬의 목소리와 말투는 전과 조금 달랐다, "여긴 내 길이고 누구든 자신의 영역에서 자신을 굳이 표현하는 건 쉽잖은 일이니까. 어쨌든 내가 왜 제군을 여기로 초대했는지 설명해야 하니까 일단 앉을까요?"
   안경인은, 즉 유원지 관리인은 시간 낭비 어쩌고 중얼거렸지만 그늬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어디서인지 나타난 은색 의자에 청년은 일단 앉았다. 자신을 먼 별 먼 과거의 소산인 여신으로 소개한 그늬는 잘록한 허리에 양손을 얹고 잠시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예전에, 아직 이곳이 망하기 전에 말이죠, 혼자 여기 찾아온 남자가 있었어요. 인간이었는데 키는 한참 큰 데다 수염은 하나도 정돈하지를 않아서 부숭부숭해서 딱 해적같이 생겼다 싶었는데, 정말로 해적이라더군요. 거기까지는 내 눈이 맞았는데, 곧이어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어요. 갑자기 주저앉더니 눈물을 줄줄 흘리는 거야. 당황스럽지 않겠어요? 누구든? 아무튼 그렇게 울면서 그러는 거예요,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잃었다고. 헤어진 것도 아니고 잃었다고. 자, 아무리 눈앞의 가련한 중생이 슬프고 처연해 보인다고 해도 난 이 분야에서 나름 베테랑이에요. 명색이 이시스아프로디테비너스그외다수 앞에서 실연한 이야기를 해 봤자 본전도 못 찾는게 당연하다니까. 그런데 그 해적의 이야기는 나도 모르게 끝까지 다 듣고 말았지 뭐예요. 궁금하지 않아요?" 그리고 자칭 사랑의 여신은 옥 같은 손가락으로 비단결 같은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그 해적의 이야기인즉, '마음껏 노략질을 하고 횡포를 부리며 꽤나 악명높은 해적으로 살아온 지 스무 해, 아직도 길 가는 눈먼 배 납치해다 물자는 죄다 털고 돈 되는 인질은 붙잡아다 단물 쓴물 다 빨아먹고 몸값 받아 팔아먹고 살던 저였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평소와 다름없이 납치해온 여객선 중에 꽤 유명한 부잣집 딸이 있었던 겁니다. 저야 횡재했다고 좋아했습지요. 몸값을 비싸게 불러서 한몫 제대로 챙기고 다른 시스템으로 옮겨갈 생각에 아주 행복에 겨웠더랍지요. 어차피 제가 그때까지 돌아다니던 지역은 점차 치안이 살벌해지고 있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던 참이었으니까. 여객선 안의 다른 물건들부터 하나씩 넘기다가 드디어 대망의 부잣집 딸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몸값을 있는대로 비싸게 부른 메시지를 전송해놓고 한잔 걸치고서 얼큰히 퍼졌는데, 이 여자가 갑자기 그러지 뭡니까. 너 살인에는 취미 없니? 처음에는 뭐라고 했는지 다시 물었어요. 그랬더니만 너 사람은 못 죽여? 꼴에 살인죄는 무서워서? 그러는 거예요. 황당한 것이, 비꼬거나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보고 있었던 겁니다. 눈을 크게 뜨고서. 몸값 받아야지 내가 미쳤다고 널 죽이냐, 그랬더니 이 여자가 갑자기 비장하기 그지없는 상판을 하더니만 난 죽어버릴거야, 그렇게 씨부렁대지 뭡니까! 죽여버릴거야 라고 했다면 웃었겠지만 죽어버릴거야라면 문제가 심각하지 않습니까? 내 돈은! 그래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대뜸 한다는 말이,
   "사랑을 잃었어."
   지 뭡니까그래. 아 씨부럴, 아니 죄송합니다 욕을 하려던 건 아니었고 어쨌든 딱 제 심정이 그때 그랬습니다. 미친 거 아닙니까? 생각을 해 보세요, 돈은 배가 터질 때까지 먹어치우고도 남을 정도로 많지, 하나뿐인 상속녀지, 돈줄을 틀어쥔 부자 아버지는 늙을 대로 늙어서 오늘 내일 골골대지, 게다가 참 제 높은 눈으로도 이쁘다 싶을 정도로 이쁘게까지 생겼지, 뭐가 부족해서 죽는다 어쩐다 지랄입니까? 사랑? 얼어죽을, 사랑이 뒤집어지든 엎어지든 돈만 있으면 어쨌든 배는 안 굶어요! 흠흠,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흥분을... 어쨌든, 그 여자가 그러더니 갑자기 제가 들고 있던 술병을 낚아채서 그대로 들이키더군요. 그러더니 갑자기 우는 거예요. 전 이쯤 해서는 그냥 등을 떡 하니 소파에 기댄 채 마음을 비우고 있었지요. 그래 넌 주접을 떨어라, 나는 부자 될 거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끅끅대며 울다 울다 지쳤는지 한참 후 조용해졌습니다. 그러더니 전혀 궁금하지도 않은 자기 얘기를 늘어놓지 뭡니까.
"난 아무래도 좋아, 그 사람을 볼 수만 있다면 평생 그 허름한 코압에서 살아도 좋았어. 밤이면 쥐 돌아다니는 소리에 윗층 발소리, 별별 소리가 다 나도 상관없었어. 볼 것도 없는 주제에 가식이나 떨어대는 그 사람 마누라한테 얼마든지 입에 발린 말, 해줄 수 있었어. 새벽이면 베란다로 나가서 출근하는 그 사람을 바라봤고, 저녁이면 코압 입구를 괜히 서성대면서 인삿말이라도 붙여보려고 애썼지. 그 사람, 정말 자기 마누라인 그 여자한테 목숨을 걸은 것 같았어. 새벽 일찍 정장 빼 입고 나가서는 돈 벌려고 못 하는 짓이 없었으니까. 예를 들어줄까? 청소부, 공사장 일일잡부, 그러다 몸도 팔았지. 솔직히 내가 그 사람을 처음 본 것도 파티에 나갔다가였어. 그 사람을 데려온 애가 나더러 시승해 보라면서 깔깔댔지. 당신은 해적이니까 알 거야. 그런 곳 분위기는 해적질하는 분위기하고 똑같으니까. 돈을 벌려고 하루치의 시간을 포기한 창녀들이나 남창들은, 그런 곳에 처음 떨어지면 얼어붙거나 포기하거나 능숙한 척하면서 뻗대. 그런데 그 사람은 이상했어. 해적질하면서 우주평화라는 가치 역시 소중히 여기는 그런 이상함. 그 자리에서 남창으로 취급받는 와중에 혼자서 멋대로 멀쩡했던 거야. 누가 뭐라 지껄이든 그렇습니까? 그렇군요. 오늘 많은 분들이 오셨군요. 어깨에 깃털 조각이 묻었습니다, 떼어 드리지요. 그런 식으로 마치 자기가 그 파티 주최자라도 되는 것마냥 태연자약하게 구는데, 만약 친구애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깜박 속아넘어갔을 거야. 나한테 와서 잔을 건네며 슬쩍 웃더니만 '재미없지요?' 그러더군. 아무 말 없이 쳐다봤더니 '재미있는 걸 보여드릴까요? 물론 부잣집 따님이시니 보수는 두둑히 주시리라 믿겠습니다.' 그러면서 샴페인 잔이 가득 담긴 트레이를 들더니만 혼자 발코니로 불쑥 나가는 거야. 별 이상한 놈이네 싶어서 슬슬 따라가 봤는데, 그 사람이 그랬어. '저길 보세요, 이 도시 경치야 지겹도록 보아온 것이니 재미없을 법도 하지요. 하지만 샴페인을 더하면 꽤나 재미있어집니다.' 그리고 잔이 열 개는 넘게 담긴 트레이를 그대로 집어던졌지. 밖으로. 그리고 한동안 아무 일도 없었어. '뭐가 어떻다는 거야, 재미없잖아.' 라고 말하자마자 발코니 아래서 무슨 소리가 들렸어. 고대의 지구 박물관에서 들었던 종소리 같은 소리. 울리고 맑고 시린 것. 한 번, 두 번, 곧이어 와르르르, 수도 없이. 그 사람이 '이 밑에는 분수가 있지요' 라고 했고 그건 나도 알고 있었어. 또 그 사람이 '이곳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방지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헌데 가끔 오류가 나더군요.' 라고 했어. 난 그건 몰랐어. 그 사람이 시계를 보면서 가만 있다가 곧 발코니 아래쪽을 가리키며, 마치 무슨 파티를 주최한 호스트라도 된다는 양 내게 손을 내밀며 그러더군. '저쪽입니다, 보시지요.' 그래서 슬쩍 내려다 봤는데, 그 사람이 그랬어. 자살방지 시스템은 쏟아지는 술이 흐트러지지 않고 일정한 너비와 두께를 유지한 채 잔 속에 둥글게 뭉쳐 있도록 도와주더군요. 오류 때문이기도 하지만 꽤 볼만합니다. 열 개도 넘는 유리잔은 발코니와 플라스틱 바닥 중간 즈음 허공에서 발레라도 하는 것마냥 춤을 추고 샴페인은 잔에 고스란히 담겼는데 조명을 받으며 금색으로 반짝거렸어. 꼭 유영하는 별들 같았지. 볼만한 장면이었지만 그런 티는 안 내려고 노력했어. 저런 건 어떻게 알아냈을까. 직접 뛰어내리기라도 한 거야? 왜 그 따위 질문은 했을까. 그 사람은 왜 고개를 끄덕였을까. 그렇지요 뭐, 안 뛰어내렸으면 영영 이런 오류는 찾아내지 못했을 겁니다. 저 아래서 둥둥 떠 있는데 기분이 꽤 괜찮더군요. 그 사람은 왜 그런 말을 그렇게 덤덤히 지껄였을까.
   난 왜 가출을 결심했던 거지? 그 사람은 이미 끔찍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난 왜 아직도 그 사람을 잊을 수가 없는 거야? 그 후로 몇 년간 포기하지 않았는데도, 어째서 포기하기를 거부하는 순간에도 난 실패를 인정하고 있었을까? 내가 왜 그 사람을 이제서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겠어, 해적? 그 사람이 스스로를 포기했기 때문이야. 내가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그 사람이 그렇게 사랑하던 아내를 스스로 쏴죽였기 때문이야. 그 사람이 왜 살인을 했을까? 그건 아마 해적이니까 당신이 알 수 있지 않을까? 가련하리만큼 얇은 벽 너머로 총성을 들었어. 깨달았지. 난 끝났구나. 불가능하구나. 절망적이구나. 짐을 싸고 표를 사고 배에 오르고 인질로 잡히고, 그런데도 모르겠어. 코압 밖으로 나서다가 창가에 선 그 사람을 봤어. 옆얼굴만. 절망적이었지. 죽은 건 그 사람 쪽 같았어. 아마 총을 쏘면서 세상을 다 폐쇄한 걸 거야. 그러니까 그 사람의 진실은 세상 바깥, 생시의 인간이 범할 수 없는 어떠한 불멸의 차원에나 존재할 테지. 살인도 죽음도 상관없는 그런 세상에나. 내 처지가 가련하지 않아? 그 사람이 실연했을 때 나 역시 그 사람을 잃었던 거야. 어째서 그런 거라고 깨달을 수 있었을까. 논리적으로- 혹은 이성적으로 전혀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냥 알 수 있었어. 그 사람이 더 이상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 또한 그이를 사랑할 수 없다는 거."
   그 여자가 그런 말을 하는데 뉴스에서는 전쟁과 그 전쟁의 주역인 총통에 대한 보도가 나오더군요. 실컷 쏟아낸 후 지쳤는지 여자는 축 늘어졌고, 전 담배나 물었습니다. "너, 내 말 알아듣겠어?" 그러길래 그랬지요, "못 알아들었으면 내가 지금 이렇게 인상을 쓰고 앉아있겠냐?" "해적 같으니라고. 혼자 담배 피우면 맛있지? 나쁜 놈." "넌 니네 집에 가서 피워라." "집에 갈 수 있을 리 없잖아." 뭐라고? 이건 또 무슨 개소리랍니까그래. 놀라서 얼른 물었지요. "뭔 말이야?"
   "난 물려받을 재산이 없어. 지금 내 아버지랍시고 나돌아다니는 건 대역이야. 진짜는 예전에 죽었지. 난 내 유산 다 포기했어."
   이런 즈엔장할! 눈부시게 빠른 속도로 담배를 채 물며 한다는 말이,
   "어차피 죽일 거면 담배나 하나 줘."
   였습니다. 저는 꼭 울고 싶었습니다그려. 팔자 고쳐 좀 더 고귀한 해적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것이 왕창 헛거였다는 거 아닙니까그래. 그런데 그 여자는 맛있게 담배를 뽁뽁 빨아먹고 앉았고, 저는 저도 모르는 새 엉뚱한 말이나 지껄여댔을 뿐입니다. "기분 전환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고, 라미오라 행성에 관광가는 건 어때? 해변 경치가 죽인다던데. 난 어차피 그리 가려던 참이었으니까 가는 김에 태워다 주지." 전 라미오라에 대한 건 하나도 몰랐어요. 그날 아침에 편지함을 비우다가 라미오라 유람성 할인권! 푸르디 푸른 바다와 유서깊은 라미오라 왕실 연회를 즐겨보세요! 라고 써 있던 스팸편지를 삭제했던 것 말고요. 제가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왜! 말해놓고도 스스로의 입을 믿을 수 없어 탁자를 엎고픈 심정이었습니다. 그때 그늬가 고개를 끄덕이지만 않았으면 정말로 엎었을 겁니다. 그때 뉴스에서 총통이 연합 정부의 다이렉트 섭 캐피털 행성 라인 스무 개를 멸절시켰다는 속보가 나오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라미오라에 갔겠지요. 그 소식을 보고서 그늬는 나를 향해 안되겠다고 했습니다.
   "내가 준 돈 때문에 고속으로 출세하더니 고속으로 잔인해졌나봐,"
   라고 하더군요.
   "라미오라에 바람 쐬러 가는 건 안 되겠어. 만나보고 말려야겠어. 어쨌든 아내를 스스로 쏴죽인 그이의 상태가 어떨지 생각조차 않고 떠나려 한 나도 책임이 있으니까. 내가 그 돈만 계좌에 넣어주지 않았다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도합 육천억의 생명이 한순간에 끊겼어. 내가 어떻게 마음 편히 휴가행성으로 도피할 수 있겠어? 해적인 너야 달리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근처 가까운 정류장으로 데려다 줘. 아무래도 맞대면을 해야겠어."
   저는 절대 그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뉴스에서는 아직 별 말이 없었지만 돈으로 한 시스템의 총통 자리에 오르는 일이 가능할 수 있습니까? 일단 능력 있어야 되는 건 기본이고 또 다른 게 더 있어야 노려볼 만한 자리가 그만한 높은 자리 아니겠습니까? 이번 총통의 아내가 우리 시스템 출신이 아니라 다른 별 출신이라는 사실도-상당히 적대시해온 시스템에 속한 왕실 출신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총통의 출세에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은 총통이 아내를 직접 죽였기 때문이라는 것도 잘 알았지만 굳이 말해주지는 않았습니다. 말해봤자 들어먹지 않을 기세였거든요. 해적질을 하다보면 누가 말을 들어먹을지, 안 들어먹고 차라리 혀 깨물고 죽을 지 분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늬는 후자였어요. 그래서 아무 말 안했습지요. 대신 몇 번이고 확인했습니다, 정말로 저 괴물- 아니, 총통을 만날 수 있으리라 믿느냐, 만나서 그런 말을 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믿느냐, 후회하지 않겠느냐, 그런 것들. 정류정에 도착하고도 사흘간을 잡아뒀습니다. 아무리 곤란한 질문을 해대도 전혀 흔들림 없는 눈으로 후회하지 않는다 말하는데 저는 더 할 말이 없었습지요. 그저 그늬가 천천히 아래로 열리는 배의 출입구 계단으로 가 서던 모습,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던 그때 마치 익사하는 것처럼 보이던 몰골, 슬쩍 돌아보며 그간 고마웠다고 수줍게 인사하던 모습 같은 것들이 아직도 뇌리에 박혀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늬는 이미 죽었지만- 왜냐하면 총통은 애인과 자살했으니까- 어째서 제게는 여전히 고통스레 살아있는 것인지, 어째서 저는 매일 밤 그때 해적선의 출입구를 개방했던, [개폐]라고 쓰인 버튼을 눌렀던 행동을 돌이켜 후회했던 것인지 알 수 없었습지요. 궁극에는 그늬를 정류장으로 데려와야 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냥 라미오라로 가야 했던 것인지 헷갈리기만 합니다. 제가 내린 결정이 이제 와서는 마치 죄처럼 느껴집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러면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게 될지요. 그늬가 그 총통이라는 작자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동안 저는 그늬에게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제 죄입니까, 제 책임입니까? 이런 종류의 연심도 연심일 수 있습니까? 정당합니까? 어째서 정당하지 못합니까, 그놈의 사랑이라는 것은? 아니면 정당함이라는 것 자체가 거짓입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저는 아직도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까? 전쟁이 불어오를대로 불어올라서 연방은 물론이고 세상 일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 듯 굴던 아웃스트림 쪽 연맹까지 미쳐돌아갈 적에 말입니다. 총통이 항복을 권유하던 방송을 내보냈을 때 그 옆에 비스듬히 앉은 채 담배를 태우던 여자가 있었잖습니까. 눈가에 꽃잎무늬 문신을 새기고 손가락에는 시에라 뼈 재질로 만든 반지를 꼈던. 그 여자가 그 여자였습니다. 푸른 눈은 시꺼맸고 붉던 입술은 푸른 빛으로 칠했었지요. 끝의 끝까지 익사한 모양이었습니다. 더 웃긴 게 뭔지 아십니까? 그 잘난 총통이란 새끼는 그 여자를 제 손으로 쏴죽이지도 않았더랩니다. 전쟁이 다 망하고 포위당한 와중에서 저 혼자만 쏴서 죽었고, 그 여자는 그 새끼가 떨어뜨린 총이나 주워서 스스로를 겨냥했겠지요. 아주 그것만 생각해도 입맛이 써서-.
   "축하하네.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살아있다는 증거지," 하고 비너스아프로디테그외다수의 여신은 답했었지. 내가 그리 답했었다는 말이네.'
   그것을 끝으로 해적은 별 말 없이 고요해졌었고, 유람지의 탑텐노티스스팟인 포츈가디스 빌딩의 주인인 아프로디테비너스이시스그외다수 여신은 숙연해졌었다. 그 숙연함을 그늬는 이제 막 처음 본 외지인에게 쏟아붇고 있었다. 물론 그 외지인은 이야기의 주제나 의도를 별로 깨닫지 못했다. 체력 낭비요 의지력 손실에 불과한 일이었다. 그러나 홀로그램, 전자 여신은 어쨌든 이야기를 해야 했다. 그러므로 했고, 다 한 뒤에는 실로 오랜만에 가슴 시원한 기분을 느꼈다.
   한 홀로그램과 두 인간은 화물선이 도착할 정거장을 향해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흰 길과 검은 길과 갈색 길과 리본 길과 물총새 길과 여우 길을 지나기까지 아무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런데 제게 왜 이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고 하셨던 겁니까? 저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 같은데요."
   인공 여신이 청년에게 물었다.
   "배가 오면 그걸 타고 어디로 갈 작정이지? 따로 생각해둔 곳이 있어?"
   또 말투가 달라져 있었지만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다. 청년은 한참 고민하다가 답했다.
   "실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러고보니 제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군요,"
   "그거 심각한 거 아닌가? 완전 기억상실증이잖아?"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렇지만 일단은 별 방도가 없습니다."
   "불쌍한 길가메쉬가 생각나는군."
   "그거 혹시 영생의 꽃을 찾으려고 온갖 관문을 다 통과하지만 마침내 꽃을 찾았을 때 웬 뱀한테 허무히 절도당하는 그런 이야기 아닙니까?"
   "그렇지. 고대 지구의 수메르인들이 어떤 인간들이었는지 대략 짐작이 가지 않아? 그러니 세상이 그리도 비극적이지 하고 생각했다니까. 숲은 무엇하러 죽이고 릴리스는 무엇하러 쫓아내누? 지옥에는 왜 다녀오고? 지옥에 다녀온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기억도 없다면서 그런 건 잘도 아네?"
   "아직도 지옥이랄 게 있습니까?"
   이쯤해서 관리인이 끼어들었다.
   "헛소리는 그만하고 이제 관리구역으로 돌아가십시오. 저와 이 사람은 슬슬 서둘러야 합니다. 이번에 오는 배를 놓치면 또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니까요."
   자칭 사랑의 여신인 인공 여신은 입술을 삐쭉 내밀어 보였다.
   "이곳에 처음 문을 열었을 때 내 옆자리에 구역을 배정받은 이가 있었지. 정말 지옥에 떨어진 이라면 바로 그 자야. 난 그냥 구경만 했을 뿐이지.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고. 도대체 홀로그램 유희거리인 주제에 관광객 중 하나, 즉 진짜 인간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는게 말이나 돼? 가능할 수가 없는 이야기잖아. 물론 난 자칭 사랑의 여신이니까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애써 이야기해야 하지만. 사랑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나 같은 건 굳이 존재할 필요도 없을 걸. 어쨌든, 그런 일이 있었다우. 넌 그만 좀 동동거려. 어차피 화물선 도착하는 곳까지 걸어가면서 수다 떠는 거니까. 이봐 청년, 그 멍청한 인간은 말이지, 한낱 환영 주제에 진실한 사랑이라는 감정 하나면 진짜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 그래서 망했지. 지옥에 빠진 채 돌아오지 못했어. 모르지, 그곳에서 지옥 나름대로의 위안을 찾았을는지. 어쨌든 배은망덕하게도 그 관광객 여자와 이 별 밖으로 도망쳤었어, 그 인간. 한동안 무소식이 희소식이었지. 어쨌든 미리 충전되었던 시간 이상으로 환영 상태를 유지했던 것 같아. 그런 걸 기적이라면 기적이랄 수 있겠지. 도대체 뭘 흡수해서 형태를 유지했을지 모르겠어. 그 인간이 눈이 맛이 가서 주절거렸듯 사랑 때문에 살아나갈 수 있었을까, 어쨌을까. 물론 애써 노력해서 쟁취한 영생의 꽃은 잠깐 방심한 순간 엉뚱한 뱀에게 빼앗기게 마련이고. 그 인간 결국은 자기 마누라를 스스로 쏴죽였다더군. 그리고 인간들을 억 단위로 죽였다지, 아마? 그렇다고 이미 잃은 걸 되찾을 수는 없었겠지만. 그나저나 젊은이 안색이 왜 그런가?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걸 굳이 말하지 않는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네. 백날 귀에 대고 말해줘 봤자 소용없는 것들,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 불가능한 것들 말이네. 그나저나 화물선은 벌써 도착해 있는 듯하네만. 가지 않을 건가? 얼굴이 온통 허얘가지고 식은땀이나 줄줄 흘리고, 왜 그러나?"
   청년, 낯선 행성의 낯선 방문자이자 이방인인 그는 머리를 감싼 채 한동안 뻣뻣이 굳어 있었다. 잠시 자신의 이름이라 생각되었던 단어가 지나갔는데 막상 다시 기억나지 않았다. 잠시 자신의 고향과 애인이라는 이가 생각났지만 다시 기억하려 하자 오히려 더 빨리 사라졌다. 기억날 것 같은 느낌은 강렬한데 정작 기억나는 것은 없으니 괴롭기 그지 없었다. 그 기분 내 잘 알지. 내 도와줄 수 있네. 도움 받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필요 없는가? 인공 사랑의 여신은 수백 년은 늙은 노파처럼 보였다가 막 피어나는 나이의 싱그러운 처녀처럼도 보였다. 홀로그램이라 그런지 모습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어느 모습이든지 한 꺼풀 흐린 유리에 덮이기라도 한 양 흐리게 보였다. 청년은 심호흡을 하려 애썼다. 심장 고동소리가 양쪽 고막 안으로 깊고도 급했다. 사랑의 여신은 다시 물었다. 내 자네 기억 찾는 일을 도와줄까 물었네. 긴가 아닌가 간단히 답하게. 옆에서 관리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재촉했다. 조금만 더 가면 화물선 서는 곳으로 바로 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있네. 저 홀로그램들 말은 듣지 말고 기운 내서 조금만 더 가세나. 그러나 다시 걷기 시작한대도 아무 곳에도 닿을 수 없을 듯했다. 그런 느낌이었다. 자신은 이름도 고향도 과거도 알지 못한다. 이곳을 헤매든 화물선에 올라타든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화물선도 홀로그램도 아닌… 여신은 그의 눈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청년은 자신의 모든 것을 그늬가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두 아무런 장식도 스킨도 적용되지 않은 흰 길 앞에 멈췄다. 청년은 갑자기 수만년은 늙은 듯한 이시스비너스아프로디테그외다수 여신의 외양을 흘끗 훔쳐보았다. 홀로그램 여신은 아주 먼 곳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시간은 그늬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듯했다. 청년은 순간적으로 질투를 느꼈다. 그늬가 홀로 영원의 차원에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그 자신은 뻔하디뻔한 필멸의 세계에 묶여 있었으므로. 그는 이 행성이 왜 한때 사람들을 그리도 많이 끌여들었는지, 설득시켰는지 알 것 같았다. 사람들은 아마도 이런 순간, 익숙하고 낯익고 지겨운 보통 시간을 떠나 특별하고 끝남없고 영원한 순간을 만끽하기 위해 유람지에 왔을 것이다. 커피를 마시며 차 향기를 즐기며 홀로그램 속을 떠돌며 오직 혼자 이 너른 우주 한가운데 특별하게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는 환상 속에 빠지고 싶었을 것이다. 다섯 시간 후 돌아가야 하는 일이나 오래 미뤄 둔 크레딧 문제나 방금 전 파산한 일 같은 건 별로 중요치 않게 여길 수 있는, 초월적인 평온. 신. 자신. 어느 누구도 빼앗거나 상처입힐 수 없는 어떠한 절대적인 무언가.
   향풍이 또 불었다. 청년은 허공을 떠다니는 금색 물고기들의 환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금빛 비늘을 지닌 물고기들은 입은 툭 튀어나왔으며 눈은 쑥 들어가고 지느러미는 쓸데없이 길어 결코 잘 생겼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모습들을 했다. 수백 마리는 되는 물고기들이 허공을 유유히 돌아다니며 뻐끔거렸다. 말도 소리도 아닌 것이 물고기들의 입 밖으로 들어가고 나왔다. 환영의 심해가 사방에 자욱했다.
   푸른 바다는 머리 위에 있었고 흑색 돌이 깔린 계단이 발 앞에 있었다. 돌계단은 구불구불 이어져 올라가다가 흰 벽과 붉은 테이블이 즐비한 구식 카페 입구에서 멈추었다. 또 뭐라고 말하려는 관리인을 인공 여신이 잡아 조용히 시켰다. 청년은 카페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꽤나 익숙한 탓이다.
   "꼭 예전에 저런 곳을 봤었던 기분입니다."
   "익숙함에는 꼭 이유가 있는 법이지. 익숙한 것을 익숙하게 대하는 일에 익숙했던 사람이 그 익숙한 일의 정체를 처음으로 깨닫고서 돌로 굳어버린 이야기를 듣고 싶은가?"
   "됐습니다."
   "허긴 그런 사례야 흔하지. 수십년간 함께 살아오던 배우자를 처음 진짜로 알아보고서 심장마비로 죽는다든지 하는 것들."
   "처음 듣습니다. 그런 게 흔히 일어난다는 말입니까?"
   "고대의 지구가 멸망한 이후 수백억 개의 행성들로 퍼져나간 지구인들이 정착한 별들을 죄다 지구로 명명하지 않았는가. 그만큼이나 흔해. 지구 어쩌고 시스템 몇째 구역 몇째 방위 몇째 행성 등등. 전문가의 말이니 믿어도 좋을 걸세. 적어도 수십 년간 무심하거나 증오하거나 하다가 처음으로 진짜로 알아보고 사랑에 빠지는 일만큼이나 흔하거든. 한 대 태우려나?"
   청년은 여신이 내미는 담배를 공손히 사양했다. 둘 다 이미 정류해 있을 화물선에 대한 일은 까맣게 잊은 듯했다. 관리인 혼자 급해 보였다.
   "홀로그램이 태우는 담배 연기는 홀로그램일거나, 아니면 진짜일거나."
   중얼거리던 여신은 몇 모금 빨지도 않은 담배를 퉁겨 날렸다. 금빛 광채를 끝에 매단 담뱃대는 밤색 어둠 속으로 유성처럼 빛의 잔영을 새기며 날아가다가 몇 마리 나방으로 흩어져 제각기 흩어졌다.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에는 애당초 집착하지 않는 게 좋아. 결국 망하거든. 자네는 어떤가?"
   여신은 어느새 금색 비단옷을 두르고 있었다. 용 비늘 무늬가 옷감에 치밀하게 수놓인 옷이었다. 금색 머리칼은 어깨와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와 둥근 엉덩이와 가는 발목에 이르기까지 물결처럼 흘러내렸다. 청년은 어째서인지 그 홀로그램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지나치게 눈부신 것도 아니고 흐린 것도 아닌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늬 눈동자는 먹먹했다.
                                           잔인한 것보다 조금 더,
                       맹렬한 것보다 조금 더,
불가능한 것보다 조금 더.
   "홀로그램과 인간 사이에서 자식을 보는 일은 가능할거나."
   홀로그램 물고기 사이로 문득 홀로그램 꽃이 내렸다. 꽃의 환영은 허공을 가득 메운 채 기적처럼 강림했다. 기적의 홀로그램 버전처럼, 딱 그만큼만 장관이었다.
   꽃잎이 살갗에 닿는 감각의 환영, 세상을 채운 꽃을 바라볼 때 일어나는 감동의 환영, 발 아래 눌리는 꽃송이가 일으키는 애련함의 환영, 안개 너머 희미한 붉고 흰 카페의 환영, 모든 것이 한 번 체를 거친 것처럼 슬며시 거짓스러웠다. 그러나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이제 뭐 기억나는 게 있나?"
   멀리서 사랑의 환영이 말을 걸었다.
   그리고 그러했다, 기억나는 것이 있었다. 네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한 이가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
   청년은 돌계단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몇 걸음 앞으로 여신의 그림자가 오르고 있었다. 돌이 깔린 흙길이 나타났다. 은색 가로수가 줄지어 섰고, 그 뒤로 돌담이 이어졌다. 백색 돌을 쌓아 만든 계단이 보였다. 그 위로 작은 카페가 있었다. 나무 문을 열고서 청년은 또다시 시작되는 계단을 올라갔다. 그는 중심에 붓꽃 한 줄기 꽂힌 나무 테이블 중 하나를 골라잡아 편히 앉았다.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여신은 수정 목걸이를 짤랑이며 옆자리에 앉았다. 관리인은 그 옆에 앉았다.
   여신은 카페 주변을 멀리 둘러보았다.
   "대체 이건 누구의 거리일까,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시대 것 같은데."
   카페 옆길로 마차 한 대가 지나갔다. 주변을 구경하는 여신과 관리인과는 달리, 청년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오래 침묵하던 끝에 입을 열었다.
   "실은 어떤 게 기억났어요."
   그는 또 잊기 전에 소리내어 말해야 했다. 말한다면 설령 자신은 잊어도 홀로그램의 여신이 기억할 것이다. 그러면 아주 잊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 막 기억했습니다. 저는 얼마 전 마무리된 전쟁을 일으킨 사람, 진두지휘하며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사람의 외아들입니다. 제가 다섯 살일 때 아버지는 전함 속 가상정원에서 자살했고, 전쟁은 그걸로 흐지부지 끝났지요. 수많은 별의 왕과 총통과 대통령과 총리와 수장과 원로와 장로들이 최상의 환희를 표현하며 악마의 죽음을 축하했습니다. 공식 채널로 전쟁의 끝이 선포되던 때 저는 적당히 낡아 보이고 평범해 보이는 소형 배에 담겨 우주의 변두리로 운반되고 있었어요. 제 원래 신분은 이미 지워지고 대신 다른 이름과 다른 출생, 재정정보가 입력되어 있었습니다. 전쟁의 끝과 함께 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던 거지요. 평생 넉넉히 쓰고도 남을 만큼 부유한 재정을 소유한 천애고아 정도?
   정거장까지 가려면 한 달 정도나 걸리는 궁박진 곳에 배는 자동으로 정착했고, 제가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 안에서 컴퓨터로 필요한 교육 등을 받으며 평온하기 그지없이 살았지요.
   열다섯번째 생일 때 배의 모든 락은 자동으로 풀렸고, 그때부터는 조작을 스스로 할 수 있었습니다. 배가 머무르던 행성의 환경은 사람이 살기에 적합치 않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굳이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가까운 정거장과 좀 더 사람이 북적이는 시스템들을 살펴보며 시간을 보내려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저장 데이터 중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영상 파일을 찾았습니다. 별 생각 없이 재생했지요.
   그건 다양한 종류의 영상을 연결시켜 둔 것이었습니다. 다큐멘터리 비슷하게. 맨 처음 등장한 것은 희고 둥근 지붕으로 덮인 궁성과 천사 조각상으로 장식된 분수, 노을과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들이었습니다. 장관이었고…. 그 다음으로 화면이 조금 떨리더니 온통 흰 천으로 몸을 감싼 젊은 여자가 등장했어요. 곱슬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고 한 손으로는 이마를 가리고 다른 손으로는 화면 바깥, 그러니까 아마도 촬영하고 있었던 사람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더군요. 빛이 거꾸로 들어오는 바람에 영상을 바라보는 저까지 눈부실 지경이었습니다. 여인은 활짝 웃으며 갑자기 영상 가까이 뛰어들었고, 흰 팔을 들어 촬영인을 끌어안는 듯했습니다. 그 후로는 화면이 빙 돌아가더니 하늘을 비추더군요. 달이 몇 개 뜨고 문득 여인의 속삭임이 들렸습니다. 저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지요. 영상을 뒤로 돌려 다시 들어도 역시나였습니다. 그 여인이 행복에 취해 속삭이는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이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저는 주의깊게, 그 누구에게도 이 사람이 아버지라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그 교육용 영상에서는 군복 차림의 무심한 남자가 자주 나왔는데, 그 사람의 이름이나 얼굴을 알아는 두되 절대로 아는 척하거나 입에 올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반복해서 보여주더군요. 기계음으로 건조하게 경고처럼 되풀이되던 그 이름을 그런 달콤한 여인의 음성으로 듣자 참 이상한 기분이었지요.
   아무튼 그제서 조금 알 것 같더군요. 지금 이 영상은 아마도 아버지, 어머니의 결혼 전 시절을 담은 거라고.
   그후로 영상은 짧게 바뀌거나 급히 촬영한 듯 색깔이 어둡거나 했습니다. 몇 번 다시 보고 추측한 바로는, 어머니는 그 거대하고 화려한 왕성에서 가장 귀중한 보석처럼 떠받들리던 분이라는 사실과 아버지는 신발을 신는 것이 금지된 낮은 신분의 소유자라는 사실, 그리고 그 둘이 사랑에 빠졌다는 겁니다.
그리고 갑자기 다른 장소가 등장했습니다. 왕성이나 정원이 아닌, 가구라고는 하나도 없는 좁은 건물 안이었어요. 어머니는 거친 천옷과 보석 같은 건 찾아볼 수도 없는 머리끈 하나로 머리칼을 묶은 채 마치 구름 위를 걷듯 발끝으로 그 초라한 집을 돌아다녔어요.
   충분히 행복해 보였습니다. 어머니가 총에 맞아 쓰러지고 아버지가 시체 위에 이불을 집어던지던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는. 영상은 거기까지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뺨을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그 총통이라는 냉혈한이 끝까지 제게 무관심했다면 괜찮았을 겁니다. 저는 마음 편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 거라고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암살당하기 전날 아무도 모르게 방으로 들어와서 잠든 아들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다가, 앞머리를 쓸어주다가 정수리 부근에 입을 갖다댄단 말입니까. 그건 빌어먹게도 평범한 자상한 아버지나 하는 일이잖아요. 어째서 그런 인자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하면서,
   "나는 네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겁니까? 게다가 왜 저는 그걸 십여년도 흐른 그제서야 기억해냈을까요? 웃기는 일 아닙니까?
   전 그 후로 오래도록 모욕을 당한 기분이었습니다. 확실하게 믿을 수 있었던 단 한 가지 사실이 그날 뒤집어졌어요. 절대선은 몰라도 아버지의 예를 보아 절대악이란 존재한다고 믿어왔던 것이 한순간에 무효가 되었고- 그리고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왜 한 사람 안에 미친 듯한 부분과 자애로운 부분이 같이 들어있는지, 왜 그런 사실을 아버지가 내게 그런 식으로 전달해 주었어야 했는지- 상상이 가십니까? 아직도 그것만 생각하면 화가 나요! 차라리 멱살을 잡고 길거리로 내던진 후 침을 뱉고 발로 걷어찼다면 이렇게 머리가 복잡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도대체 어떻게 아내를 죽인 사람과, 잠든 아들의 정수리에 입맞출 수 있는 사람이 동일인물일 수 있는 겁니까. 잠든 아들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지도 않았으면서 왜- 밑바닥에 있을 때 유일하게 따뜻하게 대해 준 여자와 사랑에 빠져서 도피한 사람, 그리고 출세와 권력을 위해 그 여자를 죽인 사람, 전쟁의 꼭대기까지 기어올라가 수억 명을 죽이라 명령한 사람이… "
   청년은 정말로 두통이 밀려오는 듯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았다.
   "그 총통이라던 작자, 제 아버지라던 그 인간은 스스로 아내를 쏴 죽이던 장면을 찍어서 그 영상 속에 첨부시켰습니다. 제가 커서 파일을 찾아내게 되면 그걸 보게 되리라는 걸 알면서, 잘도 그런 짓을 했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게다가 그럴 거였으면 도대체 왜 그날 제게 그 따위 호의적인 행동은 보였던 겁니까?"
   "이미 죽었으니 불러다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야."
   여신과 청년과 관리인은 붉은 색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다. 여신은 깃털 장식이 화려한 모자와 레이스 투성이 드레스 차림이었고, 관리인은 잔뜩 부어 있었다. 흰 옷을 차려입은 웨이터가 다가와서 인사하고 메뉴를 놓고 갔다. 청년은 메뉴를 펼쳤지만 안에는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았다. 여신은 새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늬는 옆 길의 환영이던 동료가 잠시 놀러온 인간 여자에게 반해서 도망쳐 나갔을 적에도, 그 둘이 여자 쪽 고향별에서 도망치기 위해 절벽을 넘고 불의 미로를 통과하던 적에도 내내 그들과 함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굳이 눈앞의 청년에게 해줄 마음이 없었다. 어쨌든 자신은 자칭 사랑의 여신이 아닌가. 어떤 말이 도움일지 해가 될 지 정도는 분간할 수 있었다.
   "성장통에 대한 건 내 전문분야가 아니야. 빨리 연애담이나 말해보라고."
   청년은 얼음물을 한껏 들이마셨다. 이야기할수록 기억이 빨리 돌아오는 듯했다. 좋은 일이었고 나쁜 일이었다. 그는 얼음조각을 다 씹어먹은 후 말을 이었다.
   "그늬를 만난 것은 그로부터 삼년 여 후의 일입니다. 웃기게도 한 눈에 반했지요. 그런 거 전혀 안 믿었는데, 그 여자는 도저히 불가능했어요. 할인마켓 문을 열어주는데 고맙다고 하더군요. 조금 웃는데 그때 눈이 마주쳤어요. 그런데 그때 그 눈이, 파란색도 아니고 녹색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슨 어떤 확실한 색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쳐다보던 그때 홀려버렸어요. 인상깊은 느낌도 아니고 특이한 외양에 관심을 빼앗긴 것도 아니었습니다. 진짜였어요. 진짜로 빨려들어간 그런 거. 그 이후로는 도대체 어떻게 뭘 어쨌는지 정신이 없습니다. 후에 정식으로 사귀게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지요. 쳐다만 보고 있어도 웃음이 실실 나오고, 웃든 울든 찡그리든 다 이쁘게만 보이고, 시도때도 없이 가서 끌어안고 싶고 그랬습니다.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사실 지금도 제정신이 아니고요. 수월하게 결혼까지 해서 그대로 제정신이 아닌 채 살다 죽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공교롭게도 우리는 둘 다 세상이 죽은 지구의 망령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다음에 개척될 별, 시스템부터는 전혀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하나고도 믿었고요. 혹시 들어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연방 시스템을 해체하기를 꾀한다면서 한동안 미디어에서 시끄러웠거든요. 우리가 완전 악마의 자식들이라도 되는 것마냥 보도가 되어서 여러모로 곤란했습니다. 수에라 쪽에서 임시로 멤버들이 모이고는 했는데 그마저도 계속하지 못할 지경이 되더니만 나중에는 현상금까지 붙더군요. 억울했지만 일단은 몸부터 피해야 했습니다."
   청년은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여신은 온데간데 없었다. 관리인은 안경알에 입김을 불어 닦고 있었다. 주변을 메웠던 환영의 색이 서서히 바래는 중이었다. 앉은 테이블의 색깔마저 점차 빛바랜 회색으로 변해갔다. 청년은 어쨌든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는 서로 길을 나누어 도망치며 가능한한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만나자고 했었어요. 약속 장소는... "
   찾는 사람 없는 회전목마와 꽃의 환영이 수북히 쌓인 롤러코스터가 아직도 존재하는 곳. 불꽃놀이가 천장에 색색의 전구로 아로새겨진, 우주의 구석에 버려진 오래된 관광지. 즐거움의 환영이 아직도 폐기되지 않은 우주 유일의 유효 과거.
"어쩐지 이상하다 했지. 그 팔찌를 찼으면 홀로그램은 전혀 보이지 않아야 정상인데."
   관리인은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청년은 이제서야 유원지를 덮은 원형 천장의 정체를 알아보았던 것이다. 무지개처럼 길게 이어지는 전구, 깜박이는 색색의 불빛은 실상 멈춘 에스컬레이터를 장식한 환영이었다. 에스컬레이터가 끝나는 곳에 사각형 출구가 뚫려 있었다. 화물선 특유의 붉은 개폐등 불빛이 출구를 통해 규칙적으로 유원지 아래로 내려와 닿았다. 그러나 그가 바라보는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었다. 익숙한 여인의 그림자가 에스컬레이터 계단으로 접히며 내려와 있었다. 지나치게 멀어서 정확히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확실함을 믿을 수 있었다.
   저기로 가기만 하면 된다.
   "갑자기 또 어디로 가려고 그러나?"
   청년은 에스컬레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허공을 떠다니던 물고기들이 그의 발치로 모여들었다. 무지개 빛깔 전구와 물고기의 환영을 밟으며 그는 천천히 천장의 환영이 끝나는 곳으로 올라섰다. 아래쪽에서 관리인이 크게 소리치는 것이 전혀 들리지 않는 듯했다. 안경을 다시 쓰고서 관리인은 급히 청년의 뒤를 따라 에스컬레이터를 뛰어 올랐다. 보이기에는 멀쩡해도 중간에 끊긴 계단이다. 인간은 건널 수 없다. 이곳이 아니라 좀 더 가서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 정류 위치에 도달할 수 있는데 지금 저기로 올라가서 어쩌자는 것인가. 게다가 저 위에 버티고 있는 자가 정말로 그 애인인지 어떻게 알고?
   "지금 다시 만날 거라고 믿는 건가?"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청년은 관리인이 연신 소리치는 경고가 아예 들리지 않는다는 듯 멍하니 천장 쪽만을 응시한 채 계속 걸었다. 관리인은 최선을 다해 뛰어 올라갔지만 청년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무지개색 전구가 점차 뜸해지다가 종국에는 아주 끊기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홀로그램 물고기들은 여전히 그의 발을 받쳤으며 청년은

   정녕
      추락하지
               않았다.

   관리인은 끊긴 계단에 주저앉은 채 비통하게마저 보이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게 다른 홀로그램이 아닌지 어떻게 알지?" 그 옆에 급작스레 나타난 사랑의 여신은 곰방대를 문 채 웅얼거렸다. 호루스의 말도 안 되는 탄생담을 아는지 모르겠다, 너 같은 꽉 막힌 놈이 말이다. 저승의 벽을 뚫고 세상에 태어난 신 있잖냐. 죽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물 사이에서 잉태된 기적 덩어리. 관리인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홀로그램 여신을 바라보았다. 여신은 요염히 눈웃음을 쳤다. 우주를 메운 지구의 유령들을 정신 차리게 하려면 보통 영웅으로는 부족하다네, 관리인 나으리.
   청년은 점차 걸음을 빨리하며, 마침내 뛰며, 물고기들이 지은 무지개다리를 건너갔다. 그의 걸음이 닿은 물고기들은 각자 수정구슬이나 까치나 돌고래나 연꽃으로, 각설탕이나 청미래열매나 산딸기로, 은행잎이나 붉나무잎으로 탈바꿈했다. 수정잔이나 장미꽃이나 라일락 뭉치가 이리저리 폭죽처럼 솟구치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영원히 이어지는 것만 같은 다리를 따라 달렸다. 퍼져나가는 불꽃 모양으로 정비된 색색의 전구들이 천장을 장식한 채 그의 머리 위로 바쁘게 깜박였다. 사각형으로 뚫린 출구를 통해 우주가 점차 내려오고 있었다. 금빛으로 빛나는 샴페인 잔처럼 생긴 별들이 우주를 끝없이 메웠다. 아주 오래 전, 뛰어내렸으나 날아오른 이가 있었다. 청년은 그를 잘 기억할 수 없었다. 여인이 문득 돌아보았다. 이 모든 것은 그로부터 백 년 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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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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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7.01.06 10:12 댓글 수정 삭제
    "밤이 깊어 그윽한 꿈속에서 홀연히 고향에 돌아왔네." 이 시가 첨부되면 좋겠다 싶네요. 소식(蘇軾) "강성자"(姜城子) 이 소설에서는 '홀(忽)'이라는 글자를 '홀연히, 갑자기'보다는 '홀로그램'의 음차 정도로 쓴 우리 시간의 잔상 새 작가의 운치가 느껴집니다. 안 독하고 향긋한 맑은 술 한 잔이 필요한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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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mrita 07.01.07 05:05 댓글 수정 삭제
    따뜻한 댓글 감사합니다. (글을 보낸 후 밤에 자다 일어나서 소동파 시구라는 사족을 달아야 하는 건데, 라면서 후회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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