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곽재식 황야의 무직자

2006.06.03 01:5806.03

1.

저녁 햇살이 탁트인 유리의 탑승구로 가득 쏟아 졌다. 사실 공항은 어쩐 일인지, 성수기도 아닌 듯한 계절, 평일의 공항이었지만 정말 많은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보안 검색을 지나 면세점과 기다림에 지친 여행객들이 있는 탑승구 쪽으로 넘어오니, 그제서야 좀 조용해진듯 했다. 여권검사와 출국심사로 벽을 나누고 있는 그 구역이 시끄러운 소음과 혼란마저 막고 있는 듯 하였다.

할 일이 없어서 공항에 일찍 나온 한 무직자는 벌써 한참 동안 한자리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무료하게 오랜 시간을 보내는 이 무직자는 이 뜬금없는 그랜드 캐년 여행이 자신의 무직 생활의 한 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홀로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천천히 주변을 살피면서, 주로 유리 밖으로 펼쳐진 드넓은 활주로를 그는 보았다. 그 끝없는 아스팔트위에 맞닿은 넓은 하늘에 가득한 석양에 괜히 첫사랑의 아련함을 느낀다는 듯한 감상에 불탄 그 청년은, 바로 나 이다.

얼마전까지 일하던 한국산림개발진흥원에서 괜히 상사에게 버티다가 잘린 것이 내가 다시 무직자가 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따지고보면 이바닥에서 보통 "개진"이라고 불리우는 한국산림개발진흥원의 계약직 연구원이라는 것은 옳은 직장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쓸데없이 잡다하게 굽신거릴 사람과 지켜야할 보안 수칙이 많고, 이런저런 영어, 스웨덴어, 핀란드어 논문들을 뒤적거리는 일이 많을 뿐이지 근본적으로는 편의점에서 바코드 찍는 보조직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닌게 아니라, 나는 가끔,

"맥도널드 같으면 아르바이트생이라도 유니폼은 공짜로 줄텐데."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지 않았던가.

"미국 라스베가스로 가시는 테드 항공 UA426편 이용 승객 여러분께 안내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염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문득 방송이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부스럭 거리며 자리에서 일어 났다. 가만 자리에 앉아서 턱을 괴고 활주로쪽만 쳐다 보던 나에 비해 정신없이 통화를 하고 뭔가를 받아적으며 들락날락하던 항공사 직원중에 하나가 말하고 있었다. 내가 탈 비행기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애써 이 여행이 굳이 그녀를 만나러 가는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멍청하고 헛구름잡기 같기 만한 혼자 자폭하는 감상주의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실연을 당하고 괜히 비오는날 분위기 잡으며 비 맞고 걸어다니는 사람이, 장마철이  되면 전국적으로 2천3백명정도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상당수는 정말로 너무 슬퍼서 비를 맞고 싸돌아다니기 보다는, 그렇게 사랑에 아파하며 비를 맞는다는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 멋있다는 생각을 한켠에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걷는 것이었다. 그게 뭔가 그럴듯한 무용담이나 잘난척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무직자가 된 처지에 그녀를 보기 위해 태평양을 건넌다는 이 무모함은 어쩌면 내 스스로 낭만주의의 시인인척 하려는 가히 불쌍해보이는 추레한 허영일 수 있었다. 나 자신역시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여행에 그런 감상은 될 수 있는 한 경계하려 했다. 그래서, 이 여행에서 그녀와 관련된 사실들은 애써 아껴서 조금씩만 떠올리려고 했다.

그런데, 약간 어둡고 한결 더 조용하고, 비행기의 답답하면서도 안락한 폐쇄감이 느껴지는 탑승구 통로 안으로 들어서자, 탑승구 안으로 눈부신 붉은 노을이 쏟아져 들어왔다. 사람들은 저마다 손을 눈 앞에 막으며 오렌지빛 햇살을 의식했다.

오늘 하루가 저물고 있으며, 그 서쪽 하늘을 날아 서부로 향한다는 생각이 드니, 자꾸만 그녀 생각이 계속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괜히 탑승권과 여권을 다시 한 번 뒤적뒤적하고, 아무의미도 없이 여권에 적힌 복잡한 인식번호를 주욱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비행기가 이륙하고, 곧 저녁식사가 나오는데, 이번에도 직원들의 실수로 카레로 범벅이된 렌틸콩이 나왔다. 이번에도 그 때처럼 사방에 인도사람들로 둘러쌓인 자리에 앉게되어, 렌틸콩을 저녁식사로 마주하게 된 것이다. 똑같은 실수를 4년만에 또 당하다니.

나는 좀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냥 내 식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있으니, 옆에 앉은 인도인 할아버지가, 내 저녁을 가리키며

"It's coriander sauce. Very delicious."

하고 말하면서 웃으셨다. 그렇게 되고나니 도저히 그 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2.

아무 음식이나 가리지 않고 잘 먹는 나였지만, 4년전 기내식으로 나온 코리앤더 소스로 범벅된 렌틸콩을 보았을 때는 정말 한 알도 입에 넣기 싫었다. 일단 그 이상한 향과 뭔가 상한 청국장처럼 보이는 질척거리는 느낌부터 낯설었다. 그렇거니와 그것보다 정말 열받았던 것은 도대체 왜 나에게 엉뚱하게 이 괴이한 이국의 요리를 갖다 준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분명히 저녁은 안심 스테이크나 초밥 중에 하나를 주도록 되어 있지 않았는가?

물론 야간 비행으로 정신없이 바쁠 승무원들의 실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 나는 굉장히 기분이 나빠 있었다. 안그래도 터무니없는 일이 생겨서 정말 짜증스런 기분으로 비행기를 탄 상태였다. 일단, 야간비행이건 오후비행이건 무조건 이륙하자마자 밥부터 한 번 주고보는 국제선 여객기의 서비스 스케쥴부터 좀 못마땅했는데, 그나마 이상한 음식을 갖다주니,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는 것인가, 내지는 나는 엄청나게 재수가 없는 악마의 저주에 걸려 든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던 것이다.

"저기요. 저는 이거 안 먹고, 안심 스테이크 먹고 싶은데요."

치솟는 짜증을 담뿍 담아 나는 가히 "스탈린그라드에서 단 한 발도 물러서지마라!"와 비슷한 어조로 말하며 승무원을 홱 올려다 보았다.

"어? 손님 손님 좌석이 39D 아니신가요."
"손님 좌석이 39D는 맞으신데요. 저는 인도 음식 먹고 싶다고 말씀드린적 없거든요."
"예, 잠시만요. 손님. 죄송합니다."

초보인 듯 보이는 승무원은 가히 겁에 질린 듯 허둥대며 뒤쪽으로 가면서, "객실장님~"하면서 누군가를 불렀다.

"죄송합니다. 손님, 손님 오른쪽 자리 두 분도 인도분이시고, 손님 왼쪽 자리 두 분도 인도분이시라서요... 그게요...  제가... 저희들이 착오가... 착오가 있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돌아온 승무원은 얼굴이 빨갛게 변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화장한 모양이나 걸어다니는 모습, 나이나 말투 같은 것이 친한 고등학교 친구 경숙이랑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에서 미국 서부로 가려는 사람들은 그 머나먼 거리 때문에 흔히 한국을 중간 기착지로 삼곤 한다. 인도에서 미국을 향해 낮에 출발하는 항공편이 한국에 들르게 되면 밤이 된다. 때문에 한국 승객들이 별로 없는 심야 비행편은 비행기를 갈아탄 인도 승객으로 가득하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항공사에서는 평소에는 특별한 예외로만 준비하는 인도 음식을 갑자기 한가득 준비해 실어야 한다. 잠이 솔솔오는 한밤중에 정신 없이 힌두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과 상대하며 뛰어다니는 한국 직원들로서는 실수할만도 한 상황이었다.

나는 새벽 2시에 비행기안에서 뛰어다니면서 항상 웃는 낯을 해야하는 그 승무원이 좀 불쌍하게 느껴졌다. 이 사람도 겨우겨우 잡은 직장, 잘 해보려고 노력하는데, 이런 일이 생긴 것이 참 난감하겠지. 나는, 이 사람의 불쌍한 얼굴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내 짜증을 한 켠으로 다스리고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괜찮아요. 그냥 가져가시고요, 안심 스테이크 주십시오."
"그게요, 손님. 정말 정말 죄송한데요...."

승무원은 잠깐 말을 흐렸다.

"저희들이 안심 스테이크가 다 떨어졌거든요. 저희들이 내일 아침으로 준비해놓은 오믈렛은 여분이 있을 듯 한데요. 그거 드리면 안될까요. 양이 부족하시면 저희들이 두 개 드릴 수 있는데요. 필요하시면 세 개도 드릴 수 있구요... 내일 아침에도 오믈렛 두 개 더 드릴 수 있구요..."

승무원의 눈빛은 거의 눈물을 흘릴듯 했고, 겁에 질린 듯 하기까지 했다. 어쩌리. 세상에 인생에 고달픔을 느끼는 사람 중에 내가 있으니, 남의 고달픔은 좀 줄여주는 것이 도리겠지.

"오믈렛 세 개 먹고, 아침으로 오믈렛 또 두 개 먹으면... 도합 다섯개라. 하나만 더 먹으면 오믈렛을 넘어 육믈렛에 도전할 수 있겠네요."
"죄송합니다. 손님. 정말로요..."
"그냥, 이거 인도 음식 먹을게요. 서류상으로도 제가 그냥 이거 주문한 걸로 하세요. 대신에 맥주나 종류별로 다 갖다 주십쇼."
"감사합니다. 예, 곧 갖다드리겠습니다."

승무원은 도망치듯 내 옆을 떠났다.

그리하여, 나는 그 때 코리앤더 범벅이 된 렌틸콩을 처음으로 맛보게 되었던 것이다.

여행의 목적과 기분을 완전히 망쳐버린 상황에서 출발한데다가, 갑자기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의 낯선 향을 참으면서 꾸역꾸역 내 위장 속에다 이상한 식물들을 집어 넣은 것에서, 나는 이미 불길함을 눈치채었어야 했다.

그 때까지 둔감했다하더라도, 적어도 미국으로 들어서는 입국심사에서는 그 여행에 무슨 운명의 어두운 손길이 쿡쿡 옆구리를 찌르고 있음을 느꼈어야 했다. 나는 비행기에서 받은 전세계 각국 11종의 맥주를 짊어지고 있었고, 승무원들이 미안하다면서 주는대로 받은 카지노 우대 쿠폰을 주섬주섬 들고 나온 상태였다. 덕택에, 세관통과에서 밀수꾼으로 몰려 버렸던 것이다.

"These are not products to sell?"
"Yes."
"Then, you mean you sell these things?"
"No. I mean no. I meant no. That was just a language mistake."
"Yes, or No?"
"No."
"Then, you don't sell. right?"
"No."
"Not right?"
"No.... I mean yes. I mean..., I don't sell. You are right."
"Then, what is your purpose?"
"I just carry my beer to drink."
"You drink 11 different kinds of beer? Are you a chronic alcoholic?"
"No. No. Not at all."

한참을 설명하면서, 나는 내가 비행기 안에서 겪은 일들과 렌틸콩과 왜 인도인들이 한국을 거쳐 미국에 가는가를 이야기했다. 세 시간 반동안 이런 저런 공항 관리들을 만나면서, 나는 중간기착지로 인도인들이 왜 홍콩이나 도쿄대신 서울을 택하는가, 인천공항이 가진 동북아시아 허브로서의 국제경쟁력 같은 것까지 한참 떠든 뒤에야 세관원의 납득을 얻을 수 있었다.

라스베가스의 맥카란 공항을 빠져나오면서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느라 나는 진이 다 빠졌다. 그러나, 마침 주말 심야가 되다 보니 교통편을 찾지 못하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몽땅 택시를 타려고 몰려 들었다. 성지를 찾은 수많은 순례객들의 행렬을 방불케 할만큼 거대한 줄의 맨 끝트머리에 나는 서야 했다. 깊은 밤, 맥카란 공항을 빙빙돌며 에워싼 슬롯머신의 메카를 찾은 그 많은 사람들은 진이 다 빠진 나를 바닥까지 마르고 닳도록 만들었다.

나는 짜증을 다스리고 지루한 기다리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마음속으로 비틀즈 Please Please Me 앨범부터, Let It Be 앨범까지 순서대로 기억하기를 했다. 네바다 주 사막의 한 가운데에 자리잡은 라스베가스에는 서부 사막 공기의 음산함이 기다리는 사람을 춥게 만들었다. 떨면서 음반 순서를 다 맞추도록 심심한 시간은 끝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Abbey Road 앨범의 B면 접속곡들을 머릿속에서 순서대로 맞춰보는 이상한 짓까지 시도했다. 그러고 나서야 맥카란 공항의 기나긴 택시 줄은 끝을 맺었다. 그제서야 나는 마침내, 요란한 댄서 광고로 장식된 다소 민망한 외관의 택시에 탈 수 있었다.

숙소인 레드록 호텔에 도착했을 때, 나는 맥주 11캔 값을 가볍게 넘어서는 놀라운 택시 요금에 다시 한 번 휘청거렸다. 그리고, 지친 나머지 빨랑 호텔에 체크인하고 욕조에서 한 숨 자야겠다... 는 소박한 소망을 개평도 없이 날려버리는 체크인 카운터 앞에 늘어선 수많은 관광객들의 줄을 보게 되었다. 당장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싸게 계약하느라 환불할 수 없는 조건으로 예약한 호텔값과 비행기값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Abbey Road 앨범 B면 접속곡 순서 맞추기를 완전히 완료해야 했다.

"Wow, incredible. You have so much coupones."

마침내 체크인 카운터에 섰을 때, 나는 집어 던지듯 비행기 승무원들이 준 수많은 쿠폰들을 늘어 놓았다.

온갖 다양한 쿠폰들의 유효기간과 효용을 살피기 위해 레드록 호텔의 수많은 경력자들이 달려 들어 한참을 분류, 분석한 끝에 최종적으로 나에게는 오늘 밤 동안만 현금의 가치를 갖고 있는 카지노 칩들을 주었다. 그리고도 쿠폰들은 남아서 그들은 100달러 상당의 여행상품 혹은 오늘밤 최고 수준의 레드록 호텔 레스토랑 갈라 디너를 맛볼 수 있는 교환권을 주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호텔방에 들어간 나는 모든 것을 잊고 그냥 마음을 비운채 잠시간의 명상의 시간과 고요하고도 평화로운 수면의 시간을 가지려고 했다. 그러나 필요 이상으로 날려버린 택시 요금이 아까웠다는 생각이 명상을 방해했고, 코리앤더 소스 렌틸콩 때문에 속이 이상한 것이 아직까지 계속되어서 수면도 방해되었다.

그런 와중에 무직자 특유의 작은 금전에 대한 집착이 마음속에서 새록새록 피어나기 시작했고, 그 집착은 오늘 밤이 지나면 쿠폰을 교환한 칩들이 소용이 없어진다는 사실을 떠오르게 했다. 결국 오늘 밤동안만 효과가 있다는 카지노 칩들이 아까워서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호텔 카지노로 내려오고야 말았다.

나는 딜러의 현란한 손짓과 다른 도박꾼들의 째려보는 눈빛 사이에서 초보자 처럼 보이기 싫어서 혼자서 기계 앞에서 할 수 있는 슬롯 머신을 땡겨보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리 들여다 봐도 규칙을 알 수 없었다.

"일단 해보면서 규칙을 느껴보자."

하는 마음으로 칩을 집어 넣었는데, 순식간에 30달러가 기계속으로 빨려들어갔고, 도로 나온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무와 공, 허와 영의 이치였다. 그렇게 돈을 날리고나서야 뭐가 내가 이기는 조건이고 뭐가 내가 지는 조건인지 나는 대강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제대로 해 보자 하고 또 돈을 넣으려고 했다. 그랬더니 이건 뭔가 사기당하는 느낌이었다.

"규칙을 아는 걸 해야 한다."

그런 생각으로 나는 과감하게 자리에서 일어 섰다. 그리고 다른 도박 종목을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기웃기웃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노래소리가 들려 왔다.

"Some day, when I'm awfully low, When the world is cold......"

카지노 한 켠에 있는 바에서 5인조 밴드의 연주, The Way You Look Tonight 이었다. 다섯명 중에 중절모를 쓰고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있는데, 전체적으로 프랭크 시나트라 모창이었지만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나는, 자연히 노래하는 모습을 보러 바로 향했다.

바 옆에는 포커를 하는 곳이 있었다. 포커 방식은 파이브 카드 원 체인지. 내가 할 줄 아는 거였다. 옳거니. 이걸 해야 겠다. 하고, 살펴보니, 딜러 앞에 모여 있는 미국 노인들과 중국계 아주머니들 사이에 비행기안에서 보았던 그 승무원이 있었다. 그리고 곧, "Oh, dear." "What a-" "Surprising." 하는 탄성이 들려왔다.

나는 포커판 옆에서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굉장히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분명 규칙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부족한 불안한 기색이었다. 딜러가 카드 다섯장을 그녀 앞에 늘어 놓았다. 3, 3, 3, 5, 7 이었다. 이미 쓰리 오브 어 카인드 확보였다. 굉장히 좋은 패였다.

그녀는 주변을 잠시 두리번 하더니, 3, 5를 빼 놓더니, 두 손 바닥을 펼쳐 딜러에게 보여주는 손동작을 취했다. 당장에, 사방에서 "Oh my god." "This is crazy!" "I can't see" 하는 탄식이 울려퍼졌다. 살짝 취한 듯 보이는 그녀는 사람들이 그러는 것이 재미있는지 여전히 싱글거리는 표정이었다. 딜러는 손을 뻗어 3, 5를 가져가고 대신 1, 4를 주었다. 그리고는 딜러는 그녀가 걸었던 돈을 톡 털어 가져가 버렸다. 쓰리 오브 어 카인드를 버리고 아무 의미 없는 카드를 택하다니, 그녀는 규칙을 전혀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분명히, 그녀도 "일단 해보면서 규칙을 느껴보자."하고는 이 포커 도박을 시작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영문도 모른채 매우 빠른 시간안에 돈을 잃자, 그녀는 그제서야 약간은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

"익스큐즈 미. 두 유 노 룰 오브 디스 게임? 쿠드 유 텔 미?"

옆에 있는 사람이란 다름아닌 나 였다. 그녀는 말을 다 마치고 나서야 자기에게 규칙을 좀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 사람이 바로 렌틸콩을 먹고, 맥주 11캔을 받아간, 비행기 안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어, 손님?"
"이제는 우리 둘 다 여기 손님이죠."

그 때, 딜러가 다시 카드를 돌렸다. 1, 4, 4, 9, 10 다섯 장이었다. 4 원 페어 확보. 그런데, 1, 4, 9, 10 다섯장은 하트였고, 나머지 4 하나가 다이아몬드였다.

"여기서 빼내서 딜러한테 카드를 주면 딜러가 그 카드를 바꿔서 주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4 두 장 말고 나머지 카드를 딜러한테 주세요. 4는 숫자가 같아서 벌써 원페어니까 들고 있어야 돼요."

꼭 SS친위대 장교처럼 생긴 냉정한 표정의 딜러가 딱딱하고도 무표정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 보았다. 재촉의 뜻이었다. 나를 보고 놀란 그녀는 그 재촉에 일단 내가 시킨대로 1, 9, 10을 집어서 딜러에게 주려고 했다. 그러다가.

"그런데, 지금 하트가 4장이잖아요. 하트 다섯장 모양 맞추면 뭐 되는거 아녜요?"
"그렇게 되면 플러쉬인데. 그러면 지금 원페어를 포기해야 되잖아요. 포커는 페어 게임이거든요. 플러쉬 욕심부리지 말고, 그냥 원페어로 가는게 안전해요."
"그래도 한 장 바꿔서 또 하트 나올 확률도 25%나 되지 않나?"
"돈 날릴 확률이 75%라는 말도 되죠."
"그래도 하트 잖아."
"그럼, 젊은이 답게 하트의 순정에 모험을 걸든지."
"좋아. 그런 노래 가사도 있지 않나? Love you with all my heart."

그녀는 그렇게 웃으면서 다이아몬드 4를 딜러에게 주고 손가락 세 개를 모으는 손모양을 취했다.

"그 손모양 뭔지 알고 한 거예요?"
"아뇨. 딴사람들 보니까 가끔 기분좋을 때 이렇게 하던데."
"그거 판돈 세 배로 올리는 거거든요."
"예?"

그녀가 놀라면서 겁먹은 표정을 지으려는데, 딜러가 카드를 가져가고 새 카드를 보여 주었다. 하트7 이었다.

"오!"

그녀는 즐거워 했다. 나는 온몸이 피곤하고, 온머리속에 불만이 가득하고, 온마음속에 짜증이 가득한 상태였지만, 승리의 순간에는 왠지 나도 같이 웃을 수 있었다.

"이거라니까요. All my hearts."

그녀는 하트 플러쉬가 된 다섯장의 하트 카드를 모아 쥐면서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무뚝뚝한 딜러가 칩을 얹어 주는 것을 받았다.

딜러는 포커패도 볼 줄 모르는 초보자에게 한 순간에 왕창 돈을 잃은 것이 분한 듯 보였다. 워낙에 표정이 없는 얼굴이라 별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런 얼굴인만큼, 흥분하니까 더 이상해 보였다.

우리는 그녀의 과감한 베짱의 결단력과 나의 치밀한 전략이 혼연일체가 되어 게임을 이끌어 나갔다. 이렇게 말하니까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녀는 무모하게 밀어붙이고, 나는 쪼잔하게 좀스러웠다는 말이다. 우리는 조금 잃고 또 조금 따기를 반복한 끝에, 오늘 밤이면 효력이 없어지는 내 칩까지 털어넣은 막판 밀어 붙이기로 다시 한 번 약간의 돈을 딸 수 있었다.

"잠깐, 잠깐 여기까지."
"왜요? 분위기 좋은데."
"이 손님, 또 빨려들어가시네. 딴다 싶을 때, 불탄다 싶을 때 잠시 식히는 것이 또 진정한 포커의 명수 아니겠습니까."
"지금 손님의 역할은 포커의 명수라기보다는 포커의 조수 아닙니까? 손님."
"목도 좀 마르고 하지 않아요? 여기 담배연기도 많이 나고 그런데."
"그럼, 뭐라도 한 잔 할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5인조 밴드가 연주하는 바에 가서 앉았다. 전체적으로 카지노의 손님들은 좀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서, 우리는 왠지 이모 손을 잡고 이모가 다니는 대학에 따라와서 큰 학교를 두리번거리는 초등학생의 마음가짐과 비슷했다.

"어떤거 마시죠? 누가 코로나가 맛있다던데."
"맥주의 진수는 기네스."
"그래도 라스베가스니까 좀 멕시코 분위기도 나게 코로나 이런거 좋지않나?"
"아니죠. 아니죠."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되물었다.

"서울에서 마실 최고의 맥주는?"
"맥주는?"
"기네스."
"파리에서 마실 최고의 맥주는?"
"맥주는?"
"기네스."
"뉴욕에서 마실 최고의 맥주는?"
"맥주는?"
"역시 기네스."
"세계 어디를 가든, 아마존이든 북극이든, 피라밋 꼭대기에서건 진시황릉 안에서건 언제 어디라도. 최고의 맥주는, 진짜 맥주는?"
"기네스?"
"바로 그거죠."

나는 짝짝짝 손뼉을 쳤다. 이 무슨 80년대 할아버지들이 하던 유머란 말인가. 이 따위로 사람의 호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인가. 술은 그녀가 마신 거 같은데, 취하긴 내가 취한 거 같았다. 나는 갑자기 멋적어졌다. 그녀는 별로 아랑곳 하지 않는 거 같았다.

"그럼 기네스 두 잔 시킬까요? Hey, hi, would you give us..."
"잠깐 잠깐 잠깐."

그녀가 바텐더를 부르는데, 내가 잠깐 멈추었다. 대신 내가 바텐더에게 물었다.

"Can we drink our own bottle of liquor around this bar?"
"Of course. This is your hotel, and your casino."

곧 나는 쏜살같이 내 방에 올라가, 비행기에서 받은 11개의 맥주캔을 짊어지고 다시 바로 내려 왔다.

맥주캔을 들고 내려오는 길에 보니, 그녀는 엘레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왜요? 바에 있지 않구선."
"거기 담배 연기 너무 많아. 어차피 캔맥주면 밖에서 마셔도 되지 않나?"
"근데... 왜 그런거 있지않아요. 미국에서는 실외에서는 함부로 술마시고 그러면 벌금 내고 그런다던데."
"이 손님이, 비행기에서 내리신지도 한참인데 아직도 자기 목적지도 잘 모르시네. 여기가 어딥니까?"
"라스베가스요."

호텔 밖으로 나오니 수많은 사람들로 큰 길이 북적이고 있었고 그 중에 2%정도는 어디가 부족한지 술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삼삼오오 사람들이 무리지어 길에서 술마시고 있었다. 가끔은 길바닥에 퍼질러져 앉아 공화당의 향방이나 케네디가 정말로 위대한 대통령이었나 하는 주제로 심각한 토론을 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무리들도 있었다.

사막의 밤바람이 불어와 거리는 확실히 카지노 안보다는 신선했다. 시계를 한 번 보더니, 그녀는 맥주는 잊었는지,

"어 늦을 수도 있겠다."

하면서 빠른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무의미해진 맥주캔들을 짊어지고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가 간 곳은 벨라지오 호텔 앞의 분수대 앞이었다. 커다란 연못을 따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어 있었다. 오기 전에 여행 가이드 북에서 잠깐 읽어 본, 음악 분수가 물을 뿜는 다는 곳인 것 같았다. 사실 나는 그런거야 한국에도 널린거 아냐. 하면서 별 관심이 없었다. 곧, 화려한 조명과 시원한 물줄기와 함께 사람들의 탄성이 들려왔다. 그녀와 나에게도 물의 파편이 흩날렸다. 나는 눈에 물이 들어가서 눈을 깜짝여야 했다. 그녀는 머리칼이 젖었다.

Luck Be A Lady Tonight. 고전적인 도박꾼들의 주제곡과 같은 노래가 흥겹게 울려처졌다. 그 흥겨운 리듬과 물줄기와 함께 부서지는 빛깔이 그것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에 비치었다. 노랫소리와 움직이는 물줄기, 사막의 바람만 한참 동안 이어졌다. 말없이 나는 가만히 분수와 그녀의 옆 모습을 보았다.

"라스베가스에는 혼자 오신거예요?"
"예."

한참만에 그녀가 말했다. 나도 물었다.

"승무원으로 이렇게 오시면, 얼마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세요?"
"에이. 저 승무원 아녜요."
"아니시면? 직업이 뭔데요?"
"무직자."

그녀도 튄 물이 눈에 들어갔는지 그렇게 말하면서 눈을 한 번 감았다. 그녀는 손으로 눈을 비비며 말했다.

"아... 눈에 물들어갔다.... 인턴연수로 미국와서 있었거든요. 영어도 좀 더 배우고 경험도 좀 쌓고 한다고. 전공이 호텔관광학과 거든요."
"호텔관광학과요?"
"예. 근데, 사실 그렇게 인턴 연수 하면서 미국 오면, 말이 그럴듯해서 인턴 연수지 무슨 고속 도로변 모텔 같은데 돌아다니면서 죽도록 접시 닦고 청소하고 숙식해결해주는 대신 돈 한푼도 못받고 그런식으로 당하고. 막 그래요. 그런데, 제가 운좋게 항공사 인턴을 딴 거죠."
"어, 잘 모르지만 언뜻 듣기에 쉽지 않았을거 같은데."
"제가 또, 한국어, 영어에 더하기, 힌두어를 한다는거 아닙니까. 한미 노선 운항하는 항공사에서 딱 그렇게, 한국어, 영어, 힌두어 조금씩 하는 사람 많이 찾거든요."

나는 비행기 안에 가득하던 인도 사람들과 그 해괴한 맛의 코리앤더 카레를 다시 기억했다.

"그래서, 진짜 고생고생해서는 어제 처음 기내 현장 실습 들어간건데. 말도 안되는 실수를 했으니."
"실수...? 나...요?"

나는 나를 가리켰다. 수많은 인도 사람들 사이에서 한국사람 밥 한 번 잘못 준 것이 바로 그 실수였던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요?"

그녀는 말 없이 목 뒷덜미를 손으로 내리쳤다. 미국, 한국, 인도에서도 통하는 만국공통의 제스쳐. 잘렸다는 뜻이었다. 넘치는게 자리 구하는 인턴이니, 작은 실수 하나라도 내치기에는 충분했을 것이다.

"이거 제가 좀 미안하네요."
"아뇨. 아니죠. 제 실수인데요 뭘. 거기다가 만약에 정식으로 항의하셨으면, 저는 인턴이라서 보험이 안되기 때문에, 제가 제 돈으로 회사에 배상까지 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손님이 그냥 음식 다 드시고, 쿠폰이랑 맥주 받아가시고 웃어 넘겨 주셔서 정말 다행이었다고요."

나는 드넓은 스트립 거리를 무슨 대전차포처럼 짊어지고 뛰어온 무거운 맥주캔 더미를 다시 바라 보았다.

"미국와서 고생고생하면서 겨우 인턴 된 건데. 기분도 나쁘고, 허무하기도 하고. 그래서 괜히  한 잔하고, 한국 가기 전에 카지노도 좀 돌아보고 하려고...... 아, 손님은요? 손님은 뭐 하시는 분이세요?"
"저요? 계속 손님이라고 하니까 좀 이상하다."
"하여튼."
"무직자 입니다."

잠시 잊었던 약간의 분노감이 다시 되돌아왔다. 흥겨운 노래소리에 섞여 그 분노감은 허탈감이 되어, 나는 한숨을 쉬었다. 나는 설명을 계속했다.

"얼마전에 대학원 졸업했는데, 전공이 수림공학이거든요."
"수림공학이요?"
"예. 나무 키우고 숲 만드는 거 연구하는 거요. 그중에서도 낙우송 전공이거든요. 한국에서 연구원 뽑는 자리가 안나서 계속 시간만 보내고 있다가, 여기 네바다주 주립환경연구원에서 연구원 뽑는다고 연락이 와서 서류 통과되고 면접보러 온거죠."
"피, 그럼 골수 무직자 아니네. 인제 곧 취직하겠네."
"아니요. 완전 척추 골수 무직자입니다. 비행기표 다 끊어 놓고 호텔 예약 다 해놨는데, 비행기 타기 1시간에 취직하면 안된다고 연락왔습니다."

나는 다시 한 번 한 숨을 쉬었다. 비행기 타기 직전 온몸을 불태웠던 그 짜증스런 느낌이 생생히 다시 기억 났다.

"네바다, 그 주립 연구소에서 오지 말라고 연락 온거예요?"
"아뇨. 걔네들은 내가 내일 면접올거라고 보고 기다리고 있을걸요. 면접 때 물어볼 질문 같은 거 짜고 있을 거고..."
"그런데 왜요. 누가 취직 하면 안된데?"
"몰라요. 4월달에 무슨 그런 법이 통과됐데요. 한번 회사에 취직한 연구원은 퇴직하고 나서 다른 회사에 취직할 수 없게 하는 법이 생겼거든요."
"예? 그런 법이 어딨어요?"
"유 민 웨어? 리퍼블릭 오브 코리아."

나는 분노의 힘을 담아 맥주캔을 따면서 답했다.

나역시 얼마전에 국회의원 34명이 합심해서 만든 지옥의 법안이 어떻게 나를 괴롭히는지 알게 된 것도 불과 48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각이었다. 연구원들은, 산업자원부 장관의 특별허가 없이는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를 떠나면 다른 회사에 취직하지 못하게하는 무슨 나치의 유태인 탄압 법 같은 미치광이 법안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법안이 설마 그냥 나무 키우는 거나 연구하는 나 같은 사람을 괴롭히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에... 어쨌거나 그러면, 자기는 옛날에 한 번은 딴 회사에 취직한적 있는거네. 그 정도로는 진정한 척추 골수 무직자치고는 좀 약한거 아닌가."
"사실 정말로 취직한 적도 없어요. 작년에, 중소기업이랑 같이 BK21 프로젝트 연구 하나 한 거 있거든요. 그게 걸렸다고 그러드라고요. 학교 학과 사무실에서 전화와서는, 그거 때문에, 기업 기술 연구원과 같이 취급돼서, 취직 못하게 됐데요."
"그럼 영영 취직 못하는거예요?"
"5년 동안."
"30대 중반 쯤 될 때까지는 꼼짝없이 무직자 되는 거네..."
"어. 제가 그렇게 나이 들어 보입니까?"
"뭘 딱 그정도 되어 보이는구만."
"어허 이 사람이..."
"야, 이거 난감하다. 그때까지 법때문에 계속 무직자로 남아 있어야 한다라... 그럼 혼기도 놓치고, 집도 못사고, 부모 속 뒤집어 놓고, 집에서 노느라 정신 상하고, 이거 인생 제대로 꼬아놓네."

그녀는 그렇게 중얼 거렸다. 이렇게 남 속을 뒤집어 놓는 말을 그녀가 잘 하는 것은, 사실 그 말이 자기 자신에게 읊조리는 말이기 때문이기도해서 였을 것이다.

"네바다주 거기 취직했으면 연봉은 얼마쯤 되는데요?"
"한 6만달러쯤 되려나."
"그정도면 대단하네요. 왜, 진작에 미국으로 건너오지, 뭐하러 이상한 중소기업이랑 연구하면서 한국에 있었어요. 이렇게 인생 꼬이게."
"......"

나는 그녀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재작년에 로마에서 열린 학회에서 발표했을 때, 그 때 내용이 굉장히 좋아서, 사실 그 때 나는 네바다 주립환경연구원의 레오네 박사님께 제안을 받은 적 있었다. 그 때 그걸 수락하고 미국으로 건너왔어야 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나는 한국에서 취직해서 한국에서 살고 싶어서 레오네 박사님께 정말 미안하지만 정말 고맙다고 말했는데. 지금 돌아보니 그만큼 멍청한 짓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때는 그게 결코 멍청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만해도 나는 한국에서 자리를 잡고 살아야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저런, 생각에 나는 갑자기 외로움이 확 휘몰아쳤다. 대학원을 마친 친구들 중에는 나와 비슷한 무직자들이 몇몇 있었는데, 게중에는 애인이 있는 애들이 있었다. 그런 애들은 그나마 무직자 생활의 무의미함과 좌절감, 무료함을, 사람들간의 애정으로 버텨내곤 했다. 특히나, 무직자들끼리 어울린 짝들은 뭔가 상황을 타개하고 취업을 해보려는 열정으로 서로가 서로를 북돋아 주며 발전적인 앞날을 추구하며 나아가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 신세는 뭔가. 그나마 있던 애인한테마저 차인 처지 아닌가. 나는 가끔 사지육신 멀쩡한데다가, 일도 열심히 했고, 별 범죄 안 저지르며 인생살았고, 세계적으로 연구결과까지 인정받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뭐가 모자라서 휴일마다 혼자 놀며 궁상을 떠는지 울분이 치솟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괜히 그런 무직자 짝들에게 질투가 나기도 했다. 제네들은 애인이라도 있지, 난 뭔가 이 말이다. 바로 그런 때에 어둡게 내리 깔리는 제대로 된 생각이란, 그런 질투와 울분이 나 자신을 더더욱 한심무쌍하게 보이게 한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여기, 인도식 콩요리 때문에 취업의 가망을 잃은 한 사람을 보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분수와 빅밴드 연주를 듣고 있는 그녀는 아직 해맑은 힘이 남아 있어 보였다. 일전에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기위해 다른 도시에 혼자 살러 떠나게 되자, 떠나는 전날밤, 아버지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해 주신적이 있다. 그 때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평생 가장 진지한 표정으로, 지금 이 이야기를 명심하라고 하셨다.

"술을 한 잔 마시고, 자기는 조금도 안 취했다고 생각하지만. 바로 그 때 그 약한 술기운이 있다. 그 때 어두운 조명 아래 보이는 여자가 아름답다는 자신의 감상에는 절대로 속으면 안된다. 아들아. 그게 바로, 인생에서 가장 조심해야할 무엇보다 두려운 함정이다. 잘못하면 진짜... 정말... 다망한다."

나는 그 때, 그 뭔가 맺힌 듯한 아버지의 표정에서 하루 세 번, 식후 삼분전, 매 세 시간 동안 어머니에게 구박을 듣는 명예퇴작자 공처가의 뜨거운 낭만 같은 것 마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쩔 수 없었다. 세상을 살다보면, 별 이유도 없이 눈에 괜히 뜨이는 사람이 있다. 예를 들면, 내가 처음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우리반 여학생들 중에 누가있는지 보았다. 여러 아이들이 있었지만, 나는 혜란이라는 아이는 좀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 처음 눈에 띈 좀 예쁘다는 생각은, 다음 날 학교에 왔을 때, 한 번 더 혜란이를 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왔을 때, 다시 한 번 더 혜란이를 보게 만들었다. 어느 새, 나는 우리반 여자아이들 중에 나는 혜란이를 가장 좋아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여름이 올 때 쯤이 되자, 나는 혜란이와 마주쳐 무슨 말이라도 두 세마디 할라치면,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는 증세로 발전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벨라지오의 분수 앞에서 그녀를 보며 그런 생각들을 했다. 세상 살다보면 서로 말이 안통하는 상대라든가, 같이 있으면 어색해서 빠져나오고 싶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뿐이랴. 괜히 보고만 있어도 반감 생기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실제로 현실에서 아무 상관도 없어도 텔레비전에 나오기만 해도 왠지 싫어서 채널을 돌리게 하는 배우나 가수들도 있다. 그런데, 처음 이상한 인도식 콩요리를 잘못 갖다 줬을 때부터, 나는 이 사람과는 이상하게 뭔가 통하는듯 하지 않았던가. 따지고보면, 이런게, 이런게 첫 눈에 반한다는 거 아닌가.

나는 뭘 어떻게 더 좀 친해질 수 있을까, 하고 이런저런 시나리오를 머리속에서 짜기 시작했다. 이렇게 저렇게 대사를 해서, 저쪽 호텔의 쇼를 보러가자고 해볼까. 그게 아니면, 좀 조용한 어떤 장소로 어떻게 가는 것은 어떤가. 쓸데 없이 이런저런 영화의 장면들이나 드라마상의 수법들도 한 번씩 돌이켜 보았다.

그러다가, 나는 생각이 오른쪽 바지주머니에 있는 교환권에 미쳤다. 쿠폰 꾸러미를 갖다주고 호텔에서 받아온 교환권. 이 교환권은 왕처럼 대접해주는 레드록 호텔의 최고 식사를 누릴 수 있는 갈라 디너 초대권으로 쓸 수 있었다.

레드록 호텔은 개장 10주년을 맞아서 다양한 행사들을 하고 있었다. 내가 하필 레드록 호텔에 온것도, 바로 그 행사의 일환으로 할인 행사를 하고 있었기에 호텔 방 값이 쌌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레드록 호텔에 머무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여러가지 개장 10주년 행사들 중에서 특별히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 바로 갈라 디너 행사였다. 세계 최고의 요리를 세계 최고의 봉사와 함께. 그리고 방해가 되지 않지만 심금을 울리는 음악 연주와 요란하지 않지만 진심을 즐겁게하는 마술 공연을 펼친다.

바로, 이거다. 네바다주에서 미래를 잃은 이 불쌍한 아시아인을 위해서, 아나사지 인디언 조상들의 영험이 바로 오늘 나의 인연을 맺어줄 기회에 숨을 불어 넣어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교환권을 꺼내서.

"어, 이거 오늘 지나면 쓸모 없는 건데 먹으러 갈래요?"

하고 말하려고 했다.

이거 나름대로 용기가 필요하다면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 말을 꺼낼까, 분수가 끝나면 말을 꺼낼까. 아니면 잠깐 이쪽으로 돌아보면 말을 꺼낼까. 아니면 지금 "저기요..." 하면서 말을 꺼낼까. 고민을 했다.

"으어어-"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괴물체에 나는 흠칫 놀라며 그녀 옆으로 몸을 숨겼다. 그녀는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것은 술취한 어느 덩치큰 아주머니가 끌고 나온 괴물같이 거대한 황색의 개였다. 이 개는 왠일인지 내 옆구리를 핥으려 했던 것이다. 개에게 놀라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면서, 그녀를 벽삼아 뒤에 숨어 있는 나를 보고 그녀가 가볍게 비웃었다.

"덩치에 안 어울리게 개 너무 무서워하는거 아녜요?"
'"아... 내가 어릴 때 개 한테 쫓기고 공격당하고 이런거 너무 시달려서요. 나 쪼그만 강아지도 무서워해요."
"난, 나중에 집짓고 살면, 저만한 큰 개 키우는 게 꿈인데."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분수로 고개를 돌렸다. 졸지에 겁쟁이로 인상을 흐려버렸다. 더군다나 그녀에게 레드록 호텔 갈라 디너를 같이 먹으러 가자는 제안을 할 마음의 흐름, 그러니까 그 용기의 집중 마저 흩어지고 말았다. 이런 개 같은.

나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자연스럽게, 별로 그렇게 대단한 제안이나 중한 데이트 신청이 아닌거 처럼 그냥 가볍게 말하자. 그래, 잠깐 그녀가 이쪽으로 돌아보면 말을 꺼내기로 하자, 하면서 계속 시간을 엿보고 있었다.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의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응...? 응."

올라가는 응? 과 내려가는 응. 확연히 느려지고 점성이 높아진 어투. 그리고 세 번째 말을 읊을 정도의 무렵, 내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며 고개를 한 번 숙이며 눈을 맞추기를 피하는 몸 동작. 그녀의 애인이 건 전화 같았다.

나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 모습을 보고 혼자 가슴이 덜컥 하는 느낌이 들며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꼈다.



3.

나는 혼자 내 스스로가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쪽팔렸다. 이게 뭐란 말인가. 괜히 카지노에서 만나서 잠시 도박 같이한 사람 보고, 뭘 첫눈에 반하니 어쩌니 하면서, 무슨 야밤에 긴치않은 수작을 부린 영구짓이었단 말인가.

그럼 그렇지. 세상에 나나 바보 같이 혜란이 한테 차이고 직업도 없이 비실거리고 있지. 그녀 정도 되는 멀쩡한 사람이 왜 애인이 없겠냐. 나는 어제 한 순간 그녀와 내가 통하는데가 있을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녀가 나를 좋아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나. 왕자병도 가지각색이지. 얼마나 추해 보이나. 멍청한 놈. 아, 무슨 혼자서 망상의 풀장에서 허우적거리며 배영 접영 평영 번갈아가면서 혼자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하다가 물먹고 콜록거리는 모양새란 말이냐.

어제밤, 그녀가 애인이 있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나는 내가 내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대강 "시차 적응이 안돼서 너무 피곤하네요" 하면서 아무도 없는 호텔방으로 도망쳐 돌아 왔던 것이다.

아침이 밝아오자, 나는 호텔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의 레드록 호텔 갈라디너는 날렸으니, 이 100달러 짜리 쿠폰을 어떻게든 쓰기 위해서 나는 여행 상품을 하나 사용하기로 했던 것이다.

이런 저런 안내책자들을 보니, 라스베가스에서 그랜드 캐년에 다녀오는 여행이 괜찮아보였는데, 고작 100달러로는 옳은 여행을 하기가 힘들어 보였다. 거리에 나뒹구는 이런저런 생활정보지들과 전화번호부를 뒤진 끝에, 나는 한 멕시코 계열 여행사가 운영하는 초저가 여행 상품을 하나 발견했다. 그래서 나는 그 멕시코계 여행사에서 나를 데려갈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거였다.

정신나간 라스베가스의 밤에 비해서 아침은 대조적으로 고요하였다. 청량한 사막 바람이 차분하게 거리를 지나갔다. 호텔 앞으로 이런저런 버스들이 왔다 지나갔다. 2층으로 되어 있는 듯 거대해 보이는 커다란 버스도 있었고, 비행 여행을 위해 헬리콥터 착륙장으로 사람들을 데려가는 버스도 있었다. 내가 호텔에서 가장 먼저 나와 있었는데, 한 쌍의 노부부와 대머리 아저씨 일행과 키가 큰 젊은 연인들이 각각 그런저런 버스들을 타고 저마다의 여행지를 찾아 호텔 앞에서 사라졌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내가 어제 전화로 예약을 제대로 하긴 한 것인가 하는 의문에 휩싸일 무렵이 되어서야 어느 낡은 미니 버스 한 대가 털털거리며 호텔 앞으로 나타났다. 별로 기대는 안했지만 기대보다 더욱 허름해 보여서 안그래도 허름한 마음의 상태를 더욱 허름하게 했다.

"Buenos dias."

자신의 콧수염이 근사하다고 여기고 있음이 분명한 버스 기사가 스페인어로 인사했다. 나는 가볍게 억지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에는 주로 대가족인 듯 보이는 멕시코계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사실 거의 다 였다. 어머니 아버지, 큰 딸, 남자 아이 두 명, 막내 딸. 애들 삼촌인 듯 보이는 사람. 나이든 할머니 한 명. 그런 식으로 구성된 가족들 몇몇이 가득 버스 안에 타고 있었다.

버스에 탄 많은 가족들은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서로서로 끊임없이 속삭이면서 왁자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심지어 한 가족은 강아지를 데리고 타고 있기도 했다. 나는 어제의 기억도 있고 원래 강아지를 좋아하지 않고 해서, 그 개 옆을 지날 때는 최대한 몸을 젖혀 개와 멀리 떨어져 버스의 통로를 걸었다. 강아지가 몹시 작고 귀여웠기에, 나는 주위의 비웃는 시선을 흠뻑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버스 한 켠에는 피곤한 표정으로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동양인이 한 명 있었다. 다름 아닌 그녀였다. 나는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지 고민했는데, 그녀가 나를 보더니 밝게 웃으면서 먼저 인사했다.

"어, 또 만나네요."

이거, 정말 무슨 운명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가, 나는 어제 밤의 멍청한 좌절감을 떠올리며 곧장 마음속의 생각을 흩었다.

"예. 쿠폰이 잔뜩 있는데, 여행상품권으로 쓸 수 있더라고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그녀 옆자리에 앉았다. 아마도 그녀는 빈손으로 한국에 돌아가기전에 이런저런 여행을 하고 돌아가고 싶어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녀도 가장 싼 여행상품을 찾아본 것이겠지. 그 점에서는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기가 제일 싸죠?"
"예. 100달러 이하로 갈 수 있는 데는 여기 밖에 없던데요."
"보통 여행 예약하면 고속도로로 가거든요. 그런데, 이 버스는 고속도로로 안가고 그냥 비포장 도로로 가로질러 가는 걸로 돼 있어요. 그래서 더 빨리 질러가고, 더 싼거라고 그러드라구요."
"예."

버스가 출발했고, 우리의 대화는 그렇게 끊어졌다.

나는 그 때까지도 낯선 여행지에서 만난 낯선 사람과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는 어줍잖은 어제의 망상에서 혼자 헤멘 일을 괴로워 하고 있었다. 그래서였는지, 그녀는 별로 말투며 표정이 달라진 것 같지도 않은데, 나는 계속 이상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행동하고 있다는 점 자체를 다시 머릿속으로 생각하게 되니, 도리더 더더욱 말을 잘 못하게 되고 꼬이고 더욱 더 제대로 사람을 대할 수가 없었다.

라스베가스 시내를 벗어나서, 버스는 동쪽의 사막을 향해 달렸다. 버스가 후버 댐이 있는 높은 산 언덕배기로 올라서자 수많은 집들이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반대쪽으로 펼쳐지는 광경은 망망한 돌덩이의 사막이었다. 커다란 바위산이 기이하게 몇 군데 솟아 있고, 그 사이에 말라 죽은 듯 보이는 잡풀들이 이리저리 돋아 있을 뿐, 아무것도 없는 끝없는 빈 땅이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도 그 빈 사막만큼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

마침내 나는, 창밖의 경치를 가리키며.

"여기가 모하비 사막 끝자락인데, 라스베가스 시내 쪽을 보면 골목골목마다 나무들이 굉장히 많죠?"
"예. 뭐, 녹지나 가로수는 서울보다 더 잘 가꿔 놓은 거 같은데요."
"그렇죠. 그게 사실, 여긴 사막이라서 저렇게 가로수나 정원수 같은 게 자라지 않는 땅이거든요. 저쪽편 처럼 그냥 돌로된 사막이라고요. 그런데, 캘리포니아 쪽에서 물을 조금만 줘도 잘 자라고 햇빛이 강해도 잘 크는 나무 종류를 잘 개량해 와서 여기 사람들이 심은 거죠. 도시를 만들면서 했던 그런 작업들이 성공해서, 라스베가스는 사막 도시 인데도 의외로 보기 좋게 아름드리 나무들도 많이 자란거고."
"아."

그녀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 그걸로 대화는 다시 뚝 끊겼다. 아 바보스러워라. 애초에 화제를 잘못 꺼낸 거였다. 내 전공이 수림공학이라서 나야 그런 이야기를 재밌어하지만, 도대체 네바다 주의 식생과 연평균강수량, 일조시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서 어떻게 흥미있는 대화를 이끌어 갈 수 있겠는가. 완벽한 패착이었다. 대학원에서 학위하고나서 막상 갈데가 없는 백수들이 갖고 있는 고정관념만 더 드러내 보였을 뿐이었다. 생활력은 하나도 없으면서 쓸데 없이 배운거 많다고 오만하기만 한 꼴같잖은 인간으로 비치지나 않을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모든 종류의 대화에서 덧없는 아는척으로 빠져드는 것은 자멸의 고속국도임을 다시 한 번 되씹으며, 한참 스스로 자책하고 있을 무렵. 그리고 그렇게 해서 다시 대화가 없는 사막이 오랫동안 계속되었을 무렵, 이번에는 그녀가 말했다.

"전공이 그 쪽이라고 그랬죠. 수림공학?"
"기억하시네요."
"그래서, 원래 네바다주 연구소에 취직하면 그런 거 연구하게 되는 거 였어요?"
"예. 라스베가스에서 나무 종류 개량하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나무 찾고 그런데에 아직까지도 관심이 많거든요. 그래서 세계적으로 그런 쪽에 실력있는 사람들 많이 모으고 있고, 대우도 좋은 편이고......"
"오... 스스로, 세계적으로 실력있는 사람들이라 이건가?"

아무렴, 내가 생각해도 지난 번 로마 학회에서의 발표는 굉장했단 말이다.

"아뇨. 뭐. 그렇기야 하겠어요. 하여간 그래서 네바다 쪽에서 오라고 제안이 왔더라고요. 사실 지금 쯤은 연구소에서 면접 보고 있어야 하는데......"
"고만고만. 또 생각하면 또 짜증나겠다. 거기까지."

이미 짜증은 되살아나고 있었다. 나는 내가 메고 온 가방을 내려다 보았다. 가방안에는 오늘 면접 때 발표할 내 연구실적 소개 자료와 그것이 정리된 파일. 랩톱 컴퓨터가 들어 있었다. 말하다 보니까 또 심장이 답답했다. 연구원은 한 번 일에 발을 담그면 다시는 취직을 할 수 없다는 말도 안되는 법 때문에 걸려서 나는 계속 무직자로 남아 있어야 한다니. 부아가 치밀었다. 안좋은 표정을 그녀에게 보이기 싫어서 나는 고개를 반대쪽 창쪽으로 돌렸다.

무심한 사막은 무심한 풍경만 계속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흘렀다. 그녀는 그런 나를 달래주려는지, 미국에서 사는 동안 만난 웃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간간이 해 주었다. 샌프란시스코 시립 도서관 구석에서 침낭을 들고와서 잠을 잔 사람 이야기 같은 것은 꽤 재미있기도 했다.

"Almerzo, almerzo."

버스 기사가 차를 세우고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점심을 나눠 주었다. 피자를 닮았는데, 포블라노 소스 비슷한 것이 아주 강한 냄새가 났다. 나는 나름대로 멕시코 음식을 좋아하는 터라 한 번 흥미있게 먹어보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종이 봉투에 담긴 그 음식을 받은 그녀는 음식을 무슨 플라스틱 폭탄이라도 되는 양 두렵게 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녀에게는 먹기 어려운 냄새였나보다.

"이상해요?"
"영... 마음에 안드는데요."

나는 손짓을 해서 점심을 준 버스 기사를 불렀다.

"Sorry. Do you have any other food rather than this one?"
"Well, we have some Indian style food. Would you like it?"

인디언 음식이라. 흥미진진했다. 이 근처의 아나사지 인디언 부족 전통의 독특한 요리일지 모른다. 혹시 자벨리나나 벌처 같은 독특한 이 지역 동물의 고기로 만든 것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나는 그녀를 쳐다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O.K. Here you go."

그녀의 점심을 되가져간 버스 기사는 다른 봉투를 내밀었다. 그녀가 봉투를 열어 보니 안에 든 것은, 아름답게도, 인도식 렌틸콩 카레 요리였다.

인디언이라는 말을 착각한 것이었다. 우리는 미국 원주민식 전통요리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힌두교도식 인도 음식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이 렌틸콩 카레에 도대체 무슨 향료를 넣었길래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을만큼 강렬한 냄새가, 정신을 앗아갈만큼 아찔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왼손으로 신김치를 주물럭거리고 오른손으로 캐첩을 주물럭거린다음 두 손을 동시에 따뜻한 짜장 속에 씻은 뒤에 3일동안 날계란 속에 담구어둔 냄새와 비슷했다. 아무래도 멕시코인 주방장이 나름대로 인도식 요리를 만들어보려다가 엄청난 실패를 한 처절한 흔적이 바로 이 음식이지 싶었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인 후에, 자신이 받은 그 괴상한 렌틸콩 카레를 나에게 건넸다. 그리고 그녀는 내 멕시코 요리를 빼앗아갔다. 그리고 그녀는 아까는 "마음에 안든다던" 그 멕시코 요리를 꽤나 맛있게 먹었다.

나는 어떻게든 그 음식을 먹어보기 위해 한손으로 코를 막고 다른 손으로 딱 한 알의 콩을 포크위에 올려서 입에 넣어 보았다.

곧, 라스베가스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맛본 제대로 만든 렌틸콩 요리가 얼마나 맛있는 것이었는지, 나는 절절히 깨닫게 되었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이 이상한 콩 덩어리는 맛으로 보건데 상한 것인지 신선한 것인지 아니면 오늘 아침 막 만든 것인지 완전히 썩은 것인지조차 제대로 판단하기 어려울 만큼 해괴한 상태임을 알게 되었다. 또다시 속이 완전히 이상해진 나는 내가할 수 있는한 최대한 정성을 다해 이 콩요리를 밀봉했다. 그녀는 나의 그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재미있어하며 웃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역시 그 양많은 멕시코 음식을 다 먹지는 못하고 도중에 그만 두었다.

긴팔 옷을 입고 있는데도, 에어콘 바람이 너무 세서 우리는 약간 춥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에어콘 바람이 최소로 나오도록 잠궈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 광기어린 음식 향취의 회오리바람을 어떻게든 다른 곳으로 보내기 위해 우리는 에어콘 바람을 틀었다. 썰렁했다. 신기한 것은, 이 버스에 타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이 쌀쌀한 에어콘 바람에 조금도 아랑곳 하지 않고, 반팔차림으로 이 추위를 즐기는 듯 보였다는 것이다.

한참을 덜덜 떨면서 가고나니 이제는 좀 냄새가 가신 듯 하여 우리는 에어콘을 다시 잠구었다. 사실 닫힌 버스 안에서 냄새가 빠져나갔다기 보다는, 우리의 후각이 이제는 그 파괴적인 냄새에 쩔어버린 것일 가능성이 더 컸다. 그 쯤 되니, 버스가 본격적으로 비포장 도로에 접어들어 길도 없는 황무지를 덜컹거리면서 달리게 되었다.

해가 점점 높이 뜨자, 뜨거운 아리조나 사막의 햇살이 버스 창밖으로 쏟아졌다. 그 눈부신 태양 광선에 그녀는 눈을 찡그렸다.

"너무 뜨겁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속눈썹이 길어서 햇빛 같은 거 잘 견디실거 같은데."
"아뇨. 피부가 약해서 햇빛 조금만 심하게 받으면 금방 막 상하고 벗겨지고 그래요. 속눈썹이 길면 햇빛 잘 견디는 거래요?"
"눈에 너무 심한 빛이 안들어오게 잘 가려주거든요. 그래서 낙타 같은 사막 동물도 이렇게 속눈썹이 길죠."
"내가 낙타 같이 생겼다 라는 건가?"
"아니 그냥, 속눈썹 길이만."

창가쪽에 앉은 그녀에 비해 내가 앉은 자리는 안쪽이라서 햇빛이 덜드는 쪽이었다.

"자리 바꾸죠. 난 햇빛 좋아하는데."

나는 그녀와 자리를 바꾸었다. 막상 자리를 바꾸고 보니, 정말 햇살이 뜨거웠다.

그러나 기왕 이렇게 된 것, 나는 그냥 편안하게 수억킬로미터 밖에서 이 행성에 끊임없이 에너지를 퍼부어 주는 저 커다란 별을 즐기기로 하였다. 끝없이 이어지는 콜로라도 고원의 황량한 길에, 끝없이 내려 쪼이는 고요한 태양 빛. 어디선가 느릿느릿 한 곡조 연주하는 하모니카 소리가 들려오면 적당하리라.

그녀와 나의 대화는 계속 되었다. 그녀는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의 한 야박한 장사꾼 이야기를 했고, 나는 로마에서 겪은 말도 안되는 바가지 상술에 대해 이야기 했다. 한편 그녀는 샌프란시스코 시청 앞 유엔 광장에서 열린 장터에서 사들인 오래된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덧붙였고, 나 역시 유럽의 어느 집시 행상에게 산 아주 오래된 이탈리아 오페라 가수 녹음 레코드를 이야기 해 주었다.

"말하는 거 들어보니까 거기 로마에서는 대우가 꽤 괜찮았나봐요?"
"나쁘지 않았죠. 그 때 우수발표자로 뽑혀서 발표하게 된 거라서 사람들이 여러모로 많이 배려해 줬거든요."
"우수발표자... 그럴싸하게 들리네요."

그러면 뭐하나. 지금은 취업기회마저 원천 봉쇄당한 무직자이거늘. 갑자기 그녀가 불어넣어주는 자신감에 흥에 겨워 또다시 아는척 대화로 빠져드는 거 같아 스스로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려 했다. 그 즈음 해서, 버스가 섰고, 기사가 뭐라고 큰 소리로 스페인어로 떠들자, 버스의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내려서 뛰어나갔다.

"뭐죠?"
"내리나 본데요?"

우리도 뒤늦게 일어서서 두리번 두리번 했는데, 그러는 사이에 다른 승객들은 모조리 다 버스 밖에 내려서 어디론가 주변 여기저기로 흩어져 걸어갔다. 우리는 지하철표를 어디에 집어 넣어야 할지 고민하는 시골뜨기처럼 왜 여기서 내리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 우리에게 버스 기사가 뭐라고 재빠르게 스페인어로 이야기했다.

"Wha..at?"
"Take another bus. OK?"

그리고 또 스페인어인지 영어인지 모를 설명을 빨리 덧붙인 다음, 갑자기 기사는 버스 문을 닫았다. 그리고 버스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나 오던길로 돌려 되돌아 나갔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버스가 되돌아나가고 나니, 그 버스가 가는 엔진소리와 바퀴의 마찰음이 들렸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저 황무지였기 때문에, 아무런 다른 소리도 없었고, 점차 작아지는 그 버스의 소음은 아주 오랫동안 멀리까지 계속 들려왔다. 사방을 둘러보니, 우리와 같이 버스에 탔던 다른 사람들은 저마다 어디로 갔는지 벌써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유일하게 방향이나마 확인 되는 것은 멀리 강아지를 데리고 온 가족의 희미한 먼 뒷모습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거죠?"
"기사가 하는 말 안들었어요?"
"잘못들었는데."
"나도 잘못들었는데."

나는 나와 함께 걸어 나온 그녀에게 물어 보았지만, 그녀 역시 답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사방 눈에 보이는 한계 안에서 아무도 보이지 않는 이 황야에 단 둘이 남겨진 지금, 우리는 우리가 왜 여기에 남겨진 것인지도 도무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아무래도 그녀는 인턴으로 일하며 미국에서 살기도 했다고 하니 영어를 나보다 더 잘해서 분명 그 버스기사가 하는 말을 다 잘 알아들었을 것이라고 나는 방심하고 있었다. 반대로 그녀는 내가 해외 학회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도 받고, 미국 주립 연구원에 면접발표도 하러오고한다니, 내가 더 영어를 잘해서 그 버스기사의 말을 잘 알아들었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우리는 서로 서로를 너무 믿은 덕택에, 결국 영문도 모르고 사막 한 가운데서 길을 잃어버린 어이 없는 조난을 당한 셈이었다.

"여기가, 벌써 그랜드 캐년인가? 협곡, 계곡, 캐년 비슷한 것도 안 보이는데."
"아니죠. 그랜드 캐년 근처면 한쪽에 협곡이 있고, 콜로라도 강이 흐르고 있을 텐데. 여기 주변에는 큰 나무 같은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여기 있는 이 사막 관목들은 그랜드 캐년 같은 지형에 어울리는 식물들이 아니거든요."
"그럼, 도대체 왜 우릴 여기에 내려 준거야."

그녀가 버스가 왔다가 돌아온 길을 다시 되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한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작렬하는 태양아래 돋아난 풀들을 살펴보았다. 흙을 보니, 전형적인 간대토양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나무가 자란 적이 없는 지형이었다. 이곳은 정말로 막막한 황무지, 사막이었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맞다. 아까, 스페인어로 이야기할 때 언뜻 보니까. 어느 쪽으로 얼마 가서 기다리면, 몇 시 쯤에 다른 버스가 온다느니 뭐 그런 비슷한 이야기 한 거 같아요."
"스페인어도 할 줄 알아요?"
"아주 조금. 정말 조금. 그냥 듣는 것만. 이 동네서 살다 보니까."
"그러니까, 조금 이동해서 버스를 갈아타야 된다는 거죠?"
"그 비슷했어요. 시간이랑 방향도 이야기하긴 했는데..."
"아까 마지막에 take another bus 어쩌고 한 거 보면 그 말이 맞는 거 같긴 하네요."
"그럼 어디로 가서 언제 버스를 기다려야 되는 거죠?"
"모르겠네요. 저는 멕시코 음식은 좋아해도 스페인어는 모르거든요. 그걸 물어 봤어야 되는데."
"우리가 좀 빠릿빠릿하게 행동했으면 아까 버스 같이 탄 사람들 따라서 가면 됐을 건데."

그녀가 안타까워 했다. 맞는 말이었다. 우리는 왠지 좀 정신 빠진 사람처럼 어설프게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고개를 들어 사방을 보니, 사방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드넓은 사막과 정신나간 듯이 강한 태양 뿐이었다. 그러고 있자니 갑자기 겁이 덜컥났다. 완전히 길을 잃은 것 아닌가. 이렇게 허망하게 여기서 목말라서 죽어버리는 것 아닌가.

"아까, 그 사람들은 이 쪽으로 간건가?"

죽음의 공포로 얼굴색이 하얗게 질리려고 하는 나에 비해서, 그녀는 아직까지 태연한 듯 했다. 그녀는 버스에 탔던 다른 승객들이 걸어간 방향을 가리켰다. 나는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 언저리에 마른 잡풀들이 엉켜 땅에 붙어 있는 모양을 보았다. 사람이나 곰 같은 거대한 동물이나 자동차가 지나간 자리에만 생기는 자국이었다.

"자동차 바퀴 자국 같은게 이쪽 방향으로 있네요."
"그럼 이쪽 방향인가보죠."
"그러다 더 길 잃는 거 아닙니까?"
"여기서 계속 기다리라는 말은 분명히 아니었어요. 여기서 버스 기다리려면 내일 모레 여행 회사 버스가 여기 다시 올 때나 되어서야 버스 탈 수 있을거잖아요."
"그럼, 일단 한 한두시간 정도만 걸어가 볼까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약간 물러서서 살펴보고 태양을 등지고 다시 다른 각도에서 풀들이 짓밟힌 모양을 보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정확한 바퀴자국이 보였다. 그렇게해서 방향을 잡았다. 참 일이 끝까지 꼬인다 싶어, 한 숨을 푹 쉬었다. 처음에는 대한민국 정부에서 취직을 막고, 그 다음에는 기내식이 이상하게 나오더니, 이제는 사막에 버려지지 않았나 말이다. 도대체 이번 여행은 어디까지 내 인생을 한도 끝도 없이 망하는 방향으로 몰아붙이는 건가.

나는 지평선을 보며 발걸음을 떼었다. 문득 그녀를 보니, 자외선차단제를 꺼내서 바르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보고 말했다.

"어? 이런거 안 발라요?"
"그런거 없는데."
"아서라. 햇빛을 아무리 좋아해도, 바람 시원하다고 멋모르고 돌아다니다가 홀라당 다 태우고 막 허물벗거지고 그래요. 얼마나 따갑고 보기 흉하게 되는데."
"그런가."

그녀는 아둔한 대답을 하는 나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 보았다. 그녀는 손에 자외선차단제를 더 짜놓으려 했는데 다 쓴 모양인지 더 나오지 않았다.

"이게 다 인가 보네. 이렇게 해봐요."

그녀가 손짓해 내 얼굴을 들이미라고 시켰다. 그리고 그녀는 손등에 묻은 자외선차단제를 내 얼굴에 묻혔다. 미친듯이 햇빛이 퍼붓고 있는 중이었는데도, 그녀는 아직 버스의 에어콘에 떨고 있던 느낌이 남아 있어서 인지 손이 약간 차가웠다. 손등은 통통하고 손가락은 가늘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얼굴에 자외선차단제를 발랐다.

"목덜미뒤랑 귀에도 잘 발라요. 거기가 전형적인 취약점이예요."

엉성하게 바르다보니, 얼굴이 무슨 밀가루 제분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허옇게 된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 둘은 사막을 걷기 시작하였다.



4.

사실, 우리는 인디아나 존스도 아니고 툼레이더 등장 인물들도 아니며, 사막의 라이온이나 롬멜 장군 일행은 더더욱 아니라서 사막을 걷기에는 전혀 적합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우리의 복장상태는 가히 가여울 정도의 가관에 가까운 가소로운 것이었다.

그녀는 작은 파란 꽃이 무늬로 있는 얄팍한 흰 상의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허리가 조금 높게 올라오는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여기저기 조그마한 끈들이 리본을 이루고 있는 모양에 굽이 낮은 구두는 꽤 고전적인 점심도시락 바구니 들고 소풍가는 분위기에 가까웠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연구소 면접을 위해 준비했던 회색 정장 양복 겉옷을 한 손에 벗어 들고 있었다. 그리고, 흰 와이셔츠에 걸친 빨간 넥타이를 대강 풀어서 놓은 상태인데다가, 흙먼지 나는 길을 걷다보니, 검은 구두와 바지는 보얗게 먼지가 앉아 있었다.

공원에서 버드나무 아래를 걷거나 은행에서 돈 세고 있기에 적합해 보이는 두 사람이, 모하비 사막의 끝자락, 끝도 없는 콜로라도 고원의 황야를 헤메고 있는 것이었다.

"아까 하던 이야기 계속. 그래서, 그렇게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고 계시는 분이, 왜 한국에서는 지금껏 자리를 잡지 못했던 거죠?"
"제 전공이 수림공학에 낙우송이거든요. 이걸 잘하다보니까 이게 당연히 좀 깊게 연구하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전공분야가 굉장히 좁아져 버렸다고요. 지금까지 어디서 무슨 낙우송 수림공학 전공한 사람 뽑는다는 이야기 들어본 적 있으세요?"
"아니요. 무슨 선인장 가시 모양 전문가 뽑는다는 이야기 비슷하게 들려."
"그렇죠. 아닌게 아니라, 그게 그거예요. 우리나라 전체에서 낙우송 수림공학 전공자를 한 해에 어디서 몇 명이나 뽑겠어요. 깊게 파면 파서, 자기 전문 분야가 두꺼워지면 두꺼워 지고 학문이 높아지면 높아질 수록, 그만큼 취직할 구멍은 좁아지는 거죠."
"그래서, 한국에서는 그 수림공학에 낙우송 전공하면 취직할 데가 없어요?"
"산림청 연구원 자리가 한 해에 한 자리씩 나기는 하거든요. 전국, 대한민국 4천5백만 인구중에, 이쪽 전공에서 연구원 자리는 딱 하나 나는 거죠."
"그래도 실력 있잖아요. 자기가 그 한 명 될 수도 있는거 아닌가."
"그런데, 이게 숫자가 너무 적어지면, 그게 또 그렇게 안되는 거거든요."
"안되면요?"
"우리나라에 낙우송 전공에는 계열이 딱 정해져 있어요. 대학원 때 저희 지도교수님 계열이랑, 김학상 교수 계열이 있거든요. 김학상 교수 제자들이 요즘에 산림청 쪽을 잡았어요. 그래서, 산림청 연구원은 계속 그쪽 후배들을 뽑아다 쓰죠."
"그럼 어떡해."
"처음에는 어학실력의 현장감각 부족하다면서 면접에서 떨어뜨리고, 그 다음에는 발표실력이 부족하다면서 면접에서 떨어뜨리고, 그 다음에는 연구의 방향에 직업의식이 부족하다면서 면접에서 떨어뜨리더라고요. 계속 떨어져서, 뭐, 계속 시험치고 떨어지고 하면서 무직자로 있었죠. 몇 년 죽어라 수림공학 연구밖에 안했는데 또 어디 다른 직장에 취직을 할수 있겠습니까."
"에이. 그럼, 진작에 미국이나 다른 나라쪽으로 취직자리 알아보지 왜. 그럼 그 이상한 취직 금지 법에 덜미 잡히지도 않고 벌써 취직했을거 아냐. 국제적으로 인정도 받을만 하다면서요. 왜 계속 한국에 남아 있으려고 했어요?"

사막을 걸으며 그녀와 나는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변을 아무리 보아도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황무지와 지평선 너머 가득 덮은 푸른 하늘과 뜨거운 햇빛만 가득했다. 보이는 것은 그녀와 그녀에게 보이는 나 뿐이었다.

무엇보다, 온통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의 말소리외에는 그 어떤 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나누는 이 대화가 아무도 없는 이 하늘에 울려퍼지고 지평선을 향해 저 멀리 나아가서 이 행성 전체에 엷지만 뚜렷하게 퍼진다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가끔 바람에 섞인 먼지 때문에 대화가 끊어질 때도 있었고, 끊임 없는 걸음 사이에서 방향을 잡느라 잠시 건초들을 뒤적일 때에도 이야기는 멈칫했지만,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나는 그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단지 지루함을 덜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막에 홀로 남겨져 길을 잃었다는 정신나갈 듯한 공포감을 잊을 수 있었다. 그녀와 말을 하고 있는한, 나는 여전히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그저 평안하고 소중한 내 인생의 하루라는 분위기가 왠지 모르게 마음에 와닿았다. 그런 분위기를 내가 느끼는 지금의 상황이 나는 자뭇 신비하다고까지 여겼다.

"내가 왜 계속 한국에서만 직장을 찾았냐 하면요......"
"하면......?"
"뭐냐면......"
"오... 여자 때문이구나?"
"뭐, 꼭 그렇다기보다는..."
"맞네. 여자 때문 맞네."

내 뒤에서 따라오고 있던 그녀는 내 등을 주먹으로 한 대 가격했다.

오후로 접어 들어 서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햇빛은 남쪽으로 걷고 있는 우리에게 동쪽으로 그림자를 늘어 뜨리게 했다. 그러면, 내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그녀는 교묘하게 각도를 맞추면 내 그림자 뒤에 숨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햇빛으로부터 그 밝은 얼굴을 얍삽하게 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사귀던 여자 친구랑, 나 정말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그렇게 살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한국에서 살려고 하다보니까, 계속 한국에서 자리잡으려고 했던거죠."
"그 사람은 직업이 뭔데요?"
"수의사요."
"그럴싸하네. 수의사."
"그렇죠?"
"그래도. 그렇게 해서 한 사람은 자리 잡았는데, 한 사람은 계속 무직자로 떠돌면 그것도 좀 이상해지기 쉬운데. 그럴 때 일 수록 좀 마음 냉정하게 먹고 따져봐야 되는 거 아니예요?"
"그렇죠. 그게 맞는 말이긴 하죠."
"음... 많이 좋아했구나?"
"예."

나는 짧게 답했다. 얼른 무슨 말을 뒤이어 설명해야 할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수천만가지 생각과 추억들이 마구 몰려들어 휘몰아쳐서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정해지지 못했다는 것이 맞는 이야기 였다. 잠깐의 침묵 동안, 드넓은 황야는 철저한 고요함을 제공해 주었다. 그녀는 멋쩍어서인지, 잠깐 뒤를 돌아보는 것 같았다. 끊임없이 이어진 우리가 남긴 긴 발자국을 그녀는 보았을 것이다.

"중3 때 처음 봤는데요. 처음에는 그냥 좀 괜찮구나... 하는 생각 뿐이었거든요. 그런데, 고등학교때쯤 되니까, 정말 좋더라고요. 무슨 사랑 어쩌고 하는 영화 보거나 노래 들으면 걔 생각 계속 나고, 드라마봐도 계속 생각나고. 꿈에 나오고. 꿈 속에서는 또 어떻게 잘 고백도 하고 그래서 정말 꿈만 같다면서 좋아하고 그러거든요. 꿈 속에서. 그러다가 아침에 잠깨면 그게 꿈이잖아요. 현실은 그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너무 아깝고, 그런 꿈이나 꾸고 있는게 한심하기도 하고 막 그랬어요."
"첫사랑이네요."
"그... 왜... 제가 눈이 별로 안좋아서, 학교 다닐 때 항상 맨 앞자리에 앉았거든요. 그런데, 고등학교 때는 일부러 뒷자리에 앉았어요."
"나, 그거 왜 그랬는지 알아. 그래야, 수업시간에 계속 그 좋아하는 애 뒷모습 볼 수 있으니까."
"예. 그래서, 수업시간 되면, 그냥 하염없이 넋놓고 계속 뒤에서 쳐다 보고 있고 그랬죠."
"그게, 바로 뒤쪽 자리보다, 대각선 뒤쪽 자리가 좋아요. 그래야 옆모습 까지 은근 잘 보이거든요."
"콜."
"그런데 그거 좀 패착이다. 너무 그렇게 좋아하고 티네고 목매고 그러면 사실 그나이 또래 여자에들이 오히려 싫어하게 되기 쉽거든요."
"그런거 같더라고요."

나는 한숨을 쉬었다. 학교 다닐 때, 혜란이를 짝사랑해서 불탔던 그 많은 느낌들을 다시 되새겨보려면, 이 사막을, 울창한 밀림과 자동차들이 가득한 마천루로 뒤덮어도 부족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간, 저 학교 다닐 때, 이공계 이런 쪽 되게 인기 없었어요. 그런데, 걔가 수의대 간다고 이과반 들어가는 바람에 저도 이과반 들어갔고, 걔가 지원한 대학에, 저도 은근히 이유 갖다 붙여서 같이 지원했죠. 그때는 저 스스로도 무슨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 지금와서 냉정히 따져보면, 그냥 걔랑 같은 학교 다니고 싶어서 거기 지원한거예요."
"잠깐만. 자기 전공이 수의학 아니지 않나? 수림공학 아니었어요? 왜, 그럼 아예 수의학과를 가지 어정쩡하게 수림공학은 또 뭐야?"
"어떡하겠어요. 나. 개 무서워 하잖어."
"하."

그녀는 상쾌하게 한 번 웃었다.

"그래도 결국은 결국은 걔랑 나랑 애인이 됐죠. 그게 작년까지 계속되었던거고. 그래서 걔랑 결혼도 하고 살림차리고 잘 살아보려고 한국에서 직장을 찾아보려고 한거죠 뭐."
"지금은?"
"헤어졌으니까, 이제 미국에서 그냥 직장 찾으려고 라스베가스까지 온 거 아니겠습니까. 지금쯤, '축하하네. 우리와 함께 한 번 잘 일 해보세' 하는 소리 듣고 있어야 할텐데, 이상하게 일이 꼬여서 갑자기 사막을 걷고 있는거고."
"좀 알 것 같네요."

사실, 계속 산림청 취직에 실패하면서 무직자로 썩는 동안, 제대로 따져보면 혜란이는 항상 내게 힘을 주려고 했었다.

오히려 베베 꼬인 성격이 되어 틱틱거린 것도 나였고, 자꾸만 밥맛떨어지는 태도로 우울함을 느껴 이상한 생각만 한 것도 나였다. 나는 혜란이가 동료 수의사와 별 것 아닌 대화나 만남을 갖는 것에 볼썽사나운 질투를 품었고, 결국 말도 안되는 싸움을 했고, 무직자 특유의 자존심 대결을 펼쳤다.

그러던 끝에 결국 나는 그녀와 헤어졌고, 그토록 사랑했던 혜란이는 내가 질투를 품을 때만해도 아무것도 아니었던, 겨우 그 동료 수의사와 약혼을 하니 어쩌니 하고 있는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지금, 같이 황야를 헤메고 있는 그녀가, "좀 알 것 같네요"라고 한 것은 자기도 그 비슷한 일들을 겪었기 때문에, 그래서 알 것 같다고 하는 듯하다는 그런 짐작을 하게 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점점 희미해진 자동차 흔적은 문득 사라져 있었다.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일 가능성이 컸다. 아까보다는 약간 파란 풀도 보이는 좀 달라진 지형이긴 했으나, 여전히 360도 어디를 둘러보아도 망망한 사막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었다.

"어떡하죠? 되돌아갈까요?"

나는 당황해서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가 답했다.

"어차피 되돌아가도 아무것도 없잖아요. 다음 버스 오려면 내일 모레까지 기다려야 되는거고."
"그럼 어떡하면 좋겠어요?"
"계속 가봐요. 이쪽에 파란색 풀이 많으니까. 이쪽에 물이 있나보네. 나 목 많이 말라요. 물 있는 쪽으로 가보자."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저주의 렌틸콩 때문에 점심을 거른 나보다, 소금기 많은 짠 멕시코 음식을 먹은 그녀가 훨씬 더 목마를 것이었다.

"그 쪽으로 가면 안돼요. 여기 자세히 보시면 지금 우리가 있는 땅이 조금 놓고 그쪽이 약간 더 남쪽으로 낮거든요. 거기에 풀이 많은 건, 물이 있어서 그런게 아니라, 햇빛이 더 잘드는 쪽이라서 그런거라고요."

나는 오른편을 살폈다. 거기에는 풀 사이를 잠깐 헤집었다. 그녀가 내 어깨위로 다가와 고개를 숙이고 풀을 보았다.

"여기 이 민들레 종류 풀 보이죠?"
"예."
"이게, 잎이 이렇게 생긴 종류는, 물이 있는 곧까지 뿌리를 굉장히 길게 뻗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뿌리를 좀 파헤쳐 보면...... 보면, 이쪽으로는 뿌리가 조금밖에 없는데, 이쪽으로는 뿌리가 계속 퍼져 있죠?"
"그러네. 신기하다."
"그러니까, 이쪽이 물이 있는 방향인거죠."
"오. 역시, 세계적인 지명도의 과학자-"

그녀는 내 어깨를 두들기며 웃었다. 일단 많이 걸어서 쉬기도 쉬어야 했고, 무엇보다 햇빛을 너무 많이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일사병을 피하려면 그늘이 필요했다.

"옷이 더러워지는 것은 좀 아깝지만, 쉬어야 하니까."

나는, 황야의 풀밭위에 반듯이 누웠다. 그리고 양복 겉옷을 펼쳐 얼굴을 가렸다. 옷 색깔이 짙었기 때문에, 햇빛을 충분히 가려 주었고, 시원한 미루나무 아래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어쨌거나 그늘로서 기능은 하고 있었다. 그녀도 내 옆에 반듯하게 누워서, 내 양복 겉옷 아래로 들어왔다.

우리는 깜깜하게 이불을 덮어 앞을 가리고 이 넓은 사막에 오직 두 사람만이 나란히 누워 있는 좀 웃긴 모양새가 되었다. 눈 앞의 빛마저 사라지고 깜깜해지니, 더더욱 적막한 고요가 느껴졌다. 한참 우리는 그렇게 누워 있었다. 그녀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대학원가고 연구하는 거 시작한 것도 애인 때문이예요?"
"예. 걘 그럴듯한 수의사인데, 수림공학 같은 거 전공하고 취직하려고 했더니 걔 한테 어울리는 좋은 데 취직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좀 전문성을 갖춰서 괜찮은 연구원이 되거나 대학 교수 되거나 하려고 대학원에 간거죠."
"참... 어떻게 보면 좀 무모하네요."
"그렇긴 그렇죠."
"그래도 토익 점수가 죽어도 안나와서 취직 못한다는 것 보다는 약간 더 그럴싸함."

그녀는 다시 웃었다. 겉옷 아래는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보였지만, 나는 그녀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누웠다.

"그런데요. 따지고 보면 지금 그렇게 무모하지도 않아요. 이게요. 보세요. 내가 원래 계획대로 대학을 무슨 상대에 들어갔다고 쳐요. 그럼, 졸업할 때 쯤이 되면, 회계사 시험을 쳐서 회계사가 되느냐, 아니면 그냥 무슨 좋은 대기업 재무팀에 들어가느냐 생각을 하겠죠. 그래서 선배들이나 아는 사람들을 동원해서 조사를 해보면, 재무팀 직원은 연봉 4천만원인데 회계사가 되면 연봉이 4천5백만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거고, 그럼 회계사가 될거란 말이예요."
"취직에 대한 자신만은 여전한 저 말투."
"그렇게 취직을 하면, 사람들이 참 현실을 잘 보고 정보를 잘 파악해서 직장을 잡았다고 하겠죠. 그렇게 하면 5백만원 연봉을 더 얻는 거라고요. 그런데, 나는 내가 눈을 감으면 눈을 감을 때마다 항상 생각이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가기 위해서 직업을 정했어요. 정말 사랑해서, 영영 잊지 못할 거 같은, 내 가장 순수했던 시절의 추억에 등장했던 등장인물과 결혼하고, 그 사람이 내 아이의 어머니가 되고, 나와 함께 가정을 꾸미도록 하기 위해서 인생의 방향을 바꾼거라고요. 그게, 그게 그렇게 멍청한 짓입니까."
"......"
"여자 하나 때문에 인생 엎었다고 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2천만원 연봉을 받는 일이랑 4천만원 연봉을 받는 일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 보다는, 그 몇 년 동안이나 내 마음속을 달구어 놓은, 그리고 평생 마음에 남을 그 사랑에 삶을 거는게, 그게 더 중요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원래, 무직자들이 무직 상태에 오래 있다보면, 합리화를 굉장히 잘 하게 되죠. 취직 못하는 것은 자기탓이 아니다. 무능한 정부의 정책 탓이다. 구조조정을 강압하는 강대국의 투기자본 탓이다."

그녀는 내 대답에 그렇게 비판의 말을 덧붙였다. 그랬지만, 나는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아리조나의 오후, 흙바닥에 같이 누워 양복 겉옷을 덮고 있기에 그녀의 얼굴을 전혀 볼 수는 없었음에도, 나는 왠지 그녀가 나의 말에 일견 공감하는 표정을 비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누워서 잠시 몸을 식힌 우리들은 다시 사막을 걷기 시작했다.

끝이 없어 보이는 이 사막에는 그 끝이 없는 느낌 덕분에 또한 저 멀리 지평선 너머에 온갖것이 다 있을 듯하다는 상상이 쉽게 들기 마련이었다. 분명히 저 서쪽 끝트머리에는 밤마다 휘황찬란한 불빛들과 도박의 정열에 술취한 중장년의 혈기가 솟아오르는 라스베가스가 있을 것이다. 북쪽에는 마법사의 궁전이 있다면, 동쪽 끝에는 용이 사는 동굴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남쪽에는 바다로 향하는 해맑은 초원이 있거나, 하늘 끝까지 오를 수 있는 계단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도 없는 사막의 고요와 약한 생명력만이 최소한의 저점에 멎어 있는 이 분위기는 또한 그만큼 사람사이의 관계라거나, 도시의 넘쳐나는 소란스러움을 달콤한 꿈으로 그리워하게 만들기도 한다.

오늘 아침만 해도, 나는 미국 남서부의 가장 개성적인 도시에 있었는데, 지금은 도저히 그런 분위기를 상상도 할 수 없는, 그 어떤 문명의 흔적도, 도시의 인간 관계도 찾을 수 없는 고요한 대지의 한 가운데에 남겨진 것 아닌가. 그런 가운데, 저 강한 태양이 온 몸을 달구면, 지금까지 생명을 유지해온 시간이라든가, 앞으로 죽음까지 이르기에 남은 시간. 생명의 유한함이라든가 의미의 한시성에 대해서 문득 문득 생각하게 되기도 하였다.

"머리 아프거나 하지 않아요? 일사병 조심하는게 제일 중요할 거 같은데."
"아직은 괜찮아요. 그래도, 정말 그늘이 있었음 좋긴하겠다."
"점점 풀 같은게 많아지고 있으니까. 버스 갈아타는 곳은 지금 완전히 잃어버린 거 같긴 하지만, 그늘은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믿어 보겠소. 근데, 자기는, 자기는 머리 안아파요?"
"나 햇빛 좋아한다고 그랬잖아요. 끄떡 없습니다."
"햇빛을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거고. 일사병에 잘 버티는 것은 또 다른거 아녜요?"

그녀의 표정은 정말로 걱정스러워하는 것이었다.

"고등학교때, 그 좋아하던 여학생은 수학여행을 안 갔거든요. 저도 그래서 이상한 핑계 대고 수학여행 안가고 학교에 남았죠. 물론, 그 여학생이랑 나랑 별 친하지도 않고 그래서 별로, 뭐 그렇게 같이 남아있었다고는 해도 별 무슨 관계의 진전은 없었습니다만, 그러고 있는데 수학 선생님이 공연 초대권이 생겼다고 보러가려면 보라고 수학여행 안간 애들한테 주더라고요... 저... 옛날 가수 폴 앙카 알아요?"
"Oh- please- stay by me- Diana-"
"그 폴 앙카 내한공연이었어요. 그게 잠실에 올림픽 공원 있는데서 했는데, 초대권을 표로 바꾸려고 하니까 오후서부터 나가서 기다려야 되더라고요. 그래서 그 때 걔는 그늘 있는데서 기다리고 있고, 내가 햇빛에서 줄서서 기다렸다가 표로 바꿨거든요. 굉장히 오래서 땡볕에 있었는데,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뭘, 그런 일을 그렇게 자세하게 기억해?"
"그날이, 걔랑 처음 이야기 많이 해 본 날이거든. 그 때 같이 잠실까지 가고, 공연 보고, 또 집에 오고 하면서 참 이야기 많이 했어요. 걔 어릴 때 이야기라든가, 요즘 집안 이야기, 나중에 미래에 대한 꿈, 그런 이야기도 참 많이 들었고."
"헤어 나올 수 없이 빠져 들었겠소."

나는 당연하다는 듯 미간에 힘을 주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답을 계속했다.

"그날 알게 된 일들이, 정말 걔를 사랑하게만든 거 같아요. 폴 앙카가 Puppy Love 부를 때, 그 조명 반사광 받은, 걔 옆모습도 정말 정말, 아직까지도 똑똑하게 기억 나고. 정말로. 정말로 사랑한다고 생각했죠."
"그런건 정말로 사랑 맞아요."
"10대의 멍청함의 패키지 상품이 아니고?"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눈동자만 재미나게 좌로 한 번 우로 한 번 움직였다.

말하고 싶은 내용이 있는데, 어떻게 말을 할지 생각하느라 뜸들이는 표정이었다. 한편 내가 민들레 뿌리를 보고 생각한 것이 얼추 맞아들었는지, 점차 주변에는 풀다운 풀이 하나 둘 늘어나고 있었다. 그녀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 직업도 없고, 취직도 실패하고 미래도 암담하고, 누구에게 뭐라도 잘했다고 내세울 게 없는 처지죠. 연애는 깨어졌고, 애인한테는 차였죠. 돈은 부족하고, 딱히 다른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예요. 그래도 사람이다보니, 남에게 자랑하고 싶기도하고, 자기 인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스스로 내세울 것도 필요하거든요. 그럴때, 들먹이는게, 옛날에 누구를 짝사랑했는데, 그건 정말 순수하고 깊은 사랑이었기 때문에 멋있었다는 거죠. 자기는 그렇게 낭만을 아는 멋있는 사람이라는 그걸, 그걸 들먹여서 그거라도 자랑하면서, 자기 인생이 그냥 실패만은 아니라고 애써 주장하고 싶어하는 거죠.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런데...?"
"그런데, 그게 아니면요. 그런식으로, 억지로 억지로 가짜로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서 굳이 모양 좋게 꾸며낸 추억이 아니라면요. 정말로 삶에 빛나는 한 순간으로 남아 있는 하루가 있다면요. 그건 정말 정말 소중한거예요."
"그게, 그냥 짝사랑하던 여학생 옆모습 정말 예뻤다 같은 거라도?"

그녀는 갑자기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내 얼굴을 한 번 빤히 쳐다 보았다. 그녀는 다시 바닥에 놓인 돌 하나를 가리켰다.

"여기 이 돌은 바로 옆의 돌 보다는 좀 크죠. 꽤 크지. 그런데, 우리는 지금 걸어다니면서 이런 돌은 한 번 제대로 거들떠 보지도 않았어요. 이런 작은 돌은 수억개가 이 사막에 널려 있거든요. 이 사막은 이렇게 끝도 없이 넓은데, 이 돌은 좀 작고, 이 돌은 그 돌 보다 조금 더 크다고요."

그녀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 한마디 한 마디를 천천히 말하였다.

"이 사막이 생기고 돌이 굴러다니기 시작한지 얼마나 됐겠어요? 몇 백만년, 몇 억년?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즐거워하고 고생하고 죽었을까.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이 황무지에 햇빛이 쪼이고 또 흙먼지 섞인 바람이 불었을까나. 그 긴 세상의 시간에 비하면,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가 100년이 되든, 10년이 되든, 그건 그냥 짧은 한 순간일 뿐이라고요. 100년짜리 인생은 이 큰 돌이고, 1년 동안 여행한 거는 이 작은 돌이겠죠."

그녀는 걸어가며 말하고 있었다. 나는 돌을 돌아 보았다.

"그러면, 사실, 한 사람의 한 평생이나, 폴 앙카 공연이 있던 그 하루 저녁이나 별 다를바 없는 비슷한 거라고요. 단 하루의 아름다운 기억은, 이 세상에서 살펴보면, 사람의 짧은 100년 인생과 맞먹는 거라고요. 둘 다 그냥 짧은 시간이예요. 그 하루의 순간을 시계로 재어 본다면 그 크기는 작겠지만, 전혀 다를 바 없는 하나의 돌로, 대신 사막의 어느 구석에 있는 작은 금강석처럼 빛나고 있는거죠."

그녀는 나를 쳐다보고 있는 듯 하였다. 나는 그녀의 표정 또한 상상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바라보지 않고, 그저 앞만 보며 걸었다. 아마 그녀는 자신의 말이 갑자기 너무 감정과 낭만을 스텝 꼬인 왈츠처럼 펼쳐놓은 것은 아닌가 부끄러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우리는 한참동안 별 말 없이 계속 걸었다. 갑자기 말이 없어져서 좀 어색해 졌기에, 나는 눈 앞에 보이는 풍경에 좀 더 집중하고 있었다. 풀이 좀 더 많은 곳인가 싶더니, 이런저런 다른 식물들이 눈에 보였다. 곧 우리는 선인장들이 자라고 있는 곳에 도달하게 되었다. 나도, 그녀도 시선은 선인장들에 고정되었다.

"어, 선인장이다."

나무가 자라는 것을 수년간 연구해오고, 직업으로 삼은 사람에게 사막을 헤메다가 선인장을 발견했을 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어떻게 하면 책상위에서 키우는 선인장 화분에 꽃피는 걸 볼수 있는가?"

는 결코 아닐 것이다. 내 전공은 낙우송이었지만, 라스베가스에 면접을 보러 온답시고 이것저것 이 근방의 대표적인 식물은 한 번 훑어 보았기에 아는 것이 있었다. 면접 생각을 하니, 또 다시 망할 연구원 취업 금지 법령 때문에 짜증이 되돌아오는 듯 했지만, 그것보다 여러 선인장들을 세세히 관찰하는게 우선이었다.

일단 사람 키만한 팔다린 달린 큰 선인장을 둘러 보았다.

"이 선인장이 크기가 크고 물이 많이 들어서 사실 이걸 잘 하면 꽤 마실게 있는데, 지금 우리는 도구가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래서......"

나는 옆에 있는 나지막한 작은 선인장의 바닥을 파 뿌리를 드러내게 했다. 그리고 구두로 건드려서 선인장을 뽑았다. 나는 가방에 있는 빈 맥주캔을 접었다 폈다해서 날카롭게 찢어지게 해서는 선인장의 한쪽을 그었다.

"이렇게 하면, 흰색 나무즙 같은게 나오죠? 이게 보통 굉장히 써서 이거 잘못먹으면 선인장 물 먹은거 보다 더 갈증 나거든요. 그런데, 가시 모양이 이런식으로 나온 선인장은 이 흰색즙을 먹어도 쓴 맛이 거의 없어서 괜찮은 종이예요."

나는 혀끝으로 한 번 핥아 보았다. 제대로 보았다. 쓴 맛이 거의 나지 않았다. 나는 선인장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선인장을 들고 고개를 젖혔다. 똑똑똑... 조금씩이었지만 끊임없이 물이 흘러나왔다.

"자기는, 자기는 안마셔도 돼요?"
"점심을 못먹어서 저는 목이 덜 말라요. 다 마셔요."

그녀는 정말 목이 말랐는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계속 선인장만 붙들고 있었다. 나는 몇 개의 선인장을 더 파내서 그 물을 바싹 마른 맥주캔에다 모아서 한 잔을 더 건냈다.

"정말 안 마셔도 괜찮겠어요?"

그녀가 나를 걱정했다. 나는 괜찮다고 했다.

그녀와 이야기를 하면서 걷느라 어딘지 모르게 정신이 좀 이상해지긴 했지만, 분명한 사실은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우물이나 개울을 발견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못한다면, 이런 선인장 따위로는 이틀도 못버티고 우리는 쓰러질 것이 뻔했다. 선인장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기보다는, 보다 확실하게 길을 찾을 방법을 알아야 했다.

나는 몇몇 식물들의 뿌리를 좀 더 파헤쳐 보고, 고민에 빠졌다. 물이 있는 방향은 대강 확실하지만 얼마나 가까울지 멀지가 도무지 정확한 판단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잘못하면 죽을 것이다. 심장이 겁에 질려 다시 빠르게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오늘 하루에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고. 일단 어디서든 물만 찾으면 거기서 목 축이고 내일까지 쉰뒤에 다시 왔던 길 되돌아가기만 하면, 여행사에서 오는 버스를 타고 돌아가면 되긴 할텐데......"
"그럼 되겠네. 다시 가죠. 아직 충분히 걸을 힘 있어요."

물을 한 잔 마신 그녀는 한결 더 밝아진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듣자 이내 마음은 안정되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다시 길을 나섰다. 다행히 망망한 사막 저편으로 멀리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중에는 사람인지 차인지 무엇인가 좀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것도 희미하게 보여서 잠시간 큰 기대를 품기도 했지만, 이내 그 희미한 것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아마 실제로 신기루일 가능성도 높았다.

아까 폴 앙카 이야기를 했기 때문인지, 그녀는 60년대 노래들을 콧노래로 낮게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상황에 비해 지나치게 태평하다는 문제점이 있긴했지만, 노래는 컨트리 송 분위기도 나는 것이 적당히 아리조나 사막에 어울린다면 어울렸다.

"어, 그 노래 Chains 아녜요?"
"제목은 잘 모르는데."
"들어봐요. 맞을 거예요."

나는 내 MP3 플레이어를 꺼내서, 이어폰을 그녀의 귀에 꽂아 주었다. 그리고 Chains를 찾아 주었다. 그녀는 고개를 까닥거리면서 박자를 맞추었다. 그 동안 나는 선인장들을 유심히 보며, 노래를 같이 따라 불렀다. Chains, my baby's got me locked up in chains. And they ain't the kind that you can see...

"어, 그 노래 아닌데."

그녀가 말했다. MP3 플레이어를 보니, 노래를 잘못 골라서 Ask Me Why를 재생하고 있었다. 내가 노래를 바꾸려고 하자,

"아녜요. 이 노래도 듣기 좋아요."

하면서 계속 노래를 들었다. I love you, 'cause you tell me things I want to know...

어느새 해는 서쪽으로 완연히 기울어 있었다. 해가 지고 밤이 되기 전까지는 물을 찾아야 할 것이다. 밤이 되면 잘 보이지도 않거니와 분명히 꽤 추워질 것이 분명한데, 그렇게 되면 더 공포감은 심해질 것이고 길찾기는 더욱 어려워 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니 점차 조바심이 났다.

노래를 하다보니, 그녀와 나는 주로 옛날 노래들을 중심으로 좋아하는 노래와 싫어하는 노래들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대체로 그녀와 나는 좋아하는 노래들이 비슷했다. 싫어하는 노래들은 좀 달랐지만, 무엇보다도, 50, 60년대 해묵은 유행가들을 좋아한다는 취향자체가 비슷하다는 것부터가 신기한 점이었다.

우리는 비틀즈냐 롤링스톤즈냐 논쟁에서 어찌 롤링스톤즈 정도로 비틀즈와 비교할 수 있겠냐는 점에서 의기 투합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은 문명세계 저편에서 우리와 같이 죽음의 어두운 골짜기를 거니는 사람과는 상대도 되지 않는 평화를 누릴 롤링스톤즈 지지 평론가들을 함께 힐난했다. 그녀는 60년대 재즈 음악가들에 대해서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고, 나는 해변용 록큰롤의 단촐하고도 흥겨운 세계를 설파할 기회를 잡기도 했다.

Surfer Girl을 그녀가 부르는 부분과 내가 부르는 부분, 화음으로 부르는 부분까지 나누어 연습하고, 리허설까지 한 두어번 완벽하게 마쳤을 무렵에, 우리는 드디어 나무다운 나무가 서 있는 작은 풀밭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그늘입니다. 그늘."

그녀는 대답도 하지 않고 먼저 그늘 아래에 앉았다.

"이 그늘에 앉아 본 사람은 어쩌면 지금껏 지구가 생긴이래, 내가 처음일 수도 있는거죠?"
"충분히 그럴 수 있죠. 좀 비참한 사실입니다만, 지금껏 오는 길에 사람 흔적이 한 동안 없었으니까."
"그럼, 내가 이 그늘에 이름을 붙일 수도 있는거 아냐."
"그렇죠."
"그럼, 내가 오늘 부로, 이 그늘을 '취업그늘'로 명하노라."

그녀는 나무에 기대어 반쯤 누운 듯한 모습이었다.

사실 무엇보다 기쁜 것은, 길의 방향을 제대로 찾았다는 것이었다. 이런 활엽수는 물이 꽤 있는 곳에서만 자랄 수 있고, 그렇다는 말은 근처에 분명히 꽤 물다운 물이 있다는 뜻이었다. 더군다나, 그늘에 앉아 하늘을 보니, 매인지 독수리인지 무슨 큰 새가 높이서 빙빙돌고 있었다.  저런 육식성 새가 사는 것은 근처에 새가 사냥할 작은 동물들이 있다는 뜻이고, 그것은 또한 그런 작은 동물들이 마실 물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 점은, 사막에서 사망의 공포에 질리기 쉬웠던 나에게 꽤 중대한 위안이었다.

"무슨 재미없게 취업그늘입니까."
"어때서요. 괜찮잖아요. 혹시 모르잖아요. 나중에는 유명해져서 미국 사람들 중에 취직 안되는 사람들이 여기 그늘에 와서 쉬고가면 취직된다는 미신이 퍼질 수도 있잖어. 그래서 매년 수만명씩 찾아올지..."
"아리조나에 있는 사막이 무슨 팔공산 갓바위입니까?"
"팔공산 갓바위도 처음에는 비슷하게 시작했을거라고요."

그녀는 빙긋이 웃었다. 나도 같이 웃으며, 그녀 옆의 그늘에 붙어 앉았다. 과연 햇빛을 제대로 가려주고 있어서, 일사병으로 뜨거울 우리를 적당히 식혀 주기에 충분할지 싶었다. 사막의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그녀와 나의 몸을 휘감았다.

한동안 우리는 다리를 쉬고 햇빛을 피하며 앉아 있었다. 그렇게 앉아 있으면서, 나는 아까부터, 사막 저편에서 움직이던 그 이상한 물체가 점점 이곳으로 다가오는 것을 알았다. 그 물체는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모양이 낮고 빠른 편이었고, 자동차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아 보였다. 그 물체는 좀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움직였는데, 확실한 것은 갈수록 계속 우리쪽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점차 이상한 느낌을 받아, 나는 계속 그 물체를 관심있게 보다가, 나중에는 그 물체만을 가만히 응시하게 되었다. 물체가 다가오면 다가올 수록 나는 설마설마하다가, 마침내 그 물체가 완연한 형상을 갖추고 정체에 대해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 일어섰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고 있는데, 곧 그것은 가벼운 이동으로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것의 정체는 내 몸집의 절반은 넘을만한 덩치의 산 사자, 퓨마가 나를 정면으로 쳐다 보는 것이었다.



5.

나는 무심코 한 발 앞서 나가며 다리를 벌리고 섰다. 그녀를 내 등뒤에 숨기기 위해서 였다. 이미 행동을 취해버리고, 한층 더 가까워진 퓨마를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내가 강아지 조차 무서워하는 동물 공포심을 느끼는 인간임을 깨달았다. 내 등 뒤에 선 그녀가 호흡이 가빠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정도로 그녀는 퓨마를 두려워 하고 있었다. 물론 나 역시 정신이 멍할만큼 무서웠다.

나는 이 난국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닥치는데로 아무렇게나 상상하며 온갖 지식들을 머리 굴려 떠올려 보았다. 당연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의 숨소리가 점점더 거칠게 들렸다. 나는 지리산으로 현장 연구를 나갔을 때, 지리산 공원관리공단 직원이 이야기해주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래서 그녀의 손을 잡아 내 어깨에 얹으며 말했다.

"원래 저기 저... 독사 같은데 물려도, 독사 독 보다 훨씬 더 위험한게, 겁에 질려서 호흡곤란되는 거 거든요. 실제로 그것 때문에 신경이상 잃으켜서 위험해지는 경우가 훨씬 더 많고요. 그러니까, 너무 겁먹지마요. 겁먹는게 훨씬 더 위험한 거라고."

겁먹지 말라고 하는 사람이 지금 겁이나 죽겠는데다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아무것도 아닌 애완동물 따위를  두려워해서 쩔쩔매는 걸 두 눈으로 본 그녀에게 내 말은 참으로 설득력 없게 들릴 것이다. 그런 당황한 우리를 한심하게 여기는 듯, 퓨마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걱정마요. 걱정마. 다 우리 먼먼 조상들은 저런 애들 잡아다가 집에서 가르쳐서, 헬로 키티도 만들고, 톰과 제리도 만들고 한거라고요."
"왜, 저, 그런거 있잖아요. 몸을 크게 보이게 움직이는게, 맹수들에게 겁을 줘서 쫓는데 도움 된다고."

그녀는 내 어깨를 힘을 꽉 주어 잡고는 그렇게 이야기했다. 맞는 말이었다. 강원도 산자락에서 참나무 뿌리 같은거 뒤지다가 반달곰이나 멧돼지와 마주치면, 그런식으로 행동하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게 이 사자 사촌처럼 생긴 사막 괴물에게도 통하리라는 확신이 전혀 들지 않을 만큼 이 놈은 크고 무시무시하게 생겼다는 점이 큰 문제긴 했다.

"좋아요. 좋아요. 내가 몸을 크게 크게 한 번 보여 볼께요. 그리고, 야생동물들은 대부분 사람을 사람을 무서워 하거든요. 그러니까... 뭔가 사람다운 것도 소리도 좀 내고..."

나는 움직임과 크게 보이는 동작을 동시에 하기 위해서 퓨마를 바라보며, 양 팔을 하늘로 뻗었다가 앞으로 뻗었다가 하는 동작을 반복했다. 퓨마의 눈빛은 딱히 무슨 느낌을 주고 있지는 않았지만, 나에게 관심을 두고 있었다. 중간에 퓨마는 잠시 으르렁 거렸는데, 그 때 드러나는 쌍절곤 만한 이빨들은 나를 흠칫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그냥 다리에 힘이 빠져 머리를 싸쥐고 웅크리고 싶었지만, 그래봐야 퓨마의 공격기회를 자극할 것일 뿐이었다.

육식동물을 만났을 때, 개 울음소리 비슷한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흉내내는 것은 결코 도움이 못된다는 이야기를 들은적 있었다. 그런 것은 그야말로 개소리일 뿐인것이다. 지극히 인간다운 그러나 확신에 찬 소리가 도움이 된다고 할 것이다. 나는 최대한 근엄한 목소리로 크게 울리지만 너무 크지 않은 목소리가 되도록 조절했다. 나는 퓨마를 보고 떨면서 말했다.

"여기는 여기는 우리가 처음 발견해서 이름 붙인 취업그늘이다. 여기서 쉬면 취업이 되는 거다. 너는 실직, 실업, 무직 그런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니, 그러니. 그러니. 여기서 물러가라. 저리로 멀리로 가란 말이다."

겁에 질려 덜덜 떨면서 하는 이런 한심한 이야기로는 그녀에게 어떠한 믿음도 줄 수 없음이 분명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퓨마 역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적극적으로 퓨마를 쫓는 것만이 우리가 뭔가 다음 단계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결정적인 고비라는 점이었다. 퓨마 때문에 정신이 흔들려서, 나는 지금 내가 어디서 뭘 하다가 이렇게 퓨마를 만났는지 그것또한 제대로 생각이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게요. 이게. 여기가 국립공원 근처 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동물들에게 먹이를 많이 준다고요. 그래서 동물들이 토실토실하게 살이 쪄 있고 숫자도 많아요. 그러니까 퓨마도 걔네들 잡아 먹지 우리는 안 건드릴 거라고요. 우리한테는 입맛도 없을 거라고. 그냥. 그냥 쫓아버리면 돼요. 그냥."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내 스스로 용기를 돋구어 보려는 말이기도 했다.

퓨마가 한 걸음, 두 걸음, 앞으로 다가 왔다. 나는 팔을 뒤로 뻗어 그녀의 옆쪽을 가리는 동작을 취했다. 저 축구화 스파이크 같은 것을 입에 달고 다니는 정신 나간 괴물이 달려 든다면, 그녀의 옆쪽에 내가 팔을 하나 뻗은 들 무슨 방어가 되겠냐만은, 그래도 놈이 다가오는 데 그냥 내가 가만히 있을 수 만은 없지 않은가.

나는 퓨마의 눈을 가만히 응시하였다. 그리고, 더욱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저리. 저리 멀리 가라. 우리는 속세의 때가 묻은 인간. 야생의 자연인 너희들이 마주할 게제가 아니다. 당장 몸을 돌려 사라져라. 내가 여기까지 원래 뭐하러 온 건지 넌 상상도 못할거다. 안그래도 취직 묶여서 괜히 인생 어긋나 휘둘리는 거 같아 짜증나 미치겠는데. 너까지 왜 이러냐"

나는 이 동물을 쫓겠다는 신념과 적대감, 그리고 어떤 울분과 애환마저 담겨 있는 소리로 울부짖었다. 내 사력을 다한 열변에 퓨마도 어떤 애틋함을 느꼈는지, 혹은, 이것이 함부로 공격하면 안되는 인간의 한 무리임을 명백히 느꼈는지, 뭔가 주춤하는 태도였다. 나는 이 세를 몰아서 퓨마를 밀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팔다리를 움직이면서 닥치는대로, 인간다움을 과시할 수 있는 공포감을 줄 수 있는 말들을 아무것이나 소리쳤다.

"너 자꾸 그러면 아저씨가 이놈 한다. 이놈. 넌 어릴 때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 최소한 자기 밥값은 하고 살아야 하는 거 아니냐. 명절날 되면 결혼 못했다고 놀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넌 모르지. 세상에 TV속의 시어머니가 얼마나 무서운 건지 상상이나 해 보았겠느냐 이말이다."

놈은 확실히 주춤주춤했다. 정신이 이상해질 듯한 이 분위기에 나는 일종의 흥에 겨운 이상한 카타르시스 비슷한 감정마저 느껴져서 진정으로 인간성을 동물에게 과시하며, 괴로움을 준다는 생각으로,

"인테그랄 유 디 브이 이퀄스 투 유 브이 마이너스 인테크랄 브이 디 유!"

하고 부분 적분 전개식을 뜬금없이 읊었다.

언제나 악몽처럼 선명히 떠오르는 학부 시절 미적분학 F학점의 번민이 사정없이 끓어오른다. 그리고 그 정신이 수학의 오묘함이나, 계산의 공학적 이치, 그리고 학사경고의 잔인함 따위는 상상도 못할 퓨마의 영혼을 두들겨 팬다는 전략 같지도 않은 전략이었다.

동물 앞에서 크게 보이기 위해서 팔 다리를 휘젖는 모양은 어느새 자연스럽게 익숙한 국민체조 첫번째 동작으로 변했거니와, 그런 모양새로 헛소리를 소리지르는 모양은 말이 아니었다. 어딘가 문제가 많은 듯한 내 모습을 보고, 과연 퓨마는 상대해 봤자 자기만 추해진다는 생각으로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더니, 결국은 몸을 돌려서 반대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안심이었다. 어처구니 없는 방법이었지만, 겨우겨우 퓨마를 쫓은 것이었다. 나는 갑자기 안도한 나머지 다리에 힘이 풀려 그자리에 푹 주저 앉았다. 이 무슨 어림없는 일을 또 하나 겪은 것이란 말이냐.

그런데, 갑자기 퓨마가 빠른 속도로 원을 그리며 멀리서 움직이더니, 옆쪽으로 돌아와 갑자기 그녀를 향해 달려드는 것이었다.

"아니 이 자식이-"

순간 나는 갑자기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정말로, 뭐라도 봤다면 그 따위 아무 생각 없는 행동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몸을 날려 퓨마의 어깨죽지깨를 양 다리로 감아 올리며 양 손으로 퓨마의 뺨을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순간적으로 잠시 맨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죽기 직전이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도구들과 퓨마의 약점 같은 것들을 순식간에 한 번 떠올렸다.

그리고, 나는 반사적으로 가방에 손을 뻗었다. 퓨마와 같은 육식 동물은 놀라울 정도로 예민한 후각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났다. 나는 가방속에 잠들어 있던, 광폭한 냄새를 자랑하는 멕시코 요리와 지옥에서 불길처럼 치솟아 나오는 향의 렌틸콩 카레를 꺼냈다. 그리고 그 음식들을 퓨마 놈의 코에 정통으로 갖다 붙여 닥치는데로 쑤셔 박았다.

퓨마는 길게 으르렁 거리며 포효하면서 미친듯이 날뛰어 튕기듯 도망쳤다. 퓨마는 온몸이 부서져 내리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정신없이 전속력으로 달려 도망쳤다. 그러면서도 놈은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길길이 날뛰며 계속 괴성을 질렀다.

베토벤의 14번 피아노 소나타와 현영의 "누나의 꿈"은 퓨마와 같은 동물의 귀에는 그저 인공적인 잡다한 소리의 리드미컬한 재연일 뿐이다. 그게 그거다. 하지만 인간의 감수성으로 들으면 그 비슷한 소리 뭉치는 전혀 다른 감정을 자아낸다. 어느 한 쪽의 노래 때문에 심신의 평안을 얻는 반면, 다른 한 쪽 때문에 머리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멀리서 부터 냄새로 동물을 감지하고, 자신과 다른 퓨마의 영역권을 느껴야하는 퓨마는 극도로 후각이 예민하다. 그런 퓨마에게 이토록 강렬한 냄새라니. 하물며, 실패한 렌틸콩 카레의 냄새는 이 관대한 나의 입맛마저 실의에 빠져 허무의 깊은 늪에서 침전하게 하지 않았는가. 최고의 위력을 가진 멕시코 소스와 결합된 이 악마의 토네이도와 같은 렌틸콩 카레 냄새에 퓨마는 단장의 고통을 경험했을 것이다.

퓨마를 쫓은 후에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허겁지겁 퓨마가 달아난 반대방향으로 달렸다. 조금이라도 그 동물과 떨어져야 겠다는 본능적인 경계심이 온몸으로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달리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쉴 때까지도 나는 한 동안 정신이 멍했다. 나는 한국에 돌아가서, "면접 보러 갔다가 사막 한 가운데서 퓨마를 만났는데 맨손으로 격투하다가 콩요리를 퓨마 콧구멍에다 넣어서 물리쳤다"고 말하면 과연 누가 믿어 줄까 한참 생각하고 고민해 보았다. 퓨마는 사실 상당히 만나기 어려운 동물이기도 한데, 이게 도대체 무슨 정신나간 소동인지 헛웃음마저 나오게 하는데가 있었다.

겨우겨우 마음을 추스리고 다시 움직이려고 하는데, 그녀가 내 뒷모습을 보고 말했다.

"목 뒤에 할퀸 상처 있네요. 꽤 깊네."

그 말을 듣고 손을 뻗어 만져 보니, 피가 묻어 났다. 퓨마와 격투할 때 발톱에 할퀸 것이지 싶었다.

"빨리 누구라도 만나야겠네요. 사막에서는 건조해서 상처가 잘 안아무는데다가, 계속 먼지바람이 불어서 소독안하면 좀 문제가 생기기 쉽거든요."

나는 그렇게 말하니 다시 좀 겁이 나고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그 말을 듣고는 그녀가.

"잠깐만요. 가만 있어봐요."

하더니, 그대로 나를 세워두고, 목덜미의 상처를 혀로 핥고는 침을 발랐다. 처음에는 그녀의 체온 때문에 따뜻했고 나중에는 그녀의 젖은 혀 때문에 촉촉한 느낌이 느껴졌다. 나는 머쓱해졌다.

"에... 제가 할게요."
"얼마나 몸이 유연하시길래, 자기 목덜미를 핥을 수 있어요?"

나는 잠자코 가만히 있어야 했다.

한참을 더 걸은 끝에, 우리는 멀리 조그만 오두막이나 천막 비슷한 것이 있는 것을 보았다. 아. 드디어 살았구나. 거기서는 희미하지만 연기마저 피어오르고 있었다. 요리를 하거나 불을 만들었다는 증거였고, 그말은 거기에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갑자기 다시 기운이 솟기 시작했다. 그녀에게도 기쁘고도 떨리는 목소리로 "저기 저기 집 같은 거 보이죠. 인제 됐어요. 인제 우리 살았아요."하고 떠들기도 했다.

사막은 평탄하고 제대로 된 나무 한 그루 없는 땅이었기에 눈에 멀리 오두막이 들어왔다한들, 아직 걸어야할 길은 굉장히 멀었다. 하지만, 이제는 분명한 목적지와 뚜렷한 희망이 생겼고, 덕분에 한결 걷는 것은 수월하고 즐거웠다.

퓨마 때문에 놀란 가슴이 좀 진정되자, 그녀와 나는 다시 잡다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에게 서울 시내와 로마의 맥주 맛이 좋은 집들을 소개하며 이런저런 평을 곁들였고, 그녀는 샌프란시스코와 서울의 커피 맛 좋은 집들을 가르쳐주며 다양한 제반 지식을 알려 주었다. 맥주와 커피는 서로에게 상당히 낯선 분야였기 때문에, 우리는 스승과 수제자처럼 서로 경쾌한 교육과 학습의 즐거움을 나눌 수 있었다.

줄사초 종류의 짧은 풀로 뒤덮인 나지막한 언덕배기를 넘어서고 나서야, 우리는 천막에 도달했다. 천막은 매우 낡은 것이었지만, 그 크기는 꽤 커보였고, 또 노련한 솜씨로 세운 것인지 꽤 견고해 보였다. 천막 주변에는 돌을 모아 만든 화덕과 배수로 표지들이 있었다. 화덕 앞에 밥을 지으시는지 한 나이든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할머니를 발견하자 나는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빈 손임을 보였다.

"Hello, there-"

멀리서부터, 나는 긴 소리를 질러 할머니께 인사를 했다. 중국계로 보이는 할머니는 처음에는 아주 놀라는 듯 하더니, 이내 무뚝뚝하면서도 너무나 일상적인 평범한 표정이 되었다.

할머니는 우리를 보자 마자 우선 플라스틱 탱크에서 물을 받아 물 부터 한 그릇 건넸다. 할머니는, 바닥의 자갈을 집어 물그릇에 두서넛쯤 집어 넣었다. 심하게 갈증이 나는데 갑자기 너무 맑은 물을 먹으면 삽투압이 엉켜버릴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할머니가 물에 자갈을 조금 탄 것은 노련한 행동이었다.

나는 물을 그녀에게 전달했다. 지금까지 오면서 선인장에서 나온 물을 한 모금 먹었을 뿐, 그녀는 그 먼 길 동안 아무것도 마시지 못했다. 그녀가 물을 급하게 들이켰다. 급하게 마시기에, 그 물이 그녀의 콧잔등에 튀었고, 그녀의 뺨에도 그릇을 따라 물자국을 남기었다.

나도 물을 마셨다. 내가 지상에서 맛본 가장 화려하고 장엄한 음료였다. 말라 붙은 입안에 물이 쏟아져 들어오자, 그 물의 차가운 온도가 씁쓸한 입맛과 섞이며 묘한 달콤한 맛으로 변하였다. 목을 타고 물이 흘러 들어 오고 배에 차가운 온도가 전해지자 나는 머리에서부터 손끝까지 거의 전율에 가까운 깊은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순식간에 물 한냄비를 마셔 없앴다.

머리칼 끝에 물이 조금 젖은 그녀는 물을 마시고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나도 그녀를 보고 웃었다. 천막 앞에 앉은 그녀는 할머니에게로 다가 갔고, 나는 천막 앞에 서서 먼 곳까지 다시 한 번 주욱 둘러 보았다.

"Do you speak English? E-ngli-sh-?"

그녀가 할머니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그동안 내가 살펴보니 오후의 해가 많이 기울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모래안개 때문이지 왠지 약간 햇빛의 밝기가 덜 해진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시 한 번 방향을 가늠해 보니, 우리는 처음부터 대체로 지금까지 줄곧 동쪽으로 걸어온 셈이었다. 천막은 언덕배기의 입구쯤에 자리잡고 있었고, 언덕은 완만한 경사로 이어져서 곧 산길이 되는 듯 보였으므로, 지도 같은 것이 있다면, 대략이나마 지금 위치를 짐작할 수도 있을 법 했다.

한편 그녀는 할머니와의 의사소통이 쉽지 않은 듯 싶었다.

할머니는 영어에는 능숙한 듯 보였지만, 귀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큰 목소리로 한 단어 한 단어 또박또박 말했지만, "go", "from", "to", "water" 같은 평범한 단어 외에는 거의 서로 통하지 않았다. 그녀는 중국어 단어나 한자를 이용해서 할머니에게 뜻을 전하고 뜻을 받으려하기도 했다. 이 지역 사막의 지형에 대해 이야기하는데는, 스페인어 단어들이 많이 이용되는 듯도 했기에, 그녀는 스페인어를 이리저리 상상해서 사용해보기도 했다.

천막안에는 다양한 동물 가죽들이 이리저리 깔려 있었고, 동물뼈나 고기로 보이는 것들이 이런저런 천에 덮여 쌓여 있기도 했다. 한참 이야기 하다 보니, 할머니는 나에게 손짓하였다. 천막안으로 들어오라는 듯 했다. 그녀와 나는 할머니와 함께 천막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갑자기 사방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나는 천막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하늘을 보았다. 먹구름이었다.

아까부터 햇빛이 좀 어둑어둑해진 것은, 바로 구름이 모여들고 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삽시간에 하늘에 검게 가득찬 먹구름은 그 강렬했던 태양을 완전히 가리고, 낮인데도 사방에 흑암을 가져 오는 거대한 권세를 부렸다. 곧 후둑후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이내 우리는 사막을 적시는 시원한 빗줄기를 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천막 뒤쪽이 한 번 번쩍거리며 환해졌다가 어두워졌다. 곧이어 땅을 울리는 거대한 천둥소리가 전해졌다. 이내 여기저기에서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의 굉음이 이 조그마한 천막 따위는 한숨에 훅 불어버릴 뜻 마구 세상을 뒤흔들었다. 점차 격렬해진 천둥번개가 마치 세상을 뒤집어 부수어 버릴듯하게 무시무시했기에, 나는 좀 겁에질려서 그녀 곁에 바짝 붙었다.

"나, 천둥번개 좋아하는데."
"예?"
"신기하잖아요. 원래 자연이라는게 이렇게 그냥 가만히 있는 걸로 보이기 쉬운데. 천둥번개는 막 빠르게 번쩍번쩍하고 급하게 소리도 내고 하니까."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아요?"

그녀의 말소리의 일부가 잘 안들릴 만큼 천둥소리는 크고 매서웠다. 방금전까지 끝없이 계속되는 지평선에 영원처럼 쏟아져 내리던 무한한 햇살이 있었다라고는 도저히 상상도 하기 어려울만큼 어두운 먹구름이었다. 그리고 그 우주의 한 축과 같은 크기인, 먹구름의 거인이 한껏 자신의 위력을 과시하듯 천둥과 번개를 쏟아붓고 있었다. 그것은 천지창조의 위대함이나 묵시록적인 거룩함이 서려있는 듯 하다는 느낌마저 들게 했다.

"번개가 구름이랑 바닥이랑 전기가 통해서 생기는 거니까. 꼭 하늘과 땅이 근엄한 목소리로 뭐라고 뭐라고 말하는 그런 느낌들지 않아요? 말 없는 과묵하고 조용한 사람이, 아주 가끔, 아주 가끔 정말로 중요한 한 마디 속내 들어내서 한 마디 하는 거 같잖아요."

근처에 스치기만해도 당장에 증발해 버릴 거라는 생각이 들만큼 번개는 강했는데, 그녀는 마냥 웃는 얼굴로 그 광경을 살펴보고 있었다. 번개가 반짝일 때마다 하얗게 비치는 그녀의 얼굴은 아까 급하게 마신 물 때문인지, 아니면 빗방울이 튀었기 때문이지, 아직까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그녀는 쏟아지는 빗방울에 손을 내밀어 손을 씻고는 그 물을 모아 다시 얼굴을 씻었다.

나는 그녀에게 기대어 과연 그런가 하며 천둥소리를 듣고 있다가, 과연 아니다 싶어 움찔하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태연하게 그 모든 것을 즐기고, 또 점차 말이 통하는 부분이 생겼는지, 할머니와 가끔 웃음을 곁들여 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무슨 사기 비슷하게, 잠깐 사이에 그 어마어마했던 비는 그치고, 다시 황야의 뜨거운 태양이 빛을 내 뿜었다. 아직 덜 걷힌 구름 사이로 해가 나타나, 빛이 줄기처럼 쏟아지는 저멀리 동쪽 땅이 눈에 들어왔다. 곧 바싹 마르겠지만, 젖은 돌 사이를 흐르고 있는 빗물은, 마치 이 거대한 사막이 다시 깨어난 듯한 깊은 생명력을 보여 준다고 생각했다.

긴 대화 끝에 그녀는 할머니에게서 그랜드 캐년까지 가는 방향과 부지런히 걸어가면 오늘 해가 지기 전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여기까지 와 봤는데, 가봐요. 재밌을 거 같네."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냥 이 천막에서 오늘 밤을 난 뒤에, 다시 원래 버스에서 내린 곳으로 돌아가서 안전하게 돌아가는 쪽이 더 낫지 않나 하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모습과, 그녀가 서 있는 배경인, 소나기가 스치고 지나간 뒤에 맑게 개여 오후 햇빛에 반짝이는 이 사막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나도 왠지 좀 더 걸어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인사를 하고 떠나려 하자, 할머니는 내 오른손을 붙잡고, 그녀의 왼손을 잡았다. 그리고, 할머니는 우리의 두 손을 한 대 포개어 놓았다.

빗물에 씻은 그녀의 손은 다시 차갑고 말랑말랑했다. 할머니는 우리에게 뭐라고 불분명한 발음으로 영어인지, 중국어인지, 스페인어인지 모를 말을 몇 마디 아주 신신당부하는 목소리로 들려주었다. 무슨 말인지 알수는 없었지만, 나는 할머니의 말투가 너무나 진지했으며, 거기에 왠지 모를 깊은 행복감 같은 것도 있는 듯하여, 이상하게 감동적이었다.

우리는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어 다시 할머니의 오두막이 보이지 않을 만큼 걸어 뒤를 돌아보자, 지금까지 걸어온 이 드넓은 황야의 지평선이 석양으로 물들고 있었다. 온통 바위와 돌들을 붉게 하는 저녁놀은 마치 이 지구를 먼 외계의 외딴 행성인 듯 보이게 하였다. 그리고, 이 인생의 굳건한 기억의 한 자락을 차지할 오늘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온통 붉은 빛으로 마음을 사로잡게 하였다.

나는 내 손을 들어 손가락을 움직이며 손등에 어린 붉은 저녁 빛이 어떻게 변하는 지 가만 보았다. 그녀도 나를 보고 따라했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반사하는 저녁 햇빛은 그대로 이 지구의 황야에서 언제까지나 기억될 한 장면으로 남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녀가 서쪽 하늘을 보고 있는 모습을 말없이 계속 쳐다 보았다.

"가죠. 인제."

그녀가 말했다. 우리는 석양에 등을 돌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6.

"나 이상해. 토할거 같어."

그녀가 또 다시 길을 가나 멈춰 섰다. 그녀는 가슴에 한 손을 얹고 얼굴을 찡그렸다. 길은 점점 험하고 가파른 바위투성이 산길이 되어가고 있었고, 햇빛은 점점 사라지고 있어서 어느 새 곧 어둠이 찾아올 듯 하였다.

"아까 물 너무 급하게 마시다 체했나보다."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파리해진 그녀의 질린 얼굴을 보니, 물 마시다 체한 것은 아니지 싶었다.

"고산병 종류인 거 같은데요."
"고산병이요?"
"여기있는 나무 같은 거 보면, 전형적인 고산 관목이거든요. 지금 지대가 많이 높다구요. 높은 지역을 우리가 걷다보니까,
기압이 낮고 산소가 희박하고, 그래서 조금만 걸어도 숨이 쉽게 막히고, 좀 심하게 걸으면 병으로 도진다고요."
"그래서 그럼 속도 안 좋아지고 그런거예요?"
"열도 나고 구역질도 하게 되고 그렇죠. 산소를 많이 들이 쉬거나, 푹 쉬는게 유일한 해결책인데......"

황무지를 가로질러 끝도 없이 걸어와서는, 지금은 영문도 모르는 바위산의 좁은 비탈을 오르고 있으니, 산소도 구할 수 없고, 안락한 침대와 따뜻한 욕조, 편안한 맛사지 같은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형편이었다.

"여기 이거 좀 씹어 볼래요? 그런데로 약효가 있을 거라고요."

나는 옆에 있는 나뭇잎을 뜯은 뒤 닦아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말없이 고분고분 나뭇잎을 받아 씹었다.

사실 그 나뭇잎은 약초도 뭣도 아무것도 아닌, 그냥 평범하고 아무 성분도 없는 산양이나 뜯어먹는 나뭇잎이었다. 곧 해가 질 텐데, 겁에 질려 허둥대기 시작하면 무엇보다 큰 일이었기에, 그냥저냥 진정이 되도록 아무거나 약이라며 내민 것이었다. 지금 같이 체력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그 정도 위약효과만 가지고도 어느 정도는 증세에 도움이 될 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잠깐만. 잠깐만."

뒤에서 따라오던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나를 세웠다. 우리는 걷는 속도가 확연히 느려져 있었다. 그녀는 내 어깨를 짚으며 한참 서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에는 힘이 부족했다.

"천천히 조금씩 조금씩 가자고요."

내가 말했다. 그녀는 한쪽 눈을 감으며 한 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한 번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몇 발짝 옮기기도 전에, 삽시간에 황야에는 밤이 찾아 왔다. 나는 짐짓 당황했다. 저멀리 먼 곳까지도 아무 인가도 없고, 전기 불빛도, 자동차도 없는 곳 아닌가. 가로등이 있을리는 더욱 만무하니, 반사광이 전혀 없어서 그야말로 완전한 암흑이었던 것이다.

바로 내 눈 앞에 들어올린 손도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완전한 어두움으로 세상이 가득찼다. 공기는 더욱 차갑게 느껴졌고, 동물적인 어둠에 대한 공포감이 자꾸 느껴졌다. 내 뒤에 그녀가 따라오고 있고, 그녀 앞에 내가 있다는 것도 그 깜깜함 때문에 전혀 눈으로 볼 수가 없었다. 내 주변에 누군가 사람이, 인간의 흔적이 있다는 것은, 오직 내 손에 잡혀 있는 그녀의 손의 감촉 뿐이었다.

"이렇게 깜깜하게 아무것도 안보이는 데서, 혼자 아무도 모르는 데서 그냥 죽어버리면 어쩌나 하면서 무서워하고 있죠?"

그녀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지만, 여전히 나를 놀리는 듯한 태도 였다.

"밤이 깊어지면 점점 더 추워질 거고, 그러니까. 아무래도."
"걱정마요. 이렇게 내가 있잖아."

고산병에 비실대는 사람이 그렇게 말해 주었다. 나는 제대로 방향을 잡아 걷고 있냐는 생각에, 하늘의 별을 보고 방향을 알아봐야 겠다고 생각하고는 밤하늘을 다시 올려다 보았다.

그런데, 우리의 머리 위에는 수백만개의 별들이 한 가득 빛을 발하며 저 머나먼 하늘 전체에 온통 가득했다. 별빛은 소나기가 먼지를 씻어간 사막의 밤하늘을 끝도 없이 밝히고 있었다. 광막한 하늘의 저편까지 수없이 다채로운 별의 무리들이 가득했고, 그 선명한 별들 사이로, 뚜렷하게 하늘을 가로지르는 은하수가 보였다.

아무도 없는 황야의 막막한 대지는 어떠한 불빛도 없는 단조로운 광경이었다. 그랬기에, 그에 대비되어 밤하늘은 더욱더 화려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보통 우리는 어떤 빌딩이 어느 모서리에 서있고, 몇 번 도로를 따라가다보면 무슨 아파트가 나온다는 식으로 변해가는 땅의 광경을 주로 지켜 본다. 하늘의 광경은 그냥 멀건 하늘색 텅빈 공간이거나, 가끔 공상에 빠진 사람에게만 친근한 구름 조각 몇 조각이 흩어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곳의 밤은 완전히 달라 보였다. 땅은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무의미한 검은 빈 공간일 뿐이었으나, 하늘은 가지각색의 별들이 저마다 환한 빛을 머나먼 우주의 끝에서 부터 밝혀오고 있는 신화의 공간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아무리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도, 저 별의 한쪽에서, 지구를 올려다보고 있을 어떤 존재에 대한 상념이나, 대체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난 후가 되면, 우리의 한 흔적이 은하수 저편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긴긴 시간과 무한한 공간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저 별들의 한 무리가 거인과 요정이 되어 밤하늘을 달리는 이야기라든가, 언젠가 어디에서인가 잠깐이라도 같은 별을 올려다 볼지 모를, 사랑하는 이의 눈빛 같은 것을 떠올리게 되기 마련이었다.

"별 보고 방향 잡는거 잘해요?"
"아뇨. 오늘 처음 해보는 건데."
"그런데 믿을만 하려나."
"제가 맨손으로 사자도 때려잡은 역전의 용사아닙니까."
"무슨. 콩도 잘 못먹는 어리광쟁이지."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또 어둠 때문에 발걸음이 더욱 조심스러워졌기에 우리는 한참동안 거의 한자리에 서 있는 듯 천천히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마침내 동쪽 하늘을 밝히며 휘영청 밝은 거대한 달이 떠오르자, 그 빛에 조금씩 길 앞이 보이기 시작해서, 우리는 다시 걸을 수 있었다.

달빛 아래 묘한 은빛을 반사하는 기묘한 바위 사막의 가장자리들은 아무런 소리도 들지지 않는 적막한 밤 분위기에 어울려 그 자체로 살아 있는 듯 신비하게 보였다. 그녀는 그런 풍경을 돌아 보다 그만 길을 잃는 것이 걱정되었던지, 내 손을 한 번 더 꼭 잡았다.

느린 걸음이었지만, 꾸준히 밤길을 걷다가, 우리는 바위길의 한쪽 벽면에 이상한 무늬 같은 것이 새겨진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선으로 된 묘한 그림들과 기호들이 바위산을 따라 끝없이 늘어선 모양이었다. 아마 어떤 고대 인디언 부족의 유적인 듯 싶었다.

"음... 무슨 문자 같죠?"
"그렇기도 하고."

그녀는 유심히 바위에 새겨진 기호들을 살펴 보았다.

"예언 같은 데요... 머나먼 훗날..."
"오... 영어, 힌두어, 스페인어에 이어 고대 인디언 문자도 해독할 줄 아는 겁니까? 정말 대단하다."
"머나먼 훗날... 사막을 가로질러 낯선 이방인들이 찾아 올지니, 그들은 천상의 미녀와 강아지를 두려워하는 머슴이로다..."

그녀는 익살스러운 웃음을 덧붙였다.

이미 몇 백년 전에 이 근처에서 자취를 감추었음이 분명한 고대인의 유적이었다. 그렇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살았던 생생한 문명의 흔적에 나는 꽤 안도감을 느꼈다. 우리는 점차 인간의 무리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밤바람은 점점 더 차가워 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작은 발견은 더욱 큰 위안이 되었다.

"저기요."

그녀는 산길 저편 어두운 곳을 가리켰다. 그 곳에는 전등 불빛으로 보이는 빛이 아주 천천히 깜빡이며 빛나고 있었다. 거기에는 분명히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녀와 나는 동시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바위산 옆으로는 고대 부족의 기호와 그림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곧 도달할 수 있을 듯했던 산비탈의 불빛은 의외로 꽤 먼 거리에 있었다. 괜히 갑자기 걸음을 빨리 했던 탓에, 우리의 체력은 더욱 급속히 줄어들었다. 그녀는 이제는 한 걸음 한 걸음을 떼기 어려운 듯 힘겨워 보였고, 고산병은 이제는 어줍잖은 가짜 약으로는 어떻게 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무엇보다, 차가운 공기 때문에 체온이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어떻게든 추위를 막을 곳이 필요했다.

초조한 마음으로 이리저리 두리번 거리며 걸어가던 중에, 나는 돌무더기를 바위 벽에 쌓아 만든 작은 굴 같은 것을 발견했다. 누군가 사람이 만든 것임에 분명했다.

"사람 흔적이 있네요."

나는 가까이 다가가서 돌로된 그 작은 집 같은 것을 자세히 살폈다. 근처에서 나무판에 금속을 댄 팻말 같은 것을 발견했다. 새겨져 있는 것을 보니 영문 알파벳이었다.

"투사얀 인디언 부족의 유적... 이라고 쓰여있네요."
"투사얀 인디언?"
"이런식으로 팻말이 있는 거 보니까, 여기도 관광객들이나 트레킹하는 사람들이 찾는 길인 거 같거든요. 어쨌거나 인제 거의 다 거의 다 온 거 같아요."
"근데, 너무 춥다."

다 무너진 고대인의 돌집에 나는 크게 안도하고 있었다. 이제는 길 다운 길에 도착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우선 그녀와 함께 이 무너진 돌집에 들어갔다. 그리고 양복 겉옷을 그녀에게 둘러 주었다.

돌집에 뚫린 창으로 달빛이 그대로 새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작은 창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에는 별 몇 개가 떠올라 그대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먹을것도 마실 것도 없지만, 여기서 조금만, 조금만 쉬었다가 저편에 보이는 불빛을 향해 잠시만 더 걸어가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좁은 창문에 어딘지 외로워 보이는 별 몇 개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한국에서 겪은 일들과 어제 라스베가스의 카지노에서 그녀를 만난 일과 같은 것들이 벌써 먼 옛날의 까마득한 추억처럼 느껴졌다. 다만, 놀라울 정도의 고요함과 그런 가운데 느껴지는 그녀와 나, 두 사람의 이 여정에 대한 존재감만이 지극히 생생한 현재로 느껴질 뿐이었다.

그녀가 내 곁에 다가와 양복 겉옷 자락을 나에게도 덮어 주었다. 그녀는 내 등을 기대고 앉아, 그녀의 목이 내 목 뒷덜미에 와 닿았다. 귀에서는 가만히 그녀가 숨을 쉬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엄지손가락 뒤의 손등으로 아직 땀이 흐르고 있는 내 옆얼굴을 쓰다듬었다. 달빛에 비치는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고, 나는 그녀의 속눈썹을 보았다. 그 속눈썹에는 황무지에서 불어온 바람때문에 먼지 같은 것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내 목 뒤편을 다시 혀로 가만 핥았다. 간지러웠다. 나는 손가락을 뻗어 기나긴 길을 걸어온 때문에 모양이 볼품 없어진 그녀 옷의 리본을 건드려보았다. 그리고 그 손을 그녀의 목 아래와 숨을 쉬고 가슴이 뛸 때마다 약하게 같이 떨리고 있는 쇄골에 얹어 보았다. 나는 오늘 하룻동안 이 사막의 햇빛을 끝도 없이 받았던 그녀의 까만 머리칼에 입을 맞추며 내 품에 그녀를 안았다.

잠깐 선뜻 잠이 들었다가 깨어 난 것은, 그녀가 말없이 가만히 어깨를 툭툭치며 잠을 깨웠기 때문이었다.

"저 쪽이요."

그녀는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이며 달빛아래 돌집의 한 구석을 가리켰다.

그 곳을 보니, 토실토실한 오소리 한 마리와, 그 보다 조금 더 큰 늑대를 닮은 코요테 한 마리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래 봤자 작은 개 정도의 덩치라서 그렇게 위협적이지는 않았지만, 나는 약간은 경계하는 마음이 생겼다.

하지만, 두 동물은 우리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자기들 끼리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코요테는 킁킁 거리며 땅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고, 오소리는 뒤에서 고개를 이쪽 저쪽으로 움직이며 망을 보고 있는 듯 하였다. 날렵하게 생긴 코요테와 좀 너굴너굴하게 생긴 오소리가 그렇게 함께 행동하는 모습은 좀 우습게 보였다. 달빛 아래에서 자기들끼리 분주히 움직이는 두 동물은 블루스 브라더스나 예전의 서영춘 이기동 코메디의 코메디언들이 무대에 서서 만담 한 자락을 읊을 듯한 분위기마저 느껴졌다.

코요테가 열심히 냄새를 맡다 말고는 흙의 한 구석을 발로 톡톡 건드려 조금 파헤쳤다. 그리고 조금 물러서니, 오소리가 나타나 코요테가 건드린 그 바닥을 재빠른 몸돌림으로 흙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코요테가 무엇인가가 있는지 냄새를 맡아 알아내면, 오소리가 그 땅을 파헤치는 것으로 두 동물은 서로 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소리가 달빛속에서 소리를 내며 한참을 파헤치자, 놀랍게도 거기에서는 작은 물줄기가 샘솟아 나왔다. 자갈밭 위로 그 물줄기는 맑은 소리를 내며 흘렀고, 달빛에 그 샘물은 반짝거렸다. 물이 솟아나오자, 두 동물은 유쾌하게 나란히 엎드려서는 그 물을 즐겁게 마시는 것이었다. 달빛 아래 펼쳐지는 그 두 동물의 모습은 내가 본 그 어떤 광경보다도 신기한 것이었다.

숨을 죽이고 두 동물을 한참 지켜보고 있던 우리는, 두 동물이 다시 자기들의 길을 떠나자, 그 샘물에 다가가 우리들의 목을 축였다. 자갈밭 사이에서 새어 나온 작은 물길에서 마신 그 흙먼지 섞인 물이 무슨 그렇게 대단한 것이겠냐만은, 그래도 우리는 충분히 체력이 회복되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계속 달빛이 어린 산길을 걸은 끝에, 우리는 동틀녘이 다 되어서야 마침내 산 비탈의 불빛이 있는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 전등은 동물을 잡는 이상한 덫 같은 것을 설치하고, 불빛으로 동물을 유인하고 있던 중국계 할아버지였다. 노새에 동물 가죽과 한약재로 쓰일 듯한 이런저런 물건들을 주렁주렁 늘어뜨리고, 밤새도록 덫을 지켜보고 있던 그 할아버지는 몹시 피곤해 보였지만, 또한 우리를 발견하고 짐짓 매우 놀라는 눈치이기도 했다.

제대로 인사 조차하지 않고, 우리 둘은 그 할아버지의 노새 옆에 앉았다. 우리는 한참동안, 그냥 사람에게 발견되었다는 안도감만 느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갑자기 피로감이 몰아 닥쳐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겨우 힘을 내어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For heaven's sake, where is the Grand Canyon?"

천근만근의 무게가 실린 나의 힘겨운 물음과는 달리, 할아버지는 미소를 띠며 경쾌하게 한 마디로 답하였다.

"Here."

그리고 할아버지는 고개를 들어, 우리가 기어 올라온 산비탈을 내려다 보았다.

그곳에는, 아무런 기약도 없이 그저 암흑속에서 먼 별빛 만이 점멸하던 그 검은 공간에는, 어느새 보라빛으로 밝아오는 아침 여명의 새 빛을 받는 땅이 있었다.

솟는 아침해에 펼쳐진 땅은, 마치 이 대지를 한 번 덮칠 수 있는 거대한 손이 무슨 열정에 빠져 이 땅을 끝없이 길게 파헤친 듯한 거대한 협곡이 자리하고 있었다. 땅이 지평선 끝까지 크게 갈라진 이 기이한 골짜기는 끝이 까마득한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었고, 같은 절벽이 있어 멀리 구름저편의 반대쪽 끝을 드러내고 있었다. 바로 우리가 어제 저녁부터 끝없이 올라온 그 울퉁불퉁한 바위 산길이, 그랜드 캐년 절벽의 한 모퉁이였던 것이다.

아침 햇빛을 받아, 이 끝없는 규모의 돌덩이들은 온통 붉은 빛이었다. 그녀와 나는 완전히 힘이 빠진채 바닥에 앉아 시시각각 해가 떠오면서 점차 드러나는 협곡의 광경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해가 떠오르면서, 햇살을 받는 튀어나온 바위들은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그림자의 강한 명암 때문에, 저 멀리 골짜기 저편의 절벽이 더욱 선명한 입체감을 느끼게 하였다.

한 없이 높은 두 절벽 사이에 이 깊고도 넓은 거대한 웅덩이를 보고 있자니, 당연히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이쪽 절벽에서 저쪽 절벽으로 저 긴 거리를 날아서 건너는 것을 상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거대한 골짜기를 건너 저편 끝에는 도대체 또 어떤 이상한 세계가 자리잡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커다란 콘돌의 발목을 잡고 하늘로 날아올라, 마치 행글라이더를 타고 나는 것처럼 이 대협곡을 가로질러 날았다는 고대의 전설이 생생히 떠올랐다.

그리고 그 떠오르는 햇살이, 마침내 어제 끝없이 사막을 헤메던 우리의 머리 위로 내려 쪼이던 것처럼, 절벽의 구석 구석과 골짜기 전체를 환하게 비추었다. 그렇게 뜨거운 태양은 다시 또 하루의 완연한 아침이 찾아왔음을 알렸다. 우리는 마치 합창곡의 짧은 코다 처럼 느껴진 그 긴 일출의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 햇살이 내려 쪼인 긴 황무지와 한 없이 헤메던 바위산의 끝없는 길들을 떠올렸다.

"우리 언제, 여기 한 번 다시 보러와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작은 목소리가 황야 전체에 퍼져나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아리가 아니었는데도, 나는 꼭 다시 한 번 이곳에 보러 오자는 그녀의 목소리가 계곡에 온통 메아리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 때, 멀리서 한 발의 총소리가 울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돌아보았다. 짐짓 나는 당황했는데, 옆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할아버지는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노새를 끌고 바위산 아래로 홀연 사라졌다. 그녀는 힘이 없어서인지 일어 서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나는 서서 지평선 저쪽을 보았다.

이내 4륜구동 차량을 타고, M66 리볼버 권총을 든 아리조나 주의 국립공원 레인저 2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우리를 밀렵 혐의로 긴급체포했고, 그녀와 나는 서로 다른 차에 실려 그곳에서 멀어져 갔다.

그것이 내가 그녀를 본 마지막 기억이었다.



7.

아리조나 주 피닉스까지 호송되어 한참을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나서야, 나는 영문을 알게 되었다.

사막에서 만난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밀렵꾼이었다. 그들은 금광 개척기에 노동자로 이지역에 왔다가 한약재를 매매하는 사냥꾼이 된 중국인들의 후손이었다. 할아버지는 캘리포니안 콘도르를 덫으로 잡는 사람이었다. 그는 최근에는 한약재로 쓰이는 콘도르의 뼈와 깃털을 매매하기 위해서 이지역을 지나치는 멕시코인 밀입국자들과 거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탔던 그 초저가 관광 버스도 사실 그랜드 캐년을 방문하려는 관광객들보다는 밀입국자들이 검문을 피해 재빠르게 이동하기 위해서 주로 이용하는 교통수단이었던 것이다. 아리조나쪽으로 국경을 넘은 사람들이 유타주로 빠지거나 네바다 주를 통해 캘리포니아로 건너가기 위해 이용하는 교통편이었다. 실제로 라스베가스 경찰서에서는 의심스러울만큼 가격이 저렴하고, 정상적인 고속도로를 이용하지 않는 관광버스를 유의하라고 주의를 주는 중이기도 했다.

처음에 라스베가스로 떠난 것은 취직을 하기 위해서였지만,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기도 전에 그 목적은 이미 사라지고, 지난 며칠 동안 나는 도저히 앞뒤를 짐작할 수 없는 여행을 한 셈이었다. 영사관에서 모든 이야기가 진행되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탈 때 까지도, 나는 제대로 감상이 정리되지 않아, 그저 끝이 없던 것 같던 사막의 풍경과 수없이 많은 별들이 빛나던 대협곡의 밤경치, 그리고 그녀의 모습만이 머릿속에 가득하였다.

한국에 돌아온 나는, 그녀를 찾기 시작하였다. 돌아와서 따져 보니, 나는 그녀가 좋아하는 노래라든가 더울 때 마시고 싶어하는 음료수 같은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주소나 전화번호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나는 그녀가 I've Got The World On A String 노래에서 어느 구절을 좋아하는 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다닌 학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물을 마시는 그녀의 모습이나 걷는 버릇 같은 것은 생생한 영화 장면처럼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한국에 돌아오면 어디를 다니고 무엇을 할 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녀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나는 전국의 호텔관광학과들을 수소문 해보기도하고, 테드 항공사의 인턴 프로그램 지원자들을 알아보려고 하기도 했다. 심지어 나는 방송사의 사람 찾아주기 프로그램이나, 인터넷 게시판의 이곳저곳에 사람 찾는 글을 올려보기도 했지만, 어느 것 하나 신통한 결과는 없었다.

황야에서 긴 밤과 긴 낮과 달리, 다시 시작되는 일상은 너무나 숨가쁘게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언제까지나 취직 못하는 신세만 한탄할 수 없었던 나는, 옛날 회사가 다시 참여한 프로젝트를 타고, 한국 산림 개발 진흥원에 계약직 임시연구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적은 월급에 이 사람 저 사람 떠넘기는 일은 미친듯이 많았지만, 어쨌거나 법 때문에 제대로된 직장을 잡을 수 없던 나는 그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문득 문득 그녀 생각을 했다. 가끔 서울 하늘의 몇 안되는 별들을 올려다 볼 때나, 길을 지나가다가 60년대 음악이 음반 가게에서 흘러나올 때 나는 그녀의 목소리와 얼굴을 떠올렸다. 연구소에서 옆자리의 동료가 작은 선인장을 사 와서 책상위에 올려 놓았을 때, 혹은 오랫만에 친구들과 포커를 할 때에도 나는 그녀에 대해 가슴이 답답할 만큼 많은 사연들에 사로잡혔다.

나는 그녀를 왜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같잖은 소리라고 비웃을 수도 있었다. 지금껏 살면서 공부에 일에 기껏 모든 여력을 쏟아 부어 일해 왔지만, 겨우 무직자 신세에 어림없는 가짜 아르바이트나 하고 있는 지금의 삶이 부끄러워서, 그나마 남들에게 자랑할만큼 독특한 여행지의 추억에 집착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그 자랑할만한 무용담으로, 아직은 내가 남보다 재미있고 우월한 인생을 살고 있는 증거자료로 내밀기 위해 괜히 대단한 운명의 인연이자, 인생의 가치로 떠벌리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만약 내가 과학기술부 장관을 하면서 노벨상을 수상하고 혜란이와 결혼해 살고 있다면, 똑같은 일을 겪었던들 이만큼, 그녀를 중하게 여겼을까. 그런 질문은 답이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정말 그녀 생각을 진심으로 많이 했다는 것이다. 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도심을 걸을 때나, 차가운 겨울 바람 때문에 일찍 문을 연 맥주집으로 몸을 피해 녹일 때, 그 짧은 순간 순간에 그녀의 손을 잡고 사막을 헤메던 기억이 다시 실려 왔다. 멕시코 요리에 후추를 뿌릴 때는 물론이고, 콩자반을 집어 먹을 때에 그녀가 들려주던 많은 이야기들과 재미난 웃음들이 떠오르는데. 내가 그녀의 생각에 빠져 있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렇게 4년의 세월이 흘렀고, 마침내 나는 내 발목에 걸려 있던 취직 금지 법령의 사슬이 풀려 자유의 몸이 되었다.

올해 내가 처음으로 맡은 연구는 산림청에서는 김학상 교수의 연구결과에 따라 밀양 가야산에 메타세콰이어-426종을 심는 사업에 관련된 것이었다.

"메타세콰이어-426종은 기후에도 잘맞고 빨리 잘 자라기는 하지만, 바람에 약합니다. 매년 남부지방에 태풍이 몰아닥치면 당장에 몽땅 다 뿌리뽑히고 꺾여 버릴 겁니다. 메타세콰이어-426종을 밀양에 심는 것은 머저리같은 돈낭비입니다."

나는 그렇게 말했다.

산림청은 김학상 교수의 연구결과에 도전하는 것이 못마땅하기도 했거니와, 이미 내부 계약으로 한 수입업체에서 메타세콰이어-426종의 묘목을 대거 들여오기로 짜놓은터라 그러한 비판이 달갑지 않았다. 당연히 산림청은 한국산림개발진흥원에 압력을 넣었다. 곧 나와 같이 일하는 정규직 신입 연구원이 나를 커피 자판기 앞으로 불러 나를 혼내기에 이르렀다.

"사회 생활 별로 안해 보셔서 잘 모르시나본데... 일을 하나보면 맞는 일이라도 굽혀야 될 때가 있고, 틀린 일이라도 밟고 나가야 될 때가 있는 거거든요. 지금 이렇게 사소한 일로 당신 혼자 자꾸 밀어 붙이시면, 당신만 힘들어지는게 아니라 우리팀 전체가 통채로 힘들어지는 거 몰라서 그래요?"

그러나, 나는 끝까지 메타세콰이어-426종은 남부지역에 심기에 적합하지 않은 수종이라고 했다. 나는 내 보고문건을 취소하지도 않았고, 수정하지도 않았다. 보다 못한 팀장이 나를 불러서,

"끝까지 그렇게 버티면, 그냥 당신 자르고, 보고 문건 끌어내리는 수 밖에 없어요."

라고 호통을 쳤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운 것이 없었다. 나는 이제 내 시한을 다했고, 이제는 얼마든지 다른 곳에서 직장을 얻을 수 있는 자유의 몸 아닌가. 거지 같은 한국 산림 개발 진흥원 시간제 계약직 자리 따위 조금의 미련도 없었다. 나는 끝까지 버텼고, 곧 해고 되었다.

새 직장을 얻기 전의 무직자 기간동안, 나는 한동안 미뤄 두었던 일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언제나 마음속에 남아 있던 그녀의 마지막 말. 언제 다시 한 번 그랜드 캐년을 보러 오자는 그 말을 이제는 실천할 때라는 생각에, 결심을 굳혔다.

때아니게 일찍 찾아온 5월 태풍에 밀양에 심었던 1만 2천 그루의 메타세콰이어 나무들이 조각조각 부러져 날아갔다는 뉴스를 본 며칠 후에, 나는 마침내 다시 라스베가스로 향하는 테드 항공 비행기 표를 샀다. 여러가지 조건들이 잘 맞아서, 마침 우리가 처음으로 그랜드 캐년을 보았던 그때로부터 꼭 4년만에 다시 그곳에 갈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물론 이번에는 정상적으로 고속도로를 따라 달리는 그랜드 캐년 여행 상품을 예약했다.

비행기 안에서 또다시 잘못 나온 렌틸콩 요리를 나는 이번에는 꽤 즐겁게 먹었다. 이후 4년동안 나는 점점 렌틸콩 요리와 인도식 카레요리에 점점 친숙해졌고, 코리앤더가 듬뿍 들어간 소스도 그 맛을 슬그머니 좋아하게 되었다. 인도 음식점에서 먹어본 한국인들을 위한 개량 인도 요리들에 비해서, 테드 항공에서 나눠주는 이 렌틸콩 카레는 좀 더 전통적인 맛이었다. 그정도면 충분히 호평을 받을 만한 정성스런 맛이었다.

내가 렌틸콩 카레를 즐겁게 먹는 모습을 보자, 옆 자리의 인도인 할아버지는 꽤 대견함을 느꼈는지 이런저런 말들을 걸어 왔다. 사실 내 주변의 인도인 일가족은 아이들이 대단히 소란스러웠고, 아이들의 어머니와 아버지로 보이는 두 사람은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 미안하고 죄송하다고 하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주변 분위기는 무슨 명절 분위기라도 된냥 생생한 데가 있었다. 더군다나 승무원이 따라주는 술을 몇 잔 한 이 할아버지는 더욱 흥에 겨워서 나와 대화하는 것을 즐겼다.

"So, you will see the woman, there."
"Yes. I have a kind of an appointment."
"Appointment?"
"We made that appointment, exactly four years ago."

나의 대답에 할아버지는 내 얼굴을 한 번 조용히 살폈다.

사실 4년만에 그랜드 캐년에 다시 찾아가고 있지만, 그곳에서 그녀를 만날 가능성이 얼마나 있을까.

일단 그 먼 곳 까지 굳이 찾아오기도 쉬운일이 아닌데다가, 1개월만도 아니고, 1년만도 아니고, 4년이 지난 지금에서 그녀를 그랜드 캐년에서 만날 수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상하게도, 지금도 그 사막 너머 협곡에 다다르면, 꼭 그녀가 있어서 4년전처럼 나와 함께 걸어줄 것 같은 강한 믿음을 느꼈다. 그녀도 꼭 나와 같은 심정으로, 바로 지금, 이 비행기를 타고 그 황야의 한 복판을 향해 가고 있는 듯한 그런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막연하다고 했지만, 그렇지만, 그 생각의 깊이는 너무나 깊었다.

정확히 내 자신을 돌아본다면, 정작 문제는, 그녀와 만날 수 있을지 아닐지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작 두려운 문제는 그녀의 마음도 이 모든 것을 이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데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 날의 일들은 그냥 낯선 여행지에서 겪을 수 있는 가벼운 추억거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나라는 사람이 그녀에게는 그냥 지하철에서 잠깐 자리를 양보해준 어떤 날의 어떤 사람에 지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갑자기 어릴 때 부터 짝사랑해온 애인에게 차이고 취직은 금지당한채 미국에 떨어졌으니, 그래서 그럴 때 만난 한 예쁘장한 여인이, 나 혼자 괜히 인생의 중대한 인연이요, 한 번의 만남이지만 평생의 기억에 남을 소중한 기억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녀도 뭔가 깊은 마음을 갖고 있을까. 거기에 대해 공허한 결론이 나온다면, 그것이야 말로, 단지 이번 여행에서 그녀를 만나지 못하는 것보다도 더욱 두렵고 허전하며, 멍청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대해서도 어떤 희망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날 겪었던 일들과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의 한마디 한마디들을 차분하게 다시 돌아 볼 수 있다. 이 정신나간 세상에서, 외롭게 펼쳐진 사막 한 가운데, 우리 두 사람이 있어서 서로를 이해하고 의지하며 삶을 헤쳐나가던 그 때 그 느낌은 서로가 깊게 연결되어 있다는 어떤 소중한 진심에 닿아 있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순수한 마음의 주고 받음에 분명히 중요한 어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 마디, 한 마디 내 이야기를 듣던 인도 할아버지 께서는, "사랑은 스쳐서 지나가고, 또 도망쳐 가는 바람이다." 라는 인도 속담을 하나 소개해 주셨다. 그리고는 가만 등받이에 기대어 잠을 청하셨다.

4년전 괜히 국립공원내 밀렵 문제에 얽혀들어 조사를 한 번 받은 일 때문에 입국심사는 좀 복잡했다. 그렇지만 라스베가스에 도착하고 관광버스를 타고 그랜드캐년의 입구까지 오는 길은 순조로웠다. 그녀와 말없는 시간을 보내던 그때의 덜컹이던 작은 버스에 비해, 이번 버스에서는 버스기사가 쉴새없이 근처 풍경의 역사나 사연을 소개해 주었다. 버스기사가 소개해주는 많은 농담과 잡다한 네바다주와 아리조나주의 특색에 대한 이야기가 버스 안 스피커로 울려퍼져 계속 곁들여 졌다. 그래서 새벽에 출발해 아침에 도달하는 그 긴 버스 여정은 의외로 그렇게 많이 지루하지는 않았다.

나는 국립공원 관리공단 사무실에 잠깐 들른 뒤에 관광안내소가 있는 쪽의 그랜드 캐년 사우스림으로 걸어 갔다. 비록 보는 방향은 달랐지만, 4년전 보았던 그랜드 캐년의 위엄있는 경치는 다를 바 없었다. 다만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과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는 아메리카 인디언들 사이를 오가는 수많은 인파는 어색했고, 끝없이 주차된 자동차들은 좀 낯설었다. 그 모습은 그날 걷고 보았던 그 경치에 비해서는 어딘가 남산타워 전망대 비슷한 답답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자리잡고, 나는 그곳의 경치를 보며 그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나는 정말로 그녀가 나타날 것만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 둘 살폈고, 기념품 가게와 주차장을 수십번도 넘게 오가면서 그 안의 수많은 사람들을 살펴 보았다. 관광버스가 도착할 때마다, 거기서 내리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했고, 근처의 숙소나 전화부스와 연결되는 곳도 둘러 보았다. 가끔 4년전의 그녀와 비슷한 옷차림을 한 사람이 있긴 했고, 간혹 그 때의 그녀와 닮은 사람이 있기도 했지만, 그녀는 없었다.

어쩌면, 그렇게 그녀를 만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를 이곳에서 다시 만난다는 사실을 더 당연한 일로 믿고 있었다. 특별히 대단한 것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다시 그녀와 이곳의 풍경을 보면서, 그 때 그 날 나름대로 재미있고 의미있지 않았냐고, 정말 그렇다고 같이 다시 맞장구치면서 잠시간 감상에 젖는 것을 바랬을 뿐이었다. 그 짧은 재회라면, 그것으로 그녀에 대한 내 사랑의 결실로는 충분할 터 였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그곳에서 나는 한 시간, 두 시간, 점심이 지나고 오후가 지나도록 계속 그녀를 기다렸다.

혼자서 헤메는 생각에 더욱 하염없이 그녀에 대한 생각만 깊어갔고, 끝없이 사람들 사이를 뒤지면서 시간은 흘러갔다. 그러는 사이에 협곡에는 해가 저물고 밤이 찾아 왔다. 다시 한 번 그 깜깜한 밤 하늘을, 수없이 많은 별들이 밝혔다. 그리고 뒤늦게 떠오른 흰 달이, 황무지에 아름다운 빛깔을 드리웠다.

근처의 숙소는 이미 만원이었기에, 나는 털가죽으로된 담요를 두르고 그 밤하늘을 보며 절벽 한 끝에 앉아 밤을 지새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흐르는 별들과 오랫만에 다시 펼쳐진 은하수를 보았다.

"It's beautiful. Isn't it?"
"Really it is."

나와 같이 밤하늘을 보며 밤을 지새는 사람은 몇몇이 있었다. 나는 그들과 짧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또 몇가지 농담을 주고 받기도 했다. 재미있는 사람들이었고, 또 고요한 적막가운데 속삭이듯 낮은 소리로 천천히 대화가 이어진 즐거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도 그녀는 없었다.

새벽이 오고, 또다시 해돋이가 찾아올 때까지도 나는 그녀를 기다리는 그 허망한 상상에 빠져 있었다. 드높은 산맥처럼 버티고 선 절벽들을 붉게 물들이는 아침 햇살은 여전히 몹시 아름다웠다. "It's really great-" 하는 환호성이 들려오기도 하고, 또 길게 소리지르는 어떤 아이의 소리도 들려왔다. 그런 저런 소리 사이로, 나는 그날 아침, 언제 다시 한 번 보러 오자고 말하던, 그녀의 그 작은 목소리를 환청처럼 상상하고 있었다.



8.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싸한 가슴으로 계속 그 해뜨는 모습을 바라 보면서, 나는 다시 차분히 생각해 보았다.

그 암담했던 무직자 시절 동안 내가 부족했던 것은 단지 직장이나 직장에서 벌어들일 연봉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싫었던 것은, 그래서 느끼게 되는 혜란과의 불안한 관계라든가 주변의 친구들이나 동료들로부터 내가 느끼는 열등감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가만 더 생각해 보면, 그 열등감보다 더욱 더 삶을 어렵게 만들었던 것은 할 일이 없을 때 느끼는 심심함이나 끝없는 무료함에서 나오는 무력감, 그리고 그런 심심함이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암담한 막막한 기분이 정말 정말 견디기 싫었던 것 같다. 어딘지 모르게 불만에 가득차고 꼬인 기분에 답답한 마음만 하루종일 계속되는 그 기분이 싫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을 때, 그녀를 만나서 이 황야를 걸으며 생각했던 것은, 그 무료한 시간들 자체보다 더 나쁜 것은, 바로 그런 시간들이 나를 점점 망가뜨린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암담함과 무력감은 내가 갖고 있었던 긍정적인 용기나 활달한 자신감을 잃게 했고, 사람을 대하는 경쾌함이나 적극적인 행동의 즐거움으로부터 나를 멀어지게 만들었다.

황무지의 먼지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적막속에서 오직 태양만이 작렬하는 땅. 거기서 그녀와 하루를 보내면서, 나는 당장 인생이 좀 답답한 것 같아도, 그것 때문에 내 마음과 성격의 많은 장점들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아직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내 좋은 힘들을 그녀는 잘 간직해야 한다고 내게 깨우쳐 주었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다시 아침해가 떠오르고 오전이 되어 버스가 찾아올 때까지 나는 그 긴시간을 기다렸지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비록, 그녀가 "자기 합리화는 무직자의 주특기"라고 놀리는 소리가 다시 떠오르긴 했어도, 나는 다시 이곳에 와서 그녀를 기다린 이 시간이 결코 헛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이번에는 아예 스스로 인도식 소스를 듬뿍 사용한 렌틸콩 요리를 주문했다. 막 비행기가 태평양 상공으로 접어 들었을 때, 승무원들은 식사를 나눠 주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반대로 렌틸콩 요리 대신에 내게 비빔밥을 주었다.

"저... 저는 인도 요리 주문했었는데요."
"예? 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손님. 손님이 한국분이시길래, 저희는 당연히 렌틸콩 요리는 싫어하실 줄 알고요......."

승무원은 무척 당황했다. 나는 당황하는 그 승무원의 모습을 좀 재미있어 하며, 감상에 푹 젖어 가만 지켜보았다.

그런데, 그 승무원이 렌틸콩 요리 남은 것을 찾아 비즈니스 클래스의 인도 사람들에게 찾아갔을 때, 나는 한 인도인 관광객의 말을 듣고 있던, 다른 승무원을 보았다. 힌두어와 영어를 섞어 뭐라고 말하던 그녀는, 렌틸콩 요리 여분을 찾는 소리를 듣고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사람은, 4년전의 그녀였다. 얼마나. 얼마나 반가웠던지. 얼마나 신기했는지. 그녀는 마치 황야에 떠오른 신기루 같은 환상처럼, 거기에서 테드 항공사의 다른 제복을 입고 서 있었다. 그 오랜시간동안, 기다려온, 그저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그녀였던 것이다.

"저기.... 거기..거.. 여기요!"

나는 당황한 나머지 이상하게 말을 더듬으며 소리쳤다.

그녀는 이쪽을 보았다. 그녀도 무척 놀라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 어느 사람의 표정에서 발견했던 것 보다, 더 편안하고 행복한 웃음을 떠올리며 내게로 걸어 왔다.

"되게 신기하다. 정말 오랫만이네요. 어떻게, 그동안 잘 지냈어요?"

나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해 둔 바가 없었다. 자꾸 첫 발음이 꼬이기만 하지 뭐라고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겨우겨우, 나는 엉뚱한 소리부터 갑자기 하기 시작했다.

"그랜드 캐년, 거기 우리 다시 가서 다시 가서 또 보기로 했었잖아요."

그녀는 렌틸콩 요리를 내 자리 위에 올려 놓았다. 나는 내 눈앞을 스쳐지나가는 그녀의 얼굴과 눈을 잠깐 살펴 보았다. 그녀도 왠지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내가 다시 말했다.

"저기, 저, 여기서 일해요?"
"예."
"여기 항공사에서?"
"항공사에 딸린 여행사에서 여기 구경오는 인도인 관광객들... 개인 가이드...하는 일 하고 있어요."
"야... 좋은 데 취직했구나."
"자기는. 자기는... 지금 거기 갔다 오는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도 어떻게 들으면 참 우습기도 할 만큼 이상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렌틸콩에서 나오는 코리앤더 소스 냄새를 느꼈다. 그 솔솔 피어오르는 향 속에서, 나는 서 있는 그녀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나는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고, 그녀는 지나가는 다른 승무원 때문에 내 무릎 앞으로 들어와 자리를 잠깐 피해야 했다. 나는 식사에 포함되어 있던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물잔을 든 손이 좀 떨렸다. 나는 물을 삼키고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

"거기... 또 가본 적 있어요?"

이 여행사 개인 가이드의 얼굴은 비행기 안의 오렌지 빛 조명을 받아 흡사, 해돋이를 보던 그날 그 때 무직자 시절처럼 보였다.

"마흔 두 번."

그녀는 그리고 다시 밝게 웃었다. 나는 고개를 젖히고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잠깐 감았다. 그리고, 나는 내 가방속에서 주섬주섬 서류를 꺼내서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태평하게 무모한 건 여전하네. 그렇게 그냥 자꾸 가보면, 엇갈려서 못만나면 어떡하려고."

그녀는 내가 내미는 서류를 보았다. 내가 다시 말했다.

"저, 아리조나 주 국립공원 관리국에, 생태 연구원에 취직했어요. 다음달 부터, 그냥 그랜드캐년에서 줄창 눌러 살면서 오는지 기다리려고요."

그녀는 한동안, 그자리에 서 있었다. 나도 그런 그녀를 계속 보고 있었다.

곧, 그녀는 다시 비즈니스 클래스에서 그녀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대답하며 걸어갔다. 그녀는 걸어가면서, 계속 내쪽을 돌아 보았다.

그녀가 시야에서 멀어지자, 나는 비행기 창 밖을 보았다. 달빛이 들어오는 그 작은 창에는 밤하늘 몇 개의 별이 내 비치고 있었다


- 2006년,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서
mirror
댓글 8
  • No Profile
    희진 06.06.04 21:03 댓글 수정 삭제
    질문. 곽재식 님의 글을 보면 소설 말미에 꼭 "~에서" 란 글이 있잖아요. 그건 소설이 완성된 장소를 말하는 건가요, 아니면 그 소설을 주로 쓴 장소? 아니면 시작한 장소? 평소 읽으면서 참 궁금했어요.
  • No Profile
    희진 06.06.04 21:09 댓글 수정 삭제
    아, 방금 인터뷰에서 찾아봤습니다. ^^
  • No Profile
    곽재식 06.06.05 10:10 댓글 수정 삭제
    너무 장황하기 때문인지 거의 아무도 읽지 않으시는 듯한(...) 그 인터뷰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 놓은 바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벌써 그것도 반년 전입니다. 와...
  • No Profile
    희진 06.06.07 14:32 댓글 수정 삭제
    퓨마를 물리치는 장면에서 완전 폭소; 멋져요 :)
    그런데 곽재식 님,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이 한 사람인 듯한 착각을 계속 일으켰어요. 이번 작품뿐만 아니라 다른 글에서도 종종 그런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 No Profile
    곽재식 06.06.07 17:02 댓글 수정 삭제
    글쓴이의 무능 탓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잘 통하는데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하는데 솜씨가 부족합니다. 향후 일취월장해 나갈 미래의 모습을 기대해주시렵니...까?
  • No Profile
    06.06.08 14:27 댓글 수정 삭제
    사실 먼저 만난 할머니는 밀렵꾼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부부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드데요. 혹시 두 사람의 미래의 모습?? 그건 더더욱 아닐테고... 내가 뭔 소리를 하는 거지..;;;
  • No Profile
    곽재식 06.06.08 15:04 댓글 수정 삭제
    종종 괜히 이야기에 끼워 넣곤 하는 "뭔가 뒷이야기가 있을 듯한 인물" 구도 입니다. 밀렵꾼 할아버지와 할머니 부부 구도도 은근히 그럴 수도 있겠거니... 암시한 의도가 사실 없지 않았습니다. 반갑습니다!
  • No Profile
    청야 18.03.27 23:38 댓글

    퇴근시간에 주로 여기 소설을 읽기 시작하는데, 시작할때는 업무와 사회생활로 인한 분노와 무력감이 사그라들 정도로 공감가고 정확합니다. 그러다가 중간에 퓨마같은 한참 빵터지는 부분이 나와요. 그러다가 집에 도착해서 또는 자기전에 읽는 끝부분은 훈훈하고 따뜻한 결말이 나옵니다. 진짜 작가님 글은 직장인들을 위한 오아시스에요...

     

    아..정말 퓨마는..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등장부터 퇴장까지 모든걸 초집중해서 읽었어요ㅋㅋㅋ웃음이 멈추질않으면서도, 너무 고통스러울것 같은게 제 몸이 다 찌릿해지는것 같았어요ㅋㅋㅋㅋㅋㅋㅋㅋ

분류 제목 날짜
초청 단편 월더빌 살인사건3 2006.07.28
배명훈 철거인(鐵巨人) 662824 2006.07.28
배명훈 355 서가20 2006.06.30
김이환 종이 바깥의 영화9 2006.06.30
곽재식 흡혈귀의 여러 측면 (본문 삭제)24 2006.06.30
초청 단편 Why do I need feet when I have wings to fly?2 2006.06.30
초청 단편 태그Tag1 2006.06.30
赤魚 나비, 꿈꾸다 - 본문 삭제 -4 2006.06.03
赤魚 걸어 다니는 화석 - 본문 삭제 -4 2006.06.03
곽재식 신비한 사랑의 묘약4 2006.06.03
곽재식 황야의 무직자8 2006.06.03
jxk160 7 2006.06.03
김수륜 옛날옛날옛날에 - 본문삭제 -4 2006.06.03
정대영 푸른 숲의 남자2 2006.06.03
배명훈 16 2006.06.03
곽재식 월척8 2006.06.03
초청 단편 황금알 먹는 인어6 2006.06.03
pena 적백화면 2006.04.29
초청 단편 쓰레기 같은 시간2 2006.04.28
정소연 마산앞바다 - 본문 삭제 -4 2006.04.28
Prev 1 ... 38 39 40 41 42 43 44 45 46 47 ... 52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